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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계(花王戒)-설총

임기종 2014. 4. 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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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계(花王戒)-설총

 

 

화왕(꽃 중의 왕, 모란을 말함 )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는데,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맞아 예쁜 꽃을 피우니, 온갖 다른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가지 꽃들이 화왕을 뵈오러 왔다. 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맑은 정기를 타고난 탐스러운 꽃들과 양지바른 동산에서 싱그러운 향기를 내며 피어난 꽃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 왔다. 문득 한 가인(佳人)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 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舞姬)처럼 얌전하게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 몸은 백설(白雪)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薔薇)라고 합니다.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듣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몸을 받아주실는지요?"

이때 베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 머리는 흰 백발을 한 장부 하나가 둔중(鈍重)한 걸음으로 나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몸은 서울 밖 한 길 옆에 사는 백두옹(할미꽃)입니다. 아래로는 창망한 들판을 내려다 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 경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좌우에서 보살피는 신하는 고량(膏粱 고량진미(膏粱珍味)의 준말. ) 과 향기로운 차와 술로 수라상을 받들어 임금님의 식성을 흡족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또 고리짝에 저장해 둔 양약(良藥)으로 임금님의 양기를 돕고, 금석(金石)의 극약(劇藥)으로써 임금님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군자된 자는 비록 사마(絲麻)가 있다고 해서, 관괴(管 풀, 수초(자리 만드는 재료) , 곧 사마(絲麻)보다 못한 것. ) 버리는 일이 없고, 부족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신하가 아뢰되,

" 두 사람이 왔는데 임금님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하니 화왕께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부의 말도 도리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가인을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할꼬?"

장부가 앞으로 나와,

"제가 온 것은 임금님의 총명이 모든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뵈오니 그렇지 않으십니다. 무릇 임금된 자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는 드뭅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 漢나라의 어진 인재였으나 벼슬이 낭관에 그침)은 낭관(郎官: 尙書(상서)를 보좌하는 역 )으로 파묻혀 머리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오니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말씀드렸다. 화왕께서는 마침내,

"내가 잘못했다."고 되풀이했다. <삼국사기> 열전 설총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