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체 소설 기타

정시자전(丁侍者傳)-석식영암

임기종 2014. 4. 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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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자전(丁侍者傳)-석식영암

 

 

입동날 새벽, 식영암은 암자 안에서 벽에 기대앉은 채 졸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누군가가 뜰에 대고 절을 하면서 말하였다.

"새로온 정시자가 문안 여쭙니다."

식영암은 이상히 여기며 밖을 내다 보았다. 거기에는 사람 하나가 서 있는데, 몸이 몹시 가늘고 키는 크며 색이 검고 빛났다. 붉은 뿔은 우뚝하고 뾰쪽하여 마치 싸우는 소의 뿔과도 같았다. 새까만 눈망울은 툭 튀어나와서 마치 부릅뜬 눈과 같았다. 이 사람은 기우뚱거리면서 걸어 들어오더니 식영암 앞에 우뚝 섰다. 식영암은 처음엔 놀랐으나 천천히 글 불러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오게. 자네에게 우선 물어 볼 것이 있네. 왜 자네의 성은 정(丁)인가? 또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는가? 더구나 나는 평소의 자네 얼굴도 모르는데, 시자(侍者)라고 하니 그건 또 어찌 된 연유인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시자는 깡충깡충 뛰어 더 앞으로 나오더니 공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옛날 성인에 소의 머리를 한 분이 있어 포희씨라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또 여와는 뱀의 몸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제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저를 낳아서 숲 속에 버리고 기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리를 맞고 우박을 맞으며 얼고 말라서 거의 죽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따스한 바람과 비를 만나 다시 살아나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추위와 더위를 천백 번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라나 인재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를 지나서 진나라 세상에 이르러 저는 범씨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이 때 비로소 몸에 옻칠을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와서는 조로의 문인이 되었고, 또 철취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그 뒤에 저는 정도 땅에서 놀았습니다. 이 때 정삼랑을 길에서 만났지요. 그는 저를 한참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생김새를 보니 위로는 가로 그어졌고, 아래로는 내리 그어졌으니 내 성 정자와 똑같이 생겼네. 내 성을 자네에게 주겠네.' 저는 이 말을 듣고 그의 말이 좋아서 성을 정으로 하고 고치지 않으려 합니다. 저의 직책은 사람들의 옆에서 붙들어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자연 모든 사람들이 저를 부리기만 해서 제 몸은 항상 천하고 고달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히 저를 부리지 못합니다. 때문에 제가 진심으로 붙들어 모시는 분은 몇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제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이제 저는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토우인에게 비웃음을 당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온데 어제 하느님이 저의 기구한 운명을 불쌍히 여겼던지 저에게 명하셨습니다. '너를 화산(花山)의 시자로 삼가서 섬길지어다.' 이에 저는 하느님의 명을 받들고 기뻐서 외다리로 뛰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장로께서는 용납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식영암이 말했다.

"아! 후덕스러운 일이로구나. 정상좌는 옛성인이 남겨준 사람이로다. 몸의 뿔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씩씩함이요, 눈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용맹스러움이로다. 몸에 옻칠을 하고 은혜와 원수를 생각한 것은 믿음과 의리가 있는 것이로다. 쇠주둥이를 가지고 재치있게 묻고 대답하는 것은 지혜가 있는 것이요, 변론을 잘 하는 것이로다. 사람을 붙들어 모시는 것을 직책으로 삼는 것은 어진 것이요, 예의가 있는 것이며, 돌아가서 의지할 곳을 택하는 것은 바름이요, 밝은 것이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덕을 보아서 길이 오래 살고, 조금도 늙거나 또 죽지도 않으니, 이것은 성인이 아니면 신이로다. 그중에 나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다. 그러니 너의 친구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너의 스승이 될 수가 있겠느냐? 화도에 화라는 산이 하나 있다. 이 산 속에 각암이라는 늙은 화상이 지금 2년 동안 머물고 있다. 산 이름은 비록 같지만 사람의 덕은 같지 않으니, 하늘이 그대에게 명하여 가라고 한 곳은 여기가 아니고 바로 그곳일 것이다. 그대는 그곳으로 가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식영암은 노래를 부르면서 그를 보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정(丁)이여! 어서 빨리 각암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라. 나는 여기서 박과 외처럼 매여 사는 몸이니, 그대만 못한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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