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임기종 2016. 7. 7.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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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金洙暎)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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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自鳴鐘)/최 승 범

 

내 마음 깨워 주는

자명(自鳴) 하나 갖고 싶다

 

허방에 빠지려 하면

"눈 똑바로 뜨라" 따르릉

 

경망한

휘뚝거림이면

"꼴값하라"

따르릉

 

헛된 욕심이면

"나이를 챙겨라" 따르릉

 

이웃을 하찮게 여기면

"너만 사는 세상이냐" 따르릉

 

내 마음

그때 그때 일깨우는

자명 하나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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