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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전(竹婦人傳)-이곡

임기종 2014. 4. 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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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전(竹婦人傳)-이곡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사람 운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창랑씨(蒼 氏)로부터 시작한다. 조상이 음률을 잘 해득하였으므로, 황제(黃帝)가 그를 뽑아서 음악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우(虞)나라 때의 소(簫) 역시 그 후손이다. 처음 창랑은 곤륜산(昆侖山) 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옮겨 와서, 복희씨(伏羲氏) 때에 위씨(韋氏)와 함께 문적에 관한 일을 보아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모두 사관(史官)의 자리를 맡아 왔다. 진(秦)나라는 포악한 정사를 하였다. 이 사(李斯)의 계략을 받아들여 모든 책들을 불사르며 선비들을 묻어 죽였다. 이렇게 되자 창랑의 자손들은 점점 한미(寒微)해 졌다. 한(漢)나라 때에는 채 윤(蔡倫)의 문객 저생(楮生)이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 위인이 경박해서 남 헐뜯기를 좋아했다. 죽씨의 그 강직한 모습을 싫어하여 몰래 헐뜯다가, 마침내 죽씨의 소임까지 빼앗아 갔다. 주나라 때눈 간(竿)이 있었다. 그도 역시 죽씨의 후손이다. 그는 태공망과 함께 위빈에서 낚시질을 했다. 어느날 태공은 낚시에 쓸 갈고리를 만들었다. 이것을 본 간이 태공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고리가 없다고 합니다. 낚시의 크고 작은 것은 굽고 곧은 데가 있습니다. 곧은 낚시는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낚시는 겨우 물고기를 낚는 데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태공은 간의 말을 옳게 여기고 그 말대로 좇기로 했다. 뒤에 과연 태공은 문왕의 스승이 되어 마침내 제(濟) 나라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이에 태공은 간이 어질다고 임금에게 천거하여 위빈을 식읍으로 삼게 했다.

이것이 바로 죽씨와 위빈이 관계를 맺게 된 유래이다. 지금도 죽씨의 자손은 수없이 많이 퍼져 있다. 이를테면 임,어,군,정이 곧 그들이다. 이 자손 중에서 양주로 옮겨 간 자들이 있다. 이들은 조, 탕이라고 한다. 또 오랑케 땅으로 들어간 자는 봉이라 한다. 죽씨에게는 대개 문과 무의 두 줄기가 있다. 대대로 변, 궤, 생, 우처럼 대체로 예악에 소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는 활 쏘고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작은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적(典籍)에 실려 있어 대의 마디마디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오직 감만은 성질이 몹시 둔했다. 속이 꽉 막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운의 대에 이르러서 숨어 살면서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죽씨의 자손에 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형과 함께 욕심 없이 살았다. 특히 왕 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자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루도 그대[此君) 없이는 살 수 없소."

이로부터 그의 호를 차군(此君)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유는 단정한 사람으로서 벗을 사귀는데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과 사귀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을 알 만하다. 당은 익모(益母)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죽부인(竹夫人)은 바로 그 딸이다. 처녀 때에 그는 정숙한 자태를 지녔다.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란한 노래를 지어 마음을 떠보았지만, 부인은 화를 내며,

"남녀가 비록 다르지만 그 절개는 하나밖에 없다. 한 번 남에게 절개를 꺾이게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설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의남은 부끄러워서 달아났으니, 어찌 소나 끄는 사람들이 엿볼 수 있는 것이랴.

송 대부가 예를 갖추어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그 부모는 말하였다.

"송 공은 참으로 군자다. 그의 지조와 행동을 보니 우리와 짝이 될 만하구나."

마침내, 그와 결혼하였다. 이로부터 부인의 성질은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흑 일을 분별함에 임하여서도 그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무엇을 쪼개는 것과 같았다. 비록, 매선(梅仙)의 유신(有信)이나 이씨(李氏)의 무언(無言)일지라도 불고하였거늘, 하물며 그의 이러한 성질을 늙은 귤이나 살구 열매 따위에 비교할 수 있으랴!

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바람을 시로 읊고 비를 휘파람으로 즐겼나니, 그 말쑥한 태도를 무엇으로 형용하랴. 호사자(好事者)들은 남몰래 그 얼굴을 그려 전하면서 보배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문 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이 더욱 이를 좋아했다. 송 공은 부인보다 나이가 십 팔 세나 위였다. 늦게 신선이 되어 곡성산(穀城山)에서 놀다가 돌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부인은 혼자 살면서 왕왕 시경(詩經)의 위풍(衛風)을 노래하였다. 자연히 마음이 흔들려 혼자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부인의 성품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해인가 오월 십 삼일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겨 살다가 술에 취하여 고갈병(枯渴病)에 걸려 끝내 고치지 못했다. 병을 얻은 후부터 항상 남에게 의지해 살았다 부인은 만절(晩節)이 더욱 굳었으므로 향리의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또 삼방 절도사(三邦節度使) 유균(惟菌)의 부인과도 성이 같았다. 그녀의 행실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져서 절부(節婦)의 직함을 받았다.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竹氏)의 조상이 크게 상세(上世)하여 공이 있었고, 그 묘예(苗裔)들이 다 재능이 있어 절(節)을 항(抗)하여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함이 어찌 헛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