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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고사성어

임기종 2013. 9. 2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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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事成語

苛政猛於虎(가정맹어호)

苛:가혹할 가, 政:정치 정, 猛:사나울 맹, 於:~보다, 虎:호랑이 호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

【출 전】 ?禮記? 「檀弓記」

春秋時代 말엽, 孔子(:B.C 551~479)의 출생지였던 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인 대부 季孫子의 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孔子過泰山側 有婦人哭於墓者而哀 夫子式而廳之 使子路問之曰 子之哭也 壹似重有憂者 而曰 然 昔者 吾舅死於虎 吾夫又死焉 今吾子又死焉 夫子曰 何爲不去也 曰 無苛政 夫子曰 小子 識之 苛政猛於虎也

佳人薄命(가인박명)

佳:아름다울 가, 人:사람 인, 薄:엷을 박, 命:목숨 명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함. 재주가 많은 사람은 팔자가 기구하다.

소시(蘇軾)의 시(詩) 나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홍안박명(紅顔薄命) 미인박명(美人薄命) 이 있다. 아래 시를 쓴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소식은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쓴 데서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말이 전해졌다.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雙頰凝酥髮抹漆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眼光入廉珠的白樂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故將白練作仙衣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不許紅膏汗天質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앳되

吳音嬌軟帶兒癡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無限間愁總未知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自古佳人多命薄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 꽃 떨어지네.

閉門春盡楊花落

刻舟求劍(각주구검)

刻:새기다 각, 舟:배 주, 求:구하다 구, 劍:칼 검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표시를 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어리석어 시세에 어둡거나 완고함의 비유.

비슷한 말로 수주대토(守株待兎)란 말이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일이다.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싸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했다. 이윽고 배가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배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肝膽相照(간담상조)

肝:간 간, 膽:쓸개 담, 相:서로 상, 照:비추다 조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곧 ① 상호간에 진심을 터놓고 격의 없이 사귐.② 마음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나오는 말이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국의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문장으로 유명했던 중국의 여덟 사람을 일컫는 말) 중 당대의 두 대가에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운동을 제창한 친구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한유와 유종원의 성만 따서 부른 것)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때 유종원이 유주자사로 좌천되었는데, 그의 친구 유몽득(劉夢得)도 파주자사로 가게 되었다. 한유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이었던 파주자사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그의 묘지명에 이렇게 쓰고 있다.

“.....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또 흰소리를 치기도 하고 지나친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서로 양보하고 손을 맞잡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일단 털 끌만큼이라도 이해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擧案齊眉(거안제미)

擧:들거, 案:책상 안, 齊:가지런할 제, 眉:눈썹 미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깎듯이 공경함’을 이름.

후한서(後漢書)의 일민전(逸民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현(縣)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

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

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거안제미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皐白通)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梁鴻字伯鷰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日 欲得賢如梁伯鷰者鴻聞而聘之 字之日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春 每歸 妻爲具食不敢於鴻 前仰視 擧案齊眉.

乾坤一擲(건곤일척)

乾:하늘 건, 坤:땅 곤, 一:한 일, 擲:던질 척

하늘과 땅을 걸고 한번 주사위를 던진다는 뜻.곧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흥하든 망하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결행함의 비유.

일척건곤( 一擲乾坤), 재차일거(在此一擧)와 같은 말이다.

한유(韓愈)의 시 과홍구(過鴻溝)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의 대문장가인 한유가 홍구(하남성 내)을 지나다가 그 옛날 (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건곤일척(乾坤一擲)을 촉구한 장랑(張良)‧진평(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인 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용은 지치고 범은 피곤하여 강을 나누니龍疲虎困割川原

만천하 백성들의 목숨이 보존되는도다 億萬蒼生性命存

누가 군왕에게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하여誰勸君王回馬首

진정 ‘건곤일척’의 성패를 겨루게 했는가眞成一擲賭乾坤

전쟁 3년만에 秦나라를 멸하고(B.C. 206) 스스로 초패왕이 된 항우는 팽성(서주)을 도읍으로 정하고 의제(義帝)를 초나라의 황제로 삼았다. 그리고 유방을 비롯해서 진(秦)나라 타도에 기여한 유공자들을 왕후(王侯)로 봉함에 따라 천하는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의제가 시해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어 온 제후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자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항우가 제. 조. 양(齊‧趙‧梁)의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 진여. 팽월(田榮‧陳餘‧彭越)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시해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의 대군을 휘몰아 단숨에 팽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의 수중에 남겨둔 채로 겨우 목숨만 살아 형양(하남성 내)으로 패주했다.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쟝량과 진평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한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사오나 초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초나라를 멸하려는 하늘의 뜻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해하(안휘성 내)에서 초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오강(안휘성 내)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格物致知(격물치지)

格:이를 격. 物:만물 물. 致:이를 치. 知:알 지.

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朱子)의 설)

② 낱낱의 사물에 존재하는 마음을 바로잡고 선천적인 (良知)를 갈고 닦음 (王陽明의 설).

줄여서 격치(格致) 라고도 한다.사서삼경중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에 나오는 말리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은 유교의 교의(敎義)를 간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서 그 내용은 3강령(三綱領)(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 팔강목八條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으로 요약된다.

팔조목 중 여섯 조목에 대해서는 ?대학?에 해설이 나와 있으나 ‘격물’ ‘치지’의 두 조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없다. 그래서 송대(宋代)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나와 유교 사상의 근본 문제 중의 하나로 논쟁의 표적이 되어 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송나라 朱子(원래 이름은 주희, 1130~1200)의 설과 明(명)나라 왕양명 王陽明(원래 이름은 왕수인, 1472~1528)의 설을 들을 수 있다.

① 주자의 설 : 만물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 理’를 갖추고 있다. ‘이 理’를 하나 하나 궁구(窮究)(속속들이 깊이 연구함)해 나가면 어느 땐가는 豁然(활연:환하게 터진 모양)히 만물의 겉과 속, 그리고 정밀함(精)과 거침(粗)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② 왕양명의 설 : 격물의 ‘물’이란 事(사)이다.‘사’란 어버이를 섬긴다던가 임금을 섬긴다던가 하는 마음의 움직임, 곧 뜻이 있는 곳을 말한다. 사’라고 한 이상에는 거기에 마음이 있고, 마음밖에는 ‘물 物’도 없고 ‘이 理’도 없다. 그러므로 격물의 ‘격 格’이란 ‘바로잡는다’라고 읽어야 하며, ‘사 事’를 바로잡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악을 떠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사람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양지(良知)를 명확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지 知를 이루는(치致) 것이며 ‘치지 致知’이다.

犬免之爭(견토지쟁)

犬:개 견, 免:토끼 토, 之:갈 지(…의), 爭:다툴 쟁.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 곧 ① 양자의 다툼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利)을 봄에 비유. 橫財함의 비유. ② 쓸데없는 다툼의 비유.

같은 뜻으로 전부지공(田父之功).방휼지쟁(蚌鷸之爭). 어부지리(漁父之利).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이 있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된 淳于髡(순우곤)은 원래 해학과 변론의 뛰어난 설객說客이었다. 제나라 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려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名犬이 東郭逡(동곽준)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를 뒤쫓았사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 바퀴나 돈 다음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바람에 개도 토끼도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나이다. 이 때 그것을 발견한 ‘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를 하였나이다.지금 제나라와 위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하는 바람에 군사도 백성도 지치고 쇠약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온데 서쪽의 진秦나라나 남쪽의 초楚나라가 이를 기화로 ‘전부지공田父之功’을 거두려 하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옵니다.“이 말을 듣자 왕은 위나라를 칠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오로지 부국강병에 힘썼다.

結草報恩(결초보은)

結:맺을 결, 草:풀 초, 報:갚을 보,恩:은혜 은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비슷한 말로 각골난망刻骨難忘, 난망지은難忘之恩, 명심불망銘心不忘이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顆(과)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개가改嫁시키도록 하여라.”

하였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남편과 함께 순장시키는 옛날의 장례 풍속)케 해라.”

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

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시켜 드렸다.

그 후 진秦나라 환공桓公이 晉나라를 침략하여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顆(과)는 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진秦의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顆(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두회의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넘어지게 하여 과가 두회를 사로 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날 밤 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개가하여 잘 살고 있소.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오.”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候治兵于稷 以略秋士 立黎侯而還 及洛魏顆敗 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初魏武子有擘妾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 以亢杜回 杜回足質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傾國之色(경국지색)

傾:기울 경, 國:나라 국, 之:~의, 色:여자 색

나라 안에 으뜸가는 미인. 임금이 여인에게 반하여 나라가 뒤집혀도 모를 만한 미인.

비슷한 말로 경성지색傾城之色, 만고절색萬古絶色, 절세미인絶世美人이 있다 반대어로는 박색薄色이 있다.

한서漢書 이부인전李夫人傳 에 나오는 말이다.

‘경국傾國’이 ‘경성傾城’과 아울러 미인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인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시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北方有佳人

세상을 끊고(견줄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홀로 서 있네.絶世而獨立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一顧傾人城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再顧傾人國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寧不知傾城與傾國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경국傾國이란 말은 李白(이백)의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양상환:이름난 꽃이 나라를 기울이며 둘이 서로 즐거워한다.)」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왕은 색을 중히 여겨 경국을 생각한다.」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부인과 자식을 변설로써 찾아준 위공侯公을 한고조漢高祖가 「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鷄口牛後(계구우후)

鷄‧雞: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 곧 큰 집단의 말석보다는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말.

원말은 영위난구寧爲雞口 물위우후 勿爲牛後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아라)이다.

사기史記의 소진열전蘇秦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중엽, 동주東周의 도읍 낙양에 소진蘇秦( ?~B.C.317)이란 종횡가 縱橫家(모사)가 있었다. 그는 합종책合縱策으로 입신할 뜻을 품고,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동진東進정책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6국을 순방하던 중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을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나라는 지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차제에 6국이 남북, 즉 세로(縱:종)로 손을 잡는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책을 막고 국토를 보존하시오소서.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옛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혜왕은 소진의 합종설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6국의 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소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정치가가 되었다.

鷄群一鶴(계군일학)

鷄:닭 계. 群‧羣:무리 군. 一:한 일. 鶴:학 학.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

같은 말로 群鷄一鶴(군계일학). 雞群孤鶴(계군고학). 鶴立鷄群(학립계군), 出衆(출중), 拔群(발군), 絶倫(절륜)이 있다.

비슷한 말은 白眉(백미)가 있고 반대말로는 人中之末(인중지말)이 있다

晉書(진서)의 嵇紹傳:혜소전에 나오는 말이다.

魏晉(위진)시대에는 竹林七賢(죽림칠현)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老莊(노장:노자와 장자)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죽림칠현 중 위나라 때 中散大夫(중산대부)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嵇紹(혜소:?~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重臣(중신) 산도가 그를 武帝(무제: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천거했다.

“폐하,?書經(셔경)?의 「康誥篇(강고편)」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같이얽어맴)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晉(진)나라의 대부 郤缺(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면 丞(승:랑 위의 벼슬)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월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

“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鷄肋(계륵)

鷄:닭 계. 肋:갈빗대 륵.

먹자니 먹을 것이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란 뜻.

곧 ①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

② 닭갈비처럼 몸이 몹시 허약함의 비유.

後漢書(후한서)楊修傳(양수전)과 晉書(진서)劉伶傳(유영전)에 나오는 말이다.

① 삼국 시대로 접어들기 1년 전(219)인 후한後漢 말의 일이다. 위魏나라 왕인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원정을 떠났다. 익주(사천성)을 차지하고 한중으로 진출하여 한중왕을 일컫는 유비를 치기 위해서였다. 유비의 군사는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정면 대결을 피한 채 보급로 차단에만 주력했다. 배가 고파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자 조조는 어느 날, 전군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鷄肋(계륵)!”

‘계륵?’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主簿(주부) 벼슬에 있는 양수만은 서둘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 장수가 그 이유를 묻자 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닭갈비는 먹자니 먹을 게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한중 역시 그런 닭갈비 같은 땅으로 생각하고 철군을 결심하신 것이라오.”

과연 조조는 며칠 후 한중으로부터 전군을 철수시키고 말았다.

② 진晉(西晉, 265~316)나라 초기에 죽림칠현 가운데 유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취하여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은 점잖게 말했다.

“보다시피 ‘닭갈비(鷄肋)’처럼 빈약한 몸이라서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는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鷄鳴狗盜(계명구도)

鷄:닭 계. 鳴:울 명. 拘:개 구. 盜:도둑 도.

닭의 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라는 뜻.

곧 ① 선비가 배워서는 안 될 천한 기능을 가진 사람.

② 천한 기능을 가진사람도 때로는 쓸모가 있음의 비유

비슷한 말로函谷鷄鳴(함곡계명)이란 말이 잇다. 史記(사기)의 孟嘗君列傳(맹상군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중엽, 齊(제)나라 孟嘗君(맹상군)은 왕족으로서 재상을 지낸 정곽군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정곽공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수천 명에 이르는 그의 식객 중에는 文武之士(문무지사)는 물론 ‘拘盜’(구도:밤에 개가죽을 둘러쓰고 인가에 숨어들어 도둑질하는 좀도둑을 말함)에 능한 자와 닭 울음소리(鷄鳴:계명)을 잘 내는 자까지 있었다.

이 무렵(B.C.298), 맹상군은 秦(진)나라 소양왕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식객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비싼 狐白裘(호백구)를 예물로 진상했다. 소양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이 총애하던 첩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이 사실을 안 ‘구도’가 그날 밤 궁중에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내어 총희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 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계명(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人家(인가) 쪽으로 갑자기 사라진후, 얼마 안되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일행은 그 문을 나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그 직후였다고 한다.

鼓腹擊壤(고복격양)

鼓:북‧북칠 고. 腹:배 복. 擊:칠 격. 壤:땅 양.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한다는 뜻으로, 태평 성대를 형용하여 이르는 말.

준말로 擊壤(격양)이 있고 같은 뜻을 가진 말로는 擊壤之歌(격양지가), 擊壤歌(격양가). 堯舜之節(요순시절), 太平聖代(태평성대) 가 있다.

十八史略(십팔사략)의 帝堯篇(제요편)과 樂府詩集(악부시집)의 擊壤歌(격양가)에 나오는 말이다.

먼 옛날 중국에 성군으로 이름난 요(堯)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민정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立我烝民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莫匪爾極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不識不知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順帝之則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하얀 한 노인이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鼓腹:고복)’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격양)’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日出而作 日入而息

밭을 갈아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耕田而食 鑿井而飮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帝力何有 于我哉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정치가 잘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孤城落日(고성낙일)

孤:외로울 고, 城:성 성, 落:떨어지다 락, 日:해 일

남의 도움이 없는 몹시 외로운 정상의 비유.

唐(당)나라 왕유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유(王維:699-759)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인 송위평사送韋評事(위평사를 보냄)에서 읊은 것이다.

장군을 따라서 우현(右賢)을 취하고자 하니, 欲逐將軍取右賢

모래밭으로 말을 달려 거연(居延)으로 향하네. 沙場走馬向居延

멀리 한나라 사자가 소관(蕭關) 밖에 옴을 아니, 遙知漢使蕭關外

근심스러워 보이는구나, 고성낙일(孤城落日)의 가여. 愁見孤城落日邊

이 시에서는 직접 세력이 쇠퇴하여 도움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음이 안 놓이는 상태에 있음을 비유하여, 「孤城落日(고성낙일)」이 불려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요새 밖의 쓸쓸한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그곳에 간 친구가 그곳에서 겪을 안타까운 처지를 상상하여, 그 처지를 위로하는 기분으로 읊은 것이다.요새 밖에서의 안타까움을 ‘孤城(고성)’과 ‘落日(낙일)’이라는 사물에 집약시킨 왕유의 필치도 멋지지만, 홀로 쓸쓸하게 완전히 썩어버릴 일에 마음이 안 놓이는 것을 상상으로 하여, 이것을 사용하는 후세 사람들의 말의 사용법도 또한 묘미가 있다.

高枕安眠(고침안면)

高:높을 고. 枕:베개 침. 安:편안할 안. 眠:잘 면.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는 뜻.

곧 ① 근심 없이 편히 잘 잠. ② 안심할 수 있는 상태의 비유.

같은 뜻으로 高枕而臥(고침이와)가 있다.

戰國策(전국책))의 魏魏策 哀王(위위책 애왕)과 史記(사기)의 張儀列傳(장의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과 장의는 縱橫家(종횡가)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合縱(합종), 장의는 連衡(연형)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秦(진)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 곧 韓(한)‧魏(위)‧齊(제)‧楚(초)가 동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며, 연횡이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손잡는 것이지만 실은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문공 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화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고침안면)’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周(주)나라 赧王(난왕)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曲學阿世(곡학아세)

曲:굽을 곡. 學:학문 학. 阿:아첨할 아. 世:인간‧세대 세.

학문을 굽히어 세속(世俗)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함을 이르는 말.

비슷한 말로 御用學者(어용학자)가 있다.史記(사기)의 儒林傳(유림전)에 나오는 말이다.

漢(한)나라 6대 황제인 景帝(경제: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에 사는 轅固生(원고생)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같은 선비로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했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출신의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 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正道(정도)가 어지러워져서 俗說(속설)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邪說(사설)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곡학)’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아세)’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泰山北斗(태산북두)를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骨肉相爭(골육상쟁)

骨 : 뼈 골 肉 : 고기 육 相 :서로 상 爭 : 다툴 쟁

부자나 형제간의 싸움을 이르는 말.

【참고】 七步之才(칠보지재)

조조는 훌륭한 무장이자 보기 드문 문학 애호가였다. 동한말 실세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자 그의 문하에는 시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曹丕(조비)는 후에 漢(한)을 무너뜨리고 魏(위)를 세워 삼국시대를 열게 된다.그도 아버지처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중국 최초로 문학비평을 시도했는가 하면 최초로 7언시를 지었다. 둘째 아들 曹植(조식)도 문학과 무예에서는 형 못지 않았다. 조조는 그런 조식이 더 맘에 들었던지 그를 편애했다. 조비의 눈에는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니 이가 文帝(문제)다.하루는 조식을 해칠 생각으로 말했다. “내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내리겠다. 조식은 골육상쟁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

이 시를 들은 문제는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空中樓閣(공중누각)

空:빌 공. 中:가운데 중. 樓:다랄 루. 閣:누각 각.

공중에 떠 있는 누각, 蜃氣樓(신기루)란 뜻.

① 내용이 없는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론(議論).

② 진실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일.

③ 허무하게 사라지는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

誇大妄想(과대망상)이라고도 표현한다. 夢溪筆談(몽계필담)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의 학자 沈括(심괄)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登州(등주)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城市樓臺(성시누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海市(해시)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 遙見空際 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훗날 淸나라의 학자 翟灝(적호)는 그의 저서 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의 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이처럼 ‘공중누각’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해시’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過猶不及(과유불급)

過:지날 과. 猶:같을 유. 不:아니 불. 及:미칠 급.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뜻.

論語(논어)先進扁(선진편)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제자인 자공(子貢:B.C. 520~456)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자공이 다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

공자는 中庸(중용: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中正함)의 도(道)를 말했던 것이다.

瓜田李下(과전이하)

瓜:오이 과. 田:밭 전. 李:오얏 리. 下:아래 하.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원말은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이다. 같은 뜻으로 瓜田履 李下冠(과전리 이하관 ), 이하관 과전리 이 있다.

列女傳(周(열녀전), 文選(문선) 樂府篇(악부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인 주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虞姬(우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臣妾(신첩)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靑天白日(청천백일)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裹革之尸(과혁지시)

裹:쌀 과, 革:가죽 혁, 之:~의, 尸:시체 시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

後漢書(후한서)馬援傳(마원전)에 나오는 말이다.

마원은 후한 광무제 때 伏波將軍(복파장군)으로 지금의 월남인 交趾(교지)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맹장으로 다시 계속해서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야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환영 인파 속에는 지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孟翼(맹익)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은 듯한 인사말을 하자 마원은,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복파장군 路博德(노박덕)이 南越(남월)을 평정하고 일곱 郡(군)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烏桓(오환)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裹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가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을 다같이 환송토록 명했다고 한다.

管鮑之交(관포지교)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의). 交:사귈 교.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같은 뜻으로 管鮑交(관포교)가 있다. 비슷한 말로는 刎頸之交(문경지교), 金蘭之交(금란지교), 斷金之交(단금지교), 水魚之交(수어지교), 膠漆之交(교칠지교), 莫逆之友(막역지우)가 있고 반대말은 市道之交(시도지교)이다.

史記(사기)의 管仲列傳(관중열전)과 列子(열자)의 力命篇(역명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엽, 濟(제)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竹馬故友(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公子(공자) 糾(규)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小白(소백)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襄公(양공)이 사촌 동생 公孫無知(공손무지)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魯(노)나라와 莒(거)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君位(군위:임금 자리)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政敵(정적:정치적 대적 관계)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大夫(대부)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倉廩實則 知禮節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

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德本主義(덕본주의)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春秋(춘추)시대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무튼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刮目相對(괄목상대)

刮:비빌 괄. 目:눈 목. 相:서로 상. 對:마주 볼‧대할 대.

눈을 비비고 본다는 뜻.

곧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전에 비하여 딴 사람으로 볼 만큼 부쩍 는 것을 일컫는 말.

三國志(삼국지) 중 吳志 呂蒙傳注(오지 여몽전주)에 나오는 말이다.

三國時代(삼국시대) 초엽, 吳王(오왕) 孫權(손권:182~252)의 신하 장수에 呂蒙(여몽)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쟁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卷:수불석권)’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重臣(중신)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상 魯肅(노숙)이 전지 시찰 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때 여몽이 아닐세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괄목상대)’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 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曠日彌久(광일미구)

曠:빌‧멀 광. 日:날 일. 彌:많을 미. 久:오랠 구.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낸다는 뜻.

戰國策(전국책) 중 趙策(조책)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말엽,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의 일이다.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은 혜문왕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3개 성읍城邑을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명장 田單(전단)의 파견을 요청했다. 전단은 일찍이 연나라의 침략군을 火牛之計(화우지계)로 격파한 명장인데 조나라의 요청에 따라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의 명장 趙奢(조사)는 재상 평원군平原君에게 항의하고 나섰다.

“아니, 조나라엔 사람이 없단말입니까? 제게 맡겨주신다면 당장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평원군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사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원수 사이이긴 합니다만 전단은 타국인 조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한 조나라는 제나라의 霸業(패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단은 조나라 군사를 장악한 채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낼 것입니다(曠日彌久:광일미구).’ 두 나라가 병력을 소모하여 피폐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평원군은 조사의 의견을 묵살한 채 미리 정한 방침대로 전단에게 조나라 군사를 맡겨 연나라 침공군과 대적케 했다. 결과는 조사가 예언한 대로 두 나라는 장기전에서 병력만 소모하고 말았다.

光風霽月(광풍제월)

光:빛 광, 風:바람 풍, 霽:개다 제, 月:달 월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

宋書(송서) 周敦頤傳(주돈이전)에 나오는 말이다.

주돈이(周敦頤 : 1017-1073)는 北宋(북송) 중기에 나와 ?太極圖說(태극도설)?과 ?通書(통서)?을 저술했고, 그 뒤에 程顥(정호)와 程頤(정이)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中庸·論語·孟子)를 정했으며, 朱子(주자)가 이것을 집대성하여 形而上學(형이상학)으로서의 經學(경학)을 수립하여 소위 宋學(송학)을 大成(대성)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愛蓮說(애련설)> 한 편은 글 안에 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蘇軾(소식)과 함께 北宋(북송)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黃庭堅(황정견 : 1045 - 1105)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春陵(춘릉)의 周茂叔(주무숙)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光風霽月(광풍제월)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앞에서 말한 뜻 뿐 아니라,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巧言令色(교언영색)

巧:교묘할 교, 言:말씀 언, 令:명령할‧하여금 령, 色:빛 색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라는 뜻으로,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이르는 말.

반대말로 剛毅木訥(강의목눌), 誠心誠意(성심성의)가 있다.

論語(논어) 學而篇(학이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아첨꾼에 대해 論語(논어)學而篇(학이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

巧言令色 鮮矣仁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子路篇(자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에 가깝다.

剛毅木訥 近仁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擁也篇(옹야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이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文質彬彬 然後君子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사라는 뜻이다.

膠柱鼓瑟(교주고슬)

膠:아교 교, 柱:기둥 주, 鼓:북 고, 瑟:거문고 슬

고지식하여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의 비유.

史記(사기) 廉頗 藺相如列傳(염파 인상여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조나라에 趙奢(조사)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括(괄)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는,

“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으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이 장수가 된다면 조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을 하기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유언비어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藺相如(인상여)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膠柱(기둥)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광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수 없게 되어 소리가 제대로 날리가 없었다.

膠漆之心(교칠지심)

膠:아교 교, 漆:옻 칠, 之~의 지, 心:마음 심

아교(膠)와 옻칠(漆)처럼 끈끈한 사귐이란 뜻으로,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교분(交分)을 이르는 말.

元微之 白氏文集(원미지 백씨문집)에 나오는 말이다.

唐(당)나라 때 白樂天(백낙천)과 元微之(원미지)는 校書郞(교서랑)시절의 동료요, 천자가 親裁(친재)하여 등용하는 과거에 함께 급제했고, 시의 혁신에도 뜻을 같이 해서 漢(한)나라 시대의 민요를 토대로 시대의 폐단인 백성들의 분노와 고통과 번뇌를 담은 樂府(악부)에 유교적인 민본사상을 맥박치게 하는 新樂府(신악부)를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두 사람 다 시골로 좌천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니 그리워서 백낙천이 원미지에게 편지를 썼다.

“4월 10일 밤에 낙천은 아뢴다. 미지여, 미지여,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이미 3년이 지났네.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도 2년이 되려고 하네. 인생이란 길지 않은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니 말일세. 하물며 아교와 옻칠 같은 마음(況以膠漆之心)으로써 북쪽 오랑캐 땅에 몸을 두고 있으니 말일세. 나아가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물러서도 서로 잊을 수 없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어, 각자 흰머리가 되려고 하네. 미지여, 미지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실로 하늘이 하신 것이라면, 이것을 어찌하랴!“

四月 十日夜 樂天白

微之 微之 不見足下面 已三年矣 不得足下書 欲二年矣 人生幾何 離闊如此 況以膠漆之心 置於胡越之身 進不得相合 退不得相忘 牽奱乖隔 各欲白首 微之 微之 如何 如何 天實爲之 謂之奈何.

口蜜腹劍(구밀복검)

口:입 구. 蜜:꿀 밀. 腹:배 복. 劍:칼 검.

입 속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지녔다는 뜻으로, 말로는 친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은근(慇懃)히 해칠 생각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비슷한 말로 笑裏藏刀(소리장도), 笑中有劍(소중유검), 面從腹背(면종복배), 敬而遠之(경이원지), 羊頭狗肉(양두구육), 表裏不同(표리부동)이 있다.

新唐書(신당서)에 나오는 말이다.

唐(당)나라 玄宗(현종: 712~756) 후기에 李林甫(이림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위로는 태자로부터 아래로는 그 유명한 무장인 安祿山(안록산)까지 두려워했던

전형적인 宮中政治家(궁중정치가)였다. 뇌물로 환관과 후궁들의 환심을 사는 한편

현종에게 아첨하여 마침내 재상이 된 그는, 당시 楊貴妃에게 빠져 政事를 멀리하는

현종의 유흥을 부추기며 조졍을 좌지우지했다.

만약 바른말을 하는 충신이나 자신의 권위에 위협적인 신하가 나타나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런데 그가 정적을 제거할 때에는 먼저 상대방을 한껏 추켜 올린 다음 뒤통수를 치는

表裏不同(표리부동)한 수법을 썼기 때문에 특히 벼슬아치들은 모두 이림보를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림보는 ‘입으로 꿀 같은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무서운 칼이 들어 있다(口蜜腹劍).’”

李林甫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 ‘口有蜜腹有劍’ 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之亂 而上不悟 然綠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末 敢反.

九牛一毛(구우일모)

九:아홉 구, 牛:소 우, 一:한 일, 毛:털 모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쇠)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것 중에 가장 적은 것의 비유.

비슷한 말로 滄海一粟(창해일속), 滄海一滴(창해일적), 大海一滴(대해일적)이 있다.

漢書(한서)報任安書(보임안서)와 文選(문선)司馬遷 報任少卿書(사마천 보임소경서)에 나오는 말이다.

漢(한)나라 7대 황제인 武帝(무제:B.C. 141~87) 때(B.C. 99)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亂戰(난전)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一族(일족)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래서 이를 분개한 司馬遷(사마천: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광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에 임할 용장’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史家(사가)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고통을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皇恩(황은: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苦肉策(고육책)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한 후 宮刑(궁형)에 처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任安(임안)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太史令(태사령)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司馬談(사마담)이 임종시(B.C. 122)에 ‘通史(통사)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史記(사기)?을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을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후에 중국 최초의 史書(사서)로서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130여권이 완성(B.C. 97)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國士無雙(국사무쌍)

國:나라 국. 士:선비 사. 無:없을 무. 雙:쌍 쌍.

나라 안에 견줄 만한 자가 없는 인재라는 뜻으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

비슷한 말은 棟梁之器(동량지기), 國土無雙(국토무쌍), 一世之雄(일세지웅) 이다.

史記(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한 한왕 漢王 원년(B.C. 206)의 일이다. 당시 한나라 군대에는 한신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楚軍(초군)에 속해 있었으나 아무리 軍略(군략)을 내놔도 받아 주지 않는 항우에게 실망하여 초군을 이탈, 한군에 투신한 사람이다. 그 후 한신은 우연한 일로 재능을 인정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治粟都尉(치속도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직책상 승상인 蕭何(소하)와도 자주 만났다. 그래서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 소하는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무렵, 고향을 멀리 떠나온 한군은 향수에 젖어 도망치는 장병이 날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 도망병 가운데는 한신도 끼어 있었다. 英才(영재)를 자부하는 그는 ‘치속도위’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자 황급히 말에 올라 그 뒤를 쫓았다. 그 광경을 본 장수가 소하도 도망가는 줄 알고 유방에게 고했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듯이 낙담한 유방은 노여움 또한 컸다. 그러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노한 얼굴로 도망친 이유를 물었다.

“丞相(승상)이란 자가 도망을 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오?”

“도망친 것이 아니오라, 도망친 자를 잡으러 갔던 것이옵니다.”

“그래, 누구를?”

“한신이옵니다.”

“뭐, 한신? 이제까지 열 명이 넘는 장군이 도망쳤지만, 경은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뒤쫓은 적이 있소?”

“이제까지 도망친 여러 장수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사오나,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이 파촉의 땅만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한신이란 인물은 필요 없사옵니다. 하오나 동방으로 진출해서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이 소망이시라면 한신을 제쳐놓고는 함께 군략을 도모할 인물이 없는 줄로 아나이다.”

“물론, 과인은 천하 통일이 소망이오.”

“하오면 한신을 활용하시오소서.”

“짐은 한신이란 인물을모르지만 경이 그토록천거하니 경을 위해 그를 장군으로 기용하겠소.”

“그 정도로는 활용하실 수 없사옵니다.”

“그러면 대장군에 임명하겠소.”

이리하여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다. 이제서야 한신은 그의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群盲撫象(군맹무상)

群:무리 군. 盲:소경 맹. 撫:어루만질 무. 象:코끼리 상.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진다는 뜻. 곧 ① 범인(凡人)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의 비유. ② 범인의 좁은 식견의 비유.

群盲摸象(군맹모상). 群盲評象(군맹평상)와 같은 말이다.

涅槃經(열반경)에 나오는 말이다.

인도의 鏡面王(경면왕)이 어느 날 맹인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끌어오게 한 다음 소경들에게 만져 보라고 했다. 얼마 후 경면왕은 소경들에게 물었다.

“이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느냐?”

그러자 소경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알았나이다.”

“그럼, 어디 한 사람씩 말해 보아라.”

소경들의 대답은 각기 자기가 만져 본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달랐다.

“무와 같사옵니다.” (상아)

“키와 같나이다.” (귀)

“돌과 같사옵니다.” (머리)

“절굿공 같사옵니다.” (코)

“널빤지와 같사옵니다.” (다리)

“독과 같사옵니다.” (배)

“새끼줄과 같사옵니다.” (꼬리)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석가모니를 비유한 것이고, 소경들은 밝지 못한 모든 중생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들이 석가모니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모든 중생들에게는 각기 석가모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君子三樂(군자삼락)

君:임금 군. 子:아들 자. 三:석 삼. 樂:즐길 락, 좋아할 요.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君子有三樂(군자유삼락)에서 나온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益者三樂(익자삼요)가 있고 반대말은 損者三樂(손자삼요)이다.

孟子(맹자)盡心篇(진심편)에 있는 말이다.

전국시대,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孟子(맹자:B.C. 372?~289?)는 맹자 진심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몸을 구부려 아랫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君子有三樂 父母具存 兄弟無故 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한편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손해가 되는 세가지 좋아함(損者三樂-손자삼요)’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교락(驕樂:방자함을 즐김), 일락(逸樂:놀기를 즐김), 연락(宴樂:주색을 즐김).

捲土重來(권토중래)

捲:걷을‧말 권. 土:흙 토. 重:무거울‧거듭할 중. 來:올 래.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한 사람이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공격(도전)해 온다는 말.

원말은 卷土重來(권토중래)이다. 비슷한 말로는 死灰復燃(사회부연)이 있다.

杜牧(두목)의 시 「題烏江亭(제오강정)」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 「題烏江亭」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勝敗兵家不可期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包羞忍恥是男兒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江東子弟俊才多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捲土重來未可知

오강(烏江:안휘성 내)은 楚霸王(초패왕) 항우(項羽:B.C. 232~202)가 스스로 자결한 곳이다.

한왕 유방과 해하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신하들로부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을 돌아가(無面 江東)’ 부형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 만장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은 오강의 객사(客舍-일종의 여관)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였던 단순하고 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었으면서도, 사면 초가(四面楚歌)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 준 인간적인 매력도 가지고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捲土重來(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王安石(왕안석)은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읊었고, 司馬遷(사마천)도 그의 저서 ?史記(사기)?에서 ‘항우는 힘을 과신했다’고 쓰고 있다.

克己復禮(극기복례)

克:이기다 극, 己:자기 기, 復:돌아가다 복, 禮:예 례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좇음.

論語(논어)顔淵篇(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의 대표적 사상은 ‘인 仁’이었다. 논어에는

“인仁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누가 인仁한가? 모든 사람이 인仁 때문에 살면서 인仁을 모르고 인仁을 외면한다”

고 하시며 “인仁 좋아하기를 색色 좋아하듯 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라고도 했다.

극기복례 克己復禮도 仁의 정의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감이 仁이 된다. 하루동안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간다. 仁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묻자,

“禮(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禮(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禮(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禮(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했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金蘭之交(금란지교)

金:금 금, 蘭:란 란, 之:~의 지, 交:사귀다 교

①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情義), ② 다정한 친구 사이의 교제(交際)

易經(역경)繫辭上傳(계사상전)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同人 先號咷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惑出惑處 惑黙惑 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易經 繫辭上傳?

몹시 친밀한 사이를 「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백낙천의 시구에도 나온다.

錦上添花(금상첨화)

錦:비단 금, 上:위 상, 添:더하다 첨, 花 : 꽃 화

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을 더함.

반대말은 雪上加霜(설상가상), 病上添病(병상첨병)이다

王安石(왕안석)의 詩 「卽事(즉사)」에 나오는 말이다.

王安石(왕안석)은 北宋(북송) 중엽, 군사비 팽창에 의한 경제적 파탄을 구하려고 획기적인 新法(신법)을 실시한 정치적 귀재일 뿐 아니라 宋나라 시대의 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다음 시 <卽事>는 그가 만년에 정계를 떠나 南京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은 남원을 흘러 언덕 서쪽으로 기우는데 河流南苑岸西斜

바람엔 맑은 빛이 있고 이슬에는 꽃의 화려함이 있네.風有晶光露有華

문앞의 버들은 옛 도령의 집이요 門柳故人陶令宅

우물가의 오동은 전날 총지의 집이라.井桐前日總持家

좋은 모임에서 술잔을 거듭 비우려 하는데嘉招欲履盃中淥

아름다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한 듯麗唱仍添錦上花

문득 무릉의 술과 안주를 즐기는 손이 되어便作武陵樽俎客

내 근원에 응당 붉은 노을이 적지 않으리라.川源應未少紅霞

金城湯池(금성탕지)

金:쇠 금, 城:성 성, 湯:넘어질 탕, 池:못 지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

湯池鐵城(탕지철성)와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金城鐵壁(금성철벽)이 있다.

漢書(한서) 蒯通傳(괴통전)에 나오는 말이다.

秦(진)나라 始皇帝(시황제 : B.C 246-210)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전국시대 6강국의 후예들이 군사를 일으켜 고을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관청을 점거했다. 그 무렵,

武信(무신)이라는 사람이 趙(조)나라의 옛땅을 평정하고 武信君(무신군)이라 일컬었다.

이를 본 모사 蒯通(괴통)은 范陽縣令(범양현령) 徐公(서공)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지금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대로 하시면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서공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무엇이 위급하다는 거요?”

“사또께서 현령으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에 秦나라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부모를 처형당한 사람, 손발이 잘린 사람,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그들이 사또를 원망하며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또 무슨 말이오?”

“제가 사또를 대신해서 지금 세력이 한창인 무신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사또를 후대할 것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오.”

이리하여 무신군을 찾아간 괴통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貴公(귀공)이 범양을 쳐서 현령이 항복한 경우, 그 현령을 푸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귀를 바라는 각지의 현령들은 ‘항복하면 범양 현령처럼 푸대접받는다.’며 더욱 군비를 강화하여 마치 ‘끓어오르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金城湯池)’ 같은 철벽의 수비를 굳히고 귀공의 군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땐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 범양 현령을 극진히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각지의 현령들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기꺼이 항복할 것입니다.”

錦衣夜行(금의야행)

錦:비단 금 衣:옷 의. 夜:밤 야. 行:다닐‧행할 행.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간다는 뜻.

곧 ① 아무 보람없는 행동의 비유.

② 立身出世(입신출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음의 비유.

같은 말로는 繡衣夜行(수의야행).반대말은 錦衣晝行(금의주행), 錦衣還鄕(금의환향)이 있다.

漢書(한서)「項籍傳(항적전)과 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에 나오는 말이다.

劉邦(유방)에 이어 秦(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한 項羽(항우)는 유방과는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 둔 3세 황제 子嬰(자영)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 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그 불을 안주삼아 미녀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謀臣(모신) 범증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財寶(재화와 보물)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江東(강동)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자 한생이라는 사람이 간했다.

“관중(關中: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분지)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하옵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시오소서.”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한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안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자 이렇게 말했다.

“楚(초)나라 사람은 ‘원숭이(沐猴:목후)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猴而冠:목후이관)처럼 지혜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삶아 죽였다고 한다.  이 ‘금의야행’에서 ‘錦衣晝行(비단옷을 입고 낮길을 간다)’ ‘錦衣還鄕(비단옷을 입고-입신 출세해서-고향으로 돌아간다)’이라는 말이 나왔음.

杞人之優(기인지우)

杞:나라 이름 기. 人:사람 인. 之:갈 지(…의). 優:근심 우.

기(杞)나라 사람의 작은 걱정이란 뜻. 곧 쓸데없는 군걱정. 헛 걱정. 무익한 근심.

줄여서 기우杞優라 한다. 같은 뜻의 말로는 기인우천杞人優天이 있고 비슷한 말은 吳牛喘月(오우천월)이다.

얄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왕조 周王朝 시대, 기나라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진다면 몸둘 곳이 없지 않은가?’

그는 이런 걱정을 하느라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저러다 죽지 않을까?’ 걱정이 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하늘은 (공)기가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기가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몸을 굴신(屈伸:굽힘과 폄)하고 호흡을 하는 것도 늘 하늘 안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日月星辰:해와 달과 별)이 떨어저 내릴 게 아닌가?”

“일월성신이란 것도 역시 쌓인 기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일 뿐이야. 설령 떨어져 내린다 해도 다칠 염려는 없다네.”“그럼, 땅이 꺼지는 일은 없을까?”

“땅은 흙이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사방에 흙이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뛰고 구르는 것도 늘 땅 위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땅이 꺼진단 말인가? 그러니 이젠 쓸데없는 군걱정은 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騎虎之勢(기호지세)

騎:말탈 기. 虎:범 호.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호랑이를 자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

곧 ①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② 내친걸음

騎獸之勢(기수지세)기 원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騎虎難下(기호난하)가 있다

북서北書 독고전獨孤傳에 나오는 말이다.

南北朝(남북조)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北周(북주)의 宣帝(선제)가 죽자, 재상 양견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漢族(한족)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鮮卑族(선비족)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양견의 뜻을 알고 있는 아내 獨孤(독고) 부인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靜帝(정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文帝(문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隋(수)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 최후의 왕조인 陳(진)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當周宣帝崩 高祖入居禁中 總百揆 后使人謂高祖曰 大事已然 騎虎之勢 不得不勉之.

奇貨可居(기화가거)

奇:기이할 기. 貨:재물 화. 可:옳을‧허락할 가. 居:살‧있을 거.

진귀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을 얻게 한다는 뜻.

곧 ①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음.

② 훗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돌봐 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

③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음.

史記(사기)呂不韋列傳(여불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말, 韓(한)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는 무역을 하러 趙(조)나라의 도읍 邯鄲(한단)에 갔다가 우연히 秦(진)나라 소양왕의 손자인 자초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이것이야말로 기화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正嬪(정빈-본부인)인 화양부인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庶出(서출)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千金(천금)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말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政(정)은 훗날 始皇帝(시황제)가 되었다.

洛陽紙貴(낙양지귀)

洛:물 이름 락. 陽:볕 양. 紙:종이 지. 貴:귀할 귀.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하는 뜻. 곧 저서가 호평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됨을 이르는 말.

원말은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란 말이다. 같은 말로는 洛陽紙價高(낙양지가고)가 있다.

晉書(진서)文傳(문전)에 나오는 말이다.

晉(진:265~316)나라 시대, 齊(제)나라의 도읍 임치 출신의 시인에 좌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남에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일단 붓을 잡으면 장려한 시를 썼다.

그는 임치에서 집필 1년 만에 ?齊都賦(제도부)?을 탈고하고 도읍 낙양으로 이사한 뒤 삼국시대 촉한의 도읍 성도(成都), 오나라의 도읍 건업(建業:南京), 위나라의 도읍 업(鄴)의 풍물을 읊은 ?三都賦(삼도부)?을 10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라는 유명한 시인이 ?삼도부?을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반고)‧장(張:장형)의 유(類-거의 같은 경지)이다.”

後漢(후한) 때 ?兩都賦(양도부)?을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저술),?이경부(二京賦)?을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삼도부?은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환관‧문인‧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고 한다.

難兄難弟(난형난제)

難:어려울 난, 兄:형 형, 弟:아우 제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두 사물의 낫고 못함을 분간하기 어려움의 비유.

비슷한 말로는 막상막하(莫上莫下), 백중지세(伯仲之勢), 호각지세(互角之勢) 가 있다.世說新語(세설신어)德行篇(덕행편)에 나오는 말이다.

梁上君子(양상군자)로 유명한 後漢(후한)의 진태구가 낭능후(郎陵候)를 지낸 순숙(筍淑)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 : 元方원방)와 진심(陳諶 : 季方계방), 진군(陳群 : 長方장방)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德星)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

라고 했다. 진식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사촌간인 진기의 아들과 진심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은, “원방(진기)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진심)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

(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말했다 한다.

南柯一夢(남가일몽)

南:남녘 남. 柯:가지 가. 一:한 일. 夢:꿈 몽.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① 덧없는 한때의 꿈. ②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南柯之夢(남가지몽). 南柯夢(남가몽). 槐夢(괴몽)이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은 邯鄲之夢(한단지몽). 巫山之夢(무산지몽). 一場春夢(일장춘몽)이 있다.

南柯記(남가기). 異聞集(이문집)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9대의 황제인 덕종德宗(:780~804년) 때 광릉 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 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駙馬(부마)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태수를 除授(제수)받고 부임했다. 南柯郡(남가군)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檀羅國軍(단라국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雪上加霜(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遷都(천도:도읍을 옮김)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대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南橘北枳(남귤북지)

南:남녘 남, 橘:귤나무 귤, 北:북녘 북, 枳:탱자나무 지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된다는말.

橘化爲枳(귤화위지)와 같은 말이다.

晏子春秋(안자춘추)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말기, 齊(제)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楚(초)나라 영왕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齊(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臣(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齊(제)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楚王(초왕)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

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齊(제)나라 사람이 齊(제)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楚(초)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機智(기지)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濫觴(남상)

濫:넘칠 람. 觴:술잔 상.

겨우 술잔(觴)에 넘칠(濫)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사물의 시초나 근원을 이르는 말.

嚆矢(효시). 權與(권여)가 비슷한 말이다.

荀自(순자)子道篇(자도편)과 孔子家語(공자가어)三恕篇(삼서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에 子路(자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揚子江(長江)은 四川땅 깊숙이 자리한 岷山(민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매사는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고 한다.

子路盛服見孔子 孔子曰 由 是裾裾何也 昔者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 乃其至江津 不放舟不避風 則不可涉也 非唯下流水多邪 令女衣服旣盛 顔色充盈 天下且孰肯諫女矣.

囊中之錐(낭중지추)

囊:주머니 낭.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錐:송곳 추.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남의 비유.

같은 말로는 錐處囊中(추처낭중)이 있다.

史記(사기) 平原君列傳(평원군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말엽, 秦(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은 동생이자 재상인 平原君(평원군:趙勝)을 초 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 때 毛遂(모수)라는 식객이 스스로 자신을 천거하며 나섰다.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건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國賓(국빈)으로 환대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老馬之智(노마지지)

老:늙을 로. 馬:말 마. 之:갈 지(…의). 智:슬기‧지혜 지.

늙은 말의 지혜란 뜻,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장기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

같은 뜻으로 老馬知道(노마지도)라는 말이 있다.

韓非子(한비자)說林篇(설림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五霸(오패)의 한 사람이었던 齊(제)나라 桓公(환공: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과 대부 습붕을 데리고 고죽국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이 진퇴양난 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에는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합니다.”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韓非子(한비자)는 그의 저서 ?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을 그들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노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綠林(녹림)

綠:초록빛 록. 林:수풀 림.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

綠林豪客(녹림호객)과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은 白浪(백랑). 白波(백파). 夜客(야객)이 있다.

漢書(한서)王莽傳(왕망전)과 後漢書(후한서)劉傳(유전)에 나오는 말이다.

前漢(전한:B.C. 202~A.D. 8) 말, 왕실의 외척인 大司馬(대사마) 왕망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新(신:8~24)이라 일컬었다.

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명이나 되는 무리는 스스로를 ‘綠林之兵(녹림지병)’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官庫(관고)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림지병은 5만을 헤아리는 대세력으로 부상했는데 後漢(후한)을 세운 光武帝(광무제:25~57) 劉秀(유수)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壟斷(농단)

壟:언덕 롱. 斷:끊을 단.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

원말은 籠斷(농단)이다.

孟子(맹자)공손추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齊(제)나라 선왕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그 의미가 변화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죠.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한 수법을 憎惡(증오)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합니다.

累卵之危(누란지위)

累:여러‧포갤 루. 卵:알 란. 之:갈 지(…의). 危:위태할 위.

알을 쌓아(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형세의 비유.

줄여서 누란(累卵) 이라 말한다 같은 뜻의 말은 위여누란(危如累卵) 비슷한 말로는 백척간두(百尺竿頭)가 있다.

史記(사기)范雎列傳(범저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세 치의 혀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하는 說客(세객)들은 거의 모두 策士(책사)‧謀士(모사)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모사를 縱橫家(종횡가)라고 일컬었다.

魏(위)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齊(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中大夫(중대부) 須賈(수가)의 從者(종자)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讒言(참언:거짓말)했다.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져,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鄭安平(정안평)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張祿(장록)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秦(진)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王稽(왕계)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昭襄王(소양왕)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 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 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 후 범저(장록)는 ‘遠交近攻策(원교근공책)’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能書不擇筆(능서불택필)

能:능할 능. 書:글 서. 不:아니 불. 擇:가릴 택. 筆:붓 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唐書(당서)歐陽詢傳(구양순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나라 초기의 사대가로 꼽혔던 우세남‧저수량‧유공권‧구양순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書聖(서성) 王羲之(왕희지)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率更體(솔경체)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 ?王肯堂筆塵(왕긍당필진)?과 ② 주현종의 ?論書(논서)?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行書(행서)와 草書(초서)를 제외한 楷書(해서)‧篆書(전서)‧隸書(예서)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多岐亡羊(다기망양)

多:많을 다. 岐:가닥나뉠 기. 亡:잃을 망. 羊:양 양.

달아난 양을 찾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서 양을 잃었다는 뜻.

곧 ① 학문의 길이 다방면으로 갈려져서 진리를 찾기 어려움의 비유.

② 방침이 많아 갈 바를 모름.

亡羊之歎(망양지탄)과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讀書亡羊(독서망양)이 있다.

列子(열자)說符篇(설부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楊子(양자:이름은 주(朱), B.C.395?~335?)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多多益善(다다익선)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좋을‧잘할 선.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뜻.

多多益瓣(다다익판)과 같은 말이다.

史記(사기)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한 漢나라 고조 유방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 楚王 한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臣(신)은 ‘다다익선’이옵니다.”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의 장수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斷腸(단장)

斷:끊을 단. 腸:창자 장.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 전하여,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의 비유.

비슷한 말로 구회지장(九回之腸) 이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黜免(출면)과 蔡琰(채염)의 胡笳歌(호가가)에 나오는 말이다.

진 晉(東晉, 317~420) 나라의 환온이 촉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三峽(삼협)을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이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다.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강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벼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다. 배는 100여 리쯤 나아간 뒤 강기슭에 닿았다.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크게 노하여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배에 실은 그 부하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螳螂拒轍(당랑거철)

螳:버마재비 당. 螂:버마재비 랑. 拒:막을 거. 轍:수레바퀴 자국 철.

사마귀(螳螂)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가로막는다는 뜻.

곧 ① 허세. ② 미약한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항거하거나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의 비유.

같은 말로 螳螂之斧(당랑지부), 螳螂當車轍(당랑당거철), 螳螂之力(당랑지력)이 있다.비슷한 말은 螳螂窺蟬(당랑규선)이다.

韓時外傳(한시외전) 卷八(권팔)과 文選(문선)에 나오는 말이다.

① 한시외전 권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齊(제)나라 장공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螳螂之斧:당랑지부)’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호종하던 신하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놈이 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하라.”

한시외전에서의 ‘螳螂之斧(당랑지부)’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② ?문선?에 보면 ‘당랑거철’은 三國時代(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이란 사람이 劉備(유비) 등 群雄(군웅)에게 띄운 격문에 나온다.

“조조 曺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大器晩成(대기만성)

大:클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곧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같은 말은 大器難成(대기난성)이다. 비슷한 말로는 大才晩成(대재만성)이 있다.

三國志(삼국지)魏志 崔琰傳(위지 최염전)과 後漢書(후한서)馬援傳(마원전) 그리고 노자(老子)「四十一章(사십일장)에 나오는 말이다.

⑴ ?삼국지? ‘위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魏(위)나라에 최염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天子(천자)를 보좌하는 三公(삼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 ?후한서?에 보면,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까지 된 인물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대기만성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하라.”

⑶ ?노자?에도,‘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大義滅親(대의멸친)

大:클 대. 義:옳을 의. 滅:멸할 멸. 親:친할‧육친 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

滅私奉公(멸사봉공)이 비슷한 말이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隱公三‧四年條(은공삼‧사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인 주周나라 환왕 원년(B.C.719)의 일이다. 위衛나라에서는 공자公子 주우가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후의 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 형제간으로서 둘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先君(선군) 장공 때부터 충의지사로 이름난 대부 석작은 일찍이 주우에게 逆心(역심)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석후에게 주우와 절교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의 시대가 되자 은퇴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석작이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반역은 일단 성공했으나 백성과 귀족들로부터의 반응이 좋지 않자 석후는 아버지 석작에게 그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 석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왕실을 예방하여 천자天子를 拜謁(배알)하고 승인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자를 배알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왕실과 각별한 사이인 陳(진)나라 陳公(진공)을 통해서 청원하도록 해라. 그러면 진공께서 선처해 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도록 일렀다.

“바라옵건대, 主君(주군)을 시해한 주우와 석후를 잡아 죽여 대의를 바로잡아 주시 오소서.”

진나라에서는 그들 두사람을 잡아 가둔 다음 위나라에서 파견한 입회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다고 한다.

度外視(도외시)

度:법도 도. 外:바깥 외. 視:볼 시.

①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②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비슷한 말은 置之度外(치지도외)이다. 반대말은 問題視(문제시)다.

後漢書(후한서)光武記(광무기)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의 시조 光武帝(광무제)때의 일이다. 광무제 劉秀(유수)는 漢(한:前漢)나라를 빼앗아 新(신)나라를 세운 왕망을 멸하고 劉玄(유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大司馬(대사마)가 된 유수는 그 후 銅馬(동마)‧赤眉(적미)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齊(제) 땅과 江淮(강회) 땅이 평정되자 中原(중원)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秦(진) 땅에 웅거하는 隗囂(외효)와 역시 산간오지인 蜀(촉) 땅의 成都(성도)에 거점을 둔 公孫述(공손술)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平定(평정)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

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桃園結義(도원결의)

桃:복숭아나무 도, 園:동산 원, 結:맺을 결, 義:옳을 의

‘의형제를 맺음’이란 뜻.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 나오느 말이다.

前漢(전한)은 外戚(외척)에 의해 망했고 後漢(후한)은 宦官(환관)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黃巾賊(황건적)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太平道(태평도)의 교조 張角(장각)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幽州(유주) ?縣(탁현)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劉備(유비)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張飛(장비)였고, 그 다음에 關羽(관우)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청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桃園結義)

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제갈공 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조조(魏), 손권(吳)과 함께 촉(蜀)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道聽塗說(도청도설)

道:길 도. 聽:들을 청. 塗:길 도. 說:말씀 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

곧 ① 제대로 듣지도 않은 말을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옮김.

②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뜬소문.

비슷한 말은口耳之學(구이지학), 街談巷說(가담항설), 流言蜚語(유언비어)이다.

論語(논어)陽貨篇(양화편)과 漢書(한서) 藝文志(예문지), 그리고 荀子(순자)勸學篇(권학편)에 나오는 말이다.

①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논어?「양화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과 같다(德之棄也).”

길거리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고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고, 천도天道를 지상地上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을 실천하고 인덕仁德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논어?에서 이르고 있다.

② 후한시대, 班固(반고)가 엮은 ?한서? 「예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는 ‘稗官(패관:하급 관리) 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③ ?순자?「권학편」에는 多言(다언)을 이렇게 훈계하고 있다.

“‘소인배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곧바로 입으로 흘러나오고(口耳之學 구이지학)’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불과 네 치(口耳四寸 구이사촌).’ 이처럼 짧은 거리를 지날 뿐이라면 어찌 七尺(칠척)이나 되는 몸을 훌륭하게 닦을 수 있겠는가.옛날에 학문을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배운 것을 금방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자기를 위해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하지만 소인배의 학문은 인간을 못쓰게 망쳐 버린다. 그래서 묻지 않은 말도 입밖에 낸다. 이것을 ‘잔소리’라 하며, 하나를 묻는데 둘을 말하는 것을 ‘饒舌(수다)’라고 한다. 둘 다 잘못되어 있다. 참된 君子(군자)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어느 세상에도 오른쪽 귀로 들은 것을 왼쪽 사람에게 털어놓는 수다쟁이나 정보통이 많다. 더구나 그 정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에 점점 꼬리를 물어 불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무리는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뿐’이라며 공자, 순자는 경계하고 있다.

獨眼龍(독안룡)

獨:홀로 독. 眼:눈 안. 龍:용 룡.

애꾸눈의 용이란 뜻. 곧 ① 애꾸눈의 영웅 또는 용맹한 장수. ② 애꾸눈의 高德한 사람.

五代史(오대사)唐記(당기)와 唐書(당서)李克用傳(이극용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18대 황제인 희종 때의 일이다. 山東(산동) 출신인 黃巢(황소)는 王仙芝(왕선지) 등과 반란을 일으킨지 5년만에 10여 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마침내 도읍인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스스로 제나라 황제라 일컫고 대제국을 세웠다.한편 成都(성도)로 蒙塵(몽진)한 희종은 돌궐족 출신인 맹장 이극용을 기용하여 황소 토벌을 명했다. 당시 4만 여에 이르는 이극용의 군사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사정없이 맹공을 가했기 때문에 반란군은 '갈가마귀의 군사(鴉軍 아군)가 왔다!‘며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19대 황제인 소종이 즉위한 그 이듬해 마침내 반란군은 토멸되었고 황소도 전쟁에 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극용은 그 공에 의해서 농서 지방 군왕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극용은 숙적 주전충(朱全忠:852~912,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귀순한 뒤 황소 토멸에 공을 세워 동평군왕(東平郡王)이 됨)과 정권을 다투다가 패하고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주전충은 20대 황제인 哀宗(애종)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後梁(후량)을 세웠으나 16년 후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李存勗:후당(後唐)의 초대 황제인 장종(莊宗))에게 멸망했다.맹장 이극용에 대해 五代史(오대사)唐記(당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극용은 젊고 사나우며 날쌨는데(驍勇 효용:사납고 날쌤)했는데 軍中(군중)에서는 이아아(李鴉兒)라고 일컬었다. 그의 눈은 애꾸눈이었다. 그가 귀한 자리에 오르자 일컬어 ‘독안룡’이라고 했다.”

同病相憐(동병상련)

同:한가지 동. 病:앓을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딱하게 여겨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

비슷한 말은 同優相救(동우상구), 同舟相救(동주상구), 同氣相救(동기상구),

同惡相助(동악상조),同類相救(동류상구), 吳越同舟(오월동주),

類類相從(유유상종)이다.

吳越春秋(오월춘추)와 闔閭內傳(합려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吳(오)나라의 공자 光(광)은 사촌 동생인 오왕 僚(요)를

시해한 뒤 오나라 왕 합려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광(합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被離(피리)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나쁜 얼굴)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河上歌(하상가)에도 ‘同病相憐 同憂相救(동병상련 동우상구)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人之常情(인지상정)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越(월)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죽고 말았다.

董狐之筆(동호지필)

董:동독할 동. 狐:여우 호. 之:갈 지(…의). 筆:붓 필.

‘동호의 直筆(직필)’이라는 뜻.

곧 ① 정직한 기록. 기록을 맡은 이가 직필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을 이름.

②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어 역사에 남기는 일.

太史之簡(태사지간)과 같은 말이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宣公二年條(선공이연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대신인 조천이 무도한 영공을 시해했다. 당시 재상격인 경경正卿 조순은 영공이 시해되기 며칠 전에 그의 해학을 피해 망명 길에 올랐으나 국경을 넘기 직전에 이 소식을 듣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관史官인 동호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그 군주를 시해하다.’조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고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이 분명히 하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감은 당시 국내에 있었고, 또 도읍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은 공식적으로는 弑害者(시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조순은 그것을 도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趙宣子(조선자:조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

得隴望蜀(득록망촉)

得:얻을 득. 隴:땅 이름 롱. 望:바랄 망. 蜀:나라 이름 촉.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곧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③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

줄여서 望蜀(망촉)이라 한다. 같은 말로는 平隴望蜀(평롱망촉), 望蜀之歎(망촉지탄)이 있다. 비슷한 말은 谿壑之慾(계학지욕), 借廳借閨(차청차규), 車魚之歎(거어지탄), 騎馬欲率奴(기마욕솔노)이다.

후한서 後漢書 광무기光武記 헌제기獻帝記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나오는 말이다.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赤眉之賊(적미지적)의 劉盆子(유분자)를 비롯하여 隴書(농서)에 외효, 蜀(촉)에 공손술, 睢陽(수양)에 유영, 盧江(노강)에 이헌, 臨淄(임치)에 장보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유양‧이헌‧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修好(수호)하고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외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隴望蜀).’”

그로부터 4년 후 건무 13년(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189~226) 말, 즉 삼국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劉備(유비)가 강남의 孫權(손권)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曹操(조조)는 단숨에 한중(漢中: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隴(농) 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 사마의(司馬懿-字는 仲達(중달), 晉(진)나라를 세운 司馬炎(사마염)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인간이란 만족할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년(223),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鷄肋(계륵)’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登龍門(등용문)

登:오를 등. 龍:용 룡. 門:문 문.

용문에 오른다는 뜻.

곧 ① 입신 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말.

② 영달의 비유.

③ 주요한 시험의 비유.

④ 유력자를 만나는 일.

반대말은 點額(점액). 龍門點額(용문점액)이다.

後漢書(후한서)李應傳(이응전)에 나오는 말이다.

龍門(용문)은 黃河(황하) 상류의 山西省(산서성)과 陝西省(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극한의 난관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進士(진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입신 출세의 제일보라는 뜻으로 ‘등용문’이라 했다.‘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點額(점액)’이라 한다. ‘點(점)’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額(액)’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출세 경쟁에서의 패배자, 중요 시험에서의 낙방자를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146~167)때 정의파 관료의 지도적 인물에 이응(李應:자는 원례(元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촉군태수(蜀郡太守)‧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했을 때 환관의 미움을 받아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경찰청장)가 되어 악랄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었다.

磨斧作針(마부작침)

磨:갈 마. 斧:도끼 부. 作:지을(만들) 작. 針:바늘 침.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

곧 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함의 비유.

② 노력을 거듭해서 목적을 달성함의 비유. ③ 끈기 있게 학문이나 일에 힘씀의 비유.

같은 말은 鐵杵成針(鍼)(철저성침).磨杵作針(鍼)(마저작침)이고 비슷한 말은 愚公移山(우공이산). 水滴穿石(수적천석)이다.

唐書(당서)文藝(苑)傳(문예(원)전)과 方與勝覽(방여승람)에 나오는 말이다.

詩仙(시선)으로 불리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蜀(촉) 땅의 성도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修學(수학)했는데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

“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

“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馬耳東風(마이동풍)

馬:말 마. 耳:귀 이. 東:동녘 동. 風:바람 풍.

말의 귀에 東風(동풍:春風)이 불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대로 흘려 버림의 비유.

②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느끼지 못함의 비유. ③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의 비유.

비슷한 말은牛耳讀經(우이독경). 吾不關焉(오불관언). 對牛彈琴(대우탄금)이다.

李太白集(이태백집)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李白)이 벗 왕십이(王十二)로부터「寒夜獨酌有懷:한유독작유회-추운 방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라는 시 한 수를 받자 이에 답하여「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시를 보냈는데 ‘마이동풍’은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긴 시인 이 시에서 이백은 “우리네 시인들이 아무리 좋은 시를 짓더라도 이 세상 속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울분을 터뜨리고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세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흔드네 世人聞此皆掉頭

마치 동풍이 쏘인 말의 귀처럼 有如東風射馬耳

  동풍은 봄바람의 뜻이다. 그 동풍이 말의 귀를 쏘아(스쳐) 봤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다. 즉 세인들이 시인의 말이나 걸작에 기울이는 관심도가 그 정도로 낮다- 무관심하다고 이백은 비분(悲憤)하고 있는 것이다.

莫逆之友(막역지우)

莫:없을 막, 逆:거스를 역, 之:어조사 지, 友:벗우

아주 허물없는 사이.

莊子(장자)大宗師篇(대종사편)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① 자사와 자여와 자리와 자래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를,

“누가 능히 無(무)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死生存亡(사생존망)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

子祀 子輿 子犁 子來 四人相與語曰 孰能以無爲者 以生爲背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② 자상호와 맹자반과 자금장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

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子桑戶 孟子反 子琴張 三人相與語曰 孰能相與於無相與 相爲於無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撓無極 相忘以生 無所終窮 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友.

輓歌(만가)

輓:수레 끌 만. 歌:노래 가.

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

古今洼(고금와)音樂篇(음악편)과 晉書(진서)禮志篇(예지편),古詩源(고시원)薤露歌(해로가) 蒿里曲(호리곡)에 나오는 말이다.

漢(한)나라 고조 劉邦(유방)이 즉위하기 직전의 일이다. 한나라 창업 三傑(삼걸) 중 한 사람인 한신에게 급습 당한 齊王(제왕) 전횡은 그 분풀이로 유방이 보낸 說客(세객) 역이기를 삶아 죽여 버렸다. 이윽고 고조가 즉위하자 보복을 두려워한 전횡은 5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발해만에 있는 지금의 전횡도(田橫島)로 도망갔다. 그 후 고조는 전횡이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그를 용서하고 불렸다. 전횡은 일단 부름에 응했으나 낙양을 30여리 앞두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포로가 되어 고조를 섬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전횡의 목을 고조에게 전한 고조에게 전한 두 부하를 비롯해서 섬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전횡의 절개를 경모하여 모두 殉死(순사)했다.그 무렵, 전횡의 門人(문인)이 薤露歌(해로가)‧蒿里曲(호리곡)이라는 두 章(장)의 喪歌(상가)를 지었는데 전횡이 자결하자 그 죽음을 애도하여 노래했다.

- 해로가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 薤上朝露何易晞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내리지만 露晞明朝更復落

사람은 죽어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나 人死一去何時歸

-호리곡

호리는 뉘 집터인고 蒿里誰家地

혼백을 거둘 땐 현‧우가 없네 聚斂魂魄無賢愚

귀백은 어찌 그리 재촉하는고 鬼伯一何相催促

인명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못하네 人命不得少踟躕

이 두 상가는 그 후 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에 樂府(악부) 총재인 이연년에 의해 작곡되어 해로가는 公卿貴人(공경귀인), 호리곡은 士夫庶人(사부서인)의 장례 때에 상여꾼이 부르는 ‘만가’로 정해졌다고 한다.

萬事休矣(만사휴의)

萬:일만 만. 事:일 사. 休:그칠‧쉴 휴. 矣:어조사 의(…이다).

모든 일이 끝장났다(가망 없다)는 뜻으로, 어떻게 달리 해볼 도리가 없다는 말.

비슷한 말은 能事畢矣(능사필의)이다.

宋史(송사)荊南高氏世家(형남고씨세가)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가 망하고 宋(송:北宋, 960~1127) 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53년 동안에 중원에는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다섯 왕조가 일어났다가 쓰러지곤 했는데 이 시대를 오대(五代:후오대(後五代)의 준 말)라 일컫는다.

또 다시 중원을 벗어난 각 지방에는 전촉(前蜀)‧오(吳)‧남한(南漢)‧형남(荊南)‧오월(吳越)‧초(楚)‧민(閩)‧남당(南唐)‧후촉(後蜀)‧북한(北漢)등 열 나라가 있었는데 역사가는 이를 五代十國(오대십국)이라 일컫고 있다.

이들 열 나라 중에는 형남과 같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도 있었는데 이 나라의 왕인 고종회는 아들 고보욱을 분별없이 귀여워했다. 그래서 고보욱은 남이 아무리 노한 눈으로 쏘아보아도 싱글벙글 웃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장났다(萬事休矣).’

과연 고보욱의 代(대)에 이르러 형남은 멸망하고 말았다.

亡國之音(망국지음)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의). 音:소리 음.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

곧 ① 음란하고 사치한 음악. ②망한 나라의 음악. ③ 애조(哀調)를 띤 음악.

같은 뜻의 말은 망국지성(亡國之聲)이고 비슷한 말은 정위지음(鄭衛之音)이다.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과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이다.

① 춘추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衛(위)나라 영공이 晉(진)나라로 가던 도중 濮水(복수) 강변에 이르자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멋진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잠시 넋을 잃고 듣다가 수행중인 사연(師涓)이란 악사(樂師)에게 그 음악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 앞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진나라에는 師曠(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학이 춤을 추고 흰 구름이 몰려든다는 명인이었다. 위나라 영공이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한 사광은 그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지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亡國之音)’이오.”

이 말에 깜짝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그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 옛날 殷(은)나라 주왕에게는 師延(사연)이란 악사가 있었사옵니다. 당기 폭군 주왕은 사연이 만든 新聲百里(신성백리)라는 淫蘼(음미:음란하고 사치함)한 음악에 도취하여 酒池肉林(주지육림)속에서 淫佚(음일:음란하고 일을 돌보지 않음)에 빠졌다가 결국 周(주)나라 武王(무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나이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투신 자살했는데, 그 후 복수에서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무서워하며 그곳을 지날 땐 귀를 막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사옵니다.”

② ?예기?「악기」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복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망국지음’이다.”

望洋之歎(망양지탄)

望:바랄‧바라볼 망. 洋:바다 양. 之:갈 지. 歎:탄식할‧감탄할 탄.

넓은 바다를 보고 감탄한다는 뜻.

곧 ①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② 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

莊子(장자)秋水篇(추수편)에 나오는 말이다.

먼 옛날 황하 중류의 맹진(孟津)에 하백이라는 하신(河神:강의 신)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北海(북해)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장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갑절이나 넓어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海神:바다 신)인 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다.

“나는 북해가 크다는 말을 듣고도 이제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단견(短見:짧은 소견)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구려. 大海(대해)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麥秀之歎(맥수지탄)

麥:보리 맥.秀:빼어날‧팰 수.之:갈 지. 歎:탄식할‧감탄할 탄.

보리 이삭이 무성함을 탄식한다는 뜻. 곧 고국이 멸망한 탄식.

원말은 黍離麥秀之歎(서리맥수지탄)이고 같은 말은 麥秀黍油(맥수서유). 麥秀之詩(맥수지시). 亡國之歎(망국지탄)이다.

史記(사기)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와 詩經(시경)王風篇(왕풍편)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殷(은)나라 주왕이 음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한 신하 중 三仁(삼인)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 기자, 비간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三公(삼공:왕을 보좌하던 세 제후)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훗날의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誅殺)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武王(무왕) 발은 은왕조의 奉祭祀(봉제사)를 위해 미자를 宋王(송왕)으로 봉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朝鮮王(조선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今昔之感(금석지감)을 금치 못한 기자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麥秀漸漸兮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禾黍油油兮

교활한 저 철부지(주왕)가 彼狡童兮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不與我好兮

孟母斷機(맹모단기)

孟:맏 맹. 母:어미 모. 斷:끊을 단. 機:베틀 기.

맹자의 어머니가 遊學 도중에 돌아온 맹자를 훈계하기 위해 베틀에 건 날실을 끊었다는 뜻으로,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

원말은 孟母斷機之敎(맹모단기지교)이고 같은 말은 斷機之戒(단기지계). 斷機戒(단기계) 비슷한 말은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이다.

列女傳(열녀전)母儀傳(모의전)과 蒙求(몽구)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를 살다 간 맹자의 어머니의 훈육 일화이다. 집을 떠나 타향에서 공부하던 어린 맹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은 채 맹자에게 물었다.

“그래, 글은 얼마나 배웠느냐?”

“별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님.”

맹자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리고 이렇게 타일렀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이 베의 날실을 끊어버린 것과 다를게 없다.”

크게 깨달은 맹자는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 전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孔子(공자)에 버금가는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孟母三遷(맹모삼천)

孟:맏 맹. 母:어미 모. 三:석 삼. 遷:옮길 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

원말은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이고 같은 말은 三遷之敎(삼천지교)이다.

비슷한 말로는 賢母之敎(현모지교). 孟母斷機之敎(맹모단기지교)가 있다.

列女傳(열녀전)의 母儀傳(모의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유학자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 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 亞聖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그러자 맹자는 제구 祭具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데 더할 나위 없이 놓은 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明鏡止水(명경지수)

明:밝을 명. 鏡:거울 경. 止:그칠 지. 水:물 수.

맑을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말.

莊子(장자)德充符篇(덕충부편)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 덕충부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魯(노)나라에 왕태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鼻祖(비조)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은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 常季(상계)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兀者(올자)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 靜止해 있는 물이니라.”

또 같은 덕충부편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거울에 흐림이 없으면 먼지가 앉지 않으나 먼지가 묻으면 흐려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오랫동안 賢者(현자)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 허물이 없어진다.”

明眸皓齒(명모호치)

明:밝을 명, 眸:눈동자 모, 皓:희다 호, 齒: 이 치

눈동자가 맑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하는 말.

杜甫(두보)의 詩 「哀江頭(애강두)에 나오는 말이다.

安祿山(안록산)이 난리를 일으켜 낙양이 함락된 것이 755년, 두보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그해에 두보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것을 처자에게 통고하기 위하여, 당시 疏開(소개)되어 있는 장안 근처의 奉先(봉선)으로 갔다. 도적들의 수중에 있는 장안에서 봄을 맞이한 두보는 남몰래 강 입구를 찾아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이 강두에서 슬퍼하며, 목소리를 삼키고 울면서 이 哀江頭(애강두)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밝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明眸皓齒今何在

피로 더러워진 떠도는 혼은 돌아가지를 못하네.血汗遊魂歸不得

맑은 위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검각은 깊은데,淸渭東流劍閣深

蜀(촉)나라로 끌려가 사니 피차간 소식이 없네.去住彼此無消息

인생은 情(정)이 있어 눈물이 가슴을 적시니, 人生有情淚沾臆

강물에는 강꽃이 피니 어찌 마침내 다함이 있으랴.江水江花豈終極

황혼에 오랑캐 기마들은 티끌로 城(성)을 채우는데,黃昏胡騎塵滿城

城(성)남쪽으로 가고자 하여 城(성) 북쪽을 바라보네.浴往城南望城北

여기에서 ‘明眸皓齒(명모호치)’라고 한 것은 楊貴妃(양귀비)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矛盾(모순)

矛:창 모. 盾:방패 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비슷한 말은 自家撞着(자가당착)이다.

韓非子(한비자)難勢篇(난세편)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초나라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방패와 창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자,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고 외쳐댔다.

“자,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구경꾼들 속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장사꾼은 대답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巫山之夢(무산지몽)

巫:무당 무. 山:메 산. 之:갈 지(…의). 夢:꿈 몽.

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

朝雲暮雨(조운모우). 薦枕席(천침석)과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은 巫山之雲(무산지운). 巫山之雨(무산지우)이다.

文選(문선)宋玉 高唐賦(송옥 고당부)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초나라 襄王(양왕)의 先王(선왕)이 어느 날 高唐館(고당관)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小妾(소첩)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枕席(침석: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

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雲雨之情(운우지정)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

“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陽臺(양대)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朝雲廟(조운묘)라고 이름지었다.

無爲而化(무위이화)

無:없다 무, 爲:하다 위, 而:그러나 이, 化:되다 화

①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짐.

②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老子(노자)五十七章(오십칠장)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천하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진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나라는 혼란해진다.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聖人(성인)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和하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 없이 있으면 백성은 저절로 잘 살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또 老子는 말한다.

“‘道(도)는 언제나 無爲(무위)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

“侯王(후왕)이 만약 능히 이 ‘道’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化(화)하려 한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墨翟之守(묵적지수)

墨:먹 묵. 翟:꿩 적. 之:갈 지(…의). 守:지킬 수.

‘묵적의 지킴’이란 뜻.

곧 ①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킴. ②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줄여서 墨守(묵수)라고도 한다.

墨子(묵자)公輸盤篇(공수반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의 사상가로서 ‘자타 차별 없이 서로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兼愛交利說(겸애교리설:兼愛說 겸애설)과 非戰論(비전론)을 주창한 墨子(묵자)의 이야기이다.

楚(초)나라의 도읍 郢(영)에 도착한 묵자는 公輸盤(공수반)을 찾아갔다. 그가 초왕을 위해 雲梯械(운제계)라는 새로운 攻城機(공성기: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만들어 宋(송)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방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죽여 줄 수 없겠소?”

그러자 공수반은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義(의)를 중히 여기는 만큼 살인은 안하오.”

“사람 하나 죽이지 않는 게 ‘의’라면 왜 죄 없는 송나라 백성을 죽이려 하시오?”

답변에 궁한 공수반은 묵지를 초왕 앞으로 안내했다.

“전하, 새 수레를 소유한 사람이 이웃집 헌 수레를 훔치려 하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이웃집 누더기를 훔치려 한다면 전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건 도벽이 있어서 그럴 것이오.”

“하오면, 사방 5000리 넓은 국토에다 온갖 짐승과 초목까지 풍성한 초나라가 사방 500리밖에 안되는 가난한 송나라를 치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과인은 단지 공수반의 운제계를 한번 실험해 보려했을 뿐이오?”

“하오면, 外臣(외신)이 여기서 그 운제계에 의한 공격을 막아 보이겠나이다.”

이리하여 초왕 앞에서 기묘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 모양으로 사려 놓고 나뭇조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공수반은 모형 운제계로 아홉 번 공격했다. 그러나 묵자는 아홉 번 다 굳게 지켜냈다. 이것을 본 초왕은 묵자에게 송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刎頸之交(문경지교)

刎:목 찌를 문. 頸:목 경. 之:갈 지(…의). 交:사귈‧벗 교.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刎頸之契(문경지계). 刎頸之友(문경지우)와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은管鮑之交(관포지교). 金蘭之契(금란지계). 斷金之契(단금지계)이다.

史記(사기)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의 신하 繆賢(목현)의 식객에 藺相如(인상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秦(진)나라 昭襄王(소양왕)에게 빼앗길 뻔했던 名玉(천하 명옥)인 和氏之璧(화씨지벽)을 원상태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上大夫(상대부)에 임명됐다.그리고 3년 후(B.C. 280), 소양왕과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從一品(종일품)의 上卿(상경)에 올랐다.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廉頗(염파)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城(성)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로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로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笞刑(태형)에 쓰이는 荊杖(형장)을 짊어지고(肉粗負荊 육조부형: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아래 무릎을 끓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聞一知十(문일지십)

聞:듣다 문, 一:한 일, 知:알다 지, 十:열 십

한가지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앎.

論語(논어)公冶長篇(공야장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었으며 철인哲人으로 꼽힌 사람도 10명이나 되었다.

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주유천하 周遊天下할 때의 경비 대부분을 대었고 학문의 재주와 재치도 뛰어났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顔回는 매우 가난했으나 삼 개월 동안 어질었다고 인仁이란 말을 들은 유일한 제자였다. 안회와 자공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은 “賜(사)가 어찌 감히 回(회)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回(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賜(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을 알고 있었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이는 스승인 공자의 가슴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門前成市(문전성시)

門:문 문. 前:앞 전. 成:이룰 성. 市:저자‧도시‧시가 시.

문 앞이 저자(市)를 이룬다는 뜻으로,

권세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빈다는 말.

비슷한 말은 門前如市(문전여시). 門庭如市(문정여시)이고 반대말은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 門前雀羅(문전작라)이다.

漢書(한서)孫寶傳(손보전)鄭崇傳(정숭전)에 나오는 말이다.

前漢(전한) 말, 11대 황제인 哀帝(애제:B.C. 6~1)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大司馬(대사마:국방 장관) 왕망(王莽:훗날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움)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애제의 할머니), 정씨(丁氏:어머니)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충신들은 간했으나 馬耳東風(마이동풍)이었다.

그중 尙書僕射(상서복야:장관) 鄭崇(정숭)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趙昌(조창)이라는 尙書令(상서령)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사온데(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오소서.”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시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 오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패 옥에 가뒀다. 그러자 司隷(사례)가 상소하여 조창의 讒言(참언)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애제는 손보를 削奪官職(삭탈관직)하고 庶人(서인)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書令趙昌佞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

門前雀羅(문전작라)

門:문 문. 前:앞 전. 雀:참새 작. 羅:벌일 라.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다는 말.

원말은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이고 반대말은 門前成市(문전성시)이다.

史記(사기)汲鄭列傳(급정열전)과 白居易(백거이)의 寓意詩(우의시)에 나오는 말이다.

전한 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 급암과 정당시라는 두 신하가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각기 구경(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좌천‧면직‧재등용을 되풀이하다가 급암은 淮陽太守(회양태수)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이어 사마천은 ?사기?「급정열전」에서 이렇게 덧붙여 쓰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賓客(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지만 세력이 없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또 翟公(적공)의 경우는 이렇다. 적공이 廷尉(정위)가 되자 빈객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그가 면직되자 빈객은 금새 발길을 끊었다. 집 안팎이 어찌나 한산한지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얼마 후 적공은 다시 정위가 되었다. 빈객들이 몰려들자 적공은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一死一生 卽知交情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一貧一富 卽知交態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一貴一賤 卽見交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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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縫(미봉)

彌:더할‧많을 미. 縫:꿰맬 봉.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임시 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서 꾸며 댐

비슷한 말은姑息(고식). 臨時變通(임시변통)이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桓公五年條(환공오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인 周(주)나라 桓王(환왕) 13년(B.C. 707)의 일이다. 환왕은 명목상의 天子國(천자국)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鄭(정)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시 정나라 莊公(장공)은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을 배경으로 천자인 환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은 우선 장공으로부터 왕실 卿士(경사)로서의 정치상 실권을 박탈했다. 이 조치에 분개한 장공이 朝見(조현: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을 중단하자 환왕은 이를 구실로 징벌군을 일으키고 諸侯(제후)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왕명을 받고 虢(괵)‧蔡(채)‧衛(위)‧陳(진)나라 군사가 모이자 환왕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런 일이 곧 天子(천자)의 自將擊之(자장격지)는 춘추 시대 240여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윽고 정나라의 수갈(繡葛)에 도착한 王軍(왕군)은 장공의 군사와 대치했다. 公子(공자)인 元(원)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左軍(좌군)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사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戰意(전의)를 잃고 있습니다. 하오니 먼저 진나라 군사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中軍(중군)을 혼란에 빠질 것이며 卿士(경사)인 虢公(괵공)이 이끄는 채‧위나라의 右軍(우군)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 때 중군을 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장공의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의 陣(진)을 쳤는데 이는 兵車(병거:군사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步兵(보병)을 뒤따르게 하는 軍陣(군진)으로서 병거와 병거 사이에는 보병으로 ‘미봉’했다. 원이 진언한 전략은 적중하여 왕군은 대패하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尾生之信(미생지신)

尾:꼬리 미. 生:날 생. 之:갈 지(…의). 信:믿을 신.

미생의 믿음이란 뜻. 곧 ① 약속을 굳게 지킴의 비유. ②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史記(사기)蘇秦列傳(소진열전)과 莊者(장자)盜跖篇(도척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魯(노)나라에 尾生(미생: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橋脚(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전국 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蘇秦(소진)은 燕(연)나라 昭王(소왕)을 설파할 때 신의 있는 사나이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그러나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莊子(장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그의 寓言(우언)이 실려 있는 ?장자?「도척편」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의 입을 통해 미생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磔刑(책형: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尾生與女子 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梁柱而死

博學詳說(박학상설)

博:넓을 박, 學:배울 학, 詳:자세할 상, 說:말씀 설

널리 배우고, 상세하게 해설한다

博學(박학)은 ‘여러가지를 배워 많이(博) 안다’로 博識(박식)과 같다. 詳說(상설)은 ‘자세히 설명하다(說)’이니, 박학상설博學詳說은 ‘널리 배우고, 상세하게 해설한다’는 말이다.

‘맹자’의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박학이상설지 장이반설약야 : 여러 학문을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반대로 간단 명료함을 설명키 위해서다)에서 나온 성어成語다.

‘……상설지 詳說之’의 ‘지之’는 詳說(상설)의 목적어로 앞의 박학博學을 나타낸다. ‘반反’은 (앞에 서술한 내용에 대해) ‘오히려’ ‘도리어’ ‘반대로’라는 뜻으로 쓰이며, 설약說約은 ‘요점을 추려 간략히 하다’는 의미다.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박학 박학博學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리를 얻어 생활에 활용키 위해서다. 인류문명은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갔다가, 다시 복잡한 것에서 간단한 것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니까 박학博學은 설약說約의 과정인 셈이다.

盤根錯節(반근착절)

盤:서릴‧쟁반 반. 根:뿌리 근. 錯:섞일 착. 節:마디 절.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얼크러져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의 비유.

後漢書(후한서)虞栩傳(우허전)에 나오는 말이다.

後漢(후한) 6대 황제인 安帝(안제: 106~125)때의 일이다.

안제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母后(모후)인 太后(태후)가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고 태후의 오빠인 鄧騭(등즐)이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 무렵, 서북 변경은 티베트계(系) 유목 민족인 羌族(강족)의 침략이 잦았다. 그러나 등즐은 국비 부족을 이유로 凉州(양주)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郎中(낭중) 벼슬에 있는 虞栩(우허)가 반대하고 나섰다.

“函谷關(함곡관)의 서쪽은 장군을 내고 동쪽은 재상을 낸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양주는 많은 열사와 무인을 배출한 곳인데 그런 땅을 강족에게 내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중신들도 모두 우허와 뜻을 같이했다. 이 때부터 우허를 미워하는 등즐은 때마침 朝歌縣(조가현)의 현령이 匪賊(비적)에게 살해되자 우허를 후임으로 정하고 비적 토벌을 명했다. 친구들이 모여 걱정했으나 우허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盤根錯節)’에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

현지에 도착한 우허는 우선 전과자들을 모아 적진에 침투시킨 다음 갖가지 계책으로 비적을 토벌했다고 한다.

伴食宰相(반식재상)

伴:짝 반. 食:밥‧먹을 식. 宰:재상 재. 相: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같은말은 伴食大臣(반식대신) 이고 비슷한 말은 尸位素餐(시위소찬). 祿盜人(녹도인). 衣冠之盜(의관지도)이다.

舊唐書(구당서)盧懷愼傳(노회신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6대 황제인 玄宗(현종)을 도와 가장 번성했던 ‘개원(開元:당 나라 때의 연호)의 정치’를 연 재상은 姚崇(요숭)이었다.

개원 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무 백관의 호사스런 비단 관복을 正殿(정전) 앞에 쌓아 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農兵(농병) 제도를 募兵(모병) 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숭의 진언에 따른 개혁이었다.이처럼 요숭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 데 힘썼다.

특히 政務裁決(정무재결)에 있어서의 迅速的確(신속적확)함에는 그 어느 宰相(재상:大臣)도 요숭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黃門監(황문감: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盧懷愼(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 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伴食宰相)’이라고 冷評(냉평)했다.

拔本塞源(발본색원)

拔:뽑다 발, 本:근본 본, 塞:막다 색, 源:근원 원

폐단의 근원을 아주 없애 버림.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昭公 九年條(소공 구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발본색원 拔本塞源은 ‘춘추좌씨전’ 소공 구년조 중, 주왕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된 고사이다.

“나에게 伯父(백부)가 계신 것은 마치 옷에 갓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어야 하듯 백셩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어야 한다. 백부께서 만약 갓을 찢어버리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으며(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움을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춘추좌씨전’ 소공 구년조에 실린, 윗글의 원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큰아버지가 계신 것은, 마치 의복에 갓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혜로운 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만일 갓을 짜개고 면류관을 부수고, 근본을 뽑아 근원을 틀어막고(拔本塞源), 오로지 지혜로운 임금을 버리신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 남음이 어찌 한 사람에 있으리오.

我在伯父 猶衣服之有冠冕 木水之有本源 民人之有謀主 伯父若裂冠毁冕 拔本塞源 專棄謀主 雖戎狄其何有餘一人..

이와는 다른 출전으로, 명나라 때의 철학자 王陽明(왕양명)의 ‘拔本塞源論(발본색원론)’이 있다.

왕양명의 ‘발본색원론’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소 제창하던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과 취지가 같다. 즉, 사사로운 탐욕은 근본부터 뽑아버리고 그 근원을 틀어막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고사가 지금 세상에서는 범죄나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다.

傍若無人(방약무인)

傍:곁‧의지할 방. 若:갈을 약. 無:없을 무. 人:사람 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마구 행동함을 이르는 말.

史記(사기)刺客列傳(자객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도 거의 막을 내릴 무렵, 즉 진秦 나라 왕 정 (政:훗날의 시황제)이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의 일이다. 당시 포학무도한 진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중에 荊軻(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衛(위)나라 사람이었으나 위나라 元君(원군)이 써주지 않자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燕(연)나라에서 축(筑: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의 명수인 高漸離(고점리)를 만났다. 형가와 고점리는 곧 意氣投合(의기투합)하여 매일 저자에서 술을 마셨다. 취기가 돌면 고점리는 축을 연주하고 형가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감회가 복받치면 함께 엉엉 울었다.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傍若無人)’

杯盤狼藉(배반낭자)

杯:잔 배. 盤:쟁반 반. 狼:이리‧어지러울 낭. 藉:어지러울 자.

술잔과 접시가 마치 이리에게 깔렸던 풀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는 뜻.

곧 ① 술을 마시고 한창 노는 모양.

② 술자리가 파할 무렵 또는 파한 뒤 술잔과 접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양.

史記(사기)滑稽列傳(골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초엽, 齊(제)나라 威王(위왕) 때의 일이다. 楚(초)나라의 침략을 받은 위왕은 언변이 좋은 淳于髡(순우곤)을 趙(조)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했다. 이윽고 순우곤이 10만의 원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초나라 군사는 밤의 어둠을 타서 철수하고 말았다. 戰禍(전화)를 모면한 위왕은 크게 기뻐했다. 이어 주연을 베풀고 순우곤을 치하하며 환담했다.

“그대는 얼마나 마시면 취하는고?”

“臣은 한 되를 마셔도 취하옵고 한 말을 마셔도 취하나이다.”

“허, 한 되를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어찌 한 말을 마실 수 있단 말인고?”

“예, 경우에 따라 주량이 달라진다는 뜻이옵니다. 만약 高官大爵(고관대작)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마신다면 두려워서 한 되도 못 마시고 취할 것이오며, 또한 근엄한 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마신다면 자주 일어서서 술잔을 올려야 하므로 두 되도 못 마시고 취할 것이옵니다. 옛 벗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마신다면 그땐 대여섯 되쯤 마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동네 남녀들과 어울려 쌍륙(雙六:주사위 놀이)이나 투호(投壺: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놀이)를 하면서 마신다면 그땐 여덟 되쯤 마시면 취기가 두서너 번 돌 것이옵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나서 취흥이 일면 남녀가 무릎을 맞대고 신발이 뒤섞이며 ‘술잔과 접시가 마치 이리에게 깔렸던 풀처럼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집 안에 등불이 꺼질 무렵 안주인이 손님들을 돌려보낸 뒤 신臣 곁에서 엷은 속적삼의 옷깃을 헤칠 때 섹정적 色情的인 향내가 감돈다면 그땐 한 말이라도 마실 것이옵니다.”

이어 순우곤은 주색을 좋아하는 위왕에게 이렇게 간했다.

“전하, 술이 극에 달하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픈 일이 생긴다(樂極偯生:악극의생)’고 하였사오니 깊이 통촉하시오소서.”

위왕은 그후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순우곤을 옆에 앉혀 놓고 마셨다고 한다.

背水之陣(배수지진)

背:등 배. 水:물 수. 之:갈 지(…의). 陣:진칠 진.

물을 등지고 친 진지라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의 비유.

배수진 背水陣과 같은 말이다.

史記(사기)准陰侯列傳(준음후열전)과 十八史略(십팔사략)漢太祖高皇帝(한태조고황제)에 나오는 말이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르기 2년 전(B.C.204)의 일이다. 명장 한신은 유방의 명에 따라 魏(위)나라를 쳐부순 다음 趙(조)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井陘(정형)의 狹道(협도) 출구 쪽에 城砦(성채)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다. 이에 앞서 군략가인 李左車(이좌거)가 재상 陳餘(진여)에게 ‘한나라 군사가 협도를 통과할 때 들이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간첩을 통해 이 사실을 안 한신은 서둘러 협도를 통과하다가 출구를 10리쯤 앞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췄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신은 2천여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시키기로 하고 이렇게 명했다.

“本隊(본대)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 敗走(패주)한다. 그러면 적군은 패주하는 아군을 추적하려고 성채를 비울 것이다. 그때 제군은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한신은 1만여 군사를 협도 출구 쪽으로 보내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한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조나라 군사는 성채를 나와 응전했다. 2,3차 접전 끝에 한나라 군사는 퇴각하여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했고, 승세 勝勢를 탄 조나라 군사는 맹렬히 추격했다. 그 틈에 2000여 기병대는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강을 등진 한나라 군사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나라 군사가 성채로 돌아와 보니 한나라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전쟁은 한신의 대승리로 끝났다. 전승 축하연 때 부하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이유를묻자 한신을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烏合之卒(오합지졸)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死地(사지)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야.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背水之陣)’이네.”

諸將이 問韓信曰 兵法 右倍山陵 前左水澤 今者 將軍 令臣等 反背水陣 臣等不服 然竟以勝 此 何術也 信曰 此在兵法 顧諸君 不察耳 兵法 不曰 陷之死地 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 且信 非得素撫順將卒也 此所謂驅市人而戰 其勢非置之死地則不可

杯中蛇影(배중사영)

杯:술잔 배. 中:가운데 중. 蛇:뱀 사. 影:그림자 영.

술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란 뜻으로, 쓸데없는 의심을 품고 스스로 고민함의 비유.

의심암괴(疑心暗鬼), 반신반의(半信半疑). 기우(杞憂)와 비슷한 말이다.

晉書(진서)樂廣傳(악광전)과 風俗通義(풍속통의)에 나오는 말이다.

晉(진) 나라에 樂廣(악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독학을 했지만 영리하고 신중해서 늘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훗날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역시 매사에 신중했다.악광이 하남태수河南太守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자주 놀러 오던 친구가 웬일인지 발을 딱 끊고 찾아오지 않았다. 악광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찾아가 물어 보았다.

“아니, 자네 웬일인가? 요샌 통 얼굴도 안 비치니…….”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번에 우리가 술을 마실 때 얘길세. 그때 술을 막 마시려는데 잔 속에 뱀이 보이는 게 아니겠나.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냥 마셨지. 그런데 그 후로 몸이 좋지 않다네.”

악광은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술자리는 官家(관가)의 자기 방이었고, 그 방 벽에는 활이 걸려 있었지?

그렇다. 그 활에는 옻칠로 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안광은 그 친구를 다시 초대해서 저번에 앉았던 그 자리에 앉히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떤가? 뭐가 보이나?”

“응, 전번과 마찬가지네.”

“그건 저 활에 그려져 있는 뱀 그림자일세.”

그 친구는 그제서야 깨닫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白駒過隙(백구과극)

白:희다 백, 駒:망아지 구, 過:지나다 과. 隙:틈 극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과 세월의 덧없고 짧음’을 이르는 말.

莊子(장자)知北遊篇(지북유편)과 史記(사기)留侯世家(유후세가)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이 지나가는 것의 빠르기가, 문틈으로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봄과 같다는 말이다.

?장자? 「지북유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실려 있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無(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로 위대한 復歸(복귀)가 아닌가!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일이다.

사기와 유후세가에는 呂太后가 留侯(유후)에 대하여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생의 한 세상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와같음에 이르겠는가?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何至自若如此乎.

百年河淸(백년하청)

百:일백 백. 年:해 년. 河:물 하. 淸:맑을 청.

백 년을 기다린다 해도 黃河(황하)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뜻.

곧 ①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事物(사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의 비유.

② 확실하지 않은(믿을 수 없는) 일을 언제까지나 기다림(기대함)의 비유.

원말은 百年俟河淸(백년사하청)이고 같은 뜻은 千年河淸(천년하청) 이며 비슷한 말은 不知何歲月(부지하세월)이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襄公八年條(양공팔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중반인 周(주)나라 靈王(영왕) 7년(B.C. 565), 鄭(정)나라는 위기에 빠졌다. 楚(초)나라의 속국인 蔡(채)나라를 친 것이 화가 되어 초나라의 보복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곧 주신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은 초나라에 항복하자는 和親論(화친론)과 晉(진)나라의 구원군을 기다리며 싸우자는 主戰論(주전론)으로 나뉘었다.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대부인 子駟(자사)가 말했다.

“주나라의 시에 ‘황하의 흐린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린다 해도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진나라의 구원군을 기다린다는 것은 ‘백년하청’일 뿐이오. 그러니 일단 초나라에 복종하여 백성들의 불안을 씻어 주도록 합시다.”이리하여 정나라는 초나라와 화친을 맺고 위기를 모면했다.

白面書生(백면서생)

白:흰 백. 面:얼굴 면. 書:글 서. 生:날 생.

오로지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

宋書(송서)沈慶之傳(심경지전)에 나오는 말이다.

南北朝(남북조) 시대, 남조인 宋(송)나라 3대 황제인 文帝(문제) 때 吳(오) 땅에 沈慶之(심경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힘써 무예를 닦아 그 기량이 뛰어났다. 前(전) 왕조인 東晉(동진)의 遺臣(유신) 孫恩(손은)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로 一團(일단)의 私兵(사병)을 이끌고 반란군과 싸워 번번이 승리하여 명성을 떨쳤다.그의 나이 40세 때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장군에 임명되었다. 문제에 이어 즉위한 孝武帝(효무제) 때는 도읍인 建康(건강)을 지키는 방위 책임자로 승진했다. 그 후 또 많은 공을 세워 建武將軍(건무장군)에 임명되어 변경 수비군의 總帥(총수)로 부임했다.

어느 날 효무제는 심경지가 배석한 자리에 문신들을 불러 놓고 숙적인 北魏(북위)를 치기 위한 출병을 논의했다. 먼저 심경지는 북벌 北伐 실패의 전례를 들어 출병을 반대하고 이렇게 말했다.

“폐하, 밭갈이는 농부에게 맡기고 바느질은 아낙에게 맡겨야 하옵니다. 하온데 폐하께서는 어찌 북벌 출병을 ‘백면서생’과 논의하려 하시나이까?”

그러나 효무제는 심경지의 의견을 듣지 않고 문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병했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百聞不如一見(백문불여일견)

百:일백 백. 聞:들을 문. 不:아니 불. 如:같을 여. 一:한 일. 見:볼 견.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

漢書(한서)趙充國傳(조충국전)에 나오는 말이다.

前漢(전한) 9대 황제인 宣帝(선제) 때의 일이다. 서북 변방에 사는 티베트계(系) 유목 민족인 羌族(강족)이 쳐들어왔다. 한나라 군사는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제는 御史大夫(어사대부:검찰총장)인 丙吉(병길)에게 後將軍(후장군) 趙充國(조충국)을 찾아가 토벌군의 장수로 누가 적임자인지 물어 보라고 명했다.당시 조충국은 나이 70이 넘은 老將(노장)이었다. 그는 일찍이 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 貳師將軍(이사장군) 李廣利(이광리)의 휘하 장수로 흉노 토벌에 출 전했다가 포위되자 불과 100여 명의 군사로써 血戰(혈전) 끝에 포위망을 뚫고 전군을 구출했다. 그 공으로 車騎將軍(거기 장군)에 임명된 그는 이때부터 오랑캐 토벌전의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조충국을 찾아온 병길은 이렇게 말했다.

“강족을 치는데 누가 적임자인지, 장군에게 물어 보랍시는 어명을 받고 왔소이다.”

그러자 조충국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디 老臣(노신)을 능가할 사람이 있겠소?”

선제는 조충국을 불러 강족 토벌에 대해 물었다.

“강족을 토벌하는데 계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또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오?”

조충국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옵니다(百聞不如一見).’ 무릇 군대의 일란 실지를 보지 않고는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오니 원컨대 신을 金城郡(금성군)으로 보내 주시 오소서. 계책은 현지를 살펴 본 다음에 아뢰겠나이다.”

선제는 기꺼이 윤허했다.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조충국은 騎兵(기병)보다 屯田兵(둔전병)을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상주했다. 그 후 이 계책이 채택됨으로써 강족의 반란도 수그러졌다고 한다.

白眉(백미)

白:흰 백. 眉:눈썹 미.

흰 눈썹(白眉)을 가진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는 뜻.

곧 ①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②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일컫는 말.

三國志(삼국지)蜀志 馬良傳(촉지 마량전)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가 魏(위)‧吳(오)‧蜀(촉)의 세 나라로 나뉘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삼국 시대의 일이다. 劉備(유비)의 촉나라에 文武(문무)를 겸비한 馬良(마량)이라는 이름난 참모(후에 侍中(시중)이 됨)가 있었다. 그는 諸葛亮(제갈량)과 刎頸之交(문경지교)를 맺은 사이로, 한번은 세 치의 혀 하나로 남쪽 변방의 흉포한 오랑캐의 한 무리를 모두 부하로 삼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德性(덕성)과 智謀(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형제 중 맏이인 마량은 태어날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白眉(백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 오형제는 ‘泣斬馬謖(읍참마속)’으로 유명한 마속을 포함하여 모두 재주가 비범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馬氏(마씨)네 오형제 중에서 ‘백미’가 가장 뛰어났다며 마량을 특히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 때부터 ‘백미’란 같은 부류의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白:흰 백. 髮:터럭 발. 三:석 삼. 千:일천 천. 丈:길 장.

흰 머리털의 길이가 삼천 길(仞)이란 뜻으로, 중국 문학의 과장적 표현으로 널리 인용되는 문구.

李白(이백)의 시 秋浦歌(추포가)에 나오는 말이다.

‘백발 삼천장’이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추포가」17수 중 한 수인 오언절구(五言絶句)에서 나온 말이다.

흰 머리털이 (자라 어느새) 삼천 길 白髮三千丈

근심으로 인하여 이처럼 길어졌네 緣愁似箇長

알지 못해라 밝은 거울 속 不知明鏡裏

어디서 가을 서리를 얻었는고 何處得秋霜

이 시는 만년에 귀양에서 풀려난 이백이 秋浦(추포)에 와서 거울을 보고 이미 늙어버린 자기 모습에 놀라서 지은 連作(연작) 중 한 수이다. 이 유명한 ‘백발의 길이가 삼천 길’이란 표현은 중국 문항의 과장적 표현으로 널리 인용되는 문구인데 요즈음에는 ‘과장된 것을 비웃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다.

伯牙絶絃(백아절현)

伯:맏 백. 牙:어금니 아. 絶:끊을 절. 絃:악기 줄 현.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는 뜻.

곧 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벗(知己)의 죽음을 이르는 말. ② 친한 벗을 잃은 슬픔.

줄여서 絶絃(절현)이라고 한다. 같은 말은 伯牙破琴(백아파금)이고 비슷한 말은 知音(지음), 高山流水(고산유수)이다.

列子(열자)湯問篇(탕문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伯牙(백아)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鐘子期(종자기)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율이고 있던 종자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泰山(태산)같군.”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黃河(황하)같군.”

두 사람은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知己(지기)를 가리켜 知音(지음)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伯牙鼓琴 鍾子期廳之 方鼓琴而志在太山 鍾子期曰 善哉乎 鼓琴 巍巍乎 若太山 少選之間而志在流水 鍾子期又曰 善哉乎 鼓琴 蕩蕩乎 若流水 鍾子期死 伯牙破琴絶弦 終身不復鼓琴 以爲世無足復爲鼓琴者.

白眼視(백안시)

白:흰 백. 眼:눈 안. 視:볼 시.

남을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

비슷한 말은 白眼(백안)이고 반대말은 靑眼視(청안시)이다.

晉書(진서)阮籍傳(완적전)에 나오는 말이다.

魏晉時代(위진시대:3세기 후반)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노장老莊의 철학에 심취하여 대나무숲 속에 은거하던 竹林七賢(죽림칠현)의 한 사람에 阮籍(완적)이 있었다. 그는 예의 범절에 얽매인 지식인을 보면 속물이라 하여 ‘백안시’했다고 한다.

어느 날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嵇康(혜강)의 형 嵇喜(혜희)가 완적이 좋아하는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완적이 업신여기며 상대해 주지 않자 혜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도망가듯 돌아갔다.이처럼 상대가 친구의 형일지라도 완적은 그가 속세의 지식인인 이상 靑眼視(청안시)하지 않고 ‘백안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朝野(조야)의 지식인들은 완적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몹시 미워했다고 한다.

百戰百勝(백전백승)

百:일백 백. 戰:싸울 전. 勝:이길 승.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말.

같은 말로 連戰連勝(연전연승)이라 하고 비슷한 말은 百發百中(백발백중).반대말은 百戰百敗(백전백패)이다.

孫子(손자)謀攻篇(모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齊(제)나라 사람으로서 吳王(오왕) 闔閭(합려)를 섬긴 병법가 孫子:孫武(손자)가 쓴 ?손자?「모공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승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서 얻는 승리와 적을 공격한 끝에 얻는 승리인데 전자는 최상책最上策이고 후자는 차선책次善策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다(百戰百勝)’해도 그것은 최상의 승리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인 것이다.

곧, 최상책은 적이 꾀하는 바를 간파하고 이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 다음 상책은 적의 동맹 관계를 끊고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적과 싸우는 것이며, 최하책은 모든 수단을 다 쓴 끝에 강행하는 攻城(공성)이다.”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

覆:엎을 복. 水:물 수. 不:아니 불. 返:돌이킬 반. 盆:동이 분.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뜻.

곧 ① 한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의 비유.

② 일단 저지른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의 비유.

覆杯之水(복배지수), 覆水不收(복수불수)와 같은 뜻이다.

비슷한 말은 落花不返枝(낙화불반지), 破鏡不照(파경부조), 破鏡之歎(파경지탄)이다. 拾遺記(습유기)에 나오는 말이다.

周(주)나라 시조인 武王(무왕)의 아버지 西伯(서백:문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황하의 큰 지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초라한 노인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학식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백은 이 노인이야말로 아버지 태공(太公)이 ‘바라고 기다리던’ 주나라를 일으켜 줄 마로 그 인물이라 믿고 스승이 되어 주기를 청했다.

이리하여 이 노인, 태공망(太公望:태공이 대망하던 인물이한 뜻) 여상(呂尙:성은 강(姜) 씨, 속칭 강태공)은 서백의 스승이 되었다가 무왕의 태부(太傅:태자의 스승)‧재상을 역임한 뒤 齊(제)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태공망 여상은 이처럼 입신 출세했지만 서백을 만나기 전까지는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던 가난한 서생이었다. 그래서 결혼 초부터 굶기를 부자 밥 먹듯 하던 아내 馬(마)씨는 그만 친정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마씨가 여상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전엔 끼니를 잇지 못해 떠났지만 이젠 그런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아 돌아왔어요.”

그러자 여상은 잠자코 곁에 있는 물그릇을 들어 마당에 엎지른 다음 마씨에게 말했다.

“저 물을 주워서 그릇에 담으시오.”

그러나 이미 땅 속으로 스며든 물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마씨는 진흙만 약간 주워 담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여상은 조용히 말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법이오.”

伯仲之勢(백중지세)

伯:맏 백, 仲:버금 중, 之:~의 지, 勢:형세 세

서로 비슷 비슷 형세.

魏 文帝(위 문제)의 典論(전론)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부모의 형과 누님을 백부와 백모라 하고, 동생과 누이동생을 숙부와 숙모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의 중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형제의 순서를 다시 세분하여, ‘백伯 · 중仲 · 숙叔 · 계季’로 부르고 있다.?예기? ‘壇弓(단궁)’ 상편上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이름을 짓고, 冠禮(관례)를 하고서 字(자)를 붙이고, 50에 伯仲(백중)으로써 하고, 죽으면 諡號(시호)를 내리는 것은 周(주)나라의 도리이다.”

즉, 어린이가 태어나면 3개월만에 이름을 짓고, 20세가 되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冠(관)을 씌우고, 字(자)를 짓는다. 50세가 되면 字(자) 위에 伯 · 仲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諡號(시호)를 내린다. 이것이 주나라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伯仲(백중)”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는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비교 평가하여도 서로 優劣(우열)을 가릴 수 없을 때, <그들은 伯仲之間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伯仲之間>이란 말을 처음에 쓴 것은, 魏(위)나라의 文帝(문제) 曹丕(조비)였다.

문인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傅儀(부의)와 班固(반고)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

駙馬(부마)

駙:곁말 부. 馬:말 마.

임금의 사위. 공주의 부군(夫君).

원말은 駙馬都尉(부마도위)다.

搜神記(수신기)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隴書(농서) 땅에 辛道度(신도탁)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름 높은 스승을 찾아 雍州(옹주)로 가던 도중 날이 저물자 어느 큰 기와집의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하녀가 나와 대문을 열었다.

“옹주로 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재워 줄 수 없겠습니까?”

하녀는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그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잘 차린 밥상이 있었는데 하녀가 사양 말고 먹으라고 한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들어왔다.

“저는 진나라 문왕의 딸이온데 조나라로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을 하고 이제까지 23년 동안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찾아 주셨으니 저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세요.”

신도탁은 그런 고귀한 여인과 어찌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겠느냐고 극구 사양했으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사흘 낮 사흘 밤을 함께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여인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좀더 함께 지내고 싶지만 사흘 밤이 한도예요. 이 이상 같이 있으면 화를 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헤어져야 하지만 제 진심을 보여 드릴 수 없는 게 슬프군요. 정표로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여인은 신도탁에게 금베개를 건네주고는 하녀에게 대문까지 배웅하라고 일렀다. 대문을 나선 신도탁이 뒤돌아보니 그 큰 기와집은 간데 없고 잡초만이 무성한 허허 벌판에 무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품속에 간직한 금베개는 그대로 있었다.신도탁은 금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 먹었다. 그후 왕비가 금베개를 저잣거리에서 발견하고 관원을 시켜 조사해 본 결과 신도탁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왕비는 그를 잡아다가 경위를 알아본 다음 공주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다른 副葬品(부장품)은 다 있었으나 금베개만 없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조사해 본 결과 情交(정교)한 흔적이 역력했다. 모든 사실이 신도탁의 이야기와 부합하자 왕비는 신도탁이야말로 내 사위라며 그에게 ‘駙馬都尉(부마도위)’하는 벼슬을 내리고 후대했다고 한다.

焚書坑儒(분서갱유)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秦(진)나라 始皇帝(시황제)의 가혹한 법과 혹독한 정치을 이르는 말.

史記(사기)秦始皇紀(진시황기)와 十八史略(십팔사략)秦篇(진편)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222년, 齊(제)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周(주)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中央執權(중앙집권)의 郡縣制度(군현제도)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咸陽宮(함양궁)의 잔치에서 博士(박사)인 淳于越(순우월)이 ‘현행 군현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立案者(입안자)인 승상 李斯(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發令(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醫藥(의약)‧卜筮(복서:점)‧種樹(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竹簡(죽간)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阿房宮(아방궁)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神仙術法(신선술법)을 닦는 方士(방사)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盧生(노생)과 侯生(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詐取(사취)한 뒤 시황제의 不德(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不俱戴天之讎(불구대천지수)

不:아니 불. 俱:함께 구. 戴:머리에 일 대. 天:하늘 천. 讎:원수 수.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

줄여서 戴天之讎(대천지수), 不共戴天(불공대천)라 한다.

같은 말은 不俱戴天之怨讎(불구대천지원수), 不共戴天之讎(불공대천지수)이다.

禮記(예기)曲禮篇(곡례편)과 孟子(맹자)盡心篇(진심편)에 나오는 말이다.

예기 곡례편에는 ‘불구대천지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父之讎弗與共戴天 兄弟之讎不反兵 交遊之讎不同國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 이 말은 맹자 진심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맹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拂鬚塵(불수진)

拂:떨칠 불. 鬚:수염 수. 塵:티끌‧먼지 진.

(남의) 수염에 붙은 티끌을 털어 준다는 뜻.

곧 ① 윗사람이나 권력자에게 아부(아첨)함의 비유.

② 上司(상사)에 대한 비굴한 태도의 비유.

줄여서 拂鬚(불수)라 한다.

宋史(송사)寇準傳(구준전)에 나오는 말이다.

宋(송:북송)나라의 4대 황제인 仁宗(인종) 때 강직하기로 유명한 寇準(구준)이라는 정의파 재상이 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여러 유능한 인재를 발탁, 천거했는데 參政(참정:從二品) 丁謂(정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구준이 정위를 포함한 중신들과 會食(회식)을 하는데 음식찌꺼기가 수염에 붙었다. 이것을 본 정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소맷자락으로 공손히 털어냈다. 그러자 구준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허, 참. 참정이라면 나라의 중신인데, 어찌 남의 ‘수염에 붙은 티끌을 털어 주는’ 그런 하찮은 일을 하오?”

정위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물러갔다고 한다.

不入虎穴不得虎子(불입호혈 부득호자)

不:아니 불. 入:들 입. 虎:범 호. 得:얻을 득. 子:아들 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못 잡는다는 뜻으로, 모험을 하지 않고는 큰 일을 할 수 없음의 비유.

後漢書(후한서)班超傳(반초전)에 나오는 말이다.

後漢(후한) 초기의 장군 班超(반초)는 중국 역사서의 하나인 漢書(한서)를 쓴 아버지 班彪(반표), 형 班固(반고), 누이동생 班昭(반소)와는 달리 武人(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반초는 후한 2대 황제인 明帝(명제) 때(74년) 서쪽 오랑캐 나라인 鄯善國:누란(선선국)에 사신으로 떠났다. 선선국왕은 반초의 일행 36명을 上客(상객)으로 후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후대는 薄待(박대)로 돌변했다. 반호는 궁중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즉시 부하 장수를 시켜 진상을 알아보라고 했다. 이윽고 부하 장수는 놀라운 소식을 갖고 왔다.

“지금 신선국에는 匈奴國(흉노국)의 사신이 와 있습니다.게다가 대동한 군사만해도 백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흉노는 옛부터 漢族(한족)이 萬里長城(만리장성)을 쌓아 침입을 막았을 정도로 獰猛(영맹)한 유목민족이다. 반초는 즉시 일행을 불러 모은 다음 술을 나누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흉노국의 사신이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있다고 한다. 신선국왕은 우리를 다 죽이거나 흉노국의 사신에게 넘겨 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싸워야 합니다!”모두들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외쳤다.

“좋다. 그럼 오늘 밤에 흉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쳐들어가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못 잡는다(不入虎穴不得虎子)’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날 밤 반초 일행은 흉노의 숙소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일을 계기고 선선국이 굴복했음은 물론 인근 50여 오랑캐의 나라들도 한나라를 上國(상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不惑(불혹)

不:아니 불. 惑:미혹할 혹.

미혹(迷惑)하지 아니함. 나이 마흔 살의 일컬음.

不惑之年(불혹지년)과 같은 말이다.

論語(논어)爲政篇(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일생을 회고하며 자신의 학문 수양의 발전 과정에 대해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志學>

서른 살 때 입신했다.三十而立<而立>

마흔 살 때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不惑>

쉰 살 때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知命>

예순 살 때는 귀에 따랐고六十而耳順

<耳順>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從心>

20세:약관(弱冠),?예기(禮記)?에서 온 말.

60세 : 환갑(還甲).

70세 : 고희(古稀), 두보의 시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

77세 : 희수(喜壽), ‘喜’의 초서체(草書體)는 七七이라 읽을 수 있음.

88세 : 미수(米壽), ‘米’자를 분해하면 八十八이 됨.

鵬程萬里(붕정만리)

鵬:새 붕, 程:단위 정, 萬:일만 만, 里:거리 리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

莊子(장자)逍遙遊篇(소요유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장자 소요유편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鯤(곤)이라 한다. 곤의 큰 것은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鵬(붕)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齊諧(제해)라는 사람이 있어 다음과 같은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김에, 물을 치기를 3천 리나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旋風(선풍)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를 9만 리나 하며, 6개월이나 걸려서 남쪽 바다에 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과 먼지를 생물들이 뿜어내건만, 하늘은 푸르고 푸르르니, 그 올바른 색깔인가? 그 멀어서 끝간 데가 없는 까닭인가? 그 내려다봄에 또한 이와같을 뿐이다. 또한 대저 물의 쌓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움에 힘이 없고, 술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엎어진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텁지 못하면, 그 큰 날개를 띄움에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면 바람이 그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뒤에 곧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서,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이리하여 지금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脾肉之嘆(비육지탄)

脾:지라 비, 肉:고기 육, 之:~의, 嘆:탄식하다 탄

성공하지 못하고 한갓 세월만 보냄에 대한 탄식.

三國志(삼국지)蜀志(촉지)에 나오는 말이다.

劉備(유비)는 198년에 曹操(조조)와 협력하여, 한 마리 이리와 같은 勇壯(용장) 呂布(여포)를 下邳(하비)에서 격파한 다음, 漢(한)의 임시 수도 許昌(허창)으로 올라가 조조의 周旋(주선)으로 獻帝(헌제)에게 拜謁(배알)하고 좌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그대로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허창을 탈출하여 각지로 전전한 끝에 皇族(황족)의 일족인 荊州(형주)의 劉表(유표)에게 의지하여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유표에게 초대되어 荊州城(형주성)에 갔을 때,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일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功業(공업)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

備住荊州數年 嘗於表坐起至厠 見髀肉生 慨然流悌 還坐 表怪問備 備曰 吾常身不離鞍 髀肉皆消 今不復騎 髀裏肉生 日月若馳 老將至矣 而功業不建 是以悲耳.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

氷:얼음 빙, 炭:숯 탄, 不:아니 불, 相: 서로 상, 容: 담다 용

사물이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을 일컫는 말.

楚辭(초사)七諫(칠간)에 나오는 말이다.

‘빙탄불상용’이란, 그 성질이 전혀 반대여서, 아무래도 타협하기 어려운 사이를 말한다. 다음은 ?초사? 「칠간」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사람 일의 불행을 슬퍼하여, 태명太命을 붙여서 함지(咸池)에게 맡긴다.

몸은 병을 얻어 쉬지 못하고,마음은 湯(탕)임금과 같이 끓어오르네.

얼음과 숯은 가히 써 서로 함께하지 못하니,氷炭不可以相竝兮

내 본디부터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吾固知乎命之不長

홀로 괴롭게 죽어 즐거움이 없음을 슬퍼하여,哀獨苦死之無樂兮

나는 나이가 아직 다하지 않음을 슬퍼한다.措余年之未央.

四面楚歌(사면초가)

四:넉 사. 面:낯‧겉‧대할 면. 楚:초나라 초. 歌:노래 가.

사면에서 들려 오는 초나라 노래란 뜻.

① 사방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상태.

② 주위에 반대자 또는 적이 많아 고립되어 있는 처지.

③ 사방으로부터 비난받음의 비유.

줄여서 楚歌(초가)라 한다. 같은 말은 四面楚歌聲(사면초가성)이다.

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에 나오는 말이다.

秦(진)나라를 무너뜨린 楚霸王 항우와 漢王 유방은 鴻溝(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 강화하고 5년간에 걸친 覇權(패권) 다툼을 멈췄다(B.C. 203). 힘과 氣(기)에만 의존하다가 范增(범증) 같은 유일한 謀臣(모신)까지 잃고 밀리기 시작한 항우의 휴전 제의를 유방이 받아들인 것이다.

항우는 곧 초나라의 도읍인 彭城(팽성)을 향해 撤軍(철군) 길에 올랐으나 서쪽의 漢中(한중)으로 철수하려던 유방은 참모 張良(장량)‧陳平(진평)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윽고 垓下(해하)에서 韓信(한신)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陣營(진영)은 군사가 격감 한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四面楚歌)’ 소리가 들려오니 말이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 노랫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한 장량의 심리 작전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항우는 깜짝 놀랐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단 말인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이 많은고?’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한 항우는 결별의 주연을 베풀었다.

항우의 진중에는 虞美人(우미인)이라 불리는 애인 虞姬(우희)와 騅(추)라는 준마가 있었다. 항우는 우희가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悲憤慷慨(비분강개)하여 시를 읊고 또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지만 力拔山兮氣蓋世

때는 불리하고 추는 가지 않누나 時不利兮騅不逝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고 騅不逝兮可奈何

우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도 이별의 슬픔에 목메어 화답했다. 역발산을 자처하는 천하장사 항우의 뺨에는 어느덧 몇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좌우에 배석한 장수들이 嗚咽(오열)하는 가운데 우희는 마침내 항우의 보검을 뽑아 젖가슴에 꽂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날 밤, 불과 800여 騎(기)를 이끌고 중포위망을 탈출한 항우는 이튿날, 혼자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수백 명을 벤 뒤 강만 건너편 당초 군사를 일으켰던 땅, 江東(강동)으로 갈 수 있는 烏江(오강)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항우는 800여 강동 子弟(자제)들을 다 잃고 혼자 돌아가는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쳐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그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駟不及舌(사불급설)

駟:사마 사, 不: 아니 불, 及:미치다 급, 舌:혀 설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

論語(논어)顔淵篇(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子貢(자공)을 보고 棘子成(극자성)이 물었다.

“君子(군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文(문)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駟(사)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文(문)이 質(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惜乎夫子之說 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猶犬羊之鞹.

唐(당)나라 때의 명재상인 馮道(풍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似而非(사이비)

似:같을 사. 而:어조사 이. 非:아닐 비.

①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다름. ②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임.

원말은 似而非者(사이비자)이다.

孟子(맹자)盡心篇(진심편)과 論語(논어)陽貨篇(양화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亞聖(아성)으로 불리던 맹자에게 어느 날 萬章(만장)이라는 제자가 물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디를 가든 훌륭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가리켜 ‘향원(鄕原:지방의 토호(土豪))은 덕(德)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들어서 비난할 것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나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또 집에 있으면 忠心(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는 더불어 堯舜(요순)의 道(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공자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느니라.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鄭(정)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雅樂(아악)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蛇足(사족)

蛇:뱀 사. 足:발 족.

뱀의 발. 곧 ① 쓸데없는 것. 무용지물(無用之物)의 비유.

②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더 나음의 비유.

③ 공연히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실패함의 비유.

원말은 畵蛇添足(화사첨족)이다.

戰國策(전국책)齊策(제책)과 史記(사기)楚世家(초세가)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인 楚나라 懷王(회왕)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楚有祠者 賜其舍人巵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巵 右手畵蛇曰 吾能爲之足 未成一人蛇成 奪其巵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終亡其酒.

‘사족’은 齊(제)나라를 방문한 秦(진)나라의 사신 陳軫(진진)이 제나라 湣王(민왕)의 요청으로, 초나라 재상 昭陽(소양)을 만나 제나라에 대한 공격 계획을 철회하라고 설득할 때 인용한 이야기임.

殺身成仁(살신성인)

殺:죽일 살. 身:몸 신. 成:이룰 성. 仁:어질 인.

몸을 죽여 어진 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 또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

論語(논어)衛靈公篇(위령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춘추 시대, 仁(인)을 이상의 도덕으로 삼는 孔子(공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스스로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인’의 도는 제자인 曾子(증자)가 논어里仁篇(이인편)에서 지적했듯이 ‘忠(충)과 恕(서)’에 귀착한다.“부자(夫子:공자에 대한 경칭)의 도는 ‘충’‘서’일 뿐”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충’이란 자기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서’란 ‘충’의 정신을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증자는 공자의 ‘인’이 곧 이 ‘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三顧草廬(삼고초려)

三:석 삼. 顧:돌아볼 고. 草:풀 초. 廬:풀집 려.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곧 ①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三顧之禮) ② 윗사람으로부터 후히 대우받음의 비유.

줄여서 三顧(삼고)라 하고 같은 말은 草廬三顧(초려삼고), 三顧之禮(삼고지례)이다.

비슷한 말은 三顧知遇(삼고지우)이다

삼국지 三國志중 蜀志 諸葛亮專(촉지 제갈량전)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 말엽, 유비는 관우‧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漢室(한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司馬徽(사마휘)에게 군사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鳳雛(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襄陽(양양)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魏(위)나라의 조조, 吳(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三分(삼분)하고 漢室(한실)의 맥을 잇는 蜀漢(촉한)을 세워 황제 (소열제(昭烈帝), 221~223)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다.

三年不飛又不鳴(삼년불비우불명)

三:석 삼. 年:해 년. 不:아니 불. 飛:날 비. 又:또 우. 鳴:울 명.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훗날 雄飛(웅비)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르는 말.

같은 말은 三年不飛 不鳴(삼년불비 불명)이고 비슷한 말은 雌伏(자복)이다.

呂氏春秋(여씨춘추)審應覽(심응람)과 史記(사기)滑稽列傳(골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초엽, 五霸(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을 간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오.”

그 후 장왕은 3년간에 걸쳐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酒色(주색)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 五擧(오거)는 죽음을 각오하고 諫言(간언)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차마 直諫(직간)할 수가 없어 수수께끼로써 우회적으로 간하기로 했다.

“전하,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까 하나이다.”

“어서 내보내시오.”

“언덕 위에 큰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이 새는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사옵니다(三年不飛又不鳴).’ 대체 이 새는 무슨 새이겠나이까?”

장왕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3년이나 날지 않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오. 또 3년이나 울지 않았지만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이제 그대의 뜻을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시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나 장왕의 행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부 蘇從(소종)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전에 나아가 직간했다. 그러자 장왕은 꾸짖듯이 말했다.

“卿(경)은 포고문도 못 보았소?”

“예, 보았나이다. 하오나 신은 전하께서오서 국정에 전념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알았소. 물러가시오.”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에 전념했다. 3년 동안 장왕이 주색을 가까이했던 것은 충신과 간신을 선별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장왕은 국정에 임하자마자 간신을 비롯한 부정 부패 관리 등 수백 명에 이르는 반윤리적 공직자를 誅殺(주살)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등용했다. 그리고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를 맡겨 어지러웠던 나라가 바로잡히자 백성들은 장왕의 멋진 재기를 크게 기뻐했다.

三十六計走爲上計(삼십육계주위상계)

十:열십.六:여섯륙.計:꾀할계.走:달아날주.爲:할 위.上:위 상.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에서 피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란 뜻으로, 일의 형편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

비슷한 말로 走與槄飯(주여도반)이 있다.

資治通鑑(자치통감)卷百四一(권백사일)과 齊書(제서)王敬則專(왕경칙전)에 나오는 말이다.

남북조 시대, 제齊(南齊, 479~502)나라 5대 황제인 명제明帝 蕭道成(소도성)의 종질從姪(사촌 형제의 아들)로서 고제의 증손曾孫인 3대‧4대 황제를 차례로 시해하고 제위를 簒奪(찬탈)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 후에도 고제의 直孫(직손)들은 물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잡아 죽였다.

이처럼 피의 숙청이 계속되자 고조 이후의 옛 신하들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개국 공신인 會稽(회계) 태수 王敬則(왕경측)의 불안은 날로 심해졌다. 불안하기는 명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부 張壞(장괴)를 平東(평동)장군에 임명하여 회계와 인접한 五郡(오군)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왕경측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도읍 建康(건강)을 향해 진군하여 불과 10여 일 만에 건강과 가까운 興盛城(흥성성)을 점령했다. 도주에 농민들이 가세함에 따라 병력도 10여 만으로 늘어났다.

한편 병석의 명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던 태자 蕭寶卷(소보권)은 패전 보고서를 받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경측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檀將軍(단장군)의 ‘서른 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三十六計走爲上計)’이었다고 하더라. 이제 너희 父子(부자)에게 남은 건 도망가는 길밖에 없느니라.”

이 말은 ‘단장군이 魏(위:북위)나라 군사와 싸울 때 도망친 것을 비방한 것이다’라고 주석을 붙인 책도 있다.그 후 관군에게 포위 당한 왕경측은 亂戰中(난전중)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三人成虎(삼인성호)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 듣는다는 말.

줄여서 市虎(시호)라 한다. 같은말은 市有虎(시유호), 市虎三傳(시호삼전), 三人言而成虎(삼인언이성호)이고 비슷한 말은 曾參殺人(증삼살인), 十趵木無不顚(십작목무부전)이다.

韓非子(한비자)內儲設(내저설)과 戰國策(전국책)魏策 惠王(위책 혜왕)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魏(위)나라 惠王(혜왕)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龐葱(방총)이 볼모로서 趙(조)나라의 도읍 邯鄲(한단)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讒言(참언)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喪家之狗(상가지구)

‘상갓집 개’(속담) ① 초상집 개, 주인 없는 개.

② 여위고 기운 없이 초라한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

孔子家語(공자가어)와 史記(사기)孔子世家(공자세가)에 나오는말이다.

춘추시대 말엽의 대철학자요 사상가로서 유교의 鼻祖(비조)인 공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魯(노)나라 定公때 大司寇(대사구)로서 재상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공자는 왕족인 三桓(삼환)씨에게 배척을 당하여 노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후 공자는 십 수 년간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도덕 정치’를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6-7개국을 순방했으나 받아 주는 군주가 없었다.

한 번은 鄭(정)나라를 찾아갔던 공자(56세)가 제자들을 놓쳐 버리고 홀로 동문(東門) 옆에 서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스승을 찾아나선 子貢(자공)이 한 행인에게 공자의 人相着衣(인상 착의)를 대면서 혹시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 행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東門(동문) 옆에 웬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는 堯(요)임금과 같았고, 목은 舜·禹임금과 같았으며, 어깨는 名宰相(명재상) 子産과 같았소.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禹(우)임금에게 세 치쯤 미치지 못했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같습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문으로 달려간 자공은 공자를 만나자 방금 행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고했다. 이야기를 듣고난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용모에 대한 형용은 들어맞는다고 하기 어려우나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 후 鄭(정)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는 그야말로 상갓집 개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노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塞翁之馬(새옹지마)

塞:변방 새. 翁:늙은이 옹. 之:갈 지(…의). 馬:말 마.

세상 만사가 變轉無常(변전무상)하므로,

인생의 吉凶禍福(길흉 화복)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

길흉화복의 덧없음의 비유.

원말은 人間萬事塞翁之馬(인간만사 새옹지마)이다. 같은 말은 塞翁馬(새옹마), 北翁馬(북옹마)이고 비슷한 말은 塞翁得失(새옹득실), 塞翁禍福(새옹화복), 禍福糾纆(화복규목), 禍福糾繩(화복규승)이다.

淮南子(회남자)人生訓(인생훈)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駿馬(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누가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戰死(전사)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한다.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西施矉目(서시빈목)

西:서녘 서. 施:베풀 시. 矉:눈살 찌푸릴 빈. 目:눈 목.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곧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의 비유,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效顰(효빈)이 원말이고 西施捧心(서시봉심), 西施效矉(서시효빈)이 비슷한 말이다.

莊子(장자)天運篇(천운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勾踐(구천)은 오왕吳王 夫差(부차)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醜女(추녀)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자 천운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反儒敎的(반유교적)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本質(본질)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춘추 시대 말엽의 亂世(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周王朝(주왕조)의 理想政治(이상 정치)를 그대로 魯(노)나라와 衛(위)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噬臍莫及(서제막급)

噬:씹을 서. 臍:배꼽 제. 莫:아닐‧없을 막. 及:미칠 급.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

噬臍(서제)가 원래 말이고 같은 말은 後悔莫及(후회막급)이다.

春秋左氏專(춘추좌씨전) 莊公六年條(장공육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7세기 말엽, 周王朝(주왕조) 莊王(장왕) 때의 이야기이다. 楚(초)나라 文王(문왕)이 지금의 河南省(하남성)에 있었던 申(신)나라를 치기 위해 역시 하남성에 있었던 鄧(등)나라를 지나가자 등나라의 임금인 祁侯(기후)는 ‘내 조카가 왔다’며 반갑게 맞이하여 진수성찬으로 환대했다. 그러자 세 賢人(현인)이 기후 앞으로 나와 이렇게 진언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머지 않아 저 문왕은 반드시 등나라를 멸하고 말 것이옵니다. 하오니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噬臍莫及).’”

그러나 기후는 펄쩍 뛰며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문왕은 군사를 이끌고 등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리하여 등나라는 일찍이 세 현인이 예언한 대로 문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先始於隗(선시어외)

先:먼저 선. 始:비로소 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隗:높을 외.

‘먼저 隗(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戰國策(전국책)燕策 昭王(연책 소왕)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燕(연)나라가 영토의 태반을 齊(제)나라에 빼앗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즉위한 昭王(소왕)은 어느 날, 재상 郭隗(곽외)에게 잃은 땅의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千金(천금)을 가지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일을 맡아보는 신하가 천리마를 구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왕은 그에게 천금을 주고 그 일을 맡겼나이다. 그는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갔으나 애석하게도 그 말은 그가 도착하기 몇 일 전에 죽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죽은 말의 뼈를 500금(金)이나 주고 사 오자(賈死馬骨)’ 왕은 진노하여 ‘과인이 원하는 것은 산 천리마야. 누가 죽은 말뼈에 500금을 버리라고 했느냐’며 크게 꾸짖었나이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리마라면 그 뼈조차 거금으로 산다는 것을 안 만큼 머지 않아 반드시 천리마를 끌고 올 것’이라고 말했나이다. 과연 그 말대로 1년이 안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모였다고 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서 진정으로 賢才(현재)를 구하신다면 ‘먼저 신 외부터(先始於隗)’ 스승의 예를 받도록 하오소서. 그러면 외 같은 자도 저렇듯 후대를 받는다며 신보다 어진 이가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스스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위해 黃金臺(황금대)라는 궁전을 짓고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 일이 諸國(제국)에 알려지자 천하의 현재가 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趙(조)나라의 명장 樂毅(악의)를 비롯하여 陰陽說(음양설)의 鼻祖(비조)인 鄒衍(추연), 대정치가인 劇辛(극신)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은 소왕은 드디어 諸國(제국)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를 쳐부수고 숙원을 풀었다.

  매사마골 : 쓸데없는 것을 사서 요긴한 것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데없는 것이라도 소중히 다루면 현인은 그에 끌려 자연히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先則制人(선즉제인)

先:먼저 선. 則:곧 즉(…그러면), 법 칙. 制:억제할 제. 人:사람 인.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비슷한말은 陳勝吳廣(진승오광)이다.

史記(사기)項羽本記(항우본기)와 漢書(한서)項籍專(항적전)에 나오는 말이다.

秦(진)나라 2세 황제 元年(원년:B.C. 209)의 일이다. 秦始皇(진시황)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大澤鄕(대택향)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陳勝(진승)과 吳廣(오광)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秦(진)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張楚(장초)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 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咸陽(함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 江東의 會稽君守(회계군수) 殷通(은통)은 郡都(군도) 吳中의 유력자인 項梁(항량)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敗死(패사)한 옛 楚나라 명장이었던 項燕(항연)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籍(적:항우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江西(강서)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時運(시운)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앆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漢王朝(한왕조)를 이룩한 劉邦(유방)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城下之盟(성하지맹)

城:성 성, 下:아래 하, 之:~의 지, 盟:맹서 맹

적국에게 항복하고 맺는 치욕적인 講和(강화)의 盟約(맹약).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桓公 十二年(환공 십이년)에 나오는 말이다.

桓公(환공) 12년(BC 700), 초나라가 絞(교)로 쳐들어가 성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莫敖(막오)라는 벼슬에 있는 屈瑕(굴하)가 桓公(환공)에게 말했다.

“絞(교)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絞(교)의 군사들은 첫날 楚(초)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絞(교)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扜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而覆諸出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成蹊(성혜)

成:이룰 성. 蹊:지름길(샛길) 혜.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원말은 桃李不言下自成蹊(도리불언 하자성혜)이다.

史記(사기)李將軍列傳(이장군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한 6대 황제인 景帝(경제)때 李廣(이광)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匈奴簇(흉노족)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武勇談(무용담)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騎(기)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 이장군’ 열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 도이불언: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하비성혜).”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少:젊을 소. 易:쉬울 이. 老:늙을 로. 學:배울‧학문 학. 難:어려울 난.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朱子(주자)의 朱文公文集(주문공문집)勸學文(권학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南宋(남송)의 大儒學者(대유학자)로서 송나라의 理學(이학)을 대성한 朱子(주자:朱熹주희)의 주문공문집 권학문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少年易老學難成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一寸光陰不可輕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未覺池塘春草夢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階前梧葉已秋聲

宋襄之仁(송양지인)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의). 仁:어질 인.

송나라 襄公(양공)의 인정이란 뜻.

곧 ① 쓸데없는 인정을 베푸는 것의 비유. ② 무익한 동정이나 배려.

十八史略(십팔사략)卷一(권일)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인 周(주)나라 襄王(양왕) 2년(B.C.650), 宋(송)나라 桓公(환공)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玆父(자부)는 仁德(인덕)이 있는 庶兄(서형) 目夷(목이)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位(위)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覇者(패자)인 齊(제)나라 桓公(환공)이 죽고, 송나라에는 隕石(운석)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昭(소: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제‧楚(초) 세 나라의 盟主(맹주)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通交(통교)한 鄭(정)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泓水(홍수)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戰列(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劣勢(열세)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首鼠兩端(수서양단)

首:머리 수. 鼠:쥐 서. 兩:두 량. 端:바를‧끝‧실마리 단.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라는 뜻.

곧 ① 진퇴‧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태. ② 두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엿봄.

같은 말은 首施兩端(수시양단)이고 비슷한 말은 左顧右眄(좌고우면)이다.

史記(사기)魏其武侯列傳(위기무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한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의 일이다. 5대 文帝(문제)의 황후의 조카인 魏其侯(위기후) 竇嬰(두영)과 6대 景帝(경제)의 황후의 동생인 武安侯 田蚡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西山落日하는 고참 대장군이었고, 전분은 旭日昇天(욱일 승천)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두영의 친구인 灌夫(관부) 장군이 高官大爵(고관 대작)들이 모인 주연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詰責(힐책)하는데 전분이 그를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朝議(조의)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이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內史(내사:도읍을 다스리는 벼슬) 鄭當時(정당시)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御史大夫(어사대부:감찰 기관의 으뜸 벼슬) 韓安國(한안국)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是非曲直(시비 곡직)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明若觀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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漱石枕流(수석침류)

漱:양치질 수. 石:돌 석. 枕:베개 침. 流:흐를 류.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

곧 ①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씀. 억지로 발라 맞춰 발뺌을 함.

② (남에게 지기 싫어서 좀처럼 체념을 안하고) 억지가 셈의 비유

같은 말은 枕流漱石(침류슈석)이고 비슷한 말은 牽强附會(견강부회), 我田引水(아전인수), 推舟於陸(추주어륙), 詭辯(궤변)이다.

晉書(진서)孫楚專(손초전)에 나오는 말이다.

秦(진)나라 초엽, 馮翊太守(풍익태수)를 지낸 孫楚(손초)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대부간에는 속세의 도덕‧名聞(명문)을 경시하고 老莊(노장)의 哲理(철리)를 중히 여겨 담론하는 이른바 淸談(청담)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손처도 竹林七賢(죽림 칠현)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친구인 王濟(왕제)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참류수석)’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수석침류)’고 잘못 말했다.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존심이 강한데다 文才(문재)까지 뛰어난 손초는 서슴없이 이렇게 강변했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隱士(은사)인 許由(허유)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水魚之交(수어지교)

水:물 수, 魚:물고기 어, 之:~의 지, 交:사귀다 교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三國志(삼국지)蜀志 諸葛傳(촉지 제갈전)에 나오는 말이다.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謀士(모사)가 없었다.이러한 때에 諸葛孔明(제갈공명)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荊州(형주)와 益州(익주)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生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水滴穿石(수적천석)

水:물 수. 滴:물방울 적. 穿:뚫을(통할) 천. 石:돌 석.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

곧 ①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내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의 비유.

②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됨의 비유. 큰 힘을 발휘함의 비유.

같은 말은 點滴穿石(점적천석)이고 비슷한 말은 愚公移山(우공이산), 積土成山(적토성산), 積水成淵(적수성연), 山溜穿石(산류천석)이다.

鶴林玉露(학림옥로)에 나오는말이다.

北宋(북송:960~1127)때 崇陽縣令(숭양 현령)에 張乖崖(장괴애)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관아를 돌아보다가 창고에서 황급히 튀어나오는 한 구실 아치를 발견했다. 당장 잡아서 조사해 보니 상투 속에서 한 푼 짜리 엽전 한 닢이 나왔다. 엄히 추궁하자 창고에서 훔친 것이라고 한다. 즉시 刑吏(형리)에게 명하여 곤장을 치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구실 아치는 장괴애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또, 그까짓 엽전 한 푼 훔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 말을 듣자 장괴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 이놈!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 하루 한 푼이라도 천 날이면 천 푼이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을 뚫는다’고 했다.”

장괴애는 말을 마치자마자 층계 아래 있는 죄인 곁으로 다가가 칼을 빼어 목을 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상관을 무시하는 구실 아치의 잘못된 풍조를 고치려는 행위였다고 ?옥림학로?에서 전하고 있다.

‘수적천석’은 우리 나라의 속담(俗談) ‘낙숫물이 댓돌(臺石)을 뚫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고사 성어임.

守株待兎(수주대토)

守:기다리다 수,株:그루터기 주, 待:기다리다 대, 兎:토끼 토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함.

韓非子(한비자)에 나오는 말이다.

宋(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宋(송)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이다.

宋人 有耕田者 田中 有株 免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 而守株 冀復得免 免不可不得 而身爲宋國笑.

韓非子(한비자)는 堯舜(요순)을 이상으로 하는 王道(왕도) 정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守株待兎(수주대토)의 비유를 들었다.그는 시대의 변천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復古主義(복고주의)는 진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착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낡은 관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상 또는 사람에게 이 守株待兎(수주대토)의 비유를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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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則多辱(수즉다욕)

壽:목숨 수. 則:곧 즉, 법 칙. 多:많을 다. 辱:욕될‧욕 욕.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망신스러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는 말

莊子(장자)天地篇(천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를 살다간 사상가 莊子(장자)의 저서 ?장자? 「천지편」에는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그 옛날 聖天子(성천자)로 이름 높은 堯(요) 임금이 巡幸(순행)중에 華(화)라는 변경에 이르자 그곳의 관원이 공손히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장수하시오소서.”

그러자 요 임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장수하기를 원치 않네.”

“그러시면 부자가 되시오소서.”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네.”

“그러시면 남자 아이를 많이 낳으소서.”

“그것도 나는 원치 않네. 다남하면 못난 아들도 있어 걱정의 씨앗이 되고, 부자가 되면 쓸데없는 일이 많아져 번거롭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은 법이네(壽則多辱).’”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실망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대듯 말했다.

“요 임금은 성인이라고 들어 왔는데 이제 보니 君子(군자)에 불과하군. 아들이 많으면 각기 분수에 맞는 일을 맡기면 걱정할 필요 없고, 재물이 늘면 는 만큼 남에게 나누어주면 될텐데…‥. 진정한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거처를 가리지 않으며 병아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새가 날아간 흔적 없는 자리처럼 자유 자재이어야 하는 법. 그리고 세상이 정상이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 번영을 누리고, 정상이 아니면 스스로 덕을 닦고 은둔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한 100년쯤 장수하다가 세상이 싫어지면 그때 신선이 되어 흰구름을 타고 玉皇上帝(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에서 놀면 나쁠 것도 없지…‥.”

관원은 말을 마치자 마자 그 자리를 떠났다. 허를 찔린 요 임금은 좀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水淸無大魚(수청무대어)

水:물수. 淸:맑을청. 無:없을 무. 大:클 대. 魚:고기 어.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가 (물을 숨기지 못해)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너무 결백하면 남이 가까이하지 않음의 비유.

水至淸則無魚(수지청즉무어)가 원말인데 같은 말은 水淸魚不(住)棲(수청어불(주)서). 水淸無魚)수청무어) 이다.

後漢書(후한서)班超專(반초전)고 孔子家語(공자가어)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 시대 초엽, ?漢書?의 저자로 유명한 班固(반고)의 동생 중에 班超(반초)라는 무장이 있었다. 반초는 2대 황제인 明帝(명제)때(74년) 지금의 新疆省(신강성) 타림 분지의 동쪽에 있었던 鄯善國(선선국:누란)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끊임없이 활약한 끝에 서쪽 오랑캐 땅의 50여 나라를 服屬(복속)시켜 한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그는 그 공으로 4대 和帝(화제)때인 永元(영원) 3년(91)에 지금의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의 庫車(고차:당시 실크로드의 요충)에 설치되었던 西域都護府(서역 도호부)의 都護(도호:총독)가 되어 定遠侯(정원후)에 봉해졌다. 도호의 직책은 한나라의 도읍 洛陽(낙양)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맹세한 서역 50여 나라를 감독‧査察(사찰)하여 離叛(이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영원 14년(102), 반초가 큰 잘못없이 소임을 다하고 귀국하자 후임 도호로 임명된 任尙(임상)이 부임 인사차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서역을 다스리는 데 유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반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 성격이 너무 결백하고 조급한 것 같아 그게 걱정이네. 원래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는 살지 않는 법(水淸無大魚)’이야. 마찬가지로 정치도 너무 엄하게 서두르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네. 그러니 사소한 일은 덮어두고 대범하게 다스리도록 하게나.”

임상의 반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묘책을 듣고자 했던 기대와는 달리 이야기가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다. 임지에 부임한 임상은 반초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자기 소신대로 다스렸다. 그 결과 부임 5년 후인 6대 安帝(안제) 때(107년) 서역 50여 나라는 모두 한나라를 이반하고 말았다. 따라서 서역도호부도 폐지되고 말았다.

脣亡齒寒(순망치한)

脣:입술 순. 亡:망할‧잃을 망. 齒:이 치. 寒:찰 한.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

곧 ① 이웃 나라가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같은 말은 脣齒之國(순치지국), 脣齒輔車(순치보거)이고 비슷한 말은 鳥之兩翼(오지양익), 車之兩輪(거지양륜)이다.

春秋左氏專(춘추좌씨전)僖公五年條(희공오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말엽(B.C. 655), 五霸(오패)의 한 사람인 晉(진)나라 文公(문공)의 아버지 獻公(헌공)이 虢(괵)‧虞(우) 두 나라를 공략 할 때의 일이다.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통과국인 우나라의 虞公(우공)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財寶(재보)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宮之奇(궁지기)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보거상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순망치한)’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준다는 것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나라는 모두 周皇室(주황실)에서 갈라져 나온 同宗(동종)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를 잃은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宗親(종친)인 齊(제)나라 桓公(환공)과 楚(초)나라 莊公(장공)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一家眷屬(일가권속)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視吾舌(시오설)

視:볼 시. 吾:나 오. 舌:혀 설.

‘내 혀를 보아라’는 뜻. 곧 혀만 있으면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

같은 말은 尙存吾舌(상존오설)이다.

史記(사기)張儀列傳(장의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魏(위)나라에 張儀(장의)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언변과 완력과 재능이 뛰어난 그는 권모 술수에 능한 鬼谷子(귀곡자)에게 배웠다. 따라서 合從策(합종책)을 성공시켜 6국이 재상을 겸임한 蘇秦(소진)과는 동문이 된다. 장의는 修業(수업)을 마치자 자기를 써 줄 사람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楚(초)나라 재상 昭陽(소양)의 식객이 되었다.어느 날, 소양은 楚王(초왕)이 하사한 ‘和氏之壁(화씨지벽)’이라는 진귀한 구슬을 부하들에게 披露(피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연석에서 구슬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모두가 장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가난뱅이인 장의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그래서 수십 대의 매질까지 당했으나 장의는 끝내 부인했다. 마침내 그가 실신하자 소양은 할수 없이 방면했다. 장의가 초주검이되어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말했다.

“어쩌다가 그래, 이런 변을 당했어요?”그러자 장의는 느닷없이 혀를 쑥 내밀며 보인 다음 이렇게 물었다.

“‘내 혀를 보시오(視吾舌).’ 아직 있소, 없소?”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혀야 있지요.”

“그럼 됐소.”

몸은 가령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나 혀만은 傷(상)해선 안된다. 혀가 건재해야 살아갈 수 있고 천하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의는 그 후 혀 하나로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連衡策(연횡책)으로 일찍이 소진이 이룩한 합종책을 깨는 데 성공했다.

雁書(안서)

雁:기러기 안. 書:글‧쓸‧편지‧책 서.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는 말.

같은 말은 雁札(안찰), 雁信(안신), 雁帛(안백)이다.

한서 漢書 소무전蘇武專에 나오는 말이다.

漢(한)나라 昭帝(소제)는 19년 전, 先帝(선제)인 武帝(무제) 때(B.C. 100)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匈奴(흉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당한 中郞將(중랑장) 蘇武(소무)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單于(선우)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常惠(상혜)라는 사람이 은밀히 특사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무를 따라왔다가 흉노의 내란에 말려 일행이 모두 잡힌 뒤 투항한 사람 중하나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소무는 北海(북해: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당한 뒤 아직도 그곳에서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소.”이튿날 특사는 선우를 만나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大澤(대택:큰 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이것만 봐도 소무는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 않소?”

안색이 변한 선우는 부하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모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그는 살아 있다고 하오.”

꾸며댄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며칠 후 흉노의 使者(사자)가 데려온 소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符節(부절)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 고사에 연유하여 그 후 편지를 안서라고 일컫게 되었다

眼中之釘(안중지정)

眼:눈 안.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釘:못 정.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

곧 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비유.

②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의 비유.

眼中釘(안중정)과 같은 말이다.

新五代史(신오대사)趙在禮專(조재례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말, 혼란기에 趙在禮(조재례)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가 있었다. 그는 河北節度使(하북 절도사) 劉仁恭(유인공)의 수하 무장이었으나 討索(토색)질한 재무를 고관대작에게 상납, 출세길에 오른 뒤 後梁(후량)‧後唐(후당)‧後晉(후진)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宋州(송주)에서도 백성들로부터 한껏 착취한 조재례가 永興(영흥) 절도사로 영전, 전임하게 되자 송주의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놈이 떠나가게 되었다니 이젠 살았다.마치 ‘눈에 박힌 못(眼中之釘)이 빠진 것 같군.”

이 말이 전해지자 화가 난 조재례는 보복을 하기 위해 1년만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조정에 청원했다. 청원이 수용되자 그는 즉시 ‘못 빼기 돈(拔釘錢(발정전))’이라 일컫고 1000푼씩 납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미납자는 가차없이 투옥하거나 태형에 처했다. 이처럼 악랄한 수법으로 착취한 돈이 1년간에 자그마치 100만 관(貫)이 넘었다고 한다.

暗中摸索(암중모색)

暗:어두울 암. 中:가운데 중. 摸:더듬을 모. 索:찾을 색.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는다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찾는다(혹은 추측한다)는 말.

줄여서 암색暗索이라 하고 같은 말은 暗中摸捉(암중모착)이며 비슷한 말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隋唐佳話(수당가화)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女帝(여제)였던 則天武后(즉천무후:690~705) 때 許敬宗(허경종)이란 학자가 있었다.그는 경망한데다가 방금 만났던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할 적도로 건망증이 심했다. 어느 날, 친구가 허경종의 건망증을 비웃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 같은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이야 기억할 수 없지만 曹植(조식)이나 謝靈運(사령운) 같은 문장의 대가라면 ‘암중모색’을 해서라도 알 수 있다네.”

良禽擇木(양금택목)

良:어질‧좋을 량. 禽:새 금. 擇:가릴 택. 木:나무 목.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같은 말은 良禽相木棲(양금상목서)이다.

春秋左氏專(춘추좌씨전) 衷公十八年條(충공십팔년조)와 三國志(삼국지)蜀志(촉지)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공자가 치국의 도를 유설遊說하기 위해 衛(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魯)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藥籠中物(약롱중물)

藥:약 약. 籠:농 롱. 中:가운데 중. 物:만물 물.

약농 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같은 말은 藥籠之物(약롱지물)이고 唐書(당서) 狄仁傑專(적인걸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3대 황제인 高宗(고종)의 황후였던 則天武后(즉천무후)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太宗(태종)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才色(재색)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還俗(환속),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天后(천후)라 일컫고 수많은 名臣(명신)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中宗(중종:4대)‧叡宗(예종: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周(주: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女帝(여제)가 출현한 이 정변을 武周革命(무주 혁명)이라고 한다.그 무렵, 狄仁傑(적인걸: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直諫(직간),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朝野(조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元行沖(원행충)과 같은 博學多才(박학다재)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相公(상공)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양약고어구이리어병), 충언을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충언역어이이리어행)’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

羊頭狗肉(양두구육)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

곧 ① 거짓 간판을 내검. ②좋은 물건을 내걸고 나쁜 물건을 함.

③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의 비유. ④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전혀 다른 속임수의 비유.

원말은 懸羊頭賣拘肉(현양두 매구육)이고 동의어는 懸羊首賣馬肉(현양수매마육), 懸牛首(賣)馬肉(현우수(매)마육)이다.

晏子春秋(안자춘추)無門關(무문관)揚子法言(양자법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齊(제)나라 靈公(영공)때의 일이다.

영공의 궁중의 여인들에게 男裝(남장)을 시켜 놓고 즐거워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晏嬰(안영: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유행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면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사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사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시오소서.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영공의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梁上君子(양상군자)

梁:들보 량. 上:위 상. 君:임금‧군자 군. 子:아들‧사람 자.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

곧 ① 집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전하여) 천장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後漢書(후한서)陳寔專(진식전)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太丘縣(태구현) 縣令(현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縣民(현민)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모았다.그런데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나이가 몰래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인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룻바닥에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時勢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自投於地 稽顙歸罪 寔徐 譬之曰 視君狀貌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良藥苦口(양약고구)

良:좋을 량. 藥:약 약. 苦:괴로울‧ 쓸 고. 口:입 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忠言(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

원말은 良藥苦於口(양약고어구)이고 동의어는 忠言逆於耳(충언역어이), 諫言逆於耳(간언역어이), 金言逆於耳(금언역어이)이다.

史記(사기)留侯世家(유후세가)와 孔子家語(공자가어)六本篇(육본편)에 나오는 말이다.① 천하를 통일하고 동아시아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던 秦(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간 학정에 시달려온 민중이 각지에서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2세 황제 元年(원년:B.C. 209)에 군사를 일으킨 유방은 전쟁 3년 만(B.C. 206)에 경쟁자인 항우보다 한 걸음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했다.유방은 3세 황제 子嬰(자영)에게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호화찬란한 궁중에는 온갖 재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꽃보다 아름다운 궁녀들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원래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다. 그러자 강직한 용장 樊噲(번쾌)가 간했다.

“아직 천하는 통일되지 않았나이다. 지금부터가 큰일이오니 지체없이 왕궁을 물러나 적당한 곳에 진을 치도록 하시오소서.”

유방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현명한 참모로 이름난 張良이 간했다.

“당초 진나라가 무도한 폭정을 해서 천하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전하와 간은 서민이 이처럼 왕궁을 드실 수 있었던 것이옵니다. 지금 전하의 임무는 천하를 위해 殘敵(잔적)을 소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입정하시자 재보와 美色(미색)에 현혹되어 포악한 秦王(진왕)의 음락(淫樂 어지러운 행동)을 배우려 하신다면 惡王(악왕)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옵니다. 원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於耳利於行), 독약(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毒藥苦於口而利於病)’고 하였나이다. 부디 번쾌의 진언을 가납(嘉納:권하는 말을 기꺼이 들음)하시오소서.”유방은 불현듯 깨닫고 왕궁을 물러나 霸上(패상)에 진을 쳤다.

② 이 ‘양약고구’란 말은 ?공자가어?에도 실려 있는데 요약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 은나라 湯王(탕왕)은 간하는 충신이 있었기에 번창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따르는 신하만 있었기에 멸망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형이 잘못하면 동생이, 자신이 잘못하면 친구가 간해야 한다. 그리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는 법이 없고, 집안에 悖德(패덕)의 악행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諤諤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漁父之利(어부지리)

漁:고기 잡을 어. 父:아비 부. 之:갈 지(…의) 利:이로울 리.

어부의 이득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챙긴다는 말.

犬免之爭(견토지쟁), 田不之功(전불지공), 坐收漁人之功(좌수어인지공)와 같은 말이다.

戰國策(전국책)燕策(연책)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齊(제)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燕(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다. 그래서 연나라 昭王은 縱橫家(종횡가)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犬馬之勞(견마지로)를 다해 온 蘇代(소대)에게 혜문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다.

조나라에 도착한 소대는 세 치의 혀 하나로 合縱策(합종책)을 펴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蘇秦(소진)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했다.

“오늘 귀국에 돌아오는 길에 易水(역수:연‧조와 국경을 이루는 강)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가 조가비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 사납게 이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 다 잡혀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이옵니다. 연‧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疲弊(피폐)케 한다면,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秦(진)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혜문왕도 명신으로 이름난 藺相如(인상여)와 廉頗(염파)를 중용했던 현명한 왕인 만큼, 소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리하여 혜문왕은 당장 침공 계획을 철회했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拑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夫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乃止.

餘桃之罪(여도지죄)

餘:남을 여. 桃:복숭아 도. 之:갈 지(…의). 罪:허물 죄.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란 뜻으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의 비유.

餘桃啗君(여도담군)이고 韓非子(한비자)說難篇(설난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衛(위)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彌子瑕(미자하)란 美童(미동)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는 사람은 刖刑(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오히려 효심을 칭찬하고 용서했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더니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제가 먹을 것도 잊고 ‘과인에게 먹이다’니…‥.”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도 엷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왕은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과인의 수레를 탔고, 게다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과인에게 먹인 일도 있다.”

이처럼 한 번 애정을 잃으면 이전에 칭찬을 받았던 일도 오히려 화가 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緣木求魚(연목구어)

緣:인연‧인할 연. 木:나무 목. 求:구할 구. 魚:고기 어.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 곧 ① 도저히 불가능한(가당찮은) 일을 하려 함의 비유.

② 잘못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 함의 비유. ③ 수고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함의 비유.

指天射魚(지천사어)와 비슷한 말이다.

孟子(맹자)梁惠王篇(양혜왕편)에 나온다.

전국 시대인 周(주)나라 愼靚王(신정왕) 3년(B.C. 318), 梁(양:魏)나라 惠王(혜왕)과 작별한 맹자(孟子)는 제(齊)나라로 갔다. 당시 나이 50이 넘는 맹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仁義(인의)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王道政治論(왕도정치론)을 遊說(유세)중이었다.

동쪽의 제나라는 서쪽의 秦(진)나라, 남쪽이 楚(초)나라와 함께 대국이었고 또 宣王(선왕)도 역량 있는 명군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점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왕도정치가 아니라 무력과 책략을 수단으로 하는 覇道政治(패도정치)였으므로, 선왕은 맹자에게 이렇게 청했다.

“춘추 시대의 覇者(패자)였던 제나라 桓公(항공)과 晉(진)나라 文公(문공)의 霸業(패업)에 대해 듣고 싶소.”

“전하께서는 패도에 따른 전쟁으로 백성이 목숨을 잃고, 또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가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원하지 않소. 그러나 과인에겐 大望(대망)이 있소.”

“전하의 대망이란 무엇이오니까?”

선왕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했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이, 아니면 아름다운 색이 부족하시기 때문이오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오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잘못된 방법(무력)으론 목적(천하통일)은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하나이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後難(후난)은 없나이다. 하오나 패도를 쫓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선왕은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진지하게 경청했다고 한다.

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 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采色 不足視於目與 曰 吾不爲是也 曰 然則 王之所大欲 可知已 欲辟土地 朝秦楚 莅中國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五里霧中(오리무중)

五:다섯 오. 里:마을‧이수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四方(사방) 5리에 안개가 덮여 있는 속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행방이나 사태의 추이를 알 길이 없음의 비유.

五里霧(오리무)와 같은 말이다. 後漢書(후한서)張楷專(장해전)에 나오는 말이다.

後漢(후한) 順帝(순제) 때 학문이 뛰어난 張楷(장해)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대고 끝내 出仕(출사)하지 않았다. 장해는 ?春秋(춘추)? ?古文尙書(고문상서)?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宿儒: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을 비롯하여 괴족‧고관대작‧宦官(환관)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華陰山(화음산)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字(자)를 딴 公超(공초)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道術(도술)에도 능하여 쉽사리 ‘五里霧(오리무)’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方術(방술)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之 楷避不肯見.

  ‘五里霧中(오리무중)’이란 말은 ‘오리무’에 ‘中(중)’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중’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함.

烏孫公主(오손공주)

烏:까마귀 오. 孫:손자 손. 公:공변될‧귀인 공. 主:주인 주.

정략 결혼의 희생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

漢書(한서)西域專(서역전)에 나오는 말이다.

오손은 前漢(전한) 때 西域(서역) 지방에 할거하던 터키계의 유목 민족으로, 그 세력권은 天山(천산) 산맥 북쪽의 이시크를 호수 부근으로부터 이리하(伊犁河:일리 강) 유역의 분지를 포함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 강 상류의 나린 강 계곡에 있던 적곡성(赤谷城:본거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오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던 흉노는 북방 몽골 땅을 근거지로 삼고 한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했다. 그래서 한나라 7대 황제인 武帝(무제)는 흉노를 무찌르기 위해 건建元(원) 26년(B.C. 115) 張騫(장건)을 오손에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0년 후 무제의 형인 江都王(강도왕)의 딸 細君을 공주로 꾸며 오손왕에게 출가시킴으로써 동맹은 더욱 굳어졌다.

이리하여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에 견디지 못하고 서역은 물론 한나라의 변경으로부터 북방 멀리 쫓겨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서역 50여 이민족의 소국들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이들 나라의 이반을 막기 위해 龜玆(구자:쿠차)에 감독‧사찰 기관으로서의 西域都護府(서역 도호부)를 두었다. 건국 이후 100년 이상 시달려 온 흉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먼 이국의 이민족에게 주어진 오손 공주는 망향의 노래를 부르며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五:다섯 오. 十:열 십. 步:걸음 보. 百:일백 백.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 보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다는 뜻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론 마찬가지라는 말.

五十步笑百步(오십보소백보)가 원래 말이다. 비슷한 말은 大同小異(대동소이)이고 孟子(맹자)梁惠王篇(양혜왕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중엽, 魏(위)나라 惠王(혜왕)은 秦(진)나라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도읍을 大梁(대량)으로 옮겼다(이후 양나라라고도 불렸음). 그러나 齊(제)나라와의 싸움에서도 늘 패하는 바람에 국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혜왕은 국력 회복을 자문하기 위해 당시 제후들에게 왕도 정치론을 유세중인 맹자를 초청했다.

“선생이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이렇게 와 준 것은 과인에게 富國强兵(부국 강병)의 秘策(비책)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 아니겠소?”

“전하, 저는 귀국의 부국 강병과 상관없이 仁義(인의)에 대해 아뢰고자 왔나이다.”

“백성을 생각하라는 선생의 인의의 정치라면 과인은 평소부터 힘써 베풀어 왔소. 예컨대 河內(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젊은이들을 河東(하동) 지방으로 옮기고, 늙은이와 아이들에게는 하동에서 곡식을 가져다가 나누어주도록 하고 있소. 그와 반대로 하동에 기근이 들면 하내의 곡식으로 구호하도록 힘쓰고 있지만, 백성들은 과인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것 같지 않고, 또 이웃 나라의 백성 수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못 들었소. 대체 어찌 된 일이오?”“전하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아뢰겠나이다. 전쟁터에서 白兵戰(백병전)이 벌어지기 직전, 겁이 난 두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사옵니다. 그런데 오십 보를 도망친 병사가 백 보를 도망친 병사를 보고 ‘비겁한 놈’이라며 비웃었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런 바보 같은 놈이 어디 있소? 오십 보든 백 보든 도망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걸 아셨다면 전하, 백성들 구호하시는 전하의 목적은 인의의 정치와 상관없이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이웃 나라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혜왕은 대답을 못 했다. 이웃 나라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백성을 구호한 것을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해서 구호한 양 자랑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吳越同舟(오월동주)

吳:오나라 오. 越:넘을‧월나라 월. 同:한가지 동. 舟:배 주.

敵對(적대) 관계에 있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뜻.

곧 ① 서로 적의를 품을 사람끼리 같은 장소‧처지에 놓임. 원수끼리 함께 있음의 비유.

② 적의를 품은 사람끼리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서로 도움.

吳越之爭(오월지쟁), 吳越之思(오월지사)와 같은 말이고 同舟相救(동주상구), 同舟濟江(동주제강), 胡越同舟(호월동주), 吳越之富(오월지부)는 비슷한 말이다.

孫子(손자)九地篇(구지편)에 나오는 말이다.

?손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兵書(병서)로서 춘추 시대 오나라의 孫武(손무)가 쓴 것이다. 손무는 吳王(오왕) 闔閭(합려) 때 서쪽으로는 楚(초)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 齊(제)나라와 晉(진)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손자? 「구지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兵(병)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地(지)가 있다. 그 구지 중 최후의 것을 死地(사지)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必死(필사)의 지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活路(활로)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의 場(장)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用兵術(용병술)은 예컨대 常山(상산)에 서식하는 率然(솔연)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오월동주)’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은 평소의 敵愾心(적개심)을 잊고 서로 왼손‧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戰車(전차)의 말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당하지 않으려 해 봤자 최후의 의지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烏合之卒(오합지졸)

烏:까마귀 오. 合:합할 합. 之:갈 지(…의). 卒:무리 졸.

①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사.②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烏合之衆(오합지중)과 같은 말이고 瓦合之衆(와합지중)은 비슷한 말이다.

後漢書(후한서)耿弇專(경감전)에 나오는 말이다.

前漢(전한) 말, 大司馬(대사마)인 王莽(왕망)은 平帝(평제)를 弑害(시해)하고 나이 어린 嬰(영)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嬰(영)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新(신)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과 失政(실정)으로 말미암아 각지에 도둑떼가 들끓었다.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劉秀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王莽(왕망) 일당을 誅伐(주벌)하고 景帝(경제)의 후손인 劉玄을 황제로 擁立(옹립)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成帝(성제)의 아들 劉子輿(유자여)를 자처하며 황제를 僣稱(참칭)하는 王郞(왕랑)을 토벌하러 나서자, 上谷(상곡) 태수 耿況(경황)은 즉시 아들인 耿龕(경감)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들어 갔다. 그때 孫倉(손창)과 衛包(위포)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가 있었다.

“유자여는 漢王朝(한왕조)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耿龕(경감)은 두 사람을 끌어낸 뒤 칼을 빼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皇子(황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長安(장안)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烏合之卒’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事理)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耿龕(경감)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耿龕(경감)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建威大將軍(건위대장군)이 되었다.

우리가 돌격 기병대를 일으켜 써 烏合之衆(오합지중)을 치는 것은 썩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깎음과 같을 뿐이다.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腐耳.

玉石俱焚(옥석구분)

玉:옥 옥, 石: 돌 석, 俱:함께 구, 焚:불사르다 분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玉石俱焚>이라고 한다.

書經(서경)夏書 胤征篇(하서 윤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서경 하서 윤정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崑岡(곤강)에 타면 玉(옥)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라.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汙俗 咸與惟新.

‘胤征(윤정)’은 胤侯(윤후)가 夏(하)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羲和(희화)를 치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崑岡(곤강)’은 玉(옥)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玉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玉石混淆(옥석혼효)

玉:구슬 옥. 石:돌 석. 混:섞을 혼. 淆:뒤섞일 효.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는 뜻.

곧 ① 훌륭한 것과 쓸데없는 것이 뒤섞여 있음.

② 선과 악, 賢(현)과 愚(우)가 뒤섞여 있음.

玉石混交(옥석혼교), 玉石同架(옥석동가), 玉石同匱(옥석동궤)와 같은 뜻이다.

비슷한 말은 玉石俱焚(옥석구분), 玉石同碎(옥석동쇄)이고 抱朴子(포박자)外篇 尙專(외편 상전)에 나오는 말이다.

東晉(동진)이 道士(도사)인 葛洪(갈홍:호는 포박자, 283~343?)은 ?포박자?「외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詩經(시경)이나 「書經(서경)」이 道義(도의)에 大海(대해)라 한다면 諸子百家(제자백가: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의 글은 그것을 보강하는 냇물의 흐름이라 할 수 있으며 방법은 달라도 덕을 닦는 데는 변함이 없다. 옛사람들은 재능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여 ‘崑崙山(곤륜산:중국 전설상의 산)의 옥이 아니라 해서 夜光珠(야광주)를 버리거나 聖人(성인)의 글이 아니라 해서 수양에 도움이 되는 말’은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漢(한)‧魏(위) 이래 ‘본받을 만한 좋은 말’이 많이 나와 있는데도 식견이 좁은 사람들은 字義(자의) 해석에만 사로잡혀 오묘한 점을 가볍게 보며 도외시한다. 또한 小道(소도)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거나 넓고 깊어서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티끌이 쌓여 태산이 되고 많은 색깔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룬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또 천박한 詩賦(시부)를 감상하는가 하면 뜻 깊은 子書(자서:제자(諸子)의 서(書))를 가볍게 여기며 유익한 金言(금언)을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과 거짓이 顚倒(전도)되고 ‘옥과 돌이 뒤섞이며(玉石混淆)’ 아雅樂(악)도 俗樂(속악)과 같은 것으로 보고 아름다운 옷도 누더기고 보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溫故知新(온고지신)

溫:따뜻할‧복습할 온. 故:연고‧예 고. 知:알‧깨달을 지. 新:새 신.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안다는 뜻.

원말은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원고이지신 가이위사의)이다.

論語(논어)爲政篇(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古典(고전)에 대한 博識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禮記(예기)學記(학기)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記問之學(:피상적인 학문)은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記問之學 不足以爲師矣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실로 ‘온고지신’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전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고전의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고전 학습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蝸角之爭(와각지쟁)

蝸:달팽이 와. 角:뿔 각. 之:갈 지(…의). 爭:다툴 쟁.

달팽이 촉각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

곧 ① 형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작은(쓸데없는) 다툼의 비유.

② 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의 비유. ③ 인간 세계의 비소(卑小:보잘 것 없이 작음)함의 비유.

蝸牛角上之爭(와우각지쟁)이 원래말이고 蝸牛角上(와우각상), 蝸角相爭(와각상쟁), 蝸牛之爭(와우지쟁)과 같은 말이다.

비슷한 말은 蠻觸之爭(만촉지쟁)인데 莊子(장자)則陽篇(칙양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시대, 梁(양)나라 惠王(혜왕)은 중신들과 맹약을 깬 齊(제)나라 威王(위왕)에 대한 응징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혜왕은 재상 惠子(혜자)가 데려온 戴晉人(대진인)에게 의견을 물었다.대진인은 賢人(현인)으로 이름난 道家者流(도가자류:도교를 믿고 닦는 사람)답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달팽이라는 微物(미물)이 있사온데 그것을 아시나이까?”

“물론, 알고 있소.”

“그 달팽이의 왼쪽 촉각 위에는 觸氏(촉씨)라는 자가, 오른쪽 촉각 위에는 蠻氏(만씨)라는 자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있었나이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시작했는데 죽은 자가 수만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15일 만에 전쟁을 멈추었다하옵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소?”

“하오면, 이 이야기를 사실에 비유해 보겠나이다. 전하, 이 우주의 四方上下(사방 상하)에 際限(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아니, 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오면, 마음을 그 무궁한 세계에 노닐게 하는 자에게는 사람이 왕래하는 지상의 나라 따위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으음, 과연.”

“그 나라들 가운데 위라는 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大梁(대량:개봉)이라는 도읍이 있사오며, 그 도읍의 궁궐 안에 전하가 계시옵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에 비한다면, 지금 제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시려는 전하와 달팽이 觸角(촉각) 위의 촉씨‧만씨가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아옵니까?”

“과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소.”

대진인이 물러가자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싹 가신 혜왕은 혜자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聖人(성인)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臥薪嘗膽(와신상담)

臥:누울 와. 薪:섶(땔)나무 신. 嘗:맛볼 상. 膽:쓸게 담.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의 비유.

會稽之恥(회계지치), 切齒扼腕(절치액완)과 비슷한 말이다.

史記(사기)越世家(월세가)에 이말이 나온다.

춘추 시대, 越王(월왕) 勾踐(구천)과 欈李(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吳王(오왕) 闔閭(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夫差(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오왕이 된 부차는 父王(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范蠡(범려)가 諫(간)했으나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會稽山(회계산)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獻策(헌책)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伯嚭(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伍子胥(오자서)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진언에 따라 구천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屬領(속령)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회계의 치욕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그 해(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覇權(패권)을 일컫기 위해 杞(기) 땅의 黃地(황지)에서 제후들과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전쟁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姑蘇(고소)에 육박한 구천은 오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甬東(용동)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그 후 구천은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覇者(패자)가 되었다.

完璧(완벽)

完:완전할 완. 璧:둥근 옥 벽.① 흠이 없는 구슬

壁:環狀(환상)의 玉(옥). 결점 없이 훌륭함. ② 빌려 온 물건을 온전히 돌려보냄.

完調(완조)와 같은 말이고 비슷한 말은 和氏之壁(화씨지벽), 連城之壁(연성지벽)이다.

史記(사기)藺相如列傳(인상여열전)과 十八史略(십팔사략)趙篇(조편)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은 和氏之壁(화씨지벽)이라는 天下名玉(천하명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城(성)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은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했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강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여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혜문왕은 중신들에게 물었다.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일 것 같소?”그러자 대부인 繆賢(목현)이 말했다.

“신의 식객에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藺相如(인상여)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 자라면 차질 없이 중임을 완수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제게 주시면 가르쳐 드리겠나이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인상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인상여를 잡아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죽였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다.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完璧(구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인상여는 그 공으로 上大夫(상대부)에 임명되었다.

遼東之豕(요동지시)

遼:멀‧나라 이름 요. 東:동녘 동. 之:갈 지(…의). 豕:돼지 시.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하찮은 공을 득의 양양하여 자랑함의 비유.

줄여서 遼豕(요시)라 하고 遼東豕(요동시)와 같은 말이다.

文選(문선)朱浮書(주유서)와 後漢書(후한서)朱浮專(주부전)에 나오는 말이다.

後漢(후한) 건국 직후, 漁陽太守(어양태수) 彭寵(팽총)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자 大將軍(대장군) 朱浮(주부)는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그의 돼지가 대가리가 흰 새끼를 낳자 이를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河東(하동)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광무제)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팽총은 처음에 후한을 세운 光武帝(광무제) 劉秀(유수)가 叛軍(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河北(하북)에 布陣(포진)하고 있을 때에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세했다. 또 광무제가 옛 趙(조)나라의 도읍 邯鄲(한단)을 포위 공격했을 때에는 군량 보급의 重責(중책)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공을 세워 佐命之臣(좌명지신:천자를 도와 천하 평정의 대업을 이루게 한 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오만 불손한 팽총은 스스로 燕王(연왕)이라일컫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2년후 토벌당하고 말았다.

要領不得(요령부득)

要:종요로울‧구할 요. 領:옷깃‧요소 령. 不:아니 불. 得:얻을 득.

사물의 중요한 부분을 잡을수 없다는 뜻,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

史記(사기)大宛專(대완전)과 漢書(한서)張騫專(장건전)에 나오는 말이다.

前漢(전한) 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의 일이다.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그러나 영맹한 흉노는 동쪽 熱河(열하)에서부터 서쪽 투르키스탄(중앙 아시아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펴고 빈번히 한나라를 침범 약탈했다. 그래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隴西(농서)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겨간 月氏(월지)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을 공모한 결과 張騫(장건)이란 관리가 뽑혔다.建元(건원) 3년(B.C. 138),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쪽 伊犁(이리: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長安(장안)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天山(천산)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大宛國(대완국)‧康居國(강거국)을 거쳐 마침내 아무 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월지는 西遷(서천) 이후 기름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소. 그러니 백성은 이제 옛 원한을 씻기 위한 그런 쓸데없는 전쟁은 원치 않을 것이오.”

장건은 여기서 단념하지 않고 당시 월지의 속국인 大夏國(대하국)까지 찾아가 월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이 일을 史書(사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끝내 사명으로 하는 월지의 ‘요령을 얻지 못한 채(要領不得)’ 체류한 지 1년이 지나 귀국 길에 올랐다.”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출, 13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B.C. 126). 그로부터 3년 후 博望侯(박망후)에 봉해진 장건은 계속 西域(서역)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名馬(명마)‧보석‧琵琶(비파)‧수박‧석류‧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愚公移山(우공이산)

愚:어리석을 우. 公:귀 공. 移:옮길 이. 山:메 산.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 어떤 큰 일이라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의 비유.

磨斧作針(鍼)(마부작침), 水適穿石(수적천석), 積土成山(적토성산)과 비슷한 말이다.

列子(열자)湯問篇(탕문편)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 시대의 사상가 列子(열자:이름은 어구(禦寇))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 ?열자? 「탕문편」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먼 옛날 太行山(태행산)과 王玉山(왕옥산) 사이의 좁은 땅에 愚公(우공)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 700리에 높이가 만 길(仞)이나 되는 두 큰 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우공은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이 저 두 산을 깎아 없애고, 豫州(예주)와 漢水(한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아니, 늙은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저 큰 산을 깎아 없앤단 말예요? 또 파낸 흙은 어디다 버리고?”

“渤海(발해)에 갖다 버릴 거요.”

이튿날 아침부터 우공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知叟(지수)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이라며 비웃자 우공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이렇게 子子孫孫(자자손손)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蛇神(사신)이었다.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사신은 玉皇上帝(옥황 상제)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옥황상제는 力神(역신) 夸娥(과아)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각각 두 산을 업어 태행산은 朔東(삭동) 땅에, 왕옥산은 雍南(옹남)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冀州(기주)와 漢水(한수)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한다.

遠交近攻(원교근공)

遠:멀 원. 交:사귈 교. 近:가까울 근. 攻:칠 공.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정책.

史記(사기)范雎列傳(범저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 시대, 魏(위)나라의 策士(책사)인 范雎(범저)는 齊(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에 빠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秦(진)나라의 사신 王稽(왕계)를 따라 咸陽(함양)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진나라 昭襄王(소양왕)은 진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고 自國(자국)의 정사를 혹평한 범저를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범저는 소양왕에게 자신의 장기인 辯舌(변설)을 펼쳐 볼 기회도 없었다.그런데 소양왕 36년(B.C. 271), 드디어 범저에게 때가 왔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모후인 宣太后(선태후)의 동생 穰侯(양후)가 재상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제나라를 공략하여 자신의 영지인 陶(도)의 땅을 확장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범저는 왕계를 통해 소양왕을 알현하고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韓(한)‧魏(위) 두 나라를 지나 강국인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得策(득책)이 아닌 줄 아옵니다. 적은 병력을 움직여 봤자 제나라는 꿈쩍도 않을 것이옵고, 그렇다고 大軍(대군)을 출동시키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 더욱 좋지 않사옵니다. 가능한 한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위 두 나라의 병력을 동원코자 하시는 것이 전하의 의도인 듯하오나 동맹국을 신용할 수 없는 이 마당에 타국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옵니다. 지난날 제나라의 湣王(민왕)이 燕(연)나라의 樂毅(악의)장군에게 패한 원인도 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楚(초)나라를 공략하다가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된 동맹국이 離反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때 덕을 본 것은 이웃 나라인 한나라와 위나라이온데, 이는 마치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借賊兵 차적병) 도둑에게 식량을 갖다 준 꼴(齎盜糧 재도량)’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나이다.

지금 전하께서 채택하셔야 할 계책으로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遠交近攻策(원교근공책)’이 上策(상책)인 줄 아옵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寸土(촌토)이옵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尺地(척지)가 아니옵니까? 利害得失(이해득실)이 이토록 분명 하온데 굳이 먼 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닌 줄 아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소양왕의 신임을 얻은 범저는 승진 끝에 재상이 되어 應侯(응후)에 봉해졌고, 그의 지론인 원교근공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國是(국시)가 되었다.

遠水不救近火(원수불구근화)

遠:멀 원.水:물 수.不:아니 불.救:구원할 구.近:가까울 근. 火:불 화.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는 뜻으로, 먼 데 있으면 급할 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

【출 전】?韓非子(한비자)?「說林篇(설림편)」

춘추 시대, 魯(노)나라 穆公(목공)은 아들들에게도 晉(진)나라와 荊(형)나라를 섬기게 했다. 그 무렵 노나라는 이웃 나라인 강국 齊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위급할 때 진나라와 형나라 같은 강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에서였다. 목공의 그런 속셈을 梨鉏(이서)가 간했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경우, 먼 越(월)나라에서 사람을 청해다가 구하려 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사오며, 또 집에 불이 난 경우, 渤海(발해)와 같이 먼바다에서 물을 끌어다가 끄려 한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때는 역시 늦사옵니다.

이처럼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火)’고 했듯이 노나라가 이웃 제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먼 진나라와 형나라가 강국이긴 해도 노나라의 위난은 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怨入骨髓(원입골수)怨:원망할 원.入:들 입. 骨:뼈 골. 髓:골수 수.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 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말.

【원 말】怨入於骨髓(원입어골수).【동의어】怨徹骨髓(원철골수), 恨入骨髓(한입골수).【출전】?史記(사기)?「秦本紀(진본기)」

춘추시대 五霸(오패)의 한 사람인 秦(진)나라 繆公(목공)은 중신 百里奚(백리해)와 蹇叔(건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 장군에게 鄭(정)나라를 치라고 명했다. 진나라 군사가 周(주)나라의 북문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이곳에 소를 팔러 온 정나라의 소장수인 弦高(현고)는 진나라 장군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정나라 主上(주상)께서는 장병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소생에게 소 12마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거두어 주십시오.”이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진 세 장군은 공격목표를 바꾸어 晉(진)나라의 屬領(속령)인 滑(활)로 쳐들어갔다.당시 진나라는 文公(문공)이 죽어 國喪(국상)중에 있었으나 太子(태자:후의 양공(襄公))는 즉시 勇將(용장)을 파견하여 침략군을 섬멸했다. 포로가 된 세 장군은 태자 앞에 끌려 나왔다. 그러자 목공의 딸인 태자의 母后(모후)는 그들의 구명을 청원했다.

“저들을 죽이면 강국인 진나라 목공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怨入骨髓)’ 반드시 이 나라를 칠 것이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 보내는 게 좋겠소.”태자는 모후의 말을 옳게 여겨 세 장군을 모두 풀어 주었다.

月旦評(월단평)月:달 월. 旦:아침 단. 評:평론할 평.

‘매달 첫날의 평’이란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

【준 말】 月旦(월단). 【동의어】 月朝評(월조평).【출 전】?後漢書(후한서)?「許劭專(허소전)」

後漢(후한) 말, 12대 황제인 靈帝(영제) 17년(184)에 일어난 ‘黃巾(황건)의 亂(난)’ 때 큰 공을 세운 曹操(조조)가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 일이다.

그 무렵, 汝南(여남) 땅에 許劭(허소)와 그의 사촌 형 許靖(허정)이라는 두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첫날(月旦)’이면 허소의 집에서 鄕黨(향당:향-1만 2500집, 당-500집)의 인물을 뽑아 비평했는데 그 비평이 매우 적절함으로 해서 평판이 높았다. 그래서 당시 ‘여남의 비평’으로 불리던 이 비평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았다.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허소를 찾아와서 비평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난폭자로 소문난 조조의 청인지라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조조가 재촉하자 허소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이되,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姦雄(간웅:간사한 영웅)이 될 인물이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黃巾賊(황건적)을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月下氷人(월하빙인)月:달 월. 下:아래 하. 氷:얼음 빙. 人:사람 인.

月下老(월하로)와 氷上人(빙상인)이 합쳐진 것으로, 결혼 중매인을 일컫는 말.

【동의어】 月下老(월하로), 氷上人(빙상인), 氷人(빙인).【유사어】 赤繩(적승).

【출 전】?續幽怪錄(속유괴록)?,?晉書(진서)?「索耽篇(색탐편)」

① 당나라 2대 황제인 太宗(태종)때의 이야기이다. 韋固(위고)라는 젊은이가 여행 중에 宋城(송성)에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月下老)’이 손에 빨간 끈을(赤縄 적승)을 든 채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묻지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 혼사에 관한 책인데, 여기 적혀 있는 남녀를 이 빨간 끈으로 한 번 매어 놓으면 어떤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그럼, 지금 제 아내 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이 송성에 있구먼, 성 북쪽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陳(진)이란 여인네 어린아이야.”

위고는 약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相州(상주)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위고는 그곳 太守(태수)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17세로 미인이었다. 어느 날 밤 위고가 아내에게 身上(신상)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실은 태수님의 양녀입니다. 친아버지는 송성에서 벼슬을 다니시다 돌아가셨지요. 그 때 저는 젖먹이였는데, 마음씨 착한 유모가 성 북쪽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면서 저를 길러 주었답니다.”② 晉(진)나라에 索耽(색탐)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 날 令孤策(영고책)이라는 사람이 夢占(몽점:꿈 해몽)을 치러 왔다.“꿈속에서 나는 얼음 위에 서서 얼음 밑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색탐은 이렇게 해몽했다.“얼음 위는 곧 陽(양)이요, 얼음 밑은 陰(음)이니 양과 음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음 위에 선 사람(氷上人)’인 그대가 결혼 중매를 서게 될 조짐이오. 成事(성사)시기는 얼음이 녹는 봄철이고…‥.”그 후 얼마 안 되어 과연 영고책은 태수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들과 張(장)씨의 딸을 중매 서서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韋編三絶(위편삼절)韋:가죽 위,編:엮을 편,三:세 삼,絶:끊어지다 절

① ‘독서에 열심함’의 뜻. ② 한 책을 되풀이하여 숙독함의 비유.

【출 전】?史記(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서 책을 綴(철)한 곳이 닳아 흩어진 것을 다시 고쳐 매어서 愛讀(애독)을 계속하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책이 소위 몇십 장의 竹簡(죽간)을 끈으로 철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책을 계속하여 읽는 것을 ‘韋編三絶’이라고 한다. ‘三絶’이란 딱 세 번에 한정된 수가 아니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알려진 사마천이 쓴 ?사기?가운데 孔子傳, 즉 孔子世家에 실려 있는 말로, 공자가 만년에 易經을 애독하여 韋編三絶에 이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孔子가 晩年(만년)에 易經(역경)을 좋아하여, 彖(단) · 繫(계) · 象(상) · 說卦(설괘) · 文言(문언)을 序(서)하고, 易經(역경)을 읽어 韋編三絶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몇 해를 빌어 이와같이 하면, 나는 易經(역경)에 있어서 곧 빛나게 될 것이다.’孔子晩而喜易 徐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曰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有備無患(유비무환)有:있다 유,備:준비 비, 無:없다 무, 患:근심 환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출 전】?書經(서경)? 「說命(열명)」

‘說命(열명)’은 殷(은)나라 高宗이 傅說(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能(능)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功(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處善以動 動有厥時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及其有備 有備無患.

또,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서 보낸 값진 보물과 佳姬(가희)들을 和親(화친)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위강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

殷鑑不遠(은감불원)殷:은나라 은. 鑑:거울 감. 不:아니 불. 遠:멀 원.

殷(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멸망의 선례는 먼데 있지 않다는 뜻으로, 남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원 말】~在夏后之世(재하후지세). 【동의어】商鑑不遠(상감불원).【유사어】覆車之戒(복차지계), 覆轍(복철).

【참 조】酒池肉林(주지육림), 麥秀之嘆(맥수지탄). 【출 전】?詩經(시경)?「大雅篇(대아편)」

고대 중국 夏(하)‧殷(은)‧周(주)의 3왕조 중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紂王(주왕)은 원래 智勇(지용)을 겸비한 賢主(현주)였으나 그를 暴君 淫主(폭군 음주)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오랑캐의 有蘇氏國(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 온 妲己(달기)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기울여 시설한 酒池肉林(주지육림) 속에서 晝夜長川(주야장천) 飮酒淫樂(음주음락)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와, 忠諫者(충간자)를 처형하기 위한 炮烙之刑(포락지형)을 일삼는 惡王(악왕)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그간 주왕의 포학을 간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三公(삼공) 중 九侯(구후)와 鄂侯(악후)는 처형당하고 西伯(서백:훗날 주문왕(周文王)이 됨)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湯王(탕왕:주왕의 28대 선조)에게 주벌당한 하왕조의 桀王(걸왕:주왕과 대동 소이한 폭군음주)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간하다가 화를 당했는데 그 諫言(간언)이 ?시경? 「대아편」 ‘湯詩(탕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侯之世

삼공에 이어 三仁(삼인)으로 불리던 微子(미자:주왕의 친형, 망명)‧箕子(기자:왕족, 망명)‧比干(비간:왕자, 처형당함)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發(발:주왕조의 시조 武王(무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泣斬馬謖(읍참마속)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출 전】?三國志(삼국지)?「蜀志 諸葛亮專(촉지 제갈량전)」

삼국시대 초엽인 蜀(촉)나라 建興(건흥) 5년(227) 3월, 諸葛亮(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成都(성도)를 출발했다. 곧 漢中(한중: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祁山(기산: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魏(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그러자 曹操(조조)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司馬懿(사마의)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扇形(선형-부채꼴)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中原(중원)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그때 馬謖(마속)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刎頸之交(문경지교)를 맺은 명참모 馬良(마량)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老獪(노회)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兵略(병략)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一家眷屬(일가 권속)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軍律(군율)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張郃(장합)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張埦(장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大義(대의)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疑心暗鬼(의심암귀)疑:의심할 의. 心:마음 심. 暗:어두울 암. 鬼:귀신 귀.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는 듯이 느껴진다는 뜻. 곧 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달아 일어나 불안해짐. ② 선입관은 판단을 빗나가게 함.

【원 말】 疑心生暗鬼【유사어】竊斧之疑(절부지의), 杯中蛇影(배중사영).【출전】?列子(열자)?「說符篇(설부편)」

① 어떤 사람이 소중히 아끼던 도끼를 잃어버렸다. 도둑 맞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슬금슬금 도망갈 듯한 자세였고 안색이나 말투도 어색하기만 했다.‘내 도끼를 훔쳐 간 놈은 틀림없이 그 놈이야.’

이렇게 믿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저번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를 놓고 온 일이 생각났다. 당장 달려가 보니 도끼는 산에 그대로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웃집 아이를 보자 이번에는 그 아이의 행동거지가 별로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② 마당에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본 이웃 사람이 주인에게 말했다.

“집안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네.”주인이 막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자 그 사람이 또 나타나서 땔감이 필요하다며 달라고 했다. 주인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이제 보니 땔감이 필요해서 날 속였군. 이웃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엉큼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移木之信(이목지신)移:옮기다 위, 木:나무 목, 之:~의 지, 信:믿다 신

위성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뜻. 곧 ① 남을 속이지 아니한 것을 밝힘. ② 약속을 실행함.

【동의어】 徙木之信(사목지신).【반의어】 食言(식언).【출 전】?史記(사기)?「商君列專(상군열전)」

秦(진)나라 孝公(효공) 때 商鞅(상앙)이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衛(위)나라의 公族(공족)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부국 강병책을 펴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다.한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한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장(三丈:약 9m)에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써 붙였다.“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十金(십금)을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五十金(오십 금)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以心傳心(이심전심)以:써 이. 心:마음 심. 傳:전할 전.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

【동의어】 拈華微笑(염화미소).【유사어】 不立文字(불립문자), 敎外別傳(교외별전).

【출 전】?五燈會元(오등회원)?「傳燈錄(전등록)」,?無門關(무문관)?,?六祖壇經(육조단경)?

宋(송)나라의 중 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法語를 기록한?전등록?에서 보면 석가가 제자인 迦葉(가섭)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眞髓(진수)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普濟(보제)의 ?오등회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靈山(영산)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抩華 염화).’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미소).’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正法眼藏(정법안장)과 涅槃妙心(열반묘심), 實相無相(실상무상), 微妙法門(미묘법문), 不立文字 敎外別傳(불립문자 교외별전 불립문자)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世尊在靈上會上 拈華示衆 是時衆皆寂然 惟迦葉尊者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磨訶迦葉.

人生朝露(인생조로)人:사람 인. 生:날‧살 생. 朝:아침 조. 露:이슬 로.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다는 말.

【원 말】 人生如朝露(인생여조로). 【유사어】 人生草露.【참 조】 雁書(안서), 九牛一毛.

【출 전】?漢書(한서)?「蘇武專(소무전)」

전한 武帝 때(B.C.100) 中郞將(중랑장) 蘇武는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내란에 말려 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우두머리인 單于(선우)는 한사코 항복을 거부하는 소무를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며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했다. 소무가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어느 날, 고국의 친구인 李陵(이릉) 장군이 찾아왔다.

이릉은 소무가 고국을 떠난 그 이듬해 5000여의 보병으로 5만이 넘는 훙노의 기병과 혈전을 벌이다가 衆寡不敵(중과 부적)으로 참패한 뒤 부상, 昏絶중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릉은 선우의 빈객으로 후대를 받았으나 降將이 된 것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선우의 특청으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이릉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를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우는 자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人生如朝露)’고 하지 않는가.”

이릉은 끝내 소무의 절조를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갔다. 그러나 소무는 그 후(B.C.81) 소제(昭帝:무제의 아들)가 파견한 특사의 機智(기지)로 풀려나 19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一擧兩得(일거양득)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거둔다는 뜻.

【준 말】 兩得(양득). 【동의어】 一擧兩獲(일거양획), 一箭雙鳥(일전쌍조), 一石二鳥(일석이조).

【반의어】 一擧兩失(일거양실).【참 조】 朝名市利(조명시리).【출 전】?春秋後語(춘추후어)?,?戰國策(전국책))?「秦策(진책)」

秦(진)나라 惠文王(혜문왕)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司馬錯(사마조)은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朝名市利(조명시리)에 부합하는 霸業(패업)’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張儀(장의)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强兵(강병)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富(부)에 힘써야 하며, 覇者(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 지는 법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蜀(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宗室(종실)인 周(주)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韓(한)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齊(제)나라와 趙(조)나라를 통해서 楚(초)나라와 魏(위)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오며, 더욱이 주나라의 九鼎(구정)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이옵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惡名(악명)만 얻을 뿐이옵니다.”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一網打盡(일망타진)一:한 일. 網:그물 망. 打:칠 타. 盡:다할 진.

한 번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 곧 범인들이나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말.

【준 말】 網打(망타). 【출 전】?宋史(송사)?「人宗紀(인종기)」,?東軒筆錄(동헌필록)?

北宋(북송) 4대 황제인 仁宗(인종)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요(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중국의 일부였던 安南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前漢(전한) 5대 황제인 文帝(문제)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文治(문치)를 폄으로써 이른바 ‘慶曆(경력:인종의 연호)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聖世(성세)를 이룩했다.이 때의 역사적인 명신으로는 韓琦(한기)‧范仲淹(범중엄)‧歐陽脩(구양수)‧司馬光(사마광)‧周敦頣(주돈이)‧張載(장재)‧程顥(정호)‧程頣(정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朝議(조의)를 같이하다 보니 名論卓說(명론탁설)이 百出(백출)했고 따라서 충돌도 잦았다. 결국 朝臣(조신)이 양 당으로 나뉘어 교대로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에 내각이 17회나 바뀌었는데, 후세의 역사가는 이 단명 내각의 시대를 가리켜 ‘경력의 黨議(당의)’라 일컫고 있다.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杜衍(두연)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相臣(상신)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內降(내강)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政道(정도)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태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聖旨(성지)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인 蘇舜欽(소순흠)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검찰총장) 王拱辰(왕공진)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모고했다.

“범인들을 一網打盡(일망타진)했습니다.”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 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一衣帶水(일의대수)一:한 일. 衣:옷 의. 帶:띠 대. 水:물 수.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이나 바닷물이라는 뜻. 곧 ① 간격이 매우 좁음. ② 강이나 해협을 격한 대안(對岸)의 거리가 아주 가까움.

【유사어】 一牛鳴地(일우명지), 一牛吼地(일우후지), 指呼之間(지호지간).

【출 전】?南史(남사)?「陳後主紀(진후주기)」

서진(西晉:265~317) 말엽, 천하는 혼란에 빠져 이른바 南北朝(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북방에서는 五胡十六國(오호 십육국)이라 일컫는 匈奴(흉노)‧羯(갈)‧鮮卑(선비)‧羌(강)‧氐(저)등 5개 이민족이 세운 열 세 나라와 세 漢族國(한족국)이 흥망을 되풀이했고, 남방에서는 宋(송)‧齊(제)‧梁(양)‧陳(진) 등 네 나라가 교체되었다.북방의 북조 최후의 왕조인 北周(북주)를 물려받아 隋(수)나라를 세운 文帝(문제)는 마침내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陳王(진왕)은 무도하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도다. 이제 朕(짐)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어찌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一衣帶水)’ 따위를 겁내어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으랴.”

양자강은 예로부터 천연의 要害(요해)로서 삼국 시대의 吳(오)나라 이후 南岸(남안)의 건강(建康:南京)에 역대 남조의 도읍이 있었다. 문제의 명에 따라 52만의 수나라 대군은 단숨에 양자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一以貫之(일이관지)一:한 일, 以:~로써 이, 貫:꿰뚫다 관, 之: 것 지.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음.

【출 전】?論語(논어)? 「里仁篇(이인편)」

공자께서 曾子(증자)에게 “參(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參乎吾道一以貫之)” 증자는 알아듣고 “네”하고 대답했다.공자께서 나가시자 門人(문인)들이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자, 증자는 “선생임의 말씀은 忠(충)과 恕(서)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논어? 「위령공편」에도 공자께서 자공에게 “나는 한 가지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었느니라.(子一以貫之)”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賜(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자공이 대답해 말했다.“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를 가지고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一字千金(일자천금)一:한 일. 字:글자 자. 千:일천 천. 金:쇠 금.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사어】 一字百金(일자백금). 【출 전】?史記(사기)?「呂不韋列傳(여불위열전)」

전국 시대 말엽, 齊(제)나라 孟嘗君(맹상군)과 趙(조)나라 平原君(평원군)은 각 수천 명, 楚(초)나라 春申君(춘신군)과 魏(위)나라 信陵君(신릉군)은 각 3000여 명의 食客(식객)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秦(진)나라의 相國(상국: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仲父(중부)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文信侯(문신후) 呂不韋(여불위: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莊襄王(장양왕) 子楚(자초)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奇貨可居(기화 가거)’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私財(사제)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荀子(순자)가 수만語(어)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여불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大作(대작)을 만들었다. 이 책은 天地萬物(천지만물), 古今(고금)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呂氏春秋(여씨춘추)?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 ?여씨춘추?을 도읍인 咸陽(함양)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榜文(방문)을 써 붙였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덧붙이거나 빼눈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리라.”

이는 商魂(상혼)이 왕성한 여불위의 우수 식객 유치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自暴自棄(자포자기)自:스스로 자. 暴:사나울 포. 棄:버릴 기.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돌보지 아니함.

【준 말】 自暴(자포), 暴棄(포기), 自棄(자기). 【출 전】?孟子(맹자)?「離婁篇(이루편)」

전국 시대를 살다간 亞聖 맹자는 ‘자포자기’에 대해 ?맹자? 「이루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스스로를 버림)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仁(인)이나 義(의)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自棄(자기)라고 한다. 사람의 本性(본성)은 원래 善(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한 집(安宒)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자포자기’란 말은 맹자가 어느 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虐待(학대)하고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戰戰兢兢(전전긍긍)戰:무서워 떨‧싸움할 전. 兢:조심할 긍.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는 모양. 戰戰(전전)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兢兢(긍긍)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말한다.

【준 말】 戰兢(전긍).【동의어】 戰戰恐恐(전전공공).【유사어】 小心翼翼(소심익익).【출 전】?詩經(시경)?「小雅篇(소아편)」

이 말은 중국 最古(최고)의 詩集(시집)인 ?시경? 「소아편」의 ‘小旻(소민)’이라는 詩(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謀臣(모신)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

그 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하네 如履薄氷

참고 -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요즈음에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적발당할까봐 쩔쩔매는 경우’에 이 말이 흔히 쓰이고 있음.

輾轉反側(전전반측)輾:구르다 전, 轉: 구르다 전, 反:돌이키다 반, 側:켵 측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출 전】?詩經(시경)? 「周南(주남)」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시경? 「주남」의 關雎(관저)에 이렇게 실려 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關關雎鳩 在河之州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窈窕淑女 君子好逑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參差荇菜 左右流之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窈窕淑女 寤寐求之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求之不得 寤寐思服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悠哉悠哉 輾轉反側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戀歌(연가)이다. 즉 勞動歌(노동가)임과 동시에 戀愛歌(연애가)이기도 하다.

前車覆轍(전차복철)前:앞 전. 車:수레 차‧거. 覆:엎어질 복. 轍:바퀴자국 철.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준 말】 覆轍(복철). 【대응어】 ~後車之戒(후차지계).

【동의어】 前車覆後車戒(전차복 후차계), 覆車之戒(후차지계, 복거지계).

【유사어】 踏覆轍(답복철), 踏覆車之轍(답복차지철), 前轍(전철).【참 조】 殷鑑不遠(은감불원).

【출 전】?漢書(한서)?「賈誼專(가의전)」,?說苑(설원)?「善說(선설)」, ?後漢書(후한서)?「竇武專(두무전)(두무전(두무전)」)

① 전한 5대 황제인 文帝(문제)때 賈誼(가의)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仁君(인군)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전차복철)’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후차지계)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秦(진)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 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前轍(전철)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治亂(치란)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문제는 이후 國政刷新(국정 쇄신)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② 이 말은 ?說苑(설원)? 「善說(선설)」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魏나라 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醉興(취흥)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公孫不仁(공손불인)이 술을 가득 채운 큰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시오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轉禍爲福(전화위복)轉:구를 전. 禍:재화 화. 爲:할‧위할 위. 福:복 복.

① 禍(화)를 바꾸어 오히려 福(복)이 되게 함.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대응어】 ~因敗爲功(인패위공). 【동의어】 因禍爲福(인화위복).【유사어】 塞翁之馬(새옹지마).

【출 전】?戰國策(전국책)?「燕策(연책)」

전국시대 合從策(합종책)으로 6국, 곧 韓(한)‧魏(위)‧趙(조)‧燕(연)‧齊(제)‧楚(초)의 재상을 겸임했던 縱橫家(종횡가) 蘇秦(소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功(공)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切磋琢磨(절차탁마)切:끊을‧자를 절. 磋:탄식할‧찬탄할 차. 琢:쫄 탁. 磨:갈 마.

뼈‧상아‧옥‧돌 따위를 깎고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 곧 ① 수양에 수양을 쌓음의 비유. ② 학문‧기예 따위를 힘써 갈고 닦음의 비유.

【원 말】 如切如磋如琢如磨(여절여차여탁여마). 【준 말】 切磨(절마).

【출 전】?論語(논어)?「學而篇(학이편)」,?詩經(시경)?「衛風篇(위풍편)」

언변과 재기가 뛰어난 子貢(자공)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좋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공자의 대답에 이어 자공은 또 이렇게 물었다.

“?詩經(시경)?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象牙(상아)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긴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 ?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로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 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井中之蛙(정중지와)井:우물 정.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蛙:개구리 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음의 비유.

【원 말】 井中蛙不知大海(정중와 부지대해). 【준 말】 井蛙(정와).

【동의어】 井蛙(정와), 井中蛙(정중와), 井底蛙(정저와), 坎井之蛙(감정지와).

【유사어】 蜀犬吠日(촉견폐일), 越犬吠雪(월견폐설).【참 조】 望洋之嘆, 得隴望蜀(득롱망촉).

【출 전】?後漢書(후한서)?「馬援專(마원전)」,?莊子(장자)?「秋水篇(추수편)」

① 王莽(왕망)이 前漢(전한)을 멸하고 세운 新(신)나라 말경, 馬援(마원)이란 인재가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된 세 형과는 달리 고향에서 조상의 묘를 지키다가 隴西(농서)에 웅거하는 隗囂(외효)의 부하가 되었다.그 무렵, 公孫述(공손술)은 蜀(촉) 땅에 成(성)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僭稱(참칭)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외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원을 보냈다. 마원은 고향 친구인 공순술이 반가이 맞아 주리라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공손술은 계단 아래 무장한 군사들을 도열시켜 놓고 위압적인 자세로 마원을 맞았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옛 우정을 생각해서 자네를 장군에 임명할까 하는데, 어떤가?”

마원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천하의 雌雄(자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공손술은 예를 다하여 천하의 인재를 맞으려 하지 않고 허세만 부리고 있구나. 이런 자가 어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마원은 서둘러 돌아와서 외효에게 고했다.

“공손술은 좁은 촉 땅에서 으스대는 재주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습니다.”

그래서 외효는 공손술과 손잡을 생각을 버리고 훗날 後漢(후한)의 시조가 된 光武帝(광무제)와 修好(수호)하게 되었다.

② ‘정중지와’란 말은?莊子(장자)?「秋水篇(추수편)」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北海(북해)의 海神(해신)인 若(약)이 黃河(황하)의 河神(하신)인 河伯(하백)에게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구애하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여름 한 철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과 道(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배운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北海若曰 井䵷不可以語海者 拘於處也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曲土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糟糠之妻(조강지처)糟:술재강 조. 糠:겨 강. 之:갈 지(…의). 妻:아내 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원 말】 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 불하당).【출 전】?後漢書(후한서)?「宋弘專(송홍전)」

前漢(전한)을 찬탈한 王莽(왕망)을 멸하고 劉氏(유씨) 천하를 재흥한 後漢(후한) 光武帝(광무제) 때의 일이다. 建元(건원) 2년(26), 당시 監察(감찰)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 宋弘(송홍)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湖陽公主(호양공주)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 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人之常情(인지상정) 아니겠소?”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다.”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朝名市利(조명시리)朝:아침‧조정 조. 名:이름‧이름날 명. 市:저자 시. 利:이로울 리.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유사어】 適時適地(적시적지). 【참 조】 一擧兩得.【출 전】?戰國策(전국책)?「秦策(진책)」

秦(진)나라 惠文王(혜문왕)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司馬錯(사마조)는 어전에서 ‘蜀(촉)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一擧兩得(일거양득)’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그러나 縱橫家(종횡가) 출신의 재상 張儀(장의)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魏(위)‧楚(초)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韓(한)나라의 三川(삼천)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周(주)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구정(九鼎: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霸業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疲弊(피폐)케 할 뿐 무슨 名利(명리)가 있겠나이까?

臣(신)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皇室(황실)은 천하의 조정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朝三暮四(조삼모사)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 곧 ① 당장 눈앞의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 ②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준 말】 朝三(조삼). 【동의어】 朝四暮三(조사모삼).【출 전】?列子(열자)?「黃帝篇(황제편)」,?莊子(장자)?「齊物論(제물론)」

宋(송)나라에 狙公(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狙(저)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가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화를 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芧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芧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左袒(좌단)左:왼 좌. 袒:옷 벗어 멜 단.

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출 전】?史記(사기)?「呂后本紀(여후본기)」

漢(한)나라 高祖(고조) 劉邦(유방)의 황후인 呂太后(여태후)가 죽자(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劉氏(유씨) 일족과 陳平(진평)‧周勃(주발) 등 고조의 遺臣(유신)들은 上將軍(상장군)이 되어 北軍(북군)을 장악한 趙王(조왕) 呂祿(여록), 南軍(남군)을 장악한 呂王(여왕) 呂産(여산)을 비롯한 외척 呂氏(여씨) 타도에 나섰다.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右丞相(우승상) 진평은 太尉(태위) 주발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印綬(인수)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酈寄(역기)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은 즉시 북군의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漢室(한실)의 주인은 유씨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씨가 유씨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右袒(우단)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左袒(좌단)하라.”

그러자 全軍(전군)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酒池肉林(주지육림)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술로 못

池(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酒宴을 일컫는 말.

【동의어】 肉山酒池(육산주지). 【유사어】 肉山脯林(육산포림).【참 조】 殷鑑不遠(은감불원).

【출 전】?史記(사기)?「殷本紀(은본기)」,?帝王世紀(제왕세기)?,?十八史略(십팔사략)?

고대 중국의 夏(하)나라 桀王(걸왕)과 殷(은)나라 紂王(주왕)은 원래 智勇(지용)을 겸비한 賢主(현주)였으나 그들은 각기 妺喜(말희), 妲己(달기)라는 희대의 妖女毒婦(요녀독부)에게 빠져 사치와 주색에 탐닉하다가 결국 暴君淫主(폭군음주)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 말았다.

하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有施氏國(유시씨국)에서 공물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逸樂(일락)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美少女(미소녀)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舞樂(무악)을 베풀기도 했다.또 무악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宮庭(궁정)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美酒(미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뭇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脯肉(포육)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은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貪食(탐식)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이 같은 奢侈淫佚(사치음일)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服屬(복속)했던 은나라 湯王(탕왕)에게 誅伐(주벌)당하고 말았다.또한 은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탕왕으로부터 28대째)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有蘇氏國(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 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의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錢帛(전백)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珍獸奇物(진수기물)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 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을 만들었다.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北里舞樂(북리무악)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沒我(몰아)의 怳惚境(황홀경)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狂宴(광연)이 晝夜長川(주야장천)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이같이 常軌(상궤)를 벗어난 狂態(광태)를 보다못해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없이 炮烙之刑(포락지형)에 처하곤 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銅柱(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일종의 잔인 무도한 사형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 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은 희생자들의 阿鼻叫喚(아비규환)의 모습까지도 잔인한 달기의 淫慾(음욕)을 돋우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인 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竹馬故友(죽마고우)竹:대나무 죽. 馬:말 마. 故:예‧연고 고. 友:벗 우.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곧 ① 어렸을 때의 벗. 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친구.

【동의어】 竹馬之友(죽마지우), 竹馬舊友.【유사어】 騎竹之交(기죽지교), 竹馬之好(죽마지호).

【출 전】?世說新語(세설신어)?「品藻篇(품조편)」,?晉書(진서)?「殷浩專(은호전)」

晉(진)나라 12대 황제인 簡文帝(간문제) 때의 일이다. 蜀(촉)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桓溫(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殷浩(은호)라는 隱士(은사)를 建武將軍(건무장군) 揚州刺史(양주자사)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反目(반목)했다. 王羲之(왕희지)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五胡十六國(오호 십육국) 중 하나인 後趙(후조)의 왕 石季龍(석계룡)이 죽고 胡族(호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上疏(상소)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樽俎折衝(준조절충)樽:술통 준. 俎:도마 조. 折:꺾을 절. 衝:충돌할 충.

‘술자리에서 유연한 담소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는 뜻으로, 외교를 비롯하여 그 밖의 교섭에서 유리하게 담판하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유사어】 樽俎之師(준조지사). 【출 전】?晏子春秋(안자춘추)?「內篇(내편)」

춘추 시대, 齊(제)나라 莊公(장공)이 신하인 崔杼(최저)에게 시해되자 동생이 뒤를 잇고 景公(경공)이라 일컬었다. 경공은 최저를 左相(좌상)에 임명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까지 했다. 이어 모든 신하가 맹세했다.그러나 단 한 사람, 晏嬰(안영)만은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좋으련만.’

이윽고 최저가 살해되자 경공은 안영을 相國(상국)에 임명했다. 안영은 溫厚博識(온후박식)한 인물로서 ‘한 벌의 호구(狐裘: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으로 만든 갖옷)를 30년이나 입었을(一狐裘三十年)’정도로 검소한 청백리이기도 했다. 한 번은 경공이 큰 食邑(식읍)을 하사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욕심이 충족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지나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국만 해도 12개국이나 있었고 소국까지 세면 100개국이 넘었다. 안영은 이들 나라를 상대로 빈틈없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제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영의 외교 수완에 대해 그의 언행을 수록한 ?晏子春秋(안자 춘추)?은 이렇게 쓰고 있다.

“술통과 도마 사이(樽俎間:술자리)를 나가지 아니하고 1000리(里)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그것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衆寡不敵(중과부적)

衆:무리 중. 寡:적을 과. 不:아니 불. 敵:대적할‧원수‧적수 적.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

【출 전】?孟子(맹자)?「梁惠王篇(양혜왕편)」

전국 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王道論을 역설하던 맹자가 齊(제)나라 宣王(선왕)에게 말했다.

“전하 스스로는 放逸(방일)한 생활을 하시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천하의 覇權(패권)을 잡으려 드시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아니, 과인의 행동이 그토록 나쁘단 말이오?”“가령, 지금 소국인 鄒(추)나라와 대국인 楚(초)나라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나이까?”“그야, 물론 초나라가 이길 것이오.”

“그렇다면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衆寡不敵)’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지금 천하에는 1000里(리) 四方(사방)의 나라가 아홉 개 있사온데 제나라도 그중 하나이옵니다. 한 나라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소국인 초나라가 대국인 초나라를 이기려 하는 것과 같지 않사옵니까?”이렇게 몰아세운 다음 맹자는 계속하여 왕도론을 설파했다.“왕도로써 백성을 悅服(열복)시킨다면 그들은 모두 전하의 덕에 기꺼이 굴복할 것이오며 또한 천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옵니다…‥.”

中石沒鏃(중석몰촉)中:가운데‧맞을 중. 石:돌 석. 沒:잠길 몰. 鏃:화살 촉.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원 말】 射中石沒鏃(석중석몰촉).【동의어】 射石飮羽(석석음우), 射石沒金飮羽(석석몰금음우), 熊渠射虎(웅거석호).

【유사어】 一念通巖(일념통암),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

【출 전】?史記(사기)?「李將軍專(이장군전)」,?韓詩外專(한시외전)?「卷六(권육)」

① 前漢(전한)의 李廣(이광)은 영맹한 흉노족의 땅에 인접한 隴西(농서) 지방의 武將大家(무장 대가) 출신으로, 특히 弓術(궁술)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이었다. 文帝(문제) 14년(B.C. 166), 이광은 肅關(숙관)을 침범한 흉노를 크게 무찌를 공으로 시종 무관이 되었다. 또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천하에 勇名(용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이광은 숙원이었던 수비 대장으로 전임되자 변경의 城塞(성새)를 전전하면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때도 늘 이겨 常勝(상승) 장군으로 통했다. 그래서 흉노는 그를 ‘한나라의 飛將軍(비장군)’이라 부르며 감히 성해를 넘보지 못했다.어느 날, 그는 황혼 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一發必殺(일발필살)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돌이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한시외전?에도 楚(초)나라의 熊渠子(웅거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中原逐鹿(중원축록)中:가운데 중. 原:근원‧들‧벌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天下(중원)의 帝位(사슴)을 쫓는다는 뜻. 곧 ① 帝位(제위)를 다툼. ② 정권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준 말】 逐鹿(축록). 【동의어】 角逐.【유사어】 中原場裡(중원장리), 中原射鹿(중원석록).

【출 전】?史記(사기)?「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漢(한)나라 高祖(고조) 11년(B.C. 196), 趙(조)나라 재상이었던 陳豨(진희)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와 내통하고 있던 淮陰侯(회음후) 韓信(한신)이 도읍 長安(장안)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蕭何(소하)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蒯通(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齊(제)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齊王(제왕)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秦(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盜跖(도척)의 개가 堯(요) 임금을 보고 짖었다(跖狗吠堯)’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指鹿爲馬(지록위마)指:손가락‧가리킬 지. 鹿:사슴 록. 爲:할‧위할 위. 馬:말 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 곧 ① 윗사람을 농락하여 마음대로 휘두름의 비유. ② 위압적으로 남에게 잘못을 밀어붙여 끝까지 속이려 함의 비유.

【출 전】?史記(사기)?「秦始皇本紀(진시황본기)」

秦나라 시황제갸 죽자 측근 환관인 趙高는 거짓 詔書(조서)를 꾸며 태자 扶蘇(부소)를 죽이고 어린 胡亥(호해)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오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李斯(이사)를 비롯, 그밖에 많은 옛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오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趙高欲慰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 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黙 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咸陽(함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子嬰(자영)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池魚之殃(지어지앙)池:못 지. 魚:고기 어. 之:갈 지(…의). 殃:재앙 앙.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 곧 ① 禍(화)가 엉뚱한 곳에 미침. ② 상관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의 비유. 언걸 먹음.

【동의어】 殃及池魚(앙급지어). 【출 전】?呂氏春秋(여씨춘추)?「必己篇(필기편)」

춘추 시대 宋(송)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大臣) 벼슬에 있는 桓魋(환퇴)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 둔 장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쳐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꿎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죽고 말았다.

知彼知己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

知:알지. 彼:저 피. 己:몸‧자기 기.百:일백 백. 殆:위태하 태.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勝算(승산)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말.

【출 전】?孫子(손자)?「謀攻篇(모공편)」

춘추 시대, 吳王(오왕) 闔閭(합려)의 霸業(패업)을 도운 孫武(손무)는 전국 시대에 楚(초)나라의 병법가로서 ?오자(吳子)?을 쓴 吳起(오기)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리는데 그가 쓴 ?손자? 「모공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懲羹吹虀(징갱취제)懲:징계할 징. 羹:국 갱. 吹:불 취. 虀:냉채 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 한 데 데어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동의어】 懲羹吹菜(징갱취채), 懲羹吹膾(징갱취회).【유사어】 懲船忌輿, 吳牛喘月(오우천월).

【출 전】?楚辭(초사)?「七章 惜誦(칠장 석송)」

전국 시대 말엽, 秦(진)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楚(초)‧齊(제)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張儀(장의)는 초‧제 동맹의 强化論者(강화론자)인 초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굴(屈)‧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 굴원(屈原: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懷王(회왕)의 寵姬(총회) 鄭袖(정수)와 佞臣(영신) 勤尙 등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로부터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讒訴(참소)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도 하지 않고 한결같이 洞庭湖(동정호)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水中孤魂(수중 고혼)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楚辭(초사)?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 ?초사? 「9장」중 ‘惜誦(석송)’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懲於羹者 而吹虀兮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는가 何不變此志也‥‥‥‥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主君(주군)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慷慨之心(강개지심)을 토로한 시이다.

創業守成(창업수성)創:비롯할‧시작할 창. 業:업 업. 守:지킬 수. 成:이룰 성.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

【원 말】 易創業難守成(이창업 난수성).【출 전】?唐書(당서)?「房玄齡專(방현령전)」,?貞觀政要(정관정요)?「君道篇(군도편)」, ?資治通鑑(자치통감)?

隋(수)나라 말의 혼란기에 李世民(이세민)은 아버지인 李淵(이연)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關中(관중)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煬帝(양제)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恭帝(공제)를 폐하고 唐(당) 나라를 ‘창업’했다.626년 高祖(고조)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太宗(태종)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고, 外征(외정)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제도적으로 민생 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治世(치세)의 본보기로 삼는 盛世(성세)를 이룩했다. 이 성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태종 정관 연간(627~649)의 치세)’라고 한다.

‘정관의 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左僕射(좌복야) 杜如晦(두여회), 기획력이 빼어난 右僕射(우복야) 房玄齡(방현령), 강직한 大夫(대부) 魏徵(위징) 등과 같은 많은 현신들이 善政(선정)에 힘쓰는 태종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 이런 질문을 했다.

“창업과 수성은 어느 쪽이 어렵소?”

방현령이 대답했다.“창업은 雨後竹筍(우후 죽순)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나이다.”그러나 위징의 대답은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艱難(간난) 속에서 어렵게 얻어, 安逸(안일)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옵니다. 그런 만큼 수성이 어려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房公(방공)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 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魏公(위공)은 짐과 함께 國泰民安(국태민안)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驕奢(교사: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禍亂(화란)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天高馬肥(천고마비)天:하늘 천. 高:넢을 고. 馬:말 마. 肥:살찔 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곧 ① 하늘이 맑고 五穀百果(오곡 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

【원 말】 秋高馬肥. 【동의어】 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유사어】 天高氣淸(천고기청).

【출 전】?漢書(한서)?「匈奴專(흉노전)」

殷(은)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周(주)‧秦(진)‧漢(한)의 三王朝(삼왕조)를 거쳐 六朝(육조)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사나운 유목 민족이었다.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데 전국시대에는 燕(연)‧趙(조)‧秦(진)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은 기존의 성벽을 修築(수축)하는 한편, 增築連結하여 萬里長城(만리장성)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戰戰兢兢(전전긍긍)했다고 한다.

千慮一失(천려일실)千:일천 천. 慮:생각할 려. 一:한 일. 失:잃을 실.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

【원 말】 智者千慮必有一失(지자천려 필유일실).【동의어】 智者一失. 【반의어】 千廬一得.

【참 조】 背水之陣(배수지진). 【출 전】?史記(사기)?「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趙(조)나라로 쳐들어간 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李左車(이좌거)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知德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전 결과 조나라는 괴멸했고,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은 손수 포박을 풀어 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천하 통일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燕(연)‧齊(제)에 대한 공략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將 兵不語)’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장이 듣기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그 후 이좌거는 한신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天衣無縫(천의무봉)天:하늘 천, 衣:옷 의, 無:없다 무, 縫:꿰매다 봉

하늘의 직녀가 짜 입은 옷은 솔기가 없다는 뜻으로, ① 詩文(시문)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이름. ② 완전 무결함.

【출 전】?太平廣記(태평광기)? 「鬼怪神寄(귀괴신기)」

郭翰(곽한)이 뜰에 누웠는데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저는 天上(천상)의 織女(직녀)이온데,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 울화병이 생겨서, 上帝(상제)의 허락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습니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요구하더니 매일

밤 찾아왔다. 칠월 칠석이 되자 며칠 안오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남편(牽牛:견우)과의 재미는 좋았소?” 하자, “천상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 질투는 마십시오.” 했다.

곽한이 조용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니, 바느질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상해서 물으니, “하늘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꿰매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벗은 옷은 그녀가 돌아갈 때면 저절로 가서 그녀의 몸에 입히는 것이었다.徐視其衣竝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每去 輒以衣服自隨.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織女(직녀)의 시녀가 소식을 한 번 전한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곽한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인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혈통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싫어도 아내를 맞이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아들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千載一遇(천재일우)千:일천 천. 載:해 재. 一:한 일. 遇:만날 우.

千載(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란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이르는 말.

【동의어】 千載一時(천재일시), 千載一會(천재일회), 千歲一時(천세일시).

【유사어】 盲龜浮(遇)木(맹귀부(우)목).【출 전】?文選?「袁宏 三國名臣序贊(원굉 삼국명신서찬)」

東晉(동진)으 학자로서 東陽太守(동양태수)를 역임한 袁宏(원굉)은 여러 문집에 시문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거슨?문선?에 수록된「삼국 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삼국지?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중 魏(위)나라의 荀文若(순문약)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대저 伯樂(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 천리마 한 필을 찾아내지 못한다(夫末遇伯樂則 千載無一驥)’고 적고, 현군과 명신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만 년에 한 번의 기회는 이 세상의 통칙이며 夫萬歲一期 有生之通途

천 년에 한 번의 만남은 현군과 명신의 진귀한 해후다 千載一遇, 賢智之嘉會

鐵面皮(철면피)鐵:쇠 철. 面:낯‧겉 면. 皮:가죽 피.

①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사람. ②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 또 그런 사람. ③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음. 厚顔無恥(후안무치).

【동의어】厚顔無恥(후안무치).【유사어】面帳牛皮(면장우피), 强顔女子(강안여자).

【출 전】?北夢瑣言(북몽쇄언)?,?虛堂錄(허당록)?

王光遠(왕광원)이란 사람이 있었다. 학재가 뛰어나 進士(진사)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출세욕이 지나쳐 그는 고관의 습작시를 보고도 ‘李太白(이태백)도 감히 미치지 못할 신운(神韻: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감도는 시’라고 극찬할 정도로 뻔뻔한 아첨꾼이 되었다.아첨할 때 그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았고 상대가 무식한 짓을 해도 웃곤 했다. 한 번은 고관이 취중에 매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를 때려 주고 싶은데, 맞아 볼 텐가?”“대감의 매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 자 어서…‥.”

고관은 사정없이 왕광원을 매질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동석했던 친구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책하듯 말했다.

“자네는 쓸개도 없나? 滿座(만좌) 중에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어쩌면 그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잘 보이면 나쁠 게 없니.”

친구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광원의 낯가죽은 두껍기가 열 겹의 鐵甲(철갑)과 같다.”

淸談(청담)淸:맑을 청. 談:말씀 담.

① 名利(명리)‧名聞(명문)을 떠난 淸雅(청아)한 이야기. 고상한 이야기. ② 위진 시대에 유행한 老莊(노장)을 祖述(조술)하고 속세를 떠난 淸淨無爲의 空理空論(공리공론).

【유사어】 淸言(청언), 淸譚(청담).【출 전】?晉書(진서)? 「郄超傳(극초전)」 「王衡傳(왕형전)」. ?宋書(송서)? 「蔡郭傳論(채곽전론)」. ?顔氏家訓(안씨가훈)?

魏晉時代(위진 시대)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사회가 혼란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난세였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자와 그에 추종하는 세속적 관료들의 횡포도 극심했다. 그래서 당시 士大夫(사대부) 간에는 汚濁(오탁)한 속세를 등지고 산림에 隱居(은거)하여 老莊(노장)의 철학이라든가 문예 등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그 중에서도 竹林七賢(죽림 칠현), 곧 山濤(산도)‧阮籍(완적)‧嵇康(혜강)‧阮咸(완함)‧劉伶(유령)‧尙秀(상수)‧王戎(왕융)은 도읍 洛陽(낙양) 근처의 대나무 숲에 은거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취한 채 ‘청담’-청신기경(淸新奇警:산뜻하고 기발함)한 이야기, 곧 세속의 名利(명리)‧名聞(명문)‧喜悲(희비)를 초월한, 고매한 정신의 자유 세계를 주제로 한 老莊(노장)의 철학-을 논하며 명교(名敎:儒敎 유교) 도덕에 저항했다.

靑雲之志(청운지지) 靑:푸르다 청, 雲:구름 운, 之:~의 지, 志: 뜻 지

① 속세에 초연한 태도. ②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

【출 전】?史記(사기)? 「伯夷列傳(백이열전)」

장구령은 玄宗 때의 어진 재상으로 간신 李林甫의 모략으로 인해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餘生을 보냈다. 다음은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宿昔靑雲志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蹉跌白髮年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誰知明鏡裏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形影自相潾

오늘날, 보통이 아닌 큰 뜻, 입신출세에 대한 야망을 ‘청운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청운’이라는 말은 옛날?사기?‘백이열전’에도 나오며, 다음과 같이 쓰여지고 있다.항간의 사람들은 행실을 닦아 이름 세우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靑雲의 선비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니, 어찌 능히 후세에 베풀 수 있으랴!閭巷之人 欲砥行立名者 非附靑雲之士 惡能施于後世哉.

靑天白日(청천백일)靑:푸를 청. 天:하늘 천. 白:흰 백. 日:날 일.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는 해라는 뜻. 곧 ① 맑게 갠 대낮. ② 뒤가 썩 깨끗한 일. ③ 원죄가 판명되어 무죄가 되는 일. ④ 푸른 바탕의 한복판에 12개의 빛살이 있는 흰 태양을 배치한 무늬.

【출 전】?唐宋八家文?「韓愈 與崔群西(한유 여최군서)」, ?朱子全書(주자전서)?「諸子篇(제자편)」

당나라 중기의 시인‧정치가인 韓愈(한유)는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崔群(최군)이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外職(외직)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名文(명문)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芝))가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며 ‘청천 백일’이 맑고 밝다는 것은 노예인들 모를 리 있겠는가?”

  여기서 ‘청천백일’이란 말은 최군의 인품이 淸明(청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최군처럼 훌륭한 인물은 누구든지 알아본다는 뜻임.

靑天霹靂(청천벽력)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맑게 갠 하늘의 벼락(날벼락)이란 뜻. ① 약동하는 筆勢(필세)의 형용. ② 생각지 않았던 무서운 일. ③ 갑자기 일어난 큰 사건이나 異變(이변)의 비유.

【원 말】 靑天飛霹靂(청천비벽력).【출전】 陸游(육유)의 ?劍南詩稿(검남시고)?「九月四日鷄未鳴起作(구월사일계미명기작)」

이 말은 南宋(남송)의 대시인 육유의 ?劍南詩稿(검남시고)? 「九月四日鷄未鳴起作(9월4일 계미명기작)」에 나오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의 끝 구절이다.

방옹이 병으로 가을을 지내고 放翁病過秋

홀연히 일어나 취하여 글을 쓰니 忽起作醉墨

정히 오래 움츠렸던 용과 같이 正如久蟄龍

푸른 하늘에 벼락을 치네 靑天飛霹靂

靑出於藍(청출어람)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藍:쪽 람.쪽

藍(람)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이르는 말.

【준 말】 出藍(출람).【동의어】 出藍之譽(출람지예), 出藍之才(출람지재), 後生角高(후생각고),

出藍之榮譽(출람지영예).【출 전】?荀子(순자)?「勸學篇(권학편)」

이 말은 전국 시대의 儒學者로서 性惡說을 창시한 荀子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지해서는 안 되며 청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

寸鐵殺人(촌철살인)寸:마디 촌, 鐵: 쇠 철, 殺: 죽이다 살, 人: 사람 인

간단한 警句(경구)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시킴의 비유.

【출 전】「學林玉露(학림옥로)」

‘學林玉露(학림옥로)’라는 책은 南宋(남송) 때의 羅大徑(나대경)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淸談(청담)을 侍童(시동)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天 · 地 · 人’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그 중 ‘地部(지부)’ 제7권 「殺人手段(살인수단)」에는 宗杲禪師(종고선사)가 다음과 같이 禪(선)을 논하여 말했다.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寸鐵(촌철)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宗杲論禪曰 譬如人載一車兵器 弄了一件 又取出一件來弄 便不是殺人手段 我則只有寸鐵 便可殺人.이것은 그가 禪(선)의 要諦(요체)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逐鹿者不見山(축록자불견산)

逐:쫓을 축. 鹿:사슴 록. 者:놈 자. 不:아니 불. 見:볼 견. 山:메 산.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 곧 ① 명예와 利慾(이욕)에 迷惑(미혹)된 사람은 도리도 저버림. ② 이욕에 눈이 먼 사람은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 또는 보지 못함. ③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

【동의어】 逐獸者目不見太山(축수자목불견태산).【출 전】?淮南子(회남자)?「說林訓篇(설림훈편)」

前漢(전한) 7대 황제인 武帝(무제) 때 중앙 정권에 대항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족 淮南王(회남왕) 劉安(유안)은 門下(문하) 食客(식객)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서책을 저술했는데, 그중 특히 道家(도가)사상을 중심으로 엮은?淮南子(회남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逐鹿者 不見山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攫金者 不見人

癡人說夢(치인설몽)癡:어리석을 치. 人:사람 인. 說:말씀 설, 달랠 세. 夢:꿈 몽.

바보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다는 뜻. 곧 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의 비유. ② 종작없이 지껄이는 짓의 비유. ③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이해되지 않음의 비유.

【원 말】 對癡人夢說(대치인몽설).【동의어】 癡人前說夢(치인전설몽).

【출 전】?冷齋夜話(냉재야화)?「卷力(권력)」,?黃山谷題跋(황산곡제발)?

南宋(남송)의 釋惠洪(석혜홍)이 쓴 ?냉재야화? 「권9」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 시대, 西域(서역)의 고승인 僧伽(승가)가 양자강과 淮河(회하) 유역에 있는 지금의 安徽省(안휘성) 지방을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할 때의 일이다. 승가는 한 마을에 이르러 어떤 사람과 이런 문답을 했다.

“당신은 성이 무엇이오?”“성은 하가요.”“어느 나라 사람이오?”“하나라 사람이오.”

승가가 죽은 뒤 당나라의 書道家(서도가) 李邕(이옹)에게 승가의 비문을 맡겼는데 그는 ‘대사의 성은 何氏(하 씨)이고 하나라 사람이다’라고 썼다. 이옹은 승가가 농담으로 한 대답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석혜홍은 이옹의 이 어리석음에 대해?냉재야화?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는 곧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옹은 결국 꿈을 참인 줄 믿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치인설몽’이란 말은 요즈음에는 본뜻과는 반대로 바보(치인)가 ‘종작없이 지껄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

七步之才(칠보지재)七:일곱 칠. 步:걸음 보. 之:갈 지(…의). 才:재주 재.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동의어】 七步才(칠보재), 七步詩(칠보시).【유사어】 倚馬之才(의마지재), 五步詩(오보시).

【출 전】?世說新語(세설신어)?「文學篇(문학편)」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魏王(위왕) 曹操(조조)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建安(건안)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丕(비)와 셋째 아들인 植(식)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詩才(시재)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後嗣(후사)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後漢(후한)의 獻帝(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帝位(제위)에 올라 文帝(문제)라 일컫고 국호를 魏(위)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東阿王(동아왕)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逼迫(핍박)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煮豆燃萁(자두연기)’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

他山之石(타산지석)他:다를 타. 山:메 산. 之:갈 지(…의). 石:돌 석.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玉(옥)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곧 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됨의 비유. ②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의 비유.

【원 말】 可以攻玉(타산지석 가이공옥).【유사어】 切磋琢磨(절차탁마), 攻玉以石(공옥이석).

【출 전】?詩經(시경)?「小雅篇(소아편)」

이 말은?시경?「소아편」‘鶴鳴(학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일부)의 한 구절이다.

‥‥‥‥‥

즐거운 저 동산에는 樂彼之園

박달나무 심겨 있고 爰有樹檀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 其下維穀

다른 산의 돌이라도 他山之石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 可以攻玉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石(돌)을 小人(소인)에 비유하고 玉(옥)을 君子(군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

泰山北斗(태산북두)泰:클 태. 山:메 산. 北:북녘 북. 斗:말‧별자리 두.

태산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 곧 ① 권위자. 제일인자. 학문‧예술 분야의 대가. ②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받듦을 받거나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준 말】 태두(泰斗). 산두(山斗). 【동의어】 如泰山北斗【출 전】 ?唐書? 「韓愈傳贊(한유전찬)」

당나라 때 四大詩人(사대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韓愈(한유)는 768년, 지금의 河南省(하남성)에서 태어났다.그는 9대 황제인 德宗(덕종) 때 25세의 나이로 進士(진사) 시험에 급제한 뒤 吏部尙書(이부상서)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佛事(불사)를 極諫(극간)하다가 潮州刺史(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罷職(파직) 당했다가 재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吏部侍郞(이부시랑)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년).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韓柳(한유)’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자는 자후(子厚))과 함께 古文復興(고문부흥)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 ?唐書(당서)?「韓愈專(한유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免死狗烹(토사구팽)免:토끼 토. 死:죽을 사. 狗:개 구. 烹:삶을 팽.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원 말】 狡免死良狗烹(교토사 양구팽)【동의어】 野獸盡獵狗烹(야수진 엽구팽)

【유사어】 高(飛)鳥盡良弓藏(고(비)조진 양궁장)【출 전】?史記(사기)?「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十八史略(십팔사략)?, ?韓非子(한비자)?「內儲說篇(내저설편)」

楚霸王 項羽를 멸하고 漢(한)나라의 高祖(고조)가 된 劉邦(유방)은 蕭何(소하)‧張良(장량)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三傑(삼걸)의 한 사람인 韓信(한신)을 楚王(초왕)에 책봉했다(B.C.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猛將(맹장)이었던 鍾離昧(종리매)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지난날 그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陳平(진평)의 獻策(헌책)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제후는 楚(초) 땅의 陳(진)에서 대기하다가 雲夢湖(운몽호)로 가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을 진에서 포박하든가 나오지 않으면 諸侯(제후)의 군사로 誅殺(주살)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주지.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걸 잊지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당하자 그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져)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免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고조진양궁장)),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종에게 죽게 되었구나.”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않았다. 그러나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킨뒤 주거를 도읍인 長安(장안)으로 제한했다.

?十八史略(십팔사략)?에는 高鳥(고조)가 飛鳥(비조)로, 良狗(양구)가 走狗(주구)로 나와 있으나 뜻은 같음.

推敲(퇴고)推:밀 퇴‧옮을 추. 敲:두드릴 고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詩文(시문)을 지을 때 字句(자구)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출 전】?唐詩紀事(당시기사)?「卷四十 題李凝幽居(권사십 제이응유거)」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唐代(당대)의 대문장가인 韓愈(한유)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詩友(시우)가 되었다고 한다.

破竹之勢(파죽지세)

破:깨뜨릴‧깨어질 파. 竹:대나무 죽.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 곧 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 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의 비유.

【동의어】 迎刃而解(영인이해), 勢如破竹(세여파죽).【출 전】?晉書(진서)?「杜預專(두예전)」

魏(위)나라의 權臣(권신) 司馬炎(사마염)은 元帝(원제)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武帝(무제)라 일컫고, 국호를 晉(진)이라고 했다(265년).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鎭南大將軍(진남 대장군) 杜預(두예)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음력),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법인데, 어찌 이런절호의 기회를 버린단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建業(건업)으로 殺到(쇄도)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吳王(오왕) 孫晧(손호)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昔樂毅藉齊西一戰 以幷彊齊 今兵威己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 無復著手處也

暴虎馮河(포호빙하)暴:사나울 폭(관용)‧포. 虎:범 호. 馮:탈 빙. 河:물 하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뜻. 곧 무모한 행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의 비유.

【동의어】 暴虎馮河之勇(포호빙하지용)【참 조】 戰戰兢兢(전전긍긍). 【출 전】 ?論語(논어)? 「述而篇(술이편)」

공자의 3000여 제자 중 특히 顔回(안회)는 學才(학재)가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라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이를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노하거나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이 안회에게 어느 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王侯(왕후)에게 등용되면 포부를 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해 두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때 곁에서 듣고 있던 子路(자로)가 은근히 샘이 나서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만약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武勇(무용)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그야 물론 너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대했으나 공자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거나 황하를 걸어서 건너는 것(暴虎馮河)과 같은 헛된 죽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나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을 것이다.”

豹死留皮(표사유피)豹:표범 표, 死:죽을 사, 留:머무르다, 남기다 유, 皮:가죽 피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死後(사후)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동의어】虎死留皮(호사유피)【출 전】?新五代史(신오대사)? 「死節篇(사절편)」

王彦章(왕언장)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後梁(후량) 太祖(태조) 朱全忠(주전충)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蜀漢(촉한)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王鐵槍(왕철창)이라 불렀다.그는 後梁(후량)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後唐(후당)의 藏宗(장종)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敗軍之將(패군지장)이 되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梁(양)나라, 저녁에 晉(진)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속담을 언제나 말하고지키겠다.”고하였다.彦章武人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風聲鶴唳(풍성학려)風:바람 풍. 聲:소리 성. 鶴:학 학. 唳:학울 려.

바람 소리와 울음소리란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의 비유.

【출 전】 ?晉書(진서)? 「謝玄載記(사현재기)」

東晉(동진)의 9대 孝武帝(효무제) 때인 太元(태원) 8년(383)의 일이다. 五胡十六國(오호 십육국) 중 前秦(전진)의 3대 임금인 苻堅(부견)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효무제는 재상 謝安(사안)의 동생인 征討大都督(정토대도독) 謝石(사석)과 조카인 前鋒都督(전봉도독) 謝玄(사현)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우선 참모인 劉窂之(유로지)가 5000의 군사로 적의 선봉을 격파하여 서전을 장식했다.이 때 중군을 이끌고 淝水(비수)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부견은 휘하 諸將(제장)에게 이렇게 명했다.

“전군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그러나 이는 부견의 오산이었다. 일단 후퇴 길에 오른 前秦軍(전진군)은 반격은커녕 멈춰 설 수도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동진군은 사정없이 전진군을 들이쳤다. 대혼란에 빠진 전진군은 서로 밟고 밟혀 죽는 군사가 들을 덮고 강을 메웠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군사들은 겁을 먹은 나머지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風聲鶴唳)’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추격군이 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匹夫之勇(필부지용)匹:짝 필, 夫:사내 부, 之:~의 지, 勇:용기 용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기.

【출 전】?孟子(맹자)? 「梁惠王下(양혜왕하)」

齊(제)나라 선왕이 물어 보았다.“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인자)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殷(은)나라 湯王(탕왕)이 葛(갈)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주 문왕)이 昆夷(곤이)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월왕) 勾踐(구천)이 吳(오)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道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시경?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匹夫(필부)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齊宣王 問曰 交隣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故 勾踐事吳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干時保之 王曰 大哉言矣 寡人有疾 寡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 夫撫劒疾視曰 彼惡敢當我哉 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王請大之.

涸轍鮒魚(학철부어)涸:마를 학. 轍:수레바퀴 자국 철. 鮒:붕어 부. 魚:고기 어.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경우에 처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의 비유.

【준 말】 涸鮒(학부), 轍鮒(철부).【동의어】 轍鮒之急(철부지급), 涸轍之鮒(학철지부), 涸轍鮒魚(학철부어).

【유사어】 牛蹄之魚(우제지어). 【출 전】 ?莊子(장자)? 「外物篇(외물편)」

전국 시대, 無爲自然(무위자연)을 주장했던 莊子(장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王侯(왕후)에게 무릎을 굽혀 안정된 생활을 하기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그는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監河侯(감하후)를 찾아가 약간의 식대를 꾸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감하후는 친구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빌려주지. 2,3일만 있으면 식읍(食邑)에서 세금이 올라오는데 그때 三百金(삼백 금)쯤 융통해 줄 테니 기다리게.”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2,3일 뒤에 巨金(거금) 삼백 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장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고맙군. 하지만 그땐 아무소용없네.”그리고 이어 장자 특유의 비아냥조로 이렇게 부연했다.

“내가 여기 오느라고 걷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더군(涸轍鮒魚).’‘왜 불렀느냐’고 묻자 붕어는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몇 잔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겨야. 그래서 나는 귀찮은 나머지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래. 나는 2,3일 안으로 남쪽 吳(오)나라와 越(월)나라로 유세를 떠나는데 가는 길에 西江(서강)의 맑은 물을 잔뜩 길어다 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랬더니 붕어는 화가 나서 ‘나는 지금 물 몇 잔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乾魚物廛(건어물전)으로 내 시체나 찾으러 와 달라’고 하더니 그만 눈을 감고 말더군. 자, 그럼 실례했네.”涸’이란 글자는 원래 ‘학’자인데 이 경우 ‘확’으로 읽어 ‘확철부어’라고도 함.

邯鄲之夢(한단지몽)邯:땅 이름 한. 鄲: 땅 이름 단. 之:갈 지(…의). 夢:꿈 몽.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榮華(영화)의 헛됨의 비유.

【동의어】 邯鄲之枕(한단지침), 邯鄲夢枕(한단몽침), 盧生之夢(노생지몽), 一炊之夢(일취지몽),

榮枯一炊(영고일취), 黃粱之夢(황량지몽)【출 전】 沈旣濟(심기제)의 「枕中記(침중기)」

당나라 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山東에서 사는 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崔氏(최씨)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御史大夫(어사대부) 겸 吏部侍郞(이부시랑)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端州刺史(단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3년 후 戶部尙書(호부상서)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宦官(환관)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冤罪(원죄)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中書令을 除授(제수)한 뒤 燕國公(연국공)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후 노생은 모두 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邯鄲之步(한단지보)邯:땅 이름한, 鄲:조나라 서울이름단, 之:~의 지, 步:걸음 보

자기가 지켜야 할 본분을 모르고 마구 남의 흉내를 내면 두 가지를 다 잃는다는 말.

【출 전】?莊子(장자)? 「秋水篇(추수편)」

위모가 공손룡에게 말했다.

“또한 그대는 걷는 법을 배우러 壽陵(수릉)의 젊은이가 邯鄲(한단)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아직 그 나라의 걸음걸이에 능하지 못하였는데 제 나라의 걸음걸이마저 잃어, 곧 엎드려 기어서 제 나라로 돌아갔을 뿐일세. 당장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의 방법을 잃고 그대의 본분을 잃어버릴 것일세.”

공손룡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혀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곧 달려서 도망쳐 갔다.

且子獨不聞 夫壽陵餘子之學行于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 直匍匍而歸耳 今子不法 將忘子之故 失子之業 公孫龍口呿而不合 舌擧而不下 乃逸而走.

汗牛充棟(한우충동) 汗:땀 한, 牛:소 우, 充:차다 충, 棟:마루 동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藏書(장서)가 매우 많음의 비유.

【출 전】柳宗元(유종원) 「陸文通先生墓表(육문통선생묘표)」

唐(당)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의 ‘陸文通先生墓表(육문통선생묘표)’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 ?春秋(춘추)?을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竹簡(죽간)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註釋(주석)을 지은 자가 百千(백천)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父子(부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聖人(성인)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乘觚牘 焦思慮以爲讀注疏說者 百千人矣 攻訐狠怒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其本 則專其所學 以訾其所異 黨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詆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咸興差使(함흥차사) 咸:다 함, 興:흥할 흥, 差:다를 차, 使:사신 사

갔다가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

고사성어는 중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말 중에도 재미있는 표현이 많은데, 함흥차사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함흥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며, 차사란 조정에서 懸案(현안)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관리를 뜻한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論功行賞(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정도전, 조준 등 개국 공신들에게 “도평의사사”라는 기구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이 기구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불만이 높았다. 게다가 태조가 계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불만을 품은 정비 소생 방원이 태조가 병석에 있는 틈을 타 私兵(사병)을 동원하여 방석과 함께 그의 스승이었던 정도전, 방번을 죽이고 방과를 세자로 앉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태조는 무척 상심해 방과에게 양위하니 이가 정종이다.(1398) 2년 뒤 방원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되자 태조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고향 함흥으로 잠적해 버렸다(1401)태종은 평소 태조가 총애하던 성석린을 차사로 보내 가까스로 태조를 모셔오기는 하지만, 이듬해 다시 함흥으로 가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 뒤 태종이 문안인사차 차사를 보냈지만, 그 때 마다 차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태조는 수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다가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돌아온다.

이 때부터 함흥차사라면 갔다가 소식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芳碩變後 太祖 棄位奔于咸興 太宗 屢遣中使 問安 輒彎弓而待之 前後相望 使 未敢道達其情 時 問安使 無一得還者 太宗 問群臣 誰可遣 莫有應之者 判承樞府事 朴淳 挺身請行

兄弟投金(형제투금) 兄:형 형, 弟:아우 제, 投:던지다 투, 金:금 금

형제간의 우애

【출전】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일반 백성 중에 한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금 덩이 2개를 길에서 주웠다.동생은 그 중 하나를 형에게 주고, 자신도 하나를 가지고는 계속해서 길을 가 공암진(지금의 서울 양천)에 닿았다.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을 강에 던져 버렸다. 형이 동생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묻자, 동생이 하는 말이

“저는 원래 형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을 보자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이 금은 분명히 좋지 못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금을 강물에 던져 제 나쁜 마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려고 금을 강물에 버렸습니다.”사실 형도 동생과 같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다 동생의 이런 말 까지 들으니 형은 부끄럽기가 한이 없었다. 형은 동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자신도 금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高麗 恭愍王時 有民兄弟偕行 弟得黃金二錠 以其一 與兄 至孔巖津 同舟而濟 弟忽投金於水 兄怪而問之 答曰 吾平日에 愛兄篤 今而分金 忽生忌兄之心 此乃不祥之物 不若投諸江而忘之 兄曰 汝之言 誠是矣 亦投金於水

螢雪之功(형설지공) 螢:반딧불 형, 雪:눈 설, 之:~의 지. 功: 공 공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 공.

【출 전】?晉書(진서)?

晉(진)의 車胤(차윤)은 字(자)가 武子(무자)이다. 어려서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책을 읽었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름철에 비단 주머니로써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담고 책을 비춰서 읽으며 밤으로써 낮을 잇더니, 후에 벼슬이 尙書郞(상서랑)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書窓(서창)을 螢窓(형창)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晉車胤武子 幼 恭勤搏覽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 照書讀之 以夜繼日 後官至尙書郞 今人以書窓 爲螢窓由此也.

晉(진)의 孫康(손강)은 어려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고 놂이 잡스럽지 않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이 없어서 일찍이 눈에 비춰 책을 읽더니, 후에 벼슬이 御史大夫(어사대부)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이 書案(서안)을 雪案(설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孫康 少 淸介 文遊不雜 嘗映雪讀書 後官至御史大夫 今人 以書案爲雪案 由此也.

狐假虎威(호가호위)狐:여우 호. 假:거짓 가. 虎:범 호. 威:위엄 위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에 비유.

【준 말】 假虎威(가호위).【동의어】假虎威狐(가호위호)

【출 전】 ?戰國策(전국책)? 「楚策(초책)」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楚(초) 나라 宣王(선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왕은 魏(위)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江乙(강을)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이 우리 재상 昭奚恤(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나이까. 전하, 혹 ‘호가호위’란 말을 알고 계시옵니까?”“모르오.”

“하오면 들어 보시오소서. 어느 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나이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天帝(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와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였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軍勢(군세), 즉 전하의 强兵(강병)이옵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貶(폄)하는 이유는 아부로 선왕의 영신(佞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觀 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浩然之氣(호연지기)浩:넓을 호. 然:그럴 연. 之:갈 지(…의). 氣:기운 기.

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②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③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준 말】 浩氣. 【동의어】 正大之氣. 正氣.【출 전】 ?孟子(맹자)? 「公孫丑篇(공손축편)」

전국 시대의 哲人(철인) 孟子(맹자)에게 어느 날, 齊(제) 나라 출신의 公孫丑(공손추)란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覇者(패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선생님도 역시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나는 40 이후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勇(용)’이다.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고, 이것이야말로 ‘大勇(대용)’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최상의 수단이니라.”

“그럼, 선생님의 不動心(부동심)과 告子(고자)의 부동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고자는 맹자의 性善說(성선설)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善(선)하지도 惡(악)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맹자의 論敵(논적)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소극적이다. 나는 말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고자 보다 낫다. 게다가 ‘호연지기’도 기르고 있다.”

‘지언’이란 피사(詖辭:편벽된 말), 음사(淫辭:음탕한 말), 사사(邪辭:간사한 말), 둔사(遁辭:회피하는 말)를 간파하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란 요컨대 평온하고 너그러운 和氣(화기)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간에 넘치는 至大(지대), 지至剛(강)하고 곧으며 이것을 기르면 광대무廣大無邊(변)한 천지까지 충만 한다는 원元氣(기)를 말한다. 그리고 이 氣(기)는 도와 義(의)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道義(도의)가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 ‘기’가 인간에게 깃들여 그 사람의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여 부끄러울 바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敢問夫子 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之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胡蝶之夢(호접지몽)胡:오랑캐‧어찌 호. 蝶:나비 접. 之:갈 지(…의). 夢:꿈 몽.

나비가 된 꿈이란 뜻. 곧 ① 物我一體(물아 일체)의 경지. 물아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萬物一體(만물일체)의 심경.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④ 꿈.

【유사어】 莊周之夢(장주지몽) 【출 전】 ?莊子(장자)? 「齊物篇(제물편)」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物(물)의 是非(시비)‧善惡(선악)‧眞僞(진위)‧美醜(미추)‧貧富‧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無爲自然(무위자연)을 제창한 사람이다.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그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胡蝶之夢(호접지몽)’은 요즈음에도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음.

紅一點(홍일점)紅:붉을 홍. 一:한 일. 點:점‧점 찍을‧흠 점.

① 여럿 가운데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 많은 남자들 틈에 오직 하나뿐인 여자. ③ 여러 하찮은 것 가운데 단 하나 우수한 것.

【출 전】 ?唐宋八家文(당송팔가문)? 「王安石 詠石榴詩(왕안석 영석류시)」

北宋(북송) 6대 황제인 神宗(신종) 때 王安石(왕안석)이란 재상이 있었다. 당시 新法黨(신법당)의 지도인 왕안석은 재상에 임명되자 부국강병을 위한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歐陽脩(구양수)‧司馬光(사마광)‧程頤(정이)‧蘇軾(소식) 등 유명한 문신들이 주축이 된 舊法黨(구법당)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중단 없이 실행되었다.왕안석은 詩文(시문)에도 능하여 唐宋八大家(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그의 「詠石媹詩(영석류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萬綠叢中 紅一點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動人春色 不須多

畵龍點睛(화룡점정)畵:그림 화. 龍:용 룡. 點:점 찍을 점. 睛:눈동자 정.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도 그려 넣는다는 뜻. 곧 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킴. 끝손질을 함. ② 사소한 것으로 전체가 돋보이고 활기를 띠며 살아남의 비유.

【유사어】 入眼(입안). 【출 전】 「水衡記(수형기)」

南北朝(남북조) 시대, 남조인 梁(양)나라에 張僧繇(장승요)라는 사람이 있었다. 右軍將軍(우군장군)과 吳興太守(오흥태수)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立身(입신)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어느 날, 장승요는 金陵(금릉)에 있는 安樂寺(안락사)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을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星火督促(성화독촉)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則飛去 人以爲誕因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華胥之夢(화서지몽)華:빛날 화. 胥:서로 서. 之:갈 지(…의). 夢:꿈 몽.

화서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이나 낮잠을 이르는 말.

【유사어】 華胥之國(화서지국).遊華胥之國(유화서지국).【참조 胡蝶之夢(호접지몽).【출전】 ?列子(열자)?「黃帝篇(황제편)」

먼 옛날 중국 최초의 聖天子로 알려진 황제(帝:공손헌원(公孫軒轅))는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華胥氏(화서씨)의 나라에 놀러 가 안락하고 평화로운 理想境(이상경)을 보았다.

그곳에는 통치자도 신분의 상하도 연장(年長)의 권위도 없고, 백성들은 욕망도 愛憎(애증)도 利害(이해)의 관념도 없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도 초연하다. 또 물 속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지 않으며, 공중에서 잠을 자도 침대에 누워 자는 것과 같고 걸어도 땅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또한 사물의 美醜(미추)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도 보행을 어렵게 하지 않는다. 형체를 초월한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 충만한 이상경인 것이다.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번뜻 깨닫는 바 있어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지난 석 달 동안 방안에 들어앉자 심신 수양에 전념하며 사물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려 했으나 끝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소. 그런데 짐은 이번에 꿈속에서 비로소 그 道(도)하는 것을 터득한 듯싶소.”

그 후 황제가 ‘도’의 정치를 베푼 결과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華胥氏之國 在弇州之西 臺州之北 不知斯齊國幾千萬里 蓋非舟車足力之所及 神遊而已 其國 無師長 自然而已 其民無嗜欲 自然而已 不知樂生 不知惡死 故無夭殤 不知親己 不知疏物 故無愛憎 不知背逆 不知向順 故無利害 都無所愛惜 都無所畏忌 入水不溺 入火不熱 斫撻無傷痛 指擿無痟癢 乘空如履實 寢虛若處牀 雲霧不礙其視 雷霆不亂其聽 美惡不滑其心 山谷不躓其步 神行而已.

和氏之璧(화씨지벽)和:화할 화. 氏:각시 씨. 之:갈 지(…의). 璧:둥근 옥 벽.

天下名玉(천하 명옥)의 이름.

【준 말】 和璧(화벽). 【동의어】 卞和之璧(변화지벽)【유사어】 完璧(완벽). 連城之璧(연성지벽)

【참 조】 完璧(완벽). 【출 전】 ?韓非子(한비자)? 「卞和(변화)」

전국 시대, 楚(초)나라에 卞和氏(변화씨)란 사람이 산 속에서 玉(옥)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厲王(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刖刑(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武王(무왕)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무왕에 이어 文王(문왕)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그 후 화씨지벽은 趙(조)나라 惠文王(혜문왕)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秦나라 昭襄王(소양왕)이 15개의 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連城之壁(연성지벽)’이라고도 불렸다.

換骨奪胎(환골탈태)換:바꾸다 환, 骨: 뼈 골, 奪: 빼앗다 탈, 胎:아이배다 태

① 얼굴이 전보다 변해 아름답게 됨. ② 남의 문장의 취의를 본뜨되 그 형식을 바꿔 自作(자작)처럼 꾸밈.

【출 전】惠洪(혜홍) 「冷濟夜話(냉제야화)」

黃庭堅(황정견)은 蘇軾(소식)과 함께 北宋(북송)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博學多識(박학다식)하여 獨自的(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道家(도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 ‘換骨奪胎’라는 말이다.

“황정견은 ‘杜甫(두보)의 시를 일컬어 靈丹(영단)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黃庭堅稱杜甫詩 如靈丹一粒 點鐵成金)’라고 말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 빠진 경치도 곧 아름다운 자연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연금술사가 쇠에 한 알의 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때의 ‘靈丹(영단)’은 ‘詩想(시상)’을 의미한다.

道家(도가)에서는『영단 혹은 金丹(금단)을 먹어서 보통 사람의 뼈를 仙骨(선골)로 만드는 것을 ‘換骨(환골)’』이라 하고, 奪胎(탈태)의 ‘胎(태)’도 先人(선인)의 시에 보이는 着想(착상)을 말하며, 시인의 詩想(시상)은 마치 어머니의 胎內(태내)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그 태(胎 : 着想)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詩境(시경)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탈태(奪胎)』라고 말하는 것이다.남송(南宋)의 중 혜홍(惠洪)이 쓴?冷濟夜話(냉제야화)?에 황산곡(黃山谷 : 庭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시의 뜻은 窮盡(궁진)함이 없고 사람의 재주는 限(한)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써 궁진함이 없고, 뜻을 쫓는 것은 도연명이나 두보일지라도 교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 이것을 換骨法(환골법)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규모로 하여 이를 형용하는 것, 이것을 奪胎法(탙태법)이라고 말한다.”

後生可畏(후생가외)後: 뒤 후. 生:날 생. 可:가히 가. 畏:두려울 외.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선인(先人→先生)의 가르침을 배워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히 두렵다는 말.

【출 전】 ?論語(논어)? 「子罕篇(자한편)」

춘추 시대의 대철학자‧사상가인 聖人(성인) 공자는 말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바 없느니라.”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후생가외’는 공자가 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가장 뛰어난 안회(顔回:자는 자연(子淵), B.C. 521~490)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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呵呵大笑(가가대소) 껄걸 크게 웃음

可高可下(가고가하) 어진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다

家給人足(가급인족)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의식(衣食)에 부족함이 없음.

街談巷說(가담항설) 길거리나 동네에 떠도는 이야기 또는 소문

家徒壁立(가도벽립) 집안에 세간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다만 사면에 벽만이 둘려 있을뿐이라는 뜻.집안이 가난함을 비유한말.

可東可西(가동가서) 동쪽이라도 좋고 서쪽이라도 좋다.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다.

苛斂誅求(가렴주구)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것. 폭정으로 인해 살기 어려움을 상징한다

假弄成眞(가롱성진) 거짓된 것을 참된 것처럼 보이는 것. 장난 삼아 한 일이 진짜가 되는 것. “장난이 아이가 된다.”

家無擔石(가무담석) 석(石)은 한 항아리, 담(擔)은 두 항아리라는 뜻, 집에 모아 놓은 재산이 조금도 없음을 말한다.

加捧女(가봉녀) 전부(前夫)의 아들을 거느린 재가녀(再嫁女). 즉, 전 남편의 아들을 데리고 재혼한 여자를 말한다.

家貧思良妻(가빈사양처) 집이 가난해지면 좋은 아내를 생각,. 궁핍한 지경이 되면 훌륭한 관리자가 생각난다는 의미.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감.

刻鵠類鶩(각곡유목) 고니를 조각하다가 이루어내지 못하고 집오리가 되었다. 높은 뜻을 갖고 어떤 일을 성취하려다가 중도에 그쳐 다른 사람의 조소를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刻骨難忘(각골난망) 은혜를 입은 고마움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잊기 어려움.

脚光(각광) 사회의 주목을 그는 일勤勉勵(각근면려) 부지런히 힘써 일함

各得其所(각득기소)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 원래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맞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후에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적절한 배치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各自圖生(각자도생) 제각기 살 길을 모색함

角者無齒(각자무치) 뿔이 있는 자는 이가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모든 복을 겸하지 못함을 말함.

各自爲政(각자위정)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전체와의 조화나 타인과의 협력을 생각하기 어렵다 뜻.

肝膽楚越(간담초월) 간과 담과 같이 가가운데도 초나라와 월나라 만큼이나 사이가 먼 것처럼 보인다는 뜻.

竿頭之勢(간두지세) 대나무 가지 꼭대기에 서 있게 된 형세. 어려움이 극도에 달하여 아주 위태로운 상황을 말한다.

間髮之差(간발지차) 사이가 머리카락 한 올을 넣을 만큼의 틈이라는 뜻. 또는 일이 눈 앞에 닥쳐서 여유가 없는 것. 혹은 재빠르게 일을 실행하거나 다음의 일을 시작하자는 것을 말함.

間世之材(간세지재) 썩 뛰어난 인물

間於齊楚(간어제초) 주(周)나라 말기에 작은 제후국인 勝나라가 좀 큰 축에 드는 齊나라와 楚나라 사이에 위치해서 괴로움을 겪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말. 약자가 강자 사이에 끼어서 괴로움을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渴而穿井(갈이천정) 목이 마를 때에 비로소 우물을 판다. 미리 갖추지 않으면 일이 임박해 덤벼대야 무익하다는 말.

感慨無量(감개무량) 사물에 대한 회포의 느낌이 한이 없음.

敢不生心(감불생심) 힘이 부치어 감히 마음을 먹지 못함

甘呑苦吐(감탄고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개인적인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 믿음이나 의리는 상관하지 않고 필요할 땐 쓰고 그렇지 않을 땐 버리는 태도를 말한다.

甲男乙女(갑남을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 (=善男善女=匹夫匹婦=張三李四=愚夫愚婦樵童汲婦)

康衢煙月(강구연월) 평화스러운 대낮의 길거리 풍경과 저녁 짓는 굴뚝 연기가 달을 향해 피어오르는 풍경. 살기좋고 평화로운 태평시대를 상징한다.

强近之親(강근지친) 도와 줄만한 가까운 친척

綱紀肅正(강기숙정) 법령, 명령, 규칙 풍습 등을 엄격히 지키게 하는 것

强弩之末(강노지말) 센 놋쇠로 쏜 화살도 먼 데까지 다 가면 힘이 다해서 노(魯)나라에서 나는 얇은 명주도 뚫을 수 없다는 문맥에서 유래.(强弩之末, 力不能入魯縞). 강대한 힘일지라도 최후의 쇠약해짐에는 어쩔 수 없다는 뜻.

江流石不轉(강류석부전)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陣圖) 중에 있는 말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剛木水生(강목수생)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 어려운 사람에게 없는 것을 내라고 억지를 부리며 강요하는 것을 비유한다.

江湖煙波(강호연파)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뽀얗게 이는 잔 물결

江湖之樂(강호지락) 자연을 벗삼아 누리는 즐거움

江湖之人(강호지인) 강호에 있는 사람으로 곧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함.

改過遷善(개과천선) 지나간 잘못을 고치고 착하게 됨.

蓋棺事定(개관사정)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결정된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은 뒤에야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

開卷有益(개권유익) 책을 펴서 읽으면 반드시 이로움이 있다. ‘개권(開卷)’은 책을 펴서 읽는 것을 말한다.

改頭換面(개두환면) 일의 근본을 고치지 않고 사람만 갈아서 그대로 시킴.

開門納賊(개문납적) 문을 열고 도적에게 바친다. 스스로 재화(災禍)를 끌어 들이는 것을 말함. (=開門而揖盜)

開門而揖盜(개문이읍도) 문을 열고 절까지 해가며 도둑을 맞이 한다. 스스로 재화(災禍)를 자초하는 행동이나 태도.

改善匡正(개선광정) 좋도록 고치고 바로잡음

蓋世之才(개세지재) 세상을 덮을 만한 재주

改玉改行(개옥개행) 차고 다닐 옥의 종류를 바꾸면 걸음걸이도 바꾸어야 한다. 법을 변경하면 일도 고쳐야 한다뜻.

擧棋不定(거기부정) 바둑을 두는데 포석(布石)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뜻. 사물을 명확한 방침이나 계획을 갖지 않고 대함을 의미한다.

車同軌書同文(거동궤서동문) 각 지방의 수레는 넓이를 같이 하고 글도 같은 글자를 쓴다는 뜻으로, 천하가 통일됨을 이르는 말.

擧世皆濁(거세개탁)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비유.

車水馬龍(거수마룡) 거마의 왕래가 흐르는 물이나 길게 늘어진 용처럼 끊임없이 많은 것을 형용한다. 즉, 행렬이 성대한 모양.

居安思危(거안사위) 평안할 때에도 위험과 곤란이 닥칠 것을 생각하며 잊지말고 미리 대비해야 함을 말한다.

車載斗量(거재두량) 차에 싣고 말에 담을 만큼 많음을 뜻한다.

桀犬吠堯(걸견폐요) 폭군 걸왕(桀王)의 개도 성인 요(堯)임금을 보면 짓는다. 자기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黔驢之技(검려지기) 黔州(검주)는 나귀가 없는 땅이라 어떤 사람이 나귀를 그 곳에 가져다 야산에 풀어놨는데 호랑이가 보고 대단히 무서워했다. 호랑이가 두려워하며 나귀 주위를 이리저리 배회했는데, 나귀가 뒷 발로 호랑이를 찼다. 호랑이는 나귀의 재주가 그것 뿐인 것을 알고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버렸다는 고사. 즉, 별볼일 없는 기량을 뽐내는 것을 말한다.

擊壤歌(격양가) 풍년이 들어 농부가 태평한 세월을 구가하는 노래

隔墻之隣(격장지린) 담 하나를 사이한 이웃집

激濁揚淸(격탁양청) 탁류를 몰아내고 청파를 끌어 들임. 惡을 미워하고 善을 좋아함.

隔靴搔痒(격화소양)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 같이 일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함을 말한다.(=隔靴爬癢)

隔靴爬痒(격화파양)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이 일의 효과를 내긴 했어도 만족감을 얻기 어려움.

牽强附會(견강부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의 주장하는 건에 맞도록 함

見機而作(견기이작) 낌새를 알고 미리 조치함.

見利忘義(견리망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어버림

見利思義(견리사의) 눈 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함

犬馬之誠(견마지성) 임금이나 나라에 정성으로 바치는 정성. 자기의 정성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犬馬之養(견마지양) 개나 말을 기를 때에도 먹이기는 한다. 부모를 모시는 데 먹는 것이나 돌보고 만다면 개와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부모를 소홀히 대접하고 공경하지 않음을 뜻함.

見蚊拔劒(견문발검) 모기에 노하여 칼을 빼어 든다는 말로 쓸 데 없는 일에 잘 노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말이다.

見佛文法(견불문법) 눈으로 대자대비한 부처를 보고 귀로 오묘한 교법을 들음.

堅壁淸野(견벽청야) 견벽은 성벽을 견고히 지키는 것. 청야는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함을 말한다.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수단이다.

見善如渴(견선여갈) 착한 일을 보기를 마치 목마른 것같이 하라

見善從之(견선종지) 착한 일이나 착한 사람을 보면 그것을 따르라.

犬齧枯骨(견설고골) 개가 말라빠진 뼈를 핥음. 아무 맛도 없는 것을 뜻한다.

見性成佛(견성성불) 자기 자신의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犬牙相制(견아상제) 개의 어금니가 서로 맞지 않는 것. 국경선이 볼록 나오고 오목 들어가 서로 견제하려는 형세.

堅如金石(견여금석) 굳기가 금이나 돌 같음

見危授命(견위수명)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침. = 견위치명

見危致命(견위치명) 위태로운 상황을 만나면 목숨을 바친다.

見義不爲無勇也(견의불위무용야) 義를 보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堅忍不拔(견인불발) 굳게 참고 견디며 노발대지 않음을 말한다.

見兎放狗(견토방구) 토끼를 발견한 후에 사냥개를 풀어도 늦지 않는다. 일이 일어남을 기다린 후에 대처해도 좋다.

結者解之(결자해지) 맺은 사람이 그것을 푼다. 일을 시작한 사람이 끝맺는다,혹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해결을 해야 한다는 뜻

兼人之勇(겸인지용) 몇 사람을 능히 당해낼 만한 용기

傾蓋如舊(경개여구) 잠깐 만나도 구면과 같이 친함.

耿耿孤枕(경경고침) 근심에 젖어 있는 외로운 잠자리

經國濟世(경국제세) 나라 일을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함 → ‘경제’의 본말

驚弓之鳥(경궁지조) 화살에 놀란 새. 있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耕當問奴(경당문노) 농사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으로 모르는 일은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

經世濟民(경세제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

輕衣肥馬(경의비마) 경의는 가벼운 비단옷으로 호화스런 차림새를 가리키는 말.

敬而遠之(경이원지)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 = 敬遠

敬人者人恒敬之(경인자인항경지)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늘 그를 공경해준다.

耕者有田(경자유전) 경작하는 사람이 밭을 소유한다.

輕敵必敗(경적필패)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함.

鯨戰蝦死(경전하사) 고래싸움에 새우가 죽는다는 뜻, 강자들 싸움 틈에 끼여 약자가 아무 상관없이 화를 당하는 것.

輕佻浮薄(경조부박) 마음이 침착하지 못하고 행동이 신중하지 못함을 말한다.

罄竹書難(경죽서난) 고대(古代)엔 대나무가 종이 역할을 했다.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대나무 잎을 사용해 그 나쁜 행실을 기록하는데,악행이 너무 많아 다 쓰기 어렵다는 뜻이다.

敬天勤民(경천근민) 하느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함

經天緯地(경천위지)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만한 것.

鏡花水月(경화수월) ①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② 볼 수만 있고 가질 수 없는 것

階高職卑(계고직비) 품계는 높고 벼슬은 낮음

計窮力盡(계궁역진) 꾀와 힘이 다하여 어찌 할 수 없게 됨.

鷄卵有骨(계란유골) 달걀 속에도 뼈가 있다. 뜻밖의 장애물이 생김을 이는 말이다.

鷄鳴狗吠相聞(계명구폐상문) 닭 울음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땅이 활짝 트여있고, 이웃 지방이 잘 보이고 인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뜻.

呱呱之聲(고고지성) 갓난아이가 처음 세상에 날 때 우는 소리. 출생을 뜻함.

股肱之臣(고굉지신) 자신의 팔.다리 같이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신하

高臺廣室(고대광실) 굉장히 크고 좋은 집

孤軍奮鬪(고군분투)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잘 해냄

叩頭謝罪(고두사죄) 머리를 조아려 사죄함

膏粱珍味(고량진미) 살찐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高麗公事三日(고려공사삼일) 옛날 우리나라 사람의 인내성이 부족하고 또한 政令의 변혁이 많음을 지적한 말.

苦輪之海(고륜지해) 고뇌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간 세계

孤立無援(고립무원)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음

枯木死灰(고목사회) 형체는 마른 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아무 생각이 없음. 사람의 無爲無心함을 비유한다.

叩盆之痛(고분지통) 아내가 죽은 설움.

姑息之計(고식지계) 고식(姑息)은 우선 당장에는 탈이 없는 편안함. 즉, 당장의 편안함만을 꾀하는 일시적인 방편.

孤臣寃淚(고신원루)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

苦心慘憺(고심참담) 몹시 애를 쓰며 근심 걱정을 많이 함

孤身隻影(고신척영)외로운 몸과 그몸의 그림자 하나뿐. 붙일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신세라는 뜻이다.

孤往獨驀(고왕독맥) 고독하나 힘차게 나아가는 것

苦肉之計(고육지계)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무릎쓰고 꾸미는 계책 = 苦肉之策(고육지책)

孤掌難鳴(고장난명)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 일하기 어렵다는 말로 쓰인다. 서로 같으니까 싸움이 난다는 말로도 쓰인다.

苦盡甘來(고진감래)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

孤枕單衾(고침단금) 혼자 쓸쓸하게 자는 여자의 이부자리.

高枕短眠(고침단면) = 고침안면(13페이지) = 고침단명(13페이지)

高枕短命(고침단명) = 고침안면(13페이지) = 고침단명

孤枕寒燈(고침한등) 외로이 자는 방안의 쓸쓸한 등잔.

古態依然(고태의연) 옛 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음. = 舊態依然(구태의연)

膏肓之疾(고황지질) 깊이 든 병

曲突徙薪(곡돌사신) 화재(火災)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 즉, 화(禍)를 미연에 방지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困獸猶鬪(곤수유투) 위급한 경우에느 짐승일지라도 적을 향해 싸우려 덤빔. 곧 궁지에 빠지면 약한 자가 도리어 강한 자를 해칠 수 있다는 뜻.

滑稽(골계) 풍부한 지헤로 화술이 뛰어나 우습고 재미나게 말하는 것. 익살

空間表象(공간표상) 시각과 청각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표상

公卿大夫(공경대부) 삼공과 구경과 대부, 곧 벼슬이 높은 사람들.

空谷足音(공곡족음) 빈 골짜기의 발자욱 소리. 몹시 신기한 일, 뜻밖의 기쁨, 반가운 소식 등을 의미한다.

空理空論(공리공론)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이론.

孔孟之道(공맹지도)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仁義의 도덕

公輔之器(공보지기) 재상이 될 만한 인재.

空手來工手去(공수래공수거) 세상에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

空言無施(공언무시) 빈말만 하고 실행이 없는 것.

空前絶後(공전절후) 전에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고 앞으로 절대로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 매우 드문일을 가리킴.

公平無私(공평무사)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심을 버리고 공정하게 사물을 보는 것.

蝌蚪時節(과두시절) 개구리가 올챙이였던 시절이라는 뜻으로, 현재가 과거에 견주어 대단히 발전된 경우에 그 발전괴기 저의 과거를 가리키는 말.

過麥田大醉(과맥전대취) 밀밭을 지나는데 누룩을 생각하고 취하게 됨. 즉,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過聞不入(과문불입) 아는 사람의 문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아니함.

過而不改是謂過矣(과이불개시위과의)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을 잘못’이라 하는 것이다.

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 잘못을 하면 즉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라.

寬弘磊落(관홍뇌락) 마음이 너그럽고 신선하여 작은 일에 거리끼지 아니함.

曠日持久(광일지구) =광일미구(20페이지)

掛冠(괘관) 갓을 벗어 건다. 관직을 버리고 사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矯角殺牛(교각살우)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 작을 일에 힘쓰다가 일을 망친다는 말이다.

驕兵必敗(교병필패) 자기 군대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적에게 위엄을 보이려는 병정은 적의 군대에게 반드시 패한다.

矯枉過正(교왕과정) 교왕은 구부러진 것 바로잡음. 잘못을 바로 고치려다 지나쳐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옴을 의미한다. 곧 어떤 일이 극(極)과 극(極)인 모양를 말함.(=矯枉過直)

敎外別傳(교외별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을 이르는 말 = 以心傳心

狡兎死走狗烹(교토사주구팽)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필요할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학대한다. = 兎死狗烹

敎學相長(교학상장) 가르쳐 주거나 배우거나 다 나의 학업을 증진시킨다는 뜻이다.

救國干城(구국간성)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

狗尾續貂(구미속초) 개 꼬리를 담비 꼬리에 이음. 좋은 것 다음에 나쁜 것을 잇는 것. 쓸만한 인격자가 없어 비열한 사람을 고관(高官)에 등용함을 비유.

口腹之累(구복지루) 먹고 사는데 대한 걱정

口腹之累(구복지루) 먹고 사는데 대한 걱정, 근심

口尙乳臭(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날 만큼 언행이 유치함

鳩首會議(구수회의)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함

九十春光(구십춘광) ① 노인의 마음이 청년같이 젋음을 이름 ② 봄의 석달 구십일 동안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겉으로는 상냥한 체 남을 위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갖고 있음. 줄여서 구밀복검(口蜜腹劍:23페이지)이라 한다.(=笑裏藏刀)

口耳之學(구이지학)입과 귀로만 배움.들은 풍월 격으로 아무런 영구성이 없는 천박한 학문을 말한다.

九仞功虧一簣(구인공휴일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될 곳에서, 손을 빼기 때문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

求田問舍(구전문사) 논밭과 집을 구하여 산다는 뜻으로 자기의 일신상의 이익에만 마음을 쓰는 것.

求全之毁(구전지훼) 몸을 닦고 행실을 온전히 하다가 오히려 남에게서 듣는 비방

九折羊腸(구절양장) 아홉번 꺾이는 양의 창자처럼 험하고 꼬불꼬불한 산길. 길이 매우 험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口禍之門(구화지문)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다.

救火投薪(구화투신) 불을 끈답시고 땔나무를 던진다. 폐해(弊害)를 없애려고 한 행위가 폐해를 조장하게 되는 것.

國土無雙(국토무쌍) =국사무쌍(25페이지)

軍令泰山(군령태산) 군대의 명령은 태산같이 무거움

群盲評象(군맹평상)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고 각자 평을 한다. 자기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함을 말함=군맹무상

君爲臣綱(군위신강)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君子務本(군자무본)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君子之交淡若水(군자지교담약수)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 즉, 군자의 사귐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담박하기 때문에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물이 없으면 금방 갈증을 느끼므로 계속 찾게 된다.)

君子豹變(군자표변) 호랑이 털이 가을이 되면 새로 나와 훨씬 아름답게 되는데, 훌륭한 사람은 잘못을 깨달으면 곧 고치는 것이 표범의 가죽과 같다는 비유로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태도나 생각을 바꾸는 사람을 말하기도 함.

屈而不申(굴이불신) 굽히고는 펴지 아니함

窮狗莫追(궁구막추) 쫓기던 개가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돌변할 지 모르니 쫓지 말라.

窮年累世(궁년누세) 궁년은 자기의 한평생, 누세는 자손 대대, 즉 본인의 한 평생과 자손 대대란 말.

窮鼠囓猫(궁서설묘) 쫓기는 쥐도 너무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

窮餘之策(궁여지책) 막다른 골목에서 그 국면을 타개하려고 생각다 못해 짜낸 꾀

權不十年(권불십년)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10년을 지속하기 어렵다.

貴鵠賤鷄(귀곡천계) 먼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人之常情임을 말함.

歸馬放牛(귀마방우) 전쟁에 징발해 쓰던 마소를 놓아 보낸다는 뜻으로, 다시는 전쟁을 안한다는 말.

龜毛免角(귀모토각)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라는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

龜背刮毛(귀배괄모) 없는거북 등의 털을 벗겨 뜯는다. 없는 것을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다.

橘化爲枳(귤화위지) 귤이 화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隙駒光陰(극구광음) 흘러가는 세월의 빠름은 달려가는 말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인생의 덧없고 짧음을 비유.

僅僅姉姉(근근자자)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

近墨者黑(근묵자흑)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사귀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말

勤將補拙(근장보졸) 서투른 것을 보충하는 데에는 부지런함이 으뜸임을 뜻한다.

近朱者赤 近墨者黑(근주자적 근묵자흑) 주에 가까이 하면 붉어지고 먹에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

槿花一日自爲榮(근화일일자위영)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무궁화 같이 사람의 영화는 덧없다.

今古一般(금고일반) 지금이나 옛날이 같다

金蘭之契(금란지계) 친구 사이의 우의가 두터움 = 金蘭之交(29페이지)

金石牢約(금석뇌약) 금과 돌같은 굳은 언약. 서로 언약함이 매우 굳음을 비유.

金石盟約(금석맹약) 금과 돌같이 굳게 맹세해 맺은 약속

今昔之感(금석지감) 지금을 옛적과 비교함에 변함이 심하여 저절로 일어나는 느낌

金石之交(금석지교) 금서과 같이 굳고 변함없는 교분

金舌蔽口(금설폐구) 금으로 혀를 만들어 입을 가린다.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아니함.

金聲玉振(금성옥진) 金은 鍾, 聲은 宣, 玉은 磬, 振은 收를 의미. 팔음을 합주할 때 먼저 종을 쳐서 그 소리를 베풀고 마지막에 경을 쳐서 그 운을 거두어 주악을 끝냄. 轉하여 智德이 갖추어 있음을 비유한다.

金城鐵壁(금성철벽) 방비가 굳건한 성

琴瑟之樂(금슬지락) 금과 슬의 즐거움.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을 일컫는다.

金烏玉兎(금오옥토) 일월(日月)을 말한다. 금오는 태양, 옥토는 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錦衣玉食(금의옥식) 좋은 옷과 좋은 음식.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컬음.

金枝玉葉(금지옥엽) 임금의 자손이나 집안 또는 귀여운 자손을 소중하게 일컫는 말

汲水功德(급수공덕)불교용어.물을 떠 남에게 주는 공덕.지극히 쉽고도 대단치 않으나,남을 위하여 일하는것은 선행이라는 의미.

給水功德(급수공덕)불교용어.물을 떠 남에게 주는 공덕.지극히 쉽고도 대단치 않으나,남을 위하여 일하는것은 선행이라는 의미.

箕裘之業(기구지업) 선대(先代)의 업(業)을 완전히 이어받음을 뜻한다.

其利斷金(기리단금) 절친한 친구사이

麒麟兒(기린아) 기린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재주와 지헤가 많은 아이를 귀엽게 가리키는 말.

起死回生(기사회생)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되살린다. 또는 위기에 처한 것을 구원하여 사태를 바로 잡는다는 뜻.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물시어인)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라.

起承轉結(기승전결)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글로 쓸 때, ‘기’에서 말머리를 일으키고, ‘승’에서 앞에 것을 받아서 풀이하고, ‘전’에서 뜻을 한 번 변화시켜, ‘결’에서 끝맺음.

旣張之舞(기장지무) 이미 벌린 춤이란 뜻으로 이미 시작한 일이므로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는 말.

旣借堂又借房(기차당우차방) 대청 빌면 안방 빌자 한다. 체면없이 이것저것 요구함.

其臭如蘭(기취여란) 난 향기 처럼 그윽하고도 오래가는 절친한 친구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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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마음으로 귀의하는 것

落膽喪魂(낙담상혼) 쓸개가 떨어지고 혼을 잃음. 몹시 놀라 정신이 없음을 일컫는다.

樂而不淫(낙이불음)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뜻함.

樂而思蜀(낙이사촉) 타향(他鄕)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落穽下石(낙정하석) 함정에 빠진 데다가 돌까지 던진다. 남의 환란(患亂)에 다시 위해(危害)를 준다는 말이다.

落花流水(낙화유수)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남녀간의 그리운 심정을 뜻하기도 한다.

爛漫相議(난만상의) 오래 두고 여러 번 충분히 논의함.

難事必作易(난사필작이)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일어난다. 쉬운 일을 신중히 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

爛商公論(난상공론) 여러 사람들이 잘 의논 함

難上之木不可仰(난상지목불가앙)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

爛商討議(난상토의) 낱낱이 들어 잘 토의함

亂臣賊子(난신적자) 임금을 죽이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하는 자식. 극악무도한 자를 말한다.

暖衣飽食(난의포식) 따뜻한 옷을 입고 음식을 배불리 먹어 衣食에 부자유함이 없음.

難中之難(난중지난)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움.

南郭濫吹(남곽남취) 학문과 기예에 전문적 지식과 체계나 조리도 없이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南頓北漸(남돈북점) 당나라 때에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신수(神秀)의 교가 소칭 북종(北宗)이, 광주를 중심으로 혜능(慧能)의 교가 속칭 남종(南宗)이 번성했다. 북종은 漸悟(점오-점차로 깨달음)를, 남종은 頓悟(돈오-별안간 깨달음)를 주장하였기에 ‘남돈북점’이라한다.

男負女戴(남부여대) 남자는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떠돌아 사는 것.

南船北馬(남선북마) 남쪽은 배로 북쪽은 말로.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님

男兒須讀 五車書(남아수독 오거서)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정도의 많은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

濫竽(남우) 남(濫)은 실제로는 능력이 없으면서 함부로 한다는 뜻. 우(竽)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 즉, ‘우(竽)를 함부로 분다’는 뜻이다.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

狼子野心(낭자야심) 이리 새기는 아무리 길들여 기르려 해도 야수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성질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끝내는 배반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囊中取物(낭중취물)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같이 매우 손쉬운 일을 일컫는다.

內省不疚(내성불구) 마음 속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음. 즉 마음이 결백함을 뜻한다.

內潤外朗(내윤외랑) 옥의 광택이 안에 함축된 것을 내윤(內潤)이라 하고, 밖으로 나타난 것을 외랑(外朗)이라 함. 재주와 덕망을 겸비한 것을 비유한다.

內助之功(내조지공) 안에서 돕는 공. 아내가 집안 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 일을 말한다.

內淸外濁(내청외탁)마음은 깨끗하나 행동은 흐린 것처럼 함.군자(君子)가 난세(亂世)를 당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처세술.

怒甲移乙(노갑이을) 어떤 사람에게서 당한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 하다.

老驥伏櫪(노기복력) 나이 많은 천리마가 헛간 널빤지 위에 잠을 자고 있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이 나이 먹어도 아직 세상에 쓰이지 않고 있음을 비유함.

老當益壯(노당익장) 사람은 늙을수록 더욱 기운을 내어야 하고 뜻을 굳게 해야 한다. =(老益壯)

老萊之戱(노래지희) 주(周)나라의 노래자(老萊子)가 칠십의 나이에 무늬 있는 옷을 입고 동자의 모습으로 재롱을 부려 부모에게 자식의 늙음을 잊게 해드린 일.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은 똑같으니 변함없이 효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路柳墻花(노류장화)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 기생(妓生)을 의미한다.

駑馬十駕(노마십가) 둔한 말도 열 대의 수레를 끌 수 있음.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하고 태만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한다.

老馬之智(노마지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길을 잃고 헤맬 때, 관중(管仲)이 늙은 말을 풀어 놓고 그 뒤를 따라가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경험이 풍부하고 숙달된 지혜. 쓸모없는 사람도 때로는 유용함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盧生之夢(노생지몽) 중국 당나라 때 놋애이 한단으로 가는 길에 주막에서 도사 영옹을 만나 그 베개를 빌어 베고 자면서 일생의 영화를 꿈꾸었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

怒蠅拔劍(노승발검) 파리 때문에 성질이 난다고 칼을 뽑아 듦. 작은 일을 갖고 수선스럽게 화내는 것을 비유한다.

鹿死不擇音(녹사불택음) 사슴은 소리를 아름답게 내지만, 죽을 때를 당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가려서 낼 여유가 없다. 사람도 위급한 지경을 당했을 때는 나쁜 소리 즉, 좋지 않은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綠陰芳草 勝花時(녹음방초 승화시)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 녹음이 봄의 꽃보다 좋은 시절.

綠衣紅裳(녹의홍상) 연두 저고리에 다홍 치마.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아가씨의 복장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이다.

論點逸脫(논점일탈) 논설의 요지를 벗어남

弄假成眞(농가성진) 장난삼아 한 것이 참으로 한 것같이 되는 것.

弄瓦之慶(농와지경) 질그릇을 갖고 노는 경사. 딸을 낳은 기쁨을 말한다.

弄璋之慶(농장지경) 장(璋)으로 만든 구기를 갖고 노는 경사. 아들을 낳은 기쁨을 말한다.

籠鳥戀雲(농조연운) 새장 속에 있는 새는 구름을 그리워 한다. 곧 몸이 속박 당한 사람은 자유를 갈망한다.

雷逢電別(뇌봉전별) 갑자기 잠깐 만났다가 이내 곧 이별한다는 것.

累卵之勢(누란지세) 쌓아올린 달걀이 금방 무너질 것 같이 몹시 위태로운 형세.(=累卵之危:누란지위)

訥言敏行(눌언민행) 말은 둔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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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聞博識(다문박식) 많이 듣고 넓게 공부함. 견문이 넓고 학식이 많음을 말한다.

斷金之交(단금지교) 둘이 마음을 합하면 쇠라도 자를 수 있는 사이. 사귀는 정이 매우 깊은 벗을 일컫는 말이다.

斷機之交(단기지교) 학업을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을 짜던 베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 보람이 없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뜻. = 孟母斷機 = 斷機之戒

斷末魔(단말마) 불교용어. 임종시를 말함.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숨이 끊어질 때 내뱉는 짧은 비명

丹脣皓齒(단순호치) 붉은 입술과 새하얀 이, 즉 미인의 얼굴을 형용하는 말이다.

簞食豆羹(단사두갱) 단(簞)은 밥을 담는 그릇. 두(豆)는 국을 담는 완(椀) 같은 것으로 음식의 분량이 적은 것.

簞食瓢飮(단사표음) 대그릇 밤과 표주박 물, 즉 변변치 못한 살림을 가리키는 뜻으로 청빈한 생활을 말함.(=一簞食一瓢飮)

斷長補短(단장보단) 긴 곳을 잘라 짧은 곳을 메꾸어 들쭉날쭉한 것을 곧게 한다.

膽大心小(담대심소)담대하면서도 치밀한 주의력을 가져야함. 문장을 짓는데 경계하는 말로도 쓰인다.

談笑自若(담소자약) 위험이나 곤란에 직면해 걱정과 근심이 있을 때라도 변함없이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가짐.(=泰然自若)

堂狗風月(당구풍월) 서당개는 풍월을 읊는다. 무식한 사람이라도 유식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다소 유식해진다는 뜻

黨同伐異(당동벌이) 도리와는 관계 없이 자기와 같은 패의 사람은 덮어놓고 돕고 자기와 다른 패의 사람은 물리침

螳螂在後(당랑재후) 사마귀가 참새가 뒤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매미 잡을 욕심에 구멍으로 들어간다는 말. 한갖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고, 해를 입을 것을 생각지 않으면 災禍를 당하게 됨을 비유한 것이다.

當來之事(당래지사) 앞으로 마땅히 닥쳐올 일.

對客初人事(대객초인사) 손님에게 먼저 담배를 권하는 것이 재래 우리나라의 습관으로 먼저 담배를 권함.

大同團結(대동단결) 나위었던 단체나 당파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립됐던 자신들의 이익을 버리고 뭉치어 한 덩어리가 되는 것.

戴盆望天(대분망천)머리에 동이를 이면 하늘을 볼 수 없는데 보려고 한다. 즉, 두 가지 일을 겸행하고자 하나 할 수 없음을 뜻.

大言壯語(대언장어) 제 주제에 당치 아니한 말을 희덥게 지껄임. 또는 그러한 말.

大材小用(대재소용) 큰 재목(材木)이 작게 쓰이고 있다.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됨을 뜻한다. 역설적으로 큰 재목은 큰 일에 쓰여야 한다는 말로도 쓰인다.

德無常師(덕무상사) 덕(德)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

德本財末(덕본재말)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德)이 뿌리가 되고 재물(財物)은 사소한 부분이다.

德不孤必有隣(덕불고필유린) 덕스러운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말로 형상화된 도(可道)는 늘 그러한 원래의 도(常道)가 아니다.

徒勞無益(도로무익) 헛되이 애만 쓰고 이로움이 없음

桃李滿天下(도리만천하) 복숭아와 오얏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수한 문하생(門下生)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아 따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후배를 교육하거나 자식을 가르치는 의미.

桃李不言下自成蹊(도리불언하자성혜) 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따먹으러 오게 돼 자연히 길이 생긴다. 덕행이 있는 사람은 무언 중에 남을 심복시킴을 비유한 말이다. 훌륭한 스승 아래로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모이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道傍苦李(도방고리)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길가에 서 있는 오얏나무. 사람에게 버림 받는 것을 비유한다.

道不拾遺(도불습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는다.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하고 풍부한 세상을 형용屠所之羊(도소지양)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양, 즉 죽으러 갈 때.

盜憎主人(도증주인)도둑은 주인이 밉게 마련이다.즉 자기와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감정이다.

到處宣化堂(도처선화당) 가는 곳마다 대접을 잘 받음을 이르는 말이다. 宣化堂은 관찰사가 사무를 보는 政堂.

倒行逆施(도행역시)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함. 곧 도리(道理)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뜻한다.

獨木不成林(독목불성림) 홀로 선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 여럿이 힘을 합쳐야 일이 된다는 의미.

讀書亡羊(독서망양) 책을 읽는라 양을 잃어버렸다.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다른 일에 정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 (?莊子?, 「騈拇篇」)

讀書三到(독서삼도) 남송 때 주희가 한 말로 책을 읽을 때에는 1, 口到(구도)로서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을 것, 2, 眼到(안도)로서 눈으로써 읽을 것. 3, 心到(심도)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읽는다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讀書三餘(독서삼여) 책 읽는 좋은 시기에 대해서 한 말로서 1, 일년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겨울철에. 2, 하루에 마직막으로 남은 밤에. 3, 밖에서 일할 수 없는 비가 오는 날을 말한 것으로 이처럼 남은 시간을 이용하면 독서나 공부가 달 되는 것이라 하였다.

讀書常友(독서상우) 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다는 뜻.

讀書百遍 義自見(독서백편 의자현) 책을 널리 읽으면 뜻을 저절로 알 수 있다.

同價紅裳(동가홍상)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기왕이면 좋은 것을 택한다는 의미.

同工異曲(동공이곡) 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똑같다는 뜻으로, 경멸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同根連枝(동근연지) 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 즉,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일컫는 말이다.

同氣相求(동기상구) 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

洞洞燭燭(동동촉촉) 매우 공경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운 모양.

棟樑之材(동량지재) 기둥이나 들보가 될만한 훌륭한 인재,

同文同軌(동문동궤)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뜻함. 同文은 문자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고, 同軌는 법을 같게 한다.

冬扇夏爐(동선하로) 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을 말한다.

同性異俗(동성이속) 사람의 성질은 본래는 같으나 습관에 따라 변함을 뜻함.

同聲相應(동성상응)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여 어울린다. 의견을 같이 하면 자연히 서로 합치게 된다는 의미.

同心之言(동심지언) 절친한 친구사이를 이르는 말

同而不和(동이불화) 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내심은 그렇지 않음.

同舟相救(동주상구) 사람은 알건 모르건 친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이 위급한 경우를 함께 만나면 서로 도와주게 된다頭角(두각) 머리끝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학식이나 재능이 특히 뛰어난다는 말.

斗南一人(두남일인) 두남은 북두칠성의 남쪽. 즉, 온 천하에서 제일 가는 현재(賢才)를 의미한다.

杜門不出(두문불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입을 하지 않음

斗筲之人(두소지인)한말 두되 들이 대그릇 같은사람.즉,사람의 식견이나 그릇이 좁은것을 비유한다.

杜漸防萌(두점방맹) 애시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점(漸)은 사물의 처음. 맹(萌)은 싹.곧 좋지 못한 일의 조짐이 보였을때 즉시 그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더 큰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

杜撰(두찬) 저술(著述)한 것에 틀린 곳이 많아서 믿을 수 없는 것을 일컫는다.

得魚忘筌(득어망전)물고기를 잡고 통발을 잊어먹는다.목적을 달성하고 나면,그 적을 위하여 사용한 사물을 잊어버린다는 비유.

得一忘十(득일망십) 한 가지를 얻고 열 가지를 잃어버림. 기억력이 좋지 못함을 뜻한다.

登高自卑(등고자비)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는 낮은 곳부터 밟아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登樓去梯(등루거제) 樓上에 오르게 하여 놓고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운다. 즉, 처음엔 남을 기쁘게 해놓고 뒤에 괴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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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脚(마각) 말의 다리라는 뜻으로 말의 가면으로 말의 역하을 하다가 참 모습이 나타나서 말의 발이 아니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마각을 드러낸다는 말은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이 부지 중에 드러낸다는 말이다.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서 침을 만든다.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만 있으면 성공하고야 만다는 뜻이다. = 마부작침

麻中之蓬(마중지봉) 삼 가운데 자라는 쑥. 좋은 환경의 감화를 받아 자연히 품행이 바르고 곧게 된다는 비유.

磨鐵杵(마철저) (磨鐵杵欲作針) 쇠로 만든 다듬이 방망이를 갈아서 침을 만들려 한다. 노력하면 아무리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음을 뜻한다.

馬行處牛亦去(마행처우역거) 말 가는 데 소도 간다.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뜻.

馬革裹屍(마혁과시)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말한다.

萬綠叢中紅一點(만록총중홍일점) 푸른 물 가운데 한떨기 꽃이 피어 있음. 좌중(座中)에 한 사람의 예기(藝妓)가 있음. 많은 남자 가운데 오직 한 명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 紅一點

萬乘之國(만승지국) 乘은 군사용 수레. 일만 대의 乘을 낼 수 있는 나라. 큰 나라의 제후 혹은 천자를 뜻한다.

晩食當肉(만식당육) 때늦게 먹으면 고기맛 같다. 배고플 때는 무엇을 먹든지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萬彙群象(만휘군상) 우주의 온갖 수많은 형상

秣馬利兵(말마이병) 말에 먹이를 먹이고 칼을 갈아 출병 준비를 한다.

罔極之恩(망극지은) 다함이 없는 임금이나 부모의 큰 은혜

忘年之交(망년지교) 나이의 차이를 잊고 사귀는 친한 벗. 늙으막에 얻은 어린 친구와의 사귐을 일컫기도 한다.

網漏呑舟(망루탄주) 그물이 세면 배도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다. 법령이 관대하여 큰 죄를 짓고도 피할 수 있게 됨

望梅解渴(망매해갈) 조조(曹操)가 목이 마른 병사에게 살구 이야기를 하여 자연히 입안에 침이 생겨서 목마름을 풀게 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

罔赦之罪(망사지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

亡羊補牢(망양보뢰)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 이미 때는 늦었음을 비유.

亡羊之歎(망양지탄) 학문의 갈래가 너무 많음을 갈래길이 너무 많아 쫓던 양을 잃은 것에 비유한 말

望雲之情(망운지정) 구름을 바라보는 심정. 자식이 타향에서 고향의 부모를 그리는 정을 말한다.

芒刺在背(망자재배) 망자(芒刺)는 가시.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 즉, 등 뒤에 자기가 꺼리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妄自尊大(망자존대) 아주 건방지게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어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芒知所措(망지소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함

盲者直門(맹자직문) 장님이 문을 바로 들어갔다. 우연히 요행수로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盲者正門)

面從腹背(면종복배)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음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말로 형상화된 이름은 늘 그러한 실제의 이름이 아니다.

命在頃刻(명재경각) 곧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름

明珠闇投(명주암투) 밤에 빛나는 구슬인 야광주(夜光珠)를 어두운 밤중에 집어 던진다. 지극히 귀한 보물도 남에게 예(禮)를 갖추어서 주지 않으면 도리어 원한을 사게 됨을 뜻한다. 明珠暗投로도 쓴다.

明哲保身(명철보신) 사리에 통하여 무리들에 앞서 알고, 사리에 따라 나옴과 물러남을 어긋나지 않게 함. 요령있게 처세를 잘하는 것.

毛遂自薦(모수자천)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치자 조나라는 초나라와 반진(反秦) 연합군을 결성하고자 했다. 좋은 수가 없던 상황에서 모수(毛遂)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평원군(平原君)을 따라 초(楚)나라에 가 망설이는 초왕을 칼자루로 위협하고 논리적으로 구슬리어 합종(合從)의 협약을 맺게 한 고사.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유래된 고사이기도 하다.

矛盾撞着(모순당착)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서 모순됨=矛盾

目食耳視(목식이시) 음식물을 보기 좋게 차려서 맛은 상관없이 눈에만 들게 하고, 옷을 맞고 안맞고는 신경쓰지 않고 보기 좋게 입어서 칭찬하는 말을 들어 귀만 만족하려 한다. 겉치레만을 취하여 생활이 헛된 사치에 흐름을 한탄하는 말이다.

蒙塵(몽진)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을 말한다.

猫頭縣鈴(묘두현령)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뜻으로 실행할 수 없는 헛 이론을 일컬는다.

描虎類犬(묘호류견) 호랑이를 그리려다 실패하여 개와 비슷하게 되었다. 높은 뜻을 갖고 어떤 일을 성취하려다가 중도에 그쳐 다른 사람의 조소를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毋望之福(무망지복)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들어오게 되는 행복.

無不干涉(무불간섭)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함부로 남의 일에 간섭함을 말한다.

無不通知(무불통지)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것이 없음

無所不爲(무소불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

無爲徒食(무위도식)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놀기만 함

無爲而民自化(무위이민자화) 위정자(爲政者)가 덕(德)을 지니고 있다면, 함이 없어도 백성들이 스스로 그 덕에 교화된다.

無爲而治(무위이치) 인위적으로 뭔가를 할려고 꾀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잘 다스림.

無依無托(무의무탁) 의지하고 의탁할 곳이 없음

無足之言飛于千里(무족지언비우천리)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無偏無黨(무편무당)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정(中正), 공평(公平)함.

墨守(묵수) 묵자가 끝까지 성을 지킨다는 말로 자기의 의견 또는 소신을 굽힘이 없이 끝까지 지키는 것 = 墨翟之守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 문전성시(門前成市)와는 반대로,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말한다. = 門設雀羅

勿輕小事(물경소사) 조그만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

刎頸之交(문경지교)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변치 않고 사귀는 친한 사이 → 67쪽

物色(물색) 원래 제물로 바치는 때에는 소나 양의 털 색을 보고 결정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많은 것 중에서 색채 등을 보고 원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

物心一如(물심일여) 마음과 형체가 구분됨이 없이 하나로 일치한 상태

物外閒人(물외한인)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

迷道不遠(미도불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길을 헤맨다. 멀지 않다는 뜻. 즉, 곧 본 길을 찾게 됨을 의미.

未然之前(미연지전) 아직 그렇게 되지 아니함

密雲不雨(밀운불우) 짙은 구름이 끼어 있으나 비가 오지 않음. 어떤 일의 징조만 있고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비유. 위에서 내리는 은택이 아래가지 고루 내려지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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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而不精(박이부정) 넓게 알고만 있지 자세하거나 정밀하지는 못함.

璞玉渾金(박옥혼금) 박옥(璞玉)은 갈고 닦지 않은 옥, 혼금(渾金)은 아직 제련하지 않은 금. 곧 검소하고 질박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盤溪曲徑(반계곡경) 소반같이 좁은 시내와 꾸불꾸불한 지름길. 정당한 방법을 취하지 않고 옳지 않은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한다는 뜻이다.

半面之分(반면지분) 얼굴을 반만 아는 사이. 서로 알아는 보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

半面之識(반면지식) 얼굴을 반만 아는 사이. 서로 알아는 보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

反目嫉視(반목질시) 서로 미워하며 눈을 흘기는 것.

班門弄斧(반문농부) 자기의 실력을 생각지 않고 당치않게 덤비는 것을 말한다.

斑衣之戱(반의지희) 지극한 효성

反哺之孝(반포지효)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그 어버이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일.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함을 비유

發憤忘食(발분망식) 한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 밥생각도 잊고 바삐 돌아다님.

拔山蓋世(발산개세) 항우(項羽)의 힘을 비유. 산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뒤엎을만한 힘과 기운. (力拔山氣蓋勢)

發揚狀態(발양상태) 의식은 대체로 혼탁되어 있지 않으나 고성을 내거나 울거나 난폭하게 굴거나 자기의 주위에 대하여 분별없이 행동하는 형태

勃然變色(발연변색) 왈칵 성을 내어 안색이 변함.

拔萃抄錄(발췌초록) 여럿 속에서 뛰어난 것을 뽑아 간단히 적어둔 것

跋扈(발호) 제 마음대로 날뛰며 행동하는 것.

跋扈將軍(발호장군) 폭풍을 의미한다.

房外犯色(방외범색) 자기의 처 이외의 여자와 정을 나누는 것.

方長不折(방장부절) 한창 자라는 나무는 꺾지 않는다. 앞길이 창창한 사람을 박해하지 말라, 혹은 잘 되어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

蚌鷸之爭(방휼지쟁)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고 싸움. 서로 지지않으려고 싸우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어부지리와 같은 고사에서 나온 성어이다.

百家爭鳴(백가쟁명)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

百代之親(백대지친) 먼 조상 때부터 친하에 지내온 친분.

百年偕老(백년해로) 백년 동안 함께 늙음. 부부가 화락하여 함께 늙는 것을 말한다.

白頭如新(백두여신) 머리가 희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사귀어도 서로 상대방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 사귄 벗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伯樂一顧(백락일고) 아무도 쉽게 천리마임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백락(伯樂)은 천리마(千里馬)를 한 눈에 알아보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 남이 자기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함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百發百中(백발백중)백발의 화살이 백번 다 명중한다는 뜻,모든 계획이 예정대로 다적중한다는 뜻.

百世之師(백세지사) 백세 후에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만큼 훌륭한 사람을 일컬음.

白首北面(백수북면) 재주와 덕이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스승 앞에서 북향(北向)하고 앉아 가르침을 바란다.

白衣宰相(백의재상) 유생으로 있던 사람이 단번에 재상의 벼슬에 오른 사람.

百折不撓(백절불요) 백번 꺽어도 굽히지 않음 = 百折不屈

伯仲之間(백중지간) 백중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로 형제는 비슷하고 닮았기에 비교 평가하여 우열을 각리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슷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를 가리킴.

白地曖昧(백지애매) 까닭없이 죄를 받아 재앙을 입음.

百八煩惱(백팔번뇌) 불교용어로 인간이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108가지의 번뇌(煩惱)를 말한다.

百花爛漫(백화난만)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짐

百花齊放(백화제방) 많은 꽃이 일제히 핀다는 뜻으로 갖가지의 예술이나 학문이 함께 활발하는 것을 비유함.

繁文縟禮(번문욕례) 번거롭고 까닭이 맣으며 형식에 치우친 예문

伐齊爲名(벌제위명) 실속은 없는 데도 명분만을 위해 제(齊)나라를 친다. 뭔가를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을 일컬는 말로 쓰인다.

法三章(법삼장)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통일을 한 후 제정한 삼장(三章)의 법률. 진(秦)나라의 가혹했던 법률을 모두 폐지해버리고, 살인, 상해, 절도에 대해서만 지극히 간략하게 삼장으로 제정하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病入膏肓(병입고황) 병이 고황에까지 들었다. 고황(膏肓)은 심장과 격막 사이의 부분. 신체 부위 중에서 고황에 병이 들면 침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가망이 없었다 해서, 병이 위중하여 치료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고치기 어려운 오류(誤謬)에 비유하기도 한다.

報怨以德(보원이덕) 원수 갚기를 덕으로써 하라. (老子 「道德經」)

報以國士(보이국사) 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의 은혜에 감동하는 말로 쓰인다.

腹高如山(복고여산) 배가 산같이 높다는 뜻으로 임심한 여자의 부른 배를 형용하거나 혹은 돈 많은 부자의 교만스러움을 형용하기도 한다.

福過災生(복과재생) 복이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재앙이 생긴다는 말.

福在積善禍在積惡(복재적선화재적악) 복(福)의 근원은 선(善)을 쌓는 데 있고, 화(禍)의 근원은 악을 쌓는 데 있다.

覆車之戒(복차지계) 먼저 간 수레가 엎어졌음을 보고경계함. 앞사람의 실패를 뒷사람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本末顚倒(본말전도) 일의 원줄기를 잊고 사소한 부분에만 사로잡힘

夫爲婦綱(부위부강)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父爲子綱(부위자강)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것이 근본이다.

釜中生魚(부중생어)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란 뜻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할 일을 비유함

釜中之魚(부중지어) 장차 삶아질지도 모르고 솥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夫唱婦隨(부창부수) 남편이 창을 하면 아내도 따라 하는 것이 부부 화합의 도리라는 것. 그 남편에 그 부인.

負荊請罪(부형청죄) 형(荊)은 가시나무.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 주기를 바란다. 즉, 사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附和雷同(부화뇌동) 그렇다고 여기고 따라가는 것이 뇌동과 같다. 뇌동(雷同)은 우뢰가 울리면 만물이 이에 응하여 울리는 것을 말한다. 그처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서 경솔하게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附和共鳴)

北門之歎(북문지탄) 북문에서 한탄함. 북문(北門)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즉, 벼슬 자리에 나가기는 하였으나 뜻대로 성공하지 못하여 살림이 곤궁함을 한탄하는 말이다.

北山之感(북산지감) 북산에서 느끼는 감회. 북산(北山)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나라 일에 힘쓰느라고 부모봉양을 제대로 못한 것을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北窓三友(북창삼우) 거문고와 시와 술을 일컬음

不立文字(불립문자) 글이나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함 = 以心傳心

不眠不休(불면불휴)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애써 일함의 뜻

不問可知(불문가지)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음

不伐不德(불벌부덕) 자기의 공적을 뽐내지 않음

不撓不屈(불요불굴) 곤란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음. (不搖不屈로도 쓴다.)

不怨天不尤人(불원천불우인)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知命者不怨天,知己者不怨人)

不肖=불초지부

不肖之父(불초지부) 선대(先代)의 덕망을 닮지 못한 어리석은 아버지. (불초(不肖)는 닮지 않았다는 뜻. 아버지의 덕망을 닮지 않아 어리석다는 뜻.)

不恥下問(불치하문) 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음

不偏不黨(불편부당)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중정(中正), 공평(公平)함. 늘 그러한 자연의 길(道)의 본질.

朋黨(붕당) 뜻을 같이한 사람끼리 모인 단체

朋友有信(붕우유신)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比肩繼踵(비견계종)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 뒤꿈치를 이음.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잇달아 속출함을 말한다.여러 사람을 줄지어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非禮勿動(비례물동) 예(禮)가 아니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말아라

非禮勿視(비례물시)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아라

非禮勿言(비례물언)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아라

非禮勿聽(비례물청) 예(禮)가 아니면 듣지도 말아라

非夢似夢(비몽사몽) 꿈인지 생시인지 알수 없는 어렴풋함

悲憤慷慨(비분강개)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음

比比有之(비비유지) 드물지 않음

非一非再(비일비재) 한두 번이 아님

轡長則踏(비장즉답) 고삐가 길면 밟힌다는 뜻으로 나쁜 짓을 계속하면 끝내 들키고 만다는 말.

悲風慘雨(비풍참우) 인생이나 생활이 비참함을 이르는 말.

鼻祖(비조) 시조를 이르는 말

牝鷄之晨(빈계지신) 암탉이 새벽을 알리느라고 운다.아내가 남편의 권리를 잡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貧者一燈(빈자일등)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라는 말로 부귀한 사람들의 호화로운 등불보다 성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 정성의 소중함을 뜻한다.

氷姿玉質(빙자옥질)얼음같이 투명한 모습과 옥과 같이 뛰어난 바탕. 용모와 재주가 모두 뛰어남을 비유하는 말이다.(=仙姿玉質)

氷淸玉潤(빙청옥윤) 얼음처럼 맑고 구슬처럼 윤이 난다. 장인과 사위의 인물이 다 같이 뛰어남을 말한다.

氷炭之間(빙탄지간) 얼음과 숯의 사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犬猿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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徙家忘妻(사가망처) 이사할 때 자기의 처(妻)를 깜빡잊고 데려가지 않음. 잘 잊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四顧無親(사고무친) 사방을 둘러봐도 가족이나 친척이 없다. 친척이 없어 의지할 곳 없이 외로움 (-四顧無人)

詞俚不載(사리부재) 속된 거리의 노래는 책에 싣지 않는 것.

四面春風(사면춘풍) 사방으로 봄바람이 분다. 항상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것을 말한다.

四塞之地(사색지지) 사방의 지세가 험하여 쉬이 넘보지 못할 땅.

私淑(사숙) 직접 가르침은 안 받았으나 스스로 그 살마의 덕을 사모하고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

辭讓之心禮之端也(사양지심예지단야) 겸허하게 양보하는 마음은 예(禮)의 근본이다.

思而不學則殆(사이불사즉태) 생각만 하고 더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태롭게 된다.

死而後已(사이후이)어떤 사업을 함에 있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만둔다.그만큼 뜻이 굳음을말한다.

射人先射馬(사인선사마)상대방을 쓰러뜨려 굴복시키려면 그사람이 의지하고있는것을 먼저쓰러뜨려라.

獅子吼(사자후) 사자의 부르짖음이란 말로써 웅변을 토한다는 의미.

四鳥別(사조별)모자(母子)가 서로 이별함.네 마리의 새끼 새가 그 어미를 떠난다는 고사에서 비롯됨.

社稷之臣(사직지신) 나라의 안위를 맡는 중신으로 국가의 주석이 되는 신하.

四海兄弟(사해형제)사해는 온 천하는 가리키는 것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

死灰復燃(사회부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음, 혹은 곤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죽은 뒤의 약. 시기를 놓친 것을 의미한다.(=死後藥方文)

山紫水明(산자수명)산은 자주빛을 비추고 물은 하염없이 맑다. 산수의 경치가 좋음을 밀컫는 말이다.

山戰水戰(산전수전) 산에서의 전투와 물에서의 전투를 다 겪음. 세상 일에 경험이 많다는 뜻.

三綱五倫(삼강오륜) 유교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삼강은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과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三無五多(삼무오다) 울릉도에는 도둑, 거지, 바퀴 달린 물건이 없고, 눈, 바람, 오징어, 향나무, 미인이 많다는 말.

三不去(삼불거)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이유가 있는 아내라도 버리지 못하는 세 가지 경우. 즉 보내도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부모의 삼년상을 같이 치른 경우, 장가들 때에 가난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

三歲之習至于八十(삼세지습지우팔십)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三旬九食(삼순구식) 한 달에 아홉번 식사를 함.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적음을 일컫는 말이다.

三益友(삼익우) 세 가지 유익한 벗. 매화․대나무․돌을 말한다.

三日遊街(삼일유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온 거리로 돌아다녔던 관례.

三從之道(삼종지도) 여자는 어려서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관념.

三韓甲族(삼한갑족) 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문벌이 높은 집안

傷弓之鳥(상궁지조) 한번 화살에 맞은 새가 항상 의심하고 두려워 함과 같이 한번 궂은 일을 당하고 나면 늘 의심하고 두려워 하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上山求魚(상산구어)산위에서 물고기를 찾는다.당치 않은 데 가서 되지도 않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象牙塔(상아탑) 학자나 예술가가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색하고 연구하는 곳.

生口不網(생구불망)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말

生而知之(생이지지)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통해서 앎.

胥動浮言(서동부언) 거짓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함

西施有所醜(서시유소추) 월(越)나라의 서시(西施)같은 이름난 미인도 추(醜)한 구석이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과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鼠竊狗偸(서절구투) 쥐가 물건을 훔치고 개가 남의 눈을 속이는 것. 좀도둑을 말함.

席卷(석권) 자리를 마는 것처럼 한쪽으로부터 모조리 감아 취하는 것.

先公後私(선공후사)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미룸

先發制人(선발제인) 본래는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先憂後樂(선우후락)세상의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워할 일은 남보다 즐거워 함. 곧 志士나 어진 사람의 마음씨

仙姿玉質(선자옥질) 선녀같은 모습과 옥같은 바탕. 용모가 아름답고 재질도 뛰어남을 뜻하는 말이다.(=氷姿玉質)

先後倒錯(선후도착)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이 거꾸로 뒤바뀜.

先後策(선후책) 뒷 처리를 잘 하려는 계책

雪泥鴻爪(설니홍조) 눈이 녹은 진 땅에 큰 기러기가 걸어가 발 자취를 남기나 그것은 곧 사라진다. 인생이 허무하고 남는 것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舌芒於劍(설망어검)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 논봉(論鋒)이 날카로움을 뜻한다.

雪膚花容(설부화용) 눈같이 흰 살과 꽃같은 얼굴. 흰 살결에 고운 얼굴을 형용하는 말로도 쓰이고, 미인.

雪上加霜(설상가상) 눈 위에 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불행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듭 생김을 말한다.

說往說來(설왕설래) 서로 변론(辯論)을 주고 받으며 옥신각신 함

雪中松柏(설중송백) 송백은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사람의 절조(節操)가 굳은 데 비유하는 말.

城狐社鼠(성호사서) 임금 옆에 있는 간사한 신하를 말한다.

洗踏足白(세답족백) 남의 빨래를 하였더니 제 발이 희어졌다. 남을 위하여 한 일이 자기에게도 이득이 있다, 혹은 일을 하고 아무런 보수도 얻지 못하였을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어야 천리마(千里馬)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재능(才能)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진가(眞價)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재능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썩어버린다. (천리마-재능-는 항상 있지만, 백락-알아보는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歲寒松柏(세한송백) 날씨가 추워진 후의 송백.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한겨울에도 변색되지 않기에 날이 추워져야 그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굳음을 보여주는 진가(眞價)가 드러난다.

歲寒然後知松栢(세한연후지송백)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송백의 진가를 알게 된다. 즉, 지조와 절개가 굳은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야 구별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疾風知勁草)

笑裏藏刀(소리장도) 외면으로는 웃으면서 온화한 척 하지만, 마음 속에는 음흉하게 칼을 품고 있음.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속에는 해칠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口蜜腹劍)

束手無策(속수무책) 어찌 할 도리 없이 꼼짝 못 함

孫康映雪(손강영설) 손강(孫姜)이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구하지 못해서 쌓인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는 고사. 어려운 가운데 고생하면서 공부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하늘이 명(命)을 통해 부여해 준 자신의 ‘본성(本性)’을 잘 파악하고 발달시키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道)’ 즉, 자신의 ‘길’이라고 한다.

松茂栢悅(송무백열) 소나무가 무성해지니 잣나무가 기뻐한다. 친구의 잘 됨을 기뻐한다는 의미.

水到魚行(수도어행) 물이 이르르면 고기가 그 물 속을 가게 된다. 무슨 일이건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의미.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자신에게 주어진 명(命)을 파악하고 본성(本性)을 발달시켜야 하는 자신의 길(道)을 꾸준히 다듬어 나가는 것 그것을 일컬어 ‘본받음(敎)’이라고 한다.

壽福康寧(수복강녕) 오래 살고 복되며 건강하고 편안함

手不釋卷(수불석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다. 즉,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다.

水深可知人心難測(수심가지인심난측)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羞惡之心義之端也(수오지심의지단야) 그릇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의(義)의 근본이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가 고요하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어도 이미 때 늦어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음을 슬퍼하는 말.(-樹風之歎)

誰怨誰咎(수원수구) 누굴 원망하며 누굴 탓할 것인가. 남을 원망하거나 책망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手足之愛(수족지애) 형제 사이의 우애를 일컫는 말.

水至淸則無魚(수지청즉무어)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숨을 곳이 없으므로 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야박하거나 지나치게 똑똑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여 벗을 사귀지 못함.

脣齒之國(순치지국) 이해관계가 밀접하여 입술과 이와의 관계같은 나라.

膝甲盜賊(슬갑도적) 남의 시문(詩文)을 표절하여 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是非之心智之端也(시비지심지지단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근본이다.

尸位素餐(시위소찬) 이루어 놓은 아무 공도 없이 헛되이 관록(官祿)만 먹음을 일컫는 말.

食不二味(식불이미) 음식이 두가지 맛이 아니다라는 말로, 음식을 잘 차려먹지 못함을 이른다.

食少事煩(식소사번)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음

食言(식언)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입으로 들여보낸다는 뜻. 한 번 말한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

實事求是(실사구시)있는 그대로의 사실 즉,실제에 입각해서 그 일의 진상을 찾고 구하는것을 말한다.

心心相印(심심상인)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 = 以心傳心

心在鴻鵠(심재홍곡) 바둑을 두면서 마음은 기러기나 고니가 날아오면 쏘아 맞출 것만 생각한다면 어찌되겠느냐는 맹자(孟子)의 언질에서 비롯된 말이다. 학업을 닦으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씀을 일컫는 말이다.

十伐之木(십벌지목)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뜻

十常八九(십상팔구) 열이면 여덟이나 아홉은 그러함

十日之菊(십일지국) 국화는 핀 지 9일 되는 날이 절정이므로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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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高手卑(안고수비) 눈은 높으나 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 전에는 사치하게 살던 사람이 가난해져 눈은 높고 돈은 전처럼 쓰지 못할 경우를 일컫기도 한다.

安分知足(안분지족) 편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을 앎

安如泰山(안여태산) 태산같이 마음이 끄덕없고 든든함. 安如磐石(안여반석)이라고도 함.

眼中之人(안중지인) 눈 속에 있는 사람. 정(情)든 사람을 뜻한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하고, 눈 앞에 없어도 평생 사귄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暗中飛躍(암중비약) 비밀한 가운데 맹렬히 활동함

殃及池魚(앙급지어) 초(楚)나라 성문에 불이 붙어, 성 밖에 있는 연못의 물로 이 불을 끄게 되었는데, 못의 물이 전부 없어져 그 속에 있던 고기들이 모두 말라 죽은 고사에서 비롯됨. 이유 없이 재앙(災殃)을 당하는 것을 비유.

哀而不悲(애이불비) 속으로는 슬퍼하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함

愛人者人恒愛之(애인자인항애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늘 그를 사랑해준다.

弱冠(약관) 20세 성년에 이르는 남자. 예기(禮記)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10년은 어리다고 말하며 배워야 한다. 20살은 弱(약)이라 하며, 갓을 쓴다. 30살은 壯(장)이라 하며 아내를 두어야 한다. 40살은 强(강)이라 하며 벼슬해야 한다. 50살은 艾(애)라 하며 관청과 정사에 참여한다. 60살은 耆(기)라 하며 일을 시킨다. 70살은 늙었다 하며 집안 일을 시킨다. 80,90살은 耄(모)라 하며, 100살은 期(기)라 하며 봉양을 받아야 한다.

陽臺(양대) 해가 잘 비치는 대. 남녀의 정교(情交)를 의미한다.

陽臺不歸之雲(양대불귀지운) 한 번 정교(情交)를 맺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量自力(양자력)자기 자신의 능력의 정도는 자신만이 안다는 의미.어떤 일을 마음이 곧고 충실하게 탐구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楊布之狗(양포지구) 양포(楊布)가 외출할 때는 흰 옷을 입고 나갔다가 비를 맞아 검은 옷으로 갈아 입고 돌아왔는데, 양포의 개가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대서 개를 때리려 했더니, 형 양주(楊朱)가 말하기를 “네 개가 나갈 때는 흰 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너 역시 괴상하게 여기지 않겠냐”고 나무랬던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겉모습이 변한 것을 보고, 속까지 변해버렸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魚網鴻離(어망홍리)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쳤는데 기러기가 걸렸다. 즉,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반대로 구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얻었다는 말이다.

魚目燕石(어목연석) 어목(魚目)은 물고기의 눈, 연석(燕石)은 燕山의 돌. 모두 玉과 비슷하여 옥으로 혼동함. 허위를 진실로 우인(愚人)을 현인(賢人)으로 혼동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魚變成龍(어변성룡)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됨. 어릴 적에는 신통치 못하던 사람이 자라서 훌륭하게 됨을 일컫는 말.

魚水之親(어수지친) 고기와 물의 친함. 임금과 백성이 친밀한 것을 일컫기도 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水魚之交)

魚遊釜中(어유부중) 고기가 솥 속에서 논다. 목숨이 붙어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할것을 비유하는말.(=釜中之魚)

抑强扶弱(억강부약)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

偃鼠之望(언서지망) 쥐는 작은 동물이라서 강물을 마신대야 자기 배 하나 가득히밖에 더 못 마신다. 자기 정한 분수가 있으니 안분(安分)하라는 말이다.

言則是也(언즉시야) 말이 사리에 맞는다.

掩目捕雀(엄목포작)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으려 한다. 일을 성취하려면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掩耳盜鈴(엄이도령) 방울을 훔치는 도적이 방울이 소리가 난다고 자기 귀만 막고 방울을 훔친다. 모든 사람이 그 잘못을 다 아는데 얕은 수를 써서 남을 속이려 하나 아무 효과가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掩耳盜鐘)

如履薄氷(여리박빙) 엷은 얼음을 밟는 듯 매우 위험한 것을 뜻함

與民同樂(여민동락)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나눔을 말한다.

如反掌(여반장)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매우 쉬움.(-易如反掌)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 증자(曾子)가 하루에 세 가지를 돌아본 것 중의 하나로 벗과 사귀는 데에 신의로서 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如世推移(여세추이) 세상이 변하는 대로 따라 변함

與子同袍(여자동포) 자네와 두루마기를 같이 입겠네. 친구 사이에 서로 허물없이 무관하여 하는 말

麗姬哭泣(여희곡읍) 미인인 여희가 큰 소리로 슬피운다는 뜻이며, 시집가기 싫어하던 일이 시집간 뒤에는 울었던 것을 매우 후회했다는 것으로 한 치 앞을 못보고 걱정하는 것에 비유하여 사용함.

逆鱗(역린) 용의 턱 밑에 거슬러 난 비늘로서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노하여 그자를 반드시 죽인다고 한다. 즉 군주의 노여움을 비유한 말.

力拔山氣蓋世(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을만하다. 항우(項羽)의 힘센 기상을 비유한 말. 영웅의 힘이 세고 기상이 큰 것을 일컬음.(-拔山蓋世)

易子敎之(역자교지)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을 바꾸어 교육함. 父子 사이엔 잘못을 꾸짖기 어렵다는 뜻으로 쓰인다.

鉛刀一割(연도일할) 납으로 만든 칼도 한번은 자를 힘이 있다. 자기의 힘은 미약하다고 겸손하게 하는 말로도 쓰이며, 소인배도 한번은 착한 일을 할 수 있으나 두번은 계속해서 할 수 없다는 말.

戀慕之情(연모지정) 사랑하여 그리워 하는 정

鳶飛魚躍(연비어약) 하늘에 솔개가 날고 물 속에 고기가 뛰어노는 것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운데, 이는 솔개와 물고기가 저마다 나름대로의 타고난 길을 가기 때문이다. 만물이 저마다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전체적으로 천지의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자연의 오묘한 도(道)임을 말한다.

燕雁代飛(연안대비) 제비가 올 때 기러기는 떠난다. 사람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는 말.

連戰連勝(연전연승) 싸울 때마다 번번히 이김

煙霞痼疾(연하고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처럼 깊음을 뜻하는 말이다.

燕鴻之歎(연홍지탄)봄과 가을에 엇갈리는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반대입장이 되어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는 말이다.(-燕雁代飛)

炎凉世態(염량세태) 권세가 있을 때는 쫓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속의 인심

拈華微笑(염화미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 = 以心傳心

葉公之龍(엽공지룡) 표면상으로 좋아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싫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써 옛날에 엽공이 요을 좋아하여 자기 집안의 문이며 기중에 모두 용을 그려놓고 새겨놓아 하늘의 용이 크게 기뻐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얼굴을 내미니 엽공이 겁에 질려 도망갔다는 고사가 있다.

榮枯盛衰(영고성쇠)사람의 일생이나 나라의 운명이 필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으며 융성할 때도 있고 쇠퇴할 때도 있음을 뜻한다.

盈科而後進(영과이후진) 물이 흐를 때는 조금이라도 오목한 데가 있으면 우선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아래로 흘러간다. 배움의 길도 속성으로 이루려 하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닦아야 함을 비유.

盈滿之咎(영만지구) 가득 차면 기울고 넘친다. 만사가 다 이루어지면 도리어 화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

五德(오덕) 유가에서는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이고, 법가에서는 智, 信, 仁, 嚴, 勇이고, 불가에서는 怖魔(포마), 乞士(걸사), 淨戒(정계), 淨命(정명), 破惡(파악)이다.

梧桐一葉(오동일엽) 오동 한 잎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안다. 한 가지 구실을 보면 일의 전말을 알 수 있다는 말.

寤寐不忘(오매불망) 밤낮으로 자나 깨나 잊지 못함

寤寐思服(오매사복) 자나깨나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五父(오부) 아버지로써 섬겨야 할 다섯 사람으로 實父(실부), 養父(양부), 繼父(계부), 義父(의부), 師父(사부)이다.

吾不關焉(오불관언) 나는 상관하지 않음

吾鼻三尺(오비삼척) 내 코가 석자. 내 일도 감당 못해 남을 도울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五常(오상) 오륜이라고도 하며, 仁,義,禮,智,信을 말한다. 또 아버지는 의리로, 어머니는 자애로, 형은 우애로, 아우는 공경으로, 자식은 효도로 대해야 마땅한 길이다.

傲霜孤節(오상고절) 서릿발 날리는 추운 때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를 뜻한다.

五言長城(오언장성) 오언시(五言詩)를 잘 짓는 것이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바랄 수 없는 일임을 비유하는 말이다.

吳牛喘月(오우천월) 오(吳)나라의 소가 더위를 두려워해서 달을 보고도 해인줄 알고 헐떡인다. 지레 짐작으로 공연한 일에 겁을 내어 걱정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烏雲之陣(오운지진) 까마귀가 흩어지는 것처럼, 또 구름이 모이는 것과 같이 모임과 흩어짐이 계속되면서 변화가 많은 진법(陣法)을 말한다.

烏合之衆(오합지중) 까마귀떼와 같이 조직도 훈련도 없이 모인 무리

玉石同匱(옥석동궤) 옥과 돌이 한 궤짝 속에 있음. 좋은 것과 나쁜 것, 혹은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한데 섞여 있는 경우를 말한다.

屋烏之愛(옥오지애)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그 사람의 집에 있는 까마귀까지 귀여워함. 한번 사람을 좋게 보면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좋게 보게 됨을 말한다.

屋下架屋(옥하가옥) 집 아래 집을 다시 짓는다. 부질없이 모방만 하고 새로운 발전이 없음을 가리킴.

瓦釜雷鳴(와부뇌명) 질그릇과 솥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천둥이 치는 소리로 착각함. 무식하고 변변치 못한 사람이 아는 체하고 크게 떠들어댄 소리에 여러 사람이 혹하여 놀라게 된 것을 뜻한다.

玩物喪志(완물상지) 쓸 데 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소중한 자기의 의지를 잃음. 물질에만 너무 집착한다면 마음 속의 빈곤을 가져와 본심을 잃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矮子看戱(왜자간희) 난장이가 키가 작아 구경은 못하고 남들이 보고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본 체, 아는 체 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이 말하면 자기도 같이 아는 척하고 떠드는 사람을 이름.

遼東豕(요동시) 遼東의 돼지 새끼. 견문이 넓지 못한 사람이 신기하게 여기고 떠드는 것이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흔한 것인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 요동지시

樂山樂水(요산요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의 준말로 지혜있는 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 한다는 뜻

燎原之火(요원지화) 들판을 태우는 불. 세력이 대단해서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欲燒筆硯(욕소필연) 붓과 벼루를 태워버리고 싶다. 남이 지은 문장의 뛰어남을 보고 자신의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는 말이다.

欲速不達(욕속부달) 서두르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龍尾鳳湯(용미봉탕) 맛이 썩 좋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

龍蛇飛騰(용사비등) 용과 뱀이 나는 것과 같이 글씨가 힘찬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虞美人草(우미인초) 가냘픈 꽃이 슬픈 듯이 바람에 하느적거리며 흔들거리는 모습. 우미인은 항우의 애인으로 항우가 패하자 자살한 여인인데 그 무더에서 붉은 예쁜 꽃이 피워 하느적거렸다고 함.

牛溲馬勃(우수마발) 쇠오줌과 말 똥, 곧 별반 대수롭지 않은 물건을 뜻한다.

牛往馬往(우왕마왕) 소 갈 데, 말 갈 데. 갈 수 있을 만한 곳은 다 다녔다는 뜻.

羽化登仙(우화등선) 날개돋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雲泥之差(운니지차) 구름과 진흙의 차이.천지지차(天地之差)와 같은 말. 사정이 크게 다름을 말한다.

雲上氣稟(운상기품) 속됨을 벗어난 고상한 기질과 성품

雲霓之望(운예지망)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듯 그 희망이 간절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雲中白鶴(운중백학) 구름 속을 나는 백학. 고상한 기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雲蒸龍變(운증용변) 구름이 들끓어 용으로 변함. 영웅호걸이 때를 만나 일어남을 일컬음.

遠親不如近隣(원친불여근린) 멀리 있는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

遠禍召福(원화소복) 재난을 멀리하고 복을 불러옴

月盈則食(월영즉식) 달이 꽉 차서 보름달이 되고 나면 줄어들어 밤하늘에 안보이게 된다. 한번 흥하면 한번은 망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月下老人(월하노인) 혼인을 중매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渭樹江雲(위수강운) 위수(渭水)에 있는 나무와 위수를 지나와 강수(江水) 위에 떠 있는 구름. 떨어져 있는 두 곳의 거리가 먼 것을 이르는 말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벗이 서로 그리워하는 말로 쓰인다.

危如朝露(위여조로)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듯이 위기가 임박해 있음을 말함.

威而不猛(위이불맹) 위엄(威嚴)은 있으나 결코 난폭하지 않음.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 증자(曾子)가 행한 일일삼성(一日三省) 중 한 가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도모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柔能制剛(유능제강) 부드러움이 능히 굳셈을 제어한다.

柳綠花紅(유록화홍)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자연에 조금도 인공을 가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流水不腐(유수불부)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항상 움직이는 것은 못쓰게 되지 않는다는 비유.

有終之美(유종지미)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마무리를 잘 지어 완성되었다는 뜻.

遊必有方(유필유방)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그 슬하에서 모셔야 하며 비록) 유학(遊學)을 할지라도 부모가 알 수 있도록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

隱居放言(은거방언) 속세를 피해 혼자 지내면서 품고 있는 생각을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을 일컫는다.

隱忍自重(은인자중) 은근하게 참고 스스로를 무거이 한다. 견디고 참음

乙丑甲子(을축갑자)갑자을축이 바른 차례인데 그 차례가 바뀜과 같이 일이 제대로 안되고 순서가바뀜

陰德陽報(음덕양보) 남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뒤에 그 보답을 저절로 받게 된다.

飮馬投錢(음마투전) 말에게 물을 먹일 때 먼저 돈을 물 속에 던져서 물값을 지불할 정도로 결백한 행실을 비유.

陰地轉陽地變(음지전양지변) 음지도 양지로 될 때가 있음

吟風弄月(음풍농월)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놀음

衣錦褧衣(의금경의) 비단 옷을 입고 그 위에 안을 대지 않은 홑옷을 또 입는다. 군자가 미덕을 갖추고 있으나 이를 자랑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衣錦絅衣로도 쓴다)

意馬心猿(의마심원) 뜻은 말처럼 날뛰어 다루기 어렵고 마음은 원숭이처럼 이 흉내 저 흉내 다 내어 걷잡을 수 없다. 사람의 번뇌와 욕심은 동요하기 쉽고 억누르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依門之望(의문지망) 멀리 가 있는 아들을 매일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의 정을 일컫는 말이다. 줄여서 의문(依門)이라고도 한다.

意中之人(의중지인)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사람으로 사모하고 있는 사람.

疑人勿使使人勿疑(의인물사사인물의) 사람을 의심하면 그 사람을 부리지 말고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아라.

以管窺天(이관규천) 대롱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 봄. 우물안 개구리

離群索居(이군삭거) 동문의 벗들과 떨어져 외롭게 사는 것을 말함.

以德報怨(이덕보원)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

以卵投石(이란투석)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以不解解之(이불해해지) 글의 뜻을 푸는 데 풀리지 않는 것을 억지로 풀어낸다. 즉, 안되는 것을 억지로 해석하면 곡해하기 쉽다는 말이다.

以恕己之心恕人(이서기지심서인)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

以羊易牛(이양역우) 양을 가지고 소와 바꿈.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에 대용하는 것을 뜻한다.

易如反掌(이여반장) 쉽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

二人同心其利斷金(이인동심기리단금)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으로 쇠도 자를 수 있다. 마음을 합하면 강해진다는 말.

以指測海(이지측해)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 양(量)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말.

以責人之心責己(이책인지심책기)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어라.

李下不整冠(이하부정관)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

益者三友(익자삼우) 사귀어 이롭고 보탬이 되는 세 벗으로 정직한 사람, 신의있는 사람, 학식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損者三友(손자삼우)도 있는데, 아첨하는 사람, 간사한 사람, 감언이설을 잘하는 사람이다.

人無遠慮必有近憂(인무원려필유근우) 사람이 멀리까지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방 근심이 생긴다.

因人成事(인인성사)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룸

仁者樂山(인자요산) 어진 사람은 모든 일을 도의에 따라서 하여 행동이 신중하기가 태산같으므로 산을 좋아함.

人之將死其言也善(인지장사기언야선) (새는 죽을 때가 되면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

一刻千金(일각천금) 극히 짧은 시각도 천금의 값어치가 나갈만큼 매우 귀중하다.

一犬吠形百犬吠聲(일견폐형백견폐성) 한 마리의 개가 짖는 시늉을 하면 백 마리의 개가 소리내어 짖는다. 한 사람이 거짓으로 한 말이 퍼지고 퍼지면 정말 사실인 것처럼 와전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 한주먹 도시락 밥과 표주박 한 바가지 물. 변변치 못한 음식. 매우 가난한 살림을 의미.

一刀兩斷(일도양단) 한 칼에 둘로 나누듯이 일이나 행동을 선뜻 결정함을 가리킨다.

一目瞭然(일목요연) 첫 눈에도 똑똑하게 알아 볼 수 있음

一步不讓(일보불양) 남에게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음

一樹百穫(일수백확)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백 개의 열매를 수확한다. 인물을 양성하는 보람을 말함. 인재 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사회에는 막대한 이익을 준다는 뜻이다.

一視同仁(일시동인) 모두를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

一魚濁水(일어탁수) 물고기 한 마리가 큰 물을 흐리게 한다. 한 사람의 악행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그 해를 받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一魚混全川(일어혼전천) 한 마리 물고기가 온 시냇물을 흐려 놓는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도랑물을 흐린다.)

一葉知秋(일엽지추) 하나의 낙엽이 가을이 왔음을 알게 해준다. 한 가지 일을 보고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안다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쇠망의 조짐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一敗塗地(일패도지) 싸움에 한 번 패하여 간(肝)과 뇌(腦)가 땅바닥에 으깨어진다는 뜻으로, 여지 없이 패하여 재기불능하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日下無蹊徑(일하무혜경) 해가 비치고 있는 곳에는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좁은 지름길이 없다. 나쁜 일이 행해지지 아니한 것을 탄미한 말.

臨農奪耕(임농탈경) 땅을 다 다듬고 이제 농사를 지으려 하니까 농사지을 땅을 빼앗아 간다. 오랫동안 애써 준비한 일을 못하게 빼앗는다는 말이다.

林中不賣薪(임중불매신) 산 속에는 땔나무가 충분히 있어서 살 사람도 없으니 땔나무를 팔지 않는다. 물건은 그 쓰임이 유용한 곳에서 써야 함을 말한다.

林中之衆鳥不如手中之一鳥(임중지중조불여수중지일조) 숲 속의 많은 새들이 손 안에 한 마리 새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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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强不息(자강불식)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아니함. (自彊不息으로도 쓴다).

自愧之心(자괴지심)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子膜執中(자막집중)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自手削髮(자수삭발) 제 손으로 머리를 깎음. 하기 어려운 일을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제 힘으로 처리한다는 뜻이다.

自我省察(자아성찰)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핌

勺藥之贈(작약지증) 남녀간에 향기로운 함박꽃을 보내어 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張脈憤興(장맥분흥) 사람이 격분하거나 흥분하면 혈맥의 펼쳐 움직임은 강한 모습을 띄게 되지만, 그 속은 마르게 됨을 말한다.

張三李四(장삼이사) 장씨(張氏)의 삼남(三男)과 이씨(李氏)의 사남(四男)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

長袖善舞(장수선무) 긴소매는 춤을 잘 춘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하다.

長夜之飮(장야지음) 날이 새어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논 채 계속하는 주연(酒宴)을 말한다.

材大難用(재대난용) 재목이 너무 크면 쓰이기 곤란하다. 즉, 재주 있는 사람이 쓰이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才子佳人(재자가인) 재주가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爭魚者濡(쟁어자유)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을 면치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赤手空拳(적수공권) 손에 힘을 주어 보지만, 주먹에 아무 힘이 없다. 맨손과 맨주먹, 즉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積塵成山(적진성산) 티끌모아 태산

積土成山(적토성산) 흙이 쌓여 산을 이룸. 작은 것을 힘써 모아서 큰 것을 이룸을 뜻하는 말이다.

前道遼遠(전도요원)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멂.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멂

傳不習乎(전부습호)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 중 한 가지. 배웠던 것에 대해 몸에 익도록 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田園將蕪(전원장무) 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됨

前程萬里(전정만리) 나아기 젊어 장래가 유망함

前車覆後車戒(전차복후차계)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그것을 보고 교훈을 삼는다. 앞 사람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折槁振落(절고진락) 고목을 자르고, 낙엽을 움직이게 한다. 매우 쉬운 일.

切齒腐心(절치부심)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 속을 썩임

頂門一鍼(정문일침) 정수리에 침을 놓는다. 잘못의 급소를 찔러 충고하는 것을 말한다.

程門立雪(정문입설) 유초(遊酢)와 양시(楊時) 두 사람이 눈오는 밤에 스승인 정이천(程伊川)을 모시고 서 있었다는 고사. 제자가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情恕理遣(정서이견) 잘못이 있으면 온정으로 참고 이치에 비추어 용서함.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 정신만 집중하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다.

井底之蛙(정저지와) 우물안 개구리. 견문이 좁고 세상 형편을 모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綈袍戀戀(제포연연) 벗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두껍게 짠 비단옷을 주었다는 고사. 우정이 깊음을 일컫는다.

濟河焚舟(제하분주) 적을 공격하러 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넌 후 바로 배를 태워버린다. 필사(必死)의 뜻.

朝變夕改(조변석개) 일을 자주 뜯어 고침

朝不及夕(조불급석) 형세가 급박하여 아침에 저녁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함을 일컫는다.

朝不慮夕(조불려석)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한다. 당장 눈 앞의 일이나 결정할 뿐이지 앞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朝不謀夕(조불모석)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한다. 당장 눈 앞의 일이나 결정할 뿐이지 앞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爪牙之士(조아지사) 손톱과 이빨은 새나 짐승이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 즉, 국가를 보필하는 신하를 일컫는다.

朝雲暮雨(조운모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 남녀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助長(조장) 성질 급한 농부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싹을 빨리 나오라고 잡아당겨 놓는다(助長)는 우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라는 것을 돕는답시고 잡아당겨 억지로 자라게 한다.

種豆得豆(종두득두) 콩심은 데 콩난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

從善如登(종선여등) 착한 일을 쫓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힘들다는 말.

從善如流(종선여류) 선(善)을 쫓는 태도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서슴치 않음. 서슴치 않고 착한 일을 하는 태도.

左顧右眄(좌고우면) 왼쪽을 둘러보고 오른쪽을 짝눈으로 자세히 살핌. 무슨 일에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함을 비유.

坐不垂堂(좌불수당) 마루 끝에 앉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앉지 않는다. 위험한 일에 가까이 하지 않음을 뜻한다.

坐井觀天(좌정관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다. 견문이 좁음을 이르는 말.

衆口鑠金(중구삭금) 여러 사람이 합해 말하면 굳은 쇠도 녹인다. 참언(讒言)의 두려움을 말함.

重農主義(중농주의) 국가의 부의 기초는 농업에 있다는 경제 사상

中庸(중용) 치우침이나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

衆人環視(중인환시)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서 봄

櫛風沐雨(즐풍목우) 바람으로 빗을 삼아 머리를 빗고 빗물로 머리를 감는다. 세상 일에 매우 고생하며 산다는 뜻.

知過必改(지과필개)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知己之友(지기지우)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

舐犢之愛(지독지애)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으며 사랑한다는 뜻.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에 비유하나 그 방법이 지나쳐 좋지 못함을 말한다.

舐犢之情(지독지정)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서 귀여워 함. 어버이의 사랑이 맹목적이고 깊음을 일컫는 말이다.

之東之西(지동지서)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함. 독, 어떤 일에 주관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름

知命者不怨天知己者不怨人(지명자불원천지기자불원인) 하늘이 준 자기의 명을 아는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知者不言言者不知(지자불언언자부지) 진정 아는 사람은 떠들어 대지 않고 떠들어 대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知足不辱(지족불욕) 모든 일에 분수를 알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모욕을 받지 않는다

知足知富(지족지부)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

指呼之間(지호지간) 부르면 곧 대답할 만한 가까운 거리

盡善盡美(진선진미)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아름다움. 완전 무결함

塵積爲山(진적위산) 티끌이 모여 태산을 이룸.

嫉逐排斥(질축배척) 시기하고 미워하여 물리침

疾風知勁草(질풍지경초) 바람이 세게 불어야 강한 풀임을 안다. 위급하거나 곤란한 경우를 당해봐야 의지과 지조가 굳은 사람을 알 수 있게 됨을 비유하는 말.(-歲寒然後知松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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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業易守成難(창업이수성난) 일을 이루기는 쉬어도 지키기는 어렵다.

滄海桑田(창해상전) 푸른 바다가 변하여 뽕밭으로 된다는 말로 곧 덧없는 세상이라는 뜻.(=桑田碧海)

滄海遺珠(창해유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현자(賢者) 또는 명작(名作)을 비유하는 말.

滄海一粟(창해일속) 넓은 바다에 떠있는 한 알의 좁쌀. 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을 말한다.

采薪之憂(채신지우) 자기 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파서 나무를 할 수 없다는 뜻.(-負薪之憂)

責己之心(책기지심) 스스로 제 허물을 꾸짖는 마음

妻城子獄(처성자옥) 아내의 성과 자식의 감옥에 갇혀 있다. 妻子가 있는 사람은 집안 일에 완전히 얽매여서 다른 일에 꼼짝도 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千年一淸(천년일청) 황하(黃河)같은 탁류(濁流)가 맑아지기를 천년 동안 바란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바라는 것.

千慮一得(천려일득) 천번 생각하면 한가지는 얻는다. 바보도 한 가지쯤은 좋은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하늘이 하늘의 본성(天道)을 명(命)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을 본성(本性)이라고 한다.

泉石膏肓(천석고황) 샘과 돌이 고황(膏肓)에 들었다. 고질병이 되다시피 산수 풍경을 좋아함을 일컫는 말이다.

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천시불여지리지리불여인화) 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千紫萬紅(천자만홍) 가지가지 빛깔로 만발한 꽃을 비유하는 말.

轍鮒之急(철부지급) 철부(轍鮒)는 수레바퀴 자국 속의 붕어로서 그 자국만큼의 물만 있어도 살 수 있는 처지이다. 다급한 위기, 곤궁한 처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樵童汲婦(초동급부) 나무베는 소년과 물긷는 아낙네. 곧 보통 서민을 이르는 말

焦眉之急(초미지급) 눈썹에 불이 불음과 같이 매우 다급한 지경.(=燒眉之急)

蜀犬吠日(촉견폐일) 촉(蜀)나라의 개는 해를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해만 보면 짖는다. 식견이 좁은 사람이 선하고 어진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고 의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追友江南(추우강남) 친구 따라 강남간다. 주견 없는 행동을 뜻함.

追遠報本(추원보본)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

春秋筆法(춘추필법) 오경(五經)의 하나인 춘추(春秋)와 같이 비판의 태도가 썩 엄정함을 이르는 말. 대의명분을 밝히어 세우는 사실의 논법을 일컫기도 한다.

春雉自鳴(춘치자명) 봄철 꿩이 스스로 운다. 시키거나 요구하지 아니하여도 제풀에 하는것을 말한다.

出沒無雙(출몰무쌍) 들고 나는 것이 비할 데 없이 잦음.

出將入相(출장입상) 전시(戰時)에는 싸움터에 나가서 장군(將軍), 평시(平時)에는 재상(宰相)이 되어 정치를 함.

出必告反必面(출필고반필면) 나갈 때는 부모님께 반드시 출처를 알리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뵈어 안전함을 알려 드린다.

忠言逆耳(충언역이) 충고하는 말은 귀에 거슬린다.(-忠言逆於耳)

吹毛覓疵(취모멱자)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음. 남의 결점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醉生夢死(취생몽사) 아무 뜻과 이룬 일도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텅하게 살아감

惻隱之心仁之端也(측은지심인지단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근본이다.

治絲棼之(치사분지) 실을 급히 풀려고 하면 오히려 엉킨다. 가지런히 하려고 하나 차근차근 하지 못하고 급히 해서 오히려 엉키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置之度外(치지도외)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않음

七零八落(칠령팔락)나무나 풀이 산산이 어울어 떨어짐과 같이 세력이 떨어지고 연락이 끊기어 형편없이 됨.

七顚八倒(칠전팔도)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진다.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음

七縱七擒(칠종칠금)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전술로 일곱 번 놓아 주고 일곱 번 잡는다는 말로 자유 자재로운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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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尙何說(타상하설) 한가지 일을 보면 다른 일도 알 수 있다는 말

脫兎之勢(탈토지세) 토끼가 울에서 뛰어나오듯 신속한 기세를 말한다.

太剛則折(태강즉절)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쉽다.

泰山壓卵(태산압란) 태산처럼 무거운 것으로 달걀을 누른다. 쉬운 일을 뜻한다.

兎死狐悲(토사호비)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 남의 처지를 보고 자기 신세를 헤아려 동류의 슬픔을 서러워 한다는 뜻.

兎營三窟(토영삼굴) 토끼는 숨을 수 있는 굴을 세 개는 마련해놓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미리 몇 가지 술책을 마련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吐盡肝膽(토진간담)간과 쓸개를 모두 내뱉음. 솔직한 심정을 속임없이 모두 말하는것을 비유하는 말.

吐哺握發(토포악발) 뱉어도 보고 먹어도 보고 잡아도 보고 보내도 본다. 현사(賢士)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는 말

投杼疑(투저의) 베틀의 북을 던지고 의심함. 曾參의 어머니가 아들을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는데, 베를 짜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증참이 사람을 죽였다고 고함을 쳤으나 곧이 듣지 않았다. 세번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니 결국 북을 던지고 뛰어나갔다는 고사. 여러번 말을 들으면 믿게 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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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鏡重圓(파경중원) 반으로 잘라졌던 거울이 합쳐져 다시 둥그런 본 모습을 찾게 됨. 살아서 이별한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破天荒(파천황) 태초의 혼돈을 격파함. 선인이 못이룬 일을 해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八方美人(팔방미인)어느 모로 보아도 아름다운 미인.여러방면의 일에 능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覇道(패도) 인의를 무시하고 무력이나 꾀를 써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 공리만을 탐하는 일

烹頭耳熟(팽투두숙)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삶아진다. 중요한 것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됨.

弊袍破笠(폐포파립) 해진 옷과 부러진 갓, 곧 너절하고 구차한 차림새를 말한다.

弊風惡習(폐풍악습) 폐해가 되는 나쁜 풍습

蒲柳之質(포류지질) 물가에 서있는 버드나무와 같이 허약한 체질, 혹은 머리가 일찍 희는 약한 체질.

飽食暖衣(포식난의)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을 입는다. 근심없이 편안한 삶. 지나치게 편안한 것은 패륜을 낳는다는 경계의 뜻으로도 쓰인다.

風樹之嘆(풍수지탄)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효도 못한 것을 후회함

風雲之會(풍운지회)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을 말함. 훌륭한 사람들끼리 어울림, 또는 호걸(豪傑)이 때를 만나 뜻을 이룸을 뜻한다.

風餐露宿(풍찬노숙)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잠, 곧 큰 일을 이루려는 사람의 고초를 겪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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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爐冬扇(하로동선)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쓸모 없는 재능을 말한다.

下石上臺(하석상대) 아랫돌을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즉 임시변통으로 이리 저리 둘러맞춤

瑕玉(하옥) 흠이 없으면 완전한 것인데, 아깝게도 흠이 있어 결점이 된다는 뜻. 옥에도 티가 있다.

鷽鳩笑鵬(학구소붕) 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보고 웃는다. 되지 못한 소인이 위인의 업적과 행위를 비웃는다는 뜻.

學如不及(학여불급) 배움은 언제나 모자라다고 생각하라.

學而不思則罔(학이불사즉망)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갇힌 듯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學者如牛毛成者如麟角(학자여우모성자여린각) 배우는 사람은 소의 털과 같이 많고, 이룬 사람은 기린의 뿔과 같이 드물다.

割鷄焉用牛刀(할계언용우도)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 작은 일 처리에 큰 인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비유.

含憤蓄怨(함분축원)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음

含哺鼓腹(함포고복)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 태평한 시대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亢龍有悔(항룡유회) 항룡(亢龍)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 그 이상 더 올라갈 수 없어 이젠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는 의미. 부귀가 극에 달하면 패망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로 쓰인다.

偕老同穴(해로동혈) 부부가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한 곳에 묻힘. 곧 생사를 같이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를 뜻한다.

行尸走肉(행시주육) 송장의 움직임과 같이 형태만 있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 무식한 사람을 멸시하는 말.

行有不得反求諸己(행유부득반구제기) 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

向隅之歎(향우지탄)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나 자기만은 구석을 향하여 한탄한다.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한탄하는 말.

懸頭刺股(현두자고) 머리를 노끈으로 묶어 높이 걸어 잠을 깨우고 또 허벅다리를 찔러 잠을 깨운다. 학업에 매우 힘쓰는 것을 말한다.

兄弟鬩墻(형제혁장) 형제가 담장 안에서 싸운다. 동족상쟁(同族相爭)을 말한다.

毫毛斧柯(호모부가) 수목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화(禍)는 미세할 때에 예방해야 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昏定晨省(혼정신성)부모모신 사람이 저녁이면 자리를 정해드리고 아침이면 주무신 자리를 정성껏 돌봐 살핌

忽顯忽沒(홀현홀몰) 문득 나타났다가 홀연 없어 짐

紅爐點雪(홍로점설) 홀로상일점(紅爐上一點雪)의 준말. 뜨거운 불길 위에 한 점 눈을 뿌리면 순식간에 녹듯이 사욕이나 의혹이 일시에 꺼져 없어지고 마음이 탁 트여 맑음을 일컫는 말이다. 크나큰 일에 작은 힘이 조금도 보람이 없음을 가리키기도 한다.화(禍)와 복(福)이 들어오는 정해진 문이 없으며, 화는 한 번만 행해지지 않는다.

和光同塵(화광동진) 화광(和光)은 빛을 늦추는 일이고, 동진(同塵)은 속세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동화함을 말한다.

花容月態(화용월태) 꽃같은 얼굴과 달같은 자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얼굴과 자태를 이르는 말.

畵中之餠(화중지병) 그림 속의 떡. 바라만 보았지 소용은 없음을 비유한 말

換腐作新(환부작신) 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

歡呼雀躍(환호작약) 기뻐서 소리치며 날뜀

黃口小兒(황구소아) 어린 아이라는 뜻. 참새 새끼의 황색 주둥이(黃口)에서 연유한 말.

會稽之恥(회계지치) 전쟁에 진 치욕을 말한다.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싸워 포로로 잡혔다가 굴욕적인 강화를 하고 풀려났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臥薪嘗膽)會心之處不必在遠(회심지처불필재원) 자기 마음에 적합한 바는 반드시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님.

膾炙人口(회자인구)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입에 오르내리고 찬양을 받음

懷寵尸位(회총시위) 임금의 총애를 믿고 물러가야 할 때에 물러가지 않고 벼슬자리만 헛되이 차지함을 가리키는 말.

效顰(효빈)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흉내낸다. 월(越)나라의 이름난 미녀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여긴 한 추녀(醜女)가 그것을 흉내내어 눈썹을 찡그리고 다녀서 더 못생기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西施矉目:서시빈목)

孝弟仁之本(효제인지본) 효도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다.

胸中生塵(흉중생진)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은 오래 하면서 만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이다.

興盡悲來(흥진비래)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픔이 옴. 곧 흥망과 성쇠가 엇바뀜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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