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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 수 필

임기종 2014. 5. 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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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 수 필

 

 

 

 

 

 

 

 

 

 

 

 

 

 

 

 

 

 

 

박지원(朴趾源)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돌에 부딪혀, 싸우는 듯 뒤틀린다. 그 성난 물결, 노한 물줄기, 구슬픈 듯 굼실거리는 물 갈래와 굽이쳐 돌며 뒤말리며 부르짖으며 고함치는, 원망(怨望)하는 듯한 여울은, 노상 장성(長城)을 뒤흔들어 쳐부술 기세(氣勢)가 있다.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써도 그 퉁탕거리며 무너져 쓰러지는 소리를 충분히 형용(形容)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엔 엄청난 큰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강 언덕엔 버드나무가 어둡고 컴컴한 가운데 서 있어서, 마치 물귀신과 하수(河水)의 귀신(鬼神)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 하는 듯한데, 좌우의 이무기들이 솜씨를 시험(試驗)하여 사람을 붙들고 할퀴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어느 누구는 이 곳이 전쟁(戰爭)터였기 때문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때문이 아니다.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나의 거처(居處)는 산중(山中)에 있었는데, 바로 문 앞에 큰 시내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마냥 전차(戰車)와 기마(騎馬), 대포(大砲)와 북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이 이미 귀에 젖어 버렸다.

 

나는 옛날에, 문을 닫고 누운 채 그 소리들을 구분(區分)해 본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청아(淸雅)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흥분(興奮)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驕慢)한 까닭이며, 수많은 축()의 격한 가락인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노한 까닭이다. 그리고, 우르르 쾅쾅 하는 천둥과 벼락같은 소리는 듣는 사람이 놀란 까닭이고,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운치(韻致) 있는 성격(性格)인 까닭이고,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슬픈 까닭이고,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사람이 의심(疑心)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다만 자기 흉중(胸中)에 품고 있는 뜻대로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제 하룻밤 사이에 한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長城)을 뚫고 유하(楡河), 조하(潮河), 황하(黃河), 진천(鎭川) 등의 여러 줄기와 어울려 밀운성(密雲城) 밑을 지나 백하(白河)가 되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바로 이 강의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遼東)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걸었는데, 홀연(忽然)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마 천 리 밖에서 폭우(暴雨)로 홍수(洪水)가 났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을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默禱)를 올리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만, 그 때 내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탕탕(蕩蕩)히 돌아 흐르는 물을 보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眩氣)가 일면서 물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얼굴을 젖힌 것은 하늘에 기도(祈禱)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하여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으랴!

 

그건 그렇고, 그 위험(危險)이 이와 같은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나 울어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넓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나 울어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오해(誤解)인 것이다. 요하(遼河)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니, 눈엔 위험한 광경(光景)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이제야 도()를 깨달았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馬夫)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이젠 내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鞍裝)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아 앉았는데, 한 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을 것이리라. 이러한 마음의 판단(判斷)이 한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선 강물 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泰然)할 수 있어, 마치 방안의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적에 우()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져서 지극(至極)히 위험(危險)했다 한다. 그러나, 생사(生死)의 판단(判斷)이 일단 마음 속에 정해지자,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아무런 관계(關係)도 될 바가 없었다 한다.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耳目)에 누()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機能)을 마비(痲痺) 시켜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危殆)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致命的)인 병이 될 것인가?

나는 또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경험(經驗)해 볼 것이려니와, 몸 가지는 데 교묘(巧妙)하고, 스스로 총명(聰明)한 것을 자신(自信)하는 자에게 이를 경계(警戒)하고자 하는 것이다. - 연암집(燕巖集)에서

 

* 박지원(朴趾源) : 1737(영조 13) - 1805(순조 5). 실학자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실학자 홍대용에게 수학하였다. 1777(정조 1)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 이 청나라에 진하사로 갈 때에 그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서 중국 사람들의 이용후생하는 방법을 보고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다음해 의금부 도사, 제을령이 되고 1791년 한성부 판관을 거쳐 안의 현감, 1797년 면천군수가 되었다. 1800년 순조 즉위시 양양 부사로 승진, 이듬해에 치사, 귀향하였다.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이며, 저서로 연암집이 있다

 

 

경설(鏡說) 이규보

거사(居士)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달이 구름에 가리운 것 같았다. 그러나 거사는 아침, 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용모를 가다듬곤 했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당신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 같아서 얼굴을 비추어 볼 수도 없고, 그 맑은 것을 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오히려 계속하여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울이 맑으면,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 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싫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습니다. 만일 한번 보면 반드시 깨뜨리고야 말 것이니 차라리 먼지가 끼어 흐릿하게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할 것인즉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만 침식할 뿐 거울의 맑은 바탕을 없어지게 하지는 않는 것이니, 만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이상하다 합니까?"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이규보(李奎報) : 1168(고려 의종22) - 1241(고종 28)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호부낭중 윤수의 아들. 22세 되던 명종 1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 급제. 그의 호탕 활발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시호는 문순(文順).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 소설 [백운소설],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등이 실려 있다

 

 

동명일기(東溟日記) 의유당 김씨

 

행여 일출(日出)을 못 볼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새도록 자지 못하고, 가끔 영재를 불러 사공(沙工)다려 물으라 하니,

"내일은 일출을 쾌히 보시리라 한다."

하되, 마음에 미쁘지 아니하여 초조(焦燥)하더니, 먼 데 닭이 울며 연()하여 자초니, 기생(妓生)과 비복(婢僕)을 혼동하여 어서 일어나라 하니, 밖에 급창(及唱)이 와,

"감청 감관(官廳監官)이 다 아직 너모 일찍 하니 못 떠나시리라 한다."

하되 곧이 아니 듣고, 발발이 재촉하여, 떡국을 쑤었으되 아니 먹고, 바삐 귀경대(龜景臺)에 오르니 달빛이 사면에 조요(照耀)하니, 바다이 어제 밤도곤 희기 더하고, 광풍(狂風)이 대작(大作)하여 사람의 뼈를 사못고, 물결치는 소래 산악(山嶽)이 움직이며, 별빛이 말곳말곳하여 동편에 차례로 있어 새기는 멀었고, 자는 아해를 급히 깨와 왔기 치워 날치며 기생(妓生)과 비복(婢僕)이 다 이를 두드려 떠니, 사군이 소래하여 혼동 왈,

"() 없이 일찌기 와 아해와 실내(室內) 다 큰 병이 나게 하였다."

하고 소래하여 걱정하니, 내 마음이 불안하여 한 소래를 못 하고, 감히 치워하는 눈치를 못 하고 죽은 듯이 앉았으되, 날이 샐 가망(可望)이 없으니 연하여 영재를 불러,

"동이 트느냐?"

물으니, 아직 멀기로 연하여 대답하고, 물 치는 소래 천지(天地) 진동(震動)하여 한풍(寒風) 끼치기 더욱 심하고, 좌우 시인(左右侍人)이 고개를 기울여 입을 가슴에 박고 치워하더니, 마이 이윽한 후, 동편의 성쉬(星宿) 드물며, 월색(月色)이 차차 열워지며, 홍색(紅色)이 분명하니, 소래하여 시원함을 부르고 가마 밖에 나서니, 좌우 비복(左右婢僕)과 기생(妓生)들이 옹위(擁衛)하여 보기를 죄더니, 이윽고 날이 밝으며 붉은 기운이 동편 길게 뻗쳤으니, 진홍 대단(眞紅大緞) 여러 필()을 물 우희 펼친 듯, 만경창패(萬頃蒼波) 일시(一時)에 붉어 하늘에 자옥하고, 노하는 물결 소래 더욱 장()하며, 홍전(紅氈) 같은 물빛이 황홀(恍惚)하여 수색(水色)이 조요(照耀)하니, 차마 끔찍하더라.

붉은빛이 더욱 붉으니, 마조 선 사람의 낯과 옷이 다 붉더라. 물이 굽이져 치치니, 밤에 물 치는 굽이는 옥같이 희더니, 즉금(卽今) 물굽이는 붉기 홍옥(紅玉) 같하야 하늘에 닿았으니, 장관(壯觀)을 이를 것이 없더라. 붉은 기운이 퍼져 하늘과 물이 다 조요하되 해 아니 나니, 기생들이 손을 두드려 소래하여 애달와 가로되,

"이제는 해 다 돋아 저 속에 들었으니, 저 붉은 기운이 다 푸르러 구름이 되리라."

혼공하니, 낙막(落寞)하여 그저 돌아 가려하니, 사군과 숙씨(叔氏),

"그렇지 아냐, 이제 보리라."

하시되, 이랑이, 차섬이 냉소(冷笑)하여 이르되,

"소인(小人) 등이 이번뿐 아냐, 자로 보았사오니, 어찌 모르리이까. 마누하님, 큰 병환(病患) 나실 것이니, 어서 가압사이다."

하거늘, 가마 속에 들어앉으니, 봉의 어미 악써 가로되,

"하인(下人)들이 다 하되, 이제 해 일으려 하는데 어찌 가시리요. 기생 아해들은 철 모르고 즈레 이렁 구는다."

이랑이 박장(拍掌) ,

"그것들은 바히 모르고 한 말이니 곧이 듣지 말라."

하거늘, 돌아 사공(沙工)다려 물으라 하니,

"사공셔 오늘 일출이 유명(有名)하리란다."

하거늘, 내 도로 나서니, 차섬이, 보배는 내 가마에 드는 상 보고 몬저 가고, 계집 종 셋이 몬저 갔더라.

홍색(紅色)이 거록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을 뛰노더니, 이랑이 소래를 높이 하여 나를 불러,

"저기 물 밑을 보라."

외거늘,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앗고 큰 실오리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奇異)하며, 기운이 진홍(眞紅)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넓이 같은 것이 그믐밤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우흐로 적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랑(通朗)하기는 호박도곤 더 곱더라.

그 붉은 우흐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白紙) 반 장(半張) 넓이만치 반듯이 비치며, 밤 같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 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적색(赤色)이 온 바다에 끼치며, 몬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새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로 하며, 항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左右)로 뛰놀며, 황홀(恍惚)히 번득여 양목(兩目)이 어즐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明朗)하여 첫 홍색을 헤앗고, 천중(天中)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렛바퀴 같하야 물 속으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혀처로 드리워 물 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으더라. 일색(日色)이 조요(照耀)하며 물결에 붉은 기운이 차차 가새며, 일광(日光)이 청랑(淸朗)하니, 만고천하(萬古天下)에 그런 장관은 대두(對頭)할 데 없을 듯하더라.

짐작에 처음 백지 반 장만치 붉은 기운은 그 속에서 해 장차 나려고 우리어 그리 붉고, 그 회오리밤 같은 것은 진짓 일색을 빠혀 내니 우리온 기운이 차차 가새며, 독 같고 항 같은 것은 일색이 모딜이 고온 고로, 보는 사람의 안력(眼力)이 황홀(恍惚)하여 도모지 헛기운인 듯싶은지라.

 

* 이 작품은 조선 순조 때 의유당 김씨가 함흥 판관으로 부임해 가는 남편을 따라가 그 곳의 명승 고적들을 살피고 느낀 바를 적은 순 한글 기행 수필로, 귀경대의 일출을 구경하기까지의 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데, 전반부의 일출의 장관에 대하 호기심과 기대, 일출을 기다리는 과정이, 후반부에서는 해돋이 광경을 여성 특유의 세심한 관찰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치밀한 필치가 드러나 있다. 이렇듯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동명 일기'는 기록 문학이 어떻게 문학성을 띠는 가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우리 국어 구사력의 뛰어남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호민론(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표범보다도 더 두렵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제멋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다. 도대체 어찌 그러한가.

무릇 이루어진 일이나 함께 기뻐하면서 늘 보이는 것이 얽매인 자, 시키는 대로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온순한 백성)이다. 이들 항민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모질게 착취당하며 살이 발겨지고 뼈가 뒤틀리며, 집에 들어온 것과 논밭에서 난 것을 다 가져다 끝없는 요구에 바치면서도 걱정하고 탄식하되 중얼중얼 윗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는 자는 원민(怨民:원한을 품은 백성)이다. 이들 원민도 반드시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자기 모습을 푸줏간에 감추고 남모르게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풀어보려는 자가 호민(豪民:살림살이가 넉넉하고 세력 있는 백성)이다. 이들 호민이야말로 두려운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틈을 엿보다가 일이 이루어질 만한 때를 노려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밭이랑 위에서 한 차례 크게 소리를 외친다. 그러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드는데, 함께 의논하지 않았어도 그들과 같은 소리를 외친다. 항민들도 또한 살길을 찾아 어쩔 수 없이 호미자루와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황건적 때문이다. 당나라 때에도 왕선지와 황소(黃巢)가 기회를 탔었는데, 끝내는 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이 모두 백성을 모질게 착취해서 제 배만 불렸기 때문이니, 호민들이 그 틈을 탄 것이다.

하늘이 사목(司牧)을 세운 까닭은 백성을 기르려고 했기 때문이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위에 앉아서 방자하게 흘겨보며 골짜기 같은 욕심이나 채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즉 그러한 짓을 저지른 진  이래의 나라들이 화를 입은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한도가 있었고, 자연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누렸다. 장사꾼에게는 그 길을 열어 주고 쟁이들에게도 혜택을 주었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있었다. 갑자기 큰 전쟁이나 국상이 있더라도 따로 백성들로부터 거두는 적은 없었다. 다만 말기에 와서는 삼공(三空: 흉년이 들면 사당에는 제사를 못 지내고, 서당에 항생이 없으며, 뜰에는 개가 없다.)을 염려하였다.

우리 조선은 그렇지 못하다. 얼마 안 되는 백성을 거느리고도 신을 섬기는 일이나 윗사람을 받드는 예절은 중국과 같다. 백성들이 세금을 다섯 몫쯤 내면 관청에 돌아가는 것은 겨우 한 몫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진다. 또한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한 해에도 두 번이라도 세금을 거둬들인다. 고을의 사또들은 이를 빙자하여 키로 물건을 가려내면서(이물질이 들어있는지 검사해 가면서) 가혹하게 거둬들이기에 끝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이 고려 때보다도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라고 말한다. 불행히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르면, 근심과 원망에 가득 찬 민중들이 따라 가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기주양주의 육합의 반쯤은 발을 꼬고 앉아서(속수무책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이런 두려운 형상을 환히 알라서 느슨한 활시위를 바로잡고 어지러운 수레바퀴를 고친다면, 그래도 나라는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 허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89(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평소 친교가 있던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광해군 폭정에 항거하여 이듬해 하인준(河仁俊)김개()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 《성수시화(惺戒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등이 있다

 

 

조침문(弔針文) 유씨 부인(兪氏夫人)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자 글로써 침자(針者)에게 고()하노니, 인간 부녀(人間婦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于今) 이 십 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짐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村)께옵서 동지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 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 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 박명(薄命)하여 슬하(膝下)에 한 자녀(子女) 없고, 인명(人命)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침선(針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호 통재(嗚呼痛哉),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 자식(子息)이 귀()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하나 명()을 거스릴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천은(天銀)으로 집을 하고, 오색(五色)으로 파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婦女)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珠簾)이며, 겨울 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이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哀哉), 바늘이여.

금년 시월 초십일 술시(戌時), 희미한 등잔 아래서 관대(冠帶) 깃을 달다가, 무심중간(無心中間)에 자끈동 부러지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 혼절(氣塞昏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 없고 하릴 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히 때일손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 옷 섶을 만져 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오호 통재(嗚呼痛哉),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 누를 한()하며 누를 원()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심(無心)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녁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 바늘이여.

 

조선 순조(純祖:180034) 연간에 유씨(兪氏)부인이 지은 수필. 국문체. 제침문(祭針文)이라고도 한다. 바늘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제문(祭文) 형식으로 쓴 글이다. 일찍이 문벌 좋은 집으로 시집갔으나 과부가 된 유씨는 슬하에 자녀도 없이 바느질을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데, 하루는 시삼촌에게서 얻은 마지막 바늘이 부러지자 그 섭섭한 심회를 누를 길 없어 이글을 지었다 한다.

 

뱃삯과 뇌물 이규보

어느 날 남쪽 지방을 여행하였는데 도중에 큰 강물을 만났다. 그리하여 강나루에서 뱃삯을 주고 강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때마침 강물을 건너는 사람이 많아서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동시에 출발하였다. 두 척의 배는 크기도 똑같고, 노 젓는 사람의 수도 똑같고, 태운 사람의 수도 똑같았다.

두 척의 배가 마침내 닻줄을 풀고 노를 젓기 시작하였는데 조금있다 보니 곁에서 같이 출발했던 배는 날 듯이 강물을 건너가서 이미 저쪽 나루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내가 탄 배는 아직도 이쪽 나루 근처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묻지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이 이르기를, “저 배를 탄 사람들은 술을 싣고 가다가 그 술로 노 젓는 사람을 먹이니 뱃사공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기 때문이오.” 하였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한탄하였다.

아하! 이 조그마한 강물을 건너는 데도 뇌물을 먹이고 안 먹이는데 따라 빠르게 건너고 느리게 건너는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바다같이 험한 벼슬길을 다투어 건너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는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고 뇌물을 줄만한 사람도 없는 까닭에 지금까지 조그만 벼슬자리 하나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구나.”

그리고 나는 뒷날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계기를 삼기 위하여 이렇게 써 두기로 하였다.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똑같이 뱃삯을 내고 배를 탔어도 뇌물을 받은 사람에게는 뱃사공이 배를 빨리 저어서 강물을 건너게 해주는 것을 보며, 바다와 같은 험난한 벼슬길에 있어서 줄 만한 뇌물도 또 그것을 줄 사람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글이다.

 

* 이규보(李奎報) : 1168(고려 의종22) - 1241(고종 28)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호부낭중 윤수의 아들. 22세 되던 명종 1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 급제. 그의 호탕 활발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시호는 문순(文順).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 소설 [백운소설],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등이 실려 있다.

 

해괴한 시장(市肆說) 이곡

 

장사꾼이 모여서 물건을 팔고 사는 곳을 시장이라고 한다.

내가 처음 이 도성(개성)에 온 뒤로 맨 먼저 이 시장 골목에 들어와 보았는데, 얼굴을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이 몸을 파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얼굴이 고운 정도에 따라 몸값이 비싸기도 하고 싸기도 하였는데, 공공연히 몸값을 흥정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곳을 이른바 여사(女肆:여자시장)’라고 하였다. 참 불미스러운 풍속임이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관청에 들어가 보았는데, 공문서를 작성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뇌물로 정해지는 값은 사건의 경중(輕重)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뇌물을 거리낌없이 받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곳을 사람들은 '이사(吏肆:관리시장)'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법과 행정이 올바르게 시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에 와서 또 인사(人肆:사람시장)’라는 곳을 보았다. 지난해에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여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모자라자 힘센 자는 강도질을 하고, 약한 자는 집을 떠나 떠돌이나 거지가 되었다. 그래도 입에 풀칠할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부모는 자신이 낳아 기르던 어린 자식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며, 주인은 종을 팔려고 시장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값은 너무 싸서 돼지 값만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해당 관청의 관리들은 모른 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먼저 보았던 두 시장은 그 행위가 가증스러워 말할 것도 없이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시장도 형편이 가긍하기는 하나 역시 하루빨리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세 가지 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불미스럽고 가증스러운 결과가 장래에 틀림없이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가정집(稼亭集)

 

* 이 글을 통해 당시에도 여자들이 몸을 파는 홍등가와 부정을 일삼는 관리,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자식을 파는 부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사회가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이 곡 : 1298(충렬왕 24) - 1351(충정왕 3). 호는 가정(稼亭). 이색의 아버지이며 이제현의 문인. 1333년 원나라에서 급제.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이 되어 원제에게 건의하여 고려로부터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했다. 저서로 유고집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병든 대나무를 보고 하수일

어느 날 나는 동산 가운데 있는 대나무 밭을 거닐다가 이상하게 생긴 대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그 뿌리 부분과 끝 부분은 다른 대나무와 비슷한데, 그 가운데 부분의 마디가 다른 것에 비하여 촘촘하게 짧고 또 굽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레들이 좀먹은 구멍이 나 있었다.

모든 대나무는 뿌리 부분에 있는 마디가 짧고 위로 올라갈수록 마디가 길어지다가 끝 부분에 가서 다시 짧아 지는 것이 상례일 뿐만아니라 곧게 자라는 것이 또한 당연한 것인데, 지금 이와 같이 길어야 할 부분이 짧고 곧아야 할 곳이 굽어 있으니, 이는 모두 본래의 성품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외부의 시련에 의하여 이와 같이 본성이 변한 것이 어찌 저 대나무 뿐이겠는가? 나는 여기서 탄식하기를, “우리 인간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본성이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물욕에 어두워 양심이 비뚤어지면 저 굽은 대나무와 같이 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저 대나무는 좀벌레 때문에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사람은 욕심 때문에 타고난 성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병들어 있다면 그 사람을 무엇에 쓰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물을 관찰하여 자신을 반성하여 보라.” 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저 병든 대나무를 보며 이 글을 쓰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송정집(松亭集)

 

* 병든 대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인간도 저 대나무와 같이 물욕에 병이 들면 그 본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 하수일(河受一) : 1553(명종8) ~ 1612(광해4). 호는 송정(松亭). 남명 선생의 문인 23세에 선산 향시(鄕詩)에 응시. 선조 22(37)에 사마시에 급제. 선조 24년에 전시 병과로 급제. 다음 해 임진왜란을 당하고 48세에 성균관 전적 역임. 그후 현감, 병조좌랑, 이조정랑 등 역임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애(先妣行狀) 이이  

 자당(慈堂)의 휘(:죽은 이의 이름)는 아무()인데 진사인 신공(申公)의 둘째 따님이었다. 어릴 때 벌써 경전(經傳)을 통달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낙서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바느질을 잘하여 자수(刺繡)하는 일까지 정교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게다가 천성이 온화하고 지조 있고 정숙하였으며 행동은 안정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자세하였으며 말수도 적었다. 또한 스스로 늘 겸손한 태도를 가지니 외할아버지인 신공께서 사랑하고 중히 여기셨다. 어머니는 효성이 지극하여 외조부모께서 병환이 나면 얼굴에 늘 걱정하는 빛이 있다가 병환이 나아야 얼굴빛이 밝아졌다. 뒷날 아버님에게 시집가게 되자 진사께서 우리 아버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딸이 많아서 다른 딸들은 시집가도 그리 서운하지 않더니 자네 처만큼은 실로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네.”

어머니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사께서 돌아가시니, 어머니는 삼년상을 끝낸 뒤에 서울로 올라와서 시어머니인 홍씨를 신부의 예로써 뵈었다. 어머니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경솔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집안의 여자 친척분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웃고 잡답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시어머니께서 이르기를 새아기는 왜 말이 없느냐?” 하였다. 어머니는 꿇어앉아 이르기를,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문 밖에 나가 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릅니다.” 하였다. 그러자 좌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겸연쩍게 여겼다.

뒷날 어머니는 임영(臨瀛 : 강릉)에 돌아가 친정 어머니를 뵙고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한 뒤에, 대관령에 올라와서 친정 마을인 북평(北坪)을 돌아보며 애틋한 감정을 못 이겨 가마를 멈추게 하고 시를 한 수 지어 읊었다.

머리 흰 어머님 강릉에 두고

서울로 향하여 홀로 가는 이 마음.

북촌으로 머리 돌려 때때로 바라보니

흰 구름 뜬 아래 산만이 푸르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邨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서울로 돌아온 뒤에 수진방(壽進坊)에서 살았는데 당시 할머니 홍씨가 연로하셔서 집안일을 돌볼 수 없었으므로, 어머니가 맏며느리로서 도리에 따라 집안을 다스려 나갔다. 아버님께서는 성품이 조그마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으니,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산을 절약하여 능히 자족하였고, 어른을 공양하고 손아랫사람을 보살피는 데 있어서 모든 일을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할머니에게 허락을 빋은 뒤에 행했으며, 여자 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계집이니 첩이니 하는 말로 부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항상 말은 온화하였고 얼굴빛은 부드러웠으며, 아버님께서 혹시 실수를 하면 반드시 간곡하게 권유하여 고치게 하였으며, 자녀들의 잘못은 엄히 경계하여 타일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준엄하게 나무라니, 종들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어머니의 환심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어머니는 평소에 늘 친정인 강릉을 그리워하며 고요하고 깊은 밤이면 혼자 앉아서 눈물로 날을 새는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친척 어른인 심공(沈公)의 몸종이 와서 거문고를 탄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거문고 소리가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한다.”고 하니,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어버이를 생각하는 시를 썼는데 다음과 같다.

밤마다 달을 향하여 기도하노니

바라건데 생전에 한 번 더 뵙고저.

夜夜祈向月

願得見生前

이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효심은 천성으로 타고 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홍치 갑자년(1504, 연산 10) 겨울인 1029일에 강릉에서 태어나서, 가정 임오년(1522, 중종 17)에 아버님에게 시집오고, 3년 뒤인 을유년(1525)에 서울로 왔다. 그 뒤로 때로는 강릉에 살았고 때로는 봉평에 살았으며 신축년(1541)에 서울로 돌아왔다. 경술년(1550, 명종 5)에 아버님께서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고, 다음 해인 신해년 봄에 삼청동으로 집을 옮겼다. 그해 여름에 아버님께서는 물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가지고 관서(關西) 지방으로 갔는데, 아들인 선()과 나 이()가 따라갔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버님이 계신 여관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으나 사람들이 그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해 5월에 운반하는 일을 끝내고 아버님께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환이 들었다. 어머니는 병환이 난 지 이삼 일이 지나자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래도 못 일어날 것 같다.”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평상시와 같이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자식들이 문안을 하러 가니 이미 돌아가셨다. 그 날이 곧 1551(신해년) 517일 새벽의 일로서 향년 48세였다. 이 날 아버지와 나는 서강(西江)에 있었는데 우리가 가지고 온 행장 중에 놋그릇이 모두 빨갛게 녹이 나 있었다. 모두들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조금 있자니 어머니의 부음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평소에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 7세 때 벌써 안견(安堅)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도(山水圖)를 그렸다. 특히 포도 그림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그린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율곡전서(栗谷全書)

* 이이(李珥) : 1536(중종 31) ~ 1584(선조 17).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강릉 출생. 어머니는 신사임당.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명종 3년에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에 합격.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에 심취. 1564(명종 19, 29)에 생원시와 식년 문과에 모두 장원급제. 아홉 번 장원했다고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 1568(선조 1)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역임. 동서분당의 당쟁을 조정하는데 힘쓰다가 1583년 동인들로부터 당쟁을 조장한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하기도 했다.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룬다. 서호는 문성공

 

요월당 기문(邀月堂記) 주세붕    

나는 조령(鳥嶺)에서 양산(陽山)으로 들어가 최고운(崔孤雲 : 최치원) 과 이몽유(李夢遊) 두 분의 비석을 본 뒤에 백운대(白雲臺)로 올라갔다가 선유동(仙遊洞)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은현루(加恩縣樓)에 오르니 누각이 덩그러니 높이 솟아 사방이 탁 트여 보였다. 그 누각 안에 작은 마루가 있었는데 소문보다 훌륭하였고 거기서 바라다보이는 경치도 빼어났다.

현재(縣宰)인 조군이 부탁하기를, “이 누대와 마루가 아직까지 모두 명칭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누대나 정자 같은 이름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지어야 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하였다.

풍경이 이와 같이 좋은데 궁벽한 시골에 위치하여 있어서 이름도 얻지 못하였으니 역시 흠이 아닙니까?”

꼭 이름을 짓겠다면 누대의 이름은 빙허루(憑虛樓)’ 라 하고, 마루의 이름은 요월당(邀月堂)’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조군이 대답했다.

지금 이 누대는, 위로는 별을 손에 잡을 듯이 높이 솟아 있어서 날아가는 기러기나 날랜 독수리들도 오히려 눈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으니 빙허(憑虛)’라는 이름은 썩 잘 맞습니다만, 마루의 이름이 있어서는 주위의 삼라만상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달만을 맞이한다는 뜻의  ‘요월(邀月)’이라는 이름으로 국한한다면 어딘가 좀 치우친 듯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세상에는 누대나 정자의 이름에 너무 치우친 것을 싫어하여 만졍(萬景)’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데가 있기는 하지만 경치를 수로 표시하여 이름 짓는 것은 역시 혼란스럽지 않겠소? 저 달이야 해와 짝이 되어 하늘에 올라올 때에 영기(靈氣)를 토해 내니 만 가지 경치를 다비추어 주지 않소? 곧 산은 달빛을 받아 더 아름다워지고, 물은 달빛이 비치면 더욱 맑아진다오. 게다가 풀이나 나무, 꽃들은 달빛 속에서 더욱 스산하여지는 것이오. 그러니 달을 미워하는 자는 도둑 뿐이고 달을 사랑하는 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오. 한편 저 달을 사랑하는 데는 깊고 얕은 정도의 차이가 있소. 달빛 어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글하는 사람(?)의 사랑이고, 달빛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것을 즐기는 것은 군자(君子)의 사랑이며, 그 달이 둥글어지고 이지러지는 것을 헤아려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성인(聖人)의 사랑이라오. 게다가 우리는 이 마루 위에 마주 앉아 주객(主客)이 되었으니 우리 역시 사랑하는 방법을 헤아리며 저 달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조군은 만족한 듯이 웃으며 그 참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사이에 문답한 말을 가시고 우선 글로 써서 그에게 주고 이 마루의 기문으로 대신하도록 하였으나, ‘빙허루에 대한 기문은 목로(牧老 : 목은 이색) 같은 훌륭한 선비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쓰지 않았다.

조군의 이름은 응세(應世)인데 한양 사람이다.

  가정 병오년(1546, 명종 1, 작자 52) 10

 홍문관 전한(典翰) () () 기함 - 무릉잡고(武陵雜稿)

* 문경의 가은현에 있는 누대를 돌아보고 그 누대 안의 마루 이름을 요월당이라고 한 뒤에 그것이 주는 의미를 조리있게 나열하였다. 옛사람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 주세붕(周世鵬) : 1495(연산 1) -1554(명종 9). 문신.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1552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김안로의 배척으로 강원 도사로 좌천. 백운동(순흥)에 안향의 사당 회헌당(晦軒堂)을 세우고, 1543년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창설했다. 뒷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어우당(유몽인)이 모은 야담집

 이 작품은 선조 광해군 대에 걸쳐 유무명 인사들의 일화와 민간의 야사와 가담항설을 모은 야담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야담은 조선 후기의 단편 서사양식의 하나이다.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의 사실성보다는 흥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사회 윤리적인 가치가 중시되기도 한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야담의 소재가 된다.

 박계쇠

박계쇠는 시정 상고(장사치)의 아들이라. 감사 홍춘경 첩딸이 있어 마땅히 혼인 지낼지라. 혹 계쇠로 이른데, 그 족하 승지 천민 갈오되, 사대부 엇지 시정 사람으로 더불어 혼하리오. 춘경 갈오되, 천녀이 관계하랴 하고 마침내 첩딸로써 안해 삼은지라.

가업이 요족하여 일본 중한 보배를 무역하여 그 이()를 기르고져 하여 동평관에 가 객왜(客倭-왜의사신)을 본대, 왜 야광주 한 낱으로써 어리오니(자랑하니) 그 크기 꿩의 알만 하고 밤에 시험하니 형연히 등잔 같아서 일실이 난만히 빗추는지라. 생각하되, 그 값을 백배나 받기 연경만 같지 못하다 하여, 차단을 바꾸어 두터이 선물하고 연경 하는 자리에 충수(充數-수를 채우는 것)하여 노동 하원관(요동에 있는 객관)에 이르러 독을 열고 보니 정광(精光)이 조금 덜녓더니(감해졌더니), 옥하관의 이르러 밤을 타 살펴보니 암연히 빛이 없어 완연히 한 둥근 돌이라. 연시(燕市) 사람을 뵈야 갈오되, 이는 야광주라 한데, 시인이 다 대소하고 낯에 침 뱉어 갈오되, 이는 구은 것을 구슬을 지음이라. 날이 오래니 빛이 어두워 연석(보통의 돌)이 옥뉴(玉類)만도 못하다 하니,

필경의 공수(빈손)로 돌아와 이로부터 져재(시장)에 부채하야 천금이 넘은지라. 집 팔아 다 못갚고, 전원 팔아 다 못 갚고, 서울 밖의 장획(, 노비) 팔아 다 못 갚고, 계교 궁진하고 형세 궁박하여 가만히 이부 서리로 더불어 도모하여 임의 작고한 종실 고신(告身-신분 문서)을 내고, 호부 서리로 더불어 도모하여 녹패 문서(하인으로 하여금 녹봉을 타오도록 하는 문서)를 내고, 태창 서리로 더불어 꾀하여 문서를 도준하여 삼품 종실 녹을 태창에게 가 바다 해 연()하야 입조하여 떳떳이 벼슬하는 사람같이 하여 이리하기 십 년이라.

써 그 빚을 갚다가 후에 일이 발각하여 옥에서 죽으니, 해부(該府)의 검시하야 삼일 만에 그 송장을 내니, 그 두 눈을 다 쥐가 구멍 뚫으니, 슬프다, 사람의 보화 중히 여기는 마음이 임의(이미) 화의 잃고 구하는 꾀니 어후(於後)의 맹얼(싹이 돋음)하야 등사(죽음에 이르는)하는 계교가 마침 남상에 이르러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흉화의 걸녀 쥐 그 눈을 뚫으니, 그 사람은 족히 책망할 것이 아니라. 사대부 시정의 자식을 선택하여 그 딸로 아내하여 그 집에 있게함이 또한 마땅치 아니하냐. 홍승지 말이 진짓 귀감이로다.

 지은이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黙好子).조선  중기시대 문인. 설화 문학의 대가. 본관 : 흥양(興陽).  시호 의정(義貞).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한 그는 스승의 교훈을 거역, 파문당하여 성혼이 죽은 뒤에 그를 모욕하는 글을 써서 비난을 받았다. 선조부터 광해군에 걸친 문장가로서 벼슬은 황해도관찰사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612(광해군 4) 예조참판 이조참판에 이름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과 교유하였다. ‘폐모론'에 반대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는 화를 면하였음. 이괄(李适)의 난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자, 양주 서산(楊州西山)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기자헌 등이 이괄과 동조할 우려가 있다 하여 체포되어 그가 지은 <孀婦詩(상부시)>로 화를 면하려 했으나 결국 아들 약(  )과 함께 사형됨. 정조 때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 홍양의 운곡사(雲谷祠),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 제향되었다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그는 저서로는어우야담》 《어우집등의 문집을 남겼으며,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등 글씨에도 뛰어났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박지원    

6월 어느 날 밤, 낙서(洛瑞)가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글 한 편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내가 연암 어른을 찾아갔었는데, 그 어른은 사흘이나 끼니를 거른 채 망거도 벗고 버선도 벗고 창틀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행랑의 천한 것들과 어울려 서로 말을 주고받고 계셨다.”

그 글에서 연암이라고 한 것은 바로 나를 말함인데, 내가 황해도 금천협 연암 골짜기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골짜기 이름을 따서 내 호를 삼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나의 식구들은 모두 광릉에 있었다. 내가 본래 몸집이 비대해서 몹시 더위를 타는데다가 또 풀과 나무가 울창해서 여름밤의 모기와 파리 떼도 두통거리이려니와, 논에서 개구리 떼가 밤낮없이 울어대는 것도 지겨워서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으로 피서를 오곤 했다. 서울집이 비록 낮고 좁아터졌지만 모기나 개구리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집에는 집을 봐주던 계집종 하나뿐이었는데,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친 듯 울어대더니 나를 두고 달아나 버렸다. 당장 밥을 지어줄 사람이 걱정이었다. 할 수 없이 행랑채에 사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 터놓고 지내게 되고 저희들도 나를 꺼리지 않아 노비처럼 부릴 수 있었다.

혼자 조용히 살자니 마음에 한 가지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가끔 시골집에서 오는 편지를 받더라도 다만 평안하다는 글자나 훑어보고는 팽개쳐 두었다. 이러다 보니 거칠고 게으른 생활에 버릇이 들어, 남의 경조사에 인사하는 것도 모두 그만두어 버리게 되었다. 어떤 때는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열흘이 넘도록 망건을 쓰지 않기도 했다. 손님이 와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나무 장수나 참외 장수가 지나가면 불러서 앉혀놓고 그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 염치에 대하여 친절을 다해 가르치기도 했다. 남들은 나를 보고 눈치 없이 한 번 말이 나오면 질리도록 오래 끈다고 불평을 하지만 그 버릇을 고칠 수가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더러 가정이 있으면서도 객지에서 나그네 노릇을 하고 처자가 있는 데도 중처럼 혼자 산다고 비웃지만, 나는 더욱 느긋해져서 바야흐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도 없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살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까치 새끼 한 마리가 한쪽 다리가 부러져 비틀거리고 다니는 것이 보기에 우스웠다. 밥알을 던져 주었더니 차츰 길이 들어 날마다 찾아와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놈과 장난을 하며 맹사군은 전혀 없고 단지 평원군의 식객만 있구나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우리나라 관습에 화페의 단위를 문()이라고 하기 때문에 결국 돈은 전문(錢文)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제나라 재상 맹상군의 성이 전()이요 이름이 문()이므로 맹상군은 곧 전문(田文)인데, 이 전문(田文)과 돈을 뜻하는 전문(錢文)의 음이 같기 때문에 그런 농담을 해본 것이다. 그리고 평원군의 식객이란 절름발이란 뜻이다.

졸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졸아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을 푹 자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어쩌다가 글을 지어 나의 뜻을 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 배운 철현소금(鐵絃小琴)으로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한다. 어떤 친구가 술을 보내 주면 기쁘게 퍼마신다. 취한 뒤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예찬해 보기도 한다.

내가 나만을 위하는 것은 양주와 같고 모든 사람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과 같고, 자주 쌀독이 비는 것은 안연과 같고,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은 노자와 같고, 마음이 넓어서 사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장자와 같고, 참선하는 것은 석가모니와 같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것은 유하혜와 같고,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진()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령과 같고, 남의 집에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과 같고,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박과 같고, 거문고를 잘 타는 것은 자상호와 같고, 책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과 같고, 스스로를 훌륭한 사람에 비기는 것은 제갈공명과 같으니,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깝지 않는가! 다만 키만 크고 무능하기로는 조교에게 겸손해야 하고, 3일을 굶고도 염치를 찾는 것으로는 오릉중자에게 양보해야 하니, 그것이 부끄럽고 부끄럽구나.”

그리고는 혼자서 크게 한바탕 웃는다. 그때 나는 정말로 사흘째 굶고 있었는데, 행랑살이하는 사람이 남의 지붕을 이어주고 품삯을 받아 와서야 겨우 저녁밥을 지었다. 행랑방 어린애가 밥투정을 하느라 울면서 먹으려 들지 않자, 행랑살이하는 사람이 성이 나서 밥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죽으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때 내가 막 밥을 먹고 곤해서 드러누웠다가 송나라 장영이 촉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어린애를 목베어 죽인 일을 예로 들어서 깨우쳐 주고, 또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욕만 퍼부으면 커서 은혜를 모르는 불효자가 된다고 말해 주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은하수는 지붕 위에 드리워 있고 별똥별이 서쪽으로 흐르며 하늘에 하얀 직선을 그린다. 행랑살이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낙서가 오더니 어르신께서는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가 이른바 행랑의 천하 것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더라고 적은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다. 또 낙서의 글에는 눈오는 날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옛집에 살고 있을 때의 일로, 낙서의 집과 우리 집이 서로 마주하고 있어서 그가 어려서부터 나를 잘 보아 왔기 때문이리라. 그때만 해도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펴고자 하는 뜻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 내 나이 40도 채 못되어 벌써 머리털이 하얗게 센 것을 보고서 그가 느낀 바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피곤해졌으며, 기백은 쇠하여 꺾였고 세상에 대한 의욕도 조용히 사라져 버렸으니, 다시는 옛날 그때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에 그를 위해 글을 지어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1) 평원군 - 조나라의 왕자로 식객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의 식객 가운데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다.

2) 양주 - 춘추전국 시대의 사상가. 자는 자거(子居). 극단적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주창했다.

3) 묵적 -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의 사상가 무자, 겸애숭검(兼愛崇儉)의 사상을 주창했다.

4) 진박 - 송나라 때 도사로 한번 잠들면 100여 일을 잤다고 한다.

5) 양웅 - 전한 때의 학자

6) 조교 - <맹자>에 나오는 인물로, “교가 들으니 문왕은 10, 탕왕은 9척인데, 저는 94촌의 키로 곡식만 축내고 있을 뿐이니 어찌해야 옳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7) 오릉중자 - 제나라 사람으로 지나치게 청렴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에서

 

초의 선사께 김정희    

1 병석에서 선사의 편지와 선물 꾸러미를 연달아 받으니 매우 기쁩니다. 부처님의 부적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마를 적셔 주는 감로수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보내 준 차 덕분에 병든 위장이 지금은 시원하게 뚫린 것 같습니다. 더구나 맥이 풀려 있던 때라, 그 고마움이 뼈에 사무쳤답니다.

자흔과 향훈도 차를 보냈구려. 그 넉넉한 마음이 여간 고맙지 않습니다. 나 대신 정중히 감사의 뜻을 전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향훈 스님이 따로 박생에게 보낸 엽차는 파공의 추차아에 못지 않게 향미가 있더군요. 가능하다면 내 것도 한 봉지 더 부탁했으면 합니다. 병이 어지간해지면 보잘것없는 글씨로나마 특별히 보답할 생각이니, 향훈 스님에게 나의 이 뜻도 함께 전하여 바로 내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주었으면 합니다. 포장 맛도 매우 좋습니다. 병든 혀를 상쾌하게 해 주었어요. 고맙구려.

진사(震師)의 행적을 적은 글은 인편에 돌려보내니 그대로 행해도 무방할 겁니다. 두 편의 글도 삭제할 것이 없으나 원록(原錄) 속에 상의해야 할 곳이 더러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머리가 맑지 못해서 일일이 바로잡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이 일은 하루아침에 끝낼 성질의 것이 못되니 다른 날을 기다려서 고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그대로 시행해도 무방하고…… 선문의 문자라는 것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살려 보기 때문이지요.

다른 글은 조금 정신이 맑아질 때를 기다려서 살펴볼 생각이니, 여기서는 자세히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요컨대 백파(白坡) 노인의 마견(魔見)으로 뽑아 와도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병든 지 오늘로 50일째가 되었는데, 마치 고인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날마다 열 냥쭝의 인삼을 복용하여 이미 대여섯 근이나 되었으니,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그 힘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횡설수설. 이만 그칩니다.

2 인편으로 편지를 받으니 선사가 사는 산중이나 내가 사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늘을 이고 그리워하면서도 어찌해서 지난날은 그처럼 격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세밑 주위가 기승을 부려서 벼루 물고 술을 얼리고도 남을 정도랍니다. 선사가 사는 남쪽은 들판에서도 이런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따뜻한 암자 속에서이겠습니까. 요새 청아하고 한가한 복을 입어 방석과 향등(香燈)이 한결같고 가볍고 편안하신지요? 그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몸은 계속 서울에만 있으니, 설이나 지내고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호남으로 갈 신과 지팡이를 매만질까 합니다.

차는 이 갈증이 난 폐부를 적셔 주어 좋지만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한입니다. 향훈 스님과 전에 차에 대해 약속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지. 부디 이 뜻을 전하고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봄에 이리로 오는 인편에 보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글씨 쓰기도 어렵거니와 인편도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그런데 새로 딴 차는 왜 돌샘과 솔바람 속에서 혼자만 즐기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서른 대의 매를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려.

새 달력을 보내니 대밭 속의 일월(日月)로 알고 보시기 바랍니다. 호의는 별고 없으며 자흔과 향훈도 역시 평안하신지요? 두 스님에게도 달력을 보내니 나눠주시고 또한 멀리서 보내는 나의 정성도 아울러 전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김세신에게도 달력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3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구려. 분명 산중에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혹시 나 같은 속인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요? 나는 이처럼 간절한데도 그대는 그저 묵묵부답이니…….

머리가 허옇게 센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갑자기 이처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스운 일입니다. 아예 절교하자는 말인가요?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스님으로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선사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선사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차로 해서 맺은 인연만은 끊어 버리지 못하고 또 쉽게 부숴버리지도 못하여 다시 차를 재촉하는 것이니, 편지도 필요 없고 다만 지난 두 해 동안 밀린 차 빚을 한꺼번에 갚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조(馬祖) 스님의 꾸지람과 덕산(德山) 스님의 몽둥이를 맞을 것이니, 이 꾸지람과 이 회초리는 비록 백천 겁이 지나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 뒤로 미루고, 이만.

1) 백파 - 조선 시대 말기의 승려. 전북 고창 선운사에 추사가 쓴 비문과 부도가 전하고 있다.

2) 마조 - 당나라 고승 도일선사(道一禪師)를 말한다. 성이 마씨이기 때문에 마조라고 한다.

3) 덕산 - 당나라 고승. 어려서 출가하여 깊이 경륜을 밝혀 <금강경>을 통달하니 그 도가 준엄하여 승려들을 봉살(棒殺)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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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300여 가지. 순조 1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지냈다. 금석학의 대가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냈고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이른바 추시체로 유명. 저서에는 <완당집>, <금석과안록>등이 있다.

 

 

아들 학연에게 정약용    

 여기 내가 데리고 있는 네 아우의 재주는 형인 너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듯하다. 그렇지만 금년 여름에 고시(古詩)와 산부(散賦)를 짓게 했더니 볼 만한 것들이 많이 나왔구나. 가을 내내<주역>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느라 비록 독서는 많이 할 수가 없었지만 그 애의 견해는 제법이란다. 요즘은 <좌전(左傳)>을 읽는데, 옛 임금들의 전장(典章)이 라든지 대부들의 사령(辭令)의 법도들을 제법 잘 배워서 벌써 볼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물며 너는 본래 재주가 네 동생보다 한참 낫고, 또 어려서 공부한 것도 동생에 비해서 대강은 갖추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용맹스럽게 뜻을 세워 떨쳐 일어나 학문에 매진한다면, 서른을 넘기기 전에 반드시 큰 선비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다. 그 후에는 쓰이고 쓰이지 않고, 나아가 행하고 물러나 숨고 하는 일이 어찌 말할 거리나 되겠느냐?

자질구레한 시율(詩律)을 가지고 어쩌다 이름을 얻었다 하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는 일이니, 모름지기 올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는 <상서><좌전>을 읽어야 한다. 비록 어려워서 읽기 힘든 곳이나 글이 난삽하고 뜻이 심오한 대목이 있더라도, 이미 다 주석이 달려 있으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리저리 연구하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틈틈이 <고려사>, <반계수록>,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비고> 등의 책을 읽고 이 중에서 중요하고 쓸모 있는 대모을 뽑아 적어두는 일도 그만두어서는 아니 된다.

너는 점점 그 공부해야 할 때를 놓치고 있다. 집안 사정으로 보아서는 마땅히 밖에서 유학을 해야 할 것 같으니, 이곳으로 와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여러 가지로 옳은 일일 테지만, 부녀자들이 대의를 모르고 떨쳐 보내기 어려운 인정으로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구나.

너의 아우는 문학이나 식견이 바야흐로 봄 기운이 돌아 온갖 식물이 싹터 오를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다. 형인 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동생을 집으로 보내려고 해 보지만 차마 그렇게도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내년을 지내고 내후년(경오년) 봄에나 겨우 네 아우를 돌려보낼 것 같으니, 너도 그 날까지 세월을 헛되이 보내서는 아니 된다.

백 번 생각해 보아도, 나와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다면 집에서 꾹 참고 네 아우를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보고 교대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그 사정이 만의 하나도 희망이 없다면, 내년 봄 화창해진 뒤에 온갖 일다 떨쳐버리고 내려와서 함께 공부하자꾸나. 이 일은 결코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네 마음가짐이 날로 흐트러지고 네 형실도 날로 거칠어지니, 이곳으로 와서 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 둘째로 너의 안목이 좁고 다급한 데다 뜻과 기상을 잃어 가니 이곳으로 와서 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 셋째로 경전 공부는 거칠고 서툴며, 재주와 식견이 빈약하고 결점투성이니 이곳으로 와서 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 자질구레한 사정일랑 돌아보지도 말고 아까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지난번에 성수 이학규의 시를 보았다. 거기에 너의 시를 논평했는데, 너의 잘못된 점들이 잘 지적된 것 같더라. 마땅히 승복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지은 시들 가운데는 제법 좋은 것들도 있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후세의 시율은 마땅히 두보를 공자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시가 모든 시인들 중에서 왕좌를 차지하는 까닭은 <시경> 300펴이 끼쳐준 뜻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충신, 효자, 열녀 그리고 좋은 벗들의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고 충지하고 순후한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아파하고 시속을 분개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면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뜻이 서 있지 못하고,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고, 인생의 대도를 아직 듣지 못하고, 임금을 도와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는 그 점에 힘써야 할 것이다.

두보는 시를 지을 때 고사를 인용하되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자기가 지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 뿌리가 있느니, 시성이라 할 만하니라. 한유는 시를 지을 때 자법(字法)에 모두 뿌리가 있지만 어구는 자기가 지어낸 것이 많았으니, 시의 대현이라고 할 만하니라. 소동파는 시를 지을 때 구절마다 고사를 인용하되 그 인용한 티가 나고 흔적이 있는데 얼핏 보면 의미를 깨우칠 수가 없고 반드시 이리저리 따져 보아서 그 인용한 출처를 캐낸 뒤라야 겨우 그 뜻을 통할 수 있느니, 이것이 그가 시의 박사가 된 까닭이다.

소동파의 시로 말하면, 우리 세 부자의 재주로 모름지기 종신토록 전공한다면 아마 그 근처에는 갈 수 있을 것이다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 매달리겠느냐? 그러나 시를 지을 때 전연 고사를 인용하지 않고 음풍영월(吟風詠月)이나 하고 장기 두고 술 마시는 이야기를 가지고 운이나 맞추어 시라고 지어 놓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서너 집밖에 안 되는 마을에 사는 선비의 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뒤로 시를 지을 때에는 고사를 인용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도록 하여라.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고사를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 또한 품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등 우리 나라의 책 속에서 그 사실을 캐내고 그 지방을 가려내서 시에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뒤라야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도 있고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유득공이 지은 <이십육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이 출판할 정도이니, 이를 증명할 만하다 하겠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말기의 학자.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실학을 계승하여 집대성했다. 저서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다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이른바 규중 칠우(閨中七友)는 부인내 방 가온데 일곱 벗이니 글하는 선배는 필묵(筆墨)과 조희 벼루로 문방 사우(文房四友)를 삼았나니 규중 녀잰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오.

 이러므로 침선(針線) 돕는 유를 각각 명호를 정하여 벗을 삼을새, 바늘로 세요각시(細腰閣氏)라 하고, 척을 척부인(戚夫人)이라 하고, 가위로 교두각시(交頭閣氏)라 하고 인도로 인화 부인(引火夫人)이라 하고, 달우리로 울랑자(亐娘子)라 하고, 실로 청홍흑백 각시(靑紅黑白閣氏)라 하며, 골모로 감토할미라 하여, 칠우를 삼아 규중 부인내 아츰 소세를 마치매 칠위 일제히 모혀 종시하기를 한가지로 의논하여 각각 소임을 일워 내는지라.  일일(一日)은 칠위 모혀 침선의 공을 의논하더니 척 부인이 긴 허리를 자히며 이르되,

 "제우(諸友)는 들으라, 나는 세명지 굵은 명지 백저포(白紵布) 세승포(細升布), 청홍녹라(靑紅綠羅) 자라(紫羅) 홍단(紅緞)을 다 내여 펼처 놓고 남녀의(男女衣)를 마련할 새, 장단 광협(長短廣狹)이며 수품 제도(手品制度)를 나 곧 아니면 어찌 일으리오. 이러므로 의지공(衣之功)이 내 으뜸되리라."

교두각시 양각(兩脚)을 빨리 놀려 내다라 이르되,

 "척 부인아, 그대 아모리 마련을 잘 한들 버혀 내지 아니하면 모양 제되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마라."

세요각시 가는 허리 구붓기며 날랜 부리 두루혀 이르되,

 "양우(兩友)의 말이 불가하다. 진주(眞珠) 열 그릇이나 껜 후에 구슬이라 할 것이니, 재단(裁斷)에 능소 능대(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작의(作衣)를 어찌 하리오. 세누비 미누비 저른 솔 긴 옷을 이루미 나의 날내고 빠름이 아니면 잘게 뜨며 굵게 박아 마음대로 하리오. 척 부인의 자혀 내고 교두 각시 버혀 내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삼 공이라 자랑하나뇨."

청홍 각시 얼골이 붉으락 프르락 하야 노왈,

 "세요야. 네 공이 내 공이라. 자랑마라. 네 아모리 착한 체하나 한 솔 반 솔인들 내 아니면 네 어찌 성공하리오."

감토할미 웃고 이르되,

 "각시님네, 위연만 자랑 마소. 이 늙인이 수말 적기로 아가시내 손부리 아프지 아니하게 바느질 도와 드리나니 고어에 운(),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뒤는 되지 말라 하였으니, 청홍 각시는 세요의 뒤를 따라 다니며 무삼 말 하시나뇨. 실로 얼골이 아까왜라. 나는 매양 세요의 귀에 질리었으되 낯가족이 두꺼워 견댈 만하고 아모 말도 아니 하노라."

인화 낭재 이르되,

"그대 네는 다토지 말라. 나도 잠간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눌로 하여 저가락 같이 고으며, 혼솔이 나 곧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으리요. 침재(針才) 용속한 재 들락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내의 손바닥을 한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초여 세요의 공이 날로 하여 광채 나나니라."

울랑재 크나큰 입을 버리고 너털웃음으로 이르되,

 "인화야, 너와 나는 소임 같다. 연이나 인화는 침선뿐이라. 나는 천만 가지 의복에 아니 참예하는 곳이 없고, 가증한 여자들은 하로 할 일도 열흘이나 구기여 살이 주역주역한 것을 내의 광둔(廣臀)으로 한번 쓰치면 굵은 살 낱낱이 펴이며 제도와 모양이 고하지고 더욱 하절을 만나면 소님이 다사하야 일일도 한가하지 못한지라. 의복이 나 곧 아니면 어찌 고오며 더욱 세답하는 년들이 게으러 풀먹여 널어 두고 잠만 자면 브듲쳐 말린 것을 나의 광둔 아니면 어찌 고으며, 세상 남녀 어찌 반반한 것을 입으리오. 이러므로 작의 공이 내 제일이 되나니라."

규중 부인이 이르되,

 "칠우의 공으로 의복을 다스리나 그 공이 사람의 쓰기에 있나니 어찌 칠우의 공이라 하리오."

하고 언필에 칠우를 밀치고 베개를 돋오고 잠을 깊이 드니 척부인이 탄식고 이르되,

 "매야할사 사람이오 공 모르는 것은 녀재로다. 의복 마를 제는 몬저 찾고 일워내면 자기 공이라 하고, 게으른 종 잠 깨오는 막대는 나 곧 아니면 못칠 줄로 알고 내 허리 브러짐도 모르니 어찌 야속하고 노흡지 아니리오."

교두각시 이어 가로대,

 "그대 말이 가하다. 옷 말라 버힐 때는 나 아니면 못하려마는 드나니 아니 드나니 하고 내어 던지며 양각을 각각 잡아 흔들제는 토심적고 노흡기 어찌 측량하리오. 세요 각시 잠간이나 쉬랴 하고 다라나면 매양 내 탓만 너겨 내게 집탈하니 마치 내가 감촌 듯이 문고리에 거꾸로 달아놓고 좌우로 고면하며 전후로 수험하야 얻어 내기 몇 번인 동 알리오. 그 공을 모르니 어찌 애원하지 아니리오."

세요각시 한숨 지고 이르되,

 "너는커니와 내 일즉 무삼 일 사람의 손에 보채이며 요악지성(妖惡之聲)을 듣는고. 각골 통한(刻骨痛恨)하며, 더욱 나의 약한 허리 휘드르며 날랜 부리 두루혀 힘껏 침선을 돕는 줄은 모르고 마음 맞지 아니면 나의 허리를 브르질러 화로에 넣으니 어찌 통원하지 아니리요. 사람과는 극한 원수라. 갚을 길 없어 이따감 손톱 밑을 질러 피를 내어 설한(雪恨)하면 조곰 시원하나, 간흉한 감토 할미 밀어 만류하니 더욱 애닯고 못 견디리로다."

인홰 눈물지어 이르되,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삼 죄로 포락지형( 烙之刑)을 입어 붉은 불 가온데 낯을 지지며 굳은 것 깨치기는 날을 다 시키니 섧고 괴롭기 칙량하지 못할레라."

울랑재 척연 왈,

 "그대와 소임(所任)이 같고 욕되기 한가지라. 제 옷을 문지르고 멱을 잡아 들까부르며, 우겨 누르니 황천(皇天)이 덮치는 듯 심신이 아득하야 내의 목이 따로 날 적이 몇 번이나 한 동 알리오."

칠우 이렇듯 담논하며 회포를 이르더니 자던 여재 믄득 깨쳐 칠우 다려 왈,

 "칠우는 내 허믈을 그대도록 하느냐."

감토할미 고두사왈(叩頭謝曰),

 "젊은 것들이 망녕도이 헴이 없는지라 족가지 못하리로다. 저희들이 재죄있이나 공이 많음을 자랑하야 원언(怨言)을 지으니 마땅 결곤(決棍)하암즉 하되, 평일 깊은 정과 저희 조고만 공을 생각하야 용서하심이 옳을가 하나이다."

여재 답왈,

 "할미 말을 좇아 물시(勿施)하리니, 내 손부리 성하미 할미 공이라. 께어 차고 다니며 은혜를 잊지 아니하리니 금낭(錦囊)을 지어 그 가온데 넣어 몸에 진혀 서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니 할미는 고두배사(叩頭拜謝)하고 제붕(諸朋)은 참안(慙顔)하야 물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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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연대 미상의 가전체(假傳體) 작품. 국문필사본. ‘규중칠우쟁공기(閨中七友爭功記)’라고도 한다. 2, 3종의 이본이 있으나,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소장된 망로각수기 忘老却愁記에 실려 있는 작품이 가장 상세하고 정확하다. 작자가 여자이고 조침문을 지은이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작품에 대해 의인화된 등장인물들이 다투는 모습을 당쟁과 연결지어 영·정조시대를 창작연대로 잡을 수 있다는 견해는 지나친 비약이다. 사용된 어휘나 표기법으로 미루어보아 철종조 이후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굽어야 좋은 재목감 장 유    

 이웃에 장씨(張氏) 성을 가진 자가 산다. 그가 집을 짓기 위하여 나무를 베려고 산에 갔는데, 우거진 숲속의 나무들을 다 둘러보아도 대부분 꼬부라지고 뒤틀려서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산꼭대기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발견하였는데, 정면에서 바라보나 좌우에서 바라보나 분명히 곧았다. 쓸 만한 재목이다 싶어 도끼를 들고 다가가 뒤쪽에서 바라보니, 형편없이 굽은 나무였다. 이에 도끼를 버리고 탄식하였다.

 ", 재목으로 쓸 나무는 보면 쉽게 드러나고, 가름하기도 쉬운 법이다. 그런데 이 나무를 내가 세 번이나 바라보고서도 재목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겉으로 후덕해 보이고 인정 깊은 사람일 경우 어떻게 그 본심을 알 수 있겠는가.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고 얼굴을 보면 선량해 보이고 세세한 행동까지도 신중히 하므로 우선은 군자(君子)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막상 큰일을 당하거나 중대한 일에 임하게 되면 그의 본색이 드러나고 만다.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도 따지고 보면 언제나 이러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나무가 자랄 때 짐승들에게 짓밟히거나 도끼 따위로 해침을 받은 일도 없이 오로지 이슬의 덕택에 날로 무성하게 자랐으니, 마땅히 굽은 데 없이 곧아야 할 텐데 꼬부라지고 뒤틀려서 이다지도 쓸모없는 재목이 되고 말았다. 황차 요즘 같은 세상살이에 있어서랴.

 물욕(物慾)이 진실을 어지럽히고 이해(利害)가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천성을 굽히고 당초에 먹은 마음에서 떠나고 마는 자가 헤아릴 수 없으니, 속이는 자가 많고 정직한 자가 적은 것을 괴이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이 생각을 내게 전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대는 정말 잘 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도 할 말이 있다. 서경(書經)홍범(洪範)편에 오행(五行)을 논하면서, 나무를 곡()과 직()으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나무가 굽은 것은 재목감은 안 될지 몰라도 나무의 천성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공자는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자는 요행히 죽음만 모면해 가는 것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요행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이 세상에서 굽은 나무는 아무리 서투른 목수일지라도 가져다 쓰지 않는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도 버림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대는 큰 집의 구조를 살펴보라. 들보와 기둥, 서까래와 각목이 수없이 많이 얽혀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굽은 재목은 보지 못할 것이다. 반면 조정 대신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과 경()과 대부(大夫) 그리고 사()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낭묘(廊廟)에 드나드는데, 그중 정직한 도리를 간직하고 있는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보면 굽은 나무는 항상 불행을 겪고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자가 항상 행운을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말에 '곧기가 현()과 같은 자는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굽기가 구()와 같은 자는 공후(公侯)에 봉해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굽은 나무보다 많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 시문집 계곡집4 설조(說條)에서  원제<曲木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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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유 (15871638)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충(文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광해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이후 문형(文衡) 등의 중임을 역임함. 한유(韓愈)구양수(歐陽脩)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문장 솜씨로 고문대책(高文大策)을 많이 지었으며, 청렴한 성품으로도 이름이 남. 저술로는 계곡만필(谿谷漫筆)」「계곡집(谿谷集)이 있다

 

마음을 지킴 정약용    

 수오제(守吾齋)는 나의 큰 형님<정약현>께서 당신이 사시는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인데 대해 이렇게 의심을 하였다.

"물건 중에 나와 굳게 맺어져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마음<>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으니, 지키지 않는다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상하다 그 이름이여!"

내가 장기()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조용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렴풋이 그 이름의 의문점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렇게 스스로 말하였다.

"대체적으로 천하의 물건은 모두 지킬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 나의 밭을 지고 도말갈 자가 있겠는가? 밭은 지킬 만한 것이 못된다. 내 집을 이고 달아날 자가 있겠는가? 집은 지킬 만한 것이 못된다. 나의 원림(園林)에 있는 꽃나무, 과일 나무 등 여러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겠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책을 훔쳐다가 없앨 수 있겠는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이 이 세상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그것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의복과 나의 식량을 도둑질해 가 나를 군색하게 할 수 있겠 는가? 지금 천하의 많은 실이 모두 나의 옷감이며, 천하의 곡식이 전부 나의 식량인데,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그 한 둘에 불과할 것이니 천하의 모든 옷감과 곡식을 모두 바닥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천하의 물건들은 지킬만한 것이 못된다.

유독 마음이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이 일정하지가 않다. 비록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데가 없다. 이익과 작록이 유혹하면 그리로 가고, 위엄과 재화가 위협하면 그리로 간다. 질탕한 상조(商調)나 경쾌한 우조(羽調)의 흥겹고 고운 소리를 들으면 그리로 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를 가진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 그리로 간다. 그리고 한번 가면 되돌아 올 줄을 몰라 붙잡아도 만류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끈으로 잡아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간직하여 마음을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 과거(科擧)가 좋다는 것을 알고, 그 쪽으로 가서 과거 공부에 푹 빠졌던 것이 10년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되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금포(錦袍)를 입고서, 대낮에 큰 길을 미친듯이 활보하였다. 그런 지 이제 12년이다. 이제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조령(鳥嶺)을 넘어 친척을 이별하고 선영 산소를 버려둔 채, 곧 바로 동해 바닷가의 대숲 곳에 달려 와서 머물러야 했다. 나는 그제서야 땀을 흘리며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허둥지둥 마음의 자취를 따라 함께 이 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마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 곳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온 것인가? 아니면 바닷귀신에게 불려 온 것인가? 자네의 집과 고향이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마음은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어딘가에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수 없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붙잡아 함께 머물렀다. 이 때에,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 : 정약전)께서도 역시 당신의 마음을 잃었다가, 그 마음을 쫓아 남해 지방으로 오셨는데, 또한 그 마음을 붙잡아서 함께 그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러나 유독 나의 큰 형님만은 당신의 마음을 잃지 않고, '수오재'에 편안히 단정하게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킴이 있어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 형님께서 당신의 집 이름을 그렇게 붙인 까닭인 것이다. 큰 형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란 자()를 지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나의 '태현' 을 지키려고 이것을 내 집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핑계대는 말씀이다. 맹자(孟子),

"지킴이 무엇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제일 크다." 하였으니, 진실하다 그 말씀이여!

-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3 ()에서, 원제는 [수오재기(守吾齋記)]

 

 

나나니벌과 배추벌레 신광한    

계미년(1523) 여름에 내가 어머니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낮, 날씨는 어두컴컴한데 앉았노라니 무엇인가가 뜰로 날아들었다. 모양은 벌과 같은데 조금 작고 욍윙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날아다녔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무 슨 벌레인지 얼른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두 다리로 진흙을 뭉쳐가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더니 또 다시 와서 그렇게 하기를 하루 종일 하는 것이었다. 이에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가서 저것이 무슨 벌레이며 뭉쳐간 진흙으로 무얼 하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하였다. 아이가 살펴보고 와서는 벽틈 사이에다가 그 진흙으로 집을 짓더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또 아이에게,

가서 그 벌레가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벌레로 변했는지 살펴보고 또 무슨 이유로 그전처럼 날아오지 않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하였더니, 아이가 가서 살펴보고 와서는,

그 벌레가 이제는 진흙을 나르지 아니하고 어디론가 날아가서 벌레를 한 마리 물어와서 집에다 넣어놓고는 웅웅 소리를 내며 날개를 비벼댔습니다. 그게 무슨 벌레인지 모르지 만 참 이상도 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그것은 바로 나나니벌이고 그가 물어온 벌레는 배추벌레다. 나나니벌은 다른 벌레를 자기와 유사하게 변화시킬 줄을 아는 벌레이다." 했더니 아이가,

그렇다면 변화하는 벌레가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내가,

그렇단다. 장자(莊子)도 거기에 대해 언급하였다마는 네가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겠다. 때에 따라 변화하는 벌레가 있는데 시경 에 나오는 8월의 여치, 9월의 베짱이, 10월의 메뚜기나 귀뚜라미가 바로 그런 것들이 다. 또 끊임없이 생성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벌레가 있다. 너도 누에치는 것을 보았겠지. 누에는 고치를 만들고 고치 속에서는 번데기가 생겨나고 번데기는 다시 나방이 되 며 나방이 교배한 후에는 알을 낳고 알에서는 다시 누에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른 벌레를 자신과 유사하게 변화 시킬 줄 아는 벌레는 오직 나나니벌뿐이란다." 하니, 아이가,

벌레는 벌레이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내가

좋은 질문이다. 공자(孔子)는 추() 나라 사람의 자식으로 성자(聖者)였고 안회(顔回) 는 안로(顔路)의 자식으로 현자(賢者)였다. 그런데 공자는 남의 자식인 안회로 하여금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자기와 유사하게 하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면서 사람을 변화시킨 일은 공자만이 할 수 있었다. 공 자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남에게 변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였다. - <기재집> 문집(文集) 1(한국문집총간 22)

 

신광한(申光漢) : 1484(성종15) - 1555(명종10). 중종조의 문신이다. 신숙주의 손자로 조부에게 수학하였다. 조광조 때에 신진사류로 등용되었다가 기묘사화 때 삭직, 이후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고 筆力이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기재집(企齋集)>과 소설 <기재기이(企齋記異)>를 남겼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정약용  

  위 아래로 5,000년이나 되는 시간 속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가로세로 3만 리나 되는 넓은 땅 위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도, 나이로 보면 젊음과 늙음의 차이가 있는데다가, 그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이면, 서로 만난다 해도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야 하니, 만나는 즐거움이 적을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서로 알지 못한 채 살다가 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더 많겠는가.

더구나 이 몇 가지 경우 외에도, 또 출세한 사람과 그렇지 못함에 있어서 차이가 나고, 취미나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면, 비록 동갑내기이고 사는 곳이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도, 서로 더불어 사귀거나 잔치를 해가며 재미있게 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모두 인생에서 친구로 사귀어 어울리는 범위가 좁아지는 까닭인데, 우리나라는 그 경우가 더 심하다 하겠다.

내가 일찍이 이숙(邇叔) 채홍원(蔡弘遠)과 더불어 시 모임을 결성하여 함께 어울려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자고 의논한 일이 있었다. 이숙이 나와 그대는 동갑이니,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그대가 모두 동의하는 사람을 골라 동인으로 삼도록 하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면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므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하고 또 앉아 있다가도 나이 많은 이가 들어오면 일어나야 하니, 너무 번거롭게 된다. 그래서 우리보다 네 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우리보다 네 살 적은 사람에서 끊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열다섯 사람을 골라냈는데, 이유수, 홍시재, 이석하, 이치훈, 이주석, 한치응, 유명원, 심규로, 윤지눌, 신성모, 한백원, 이중련과 우리 형제 정약전과 약용 및 채홍원이 바로 그 동인들이다.

이 열다섯 사람은 서로 비슷한 아니 또래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며, 태평한 시대에 벼슬하여 그 이름이 가지런히 신적(臣籍)에 올라 있고, 그 뜻하는 바나 취미가 서로 비슷한 무리들이다. 그러니 모임을 만들어 즐겁게 지내며 태평한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약속하기를,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왹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셔가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토록 하여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게 한다. 정기 모임 외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 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턱 내고, 승진한 사람도 한턱 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한턱 내도록 한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기록하고 그 제목을 붙이기를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 했다. 그리한 것은 그 모임이 대부분 우리집인 죽란사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번옹(樊翁)께서 이 일에 대하여 들으시고는 탄식하며. “훌륭하구나! 이 모임이여. 나는 젊었을 때 어찌하여 이런 모임을 만들지 못했던고? 이야말로 모두가 우리 성상께서 20년 내내 백성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고, 인재를 양성해 내신 결과로다. 한 번 모일 때마다 임금님의 은택을 노래하고 읊조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부질없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나 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숙이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기에 번옹이 경계해 주신 말씀을 함께 적어서 서문으로 삼는다.

 * 번옹-채홍원의 아버지 채제공의 호가 번암(樊巖)이므로 번옹이라 했다

 

落齒說(빠진 이를 아쉬워하며)                    김창흡

   숙종 44년 무술년은 내가 예순 여섯 살이 되던 해이다. 갑자기 앞니 하나가 빠져버렸다. 그러자 입술도 일그러지고 말도 새고 얼굴까지도 한쪽으로 삐뚤어진 것 같았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놀랍게도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나려했다. 그렇게 한 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림은 짚자리에 떨어지고 나서부터 늙은이가 되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절차를 밟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갓난아이로 죽으면 이도 나보지 못한 채 죽게 되고 예닐곱 살에 죽으면 젖니도 갈지 못한 채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여덟 살을 지나 육 칠십까지 살면 새 이가 난 뒤이고 다시 팔구십 살이 되면 이가 또 새로 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나이를 따져보니 거의 4분의 3을 산 셈이다. 영구치가 난 뒤로 벌써 환갑이 되었으니 너무 일찍 빠졌다고 하여 한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금년은 크게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니 그러한 정상을 생각해 보면 나처럼 이 빠진 귀신이 된 이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나는 일러한 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마음을 넉넉하게 먹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고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사람이 체력을 유지하고 기르는데는 음식 만한 것이 없는데 음식을 먹으려면 이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가 빠지고 나니 빠진 이 사이로 물이 새고 밥은 딱딱하여 잘 씹히지 않으며 간간이 고기라도 씹으려면 마치 독약을 마시는 사람처럼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책상 앞에 앉아도 빠진 이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나이 신세가 걱정된다. 그렇지 않아도 쇠약한 몸이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미의 배에 거북의 창자 꼴이 될 것이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그러니 먹고 마시는 일은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입에 올리지 못한 책이 수두룩하다. 이제부터라도 아침저녁으로 시골풍경을 바라보면서 책이나 흥얼거리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리하여 캄캄한 밤에 촛불로 길을 비추듯 인간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마음먹고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가 빠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깨진 종소리 같아서 빠르고 느림이 마디지지 못하고 말고 탁한 소리가 조화를 잃고 칠음(七音)의 높낮이도 분간할 수 없으며 팔풍(八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낭랑한 목소리를 내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끝내 소리가 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내 모양이 슬퍼서 책 읽는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더욱 게을러져 갔다.

 

  결국 인간의 근본을 찾으려 했던 최초의 마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것이 이가 빠지고 난 뒤에 나이 마음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다.

  나의 일생을 돌이켜볼 때 내가 비록 늙었다고는 하나 몸이 가볍고 건강하다는 것만은 자신했었다. 걸어서 산에 오르거나 종일토록 먼길을 말을 타고 달리거나 때로는 천리 길을 가도 다리가 아프다거나 등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내 또래들과 비교해 볼 때에 나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하며 자못 기분이 좋았다. 이미 노쇠한 것도 잊고 오히려 건강하다고 잘 못 생각하고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겁내지 않고 달려들어 처리했으며 신바람이 나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달려갔다가 반드시 녹초가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수습할 수 없게 되면 스스로 타이르기를 이 뒤에는 시골에 몸을 숨겨 다시는 문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먹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잃은 마치 버릇처럼 되어서 저녁이면 후회하면서도 아침이면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곤 했다. 이는 아마도 나이에 따라 분명히 체력의 한계가 있는데도 그 것을 모르고 겁 없이 살아온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얼굴이 일그러져 추한 모습으로 갑자기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모두들 놀라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내가 아무리 늘었음을 잠깐만이라도 잊으려 한다 해도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나는 노인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겠다.

 

  옛날 선인들의 예법에 사람이 예순 살이 되면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군대에 나가지 않으며 또 학문을 한다고 덤비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일찍이 <예기>를 읽었으나 이와 같은 예법에는 동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곤 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동안 내가 한 행동이 잘못 되었음을 크게 깨달았다. 앞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휴식을 찾아야 할까보다. 결국 빠진 이가 나에게 경고해준 바가 참으로 적지 않다 하겠다.

  옛날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도 눈이 어두워진 것이 계기가 되어 본심을 잃지 않고 타고난 착한 성품을 기르는데 전심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자 더 일찍 눈이 어두워지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이가 빠진 것도 또한 너무 늦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얼굴이 일그러졌으니 조용히 들어앉아 있어야 하고  말이 새니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고 고기를 씹기 어려우니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하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지 못하나 그냥 마음속으로나 읽어야 할 것 같다.

  조용히 들어앉아 있으면 정신이 안정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면 허물이 적을 것이며 부드러운 음식만 먹으면 오래 서는 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글을 읽으면 조용한 가운데 인생의 도를 터득할 수 잇을 터이니 그 손익을 따져본다면 그 이로움이 도리어 많지 않겠는가.

그러니 늙음을 잊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경망스런 사람이다. 그렇다고 늙음을 한탄하며 슬퍼하는 자는 속된 사람이다. 경망스럽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으려면 늙음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늙음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여유를 가지고 쉬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리하여 답답한 마음으로 세상을 조화롭게 살다가 아무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찍 죽는 것과 오래 사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길이며 근심을 떨쳐버리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노래를 짓는다.

이여, 이여!

그대 나이 얼마인가.

60년이 돌아오니

온갖 음식 갖추어 맛보았지.

공을 이루면 물러나고

보답이 극진하면 사양하는 법

나는 나의 빠진 이를 보고

세상의 조화를 깨달았지.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도

떨어지면 한낱 볼품없는 돌

여름내 무성한 나뭇잎도

서리 내리면 떨어지는 법.

이 것은 절로 그리 되는 일

딱하다 애처롭다 할 것 없다네

나는 조용히 자취를 감춘 채

침묵 속에 내 마음을 지키려 하네.

편안한 잠자리 하나면

온갖 인연이 부질없는 일

배를 채우는데는 고기가 필요 없고

얼굴은 동안이 아니어도 상관없네.

정신이 깨어있는 이여!

그대는 오직 이 이의 주인이로세.             

 : 동양음악의 국() () () () ()의 다섯 음에 반상(半商) 반치(半緻)를 더한 일곱 음.

여덟 가지의 악기 곧 금() () () () () () () ()을 팔음(八音)이라 하는데 이 팔음을 팔풍(八風)이라 한 듯 하다.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본관은 안동(安東).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의 아우이다. 15살 때 이단상(李端相)에게 배우고, 1673(현종 14)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사양하고 유불도 삼가(三家)에 심취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김창협과 함께 형제가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된 형 창집의 일로 지병이 도져 이듬해 석교(石郊) 촌사(村舍)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삼연집(三淵集)》《심양일기(瀋陽日記)》《문취(文趣)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 화악산(華岳山) 북쪽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란 터를 마련하고 한 세상을 보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의 시문이 곡운구곡도(谷雲九谷圖)에도 남아있다.

 

나의 삶, 나의 길 정약용    

경신년(39, 1800) 봄에 나는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 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께서 들으시고 내각을 시켜 급히 나를 부르신다 하기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승지를 통해 유시해 주시기를 "규영부는 이제 춘방(春坊)이 되니 처소를 정하기를 기다려 들어와 교서(校書)의 일을 하게 하라. 내가 어찌 그를 놓아두겠느냐"라고 하셨다 한다.

여름 612일 마침내 달밤이어서 한가하게 앉아 있었더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들어오도록 하니 내각의 아전이었다. 한서선(漢書選)10질을 가져왔는데 하는 말이, 임금께서 유시하시기를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鑄字所)를 새로 벽을 발랐으니 그믐께쯤 경연에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하니, 위로의 말씀이 대단하셨다. "이 책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을 삼도록 하고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셨다 한다. 아전이 말하기를, 유시를 내리실 때 얼굴빛이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듯하셨고 말씀도 온화하고 부드러워 다른 때와는 달랐다고 하였다.

아전이 나가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동요되어 어찌할 줄 몰라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탈이 났고 28일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밤에 하인을 보내 책을 하사해 주시고 안부를 물어주신 것이 끝내는 영결의 말씀이었고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곤 한다. 임금이 승하하신 날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가슴을 쥐어뜯고 목놓아 울었었다. 임금의()이 빈전(殯殿)으로 옮겨지는 날에는 숙장문(肅章門)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함께 슬픔을 이야기하였다. * 정약용의 나의 삶, 나의 길에서 한 부분을 옮겨왔습니다.

 

 

서교(西敎) 유몽인  

이 글은 어우야담(東洋古典國譯叢書30 : 傳統文化硏究會 發行)에 있는 이야기다. 카톨릭에 대해 쓴 글인데 당시의 시대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라서 소개한다.

   천축(天竺)의 서쪽에 나라가 있어 구라파(歐羅巴)라 하는데 '구라파'란 그 지역 말로는 '큰 서쪽'이란 뜻이다.   그 나라에 한 도()가 있어서 '기례달(伎禮達)이라고 하는데 그 지역 말로는 '하늘을 섬긴다'는 뜻이다. 그 도는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며 선교도 아닌 별도로 한 갈래를 세운 것이다. 무릇 마음을 먹고 일을 행할 때에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각 천존(天尊)의 상을 그려서 봉안하고 섬기며 부처와 노자(老子)와 우리 교()를 배척하여 원수처럼 여긴다. 우리의 도에 대해서 기술한 바가 많지만큰 근본에서는 현격히 다르다. 불교에 대해서는 윤회설을 깊이 배척하지만 천당과 지옥은 있다고 말한다. 그 풍속에는 혼인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으며 평생동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를 가리어 군장(君長)으로 삼고 '교화황(敎化皇:敎皇)이라고 부르며 천주(天主)를 계송하여 가르침을 반포하는데 대대로 세습하여 계승하지 않고 현인(賢人)을 가려 세운다. 사사로운 집이 없고 오직 공무(公務)만 보며 또 아들이 없고 오직 백성을 아들로 삼는다.

  그들의 글씨는 대략 회교권(回敎圈)과 같은데 왼쪽에서부터 쓰며 글자는 횡서(橫書)로 행을 이룬다. 그 선비는 친구와의 사귐을 중하게 여기고 천문과 별의 현상에 아주 정통하다.

  만력 중에 마태오리치(利瑪寶)라는 사람이 구라파에서 태어나서 팔 만리를 두루 다니다가 남마카오(南澳)에 머물렀다. 10여 년간 천금(千金)을 모았는데 모두 버리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여러 서적과 성현의 글을 두루 보고 계묘년(1603)에 상하권 8편의 책을 저술했는데 첫 편에는 천주가 시초에 천지를 만들어 주재하여 편안히 기르는 도를 논하였고 제2편에는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잘 못 알고 있음을 논하였고 제3편에는 사람의 혼은 멸하지 않아서 금수(禽獸)와 크게 다름을 논하였다. 4편에는 귀신과 인간의 혼백이 천하의 만물과 일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논하였고 제5편에는 육도(六道)를 윤회한다는 잘못된 설을 논하였고 제6편에는 뜻이 멸할 수 없다는 것을 풀이하고 그리고 천당과 지옥과 선악의 업보를 풀이했다. 7편에는 인성은 본래 선하고 천주는 바른 학문임을 논했으며 제8편에는 서양풍속을 모두 열거하고 그 전도하는 선비가 혼인하지 않는 뜻을 논하고 아울러 천주가 서쪽 땅에 내려와 탄생하여 머무른 것에 대해 풀이해 제목<천주실의(天主實義>라고 했는데 '천주(天主)'는 상제(上帝)를 말하고 '()'은 비지 않음을 말하는데 노자와 불교의 '()''()'를 배척한 것이다. 그 마지막 편에는 한()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B,C 1)이라 동지(冬至)3일이라 적혀있다.

  그 나라에 내려온 동정녀(童貞女)는 혼인하지 않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야소(耶蘇:예수)'라고 했다. '야소'라는 말을 세상을 구한다는 뜻인데 몸소 종교를 세웠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르러 서역에 신인(神人)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구했다. 사신이 길을 절반도 못 가서 독국(毒國)으로부터 불교를 얻어 돌아와 유교를 그르치게 되었다.

  마태오리치는 이인(異人)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 나서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세계지도)를 그려서 각각 그 지역의 말로 여러 나라에 이름을 붙였다. 중국은 천하의 가운데 있으며 구라파는 중국의 4분의 1보다 크다. 그 남방은 몹시 더워서 다만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종교가 이미 전파되어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들이 자못 존중하고 믿었다.

  일본은 예로부터 불교를 숭상하고 섬겼는데 기례달교(伎禮達敎)가 일본에 들어오자 부처를 배척하고 요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부처를 믿는 자를 용납하지 않아서 침을 뱉어 진흙이나 찌꺼기 같이 여겼다. 지난 날 일본장수 평행장(平行長)은 이 도를 존중하였다고 하는데 오직 우리 나라에만 알려지지 않았다. 허균(許均)이 중국에 이르러 그 지도와 찬송가 12장을 얻어왔다.

  그 말에 이치가 많으나 천당과 지옥이 있다 말하고,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을 옳게 여기니 어찌 못된 도리를 끼고서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죄를 면할 수 있으랴.

                           ()

한 도() : 서양의 가르침(西敎)으로 카톨릭을 말한다.

우리 교() : 유교를 말한다.

우리의많지만 : 카톨릭이 유교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에 대한 기술이다.

남오(南澳) : 중국 광동성이 있는 섬 이름.

제목 : 원문 ''''이라야 한다.

신인(神人) : 불교의 부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독국(毒國) :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 이름.

유몽인(柳夢寅)

  앞서 소개한 자료가 있어서 생략한다. 그가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1622)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야담집으로 전대(前代)의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야담문학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나, 빼어난 문학성을 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국문학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하여 당대 현실을 비판 풍자하여 임진왜란 이후의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개방적 적극적으로 현실의 변모에 대응하고자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충의(忠義) 유몽인  

어우야담을 한 편만 더 소개한다. 1권에 있는 충의편이다.

  김시습(金時習)은 다섯 살에 글을 잘 읽었다. 장헌대왕(莊憲大王)은 대내(對內:대궐 안)에 데려다 만나보려 하였으나 세간의 이목을 놀라게 할까 두려워  <승정원에 불러 시험하게 했는데>삼각산을 글제로 주니 김시습이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삼각산 높은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니

  그 위에 올라 북두성 견우성도 잡을 수 있겠네.

  바위굴은 비와 구름만 만들 것이 아니라

  왕조를 영원히 평안토록 할지어다.

  대왕이 그를 기특히 여기기는 했어도 시에는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 기색을 하였다. 대왕은 백 필의 비단을 상으로 주면서 그 것을 스스로 날라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김시습은 백 필을 모두 펼쳐 처음과 끝 부분을 서로 묶었다. 그리고 한 쪽 끝을 허리에 묶고는 절하여 하직한 다음 나가니 백 필이 전부 그 몸을 따라 나왔다. 대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겼다.

  그 후 혜장대왕(惠莊大王:世祖)이 즉위하자 드디어 항의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뜻을 가졌다.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그냥 두고 시를 지었다.

  머리를 깎아 속세에서 도망가나

  수염은 그냥 두어 장부임을 나타내네.

  대개 옛날의 고승들 중에는 삭발만 하고 수염은 그냥 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잘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호를 오세(五歲)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말로 <오만하다는 뜻의> '오세(傲世)'와 음이 같았다.

  김시습은 성품이 경박하고 예리하여 남을 용납하는 아량이 없었다. 당시 이 세상에서 화난을 면하기 어려웠으므로 자취를 승려에 의탁하여 세상을 조롱하였다. 슬려들은 대부분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시장 골목과 같았으나 김시습은 이를 몹시 싫어하였다.

  일찍이 그가 춘천의 사탄초암(史呑草菴)에 있었을 때 한 슬려가 김시습을 흠모하여 백 리 밖에서 방문하였다. 김시습은 아주 정성스럽게 그를 대접하였다. 음식을 차려 창 밖 계단에 앉아 먹게 하고 자기는 창위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발로 흙먼지를 돋우어 밥에 들어가게 하였다. 승려는

 "우리 스님께서 무슨 장안을 하시나?"

  하면서 흙먼지를 걷어내고 먹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 네 번 그치지 않자승려는 화가 나서 먹지를 않고 가버렸다. 또 한 번은 달밤에 삼각산 승가사(僧伽寺)의 북쪽 바위에 올라가 승려를 불렀다. 승려가

 "이 건 오세의 목소리구나."

   하고 신을 거꾸로 신을만큼 급히 달려가 보니 김시습이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나서 잠시 잇다가 김시습이 소매에서 죽은물고기 한 마리를 꺼내어 승려에게 권하였다. 승려가 물리치는데도 김시습이 극구 권하자 승려는 화를 내며 가버렸다.

  또 서울 원각사(圓覺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가 잇다는 소문이 나고 소문을 들은 승려들이 전국에서 만 명쯤 몰려들었다. 김시습도 거기에 참여하러 갔다. 가사를 입고 도량에 들어갔는데잠시 후 변소에 빠졌다. 그리고는 삶은 닭다리를 손에 들고 뜯어먹었다. 승려들은 크게 놀라 그를 쫓아냈다. 그의 하는 짓이 이렇게 어긋나 있었다.   김시습의 속마음은 자신과 친해지려는 세상 사람들을 싫어함므로써 해를 멀리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불교가 좌도(左道)를 숭상하는 것을 격멸함으로써 의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김시습이 비록 세상을 잊고 홀로 떠나갔으나 인간사에 뜻이 없었던가. 그가 지은 <매월당집(每月堂集>은 모두 직접 쓴 것이다. 상국(相國) 기자헌(寄自獻)의 처소에 있는데 필적이 매우 고풍스러웠다. 소재(蘇滓) 노수신(盧守愼)  이를 흠모하여 임서(臨書)한 사람이 있었다. 이를 보건대 역시 죽은 다음의 명성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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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 1435(세종17)-1493(성종24) 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每月堂) 동봉(洞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 1455(세조1)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 길을 떠났다. 148147세에 환속하였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장헌대왕(莊憲大王) : 세종(世宗). 원문(原文) '恭定大王'은 잘못된 것임.

세간의두려워 : 이에 대하여 매월당집(每月堂集)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장헌대왕이 듣고 승정원에 불려 서로 시험하니 과연 민첩하고 아름다웠다. 하교하기를 내가 직접 만나려 하나 세속의 소문을 놀라게 할까 두렵다. 더욱 그 집에서 노력하고 은밀히 교육시켜 기르라. 그 학문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크게 등용하리라'하여 세종이 승정원에 시험 보게 했고 직접 만나보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죽은 : 원문' '낙선재본'(마르다)'로 되어 있다.

원각사(圓覺寺)조선 세조(世祖) 때 서울의 탑골공원에 세운 절. 세조11(1465)에 완공되었는데 그 부근의 인가 200여호를 헐고 청기와를 8만장이나 쓴 법당을 지었으며 5만근이나 되는 구리 종을 달고 미슬적 가치가 높은 사리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탑만 남아있다

무차대회(無遮大會): 귀천이나 상하의 구별 없이 일체 평등으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행하는 대법회

들어갔는데 : 원문''''이어야 한다.           

좌도(左道) : 유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모든 사교(邪敎)

기자헌(寄自獻) : 1562(명종17)-1624(선조2) 자는 헌지(獻之), 선조15년 식년(式年)생원시(生員試)2등으로 합격하고 진사시(進士試)에는 1등으로 합격하였다.

노수신(盧守愼) : 1515(중종10)-1590(선조2). 자는 과회(寡悔), 소재(蘇齋)는 그의 호. 1543년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영의정을 지냈다.

임서(臨書) : 글을 베껴 씀.

 

 

고양이(原題 : 烏圓子賦)*서거정

  정유년 하지 날 저녁이었다.

  비바람은 몰아쳐 사방은 어두워 칠흑 같은데 나는 심화병을 앓아 자리에 누웠으나 편치 않아서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병풍과 휘장 사이에서 간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 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쓰는 병풍 옆 어리 속에 병아리들이 있기에 걱정이 되어 아이를 불렀으나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늙은 고양이란 놈이 사람이 잠든 틈을 타서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어금니를 갈고 주둥이를 벌름거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갑지기 지팡이를 들고 성을 내며 고양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해서이지 다른 것에 해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지금 너의 직분을 잊고 도리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니 마땅히 내가 너를 쳐서 없애버리고 말 것이다. 너를 아껴 무엇하겠는가?"  

   그 때 갑자기 내 정강이를 스치며 지나가는 놈들이 있었는데 두 마리 가운데 앞선 놈은 작고 뒤를 쫓는 놈은 컸다. 고양이가 쥐를 쫓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를 차서 깨워 촛불로 비춰보니 쥐는 이미 잡혀 죽었고 고양이는 제 자리에 가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 그 직책을 다했건만 나는 그런 고양이를 의심했으니 자칫 큰일날 뻔했던 것이다.

  생각하면 쥐란 놈은 동물가운데서도 제일 천한 것으로 털은 짧아 쓸모가 없고 고기는 더러워 제사상에도 올릴 수 없고 뾰족한 수염에 사나운 눈 대체 누가 저란 것을 창조했는지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는 모양만 봐도 한심하다. 똥 속에서 살다시피 하고 땅속에 굴을 파니 누가 그 놈의 굴을 빼앗고자 하겠는가. 담 밑으로만 돌아다니는 간사함이며 사직단은 사람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의지해서 굴을 파고 사는 그 간교함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작은 배를 채우기가 어렵지도 않으련만 욕심은 어찌 골짜기처럼 깊으며 주둥이가 긴 것도 아닌데 어찌해서 창보다 날카로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엿보기를 잘하여 낮에는 숨고 밤이면 나와 활동하면서 나의 상자를 뚫고 나의 항아리와 동이에 든 것을 좌다 휘저어 놓으니 나의 옷인들 온전할 수 있으며 나의 양식인들 남아날 수가 있겠는가.

   누가 네가 기진 썩은 고기를 빼앗을까봐 성을 내며 누가 너의 간을 삶겠는가. 무엇이든 던져서 너를 잡으려고 하다가도 옆에 있는 그릇을 깰까봐 못하고 연기를 피워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아는구나. 그래서 <시경>에는 포악한 정치를 하는 자를 너에게 비유했고 <춘춘>에는 쥐가 일으키는 재변에 대해 상세히도 적어놓았구나

  이제 고양이가 너를 없애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겠는가. 내가 일찍이 <예기>를 읽으니 고양이를 잘 대접했는데 그 것은 농사를 잘 되게 하여 백성들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양이를 가르는 까닭도 역시 그 때문이다.

  나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나의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주니 고양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것에 감격해 기운을 뽐내고 용기를 떨치며 재주와 기술을 발휘한다. "야옹"하는 그 소리 무섭게 노려보는 그 시선. 번개 치듯 달려가고 바람 불듯 빠른 동작. 쥐란 놈들 엎드리길 사람같이 하네. 산 놈은 쥐를 움켜쥐고 달아나는 놈은 발로 차면서 앞을 가로막는가 하면 바싹 쫓아서 핍박하면서 눈알을 뽑기도 하고 모가지를 자르기도 하고 낭자하게 살을 찢고 간과 골을 땅에 바르며 소굴을 소탕하여 씨까지 말리는구나.

  이러니 한나라 반초(班超)처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후에 봉하거나 날마다 벼슬아치처럼 융숭하게 대접해도 그 공을 보상하고 그 덕을 갚지 못하겠거늘 왜 내가 의심해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던가. 하마터면 너는 성실했기 때문에 도리어 해를 당할 뻔했고 나는 의심했기 때문에 너를 죽일 뻔했구나. 내가 비록 병아리에게는 인자했으나 네게는 인자하지 못해 쥐의 원수를 갚아줄 뻔했구나.

  , 천하의 사리가 무궁하고 사람의 태도 가 또한 한결같지 않아서 의심하지 않을 것은 의심하고 정직 의심할 것은 의심하지 않으니 의심하는 것과 의심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처음에는 터럭만 하지만 나중에는 천 리만큼이나 되니 이치를 따져서 헤아리지 않고 기분으로 헤아리고 사실을 가지고 따지지 않고 비슷한 점만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아리와 쥐 때문에 고양이에게 의심을 품게 되고 말았구나.

  아이 놈을 불러 모드 받아쓰게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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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을 제사하는 제단

중국 후한의 정치가. 명제 화제를 섬기고 서역을 정벌하여 후한의 세력권을 파미르고원 동서에까지 확장시켰다.

*서거정(徐巨正, 1420-1488)

호는 사가정(四街亭), 세종2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섯 임금아래서 병조 등 육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거치면서 45년간 관직에 있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동국여지승람><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대 시문을 망라한 <동문선>의 편찬은 문학사상 큰의의를 지닌다.

 

 

박연과 피리(原題 : 傭齋叢話에서)   

대제학 박연은 영동의 선비였다.

  향교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이웃에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이 있었다. 박연은 공부를 하는 틈틈이 그 사람에게서 피리를 배웠다. 얼마 후에 그는 그 고을에서 피리를 제일 잘 부는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장악원에 있는 피리를 잘 부는 광대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피리를 제대로 불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 광대에게 한 번 봐주기를 부탁했다. 그러자 광대가 그의 피리 소리를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에도 맞지 않으며 나쁜 버릇이 이미 몸에 배어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

이에 박연이 말했다.

 "비록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배우러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뒤에 그 광대가 그의 피리소리를 듣고 말했다.

  "이제 먼저 배운 선배라도 가르칠 만합니다."  또 며칠이 지나서 말했다.

  "이미 법도가 이루어 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이 있습니다."

  또 며칠이 지나자 광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제 따라갈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 후에 그는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거문고와 비파 등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어느 것 하나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세종대왕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아 관습도감 제조로서 음악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석경을 만들고는 박연을 불러 교정하게 했는데 박연이 어는 음률 일분(一分)이 높고 어느 음률 1분이 낮다고 했다. 다시 보니 그가 높다고 말한 것에는 돌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종대왕이 그 것을 떼어내게 했다. 도 음률이 일 낮다고 한 것에는 다시 돌 찌꺼기 1분을 붙이게 했다. 박연이 다시 피리소리를 들어보고는 "이제 음률이 바릅니다."라고 했다. 모두 그의 음률에 대한 신묘한 감각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계유의 난에 연루되자 그도 파면되어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친한 벗들이 한강에서 전별하였는데 그는 말 한 필에 하인 한 사람뿐인 쓸쓸한 행색이었다. 함께 술잔을 주고받다가 이제 소매를 잡고 헤어지려는 무련에 그는 전대에서 피리를 꺼냇다. 그리고 연달아 세 곡을 불고는 떠났다. 듣는 사람이 모두 쓸쓸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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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 조선시대 음률(音律)을 맡아보던 관청

계유의 난 : 계유정란. 조선 단종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이 여러 고명대신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난

*성현(成俔,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 학자.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傭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본관은 창녕(昌寧). 1462(세조 8) 식년문과에, 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1468년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과 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형 임()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다녀와 기행시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과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8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접대연에서 시를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시켰다.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고 1493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한 달 만에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또한 고려가사 중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등의 표현이 노골적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이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뒤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공조판서가 된 다음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용재총화를 지었다. 죽은 뒤 수개월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로 추앙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등이 있다

 

규정기(葵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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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의주로 귀양간 이듬해 여름이었다. 세든 집이 낮고 좁아서 덥고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소밭에서 좀 높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골라 서까래 몇 개로 정자를 얽고 따로 지붕을 덮어놓으니 대여섯 사람은 앉을 만했다. 옆집과 나란히 붙어서 몇 자도 떨어지지 않았다. 채소밭이라고 해야 폭이 겨우 여덟 발인데 단지 해바라기 수 십 포기가 푸른 줄기에 부드러운 잎을 훈풍에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 걸 보고 이름을 규정(葵亭)이라고 했다손님가운데 나에게 묻는 이가 있었다.

  "저 해바라기는 식물 가운데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 풀이나 나무 또는 꽃 가운데서 어떤 이는 그 특별한 풍치를 높이 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향기를 높이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난이나 혜초로 자기가 사는 집의 이름을 지었지 이처럼 하찮은 식물로 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당신은 해바라기에서 무엇을 높이 산 것입니까? 이에 대한 말씀이 있으십니까?"

  내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물이 한결같지 않은 것은 그리 타고나서 그런 것입니다. 귀하고 천하고 가볍고 무겁고 하여 만의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식물가운데 연약하고 보잘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더럽고 변변치 못하여 이보다 못한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난초 혜초는 식물 가운데 굳고도 세어서 특별한 풍치가 있거나 향기를 지난 것들입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무리에서 뛰어나며 세상에 우뚝 홀로 서서 명성과 덕망이 우뚝 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황량하고 머나먼 적막한 바닷가로 쫓겨나서 사람들은 천히 여겨 사람대접을 하지 않고 식물도 나를 서먹하게 내치는 형편입니다. 내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나의 정자 이름을 짓는다해도 또한 그 식물들이 수치가 되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천한 식물로 짝하고 먼데서 찾지 않고 가까운데서 취했으니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천하에 버릴 물건도 없고 버릴 재주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저귀나 샅바귀 무나 배추 같은 하찮은 것들도 옛사람들은 모두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해바라기는 두 가지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능히 해를 향하여 그 빛을 따라 기울어집니다. 그러니 이것을 충성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또 분수를 지킬 줄 아니 그 것을 지혜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대개 충성과 지혜는 남의 신하된 자가 갖추어야 할 정조이니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 자기의 정성을 다하고 지혜로써 사물을 분별하여 시비를 가리는 데 잘못됨이 없는 것. 이것은 군자도 어렵게 여기는 바이지만 내가 옛날부터 흠모해 오던 덕목입니다.

  이런 두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연약한 뭇 풀들에 섞여 있다고 해서 그것을 천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말하면 유독 소나무나 대나무나 매화나 국화나 난이나 혜초만이 귀한 것이 아님을 살필 수 있습니다지금 내가 비록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자고 먹고 하는 것이 임금님의 은혜가 아님이 없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한 술 뜨고 나서 심휴뮨(沈休文)이나 사마군실(史馬君實)의 시를 읊을 때마다 해를 향하는 마음을 스스로 그칠 수가 없었으니 해바라기로 나의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이 어찌 아무런 근거도 없다 하겠습니까?"  손님이 말했다.

  "나는 하나는 알고 둘은 알지 못했는데. 그대 정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더할 것이 없어졌소이다."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으면서 가버렸다기미년 유월 상순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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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休文 : 중국 양나라 무강 사람. 이름은 약(). 자는 휴문(休文). 박학하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음은 학의 태두로서 사성(四聲)연구의 개조이기도하다.

史馬君實 :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정치가. 이름은 광(). 자는 군실(君實).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자치통감(自治通鑑)을 편찬했다.

 * 조위(曺偉 : 1454 - 1503)

조선 전기 문인. 창녕 사람. 호는 매계(梅溪). 1474(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檢閱)이 되고 76년부터 사가독서한 뒤 79년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이 됨. 성종 때(1481) 유윤겸과 함께 초간본 <두시언해> 간행에 참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실록> 편찬할 때 함께 일한 김일손이 그들의 스승인 김종직의 <弔義帝文(조의제문)> 을 수록, 결국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순천에서 죽음.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의주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의주에 장류(杖流)되어 순천에서 죽었다. 유배가사인 <만분가>가 전해옴.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제향. 문집에 매계집(梅溪集),글씨로는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음

 

아비 도둑과 아들 도둑 이야기(原題 : 盜子說)   강 희 맹

   이 글은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훈자오설(訓子五說)>에 있는 글이다.

  옛날 어떤 도둑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기의 기술을 모두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 아들은 자기 재주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할 만큼 되었다. 훔치러 들어갈 때면 늘 아버지보다 앞서 들어갔고 나올 때는 아버지보다 나중에 나왔으며, 보잘것없는 것은 버리고 무겁고 값진 것만 가지고 나왔다. 게다가 귀는 멀리서 나는 작은 소리도 잘 들을 수가 있었고, 눈은 어둠 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다.

  마침내는 여러 도둑들이 그를 칭찬하자 아들 도둑은 슬그머니 자만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저의 기술은 아버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힘은 아버지보다 더 세니, 이런 실력이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아들이 대들었다.

도둑질에도 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재물을 많이 훔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훔친 것이 언제나 아버지가 훔친 것의 배나 됩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젊습니다. 훗날 아버지 연세가 되면 틀림없이 놀라운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멀었다. 내가 가르친 기술로는 경비가 삼엄한 성안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고, 숨겨둔 보물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 번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영락없이 낭패를 당하고 말 것이다. 궁지에 몰리더라도 임기웅변으로 그것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멀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수긍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다음날 밤 아들을 데리고 어떤 부잣집으로 가서 아들에게 곳간에 들어가도록 했다. 아들이 보물을 보고 정신없이 그것들을 챙기고 있을 때 아비 도둑이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가버렸다. 그리고는 일부러 자물쇠 잠그는 소리를 내서 주인에게 들리게 했다. 주인은 도둑이 든 줄을 알고 쫓아 나와 살펴보았으나,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곳간 속에 갇힌 아들은 빠져 나올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손톱으로 박박 긁으며 소리를 냈다. 안으로 들어갔던 주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곳간 속에 쥐가 든 게 틀림없다. 가만 두었다가는 물건을 결단낼 터이니 쫓아버려야겠구나.”

  주인은 등불을 밝히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막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를 기다렸던 아들은

잽싸게 빠져 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인이 놀라 소리치자 가족들이 모두 나와 함께 도둑을 쫓았다. 다급해진 아들은 연못을 끼고 달리다가 연못 속에 커다란 돌을 던졌다. 그러자 쫓아오던 사람들이 도둑이 연못 속으로 뛰어든 줄 알고 모두 연못을 에워싸고 도둑을 찾았다. 그 틈에 아들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원망했다.

 “새나 짐승도 제 세끼를 돌볼 줄 아는데, 아버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셨습니까?”

 이 말을 들은 아비가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세상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도둑이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술이라는 것은 대게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스스로 터득한 지혜는 그렇지 않아, 그 응용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여 막막하게 되면 도리어 그 어려움이 그 사람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그의 어진 마음도 더 완숙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곤경에 처하게 한 까닭은 너를 장차 안전하게 하고자 해서이며, 내가 너를 함정에 빠지게 한 것은 너를 장차 위험에서 건지고자 해서이다. 만약 네가 곳간에 갇히지 않고 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쥐 소리를 낼 생각을 했겠으며, 돌을 연못에 던지는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겠느냐? 궁지에 몰리자 지혜를 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혜의 샘이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다시 곤궁에 처하게 되어도 혼미해지지 않을 것이니, 이제 너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독보적인 도둑이 될 것이다.”

  후에 아들은 정말 세상에서 겨룰 사람이 없는 도둑이 되었다.

  도둑질이란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약한 기술이지만 그것도 스스로 터득함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군자가 도덕과 공명에 뜻을 두는 일에 있어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고관 대작의 후손들은 인의(仁義)의 아름다움과 학문의 이로움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입신 출세한 것만 믿고 옛 조상들의 업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니, 아들 도둑이 아비 도둑을 우습게 여겨 자만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에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낮은 지위를 취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담박한 사람을 가까이하며,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학문에 뜻을 두며, 인성과 천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여 세속적인 가치에 동요하지 않는다면 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고 공명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임금이 인정하여 높이 써 주면 뜻을 펴서 행할 것이고, 물리치면 물러나 자신을 지킨다면, 천리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들 도둑이 궁지에 몰이자 지혜를 짜내서 마침내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아들아네 처지 이와 비슷하니, 곳간에 갇히고 쫓기는 것과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 가운데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소홀히 생각하지 말라.

강희맹(姜希孟. 14441504)

호는 사숙재(私淑齋). 조선 후기의 학자. 저서로촌담해이사숙재집등이 있다

 

늙은 쥐의 꾀(原題 : 效嚬雜記)   고 상 안

  옛날에 음식을 훔쳐먹는 데 귀신이 다된 쥐가 있었다. 그러나 늙으면서부터 차츰 눈이 침침해지고 힘이 부쳐서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무엇을 훔쳐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젊은 쥐들이 찾아와서 그에게서 훔치는 기술을 배워 그 기술로 훔친 음식물을 나누어 늙은 쥐를 먹여 살렸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쥐들이 말했다.  "이제는 저 늙은 쥐의 기술도 바닥이 나서 우리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리고는 그 뒤로 다시는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았다늙은 쥐는 몹시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솥 속에 넣은 다음 무거운 돌로 뚜껑을 눌러놓고 밖으로 나갔다. 쥐들은 그 음식을 훔쳐먹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 쥐가 말했다.  "늙은 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그게 좋겠다"고 하고는 함께 가서 묘안이 없겠느냐고 물었다늙은 쥐는 화를 발끈 내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서 기술을 배워서 항상 배불리 먹고살면서도 지금까지 나를 본체만체했으니 괘씸해서라도 말해 줄 수 없다. ”

  쥐들은 모두 절하며 사죄하고 간청했다. “저희들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잘 모실 테니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늙은 쥐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일러주마. 솥에 발이 세 개 있지? 그 중 하나가 얹혀 있는 곳을 모두 힘을 합쳐서 파내거라. 몇 치 파 내려가지 않아 솥은 자연히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그러면 솥뚜껑은 저절로 벗겨질 것이다.”

  쥐들이 달려가서 파 내려가자 과연 늙은 쥐의 말대로 되었다. 쥐들은 배불리 먹고 돌아오면서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늙은 쥐를 대접했다.

  , 쥐와 같은 미물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있어 서겠는가! 이신의 계책이 노장 왕전의 심사숙고함에 미치지 못했고무현의 지모가 충국만 못했으니,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사리 판단이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다만 전쟁터에서 병사를 부리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도 젊은이가 어른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나라 목공이 "어른에게 자문을 구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가 되어 가는 꼴을 보면 국권은 경험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맡기고 늙은이들은 수수방관하며 입을 꼭 다문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다 요긴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도리어 견책이나 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을 앞에 말한 쥐의 일과 견주어 보면, 사람이 하는 짓이 쥐가 하는 짓보다 못하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 1) 진나라의 젊은 장수 이신이 용기만 믿고 60만 대군을 요청한 왕전을 겁쟁이라고 비웃으며, 20만 군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했다가 패한 고사가 있다.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호는 태촌(泰村). 조선 선조 9년 문과에 급제하여 함창 현감을 지냈다. 저수지 둑을 쌓아 함창과 상주 농민들에게 크게 혜택을 주었으며 농민들은 그 업적을 기려 공덕비까지 세웠다. 작품으로농가월령가효빈가가 유명하며, 문집으로는태촌집등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은 경기도 관찰사와 예조참판, 면천 군수와 양양부사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출세에만 연연하지 않으면서 많은 양의 독서를 했다. 또한 여행을 즐겨 유득공, 이덕무 등 뜻이 통하는 벗들과 함께 국내의 평양, 송도, 묘향산, 천마산,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 여러 명승지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연암은 중국 여행에도 관심이 컸는데, 44세 되던 1780(정조 4)년에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임명되면서 마침내 기회를 얻는다. 형의 권유에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서삼종제(庶三從弟)인 박래원도 동행하여 중국 여행길에 오른다.

연암 일행은 525일 임금께 하직인사를 하고, 624일 압록강을 건너 책문, 요양, 산해관, 통주 등 지정된 조공길을 따라 81일 북경에 도착해 5일간 체류한다. 가는 도중에 폭우를 만나 여정이 순조롭지 못했으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급류를 건너야만 했다고 한다.

이때 청의 건륭황제는 피서산장이라고 이름한 열하(熱河)의 별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84일 뜻밖에 만수절(萬壽節: 임금의 생일) 행사를 그곳에서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리하여 연암 일행은 이전에 조선 연행사들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열하 일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당시 북경에서 열하까지는 400여 리나 되는 험준한 산길이었다. 이들 일행은 만수절 안에 열하에 당도하려고 밤낮으로 강행군을 하여 하룻밤에도 9번이나 강물을 건넌다. 드디어 89일에 열하에 도착, 7일간을 체류하고 820일 북경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이들은 917일 북경을 출발, 1027일 서울에 도착해 복명(復命)한다.

열하의 본이름은 무열하(武熱河)인데 현재 북경에서 230킬로 지점에 있는 하북성(河北省)의 승덕(承德)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건륭 황제가 피서산장이라 이름 붙인 별궁을 완성한 뒤 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북경 다음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됐다. 그리하여 한 때는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몽고, 티베트, 위구르,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서 온 외교사절들로 성시를 이룬 곳이다.

이렇듯 연암이 여행했을 당시 청나라는 세계 최대의 문화국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중국의 선진 문물은 큰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를 접하고 돌아온 연암은 곧바로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한다.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소와 농기구, 돈과 종이 등속을 보내 저술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격려 덕분인지 연암은 열하일기한 편으로 당대에 명성이 절정에 오른다.

고려말부터 조선왕조까지 500여 년간 중국 사행사 그룹에 끼어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수천여 명이나 되고, 사적인 여행기만도 500여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연행록 중에 왜 유독 열하일기인가. 우선 책의 이름부터 다르다. 대부분 중국 여행기는, 명나라는 조천록이나 조천일기, 청나라는 연행록이나 연행일기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북경까지의 왕복 여정을 일기체로 쓰고 있다. 그러나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경유해 열하에 갔다가 북경에 되돌아 올 때까지 여정을 다루되,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필요한 것은 구체화해 상세하게 썼다. 연암이 특히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실생활에 이롭게 쓰이는 문물과 기술에 대한 것이었다.

2610책으로 구성된 열하일기는 집중 호우로 불어난 압록강물의 장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열하에 가서도 도도하면서도 거센 열하의 물에서 받은 충격을 나타냄으로써 이미지를 통일시키고 있다. 독창성이 돋보이는 또 하나는 여행 도중에 창작한 작품을 여행기 속에 넣었다는 점이다. 가령 한문소설 허생전이나 산장잡기(山莊雜記)중에 있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같은 작품이 그러한 보기이다.

또한 풍자와 해학이 담긴 호질(虎叱)이라는 글도 수록돼 있다. 춘추시대 풍기가 문란했던 정나라를 배경으로, 타락한 유학자 북곽선생이 동네 과부와 밀회 중에 들켜 도망치다가 범을 만나서 준열한 꾸중을 듣는 이야기인데, 양반사회의 위선과 모순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담겨 있다.

이처럼 열하일기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는 연암의 실학사상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서이자, 소설가이자 문장가로서의 명문이 실린 작품집이라는 데 큰 가치가 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쓰려고 이 여정에 오르기 전과 도중에, 그리고 여행을 마친 뒤에도 실로 많은 조사활동을 전개한다. 견문을 기록하고, 비망록을 만들고, 많은 서적을 발췌하고, 금석문을 조사하고, 시문을 창작하고, 필담(筆談) 초고를 버리지 않고 모두 수집했다. 북경의 유리창 서가에 꽂혀 있는 서적목록, 공문서 내용, 연희(演戱)에 관한 기록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기록하고 수집했다. 연암이 귀국할 때 큰 보따리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는 모두 그런 종이 쪽지뿐이어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사물을 바라보는 눈아 남달랐으며, 뜻밖에 다가오는 여정의 변화를 고통이나 불만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좋은 기회로 승화시켰다. 떠나기 전 여행준비를 철저히 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응할 수 있도록 했으며, 여행 뒤 여행기를 쓸 때를 대비해 충분한 자료를 확보했다. 이는 형제들과, 그의 수집벽과 기록벽을 잘 이해하고 협조해준 일행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그가 여행기 한 편으로 그렇듯 성가(成家)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과 뛰어난 안목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여행을 통해 그의 실학사상은 한층 더 깊이 있게 발전돼 갔던 것이다.

1. () : 누가 서문을 썼는지는 밝히지 않음. 그 기록에 있어 참은 있어도 거짓은 없다고 함

2. 1-도강록(渡江錄) : 압록강에서 요양까지 15일 동안의 기록. 중국 땅의 실용적 면에 감탄

3. 2-성경잡지(盛京雜誌) : 십리하에서 소흑산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4. 3-일신수필(馹迅隨筆) : 신광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수레의 제도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제도에 관한 기록. 앞에 서문을 달아 '이용후생'에 관한 논평을 실었음

5. 4-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에서 연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에 <虎叱> 수록

6. 5-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열하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열하로 떠날 때의 애처로운 이별의 심사를 그림

7. 6-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의 태학에서 6일 동안 머문 기록.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과 조선과 중국의 문물제도에 관해 논하고 있다. 홍대용의 지전설도 중국인에게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8. 7-구외이문(口外異聞) : 고북구 밖의 기문이사를 적은 부분

9. 8-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10. 9-금료소초(金蓼少抄) :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

11. 10-옥갑야화(玉匣夜話) : <허생전> 수록

12. 11-황도기략(黃圖記略) : 황성에서 화포도까지의 견문 수록

13. 12-알성퇴술(謁聖退述) : 순천부학에서 조선관까지의 기행

14. 13-앙엽기(像葉記) : 홍인사에서 이마보총까지의 30여 군데 명소 기록

15. 14-경개록(傾盖錄) : 열하의 태학에서 사귄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그 소전(少傳)을 기록

16. 15-황교문답(黃敎問答) : 황교와 서학, 지옥설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말미에는 북쪽 오랑캐들에 대한 주의심을 환기하였다.

17. 16-행재잡록(行在雜錄) : 청나라 황제의 행재소에서의 견문 기록

18. 17-반선시말(班禪始末) : 원나라 때부터 중국 황제들이 번승(番僧)들에게 베푼 정책 설명

19. 18-희본명목(戱本名目) : 청 황제의 만수절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 기록

20. 19-찰십윤포(札什倫布) : 열하에서 직접 보고 들은 활불 반선에 대한 기록

21. 20-망양록(忘羊錄) : 열하의 태학에서 사귄 윤가전, 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해 논한 기록

22. 21-심세편(審勢篇) : 조선인들의 다섯 가지 망령됨과 중국인들의 세 가지 어려움에 대하여 논함

23. 22-곡정필담(鵠汀筆談) : <태학유관록> 중 윤가전과 나눈 이야기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하여 기록

24. 23-동란섭필(銅蘭涉筆) : 동란재에서 머물 때 쓴 것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 양금(洋琴) 등에 관한 잡록

25. 24-산장잡기(山莊雜技) : 열하산장에서 보고 들은 일들 기록

26. 25-환희기(幻戱記) :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재주를 구경하고 소감을 적음

27. 26-피서록(避署錄) : 열하의 이궁(離宮)인 피서산장에 있을 때의 기록.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元題 : 愛日堂戱歡錄)

*이 현 보

  병술 년(1526) 여름 나는 장악원정 벼슬에 있었다. 그 때 남방 진해 등지의 바다에 있던 나라의 배들을 잘못 간수하여 못쓰게 되어가니 그 죄를 다스리라는 왕명을 받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몇 달 동안 분주히 쫓아다녔으나 그 일일 다 마치지 못하였는데 당상관으로 승진  되어 병조참지를 제수한다는 왕명을 받게 되었다. 놀랍고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때 어머님께서는 고향 예안에 계셨으므로 나는 그리로 달려가서 작별은 고했다. 어머님과 나는 서로 마주보고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서울 친구가 보낸 옥관자가 때 맞춰 도착해서 어머님 앞에서 망건을 풀어 바꾸어 달았다. 어머님께서는 손으로 옥관자를 어루만지며

  "그 옥관자가 구멍이 많아서 끈을 꿰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고 물으셨다. 내가 장난 삼아   

  "그것을 달기가 어렵지¹꿰기에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라고 말씀드렸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한바탕 웃었다

  나는 이러한 뜻을 담아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새로 내린 교서에 먹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높은 관직 알리는 옥관자는 살짝 위에 빛나는데.

어머님은 관자 구멍 많은 것을 걱정하시지만,

달기가 어렵지 꿰기야 뭐 그리 어렵겠는가.   

  

  그 다음다음 해 봄에 임금께서 동부승지를 제수하시고 말미를 주시어 어머님을 뵈러 내려오게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한글로 노래를 지어 계집종과 아이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승지가 내려오거든 그 노래를 부르라."

  고 하셨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먹기도 좋을시고 승정원의 선반(宣飯)이여.

놀기도 좋을시고 대명전(大明殿) 기슭이여.

가기도 좋을시고 부모님 찾아오는 길이여.

  이런 노래를 지은 것은 아마도 우라 어머님께서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시고 외삼촌인 문절공의 집에서 지라시어승지 벼슬이 높고 귀한 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궁중에서 늘 쓰는 말에 승정원 선비들이 아침저녁 먹는 밥을 '선반'이라고 일컬었으므로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내가 집에 내려와서 이 노래를 듣고 찬탄을 이기지 못하여 그 노랫말을 절구로 옮겨 적었다.

구포궁주선(口飽宮廚膳)

신유청쇄지(身遊靑쇄지)

남귀행색희(南歸行色喜)

책마향친위(策馬向親)

  당시 경상감사인 신대용이 어머님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일찍이 부모님을 여윈 터라 부럽고 흠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술잔을 올리고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부모님 늙지 않고 오래 사시어,

학같이 하얀 머리칼 드리우고

경사스런 자리에 나란히 앉았네.

슬하의 아드님은 임금님의 새로운 은총을 받아,

옥관자 머리에 달고 오색구름에 싸여서 오네.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서울과 지방을 드나든지 거의 40여 년 동안 양친을 봉양하면서 기쁘게 해드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직 이 두 가지가 가장 마음에 기쁘고 또 흐뭇하기도 하다.

 좋은 이야깃거리도 되고 아까운 어머님의 말씀이기도 한 이 일들을 차마 그냥 헛되이 버릴 수 없어 한 편의 글로 기록하고 아울러 신대용의 시를 함게 적어서 애일당에 갈무리 해놓으니 후손들은 이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 옥관자를 달 수 있는 당상관 이상의 자리에 오르기가 어렵다는 뜻.

 *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조선 중기 문신·시조작가.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 본관은 영천(永川). 1498(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예문관봉교·춘추관기사 등을 지냈다. 1504년 사간원정언으로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安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된 뒤 밀양부사·충주목사 등을 지내고, 23(중종 18)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그 뒤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2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은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46(명종 1) 자헌대부, 54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연을 읊은 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장가 12, 단가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漁夫歌)>를 장가 9, 단가 5장으로 고쳐지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 <농암집>이 있고, 주요 작품으로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등의 시조작품이 있다

 

 

통곡할 만한 자리            박지원

초파일 갑신(甲申), 맑다.

정사 박명원과 같은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십여 리 남짓 가서 한 줄기 산기슭을 돌아 나서니 태복(泰卜)이 국궁(鞠躬, 존경의 뜻으로 몸을 굽힘)을 하고 말 앞으로 달려나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큰 소리로,

"백탑(白塔, 중국 요동 요양성에 있는 탑)이 현신(現身, 지체 낮은 이가 지체 높은 이를 처음 뵘을 이르는 말)함을 아뢰오." 한다.

태복이란 자는 정 진사의 말을 맡은 하인이다. 산기슭이 아직도 가리어 백탑은 보이지 않았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자연의 광활함과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왜소한 인간 존재에 대해 인식하게 됨)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대고 말했다.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 볼 만하구나."

정 진사가,

"이 천지간에 이런 넓은 안계(眼界, 눈에 보이는 한의 범위)를 만나 홀연 울고 싶다니 그 무슨 말씀이오?"

하기에 나는,

"참 그렇겠네, 그러나 아니거든! 천고의 영웅은 잘 울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만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그저 옷깃을 적셨을 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 듯하여 천지에 가득 찼다는 소리를 들어 보진 못했소이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칠정(七情) 중에서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겝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하여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소이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게요. 복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 다르리요?

사람들의 보통 감정은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도 못한 채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 '슬픈 감정'에다 울음을 짜 맞춘 것이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을 치를 때 이내 억지로라도 '아이고', '어이'라고 부르짖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참다운 소리는 참고 억눌리어 천지 사이에 쌓이고 맺혀서 감히 터져나올 수 없소이다. 저 한나라의 가의(賈誼, 가의는 직간을 하다가 귀양가게 되었으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유명한 상소문을 올린 바 있다. 그 상소문에 천하사세를 위해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 크게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라 하여 조목조목 내용을 서술했다)는 자기의 울음터를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하여 필경은 선실(宣室, 한문제가 거처하던 미앙궁의 궁실로 여기서는 한나라 정권을 말함)을 향하여 한번 큰 소리로 울부짖었으니,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그래, 지금 울 만한 자리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당신을 따라 한 바탕 통곡을 할 터인데 칠정 가운데 어느 ''을 골라 울어야 하겠소?"

"갓난아이에게 물어 보게나. 아이가 처음 배 밖으로 나오며 느끼는 ''이란 무엇이오? 처음에는 광명을 볼 것이요, 다음에는 부모 친척들이 눈앞에 가득히 차 있음을 보리니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 같은 기쁨과 즐거움은 늙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없을 일인데 슬프고 성이 날 까닭이 있으랴? ''인즉 응당 즐겁고 웃을 정이련만 도리어 분하고 서러운 생각에 복받쳐서 하염없이 울부짖는다. 혹 누가 말하기를 인생은 잘나나 못나나 죽기는 일반이요, 그 중간에 허물 · 환란 · 근심 · 걱정을 백방으로 겪을 터이니 갓난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서 제 조문(弔問)을 제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갓난아이의 본정이 아닐 겝니다. 아이가 어미 태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는 어둡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비좁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 나오자 팔을 펴고 다리를 뻗어 정신이 시원하게 될 터이니, 어찌 한번 감정이 다하도록 참된 소리를 질러 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이다.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를 굽어보는 곳에 한 바탕 통곡할 '자리'를 잡을 것이요, 황해도 장연의 금사 바닷가에 가면 한 바탕 통곡할 '자리'를 얻으리니, 오늘 요동 벌판에 이르러 이로부터 산해관 일천이백 리까지의 어간은 사방에 도무지 한 점 산을 볼 수 없고 하늘가와 땅끝이 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고 간 비바람만이 이 속에서 창망할 뿐이니, 이 역시 한번 통곡할 만한 '자리'가 아니겠소."

 

네 벗이 사는 집 허균

내가 사는 집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벗하는 이가 셋이고 거기에 또 내가 끼니 합하여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 벗이란 것은 오늘날 생존해 있는 선비가 아니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선비들이다. 나는 원래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데다가 또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은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는데 나만 홀로 벗이 없으니 어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생각해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더럽다고 사귀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디서 벗을 찾을 것인가. 할 수 없이 옛 사람들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내서 벗으로 삼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으니, 나는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이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고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서 따라 가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또 그 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내가 본받으려 하나 아직은 그리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세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에 떨쳐 빛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문장은 그들에게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취하는 바는 그들의 인품에 있지, 그들의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 삼는다 할 것 같으면 굳이 속인들과 함께 옷소매를 맞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또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것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내가 찬()을 지어 한석봉에게 해서(楷書)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이면 반드시 그 초상을 좌석 귀퉁이에 걸어 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마주보고 품평하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나의 생활이 괴로운 줄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나도 비로소 오륜을 갖추었으니,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더욱 탐탐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 나는 본디 글을 못하는 사람이라, 세 군자의 뛰어난 문장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마저 거칠고 망령되어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바이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귀신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들과 서로 일치되는 바가 있다.

도연명은 팽택의 수령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나는 세 번이나 이천 석을 받는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번번이 배척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적선(謫仙) 이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귀양 가고, 소동파는 대옥과 황강으로 귀양 갔으니, 이는 모두 어진 이가 겪은 불해이었다. 그런데 나는 죄를 얻어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은 뒤 남쪽으로 귀양을 갔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을 쳐서 그들과 같은 고통만은 맛보게 하면서도 주어진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바꿀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하늘의 복을 받아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으니, 관동 지방은 나의 옛 터전으로,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 채석강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과 양선현보다 못지않으니, 마땅히 세 분 군자를 모시고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포 호숫가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에 한 가지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안다면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생각하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왜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떨기로 난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은 꽤 즐길 만하다. 그런 중에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고 읍을 하는 생활을 한다. 이에 편액을 사우재라 하고, 그 연유를 위가 같이 기록해 둔다. 신해년(1611) 2월 사일(社日)에 쓰다

 

슬견설(蝨犬說)  이규보

 어느 나그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저녁엔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돌아 다니는 개를 쳐서 죽이는데 보기에도 너무 참혹하여 실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앉아서 이를 잡아서 그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그 나그네는 실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는 미물이 아닙니까? 나는 덩그렇게 크고 육중한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한 말인데, 당신은 구태여 이를 예로 들어서 대꾸하니 이것은 필연코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대들었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돼지벌레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큰 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 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支節)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저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순오지 중에서 홍만종    

영남(嶺南)의 어떤 선비가 우리 성종조(成宗朝) 때 서울에 왔었다.   어느 날 성균관에 입관하여 여러 선비들과 같이 글공부를 해보려고 했으나 여러 선비들이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영남 선비는 창피를 당하고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성균관 담밑을 지나갈 때 마친 궁 문 앞에 만발한 꽃을 보고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종이 궁 안에서 가마를 타고 나오고 있었다.   영남 선비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망설이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냥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너는 무엇하는 사람인데 이곳에 함부로 들어와 서 있느냐.”

  선비는 자기의 일을 사실 그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묻기를,

  “네가 시를 지을 줄 아느냐.”    하니 선비는 황공해서 답하기를,

   “잘은 못하지만 대강은 하옵니다.”   그러자 임금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서,

  “내 글 한 구절을 만들테니 대구를 맞추어보아라.” 하고는 글 한 구절을 지으셨다.

  “금과 은이 보배로운 게 아니라 어진 신하들이 보배로운 것이다.”

  선비는 얼른 대구를 채우기를,   “해와 달이 밝은 것이 아니라 착하신 임금이 밝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크게 기뻐하시더니,

  “국가에는 원래 인재를 얻고자 과거라는 제도를 설치해놓았다. 너의 글재주를 내가 이미 시험해보았으니 과거에 급제를 시켜주겠노라.”

  성종은 이렇게 말하고 궁중으로 그 선비를 데리고 들어가 홍패(紅牌)를 내어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 이 홍패를 품안에 숨겨가지고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과거에 급제를 했노라.’하고 자랑을 하고, 그래도 성균관 선비들이 너를 믿지 않을 땐 이 홍패를 꺼내 보이도록 해라.”

  선비는 임금이 시키는 대로 성균관으로 갔다. 그 선비가 임금이 시키는 대로 하니 성균관 선비들이 보고 놀라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아, 글 한 귀에 대구를 맞춘 이 선비는 과거에 급제를 했으니, 선비의 출세에는 그야말로 때와 시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옛날부터 내려오기를 천하에 대구 없는 말은 없다고들 전한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교묘한 글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대구가 있다는 것이다

* 이 글은 문고판 홍만종의 순오지81 ~ 82쪽에 나와 있는 글입니다

* 홍만종(1643~1725)은 인조 21년 영천군수인 세주(世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숙종 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부사정과 참봉을 지냈습니다. 허견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역사지리가요시 등 연구에 전념하였고, 시평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8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서로는 역대총목,시화총림등이 있습니다

 

 

박지원의 단편소설

[방경각외전(放鷹閣外傳)]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문집인 [연암집(燕岩集)]의 권8의 단편소설집이다. 마장전,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총 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뒤의 두 편은 소실되어 제목만 전한다.

[방경각외전]에 실린 이야기들은 당대 사회현실의 모순을 풍자함으로써 실학자로서의 박지원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집을 굳이 [외전(外傳)]이라고 칭한 것은 주인공들이 정사(正史)와는 무관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예덕선생전  

선귤자의 벗 가운데 '예덕선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았는데,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똥을 져 나르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다. 늙은 일꾼을 '향수'라고 불렀는데, 그의 성이 엄이었다. 어느 날 자목이라는 제자가 선귤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를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同氣) 아닌 아우다' 하였으니, 벗이란 게 이처럼 소중하지 않습니까? 온 나라 사대부들 가운데 선생님의 뒤를 따라 하풍(下風)에 놀기를 원하는 자가 많건마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향수'라는 자는 시골의 천한 늙은이로 일꾼같이 하류 계층에 처하여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자꾸 그의 덕을 칭찬하면서 '선생'으로 부르고, 마치 머지 않아 벗으로 사귀고자 청하시려는 듯합니다. 제자인 저로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니, 이제 선생님 문하를 떠나려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가만 있거라. 내가 네게 벗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리라. 속담에도 있지 않더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춤 못 춘다.'는 격으로, 사람마다 저 혼자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남들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딱하게도 그의 허물을 찾으려고 애쓴단 말이야. 그러나 부질없이 그를 칭찬하기만 하면 아첨에 가깝기 때문에 멋이 없고, 오로지 그를 헐뜯기만 한다면 마치 잘못된 점만 꼬집어 내는 듯해서 비정스럽거든. 그래서 그의 아름답지 못한 점들부터 널리 들어가서 그 가장자리에나 어정거리되, 깊이 파고들진 않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그를 크게 책망하더라도 그는 노여워하진 않게 되거든.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자기가 가장 꺼리는 곳을 꼬집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 마치 어떤 물건을 점쳐서 알아낸 듯 마음속에서 느낌이 오는데,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되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도 방법이 있거든. 잔등을 어루만지되 겨드랑이 까진 이르지 말 것이며, 가슴팍을 만지더라도 목덜미 까진 침범하지 말아야 돼. 그래서 중요치 않게 이야기가 그친다면, 그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내게 돌아오는 법이지. 그도 기뻐하면서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고 말할 거야. 벗이란 이렇게 사귀면 되는 거지."

이 말을 들은 자목이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면서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시정 잡배나 머슴 놈들의 행세를 가르치시는군요."

선귤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런 것은 부끄러워하고, 저런 것은 부끄러워하지는 않는군. 시정 잡배의 사귐은 이익으로써 하고, 얼굴의 사귐은 아첨으로 하는 법이거든.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일지라도 세 번만 거듭 부탁하면 틈이 벌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오래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만 거듭 선물하면 친절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지. 그러기에 이익으로서 사귀는 것은 계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써 사귀는 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 법이야. 대체로 커다란 사귐은 얼굴빛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벗은 친절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오로지 마음으로 사귀면 덕으로 벗할지니, 이게 바로 '도의(道義)의 사귐'이야. 그러면 위로는 천 년 전의 사람을 벗하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며, 만 리 밖의 떨어져 있더라도 소외되지 않게 되지.

그런데 저 엄항수라는 이는 일찍이 나에게 지면(知面)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칭찬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네. 그의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 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수룩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 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 , 거위 따위의 똥이나, 입회령(?:돼지똥), 좌반룡(左攀龍:사람똥), 완월사(玩月:닭똥), 백정향(白丁香:닭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지. 그래도 그의 청렴한 인격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뿐더러, 혼자 그 이익을 차지하면서도 정의에 해로움이 없었으며, 아무리 탐내어 많이 얻기를 힘쓴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더러 '사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거든. 이따금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가래를 휘두르는데, 경쇠처럼 굽은 그 허리가 마치 새 부리처럼 생겼더군. 비록 찬란한 문장이라도 그의 뜻에는 맞지 않고, 아름다운 종이나 북소리도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어. 부귀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원하는 것이지만, 그리워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근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 준다고 해서 더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자기를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되게 여기지도 않는 거지.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인(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의 상을 골라 쓰되,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기름지고 살지고 평평하고 풍요러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거야. 그렇지만 엄 향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한 그릇 뿐이지. 남들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목구멍에 내려가면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른데, 왜 맛있는 것만 가리겠소?'하면서 사양했다네. 또 남들이 새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 옷을 입으면 몸에 익숙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오?'하면서 사양했다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었지.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리고, 다시 돌아와 옛 옷을 찾아 입더군.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향수야 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옛 글(논어)에 이르기를 '본래 부귀를 타고 난 사람은 부귀를 행하고, 빈천을 타고난 사람은 빈천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네. 이 말에서 '본래'란 하늘이 정해 준 분수를 뜻하는 거지. {시경}에 이르기를

아침부터 밤까지 관청에서 일하시니

타고난 운명이 나와는 다르다네

하였으니, '운명'이란 것도 분수를 말한다네.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에 제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었으니, 운명은 본래 타고난 것인데 그 누구를 원망하랴. 새우젓을 먹을 때에는 달걀이 생각나고, 굵은 갈옷을 입으면 가는 모시를 부러워하는 법일세. 천하가 이래서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농민이 땅을 빼앗기면 논밭이 황폐해지게 마련이지. (진시황의 학정에 반대하고 일어선) 진승, 오광, 항적의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의 뜻을 호미나 고무래 따위에 두고 어찌 편안히 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짊어진 사람이 수레에 탄다면 도둑에게 빼앗길 것이다'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라네. 그러므로 정의가 아니라면 비록 만종(萬鍾)의 녹이라도 조촐하지 않을 것이요, 힘들이지 않고 재산을 모은 사람은 소봉(素封:부자)과 어깨를 겨눌 만큼 부유해지더라도 그의 이름을 더럽게 여기는 이가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때에 구슬과 옥을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은 그의 깨끗함을 밝히는 거라네.

엄항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抗)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먹다가 차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차려졌을 때에는 반드시 나보다도 못한 사람을 생각했다네. 그런 엄항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견디지 못할 게 없겠지.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항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선비의 얼굴에 가난한 기색이 나타나면 부끄러운 일이거든. 또 뜻을 얻어서 영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교만이 온 몸에 흐른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 그들을 엄항수에게 견주어 본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드물 거야. 그러니 내가 엄항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항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고 호를 지어 바쳤다네."

 

 

 

팔음이 잘 화한 찬(八音克 贊)  김 시 습

 천지 자연의 문채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소리의 바탕이 문채가 되고, 문채가 나타나면 울린다. 난세의 글은 그 문채가 경박한 까닭에 그 소리도 음란하고 방탕하여 화평하지 못하고, 치세(治世)의 글은 그 문채가 점잖고 후한 까닭에 그 소리가 쟁쟁하여 지극히 정교롭다. 읊으면 화답하는 노래가 되고, 연주하면 구성(九成)이 된다. ()도 아니요 상()도 아니면서 궁도 되고 상도 되며 사(현악기)도 아니요 황(관악기)도 아니면서 사도 되고 황도 되어 오성(五聲)이 저절로 들어맞고 팔음(八音)이 자연히 드러나 오장(五臟)에서 화창하여 오상(五常)으로 펴나가니, 천지의 음성을 다하고 대조화의 높. 낮음을 갖추어, 치고 두드림이 뒤섞이고 들고 잡고 내리고 높이는 데 있어, 소리는 음률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되어 찬란한 문채를 이룬다. 그리하여 돌이켜 희미한 소리(希聲)와 큰 소리(大音)의 영역에로 들어가 저 주재(主宰)를 흔들게 되지만, 충막(沖漠)하고 창창(蒼蒼)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음에 형용하기 어렵고 비유하기도 어려우나, 화하지 아니하려 하려도 성음(聲音)이 저절로 화하고, 조화되지 아니하려 하여도 귀신과 사람이 저절로 조화되어, 연주하지 않아도 연주가 되고 노래하지 않아도 노래가 된다. 대체로 그와 같은 것은 바로 순()임금이 기()에게 명하여 준 묘지(妙旨)일 것이다. 저 기가 명을 우정(虞庭 순임금의 조정)에서 받고 그 아름다움을 펴내니, 새와 짐승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고 봉황도 와서 법도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또 천 년 뒤에 살고 있다 하여도 천 년 전을 생각해 볼 적에, 가슴 속에 자연히 생황(笙簧)과 종고(鐘鼓)를 아홉 번 연주 함과 방불함이 있어 유연(悠然)히 화창함을 느끼는 듯하구나

 

 

삽과 칼과 낫을 벗으로 삼은 사람의 이야기 권근    

 김씨는 군자이다. 나의 고향 안동에 숨어산다. 한때 조정에 벼슬한 적도 있는데 지조가 굳고 악을 미워하며 남에게 아첨하기를 싫어하는 성미이다. 더러 지방의 원님으로 나간 적도 있는데, 그때마다 버릇처럼 하는 말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별 것이 아니다. 농부가 곡식을 해치는 잡초를 먼저 없애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면서 백성에 해를 끼치는 자들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아전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살면서도 늘 삽이 달린 지팡이와 줄이 달린 칼과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는 그것들을 자기의 세 명의 친구, 즉 삼우(三友)라 했다. 잡초가 나면 삽으로 밀어버리고, 잘못 뻗은 곁가지는 낫으로 잘라버리고, 그리고 필요없는 것들은 줄칼로 깎고 쓸어버렸다. 그렇게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하여 아주 보기 좋게 다듬었다. 쓸모없는 나무나 풀이 그 사이에서 제멋대로 자랄 수 가 없었으니 정원은 자연히 깨끗하게 정돈되었고 논밭이 말끔하게 가꾸어져, 온 고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병부의 김공 역시 그 고을 사람으로 서울에 와서 예닐곱 차례나 나에게 삼우설(三友設)을 부탁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어오다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아미 김씨의 기풍을 사모하는 터이고, 또 김공의 청도 가볍게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삼우설을 적어 볼까 한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해로운 벗이 또 셋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물론 학업에 힘쓰는 사람으로 마땅히 조심해서 친구를 사귀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해롭든지 이롭든지 모두 벗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삽이며 낫이며 칼은 사람이 아니니 그것을 벗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긴 옛 사람들 가운데 사람이 아닌 것을 벗으로 삼은 예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낙천은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라 했고, 증단백은 아홉 가지 꽃과 술을 합해서 십우(十友)라 했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또한 근심 걱정까지 풀 수 있었으니 벗으로 삼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런데 삽과 칼과 낫은 물건들 중에서도 제일 보잘 것 없는 물건이다. 쳐다보아도 눈을 즐겁게 하지 못하며, 사용해도 근심을 풀어 주지 못하니, 사람으로 말한다면 하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감히 벗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벗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나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다 나의 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도를 가진 사람을 벗하면 나의 덕을 닦는데 도움이 되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과 벗하면 그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귀하고 천함이 다르더라도 참으로 도가 같고 뜻이 일치한다면 모두 나의 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뜻이 악을 미워하는 데 있고 저들이 악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내가 그 힘을 빌려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는데, 그들을 벗으로 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대개 곡식을 가꾸는 사람은 반드시 가라지를 제거하고, 난초와 혜초를 기르는 사람은 반드시 주변에 있는 가시덤불부터 잘라내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물욕을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간사한 무리를 제거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나 자신에게 달렸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또한 하늘에 달린 것이라, 모두가 친구를 사귀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듯싶다. 다만 물질적인 것에 한해서 악을 제거할 수 있으니, 그런 일을 도와 줄 수 있는 벗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 가지 농기구는 벗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김씨가 세 가지를 벗으로 삼은 것은 숨어사는 사람으로서 악을 제거하는 데 뜻을 둔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관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에까지 베풀어볼 기회가 없었다. 오직 안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일을 하는 데에서 비로소 그 효력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몸가짐이나 행실이 더욱 건실해지면 그의 절의가 더욱 높게 되고 또 그것으로 해서 그가 기른 곡식과 화초가 날로 번성하여 좋은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저 백낙천이나 증단백 같은 이들이 다만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근심을 잊기 위한 목적으로 꽃이니 술이니 하는 것을 벗으로 삼았는데, 그런 벗은 결국은 마음을 나태하게 하여 자신의 의지마저 상실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비해 보면 김씨의 벗들은 공자가 말한 유익한 벗들이 아니겠는가.

, 내 마음이 물욕에 사로잡힌 지 오래구나. 어떻게 하면 유익한 벗의 힘을 빌려 내 마음 밭에 자라난 이 탐욕의 가시덤불을 베어낼 수 있을까?

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성리학자로 문장이 뛰어났고 신흥 사대부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었다.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저서로 <양촌집(陽村集)>,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이 있다

 

때묻은 거울 이야기(鏡說)

 이 규 보

어떤 거사(居士)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 같았다.  그러나 그 거사는 아침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알른알른한 거울을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기 때문에 만일 맑은 거울 속에 비친 추한 얼굴을 보면 반드시 거울을 깨뜨려서 부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깨져 버릴 바에야 차라리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을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 있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이를 이상스럽게 생각하시오?“  하니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육가잡영(六家雜詠)序文

육가(六家)'는 여섯 사람이고, '잡영(雜詠)'은 혹은 절구(絶句), 혹은 고시(古詩), 혹은 율의 장단으로 그 형식이 하나가 아님을 이른다. 남응침 군()은 곧 나의 어릴 적 옛날 교우이다. 중년에는 오랫동안 소원하였다가 내가 줄곧 내의원 제조로 일할 때에 미쳐서는 서로 자주 만났는데, 일찍이 그처럼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의 심양을 왕래함에서도 또한 더불어 동고(同苦)하여 정의(情意)가 더욱 친밀하여 시()를 노래하면 이에 화답함이 있었으며, 그 시어(詩語)의 넉넉하면서도 뜻이 원만함을 사랑하였다.

하루는 옷소매에 책 한 권을 넣고 와서는 간청하며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인(小人)인지라 어찌 감히 뛰어난 문장가를 바라겠습니까마는 마침 뜻이 통하는 몇 사람들끼리 서로 결합해 친구를 삼고는, 대강 술 마시고 글 쓰기를 일삼아서 각각 저술한 바가 있어 장차 후손에게 남겨주고자 하는데, 만일 한 말씀 써 주신다면 영원히 가문에 전하는 보물로 삼고자 합니다. 돌보아 주신다면, 참람되고 외람되이 어찌 감히 더럽히겠습니까?"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를 아까워 한다면 어찌 옛날에 좋아했겠는가?" 드디어 그 책을 열람하며 말했다. "()은 내국에서 벼슬할 적에 안면이 있는 터라, 익히 그 시의 재주가 있는 줄 아는 자이다. 또 최()는 동회도위로 재직시에 나를 위해 말을 했었고 또한 일찍이 눈여겨 보아서 마음이 그 옛것을 사모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었다. ()은 곧 어릴 적 친구이고, 또 정()은 옛날에 내가 제조전의(提調典醫)로 있을 때, 문장과 행실이 뛰어남을 알고 있어서 늘 덧없이 죽은 것을 애도하였다. ()과 최()로 말하자면, 한 번도 대면은 못했었지만 이름은 곧 들었다. 안타깝도다! 모두가 이미 저승 사람이로구나."

열람을 마치고 내가 이에 책을 덮고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같은 여섯 명이 의원 일을 하느라 업()이 살구나무를 심는데 있거나 혹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이웃한지라 종적이 장사치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능히 바깥 사람들의 유혹에 빠지는 바가 되지 않고, 우뚝우뚝 솟았구나! 오직 시()를 다듬으며 서로 더불어 문장 공부에 정진하였으니, 진실로 즐겨함이 마치 짐승들이 꼴을 좋아함과 같으니,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무릇,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가운데 연주하여 외롭게 부르다가 동조함을 얻어 번갈아가며 둘, 셋에 화답함도 오히려 어렵건만, 하물며 대 여섯 명의 많음이랴.

바야흐로 그 안개와 노을을 능멸하고, 구름과 달을 쫓으며, 시를 읊는 동안에는 형상을 잊었으니, 세상의 시끄러움 밖에 취미를 부치고는 어찌하여 서둘러 태연한 선비의 회포로써 스스로를 기약하지 않고서, ()과 서리()를 먼저 모았다가 우레()와 이슬()로 쉽게 재촉하였는가! 평생 주막(酒幕)을 멀리하면서 하산(河山)만을 탄식하였으니 곧 애써 생각해보면, 속세의 종적을 어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가히 탄식할 일이로다.

그러나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것인데, 이에 여섯 사람이 사귄 정을 보니, 오늘에서야 각자의 원고(原稿)를 거두어 쌓았는데, 현재 생존해 있거나 이미 죽어버린 그 간의 쓰임으로써만 하지 않고 책으로 만들어서 보관하려 함이라.

무릇, 말세에 두텁고 멀리 있는 계곡에 손을 뒤집어 구름을 둘로 하는 것(厚顔無恥)을 볼 때, 그 의()로운 사람들에게서의 돈독함은 어떠한가? 또한 공자님께서도, ()는 가히 흥()할 수 있으며, 무리지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능히 시를 배워서 무리 지어 삶을 얻고, 부지런히 절차탁마 한다면 곧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 또한 가히 이로 말미암아 미루어 밝혀짐이니, 시가 가히 작은 것이겠는가! 진실로 이러할진대, 곧 오직 시를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두려워 할 뿐이다. 비록 시를 쓰는 사람이 백 명, 천 명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히려 장차 여러 시인들의 서문을 써 줄 것인데, 오히려 어찌 이를 꺼리끼겠는가?" 마침내, 이렇게 써서 말하고는 돌려보낸다.

세사(歲舍) 무술년(戊戌年;1658) 음력 이월(二月)에 백헌(白軒)은 서()하노라.

역재 전경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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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석(李景奭1595-167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 본관은 전주(全州).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16l7(광해군 8)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참여하지 않아 삭과(削科)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고, 그 뒤 검열·승문원주서 등을 거쳐 전적·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만(張晩)의 종사단으로서 의병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37년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지었다.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41년 이사(貳師)로 선양[瀋陽]에 가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보좌했다. 그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49년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을 추진했는데,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이 사실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사문사(査問事)가 왔다. 이때 그는 끝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조정의 위기를 넘기고 자신은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감금당하였다. 51년 석방되었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기용되지 못하다가 59년 영돈녕부사에 오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68(현종 9) 궤장을 하사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백헌집등이 있다. 만년에 성남의 운중동 석운리에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고 남원(南原)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운금루           이 제 현

이제현(李薺賢 : 1287~1367)은 자가 중사(仲思), 호가 익재 (益齋) 실재 (實齋) 역옹 (櫟翁)이다. 1301년 문과에 급제. 연경의 만권당 (萬卷堂)에서 원 () 나라 학자들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정당문학 (政堂文學)으로 김해군 (金海君)애 봉해지고, 문라시중에 올랐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 (程朱學)의 기초를 세웠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 (書體)를 도입하였다. 저서로 익재난고 (益齋亂藁),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 (櫟翁稗說) 등이 있다.

 이 글은 원제가 운금루기 (雲錦樓記), 동문선 제69권 기()에 실려 있다. 아름다운 경치란 반드시 먼 산 속이나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우리 주변에도 자리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사람이 많은 도화지 속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사람이 많은 도화지 속에 있던 연못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곳을 가꾸어 새롭게 단장한 사람만이 능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음을 이 글은 보여준다. 명예와 이익만을 다툴 때는 오직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그만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만족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겠다.

 산천을 찾아 구경할 만한 명승지가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은 있다.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게 되니, 비록 형산(衡山) 여산(廬山) 동정호(洞庭湖) 소상강(瀟湘江)이 반 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우연히 만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이 보이지 않고, ()을 얻게 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털끝만한 것을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은 나뭇짐은 보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일 벌이기를 좋아하면서 재력이 있는 자는, 관문(關門)이나 나루를 지나 시골 마을을 골라 자리잡고,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긴다.

 경성 남쪽에 한 연못이 있는데 백 묘()는 된다. 그 연못가로 빙 둘러 있는 것들은 어염집들로서 고기의 비늘같이 즐비하게 깔렸으며, 짊어지고 이고 말을 타고 걷는 사람들이 그 곁을 왕래하며 줄이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그윽하면서 넓은 경내가 그 사이에 있는 줄을 알 것인가?

 그 후 지원(至元) 정축년(丁丑年)1) 여름에 연꽃이 한창 피었을 때, 현복군(玄福君) 권후(權侯)가 그곳을 발견한 뒤 매우 사랑하여 바로 그 연못의 동쪽에다 땅을 사서 누각을 지었다. 그 누각은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주춧돌은 안 받쳤지만 기둥을 썩지 않게 하고, 기와는 이지 않았지만 이엉은 새지 않게 하였으며, 서까래는 다듬지도 않았는데 굵지도 않고 휘어지지도 않았으며, 흙만 바르고 단청은 하지 않았는데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대게 이와 같은데, 그 연못에 가득한 연꽃을 다 포괄하여 앞에 두었다.

 이에 그의 부친인 길창공(吉昌公)과 형제와 동서들을 그 누각 위로 청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노느라고, 날이 저물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 때 아들 가운데 큰 글씨를 잘 쓰는 자가 있었는데, 운금(雲錦)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이것을 달아 두니이에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시험삼아 가서 보니 붉은 꽃 향기와 푸른 잎 그림자가 넓게 연못 속에 끝없이 비치는데, 어지러이 흩어지는 바람과 이슬이 연파(烟波)에 움직이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용산의 여러 봉우리가 청색을 모으고 녹색을 바르고 처마 밑으로 몰려들어, 컴컴할 때와 밝을 때와 아침과 저녁에 따라 늘 각각 다른 모양을 나타낸다.

 또 건너편 어염집들이 나타내는 자세한 모습을 누각에 앉아서 하나하나 셀 수도 있다. 그리고 왕래하는 사람, 달리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사람, 어른을 만나 절하는 사람 등이 모두 형체를 숨길 수 없으니, 바라보며 즐길 만하다, 그러나 저편의 그 사람들은 연못만 있는 것을 보고 누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또 누각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구경할 만한 명승지는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과 시장 사람들이 언제나 보면서도 그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두어 사람들에게 경솔히 보이지 않았음인가?

 권후는 만호의 부절(斧節)을 허리에 차고 외척의 세력을 깔고 앉았으며, 나이는 옛사람의 강사(强仕)할 정도가 되지도 않았다. 으레 부귀에 빠져 취해 있을 때인데, 그는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즐기는 바를 즐기되,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선비들에게 미움도 받지 않으면서 시장과 조정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에서 넓은 경내를 차지하여, 그 어버이를 비롯하여 손님까지도 즐겁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남에게까지 즐겁게 하니, 이는 실로 가상할 만한 일이다.

1) 지원(至原)은 원나라 순제(順帝) 연간(1335~1340)의 연호로서, 정축년은 고려 충숙왕 6(1337)에 해당한다.

 

 

초나라 굴 원 찬(楚屈原贊) 김 시 습

()나라에 굴 원(屈原)이 있었으니, 나랏님과 동성(同姓)이었다. 회왕(懷王)에게 벼슬 하여 삼려 대부(三閭大夫)로 정사에 종사하면서 회왕의 뜰에 드나들며 모든 일을 시정해 나갔다.

의결(議決)을 도모하고 혐의스러운 정령(正令)을 결정하며, 여러 신하를 감찰하고 웅대하며, 명령을 오로지하고 계획한 일을 실행하여 맡은 직분을 잘 닦아 나가니 임금이 매우 진기하게 여기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동렬(同列)에 있는 대부인 상관(上官)과 근상(靳尙)이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해()하여 임금에게 참소하니, 임금이 굴 원을 멀리하여 여러 번 많은 무리들의 비방을 받았다. 그래도 굴 원은 바르고 곧은 말을 올려 임금이 채납(採納, 의견을 받아들임)할 것을 바랐건만, 임금은 듣지 아니하고 결국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양왕(襄王)이 뒤를 이어 섰으나 미망(迷妄)만 자꾸 거듭하며 또 다시 참소하는 말을 곧이 듣고 굴 원을 강남으로 쫓았으니, 슬프다, 정칙(正則)이여! (그는)뜻이 매우 정량(貞諒 곧고 신실함)하여 종묘 사직이 장차 위태로와지려 하니 망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드디어 돌을 품에 안고 (멱라수에 뛰어들어)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고 말았다. 저 멱라수(羅水)를 바라보니 출렁이는 물결에 마음이 아파라. 천추(千秋) 만세(萬歲) 내려가도록 충신의 넋을 그 누가 찾으리?

 

한나라 때 가생(賈生)이 있어 그 곳에 가서 조상(弔喪)하여 애달프게 말하기를,

상서롭지 못한 세상을 만나심이여, 정직한 것은 버려 두고 굽은 것만 들어 쓰네.”

라고 하였다. (굴원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을 자세히 읽어 보면 속마음이 출렁거린다. 세대는 비록 멀다지만 그 말소리를 듣는 듯하여 못 견디겠네, (굴원의 전기가 실려있는)史記읽기란! 그만 슬퍼서 멍해 버렸다네

 

집을 수리하고 느낀 것 (理屋說)

행랑채가 허물어져서 제대로 버티지 못한 것이 세 칸이다. 나는 어떨 수 없이 이를 모두 수리하였다.

 그런데 그 중의 두 칸이 장마에 샌 지가 오래 되었는데,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손을 대지 못했다. 나머지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새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새 기와를 갈아 넣었다. 그런데 수리하려고 본즉 비가 샌 지 오래 된 부분은 그 서까래추녀기둥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쓰게 되었다. 그래서 수리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그러나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한 칸의 재목들은 모두 완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훨씬 적게 들었다.

 나는 여기에서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가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서 못쓰게 되는 것과 같으며, 잘못을 알고 즉시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 집의 재목을 다시 쓸 수 있는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 되며 건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도 이와 같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백성에게 엄청난 해로움이 미치는 정책을 곧 개혁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백성이 못살게 되고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변경하려면 쉽게 만회할 수가 없다. 조심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호박의 미덕 박 지 원

한산(韓山) 이자후(李子厚)는 나이 마흔여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내아이를 얻었다. 긴 눈썹, 옴폭한 눈, 오똑한 코, 넓은 이마에 총명한 모영은 영락없는 명문세가의 아이였다. 이자후를 축하하는 친척과 벗들이 앞다투어 시를 지어 그 기쁨을 표시하였고, 자후는 이를 지어 긴 두루마리로 만들어 내게 서문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 자후가 바야흐로 자식을 두지 못했을 때였다. 자후와 정이 자별(自別)한 친구와 동료들이 그를 위해 우려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건만 나는 홀로 그에게 반드시 자식이 잇을 것이라 말하였다. 내 일찍이 그와 비록 종유하지는 않았으되 나는 그가 덕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자후를 위해 우려하는 까닭은 그가 늙을 나이가 아님에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빨이 빠져 구부정한 일개 늙은이가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식 잇기에 급급해서라고 여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후는 사람됨이 중후하고 질박하여 말수가 적었다. 진실하고 참되며 화려함이 없으니, 그 마음이 반드시 성실하고 위선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무릇 덕이 흉측함은 불성실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성실하지 못하면 아무런 사물도 없게 된다. 때문에 가을에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흉이라 말한다. 오직 덕만이 능히 그 세계(世系)를 멀리 계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니 서경덕을 힘써 행하고 편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초목에 비유해보자. 이미 열매로 맺었다면 마땅히 심을 수 있을 것이다. 심는다는 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방도이므로 씨를 인()이라고 말하며, 인이라는 것은 소멸치 않게 하는 방도이므로 종자(種子)라고 일컫는다. 하나의 과실 열매를 미루어서 온갖 이치의 실체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자후가 아들을 두게 되자 나의 임시 거처가 자후의 마을과 마주보게 되어 날마다 이웃 마을을 따라 자후와 놀았다. 자후의 아이가 태어나서 해를 지나자 어른께 인사하는 법을 익히고,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며 누가 아무개다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조개 지으며 웃는 모습과 애교있게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예쁘고 사랑스럽게 되니 지난날 자후를 위해 근심하던 이들이 내 말을 믿고 그 이치를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알기 어렵지 않다. 무릇 군자가 저 화려한 꽃을 싫어함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꽃이 크다고 해서 꼭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니 목단과 작약이 그런 것이다. 모과의 꽃은 목련에 미치지 못하고, 연봉오리의 열매는 대추와 밤만 못하다. 호박과 같은 것이 꽃을 가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하잘것없고 품위가 없어 봄날의 뭇 꽃들과 나란히 봄을 장식하거나 요염을 떨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넝쿨이 뻗어남은 멀고도 길어서 한 덩이 호박이면 한 가정의 끼니를 제공할 수 있고, 한 움큼의 씨이면 백마지기를 덮을 수 있으며, 따 갈라서 바가지를 만든다면 몇 말의 곡식을 담을 수 있으니 도대체 꽃과 열매란 어떠한 관계에 있다 할 것인가?

! 자후는 힘쓸지어다. 자후는 요염하고 기교를 가지거나 화려하고 고와서 지금 세상에 아첨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인기를 펼 수 있는 사람은 못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간직한 것이 둥글둥글하고 도타우며, 돈독하고 질박하다면 그 열매는 심을 수 있음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심었음이 이미 두텁다면 그 생육은 의당 더디겠으나 그 뿌리내림은 응당 튼튼할 것이니라. 내 어찌 이를 자후의 자식 두는 데에서만 징험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도 효자는 자손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영원히 그 무리가 뻗어나리라했다. 이러한 예로 미루어 그것이 영영세세토록 자손이 끊이지 않음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라. 내가 이제 이것을 글로 써주어서 자후의 집안에 효자가 나고 번성하기를 기다리겠노라.

 

 

 

파한집 이인로/이상보 옮김

함자진(咸子眞)이 관동에 원으로 나가 있을 때 부인 민 씨가 사납고 질투가 심해서 계집종이 너무 아름다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니 자진이 그야 아주 쉬운 일이다하고 고을 사람의 소와 계집종을 바꾸어 길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희롱삼아 절구 한 수를 지었다.

호수에 꾀꼬리* 날아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않고

강 언덕에 구슬을 잃어 찾으려 하나 어렵구나

원도와 항류*는 이제 어디 있는가?

난간가에 흑목단*뿐이로구나

그러나 길이 막혀 편지를 부칠 수가 없었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났다.

자진이 새로 홍도정리로 이사오니 나와 이웃해서 아침저녁으로 내왕했다.

내 시들을 보여달라기에 한 통을 내어 보이니 반쯤 읽어 내려가다가 벗이 부인의 강요로 계집을 소와 바꾸었다는 제목이 있자, 자진이 놀라며

이게 누굽니까

하고 묻자 내가 웃으며

그대가 틀림없소.”

하고 대답했다. 자진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한때 장난이었을 뿐이죠. 조롱해서 평하지는 말아야 옳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선생의 만고에 떨칠 시명(詩名)을 무엇으로 돕겠습니까? "

라 했다. 민 씨가 자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홀아비로 8년을 보내면서도 조금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정말 독실한 군자라 이를 만했다.

*함자진 : 이름은 순()

*꾀꼬리 : 여자를 가리킴

*원도와 항류 : 여자의 이름

*흑목단 : 소의 딴 이름

 

 

 

목란수-어유야담 중에서   유 몽 인

   공주(公主) 관아 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향이 강렬하고 잎이 넓었으며 꽃 색은 연한 자주빛이었고 가지와 줄기가 모두 아름다웠다. 관리들이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며 북돋아 증식시키면서도 옛부터 꽃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만력 무오년(戊午年 1618)에 명나라에서 표류해온 사람들이 공주를 지나가자,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그들 모두 목란수(木蘭樹)’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 나무를 재배하여 심는 방법을 물으니 가지만 잘라 심어도 모두 산다고 대답하였다. 이로부터공주 사람들이 비로소 그 나무가 목란(木蘭)임을 알게 되었다.

 ! 목란은 중국의 아름다운 나무이다. 처음부터 이 곳에서 자생한 것인지, 다른 곳에서 옮겨 심은 것인지, 아니면 전조(前朝)에서 배로 중국과 통행할 때 강남에서 옮겨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 나무는 뜰 가운데 서서 몇 년의 세월을 지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익히 보았는데도 목란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저리도 아름다운 나무가 뜰에 서있었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은 고깃덩어리인가 아니면 밀랍인가! 오직 중국 사람들만이 그 나무를 알아볼 수 있는가!

 

 

70리에 덮인 눈을 보고  이 덕 무

 이덕무(李德戀 1741~1793)는 자가 무관(懋官)이요, 호가 형암(炯庵) ·아정 (雅亭) ·청장관(靑莊館) · 영처(嬰處) 동방일사(東方一士) 등이다. 박학다재하고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저서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이 글은 원제가 칠십리설기 (七十里雪記),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嬰處文庫) 1에 실려 있다. 눈을 맞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위의 풍경을 예리한 눈으로 보고, 글로 그려 낸 글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그대로 연상될 정도로 작자의 묘사 능력이 뛰어나다. 실경(實景) 산수화 같은 산문이다.

    계미년(영조 33, 1762) 1222일에 나는 누른 말을 타고 충주(忠州)를 가려고 아침에 이부(利富) 고개를 넘었다. 그 때 마침 찬 구름은 하늘에 꽉 차 있고 눈이 펑평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눈송이가 비껴나는 모양이 마치 베틀 위의 씨줄과 같았다. 어여쁜 눈송이가 조용히 귀밑에 떨어져 은근한 뜻이 있는 듯하기에, 나는 이를 사랑하여 하늘을 우러러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산간의 가느다란 길이 제일 먼저 희어지고 멀리 보이는 소나무는 검푸른데, 푸른 빛깔이 흰 빛으로 물들려 하니 이것은 가까운 소나무임을 알겠다. 말라버린 수수대가 밭 가운데 서 있는데, 눈은 바람을 끼고 사냥하듯 몰아치니 쏴쏴 부르짖어 휘파람을 분다. 수수대의 빨간 껍질이 눈 위에 거꾸로 끌리니 저절로 초서(草書)가 된다. 나무가 여러 그루 섞여 있는데 암수 짝 지은 까치떼 예닐곱 마리가 한가로이 앉아 있다. 그것들은 부리를 가슴에 파묻어 눈을 반쯤 감고 자는 듯도 하고 자지 않은 듯도 하며, 혹은 조금 떨어져 또 부리를 갈기도 하며 목을 돌리고 발톱을 들어 눈을 긁기도 하고, 다리를 들어 옆에 있는 짝의 날개깃을 긁어 주기도 하며, 눈이 정수리에 쌓이면 흔들어 털고는 눈동자를 바로 하여 눈 날리는 모양을 보기도 한다.

   가파른 언덕으로 말을 달리니(원문 누락) 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비스듬한 소나무가 어깨를 스치기에 손을 들어 다섯 닢(원문 누락) 씹어보니 향기가 맑았으며, 눈 위에 침을 뱉으니 흰 눈이 벽옥같이 푸르러졌다. 눈이 품 안에 쌓여 턱까지 차는데도 차마 아까워서 털지 않았다. 말머리로 오는 사람은 볼이 붉고 주름도 없는데, 왼쪽 수염은 그을음과 같고 오른쪽 수염은(원문 1자 누락) 눈썹도 또한 이와 같았다. 나는 크게 웃어 갓끈이 끊어지려 할 정도였다. 품 안에 쌓인 눈을 털어 말갈기에 쓸고는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원문 누락) 눈이 서쪽을 향하여 날기 때문에 눈은 오른쪽 눈썹 위에만 쌓였는데, 수염도 눈썹과 같으니 사람이 늙어서 흰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수염이 없으므로 눈을 움직여 나의 눈썹을 치켜 보니 왼쪽 눈썹만 희다. 또 한 번 크게 웃다가 거의 떨어질 뻔하였다. 눈이 앞에서 불어오는데 앞으로 가니, 눈썹이 쉽게 희어졌다.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쭈그린 암석이 곱사등이처럼 구부리고 있는데, 이마에는 흰 눈이 덮였지만 우묵하게 들어간 배에는 눈이 없어 살짝 거무스름한 것이 찡그리는 듯하니, 그 모양은 귀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때로는 호랑이와 흡사하다. 이 때문에 말이 코를 불고 앞으로 가지 않는다. 마부가 소리를 내지르자 그제야 겨우 걸어갔다.

   유연히 말 가는 대로 행한 것이 대략 70리로 두메가 아니면 들이었다. 나무를 찍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맞붙은 듯 어슴푸레한 것이 수묵(水墨)으로 넓고 출렁거리는 강물을 그려 놓은 듯하니, 뉘라서 이렇게 농말(濃洙)을 만들었을까.

   평원(平遠)한 경색을 바라보니, 황혼의 강(暮江)과 안개 낀 물가의 모습이 홀연 두메와 들 사이에 펼쳐져 나로 하여금 의심하게 한다. 돛대가 은은하게 때로는 연기 끝에 나타나기도 하며,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노인이 고기를 메고 낚싯대를 끄는 듯, 은은히 비치는 마을 어귀에는 청둥오리가 울면서 빙 돌아 날아서 숲으로 모여든다. 저 멀리 능수버들 숲에는 햇볕에 말리는 어망(漁綱)이 흔들거린다.

    나는 의아함을 견디지 못하여 마부에게 물었지만 마부도 나와 같았다. 다시 나그네에게 물었더니 나그네는 마부와 같이 빙긋이 웃는다. 이에 말을 채찍질하여 동쪽으로 나아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앞서 있었던 강과 물가의 경관은 다름아닌 황혼이 점점 어둠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또 돛대가 은은하게 보였던 것은, 허물어진 집이 장마를 겪어 기둥만 서 있는데 백성이 가난하여 지붕을 이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노인이 도롱이와 삿갓을 차리고 낚싯대를 끌었던 것은 그가 두메에서 나오는 사냥꾼으로 물고기는 꿩이고 낚싯대는 지팡이며, 청둥오리는 오리가 아니라 검은 갈가마귀였고, 촌에 사는 백성이 짜 놓은 울타리가 종횡으로 되어 있어서 어망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그네는 내가 잘못 본 것을 비웃어 웃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물을 아홉 번 건넘   박 지 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朝鮮)의 실학자요, 소설가로, 자가 중미(仲美)요 호는 연암 (燕巖)이라. 젊은 날을 독서로 보내다 1780년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실학에 뜻을 두었다. 한성부 판관을 거쳐 양양부사로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의 한문소설은 당시 양반사회를 풍자하고,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한 것으로 유명  하다 저서로 연암집 (燕巖集)이 전한다.

   이 글은 원제가 일야구도하기(一夜直九渡河記)인데, 여기서는 여한십가문초 제7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실었다. 이 글에서는 강물 소리를 실감있게 구별하여 그려내는 솜씨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마땅한 처신(處身)을 되돌아보는 통찰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암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교훈은, 결국 인간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일이 달라지며, 사물의 이치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 글을 읽은 뒤 삶을 달관한 작자를 단지 부러워만 하고 있을 것인가.

    이 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돌에 부딪쳐 싸우며 흐르고 있었다. 그 놀란 물너울, 분노한 물결, 애원하는 듯한 여울은 내달아 들이받고 휘말려 곤두박질치고 울며 으르렁거리며 부르짖고 고함치면서 항상 장성을 쳐부술 기세다.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와 전포(戰砲) 만 가(萬架), 전고(戰鼓) 만 좌(萬坐)로서도 그 우르르쾅쾅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만족하게 형용하지 못할 것이다.

   모래 위에는 거대한 돌들이 우뚝우뚝 늘어서 있고 강류에는 버드나무들이 어두컴컴한 모습으로 있어, 흡사 물귀신들이 다투어 나와 사람 앞에 뻐기고 좌우의 교리(蛟螭)1)들이 움켜잡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이곳이 옛 전쟁터였기 때문에 물소리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물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의 집이 있는 산중 바로 문 앞에는 큰 내가 있다. 해마다 여름철 폭우가 한바탕 지나가면 냇물이 갑자기 불어나, 마냥 거마(車馬)와 포고(砲鼓) 소리를 듣게 되어 마침내 귀엣못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일찍이 문을 닫고 드러누워 그 냇물 소리를 유별(類別)하여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깊숙한 솔숲에서 울려 나오는 솔바람 같은 소리. 이 들림은 청아하다.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화 나 있다.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교만스럽다. 수많은 축(:현악기)이 번갈아 울어대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노기에 차 있다. 별안간 떨어지는 천둥 같은 소리. 이 들림은 경악에 차있다. 약하기도 세기도 한 불에 찻물이 끓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흥겹다. 거문고가 궁조(宮調)와 우조(羽調)로 울려나오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슬픔에 젖어 있다. 종이 바른 창문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 이 들림은 회의(懷疑)에 설레이고 있다. 이 모두가 똑바로 듣지 못한 것이다. 단지 가슴 속에 미리 정한 뜻을 두고, 귀가 받아들여 소리로 만들어진 것일 따름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물을 아홉 번 건넜다. 물은 새외(塞外)로부터 흘러나와 장성(長城)을 뚫고 유하(楡河) · 조하(潮河) · 황화(黃花) - 진천(鎭川) 등의 여러 줄기와 합쳐져 밀운성(密雲城) 밑을 지나 백하(白河)가 된다. 나는 어제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바로 이 물의 하류였다.

   내가 요동 땅에 처음 들어 봤을 때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뙤약별 속을 걸었다. 홀연히 대하(大河)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강에는 시뻘건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마주보이는 언덕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것은 천 리 밖 상류 지방에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 보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默禱)를 올리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을 외면하고 보지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는 물과 탕탕(蕩蕩)히 내닫는 물을 보았을 때,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시선이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 문득 현기증이 나서 물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에 그 잠깐 동안의 위급한 목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으라 !

   그 위험하기가 이와 같았는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말하였다.

   “요동(遼東)의 들이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이 성내어 울어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강물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오직 눈이 위태로움을 보는 데만 쏠려 , 벌벌 떨며 도리어 눈을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도대체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강을 건너므로 눈이 위태로움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위태로움이 오로지 청각으로 쏠려 귀가 이제는 벌벌 떨며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그윽하게 갖는 자는 이목(耳目)이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이목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 병()이 되는 것이다.

   내 마부(馬夫)가 말에 발을 밟혔기 때문에 첫 수레에 태우고, 드디어 말재갈을 풀고 강물에 들어갔다. 나는 무릎을 오그리고 발을 모아 안장 위에 앉았다. 말에서 한 번 떨어지기만 하면 강물 속이다. 그럴 경우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性情)을 삼으리라고 생각했다. 한 번 떨어질 것을 마음 속에 각오하자, 내 귀에는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데 조금도 걱정이 없어 마치 탁자 위에 좌와기거 (坐臥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가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등으로 배를 졌다고 하니, 이는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사생(死生)의 판단이 먼저 마음에 분명해지면, 용이라고 해서 크게 보일 것도 도마뱀이라고 해서 작게 보일 것도 없다.    소리와 빛은 외계(外界)의 그 사물이다. 외계의 사물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은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강물보다 심한 데가 있는데다, 보고 듣는 것이 곧잘 병이 되는 데에 있어서라. 나는 또 나의 산중에 돌아가 다시 앞 냇물 소리를 들어 이것을 징험해 보고, 그리고 몸가짐에 교묘하고 스스로 그 총명함을 자신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

1) 교와 리 모두는 아직 용이 되지 못했다는 상상의 동물

 

세검정에서 노닌 기(遊洗劍亭記)                                     정약용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하지 않고,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어도 성중(城中)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신해년(1791) 여름의 일이다. 나는 한혜보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 집에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하였다. 먹장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마른 우레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술병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만약 내켜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벌주 열 병을 한차례 갖추어 내는 걸세!”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창의문을 나섰다. 비가 벌써 몇 방울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옷자락이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니 겁이 나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술과 안주를 내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물도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까 심화오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져 벼렸다. 처음에 화오는 청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터였다. 여러 사람이 함께 골리며 조롱하다가 더불어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홍약여와 이휘조 윤무구 등이다

 

 

게으름도 때로는 이로움이 되나니( 원제 : 조용(嘲慵)         

 병술년 여름, 어느 날 나는 곤히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이었다. 정신이 산란한 것이 마치 병이 든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또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가슴이 돌에 눌린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게으름의 귀신이 든 것이 틀림없었다. 무당을 불러 귀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네가 나의 가슴속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나는 큰 병이 났다. 그 까닭을 말할 터이니 너는 잘 들어 보아라.

내가 고금의 역사를 살피고 경전을 읽어보니 게으른 사람은 이루어 놓은 것이 없고, 부지런히 일한 사람은 양식이 넉넉하며, 안일한 사람은 이룬 공적이 없고, 근면한 사람은 업적이 큼을 알았다. 하나라 우왕 같이 현명한 이도 촌음을 아꼈고, 주나라 무왕 같은 성인도 해질녘까지 한가한 틈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못하였는지 모르겠다. 맡은 직책마저 게을리 하고 놀기만 했으니 말이다. 저 농사꾼을 보아도 일 년 내내 일에 쫒기고, 저 장인들만 해도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하는데, 나는 어떻게 된 것이 일찍이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잠에만 녹아 떨어졌다.

 내가 벼슬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사람들은 서로 뒤질세라 분주하게 권문세가를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높은 벼슬자리를 얻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여 발이 있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괴롭게 낮은 벼슬에 얽매여 세 분의 임금님을 모시면서도 영전 한 번 못했다.

 내가 또 세상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매일 돈이 생길 구멍을 찾아다니다가 털끝만한 이익이라도 보이면 서로 머리가 터지게 다투어서라도 얻은 재물을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나는 저들과 같지 못해서 주먹을 쥐고 다툴 줄도 모르며, 화려한 것은  병적으로 싫어해서 가난 속에서 분수대로 사는 생활을 즐겼다.

 내가 또 젊은 사람들을 돌아보니 아름다운 노래와 춤에 빠져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가리지 않고 매일 흠씬 취해서 노는데, 나 같은 사람은 비록 초대를 받아도 한 번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은 나를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책이 있어도 읽지를 않으니 그 뜻이 애매하고, 거문고가 있어도 타지 않으니 취미가 적막하며, 손님이 찾아와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니 돌아가면서 욕을 한다. 또 말이 있어도 먹이지를 않으니 궁둥이뼈가 솟아나며, 병이 나도 치료하지 않으니 원기가 날로 쇠하고, 아들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니 세월만 허송하고 있다.

 활이 있어도 다루지 않고, 술이 있어도 거르지 않으며, 손이 있어도 세수조차 하지 않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져도 빗질조차 하지 않으며, 길이 어질러져도 쓸지 않고,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도 벨 생각을 하지 않으며, 게을러서 나무도 심지 않고 게을러서 고기도 낚지 않으며, 게을러서 바둑도 두지 않고, 게을러서 집을 수리할 생각도 못하며, 솥발이 부러져도 게을러서 고치지 않고, 의복이 해져도 게을러서 깁지 않으며, 종들이 죄를 지어도 게을러서 묻지 않고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도 게을러서 화를 내지 않아서, 마침내 날로 내 행동은 굼떠 가고, 마음은 바보가 되며, 나의 용모는 날로 여위어 갈 뿐만 아니라 말수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모든 나의 허물은 다 네가 내 속에 들어와 멋대로 한 결과이다. 어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 않고 나만 좆아 다니면서 귀찮게 구는가? 너는 어서 나를 떠나서 저 극락정토로 가거라. 그러면 나에게는 너로 해서 받게 되는 피해가 없을 것이요, 너는 또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가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랬더니 귀신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화를 입히겠습니까? 운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나의 허물로 여기지 마십시오, 굳센 쇠는 부서지고 강한 나무는 부러지며, 깨끗한 것은 더러움을 타기 쉽고, 우뚝한 것은 꺾이기 쉽습니다. 굳은돌은 조용함으로 해서 이지러지지 않고 높은 산은 고요함으로 해서 영원한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쉽게 요절하고 고요한 것은 오래오래 장수합니다. 지금 당신은 저 산과 같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근면은 도리어 화근이 되는 것, 당신과 같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도리어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요.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형세를 따라 우왕좌왕하여 그때마다 시비의 소리가 분분하지만, 지금 당신은 물러나 앉았으니 당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세상 사람들은 물욕에 휘둘려서 이익을 얻기 위해 날뛰지만, 당신은 걱정이 없어 제 정신을 잘 보존하니, 당신에게 지금 어느 것이 흉한 일이 되고 어느 것이 길한 일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이제부터 유지(有知)를 버리고 무지를 이루며, 유위(有爲)를 버리고 무위의 경지에 이르며, 유정을 버리고 무정을 지키며, 유생을 버리고 무생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도는 죽지 않고 하늘과 함께 아득하여 태초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앞으로도 계속 당신 자신을 잘 지키도록 도울 것인데, 도리어 나를 나무라시니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지요.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이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앞으로 내 잘못을 고칠 터이니 그대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게으름은 그제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있기로 했다

 

 

닭의 여섯 번째 미덕                      

 집에서 닭을 기른 적이 있다. 밥을 먹다

가 남은 것이 있으면 늘 닭을 불러 주곤 했다. 그것이 버릇이 되었던지 항상 밥상만 대하게 되면 소리를 내며 달려와 자리 옆에서 주는 밥알을 먹었다. 글 읽을 때에는 옆에 서 있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며, 어떤 때는 한 발로 책상 밑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글 뜻을 알아듣는 듯하고, 글씨를 쓸 때는 벼룻물을 쪼아 먹으며 벼슬을 갸우뚱거리며 곁눈으로 글씨를 보는 듯하고, 내가 오래 앉았다가 피곤하여 일어나 마당을 어정거리면 날개를 드리우고나와 발을 나란히 하여 내가 가는 대로 따라오는 것이 마치 아이가 어른을 뒤따르듯 했다.  닭은 본래 가축으로 기르는 것이니 사람에게 가까이 하는 것은 그의 본성이지만, 가까이하여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사람이 감화시켰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는 사람보다 신령한 것이 없기 때문에 큰 것으로는 용, 호랑이, 코뿔소 , 코끼리 같은 것도 기를 수 있고 작은 것으로는 날짐승 , 물고기, 곤충 같은 것도 모두 길들일 수가 있다. 그러나 저것들은 야성을 가진 동물이라 비록 억지로 순종하게 할 수는 있으나 은덕으로 감회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닭의 성질이 본래 사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옛사람은, “닭에게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1)고 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닭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는 덕목으로 닭의 다섯 가지 덕목에 하나를 더하려고 한다. 그리고 글을 지어 기록해 두는 바이다.

 닭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과 얼마나 다른가? 감동시키면 바로 응할 줄아네.

우리 사람들과 너는 원래 같은 무리. 그러니 네가 나를 어질게 본 것이겠는가, 내가 너를 어질게 본 것이겠는가. , 닭이여, 우리의 어진 본성을 저버리지 말자.

1) 첫째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니 문(). 둘째 발에 날카로운 며느리발톱이 있어서 무기가 되니 무(). 셋째 적과 잘 싸우는 용기가 있으므로 용(). 넷째 먹을 것을 얻으면 서로 가르쳐 주므로 인(). 다섯째 때를 알려주므로 신().그래서 닭의 다섯 가지 덕은 문,,,,신이라 한다.

윗글의 필자는 인을 여섯 번째 덕목으로 넣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닭의 5덕목을 잘못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우리고전 수필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