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연보 외

임기종 2015. 12. 15. 07:27
728x90

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시학} 창간호, 1939.4)

 

  ---------------------------

 

무화과/여 태 전

 

늘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고

입이나 글 따위로 떠드는 것만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고

조용히 타이르고 있다.

 

수다스럽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그 야무진 입술

들뜨고 지친 하루를

달콤하게 적신다.

 

그래

그래

가시돋친 말일랑

이제 그만

버릇처럼 세상을 도마질하며 사는

알량한 내 독선과 아집도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꽃눈 틔우는 삶이여

더 깊고 더 낮게 침잠하는 사랑의 수액

한 움큼 입 안에 머금고

다시 서고 싶어라.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5.12.17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5.12.16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5.12.14
한국현대시와 시조   (0) 2015.12.11
너무도 슬픈 사실 외  (0) 201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