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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연애박사들의 야망과 사랑

임기종 2014. 5. 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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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연애 박사들의

야망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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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다 -박덕은지음  / 한솔미디아

 

 

 

 

 

 

 

 

 

 

 

 

 

 

 

 

 

 

 

 

머리말

과연 어떻게 사는 삶이 가장 멋있고 후회가 없을까? 혹시 사랑이 있고 정열이 있고 또 낭만이 있는 연애로 이어 진 삶이 아닐까? 싱그럽고 아름다운 연애를  한 삶, 온 정성을 다하여 열애를 꾸려가는 삶, 그런 삶이 멋진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연애란 뭘까? 이에 대해 선인들은 어떤 정의를 내려 놓았을까?

"연애야말로 생명의 꽃이다."(F. A. R. 로댕)

"우주를 단 하나의 사람으로 줄이고 그 사람을 신에 이르게 까지 확대하는 것 그것이 곧 연애다,"(V. M. 위고)

"연애란 향상하려는 욕구와 타락하려는 욕구 사이를 부단히 왕래하는 것이다." (P. 보나르) "연애는 자연에 의하여 주어지고 상상에 의하여 수 놓아진 캔버스이다."(볼테르)

"연애는  교양의 시초이다."(J. w. 괴테)

"연애는  위대한 교사다. 순간적으로 현명한 인간을 만든다." (P. 코르네유)

"어떤 사람이 곁에 있으면  다른 인간의 존재 따위는 전혀 문 제도 안  되는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연애라는  것이다."(A. I. 쿠 프린)

"보다 더 감미로운 즐거움, 보다 더 야성적인 슬픔, 그것이 연애이다" (N. 베일리)

"연애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시작하기는 쉬어도 그만두기는 어렵다."(H.L, 멩컨)

"연애는 천연두와 같다. 젊었을 때 걸리지 않으면 좀처럼 걸리지 않거나 전혀 걸리지 않고도 지낼 수 있다, 그러나그러한 나이가 되어서 걸리면 그만큼 더  위험하다,"(A. F. F. 코체부)

"연애는 사랑스런 꽃이며 우정은 달콤한  과실이다."(A. F. F 코체부)

"연애는 결혼의 새벽, 결혼은 연애의 황혼이다(프랑스 속담)

"연애는 일종의 예술이다. 가장 순수한 예술이다."(심훈)

"참된 연애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L.  A. 세네카)

"연애는 장관의 의지처럼  간단히는 손에 넣을 수 없는, 하나 의 행복된 장래이다(스탕달) "연애는 연애하는 자의 주관적인 결정 작용이다. , 소금 광 산 속에 집어넣은 마른 나뭇가지에 소금의 결정이 엉겨 그  참새 밭 같던 나뭇가지가 수많은 다이아몬드로 얽혀서 아름다운 소금 의 결정체로 변하는 것과 같다.(스탕달)

"연애란 영원한 것이다,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  ."(H. 레니 에,

"연애란 마음으로부터  마음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다, 그것은 직선이다,(브델)

"연애란 매춘의  취미이다. 더구나 아무리 고상한 쾌락이라 할 지라도 매춘에 환원되지 않는 것이 없다."(C.  P보들레르)

"진실된 연애는 작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탄생이다." (유주현)

"연애에서  남자의 승리는 도망치는 데 있다(-나폴레옹 1)

"연애를 하고 있을 때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플라톤)

"연인들의 다툼은 사랑의 소생이다.(데렌티우스)

"연애할 운명에 놓인 사람은 누구든 한눈에 사랑하게  된다,- (W. 세익스피어)

"연애하는 인간은 몽유병자와 흡사하다. 그들은 다만 눈만으로가 아니라 몸 전체로 보는 것이다.(도루비리)

"연극의 무대는 인생보다 한층 더 연애에  도움을 받고 있다, 연애는 무대에  있어서 항상 희극의 재료가 되고, 때로는 비극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연애는 때로 유혹의 여신이 되고 때로는 복수의 여신이 되어 많은 재화를 이룬다."(F. 베이컨)

"연애는 네 가지 다른 형이 있다. 정열 연애, 취미 연애, 육체 연애, 허영 연애가 곧 그것이다.(스탕달)

"연애와 전쟁에 있어서는 모든 전술이 허용된다." (J. 플레처)

"연애가 성가신 것은 그것이 공감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죄악 이라는 점에 있다."(C. P보들레르)

"연애를 처음 해보는 사람은 그것이  비록 헛되게 되더라도 신이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연애를 하는 사람은, 더욱이 그것이 헛되게 되면, 바보다."(H. 하이네

"나에게 있어 연애는 최대의 사업이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일한 사업이었다.(스탕달)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으로 쥐는 것 이다."(스탕달)

"연애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체 하는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한다."(왕구로)

"연애는 무엇인가 참다운 것을 듣지 않아서 깨지는 일이있다. 마치 우정이 무엇인가 거짓에 의해 깨지듯이." (A. 보나르)

"연애의 불꽃은 때로 우정의 재를 남긴다." (H. 레니에)

"여자는 첫사랑에서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밖의 연애에서는 연애를 연애한다." (F라 로슈푸코)

"연애의  즐거움은 사랑하는 데 있다. 따라서 연정을 일으키기 보다는 연정을 품는 편이 더욱 행복하다." (F. 라 로슈푸코)

"연애를 한 적이 없는 여자는 있을 수 있어도, 한 번 밖에 연애를  한 적이 없는 여자는 좀처럼 없다."(F. 라 로슈푸코)

"연애의 참다운 가치는 인간에게 일반적인 생활력을 증대시켜  주는 데 있다." (P발레리)

"연애는 미래를 바라는 것이지 현재의 한 순간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E. 케이)

"연애는 남자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여자의 생애에 있어서는 역사 그 자체이다."(스탈 부인)

"연애하는 사람은 모두 이중의 고독 속에 산다."(A. E. M.  노 아유)

"연애는 많든 적든 간에 사람을 현명하게 한다,"(R. 브라우닝)

"참다운 연애는 품성  위에 머무른다,"(J. G. 피히테)

"연애라고 하는 건축물의  초석은 욕망이다."(A.  모루아)

"연애는  추한 것이  아니고 귀중한  것이다."(S. 스마일스)

"연애가 있으므로 세계는 늘 신선하다. 연애는 인정의  영구적 음악으로서 청년에게는 광휘를, 노인에게는 후광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배후에 비치는 빛으로  현재를 밝히고 전방을 비치는 빛으로 미래를 밝힌다."(S. 스마일스)

"연애가 결혼보다 즐거운 것은 소설이 역사보다 재미있는것 과 같은 이유이다."(s. R. N. 샹포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연애 없는  그런 삶을 과연 참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계사 속에서 정말로 멋진 연애를 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 이 책에서 열거되는  연애 박사들을 진지하게 한번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들의 연애가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떤 점에서 교훈적이며, 또 어떤 점에서 본받을 만한 것인가도 아울러 살펴  보기로 하자, 본문의 제1부에서는 세계사 속의 여성들 중에서, 그리고 제2 부에서는 세계사 속의 남성들 중에서 연애 박사들을 각각 선발 하여 알뜰히 소개해 놓았다. 읽고 나서 각자의 마음 속에 가장 진실한 연애를 한 사람의 생애를 자기 나름대로 아름답게 해석하여 새겨 두길 바란다. 그리하여 살아가는 동안  정말 후회없는,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런 멋진 열애를 한번 해보기를!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곁에서 수고해 준 컴퓨터 리엘, 그리고 한솔미디어 출판사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한실 서재에서 慈谷 박덕은

 

 

머리말

 

1부 창녀에서 수녀까지

1. 기원전의 연애 박사들 

1. 삽포 편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시의 여왕----23

2.  달기 편 주지육림의 원조----30

3. 여희 편 섹스를 무기로 삼은 위험한 여자---33

4. 히파르키아 편 거지 철학자의 행복한 아내---36

5. 클레오파트라 편 요염하고 야심찬 나일강의 사이렌----39

 

2. 10세기까지의 연애박사들 

6. 아그립피나 편 아들까지 유혹한 악녀----45

7. 메사리나 편 낮에는 황후 밤에는 창녀----48

8. 테오도라 편 황후가 된 경마장의 무희---51

9. 징가 편 여장부이자 색녀였던 여왕---53

10. 측천무후 편 여황제로  군림한 요녀---55

11.  양귀비 편 시아버지를  매료시킨 태진궁의 꽃----59

 

  3. 15세기의 연애 박사들

12. 프란치스카 편 아름다운 거리의 천사----65

13. 세자빈 봉씨 편 동성 연애를 즐긴 궁궐의 여인----71

14. 만귀비 편 미소년과 놀아나다가  처형당한 후궁---75

15. 어을우동 편  남자 사냥을 즐긴 여장부---79

16. 장녹수 편 왕을 요리한 창기 출신의 후궁---83

 

   4. 16세기의 연애 박사들

17.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편 야심에 철저히 희생당한 미녀---89

18. 앤 블린 편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 선 왕비---94

19. 황진이 편 멋을 아는 풍류여인의 표상---97

20. 카트린 드 메디시스 편 광적인 섹스가 최상의 수면제라고 여긴 왕비---102

21. 엘리자베드 1세 편 정권 독점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여왕--104

22. 메리 스튜어트 편  사랑의 불구덩이에 온몸을 던진 정열의 여왕---108

 

   5. 17세기의 연애 박사들

23. 가츠야마 편 일본 제일의 호색녀----115

24. 브랑빌리에  후작부인 편 부친과 형계를 독살한 마녀---117

25. 메리구인 편 발레리나 줄신의 사랑스런 애접--120

 

   6. 18세기의 연애 박사들 

26. 마리아 테레지아 편 성  풍기문란물 엄격히 통계한 여왕--125 

27. 퐁파두르 부인 편 국왕의 영원한 여자 친구---1Z70

28. 에카테리나 2세 편  수많은 섹스 상대를 곁에 둔 여왕----131

29. 마리 앙트와네트 편 피로 물든 베르사이유의 하얀 장미---133

30. 조제핀  편 바람기와 질투심의 대표적 화신--138

31. 에메 뒤뷔크 편 황제의 모후가 된 여자 노예----141

32.  스탈 부인 편 자유로운 연애 편력의 소유자--145

 

 

   7. 19세기의 연애 박사들 

33조르즈 상드 편 세계 계일의 연애 박사--149

34. 예니 마르크스 편 남편을 유일한 신앙으로 여긴 여인--159

35. 클라라 뷔크 편 순수한 사랑을 아름답게 가꾼 여인--162

36.  빅토리아 편 사랑스러운 미덕의 화신----167

37마리 듀프레시 편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청순한 동백꽃 여인----170

38. 나데즈다 폰 메크 편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원한 사랑----174

39. 서태후  편 권세와 결혼한 비정한 황후----177

40.  루 살로메 편 연애를 하되 육체는 허용하지 않는 신비스러운 여인--180

41. 마타 하리 편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들을 당혹시킨 여자 스파이--184

 

   8. 20세기의 연애 박사들

42. 아르마 마라 웰페르 편 남자 복이 많은 축복받은  여자----191

43. 버지니아 울프 편 서정적이고 유미적인 니힐리즘의 여류작가---197

44. 상가  부인 편 피임법 보급 운동의 선구자---205

45. 마리 로랑생 편 수줍은 화려함과 창백한 에로티시즘의  여류 화가---207

46. 젤다 새이어 편 만족할 줄 모르는 플래퍼의 여왕---211

47마그다 편 죽음도 남편과 함깨 한 용감한 여인----215

48. 마리안 앤더슨 편 검은 피부의 비애를 씻어준 위대한 흑인 가수---218

49. 시몬느 드 보봐르 편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멋쟁이 여류 작가---223

50. 빌리 할러데이 편 대중  에술의 숭고한 성녀---233

51. 에디뜨  삐아 편 사랑에 살고 예술에 살다 간 귀여운 여인---240

52. 마릴린 몬로 편 세계 남성들의 영원한 섹스  심벌----248

53.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편 상식을 깨뜨려 버린 퍼스트 레이디----254

 

2부 건달에서 황제까지

   1. 1세기까지의 연애 박사들

1. 유방 편 미녀에게 마음 약한 황제---263

2. 율리우스 케사르 편 여자와 야망을 동시에 사랑한 호걸---266

3. 안토니우스 편 클레오파트라를 진실로 사랑했던 영웅---270

4. 네로 편 약행과 폭정의 대표적 표상---279

 

   2. 14-18세기의 연애 박사들

  5. 연산군 편 광란의 몸짓으로 쾌락을 추구했던 남자---282

6. 헨리8 -세 편 왕비를 여섯이나 갈아치운 사나이----285

7. 앙리 2세 편  왕비보다는 애인을 더 사랑했던 남자---288 -

8.  히데요시 편 부하들의 아내까지도 탐한 난봉꾼---290 

9. 빌헬름 1세 편  자유로운 성 해방국가를 만든  인물---292

10. 조지 크레란드 편 포르노 소설을 쓴 탓에 연금받게 된 작가---294 

11. 쟝 쟈크 루소 편 쾌락이-말로 자연이라고  외친 작가----296

12.  조지 4세 편  온갖 엽색행각을 펼친  호색가---301

   3. 19세기의 연애 박사들

 13. 나플레옹 1세 편 여성들을 단지 성적 기갈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활용한 남자-303

14. 루드비히 폰 베에토벤 편 연인들에게는 반드시 곡을 지어 바졌던 음악가---306

15. 메테르니히 편 장녀들물 정치 스파이로 활용한 정치가---309

16. 스탕달 편 실연을 이상적인  허구적 세계로 형상화한 소설가---311

17. 나폴레옹 3세 편  애인의 재산을 활용하여 대통령이 된  사나이----314

18. 카밀로 벤조 카부르 편 조카의 미모를 활용하여 이탈리아를 통일시킨 남자---317

19. 도스토엡스키 편 사랑 없미는 하루도 못  사는 리얼리즘의 거장---320

20. 차이코프스키 편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체험으로 알게  된 음악가---324

21.  오스카 와일드 편  유미주의와 남색의 찬미자---- 327.

22.루돌프 편 덧없는 사랑의 진짜 주인공--330   

 

4. 20세기의 연애 박사들

23. 프란츠흔  바이로스 편 에로틱한 호색화를 그린  화가---335

24. 라스푸친 편 궁정 정치의 부페와 방탕을 대표하는 호 색 가 ---337

25혜르만 혜세 편 아내의 헌신과 사랑으로 불후의 걸작을 남긴 소설가----339

26. 아폴리네르 편 연인의 여성적인 미학에 찬사를 보낸 예술가---343

27.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편 생명주의적인 성문학을 추구한 소설가 ---346

28. 헨리 밀러 편 성과 사랑의 합일성을 집요하게 추구한 소설가---349

29. 프랑시스 스코트 핏제럴드 편 아내의 낭비벽을 충족시켜 주고자 열심히 글을 쓴 소설가---- 352.

30.빌헬름 라이히 편 진정한 성 해방을 부르짖은 과학자---358

 

 

 

 

 

 

 

 

 

 

 

 

 

 

 

 

 

 

 

 

      1 부 창녀에서 수녀까지

   1. 기원전의 연애 박사들

 I. 삽포 편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시의 여왕

삽포(Sappho BC. 625-570)는 고대 그리스 최대의 여류시인 이다. 그녀는 소아시아 에게해의 레스보스(Lesbos)섬의 미틸레네 에서 부유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국내의 정 치 사정(내란)으로 인해 정정(政爭)을 피해 시칠리아로 망명해 살았다. 그러다가, 머리에는 올림피아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쓰고 어깨에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황금의 가야금을 든 그 녀는 백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환호하는 군중에 횝싸인 채 고 향인 레스보스 섬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그녀는 케르코라스라는 남자와 결혼해 크레이스라는 딸을 하나  낳아 길렀다. 그녀는 어린 딸에게 이런 시를 지어 주었다.

"나에겐 예쁜애가 있어라. 황금의 꽃과 같은 모습을 한 귀여운 나의 크레이스 “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미틸레네에 살면서 사숙(私塾)을 열어 종교 단체의 중심이 되어 흔기에 접어든 양가(良家)의 젊은 여성 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녀들에게 시와 음악과 무용과 예의범절 을 가르쳤으며, 혼례의 의식 따위를 돕기도 했다이 무렵부터 그 녀와 소녀들과의 교유(交遊)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녀의 시는 주로 이들 소녀들과의 사귐에 필요해서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한때 그녀는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레스보스 섬의 소녀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녀는 레스보스 방언으로 된 두 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녀의 시는 대부분 하프에 맞추어 노래로 불려진 것들이었다이러한 그녀의 시는 부드러운 여성의 감정이 간결하고도 정열적인 아름  다운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노래시였 다, 그녀의 시는 간결한 시행에 감미로운 정열을 담아, 다양한 운율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자연에의 동경을 표하고 있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섬의 소녀들에게 대한 사랑을 노래한 서정 시와 빨간 능금이나 히아신스를 신부에 비유한  노래나 샛별의 노래와 같은 축혼가를  많이 지었다. 그녀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걸쳐서 우아하고 간결하고 고귀한 많은 작품을 발표해, 동향(同鄕)의 서정시인이요 아이오리아의 시가를 대표하는  여류 시인이 되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미모와 검은 빛을 띤 거무 스름한 피부를  지닌 삽포는 정열적이었고 관능적인 미에 대해 거리낌없이 애착을 보였으며다정다감하고 상냥한 그녀는 우미하고 소박하며 도의적인 기품을 잃지 않은 여류시인이었다. 그녀는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결혼의 신인 휴멘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한 그녀의 작품이 중세기에는 비도덕적이라 해 배척당했으나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의 시가 널리 애송되어 '1O의 예술의 여신'이라고까지 격찬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듯 풍부한 음률과 시형을 구사해 별처럼 빛나는 시를 시집 아흡권 분량을 지어 발표했다. 하루는 아르카이오스가 그녀에게 이런 시를 지어 바쳤다.

"보랏빛 모자를 쓰고 맑게 깨끗하게 즐거운 듯 웃는 삽포여! 당신에게 할 말이 있지만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구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파온이라는 젊은 청년에게 한없는 연정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연인을 사랑하는 그녀의 애틋한 심경을 맑은 호수처럼 투명하고 푸르게 담은 <장미 잎사귀>라는 시를 써서 파온에게 바쳤다.

"장미 잎사귀 노랗게 시들어 분수물에 파르르 떨어질 때 고요히 들리는 저 갈피리 소리 서글픈 마음을 더해 주네, 내 귀에 자갈 소리 들리기를 안타까이 안타까이 기다리는 아아 몹시 설레는 이 마음이여, 혹시 파온의 발자취련가, 그 소린."

그러나 파온은 이와 같은 그녀의 수없는 애정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 숭고한 삽포여만을 되풀이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삽포를 존경하고는  있었지만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메릿타라는 처녀 여자 노예를 동정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이 장미꽃 을 꺾으며 기쁨에 겨워 속삭이고 있는 모습을, 동굴 속에 있는 뮤즈에게 기도하러 가던 삽포가 목격하고 말았다.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삽포는 메릿타를 쫓아 버리고 잔디밭에 잠들어 있는 파온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파온과 메릿타의 사랑은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마침내 메릿타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도망을 가기로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도중에 붙들려 삽포에게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때 파온은 매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삽포여! 당신은 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과 사귀십시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오는 사람은 벌을 받기 마련입니다. "

그러자, 삽포가 부르짖었다.

안돼, 안돼-이 세상의 것을 모두 얻는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어. 그대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황금의 가야금을 바다 속 깊이 버려도 좋아

이때 메릿타가 머리를 조아리며  흐느끼듯 말했다.

"저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파온이 다시 한번 절규했다.

"인간에게는 사랑을, 신에게는 숭앙을,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길을,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각각 가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

잠시 후, 삽포는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손을 잡지 말라. 이미 내 몸은 신에게 바쳐진 것! 사랑, 미움,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그대는 귀엽고 아름다웠어,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어떤 운명에 이끌려 함께 배를 탔지만, 그 배가 뭍에 닿으면 각자 제 갈 길을 떠나는 거야. 그렇지, 우리는 이제 조용히 이별을 해야 돼"

삽포는 파온의 이마에 잠시 키스를 한 후, 메릿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나서 제단이 있는 레우카스의 낭떠러지가 있는 바닷가 언덕 높은 곳에 올라가 이렇게 소리쳤다.

"인간에게는 사랑을, 신에게는 숭앙을, 당신들에게는 즐거움을! 그리고 나를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두 손을 높이 든 채 깊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져 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노예 라므네스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1월계의 관은 시들고, 하프는  소리 그쳤도다. 이 세상엔 그녀의 고향은 없어라. 끝내 신의 나라로 가고만 그대 삽포여,”

그녀의 시 완본은 고대 말기에 고스란히 없어져 버렸다. 그녀의 작품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에 의해 9권으로 나누어져 편찬 되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의 명에 의해 그녀의 작품들 대부분 불태워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두 편의 정리된 창()이외에는 인용이나 단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와중 에서도 단편(斷片)으로나마 살아남아 지금까지 발굴된 것은 총 213편이다. 근년에 발견된 것에는 상당히 긴 작품도 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아프로디테에 대한 노래>, (잊고 간 것이 아니 고>, <장미 잎사귀>, (당신의 바라는 것), (저녁의 별빛), (히 아신스>, (단편), (내게는 그분이), (그 사람은 신과 동등한 것 같아라>등이 있다.

"그대는 한 송이 히아신스, 목동의 발굽에 마구  밟히고도 흙 속에서 자주색 꽃을 피워내는 그대는 한 송이 히아신스." <--히아신스-전문)

"별빛은 반짝이지만 달빛 둘레에서는 빛나는 제 모습을 숨기어라. 보름밤 은빛이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출 때."-단편-전문)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 끝에 매달려 과일 따는 이가 잊고 가버린아니, 잊고 간 것이 아니고 따기 어려워 남겨 놓은, 새빨간 사과, 그대는." <-잊고 간 것이 아니고-전문)

오늘날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시의 왕' 으로, 삽포는  '그리스의 시의 여왕'으로 각각 불리워지고 있다,

 

2. 달기 편 /주지육림의 원조

달기(BC. 1150년경-1122)는 기원전 1150년경에 유소(有蘇)의 딸로  태어났다. ()나라의 주왕(紂王,帝辛)이 유소의 나라를 침략해 오자유소는 항복의 표시로 자신의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쳤다.

대을(大乙) 때 하왕조를 넘어뜨리고 중국을 통일한 은나라는 허난성(河南省) 안양현 샤오툰 일대에 도읍하고 조상의 제사를 통해 유대를 갖게 된 직업적 성격이 강한 씨족의 연합체로서 구성된 나라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각지에 왕자 등을 봉하고 다른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씨족 조직으로 된 도시 국가군의 연합 조직에 의해 화북 중부에  강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3160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당당히 중국 을 다스렸다.

그러나, 사실(史實)이 확실한 시대는 11대째인 무정 (武丁) 때부터 17대 왕인  ()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에 불과 하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안에게 보내져 후궁이 된 달기는 그야말로 절세의 미녀였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요염한 관능미는 주왕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주왕을 자신의 미모와 매혹적인 몸매로 현혹시켜 언제나 그가 자기 치마폭에 늘 붙어 있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우선 그녀를 위해 사구(沙丘)에다 별궁을 증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의 매일 연회를 열어 환락의 시간을 마련해 그녀를 기쁘게 해 주었다. 별궁의 큰 연못에다는 술을 가득 채워 놓고 연못 주위에 늘어서 있는 수목들의 가지에다는 갖가지 고기와 장식들을 매달아 놓고 마치 용궁처럼 꾸며 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만든 노래를 연주하도록 했으며, 그 음악에 맞추어 알몸의 남녀들이 무리를 지어 연못 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거나 나무 아래서 진한 성 유희를 하도록 했다. 이러한 음란한 정경을 보면서 그녀는 주왕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애욕의 시간을 보냈으며 주지육림(酒地肉林)을 즐겼다. 연일 이러한 사치한 연회를 베푸느라 주왕은 점점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가차없이 거둬들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그러자, 충신들은 왕에게  간곡히 충언했고, 충신 구후(九候) 의 딸이자 정숙한 여인인 왕비도 왕과 달기의 음락과 연회에 대해 지적하면서 자제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이는 왕의 노여움만 살 뿐이었다.

달기의 치마폭 아래 갇혀 꼼짝 못하던 왕은 그녀의 조정을 받아 왕비와 왕비의 부친 구후를  함께 살해해 버렸다. 이의 부당함을 충간했던 충신 악후(鄂侯)도 사지를 몽땅 잘라 살해하고 말았다.

충신 서백창(西伯昌;文王)  한때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부하들이 미녀를 골라 주왕에게 진상하고서 사정해 그를 간신히 석방시켰다. 이후, 서백창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과 영주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 그의 나라는 은나라와 직접적으로 대립할 정도로 강성해졌으며,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공격해 멸하고,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달기와 더불어 음락에 빠진 채 포학과 폭정을 일삼던 주왕은 무왕(武王)의 군대와 싸웠으나 결국 패해, 궁중의 한 구석으로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모든게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궁전에다 스스로 불을 질러 활활 타오르게 한 다음 달기와 함께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1122년이었다,

3. 여희 편 섹스를 무기로 삼은 위험한 여자

여희(驪姬, BC. 681년경-651)는 기원전 681년경에 중국 서쪽의 이민족 여융(驪戎) 왕의 딸로 태어났다.

기원전 66418세 때 그녀는 여응을 침공해 멸망케 한 진나라 헌공(獻公)의 포로가 되어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진나라로 끌려오게 되었다.

헌공(獻公, 재위 BC. 677-651)은 전리품으로데리고 온 여희 와 그녀의 여동생을 측실로 삼았다. 그에게는 이미 제()나라  환공의 딸이자 정부인인 제강(齊姜)이라는 여인과 이민족인 적족(狄族) 호씨(狐氏) 집안의 호희(狐姬) 자매인 두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제강과의 사이에  신생(申生)이라는 아들 을 두고 있었고, 호희 자매로부터는 중이(重耳,文公 재위 BC. 636-628)이오(夷吾惠公, 재위 BC. 651-637)라는 아들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희를 정부인으로 삼고서 특별히 총애했다. 그러나, 여희는 헌공에게만 만족하지 않았다. 섹스의 참맛을 알게 된 그녀는 주위의 남자들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 다

그녀는 먼저 헌공의 측근이자 악기를 연주하는 공인(工人)이요, 같은 여응 출신인 우시(優施)라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그와 은밀히  만나 성욕의 불꽃을 살랐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섹스 기교를 헌공에게 복습해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녀는 헌공의 아들들에게도 차례차례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신생과 중이가 그녀가 펼쳐놓은 유혹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용케도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막내 아들인 이오에게 살살 꼬리를 쳤다. 이에 이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침실로 그녀를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내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여희는 옥동자(奚齊)를 낳았다. 기원전 657년이었다.

여희의 외도를 눈치채지 못했던 헌공은 30여 년만에 얻은 자식인 해제를 애지중지 했다. 이때부터 여희는 야심찬 욕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태자인 신생을  제거하고, 이어 중이와 이오까지도 없애 버린 후, 자기 아들 해제를 태자로 앉히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음흥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애인이자 심복인 우시와 잠자리를  가진 다음 그에게 은밀히 부탁했다.

"해제가 당신의 자식이라면 저 애는 우리 여융족의 피입니다. 저 애한테 이 나라를 계승하도록 해주세요."

이에 우시는 헌공의 총신들 즉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 손에 넣을 방도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그들을 그녀의 잠자리에 끌어들여 통간한 다음 그녀 편으로 삼은 후 그들로 하여금 왕에게 '해제를 태자로 봉하도록 충언하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계략은 그녀의 뜻대로 진척되어 가는 듯했다.

양오와 동관오가 그녀의 품안에서 놀아났고, 그들의 권유대로 태자 신생은 곡옥의 영지로, 중이는 포의 영지로, 그리고 이오는 굴의 영지로  각각 파견되었다. 이제 그들을 서로 이간질시키고 역모죄를 뒤집어 씌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 형제는 각 영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모반죄를 뒤집어 씌우는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우시와 양오와 동관오와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서 다른  계략을 짰다. 그리하여 시행한 것이 독살이었다. 신생에게 제사에 올릴 육류와 제물을 보내오도록 한 다음, 거기에 독약을  몰래 묻어 두고서 왕을 독살 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난처한 지경에 처한 신생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중이와 이오는 자기들의 영지로 급히 도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기원전 651년에 헌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자기 아들 해제를 등극시켰다. 그런데 그것은 일순간의 영화에 불과했다. 중신 순식(筍息)일파에 의해 그녀의 아들 해제가 헌공의 관 앞에서 처참히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때 여희도 적대자들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궁전의 정원으로  황급히 쫓겨 달아나다가 막다른 길에 이르자 그녀는 그만 우물 속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4. 히파르키아 편 /   거지 철학자의 행복한 아내

히파르키아는  그리스의  이른바  퀴니크(Kynik)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  크라테스(Krates  ho Thebai, BC. 365-285)의 아내이다.

명문 출신인 크라테스는 청년 시절에 아테네에서 메가라 학파 의 브뤼손에게 배웠는데, 얼마 안가서 디오게네스에게 영향을 받아 퀴니크적인 빈곤과 검소한 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처세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다. 그러나 한  사나이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 서민들에게 나눠주어 버리고, 나머지 논밭마저 디오게네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양치는  목장으로 개방해 버렸다. 그후  그는 생활고 가운데서 도 운명의 변전(變轉)에 지배되지 않는 정신적 안주의 땅을 찾아 끊임없이 헤맸다. 그는  아무 집이나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사람들과 얘기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나 화목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 고 화해시켰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생애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히파르키아라는 처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 또한 명문 출신에다 집이 부자였다. 그녀의 집은 트라키아 만 가까이에 있는 마로네이아라는 곳에 있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리포스가 묵어갈 정도로 훌릉한 저택이었다히파르키아는 퀴니크 학파의 철학자 크라테스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만 매료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그의 무욕적인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미모의 그녀에게는 숱한 혼담이 오고갔으나, 모두 단호히 거절해 버리고 오직 크라테스만을 원했다. 그러자, 집안에서는 너도나도 앞다투어 그녀의 고집을 꺾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부모와 친척이 아무리 그녀를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단식까지 해가며 농성을 했다.

"크라테스와 결혼시켜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굶어 죽어 버리겠어요."

고심 끝에 그녀의 아버지는 크라테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 다.

"부디 저희 집에  오셔서, 제 딸의 생각을 단념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뜻 내키지 안았지만 한 처녀의 장래를 생각해서, 크라테스는 할수없이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인생 사례를 들려주고 조언도  해주며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어댈 뿐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그녀의 완고한 고집에 한계를 느긴 크라테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서 옷을 모두 훌러덩 벗어 버렸다. 이윽고 알몸이 된 그가 자기 몸뚱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 쳤다.

"이게 바로 나다?“

그리고 벗어놓은 옷을 집어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이게 내 전 재산이다."

그런 다음,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래도 나를 따를텐가? 나처럼 무일푼으로, 나와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 않으려면 내  배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크라테스의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뜻은 꺾이지를 않았다. 부모도 크라테스도 더이상 어쩌지를 못하고 결국 그녀의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녀는 크라테스와 결혼한 후 트리봉이라는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서 남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철학 수업을 받았다. 실제로 거지나 다름없는 떠돌이 생활이었다. 그녀는 길거리건, 강연장이건, 연회장이건산책길이건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졸졸 따라다녔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파시클레스를 두었다그리고 남편을 평생토록 섬기며 남편의 인생철학을 그대로 좇아 욕심없이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갔다.

사람들은 어느때고 상관없이 이 방랑 거지 부부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크라테스의 출생 지인 테바이 시민들은 그들의 집 대문에다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놓을 정도였다,

"선신(善神) 크라테스의 입구."

 

5. 클레오파트라 편/요염하고 야심찬 나일강의 사이렌

클레오파트라 7(Kleopatra 7, BC. 69-30, 재위 BC. 51-49, BC.  48-30)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그의 누이동생 이자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트리패나와의 사이에서  기원전 69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클레오파트라' 는 이집트어로 '민족의  영광'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녀에게는 두 언니, 즉 클레오파트라 6세 트리패나와 베레니케, 그리고 여동생 아르  시노에가 있었으며, 남동생이 둘이 있었다. 남동생들 중 하나는  기원전 61년에, 또 하나는 기원전 59년에 각각 태어났다. (그녀는 나중에 이들 남동생 둘과 차례로 결혼하게 된다.) 그녀(당시  19 )는 부친의 유언에 의해 기원전 51년에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당시 11)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통치기간 동안 그녀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고, 가끔  궁전 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 토론회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남동생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섭정관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통치해 나갔다. 그런데, 기원전 49년에 그녀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관들에 의해 이집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이듬해 에 케사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나, 그의 애첩이 되었다. 그녀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케사르를 첫 대면할 때  특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녀는  심복 아폴로도로스에게 스스로 몸을 가죽띠로 묶은 커다란 침구 더미로 감싸게 한 다음, 그것을 연회를 베풀고 있는 케사르에게 선물하도록 했다, 그 침구 더미는 이내 케사르의 방으로 운반되었다. 케사르가 그 선물 더미를 푸는 순간, 알몸의 클레오파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능적인 미녀에게 그만 넋을  잃은 케사르는 그 날 밤부터 그녀와 침실을 같이 썼다. 기원전 47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사망하자, 케사르는 그녀를 이집트 통치자로 임명했다기원전 46년에 케사르는 승리연 을  로마에서 개최했는데, 이때 그녀는 케사르의 초대를 받아 케사르의 아들 케사리온과 함께 로마로 가서 그곳에 기 2년간 머물러 지냈다. 기원전 43년에 그녀는 부하를 시켜 프톨레마이오스 14세 살해를 명령했으며, 기원전 443월에 케사르가 죽자 그로 부터 한 달 뒤에 이집트로 귀국했다. 이후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한 사원에서 수많은 젊은 남성들과 성적인  실습과 훈련을 받았다. 그리하여 남성들을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자신이 최고의 쾌락에 이를 수  있는지를 줄기차게 탐구했다. 이렇듯 향락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는 기원전 41년에 안토 니우스에 의해 타르수스로 소환 당했다. 그후 그와 동거하게 된 그녀는 그 이듬해에 두 아이(쌍등이 남매  헬리오스와 셀레네)를 낳았다 기원전 37년에 그녀는 시리아의 안티오크에서 안토니우스와 정식으로  결흔하여 그 이듬해에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를 출산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시리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할당해 줌으로써 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을 이집트에  넘겨주었다. 이에 분개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도전장을 냈다. 기원전 31년에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해전에 참가했다가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불리하게 되자 이 집트로 도망쳤다, 그녀는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포로로 잡힌 후, 그의 호의를 얻지 못한 채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자살했다. 이렇게 해 요염한 나일강의 사이렌은 그 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왕조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이집트를 로마에 합병시켰으며, 후환을 없애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케사르 사이에 태어난 아들 케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을 모두 처형시켜 버렸다. 훗날 플루타르크는 매력 있는 미모, 교양, 기지, 재능, 능란한 외교술 등을 두루 갖춘 그녀의 매력을 다음과같이 기술하고 있다. "도대체 그녀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의 외모와 말솜씨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으며, 그녀의 모든 언행  하나하나에도 특별한 힘이 베어 있었다, 따라서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의 마력과 같은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 했다.

"여전히 그녀는 세련된 죽음을 택했다. 보통 여자와 같이 단검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질주하는 배에 몸을 실어 이집트를 어두운 바다에 둘러싸인 땅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차가운 미소로 황량한 자기의 궁전을 응시하며 성난 독사에 움츠림 없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핏줄에 독이 깊이 배어들 때까지."

   2. 10세기 까지의 연애 박사들

  6. 아그립피나 편 /아들까지 유혹한 악녀

 아그립피나(Agrippina, AD. 15-60년경)는 라인 강변의 콜로니아 아그립피넨시스(켈른)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이요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으로 서기 15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5세 때 오빠인  칼리굴라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그 이듬해에  파세누스 크리스푸스와 결혼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그녀는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그후 명문 귀족 출신인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재혼 했으며, 그와의 사이에 네로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네로가 태어날 때 발끝부터 나오자, 고명한 점성가가 이렇게 예언했다. "이 아이는 마침내 황제가 되겠지만, 어머니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감동해 이렇게 외쳤다. "이 아이가 황제가 되기만 한다면, 내가 죽는 게 다 무슨 상관 이겠어요." 네로가 태어난 지 3년째 되는 해에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46

이후 그녀는 오빠 칼리굴라 황제가 무척 좋아했던 미청년 레피 두스와 눈이 맞아 은밀히 정을 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애인과 함께  황제의 암살 계획을 세웠다그러나, 이는 사전에 발각되고 말아, 레피두스는 처형되고, 그녀는 칠레니아 해의 조그만  섬으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후 41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새  황제는 그녀의 숙부였기 때문에, 그녀는 추방령에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에  돌아온 그녀는 다시 불안에  떨어야 했다. 클라우디우스가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한 메사리나가 그녀와 그녀의 아들 네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메사리나는 날렵한 자객을 그녀의 침실로 보내 살해하고자 했으나그때 용케도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메사리나가  총신 나르키스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48년에 그녀는 34세의 나이로 황후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원로원 의회에도 참석하고 국사의 상당 부분을 간섭하는 등 정치계 일선에 전폭적으로 대두했다. 나라에서는 그녀의 초상을 새긴 화폐를 만들어 그녀를 신처럼 숭배했다. 그녀는 축제일이면 황금으로 만든 호화옷을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나 위엄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권세를 넓히기 위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신하들과 통간했다 그녀는 황제의 총신  파룰라스를 자기 편으로 삼고자, 그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이렇듯 자신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면서도, 황제가 관심을  갖는 여성은 그대로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루는 황제가  카르프르니아라는 한 귀부인의 미모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녀에게 황제를 유혹 했다는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황후 간택 때 마지막까지 경쟁 상대였던 로리아 파울리니아를 모함 해 처형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여인  레파다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녀는 541012일에 로쿠스터의 도움을 받아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독버섯을 먹게 해 독살시켜 버렸다, 그리고 아들 네로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런 후 정치 일선에 서서  일일이 정무 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을 했다. 이에 싫증을  느낀 네로가 그녀를 멀리하고 클라우디우스와 메사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브리타니쿠스를 독살시켜 버리자위협을 느낀 그녀가 이번에는 아들인 네로를 유혹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음란한 애무와 키스로 계속해 추파를  던졌다. 이를 견디다 못한 네로는 그의 정부인 포파에아의 조정을 받아그의 심복 아니케투스를 보내 어머니 아그립피나를 살해해 버렸다.

 

7. 매사리나 편 /낮에는 황후 밤에는 창녀

메사리나(AD. 25-48)는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얼굴,   빠진 몸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어려서 부터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티없이 성장했 다. 그녀는 16세때,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내 리비아의 손자요  황제 칼리쿨라의 숙부이자 드루수스의 아들이기도 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은 율리우스 클라우디 우스가()에서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남편은 어렸 을 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약간 불편한 상태였으며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약간 덜 떨어진  남자였 다. 메사리나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옥타비아)을 하나 낳아 기르면서 따분한 시간을  근근히 떼워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 칼리쿨라가 값자기 암살 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반란을 일으킨 황제의 호위 무장 장교들은 궁전 안에 숨어 벌벌 떨고 있던 약간 모자란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옹립해 즉위시키자 원로원도 할 수 없이 이를 승인했다. 클라우디우스 (C1audius, BC. 10- AD. 54, 재위 BC. 41-54)는 졸지에 황 제가 된 뒤에도 세상사가 두려워, 한때 정치를 팔라스와 나르킷 수스 등에게 대부분 맡기고 자신은 주로 서재에 파묻혀 지내긴 했으나, 결혼법, 상속법노예법 등을 개정하고 경제 정책을 성공 적으로 펼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한편, 17세의 젊은 나이로 일약 로마제국의 황후가 된 메사리 나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명예와 부를 한 손에 넣게 되어 너무나 기뻐했다그렇지만, 남편이 하루종일 국무나 취미 생활에만 열중 하는 바람에 늘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야 했던 그녀는 밤마다  궁정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파티에는 말주변이 좋은 귀공자들과 용모가 뛰어난 남자  배우들이 주로 초대되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귀공자나 배우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서로 눈길이  맞으면 잠자리 까지 끌어들여 은밀한 밤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편의 외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남편이  친절하게 대하는 칼리쿨라 의 여동생이자 남편의 조카인 율리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살해해버렸으며, 기타 여러 여자들을 반역죄라는 누명을 씌워 죽여 버렸다그러는 중에도 그녀는 애인을 수시로 바꿔가며 마음껏 정욕을 채웠다. 그 상대가 미남이라면 귀족이든, 배우든총각이든, 유부남이든 가리지 않았다. 남편이 잠든 뒤 밤이 깊으면 밤 중에는 베일로  머리와 얼굴을 감추고서 노예 하나만 거느리고 궁전을 그림자처럼 빠져나가 시내 뒷골목에 있는 사창가로 가서 방 하나를 빌린 다음 '류키스카'라는 이름을 내걸고 창녀처럼 남자 손님을  받았다. 그리고 새벽까지 줄기차게 여러 남자의 정액받이 노릇을 하며 성 유희를 즐기다가 새벽녘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사창가를 잽싸게 빠져 나와 궁궐로 다시 돌아왔다. 메사리나의 이러한 정욕의 불길은 집정관 가유스시리우스의 품에 안기면서부터 더욱 활활 타올랐다. 가유스가 그의 아내인 유니아와 이혼하자마자, 그녀는 그와 비밀 결혼식까지 올려 버렸다. 그러나 이 결혼 소식은 당시 지방에 내려가 있던 황제 클라 우디우스에게로 밀고되어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메사리나는  황제를 미리 만나 변명하고자 했으나, 황제의 측근들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결국 가유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메사리나도 나르키스라는 총신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나르키스는 메사리나와 통간하는 사이었으나, 그녀가 자기를 버리고  가유스와 정을 통하자 질투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 를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황제는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음식만  한가하게 먹었다. 이후 황제는 조카인 아그립피나와 결혼했다. 그러나지배욕이 강한 아그립피나는  전부(前父)의 아들 네로를 황세자로 삼게 한 후 남편을 독살해 버렸다.

 

8. 데오도라 편/   황후가 된 경마장의 무희

테오도라(Theodora, 508-548)는 당시 비천한 신분으로 멸시 받던, 콘스탄티노플 경마장  마구간 문지기의 딸로 508년경에 태어났다 그녀는  성장해 이 경마장의 무희(舞姬)   여배우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 운스티니아누스 1(JuStinlanus 1, 483-565, 재위 527-565)의 눈에 띄어 황후 가 되었다황제는 성격이 우유부단했으나,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반면, 심미안(審美眼)이 높고 건축술에 뛰어났다. 그녀는  이러한 황제를 잘 다루어 동로마제국의 통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녀는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보좌를 받아 로마제국을 더욱 넓히는데 성공했다. 치세 초기에 막대한 과세 때문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로움에서 녹당(綠黨)과 청당(靑黨)이 니카의 난을 일으키자, 그녀는 황제를 보호하 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과단성 있게 벨리사리우스로 하여금 반란을 진압시키게 했다, 그후 명실공히 황후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는 황제 가 원했던 로마 제국의 서방 부흥을 위한 원정보다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동방 통일을 중요시하고, 그 지역에 있는 그리스트교 일파를 지지해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안을 상주하는 등 남편 유스 티아누스 1세의 통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평소 매우 정숙한 그녀는 일단 로마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돌변 해 하룻밤에 적어도 10여 명의 남자들과  성 관계를 즐기는 요녀 가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궁궐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아한 황후로서의 체통을  지켰다. 이렬듯 그녀는 이중적인 화려한 삶을 살다가 548년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9. 징가 편 /    여장부이자 색녀였던 여왕

앙골라(Angola)는 아프리카 서남 해안에 면해 있는 국가인데, 수도는 루안다이다, 이 국가는 15세기 말 포르투칼인에 의해 발견된 이래 약 50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었다. 17세기 중기에는 일시 네덜란드 동방무역의 거점이 되기도 했는데, 1차 세계대전 전후를 통해 항상 열강의 침략 대상이되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열강과의  조약 등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1953년경부터 민족주의 정당이 독립운동을 전개해 1961년에 대 폭동을 일으켰고, 그 해예 인민 동맹 당수인 로베르토를 중심으로 한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이 콩고에 앙골라 임시 정부를 수립했으며, 이후 무력에 의해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751111일에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다 앙골라의 여왕 징가는 여장부이자 색녀였는데, 그녀는 남자 노예들을 잡아들인 후 그들이 섹스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절뚝거릴  지경에 이르도록 매질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남자노예들을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해 그들이 벌이는 혈투를즐긴 후, 거기서 승리한노예와그 날 밤잠자리를 함께 하며 성적 쾌락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일단 그 노예와 하룻밤의 재미를 보고 나면, 그 이튿날 아침에는 반드시 그 노예를 죽여 버렸다.

 

10. 측천무후 편 /    여황제로 군림한 요녀

측천무후(側天武后, 623-705)는 이연(李淵)의 군에 참가해 형 주도독이 된 무사확의 딸로 623년에 무수현(西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5세 때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당시 제도에 의하면황 후, 4부인, 9,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중 27세부의 3단계  중 맨 아래인 재인에 속한 후궁이었다. 어느 날 태종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황태자 이치(李治, 후에 고종)가 부친인 태종에게 탕약을 먹이려고 했다. 이때 그녀가 황제가 탕약을 마시기 쉽도록 등을 받쳐 주는 역할을 했다. 이때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맞닿자  그녀에게 매료된 황태자는 그녀와 동쪽 별실에서 은밀히 만나 통간을 했다, 부친의 첩과 아들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해 훗날 황제가 될 황태자 이 치의 마음을 휘어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비 왕씨는 이 사실을 알았으나 눈감아 주었다. 649년에 태종이 죽은 후에 그녀는 장안의 감업사(感業寺)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로부터 3  후 그녀는 고종의 눈에 들어 다시 후궁이 되어 궁궐로 돌아왔다. 황제가 숙비 중 소씨(簫氏)만을 총애하자 질투심에 쉽싸인 황후 왕씨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게  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전례없이 두 번에 걸쳐 후궁이 된 영예와 황제의 총애를 한몸 에 받게 된 무씨는  황후 왕씨와 귀빈 소씨의 반목을 교묘히 이용 해  차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다가  황후가 요술을 부려 황제의 생명을 끊기 위해 황제의 침대 밑에 목조 인형을 숨겨 놓았다는 누명을 씌워 황제에게 황후 왕씨를 폐위시키게 했으며, 655 년에 그녀가 대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황후가 된 그녀는 그후 황제가 마음에 들어하는 후궁들이나 여자들은 모두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그 회생자들 중에는 그녀의 친언니 한국(韓國) 부인, 한국부인의 딸이자  그녀의 조카인 위국 (魏國) 부인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살해 이유였다. 이후 그녀는 황태자 이충(李忠)을 폐하고 자기 소생인 이흥을 대신 황태자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장손 무기(長孫無忌) 등의  귀족 관료들을 주멸했으며, 황후 왕씨와 귀비 소씨의 손발을 자른 다음 몸을 묶어 커다란 술독에 처박아 죽여 버 렸다. 또한 그녀는 병 중에 있는 고종을 대신해 조정의 실권을 장악 한 후 660년에 고종을 천황이라 하고 자신을 천후(天后)라 일컬었으며, 고종이 죽은 뒤에 즉위한 친아들 중종과 예종을 잇달아 폐립시켜 버리고, 스스로 자신전(紫宸殿)에 나가  국정을 주관했다. 그녀는 친아들 4명을 살해했으며, 남은 두 아돌도 12년 이상 감옥 안에다 감금시켜 두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고종의 일족 70여 명과 고위관료 40여 명도 그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이경업, 월왕정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690년에는 혁명을 단행해 주() 왕조를  세우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꾸었으며  자신을 측천무후, 또는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했다. 더불어 무씨(武氏)의 묘를  짓고 관직명을 주 시대의 것으로  고쳤으며, 측 천문자 10여 개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미륵 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현신 미륵'(現身彌 ) 이라 자처했다그리고 반대파에게는 밀고, 고문, 학살 등  온갖 수단을 이용해 가차없는 탄압과 횡포를  일삼았다, 반면에 충성파 에게는  매우 호의적인 대접을 해주었다. 그녀는 승려 설회의( 懷義)를 특별히  총애했다. 본래 그는 낙양  거리에서 약을 팔며 돌아다녔던 허풍쟁이 약장수였다. 그녀는 그를 등용해 낮에는 국정을 그와 상의해 처리했으며, 밤에는 그를 성적 노리개 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해  더욱 기세가 오른 그는 화려한 승정복 차림으로 궁궐을 휩쓸고  다니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그러다가 그는 밤이 되면 그 녀의 침실로 기어들어가 색욕의  열정을 은밀히 불사르곤 했다 그녀의  침실에는 설회의 외에 장역지(長易之) 형제도 문턱이 닳아지게 드나들었다. 그들은 20, 그녀는 70대였다. 두 형제는 유달리 횐 피부와 수려한 미모를 소유한 미청년들이었다. 게다가 형 역지(易之)는 성욕 촉진제인 미약(媚藥)과 회춘제(回春劑) 투약 전문가였다. 그는 그녀에게  성욕을 촉진시켜 주고 성적 만족 을 극대화시켜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 그녀의 환심을 샀으며, 동생 창종(昌宗)  신선같이 깃털로 몸을 휘감고서 연못 한쪽에 서 있는 목재 학 등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어  주어 그녀의 스트레스 를 풀어주는 일을 담당했다, 그녀는 이 형제들을 궁중 가까이에 두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침실로 불러들이기 위해 요광전(搖光殿) 안에다 공학부(控鶴府)를 만들어 놓고, 두 형제를 그곳의 관리로 임명했다. 공학부는 겉으로는 종교 문학 연구소와  같은 곳 이었지만 실제로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후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곳에다 미소년, 미청년들을 풀어놓고 퇴폐적이고도 도착적인 향락의 장소로 삼았다. 704년에 그녀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역지 형제는  그녀 곁에 서 병 시중을 들며 그녀를 위로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7051월에 장간지(長柬之)환언범(桓彦範) 등이 장역지 일파를 주살하고 중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때  그녀는 서쪽의 별궁으로 옮겨져 감금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83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다.

 

 11. 양귀비 편 /    시아버지를 매료시킨 태진궁의 꽃

양귀비(楊貴妃, 본명 楊玉磬, 719-756)는 촉주(蜀州, 사천성) 의 사호  참군(司戶參軍) 양현염(楊玄琰)의 딸로 719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그녀는 미모와 풍만한 젖가슴과 조그마한 두 발그리고 관능적인 몸매에다 재치를 겸하고 가무음률(歌舞音律)까지 능통했기 때문에 현종의 제18왕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그러나, 현종(685-762)737년에 무혜비(武惠妃)를 여읜 뒤 시름에 잠겨 있다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현종은 당의 제6대 황제로서, 위씨 일당을 주멸한 후 부친 예종을  옹립해 그 황태자가 되었으며, 712년에 즉위해 그 이듬해 그의 누이동생 태평공주파를 토평(討平)해 실권을 잡은 이래, 명상들을 기용해 정국 혼란을 수습했으며 국가 질서를 재건하고 정치 개혁을 위해 혼심을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가 총애하던 무혜 비가 세상을  떠나 버리자, 한 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는 3천 궁녀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대충 살펴봤지만 그의 눈에 드는 여자를 찾을 수 없어 더욱 절망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 들을 사방으로 보내 미인들을 물색해 보았지만 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현종은 740년에 여산의 화청궁으로 휴양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절세 미녀를 발견하게 된다.   미녀가 바로 훈날 귀비가 된 양옥환(楊玉環)이었다. 당시 그녀는 수왕의 비로 소 현종의 화청궁 행차  때 함께 수행했었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 나고 만 것이다, 그녀에게 매료된 현종은  환관인 고력사와 짜고 그녀를 빼앗기 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자기 아들 수왕을 멀리 관직을 주어 떠나 보낸 후 그녀를 자기 가까이에 두어 총애했다. 그는 그녀를 도교(道敎)  득도(得道)를 받게 하고서 이름을 태진(太眞)으로 고치게 한 후, 745년에 27세의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에 따라  그녀의 일족은 모두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현종은 그녀에게 빠져, 이후 정무를 내팽개치다시피 하고는 양귀비가 거처하는 태진궁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사치스런 궁중 생활을 했다, 양귀비는 황제의 총애를 빌미로 세 언니를 비롯 한 자기 인척들을 모두 장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 중 그녀의 6촌 오빠 양국충(본명은 양초)은 눈에 띄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양귀비가 예전에 녕왕(현종의 형)으로부터 선물 받은 옥피리를 무심결에 불다가 현종의 질투심을  자극해 한때 고향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충 등이 현종에게 간곡히 충언했고 또한 현종  자신도 너무 경솔하게 일을 처리했음을 후회 하고 신관을 보내 그녀의 재입귈을 허용했다. 이후 현종은 정치 에 싫증이 나서 재상 이임보, 양국충 등에게 조정를 아예 맡겨 버리고 더욱 더 양귀비의 치마폭에만 매달려 지냈다. 그러나 양귀비는 34세나 차이가 나는 현종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이따금 궁중에 변방경계 보고 차 들어와 우스꽝스런 호무를 추곤 하던 당대의 명장 안녹산의 정열적인 가슴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탓에 태진궁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안녹산은  은밀히 양귀비를 만나 어울려 놀았다. 그런 데도 현종은 안녹산을 순박하고 진실한 사나이라고 믿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안녹산은 어느덧 깊은 사이가 되고 말았다어느 정도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판단한 안녹산은 그 동안 줄곧 숨겨  두었던 늑대의 발톱을 일시에 드러내고아예 당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 삼켜 버리고자 난을 일으켰다. 그는 군사 20만 대군을 이끌고  단숨에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난이 일어나자, 양귀비는 오빠 양국충의 조언대로 현종을 따라 그녀의  고향인 사천(四川)으로 피난길을 떠났으나, 피난 도중에 호위병의 강요에 의해 마의에서 목 졸려 죽었다. 그녀의 시신은 길가의 흙구덩이에 초라하게 묻혀졌다. 이때가 그녀가 현종의 총애를 받은 지 18년 만인 756614일이었다. 그녀를 잃어버린 현종은 삶의 의욕을 잃고서  그의 아들 숙종에게 양위해 버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시름에 잠겨 맥없이 지냈다. 757  숙종의 영접을 받아 상황으로서 장안에 귀경했으나, 그 는 양귀비를 그리워한 나머지 속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하다가 번민 속에서 양귀비가 떠난 지 6년 만인 762년에 쓸쓸히 세상을 하직했다.

 

 

 3. 15세기의 연애 박사들

 12. 프란치스카 편  /   아름다운 거리의 천사

프란치스카(1384-1440)13843월에 로마에서 부유한 귀족 뽈 뷔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자꼬벨라 더 로프러 더쉬도 귀족 출신으로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성당엘 즐겨 다녔다. 어느 날 그녀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합장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되게 해주세요." 7세 때 그녀는 올리벨산에 있는 성 수도회 수사회로 가서 안또 니오 신부 밑에서  교리 공부와 묵상 및 기도를  배웠다. 그리고 12세 때 그녀는 신부를 찾아가 수녀원엘 가고 싶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화를 내고서 서둘러 딸을 결혼시켜 버렸다. 그녀의 반려자는 부유한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의 청년 노렌죠였다. 결흔 후 그녀는 뽄지니에 있는 시댁으로 옮겨가 살 게 되었다. 시댁에는 노렌죠의 형님과 동서인 반노샤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와 반노샤는 서로 마음이 잘  통해 금방 친해졌다. 반노샤 역시 예전에 수녀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 여인이었다, 그러나 12세의 프란치스카에게 있어서 결혼 생활은 너무나도 힘겹고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이윽고 그녀는 병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의사가  와서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  는 며칠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반 노샤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 제가 이렇게 병이 낫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 덕분이에 요. " 그 날 두 사람은 로마 시내에 가까운  곳에 있는 성 아리수 성당을 찾아가 감사 기도를 드렸다, 성당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녀 는 낮이나 밤이나 오직 기도 속에서 살았다며칠 후 그녀는 성 프란치스꼬가 창립한 '프란치스꼬 제3회라 는 단체에 들어갔다, 그 단체는 세속 사람들도 프란치스꼬 성인 의 가르침에 따라 수녀들처럼 살 수 있는 모임이었다. 그녀는 그 회가 정한 생활 규칙대로 남편과 가정에 더욱 충실했다. 그러자 남편도  그녀를 점점 이해해 주었고 사랑과 희생으로 그녀를 보살 펴 주었다. 그녀도 남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조건없이 모두 들어주었다. 남편이 원하면 화려한 옷도 입었고 화장도 했으며 파티도 참석  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집안을 새로 꾸미고  단장했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묵상과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원 옆쪽 조그마한 동굴에다 기도의 방까지 마련해 놓고 반 노샤와 함께 시간 나는 대로 기도하고 묵상을 했다. 시어머니 세 실리아가 이를 알고 한때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아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양해하게 되었다. 17세 때 그녀는 첫 아들 밤티스타를 낳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시어머니인 세실리아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집안 살림을 모두 떠맡게 되었다. 가계부를 쓰고 손님을 접대하고 하인을 부리는 것도 모두 그녀의 몫이 되어 버렸다집 안 살림 꾸려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손에 익자 그녀는 관심을 로마의 거리로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난한 이웃에게 음식과 돈을 조금씩 가져다주다가, 나중에는 남편의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도와주었다. 몇년 후, 흥년이 들어 거리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 나자  그녀의 손은 더욱 바빠졌다. 이윽고 그녀의 금고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는 집안의 보석들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거리 의 천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시아버지 안드레오쇼는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웃을 돕는 손 길을 좀처럼 거두지 않았다. 로마의 거리에 열병이 퍼져 환자들  이 늘어나자 그녀는 병원마다 찾아다니며 간호를 해주었다. 1409년에 로마 공의회는 서로 싸우는 두 교황을 폐위시켜 버리고 또 다른 교황을 내세웠다. 이런 혼란한 틈을 이용해 나폴리 왕  라디스라오가 베드로 트로야 백작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로마를 치게 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으며, 그와 동시에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루도비꼬 앙쥬가 로마 시민을 선동해 로마를 끝까지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 노렌죠도 이에 동의하고 의용군대를 조직했다. 노렌죠는 군 출신답게 용감히 싸워 교황청의 궁전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으나, 적군의 보낸 첩자에 의해 칼에 찔려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지극한 간호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노렌죠의 형님인 바울루쇼가 적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집안에는 계속 무거운 슬픔이 감돌았다 게다가 적이 노 렌죠의 큰아들 밤티스타와 바울루쇼와 맞바꾸자고 제의해 왔기 때문에 걱정은 더욱 커졌다. 이때 반노샤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 했다, "프란치스카, 걱정 말아. 그 놈들이 내 남편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밤티스타를 데리고 멀리 도망을  , 어서." 그녀는 동서의 말대로  집을 빠져 나와 멀리 도망쳤다. 그런 중 에 안또니오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신부는 뜻밖의 말을 했다. "

밤티스타를 베드로 트로야에게 데려다 주는 게 좋겠다." 매우  복종하기 힘든 신부의 충고였지만, 그녀는 할 수 없이 순종해 악당에게 아들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슴은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밤티스타를 태운 마차가 잘 움직이기 않자, 불길한 느낌을 받은 베드로 트로야는 그 아이 를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려 보내 버리고  로마를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에는  라디스라오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 왔다 로마시민의 피해와 박해는 그전보다 더욱 가혹했다. 게다가 라디스라오는 노렌죠의 목숨을 노려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래서 노렌죠는 가족과 친지들을 버려두고 멀리 도망을 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으로 밀어닥친 침략자들은 노렌죠 대신에 밤티스타를 인질로 끌고 갔다. 게다가 이 무렵  둘째 아들 에반젤리스타가 열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다시 기도로 힘을 얻고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정성껏 돌봤다. 반노샤도 열심히 그녀의 일을 곁에서 도와주었다. 집안의 먹을 것이 바닥나 버리자, 그녀는 집집마다 동냥을 해 거리의 굶주린 자들과 병자들을 먹여 살렸다. 이러한 그녀를 오해해 욕하고 멸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죽은 아들 에반젤리스타의 환영을 보고 그녀는  큰 위로를 받았다. 그 후로  그녀는 더욱 용감히 갖은 고난에 맞서 싸우며 잘 극복해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반노샤가 곁에서 간호해 주었지만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힘을 얻은 그녀는 다시 소생했다. 1414년 폭군 라디스라오가 사망하고  로마에는 다시 평화와 자 유가 찾아왔다. 남편 노렌죠와 아들 밤티스타와 반노샤의 남편  바울루쇼도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로 인해 성격 이 거칠어져 있었다. 특히, 병든 몸에다 거듭되는 불행으로 찌들 린 남편은 화를 자주 내어 그녀의 마음에 곧잘 상처를 주곤 했다. 그래도 그녀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며 시녀처럼 갖가지 시중을 들었다. 결국 남편은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복해 옛날 성격으로 되돌아왔으며, 반항기 많은 아들 밤티스타도 이윽고 온순해졌다. 그녀는 밤티스타가 좋은 가문의 딸 모빌리아와 결혼한 후에는 집안 살림을 며느리에게 모두 맡겼다, 처음에는 며느리의 교만한 성격 때문에 화합하기 어려웠으나, 어느 날 모빌리아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그녀가 곁에서 따뜻이 대해 준 뒤부터는 둘의 사이가 좋아졌다. 이후  그녀는 로마의 착실한 전도자요 사랑의 파수꾼이자 올리 베타 수도회의 봉헌녀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는 14337월에 교황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올리베따 봉헌수녀 회를 만들어 많은 자선 활동을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또르 띠 스삐치 수도원에 들어 가 수녀가 되어 기도 생활을 했다. 그후 그녀는  그곳의 원장 수녀님이 되어 수녀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러다가 1440   39일에, 백합꽃처럼 고요한 얼굴을 한  채 하늘나라로 떠났 다,

   

  13. 세자빈 봉씨 편/     동성 연애를 즐긴 궁궐의 여인

봉씨(奉氏, 1414-1436)1414년에 봉여(奉礖)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조선왕조 제5대왕  문종이 세자로 있을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세종은 정해진 왕위 계승법에 좇아 142110월에 그때 나이 8 세밖에 안 된 원자(元子) 이향(李珦)을 세자로책봉했다. 세자는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해 거기서 강서(講書)를 받았으며, 정음청(正音廳)을 맡아서 정음의 보급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희빈 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아 들였다. 세자빈 김씨는 그보다 연상이었으며, 몸집이 크고 정열적인 미인이었다. 그녀의 색욕 또한 강해서 밤마다 세자를 휘감아 안고 웬만해서는 놔주지 를 않았다 어려서부터 워낙 몸이 유약했던 세자에게는 이러한 그녀가  너무도 힘겨웠다.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그녀의 정열과 정욕의 불길에 질려 세자는 몸을 점점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때는 그녀가 너무 두렵고 무섭게까지 여겨졌다. 이 때문에 결국 세자빈 김씨는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임으로 봉여의 딸 봉씨가 들어왔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데다가 내성적이고 유순하게 생겼기 때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외모와는 달리 그녀 또한 매우 색욕적인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전 세자빈 김씨에 못지 않게 색 을 밝혔다. 처음에 세자는 남편이자 사나이로서 기가 죽지 않으려고 매일 밤 그녀의 침소에 들어 그녀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그러나, 그녀의 색욕은 끝없이 왕성하게  솟아올라 세자의 약한 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당황한 세자 는 슬슬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대신 그는 동궁의 시비인 권순 임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 그러다가 아예 세자빈의 침실로 향하는 발길을 뚝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후 7년여 동안 세자 빈 봉씨의 독수공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외로움과 색욕으로 견디기 힘든 밤시간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자꾸만 신경질과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그녀는  한 동안 우울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돌파구를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그녀가 총애하는 시비 소쌍이와 음행을 해 그 녀의 색욕을 다소나마 달래는 것이었다. 이후 그녀와 소쌍이와의 동성 연애와 섹스가 밤마다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녀는 한밤중이 면 소쌍이를 자기 이   안으로 끌어들여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함 으로써 뜨거운 몸을 식혔다. 이 무렵 세자와 정을 통하던 시비 권순임이 잉태를 하게 됐고 그와 더불어  4품 승휘()로 봉 작되었다. 이에 더욱  분개한 세자빈은 질투심으로 이글거리는 가슴을  달 래기 위해 더욱 더 변태적인 성 행위에 몰두했다, 그녀를 너무 외면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세자가 어쩌다 한 번씩 그녀의 침소 에 들를 때에도 그녀는  잉태하지도 않은 아이를 잉태한 것처럼 꾸며  이를 핑계 삼아 세자와의 잠자리를 피하고는, 그 대신 몸종 들과 음란한 음행을 즐겼다. 그녀는 시비 소쌍이뿐만 아니라 시비 석가이(石加伊)  잠자리의 음행 상대로 삼아 매우 총애했다 그녀는 가끔 석가이에게 음탕한 내용이 담긴  노래를 부르게 하면 서 그녀와 질탕한 성욕을 채웠다. 때로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 로 음윽과 환락의 깊은 샘을 파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비 소쌍이와 석가이가 서로 세자빈의 총애 를 자신이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시샘하는 싸움을 세자의 침전  뒤곁에서 하다가, 그만 세자빈의  부끄러운 비밀이 탄로가 나고 말 았다. 이는 곧 소헌왕후에게 보고되었으며, 이윽고세자빈은 왕후 앞에 끌려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없이 오히려 오랜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 보면 그와 같은 동성간의 연애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것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당당히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조정 의 여러 대신들의 혹독한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 는 세종의 배려로 다행히 극형만은 면하고 서만으로 폐출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폐세자빈이 되어 친정집에 돌아온 그녀를 대하는  부친 봉여의 노여움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는 딸에게 스스로 목매달아  죽으라고 협박했다. 그래도 그녀가 목숨에  애착을 갖고 애걸 복걸하자, 직접 딸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숨통을 조여댔다. 그러자 그녀는 죽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두 손을 할퀴고 발로 차고 옷을 잡아뜯으며 발버등을 쳤다. 그러다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숨을 거두었다. 딸을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죽인  봉여도 비탄에 젖어 그날 밤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가 1436(세종 18 )10월이었다. 세종은 이 슬픈 소식을 전해 듣고 봉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 다. 그래서 봉여의 관직을 박탈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세종은 이후 수많은 위업과 18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와 옹주 를 남기고 14502월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그 동안 태자로서 30여 년간 세종을 곁에서 그림자 처럼 도와 왔던 문종이 즉위했다. 그후 그는 언로(言路)를 열어 민의(民意)를 파악했으며, 문무(文武)를 아울러 등용해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으나, 몸이 워낙 약해 재위 23개월 만인 14525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4. 만귀비 편/     미소년과 놀아나다가 처형당한 후궁

만귀비(萬貴妃, 본명은 萬貞兒, 1418-1478년경)는 고을 원님이던 만귀(萬貴)의 딸로 1417년경에 태어났다, 그녀는 19세 때  궁궐에 들어온 이래  29년 동안 시녀로서 지냈다그러다가, 48세 때인 1465년 여름에 헌종의  눈에 띄게  되어 후궁이 되었다헌종(憲宗,, 익균재위 1464-1487)1464년에 명나라 제9대왕으로 즉위했다. 귀비인 주씨(周氏)의 소생인 그에게는 오씨, 왕씨, 백씨 3명의 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학사 오첨(吳瞻)의 딸인 오씨가 교양과 품위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녀가 황후가 되었다. 1465년에 헌종은 전 태후의 시녀 애아를 근 비(瑾妃)로 삼았으며, 이어 만정아(萬貞兒)라는 시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만정아는 동료 시녀와 함께 1465년 여름에 궁중의 연못가에서 장난을 치며 놀다가 그만 발을 헛디며 연못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 연못이 깊지 않아 물가로 무사히  걸어나을 수 있었는데, 옷이 물에  젖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마침 정원을 거닐고 있던 헌종의 눈에 이러한 그녀의 요염한 자태가 들어왔 . 매혹적인 몸매에 홍미를 느낀 황제는 그 길로 그녀의 숙소까지 따라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그녀가 49살이나 먹었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겉모습은 20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황제는 그날밤그녀의 달콤한육체를 품에 안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때까지 처녀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후 그녀는 후궁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아, 얼마 되지 않아 귀비가 되었다. 황제는  그녀를 위해 만운궁(萬雲宮)을 지어 살게 하고서, 정무가 끝나기만 하면 곧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품 안에서 놀았다. 이후 그녀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이윽고 오황후와  견줄 만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어느 날 선제(先帝) 영종(명나라 제6대왕, 재위 1435-1449)의 기일을  맞아 어릉으로 참배를 갔을 때, 그 녀는 오황후를 제치고 먼저 배례를 올렸다, 그녀의 이러한 무례 함에 화가 난 오황후가 그 이튿날 그녀를 자기 처소로 불러들인 다음  꿇어 앉혀 놓고서 매질을 가했다, 그러자그녀는 그 날 밤 자기 침실을 찾은 황제에게 오황후를  지나칠 정도로 중상모략했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황제는 오황후를 즉시 폐위시켜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왕씨를 앉혔다. 이후 그녀는 황후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며 궁궐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그녀 는 자기 친척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높은 관직에 오르도록 도와 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  만귀는 부총사령관에, 그리고 그녀 의 남동생 만통은 친위대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녀는 시녀들 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새빨갛게 달구어진 철판 위를 맨발로 걷게 해 겁을 주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이 황자를 낳지 못한 콤플렉스 를 해소하기 위해, 유비(瑜妃)백비(柏妃)혜귀인, 영비 등을  줄기차게 괴롭혔다. 유비를 심하게 때려 그녀를 유산시켰으며, 백비 가 낳은 황자 우극(祐極)을 수레를 타고 놀게 하다가 연못 속에 빠뜨려 병걸려 죽게 했고, 혜귀인이 낳은  우영에게는 독을 탄 음식을 먹여 독살해  버렸고, 영비가 낳은 황녀 금엽(金葉)은 목욕 중에 물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이 모든 불행이 그녀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을 비로소 눈치챈 황제는 그녀에게 공포심을 느껴, 그후 그녀를 철저히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숙소 에는 아예  발길조차 뚝 끊어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밤마다 외로움과 소외감과 정욕을 견디지 못해 엎치락뒤치락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운궁 정원 뜨락의 수풀 속에서 한 처녀와 놀아나는 미소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처녀는 그녀의' 시녀인 주아였고, 미소년은 근시(近侍)인 두우(杜宇)였다처음에는 그들에게 벌을  줄 작정이었으나, 이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들을 용서해 주고 그둘의 불륜을 비밀로 해주는 대신, 밤마다 두우로 하여금 자신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하여  두우는 밤마다 만귀비의 침실로 기어들어가 그녀 의 성적 노리개감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이 미소년의 육체를  밤 마다 껴안고 목마른 정욕의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이윽고 그녀의 이러한 불륜의 밤에 대한 소문은 후궁들 사이에 자자하게 퍼 져 나갔으며, 이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사태가 이 처럼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환락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가 두우의 알몸을  품에 안고 극도 의 쾌감에 젖어 숨가쁜 신음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황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그녀의 불륜의 현장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다. 미소년 두우는 그 즉시 처형되었고, 만귀비는 그 날 밤  사약을 받고 제 세상으로 떠났다 그녀의 나이 61세 때였다.

 

  15. 어을우동 편 /      남자 사냥을 즐긴 여장부

어을우동(於乙宇同, 1460-1480년경)은 승문원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尹昌)의 딸로  1460년경에 태어났다. 그녀는 다소 개방적 인 어머니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고, 왕족의 종실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에게 시집가서 사대부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외견상으로는 미남이요 아주 점잖고 기품 있는 사대부  선비였으나, 내적으로는 약간 의처증이 있는 소심한 남자였다. 하루는 그녀의 남편이 은장이를 집으로 데려와 은그릇을 제조 케 했다. 이때 그녀는 심심하던 차에 은장이에게로 나아가서 자신을  여종이라고 속이고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를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남편이  그날밤버럭 화를내더니 그녀의 경박한  행동을 몹시 나무라며, 그녀가 '자신을 여종이라 고 속이고 은장이와 은밀히 말을 나눈 것은 사대부 부녀자의 품위를 손상했을 뿐만 아니라 이는 엄밀히 간통하려는  수작이었음이 틀림없다'라는 억지 주장을 펼쳐서 그녀를 친정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렇게 해서 뜻밖에 소박을 맞은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와 눈칫 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여종이 뜻밖의 말을 했다. 사헌부의 도리(都吏)를 지낸 적이 있는 오종년(吳從年)이라는 사내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무료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그녀에게 무척 입맛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녀는 못 이긴  체하며 여종의 뜻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종년과 가슴 설레는 밤을 함께 보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번 사내 맛을 알게 된 그녀의 육체는 점점 정욕 의  불을 노골적으로 사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종이  물어다 주 는 사내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품에 안고 성 유희를 즐겼다. 한번은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에게 일부러 유혹 당한 그녀는 그의 집에 들어가 멋진 밤을 보냈고, 얼마 후 수산수 이기의 유혹에 슬그머니 넘어가 남양군의 경저  (京邸)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뜨거운 육체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후 그녀는 전의감(典醫監) 생도인 박강창, 호색한 이근지, 내 금위 병사 구전, 생원 이승목 등과도 정을 통했다, 박강창이 노비 를 팔려고 그녀의 집에 와서 값을 홍정하자고 할 때, 이근지가 그녀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그녀에게 노골적인 수작을 부릴  , 구전이 한밤중에 담을 넘어와 그녀를 성급히 겁탈하려 할 때,   승목이 길을 가는 그녀에게 농도 짙은 수작을 걸어왔을 때도 그 녀는 이들 호색한들을 물리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기 침방으로 끌어들여 뜨거운 몸을 섞었다, 또 한번은  과거에 급제해 거리를 순회 중이던 홍찬이라는 선비 의 얼굴을 자기 소매로 일부러 스치게 해 말을  건 다음, 그의 유혹에 마지 못해 넘어가는 척하며 그의 집으로 끌려가 온몸을 불 태우며 정욕의 밤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남자 사냥은 그 뒤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잘 생긴 서리(書吏) 감의정(甘義亭)그녀의 비리를 이웃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을 요구했던 밀성군(密城君)의 종 지거비(知巨妃)등과도 애욕의 밤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문무 고관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쳐서 당시 우찬성이던 어 유소(魚有沼, 1434-1489)를 비롯해, 영의정 사신(思愼)의 장남이 자 부제학과  도승지를 역임한 바 있는 노공필(1445-1516)궁술  이 신기(神奇)에 가깝다고 평판이  자자했던 명궁  김세적(?-1490)그 외 김정(金淨)정숙지(鄭淑智) 등의 공신 및 고관들과도 깊은 정을 나눴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관계를 맺은 사내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과감히 발로 차버리고 다시 새 애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에 갇힌 그녀의 전 애인 방산수 이란이 그 녀와 성 관계를  맺은 고관들을 이용해 석방될 .생각으로 그녀를 꼬드겼다. "자네가 관계한 사람들이 모두 유력인사들이니, 숨김없이 다  실토해 버리면 그들도 걸리는 게 있어 쉬쉬할 게 틀림없소. 그렇게 되면 내가  중형만은 면하게 될 것 아니겠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어을우동은 그의 조언대로 그 동안 자기와 통간한 사내들의 명단을 세상에 공개해 버렸다. 그러자 조정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술렁댔다. 그녀와 관련된  고관 들은 서둘러 불을 끄기 위해 증거불충분 판정을 내려 방산수 이 란을 석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어을우동은 사대부 아녀자요 종실 의 여자로서 각계 각층의 사내들을 유혹해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해, 무려 3개월간의 긴 줄다리기 재판 끝에 결국은 교수형 판결 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극형을 받아 저 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와 관 계를 맺었던 고관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후 출세의 가도를  거침없이 달렸다. 가령 어유소는 병조판서를 거쳐 서정대 장, 판중추부사, 도총관에 이르렀으며, 노공필은  대사헌을 거쳐 6 조 판서, 우찬성,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김세적은 여러 요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그러나 어을우동과 관계한 많고 많은 사내들, 즉 수많은 사대부, 종실, 문무관리, 종 들 중에서도 그녀의 팔뚝에 영광스럽게도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자는 방산수 이란 과  전의감 생도인 박강창뿐이었고, 유일하게 그녀의 등에 이름이 새겨진 자는 서리 감의정뿐이었다.

 

  16. 장녹수 편 /    왕을 요리한 창기 출신의 후궁

 장녹수(張錄水, 1468년경-1506)는 조선시대 사대부 선비와 여 종 사이의 딸로 1468년경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가출해 몸을 팔아서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상인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가출해 창기(娼妓) 가 되었다. 그러던 중,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잘 연주하던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 )의 눈에 뜨여 그 집 종이 되었다. 그녀는 가무(歌舞)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워 제안대군을 흡족하게 해주었다, 이 무렵 그 녀의 나이 30세였으나얼굴은 소녀처럼 아주 앳돼 보였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전해들은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이 그녀를 욕심 내어 궁궐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 녀는 몸집이 양귀비처럼 다소 뚱뚱한 편이었으나, 뛰어난 용모와 가무 솜씨를 최대한 활용하고, 뭇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 궁궐에 들어간 지  얼마 안돼 연산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된 연산군은 그녀를 종 4품의 후궁인 숙원(淑援) 자리에 앉혔으며, 150312월에는 그녀를 다시 종 3 품인 숙용(淑容)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왕은 그녀에게 많은 상금, 재물, 노비, 논밭과 저택을 주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 에게 영수(靈壽)라는 공주를 하나 낳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정에 굻주려온 연산군을 마치 어린애 다루 듯 하며 잘 요리했다. 그녀는 때로는 왕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때로는 상스럽게 욕을 해대는 식으로 왕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 주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갖은 성 기교를 다 해 왕의  성욕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더욱 그녀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났다가도 그녀만 보면 반드시 웃었다. 정치를 할 때도 그녀의 말을 곧잘 따랐다. 15046월에 후궁의 집에 나붙은  벽보 사건 이 일어났다. 이는 장녹수가 전향(田香)수근비(水斤非) 등의 기녀(妓女)의 용모를 질투해서 꾸민 사건이었는데도,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전향과 수근비 등을 체포해 능지처참해 버렸으며, 그들의 부모 형제나 친족까지도 극형 또는 중형에 처해 버렸다. 이렇듯 그녀의 말이면 어떤 것이든 그는 들어주었다 이러한 각별한 총애를 등에 업은  그녀는 자기 형부 김효손(金孝孫) 을 사정(司正)녹직(祿職)을 거쳐 함경도 전향별감으로  끌어올렸으며, 자기 딸 영수  공주의 유모의 아들 종이를 동평관의 고직(雇直)에 앉혔다, 그리고 단천에서 납을 캐어 세금없이  이익금을 챙겼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노비들은 잡역을 면제받은  등 여러 혜택을 누렸다. 그녀가 외출할  때면 마치 왕비의 행차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이후 그녀는 지나친 월권 행위로  국사를 어지럽혔으며,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는 등 연산군의 실정을 가속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  했다. 그러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그녀는 체포되어 군기사(軍 器寺) 앞에서 처참(處塹)되었다. 민중들은 그녀의 국부에다 돌멩이를 던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 나라 백성의 기름과 피가 저기서 몽땅 탕진되었도다."

 

  4. 16세기의 연애 박사들

 17.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편    / 야심에 철저히 희생당한 미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479-1519)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재위 1492-1503)와 그의 애첩 바노차 사이에서 1479419일에 태어났다. (로마 출신의 신분 낮은 여인인 바노차는 루크레치아를 낳은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루크레치아는 투명하리 만큼 맑고 고운 피부와 엷은 금발머리에 청순한 미모를 지닌 소녀로서, 두 오빠 조반니 보르지아 (1474년생)와 체자레 보르지아(1476년생-그리고 아버지의 애정 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특히 두 오빠는 그녀를 마치 연인처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작은오빠 체자레는 호걸형 야심가였고, 큰오빠 조반니(간디아 )는 낭만적 향락가였다. 그들은 어려서 부터 아름답고 청순한 누이동생을 가운데 놓고 눈에 보이지 않게 치열한 애정 싸움을 벌이곤 했다. 단순히 형제애로 보기엔 너무 지나친 그런 이상야릇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웃사람들은 그들이  근친상간 관계에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밀라노와 나폴리와의 동맹을 죄하고 대립 관계를 완화하고자, 자기 딸을 밀라노 공 ()의 사촌인 조반니 스폴쳐와 결흔시켰다. 그런데 그들의 결흔 계약서에는 특이한  조항이 하나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아직 결혼 의식에 대비하고 있지 못하므로, 1 년 후에 남편과 함께 밀라노로 돌아갈 것." 이는 앞으로의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면 언제라도 자기 딸 루크레치아를 조반니에게서 되찾아오려는 교황의 치밀한 계략에 서 나온 계약 조건이었다, 그래서 루크레치아는 결혼은 했지만, 남편과 함께 기거할 수 없는 '처녀 결흔'  한 여인으로서 흔자서 지내야 했다. 더욱이 그녀의 남편은 병약한데다 성 불능자나 다름없었다, 1494년 프랑스의 대군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점령해 버렸다. 그러자, 교황은 전 유럽에 반 프랑스 동맹  결성을 부르짖어 로마, 베네치아, 스페인, 밀라노 등과 합세해 프랑스군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루크레치아는 자코미노라는, 남편의 하인에게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다, 그녀는 자코노미노를 커튼 뒤에 잽싸게 감추고 문을 열어 보니그녀의 작은오빠 체자레가 서 있었다. 체자레는 다짜 고짜 그녀에게 남편을 독약을 이용해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코미노를 몰래 남편에게로 보내 급히 말을 타고 달아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래서 그 녀의 남편은 그  즉시 말을 달려 자신의 영지인 페사로로 도망가  버 렸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허한 가슴을 채워줄 남자를 찾아 밤마다 로마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게다가 아버지 알렉산더 6, 큰오 빠 조반니 작은오빠 체자레와의 근친상간적인 묘한 관계를 맺 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한편, 그녀의 남편이 실종된 틈을 이용해 교황은 자기 딸의  이흔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반발한  그녀의 남편은 분개 한 나머지 '교황과 딸은 근친상간 관계이다'라는 추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루크레치아는 이에 충격을 받고 로마의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둔해 버렸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큰오빠 간디아 공()이 갑자기 살해되어 버렸다. 온몸이 칼로 난자 당한 채 그의 시체는 테베레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그녀를 더욱 더 슬프게 했다 이렇듯 큰 슬픔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페드로 칼데스라는 남자가 나타나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페드로는 법왕의 시종으로서 바티칸 과 수도원 사이를 오가며 연락을 취해 주었던 미남 귀공자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루크레치아는 페드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작은오빠 체자레와 아버지 교황을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체자레는 칼을 들고 페드로의 뒤를 좇았다. 그러자 페드로는 겁에 질려 법왕의 팔에 뛰어 들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체자레는 칼을  휘둘러 무참히 그를 살해해 버렸다. 그로부터 2개월 뒤 페드로의 시체 는 테베레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이후에도 루크레치아와 관계를 맺은 하인이나 노예들은 모두 체자레에 의해 살해  또는 독살되었다. 이탈리아 전체를 손아귀에 집어넣고 싶어 안달이 난 체자레는 이번에는 누이동생 루크레치아를 아라곤 가()의 서자요 나 폴리 왕자인 비사글리아 공() 알퐁소에게 시집  보냈다. 이번에 도 그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오빠의 말에 순종했다.

그녀는 한 살 연하인 미남 알퐁소(당시 19)의 아내가 되어, 그 의 품에 안겨서 이전의 남자들을 모두 잊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남편은 사냥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할 일이 없이 노는 데만 열 중하는 그런 싱거운 남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섬세한 애정을 쏟으며 남편을  섬기고 사랑했다 그리고 로드리고라는 아들도 하나 낳았다. 그러던 15008월의 어느 날 밤, 바티칸 궁의 계단을 내려오 던 남편이 무장 괴한들의 기습을 받아 머리와 오른팔과 무릎에 큰 부상을 당했다 그녀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남편 간호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 남편을 나 폴리로 보내기로 합의를 보고 며칠간 마음 편하게 지냈다. 그러 던 중, 남편이 침실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날  밤 남편의 시체는 예배당으로 은밀히  옮겨져 장례식도 없이 매장되 었다. 이후 그녀의 세 번째 결혼이 작은오빠 체자레와 아버지 교황 에 의해  착착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페라라의 지배자인 에스테 가()의 알폰소 1세였다. 이 결혼으로 망토바 지역이 교황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1502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 만 알폰소 1세는 그녀에게 너무도 무심한 남편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래도 그녀에게 잘  대해 주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평소 그의 습관이 재발했다 그는 마음 내키면 아무 때나 훌쩍 여행을 떠나 몇  개월씩 소식조차 주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는  하루종일 공방(工房)에 틀어박혀 대포 만드는  일에 만 열중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지내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오빠 체자레의 중병에 이은 처참한 살해 등의 일련의 사건은 그녀를 오열하게 만들었다.   후 그녀는 오직 육아 사업과 자선사업에만 열중하며 조용히 지냈다 때로는 아리오스토나 벰보와 같은 저명한  시인들과 티치 아노와 같은 화가들을 궁전으로 초대해 예술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며 시름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기를 사산한 후 산욕열에 걸려 신음하다가 1519624일에 41세의 나이로 남편과 시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남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페라라에 온 덕택에 아무런 미련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 게되었어요..."

 

  18. 엔 블린 편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 선 왕비

앤 블린(Anne Boleyn, 1507-1536)은 황실을 자주 출입하는 상인의 딸로 1507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522년에 16세 때 캐더린 왕비의 시녀로 궁정에 들어갔다그녀는 작고 마른 몸집을 한 처녀였으나, 까무잡잡한 피부, 반짝이는 검은 눈,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옥구슬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 등은 헨리 8세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헨리 8세의  왕비는 캐더린이었다. 그녀는 이라곤 왕의 딸이자 헨리 8세의 형 아더의 약혼자였으나, 형이 죽자 그의 아버지가 형수인 그녀를 헨리와 강제로 정략결혼시켜 버렸다, 이는 형수와 시동생과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대 금기사항까지 어기고,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특면장까지  발부받아 어렵사리 성사시킨 결혼이었다. 그후 캐더린은 헨리 8세의 자식을 여섯이나 낳게 되었으나, 모두 사산과  유산으로 잃어 버렸다. 유일 하게 살아 남은 자식은 메리 공주 하나뿐이었다. 이러한 불행을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한 불륜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괴로워했다. 이 무렵  그의 눈에 띈 매력적인 앤 블린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이윽고 국왕은  앤 블린을 사랑 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푹 빠져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자신을 국왕에게 내주지 않고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국왕은 울지 대법관에게 건의해 자신의 이혼 신청 을  받아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망설일 뿐 선뜻 이혼을 인준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캐더린 왕비 가 신성로마제국의 팡제인 카를 5세의 숙모였기 때문이었다. 얼마후 교황은 마지 못해 칸페지오 추기경을 보내 이혼 문제를 자기 대신 매듭짓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를 5세는 교황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흔 소송에 대한 심리법정이 열렸으며,   결과 캐더린 왕비와 메리 공주는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서  국왕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어 15331533115일에 자신과 앤  블린의 결혼식을 서둘러 거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61일에 앤 블린을 왕비에 봉했다. 이는 이미 임신  4개월 째된 앤 블린을 위한 배려였다. 이로써  헨리 8 세는 캐더린과의 이혼이 매듭되지 않는 상태에서 중혼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교황의 노여움을 사, 헨리 8세는 카톨릭에서 파문 당하게 되었다. 게다가 앤 블린은 그 해  97일에 왕자가 아닌 공주(나중에 엘리자베스 1)를 낳아, 국왕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국왕은 캐더린 왕비에게서 낳은 메리를 사생아로, 앤 블린에게서 낳은 엘리자베드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 법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국왕은 날이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잔소리만 늘어가는 앤 블린에게 싫증과 권태를 느껴 다른 여인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 었다,  

153512월에 캐더린이 사망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 던 앤 블린에게  이번에는 야속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녀가 두 번째 임신한 아이가 유산되고 만 것이다. 이에  크게 실망한 국왕은 이번에는 형제가 많아 왕자를 낳아줄 확률이 높은 시녀, 제인 시모어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애인과 결흔하기 위해 앤 블린에게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과 함께 역모죄까지  뒤집어 씌워 법정에 서도록 했다. 너무도 억울한 앤 블린은 이렇게 외쳤다. "내가 다섯 남자와 통간했다구? 어처구니없는 누명이로군! 할 수만 있다면  이 몸뚱이를 사람들 앞에 증거로  내놓고 싶도다? 재판 결과 그녀의 오빠 조지는 교수형그녀는 참수형이라는 형벌이 각각 내려졌다,  "뭐라구? 국왕의 자비로 내게 교수형 대신에 참수형을 내렸 다구? 정말 웃기는군! 하긴, 내 목이 가느니까 별로 힘들지는 않겠지만 " 결국 조지는 1536517일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앤 블린 은 그 이틀 후인 519일에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다. 이로써 30세의 젊은 나이로 그녀는 억울한 냉가슴을 안고 저 세상으로 떠 났다.

 

  19. 황진이 편 /    멋을 아는 풍류여인의 표상

황진이(黃眞伊, ?1515-1553)는 조선왕조 제11대왕 중종 (1488-1544, 재위 1506-1544)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송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 덕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탐독했으며 기타 여러  고서를 익혔다,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시()와 서()와 음률(音律)에 모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 주위 사람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16세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혼자서 짝사랑하고 연모해 오다가  상사병으로 죽어 버린 사건이 생겼다. 그런데다 그녀의 혼담이 그녀가 서녀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당하게 되었다. 그러 자 그녀는 돌연 기계(妓界)에 투신해, 여러 문인 및 석유(碩儒) 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한때 송도의  유수(留守)와 깊은 정을 나누기도 했으며, 천수원을 찾아온 이경수의 친구이자 왕손인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맺기도  했고, 당시 당상관으로 있던 소세양(蘇世讓, 1486-1562)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소세양은 의빈부 도사 자파(自坡)의 아들이었는데, 시문으로 이름이 나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1509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정자, 주서(注書)의 벼슬 을 거쳐, 수찬이 되어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으며이후 이 조 정랑, 장악원 첨정, 직제학 등을 거쳐 1521년 명나라 한림원  수찬 당고(唐皐) 등이 왔을 때 영접사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그들을 맞아 시문으로 칭찬을 받게 되어 당상관으로  특진했다. 그후 153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건너가 역시 시문으로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었다. 이렇듯 시문으로 뛰어난 선비와 역시 시 문과  가무에 뛰어난 기녀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멋진 조화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싱그럽고도 향기로운 우정과 애정을 꽃피워 가며 서로의 육체를 뜨겁게 달궜다. 한때 그녀는 무려 10여 년 동안 오직 수도(修道)에만 정진해 당대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정욕으로 유혹해 파계(破戒)시키기도 했다, 이어 당대의 대학자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을 유혹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경덕은 이미 14세 때 (서경)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학문 연구와 진리 탐구에 전력해,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해서 우주 본질로서의 기()I와 이 ()를 논하고 기와 이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分化)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시킨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성리학과 도학, 수학, 역학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를 도저히  유혹할 수 없음을 솔직히 시인한 그녀는 하루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야  선생님께서 송도의 삼절(三絶)이심을 알겠습니다 하나 는 박연 폭포요, 또 하나는 화담(花潭)이시며, 다른 또 하나는 황진이 이 몸이지요."

그녀는 그후로 그를 남자로서가 아닌 스승으로 모시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명창 이사종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 3년은 그녀 의 집에서, 그리고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각각 동거 생활을 했다. 이와 같이 6년의 동거 생활을 마친 그녀는 다시 송도로 돌아와 한가롭게 지내다가, 명문 재상의 둘째 아들이자 한양 출신 의 귀공자 윤공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 전국 유람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39세의 나이로 1553년경에 쓸쓸히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생전에 내 몸을 자애(自愛)하지 못했으니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밖 모래톱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은 모래톱이 아닌 장단(長湍)근교 구정 고개의 한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그녀가 죽은  뒤 당대의 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 1587)가 문과에 급제 후 임지로 부임하러 가던 길에 송도에 들려  황진이를 찾았으나, 그녀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을 알고 낙심하여, 그녀의 묘소에 절을  하고 울먹이며 다음과 같이 시조 한 수를 읖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그러나,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그는 사림(士林)  신분으로 체신머리 없이 일개 기생의 무덤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개의치 않고  벼슬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호방 쾌활한 시풍으로 시 를 짓는 명문장가로서 살다가 39세로 여생을 마쳤다. 황진이가 남긴 다음 시조 6수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시조문학 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했으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더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러예어 가는고."

-내 언제 무신(無信)해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20. 카트린 드 메디시스 편광적인 섹스가 최상의 수면제라고 여긴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는 피 렌체의 부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로 1519년에 태어났다. 그녀 는 13세 때 프랑스 황태자인 앙리 2(Henri 2, 1519-1559, 재위 1547-1559)와 결흔했다. 1547년에 프랑스와 1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남편이 왕위를 물려받자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보다 20살이나 연상인 디아 느 드 포와치에라는 여인에게 푹 빠져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청춘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559년에 프랑스는 스페인과  강화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종식시킨 것을 기념해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 싸였으며, 궁전 앞에서는 성대한 기마시합이 열렸다. 이 연무회 에서 남편인 앙리 2세가 젊은 몽고메리 백작과 기마시합을 하다가 그만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사건이 생겼다이때 받은 상처 때문에 남편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신음하다가 1559710일에 그녀의 손에  어린 아들을 맡긴 채 그만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이후 장남 프랑스와 2, 이어서 차남 샤를 9세의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한 그녀는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고식적(姑息的)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신구(新舊양 교도와 통했으나, 양 교도의 조정에 실패해, 위그노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뒤에 열렬한 구교도인 기즈 공() 앙리에게 접근하여 그와 결탁,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자행했다. 샤를 9세가 죽자, 그녀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가 있던 막내 아들이 즉위했다. 그가 앙리  3세인데, 그 는 매우 독선적이고, 그리고 마법을 애호하는, 그러면서도 자유 주의자였으며, 그와 동시에  퇴폐적인 성도착자였다. 앙리 3세의 즉위 즈음, 그녀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블로아로  가서 지냈다. 그녀의 권세가  한창 드높을 때, 그녀는 하루에 여섯 번 이상 성관계를 가질 만큼 성욕이 왕성했다그녀의 공식적인 연인들 만 해도 무려 21명이나 되었으며 그 외에도 60여 명이나 되는 성 유희 대상인 남성들이 늘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의 부름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그녀의 침실로 달려 왔다고,한다. 그녀는 광적  인 섹스가 최상의 수면제라고 여겼다. 앙리 3세는 어느 날 삼부회를 갑자기 소집해 정적(政敵)인 기즈 공을 체포한 다음 도끼로 쳐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카트린은 충격을 받아 자리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후 3주만에 7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가 자크 드 투는 훗날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죽은 것은 한 여성이 아닌, 왕권이었다."

 

  21. 엘리자베드 I세 편 /정권 독점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여왕

엘리자베드 1(Elizabeth 1, 1533-1603, 재위 1558-1603 )는 헨리 8세와 제2왕비인 앤 블린 사이에서 1533년에 태어났다. 그녀가 16세 때 바람등이  해군 장교에게 결혼신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모반죄에 연루될 뻔한 적이있어 한동안 의기소침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녀의 모후 앤 블린이 사형 당한 후 한때 왕위 계승권을 잃었으며, 이복 언니 메리의 재위 중에는 고생스러운 소녀 시절을 보내야 했고, 한때는 런던 탑에 유폐되어 있기도 했다. 155826세의 나이로 즉위한 그녀는 추밀원을 중심으로 지방의 치안  판사를 수족같이 부려 통치했으며, 세실 부자(父子)와 월싱검 등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그리하여 그녀는 '훌륭한 여왕 베드'라는 별명으로 영국 국민의 경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녀는 의회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온건책을 수완좋게 병행하면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선보였다. 45년간의 치세 중 그녀에게는 결흔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개인적 이유 때문에 끝까지 독신으로 지 냈다 그녀의 애인 중 첫 번째는 레스터 백작인 로버트 더들리였다, 로버트는 한때 그녀와 마찬가지로 런던 탑에 갇혀 있었다. 로버 트는 여왕과 같은 동갑내기였다. 로버트는 석방된 뒤 프랑스와 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여왕이 된 그녀에게 발탁되어 장관 직에까지 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여왕의 총신이자 애인으로 서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다. 여왕은 그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로버트의 방을 자신의 침실 옆으로 옮길 정도였다. 로버 트의 아내가 유방암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죽으면 로버트는 여왕과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웬일인지 그의 아내가 죽은 뒤에도 둘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는 궁중 안에 근무하는 1,500여 명의 인원 중 되도록 여자 수를  줄이되 남자 수는 늘려 나갔다당시 궁귈 안의 여자는 시녀와 궁녀를 포함 도합 30여 명에 불과한 반면, 나머지 1,470  여 명은 모두 남자였다.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특히 기사는 남성의 상징을 넣어두는 샅 주머니를 보란 듯이 차 고서 정강이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여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친위대는 모두 명문 출신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금도끼를 들고 여왕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녀는 가면무도회, 야외극, 사냥, 말 시합 등을 자주 열어, 귀족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음악가나 각국 대사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으며, 거의 매일 신하들을 상대로 피렌체 풍의 춤을 추며  파티를 즐겼다, 그녀에게는 주위의 총신들이나 외국 왕들로부터 자주 구혼 신청이 들어왔으나 권력의 독점욕 때문에 모두 거절해 버렸다

그러던 그녀가 월터 로리를 만나고 부터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리는 명문 출신으로 만능 천재였다. 옥스포드 대학을 중퇴하고 한때 의용군에 지원해 활동한 바 있는 그는 시문(詩文)과 화술에도 뛰어났으며, 외모가 수려해 여왕의 눈에 쏙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열과 재치와 기품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견해를 정책에 대폭 반영할 정도로 한동안 그에게 푹 빠져 지냈다. 한번은 그의 권유대로 버지니아 경영의 막대한 자금을 그에게 선뜻 넘겨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로리가 한 궁녀와 정을 통한 뒤 그녀와 몰래 결혼해 버리자, 화가 난 그녀는 그에게 다른 죄목을 뒤집어 씌워 투옥시켜 버렸다. 또한  그녀의 애인 중에는 크리스토퍼 하톤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애인들 중에서도 가장 귀여움을 받았던 자였다.

그는 춤을 잘 추어 여왕을 늘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여왕의 배려로 나중에 대법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질투심도 많아서, 여왕이 로리만을 편애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는 여왕에게 이런 당돌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폐하께서 그 자만을  소중히 여기신다면, 저는 그 자를 죽여 버리고 말겠습니다." 또 다른  여왕의 애인으로는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블이 있었 다, 그는 레스터 백작이 천거한 인물로서, 백작의 양아들이었다. 에섹스는 큰 키, 균형 잡힌 몸매, 화사한 용모, 아름다운 눈을 지닌 2O대 청년이었다. 이미  쉰 살을 넘긴 여왕으로서는 매우 싱싱한 연애 상대였다, 그녀는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해 늘 곁에 두고 싶어했다고집 세고 독선적인 그와 언쟁을 높여가며 의견 대립을 하기도 했지만, 양보하는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그 만큼 그녀는 그를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하루는 어전 회의 때 서로 자기가  추천하는 자를 요직에 앉히겠다고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던 에섹스가 조롱하는 몸짓으로 그 녀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여왕은 그의 따귀 를 철썩 하고 한 대 갈겨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꽥 고함을 질 렀다. "악마의 거처로 돌아가 버려? 이에 이성을 잃은 에섹스는 칼 자루를 쥐고 대들려 했으나, 노팅검 경이 말리는 바람에 차마  칼을 빼들지 못하고서 어전 밖 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이후 그는 그녀의 총애를 잃고 좌천되었으며, 시민 봉기 때 가담한 탓에 투옥되어 참수되고 말았다, 그 의  처형 보고를 전해들은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03년에 그녀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 렇지만, 그녀의 치적들, 즉 수장령과 통일령의 발포, 영국 국교회  확립, 통화개혁, 도제법발포, 구민법 제정, 산업 육성, 특허 회사의 설립, 해외 비약의 기초 확립 등은 그녀가 죽은 뒤 아직 까지도 영원히 빛나고 있다,

 

22. 메리 스튜어트 편 /사랑의 불구덩이에 온몸을 던진 정열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 재위 1561-1568) 는 제임스 5세의 딸로 1542년에 태어났다. 부친의 사망으로 그 녀는 생후  6일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녀 는 잉글랜드에 대항해 프랑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5487세 때  프랑스의 황태자 프랑스와 2세와 약흔해,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그녀는  프랑스 르네상스 문화 속에서 라틴어를 비롯해 시작(詩作)과 음악, 댄스 등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스포츠나 사냥 등을 즐기며 성장했다. 이 무렵  몽모랑시 재상의 둘째 아들 던빌  경이 그녀를 좋아 해 한때 열을 올리기도 했다. 1559년 남편인 프랑스와 2(1544-1560, 재위  1559-1560) 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노틀담 사원에서 성대한 결흔식을 올리고  18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병약한 국왕은 즉위 한지 1년 반도채 못돼  17세의 젊은나이로세상을떠나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호수와 숲이 많아 목가적이지만 비극적인 사 건이 많은 나라 스코틀랜드를 친정(親政)했다. 그러나 그녀는 싸움과 반목을 일삼는  귀족들과 목사들 사이에서 정치를 돌보는 일에 진저리를 쳤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는 뒷전에다 미뤄 놓고, 바람등이들과 함께 어울려 춤과 음악을 즐기면서 향락적인  생활 에 차츰 재미를 붙여갔다. 그녀는 예술적인 작은 사교 모임을 만들어  여러 예술가들을 초대해 자신의  향락벽을 충족시켰다. 어느 날 밤, 그녀에게 매료 된 시인 샤트랄이 그녀의 침실로  몰래 들어가 그녀를 겁탈하려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샤트랄은 그녀가 프랑스에 게  귀국할 때 여왕의 수행 역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이 사건 으로 그녀의 결혼이 서둘러졌다. 여기저기서 앞다투어 혼담  중 매인을 보내왔다.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드 1세는 일찍이 자신과 한때  염문을 뿌린 적이 있던 로버트 더들리 경을 메리의 남편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쟁쟁한  신랑감들을 모두 제치고 엉뚱하게도 춤, 악기 연주 솜씨가 띨어나고 시도 쓰는 청년 귀족인 다 안리 경()1565년에 화촉을 밝혀 버렸다. 그녀의 나이는 25 세 다안리 경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녀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성적 만족을 느꼈다, 그녀는 한낮에도  성적 욕구가 발동하면 그를 자기 침실로 끌어 들여 정사를 즐기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안리  경이 귀족들 앞에서 이렇게 자랑스레 떠들 어댄 적이 있었다.

"여왕은 처녀였어? 이에 당황한 그녀는 서둘러 그와의 약혼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서둘러 결흔식을 올려 버렸다. 엘리자베드 여왕은 이 결혼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것은 다안리 경 이 헨리 7세의 증손으로서 영국 왕위 계승 요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결흔 축하연은 에딘 버러의 호릴드 성에서 사흘 밤낮으로 보란 듯이 성대히 베풀어 졌다. 그러나 메리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메리에게는 남편의  장점보다는 결점이 더 많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는 나약하고 소심한 데다가 우둔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걸핏 하면 국사에 간섭하려 들었기 때문에 늘  그녀의 눈에 거슬렸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화가 난  다안리 경은 시녀들이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성 상징물을 꺼내 들고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그대를 여자로 만들어 주었으니, 나를 남편으로 고른 것 아니오? 안 그렇소? 혹시, 그대가 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 로 이것이었소? 이때부터 그녀는  풋내기 남편에게 지독한 환멸과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메리의 가슴 속에는 이탈리아  비서관이자 젊은 음악가인 다비드 리치오에  대한 사랑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비춰졌다그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멋진 남자였다. 그녀는 이러한 예술 애호가를 뜨겁게 사랑했다. 질투심과 분노에 싸인 그녀의  남편은 귀족들과 짜고서 리치오를  몰래 난도질해 살해해 버렸다. 이 사건은 그녀를 매우 격노케 했으며, 남편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도록 했다. 그녀는 한 동안  우울한 심경에 잠겨  지냈다. 그러던 어느  , 그녀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그것은 1566619일에 왕자가 태어났던 것이다. 이 왕자는 그녀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 남성이 불쑥 나타났다. 보드 웰 백()이었다그는 그야말로 바람기가 많은 야성적인 남자였 다. 그런데도 메리의 눈에는 최고로 멋진 남자로만 여겨졌으며 '한 덩어리의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한 풍모의 인물로만 비춰졌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명문가 출신인데다 교양 있는 독서가였고, 야심찬 모험가였으며, 대담무쌍한 대장부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모든것을 송두리째 바치는 불꽃같고 열정에 넘치는, 그런 눈먼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서라면 왕관 도 미련없이 바칠 용의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보드웰의 아이 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급해진 그녀는 남편 다안리를 살해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남편이 잠시 묵고 있던 한 별채를 폭파시켜 버렸다. 이 사고로  다안리는 결혼한지 1년 반만에  벽돌더미에 짓눌린 시체가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 살해에 성공한 그녀는 임신한  보도웰의 아이를 보호하고자 그럴 듯한 연극을 꾸몄다. 외출 중에 보드웰 일당에게 유괴 당해 능욕 당했다는 사건을 조작해서 발표했던 것이다. 이후 보드웰의 이후  메리와 보드웰의 결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 었다. 메리의  남편 다안리가살해된 지 석달후, 두사람은 초대 손님도 없는 조촐한 결흔식을 서둘러  치뤄 버렸다. 그러나 이 결혼 소식은 국내 제후(諸候)  비롯한 모든 계층을 분개하게 만들었다마침내 귀족들은 다안리의 복수를 하고자 보드웰 과 여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내 반란군은  여왕을 체포했다. 이 때 메리는 보드웰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단서를 붙여 반란군에게 항복했고  자신은 로치레벤 성에 갇히게 되었다. 이곳에 유폐 되어 있는 동안 그녀는 보드웰의 아이를 유산했다. 한편, 극적으 로 풀려난 보드웰은 폭도들을 피해  달아나 오크니 군도로 건너 가  해적 두목이 되었으나, 폭풍 때문에 노르웨이 해안에 표류되어 덴마크 군함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11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정신 이상자가 되어 옥사했다, 반란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긴 메리는 1568년 스코틀랜드 왕 위를 포기하고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양위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시 로치레벤 성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그녀 는 그녀에게 평소 애정을 품어 왔던 청년 귀족 로치레벤 경의 도움으로 시녀의 옷을 입고서 극적인  탈주에 성공했다. 그후 그 녀는 6,000  명의 병사를 끌어 모아 반란군에게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카톨릭 신앙 문제로 한 때 대립했지만 인척간이요 9살 위 이복 언니인 엘리자베드 여왕 에게 탄원서를  보낸 뒤 잉글랜드로 가서 보호를 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호는 커녕 오히려 감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로부터 1587년까지 무려 19  동안 그녀는 죄수나  다름없이 오랜 감금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1586년에는 스페인의 렐 리페 2세와 영국 구교도 귀족들이 손을 잡고 엘리자베드 1세를 폐위시킨 뒤 메리를 옹립하려고 한 배빙턴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결국 그녀는 엘리자베드 여왕의 명에 의해 158728 일 아침에 포자링게 성 안에 설치되어 있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5. 17세기의 연애 박사들

 

 23. 가츠야마 편/   일본 제일의 호색녀

 가츠야마(勝山)는 에도 시대(江戶時代, 1598-1867)의 이름난 창녀요 호색녀였다, 에도 시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伏見)에서 죽고 정치의  실권이 토쿠가와씨에게 옳아간 후대정 봉환(大政奉環)으 로 에도 바쿠후가 쓰러질 때까지의 270년간을 말한다. 이 동안 에도에 거성을 둔 토쿠가와씨는 바쿠후를 열고 평화적인 통일 정권을 수립해 전() 일본을  통치했는데, 이 시대에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보여지는 특질적인  현상이 더욱 전개되었다. , 집권적인  봉건 제도의 완성과 쇠퇴, 상공업의 발달, 도시 문화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사의 도시  집주(集住) 와 그 소비 계급화에 의해 일어난 상공업과 도시의 번영이 거꾸로 무사의 경제 및 그 담당자인 농민과 하층민을 압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창녀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가츠야마라는 유녀(遊女)도 요시와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간다 (新田)  한 목욕탕에 있던 창녀였다. 그녀는 너무도 정욕적이여서, 하루라도 남자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성 관계를 맺었으며, 수많은 아이를 낙태 시켰다. 그녀가 상대한 남자의 수가 수백 명도 더 넘었으며, 낙태시킨 아이만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녀는 마치  이라하 사이 카쿠의 (호색녀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에 견줄 만한 호색녀였 다. (호색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1,000여 명의 낭자와 관계를 가졌으며, 200명 이상의 아이를 낙태시킬 정도로  호색녀 였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일본의 호색녀들 중 하나인 오오쿠의 시녀 에지마와도 견줄 수 있는 여자였다. 에지마는 연극 구경을 갔다가 만난  야마무라 극단의 배우인 이쿠시마 신고로  를 궤 속에 넣어, 남성 금지 구역인 오오쿠로 끌어 들여 정열적인 성 행위를 즐겼던 호색녀였다. 그 동안 유교적인 사고방식과 남성중심 사회로 인해 억압받아 오던 성욕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에도 시대의 성 해방 의 상징적인 여인으로 가츠야마라는 호색녀를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해 왔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 다

 

 24. 브랑빌리에 후작부인 편 /   부친과 형제를 독살한 마녀

브랑빌리에 후작부인(1630-1676)은 파리에서 사법관의 딸로 1630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 마르그리트 드불레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고 집념이 아주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22세 때 부유한 브랑빌리에 후작과 결혼했다, 그런데, 브랑빌리에 후작은 결혼  후 그녀를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놀아났다. 이에 분개한 그녀는 불평 대신에 맞불 작전을 펼쳤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자기도 그만큼 바람을 피운다는 식이었다. 남편이 하는 만큼 그대로 똑같이 해주겠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요 앙갚음 전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남편 의 친구 고당 드 생트 크로와라는 남자를 선택해 노골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그녀의 상대는  당시 기병대 장교였으며 바람등이로 소문난 멋쟁이 미남자였다. 그리하여 부부는 둘 다 각자의 애인과 함께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사치스런 나날을 보냈다. 그때까지 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 녀의 아버지는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서, 사법관의  지위를 이용해 국왕의 도움을  받아 고당을 감옥에 쳐 넣 어 버렸다, 졸지에 감옥살이를 하게 된 고당은 45일 동안을  감 옥에 있으면서 이빨을 갈며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별렸다. 감옥에서 풀려난 고당은 다시  마리를 만나서 사랑을 확인한 다음 뜨거운 열애를 재개했다, 그러면서 그녀를 살살 꼬드겨 그 의 복수 계획에 그녀가 자진해서 동참하도록 유인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있던  그녀는 선뜻 그의 복수 계획에 찬동하고함께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아버지의 유산이 욕심 이 났던 그녀는 고당이 하라는 대로 일을 착착 추진해 나갔다. 그녀는 우선 자선병원의 환자들을  찾아가 독약이 든 포도주나 과자를 줄기차게 기증했다. 그리고 그것을 먹은 환자들이 어떻게 사망하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죽은 환자들의 시신에 나타나는 독약의 효과까지도 점검한 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이번에는 자기 아버지에게 독약 실험을 했다, 그리하여, 실험을 시작한지 8개월만에 아버지를 감쪽같이 독살하는 데 성공했다. 시체 부검 결과는 '노쇠로 인한 자연사'였다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뒤 그녀에게 돌아온 유산은 지극히 작은 액수에 불과했다유산의 대부분은 두 남동생에게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남동생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진행시켰다. 동생들  집에 하인을 보내어 음식에 조금씩 독약을 타서 지속적으로 먹게했다. 그리하여 16706월에는 바로 밑의 남동생이, 그로부터 3개월 후에는 막내 동생이 각 각 고열과 구토로 신음하다가 숨을 거뒀다, 이들의 부검 결과는 '단순한 위장병 악화' 였다. 이후 그녀는 고당과 결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남편 브랑빌리 에 후작을 독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미 마리와  결흔 할 마음이 없어진 고당이 해독제를 그녀의 남편에게 복용해 방 해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느닷없이 고당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많은 빛을 지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전 재산은 경매처분 대상이 되었다 차압  딱지를 붙이던 집달관에 의해 빨간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그녀가 즉시 경찰서로 찾아가서 그 상자를 자기에게 돌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경찰은 이를 거절하고, 그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버렸다. 그 결과 그녀에 의한 독살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 버렸던 것이다. 경찰은 즉시 그녀를 체포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영국으로 도피한 뒤였다이어, 독살 음모에 가담한 라 쇼네의 자백, 영국 경찰의 협조 등으로 그녀의 은신처는 더욱 좁혀지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녀는 네덜란드를 거쳐 벨기에로 은밀히 달아났으나벨기에에서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조사 초기에 그녀는 완강하게 죄를 부인하며 버텄다. 그러나 알몸으로  받은 지독한 물 고문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독살 전모를 모두 불어  버렸다. 1676717일 아침에 그녀는 파리 그레이브 광장에서 수 많은 시민들의 야유를 받으며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요? 그런데도, 어 찌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요?"

 

25. 메리구인 편 /   발레리나 출신의 사랑스런 애첩

메리구인은 궁정 발레리나 출신으로서 영국의 찰스 2(Charres2, 1630-1685)의 애첩이 되었다. 당시 궁정 발레리나들은 출신성분이 천하거나 춤  솜씨가 훌륭하지 않더라도 미모 와 몸매가 뛰어나면 발레리나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것은 궁정  발레리나가 단지 예술적인 춤 솜씨를 선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궁정 연회의  여흥용 또는 호색적인 왕후귀족들의 성적  노리갯 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발레리나나 여배우를 첩으로 두는 것을 대단한 명예요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래서 더욱 창녀들은 발레리나 명단이나 오페라 여배우 명단에 오르기를 갈망했다. 그 명단에 오르기만 하면 창녀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치스럽게 살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루이 14세는 본격적인 궁정 발레리나 육성에 힘썼는데, 이는 차츰 왕후 귀족의 성적 노리개 에서 후궁녀적인 존재로,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에는 드라마틱한 발레리나로, 19세기 초에는 로맨틱한 발레리나로, 그리고 그후에 는 예술적인 오페라 발레리나로 변신하게 되었다. 메리구인은 매우 아름다운 몸매와 각선미와 미모를 갖춘 발레리나였다. 그래서 찰스 2세의 눈에 띄게 되어 그의 애첩이 되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찰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나 청교도 혁명 당시  왕당파의 옹호를 받아 의회파와 싸웠으나, 왕당파의 패배로 프랑스로 도망해 클래렌던의 손에서 양육되었다부왕인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인 1651년에 스코틀랜드에 상륙해 국왕으로 영접되었으나, 크롬웰과 싸워 패배하게 되어 또 다시 프랑스 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680년 브레다 선언 직 후 귀국해 왕정 복고를 기어이 실현시켰다. 그후 그는 클래렌던 을 중용하고, 국교(國敎)를 재건했으며, 경제 정책으로는 크롬웰 정책을 답습했다. 클래렌던 실각 후에는 커밸을 중용해 주요 업무를 제외한 일반 정무는 모두 그에게 맡겼다. 또한 발레리나 출신인 애첩 메리구인을  총애했던 그는 예술과 과학 진흥에도 뜻을 두어 왕립 협회의 창립에 협력하는 등 예술과 과학 정책 면에서 홀릉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6. 18세기의 연애 박사들

  26. 마리아 태레지아 편  /성 풍기문란을 엄격히 통제한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카알 6세의 딸로 1717년에 태어났다. 미모의 그녀는 173620세 때 로트링 겐 공() 프란쯔 시테판(후에 독일 황제 프란쯔 1)과 결혼했다 그후 그녀는 카알 6세의 프라그마티계 장크치온(國事에 관해 군주가 발하는 칙령)에 의해서 즉위했다.그러나,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은 오스트리아의 분할을 기도해  그녀의 즉위에 이의 를 내걸어 전쟁을 일으켰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실 레지엔에 침입했다. 그러자  그녀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침입자 들과 대항했으며, 1748년 아아헨  조약에 의해 마침내 그녀의 왕위를 확보했다. 그후 그녀는 재정개혁, 상공업 진흥 등에 힘을 기울였고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가해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아들인 프란쯔  요제프 2세의 재위 기간(재위 1780-1790중에도 사실상의 실권 통치자로서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농민 보호 및 기타 내정 개혁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정력적인 그녀는 남편 프란쯔 1세 사이에 16명의 자녀를 두 매년 임신과 출산을 거듭하는 다산의 여인이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군복을 입고 전선을 누비는 늠름하고 당당한 여장부로서의 자태를 잃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성도덕 을 엄격히 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규정"을 제정해 성 풍기문란과 매춘부의 창궐을 막았다. 그 규정에는 다음과 같은 자들이 매춘행위자로 간주되어 처벌되었다. 첫째, 독신남녀가 1  이상 성관계를 했을 경우(혼전 성교 금지 둘째, 독신자들이 계속 동침을 했을 경우(동성애 금지) 셋째, 독신여성이 뭇남성과 음란한 생활에 빠졌을 경우(매춘 금지) 이를 위반한 자는 태형의 벌에 처했으며그 중에서도 성병을 옮긴 자는 속옷 차림에 맨발로 교회에 연행된 후 자루에 넣어진 채 머리카락을 모두 잘리고 송진, 타르, 숯검댕 등을 바른 상태 로 마을의 거리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사람들로부터 오물을 뒤집어쓰는 등 갖은 모욕을 받아야 했으며, 결국에는 태형을 받 은 후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27. 퐁파두르 부인 편 국왕의 영원한 여자 친구

퐁파두르 부인(Pompadour, 1721-1764)은 파리에서 1721년에 징세도급인(徵稅都給人)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잔 느 앙트와네트 포와송(Jeanne Antoinette Poisson)l이다. 그러나, 상인의 딸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기가 많아 당시 여러 명의 애인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문학과 미술을 애호하고, 재치  있는 회화 를 좋아했으며, 야심과 허영심이 강한 여자로 성장했다 더우기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투르넴은 성품이 좋아 그녀에게 친아버지 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는 부자였으며, 동인도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애인의 딸인 잔느에게 일류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자상하고그녀가 교양 있는 처녀로 성장하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투르넴의 도움과 자신 의 미모를 바탕으로해 별로 어렵지 않게 사교계의 꽃으로  각광 받게 되었다. 그녀가 경영하는 살롱에는 당시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극작가 보마르세문예비평가 볼테르, 소설가 뒤클로, 철학자 엘베시위스, 경제학자 케네 등이 그녀의 살롱에 출입하며 보호를 받았다. 그녀는 174121세 때 투르넴의 조카인 르  노르망테 티올과 결혼했다.

이때 투르넴이 그녀에게 결흔 축하 선물로 상당한 액수의 연금과 세나르 숲의  별장을 선물해 주었다. 그것으로 그녀 의 평화스럽고 행복한 여생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안락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 는 국왕 루이 15세가 세나르  숲으로 자주 사냥하러 온다는 사실 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국왕이 사냥 나오는 때를 맞추어, 붉은 색과 푸른 색 두 대의 마차를 준비시켜 놓고, 붉은색 마차를 탈 때는 푸른 색 드레스를, 푸른 색 마차를 탈  때는 장미 빛 드레스를 입고서 나들이를 했다. 그녀의 이러한 '숲의 요정' 같이 독특한 행차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어 입에서 입으로 곧 잘 오르내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곧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국왕은 애첩 샤트르의 눈치를 보느라 그녀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던  , 174412월에 국왕의 애첩 샤트르 공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어 스페인 왕녀와 프랑스 황태자와의 결혼 축하연 겸 가면무도회가 파리 공회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때 잔느는 아주 특이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와 같은 의상이었다. 허리에 살짝 끈을 감은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 활을 걸친 채, 손에는 은빛 화살을 들고서 가면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국왕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국왕이  보낸 사신이 그녀를 은밀히 찾아와 정중한 초대를 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를 타고 국왕에게로 나아갔다. 그리고 국왕에게 자신의 육체를 기꺼 바쳤다, 그러나, 국왕의 조루증 때문에 첫 대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바람등이인 어머니로부터 남성을 다루는 기법을 세밀히 배운 뒤다시 기회를 얻어 국왕의 육체를 흡족하게 해주는 데 마침내  성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신데렐라 같은 여정은 시작되었다. 이후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불륜을 남편에게 고백해, 남편의 노여움을 유발시켰다. 분개한 남편은 권총을 뽑아들고 국왕을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이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한풀 꺾여 국왕을 비난하는 협박장을 한 장 써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이용해, 그녀는 국왕에게로 달려가서  자신을 질투심 많은 남편 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국왕은 그녀를 궁정 안에 머물도록 선뜻 윤허해 주었다. 이윽고국왕과 그녀는 뜨거운 연인 사이가 되었으며, 그녀는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1745에는 후작부인(後爵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왕은 전쟁터에 있으면서도  매일 연애 편지를 보낼 정도로  그녀에게 열중했다, 그러나,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시기하고  적대시하는 무리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그녀는 그 들의 적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잘 구슬려 자기 편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하지만, 해군대장인 모르파만큼은 그녀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맞섰다. 그는  국왕에게 그 녀의 지나친 낭비벽을 지적하고 이를 제지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장관 직 해임통고를 받고 밀려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이 후 그는무려 25년 동안이나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궁정의 재정과 권세는 그녀의 치마폭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는 성이나 보석 등을 마구 사들이는 등 극도의 사치 생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그녀에 대해 국왕은 차츰 싫증을 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더욱 잘 가꾸어 국왕의 욕망 을 충족시켜 주고자  안간힘을 다 쏟았다. 아침식사에는 용선향 을 탄 바닐라 초콜릿을, 점심에는  향료를 넣은 수프와 소나무 이슬을 먹음으로써 그녀의 불감증을  없애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별 효험이 없었던지, 1751년 이후에는 국왕과 잠자리를 함께 할 기회마저  잃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르사유 거리의 한 모퉁이에다 '노루원'이라는 저택을 지어놓고 전국의 서민 출신 처녀들을 선발해 한데 모아 국왕의 성적 노리갯 감으로 제공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못해준 국왕의 성적 만족을 그녀들이 대신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이에 국왕은 매우 만족했다, 그리하여 '노루원'의 처녀들은 국왕의 사생아를 60여 명이나 낳았다, '노루원덕택에, 그녀는 국왕의 영원한 여자친구요 애인으로 남아, 국왕을 조정해 정치, 경제, 외교 정책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이렇듯 당당하고 화려한 삶을 살다가 1764년에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28. 에카테리나 2세 편수많은 섹스 상대를 곁에 둔 여왕

에카테리나 3(Ekaterina  2, 1729-1796)  독일 귀족의  딸로 1729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745년에 17세의 나이로 러시 아의 표트르 3세와 결흔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군부의 도움을 얻어 태어날 때부터 우둔하고 병약한 남편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 했다. 그후 그녀는 서유럽의 계몽 사상에 심취해 계몽 전제 군주가 되어 무려 34년간이나 러시아를 다스렸다. 그녀는 치세 기간 중 농노제를 강화해 농노제 귀족 국가의  최성기를 이룩했다. 1767년 법전 편찬위원회를 소집해 약간의 행정상의 개혁을 통해 절대 왕정을 강화했다. 그러나 농노에 대한 압박은 푸가쵸 프 지도하의 농민 전쟁을 야기시켰다 그녀는 상인 계급과의 대립을 조절하면서 귀족 계급의 이권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대외적으로는 폴란드를 분할했고, 터키와의 전쟁을  벌여 흑해로 통하는 출구를 여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진전과 신  사상의 보급을 적대시 하여 라디시 체프, 노비코프 등의 진보주의자들을 박해했다.  

그녀는 치세 기간 중 포병대위  출신인 올로프 백작(1734-1783)시종장인 포촘킨  공장 등을 특히 총애했다. 그녀는 이들을 충신이요 애인으로서  무척 아꼈으며, 틈만 나면 이들과  더불어 밀애를 즐겼다. 이들 외에도 그녀는 82명이나 되는 남자들에게도 총애를  내렸으며, 이들에게는 에르미주의 겨울 궁전에 방을 따로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 액의 애정료 와  의상비까지 지불해 주었다, 특히 밤시중을 들어주는 섹스 상대에게는 특별히 24접시의 요리를 제공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섹스 상대 중 가장 총애를 받은 자는 포템킨 공작이었다. 그 는  미남에다가 두뇌가 명석하고 총명해 그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그녀의 침실 바로 아래층에 기거하면서 밤중에는 비밀계단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침실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그가 1791년에 터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세  번이나 졸도했으며 며칠 동 안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워 깊은 슬픔과 비탄에 잠겨 지냈다 그러다가  1796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9. 마리 앙트와네트 편/   피로 물든 베르사이유의 하얀 장미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 1755-1793)는 오스트리 아 황제인 프란쯔 1세와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1755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정략 결흔 으로 1774년에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동자, 우유빛 살결, 날씬한 몸매를 지닌 그녀에 비해 그녀의 남편 루이 16제는 작달막한 키에 못 생긴 얼굴을  지닌 소심한 남자였다. 그는 틈만 나면 궁정 작업장으로 내려가  묵묵히 망치를 휘둘러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대장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물쇠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심심하면 사냥을 나갔다. 게다가 그는 포경 수술을 하지 않아 성불구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그는 결혼 후 7년 동안이나 왕비를 처녀로 놔두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 이외의 바깥 생활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자 했다. 그녀는 베르사이유  정원 한 구석에다 프티  프리아농의 별장을 지어놓고 이곳에서 엄청난 돈을 들인 호화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었으며,   파티를 통해 그 동안 쌓인 스트 레스를 마음껏 풀었다. 그녀는 연못, 동굴, 양 우리까지  있는 그 목가적인 정원에서 젊은 기사들과 히히덕거리며 숨바꼭질이나 공 던지기그리고 그네놀이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마음에 드는 시종들과 함께 마차를 몰고 궁귈 밖으로 나가 파리 의 극장이나 도박장 등지로 나가 놀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돌아와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그녀의 몸을  치장하는 의상, 장신구, 보석 등에 소요되는 비용은 엄청났다. 당시 절대 왕정의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의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그녀는 호사스럽고도 무절제한 생활을 하며 미모와 허영과 무분별한 사려 등으로 세상에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겨 왕위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민심까지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그녀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질책했다, 이때 그녀는 시큰등 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면 도대체 제가 뭘 하고 지내란 말씀이세요. 난 따분한 게 무섭단 말예요." 루이 15세가 죽고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그녀는 남편 으로부터 베르사유의 트리아궁을 선물 받았다. 그녀는 인공 연못 공사 및 바닥공사를 비롯해 트리아궁을 개조하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게다가 이 무렵 그녀는 스웨덴 장교 페르센 백작과 불륜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녀는 페르센에게 뜨거운 열정을 바쳤다. 이러한 그녀의 외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한 동안 그녀는 황태자의 출산이 늦어 왕비의 지위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스럽게도 1785년에 황태자가 태어났다, 한 편, 황태자가 루이 16세의 자식이  아니라 페르센의 자식이 아니냐는 설이 나돌아 그녀를 곤욕스럽게 하기도 했다. 여기에 목걸 이 사건(1785-1786)은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더 한층 가중시켰다. 어느 날 로앙  대주교에게 라 모트 부인이 슬며시 다가와 왕비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왕비가 54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루블 짜리의 값비싼 목걸이를 욕심을 내고 있다'는 말을 흘렸다. 이에 귀가 솔깃한 로앙 대주교는  대뜸 구매 계약서에 사인하고 대금 일부를  지불해 주었다. 그러나 목걸이는 왕비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도중에  증발해 버렸다. 지불일이 되어도 돈을 받지 못한 보석상이 왕비를 찾아가 호소하자, 왕비는 대주교에게 화풀이를 했다. 재판 결과 대주 교는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은 국외 추방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사정없이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배고픔에 굶주린 6,000여 명의 여자들이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베르사유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그녀는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다는 신하의 말을 전해 듣고서 이렇게 투덜거렸 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게 아니야?" 금새 궁전 밖으로  새어나간 그녀의 이 말은 시민들을 더   분개하도록 만들었다, 얼마 안  가서, 왕과 왕비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 및 아들과 함께 파리의 튈르리 궁에 갇혀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저 사람들은 내게 뭘  요구하는 거죠?" 내가 저네들에게 뭘 어쨌다는 거죠? 그후 그녀는 의지가 부족한 남편을 대신해 결연히 운명과 맞 서 싸웠다, 성을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외국에 있는 자기 편과 긴밀히  연락을 취했으며, 애인인 페르센의 도움을 얻어 위조 여권을 손에 넣었다. 페르센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리히 궁에 있는 왕비에게 접근해 대책을 강구하고 국왕 일가가 도망갈  구체적인 계획을 짜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엄중한 경계령을 어기고 왕비가 묵고 있는 궁으로 몰래 기어들어와 왕비의 침실에서 하룻밤의 밀회를 나누고 돌아갈 정도로 대담했다. 그의 도움으로 왕비는 대형 마차에 식량과 술과 옷을 가득 싣고 남편과 아들을 비롯해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해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치게 화려한 행차는 곧 군중과 병사들에게 발각  되는 바람에 탈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충격을 받은 왕비는 하룻밤 새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 해 겨울에 페르센이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파리에 잠입해 은밀히 왕비를 찾아와 다시 한 번 탈출할 것을 간곡히 권했지만, 모든게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국왕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렇듯 왕비의 다른 애인들과는 달리 페르센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다른 애인들,   드 코와니 공이나 기누 공, 에스텔라 지 백작, 그리고 브잔발 남작  등이 일시적 성 유희  대상이었다면, 페르센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벽한 유일한 애인이었던 것이다. 페르센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고, 왕비도 최후까지 그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바쳤다이후 그녀는 자기 오빠인  오스트리아 팡제 레오폴트 2세를 부추기어 그의 무력 간섭에 의해 혁명을 타도하려고 전쟁 정책 을 추진했다그러나, 1792810일의 봉기 및 공화제 탄생 이후 813일에 탕플 감옥에 국왕 일가가 모두 투옥되어 깊은 좌절감 속에 빠져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17931 21일에 먼저 처형되었으며, 그 해 7월에는 황태자 루이마저 처형되었다. 그 해 81일에 그녀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 된 뒤, 10월 초에는 공개 재판을 받았고, 1016일에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 단두대의 칼날을 받았다. 그녀  의 둘째 아들 루이 17세도 그로부터 2년 뒤 가혹한 감옥 생활 때문에 사망했다.

 

 30.조제핀 편/바람기와 질투심의 대표적 한신

조제핀(Josephine,1763-1814)은 서인도 제도의 마르테닉 섬 에서 농장주이자  포병 중위인 조제프의 딸로 1763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77917세의 나이로 당시 파리 식민지 장관이던 비콩테 알렉산드레 보아르네 자작에게 시집을 가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그녀의 남편은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고  그녀도 투옥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재 산은 이미 모두 몰수당한 상태여서 두 아이를 기르며 살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할 수 없이 그녀는 거리로  나섰다 이후 그녀는 동양적인 미모와 매혹적이고도 관능적인 몸매, 칠흑같이 검은 머리, 하얀 피부, 그리고 뛰어난 화술로 여러 귀족들의 애인으로 전전하며, 샬롱에 드나들면서  일약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1796  3월에 6살 연하인, 야심만만한 나폴레옹에 은근히 접근해 유혹했다. 첫눈에 반한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우직하게 다가와 사랑 고백을 늘어놓고 나서 성급히 청흔을 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그의 구흔에 옹답하지 않았으나, 줄기찬 그의 청혼에 마지못한 척  응낙하고 말았다. 재흔 후 그녀는 남편을 이탈리아 군사령관으로 취임시키기 위해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최고사령관이 되자마자 이탈리아 전선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에  한편으로는 허전하고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낀 그녀는 그동안 눌러 두었던 바람기를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사흘이 멀다하고 전선에서 애정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녀는 그 편지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파티장으로 달려가 새 애인인 이포리트샤를의 품에 안겼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상관인 바라스 사령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장에 내 아내 조제핀을 전선으로 보내 주지 않으면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에 당황한 정부 수뇌부는 조제핀을 설득해 이탈리아로 떠나도록 했다. 그리하여 내키지 않은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된 조제핀은 이때 그녀의 애인 이포리트를 여행에  동반했다. 두 사람은 같은 마차를 타고,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은밀히 열정을 불태웠다. 그 이듬해에 남편이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바람기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파리 교외에 마르 메종  저택을 사들여, 그곳에서 애인과 뜨거운 밀애를 즐기곤 했다. 이러한  그녀의 외도에 대한 소식은 이집트의 야영지에 있는 나폴레옹에게까지 속속 도착했다. 이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어느날 느닷없이 파리로 돌아와 조제핀의 불륜을 문제 삼고자 했다그러나 조제핀의 전()남편의 자식들이 사정하며  애원하는 바람에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말았다. 179911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된 후부터는 상황이 뒤바꾸게 되었다 이번에는 나폴레옹이 바람을 피워 조제핀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에게 새 애인이 생길 때마다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 밤중에 애인 집을 불쑥 방문하는 등 유치한 질투극을 벌였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격이 경박하고 사치한 여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에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황후가 된 그녀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드레스가 900여벌에, 장갑이 1,000여 켤레, 구두가 500여 켤레가 넘었다. 이 때문에 그 녀는 막대한 빛을 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제위 계승자를 낳지 못했으며, 훗날 반혁명파 진입 때  나폴레옹을 연행해간 공화파의 두목  바라스와 밀애를 즐기는 등 난잡한 성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가 결국 18091215일에 이흔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조국을 위해  나는 이혼을 승낙했습니다

그런 후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쓸쓸히 궁전을  빠져 나갔다. 이후 200만 프랑의 연금으로 살다가 폐렴에 걸린 그녀 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당하던 해인 1814  529일에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최후의 말을 남겼다. "나폴레옹, ...

 

 31. 에메 뒤뷔크 편 황제의 모후가 된 여자 노예

에메 뒤뷔크(1763-1817)는 프랑스령 마르치니크 섬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딸로 1763년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녀 는 숙부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조제핀과 친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다. 14세 때인 1776년에 그녀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도시 낭트로 상경했다. 그리고 그곳의 수도원에서 8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교육을  마친 그녀는 1784년에 들뜬 마음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타고 가던 배가 비스케이 만에서  해적선을 만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이때 그녀는 해적들의 포로로 잡혔다. 당시 해적들은 잡은 포로들을 대부분 노예로 팔아 치웠다. 남자는 거세해 신관으로, 그리고 여자는 황제가 관할하는  하렘이나 또는 회교도들의 첩으로 팔아먹었다. 그런데, 해적선 선장은 에메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일반 여자 노예들처럼 그냥 헐값에 팔아 버리기가 아까워, 황제에게 그녀를 바쳐 그의 신임이라도 얻을 속셈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그녀를  보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은   황제 압둘  하미트 1(Abdal-Hamitl, 재위 1774-1789) 가 통치하고 있었다콘스탄티노플로 보내진 그녀는 그 즉시 하렘으로 넘겨졌다. 당시 하렘에는 그녀 말고도 수백 명의 여자 노예들이 잡혀와 살고 있었다. 하렘은 황제 사르탄을 신처럼 여기는  신전 같은 곳 이었다. 여기에  있는 여자 노예들은 오로지 황제 한 사람만을 위해 평생 살아야했다. 선택되면  언제든지 누구나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황제에게 바쳐야 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매일같이 얼굴과 몸매와 피부를 곱게 가꾸기 위해 목욕, 마사지, 미용체조 등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잠자리 기교까지 배웠다. 황제가 잠자리 상대를 고르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렘을 방문 하기만 하면 되었다. 황제가 모후를 대동하고 하렘에 나타나면 신관은 황금 종을  쳐서 하렘의 여자 노예들을 한  곳에 집합시켰다. 정렬해 있는 여자 노예들 사이로 이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자가 있으면 황제는 모후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면 모후는 당첨된 노예를  황제의 애첩으로 삼아 그날 밤  황제의 침실로 수청 들게 했다. 이와 같이 황제와 동침한 노예들 중 에는 애첩이 되어 사랑 받는 자도 있었고, 황제의 아이를 낳아 후궁으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는 자도 있었다, 하렘에  들어온 에메는 처음 며칠 동안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그러나, 이곳에서 탈출하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여자 노예로서의 길이 아니면 애첩 또는 후궁으로서 의 길,   두길 외에 다른길은없었다.다행히 황태자셀림의 생모 코카서스 비가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비는 기울어져 가는 터키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 교육을  받은 에메를 은근히 욕심냈던 것이다, 그녀는  시간만 나면 에메를 설득했다.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운명을  다소곳이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명령을 거역하면 죽음밖에 없겠지만, 만약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왕자라도 낳게 되고, 또 그  왕자가 나중에 황제라도 된다면 그대는 모후로서 존대 받게 될 것이니라." 이윽고 선택받은 그녀는 압둘 하미트 1세에게 그동안 고이 간직해 온 그녀의 처녀성을 바쳤다, 그리고 1년 후 아들을 보기 좋게 분만했다, 그리하여 궁궐 안에는 제위 계승자가 셋이 있게 되었다. 코카서스 비의 아들 셀림(Selim),시리아 비의 아들 무 스타파(Mustafa),에메의 아들 마흐무트(Mahamut)가 그들이었다. 이 중에서 셀림(재위 1789-1807)이 압둘 하미트 1세의 뒤 를 이어 1789년에 즉위했는데, 그는 일찍부터 라흐무트의 어머니인 에메에게 관심을 보여왔던  터였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애정이 싹트게 되어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궁귈 내에서 는 마흐무트의 생부(生父)가 혹시 셀림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던 중 셀림 3세의 모후인 코카서스 비가 사망하고 말았다. 이 틈을 이용해 시리아 비와 그녀의 아들 무스타파를  추종 하는 무리들이 반란의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 챈 에메는 사촌인 조제핀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견해를 받아들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세바스찬 장군이 이끄는 기마대를 급파했다. 그런데, 세바스찬의 아내가 산욕열로 사망하는 바람에 실의에 빠진 세바스찬 장군이 프랑스로 돌연 귀국해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친위대가 반기를 들고 궁궐로 쳐들어와 셀림  3, 에메, 그리고 마흐무트를 체포해서 구금시켜 버렸다그리고 무스타파(재위 1807-1808)가 즉위했다. 그러나, 무스타파는 군대를 일으켜 밀고 들어오는 파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조급해진 시리아 비는 자객을 보내 갇혀 있는 셀림과 마흐무트를 죽이고자 했다. 이때 셀림은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으나, 마흐무트는 간발의 차이로 도망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윽고 의군(義軍)은 궁궐을 점 령해 시리아 비와 무스타파 4세를 제거하고, 마흐무트(재위 1808-1839)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때 마흐무트의 나이 25, 에메의 나이 46세였다. 이로써 에메 뒤뷔크는 여자 노예로 팔려온지 30여 년만에 황제의 모후로  군림하게 되었다. 미모와 기품과 지성까지 두루 갖춘 그녀는 아들을 잘 보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1809년에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흔을 해버리고 오스트리아 황녀와 정략 결흔을 해버리자그녀는 분개해 프랑스를 멀리하고 그 대신 영국과 손을 잡았다. 이어 나폴레옹의 패전, 그의 엘바섬으로의 유배, 1814년의 조제핀의 죽음 등의 소식을 전해 듣고 착잡하고도 서글픈 마음으로 지내다가, 조제핀이 죽은지 3년 뒤인 1817년에 죠세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황실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명은 이렇게 쓰여졌다. "아름다운 여인, 외국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모후 폐하, 동양 으로 새 빛을 가져온 여성!.

 

 32. 스탈 부인 편 자유로운 연애 편력의 소유자

스탈 부인(Stael, 1766-1817)은 프랑스  혁명 직전의 총리 대신이었던  스위스 은행가 네케르의 딸로 1766년에 태어났다. 그 녀는 부모의 샬롱에서 백과전서파(白科全書派)의 문인들을 알게 되어 일찍부터 문학에 재질을 보였다. 그녀는 21세 때는 1786년 에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인 스탈 남작과 결혼했으나 얼마 후 이혼했다. 그녀는(루소의 성격 및 저서에 관한 서한)(17입년) 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소설 <델핀>(1802-코린)(1807 ) 등을 집필했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 때 지롱드 당의 명사들과 뜻을 같이해 적극적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 무렵  육군경(陸軍卿) 나 르본과 연애에 빠져 지냈으며, 그후 여러 남성들과 교제하는 등 자유로운  연애 편력을 구가했다. 혁명 도중 그녀는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 있는 아버지의 영지 코페에서 지냈으며, 한때 영국 에서 나르본과 동거 생활을 하기도  했다. 테르미도르 반혁명 때 일시  파리에 돌아와 다시 샬롱을 열었다가, 또 다시 코페로 일시 도피해 있다가 1797년에 다시 파리 로 돌아와 문인으로서 활약을 재개했다. 이 무렵에 그녀가 쓴 <소설론>(1795)은 괴테의 주목을 받았다. 괴테는 이를 높이 평가해 직접 독일어로 번역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1796년에  그 녀는 나르본 과의 연애의 파탄과 혁명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해 <개인 및 국민에  미치는 정열의 영향에 대해> 라는 글을 썼는 데, 이는 그녀를 문학자로서의 지위를 한층 높여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803년에 그녀는 다시 망명의 길에 올라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지내며 집필 활동을 했다 그녀는 그 동안 사귀던 콩스탕과 결별한  , 20년 연하의 군인 로카와  스위스에서 몰래 결혼한 후 러시아, 스웨덴, 영국 등지로 망명겸 여행을 계속했다. 1814년에야  파리로 돌아와 <추방의 10>, (프랑스 혁명론) 등을 쓰면서 조용히 만년을 보내다가 181752세로 세상을 떠 났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연애는 남자의 생애에 있어서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여자 의 생애에 있어서는 역사 그것이다.  

 

 7. 19세기 연애 박사들

33. 조르즈 상드 편/ 세계 제일의 연애 박사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파리에서 귀족 모리 스 듀팡의 딸로 180475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아망 데느 루실 오로르 뒤드방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실 후예였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의 빈민굴에 사는  ()장수의 딸이었다. 가족들은 스폐인의 마드리드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녀의  나이 5세 때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프랑스 중부 베리 지방의 노앙에서 소녀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세상을 떠나고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녀는 할머니에게서는 음악을, 어머니에게서는 재봉술과 요리를 배웠다. 할머니는 매년 오백 프랑을 제공한다는  조건하에 노앙의 영지를 떠날 것과 상드의 양육권을 포기하라고 어머니에게 종용 하는 바람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려두고서 파리로 훌쩍 떠나 버렸다. 그후 그녀는 노앙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권유 대로 올갠, 클라비고드, 하프 등의 연주법을 배웠고, 그림, 라틴 어, 희랍어, 역사, 수학 등도 학습했다. 그리고, 호머, 라신, 몰리 에르 등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때로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숲과 들판을 마구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181916세 때 파리의 호세 쌍 쟈크 수도원으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 있는  동안 그녀는 수녀가 될 생각을 했 다, 이를 눈치 챈 할머니는 그  이듬해 그녀를 수도원에서 황망히 끌어냈다. 그후  그녀는 당분간 파리 생활을 하며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노앙의 영지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돌연 인생 태도를 바낀 남장(男裝)을 하고서 말 을 타고 사냥을 즐기는 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일삼았다. 한때 그 녀는  루소의 사상에 깊이 심취되기도 했다. 18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어머니를 찾아  파리 로 상경했다, 그러나그녀의 어머니는 너무도 변해 있었다. 그녀 는 딸에게서 시어머니의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고는 이를 못마땅 히 여겨 딸을 구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읽고 있던 책을 내동댕 이치기도 했다. 그래서 상드는 할 수 없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처없이 방황하던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뒤프레시스 댁을 찾아갔다 의외로 반갑게 맞아준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지내면서, 그녀는 음악회나 연극 등의 모임에도 참석했다. 이때 만난 청년이 까지미르 뒤드방 남작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군대의 육군 대령의 사생아였으나 아주 부자였으며, 그 역시 군인 신분이었다둘은 허물없이 사귀다가, 서로의 청혼을 받아들여 1823910일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그녀는 남편 으로부터 3천 프랑의 연금을 지급받기로 약속 받았다. 그로부터 9년 남짓 그녀는 11녀를 낳고 기르며 평범한 가정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불순하고 교양 없는 남편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남다른 남편은 노앙 영지 내의 수목을 함부로 잘라 내거나 화원을 없애 버리는가 하면, 가구의 위치도  마음대로 옮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렸을 때부 터 정이 든 늙은 개와 앵무새도 죽여 버렸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남편을 독서실로 끌어들여 파스칼과 몽테뉴의 저서를 읽어 주며 그의 야성적인 과잉열을 식혀 주고자 애를 썼다. 그러 나, 소용없었다. 점차 그녀는 남편에게 환멸과 비애의 감정을 느끼고 아들  모리스와 파리의 친지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그녀를  못마땅히 여긴 남편은 아내를  집안에다만 가둬 놓으려고 안달을 했다. 그래도 말을 안 듣자, 어느 날 그는  발작적으로 그 녀의 뺨을 후려갈겨 버렸다. 이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이란 자기 희생에 불과할 뿐이야" 그리고 한동안 요양을 핑계삼아 남편 곁을 떠나 지내다가 젊은 법률가 드 쎄즈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남편에 비해 지성과 박애 정신과 감정이 풍부한  남자였다. 두 사람은 달콤한 밀회를  즐기 며 어느새 서로에게 깊이 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들의 밀회  는 곧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는 드 쎄즈와 우정 관계로 전환하기로 하고 남편에게 이를  허락해 달라고 정중히 요구했다, 이때 그녀의 남편은 자기대로 여색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요구를 간단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드 쎄 즈와는 편지로, 그리고 고향  친구인 그랑쎄이뉴와는 데이트를 즐기며 동시에 사귀었다. 이 무렵 그녀는 딸 쏘랑쥬를 낳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무료함과 권태로움, 남편의 난폭함과 무례함 때문에 노앙의 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무언가  돌파구를 뚫고자, 시작 (詩作)이나 소설 창작, 또는 회화에 몰두해 보았다. 이 무렵  그녀 앞에 금발 머리의 법률학도 줄르 상드(1811-1883)가 나타났다. 그는 법률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골리브리(벌새)라는 별명을 붙여주고서 친밀히 지냈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집안의 서랍을 정리하다가 "내가 죽은 후에 펴 보시오"라고 적혀  있는 봉투 하나를 발견하고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남편이 자기를 저주하고 비난한 내용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타락한 여자라고 단호히 규정짓고 비방하는 대목이 그녀를 매우 분노케 했다. 그 길로 그녀는 남편에게로 달려가 격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자유와 연금을 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이걸로 끝냅시다." 1831년 겨울, 홧김에 무작정 파리로 상경한 그녀는 마땅히 머물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줄르 상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후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7살이나 연하 인 줄르에게 그녀는 한없이 빠져들었다그러나 생활고 때문에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어 번역삯바느질, 초상화 그리기 등등 일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닥치는 대로 손을 댔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다. 때로는 신문 기사도 썼고, 때로는 소설 도 썼다. 애인과 함께 아나)3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조르즈 상드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소 설은 출간되자마자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어 발표한 <발랑떤 느>도 각광을 받았다. 그녀는 외출할 때는 주로 남장(男裝)을 하고 다녔으며, 줄르 상드 외에도 여러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 생활 을 나누면서 정열적으로 집필 활동을 전개했다. . 즐르 상드와는 2년 동안 동거생활을 했지만, 이것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녀가 어느 날 시골을 다녀왔을 때 줄르가 세탁부와 추행을 벌이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한동안 번민하다가 프랑스 낭만파 소설 가요 <카르멘>의 미남 작가인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 를 만나 사귀었으나, 일주일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메리메는 어느 날 5천 프랑을  벽난로 위에 놓아두고는 그녀의 침실을 빠져나간 후에 여기저기 다니며 그녀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게다가 색정에 사로잡힌 탕녀에 불과해! 그러나, 그러한 메리메를 그녀는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만약 그가 나를 사랑했더라면 그는 나를 지배했을.것이고, 내 가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길 수 있었다면 나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을! 18333, 그녀는  어느 만찬회에서 알프렛 드 위세 (1810-1857)와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읽고 비평해 주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어느 날 쌩뜨 뵈브에게 이런 간략한 쪽지 를 적어 보냈다.  "저는 위세의 애인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녀의 위세에 대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는 위세에게 항상 열정과 절조를 강조했으 며, 위세는 이에 순순히 협조했다. 둘은 퐁떼느블로의  숲에 있는 저택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녀는 승마에, 위세는 데상에 열중하며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행복에 겨운 그녀가 애인을 부를 때는 특별한 호칭을 썼다. "나의 아가! 그런데, 어느  날 위세가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매우 당혹케 하고 말았다. 그녀가 이틀간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어 회복은 되었지만,   사건은 그녀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숲 속 생활에 들어온 지 8일만에 다시 파리로 상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그녀의 우울증과 위세의 멍든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그들은 <적과 흑>의 저자 스탕달을 만났다. 이때 스탕달의 교만함이 그녀의 눈에 몹시 거슬렸다. 여행마저도 그녀에게는 거의 환멸만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베네치아의 다니엘 호텔에 묵으면서 시간 나는 대로 작품 집필에 열중했다. 여행을 떠나올 때  선불로 받아 쓴 출판사의 빛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이질에 걸려 눕기도 했다. 위세는 호텔을 뛰쳐나가  음주와 도박에 돈을 허비했다. 이렇게 무절제한 애인을 그녀는 자식을 꾸중하듯 나무랐다. 이에  위세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녀를 융통성 없는 몽상가요 지루한 여인이요 수녀이자  설교가라고 몰아세웠다, 이후 두 사람 사이가 다소 서먹 서먹해 졌지만, 위세가 알코을 중독과 정신착란적 발작으로 돌연히 병석에 눕자, 그녀는 병자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자는 갑자기 그녀에게 덤벼들어 포옹하며 미친듯이 그녀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이때 갈색 머리를 한 이탈리아인 의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주 위험할뻔했다. 그 의사 이름은 빠제로 박사였는데, 그는 이미 몇몇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던 이중인격자였다. 어느 날 공포와  피곤에 찌들린 그녀는 의사의 가슴에 뛰어들어 안겨 버렸다. 그는 그녀의 불행을 최대한 이용해 마침내  그녀를 자기 품에 안고 불장난을 즐겼다, 어느 날 그 장면을 의식에서 막 깨어난 위세가 우연히 목격하고 말았다 그 충격은 그의  병세를 더 한층 악화시켰다. 그후로도 그녀와 의사의 은밀한 데이트는 계속되었다. 병세가 다소 회복된 위세가 하루는 질투심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서 그녀에게 찻잔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당신은 창녀야! 이때 그녀는 자신의 육체는 지킬 수 있었지만 마음만은  어깰 수 없었다면서 마음 약한 자신을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에게 빌었다. 이후 둘은 헤어졌다. 1835329일에 위세는 그녀를 베 네치아에 그대로 남겨둔채 혼자서 파리로 떠나가 버렸다. 베네치아에 홀로 남온 그녀는 흘가분한 마음으로 빠제로 박사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러면서도 위세에게 어떤 때는  남매처럼, 어떤 때는 어머니나 누나처럼 정깊은 편지를 연달아 보냈다. "고독해서 견디기 어려울 때면 제발 당신이 나를 차지하는 것 보다 더 귀중하고 값비싼  추억을 나에게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주세요." 그녀는 빠제로 박사에게 이내 권태를 느꼈다. 그가 어느 날 서너 명의 정체 모를 여자를 끌고 들어와 추태를 보인 뒤로는 그에 대한 불신이  더욱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녀는 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윽고 한 몸이 된 두  사람 은 보란 듯이 파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위세는 하루는 그녀를 찾아가 앞으로도 우정 관계만은 지속해 달라 고 애원했으나, 그녀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끈끈한 정은 그 뒤로도 2년간이나 더 지속되었다. 오히려 겁이 많은 빠제로 박사가 위세보다도 먼저 그녀를 포기하고 떠나가 버렸다.  

뮈세와도 결별한 후, 그녀는 극도의 정신적  불안 상태에 빠져 한때 자살을 하려고까지  했다. 이 무렵 남편 까지미르 뒤드방은 그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잡한 방탕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그 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변호사인  미쉘 드 부르즈의 지혜로운 도움으로 승소했다. 이후 그녀의 마음은 부르즈에게 일시 향했지만, 예술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문외한이었던 그에 대해 그러한 연애 감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차츰 그와 거리가 멀어지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헤어 지고 말았다, 그후 그녀는 보헤미안들인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노앙의 영지에 샬롱과도 같은 집을 세워 놓고 친구들 을 초대해 함께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리스트가 쇼팽 (isle-1849)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듣고는 값비싼 피아노까지 한 대 사들여 놓았다. 쇼팽은 1838년 봄에 노앙에 있는 그녀 의 집을 방문했다 시름에 잠긴 듯한 얼굴로 피아노를 치는 그의 모습은 이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그 해 여름부터 두 사람의 깊은 관계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1015일에 둘은 지중해의 마죠르카 섬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쇼팽이 폐병 때문에 앓아 누워 각혈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토착민들이 그 병이 두려워 즉각 퇴거해 줄 것을 요구해 할 수 없이 발데 모자로 휴양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쇼팽은 그녀보다 6살이나 연하였지만 둘은 서로 마음이 잘  통했고 아주 행복했다. 쇼팽 은 그녀에게 <빗방울의 프렐류드>라는 곡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18392,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쇼팽이 다시 ,각혈해 위급 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녀는 급한  김에 프랑스 군함의 함장 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요행히 군의관의 도움을 받게  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르세이유를 거쳐 노앙으로 돌아와 요양 생활을 하며 함께 지냈다. 쇼팽은 간 혹 그녀의 딸 쏘랑쥬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둘은 다시 파리로 상경했다. 이후 쇼팽은 샬롱의 총아가 되었으며, 그녀는  신작소설 <류크 레지아 플로리아니>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쇼팽과는 1839년경부터 1847년까지 무려 8년 가까운 세월을 친교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정열적인 상드 와의 동거 생활은 쇼팽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이었다.

그는 정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건강을 해친 결과 마죠르카 성에서 요양생활 을 해야 할 정토가 되었으며, 이후 쇼팽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849년에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만년에 상드는 손자들에 둘러싸여  평온한 나날을 보탰는데, 주변의  농민들로부터는 '노앙의 아씨마님 으로경모(敬募)되었다. 이 무렴에도 그녀는 새로운 시대의 문학자들에게 관심을 보여 프 로망탕이나 플로베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문학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는 평생 예술을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 하는 수단으로 생각해, 이른바 '예술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연구가 아니며 이상과 진리의 탐구이다'라는 예술론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녀는 염세적인 사실주의와는 다르게 현실을 미화하고 인물을 이상화시켜 인간의 사랑, 진보, 선의(善意)를 계속해서 추 구한 낙천적 이상주의자로서의  깃발을 죽는 날까지  결코 내리지  않았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1831년에 <파리 평론>에 발표한 단편소 설  <프리마돈나>를 비롯해 장편소설 <앙디아나>(1832<렐 리아>(1833)<모프라>(1837)<롱쉬엘로>(1842-l843) <앙지볼의 방앗간>(1845-1846)<마의 늪>(1846), <사랑의 요정>(1849)<엽아(葉兒) 프랑스와>(1846)<피리부는  사람 무리>(1853)<브와 도레의 미남들>(1858)<빌레메 후 작>(1861) 등이 있다. 그녀는 초기에는  로맨틱한 연애소설을, 중기에는 사회주의 소설을, 그리고 후기에는 전원소설을 주로 발표했다

 

 34. 얘니 마르크스 편  /남편을 유일한 신앙으로 여긴 여인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 1814-1881)는 독일의 작은 도시 트리어에서 프러시아의 정부 추밀 고문관인 루드비히 폰 베스트 팔렌 남작과 카롤린네 호이벨과의 사이에서 1814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베스트팔렌 남작과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인 하 인리히  마르크스는 친구지간이었다. 당시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변호사였다 그녀는 칼 마르크스보다 4살이나 위였지만, 유년시절에 둘은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개방적이고도 낭만적이고, 그런가 하면 지적이 고도 정열적인 소녀로 성장했다. 처녀 시절에 그녀는 이미 고향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손꼽혔다. 녹색 눈빛, 갈색  머리, 달걀형 얼굴, 월하향빛 피부를 가진 데다가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 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선녀나 다름없었다. 시인 하이네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녀의 이러한 미모에  놀라 이렇게 신음하듯 말했다. "그녀는 참으로 마력적이야?

그녀는 18435월에 칼 마르크스와 결혼했다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파리에서  보낸 잠간 동안의 행복한 시간 외에는, 고달픈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유태인 혁명가  출신을 남편으로 둔 그녀의 고생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고향 트리어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브뤼셀과 런던 등지로 추방당해야 하는 남편을 따라 주거지를  자주 옮겨 다니며 남모를 슬픔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가난과 질병이 늘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떤 때는 기본적 생필품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사랑하는  딸 프란치스카마저 잃었을 때는 딸의 관 을 살 비용조차 없어 눈물만 삼켜야  했다.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곱 자녀 중 네 명이나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그런데다 빛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존심 을 꺾고서 친척들과 빛쟁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간혹 그녀를 옭아매는 참흑하고도 잔인한 삶을 저 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생활비를 벌어들이지 못하는 남편 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 하고 존경했다. 일찍이 신앙심을  잃어버린 그녀에게는 남편이 그 녀의 유일한 신이요 신앙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남편 곁에서 집필을 도왔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녀는 남편의 저술을 끝까지 잃어 주고 원고 정리를 도왔다. 그리고 남편이 추구하는 혁명 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편의 믿음직한 혁명 동지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남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엥겔스를 속으로  은근히 질투하고 경계하면서도 남편이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주는 데 걸림돌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일에서 자기 실현의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만년에 그녀는 간암에 걸렸다. 그러자 마르크스는  그녀를 어린 애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이렇게 속삭 이듯 말했다. ",나는더 이상기운이 없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188112월이었다. 그녀의 나이 68그녀가 죽었을 때 엥겔스는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마르크스의 삶도 끝났다? 그녀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던 마르크스도 그녀가 죽은 지 2년 뒤인 18833월에 사망해 20여 명의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 곁에 묻혔다,

 

 35. 플라라 뷔크 편  / 순수한 사랑을 아름담게 가꾼 여인

클라라 뷔크(Clara Wieck, 1819-1896)  181999일에 피아노  교사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뷔크와 어머니 마리안네 트롬 릿츠 사이에서 둘째 딸로 181999일에  독일 라이프찌히의 쯔르호헨리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피아노 교사였기 때문에 그녀는 하녀 요한느의 손에서 성장해야 했다. 3세 때 살쯔개 쎈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세 동생이 태어났다 1824년에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혼한 후에 역시 음악 교사인 발기르와 재흔했다. 그녀는 6세부터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지가 강하고 두뇌가 명석하며 피아노 교사로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때까지 그녀는 말을 잘 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도 피아노 소리만큼은 아주 민감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피아노 기법뿐만 아니라 음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이론과 실제를  딸의 머리에 적절하게 넣어 주며 조금씩  연습을 시켰다. 그 결과 그녀는 9세 때 모짜르트 ED장조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솜씨가 현저히 향상되었다. 그 녀의 연주 중 1828331일에 칼스 박사의 집에서 연주한 훈 멜의  피아노 삼중주곡은 너무나도 훌릉했다. 바로 이때 그녀는 로베르트 슈만과 첫 대면을 했다, 그 해에  그녀의 아버지는 20세 연하인 클레멘티네와 재혼했으며, 신혼 여행 중에 딸을  데리고 다니며 곳곳의 음악 애호가들 앞에서 연주하게 만들어 실력을 쌓게 했다. 그러는  중에 당대 유명한 예술가 파가니니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라인리히에게 서는 악곡의 이론과 대위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 무렵 로베르트 슈만이라는 청년이 그녀의 아버지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슈만은 아주 쾌활하고 장난기가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간을  갖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라이프찌히 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법률 공부 를 했었다. 그러나 차츰 법률보다는 음악쪽에 관심을 두게 되어 아예 방향을 바꿔 버렸다. 그는 뷔크의 집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가끔씩 그는 클라라의 .동생들에게 유령 얘기를 들려주거나 장난기 어린 벌을  주는 등 짓궂었으나, 아이들은 그를 잘 따랐다. 그러는 사이에 소녀 클라라는 대학생인 슈 만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1829년에 그는 다시 법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서 하이델베르크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한편, 클라라의 연주 여행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바이말 에서 노시인 괴테에게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바이말 국립극장에 서의 연주는 격찬을 받게 되었다. 그후에도 클라라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 여러 도시를 순방하면서 연주 여행을 계속했다그 사이에 슈만은 다시 라이프찌히로 돌아와 음악도가 되어 맹렬히 피아노 연주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을 너무 무리하게 한 나머지 손가락에 고통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후 작곡에 더 열중하게 되었다. 파리 연주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클라라는 마침 <나비>라 는 곡을 작곡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슈만과 감회어린 상봉을 하게 되었다, 이 곡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다. 어느 날 그녀는 손가락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그를 위로하길, "로베르트! 당신에게는 피아노보다는 창작이 더  어울릴 것 같 아요. <나비>만 보더라도 그렇잖아요? 이제 피아노는 그만 두시 고 좋은 작품을 많이 쓰도록 하세요. 그러면 제가 연주를 해드릴께요." 라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우정은  사랑으로 싹터 갔다. 이를 눈치 채게 된 그녀의 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을 심산으로 비엔나  연주 여행을 떠나 버렸다. 그곳에서의 연주는 아주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예술가로서의 최고 영예인 '카마 빌튜오조'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리스트를 만나 함께 연주 할 행운도 얻었다. 반면에, 그녀는 슈만과 자기와의 관계를 단절 시키려고 혈안이 된 아버지와 큰 괴리감을 갖게 되고 말았다그 녀는 아버지가 방해하면 할수록 슈만에게 더욱 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바쳤다, 결국 부녀지간에 사이가 나빠져, 그녀는 아버지와 혜어져 18391월에 바바리아로 떠나,파리로 갔다. 그리고 슈만 은 그녀의 동의를  얻어 결혼을 방해하고 그 동안 순회연주에서 그녀가 번  돈을 몽땅 빼앗으려는 그녀의 아버지를  상대로 결혼허 가에 대한 소장을 작성해 라이프찌히  제판소에 제출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도 소장을 제출했다. 다행히 그녀는 생모로 부터 결혼 승낙을 얻어냈으며, 이어 승소해 재판소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18409  12일에 그들은 라이프찌히의 슈네펠드  교회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슈만은 <나의 사랑하는 신부에게> 라는 자작가곡집을 그녀에게 결흔 선물로 주었다. 결흔식날 그녀 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썼다,  "좋은 날씨, 아름다운 날씨? 그리고 슈만의 창작 작업이 중심이 된 결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로부터 3  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후 라인 강변의 뒤셀도르프에서 새로운 삶 을 시작한 그들은 5남매의 부모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852 년에는 헬겔 가()에 있는 새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슈만은 그곳 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러나, 단원들의 비협조로 그 자리를  그만 두고 세베닝겐으로 휴양을 떠나 그후 작곡에만 전념 했다그리하여 <서곡>를 비롯한 <라인교향곡>, (첼로협주곡), <합창곡>, (실내악곡)등과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쇼팽과 브람스를 인정하고 그들을 뒷받침해 주어 세상에 내놓았다이 무렵 건강이 너무 악화된 슈만은 발작과 류마치스로 고생했다. 18542월 어느 날 그는 벗인 요하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음악은 이미 침묵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26그가 라인 강에 투신하는 사건 이 생겼다. 그는 투신하기 전에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겨 두었다. "사랑하는 클라라여나는 내 결혼반지를 라인 강에 던지고 가오. 당신도 그렇게 해주시오. 그러면 두 개의 반지가  함께 되고 당신과 나는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오."  

이후 슈만은 정신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녀들을 남의 손에 맡기고 흔자 순회연주를 떠나야 했다. 그녀는 라이프찌히바이말, 프랑크푸르트, 함브르 베를린, 런던 등지로의 연주 여행을 계속했다. 그녀는 이렇듯 긴 순회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으나, 남편의 병환이 깊어져 면회조차 불가능할 정도가 되자  크게 낙심했다. 며칠 후, 그러니 까 1856429일에 슈만은 운명했다. 그로부터 40여 년 동안 그녀의 연주  여행은 지속되었다, 그녀 는 해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정규적으로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회연주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14세 연하인 브람스의 곡을 세상에  소개하는 데, 그리고 남편인 슈만이 이룩한 순수한 낭만음악을 지키는 기수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녀를 깊이 사모하고 존경한 브람스는 평생 독신생활을 지키며 오로지 그녀와 스승 슈만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지키고 가꾸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1896516일에  심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진 그녀는 그로 부터 나홀 뒤에 조용히 숨을 거뒀다. 브람스가 '그녀가 사망했 다'는 전보를 받고 황망히 프랑크푸르트에 닿았을 때는 그녀의 시신이 슈만의 묘지 곁에 막 묻히려는 찰나였다. 그녀가 떠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브람스도 그녀의 뒤를 따라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 1819-1901, 재위 1837-1901 )는 죠지 3세의 네째 아들인 켄트 공() 에드워드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백부인 윌리엄 4세가 허약한 체질이 원인이  되어 일찍 죽자 그 뒤를 이어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그로부터 2년 뒤에 그녀는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왕자 앨버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름다운 파란 눈에다 멋진 코, 예쁜 입술, 부드러운 콧수염, 그리고 훌릉한 구레나룻을 지닌 데다가 신중하고도 침착한 성격의 앨버트는 그녀에게 있어서 꿈 에도 그리던 이상형의 남자였다. 그녀는 183910월에 그에게 청혼을 했다. 앨버트가 기꺼이 응낙하자, 두 사람은 그 이듬해 2월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즉위 초에는 멜번의 감화를 받아 휘그 당을 편애했으나, 부군 앨버트 공() 영향으로 점차 토리  당과도 화해했다. 18642세 때 동갑 나이인 남편이 죽기까지 그와의 사이에 9명 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다 앨버트는 매우 자상한 남편이자, 친구요, 조언자였다. 그는 아 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함께 술래잡기를 하거나 아이들 앞 에서 공중  곡예 시범을 보이는 등 자상한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그는  스코틀랜드의 자연과 사람들을 좋아해 함께 잘 어울렸다. 때로는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추며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빅토리아도 춤 솜씨가 뛰어났으며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고  카드 놀이나 수수께끼 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늘 연인처럼  아기자기하게 지냈다. 그 녀는 틈만  나면 하인 몇 사람만 데리고 몰래 궁전을 빠져나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발모랄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1861년에 남편이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자 그녀는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 부르짖었다. "행복한 내 삶은 이제 끝났도다, 세상이  나를 버렸도다." 이후 그녀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정조를 지 켜 줄곧 '미덕의 화신'이요 '살아 있는  도덕'으로서 우아한 품위 를 유지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매일 아침 남편이 쓰던 방으로 가서 뜨거운  물과 깨끗한 수건, 다림질한 옷을 갖다 두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사냥을 나가 사슴을 잡은 장소에다 표지판을 세워 둘 정도로 남편을 기리는 일에 극진했다. 반면에, 그녀는  국내적으로는 선거법을 개정하고, 중산층 시민 계급의 지위를 격상시켰으며, 국외적으로는 영국의 대외발전에 적극 동참했다, 그녀는 64년간에 걸친 치세,기간 동안 '군림하지 만 통치하지 않는 여제' 로서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에게는 9명의 자녀, 37명의 증손이 있어서 유럽  여러 왕가와의 인척 관계를 탄탄히 할 수 있었는데, 가령 독일의 빌헬 름 2세도 그녀의 외손자였다.

그녀는 특히 성()의 규제를 엄격히 해, 버킹검 궁전 내에 이혼 경력이 있는  외교관이나 귀족들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공창 (公娼)을 제외한  933개의 매춘업소와 욕실이 딸려 있는  800여 개 의 바노의 풍기문란을 엄중 단속했고출판 규제도 제도화해 외설 도서의  출판 및 유포를 일절 금지시켰다. 심지어 작품 속의 성애 묘사나 애욕 묘사까지도 규제 대상으로  삼았는데, 가령 세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이나 죠이스의 <율리시즈>속에 들어 있는 성애 묘사나 애욕 묘사도 삭제되거나 봉인될 정도였다. 그러나 매춘 단속과 성 규제를 엄히  하면 할수록 비밀 매춘 행위는 음성적으로 성행했으며, 포르노 소설이 같은 출판물의 비밀 출판이 횡행했고, 외국의 호색적이고도 음란한 내용을 담은 작품 들이 몰래 번역되어  은밀히 유포되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이러한 사태만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37. 마리 듀프레시 편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청순한 동백꽃 여인

마리 듀프레시(1824-1847)1824115일에 노르망디에서 철물행상의 딸로 태어났다부부싸움이 잦았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헤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홀로 되어 파리로 상 경해 어느 영국인 가정의 하녀로 들어갔으나, 마리 듀프레시가  9세 때 그녀는 저 세상으로 떠나 버렸다. 이후 그녀는 먼 외가친척집의 한 노인에게 맡겨졌다가 13세 때 그 노인에게 겁탈을 당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눈치챘으면서도 그 노인에게서 약간의 돈을 받고  모르는 척해 버렸다. 16세 때 아버지마저 여읜 그녀는 공장으로 들어가 여공 생활을  했다. 그후 몇 군데 공장으로 전전한 끝에 상노레로 가서 허름한  양복점에 취직을 했다, 그곳은  간판만 양복점이라고 내걸었지 실 제로는 남자를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여 있는 창녀집이나 다름없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창녀로서 험난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귀공자를 만났다. 그는  훗날 나폴레옹 3세의 치 세 때 외무장관이 되었던 아듀노르 드 그라몽 공()이었다. 그녀 는 이 귀공자와  함께 3개월 가량 달콤한 동거 생활을 했다. 이때 서야 그녀는 비로소 숙녀로서 대접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귀공자는 그녀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리고 리볼리 거리에다 집도 얻어 주었고 피아노나 댄스 교사까 지 붙여 주었다. 불행히도 이 무렵부터 그녀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폐병 초기였다. 그녀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온천지 스파로 가서 얼마 동 안 휴양을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스타크라베르크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 첫눈에 반해 버린 백작은 그녀를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 으로 가꾸어 주고자 옷에서부터 말씨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 를 해주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창녀 생활을 청산하라고 타일렀다. 백작이 마드레느 거리에다  집을 얻어 주고 집안의  가구까지 고급스럽게 갖춰 주면서 달랬지만 그녀는 웬일인지 몸 파는 일만은 그만 두지  않았다. 스무 살의 장미꽃 같은 그녀는 남자들과 마음껏 향락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녀는 생리 중일 때는 빨간 동백꽃을, 그렇지 않을 때는 하얀 동백꽃을 꼿고서 사교장에  나타 나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렵, 그녀는 뒤마 퍼스를 만나게 되었다 바리에테 오페라 극장에서  둘은 첫 대면 이래 곧 연인  사이가 되었다. 둘은 같은 동갑내기여서인지 아니면  서로 너무나 정열적이어서인지 쉽게 친  해졌다. 그러나 가난한 뒤마 피스에게 그녀는 너무도 버거운 상 대였다. 그녀는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과 쾌락을 동시에 손에 넣고 생활하는 고급 창녀였다. 둘이서 데이트를 하던 중에 그녀는 갑자기 마차를 잡아타고서 다른 남자를 만나러 훌쩍 떠나 버리는 때도 있었다. 뒤마 피스의 상식으로는 이런 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지독히 사랑했다. 때로는 질투심으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만큼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면 언제든 지체없이 달려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 이별 편지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그리운 마리 그대를 사랑하기에 충분할 만큼 나는 부자가 아니라오. 그러나, 그대에게 잠시 사랑 받는 존재로 남을 정도로 내 마음이 가난하지도 않소. 그러므로 이제 헤어집시다 그럼, 안녕," 이후에도 마리 듀프레시의 사치스런 생활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스타크라베르크 백작이 파산해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로지 몸을 팔아 하루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느 날 그녀는 심한 각혈을 하면서 고통스럽게 가슴을 쥐어 안고 방바닥을 뒹굴다가 이내 숨을 거뒀다. 18472  23일 새벽이었다, 그녀의 시신은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그녀 의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에 붙어져 비싼 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녀가 죽은지 1년 뒤인 1848년에 뒤마  피스는 마리 듀프레시 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더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 <춘희>를 발표했다그는 이 작품을 1852년에 손수 각색하여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1853년 피아브의 작시건<>베르디의 작곡에 의해 가극(歌劇)<라 트라비아 타>로 개작되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훗날 뒤마 피스는 자신의 과거와 <춘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마르그리트(마리 듀프레시)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38. 나데즈다 폰 매크 편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원한 사랑

나데즈다 폰 메크(1830-1893)1830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76년에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으로부터 차이코프스키 를 소개받았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니콜 라이 루빈슈타인은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장으로 있었으며, 차이코프스키는 1866년부터 1876년까지 같은 음악원의 화성학 담당교사로 재직 중에  있었다. 미망인 나데즈다는 맨 처음 차이코프스키의 악보 <폭풍우>를 대하고서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다른 새 작품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하면서 다음 내용이 담긴  편지와 함께 거액의 돈을 보냈다. "당신의 작품에 얼마나 매료됐는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군요. 물론 당신은 나보다 훨씬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의 찬사 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나 같은 사람의 찬사에는 코웃음치겠지요만."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그만 두고 오직 작곡 에만 전력하면서, 이후 나데즈다와 무려13여 년 동안 우정과 사  랑에 가득찬 1,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데즈다는 차이코프스키가  생활고에 쪼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 해 매년 6천 루블의 연금을 보내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서로 만나지는 말자'는 무언의 언약이 엄격히  지켜졌다. 차이코프스키는 나데즈다를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그러니까 1877년 여름에 음악원 제자인 안토니아 이바노브나 밀류코바와 결혼해 버렸다. 그렇지만,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데즈다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 "내가 얼마나 사악한 여자인지  아시면 놀랄 겁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당신의 아내가 미웠지만만약 당신이 행복해 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몇 백 배나 더 그녀를 미워했을 거예요. 난 그녀가 나만의 것, 당연한 나의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답니다 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요." 189010, 두 사람이 특별한 우정을 쌓은 지 13년이 된 어 느 날, 나데즈다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뜻밖의 편지를 띄웠다. "나는 파산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연금을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날 잊지 말고 가끔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파산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이 몹시 망가진 것이었다 그녀는 결핵을 앓아 드러눕게 되었으며, 게다가 신경쇠약까지 걸려 편지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갑작스런 절교 선언으로 크게 낙심한 차이코프스키는 삶의 의지와 활기마저  잃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콜레라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리고는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189311월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데즈다도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지 3 개월  뒤에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이루기 위해  서둘러 그 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훗날 나데즈다의  아들 니콜라이와 차이코프스키의 조카 안나로 브나 다비도바는 1884년에 결혼해 딸을 하나 낳았다그 딸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와 나데즈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내 기억 속 의 그들>(1973)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한 갈리나 폰 메크이다 177

 

 39. 서태후 편   /권세와 결혼한 비정한 황후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만주 사람인 엾혁나랍혜징(獵爀那拉惠徵)의 딸로 1835년에 강남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은 엽혁 나락 씨()이고 이름은 난아(蘭兒)였다그녀는 문종(청나라 제9대왕, 재위 1850-1861)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1852년에 궁녀로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녀의 강한 성격 때문에 다른 궁녀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정원 한 구석에서 흔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곳은 황제가 자주 산책하는 길가의 정원이었다. 그녀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자기 노래  소리를 황제가 언젠가는 한 번쯤 들어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녀의 소원은 마 침내 이루어졌다. 때마침 산책하고 있던 황제가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곧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 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훌릉한 노래 솜씨에 반해 그 즉시 그녀  를 후궁으로 삼아 버렸다 그 이듬해인  1856년에 그녀는 태자 재순(載淳)을 낳았으며, 얼 마 후 귀비로 책립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의귀비(懿貴 妃) 또는 난귀비(蘭貴妃)라고 호칭했다. 이후그녀는차츰세력을확장하여청 말 약 반세기 동안조 정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친아들인 재순(목종, 동치 제, 재위 1861-1874)이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자안 황태 후(일명 동태후)와 함께 섭정했다. 그러나 목종의 황후  간택 문제 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추천한 시랑 봉수의 딸이 아닌, 동태후가 추천한 상서 숭기의 딸(慧妃)이 황후로 책립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분개한 그녀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해 황제를 황후의 침실에 들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번민  중 이던 목종이 어느 날 신하의 안내를 받아 창녀촌에 잠복해 들어 가 외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하필 이때 매독에 걸려 앓다가 이 내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당시 4살 짜리 순친왕의 아들 재첨을 1874년에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청나라 제11대왕인 덕종(광 서제, 재위 1874-1908)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정치 일선 에 나서서 끊임없는 악행과 추문을 끌고  다니며 수렴청정했다. 그러자 동태후가 그녀에게 그녀의 정권 독점욕과 문란한 행동에 대해 넌지시 충고를 했다. 이때 그녀는 동태후의 충언을 다소곳 이 듣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음흥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동태후에게 답례의 뜻으로 떡을 선물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동태후는 그 떡을 몇 개 먹고는 즉사하고 말았다. 그 떡에 는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1881년의  일이었다. 이후 그녀는 체제 강화를 위해  근대적 기술을 채용했으며, 스스로 섭정이 되어 황제의 성년 후에도  정치적 결정권을 모두 장악했다. 그러다가, 1898년 무술 정변을 누르고, 덕종을 유폐시켜 버렸으며, 1900년에는 의화단을 선동해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고, 열강의 베이징 진주, 배상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보수파의 세력이 실추되는 중에 어느 날  덕종이 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1908년 가을이었다. 그 해 1021일에 덕종은 세상을 떠났다. 이에 황후가 서태후에게 곧장 달려가 울면서 그 사실을 아뢰자, 서태후 역시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숨을 거뒀다,

 

 40. 루 살로메 편  / 연애를 하되 육체는 허용하지 않는 신비스러운 여인

루 살로메(1861-?)1861년에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 부르크에서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의 나이는  재세였다 그래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집안  사람들 의 극진한 사랑을 한몸에 받고 살았다. 왕궁 맞은 편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는 많은 하인들이 있었으 며, 다섯 오빠가 있었다. 윤택한 생활 환경, 따스한 집안 식구들 의 보살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 등이 그녀 주위에 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파티 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18세 때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학문을 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심의 대상을 찾았다. 그녀는 학문 탐구에만 온 통 시간을 바쳤다. 그러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어 요양을 위해 로마로 떠났다. 거기서 그녀는 독일 여권운동가인 마르비다 폰 마 리젠부크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집에는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유복한 지주의 아들이요 당시 소장철학자인 파을레를 사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주 로마 거리를 산보하면서 데이트를 즐겼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파을 레와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무덤덤했다 그녀는 그와 그저 '좋은 친구'로서 지내기를 원했다.   이상은 원치를 않았다. 이에 낙심한 파을 레는 잠시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다른  한 남자를 끌어 들여 셋이서 함께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이렇게 해서 1882년부터 루 살로메(당시22)파을  (당시 33세니체 (당시 38) 세 사람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니체는 바젤 대학교수직을 그만 두고 연금을 받아가면서 집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니체는 아름다운 그녀를 자기 혼자서 차지하고 싶었다. 그는 파을 레를 쫓아내고 그녀를 자기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때부터 두 남자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모른  척했다그러던 중, 1882년 그녀는 니체의 초대를 받아 그의 별장에서 한 달을 머물러 지내게 되었다 이때 니체는 하루종일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한 번은 산책길에 기회를 보아 그녀에게 슬그머니 프로포즈를 했다. 그녀는 즉각 거절하고는 느닷없이  몸을 돌려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니체는 그녀야말로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파을 레는 그녀가 니체와 단 둘이서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는 것에 화가 나서, 니체를 헐뜯는 편지를 보내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다. 마침  그녀도 니체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이내 그녀는 니체를 떠나 파을 레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단 둘이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니체가 안 달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니체는 그녀에게 애절한 편지를 연달아 보내어 자기에게 다시  와달라고 애걸복걸했다, ", 당신이 내 곁으로 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파멸뿐이라오." 그래도 답신이 없자, 이번에는 협박문을 그녀에게 보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버린다면, 당신의 모든 비리를 세상에 폭로 해 버리고 말겠소."  이때 니체를 사랑하고 있던 누이동생이 오빠를  매정하게 버린 루 살로메를 괘씸하게  여겨 그녀에 대한 비리를 낱낱이 적어 그 녀의 집과 파을 레의 집으로 각각 보내어 창피를 주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루 살로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이래저래 가슴앓이를 하며  지내던 니체는 1889년에 끝내 미쳐 버리고 말았다. 파을 레는 루  살로메와 베를린에서 5년 동안 동거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해보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 는 동양 언어학자인 앙드레아스와 돌연 결혼해 버렸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파을 레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그녀와의 추억 어린 장소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한 절벽에서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앙드레아스도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칼을 빼들어 자기 가슴을 찔러 버렸다. 그의 불같은 정열에 놀란  그녀는 순간적으로 동정심이 발동해 그의 청혼을 받아주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도 파을 레와 마찬가지로 끝내 그녀 와 육체적 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지배당하고 속박당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에, 함부로 자기 육체를 남자들에게 내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37세 때 14세 연하인 무명 시인 릴케를 만났다, 두 사 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어 4년간이나 뜨거운 사랑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릴케의 병적인 신경질이 싫어 그의 곁을  떠났다, 그후 릴케는 다른 여성과 결혼했지만, 죽는 날까지 루 살로메를 잊지 못했다. 그는 반혼수 상태에서 이렇게 부르짖기까지 했다. "나의 어떤 점이 루를 실망시켰는지  물어봐 주십시오." 루 살로메는 그후로도 여러 남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며 또 그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죽었다.

 

 41. 마타 하리 편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들을 당혹시킨 여자 스파이

마타 하리(본명은 마르갈레테 게르토르드 체레, 1876-1917)는 네덜란드의 유복한 가정에서 1876년에 태어났다. 우윳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커다란 눈을 가진  그녀는 공상을 좋아하는 명랑한 소녀로 자라났다. 그리고 20세 때 그녀는 군인 인  루돌프 마크 레오드 대위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이 바람을 자주 피웠으며그나마 아들까지 사고로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의 결혼 생활은 7년만에 끝나고 말았다이혼녀가 된 그녀는 1902년에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다어느 날 그녀는 파티 석상에서 자바춤을 선보였다가 우연히 흥행사의 눈에 띄어 댄서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녀는 작은 살롱의 어두운 무대, 파리의 올랑피아 극장의 무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무대 등지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댄서로서의 길을 착실히 걸어갔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인기는 점점 높아만 갔다. 그녀는 보석으로 장식한 브래지어와 허리띠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해 스트립  쇼나 다름없는 선정적이고도 관능적인 춤을 추어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매료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마타 하리(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을 의미하는 이름)라는 별명이 따라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인기가 높아 가면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출생  신분을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추기를 좋아했다. "내가 네덜란드 시골에서 태어난 평범한 집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 명성은 하루 아침에  시궁창 신세가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꾸 엉뚱한 말을  꾸며대기를 좋아했다. "나는 인도 태생으로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나의  할머니는 마두라의 총독의 딸이었답니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고급 장교였구요."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온갖 노력에 불구하고, 그녀는 젊고 신선한 댄서들에 밀려 자꾸만 인기가 떨어져 갔다로마나 밀라노 의 무대에서나마 인기를 유지하려 애를 써 봤지만 그것도 한계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 무렵 제1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댄서로서의 일자리를 잃어버린 그녀는 쓸쓸히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어떤 독일 고관의 조언으로 그녀는 191512월에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 파리로 들어가서 2만 프랑의 자금을 받고 스파이 노릇을 하는 고급 댄서 겸 창부 생활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녀에게 붙여진 암호명은 'H21'이었다. 그녀는 이후 독일 스파이로서 활약하면서 많은 애인들을 곁에다 두었는데, 그 애인들 중에는 프랑스 장관 줄르 캄브론, 프로이센 황태자, 네덜란드 수상브론스 위트 백작, 독일 장교 폰 카레 등이 끼어 있었다. 그들 외에도 그 녀는 마음에 내키면 언제든지 남창들과 곧잘 어울려 섹스 그 자 체를 즐기곤 했다. 그러는 중에 얻은  정보를 그녀는 독일 영사 폰 크라마에게  제공했다, 대부분 프랑스 군사 작전에 손해를 입힐 만한 정보들이었다. 19165월에는 네덜란드에서 폰 크라마 외에 독일인과 접촉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다시 파리 군사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 해 12월에는 마드리드에서 독일 해군장교 폰 카레와 접촉해 독일인의 특수한 잉크 성분을 프랑스군이 해독 해냈다는 정보도 제공해 주었고, 1917년에 1월에는 파리에서 독일군의 군사 작전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독일군 장교에 접촉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꼬리가  잡혀 1917217일에 프랑스 정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에펠탑의 무선 방수기가 폰 카레의 암호문 을  받은 직후,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입국한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유력한 혐의자라고 지목됐기 때문이다. 체포 당시 그녀는 호텔의 소파 위에 속옷도 걸치지 않는 요염 한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생긋 미소까지 띄운 채. 그녀가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 증인석에는 그녀의 옛  애인들, 즉 프로이센 황태자, 네덜란드 수상 등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결국 그녀는 체포된 지 8개월만에 '마타 하리가 빼낸 군사 기밀 은 연합군 병사  5만 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정 받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다. 19171015일 아침에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 설치된 처형 대에 오른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눈부신 알몸으로 햇빛 아래 섰다. 이때 선고문이 낭독되었다. "3군법 회의의 판결로  마르갈레테 게르토르드 체레를 스파  이 혐의로 사형에 처한다." 이윽고 열두 명의 사수가 횡대로 정렬했고, 한 병사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얼굴에 눈가리개를 씌우려 했다. 그때였다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내게 손대지 마세요. 눈가리개도 필요 없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서 눈길을  하늘로 향한 채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그녀는 12자루 총의  총탄 세례를 받고 운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1932년에 미모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 한 영화 <마타 하리>에서  부활해 수많은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뭇남성들의 눈길을 다시 사로잡았다.

 

 8. 20세기의 연애 박사들

 

 42. 아르마 마라 웰페르 편 남자복이 많은 축복받은 여자

 아르마 마라 웰페르(Alma Mahler Werfel, 1879-?)는 오스트리 아에서 1879831일에 풍경화가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에 그녀는 아버지의 그림을 감상하며  또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티없이 자라났다. 이러한 그녀를, 한때 그녀의 부친에게 도움을 얻어 좋은 직장 을  얻게 된 도크타 테오바르트 포랏크가 몹시 짝사랑했다. 그는 그녀에게  값비싼 책이나 악보를 구해다 주곤 하며 호의를 베풀었으나,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1892년 여름에 그녀의  아버지가 휴양 중에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제자였던 화가 칼 모르와 결흔했다. 이때 아르마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시계추와 결혼했어. 시계의 본체는 아빠였는데 말이야. " 이후 그녀는 되도록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서 내면적인 성장에 힘썼다. 장님 올개니스트 요젭 라볼에게서 대위법을, 막크스 브르 크하르트에계서는 독서법을, 그리고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구스 타프 크리므트에게서는 비잔틴 화풍을, 또한 알렉산더 폰 쳄므린 스키에게서는 작곡법을 각각 배웠다. 이 중에서도 그녀는 화가  구스타프 크리므트를 가장 좋아했으며  그에게 사랑의 감정까지 느꼈다. 오페라 <자레마>로 성공을  거둔 쳄므린스키에게도 매력을 느껴  한때 결혼할 마음까지 먹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그들과는 애정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16세 때부터는 교양과 지식을 위해 문고를 장만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릴케데메르, 리리엔크론, 비아바움 등을 비롯한 고전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읽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21세 때 나이 차이가 많아 아버지처럼 여겨 지는 작곡가 구스타프 마라와 알게 되어 그후 3년 동안  사귀다가 24세 때인 190239일에 윈의 칼 교회에서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첫 딸 마리아를 낳았다. 집안 살림을 하면서 그녀는 희랍어도 공부하고  교회 저술가의 저서들을 번역 하기도 했다. 1905년 여름에는 둘째 딸 안나를 낳았다. 그녀는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딸들을 키우는 재미로 살아갔다. 그런데, 1907년 여름에 큰딸 마리아가 성홍열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숨을 거두어 버리자, 한 동안 깊은 절망감을 빠져 지냈다. 그후 그녀는 남편과 더불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1911518일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이때의 심경을 그녀는 이렇게 토로했다. "마라는 드디어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이 대체 무엇이 있었다는 것인가. 불안한 생활, 많은 고뇌, 많고 커다란 기쁨, 오늘은 나의 새로운 집에서 혼자 외롭게 자야 하는 최초의 밤이다나는 철제 상자 속에서 나에게 보내는 마라의 고별사(告別辭)를 발견했다. '10교황곡'을 위한 스켓치였다. 피안으로부터 이  놀랄만한 사랑의 언어는 마치 무엇인가의 선서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불과 33세였다, 나는 새삼 기분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음악이 그 팔에 나를 안아 주었다. 이제 7살 난 내 딸 안나! 그것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특히 음악의 면에 있어서 나에 게 기쁨을 주는 공감자였다." 그후 남편을 돌봐 주었던  의사 요제프 프렌케르가 그녀에게 몇 번 프로포즈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때 작곡가 슈레카와 사귀기도  했지만 별다른 감정 없이 헤어졌다. 또 한번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 오스칼 코코슈카로부터 구애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다음 그녀의 말 속에는 이때의 심경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와 함께 지낸 3년은 여태까지 없었던 격렬한 사랑의 투쟁이 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런 투쟁을, 이런 지옥을, 아런 천국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코코슈카의 수많은 구흔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혼만은 허락하지 않았다그와의 결혼은 완전히 자기 자신을 없애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부터 그녀의  마음은 친구이자 저명한 건축가인 월타 그 로피우스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는 코코슈카를 사랑했다. 그러자, 그로피우스는 그녀와 코코슈카와의 관계를 참을 수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런 사랑 싸움에서 결국 그로피 우스가 승리해, 그로피우스는 그녀와 1915  8월에 결흔식을 올릴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그로피우스의 아내가 된 후에도 여 전히 코코규카와 애정 깊은 순수한 사귐을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코코슈카를 평생 마음의 연인이요 위안의 대상으로 삼고 지냈다. 그녀는 그로피우스와 사이에 두 아이를 두었지만, 그 중 첫딸 마농은 어려서 죽었다, 그로피우스는 결혼하자마자  곧 전쟁터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외로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이 점이 그녀를 늘 고통스럽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한 결혼이다, 결혼생활도 하지 않고 --- 속박되어 있지 않으면서 결부되어 있는 이 결혼이 무렵 그녀는 프라하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요 극작가인 프 란츠 웰페의 작품 세계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그의 시 <인식하는 자>는 그녀를 매우 감동시켰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 그로피우스를  그저 '지나가는 길손'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웰페르를  그녀의 본능적인 연정의 대상으로 꼭꼭 숨겨  두었다, 그러던 중 1917년 겨울에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시인 부라이가 뜻밖에도 그토록 그리던  웰페르를 데리고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 뒤부터는 웰페르에 대한 그녀의 각별한 애정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보다 10년 연하인 유태인 작가였다.   키와 맑은 목소리, 게다가 그의 재치와 재능은 그녀를 매혹시 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녀만을 위해 자작시를 낭송해  줄 때는 너무도 황홀해서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9191월 말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다 이렇게 서술했다. "나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다. 마라도, 코코슈카도, 그로피우 스도 , , ,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진실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머리 가운데서 내가  어떤 모양으로 죽어갔을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관능적이고 육욕적인 일체그것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런 사람들의 유산만이 나의 뇌리에 남아 있을 뿐 그밖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일순간에 일어나는 묘한 마음! 허무한, 먼지 같은 것, 구스타프  마라는 나에게 있어서 잃어버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오스칼 코코슈카와 굳게 결부되어 있었을 때의 저 수많은 행복의 순간, 또한불행한순간 --지금은그러한순간 들이 모두 어디로 다 가고 없는 것일까지금은 채색된 분위기가 조금이지만 내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내면적인 아름다운, 어딘가의 풍경, 그의 말,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결국 그로피우스와 이흔한 그녀는  웰페르의 구혼을 받아들여 그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92978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마치 아들처럼 따뜻이 대해 주며  행복한 결흔 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나이 많은 첫 남편 마라를 아버지처럼 여긴데 비해같은 또래인 두 번째 남편 그로피우스는 친구처럼, 10살 연하 인 세번째 남편 웰페르는  아들처럼, 그리고 후배같은 코코슈카 는 애인처럼 여겼다. 또한 그녀는 베르크, 피츠나, 쎈베르그, 부르노, 와르타 등의 음 악가, 아우프트만, 호프만스탈, 죠이스 등의 작가, 그리고  샤갈 등 의 화가들과도 사귀었다. 194010, 웰페르가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나자, 그녀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마사릭크, 슈슈닉그, 케렌스키 등과도 사귀었다. 19458월에 웰페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겨 지내면서 조용히 만년을 보냈다, 어느날 그녀는 이렇게 지난날을 회고했다.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다. 신의 은총에 의해 나는 우리들 시대의 천재적인 많은 작품을, 그들 창조자의 손을 떠나기 전에 친히 알 수가 있었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이처럼 빛나는 천재적인 작가들의 뒷받침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생존이 신께 인정받고 축복받은 때문이라 할 것이다."

43. 버지니아 울프 편 / 서정적이고 유미적인 니힐리즘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런던의 켄싱튼 에서 1882  125일에 문학비평가 레즈리 스티븐의 딸로 태어 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델라인 버지니아  스티븐이다. 그녀의 어머 니 줄리아 스티븐은 레즈리 스티븐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째 부인은 소설가 댁커리의 딸이었으나 딸을 하나 남기코 1875년에 죽었다. 줄리아도  허버트 더크워스와 결혼해서 세 아이의 엄마였으나, 스티븐과 재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줄리아와 스티븐와의 사이에는  네 아이가 태어났다, 큰딸 바네싸, 아들 소우비, 작은딸 버지니아, 그리고 막내 겸 차남 에이드리안. 이들 4남매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이들은 아버지를 달리하는 3남매, 즉 스텔라, 제랄드조지와는 나이 차이가 많아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별 말썽없이  지냈다. 전체 자식의 수가 아들 넷딸 셋이었으니, 자연히 집안의 교육 중점은 아들들에게 로 모아졌다. 이 점이 버지니아에게는 늘 못마땅했다. 9세 때 그녀의 아버지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그녀의 사촌  인 제임즈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지기 시작했다. 제임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나 1892년에 사망 하고 말았으며, 그 충격으로 제임즈의 아버지 휘쓰 제임즈도 그로부터 2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렇듯, 노쇠광란, 죽음 등의 불행한 현상들이 그녀 주위를 뱅뱅  맴돌면서 자꾸 위협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어머니는 사력 을 다해 집안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하다가 피곤이 겹쳐 병들어 죽고 말았다, 1895년이었다, 불과 14세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 버지니아는 한동안 깊은 절망감에 쉽싸여 지냈다. 큰언니 스텔라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이윽고 바네싸가 그녀의 뒤를 이었고, 스텔라는 결혼했으나 첫 아이를 분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 사건 또한 그녀를  무척 슬프게 했다. 그렇지만, 버지니아는 이내 슬픔을 딛고 일어나 아버지의 서재, 런던 도서관, 영국 박물관 등지를 수시로 드나들며 견문을 넓혔다. 희랍어 공부도 했으며, 엘리자베드 시대의 산문체를 모방해 글 짓는  연습도 했고 독후감을 써서 잡지사에 보내기도 했다 간혹  사교장이나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1904년에 그녀의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그녀의 가족은 생활비가 적게 드는 블룸즈베리의  북쪽 마을 골든 스퀘어로 이사했다. 공기 맑고 고요하고 우아한 이 마을에는 학자의사, 법률가, 관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이는 버지니아의 지적 욕구를 더욱 자극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산책과 집필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당했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은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 가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는 자유와 모험과 즐거움을 찾는 동네 젊은이들이 자주 모여 부담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한때 버지니아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하기도 했다. 다소 회복되자 그녀는 형체들과 함께 1905년에 유럽으로 휴가 여행을 떠났다. 그리스에서 다소 실망과  환멸을 맛보기는 했지만, 대체로 여행은  유익했고 즐거웠 다. 그런데, 여행 중에 오빠 소우비가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다가 이윽고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또 한번 그녀에게 큰  슬픔과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1907년에  언니 바네싸는 소우비 오빠의 친구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다, 그러자에이드리안과 버지니아는 골든 스줴어를 떠나  피 스로이 스퀘어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웃집에는 미술가 던칸 그랜 트,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살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평론가, 음악가, 수학가, 미술가 등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들 은 자주 한 자리에 모여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소설가 포 스터도 간혹 이 모임에 얼굴을 내밀곤 했다 버지니아는 모임에서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장난끼가 많은 이들은  하루는 아비씨 니아의 황제와 수행원들로 변장하고서 채넬 함대의 ,기함으로 들어가 사령관과 해병들을 놀려 주기도 했다, 191229세 때 그녀는 레오날드 울프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 는 문학가요 사색가로서 완숙한 꽃을 피워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플리트 가()에 있는 클리포즈인에 보금자리를 틀고  신흔의 가 정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19148월에  발발한 세계대전은 그녀 에게서 생기와  건강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래서 조용한 마을 리 치몬드로 이사했다, 어느날 버지니아는 남편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조그만 가게에서 인쇄기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산 교본을 통해 인쇄 기술을 습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의 집은 훗날 유명한 호가드 출판사의 본거지가 되었다,

인쇄 기술을 완전히 습득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공저한  <두 개의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 책은 몇 부 찍지 않았지만 독자의 반응이 의외로 좋아 용기와 힘을 얻었다. 이후 맨스필드의 <프렐 루드>,버지니아의 <큐우 식물원><벽 위의 점>,그리고 T. S. 엘리어트의 시집 등을 연달아 출판했다. 이들 책들에 대한 독자의 반응 또한 좋았다 특히, <큐우 식물원>  <벽 위의 점>에 대한 주문 쇄도는 그녀를 매우 흥분시켰다. 연이은 인쇄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자그녀는 런던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후 그녀는 작품 집필, 원고  편집, 서적 우송 등의 일에 매달려  바쁘게 보냈다. 이때의 심경을 그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에다 이렇게  서술했다. "원고는 쏟아지듯 들어오지, 작가들은 끊임없이 찾아오지, 지금 같아선 일 속에 파묻혀 압도당한 느낌이야. 언제까지나 지탱할 수 있을지 몰라. 그렇지만 재미는 무척 있단다. 이런 내 모습을  네가 보면 분명 넌 날 '책 돼지'라고 놀려댈 거야." 그녀의 남편 레오날드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집필, 편집, 선거운동, 토론, 논쟁, 정원 가꾸기, 목수일, 출판 사업, 비평 활동 등등을 병행하면서 신진 작가 또는 우수한 사상가를 발굴해 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15년에 <출범>을 내놓은 그녀는 1919년에 <밤과 낮>을 그 후타로 내보냈다. 그러자, 남편이 '작품이  문학적 가치는 있으나 그 속에  들어있는 사상이 너무 우울하다'고 평했다. 이때 그녀는 이렇게 애교있게 대꾸했다.  "인간을 광범위하게 다루려면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그녀 주위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모여 들었다. 비평가, 미술가, 작가, 경제학자들이 블름즈베리에 모여, 보다 나은 사상  확립과 전진을 도모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고도 꾸밈없는 몸가짐, 적절한 대화, 미소  띤 얼굴, 솔직하고 관대한 태도로  그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문학과 그 가치관에 대해서만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1919년에 그녀는 로드멜의 조그만 마을에 몽크스 하우스라는 집을 사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집과 조금 떨어져 있는 양지바른 곳에 그녀의 서재를 지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아침마다 출근해 창작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19201월부터 <제이콥의 거실>을 집필하기 시작해 그 이듬해 11월에 탈고했으며, 이를 수정해 19226월에 남편에게 보여 비평을 받은 다음 그 해 10월에 출간했다. 호가드 출판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태비스톡 스퀘어의 고옥 을 세내 그곳에다 사무실과 창고와 인쇄실을  차렸다. 그녀도 일정한 창작 시간 외에는 출판사에 나가 편집과 교정일을 도와 주었다. 1923년 여름부터는 <댈러웨이 부인>의 집필에 들어갔다, 1924 년에는 귀족 가문 출신의 여류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와 깊은 우 정을 맺게 되었다, 그 전에 그녀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 동기가 되었다. 어느날 비타의 집을 다녀온 후 그녀는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비타의 집은 우리 오막살이를 다시 짓자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어요. 난 정말 마음이 즐겁고도 비참했어요. 로드멜의 몽크스 하우스에 놀러오세요. 레오날드의 말마따나 서섹스에서 가장  불편한 침대를 드릴께요." 그후로도  그녀는 비타와 오붓하고 내밀한 우정 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캐더린 맨스필드, 에디스 시트웰, 로즈 마 콜리, 조지 무어 등의 작가들과도 교우 관계를 맺고 지냈다.   무렵 에세이집 <독자들>을 펴냈다. 1925년에는 <댈레웨이 부인>이 탈고되어 햇빛을 보았다. 이로써 그녀는  환영적인 상상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프루스트 또는 조이스에 의해서 확립된 '의식의 흐름'이라는 방법을 독자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추구해, 그 두 사람과는 달리 서정적이고 유미적인 니힐리즘을  구가했다, 이 경향은 그후에 발표한 <등대로>(1927)<파도>(1931)  더욱 짙게 반영되었다. 이들 작품들에서 그녀는 시간의 무상함에 농락당하는 인간존재의 공허함과 서글픔을 저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서 명멸하는 보석같은 아름다움에 황흘함을 느꼈으며 이를 포착해 놓는데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1937년에 발표한 <세월>에서는 다시  전통적 소설작법으로 복귀해, 그녀 자신의 소설적 세계를 재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틈나는 대로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1930년 이래 줄기차게 그녀를 따라다니는 우울증과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녀가 아끼던 친구들, D.  H. 로렌스, 아놀드 베네트존 골즈워 지, 조지 무어, 스텔라 벤슨, 리튼 스트레이치, 시빌 케링튼, 데이 비드  가네트, 러저 프라이 등이 연달아 죽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불안감도  더욱 짙어졌다. 이런 심경을 그녀는  비타에게 이렇게 써서 보냈다. "비타. 대기는  장례식으로 꽉 차 있어요그리고 나는 비극 속에  파묻혀 있어요."

1940년 그녀는 죽어간 이들 중 러저 프라이의 전기를 써서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 그녀는 두통이 심해 하루에 반 시 간도 제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집요한 두통 때문에 몇 주일이고 침대 신세를 져야할 때도 있었다더욱이 전쟁의 소용돌이와 잦은 공습경보는 그녀를 극도로 우울하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만년에 극도의 신경쇠약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 직전 에 유작 형식으로 된 중편소설 <막간>1940년에  집필해 그 이 듬해 2월에 탈고했다. 여기에 그녀는 전통적 소설기법과 그녀 자신이 개척한 현대소설 기법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의 영국을 심도 깊게 묘사해 놓았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런던에 있는 그녀의 집과 호가드 출판사의 사무실이 적기에 의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날은 집 근처에 떨어진 폭탄의 폭풍으로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빵을 사러 갔다가 바로 이웃집에서 폭탄이 터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그녀의 유일한 안정제였다. "이 절망은  결코 나를 집어 삼키지 못하리라. 미랜 없이 살아 도 얼굴을 닫힌 문에 처박고 살아도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드레일 부인의 전기>를 고집스럽게 써 내려 갔다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19414  봄이었다, 하루는 남편이 그녀의 서재로 가서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자, 그녀는 쓰던 것을 마저 쓰고 곧 가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식탁에 돌아와 기다렸으나 그녀가 상당히 시간을 지체하자 다시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러나 서재에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책상 위에 두 통의 편지만이  덜렁 남아 있었다. 하나는 언니에게, 또 하나는 남편에게 남긴 유서였다. "여보, 나는  꼭 미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무슨 말소리가 들리고 집필에 정신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생전의 나의 행복은 모두 당신의 덕이었어요. 당신은 너무나 착한 남편이에요. 나는 이렇게 살면서  당신의 여생을 손상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진흙 투성이의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44. 상가 부인 편 피임법 보급 운동의 선구자  

상가 부인(lss3-1966)1883년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1녀는 젊은 시절에 한때 빈민가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식들을 많이 둔 여인들의 고통과 힘든 생활고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1912  30세부터 수태조절운동을 제창했으며, 이때부터  피임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녀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수태조절에 대한 실제에 대해 연구하고 그곳에서 개발된 피임기구인 페서리를 가지고 귀국한 후, 1914년에 <여성의 반항>이라는 잡지에 '생식을 여성의  최대 목적으로 생각하는 맹목적인 신념은 산아제한 운동의  적이다'라고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수태조절 사상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그와 동시에 그녀는 위선적인 결혼 관념을 비난하고 성 도덕의 모순에 반기의 깃발을  들고서 미국 전역을 누볐다. "여성에게 낳을 자유와 낳지 않을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녀는 1916년에 뉴욕에 '수태조절 상담소'를 개설했으며, 1942년에는 '미국수태조절 진료소', 1942년에는 '미국산아조절연맹' 을 각각 설립해 피임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 확대시켜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급진적인 산하제한론과 피임방법이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어, 다섯 번이나  투옥되는 수난을 맛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자기의 소신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여론과 여성의 꾸준한 지지를 얻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눈을 돌려 일본 등지에도 피임법 보급  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전 세계 여성에게 피임 지식을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45. 마리 로랑생 편 /수줍은 화려함과 창백한 에로티시즘의 여류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5-1956)1885  1031일에 파리에서 중산계층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노는 일에도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아주 심한 근시(近視)였던 것이다, 그러나, 호기심은 많아서 어른 들이 대답하기 거북살스러운 질문을 자주 던져서 어른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녀는 동물들과 인형들을 유달리  좋아했다. 12세때 까지도 인형들을 가지고 놀았다. 주로 흔자 놀았기 때문에 그녀 에게는 동무가 별로 없었다. 혼자서 공상에 빠지거나 혹은 독서 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21세 때부터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그녀가 그린 그림은 고양이였는데, 고양이의 얼굴인지 여자의 얼굴인지 구분 이 가지 않은 그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렇케 말했다.  "나는 고양이를 그리면서 언제나 여자를 그리는 것 같은 기분 이었습니 다." 집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그녀는 리세 <라 마르틴느>에 다녔 다. 그리고 학사원 회원인 움베르의 아뜨리에에서 본격적인 회화 수업을 받았다그 무렵 그녀는 칭찬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찬사를 보내 주었다, "이 그림은 마네 예술의 행복한 여성적 전조임에 틀림없다." 이 무렵 그녀는 피카소브라크 등과도 사귀었다.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이요 평론가인 아폴리네르도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그  들로부터 아주 신선한 예술 기법을 배웠으며 많은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본격적인 화단 진출은 1907년 앙데팡당전의 출품작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포비즘의 전성시대였기 때문에 그녀도 그 유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엄밀히 말해서 그녀는 포비즘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여성다운 감각으로 이국 정서가 가득찬 세계를 담아냈다. 그녀의 그림은 파리 풍으로 세련된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가 아니면 절대 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것에 구속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그림이 야수파에 속한다고 단정짓기도 했다. 반면에, 그녀는 원근법적인 해석을 버리고 평면적으로 해석하고 그려나갔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녀를 큐비즘의 화가라고 말했다. 아폴리레르나 살몬 등은 그녀를 이  부류에 집어 넣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큐비즘 기법을 활용했을 뿐 거기에 안주하지는 않았다. 추상이론에서 벗어나  보다 감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입체파 속에 넣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느날 이렇게 토로했다. "입체파는 3년 동안 나에게 해독을 끼쳐 일을 못하게 만들었어 요. 나는 결코 입체파를 양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입체파에서는 철학이나 수학의  책에서 얻는 것과 같은 느낌을 얻었을 뿐이었죠미학의 문제는 나를 언제나 몸서리치게  할 뿐입니다." 이렇듯, 그녀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려고 애썼다. 이러한 그녀를 보고 장 콕토는 이렇게 평했다 "마리는 야수파와 입체파 화가들 사이의  함정에 걸린 애처로운 사슴이 다." 19125월에 그녀는 파리의 바르장그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녀는 화단에서 확고찬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이 무렵 그녀는 아폴리네르를 사귀다가 사랑하게 되어 약혼까지 했다, 약혼은 1년만에 그만 깨져 버렸다아폴리네르가 '모나리자 그림의 도난 사건'에 연루된 탓에 그녀의 어머니가 그와의 결흔을 적극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녀는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폴리네르와 나는 사귈 때부터 결혼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드 코스트로비치 부인께서 내가 상당한 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답니다. 그리고 1911년 이후 에는 내 어머니께서 그와의  결흔을 원하지 않게 되었구요." 그녀는 독일 화가 폰 왓센과 결혼해 스페인으로 가서 세계대전 기간을 보냈다. 휴전 후에는 독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으나, 결혼 생활이 그녀의 생각대로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파리에  있는 회색 담벽, 분홍색 어딘과 부채, 검은 레이스, 빨간 리본, 그리고 향내 음이 가득한 그녀의 아담한 살롱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결 국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다시 고국의 파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어느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활의 세부를 좋아합니다. 나는 의복이나 모자나 여자  들에게 어울릴, 여자들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귀중하게 여깁니다나에게 있어 멋있게 모양낸 여인은  위대한 예술품입니다. 나는 여자의 모습이 좋습니다. 여자들의 손과 발이  언제나 나의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렇지만 나체는 싫어요. 여자의 가슴은 나를  무섭게 하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나체를  좀처럼 그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화폭 속에 남자를 절대로 등장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단골 손님은 언제나 가냘픈 횐손과 발을 가진 소녀, , 동물, 사슴, , 비둘 기, , 백조 등이었다 1920년에 로장베르 화랑에서 열린 그녀의 개인전은 또 한번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여류 화가만이 그릴 수 있

는 우아한 색채, 섬세한 감각, 젖어 있는 듯한 향기, 수줍은 화려함, 뱀과 같이 감아드는 집념, 창백한 에로티시즘 등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1956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을 때 하얀 옷 을 입고 가슴에다는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얹은채, 그리고 빨간 장미를 손에 들고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46. 젤다 새이어 편 /만족할 줄 모르는 플래퍼의 여왕

 젤다 새이어(Zelda Sayre,  1899-1947)는 몽고메리  시 재판소  의 판사인  저지 새이어(Judge Sayre)의 딸로 1899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말광량이 소녀로 동네에서 소문이 났을 정도로 쾌활했다. 하루는 소방서에 장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소방서지요? 어떤 여자애가 지붕위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있어요. 빨리 좀 와 주세요."  그리고는 그녀는 잽싸게 자신이 직접 지붕으로 올라가 소방차를  기다렸다. 이윽고 소방차가 오자, 그녀는  태연히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되어 내려왔다. 또 한 번은 말이 끄는 마차에  갑자기 뛰어 올라 말채찍을 마구 휘둘러 한바탕 소동을 피운 적도 있었다소녀 시절에 그녀는 소년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쏘다니다가, 부모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 17세 때부터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 여러 남자친구들과 사귀었으며,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댔다. 그뿐만 아니라 남자친구들과 키스 하는 것쯤은 예삿일로 여겼다. 1918년 여름한 파티에서   그녀는 캠프 쉐리단으로   전속되어 온 육군  중위  스콧 핏제럴드(1896-1940)를 만났다. 그녀는 잘 생긴 그에게 매력을 느껴 금방 사랑에 빠져 서둘러 약흔해 버렸다. 그녀의 나이 20, 핏제럴드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을 주저하자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했다. 이 당시를 회상 하며 핏제럴드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젤다는 내가 축재가이기 전에는 나와 그녀의 운명을 같이 하는데 대해서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젊었고, 그리고 어떤 개척자나 혹은 중년 남자가 예술작가보다는 더 나은 모험의 대상으로 보였던 시기에 있었다."

핏제럴드가 뉴욕으로 떠나 버린 뒤, 그녀도 의기소침하게 지냈다. 그런데 핏제럴드가 작가로서 성공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와 구혼하자  그녀는 이를 순순히 수락했고,  19204월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새 시대의 인물로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그녀는 단발, , 담배, 재즈 등 소위  플래퍼 패션으로 새시대의 스타가 되었고, 그녀의 남편은 문단의 새 기수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총아답게 연일 축제 속에서 지냈 다. 이들은 아슬아슬한 택시 경주나 호텔의 분수지() 속으로 옷 을 입은 채 다이빙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질탕한 파티들을 즐겼다, 하루는 그녀가 파티 드레스를 입은 채 택시 지붕으로 올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티와 유흥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지는 무절제한 생활에 싫증이 났던지 그녀는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인 웨스트포트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곳은 그녀에게는 너무 나도 권태로운 곳이었다 답답했던 그녀는 어느날 화재 경보기를 고의로 울리게 했다. 소방차가 달려와서, 어디에 불이 났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바로여기!. 이후에도 그녀의  심한 낭비벽은  잠들 줄을 몰랐다. 192011 월에 다시 뉴윽으로 이사했다가, 그 이듬해 5월에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잠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세인트 폴에 자리를 잡고 지내다가 외동딸 프랜스시 스코트를 낳았다. 1924년에는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 해안에 있는  저택 하나를 빌려서 우아한 생활에 젖어 들었다. 이곳에서 남편은 글을 쓰고 그녀 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놀거나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러한 단조로운 생활이 그녀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기분 전환 겸 한 프랑스 장교와  남편 몰래 밀회를  즐겼다. 그 장교는  프랑스 미남 비행사  에듀아르 조잔느(Edouard Josnne)였다. 그러나 이 밀회는 곧 들통나 부부 싸움이 일어났다. 결투 소동, 그리고 그녀의 자살 미수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치닫 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에듀아르가  장문의 편지와 함께 자기 사진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다이후 젤다의 건강이 나빠졌다그래서 1926년 미국으로 일시 돌아왔으나  그녀는 발레 댄서로 성공하고 싶다고 남편을 졸라, 댄싱 레슨을 받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그녀는 발레 레슨 비용 을 벌기 위해 소설도 쓰면서 한동안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19304월에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켰다,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녀는 이후 스위스 클리닉에서 장기 치료를 받았다. 1931년 그녀는 남편을 따라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뒤 병이 재발해볼티모어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19364월에 노쓰 케롤라 이나 주() 애슈빌의 하일랜즈 요양소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 남편은 할리우드의  전속작가로 떠나 버렸으며, 외동딸은 대학에 들어가 버려 그녀는 외톨이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몹시 서글프게  했다. 그나마 남편이 폐병으로 194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남은건 그 녀와 그녀를 간호해  주는 노모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그녀 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 원인 모를 화재에 의해 불타 버렸다.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녀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질식사하고 말았다. 1947311일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플래퍼의 여왕으로서 젊은이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그녀는 록크빌 묘지에 있는 남편 곁으로 가서 쓸쓸히 묻혔다.

 

 47. 마그다 편   /죽음도 남편과 함께 한 용감한 여인

마그다(Magda, 1901-1945)는 독일 베를린에서 부유한 기사 (技師) 가문의 딸로 1901년에 태어났다. 7세 때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소녀 시절에 그녀는 20세 연상인 귄터 관트라는 남자를 알게 되어 사귀었다. 상대는  당시 독일에서 상당히 부유  한 실업가였다. 그는 결혼했었으나, 당시는 아내를 잃코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사귀다가 21세 때 결혼했다그리고 그 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남편이 너무 지나치게 사업에만 열중해 가정을 소흘히 했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예술과 춤을  애호하는 연하의 한 학생과 사귀며 그와 틈나는 대로 정사를 즐기면서 그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곧 끝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외도 사실을 이내 알아버린 남편이 그녀에게 정식으로 이혼 청구를 해왔 기 때문이었다. 합의하에 이혼한 후  그녀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고서는, 여러 남자 친구들과 부담없이 어울려 지내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베를린 체육관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 다리를 절며 연단에 올라 불같은 열변 을 토해내는 작은 체구 사내에게 그만 매료당하고 말았다. 그는 나치당의  선전부원 괴벨스 박사였다. 그녀는 그와  좀더 가까워지 기 위해 나치당에 즉시 입당했다. 그리고 나치당의  강령을 연구 하고 그것과 상관되는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러자, 그녀의 젊은 연인 에른스트는 무척 걱정하며 그녀가 자유분망한  옛 생활로 다 시 돌아와 줄 것을 간곡히 권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괴벨스에게 더욱  열중했다. 그녀는 괴벨스가 추천해준 베를린 지구 기록 보관소의 정리 담당자가  되어 열심히 근무했다. 그녀는 괴벨스를 곁에서 도우면서 점점 그에게 깊이 몰입되어 갔다괴벨스도 그녀에게 점차 호감을 갖고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193012월에 그녀와 괴벨스와의 결혼식이 독일 북부의 메클 렌부르크의 한 저택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히틀러가 예식 입회원 으로서 친히 참석해 주었다. 이후 그녀의 집은 나치당 간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1933년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그녀의 남편은 국민 계몽성 선전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 렵 그녀는  남편의 뜻에 따라 베를린의 고급 주택가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후 그녀는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잇따라 두었으며, 그런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런데, 남편이 여배우와  바람을 퍼우게 된 뒤로부터 가정의  화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연인은 슬라브계 미인 여배우 리다 발로바였다. 그 두 사람이 은밀히 사귄 지 2년이 지난 뒤에 서야 그녀는 비로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번민에 빠진 그녀가 어느날 히틀러를 만나 이혼 문제에 대해 신중히 상의했다. 그러나히틀러는 나치당의 계몽 선전상의 부정을 국민 앞에 폭로할 수 없다며 이흔을 한사코 반대했다, 한 동 안 그녀는 자신을 숭배하며 따르는 한케라는 남자와 어울리며 자신의 고통과  고독과 슬픔을 달래 보려고 애써  봤지만 소용없었 다. 남편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이혼 청구 소송을 철회해 버리고 다시 남편과 아이들에게 온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1939년에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남편은 히틀러의 측근 으로서 중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합군의  공격은 베를린의 목을 바짝 조여왔다. 할 수 없이 그녀는 19454  20일에 아이들과 함께 히틀러가 묵고 있는 수상 관저 지하실 의 방공호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남편과 히틀러는 그녀에 게 아이들과 함께 남부 독일로 피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 녀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서 그냥 그곳에 눌러 앉아 지냈다, 그 녀가 방공호에  들어온 지 1주일 지났을 무렵  베를린은 연합군에 의해 완전 포위당하고 말았다. 428일 밤에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결혼식이 방공호에서 조촐하게 거행되었으며, 그 이튿날 히틀러는 총을 입 안에 넣고 쏘아 자살해 버렸고, 에바는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뒀다. 다음 날 저녁에 마그다는 잠든 아이들에게 독약 주사를 놓아 차례차례  죽인 다음, 남편과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남편이 권총으로 그녀를 먼저 쏘았다, 그런 다음 남편도 아내의 뒤를 따랐다.

 

 48. 마리안 앤더슨 편  / 검은 피부의 비애를 씻어준 위대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902-?)1902년에  흑인 죤 앤더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장 내에 있는 냉동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고버지니아 주 태생인 그녀의 어머니는 전에는 국민학교 교사였으나 결혼 후에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으로는 아리스와 에쎌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교회의  어린이 찬양대를 지휘하는 로빈슨의 특별한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같은 또래의  비올라 죤슨과 이중창을 해 교회의 예배시간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노래를  좋아해, 어떤 날은 집 문밖 돌계단에  앉아 함께 민요나 찬송가 등을 즐겨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11세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큰부상을 당해 앓다가 세상을 하직해 버렸다그후 그녀는 가족과 함께 핏쯔워드  ()에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때부터 가난은 그녀의 가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윌리엄 펜 중학교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취직해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속기술이나 부기보다도 합창반  생활에 더 흥미를 느꼈다. 이윽고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교장의 도움으로 사우스 필라델피어 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 서 그녀는 교회나 부인단체에서 주관하는  사교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출연료를  받는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필라델피어 성가 합창대에  들어가 노래할 때는 지휘자  알프렛 힐에게 많은 지도를 받게 되었다. 연주회의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그녀는 자주 여행을  다녀야 했는데, 그때마다 흑인 푸대접에 화가 났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 "좋다, 내가 노래로나마 검은 피부의 비애를 씻어 주리라. 노래 로써 인종차별의 두꺼운 장벽을 무너뜨려 주리라."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메리 싼더스 패터슨 부인에게서 성악의  기초를 비로소 배우게 되었다. 패터슨 부인은 얼마 후 콘트랄트 가수인 아그네스 라이프슈나이더 선생에게 그녀를소개해  주고 그 밑에서 노래 공부를 하도록 알선해 주었다고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교장  선생으로부터 죠젯페 보겟터 선생을 소개받아 그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았다교습비는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선음악회를 열어 마련해 주었다. 보겟티 선생 은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다. 전미국흑인음악가연맹의 도움으로 그녀는 계속해 그의 밑에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노래 실력이 크게 향상되어 빌리 킹과 함께 남부  지방의 흑인대학이나 극장 등지로 연주여행을  다닐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노래 실력은 더욱 원숙하고 탄탄해져 갔다때로는 뉴욕의 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기도 했으나, 청중이 너무 적어 크게 낙심하기도 했다.  

이 무렵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예전에 월민톤의 음악 회 때 알게 된  오퓨르 H. 핏겨와 사귀었는데, 둘은 이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은 취직자리가 생긴 뉴욕 으로 떠나갔기 때문에 한 동안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33년 그녀는 필라델피어 필하모니 소사이어티 주최의 음악 콩쿨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로이손 스티지엄 콘서 트의 주최로 뉴욕에서 대규모 음악 콩쿨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에서 그녀는 <오오 나의 페르디난도여>를 불렀다. 300여 명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그녀는 당당히  우승해 주요 도시 언론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죤슨 성가대의 독창자로 케네기 홀에 자주 출연 하는 등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프로모터 아 서 쟈드슨과  죠지 레이슨 카렛지의 배려로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했다. 일년 동안 그녀는 일류 음악지도자인 프랑크 라포르류 선생 밑 에서 성악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타성적인 음악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성악교육가 쯔르뮤렌와 라파엘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미하엘 라우파이젠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자비로 바하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슈베르트 및 베에토벤의 가곡과 흑인 영가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오슬로, 스톡흘름, 헬싱키, 코펜하겐에서 개최한  음악회에 출연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6개월간의 북부 유럽의 연주여행을  마치고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로젠왈드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서 재차 유럽으로  건너가 스칸 디나비아 전역에서 200  이상의 연주회를 가졌다, 하루는 핀랜드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 쟝 시벨리우스 앞에서 그가 작곡한 노 래 <숲 속에서 노래하는 아가씨>를 불러  뜨거운 환대를 받기도 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자르쓰부르크에서는 토스카니니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위대한 음악가 토스카니니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이렇게 평해  주었다. "당신 노래는 백년에 한번밖에  들을 수 없는 노래요!. 19311월에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에프, 오뎃사, 지프리 스 등지에서 연주를 해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모스크바의 위대한 연주가 콘스탄진 스티니슬라프스키에게서 라일락 꽃다발을 받는 축복도 받았다. 19394월에 워싱턴의 링컨 기념당에서, 그리고 수주일 후 미국을 방문한 영국의 국왕 부처와 루즈벨트 대통령 내외의  면전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예를 안았다, 그후 수년 동안 그녀는 미국 전역에서 흑인, 백인 할것  없이 환호하는 청중 속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는 오퓨르 H. 핏셔와 1943년에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코넥티커트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다행히 남편은 이해심이 많아 그녀가 가수활동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빈번 한 연주 여행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워도  그는 관대한 이해로써 감싸 주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연주 여행에 동행해 주기도 했다. 그러한 남편과  가족을 위해서 그녀는 되도록이면 여름에는 연주 를 하지 않고 주부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애를 썼다집안에 있을 때 그녀는 평범한 주부처럼 바느질과 요리를 했고, 화초나 채소를 가꾸며 조용히 지냈다, 1954  가을에는 지휘자 모미트리 미트로포로즈의 인정을 받아 메트로폴리탄 일원이 되어 그 이듬해 17일에 소프라노 가수 진카 미라노브와 테너 가수 리차드 탓카 등과 함께 오페라 공연 을 가졌다. 이로써 그녀는 매트로폴리탄의 일원으로 노래한 최초 의 흑인  가수가 되었다. 1965418일에 뉴욕 카네기 흘에서 고별 공연을 하고서 은퇴한 그녀는  코네티커트의 농장에서 건축가인 남편과 함께 지내며 조용히 만년을 보냈다.

 

 49. 시몬느 드 보봐르 편  /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멋쟁이 여류 작가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0819  새벽 4시에 파리의 라스빠이유 거리 근처의 저택에서 당시 재판소에 다니는 유복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편식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식사를 잘 하지 않아 어머니와 식모 루이즈에게 늘 걱정거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옹고집장이였다. 한번은 복숭아처럼 살구의 껄질을 벗기려고 했는데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하자 화가 난 그녀는 집을 뛰쳐 나가 공원의 구석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달래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그 부인을 발로 냅다 차버렸다.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매우 싫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도 획일적인 것을 싫어해서, 촬영하는 순간 혀를 쏙  내밀거나 고개를 획 돌리기 일쑤였다 이처럼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센 그녀였지만 아무 탈 없이 매우 야무지고 쾌활한 소녀로 자라났다. 그녀는 싫은 것은 확실히 선을 그어 싫어했지만, 그 대신 좋아하는 것에는 대단한 집념을 보였다. 전쟁이 일어나 그녀의 아버지는 알제리아 보병부대에 들어갔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온 그녀가 갑자기 거리로 뛰쳐 나가 '벨기에  피난민들 위한 기금'으로 24프랑  이나 모아 프랑스의 벨기에 회관에다 갖다 바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데지르 사숙(私塾)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7살된 어린 나이인데도 그녀는  자기 여동생에게 산수, 국어 등의  공부를 가르쳤다. 이 무렵 그녀는 6살 연상인 소년 쟈끄에 게 관심을 보였다. 그 소년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지만, 집에서 운영하는 공장의 직공들과 대등하게 얘기할 정도로 성숙한 아이  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191811일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귀대했다.   는 까르디날 도서관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작문을 좋아했으며, 명상 시간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엉뚱한 결심을 했다. "난 절대 시집 안 갈테야. 수도원에 들어 가야겠어."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이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묵살해 버렸다.

191910월 그녀의 집은 렌느 거리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때 식모 루이즈는 결흔해 떠났다. 14살 때 그녀는 세련되고 재치있고 공부 잘하는 소년 쟈크와를 무척 친하게 지냈다. 그는 그녀에게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에 대해 예기해  주었으며, 어떤 때는 시도 읖어주고, 때로는  그녀가 읽 고 있는 책을 비평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깥로레아 시험에 우등의 성적으로  합격한 그녀는 쌩뜨 죈느 비에브 도서관에 다니며 여대생으로서의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쟈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에끼쁘 쏘시알 단체에 가입해서 그 회의 창립자 가리 끄 교수의 문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이외에도 그녀는  랑베르 교수의 철학 강의도 들었다, 쟈끄와는 날이 갈수록 가까와져  연인 사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결혼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남의 틀 안에 자기를 가둬 버리는, 그런 속박당하는 사랑, 그 런 결혼은 싫어 " 이 결심을 한 후, 그녀는 쟈끄와의 교제를 단호히  끊어 버렸다. 그리고 솔로본 대학 생활 동안 줄곧 공부에 전력했다. 그런데도 푸른 눈동자의 청년 삐에르 노디에가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계속 밀고 들어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그가 어느날 불쑥 찾아와 작별인사를 하고서 갈색 머리 애인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훌쩍 떠나면서 두 사람의 교제도  끝나 버렸다 그후 그녀는 같이 철학 수업을  듣던 고등사범학교 학생인 장  프라델과 사귀었다. 낙관주의자였던 그와의 산책은 즐거웠다. 쟈 끄가 군대에 간 뒤에는 한때 쟈끄의 친구 리께와  사귀기도 했다. 간혹 밤에 빠에 나가 술을 마시며 객기를 부려 보기도 했다. 때로는 밤 거리에서 뒤를 따라오는 차에 올라타 드라이를 즐기기도 했다. 이 무렵  그녀의 지배하는 사상은 '위험한 인생을 살고 아무 것도 거부하지 말라'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착실히 교수자격시험 준비를 했다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며, 논문도 썼고, 중학교에 가서 교생실습 도 했다. 휴가 중에도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을 했다, 이 무렵 그녀는  철저히 개인주의자들인 3인 그룹, 즉 사르트르, 에르보, 니쟝 등과 가끔 만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에르보에게 설레이는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날 에르보의 안내로 사르트르의 집에 갔을 때 그녀는 좀 당황했다. 책과 서류  등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어수선한 방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르트르의 박식 함에 매료되고 말았다. 3인 그룹과 그녀는 오전 중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까폐, 술집, 극장 등지를 쏘다니며 청춘을  즐겼다. 그들 이 표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인간은 정신이 아리라 욕구로 시달리는 육체다인간은 온갖 모험 속에 내던져진 존재다," 어느날 에르보는 그녀에게 사르트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사르트르가 생각하지 않는 때는 자고 있을 때 뿐일 거야. 그 밖에는 늘 생각하고 있거든." 그렇지만, 에르보는 세 사람 중 언제나 그녀의 우정  첫자리를 차지했다. 이윽고 교수자격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녀와 사르 트르와 니쟝은 합격했는데, 에르보는 떨어졌다. 이에 크게 낙심한 에르보는 그 날 저녁에 그녀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파리  를 훌쩍 떠나 버렸다.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면서 홍조 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맡겠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보름 동안의 구술시험 기간 동안 자는 시간 외에는 함께 붙어 다녔다. 외출도, 산책도, 까페 출입도 부부처럼 함께 동행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새삼 그의 존재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 어느날 그녀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또 하나의 나다!" 1929년 가을에도 그녀는 사르트르와 파리의 거리와  공원을 같이 산책하면서 또는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문학과 인생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때로는 영화관에 들어가  <아시아의 폭동>이 라는 영화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앞 돌 걸상에 앉아 있던 사르트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녀 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우리 2년간 계약 결흔을 합시다. 2년 동안 당신은 파리에 살도록 하고 되도록 친밀히 지냅시다. 그런 뒤에는 당신도 외국 에서 직업을 구하도록 하시오. 그러다가 우리 둘 중 한  쪽이 부르면 꼭 응해 공동생활을 합시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이상적인 결합이라 생각되지 않소? 작가는 그 어디서도 정착해서는 안 되며 누구 곁에서도 안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르트르 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전에도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필연적인 거야, 하지만 우연적인 사랑도 알  필 요가 있거든." 그녀는  이 매력적인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후 그 계약을 쭉 지켜 나갔다 1929  11월 초에 사르트르는 병역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는 기상반에 들어가 풍속계(風速計)의 조종을 담당했다, 그러자그녀는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를 했고, 빅또르 뒤뤼이 여자중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를 하거나 드라이브를 하며 보냈다. 19312월에 사르트르보다 먼저 제대한 빠니에즈가 열흘간의 자동차 여행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빠니에즈는 사르트르 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 파리에 잠시 들른 에르보가 갑작스레 데이트를 신청해 왔다. 그녀는 빠니에즈와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그러자 그는 자기의 파리 체류  기간 동안 함께 하지 않고 빠니에즈와 여행을 떠난다면 당장 절교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그녀가 여행을 고집하고 떠나 버리자, 에르보는 절교의 편지를 한 장 남겨두고 영영 그녀 곁을 떠나 버렸다. 사르트르에게도 예전에 사귀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까미유라는 시골 처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사르트르와 절교한 뒤 시골서 지내다가 다시 파리로 올라와 배우이자 작가로서 활약하면서, 연출가이자 배우인 뒬랭을 유혹해 출세했는데, '사르트르는 이따금 그녀 자랑을 열정적으로 늘어놓으며 찬미하곤 했다. 그래서 약간 걱정도 되었다. 아니 질투심마저 느꼈다사르트르 가 자기보다 그녀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나 해서였다 제대한  사르트르는 르 아브르에, 그녀는  마르세이유에 각각 교직 자리가 나서 각자 부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떨어져 있기 싫은  사르트르가 계약을 재고하고 결혼하자고 했다. 그의 이 뜻밖의 제안에 그녀는  잠시 혼돈이 왔으나, 이내 점잖게 거절했다.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자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고심한 끝에 영구적 결혼이나 일시적 계약결흔 대신 영구적 연인관계를 맺고 살기로 방향을 잡았다. 어쩌다 바람을 피우더라도 그 시기를 30대 이후로 잡기로 했다. 각자  부임지로 가서 교직을 잡은 두 사람은 방학이나 휴일에는 서로 만나 해변항구 등지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여름 방학에  그 들은 페르낭의 초청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서 여러  주일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마르세이유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시간만 나면 간편 한 차림으로 하이킹을 즐겼다. 흔자서 이 산 저 산 자유롭게 쏘 다녔다. 그러자, 동료 선생들이 그녀에게 '그러다가 강간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경고를 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되도록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지냈다 유일하게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같은  학교 의 영어교사로 있는 뚜르물랭 부인이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어느날 밤 자기 침실로 그녀를 유혹하려  하는 바람에 좋은 사이가 그만 깨지고 말았다, 그녀는 강의가 없을 때면 주로 소설을 써나갔다. 규재는 사르 트르와 까미유를 모델로 삼았다 봄방학 때는 사르트르를 졸라서 브르따뉴 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루앙 시로 교직을 옮긴 뒤, 르 메르 부인, 빠니에즈, 사르트르와 넷이서 자동차로 남부 스페인 여행을 했다. 그녀는 루앙에서 4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그러 는 사이에 그녀는 루앙, 르 아브르파리 등지에서 사르트르와 수시로 만나 매번 서로의 애정과 정열을 확인하곤 했다그 외 시간은 대부분 독서와 소설 쓰기에 할당했다. 어느날 파리에 들렀을 때 까미유의 소개로  알게 된 뒬랭과 사귀며 연극 연습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 때로는 사르트르와 함께 셀린느, 존 도스, 파소 스, 헤밍웨히, 숄로프 등의 작품을 함께 읽고 비평하기도 했다. 1933년 두 사람은 영국과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 온 그녀는 파리에서 종종 마르꼬와 만나 같이 저녁 식사도 하며 얘기를 나눴다. 마르꼬는 아미앵 중고등학교 교사였다. 북 아프리카 태생인 그는 무척 미남이었으며 성악도 잘해 여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와 사르트르는 대학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미소년과 동거를 하는 호모였다. 어느날 아미앵 까지 내려간 그녀가 그와 만났을  때 그는 남매처럼 한 방에서 자 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녀는  이를 점잖게 거절했다. 어느 날 그녀는  기숙사의 학생 중에 '러시아 소녀'라는 소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러시아인 아버지 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올가라는 소녀였다. 창백한 금발의 이 소녀는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보봐르는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올가를 데리고 가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둘은 정이 들었다. 이 무렵 사르트르는 같은 학원의 유학생의  아내인 마리 지라르 라는 평범한 주부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마리도 사르트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자주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보 봐르도 그녀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질투를 하지는 않았다. 여름 방학에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함께 뮌헨과 함부르크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후 그녀는 코르시카로 가서 빠니에즈와 함께 캠프  생활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 다음  여름방학에 그녀는 혼자 도보 여행을 했다, 사르트르가 자기 부모와 함께 노르웨이 여행 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보다 9살 연하인 올가는 의학부진학 시험에 떨어진 후 반항아가 되어 버렸다그러자, 보봐르와 사르트르는 그녀를 격려해 주고 그녀가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성의껏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틈만 나면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 여자친구들과  어울려 술 을 마셔댔고, 미남자 마르꼬와 자주 외출했다. 그러자 사르트르는 올가가 자기보다 마르꼬를 더 좋아하지 않나 의 환심을 사기 위 르트르와 보봐르의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커플 대신 트리오가 됩시다." 보봐르와 올가는 그 제안을 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 이 트리 오의 관계는 서로에게 유익했다 올가는 그들 사이에  싱그러움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리오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말았다. 올가와 사르트르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내 둘이 절교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보봐르와 사르트르와의 애정 어린 커플  관계가 시작되었다. 1939년에 사르트르가 빠스뙤르 중고등학교로 전임하게 되어 파리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바로아래층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동생활의 편리한 점은 모두 가지면서 그 불편한 점을 모두 없앤 아주 이상적인 커플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아침은  버어 흘의 카운터에서 커피를 마시고 빵으로 떼웠다. 그녀는 교원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서 독서와 집필을 병행했다. 그는 철학 연구를 하고 그것을 사르트 와 토론한 후 얻은 결론을 들고 가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사르트르의 가장 좋은 반려자요 협력자로서 정열적인 저작 활동을 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 함께 지낸 체험을 기초로 해 삼각관계의 질투를 그린  <초대받은 여인>를 썼으며, 괴로운 현실 속에서 인생 에 대한 긍정의 태도로 다룬 평론집 <필리우스와 시네아스>, <타인의 피>를 발표했으며, 그리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희곡 <식충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또한  그녀는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기술한 획기적인 여성론 <2의 성>1949년에 발표했다. 이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 '여인'이라는 객관적 존재에 날카로운 조명을 비춰  여성의 주체성 획득에 의한 해방을  역설한 작품으로서, 당시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그녀는 수년 동안의 침묵 끝에 발표해 콩쿠르 상을 수상한 소설 <레 망라랭>  1954년에 발표했고, 전위 문학 전반을  조명한 평론집 <특권>1955년에, 자신의 여행담을 기술한 에세이집 <긴 여행-중국시론>1957년에 각각 발표했다. 그 뒤에도 <처녀시절>, (여인의 고비), <물체의 힘>, (고요한  죽음)등 일련의 자전적 작품들을 각각 1958, 1960, 1963, 1964년에 발표됐다. 이들 작품들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자아 형성의 발자취를 점검해 보고 있다. , 신의 부재를 깨닫고서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소녀 시절로부터 실천적 작가로서 투쟁하고 있는 현재의 심경까지를 감명 깊게 서술해 놓고 있다.

 

 50. 빌리 할러데이 편 / 대중 예술의 숭고한 성녀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는 미국 발티모어의 한 초라한 병원에서 191547일에 흑인 트럼펫 연주자인 클 러렌스 할러데이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새디 훼이간은 백인의 집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어느 날 임신한 것이 발각되어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새디는 그후 한 병원에 서 일자리를  얻어 환자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지내다가 그곳 에서 빌리를 낳았다. 빌리가 3세 때 새디와 클러멘스는 결혼했다. 클러멘스는 트럼 펫으로 성공해 보겠다고 열심히 연습을 거듭하다가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해 해외로 파병되었다. 새디는 군수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가난한 생활고를 해결해 나갔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군수공장은 문을 닫아 버려 그녀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제대해서 돌아온 남편은 어느 악단을 따라 멀리 떠나버려 새디는  다시 흔자가 되었다. 고심 끝에  그녀는 빌리를 친정 오막살이에 떠맡기고 뉴욕으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다, 빌리는  가난하고 비좁은 오막살이에서 갖은 학대와 모진 매질을 받으며 눈물과 한탄에 젖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에게 유일한 말동무는 늙은 증조모뿐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마자 증조모를 목욕시키고 닦아주곤 했다. 그나마 그녀마저 어느 날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동안 시름에 젖어 살던 그녀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남의 집 아이도 봐 주고 잔심부름과 청소도 해주면서 용돈도 벌었다. 때로는 창녀들 의 잔심부름도 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루이 암스트롱 이나 베시 스미드의 음악은 그녀를  매우 감동시켰다. 그후로 그 녀는 재즈가 흘러나오기만 하면  어디든 달려가서 들었다. 간혹  영화관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구경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쩌다  한번씩 여주인에게서 얻은 헌  옷가지 들을 그녀에게 보내주곤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맥키니의 카튼 매 커즈를 따라 순회공연을 떠났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훼니라는 서인도제도 여자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의 어머니는 얼마간의 돈을 벌어가지고 볼티모어 로 돌아와 펜셀베이니어 거리에 집  한 채를 사서 모녀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훨 까프라는 남자와 재혼했다, 어느 날  빌리는 다크라는 남자에게 성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오히려  그녀가 먼저 남자를 먼저 유혹했다고 누명을 씌워 유치장에 쳐넣어 버렸다. 이윽고 법정에 선  그녀는 가톨릭 감화원으로 보내지는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 다행히 어머니가 변호사를 대주어 얼마 후에 풀려 나올 수 있었지만이 사건은 그 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이 사건 때문에 볼티모어가 싫어진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식모 살이를 하러 북부로 떠났고, 그녀는 다시 외가로 들어갔다. 이 무렵, 그녀는 어느날 트럼펫 악사인 한혹인에게 또 한 번 겁탈을 당했다. 이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여전히 할퀴어댈 뿐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어머니가 있는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처음에는 식모살이를 했지만, 여주인과 다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플로렌스 윌리암스라는 여자에게 빌리를 맡겼다. 당시 포주 노릇을 하고 있던 그녀는 빌리에게 젊은 백인들을 상대로 창녀  노릇을 하게 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 거절을 당한 흑인 깡패 한  명이 앙심을 품고 그녀를 고발했다결국 그녀는 부르크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도 동성연애를 즐기는 한 뚱보 여자의  청을 거절했다가 그녀의 모함으로 4개월간의 복역 선고를 받았다 이번에 수감된 웰페어 섬 형무소는 폐병환자 와 들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이제는  몸을 파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당장 입을 것 먹을 것이 궁해 진 그녀는 또 다시 창녀생활을 하다가 어머니와 대판 싸움을 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얼마 후 모녀는 다시 합쳐 셋방살이를 시작 했다. 그러나 어머니마저 중병에 걸려 앓아 눕는  바람에 집세가 밀린 그들은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빌리는 무작정 길거리로 나가 한 지배인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통사정했다. 지배인은 시큰등 했지만마침 그때 옆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사람이 그녀에게 불쑥 물었다.  "혹시 노래 부를 줄 아니? 방세 걱정이 앞섰던 그녀는 대뜸 할 줄 안다고 대꾸해 버렸다. 그리고 얼떨결에 평소 혼자서 흥얼대던 <외로운 나그네>를 불렀다. 의외로 그 노래는 손님들을 크게 감동시켰고 덕분에 방세보 많은 57달러의 현금을 팁으로 받게 되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밤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당시 유명한  음악평론가 존 하몬드, 멋장이 피 아니스트  베니 굿맨, 그리고 일류 매니저 조 글레더 등과도 알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조  글레더의 호평을 받게 되어 계약을 맺는 행운을 잡았다. 그녀는 하차 클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노래 를 불렀다 간혹 그녀는 대중들로부터 누구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오직 느낌을 가지고 노래할 따름입니다. 느낀 것을 솔직 하게 노래 부르면 듣는 사람이 무언가를 따라 느껴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녀는  아폴로 극장에서의 공연 성공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무렵 그녀는 훌릉한 신사요 피아니스트인 베니 굿맨과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백인 남자와 사귀는 것을 꺼려하는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와, 자기 동생이 장차 성공할 것이 틀림없다고 자부하 는 베니의 누나의 엄격한 감시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은  그만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카운트  베이시의 악단을 따라 순회 공연을 떠나면서 상황은 달라지고 말았다. 2년 동안의 순회 공연 중에 테너 섹스폰 연주자인 레스터 영과 깊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순회 공연이 끝나고 그녀는 한 동안 실직 상태에 있었다. 이 무렵 그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어느날 그녀는 아티 쇼의 주선으로 13  명의 백인 악사들과 함께 보스턴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어, 켄터 키, 센트루이스 등지에서도 공연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지만, 여전 히 그녀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호텔 숙박에서부터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푸대접을 받았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국에 중계되는  라디오망을 가지고 있는 링컨의 불루  룸에 출연했 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녀가 혹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천대를 받았다. 화가 난 그녀는 악단에서 탈퇴해 버렸다. 그리고 다운타운  의 카폐 소사이어티에 출연했다이곳에서 자주 불렀던 <기묘한 과실>이라는 노래는 콤드아 레코드에 취입되어 날개돋힌 듯 팔려 나갔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녀는 산페르난드 발레이의 클 럽, 켈리포니어의  클럽에서도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 무렵 그녀는 은막계의 거성 오손 웰스를 만났다. 그러나 당  <시민 케인>이라는 영화로 명성이 드높던 오손을 감싸는 무리들이 그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했다, 그후 인연을 맺은 부유한 차리 버네트의 호의 덕분에 주급 175달러의 대우를 받고 무대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부 연주 공연 때는 로만 그랜츠를 사귀기도 했다.--한때는 업다운 하우스의 경영자인 클라크 몬로의 동생이자 바람등이인 지미 몬 로와 함께 매릴랜드  주의 시골로 도피생활을 떠나기도 했다. 그 일로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지만 두  사람은 결흔했다. 그러나 마약 중독자였던 지미는 그녀에게 악영향만 끼쳤다. 그녀 역시 이내 마약의  노예가 돼버렸다. 예상대로 결혼 생활이 파탄 나자 그녀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다그녀가 결흔 생활을 통해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그 사이에 지어 부른  <아무 말도 말고, 아무 말도 말고>라는 노래뿐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앨러배머 출신인 젊은 트럼펫 악사  조 가이를 만나 애정을 나뒀다. 그녀는 그와 동거하면서 밴드를 조직해 함께 일했다 그리고 대형 버스를 하나 구입해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어머니 새디가 운명했다더욱이 이 무렵,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남부의  캠프 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다행히 1944년에 취입한 <경쾌한 나그네>가 인기를 끌었다, 전쟁 후반에 그녀는 여전히 마약 중독 때문에 극도의 어려움을 려었다, 그러나 다행히 토니 클리처의 도움으로  맨허턴에 있는 한 요양소에 들어가 아무도 몰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비밀을 지켜 주겠다던 병원측이 위약해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당국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운이 좋아 1946년에 영화 <뉴올린즈>라는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지만 금발의 여배우 도로시 패트릭의 심술과 질투로  인해 은막 데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는  마약 복용 및 은닉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 년간 징역살이에 처해졌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어의 올더슨에 있는 연방  부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곳에서는 치료는 커녕 허울뿐인 병실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때때로 농장에 나가 채소를 가꾸거나 돼지 우리를 치우는 노동일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엌대기의 조수 노룻을 하기도 했으며, 어떤때는 일사병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여자 간수장은 매주 동료들의 편지를 세 통 정도 뽑아 주기도  하고, 출옥과 동시에 그녀가 연예계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봐 주었다, 만기가 되어 출옥한 그녀는 조 글래더와 보티 티커의 도움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출옥한 지 10일 후에 그녀는 카네기 흘 무대에 섰는데, 대호평을 받았다. 그러자 당시 예보니 클럽을 경영하고 있던 존 레비이가 그녀에게 접근, 무대와 값비싼 의상, 구두, 보석, 호텔방, 저택 등을 제공하면서 청흔을 했다. 그녀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결혼 후에 각지의 극장으로 순회 공연을 떠났으며그후 거의 중노동을 하다시피  열성적으로 노래를 불렀 다. 그러나 레이비는 수입금 전액을 중간에서 혼자 가로채 버렸다. 게다가  레이비가 짜놓은 각본에 맞게 마약위반죄로 고발되었다. 다행히  누명이 벗겨져 풀려난 그녀는  레이비와 이흔 수속을 밟은 즉시, 루이 매캐이라는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 후 스웨 던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지를 돌며 꿈에도 그리던 유럽 순회공연을 떠났 다. 가는 곳마다 그녀는 대호평을 받았다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또 한차례  수난을 당했다. 이번 에는 총기불법소지죄에 연루되어 일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그 일 외에는 남편 루이와 더불어 행복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19597  17일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서 45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남겼다. "  세계의 캐딜락이나 밍크 모피를 가지고도 결코 바꿀 수 없 는 체험, 그 체험으로써  배우고 터득했던 모든 것이 이 두 개의 어휘 속에 짜여져 들어 있는 것이다. 인생을 놓고 백만 마디의 설교가 있기 전에 필요한 것은 먼저 '''사랑'이 아닌가?

 

 51. 에디뜨 삐아프 편  / 사랑에 살고 예술에 살다 간 귀여운 여인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1915-1960)19151219일에 파리의 빈민촌  베르뷔르가() 뒷골목 한복판에서 곡예사 갓시옹 과 가수 죠봔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르만디 출 신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는 서커스단원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녀의 어머니도 그 서커스단의 가수였는데, 만삭이 되자 파리로 돌아와 휴양 중에 길바닥에서 그녀를 분만했다. 이 소식 을 듣고 서둘러 상경한 갓시옹은 그녀에게 에디뜨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얼마 전에 부상당한 독일병사를 인도적으로 치료해 주었으나 또 다른 독일병사에게 사살당한 프랑스  간호부 에디뜨 까벨의 이름을 본따 지은 이름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지 두 달 후, 그녀의  어머니는 극심한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해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갓난아이를 안고 서커스단을  따라 지방순회 공연을 다니다가 노르만디 농촌에 사는 할머니에게 그녀를 맡겼다.  4세 때 그녀는 종교촌 리쥬로 옮 겨져, 그 곳의 저능아들을 교육하던 증조모의 따뜻한 보호 아래 맑고 밝게 자랐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기숙사 밖 뒷길 깊은 숲 속으로 달려가 혼자서 새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꽃가루가 눈에 들어갔는지 눈에 눈꼽이 끼고 충혈기가 돌았다. 그러다가  6살이 되면서는 급기야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 렸다. 대신 그녀의 청각과 촉각은 몇 배나 더 발달했다.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아 제멋대로 노래하면서 답답한 시간을 떼우는  습관이 생겼다, 이러한 어린 소녀를 딱하 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기도를  올리고, 성수로 씻으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쌩뜨 루이드 성당에 갈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증조모는 그녀를 데리고 그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 노천에서 기숙하면서 기도를 드리고 수녀한테서 받은 성수로 매번 눈을 씻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정성에 효험이 있었는지 시력이 돌아오게  되었다. 1919825일 오후  다섯 시에 일어 난 기적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수녀들도 크게  기뻐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 그녀는 순회 공연 중에 잠시 마을에 들른 아버지  갓시옹을 따라 정든 리쥬 마을을  떠났다, 교리고는 서커 스단에 들어갔다. 그녀는 얼마 안 되어 자기 아버지가  서커스단 내에서 눈치를 받는 천덕꾸러기 곡예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서커스단 생활이 싫어졌다. 매일같이  비슷비슷 한 잔심부름을 하며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10살 때부터는 아버지가 하는 곡예술을 배우느라 눈물 꽤나 흘려야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이  고통스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만 했다. 그러나 단원들에게 구박만 받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훌쩍 떠날 수도 없었다 어느날 그녀는 여자 단원으로부터 그녀 의 어머니가 예전에 서커스단에서 가수로  일했으나 자기를 낳고서 도망가 버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증조 모의 말대로 어머니가 멀리 돈 벌러 간 줄로만 알았었다.

이 때문에 더욱 슬픔에 잠기게 된 그녀는 시간만 나면 늘 천막 뒤로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지냈다. 그리고 서커스단의 여자 가수에게 샹송도 배웠다. 놀랍게도 그녀는 한 번 들은 노래는 곧잘 따라 불렀다. 그러나 갓시옹이 서커스단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바람에 부녀는 졸지에 나그네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부녀는 이 거리 저 거리로 떠돌아 다니면서 거리에 사람 을 모아 놓고 갓시옹은 곡예를 하고 그녀는 노래를 불러 하루하루 먹고 살았다. 돈이 없으면 길이나 마굿간에서 잤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면 그녀는 혼자서 곡예까지 하며 노래를  했다. 이런 거리의 유랑 가수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나이가 16  세가 되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술에 절어 살았으며 성격도 차츰 거칠어져 그녀를 자주 때리고 괴롭혔다, 게다가 제법 처녀 티가 나는 그녀를 어느 주막집에다 팔아 넘기려고까지 했다. 고심 끝에 그녀는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쪽지 한 장을 남긴 채 혼자 파리로  상경해 버렸다. 19325월이었다. 그녀는 파리의  큰 거리를 돌아다니며 거리 공연을 해서 푼돈을 벌었다. 그녀는  당대 유명한 샹송 가수들의 새로운 히트곡이 나오면 그대 로 모창했다, 그녀의 무대는 주로 뜨로와잉의 큰 거리였다. 벌이  가 그런대로 잘 되자 그녀는 거리의 깡패들에게 세금도 바쳐야 했다. 1934년 어느 가을그녀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오던 길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서 가로등에 기대 쥐어  짜듯 목놓아 노래를 불렀다. 이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녀의 노래에 매혹되었다. 사람들이 흩어진 뒤, 어떤 중년신사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시내  중심가에서 카바레 쟈니스를 경영하고 있는 루이 루쁘레였다

"어때? 우리 카바레에 와서 노래 공부를 해 볼 생각  없나? 노래 솜씨는 좋지만, 아직 미숙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야." 이 뜻밖의 행운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고 말았다. 그 이튿날 카바레를 찾아간 그녀에게 루쁘레는 '귀여운 작은 새'라 는 뜻의 '모옴 삐아프'라는 애칭을 지어 주었다. 이때부터 그녀 는 오전에는 청소부  노릇을 하고 오후에는 카바레 전속악단의 지휘자 밑에서 노래 공부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녀는 무대 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공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더욱 이 마침 그  자리에 와있던 쟝 콕토가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특별히 가사까지 써주었고유명한 작곡가와 레코드 회사 중역들도  소개해 주었다. 그후 그녀는 파리의 신데 렐라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 <참새의 노래><나를 껴안아 주 세요>가 담긴 레코드는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이렇게 데뷰한 지 6개월만에 그녀는 일약 파리의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루이 루쁘레 씨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살인 용의자로 경찰은 그 시체를 처음 발견한 그녀를 지목하고서 모윽  적인 신문을 해댔다, 언론에서도  그녀의 과거까지 들추어 내어 비방하면서 계속 그녀를 헐뜯었다, 그러나, 종업원과 악단장, 그리고 쟝 콕토와 레이몽 앗소 등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어 그녀의 살인 혐의를 벗겨 주었다 그 중에서도  레이몽 앗소는 날마다 면회를 와서 그녀를 따뜻이 위로해 주었다그는 쟝 콕토가 소개해 준 젊은  시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의심하는 대중들은 그녀에게 계속 손가락질을 해 댔다, 그녀는 다시 쟈니스로 돌아와 노래를  해달라는 악단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레이몽 앗소의 하숙집으로 가서 며칠 푹 쉬었다. 레이몽은 그녀를 정성껏 돌봐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작사한 <사랑은 가득히>라는 시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는 작곡가 루이기에 의해 작곡되었다. 이 노래를 연습해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섰다그러나, 사람들의 비난과 야유 때문에 비통한 가슴으로 공연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크게 절망한 그녀는 그 길로 곧장 달려가 세느 강물에 몸을 던졌다. 요행히 뒤따라온 악단장과  레이몽의 도움으로 그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의 자살 기도에 대해 전해 들은 쟝 콕토를 비롯 한 작곡가시인들이 충격을 받고서 그녀를 재기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무엇보다도 레이몽의  사랑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박식한 그에게서 모든 교양과 지식을 배우기로  했다. 시어의 용법에서부터 샹송 가사의 묘미와 해석법, 그리고 극작과 연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교육을 받았다. 그러자, 언론들도 그녀의 동정(動靜)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차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느날  그녀는 레이몽의 가승에 기대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이 내게 보낸  천사예요. 이건 기적이랍니다." 이후 그녀는 <그 여자는 삐갸르 거리에 가끔  나타났다>를 비 롯한 새 노래를 가지고 무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했다. 그녀의 레코드는 판매면에서 만족할만했다. 그녀의 노래는 특히 서민층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레이몽도 그녀가 유명 해짐에 따라 함께 작사가요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1936년 가을에 <  갸르손>이라는 영화에도 조연으로 출연해 주 제가를 불렀다. 이 영화도 성공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그녀의 잦은 연주여행좋은 시를 쓰지 못 해 매일 술에 젖어 사는 레이몽의 슬럼프 등으로 인해 그녀와 레 이몽 사이가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레이몽의 제의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후로도 '정열의 샹송가수'로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전쟁 중에는 자주 위문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쟝 콕토  는 그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그녀를 위해 썼다는 희곡 <아름 다운 무정인(無情人)>을 선사했다. 그녀가 주연한 이 연극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녀는 <세느 강  위의 몽마르 트르르>라는 영화에도 주연을 맡았다.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무혈  점령된 뒤에 그녀는 독일군에 협력  하는 척하며 샹송 합창단을 조직해 포로 수용소 위문 공연을  다녔다. 그러면서 그녀는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의 지령을 받고 독일 영토 내의 반독 단체 비밀 조직과 선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훌릉히 수행해 냈으며, 때로는 정치범의 탈출을 도와주기도 했다한번은 나치스의 제2인자인 선전상  괴벨스의 정중한 초대를 영화 촬영 핑계를 대고 거절해 골탕먹이기도 했다. 이는 파리 시민들의 저항 정신을 한층 고양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 이 무렵 그녀는 무랑  로쥬에 항께 출연해 알게 된 신인 가수 이브 몽땅을 친절히 이끌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몹가짐과 연기 까지도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그러다가, 파리가 연합군에 의해 수복되던 날 이브 몽땅을 힘껏 껴안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 연합군을 위해 샹송과 재즈풍의 노래를 많이 불러 주어 승리한  연합군의 노고에 답례해 주었다. 이후 그녀와 이브 몽땅과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어디든 그를 데리고 다녔으며 그의 레코드 취입까지도 곁에서  면밀히 도와 주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사랑의 찬가>라는 노랫말을 짓고 여류작곡가에게 곡을 쓰게 해 자신이 직접 노래를 했다.

"저 푸른 하늘 내 위에 떨어지고  이 지구덩이가 깨져 무너지더라도 사랑하는  당신이 내 곁에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해라."

그녀는 이브 몽땅의 넉넉한 품에 포근히 안김으로써  고독의 병 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완전한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연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를 위해서 그녀는 술도 끊어  버렸다. <밤 의 문>의 영화에 연인을 출연시키기 위해 감독을 직접 찾아가 사정하기도 했다그러나 그 영화의 실패로 두 사람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둘은 헤어졌다서로 뜨거운 열애 를 한 지 3년만에 그녀는 이브  몽땅과 시몬느 시노레가 결혼하는 것을  씁쓸히 지켜 봐야 했다. 이후 미국 공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는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그녀는 프랑스 권투 선수 마르세르 세르당과 사랑에 빠졌다하지만 그마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또  다시 혼자되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당시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그녀는 충격으로 아이까지 잃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영화 배우 폴 무리스와 약혼했으나, 세르당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 얼마 안 가서 파흔하고 말았다.  1952년 가을에 그녀는 뉴욕에 머물러 활동하고 있던 샹송가 수 쟈끄 필스를 만나게 되었는데그로부터 샹송 <나는 너에게 반했어>라는 노래를 선물받고 감동해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곧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주로 신진가수들을 발굴하는 데 온 정성을 다 쏟았다배꼬는 그녀의 도움으로 일류 작곡가 겸 샹송가수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이에 질투를 느낀 필  스는 자주 집을 비우고 멀리 순회 공연을 떠나곤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급격히 식어 버렸다. 그 결과는 이혼이었다, 또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젊은 신인들을 열성적으로 키워 내면서 고독을 달쳐다. 그러다가, 작곡가 샤르르 듀몽과 한때 열렬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떠, 작곡가 샤르르 아즈나블, 미국인 샹 송가수 에의 꽁스땅찌느 등과도 애정의 관계를 맺었다그러다가 20세 연하의 신인가수 데오 사랏뽀와 결혼해 비로소 파란많은 사랑의 유랑을 끝냈다, 그리고 잔잔한 행복의  시간을 누렸다. 그러나 짓궂은 운명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악화된  만성 위궤양으로 쓰러뜨려 버렸다. 그녀는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631011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쟝 콕 토는 그 이튿날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저승으로 떠나 버렸다.

 52. 마릴린 몬로 편 /세계 남성들의 영원한 섹스 심벌

본명이 노마 진 베이커인 마릴린 몬로(1926-1962)는 로스엔  젤레스에서 1926년에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마저 미쳐서 죽자 그녀는 집없이 사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9살 때 강간을 당했으며, 17세 때는 하사관인 군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만에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녀는 생활고 때문에 할 수 없이 엑스트라 또는 누드 모델이 되었고, 때로는 콜걸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누드 사진 달력이 전시의  미군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할리우드 제작자는 이 인기를 중시해 그녀  를 상품화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녀로 하여금 무려 6번의 성형 수술을 받게 해 요부(妖婦)로 재창조했다, 그후 그녀는 14년간에 걸쳐 육체파 여배우로서 맹활약하게 되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백만장자와 결흔하는 법), (나이아가라>등의 영화를 통해 많은 수익금을 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전 세계의 영화펀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할리우드의 섹스 심벌이요 은막의 요정으로서 자리도 탄탄히 확보했다 . 그녀의 육체는 곧 대기업이었다, 풍만한 유방과 엉덩이, 가는 허리, 매혹적인 젖가슴의 골짜기가 드러난 의상, 속삭이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 요염한 걸음걸이매혹적인 입술 등등 그녀의 육체의 모든 부분은 곧 성적 매력 덩어리요 훌릉한 상품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그녀는 항상 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다니는 섹스 심벌로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1958년에 존 F케네디를 만나고부터는 남모를  고민 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케네디의 여동생 패트의 남편인 배우 피 터 로포드의 소개로 알게 된 케네디와  그녀는 첫 대면부터 서로 에게 매혹되어, 이내 깊은 관계를 맺고 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주로  로포드의 비치 하우스나 뉴욕 카라일 호텔에 있는 대통령 전용 펜트하우스에서 만나 밀회를 즐겼다 1960년 민주당 대회  후에 그녀는 로포드에게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매우 민주적이고 예리해요난 그의 남 모르는 고통을 잊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케네디를 만날 때는 맨 몸 위에 드레스만 걸치고 만날 정도로 연인에게 노골적으로 열중했다. 두 사람의 밀회는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들은 카라일 호텔이나 로포드의 비치 하우스, 또는 대통령 전용 비행기 안에 서 서로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녀는 케네디를 만날 때는 주로 변장을 했다. 어떤 때는 푸른 색 가발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채 만났고, 어떤 때는 유행 지난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의 밀회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녀와 케네디와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겨났다. 그녀가 케네디의 정식 아내가 되고 싶어했던 반면에케네디는 그녀를 일시적인 연애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이었다,

밀회가 거듭될수록 케네디에게 아주 깊숙이 빠져들게 된 그녀 는 어떻게든 재클린과 케네디를 이혼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 앉고자 하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케네디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회피했다, 그러자, 그녀는 백악관으로 여러 번 전화를 하고, 또 시를 적은 편지도 여러 통 보냈다. 어떤 때는 재 클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케네디의 생일 축하 파티가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는데, 거기에는 핵심 민주당원들과 일류 연예인 몇 명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 아주 볼륨있는 몸매를 그대로 드러 낸 구술 장식 드레스 차림을 한 그녀가 파티 도중에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인사맛을 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디어 프레지던트 케네디(Dear President Kennedy)!대통령 각하께서 저에게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탱큐 포 메모리>를 섹시한 목소리로  노래 부른 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자, 케네디는 축하객들을 향해 미소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멋진 목소리로 생일 축하를 받다니, 이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 케네디는 사법부 장관과 FBI의 조언에 따라, 그 녀와의  밀회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마피아가 로포 드의 비치 하우스에 도청 장치를  해 녹음까지 하고 있다고 경고 해  주었기 때문이다, 케네디가 만나주지 않자, 그녀는 너무도 흥분해 전화, 편지 등 을 통해 케네디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자, 그녀는 대통령과의 정사를 메스컴에 모조리 폭로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보기도 했다, 그러자,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협박 겸 위로를 해주기 위해 그녀를 방문했다. 이후  로버트와도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열중 했지만 로버트도 그녀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없었다, 얼 마 되지 않아, 그는 그녀 곁을 떠나 버렸다. 이 때문에 그녀는 거 의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촬영 중이던 <아내는 살아 있었다>의 배역도 소흘히 해, 결국 배역마저 빼앗겨 버리는 수모 를 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로버트의 아이를 떼내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뒤로는 그녀의 히스테리가 더욱 심해졌다. 내면적인 자유나 개성을 구가할 수 없는, 오직 할리우드의  상품으로서의 존재 가치밖에 없는 겉만 번드르르한 삭막한 생활을 꾸려가야 했던 그녀! 한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와 로버트 케네디 와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으나, 그들에게마저도 버림받아 실의에 빠져 지내야 했던 그녀! 그나마 영화계에서마저 외면당해야 했던 그녀!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196284일 밤에 그녀는 할리우드의 비버리힐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온몸에 샤넬  No. 5향수를 뿌린 후에 유서 한 장도 남기지 않은 채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서 알몸으로 퀸사이즈의 침대 위에 누워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 고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그 이튿날 전세계의 메스컴을  통해 숨가쁘게 보도되었다 그런데마피아 샘 지안카나의 동생 쟈크가 그의 아들 샘과 함께  집필해 펴낸 <더블 크로스>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그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케네디 집안은 마피아의 보스 지안카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지안카나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입후보했을때  거금을 선거자금으로 내놓았고,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케네디  집안은 지안카나 의 아들을 케네디의 측근으로 삼아 주겠다는 약속을 깨뜨려 버렸 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 장관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지안카나를 범죄자 명단에 올려  버렸다. 이런 일련의 처사에 대해 지안카나 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마침 그때 CIA로부터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마릴린을 없애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자, 지안카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케네디 형제와 마릴린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데 사용하고자 그 제안을  쾌히 수락했다. 지안카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캘리포니아를 방문해 마릴린을 만나는 날 84일 밤 로버트 케네디는 마릴린의  집을 방문해 마릴린과 얘기를 나눴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다. 마릴린은  신경질적으로 욕설까지 퍼부으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형제에게 농락당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사실을 세상 에 폭로하고 말 거야." 이어 로버트도 지지않고 팽팽히 맞섰다. "우리 형제에게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 그러자, 마릴린은 로버트에게 주먹질을 해대며 앙탈을 부렸다. 이때 로버트는 담당 정신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진정제 주사를 한 대  놓아 주도록 조치했다, 그리고는 돌아갔다. 바로 이때 살인 청부업자들이 몰래  들어와, 마릴린의 입을 테 이프로 막고 꼼짝 못하게 한 다음 그녀의 항문에다 바르비탈 약 을 삽입해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그녀를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말끔히 뒷처리를 한 후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날 밤 마릴린의 사망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된 로버트 케네디는 급히 탐정 오타슈를 보내 사건 직전에 자신이 마릴린의 집 을 방문한 증거나 일기 등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이튿날, 마릴린은 '단순히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 으로 보도되 었다.

 

 53.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편  / 상식을 깨뜨려 버린 퍼스트 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Bouvier Kennedy onassis, 1929-1994)는 사우드 햄프톤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 주식 투자가인 아버지 블랙 잭 부비에와 뉴욕 중앙은행 간부의 딸인 어머니 쟈넷 사이에서 1929728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줄곧 우등생 자리를 고수했다. 그녀는 흘톤 -암즈 학교의 2년 과정을 남긴 채 화밍톤에 있는 미스 포터스 스쿨에 입학했다. 해외 연수를 다녀온 그녀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등록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그녀는 기자로서 활약하면서 뉴포트 사교계 파티에 데뷔해  1951년의 '데뷔땅뜨(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   무렵 그녀는 존 F.케네디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912일에 그녀는 쪼세의 나이로 뉴포트에서 14명 의 안내원과 10명의 들러리를 세우고 당시 37세였던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했던지 마치 대관식 같았다. 이 결혼으로 재클린에게는 한꺼번에 부와 권력이 품안에 안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61년에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전시 중에 받은 상처가 악화되고 여러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는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해야 했다. 특히 그가 마릴린 몬로와  깊은 사이가 되었을 때는 몹시 허탈감을 느꼈다. 하루는 마릴린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그녀가 직접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그녀는 끝까지 냉정을 지키며 마릴린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케네디와 헤어질께요. 하지만 그이와 결혼하게  된다면 당신은 영부인이 될 텐데, 그럴 각오는 돼 있나요? 게다가 1963년 봄에 둘째 아들 페트릭이 태어난지 불과  이틀 만에 죽어 버리자 그녀는 너무도 힘들어 했다, 같은 해 1122  미국 남부 달라스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남편의 목숨까지 앗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 는 하루 아침에 서글픈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조용히 두 자녀 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국의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모든 기대와 소망을 깨뜨려 버리고, 예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1968년에 재혼해 버렸다. 그러나 오나시스에게는 또  다른 연인이 있었다. 바로 세기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가 그녀의 만만찮은 적수였던 것이다. 재클린은 그녀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점차 그녀는 오나 시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육욕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호화 유람선 위에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애욕적인 행위로 남편 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남자와 놀아나기도  해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지나치게 낭비하는 생활로 자꾸만 빠져 들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보석 사기 경쟁 을 벌일 정도로 돈을 헤프게 썼다그런데다 오나시스의 사업도 불황에  직면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3년에는 오나시스가 가장 아끼는 아들 알렉산더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와 오나시스와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1795  315일 오나시스는 기관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는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녀는 오나시스의 딸 크리 스티나와 유산 문제로 장장 18개월에 걸친 법정 투쟁을 벌여 2,600  달러를 상속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죽기 얼마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재키는 내가 만난 인물들 중 가장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생각도, 이야기도, 꿈도, 모투 돈뿐이었다. 그녀가  한 가지 깨닫지 못한 점은 내가 그녀를 다시는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녀에게 주었던 액수의 50배라도  기꺼이 지급할 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주위 사람이 모두 사라져 가는데 그녀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녀는 위험스럽고도 무서운 존재다, 재키는 케네디가와 오나시스가 가족을 모두 잡아먹었다." 그후 그녀는 뉴욕에 머물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1975  9월에 '바이킹' 편집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킹사 가 케네디 암살사건을 다룬 책을 출판하자  그곳을 그만 두고 다른 출판사(더블데이 북스)로 옮겼다. 1976년 이후  그녀는 바이킹사의 긴저버그, 방송국 이사인 칼 킬링스워스, 칼럼니스트인 해밀, 작가인 피터 데이비스, 건축가인 페이 등과 사귀며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어느날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대변했다. "나는 흔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었지만 그녀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4520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암의 일종 인 바흐치킨 님프종이 병명이었다리차드 조링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케네디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 대해서이다,"  

 

   2 부 건달에서 황제까지

  1. 1세기까지의 연애 박사들

 1유방편  /미녀에게 마음약한 황제

 유방(劉邦, BC. 247-195)은 패()의 풍읍에서 중류 농가 출신의 아들로 기원전 247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가업을 돌보지 않고 유협(遊浹)  즐기다가 사수의 정장(亭長)이라는 말단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관리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고 오로지 술과 허풍으로 객기를 부리며 살았다, 이러한.술주정뱅이 에게 강소 사람 여공은 어쩐 일인지 선뜻 자기 딸을 주겠다고 했 다. 여공의 부인은 극구 이를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 버렸다. 그리하여 여공의 딸 여치(呂稚)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유방의 아내가 되어 시댁으로  갔다, 예측했던 대로 유방의 시댁은 너무도 가난해  여치는 시집가서 밭에 나가 죽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11녀를 낳아 길렀다. 당시의 중국은  진시황 치하에서 백성들은 연일 만리장성과 여산의 능을 건축하는 데 동원되어 가혹한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무렵 유방도 정장으로서 부역군을 인솔해 여산으로 향하 고 있었다. 그런데 행군 도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자 그는 나머지 인원을 풀어주고 스스로 군도(群盜)의 두목이 되었다, 그리고 진 시황제가 병사한 이듬해인 기원전 2087, 진승, 오광 등의 반란을 계기로 향리에서 거병해 군웅 속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항우와 맞설 만한  세력을 이루었다. 항우가 제후(諸候)와 장군, 관리 출신을 대표한 입장이라면, 그는 일반  농민, 상공인, 중소 지주 등을 대표하는 입장이었다, 초기에 그는 항우와 연합해 진과 싸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항우와 길을 달 리해 관중에 먼저 들어갔으며, 기원전 206년 진의 수도 휀양을 점령해 진을  멸망시켜 버렸다. 이에 항우는 패권을 장악하자 약속을 어기고 유방을 한 왕으로 봉해 한중으로 좌천시켰다. 이때 부터 유방과 항우는 5년간의 치열한 쟁패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기원전 202년에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해하에서 완전히 격파해 천하를 통일하고 즉위해 국호를 한()이라  일컫고, 수도를 장안으로 정했다. 이와 동시에 여치는  황후가 되었으며, 왕자 영()은 황태자가  되었다. 한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은 창업공신인 한신을 초왕으 로 삼았다. 그러나황후는 그가 모반을 꾀했다고 몰아세워 그의 삼족까지 멸해 버렸다. 창업 공신인 양왕 팽월도 마찬가지 신세 가 되었다. 이 무렵, 유방은 그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황후 여치를 멀리하고 다른 여자에게 한 눈을 팔기 시작했다. 그의 열애 대상 은 척희(戚姬)라는 미녀였다. 유방은 진의 수도를 함락시킨 후 산동에서 그녀를 만나, 그후 하남, 산동 각지를 전전할 때도 늘 곁 에 데리고 다녔다. 이 때문에 여치는 질투심을 억누르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척희는 얼마 후 왕자 여의(如意)를 낳았다 그녀 는 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졸라댔다. 그녀를 몹시 총애하던 유방은 중신들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방은 조세, 부역 등을 경감해 민심을 수습하고, 강력한  한의 군주제를 실시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으나, 내전 때  입은 부상이 원인이 되어, 소하왕능, 진평, 주발 등을 차례로 등용할 것을 황후 여치에게 유탁하고서 기원전 195년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황후 여치는 척희를 체포해 유폐시킨 다음 처참히 살해해  버렸으며, 척희의 아들 여의는 독살시켜 버렸다.

 

2. 율리우스 케사르 편 여자와 야망을 동시에 사랑한 호걸

율리우스 케사르(Gaius Julius Caesar,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이저, BC. 100-44)는 전설적인 로마의 조상 아이네아스 계보에 속하는 명문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수사학 과 변론술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기원전 81년부터 3년 동안 소아시아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기원전 78년에 술라가  죽자 로마로 돌아와, 그 이듬해에 정치  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후 에스파니아의 재무관을 거쳐, 안찰관대신관을 각각 역임했다. 그런데, 대신관으로 있을 때에 정치 자금을 마구 빛 내어 써버리는 바람에 막대한 빛을 짊어진  채무자가 되어 버렸다. 당시 로마의 갑부 크랏수스로부터 거금의 빛 을 내  호화로운 행사와 연회를 여러 번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전 59년에 크랏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동맹 을 맺은  후 제1차 삼두(三頭) 정치를 이끌어 갔으며, 기원전 59년 에는 집정관이 되어 그의 정치적 역량을  한껏 발휘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재년에 갈리아 총독이 되기를 자청해 이를 민 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울창한 산림지대인 갈리아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폼페이우스에게 자기 딸  율리아를 시집보냈다. 그후 케사르는 8년간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점령지 를 넓히고, 루카 회담에서는 갈리아의 지배권을 5년간 연장함으로써, 그는 더욱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기원전 54년에 율리아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이 듬해에 크랏수스가 동방 원정 중에  전사해 버렸다. 그러자, 폼페 이우스는 케사르를 배반하고서 기원전 52년에 단독으로 집정관 자리에 올라 독자적인 자리를 구축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케사르는 속주인 갈리아에서의 군대  지휘권을 보유한 채로 집정관에 입후보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원로원에 의해 거절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해산하고 즉시 귀국할 것을 종용받았다, 케사르는 그에 불복해 군사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로 진격해 로마를 점령했다. 이어 파르살로스 싸움에서 폼페이우스의 대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레스보스  섬을 거쳐 이집트로 도망가서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케사르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후환을 두려워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는 부하 를 시켜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손쉽게 적수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탄식했다. "! 그마저  죽었는가? 이후 그는 이집트 분규에 개입했으며, 교양과 재색을  겸비한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하게 되었다여왕으로서 품위와 요부의 매력을 두루 갖춘  그녀 앞에 그는 이성을 잃고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는 그녀를 이집트 왕위에 앉혔으며, 둘 사이에 아들 케사리온 을 두었다. 그러자 로마에서는 그의  반대파들이 그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케사르는 창부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서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그후 그는 젤라에서 미트리다데스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토벌했으며, 이어 아프리카의 탑소스 싸움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했고, 에스파니아의 문다(Munda)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잠시 고전했으나 결국 처후의 승리를 거둬, 마침내 천하 통일의 숙원을 이룩했다. 이후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되어  로마의 일인 통치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정치적 기반이 안정되자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두고 온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워 그녀와 자기 아들 케사리온(Caesarion)을 로마로 불러들였다. 그는 로마로 올라 온 클레오파트라를 그의 네 번째 아내 카르푸르니아와 같은 저택 에 머물러 지내게 했으며, 그녀에게 시저 가()의 한 사람으로 귀속되는 명예도 부여했다. 그의 전처인 폼페이아는 간통  사건에 연루되어 그에게 이혼 당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케사르는 아내 와 부정을 저지른  클로디우스의 죄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아내를 내쫓았습니까?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간략히 대꾸했다. "  아내 되는 여자는 혐의를 받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오. " 기원전 44년에 종신 딕타토르가  된 그는 안토니우스로부터 왕 관을 봉정 받았으나, 이를 수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위의 확립을 암시하는 예언이 발견되어, 로마인의 왕정 복귀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한층 가중되었다. 같은 해 315일이었다. 브루투스  (Brutus),캇시우스(Casslusl등의 공화파에 의해 그는 폼페이우스가 세운 의사당 안 폼페이우스의 상 앞에서  암살 당하고 말았 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은 비통한 한 마디를 남겼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 ,

 

3. 안토니우스 편 /클레오파트라를 진실로 사랑했던 영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2-30)는 동방  에서는 가비니우스의 부하 부장으로, 그리고 갈리아에서는 케사 르의 부하 부장으로 각각 근무하다가, 기원전  49년에 호민관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로마의 기병대장으로 이집트에 파병되기도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을 쫓아낸 괘씸한 백성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제지해, 오히려 정적인 아르케 라오스의 장례를 정중히 치러 주어 알렉산드리아의 대중들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때 그는 베레니케의 여동생인 당년 15세 된 재기발랄한 클레오파트라와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반해 남몰래 가슴을 태웠다  안토니우스는 준수하고 기품 있는 외모, 멋진 턱수염, 넓은 앞 이마, 잘 생긴 매부리코를 가진 미남이었다. 그는 농담도 잘했으며 다정다감하고 관대해 군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특히 그는 여자와 술을 좋아했다. 그는 풀비아(Ful via)라는 야심만만한 여자와 결혼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그녀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너무나도 매혹적 인 여성이었다. 케사르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그는 케사르의 손님으로 자주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케사르의 초대를 받아 로마에 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케사르가  암살 당할 당시, 케사르의 가장 신임 받던 부관인 그 는 음모자 중의 한 사람이 원로원 문  앞에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 에 곧장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었다. 그래서 케사르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그는 케사르의 집으로 가서 상관이 남긴 유언장과 군자금, 그리고 몇 가지 서류들을 손에 넣었다. 이어 케사르의 부사령관 애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도시를 장악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이때 케사르의 유언장이 대중 앞에서 공개되었다. 거기에는 케사르의 조카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양자 겸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이 사실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지만 그는 케사르의 피묻은 옷을  높이 치켜들어 격정적인 연설을 해 군중들 을 흥분시켰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브루투스와 캇시우스는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집정관 사무실을 점령하고 는 자기 동료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처음에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존재를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유학 중 서둘러 귀국해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로 고치고 군대 의 환심을 사기 위해 케사르의 군사들에게 상여금을 지불하자, 그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펼쳐나가기로 했다. 이후 그는 브루투스와 캇시우스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그 여세 를 몰아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 동부 지중해의 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타르수스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하를 보내  클레오파트라 를 소환했다, 그녀가 제2차 삼두정치를 반대한 자들을 도와준 사실을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에게 최고의 치장을 하고서 자기 앞에 나타날 것을 명했다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소환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네 번째 소환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한척하며 응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그 해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때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도시 전체를 환락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모임도 만들어 매일 사치스런 파티를 열었다. 두 사람은 가끔 흠뻑  취한 상태로 노예 복장을 하고서 한밤중에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로마에서 뜻밖의 소식이  날아왔다 그것은 그 의 아내 풀비아와 남동생이 공모해 병에서 이제 막 회복된 옥타 비아누스와  일대 접전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옥타  비아가 자기 남편과 클레오파트라를  떼어놓기 위한 속셈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아내는 아테네에서 도망쳐 나와 남편과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남편과 함께 로마로 향하던 중 그녀는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때까지 만 해도  옥타비 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싸을 뜻 이 없었으므로 자진해서 화의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징표로  자기 누이 옥타비아(Octavia)를 그의 아내로 추천했다, 안토니우스도 별 이의없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았다.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회담해  삼두 정치를 경신했으며, 로마령을 ,3분해 동방의속 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옥타비아의 자상한 남편으로 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클레 오파트라는 이 긴 세월 동안 안토니우스의 아이(쌍등이 남매)를 낳아 기르며 이제나저제나 하며 연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안토니우스는 새 아내에게 싫증을 느껴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그는 아내 옥타비아를 데리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아내를 머무르게 하고 자기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갔으며,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을 취해 그곳으로 오도록 했다. 클레 오파트라는  즉시 그에게로 달려왔다. 3년 동안 원망 한 마디 없 이 기다려준 그녀의 마음을 갸륵히 여긴 그는 선뜻  그녀와 결혼 약속을 했으며, 그녀를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진 다음 키프로스의 영토를 선물해 주었다. 그는 다시 소아시아로 출정했다. 그러나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클레오파트라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조급해지자 전투에서는 패배만  거듭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옥타비아는 몸소 2,000여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로마를 출발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사자를 보내어 보급품과 군사만을 취하고 자기 아내 옥타비아를 만나는  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옥타비아는 다시 로마로 쓸쓸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 약속한 대로 그녀와 결혼식을 올려 버렸다. 그 리고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후에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동방의 지배자로서 안락한 생활을 보내며 클레오파트라에게  동방의 속주의 태반을 증여함으로써 옥타비아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게다가 그가 기원전 32년에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이흔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독촉해 그의 권한  을 빼앗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일대 결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전은 그리스 서북쪽의 악티움 만에서 이루어 졌다. 구태여 해전을 그가 선택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전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함대에 갑자기 돛을 올리고 전열 에서 빠져 달아나 버렸다. 이를 보고 당황한 안토니우스도 부하를 버려두고 그녀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예전에 미리 만들어둔 자신의 은신처로 도망친 뒤 자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을 듣게 된 안토니우스 는 자신에게 이렇게 외쳤다

"안토니우스, 왜 삶을 연장하려고 하지? 이제 운명은 말이야, 너의 삶에 의욕을 주었던 마지막 유일한 구실마저 빼앗아 가버렸단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안 에로스(Eros)에게 칼을 주며 자신을 대신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차마 주인을 죽일 수 없어 대신 자기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안토니우스도 로마인의 제복을 입은 후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그러나 자살은 성공하지 못했다. 피를 흘린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한 사람들 이 그를 데리고 재빨리 클레오파트라의 은신처로 옮겼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어 가는 안토니우스를 가슴에 안은 클레오파트 라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마시오나를 위해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플루타르크는 이 순간을 이렇게 서술해 놓았다.

"그는 가장 뛰어나고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들 가운데 한 사람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타의 로마인들을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한 사람의 로마인으로서 조금도 천하지 않게 죽어갔다."

 

 2. 14-18세기의 연애 박사들

 4. 네로 편/  /악행과 폭정의 대표적 표상  

네 로(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Nero, 37-68, 재위 54-68)  명문 귀족 출신인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혜 노바르부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 아그립피나 사이에서  37년에 태어났다. 그는 세네카에게 배우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사후에 즉위했다. 그는 세네카의 자문으로 통치 초기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점차 독재 정치를 동경해 이를  실행에 옮기면서부터 광포 해졌다. 그는 의형 브리타니쿠스, 어머니 아그립피나황후를 차례로 독살하는 잔인성을 보였으며, 국고를 낭비하고 향락에 빠져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아그립피나에 대해 무언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보다는 갓난아기 때부터 맡아 길러준 숙모 드미티아 레피다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다. 레피다는 몹시 음탕한  여자로 어린 네로에게 애무의 손길을 뻗쳤다. 그러자 네로는 한때 그녀를 그의 첫사랑 상대로 여길 정도로 깊이 빠졌었다. 나중에 질투심 많은 어머니가 그녀를 독살하면서 40살 연상의 첫사랑은 그의 곁에서 영영 떠나 버렸다 그후 그가 관심을 가졌던 여자는 그리스 여자 노예였다. 그는 그녀를 사랑해 결혼까지 하려고 했으나, 측근인 세네카의  간곡한 만류와 어머니 아그립피나의 노여움 때문에 눈물을 삼키며 그녀 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나마, 그는 어머니가 몹시 신임하는 총신이자 그녀의 연인인 파룰라스를 추방시켜  버린 탓으로 어머니와 사이가 급속히 악화 되어 버렸다. 화가 난 아그립피나는 그를 저주하며 '브리타니쿠 스야말로 정통한 제위 계승자다' 라고 하며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이에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 그는 로쿠스터에게 독약을 제조하게 명해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역으로 궁지에 몰린 어머니 아그립피나가 자신의 옛  권세를 회복할 심산으로 아들 네로를  유흑하기 시작했 다. 그는 짙게 화장을 하고  젊게 단장한 어머니의 음란한 애무와  키스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모자간의 이러한 추행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심한 야유를 받게 되자, 그는 어 머니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네로의 정부 포파에아가 큰  몫을 담당했다. 포파에아는 네로의 남색(男色)상대인 미남 귀족 오토의  아내였는데, 네로가 탐내는 것을 안  오토가 자기 아내를 선뜻 양보했던 것이다 이후 포파에아는 네로의 공공연한 정부로 지내며 네로의 마음을 휘어잡고저 온갖 배후 조정했다, 네로는 포파에아의  간곡한 당부대로 어머니를 살해하고자 안토니 아 궁전에 가 있는 어머니를 정중하게 초대했다그리고 왕가의 별장에서 최고로 성대한 만찬회를 그녀에게 베풀어주었다. 그리 고는 지붕 달린 배에 태워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그 배 밑에는 톱니바퀴 장치가 되어 있어 배가 항해할 때 배 밑에 커다란 구멍 이 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그립피나는 흔란한 와중에 잽 싸게 물로 뛰어들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살해할 책임을 맡은 네로의 심복 아니케투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 녀의 침실까지 쳐들어가 그녀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  놓고 말았다. 네로의 악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64년에 로마시의 태반을 불태워 놓고, 6일 동안이나 불타는 로마  시를 궁전의 옥상에서 내려다 보면서, 트로이의 대화(大火)를 회상하며 시를  읖기도 했다. 게다가 방화 혐의를 크리스트교도들에게 전부 전가시켜, 그들을 잡아다가 소위 '인간 횃불'로서 불태워  죽이는 혹독 한 박해를 가했다. 그의 이러한 폭정은 민중의 반감을 사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그는 원로원에서 추방되어 68년에 자살 하고 말았다. 그에 대한 얘기는 생케비치의 <쿠오바디스>에 흥 미 깊게 그려져 있다.

 

5. 연산군 편 /광란의 몸짓으로 쾌락을 추구했던 남자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은 조선왕조 제 9대왕인  성종의 장남으로 1476년에 태어났다. 그는 1483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9419  때 즉위했다. 즉위 후 국방과 내 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쌓았으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  시절을 불우하고도 우울하게 지낸 탓에 차츰  정신이상자가 되어  향락과 횡포를  일삼으며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1494년과 1504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각각 일으켜 사림파 를  대량으로 숙청 또는 학살했다 또한 그는 성균관과 사간원의 기능을 중지케 하고 경연(經筵) 을 폐지시켜 버리고 대제학까지도 없애버림으로써 아무도 그에게 직언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원각사에 장악원을 두어 전국의 미녀(美女)들을 모아서 기녀(技女)를 양성했다. 또한 그는 숙원 장녹수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치마자락에 질질 끌려 다닌 뒤로는 더욱 정무를 소홀히 하고 극단의 유희와 향락에만 빠져 지냈다. 1503년 봄에는 장원서에서 사람들을 징발해 기이한 꽃을 구해서 금원(禁園)에 심게 했으며, 그 이듬해  7월에는 성균관이 궁궐 의 담장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유생들을 대평관으로 옮기게 한 후  성균관을 유홍의 장소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폭정을 비난한 투서가 언문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중국 문서를 번역한 것 이외의 모든 '언문구결(諺文口訣)의 책을 거두어 불태워 버렸다. 또한 150411월에 그는 자기만의 사냥터를 위해서 한양주변, 즉 한영 동쪽 일대의 70, 북쪽 일대의 65  그리고 남쪽 일대의 10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해당 구역에서 민가를 모두 철거시켰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 백성의 통행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 해 12월에는 흥청악의 정원은 300운평악의 정원은 700명으로 정해서 도합  1,000명의 기악을 궁중 에 두고 연회의 흥을 돋구게 했다. 뒤이어 원각사를  폐쇄해 승려 들을 내쫓아 버리고 이를 연방원이라 해 기생과 악수(樂手)들이 기거하도록 조치했다. 1505년 봄에는 장원서 및 8도에 명을 내려 왜철쭉, 유자, 치자, 석류, 동백장미 등을 진상하도록 해 궁귈의  정원을 호화롭게 꾸몄다. 그리고 연회에는 금은으로 된 화려한 장식을 배열하도록 하고, 사대부와 그의 부인들을 수백명씩 초대 해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중 부인들의 가슴에다는 '누구의 처'라고 써 붙이게 해 식별이 용이하게 했다. 그리고  15056월에는 이계동을 전라도에임숭재를 경상도, 충청도에 채홍 준사(採紅駿使)로 각각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 오도록 특명을  내렸으며, 궁중에다는 여러 개의 방실(房室) 을 마련해서 여자를 희롱하는 장소로 삼았고소방(小房)을 만들 게 해 왕이 밖에 놀러 나갈 때 늘 그의 곁에 따라다니게 했으며 길 가다가 별안간 욕정이  솟구치면 그 안으로 들어가 온갖 희롱 을 즐겼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집에서 성악을 익힌 뛰어난 미녀들 을 모조리  적발해 궁중에 끌어들인 다음 속흥(續紅)이라 하고,   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을  청녀(靑女)라 해 궁중에 불러들여 간택한 다음 그녀들을 모두 자신만의  성적 노리갯감으로 삼았으며, 뒤이어  미녀를 모집해 오는 채청녀사(採靑女使)와 좋은 매와 개 를 모집해 오는 채응견사(採應犬使)8도에 파견해 지속적으로 새 미녀들을 교대로 품에 안았다. 그런데도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지, 광질(狂疾)까지생겨 한밤중에는 소리를 지르며, 후원으로 느닷없이 달려가기도 했으며 때로는 푸닥거리를 해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고, 때로는 직접 신들린 것 같은 짓을 해 보이기도 했으며, 손수 노래를 짓거나 춤을 추기도 하면서 광란의 몸짓을 해댔다. 그는 이런 식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  체포되어, ()으로 강등되어 강화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독살 당해 죽었다. 이때가  1506년 그의 나이 31 세 때였다.

 6. 헨리 8세 편  / 왕비를 여섯이나 갈아치운 사나이

헨리 8(Henry 8, 1491-1547, 재위 1509-1547)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1491년에 태어났다. 그의 형 아더가 일찍 죽었으므로, 부친의 사후에  그가 헨리 8세로 즉위했다. 그후 그는 과부가 된 형수 캐더린과 결흔했다. 청년 시절에 그는 에라스무스, 토머스 모어와 교제해 학식을 넓혔으며, 추기경 올지를 기용 하고부터  국제 관계에 휘말려 에스파니아  왕 페르난도 5세를 도와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캐더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은 에스파니아의 왕 녀로서, 헨리 7세의 맏아들 아더와 약혼했으나, 그가 요사(夭死) 하자, 둘째 아들 헨리와 약혼했다가, 그가 즉위하자 결흔했다. 당시 카톨릭에서는 형수와  시동생의 결혼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니아와 지속적으로 동맹을 유지하고 싶었던 헨리 7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특면장까지 발부받아 억지로 정략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그후 캐더린은 자식을 여섯이나 낳았으나, 모두 사산과 유산으로 잃어 버렸다. 남은 자식은 유일하게 메리 한 명뿐이었다. 이에 크게 낙담한 헨리 8세는 괴로워했다. 그것은 자신이 형수와  결혼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왕비의 시녀 앤 블린에게 끌리게 되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를 가진 앤 블린은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어느덧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된 국왕은 울지 대법관에게 자신의 이혼 신청을 받아줄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애매한 태도 때문에 지지부진 시간만 끌 뿐 진척되지  않았다. 캐더린 왕비는 에스파니아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숙모였기 때문에, 교황은  헨리 8세의 이혼 신청을 선뜻 받아들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앤  블린이 임신하게 되었다. 이에 더욱 조급해진  국왕은 서둘러 앤 블린과 결흔해 버렸다. 아직  캐 더린과 정식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 결혼이었기 때문 에 이는 누가 보나 중혼인 셈이었다 이 문제로 처음엔 '신앙의 보호자'로 불리던 국왕과 교황과의 결렬은 결정적인 것이 되어, 1534년 수장령을 발해 국왕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로마 교회의 권리와 수입을 단절하고, 1536년과 1539년에는 수도원 해산을  단행해 버렸다. 이로써 국왕과 로마 교회는 극심한 대립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급기야 종교개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앤 블린은 국왕이 학수고대하던 왕자 대신에  공주(엘리자베드) 를 분만해 버렸다. 이는 국왕을 크게 실망시켰다. 게다가 그녀의 신경질과 잔소리는 국왕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했다. 그나마 그 녀가 두 번째 아이마저 유산해  버렸다. 그러자, 국왕은 그녀를 아 예 외면해  버리고 다른 여인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선택된  여인이 공교롭게도 왕비의 시녀였다. 국왕의  새 애인인 제인 시모어에게는 형제가 많았다 이  점이 특히 국왕 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이 여인이야말로 왕자를 낳아줄 확률이 가장 높은 여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처녀와 결혼 하기 위해 앤 블린에게 불륜죄와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시켜 버렸다, 국왕은 앤 블린을 처형한 지 열흘이 지난 뒤인 1536529 일에 제인 시모어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제4왕비 크리브 공()의 딸 앤, 5왕비 캐더린 하우어드, 6왕비 캐더린 파아 를 연이어 맞아들였으며, 역시 비슷비슷한 방법으로 그녀들과 이혼 또는 그녀들을 처형시켜 버렸다. 이렇듯 전형적인 절대주의 군주로서 절대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던 그도 앤 블린이 처형당한  11년 후인 1547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7. 앙리 2세 편  /왕비보다는 애인을 더 사랑했던 남자

앙리 2(Henri 2, 1519-1559, 재위 1547-1559)는 프랑스와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의 불의의 사망으로 인해 졸지에 왕태자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1547년 부친인 프랑스와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그후 그는 이탈리아  전쟁을 계속했으며 독일 황제 카알 5세와 패권을 다투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볼로뉴, 칼레를 탈회하고 빼앗겼던 프랑스의 영토를 회복 했다. 안으로는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산업을 장려, 발달시켰다. 그러나국내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했으며, 정치의 주도권을 총신인 몽모랑시, 기즈 공() 등에게 맡겨 왕권을 약화시켰다. 앙리 2세는 피렌체의 대부호 메디시스가() 13살 난 딸 카트린을 신부로  맞아들였으나, 자기보다 20살이나연상인 디아느 드 포와치에라는 여인에게 푹 빠져,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디아느는 장미꽃처럼 화사한 미모와 백옥 같은 피부를 간직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겨울철에도 냉수욕을 게을리 하지 않고 승마를 열심히 해 멋진 몸매와  고운 피부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앙리 2세는 이러한 그녀에게 르와르 호반의 슈농스 성을 비롯해 많은 영지를 선물해 주었으며, 국왕 즉위식 때도 디아느의 이니셜과 문장을 수놓게 한 의복을 입고 보란듯이 식장에 나타나  귀빈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때문에 왕비 카트린의 마 음은 늘 어둡고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1559년에 프랑스는 스페인과 강화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자 프랑스 전역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횝싸였으며, 궁전 앞에서는 성대한 기마시합이 열렸다. 이 연무회에서 앙리2세 는 몽고메리 백작과 기마시합을  했는데, 불행히도 시합 도중에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몽고메리 백작의 창이 앙리 3세의 투구를 꿰뚫고 눈을 찔러 버렸던 것이다. 이에 뇌까지 상처를 입은 왕은 병상에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이때 왕비 카트린은 밤새워 정성껏 간호하면서 왕이 회복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왕의 애인인 디아느드 포와치에가 접근하는 것을 엄중히 금했다. 왕은 왕비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점점 더 깊어져 신음하다가, 1559  710일에 왕비의 손에 어린  아들을 남기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왕비 카트린은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성바돌로매 대학살을 자행해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으며, 그 위에 자기만의 견고한 권위의 터를 구축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세계사상 가장 지독한 학살자요 악녀로 불려지게 되었다.

 

8. 히데요시 편 /부하들의 아내까지도 탐한 난봉꾼

토요토미 히 데요시(豊臣秀吉, 1536-15열년)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무장으로 입신한 후, 1566년 노부나가의 미노(美濃) 공략 때 전초기지 축성에 재능을 보인  이래 몇 차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1573년에 오오미(近江) 성주가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에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츄우고쿠 지방의 모오리(毛利)를 공략하다 가 노부나가가 죽자 그는 모오리씨와 화해하고 회군했다. 그후  그는 오다씨의 무장 아케치 미츠히데와 시바다 카쓰이에를 쳐서 살해 또는  자살시킨 다음 정권을 잡았다. 그는  오오사카 성을 쌓고 전열을 정비한 다음, 1584년에 토쿠가와 힌에야스를 굴복시켰으며, 그 이듬해에는  텐노오를 보좌하는 최고직인 칸파쿠에 임명되어 토요토미라 칭했다. 이후  여러 영주와 호족들을 굴복시켜 1590년에는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 1592년 그는 조선에 출병시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규우슈우의 나고야 전쟁터에 머물면서, 툭 하면 부하 영주들에게 아내를 진중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엉뚱한 명령에 영주들은 기가 막혔지만, 지엄한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 다, 어떤 영주는 히데요시가 자기 아내를 범하게 되면, 한 여자를 군신이 공유하는  것이 되어 쌍방간에 돈독한 유대관계가 맺어져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고 여겨 기꺼이 자기 아내를 바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어떤 영주들은 자기 아내의 얼굴을 인두로 지져 추하게 만들어 보내거나, 또는 다른 여자를 아내 대신 보내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의 명령을 받들어 자기 아내를 진중으로 보냈다. 남달리 지배욕과 우월감이 강했으며 난봉꾼이었던 히데요시는 이런 식으로 부하의  아내들을 마치 자기 소유물이나 되는 듯이 건드렸으며, 갖은 횡포를 일삼았다. 이렇듯 절대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던 독재자는 조선과의 정유왜란을 벌이는 중인 15켜년에 터세로 후시미에서 숨을 거뒀다.

 

9. 빌힐름 1세 편 /자유로운 성 해방국가를 만든 인물

프러시아의 빌헬름 1(Friedrich Wilhelm 1,  1688-1740, 재위 17131740)1713년에 즉위한 후 통치 조직을 정비해 관료제를 확립하고, 부국강병 정책으로써 강력한 상비군 양성에 힘 을 기울였다. 그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소모되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담한 인구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60세 이하의 남자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으며, 모든  남자는 두 명의 아내를 두라는 포고령을 내렸으며, 전 국민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프로이센 정신의 확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와 더불어 그는 문화 방면에도  힘을 기울여 의과대학과 기타 문화시강력한 군대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프로이센의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Friedrich 2,  1712-17또년, 재위 1740-1786)도 꾸준히 영토 확장을 기도했으며, 도덕법전과  형법전을 만들어 애욕의 범죄에 대한 모든 규제 와 처벌 규정을 없애  버렸다. 그는 축첩, 근친상간, 강간, 처녀 능욕  및 겁탈 등을 형벌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던 것이다. 또한 간음죄를 짓고서 교회에 가서 참회를 하거나 고해성사를 하는 것도 금지시켰으며온갖 음행, 강간, 간통 등에 대해 비난하는 행위도 일체 금지시켰다. 반면에 중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출산 장려 정책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8 세기의 프러시아는 어떠한 종교적, 형사적 제약이나 제재도 받지 않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성 해방 국가가 되었다. 이후 프러시아 는 강간, 간통, 겁탈, 외도창녀, 낙태, 성병 등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게 되었고, 오직 동물적인 성 행위와 임신과 출산만이 존대 받는 나라, 남자는 종마가 되어 여자에게 되도록 많이 임신시켜 인구의 수를 늘려 주면 되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엉뚱한 정책은 의외에도 프러시아를 근대유럽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부강하고 활기가 넘쳐 흐르는 국가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 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2세는 농민 보호 정책,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서  계몽 전제 군주의 전형적 존재가 되었으며, 프로이센을 유럽에 있어서의 강국으로서 격상시키는 데 일익을 담 당했다.

 

10. 조지 크레란드 편 포르노 소설을 쓴 탓에 연금 받게 된 작가

조지 크레란드(1707-17렌년)는 영국의 엄격한 군인 가문의 아들로 1707년에 태어났다. 그는  명문학교인 웨스트민스터에 들어 가 수업을 받은 후 터키령인 이즈밀의 영사가 되어 근무했다. 그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렇다할 직업을 잡지 못해  한동안 생활고에 시달려 지내야 했다. 이 무렵 한 출판사로부터 그에게 포르노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르노 소설 <화니힐>을 써서  1748년에 발표 했는데, 이 소설은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엄청난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 소설은 외설 시비에 휘말려 고발되었으며 이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을 맡은 재판관 죠잘 크란빌 은 의외에도 아주 관대한 판결을 그에게 내렸다. "작가인 조지 크레란드가 다시  빈곤해져 이런 음란한 소설을 쓰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0파운드의 종신연금을 그에게 지불하도록  조치하라." 이후 그는 프랑스의 한 시골에 들어가 종신연금으로 생확하면서 자연인으로서  조용히 집필 생활을 하다가  83세의 나이로 세상 을 떠났다.

1968년에 미국에서도 <화니힐>의 출간을  놓고 외설 시비가 일어났으나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인간신체의 어느 부분도 외설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후 이 책 의 출판 금지를 해제한다."

 

11. 쟝 자크 루소 편  /쾌락이야말로 자연이라고 외친 작가

쟝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직공의  아들로 1712년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지 3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양자로 입양되어조금만 잘못해도 엄벌에 처해 매를 때리는 교회의 가정부에 의해 양육되어졌다. 이 무렵 그는 가정부에게 하도 자주 맞아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쾌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나마 그가 11세 때 아버지는 사소한 사 건을 일으킨 후 가출해 버렸다. 15세 때 그는 매를  때려 고통을 주는 가정부를 머리에 떠올리며 몰래 숨어서 자위행위를 즐기기 도 했다. 16세 때부터 그는 집을 나와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20세 때 35세 연상의 바랑스 부인한테 몸을 의탁해 지냈으며, 얼 마 후 그녀의 애인이 되어 그녀의 정부로 지내면서 그녀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보호를 받았다. 이때 그는 근친상간의 비애감으로 괴로워했다. 이 무렵 그는 바랑스 부인의 배려 아래 샹베르 근교의 별장 샤르메트에서 살면서 공부할 것을 결심하고서 수년간의 면학 끝에 마침내 파리로 떠나 디드로 등의 문학가들과 사귀면서 문학과 음악에 손대게 되었으며, 샹류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후 그는 당시 남편과 별거 중인 45세의 라르나쥬라는 유부녀를 보호 자로 삼고 깊은 성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아주 정열적인  색녀였다. 하지만 그의 방랑생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한때 베네치아의  창녀들과 어울렸으며, 귀가 길에 두 다리가 떨릴 정도로 그녀들과 문란한 성행위를 즐겼다 1745년에 그는  하숙집 하녀인 텔레즈 르 바스르와 친해져,   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으나, 글을 겨우 읽고 쓰는 정도의 평범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5명의 자녀를 두었다그러나 그 자식들을 키울 생활력이 없어 모두 고아 원에 보내 버렸다.   때문에 그는 나중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 주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이는 그 자신에게도 심한 후회의 씨앗 이 되어 버렸다. 1750년에 <학문예술론>을 발표한 이래 달리 직업을 구하지 않고 오직 사보(寫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하면서 창작 활동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계속 대작을 완성했는데, 1761년에는 알프스  의 산기슭 레만 호수 일대를 배경으로 해 귀족의 딸 즐리와 평민 인 가정 교사 생 프르와의  열렬하고 청신한 사랑을 그린 <신엘 로이즈>, 1762년에는 소설 형식의 교육론인 <에밀>을 각각 출 간해  문명(文明)을 크게 떨쳤다. 그리고 1772년에는 그의 탄생에서부터 1765년까지의 자전적 세계를 그린 <고백>을 탈고해 목가 적인 어린 시절과박해의 망상에 사로잡혀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지냈던 청소년 시절을 아주 적나라하고도 비통하게 서술해  이후 고백문학의 활로를 활짝 열어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이런 말들을 남겼다.

"과실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 하지 말라." "섹스는 쾌락 그 자체이며, 그 쾌락이야말로 자연이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3. 19세기의 연애 박사들  

12. 조지 4세 편 /온갖 엽색행각을 펼친 호색가  

조지 3(Geoge 3, 1738-1820, 재위 1760-1820)60여 년간 재위하면서 카톨릭 해방에 반대해 대()프랑스 강경책을 취하는 등 시민적 질서 형성의 흔란기에 일관해 토리 반동의 주동자로서 활약했으며, 영국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810년 이후, 눈이 나빠지고 정신이상에 시달리며 폐인처럼 지냈다. 한편 1811년에 섭정이 된 웨일즈 공()1820년 부왕이 죽자 즉위해 조지 4(George 4, 1762-1830, 재위 1820-1830 )  칭해졌다. 그는 정치적 재능이 없고 부왕처럼 당에 일관하는 정치적 소신도 없는 인물이었다. 조지 4세는 미남자였으나 청년 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는 24세 때 히츠하버트(1744-1837)라는 6세 연상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히츠하버트는 존 즈미테경의 손녀요 토마스 히츠 하버트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카톨릭 교도라는 이유로 그의 결혼은  절식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1795년에 그는 부왕의 강권으로, 오스트리아의 칼스 윌리 앙 페르디난도 공()과 조지 3세의 여동생 오구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캐롤라인(1768-1821)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츠하버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그는 결혼식장에서 술에 만취해 추태를 부렸다, 그에게 정이 떨어진 왕비 캐롤라인 은 큰딸 샤롯테를 낳자마자 별거 생활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그는 얼씨구나 하고서 히츠하버트와 다시 합쳐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이후 그는 호색가로서 온갖  엽색(獵色)행각을 펼쳤다. 궁정의 여자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침실로 불러들여 마음껏 밤의 향락의 누렸다. 그는 여자와 한번 동침했다 하면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반드시 잘라 수집하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삼았다. 이에 화가 난 왕비 케롤라인도 비밀리에 정부들을 만들어 교대로  침실에 끌어들여 쾌감을 맛보았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출신의 시종 베르가미를 특히 총애해 그와 함께 유럽 각지를 여행 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왕비와 이혼하고 연인인 히츠하버트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했던 조지  4세는 은밀히 스파이를 왕비 가까이에 두어 불륜에 관한 증거를 수집하게 했으며, 유럽 유행지 의 여러 호텔과 피서지 호텔의 급사들과 하녀들을 배 잔뜩 데려 다가 증인으로 내세워 정식으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현명한 왕비는 그 어디에도 자신의 불륜에 관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821 년에 54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나르시스트요 호색가인 그도 재위 10년만인 183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성들을 단지 성적 기갈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활용한 남자

나폴레옹 1(Bonaparte Napolion, 17691821, 재위 1804 1814)는 코르시카에서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1769년에 태어났다 사관학교 졸업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한때 코르시카로 돌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혁명전쟁에 참가해 툴롱 항() 탈환의 포병 지휘관이 되었으며, 1793년에는 이탈리아' 전선의 여단장이  되었다. 테르미도르 9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로베스 피에르파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운 좋게 석방되었다. 그후 1795 10월에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하는 공으로 다시 중용되었다 17963월에 그는 자기보다  6살 연상인,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제핀(1763-1814)과 결흔했다. 그녀는 1779년 비콩테 알 렉산드레아 보아르네 자작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는데, 나폴레옹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해 저돌적으로 프로포즈를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군의 사령관이 되어 1796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화약을 체결해 명성을 얻었으며, 1798년에 이집트 원정에 나서 카이로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러나, 총재 정부가 위기에 몰리자 단신으로 귀국해 1799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되었다. 그후  18045월에는 황제가 되어 그 해 12월에 대관식을 가졌다. 이후 그는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손에  넣고 음욕을 채웠다, 그의 침실 상대로는 궁정 여자, 연예인, 창녀, 미망인, 유부녀, 여배우, 서커스  곡예사 등등 그 폭이 다양했다 그는 애첩도 여러 명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총애한 애첩으로는 카로리느, 폴린, 마리아 와레스카, 마드모아젤 죠르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들 여성들과 깊은 애욕에 빠져 정치를 소흘히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들 여성들을 단지 자신의 성적 기 갈을 해소하는 방편으로만 활용할 뿐이었다. 그는 유럽의 여러 전쟁에서 승리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누르고 유럽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1806년에 대륙 봉쇄령을 발포해 영국을 위협했다. 1809년에는 바람기가 많은 조제핀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 1세의 딸이자 마리 앙트와 네트의 조카인 마리 루이스(당시  19)와 정략 결혼을 했다. 결혼식  전날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를 마중 나가서는 도중에 첫날밤을  치르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18125월에 그는  대륙 봉쇄령에 복종하지 않는 러시아를 공 격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해 놓고도 러시아의 초토작전과 강추위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원정군의 대부분 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틈을 타고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영국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파리를 함락해 버렸으며, 그는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한때 유배지에서 탈출해 파리 입성한 뒤 황제에 올랐으나 워털루 싸움에서 패전해 이번에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했다. 그 곳에서 그는 재기할 날을 꿈꾸며 가슴 속의 불타는 욕망을 다독거렸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한때 장 관 부인과 밀통해 사생아를 낳는 등 정열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지내다가, 182155일에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14. 루드비히 폰 베에토벤 편 /연인들에게는 반드시 곡을 지어 바쳤던 음악가

루드비히 폰 베에토벤(Ludwig von Beethoven, 1770-18n)은 독일의 본에서 1770년에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대부터 본의 궁전에서 음악가로 있다가 빈에서 온 귀족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 을 받아 빈에 유학해 하이든에게 사사했다. 처음에는 열정적이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닌 피아니스트로서 빈의 음악계와 사교계에서 활약했으나, 30세 무렵부터 차츰 귀가 멀게 되어, 40세 이후부터는 사교계를 떠나, 되도록 사람을 피해 창작의 세계에만 몰두해 지냈다. 더우기 그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프랑스 혁명 이후 몰락해 버려, 만년에는 매우 쓸쓸하고 고생스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온갖  병고와 가난과 실연과 벗의 배신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걸으며 불멸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나몇몇 여인들과 사랑에 빠진적 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여인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귀족의 딸이거나 부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강렬히 사로잡았던  여인들로는 줄리에타 귀차르디, 테레제 부룬스빅, 그리고 안토니 폰 비르켄슈톡이었다, 그는 줄리에타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작품 272(월광> , 테레제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24  작품 78(테레제를 위해) 를 각각 애정의 열매로 바쳤다. 그리고 안토니에게는 작품 83<세 개의 가곡>과 작품 85의 피아노 편곡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을 헌정했다. 그는 특히 안토니를 지극히 사랑해, 그녀만을 위해 작곡한 <연인에게>를 헌정했으며, 그녀의 딸 막시밀리아네 에게는 B플랫 장조 피아노 트리오를 헌정했다. 그가 안토니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41세 때인 18105월이었다. 이때 안토니의 나이는 31세였다. 당시 그녀는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상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결혼해  네 아이를 둔 유부녀였다. 그녀는 친정 아버지의 장례식때 빈을 방문했다가, 시누이 베 티나와 함께 베에토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편치를 않았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 낯선 도시의 환경, 첫 아이의 죽음 등이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베에토벤은 이러한 안토니를 위로해주고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 는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가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다정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에게는 우정이 생겨났고, 이는  급기야 애정으로, 그 애정은 다시 사랑으로 꽃피워갔다. 그러나, 지극히 도덕적이었던 그는 더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는 안토니의 남편 프란츠와도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배반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기로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그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 이 담긴 편지를 썼다. " ---나는당신의 두팔속에 날아가참으로당신과함께 한 집에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에 게서 떠나 먼 곳으로 방랑하기로 결심했소 ---오오신이시여. 어째서 이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 있어야만 합니 까? ---그대의 사랑은  모든 남자 중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함과 동시에 가장 불행하게 만들고 있소." 이후, 그는 낡은 다락방의  고독한 세계에 틀어박혀 힘든 작곡 생활에만 몰입했다. 그는 병고와 운명과 정면으로 대결해교향곡 제5<운명>,6<전원>,9<합창>등을 비롯한 뛰어 난 피아노곡과 관현악곡과 실내악들을  창작했다. 특히, 그의 9곡 의 교향곡과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그의 소원대로 가난하고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구원의 길을 제공해주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하이든과 모짜르트에 의해 거의 완성된 고전주의 음악 형식을 결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5. 메테르니히 편 /창녀들을 정치 스파이로 활용한 정치가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  오스트리아의 코블렌쯔  에서 1773년에  출생했다. 그는 177323세 때 카우니쯔 재상의 손녀와 결혼했으며,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용모, 그리고 변론술을 무기로 삼아 약진적인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나폴레옹  지배 때 드레스덴, 베를린, 파리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갔으며, 그의 보고 는 오스트리아를 반나폴레옹적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디. 1809년에 수상이 된 그는 황녀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의 황후로 들여보내고, 1813년에 대 프랑스 동맹을 체결해 마침내 나폴레옹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빈 회의에 출석해 사실상 회의를 주도하며 유럽 외교계의 일인자로 군림했다. 빈 회의에는 90개국의  왕국, 53개의 공국 대표가 참석했는데, 이들의 생각과 정보를 탐지하기 위해, 메테르니히는 빈의  창녀들을 급히 모아 이들을 매수한 다음 정치 스파이로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창녀들의 윤락 행위를 묵인해주고 장래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그녀들에게 내걸어 각국  대표들과 외교관들로부터 정보를  빼오도록 강요했다. 창녀들은 의도적으로 주요 인물들에게 접근 해 데이트 및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정보를  수집한 다음 이를 경 찰장관 요제프 제드르니키에게 보고했고, 경찰장관은  이를 다시 메테르니히에게 즉각  보고했다. 그러면, 메테르니히는 수집된 여러 정보들을  참고해 사태를 수습해 가면서, 목적하는  바를 착실 히 진척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다시 왕정이  복고되면서 루이 18세가 즉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메테르니히에게도 미모의 정부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사강 공작부인이었는데, 메테르니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로 달려가 몇 시간  동안 밀애를 즐긴 후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사강 공작부인은 이 사실을 젊은 남자 애인에게  고백해 버렸다. 그러자, 부인의 젊은 애인은 자기와 절친한 창녀에게 그 사실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창녀는 명령받은 대로 경찰장관에게 즉각 보고했고, 이는 다시 메테르니히 본인에게 살 붙여져 보고되었다.

 

 16. 스탕달 편 /실연을 이상적인 허구 세계로형상화한소설가

스탕달(Stendhal, 1783-1842)은 남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수도 그레노블에서  고등법원에 근무하는 변호사의 아들로 1783년에 태어났다. 그년 유년시절에  외할아버지, 큰이모, 외숙부 등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8세 때 어머니를 여읜 후 내성적이 되어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때 수학을 잘한 덕택에 추천을 받아 이공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파리로 올라갔으나, 인생 방향을 바꿔 당시 윽군 차관으로 있던 친척 피엘 다류에게 부탁 해 육군 장교가 되었다. 그후 그는 나폴레옹 원정군으로 밀라노 에 파견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그러나  그는 곧 사직하고 파리로 상경해 유물론자인 엘베시위스와 관념론자인 카바니스와 토라시의 저서에 탐닉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극작가가 되려고 코메디 프랑세에즈에 출입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습작을 시도했다. 이 무렵 그는 고향의 미소녀 빅토리느 무니에를 사랑해 열정을 불살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실연 당하고서 한때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이번에는 아데르 루비펠이라는 미모의 여인을 사랑해 가 슴을 졸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연을 당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걸어다니는 망루'라고 놀 림받을 정도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에다 게다리, 큰 코에 붉은 얼굴, 굵고 짧은  , 군살 붙은 등근 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자기 모습을 보고 한심해 '이탈리아의 푸줏간'이라고 비하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사랑 과 열정이 이토록 연이어 열매를  맺지 못하자 다른 작전을 구사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몸매가 근사하고 아름다운 연극배우  메라 니 기르베르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다음 그녀의 지방 순회  공연장마다 따라다니며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를 품에 넣게 되었고, 이내 마르세이유에서 그녀 와 동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여인을 정복하고 나니 너무나도 허망했다그녀는 무대 위에서와는 달리 너무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에 싫증을  느낀 그는 그녀와 헤어져 다시 육군성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경리관, 사정관으로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활약했으며이내 참사원 서기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돈 을 물 쓰듯 하며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생활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몇 년만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문학 방탕아가 되어 프랑스를 떠나  밀라노에 가서 낭만주의자들과 사귀며 지냈다  이 무렵 그는 안젤 라 피에토 아그르아와의  관능적인 연애에 빠져 지냈으나, 이내  그녀에게 배반당했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찾아 왔다. 당대 사교계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던 명문가의 부인인 메 틸도 덴보우스키가 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정열적인 애정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마치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쏙 빼닮은 그런 절세 미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인생 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이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했으며그 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보답 받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끝내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권총 자살을 기도할 만큼 깊은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실의에 잠겨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22년에 연애를 정열적 연애, 취미 연애, 육체적 연애, 허영 연애로 나누어 연애 심리의 발전 7단계를 기술한 <연애론>을 집필했으며, 1827년에는 성 불구 자인 청년 귀족 옥타브의 특수한 심리를 분석한 소설 <아르망  >를 발표했고, 이어 1830년에는 쥘리앙의 이야기를 통해 왕정 복고하의 프랑스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묘사한  소설 <적과 흑>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그의 사랑에의 실연은 이상적인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게 했으며, 이는 곧 위대한 문학으로의 돌파구 를 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17. 나폴레옹 3세 편/ 애인의 재산을 활용해 대통령이 된 사나이

나폴레옹 3(Napolion 3, 1808-1873,재위 1852-1870)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 들로 1808년에 태어났다, 그는  1제정(帝政) 몰락 후, 한때 암의 요새에 유폐되어 있다가 풀려나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유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호색가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정부를 두고 자신의 정열과  정욕을 불살랐다. 미망인 리 백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 우제니 등 도 그의 정부였다. 이들 중 리 백작 부인과 그녀의 하인은 임신  까지 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보나파르트가()의 제정 부흥을 위해 여러  번 반란을 계획하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종신금고형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그는 복역 중에 과감히 탈출을 시도해 영국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런던에 머물면서 여배우 엘리자베드 하워드를 정부로 두고 지냈다. 18482월 혁명 후,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명성을 이용하고 또 그의 정부인 엘리자베드 하워드의 재산을 적절히 활용해 대통령 에 당선되었다. 그 뒤 1851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제정 해 10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이어 국민 투표를 실시해 제위에 올라 나폴레옹 3세라 칭하고 제2제정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리고 그는 국내적으로는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사이를 능숙하게 조정했으며,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크림 전쟁(1853-1856)에 참전했으며  인도차이나에도 침입해 성과를 거두었다. 황제에 어울리는  왕비를 골라야 한다는 대신들과 고문관들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1836년부터 사귀어 온 우제니를 결혼  상대로 선택했다, 이에 친척들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외무대신은 사표까지 써가며 강력히 항의했다, 예전에 막대한 선거 자금을 대준 바 있는 여배우 엘리자베드 하워드도 극구  반대했다 그녀는 우제니 대신 자신을 왕비로 선택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예전에 신세졌던 것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과 성()을 주어 간신히 단념시켰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자유 결혼을 제도화하고 법까지 고쳐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1856  3월에 우제니와 사귄 지 20년만에 그 녀와 노틀담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우제니(1826-1920)는 스페인계의  가난한 귀족 출신인 돈 시 프리아 구자망의 딸로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는데, 그녀는 미모와 풍만한 젖가슴과 섹시한 몸매를 갖춘 매우 매력적인 아가씨로  성장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유럽 각지의 온 천지를 년중 여행 하면서 마땅한 신랑감을 찾고 있었는데, 이 무렵 나폴레옹 3세를 만나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숙한 여자는 아니었다. 행실이 단정치 못한 그녀는 자주 남자를 갈아 치웠으며, 소설가 메리메, 스탕달 등과도 염문을 뿌린 경력이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일단 왕비가 된  뒤부터는 거듭난 듯이 아주 정숙한 숙녀가 되어 정조를 지켰으며남편의 어떠한 외도에도 참고  견디며 우아한 왕비로서의 체통을 끝까지 유지했다. 이탈리아에서 친선사절단으로 파견된 아름다운 처녀 카스테리오네와 밀 애를 즐기는 남편을 그녀는 끝까지 눈감아 주었다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라도 하듯이 성적 순결함을 표방하여, 궁중에 누드화를 거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남편이 사들인 앵그르의 <터키탕>도 그녀가 없애 버렸으며, 오페라좌  앞에 세워져 있던 가르보의 누드 조각품에는 무화과 잎으로 그 앞을  가리게 했다, 그녀의 극성 때문에  마네의 <풀밭 위의 오찬>도 살 롱에서 철거당해야 했고, 누드화는 올림푸스 신화 정도가 겨우 허용되었다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술책에 속아 18708월 프로이센과 전쟁(세단 전쟁)을 일으켰다가 스당 전투에서 패해, 그 해 9 월에 왕비 우제니와 함께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1873년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18. 카밀로 벤조 카부르 편  /  조카의 미모를 활용해 이탈리아를 통일시킨 남자

카밀로 벤조 카부르(Camille Benso Cavour, 1810-1861)는 피에 몬테의 명문가에서 1810년에 태어났다. 그는 토리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군대생활을 하다가 유럽으로  유학해 그 곳의 입헌 정치에 크게 감화했다. 귀국 후 그는 온건한 입헌주의를 창도함과 동시에 농지개혁과 영국식 산업 개혁의 도입에도 정력을 쏟았다. 그는 농상상, 해상, 재무상을 역임하면서 교육 제도의 개선, 우편제도 개선, 철도의 개설 등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국제적 위신을 높이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1852년에 아젤리오가 퇴진한 후 수상에 취임한 그는 외교 문제 에 몰두했다그는 우선 크림 전쟁에 개입해 1856년의 파리 조약 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1859년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긴박해지자 비상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어떻게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내 꿈에도 그리던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피에 몬테가()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 의 소유자인 조카 카스테리오네를 파리로 급파해 나폴레옹 3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전략이었다. 그는 조카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나폴레옹 3세를 농락해 반드시 원군 을 얻어내도록 해라," 처음에는 백부의 이러한 엉뚱한 주문에 반감을 가졌지만, 결국 그녀는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밀려 마지못해 토리노를 출발했다. 명목상 친선사절단으로서 파리에 도착한 카스테리오네는 즉시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그녀는 궁전 연회에 참석할 때 입을 의상을 독특하게 디자인해 황제의 눈에 띄게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녀는 수많은 작은 하트 모양을 붉게 수놓은 하얀 비단 망토를 입고 연회에 참석해 황제는 물론 귀빈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호색한이었던 나폴레옹  3세는 그녀의 작전대로 쉽게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몰래 데이트 를  거듭하면서 뜨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황제의 마음을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아주 자연스럽게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이탈리아의 수상 카부르는 보쥬 산맥에 있는  프 롱피엘에서 나폴레옹 3세와 18587월 상순에 비밀리에 만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밀약을 맺었으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고, 1860년에 이탈리아는 프랑스가 지원해 준 12만 대군과 연합군을 조직해 오스트리아를 격파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이탈리아는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파르마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카부르는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나폴리의 정복을 교묘히 조작하고, 니스아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대신 회유 해베네치아와 로마를 제외한 중부와 남부의 이탈리아를 통일했 다. 그리하여 그는 에마누엘 2세와 더불어 이탈리아 국가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이탈리아 국가 통일을 보기 직전인 1861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까지 그 는 독신이었다.

 

19. 도스토엡스키 편 /사랑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리얼리즘의 거장

도스토엡스키(Fyodor Mikhailovlch Dostoevskii, 1821-1881) 는 모크바의 어느 빈민병원 의사의 아들로 18211년에 태어났다, 17세 때 그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공병사관학교에 들어가졸업 후 에 육군 중위로 공병국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제 대한 후 문필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빈한한 노관리 마카르 데비시킨과 박복한 처녀 와르와라 의 불행한 연애  이야기를 담은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 년에 발표했는데이를 밤새워 읽은 그리고로비치와 네크라소프 가 감동한 나머지 새벽에 그에게 달려와 축하해 줄 정도로, 이 작품으로 그는 러시아 평론가들에게 '고골리의 후예'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처녀작의 성공과는 달리 이후 발표한 <  >, (주부), (백야)10여 편의 작품들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창작 활동은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1848년경부터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혁명 사상가 페트라계프스키의 서클에 참여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1849년 봄에 서클  멤버들과 함쩨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재판 직후 황제의 자비로 4년 징역 4년 군복무로  감형 조치를 받았다. 재판부는 그를 따끔히 혼내줄 심산으로 감형된 사실을 그에게 숨기고 '사형 연극'을 진짜처럼 꾸몄다. 그리하여 사형대에 일단 올라 극도의 공포와 두려운 감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형 연극' 이틀  후에 감형된 그는 족쇄를 찬 채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으로 옳겨져  4년간 참담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 고는 1854215일에 풀려나  병졸로서 키르기스 평원 부근의 조그만  마을 세미팔라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제7시베리아 보병 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세관의 하급관리 이사예프를 만나게 되어, 그 가족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사예프의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였다. 당시 27세인 그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며,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이고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감옥 생활에서  막 나온 도스토엡스키에게 따스한 친절로  따해 주었다. 이에 너무도 감격한 그는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쿠즈네츠크로 전근가는 남편을 따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565월에 그녀는 이사를 했다. 이때 도스토엡스키는 비탄을 머금은 가슴을 안고 브란겔리  남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그녀를  멀리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의 모습이 하도 측은해, 브란겔리 남작이 최고급 삼페인을 이사예프에게 먹인 후, 그가 술에 곯아떨어지자, 이사예프를 다른 마차에 옮기게 한 후, 도스 토엡스키와  마리아를 한 마차에 있도록 배려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몇 마일도 못 가서 그들은 결국 혜어져야  했다. 그후 그들은 수없이 애정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마리아의 남편은 이사한 지 얼마 후 알코을 중독으로 인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 말았다 당시 교사직에 있던 23세 연하의 청년 베르구노프가 먼저 그녀에게 청흔을 해오자, 이에 조급해진 도스토엡스키 역시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의 열정에 감복한 마리아는 그와의 결혼을 응낙하고, 1857  26 일에 쿠츠네츠크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세미팔라틴스크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도스토엡스키는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매우 당혹하게 했다. 1857년에 복권된 그는 아내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와 보금자리의 터를 잡았다. 그러나, 마리아의 폐병이 악화되어, 그녀는 블라디미르나 모스크바 등지로 가서 요양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내가 모스크바에서 요양 중에 있을 때 그는 아 폴리나리야  야스로프라는 22세의 젊은 여성과 밀애를  즐겼다. 그는 새 애인과 함께 서구 여행을 떠나기까지 했다. 1864415일에 마리아가 죽었으며, 같은  해에 그의 형도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잡지사의 경영 실패는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다행히 그는 속기사 안나 스니토키나의 헌신 적인 애정과 보살핌으로 다시 재생할 수 있었다. 그는 안나와 1867년 봄에 결혼한 후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그 는 <백치><악령>,<영원한 남편>을 탈고했으며, 여행에서 돌아온  후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하면서, 이후 10여 년  동안 봐 주었다. 그는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으로, 현실의 객관적 반영을 중시하는 톨스토이에 비해, 주관적 색채가  짙은 독자적인 문학을 창조해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모순과 상극을 추구해 근대소설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현대문학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 차이코프스키 편/ 우정과사랑의 차이를 체험으로 알겠 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Petr Il'ich Chaikovslu,  18401893)는 러시아  보트킨스크에서 광산기사의 아들로 1840년에 태어났다. 그는 1848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가서, 법률 학교를 나와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직장을 그만 두고 음악을 전공했다. 1866년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사로 부임한 이래 그곳에서 1878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음악평론가 스타소프 를 비롯해 발라키레프,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큐이, 무소르그  스키와 같은 세칭 '5인조'라고 불리는 국민악파와 친하게 지냈다. 이 무렵 그는 몇몇 아가씨와 사귀면서 때로는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육체적 관계만은 맺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자기 어머니 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온전한 사랑을 나눌수가 없었다. 그 는 9세 때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머니와는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다 그가 15세 때 그의 어머니가 콜레라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이러한 아픈 추억은 늘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마음 속에는 어머니만이 절대적인 여성이라 는 개념이  자리잡아 버렸다, 그와 사귀던 아가씨들 중에 베라  다비도프가 그에게 제일 적극 적이었다두 사람은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고, 그러다가 자연스레 혼담이 오고갔다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청흔을 거절하 는 대신에 그녀와 유럽 여행을 하는 것으로  교제를 마무리지었다. 그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장이자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루빈 슈타인의 소개로 그는 나데즈다 폰 메크라는 미망인을 알게 되었다. 당시 47세였던  그녀는 루빈슈타인으로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악보 <폭풍우>를 건네받고는 크게 감동해, 그에게 새 작품을 써 달라고 거액의 돈을 선뜻 보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은 싹트게 되어, 이후 무려 1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그들은 1,100여 통에 이르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과 음악과 철학과 인생에 대해 논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가 돈 걱정하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매년 6,000루블이나 되는 연금을 보내주었다. ,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붙었다.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도록 할  , 설령 마주치더라도 대화하 지 말것" 차이코프스키는 나데즈다 폰   부인을 만난 직후인 1877718일에,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류코바와 결혼했다. 당시 갓  스무살의 젊고 아름다운 처녀가  그에게 적극 적으로 매달리며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는 차마 그녀의 청혼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만 받아 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동성애자였던 그에게 결흔생활이란 감당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혼 후 신경쇠약에 걸린 그는 하루는 폐 렴에 걸려 죽어버리자고 작정하고서 모스크바 강에 뛰어들어 여러 시간 동안 물  속에 잠겨 있기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한편, 결혼은 했으나  남편이 자신의 육체를 탐하려 들지 않는  데 대한 충격으로 안토니아는 여러 남자들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결혼한 지 20년 만인 1896년에 정신병자 보호소로 보내졌고, 그 후 러시아 혁명 중에 남편을 원망하면서 두 눈을 감았다우정을 나눈 지 13년째 되던 189010월에 나데즈다는 '자신 은 파산했으니 앞으로 연금을  더 이상 보낼 수 없다'는 이별 편지를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냈다. 이에 크게 낙심한 차이코프스키 는 얼마 후 콜레라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1893116일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서유럽 음악 전통에 민족적 색채를 조화시켜  풍부한 서정성을 가진 그의  작품은 국민음악으로서,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다특히 그의 6곡의 교향곡 중  <4><5><비창 교향곡>,또한 <피아노 협주곡 제1>과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그리고 발레무곡 <백조의 호수><호 두까기 인형>등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명작 중의 명작 이다.

 

 21. 오스카 와일드 편유미주의와 남색의 찬미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아일랜드의 더블 린에서  의사인 부친과 여류시인인 모친과의 사이에서 1854년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재학  중에 심미파의 주창자가 되었으며, 졸업 후에는 런던으로 가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고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에 입각해 작품 활동을 했다그는 해바라기 꽃을 가슴에 달고  런던 거리를 활보하면서 관능적 향락과 현세적인 쾌락주의를 가미한 유미주의의 선두주자임을 자처했다 188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유미주의 강연을 해 미국여성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는 1891년에 자신의 예술관과 도덕관과 인생관을  곳곳에 박은 모자이크 풍의  장편소설 <도리언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한 이래, 희극 작품으로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보잘 것 없는 여성>(1895(이상적 남편)(1895)<거짓말에서 나온 진실>(l895) 등을, 그리고  비극 작품으로 신약 성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죽음과 헤로디어스의 딸 살로메의 사랑을 중심으로  다룬 <살로메>(1893)를 잇달아 발표했다, <살로메>1857년에 제정된  호색본 단속령 때문에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출판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최대의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1844-1923)에 의해 주연되어 파리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영국에서는 끝내 공연이 허락되지 않아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귀족 출신의 젊은 작가 알프레드 더글라스가 <살로메>을 영역하고 삽화가요 판화가인 오브리 비 아즈리(1862-1898)가 호색적인  삽화를 그려 넣어 영국에서 출판했다. 그런데, <살로메>  인기가 올라갈수록 와일드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다, 번역가인 더글라스와 원작자인 와일드 가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닌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 은 사태를 악화시켜, 더글라스의 부친인  퀸즈베리 후작이 자기 아들을 남색자로 타락시켰다 해 와일드를 고발해 버렸다. 이 무렵, 와일드는  북아프리카로 여행 중이었다. 그는 이때 역시 남색 (男色)의 찬미자로서 남색론을 전개한 <코리든>의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  함께 남색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와일드는 귀국하자마자 자신을 고발한 퀸즈베리 후작을 명예 훼손죄로 맞고소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1895년에 그의 남색 사건이 재판에 정식으로 회부되어 2년간 감옥 생활에 처한다는 유죄판결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즉시 그 의 긴 갈색 머리는 잘려지고 그의 몸에는  줄무의 죄수복이 입혀 졌으며, 이윽고 리딩그 감옥에 수감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1897년에 출옥한 그는  옥중에서의 감개를 침통하게 묘사한 시 <레딩 감옥의 노래>(1898)를 발표했으며, 이어 '참회와 반성으 로 가득찬 <옥중기>를 집필했다. 출옥 후 그는 줄곧 가족도 친 구도 없이 외롭게 파리의 한 조그만 다락방에 쳐박혀 지냈다. 가족은 모두 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 버렸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만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1900년에 쓸쓸히 숨 을 거둘 때까지 다락방 구석에서 외로움과 고독과의 처절한 싸움을 하며 지내야 했다.

 

22. 루돌프 편 /덧없는사랑의 진짜 주인공

루돌프(Rudolf, 1858-1889)는 황제 프란시스 요셉 2세의  아들 로 1858년에 태어났다. 황태자가 된 그는 188124세 때 벨기에 의 왕녀 스테파니와 결혼해 그녀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행 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그의 호색기가 발동해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귀공자에다 미남이요 엽색꾼이기도 한 그에게는 고급 창녀나 주위의 귀부인 및 처녀들이 모두 사냥감으로만 여겨졌다. 그는 한때 빈의 고급 창녀인 밋치 가스팔을 정부로 삼고 뜨거운 욕정의 나날을 보냈다. 때로는 궁정의  귀부인들과 처녀들에게도 손을 뻗쳐 정욕을  채우기도 했다, 그렇게 정복한 여성들 중에 젊은 공녀(公女) 엘리자베드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아우엘스 세페르크의 누이동생이었다. 아우엘스 세페르크는 자기 누이동생이 황태자에게 겁탈 당한 것을 분히 여겨 황제를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간곡히  아뢰었다. "저희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황태자와 결투를 해서 누이동생의 치욕을 겠나이다."

이 결투 신청은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다혈질인 아우엘스 스페르크는 황태자 루돌프의 자존심을 자극시켜 둘이서 몰래 미국식 결투를 하게 되었다, 권총에 횐 색과 검은 색 총알 을 넣어놓고 검은 색 총알을 먼저 쏜 쪽이 지는 결투였으며, 지는 쪽이 6개월 이내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되어 있었다, 이 결 투에서 황태자가 그만 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루돌프는 초조하고도 답답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6 개월 이내에 스스로  자살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너무도 우울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늘 가슴을 웅크리고 살아가는 그에게 왕비의 조카가 위로한답시고 싱그럽고 아름다운 처녀 마리 베 첼라를 소개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왕비 스테파니와 이혼하고 자신이 범한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자, 로마에 이혼 신청까지 내 놓았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에 더욱 초조해진 루돌프는 마지막 시한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날, 마리 베첼라를 납치하다시퍼 유인해 숲속에 있는  마이야링크의 수렵관 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강제로 그녀와 정사를 나눈 후, 그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고 말았 다. 차가운 바람이 연신 몰아쳐 대고 있던 1889129일 겨울 저녁이었다. 이는 1936년에 아나톨 리트바크에 의해 <덧없는 사랑>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샤를르 보와이에와 다니엘 다리유가 주연을 맡았다

 

 

 4. 20세기의 연애 박사들

 23. 프란츠혼 바이로스 편 에로틱한 호색화를 그린 화가

프란츠혼 바이로스(1866-1924)는 오스트리아 빈의 귀족 가문 의 아들로 1866년에 태어났다그는 빈과 윈헨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받았으며, 초상화가인  유진 훼릭스와 풍속화가 인 고트프리트 시로스에게 사사 받았다. 189631  때 그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요 지휘자이자 바이얼리스트인 요한 시트라우스(1804-1849)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해, 결혼한지 1년도 채 못 돼 이혼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6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드로테아라는 여인과 재혼해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게  되었다. 그는 1904년부터 에로틱한 삽화를 그려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접하게 된 로코코 미술의 영향을 받아, 사치스러운 로코코 풍속을 재현하는 호색화를 그렸다. 주로  귀족의 애첩들의 호화스럽고 음탕하고 자유분방한 생활과 베르사 이유 궁전의 호색적이고 찬란한  생활을 소재로 다루었다. 그러다 가 <화장대 이야기>(1911)에 실린 15장의 삽화들이 너무 외설 적이라고 뮌헨 경찰에 고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그는 빈으로 피신한  뒤 호색적인 삽화를 그만 두고, 한정 호화책이나 장서의 표지 또는 시집이나 소설집의 삽화만을 그렸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삽화집 <개미의 집>, (18세기 의 호색적인 노래와 시)를 비롯해,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 크>,크레란드의 <화니힐>,데니스 데드로의 <음란한 보석>등 지에 실린 삽화들이 있다. 특히 만년에 그가 그린 단테의 <신 곡>의 삽화는 유명하다.

 

24. 라스푸친 편 /궁정 정치의 부패와 방탕을 대표하는 호색가

라스푸친(Rasputin 1871-1916)은 시베리아 오드리스크의 벽촌인 포크로스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1871년에 태어났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수도사였으나, 1905년에  궁중으로 들어가 그의 예언과 기적을 행해 차차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난치병인  혈우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장남 알렉세이 황태자를 기도로써 치유시켜 일약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 었다. 그는 특히 황후 엘렉산드라 페오트로브나와 황태후  아나스 타샤의 후광 아래 궁정 정치에 써 숭배를 받으면서 1907년부터 10년간 로마노프 왕조를 좌지 우지했다. 그는  '암흑의 세력'이라고 불렸으며, 스톨리핀 등이 그 세력에 대적하다가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제정의 타도, 1 차 세계 대전의 수행을 부르짖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싸웠으며, 대독 강화파(對獨講和派)를 형성해 전권을 행사하는 등 막강한 권세가로 군림했다. 또한 호색가였던 그는 '영흔은 육체의 기쁨에 의해 구원된다' 고 해 궁정의 귀부인들에게 음흥한 손길을 뻗치더니, 기분 내키 는 대로 하나씩 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궁정의 귀족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마냥 지켜 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라스푸친에 의해 '육체의 정화'를 받고 싶어하는 궁정 귀부인들 때문에 그의 외도는 더욱 가속화했다. 어떤 날은 하룻밤에 두세 여자를 상대해 음욕을 채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아내를 그에게 빼앗긴 어느 젊은 공작과 결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이렇듯 러시아 제정 말기의 궁정 정치의 부패와 방탕을 대표하는 인물인 그는 반대파의 분노를 사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19161216일밤 페테르스부르크의 유스포프 광장 에서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신 후 반대파의 칼에 찔려 암살 당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암혹 정치에 있어서의 막후 실력자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25. 헤르만 헤세 편/ 아내의 헌신과사랑으로 불후의 걸작을 남긴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rnann Hesse, 1877-1962)는 독일 남부의 슈 바벤의 카르프에서 목사의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바제르의 전도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후 고향으로 돌아와 마우르브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들어 간지 반년만에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후 시계 공장띄 견습공, 서점원 노릇을 하면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으며간혹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어머니를 여읜 그는 더욱 열심히 문필 생활을 해 <페터 카멘 찐트>(1904)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큰 도시로 나가지 않고 28세때 9세 연상인 마리아 베르누이라는, 피아노를 잘치는 여성과 결혼해 라인  강변에 머물면서 창작에만 전념했다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35세 때인 1911년에  그는 싱가포르, 스마 트라, 세일론 등지를 수 개월 동안 여행했다귀국 후에는 스위스의 베른으로 이주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증오보다 사랑이, 전쟁보다는 평화가 아름답다'라 고 외친 탓에 독일에서 배반자라고 탄핵을 받았다, 47세 때  그는 당시 정신병을 앓고 있던 마리아 베르누이와 정식으로 이혼하고서 일체의  시민적 생활을 청산한 후르가노  호반가로 거주지를 옮겼다. 스위스로 국적을 옮기고, 같은 해인 19241월에 20세 연하인 루트  벵거라는 여성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51세 때 그녀와의 결혼 생활도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루트가 자기 남편인 헤세가 '변태적  인간이요 노이로제와 불면증 환자인  데다 정신병자이다'라는 이유로 법정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치열한 내적 투쟁을 하면서  작품 집필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이 무렵, 니온 아우슬랜더라는 여인이 그에게로 찾아왔다. 니온은 15세 때 헤세의 소설 <페터 카멘찐트>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헤세에게 즉시 편지를 띄웠다. "우리는 카멘찐트와 같이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사람, 언제나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위해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을 대하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답니다." 이후 그녀의 헤세에 대한 줄기찬 흠모와 동경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여읜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레드 돌 빈이라는 캐리커처 화가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 녀의 이상적인 남편감은 언제나 변함없이 아버지처럼 여겨지는 18세나 연상인 헤세였다그래서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 하고서 은밀히 그와의 이혼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이 무렵  20 세 연하인 루트 벵거라는 여성과 열애에 빠져 있던 헤세는 그녀  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헤세가 19275월 마침내 루 트와 이흔을 했다. 때를 맞난 니온은 남편과 이혼하고서 헤세에 게로 곧장 달려갔다. 하지만 당시 자신이 결흔생활에  부적격자라 는 자책감에 빠져 있던 헤세의 마음을 돌려놓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때의 헤세의 심경은 친구에게 보낸 그의 편지 속에 이렇 게 드러나 있다. "지금 어느 부인이 빈에서 갑자기 이리로 와 있다네. 그것은 그녀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나도 그녀가 좋고 사랑스럽다네, 그렇지만,   그녀와는 아무것도 함께 할 수가 없다네, 난 이 극적인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일 뿐이네." 헤세는 점차 니온의 열정과 헌신에 감동 받게 되어 동거를 허락했다, , 함께 살되 각자 서로  다른 방을 쓴다는 조건하에. 한 집에 살면서 니온은 시력이 나쁜 헤세에게 1주일에 한두 권의 책을 읽어 주거나 또는 편지 등을 읽어 주는 식의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결국 동거한지 2년 후인  193111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자상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그녀는 늘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결심했다가 그만 두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돌파구를 하나 뚫었다. 그것은 서로 방해하지 말고 나란히 함께  살아가자는 제안 때문이었다. 이후 그녀는 여행도 하고일기나 글도 쓰고, 그리스  신화나 그리스어 또는 고고학에 심취 하면서 나름대로 소일거리를 찾음으로써 외로움을 달랬다. 그녀의 헌신과 인내, 그리고 사랑은 만년의 헤세가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아내와 더불어 나치스 독일로부터 망명해 온 자들을 위한 원조에 노력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아내의 우호적인 내조 덕택에 헤세는 착실히 창작 업적을 쌓아 나가, 1936년에는 스위스의 켈레르상을, 1946년 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1962년 신경 쇠약과 뇌출혈 때문에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루가노 호반의 성 아본티오  교회 묘지에 묻혔으나, 그가 남긴 걸작 <차륜 밑에서>, (데미안), (나르찌스와  골드문트>, (관찰), (유리구슬유희),  (황야의 늑대)등은 아직 도 살아남아 독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26. 아폴리네르 편/연인의 여성적인 미학에 찬사를 보낸 예술가

아폴리네르(Cuillaume de Kostrowitsky Appollinaire, 1880-1918)  1880826일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라이인 퇴역장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인 법황청 무관의 딸이었는데, 그가 6세 때 그의 아버지는 가출하고 말았다. 그래서 소년 시절에  그는 어머니 안젤리카 드 코스토로비츠키와 동생 알베르와 함께 모나코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리옹 등지를 전전하다가 1899년에 파리로 상경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향락적인 생활 때문에, 고생이  겹쳐 그는 한동안 가정교사가 되어 라인 지방으로 가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은행 근무, 때로는 외설책 편집일, 또는 막노동일 등을 하기도 하면서 근근히 생계 를 꾸려 나갔다그는 소년 시절부터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 글을 썼으나, 1903 년부터는 상징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인 자리(Jany)와 함께 잡 지 <이솝의 향연>을 창간해 본격적으로 문필생활을  했다 그러 다가 <도가니>, (약혼>등의 시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이후, 피카소, 브라크, 드랭 등과 같은 화가들, 자콥, 살몽 등 과 같은 시인들과 사귀게 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전위잡지 <스와 레  드 파리>를 창간해, 새로운 예술 세계를 추구해 나갔다, 19075월 어느 날, 피카소가 자신의 개인전을  관람하러 온 그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이보게, 내가 말일세. 자네의 피앙세가 될 여인을 만났다네." 이 말은 당시 애니 플레이든이라는 영국 아가씨에게 받은 사랑  의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던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피카소가 말한 '피앙세가 될 여인'  다름 아닌 여류 화가인 마리 로랑생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를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던 그는 궁금해 견딜 수 없어 그  길로 당장에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사랑의 마법에 걸리듯 그녀에게 몰입하고 말았다. 그는 여러  편의 미술 평론을 써서 그녀의 그림과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여성적인 미학에도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4년만에 금이 가고 말았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1911년에 루브르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 당한 사건이 생겼는데, 하필 그 도난범으로 아폴리네르가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라 상테 형무소에  수감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며칠 후 진범이 잡혀 그의 혐의가 벗겨져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마리 로랑생의 어머니가 크게  노여워해, 그들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지원병으로 출정했으나전쟁터에서 19163월에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후방에 호송되어 개두(開頭)수술을 받았다. 그 뒤에도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세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계속 시달리다가, 당시 유 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191811  9일에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아폴리네르의 단편집 시집 <알코올>등은 문학가요 미술평론가로서의 그의 지도력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걸작들이다.

 

27.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편 /생명주의적인 성문학을 추구한 소설가

데비이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ichards  Lawrence, 1885-1930)는 잉글랜드의 중동부에 위치한 노팅검의 북방에 있는  이스트위드의 한 광부의 아들로  188591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해 주정을 부렸다. 이러한 술주정뱅이인 남편을  몹시 싫어했던, 전직 교사 출신인 그의 어머니 리디아는 오로지 자식들에게만 온갖 정성과 애정을 쏟아 부었다. 로렌스에게는 두 형, 즉 조지 아더와 윌리엄 어네스트, 그리고 누나인  에밀리 유우너와 누이동생인 에이더가 있었다. 그는 초등 학교를  마치고 장학금을 얻어 노팅검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의료기구상에서 근무했다. 이 무렵 폐렴에 걸렸다, 그는 데이비드 썬리드  스쿨에서 교사로 있을 때 알게 된 헉스 농장의 딸 제시 체임버즈와  교제하기 시작해 그녀와 10여년 동안 사귀었다, 그러는 중에 제시의 정신적인 애정에만 만족하지 못한 그는 다른 여성과도 사귀며  성 관계를 맺기도 했다. 폐렴이 나은 뒤 그는 이스트위드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견습교사로 1년 가량 지낸 다음, 이르케스튼의 교원 양성소를 거쳐 190622세 때 노팅검 대학 교육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 한  후 그는 런던 남부에 있는 그로이든의 초등학교에 들어가 5년 동안 교원생활을 했다이 무렵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사귀어온 연인 제시가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단편소설 <국화의 향기를>. 당시 일류 문예 지인 되었다. 그후 장편소설을 주로 쓰게 되었다, 1912년 봄에 그는 대학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있는 모교 의 언어학 교수 어네스트 위클리에게 초대를 받아 얼마동안 그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스승의  아내요 그(당시 32)보다 5살이나  연상인, 이미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프리다(당시 32)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소설 <범죄>의 출간 원고료를 가지고 영국을 떠나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대에 살고 있는 프리다의  친정으로 도피해 서로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후 그들은 빠듯한 생활비로 방랑의 길을 떠나 바르 트부르크, 윈헨을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까지 갔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영국으로 돌아가 1913713일에 프리다와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아내가 독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스파이  혐의를 받아 고통스런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으며, 이후 오랜 방랑 생활을 했다. 피렌체, 나폴리, 카프리 섬, 시칠리아 섬을 거쳐 독일로 가는 여정이었다. 1922년 실론을 거쳐 호주, 미국, 멕시코를 경유하여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렌체 부근의 촌락에 머물면서 집필 활동을 했다. 그는 평생 말다툼이 그치지 않았던 프리다와 이흔한 상태에서 흔자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1928년에 폐병이 악화되어 요양원에 입원했으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원한지  3주일이 채 못 되어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3032일에 남프랑스의 방스에서 생명주의적인 성문학을 추구해온 소설가는 46세의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인생 여정 가운데, 그가 탈고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 <침입자>, (사랑스러운 여인들), (날개 달린 병)등은  모두 그 의 생존시에는 영국에서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소설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가 되어서야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

 

 28. 헨리 밀러 편/성과 사랑의 합일성을 집요하게 추구한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는 미국 뉴욕의 요오크빌 에서 1891년에 태어났다, 그는 뉴욕 시립대학에 들어갔으나 도중 에 퇴학당했다, 그후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서부 지역 등지를 방랑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돌아와 술장사를 하면서 집필 생활을 했다. 193040세 때 파리로 건너가 가난과 싸우며 국적상실자로서 10여 년 동안 글 쓰기에  전념했다, 1934년에 쓴 그의 첫 장편 <북회귀선>은 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대담하고도 노골적인 성(.) 묘사를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의 출판이 미국에서 허용되지 않아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 후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허락되었다. 그의 다음 작품은 장편  <남회귀선>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도 그 대담한 성 묘사로  많은 물의를 일으켜 역시 발매  금지를 당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외설 작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그의 성 묘사의  대담성은 현실 파악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뿐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은 실로 식사나 대화와 같은 극히 자연스런 인간 행위 의 하나이며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성과 죽음을 큰 문제로 다루어, 인습적 사고 뒤에 있는 진실을  포착하고자 했다. 주인공은 작품 속에서 여러  여자들과 아 주 건강하게 관계하거나 함께 어울리고 있다. 주인공은 비서 크 론스키, 부하인 하이미, 여사무원 붸리스카, 방랑하는 유다 소녀 등과 어울린다. 그러는 가운데, 주인공은 '인생의 진실한 모습은 고상한 겉치레의 질서 안에는 없고, 성과 죽음이 뒤얽힌 혼돈 그 자체 안에 있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밀러는 <북회귀선>을 통해서 뉴욕에서의 자신의 청년  시대를, <남회귀선>을 통해서는 파리에서의 보헤미안 생활을 다루어 놓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모험을 찾아서 편력 (遍歷)하고 있다. 그는 1940년 뉴욕으로 돌아와 미국 내를 여행했으며, 2년 뒤에는 캘리포니아의 빅써에 정착해, 미국 문명을 비판하는  글을 써 댔다, <성의 세계>(1940),  (냉방장치가 된 악몽)(1945)<추억 하기 위해 기억하라>(1947) 등이  그것이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는 3부작 으켰다. 여기서도 그는 미국의 획일화된 악몽 같은  문명에 억눌려 있는 인간성의 진정한 해방을 부르짖고 있다. 그는 생명주의적인 성문학을 추구한 로렌스와는 달리, 성과 사랑의 합일성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소설을 썼다, 그는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성행위 또는 성의 불모는 인간을 황폐화시킬 뿐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작품 속에서 성이라는  인간적인 욕망을 정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의 성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人格的)인 투영 속에서 영위되는 사랑 행위 이다." 성욕은  관능기관의 쾌감의 만족이 아니라, 영혼의 정신적 만족이다."

 

29. 프랑시스 스코트 핏제럴드 편 아내의 낭비벽을 충족시켜 주고자 열심히 글을 쓴 소설가

핏제럴드(Fracis Scott Fitzgerald, 1896-1940)1896924  미국 중서부의 미네소타주 세인 트 폴에서 조그만 가구업을 하는 에드워드 핏제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이민의 딸인 매리 맥퀼랜이었다. 그의 가족은  부친이 경영하는 가구업이 실패하면서 이 도시 저 도시로 계속해서 이사를다녀야 했다. 그는 신경질적인 어머니 대신 신사다운 아버지와 예절바른 이모와 고모를 더 좋아했다, 그가 12세 때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 두자 식구들은 외가가 있는 세인트 폴로 되돌아 왔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취미 활동을 했다, 우표 수집과 시가 담배 밴드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고 풋볼도 했으며, 이웃집 다락방에서 연극 공연도 했다. 때로는 탐 정소설도 써 봤고, 역사 공부도 했으며, 때로는 풋사랑의 연애도 해보았다. 세인트 폴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학교 교지에 모험 이야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식구들의 강압에 의해 16세 때 동부 뉴 저지 주에 있는 뉴맨 스쿨로 학교를 옮겨야 했다. 용모가 수려했던 그는  주위, 사람들의 주의를 끌긴 했으나, 극단적인 자기중심벽 때문에 친구들 과 교사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늘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1913년 가을에 그는  프린스튼 대학에 입학했으며, 그곳의  풋볼 팀에 들어가 활약했다.

덕분에 대수, 기하학, 위생학에서 낙제를 했다. 더욱이 말라리아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대학 3학년 때 휴학하고서 세인트 폴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 무렵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 아름답고 우아한 처녀 기네 브라 킹(Ginevra King)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그녀와  편지(그는 죽는 날까지 그녀의 편지를  간직했다)를 주고받았으며, 뜨거운 열애를 했다그러나, 그의 가난이 둘 사이를 갈라 놓고 말았다. 19168월에 둘은 헤어졌다. 19169월에 프린스톤으로 되돌아간 그는 수많은 시와 단편들을 썼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그가 지원했던 장교 임명 사령이 관철되어, 육군 소위로 임명된 그는 11월에 포트리번위 쓰로 떠났다그리고 15개월간의 군복무에 충실했다. 그는 군복무 중에 군사교본의 안쪽에다 원고를 숨겨 가지고 다니면서 <낭 만적 에고이스트>라는 소설을 19186월에 그는  앨러배머의 몽고메리 부근의 캠프 쉐리단으로 전속되었다. 이때 그의 첫 사랑 기네브라 킹이 곧 결혼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도 몽고메리시 재판소의 판사였던 새이어 판사의 딸 젤다 세이어(Zelda Sayre)와 사랑에 빠졌다그녀는 대담성과 미모와 금발을 갖춘 방년 19세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미남과 미녀는 서로 만나자마자 정열적으로 사랑을 불태우다가 약혼했다. 19192월에 제대한 그는 뉴윽으로 가서 광고 대리점에 취직 해 광고문 작성자로 일하면서 밤에는 글을 썼으나 그의 원고는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만 해 실이에 빠져 지냈다. 게다가 젤다와의 약혼도 파기되고 말았다. 그 해 7월에 그는 뉴욕을 떠나 세일트 폴로 가서 서미트 애브뉴의 한 골방에 칩거한 채  작품 집필에 전념했다. 그리고 뉴욕의 스크라이브너사로부터 <낭만적 에고이스트>의 출간 허락을  받아냈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활발한 집필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용기를 내어 젤다를 찾아가 다시 약혼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19204월에 뉴욕 세인트 팩트릭 성당에서 젤다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후 연일 계속되는 파티와 유흥에 젖어 지내다가 재생을 위해 한적한 코네티커느주  웨스트 포트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젤다는 시골 생활에 권태를 느껴 힘들어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그리고 남편이 자기에 대한 봉사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해  주기를 바랬다. 그녀의 정열적이고 자유분방한 말괄량이 기질과 무절제한 낭비벽은 핏제럴드에게 적잖은 부담과 고통을 주었다. 그는 아내의 낭비벽을 감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원고를 써대야만 했다. 그리고 뉴욕의 웨스트에 있는 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으며, 아내가 임신하자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후 롱 아일랜드의 그레이트 넥 프랑스 남부의 휴양지 리비에라. 그리고 상 라파엘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19247월에 젤다는 에듀아르 조잔느라는 프랑스 미남 비행사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이 때문에 부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다행히 예듀아르가 장문의 이별 편지를 남긴 채 그녀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적지 않은 휴유증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 젤다를 지극히 사랑했다 그가 1925년 초에 친구 비숍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첫째가 젤다이고, 둘째가 내 책이 특별한 어떤 것을 갖기를 바라는 희망이라네." 그는 젤다와 함께 1931년 가을까지 유럽에 머물면서 지내다가, 아내의 건강이 나빠지자 192612월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부터 그의 아내는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레 댄서로 성공하겠다고 작정하고서 29세의 나이로 파리로 건너 갔다. 그러나 몇 개월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 무렵  그도 음주에 젖어 살았으며, 곧잘 화를 내고 툭 하면 술을 먹다 말고 주먹을 휘둘러 댔다이후 파리, 알지에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가, 아내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스위스의 정신 요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진단을 받게 했다. 그녀의 병명은 조발성치매증이었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파리를 거쳐 고향인 앨러배머의 몽고메리로 돌아왔다. 한때 호전 되는 듯하다가 다시 발병한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볼티모어의 병원에 그녀를 입원시켰다. 젤다는 결혼생활 중에 남편인 핏제럴드의 재능에 대한 경쟁심리와 질투심으로 늘 힘들어했다, 그녀는 남편의 성공을 매우 시기해서 남편이 되도록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과음케 했으며, 남편이 작품 집필에 몰두하고 있으면 곧잘 화를 내면서 훼방하곤 했다. 헤밍웨이(1899-1961)는 이러한 심술궂은 젤다에 대해 핏제 럴드에게 이런  편지글을 띄웠다. 당신은 당신의 작품을 시기하고 당신과 경쟁을 한고 싶어하고 당신을 망치는 여인과 결혼을 했구려."  그는 아내와 작품, 그리고 만성적인 불면증과 자학 때문에 마 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렇지만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열심히 글을  써가야만 했다. 그럴수록 그의 건강은 자꾸 나빠져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폐병이었다. 게다가 누적된 빛은 그 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으며, 아내마저도 병세가 악화되어  북 캐 롤라이나 주의 하일랜즈에 있는 요양소에 입원시켜야 했다. 하루 는 다소 병세가 호전된 아내를 수영장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다이빙 솜씨를 보여주다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크게 낙심한 그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937년 여름에  좋은 조건으로 출판사와 원고 계약을 맺은 그는 어느 정도 빛도 같고, 다시 의욕적인 삶을 전개했다.   무렵 실  그래함(Sheilah Graham)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그녀는 칼럼리스트 도니골(Donegall)경과 약혼했는데, 그 약혼 축하파티에서 만난 핏제럴드를 사랑한 나머지 그 약혼을  파기해 버렸다. 그녀는 핏제럴드에게 매우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다. 이 때 문에 그는 만년에 얼마간의 편안과 행복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계속된 그의 폭음과 무리한 집필 활동은 그 의 건강을 매우 악화시켰다. 더욱이 할리우드의 전속작가 생활은 그를 아주 힘들게 했다. 그러던 중, 194011월에 그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침대에 드러눕게 되었다그러나 일시 회복되어 1220일 실라와 함께 팬 테이지스 극장에서 연극 공연을 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다시 심장발작을 일으켜 쓰려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 그는 의사를 기다리며 신문기사를 보고 있다가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벽난로의 모서리를 잡더니 이내 바닥에 픽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켈다도 끝내 병이 회복되지 않은 채 애쉬빌의 하일랜드 요양소에 입원해 있다가, 1947311일에 요양소가 불타는 바람에 그만 질식사하고  말았다. 그녀는 록크빌 묘지에 잠든 남편 곁에 나란히 묻혔다. 이렇게 해 스코트 왕자와 젤다  신데렐라'는 갔지만, 빈곤에도 몸을 일으켜 술의 밀매로 부자가 된 제이 개츠비가 지난 날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해  잃어 버렸던 연인의 사랑을 돈의 힘으로  되찾으려 하다가 사살되는  이야기를 다룬 1920년대  뉴욕의 풍속 이  야기 국에 이르는 생활 기록에 다 부유한 미국인의 유럽 생활을 흔합한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는 그의 대표작이자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30. 빌헬름 라이히 편 /진정한 성 해방을 부르짖은 과학자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는 오스트리아의 가리시아에서 1897년에 태어났나. 그는 빈 대학의 의학부에 들어가 수업했으며, 졸업한 후 정신분석 의사로서  활약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조수가 되어 한때 프로이트의 학설에 심취했으나,  1923년에 오르가즘 이론을 확림한 후 프로이트와 의견 충돌로 결별하고 대중의 성 교육, 성 정책의 혁신을 대담하게 제창 했으며, 올바른 성 지식 보급 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성의 모든 사회적 위선과 가면을 벗겨내고, 진정한 성 해방을 부르짖었다. 낙태의 자유화, 혼전 성교의 방임, 피임 지식의 보급, 철저한 청소년 성교육 실시, 성 해방과 성에 관한 법 체계의 확립 등을 주창했으며, 진정한 성해방과 성에너지의 자유로운 방출만이 인간의 온갖 질병, 즉 신경증, 성격이상, 동성애, 자위 행위  등으로 부터 해방시킨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결혼의 목적이 생식과 종족 보존보다도 쾌락 원칙의 추구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1920년에 소련이 낙태 자유화를 선언하자, 그 곳으로 가 서 그의 성 이론과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성 이론과 성 정책은 소련 당국을 당혹하게만들어 그는 결국 그곳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어 그는  나치 정권하의 독일에서 그의 꿈을 실현코자 했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탄압을 받아 북유럽과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1939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뉴욕에 성 문제 연구소를 설립하고서 신경증, 성적 불능, 암의 실험적 치료기인 오그로논 을 발명했다. 이는 일종의  에너지 집적기였는데 불행히도 이 발명품은 미국 언론과 식품의약국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되어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오그로논 금지령에 불복했다. 그 때문에  그는 모욕죄라는 판결을 받아 1954년에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후인 195711월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창녀에서 수녀까지 건달에서 황제까지 박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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