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눈앞에 둔 어느 건장한 선비가 낮술에 얼큰히 취한 채 장안(長安)의 커다란 기와집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담 안에서 흰 광목자락이 날라온다. 호기심이 발동해 술기운에 담을 넘으니 곱상하게 생긴 계집종이 집안으로 인도한다.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자 아랫목에 비단금침이 깔려있고 윗목에는 기름진 안주가 차려진 주안상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미모의 중년여인이 수줍음을 머금은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앉아 있다. 놀라운 상황에 당황한 선비는 이미 오른 술기운에 때 아닌 대접을 받자 될 대로 되라면서 술을 연거푸 몇 잔 들이키고 여인에게 수작을 건다. 그러자 이 여인이 말한다.
"저는 권세 있는 내시의 처로 살림살이 풍족해 어느 하나 어려움이 없으나 단 한가지 이 세상 모든 남녀가 누리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모르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오늘따라 남자의 품이 몹시 그리워 계집종을 시켜 건장한 사내를 유혹해 오라고 했더니 마침 선비께서 걸려드셨군요.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이 불쌍한 여인의 소원을 풀어주시기를 엎드려 청하옵니다"
정숙한 자태와 은쟁반에 옥 굴러가는 목소리로 간절히 청을 하니 거절하기도 어렵다. 또 나간들 마땅한 거처도 없는 처지라 이미 깔려진 이부자리에서 두 남녀는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대궐에서 근무해야 할 내시가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몸 숨길 틈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주인을 맞은 선비는 미안해하지도 않고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앉아서 주인을 대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한 내시가 큰 대접에 술을 가득 채워 선비에게 주니 단숨에 다 들이킨다. 그러자 다시 긴 칼을 뽑아 고기 한 점을 찍어주니 선비는 주저함 없이 입을 쩍 벌려 고기를 받아 우적우적 씹는다. 이 대담한 태도에 오히려 내시가 당황해 하자 선비가 시한수를 짓는다.
“해 저문 장안 길을 크게 취해 걷는데
한 송이 살구꽃이 사람 향해 날아드네.
그대는 어찌 번잡한 땅에 나무를 심으셨소.
오가다 꺾인 가지는 꺾은 자 탓이 아니라 심은 이 잘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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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여년 전 도봉구 창동 중랑천가 양지바른 산비탈에서 내시(宦官)무덤 수십기가 발견됐는데 확인결과, 이곳이 내시 후손들의 집단거주지였다는 것이다. 내시란 생식능력을 제거당한 고자인데 어떻게 후손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일부 내시들은 혈족(血族)중에서 양자(養子)를 들여 대(代)를 잇기도 했었다.
사실 내시는 시대의 희생물이었다. 그들 중에는 선천(先天)적으로 생식능력이 없어 내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어려운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문중 회의에서 자식 많은 집의 남자아이를 뽑아 강제로 생식능력을 제거한 후 궁중에 들여보낸 후천(後天)적 내시들도 많았다.
내시는 대궐에서 잡무를 보면서 내명부(內命婦) 여인들만 기거하는 내전(內殿)까지도 드나들 수 있어 정사를 좌지우지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과거 시험장에서 농간을 부려 실력 없는 사람을 급제(及第)시키는 등 말썽이 많았다.
내시와 연줄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내시의 처(妻)와 줄을 통해야만 가능했는데 대부분 내시 아내들은 이런 남자들을 친정 오빠나 동생이라고 남편에게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내시 아내들은 뇌물을 챙기고 과거를 보러온 선비와 성적 문란도 있었다.
그래서 농담 중에 ‘내시 처가(妻家) 친척은 수(數)도 없이 많다’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남편 내시는 이 선비의 당당함과 자신이 감당 못할 아름다운 아내를 독수공방시킨 죄책감에 드디어 선비와 인사를 나누고 며칠 뒤 과거시험에서 이 선비를 급제시켰으니 이것이 등과비방(登科秘方)이다. 등과비방이야 말로 몸 보시를 해 얻은 벼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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