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에 관한 小考
序言
인(仁)! 인(仁)이 과연 무엇인가?
유사 이래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학문인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바로 이 인(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인(仁)으로 나서 인(仁)으로 살다 인(仁)으로 돌아가야 이 세상의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성실 된 최상의 진리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인(仁)!
그 인(仁)이 무엇인가?
그 인(仁)의 글자의 뜻에는 씨앗 즉,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생물을 싹틔우는 바로 그 씨앗 이라는 뜻과 함께 인간 즉 사람을 의미하는 상형문자인 인(人)에서 그 뜻이 확장된 개념으로 사람 둘이서 서로 주고받는 그 모든 행동과 표현을 뜻하기도 하고, 인간 본연의 본성이면서 그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실질적인 본체이기도 한, 영원 무변한 진리의 본질이 곧 인(仁)이라 설명하면서 그 모든 형이상학적 사고와 사유의 본질적, 핵심적 사상이 바로 이 인(仁)이라 설명하는 유학적 사고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 접근을 통해 실제적으로 인(仁)이 그 어떤 형태로 존재하며, 또 그 어떤 방법으로 추구되어지고 그리고 어떤 실제적 공효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한 물질만능 사상과 무한경쟁에 의한 적자생존에 따른 갖가지 병폐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론으로서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의 인(仁)의 역할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仁의 문자적 의미와 그 생성과정
인(仁)을 구지 자전을 찾아볼 것도 없이 그 생긴 모양으로도 그 뜻을 대강 알 수 있는 형성자로 사람 인(人)변에 둘을 뜻하는 이(二)가 결합된 문자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게 생긴 자임이 분명하지만, 그 뜻에 해석함에는 몇 가지로 구분 된다.
그 첫 번째 의미로는 사람 인(人)변에 -인(人)을 본래 의미인 사람이 서 있는 옆모양을 상형하여 만든 문자라는 자전적 의미 하에 - 두 二는 서로 기대고 있는 사람을 형상하는 자인 니(尼)와 통하는 의미로 보아 사람과 사람사이 서로 친근하게 어울리는 애정(愛情)과 우의(友誼)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두 번째 인(人)은 고대 갑골문자에 나타난 의미인 것으로 인(人)은 고대 중국대륙의 동쪽에 사는 족속인 동족(東族) 즉, 동이족(東夷族)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그 중국대륙의 반대편 서쪽의 서족(西族)인 민(民) ― 상형문자로서의 민(民)자는 사람의 한쪽 눈을 바늘로 찌른 형상을 본뜬 노예, 즉 피지배계급의 하층계급 사람의 형상과 그 모습을 본뜬 자이다. ― 에 상대되는 문자로 파악하여 이 인(人)족인 동쪽 동이족(東夷族) 두 사람이 서로 간 주고받는 행위, 행동(二)을 본뜬 자라는 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훨씬 후대에 형성된 의미로 보이는 과실의 씨 속에 있는 싹이 되는 보드라운 부분으로 과실의 씨앗을 의미하는 문자 - 복숭아 씨(桃仁), 살구 씨(杏仁) - 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충분히 유추 할 수 있는 인(仁)이라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문자의미는 사랑과 우의 그리고 어진사람 또는 어진사람들의 행위, 행동, 생활 등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아름다운 풍속과 어진 생각.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운 풍속과 어진 생각의 근원적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과 그런 개념에서 전이된 형이하학적 일반명사인 과실의 씨앗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논어에서 나타난 仁의 개념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논어(論語)에서 나타나는 인(仁)은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들에게 접근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학(儒學)의 개념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이란 개념에서 인(仁)의 형태를 분류해 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문이 바로 논어(論語) 안연(顔淵)편 제 1장의 글이다.
공자의 수제자일 뿐 아니라 가장 학문적 성취가 높다고 평가된 안연(顔淵)이 인(仁)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공자의 답변은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仁이 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간다. 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니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하면서
인(仁)의 본질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인(仁)의 행동세목에 대한 안연(顔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바로 사물(四勿)이라고 일컫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 안연(顔淵)편 제 2장에서의 중궁(中弓)의 인(仁)에 대한 질문에는 그 답변이 안연(顔淵)의 질문에 대한 것에 상당한 대비가 되는 답변으로 중궁(中弓)의 인(仁)에 대한 질문의 답변은
“문을 나갔을 때에는 큰 손님을 뵈온 듯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 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며,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어야 한다.”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하고 답변했다.
이 인(仁)에 대한 공자의 두 가지 답변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분명한 사안은 먼저 안연(顔淵)의 인(仁)에 대한 질문의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일차적 학문에 임하는 자의 수기(修己), 수신(修身)에 그 근본을 두고 즉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을 기본적인 본질인 성(性), 천성(天性)의 보편개념으로서 인(仁)에 도달하려면 그 본질의 천성을 내면으로부터 증명하는 방법 즉 철학적 인식론이 아닌 밖에서 드러나는 인(仁)의 방법적 세목으로서 예(禮)를 말하고 그 예(禮)의 올바른 실천으로서 인간 본성의 회복됨이고, 그 예(禮)의 실천으로 발현된 인간성 회복으로서의 인(仁)을 설명하고 있다. 하다면 인간 본성으로 내재된 인(仁)의 존재를 설명하려 한 그 외재적 존재의 예(禮)란 것은 과연 무엇이던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나와서 지켜야할 가장 본능적인 생존관계정립의 기초인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활동부터 시작하여 그 일상의 개인생활에서 촉발되는 그 모든 개인과 개인간의 인간관계에서부터 여기에서 확장, 확충된 사회 공동체 생활까지에 총집합된 모든 약속과 규칙, 규범 등이 바로 예(禮)이다. 그 예(禮)에서 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아니한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그 외면적 표면적 행위 행동 준칙으로서의 예(禮)에서 “예(禮)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 라고까지 대단히 엄격하고 내밀한 행동준칙으로 예(禮)로서 인(仁)의 수양을 말하며 이는 달리 말하면 인(仁)의 궁극적 도달 방법은 지극한 수기(修己), 수신(修身)으로 이루어지고 이 지극한 수기(修己), 수신(修身)의 인(仁)에 도달하려 한다면 외면적인 예(禮)의 지극함에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내면의 지극한 형태인 인(仁)에 다다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수기(修己), 수신(修身)의 그 엄격함의 시작은 자신으로 시작하여 그 지속됨이 하루로부터 시작하여 이틀, 사흘 그리고 한달, 두 달, 일년, 이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지속되었을 때 비로소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자기완성, 즉 수기(修己)의 지극한 데 이른다고 말하고 있음으로 예(禮)와 인(仁)은 곧 안과 밖과 같고 안이 완성되려고 한다면 바깥에 먼저 충실해짐으로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론으로서 인(仁)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仁)의 또 다른 방법론적 접근법인 일차적 나 자신 스스로의 수신(修身)만이 아닌 이차적 인간관계 즉 남과의 관계로 확장된 치인(治人)으로서의 인(仁)의 설명은 중궁(中弓)에게의 답변으로서 자기 자신의 내면적 세계만이 아닌 상대가 있는 행동과 행위적 결과론으로서의 인(仁)의 내용으로 설명하고 그 행동과 행위에 따른 엄격한 책임까지 병행된 인(仁)으로
“문을 나갔을 때에는 큰 손님을 뵈온 듯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 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며,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어야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두 장의 인(仁)에 대한 설명은 증자(曾子)가 공자의 사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충(忠)과 서(恕) 라고 말한 대목과 일치 하는 바로 제1장에 대한 인(仁)의 행위를 충(忠)으로 설명한다면 제2장의 인(仁)행동은 서(恕)로 말할 수 있겠다.
이 두장의 인(仁)의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을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인(仁)에 대한 생각은 공자가 어떤 경지로 말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안연(顔淵)과 중궁(中弓)에게 설명한 내용으로 보아서는 형이상학적인 인식론적인 인(仁)의 본질에 접근이라기보다는 형이하학적인 방법론적인 접근으로서의 인(仁)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고, 이는 공자 당시에는 인(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인식론적인 인(仁)의 개념에 대한 접근은 그 필요성에서 별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나, 그러한 문제 제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인(仁)은 곧 천성이고 타고난 본성이란 개념이 널리 인식 되어 있기에 별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가 없는 부분인가도 한다.
그런 후자의 생각이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논어 속의 글이 바로 옹야편 제 28장이다.
여기에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만약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어찌 인(仁)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성(聖)에 속한 일인 것이다.
요, 순(堯, 舜)도 (그리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다. 대저 인(仁)이란 것은 자신이 서고자 할 때 남을 세우며 자신이 통달하고 싶을 때 남도 통달하게 한다. 능히 가까운데서 취하여 알 수 있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라 답변했다.
위의 안연(顔淵)편 1,2장의 공자답변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과 그리고 충(忠)과 서(恕)에 대한 방법론적인 인(仁)하는 도리를 말했다면 이 장에서는 평천하(平天下)의 개념에서의 인(仁)의 방법적 도리 잘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평천하(平天下)에서의 인(仁)은 인(仁)의 일반적 개념을 넘어선 보편, 포괄적 개념의 인(仁)으로 성(聖)이라 하고 이 성(聖)은 중용의 성(誠)과 그 개념상의 일치를 보이는 점이 있다.
중용 제20장중에서
“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성케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유학의 기본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중에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치국(治國)에 해당하는 방법적 인(仁)이 위에 말했던 안연(顔淵)편 1,2장의 설명이라면 마지막 평천하(平天下)의 단계의 인(仁), 일차적 수기(修己)와 이차적 치인(治人)을 확장한 천하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인(仁)을 베풀어 천하 모든 사람에 인(仁)의 효용을 미치게 하는 인(仁)의 최종단계에 이르는 방법적 접근법도 그 시원의 출발점은 수신(修身) 수기(修己)로부터 시작함이라 결론지음에 다름 아니고, 이렇게 시작과 끝이 관통하는 하늘의 도리인 인(仁)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존재하는 천성(天性)이란 사실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바라 하여도 별 무리가 없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어에서 인(仁)의 구현에 가장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방법론의 구체성은 일개인의 지극한 수기(修己) 수신(修身)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의 이차적 사회적 관계의 치인(治人)의 방법으로 인(仁)을 실현하여 그 인(仁)이 천하로 확장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고 이는 인(仁)에 대한 설명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유학에서 설명하는 모든 개념의 정리를 이와 같은 원리와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그 어떤 아주 작은 기미에서 우주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도출해 내는 그런 방법론을 다른 유학의 제반 개념에도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3. 중용에서 나타난 인(仁)의 개념.
중용(中庸)은 잘 알려지다시피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여러 고증을 통해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공자의 학문적 덕을 드러낼 목적으로 저술한 책이란 설이 지배적이고 보면 중용(中庸)에서 공자의 사상의 기본적 핵심인 인(仁)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하지만 정작 중용(中庸)을 들여다보면 인(仁)을 직접 인용 설명한 부분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직접적인 인(仁)을 설명한 장은 중용(中庸) 총 33장의 글 중에서 제 20장의 글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20장에서도 애공이 공자에게 정사에 관해 던진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 있으니, 사람을 취하여 자신으로 할 것이고, 자신을 닦되 도로써 하고, 도를 닦되 인(仁)으로써 할 것이다. 인(仁)이란 사람이니,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것이 크고, 의(義)는 마땅함이니, 어진사람을 높이는 것이 큰 것이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도를 구별하는 것과 어진사람을 존중하여 높이는 차등에서 예(禮)가 생기는 것이다.”
(故 爲政 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仁者 人也 親親 爲大 義者 宜也 尊賢 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라 했는데, 이 중용에서 설명한 부분도 논어 안연(顔淵)편 1,2장의 설명과 거의 근사한 부분이고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20장에서 인(仁)에 대한 한 단계 확장된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으니 바로 성(誠)이다.
아마 자사는 인(仁)의 현상적 존재적 형태로서의 모양새에 보다 본래적 근원적 본질로의 원류에로 접근하려 한 시도를 성(誠)에서 찾은 듯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송대 주자는
“자신을 돌이켜 봄에 성(誠)하면 곧 인(仁)이라.”(反身而誠則仁矣)하여
인(仁)의 내밀한 깊숙한 본질의 문제로 성(誠)을 설명하였다.
하여 자사는 인의 근원적 본질적 접근에서의 성(誠)을 설명하기를
“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성케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이라 했는데,
이를 인(仁)으로 바꾸어 말하면
“인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인케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仁者 天之道也 仁之者 人之道也)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도 거듭하여 주장하였듯이 성(誠)이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는 지극한 본래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그 성(誠)을 행함의 성지(誠之)는 그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는 본래의 성(誠)을 진실하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하지 않음으로 고수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늘 본래의 진실 됨과 망령됨이 없는 순수 무구한 성(誠)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성지(誠之)이고 인지(仁之)인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논어에서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안연(顔淵)과 중궁(中弓)의 인(仁)은 중용(中庸)에서는 인지(仁之) 즉 성지(誠之)로 말할 수 있다 하겠다.
하여 자사는 논어에서 말하는 인(仁)의 개념인 사람 자신과 그리고 그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인(仁)의 문제를 보다 근원적인 본질적 차원에서 문제 즉 사람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오는가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인 인(仁)이란 이것은 어디에서 그 근원을 하는 가하는 문제를 하늘과 그 하늘의 뜻에서의 인(仁)과 그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과정의 인지(仁之)를 성(誠)과 성지(誠之)로 설명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맹자에서 나타난 인(仁)의 개념.
자사보다 약 100여년 뒤 사람인 맹자는 자사의 인(仁)에 대한 논구를 보다 한 단계 더 들어가 이제 본질의 인식론적인 개념 하에서의 인(仁)의 원형을 말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는 자사의 학의 이어받아 자사가 인(仁)의 궁극적 모습으로 강조한 성(誠)과 성지(誠之)의 본질을 성(性)에서 찾았다. 이 성자를 해자해보면 마음 심(心)변에 살 생(生)이다. 즉 살아가는 마음, 살음이고 살림이고 사람이다.
이를 중용 제1장에서 “천명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하였으니,
하늘의 명 즉 하늘의 뜻이 곧 살아가는 마음이고 살림이고 사람이란 뜻이다.
하여 맹자는 이 성(性)이 본질적으로 착하다는 논변을 이렇게 주장하였다.
“사람이 그 모든 사람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람이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본다면, 다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제를 어린아이의 부모에게 맺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를 향당의 벗들에게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가 미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으면 사람 아니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시초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시초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시초요, 옳고 그르게 여기는 마음은 지(智)의 시초이다.”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 乍見孺子 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之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라 말했는데,
이를 정리하면 맹자는 사람의 본디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사람은 그 누구나 교육받지 아니하고 강요받지 않는 자연의 상태에서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인 본래 본질의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다른 그 어떤 다른 계산된 생각을 떠올리기 전에 그 아이를 먼저 구하려고 하는 마음 즉 그 우물에 빠지면 죽는 아이를 살리고자하는 마음, 즉 살고자하는 하늘의 마음인 천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여 맹자는 바로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단서가 된다고 갈파하였다. 훗날 주자도 바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정이고 인, 의, 예, 지, 는 성이라.”(惻隱 羞惡 辭讓 是非 情也 仁 義 禮 智 性也)이라 파악했듯이, 맹자 역시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仁之) 즉 성지(誠之)이고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덕(四德)의 주(主)된 인(仁)을 성(誠)으로 파악한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이와 같은 맹자의 마음은 고자와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고자가 말하기를 “ 성품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를 것이니, 사람의 성품이 착하고 착하지 아니함에 구분이 없는 것이 마치 물이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告子曰 性 猶湍水也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 流水之無分於東西也)라 말하자, 맹자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했다.
“물은 진실로 동쪽과 서쪽의 구분은 없지만 위와 아래의 구분도 없는가? 사람의 성품도 착함이 물이 아래로 흐름과 같으니 사람이 착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물이 쳐서 튀게 하면 이마를 지나게 할 수도 있으며, 하류를 막아서 역행을 한다면 산 위를 올라가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사람도 때로 나쁘게 되는 것은 그 성품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今未水 博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勢則然也 人之可使爲不善 其性 亦猶是也)라 하여,
사람의 기본 성정이 흘러가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와 같이 그 본질은 착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인(仁)의 본질적 모습과 형질은 착함에 그 근원을 두는 데, 때로 불선(不善)함에는 그 본질의 인(仁)을 인지(仁之)하는 과정에서의 형세와 성품에 따라 선(善)할 수도 불선(不善)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였으니 본래의 착한 성정인 본성의 선(善)함을 끊임없는 수양과 수신으로 계발하고 적극적인 확충으로 나아가야만 인간이 타고난 본성인 선(善)함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다 강조한다.
더구나 맹자시대는 사회전반에 걸친 혼란과 혼돈이 극에 달했던 전국시대를 살았고 전국시대에는 그 사회 혼란상과 맞물려 온갖 사상들이 일어나 백가가 쟁명하는 사상계의 혼돈과 혼란의 시대였던 바, 더욱이 이러한 혼돈과 혼란을 숙정하여 공자의 인(仁)의 대도(大道)를 이 혼란한 시대에 현양하기위해서는 인간 본연의 본성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파악하여 다른 백가에 비해 공자의 인(仁)의 대도(大道)가 월등한 고급학문임과 동시에 고차원인 철학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5. 송대 성리학과 조선 중기 성리학에서 나타난 인(仁)의 개념.
맹자이후 유학은 중국 고유의 도가사상과 인도에서 전래된 고차원적인 종교적 개념의 우주관과 인성론에 기초한 불교사상의 융성으로 그 빛을 잃는 듯하여 전한(前漢) 이후로는 고대 공맹지학을 훈고하는 수준에 머문 바 없지 않았으나, 11세기 북송시절의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를 거쳐 남송의 대 유학자 주자(朱子)에 이러러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성리학(性理學)의 완성을 보게 됨으로 새로운 철학체계를 갖춘 새로운 학문으로 중국 사상계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주자는 공자와 맹자의 고대 유학에 단지 주석을 다는 훈고학(訓詁學)으로서의 유학만이 아닌 새로운 철학체계를 갖춘 고차원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유학으로 새롭게 변신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도가의 우주론과 불가의 인식론, 인성론에 상당한 영향 하에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새로운 유학체계를 정립하면서 그 철학적 근본을 주역(周易)과 맹자의 사단(四端)과 성선설(性善說)에서 찾았다.
즉 “天命之謂性이요 性卽理이고 理則善이라.”는
명제를 지금까지 논의 되어 왔던 인(仁), 인지(仁之) 즉, 성(誠), 성지(誠之)를 이기(理氣)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꾸어 보다 철학적인체계와 형이상학적 근본적 인식론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우주의 모든 물적 존재의 근원은 본연지성인 이(理)와 기질지성인 기(氣)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본연지성인 사단(四端: 仁義禮智)은 이(理)이고, 기질지성인 칠정(七情: 喜怒哀懼愛惡欲)은 기(氣)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그의 철학적 우주론과 인식론을 말하는데, 이 역시 이(理)는 사단(四端)의 인(仁)을 말함에 다름 아니고, 기(氣)인 칠정(七情)역시 인지(仁之)를 달리 설명함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이런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성리철학이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의해 보다 한 차원 높은 철학체계를 구축하는데 율곡의 관점 하에서 이기론(理氣論)을 살펴보면 율곡 역시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기이원(理氣二元)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주자나 퇴계와 같이 이기이원(理氣二元) 분리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즉 율곡은 이(理)와 기(氣)는 전혀 다른 것이 확실하지만 이 세상의 만사만물이 존재하기위해서는 이기(理氣)가 서로 반드시 만나야만 되는 이치에 근원하여 이기(理氣)는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이고 상호의존적 관계이지 서로 상충하고 충돌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율곡은 이(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고 기(氣)는 형이하자(形而下者)라 규정하고 이를 주역(周易)으로 견주어 본다면 이(理)는 태극(太極)이요 기(氣)는 음양(陰陽)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율곡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은 동시적(同時的)이고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관계이지 선후(先後)의 관계이고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이를 설명하기를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인(二而一)이치로 말하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의 형이상자(形而上者)적 존재로 순선(純善)한 것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의 형이하자(形而下者)적인 실재로서 청탁수박(淸濁粹駁)이 서로 상이하여 선과 악이 서로 공존하는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하여 율곡은 이런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이기(理氣)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의 독창성은 바로 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설에서 연유하는 바이니, 율곡은 바로 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설에서 이(理)는 형체가 없고 기(氣)는 형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理)는 공통되고 기(氣)는 국한 된다. 라고 말하고 이 세상 천하 만사만물이 모두 다름은 바로 기(氣)가 만 가지로 다름에 연유하며 그 만물의 궁극적인 근본이 하나일수 있음은 바로 이(理)의 통함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의 설명 또한 전면에 기술한 인(仁)과 인지(仁之), 성(誠)과 성지(誠之)의 관계에 대한 것을 연역하여 새롭게 정리 표현한 것이다.
6.현대사회에서의 仁의 의미와 그 역할.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유학에서 인(仁)의 개념은 유학이 안고 있는 철학의 기본이 되는 본질이면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며 결과라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仁)의 개념이 현대의 우리생활에 얼마나 밀접한 공효로 다가오는지를 파악하기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그 해답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를 통해 세계 제 1,2차대전과 냉전이라는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과 나찌즘,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과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참혹한 전쟁과 분열 그리고 갈등을 경험했고, 작금에도 미국을 위시한 기독교문화권의 서방세계와 이슬람문화권인 중동국가간의 문화 충돌, 문화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라크전쟁을 위시한 대 테러전쟁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끝없는 분쟁을 현재도 목도하고 있다.
현재 이 지구상의 60억 지구가족 모두 그 누구하나 안전하고 안락하고 평화속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와 같지 않기로 어찌하면 온 인류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 나갈 방도는 과연 없겠는가 하는 새로운 해답이 절실히 요구 되는 이때 공자의 인(仁)사상은 그 해답이 될 것임이 확실하다 하겠다. 그 이유로 유학에서 말하는 인(仁)사상은
첫째로 그 무엇보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이며,
둘째로 인간 상호간의 조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하는 사상이고,
셋째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을 최우선 내세우는 인간우선사상에 있다 하겠다.
위에서도 살펴본바와 같이 공자의 인(仁) 사상은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대명제하에 인간이 즉 인성(人性)이 곧 하늘(天人合一)이라는 철학은 기독교나 이슬람의 하나님이라는 그들 종교의 유일신아래서의 율법과 질서와는 그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공자가 논어에서 갈파한,
“사람이 道(진리)를 넓히는 것이지, 道(진리)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人能弘道 非道弘人)란 말로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각기 다른 하나님의 율법과 질서 상에서 발생되는 온갖 문화적 종교적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 본질의 사유를 바로 인간세계 속에서 진정한 인간, 존엄한 인간, 사랑의 인간을 그 누구의 절대자이고 초월자인 신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공자의 인(仁)사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