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임기종 2016. 4. 6. 07:46
728x90

 

신부(新婦)   - 서정주(徐廷柱)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시집 {질마재 신화}, 1975)

 

---------------------------

비양도 물길 /윤 금 초

내 나라 바닷속엔 요술 할망 숨어 있는갑다.

개흙 묻은 손 잠그면 쪽물 이내 우러날 듯

뭍에서 멀어질수록 깊어지는 비양도* 물빛.

 

갓물질* 테왁* 너머 숨비 소리, 호오이 소리

까까머리 동자승처럼 볼록 솟은 그 오름의

바람은 긴긴 시간을 바당* 삼킨 섬을 짓는다.

 

정게호미* 거머쥐고, 빗창* 들어 눈 겨누고

'아방 어망 고기나 줍지, 열 길 물 속 죽어 쓰겠니'*

이여사, 이여, 이여사*. 뱃물질*도 숨 겨운데.

 

오몽헤질 때까졍 기영 살아*, 살아야 한다.

한바다 일군 해녀들 거기 그렇게 몸 뉘이고

물미는 신생의 아침을 살아야주, 살아야주.

 

* 비양도 : (제주)우도 동쪽 끝에 자리해 있는 작은 섬.

* 갓물질 :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작업)하는 일.

* 테왁 : 해녀들이 물질할 때 바다 위에 띄워 놓는 뒤웅박.

*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 정게호미 : 해조류를 베는 기구.

* 빗창 : 전복 등을 캐는 길쭉한 쇠붙이.

* '아방 어망 ……' : 제주 민요의 한 대목. '아방 어망'은 아버지 어머니.

* 이여사, 이여, 이여사 : 뱃노래의 후렴.

* 오몽헤질 때까징 기영 살아야주 : 제주 방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6.04.11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6.04.07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6.04.05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6.04.04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201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