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朴寅煥)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T.S.엘리어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都市)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
밭머리에 삽을 꽂고/민 병 찬
밭머리에 삽을 꽂고 뒤를 돌아봅니다
파 일군 이랑 이랑이 파도처럼 살아나서
한 생애 썰물이 지며 다 드러난 저 개펄.
번뇌도 잘 썩히면 무르녹은 거름기.
종자랑 버무려서 함께 넣고 덮노라면
가벼워 새털구름 같은 또 하루가 묻힙니다.
노동의 꽃술 위에 침을 꽂는 꿀벌의 휴식.
아직 남은 밭 뙤야기 더 깊숙이 삽을 넣으려
미도래(未到來),
그
찬란한 강물에 꿈을 헹궈 봅니다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06.01 |
---|---|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05.31 |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05.27 |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05.25 |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