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봄놀이 하던 여러 선비가 산사(山寺)에 모여 우연히 여편네 자랑으로 갑과 을을 정하지 못하더니, 곁에 한 늙은 스님이 고요히 듣고 있다가 한참 만에 길이 탄식하며 가로되,
"여러분 높으신 선비들은 쓸데없는 우스갯소리를 거두시고 모름지기 내 말씀을 들어 보시오. 소승은 곧 옛날 한다하는 한량이었지요. 처가 죽은 후 재취했더니 재취가 어찌 고운지 차마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다정히 지내다가 마침 되놈들이 쳐들어와 크게 분탕질이라, 사랑하는 아내한테 빠져 능히 창을 잡아 앞으로 달리지 못하고 처를 이끌고 도망치다가 말 탄 되놈들에게 붙잡혔는데 되놈이 처의 아름다움을 보고 소승을 장막 아래에 붙잡아 매고 처를 이끌고 들어가 함께 자거늘 깃대와 북이 자주 접하매 운우(雲雨)가 여러 번 무르익어 남자도 좋아하고 계집은 기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어 더럽더니 밤중에 계집이 되놈장수에게 서방이 곁에 있어 마침내 편안한 마음으로 하기 곤란하니 죽여 없애는 것이 어떠하오? 하매, 그 두목이 네 말이 옳도다. 좋아, 좋아, 하니 소승이 그 음란한데 분통이 터진데다가 또한 이 말에 놀라 있는 기운을 힘껏 써서 팔을 펴자 묶은 끈이 다행히 끊어지는지라 청룡도(靑龍刀)를 훔쳐 바로 장막 안에 뛰어 들어 남녀를 함께 벤 후에 몸을 빼쳐 도망해 돌아가서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를 입어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여러분 높으신 선비들의 여편네 자랑을 어찌 가히 다 믿을 수가 있으리오. "
하니 여러 선비들이 무연히 말이 없었다.
- 파수록(破睡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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