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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임기종 2014. 4.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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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평양은 옛 조선의 도읍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1)이 상(商)나라2)를 정벌한 후 기자(箕子)3)를 찾아가니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설파하였다. 이에 무왕은 조선을 기자에게 주고 임금으로 봉한 후 신하로서 대하지 않았다.

평양의 빼어난 곳을 말하자면 금수산(錦繡山)4)과 봉황대(鳳凰臺)5), 능라도(綾羅島)6), 기린굴(麒麟窟)7), 조천석(朝天石)8), 추남허(楸南墟)9) 등이 있는데 모두 옛 유적들이다. 영명사(永明寺)10)의 부벽정(浮碧亭)11)도 그중 하나이다.

영명사는 동명왕이 건립한 구제궁(九梯宮)의 터에 있다. 평양성 외곽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큰 강을 굽어보고 넓은 평원을 바라보며 아득히 끝을 찾을 수 없으니 진정으로 빼어난 경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잇배와 장삿배가 저녁 무렵 대동문(大同門)12) 너머 버드나무 숲이 우거진 물가에 정박하면 사람들은 조류(潮流)를 따라 올라와서 이곳을 마음대로 구경하고 극진한 즐거움을 맛본 후 돌아가곤 했다.

정자 남쪽에는 돌을 깎아 만든 층계가 있는데 그 왼편은 청운제(靑雲梯), 오른편은 백운제(白雲梯)라고 새기고 화주(華柱)를 세웠으니 호사가들이 감상할 만했다.

천순(天順)13) 초년, 송경(松京)14)에 홍씨 성을 가진 부유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는 젊고 용모가 수려해 의젓한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또한 문장에도 뛰어났다.

중추절이 되자 친구들과 함께 실을 사기 위하여 포목을 배에 싣고 성 안에 들어와 강가에 정박해 두었다. 성 안의 이름 있는 기생들은 모두 성문 밖으로 나와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성 안에 살던 오랜 친구인 이 서생은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거나하게 취한 홍 서생은 배로 돌아갔는데, 밤공기가 서늘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장계(張繼)15)의 ‘풍교야박(楓橋夜泊)16)’을 떠올리니 맑은 흥취를 참을 수 없었다. 작은 배를 타고 달빛을 받으며 노를 저어 올라가며 흥취가 다하면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부벽정 아래에 도착하였다.

홍 서생은 뱃줄을 갈대숲에 매어 두고 사다리를 타고 누대에 올라갔다. 난간에 의지하여 경치를 바라보며 맑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이때 달빛은 바다와 같이 넓게 비추고 물결은 비단과 같이 곱게 흔들렸다. 기러기는 물가 백사장에서 울고 학은 소나무에 내린 이슬에 놀라니, 그 서늘한 기운은 맑고 넓은 하늘나라 궁전에 올라온 것만 같았다.

옛 도읍을 바라보니 하얀 성가퀴17)에는 연기가 끼어 있고 쓸쓸한 성에는 물결이 부딪치고 있었다. 홍 서생은 맥수은허(麥秀殷墟)18)의 탄식이 북받쳐, 이에 여섯 수의 시를 지었다.

“허무한 마음 이기지 못해 패강(浿江)19) 정자에서 시를 읊으니

구슬픈 강물 소리 애간장 끊는구나.

옛 나라 장한 기운은 이미 사라졌나.

황량한 성터는 옛 자취 그대로인데.

백사장 달빛 어려 기러기 갈 길 잃고

연기 걷힌 뜰 위엔 반딧불만 날아다녀.

풍경은 쓸쓸하고 세상은 바뀌었으니

한적한 산사(山寺)에선 종소리만 울리도다.20)

옛 궁궐 바라보니 가을 풀만 쓸쓸해

구름 가린 섬돌은 길조차 아득하네.

기생과 놀던 관사(館舍) 옛 터 잡초만 무성하고

성가퀴에 뿌연 달빛 밤까마귀 울고 가네.

풍류스럽던 옛 영광 먼지가 되었으니

적막한 빈 성 안엔 질려(蒺藜)21)만 널려 있네.

오직 강물만이 옛 모습 그대로니

도도히 흘러내려 서쪽 바다로 가는구나.

패강(浿江)의 물은 쪽보다 푸른데

천고의 흥망이야 감당하기 어렵겠지.

금정(金井)22)엔 물 말라 노박덩굴만 얽혔는데

이끼 낀 돌담은 나무들로 덮여 있네.

타향 풍월이야 천 수나 읊었고

옛 왕조 정회에 술이 반쯤 취하는데,

마루엔 환한 달빛 졸음은 달아나니

밤이 깊을수록 계수나무 그림자 길어지네.

한가위 달빛이야 곱고도 고운데

옛 성 바라보니 정한(情恨)만 솟구쳐.

기자묘(箕子廟)23) 뜰 앞엔 큰 나무 늙어 가고

단군사(檀君祠)24) 벽 위엔 여라(女蘿)25) 푸르도다.

스러진 영웅들 지금은 어디 있나.

듬성한 초목들 몇 해나 되었는지.

오직 그 옛날 둥근 달만 남아 있어

맑은 빛 흘러내려 옷깃을 비추도다.

동산에 달 뜨니 까막까치 날아오르고

깊은 밤 찬 이슬 옷 속으로 스며들어.

천년 전 살던 모습 다한 지 오래이고

만고의 산하라지만 성곽은 사라졌네.

동명왕 조천(朝天)하고 돌아오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전한 말씀 그 누가 전해 줄까.

금수레 기린마(麒麟馬) 어디로 가 버렸나.

잡초 자란 행차길로 스님 홀로 지나가네.

정원에 무성한 풀 가을이슬에 시들었고

청운교 백운교는 마주보고 걸려 있네.

수군(隋軍) 영혼들 울부짖는 여울목26)

슬피 우는 매미는 동명왕의 화신(化身)일까.

연기 덮인 치도(馳道)27)에 보연(寶輦)28)은 다니지 않아

행궁 솔밭에는 저녁종 울려퍼지네.

높이 올라 시 지어도 감상해 줄 이 없건만

달 밝고 바람 맑으니 흥은 가시지 않네.”

홍 서생은 시 읊기를 마치고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주춤주춤 춤을 추었다. 그는 매 한 구가 끝날 때마다 몇 차례씩 흐느껴 울었다. 비록 뱃전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면서 화답해 주는 음악은 없었지만, 마음속 깊이 강개(慷慨)함을 느꼈다. 이는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교룡(蛟龍)이 춤을 추게 하고, 외딴 배 위의 과부가 눈물 흘릴 만하였다.

시 읊기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니,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서쪽으로부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홍 서생은 영명사의 스님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놀랍고 의아하게 여겨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앉아서 오는 사람을 기다리니 나타난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머리를 갈라 땋은 두 명의 시녀가 여인의 좌우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옥자루가 달린 불자(拂子)29)를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얇은 비단으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인은 몸가짐이 엄숙하고 차림이 단정하여 귀한 집안의 처녀 같았다.

홍 서생은 계단에서 내려와 담장 틈에 몸을 피하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여인은 남쪽 난간에 기대어 서더니 달을 바라보며 조그만 소리로 시를 읊었다. 그 풍류스러운 태도에는 엄숙함과 순서가 있었다. 시녀가 비단으로 만든 자리를 받들고 다가갔다. 여인은 안색을 고치고 자리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여기서 누가 시를 읊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꽃과 달의 요정이 아니며, 걸음마다 연꽃이 피던 반비(潘妃)도 아니다. 다행히 오늘밤 장공만리(長空萬里) 구름 걷힌 광활한 하늘에 얼음바퀴 같은 달 뜨고 은하수는 맑으니, 계수나무 열매는 떨어지고 경루(瓊樓)30)는 서늘하다. 한 잔 술에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정을 이야기하려 했건만, 이같이 좋은 밤을 어찌 보내리.”

홍 서생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늘게 기침을 했다. 여인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녀를 보내어 청하였다.

“주인 아씨께서 모시고 오라십니다.”

서생은 조심스럽게 나아가 절을 하고 꿇어앉았다. 여인은 그다지 공경하지 않은 태도로 그저 말하기를,

“그대도 이곳으로 올라오십시오.”

시녀가 낮은 병풍으로 그들 사이를 언뜻 가렸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얼굴의 반만을 서로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방금 전 시를 읊던 사람 같은데, 그 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게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홍 서생은 한 자 한 자 외워 설명해 주었다. 여인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역시 나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인은 시녀에게 즉시 명하여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차려진 음식들은 인간 세상의 것들과는 달라 보였다. 시험삼아 씹어보았지만 굳고 단단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 술 또한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여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속세의 선비가 어찌 신선이 마시던 백옥례(白玉醴)와 규룡(虯龍)31)을 잡아 만든 홍규포(紅虯脯)를 알겠습니까?”

이어 시녀에게 말하기를,

“너는 속히 신호사(神護寺)32)로 가서 공양밥을 조금 얻어 오너라.”

시녀는 분부대로 절로 갔다가 잠시 후에 밥을 얻어 돌아왔다. 하지만 반찬이 없었다. 여인은 다시 시녀에게 말하기를,

“너는 주암(酒巖)33)으로 가서 반찬을 가져오너라.”

잠시 후 잉어구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홍 서생은 그것을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여인은 이미 그의 시에 대하여 그 뜻을 화답하는 시를 향내나는 종이 위에 써놓았다. 그녀는 시녀로 하여금 시를 가져다가 홍 서생에게 전하게 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 밤 동쪽 정자엔 달빛도 밝은데

그 같은 맑은 얘기에 이는 감개 어찌할꼬.

나무는 푸른 일산(日傘)처럼 펼쳐 있고

강물은 넘쳐 흘러 흰 비단처럼 둘러 있네.

새 같은 세월이야 홀연 지나갔지만

물결 같은 세상은 변하고 또 변했겠지.

오늘 저녁 품은 정회 그 누가 알아주리.

뜸한 종경(鐘磬)34) 소리만이 옛 터에서 들려오네.

옛 성 남쪽 바라보니 강줄기 갈리는데

푸른 물결 하얀 모래에 기러기 떼 울고 가네.

기린마(麒麟馬) 돌아오지 않으니 용은 이미 승천했고

퉁소소리 이미 끊겨 남겨진 것은 흙무덤뿐.

촉촉한 청람(晴嵐)35)에 시흥(詩興)이 일어나니

인적없는 절간도 술에 반쯤 취한 듯.

구리 낙타 가시덤불로 떨어짐을 참고 보았으니36)

천 년의 영화로움은 뜬구름이 되었구나.

풀 아래 애매미 쉴새없이 울어대고

높은 정자 올라서니 상념이 아득해.

비 그치고 구름 끼니 지난 일 서글퍼

낙화유수(落花流水) 바라보면 세월은 빛과 같아.

깊어지는 가을날 조수(潮水) 소리 장하고

누각 잠긴 강물엔 서늘한 달빛만.

그 옛날 바로 이곳 얼마나 화려했나.

무너진 성 성근 숲은 보는 이 슬프게 해.

금수산(錦繡山) 아래라서 비단을 덮었는지

강가의 단풍나무 옛 성터를 가리우네.

어디서 울리는 걸까, 쓸쓸한 다듬이 소리.

어여차 뱃노래 싣고 고깃배 돌아오네.

암벽에 기댄 늙은 나무 담쟁이 얽혀 있고

풀숲에 누운 잘린 비석 이끼에 덮여 있네.

말없이 난간 잡고 옛일을 가슴 아파하니

달빛과 물소리 모든 것이 슬픔일세.

듬성듬성 옥경(玉京)37)에 뜬 별

은하수 맑고 투명해 달빛은 교교하네.

옛날의 영광도 이젠 모두 허사 되어

다음 세상 알 수 없어 이승에서 만났구나.

좋은 술 한 동이에 마땅히 취해 보세.

속세의 삼척검(三尺劍)일랑 모두 접어두고.

만고의 영웅들도 흙먼지가 되었으니

세상에 헛되이 남은 것 죽은 뒤의 이름이라네.

밤은 어찌 이리 깊어만 가는가.

낮은 성벽에 걸린 달은 둥글어 가네.

그대는 지금부터 속세를 떠났으니

나와 함께 마음껏 즐기리라.

강 위의 경루(瓊樓)에는 사람들 흩어지고

섬돌 앞의 고운 나무 첫이슬 내리는데,

이후 다시 만날 날을 알고 싶다면

봉래산(蓬萊山) 복숭아 익고38) 푸른 바다 말라야 하네.”

홍 서생은 그 시를 읽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돌아갈까 봐 두려웠다. 홍 서생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물었다.

“감히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성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가문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여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는 은(殷) 왕조의 후예인 기(期)씨의 딸입니다. 내 선조39)는 이 땅의 왕으로 봉해지셔서 예악(禮樂)40)과 전형(典刑)41) 모두 탕왕(湯王)42)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팔조(八條)43)로써 백성들을 가르치니 그 찬란한 문물은 천 년을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의 운세가 쇠하여 재앙과 환난이 닥치게 되니 선고(先考)44)께선 보잘것없는 도적에게 패하니, 마침내 나라를 잃게 되었습니다. 위만(衛滿)45)이 이 시운(時運)을 타고 왕위를 차지하니 기자조선의 왕업은 여기서 끊어진 것입니다. 연약한 나는 어지러운 지경으로 빠져들어 정절을 지킬 생각으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나라의 시조이다. 나라를 세운 후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이미 수천 년을 살아왔다. 너는 능히 나를 쫓아 하늘나라의 궁전으로 가서 아무 근심 없이 즐거움을 누리지 않겠느냐?’ 하시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분은 마침내 나를 이끌고 거처하시던 곳으로 가서 따로 별당을 지어 나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현주(玄洲)46)의 불사약(不死藥)을 먹게 하시니, 몇 달이 지나자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건강해지더니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것이 마치 속기(俗氣)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후로 나는 하늘 위를 노닐고 사방을 날아다니며 동천복지(洞天福地)47)와 십주삼도(十洲三島)48)를 빠짐 없이 유람했습니다. 하루는 가을 하늘이 맑고 옥황상제가 계시는 궁전이 밝게 빛났습니다. 달빛이 물과 같으니 달 속의 섬계(蟾桂)49)가를 바라보며 갑자기 먼 곳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달에 올라 광한전(廣寒殿)50)에 들어가서 수정궁(水晶宮) 안에 있는 항아(姮娥)를 만났습니다. 항아는 내가 정절이 굳고 문장을 잘한다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아래 세상의 선경(仙境)은 비록 복지(福地)라고 하지만 모두 번잡함을 피할 수 없는 속세에 불과하오. 어찌 하늘나라에서 백로를 타고, 붉은 계수나무의 맑은 향기를 맡으며, 푸른 하늘 달빛과 어울려 옥경(玉京) 위를 노닐고, 은하수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으리요?’ 하고는, 즉시 나를 향안(香案)51)을 받드는 시녀로 삼아 곁에 있게 해주니, 그 즐거움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밤 문득 향수가 일어났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 세상을 돌아보고 싶지는 않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곁눈질하니 산천 경물(景物)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얀 달빛이 연기와 먼지를 가리고 맑은 이슬이 흙과 잡초 위에 내렸기에, 옥경을 잠시 하직하고 하계로 내려와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이 부벽정에 올라 정회를 풀고 있던 참입니다. 우연히 당신을 만나니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대의 옥구슬같이 훌륭한 문장에 얼떨결에 둔한 붓으로 화답했으니, 감히 글을 지었다고 할 수 없고 단지 내 마음을 술회한 정도로만 알아두십시오.”

홍 서생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아래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이니 초목과 한가지로 썩는 것을 달게 받고 있습니다. 어찌 왕손이신 천상의 선녀와 더불어 시를 화답하는 것을 바랐겠습니까?”

홍 서생은 자리에 앉았다. 아까의 시는 이미 한 번 보고 기억한 터라 다시 엎드려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인은 전생의 업(業)이 많아 신선의 음식은 먹을 수 없지만, 요행히 자획(字劃)은 조금 알고 있는 터라 선녀께서 지으신 시를 대충 이해할 수 있으니, 진실로 기이한 일입니다. 본디 네 가지 좋은 일은 함께 갖춰지기 어려운 법입니다.52)

청하건대 다시 한 번 ‘강가 정자에서 가을밤에 달을 감상하다’라는 제목으로 40운의 시를 지어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아름다운 여인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붓에 먹을 찍어 단번에 내려 썼다. 그 모양은 구름과 연기가 서로 얽힌 듯했다. 홍 서생이 달려가 읽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달빛 교교한 부벽정

높고 먼 하늘엔 옥 같은 이슬.

맑은 빛 하한(河漢)53)에 잠기니

상서로운 하늘 기운 오동나무를 뒤덮도다.

밝고 깨끗한 삼천 리 강산에

곱고 고운 십이루(十二樓)54)

.

비단 구름은 티끌 하나 없는데

산들바람은 눈 앞을 스치네.

넘실넘실 흐르는 물 따라

띄엄띄엄 떠나는 배.

쑥대로 만든 문틈 엿보고

모래톱 물억새꽃 살짝 비추는데.

들리는 듯 예상곡(霓裳曲)55)

옥도끼는 눈에 선해.

진주조개는 패궐(貝闕)56)

물소떼는 염부(閻浮)57)로.

지미(知微)58)와 달을 보고

공원(公遠)59) 좇아 놀아 보세.

달빛에 놀란 위작(魏鵲)60)

달그림자에 헐떡이는 오우(吳牛)61)

.

달빛은 청산벽해(靑山碧海)에

은은히 맴돌고 있네.

그대와 더불어 문을 열고

흥 따라 주렴(珠簾)을 거둬 보세.

이백(李白)은 술잔 멈추고62)

오강(吳剛)은 계수나무 베었지.63)

흰 병풍은 광채가 찬란하고

비단 휘장 곱게 수놓았네.

보물 거울은 걸려 있고

얼음 바퀴는 구르는데,64)

잔잔한 금빛 물결

어찌나 유유한지.

검을 뽑아 요사한 두꺼비65)를 베고

비단 그물 넓게 펼쳐 교활한 토끼놈66) 잡아 보세.

하늘엔 비 개이고

오솔길 연기 끊겼네.

누각을 둘러싼 천 그루 나무들

섬돌에 서서 만 길 못 굽어보네.

누가 관하(關河)67)에서 길을 잃었는가,

고향에서 요행히 동무를 만났다네.

도리화(桃李花)처럼 서로를 아끼며

술잔을 주고 받아,

좋은 시로써 각촉(刻燭)68)을 다툴지니

술은 물론 투호(投壺)69)까지 있지 않는가.

화로에서 타오르는 오은(烏銀)70) 조각

솥에선 물거품 보글보글.

용연향(龍涎香)71)은 수압(睡鴨)72)에서 피어오르고

맑은 술은 나무 술잔에서 찰랑이네.

소나무 위에선 학의 울음소리

벽 뒤에선 애매미 울음소리.

호상(胡牀)73)에서 못다한 얘기야

물가로 나아가서 더할 수 있겠지.

흐릿하게 보이는 황폐한 성

쓸쓸한 초목은 빽빽하기만 해.

푸른 단풍은 흔들흔들

누런 갈대는 우수수.

선경(仙境)은 광활한데

인세(人世)는 빠르게 돌아가네.

옛 궁전엔 벼와 기장 이삭

들판 사당에는 가래나무와 뽕나무 덩굴.

방취(芳臭)74)는 부서진 비석으로 남으니

흥망이야 물가 갈매기들에게나 물어 볼까.

섬아(纖阿)75)는 차고 또 기우는데

누괴(累塊)76)는 얼마나 하루살이 같은지.

옛 궁궐은 절이 되고

옛 임금은 호구(虎丘)77)에 묻혔네.

반딧불 휘장에 어른거리네,

깊은 숲 도깨비불처럼.

옛일에 눈물 흘려도

지금 슬픔은 더해만 가네.

단군(檀君)의 자취 목멱산(木覓山)78)에 남았고

기자(箕子)의 도읍 해자(垓子)79)만 남았는데,

굴 속엔 기린마(麒麟馬)의 자취

너른 평원엔 숙신(肅愼)80)의 화살.

난향(蘭香)81)은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하고

직녀(織女)도 푸른 용을 타고 올라가야 하네.

선비는 붓을 멈추고

선녀는 감후(坎侯)82)를 멈추었네.

이 노래 끝나면 이별인데

깨끗한 바람 위로 노 젓는 소리만.”

여인은 쓰기를 마치자 붓을 허공에 던지고는 사라져 버렸다. 홍 서생은 그녀가 간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사라지기 이전 시녀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였다.

“옥황상제의 명이 지엄하여 나는 이제 난새를 타고 갑니다. 우리의 맑은 이야기가 다하지 않았으니 마음 깊숙이 섭섭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잠시 후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땅을 휩쓸어 홍 서생이 앉아 있던 자리를 걷어 갔다. 여인이 쓴 시도 사라졌는데, 역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대개 이런 이유는 선계의 신비한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전파하기를 꺼리기 때문일 것이다.

홍 서생은 말을 잊고 서서 방금 전 겪은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꿈 같기고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으며, 사실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홍 서생은 난간에 기댄 채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녀가 한 말을 모두 기록하였다. 좋은 인연을 신기하게 만난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마음속의 정회를 다 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시 한 수를 지었다.

“양대(陽臺)에서 하룻밤 운우지락(雲雨之樂)

어느 해에 그녀 다시 퉁소 불며 돌아올까.

흐르는 물결이야 무정타 하지만

슬피 울며 이별 없는 세상으로 가는 듯하구나.”

시를 읊기를 마치고 사방을 살펴보니 산사(山寺)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물가 마을에서는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달은 이미 서산을 넘어갔고 샛별만이 반짝이는데, 단지 뜰 안에선 쥐가 찍찍거리고 마루 아래에선 풀벌레만 울 뿐이었다.

서생은 쓸쓸하고 슬프며, 숙연하고 두려운 생각도 들어 더 이상 부벽정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우울함이 쌓이고 쌓인 채 먼저 대었던 물가에 정박하니, 친구들이 다투어 물었다.

“어젯밤에 어디서 잤는가?”

서생은 속여서 말하기를,

“어젯밤 낚시대를 들고 달빛을 따라 장경문(長慶門)83) 밖 조천석(朝天石) 근처에서 비단잉어 낚시를 했지. 그런데 날씨가 추워 물이 차가워 한 마리도 낚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나.”

친구들 중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후 홍 서생은 여인을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어지럽고 말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더니, 어느 날 꿈속에서 엷게 단장한 어떤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주인 아씨께서 선비님에 관한 얘기를 옥황상제께 말씀하셨습니다. 상제께서는 당신의 재주를 아까워하시며, 하고(河鼓)84)의 막하(幕下)에 예속시켜 하늘 관리로 삼으셨습니다. 상제께서 직접 내리시는 명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홍 서생이 깜짝 놀라는데 꿈이 깨었다.

홍 서생은 집안 사람들에게 일러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향을 피우고 땅을 청소하고는 뜰에 자리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는 턱을 괴고 잠시 누워 있더니, 잠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구월 보름이었다.

빈소를 차린 지 며칠이 지나도록 얼굴색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가 신선을 만나 죽음의 질곡에서부터 해탈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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