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徐廷柱)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남루 : 헌 누더기.
* 지란 : 영지와 난초.
* 눙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현대 공론}, 19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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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드리는 노래 /조 성 국
경칩 머리 꽃물 닮아 미쁘고 미쁜 이여
베옷 한 깃 걸치고 저 하늘에 바친 영가(靈歌)
짝 잃은 흰 뻐꾸기가
청산을 잡고 울다
저 하늘 손모으기 불꽃보다 뜨거워라
피를 토해 율을 풀어 또 한 산을 세우려
달 도는 정화수 곁에
학을 접기 몇몇 해
솔바람 가꿔 가는 좁은 가슴 물든 백발
숱한 말 삼켜 버린 진주조개 같은 님
저 북안 기어 오른 해
님의 뜰에 넘치리.
벗한 달빛 곁에 서면 천리가 지척이라
비 내리는 밤이면 우수로 물든 둘레
쌍촛불 밝힌 자리에
영생의 길 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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