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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린 후니 ... 서경덕

임기종 2023. 7. 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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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린 후니 ...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오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약해지니 하는 일마다 어렵구나

높은 저산에 눈도 내려 내 사랑이 올리 없겠지만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스쳐가는 바람소리에

혹시나 님 오시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진다.

 

이게 남자의 진심이다. 그리고 조선조 양반들의 본 모습이다.

속으로 바라고 있지만 체면상 아니면 주위의 눈치, 좋게 말하면

도덕에 어긋나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마음속으로 젊은 황진이를 은근히 기다렸던 것이다.

 

 

서경덕의 자()는 가구(可久) ()는 복재(復齋)라 하였다. 뒤에는 개성 문 밖 화담에 물러나 살면서 학문과 우주의 원리를 궁리하는데 몰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화담선생이라 불렀다.

서경덕은 조선 성종(成宗) 20(1489)217송경(松京 :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번(好蕃) 어머니 한씨(韓氏)를 양친으로 모시고 태어났다. 어머니 한씨는 공자묘(孔子廟)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나서 서경덕을 배었다니 낳기 전에 위대한 학자가 될 숙명을 타고난 것이다.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궁리하는 데 소질이 뛰어났던 것 같다. 서경덕은 집이 가난하여 어렸을 적에 부모들이 봄에 들에 나가 나물을 뜯어오게 하였다. 서경덕은 매일 들에서 늦게 들어오는데 나물은 바구니에 조금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부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까닭을 물으니 소년 서경덕의 대답은 엉뚱하였다.

"저는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들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날은 땅에서 한치를 날고 그 다음 날은 두 치 다시 그 다음날은 새치를 날다가 차차 하늘로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새 새끼의 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치를 생각해 보았으나 터득하지 못하였고 나물도 조금 뜯어서 돌아왔던 것입니다.(朴世采南溪集)

서경덕은 열네살 (1502년 연산군8)서당에 가서 글을 읽었는데 서경의 첫머리 요전에 보이는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여(朞三百六旬有六日) 이란 대목에 이르러 서당 선생은 그 원리를 설명하지 못했다. 서경덕은 성인들이 허황된 말을 썼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물러나 보름동안 골똘히 생각한 끝에 그 이치를 스스로 깨쳤다고 한다. 그리고 열여덟살 되던해 (1506 중종 1)에는 대학을 읽다가 알아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는데 있다는 格物致知의 대목에서 크게 깨닫고 곧 그는 자기가 모르는 사물의 이름을 벽에다 붙여 놓고 밤낮으로 그것을 보면서 궁리하였는데 학문은 옛 책을 읽는 것 보다 궁리하는데서 더 중요한 진리들이 얻어진다고 그는 일찍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스무 한살되던 해(1509 중종 4)에는 빈 방안에 홀로 앉아 여러 날 잠도 자지 않고 밥 먹는 일도 잊은 채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사색에 잠겼었다. 이렇게 3년이 지나자 마침내는 병이 되어서 자연히 언제나 사색만을 일삼게 되었다.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린 것 같다.

이러한 그의 학문 경향 때문에 그의 학문은 너무나 근거 없는 사색의 글인 듯한 느낌이 든다.

논어에서 공자가 일찍이 생각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는데 그는너무 사색으로 기울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여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다 한다.

서경덕 자신이

"나는 스무살이 되면서부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

고 말하고 있으니(朴民獻神道碑銘) 도학자로서의 소질을 타고난 듯하다.

서른 한 살적(1519 중종14)조정에서는 천거과(薦擧科)를 실시하여 120명이 과거에 추천, 서경덕은 그중에서 첫 번째로 추천이 되었는데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마흔 세 살적(1531 중종 26)에는 어머니의 명으로 마지못해 서울에 가서 과거에 응하여 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진작 大科는 끝내 보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쉰 두 살적(1531 중종26)大提學 金安國에 의하여 조정에 추천이 되었고

쉰 여섯살(1544 중종39) 厚陵參奉)이라는 벼슬이 내려졌으나 받기를 사양하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서경덕은 세상에서의 높은 벼슬이나 명예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궁리를 통한 학문 연구와 올바른 몸가짐을 지키면서 조용히 일생을 보냈었다.

서경덕이 생존했던 시기는 고려말에 수입되었던 송나라 성리학이 일단 우리나라 사회에 사조나 학문 사상과의 갈등을 극복하고 이제는 본격적인 사색을 통한 이론의 체계화를 시도하므로써 새로운 儒學을 건설하려던 때이다. 특히 1519년 중종의 己卯士禍 이후로는 대부분의 선비들이 우주의 哲理를 궁리한다는 성리학을 빌어 어지러운 현실을 도피하려는 경향이 짙은 때였다.

이러한 철리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유교보다는 佛敎에 가까운 것이어서 겉으로는 유교를 숭상하면서도 안으로 불교를 떠 받드는 듯한 기미조차 두드러지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조류는 유교편에서 볼 때에는 성리학 발달의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다.

성리학은 피상적으로 살펴 볼 때 대충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주는 학파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철리의 사색을 통하여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철학화 하는 것이요

둘째는 에 입각한 엄격한 행동과 몸가짐, 곧 예교에 입각한 道學者적인 생활의 숭상이다.

서경덕이 위대한 학자로서 명성을 떨친데에는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이와 같은 시대적인 특성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곧 서경덕이 위대한 학자로 명성을 떨친 것은 순전한 그의 학문상의 업적 때문 보다 궁리를 위주로 하는 그의 학문 방법과 도덕실천을 통한 고결하고 엄격한 도학자적인 그의 생활 방식이 여러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개성의 명기로서 가무와 용색(容色)으로 일대를 울린 黃眞伊가 서경덕을 연모한 나머지 琴酒를 가지고 화담으로 찾아가 여러번 유혹해 보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知足禪師는 나의 농락대로 삼십년간의 面壁積功을 허물어뜨렸지만 화담선생은 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선생이야말로 참된 성인이시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애기도 불교에 못지않은 성리학을 통한 그의 학문의 철학적인 깊이와 함께 그의 뛰어난 도덕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일지도 모른다.

황진이 자신이 박연폭포 화담선생과 자기의 셋을 松都三絶이라 하였고 하지만 이것은 황진이 개인의 평가가 아니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서경덕은 이처럼 화담이란 아름다운 고장에 조용히 묻혀 살다가 쉰 여덟살 되던 해(1546 명종 1) 칠월 칠일 날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전 2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으나 죽음을 예감하고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화담으로 메어나가 목욕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는 이 때 임종을 앞 둔 그에게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지 오래라 심경은 편안하기만 하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김학주역 서화담문선에서 (한국자유교육협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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