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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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高 正 國
(1)
한 세상 사는 것이
다 길이라 하는 것을,
물빛 글썽이는
山만 보고 가노라면
세월은
소롯길로 와서
억새꽃을 피웠네.
(2)
노을녘 산마루엔
하늘만한 뉘우침이
웃자란 억새밭에
하얗게 눕던 날은
길잃은
조랑말 한 마리
山을 향해 울었다.
(3)
반 평생 구빗길을
먼 발치로 따라와서,
때로는 이맛섭에
주린 듯 돋는 별빛.
그 순명(順命)
비포장길에서
삐걱이는 내 수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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