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祖國) -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호박꽃 바라보며 / 정완영
–어머니 생각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 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
― 돌아온 뻐꾸기가
지난해 짓다가 만 집을 올해도 다 못 짓고
아까운 꽃 시절도 낙화시절도 보낸 채로
늘어진 여름 한 철을 또 맞고야 말았구나.
돌아온 뻐꾸기가 저도 보기 민망했던지
후박나무 이파리 같은 푸른 날의 목소리를
우리 집의 용마루 위에 업어다가 자꾸 보탠다.
― 그래도 봄은 오네
세상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지만
그래도 오는 봄을 막을 수야 없잖은가
찬바람 붕대를 푸는 꽃가지를 보더라도.
― 봄이 찾아왔다는데
경부선 고속열차 미역줄기 같은 바람
바람도 봄바람엔 철로길이 휜다는데
황악산 안 갈 수 있나 진초록이 핀다는데.
― 서울의 버들가지
서울의 버들가지는 몸 풀기가 그리 힘든다
목숨도 짐짝 같은 중량교 넘엇길에
상기도 어두운 가지를 드리우고 섰는 버들.
― 연(蓮)과 바람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은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여
바람에 인경 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은가.
- 눈 내리는 밤
산과 들, 마을과 숲, 고목나무 가지까지
한 집안 식구 되어 한 이불 속 잠이 든다
한 밤 내 눈은 내리고 등불 혼자 타는 밤에
- 봄이 오고 있습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봄이 오고 있습니다.
하늘에 소복한 별 씨, 땅에는 숨 쉬는 꽃씨
새들도 이 마을 저 마을 등불 달러 다닙니다.
적막한 봄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 풀에 지쳐 오도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 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을숙도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 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있데.
그래서 목로주점엔 한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落日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부자상(父子像)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 바랜 흰 자락이
왠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사오며,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관악 봄
산은 늙었는데도 봄은 늘상 어린 걸까
숲 속에 들어서면 구슬 치는 산새소리
나무들 키 재는 소리도 내 귓속엔 들려온다.
-초봄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 꽃도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
-분이네 살구나무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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