제정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과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 차이코프스키는 화려한 박수갈채 속에서도 고독과 상상에 젖어 모스크바로 돌아가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발표한 후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1840 년생인 차이코프스키가 젊음을 맞이한 때는 제정러시아의 격동기였다. 광산기사의 아들로 자유롭게 자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조국의 암담한 현실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는 '안단테 칸타빌라'를 비롯해서 '비창'에 깔린 깊은 애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서만이 이해와 공감이 가능했다. 음악을 직업으로 택하기가 어렵던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를 마치고 장래가 보장된 법무부의 관리가 되었지만 여기서 그는 생리적인 구토감을 갖게 하는 사회악만을 보게 된다. 아들의 우울을 간파한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가의 길을 종용한다. 안톤 루빈스타인이 경영하는 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와 작곡에 개미처럼 부지런했던 결과 25세 때 작곡 부분에서 은상을 획득하고 영예로운 졸업을 하였다.
루빈스타인의 동생인 리콜라이가 모스크바에서 경영하는 음악원에 작곡과 교수로 자리를 잡은 그는 터질 듯한 창작의욕을 불태우면서 부임 이듬해인 1866년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을 발표했다.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그린 이 한 편은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차이코프스키를 확고하게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어쩌면 미스테리와도 같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나데즈다 폰 메크'이다.
사유철도경영을 하던 남편이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죽자 사교계와 발을 끊고 그림수집과 독서와 음악에 묻혀 조용히 살고 있던 그녀에게 차이코프스키의 제자가 선생의 딱한 사정을 얘기하자 즉시 소품 시작을 의뢰 엄청난 작곡료를 보내 주었다.
36세였던 차이크프스키와 미망인은 편지로만 왕래하였는데 교향곡 제4번은 '우리 두 사람의 교향곡'이라고 차이코프스키가 그녀에게 고백한 바 있다. 이 곡은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밝고 찬란하다는 평을 듣는 곡이다. 그러다가 차이코프스키는 성격 차이로 마침내 결혼의 파탄을 맞게 되는데, 이때에도 폰 메크 부인은 구원의 손길로 매년 6,000루불을 보내 주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생명과 예술을 구해 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조의 호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그녀는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13 년이 지난 후, 연금을 중단하겠다는 편지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편지라도 계속하기를 간청했지만 회답도 없이 부인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고독과 상심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 화려함과 박수갈채가 있었지만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시대의 아픔, 인류의 삶과 죽음, 투쟁과 종말을 그렸다는 마지막 교향곡 제6번 '비창'을 발표, 초연을 지휘한 후 열흘만에 콜레라로 죽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 폰 메크 부인이 찾아와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결코 보여 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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