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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임기종 2013. 8. 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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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에 대하여

- 史記중에서 -

한비(韓非)는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公子)중의 한 사람이다.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귀착점은 황제(黃帝)·노자(老子)에 근본한 것이다.

한비는 사람됨이 말더듬이여서 입으로 잘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글은 잘 지었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신의 재주가 한비를 따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한비는 조국 한나라가 땅을 잃고 국력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자주 한왕에게 글을 올려 진언하였으나, 한왕은 그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한비는 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법제를 닦아 밝히고, 권세를 잡아 그 신하를 조종하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하며, 인재를 구하여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임용하는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좀 먹는 무리를 등용하여 그 들을 공로 있고 실적이 있는 사람들의 위에 두는 것을 미워하였다. 유학자는 글로써 국법을 혼란하게 만들고, 협사(俠士)는 무용(武勇)한 것을 가지고 나라의 금령을 범한다. 나라가 편안할 때는 이름과 남의 칭찬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총애하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무장한 군인을 사용한다. 지금 나라에서 양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위급할 때에는 쓸모 없는 사람들이고, 위급할 때 소용되는 사람들은 평소에 양성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청렴 정직한 사람들이 사악하고 바르지 않은 신하들 때문에 용납되지 않는 사태를 슬퍼하고 또 지나간 옛날의 성패득실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그는 고분(孤憤), 오두, 내저설(內儲說), 외저설(外儲說), 설림(說林) 세난(世難)등 십여만언(十餘萬言)의 글을 지었다.

그러나 한비는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설난편(說難篇)을 지어 매우 자세하게 설득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비 자신은 마침내 진나라에서 비명에 죽게되어 스스로 그가 말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韓非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사상가 한비(韓非)와 그 문류(門流)의 저서. 한자(韓子)라고 불렸으나, 송(宋)나라 이후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한자와 혼동을 막기 위해 변경되었다.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한 법가사상(法家思想)의 대표적 고전으로, 한비가 죽은 뒤 BC2세기말 전한(前漢)시대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국 한(韓)나라의 쇠퇴를 걱정하여 군권(君權)의 강화와 부국책을 서술한 것으로, 내용상 6부분으로 나뉜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 <현학(顯學)> <고분(孤憤)> 등으로 인성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군주의 통치술을 논하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세상도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군주는 시세에 즉시 대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특히 인간의 선한 면만을 강조한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도덕을 근거로 비현실적인 말장난만 늘어놓는 학자, 미묘한 국제관계를 이용해 군주를 혼란하게 하는 변설자(辯說者), 소영웅주의에 빠진 협객(俠客), 그리고 군주 측근과 상공업자를 사회를 해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오두)으로 규정하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중농억상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한비 문류의 강학(講學)·토론으로 추정되는 <난세(難勢)> <문변(問辨)> <정법(定法)> 등이 있다. 특히 <난세>와 <정법>은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에 속하는 신자(愼子)·상자(商子)의 견해까지도 비판, 수정하였는데 이 책이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漢)나라 때까지 한비 후학들의 정론(政論)인 <유도(有度)> <팔간(八姦)> <심도(心度)> <제분(制分)> 등은 신하를 다스리는 법(群臣統御)과 법의 운용〔法術〕에 관해 자세히 적고 있다. ④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 <양각> <해로(解老)> <유로(喩老)> 등의 4편은 도가의 허정(虛靜)을 도입하여 군주의 통치술을 논하였다. ⑤ 한비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存韓)>은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적고 있다. ⑥ 한비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 <내외저설(內外儲說> <십과(十過)> 등은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여 가지를 소개하고 편견적인 인간관과 법률적 강제를 강조함으로써 유가로부터 애정을 무시한 냉혹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가·법가·도가·명가(名家) 등의 사상을 집대성하였으며, 법을 독립된 고찰 대상으로 삼아 유물론적이며 실증주의적인 방법에 의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여러 간행본이 있으나 저장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유명하다. 55편. 20권.

인형을 조각하는 법 - 韓非子중에서 -

인형을 조각하는 법은 우선 코를 크게 만들어 두는 것이 좋으며, 눈은 되도록 작게 만들어야 한다.

코를 크게 하는 것은 언제든지 깍아서 작게 할 수 있지만 작은 코를 나중에 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눈을 작게 하는 것은 언제든지 도려내어 크게 할 수는 있지만 나중에 작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하는 데도 같은 이치로 다시 손을 쓰도록 해두면 실패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 약 - 韓非子중에서-

불사의 선약을 초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안내인이 이것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시종이 물었다.

"그건 먹어도 되는 것인가?"

안내인이 대답했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그 자리에서 그 약을 빼앗아 먹어버렸다.

왕은 크게 노하여 형리를 시켜 그 시종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시종은 이렇게 변명하였다.

"저는 안내자에게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먹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장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죄가 없고 안내자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손님이 불사의 선약을 바쳤는데, 이것을 먹은 저에게 왕께서 죽음을 주시게 되면 그것은 불사약이 아니라 사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손님은 왕을 기만한 셈입니다. 생각건대 죄가 없는 저를 죽이시고 폐하께서 속았다는 말이 천하게 퍼져 창피를 당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시는 것이 나을 줄로 아룁니다."

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훌륭한 거짓도 어설픈 진실에 미치지 못한다 - 韓非子중에서 -

악양이 위나라 장수가 되어 중산을 공격하였는데,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에 있었기 때문에 중산의 군주가 그 아들을 죽여 삶아서 육즙을 만들어 악양에게 보냈다. 악양은 막사 안에서 그 육즙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위의 문후는 그 소식을 듣고 도사찬에게 말하였다.

"악양은 나를 위하여 제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도사찬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 자식의 고기를 먹은 자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인들 안 잡아먹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귀국했는데 문후는 그 공을 치하는 하였으나 그 마음속은 믿지 않았다.

노나라 대부 맹손이 사냥을 하고 있었을 때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를 시켜 수레에 싣고 돌아가게 했다. 진서파는 어미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가련하게 여겨 새끼 사슴을 돌려보내 주었다.

맹손이 돌아와서 새끼 사슴을 찾자 진서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나도 가련해서 어미사슴에게 돌려주어 버렸습니다."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했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불러들이어 자기의 자식을 지키게 했다. 마부가 맹손에게 물었다.

"전에는 처벌 하셨는데 다시 불러들여 아드님을 지키도록 하신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맹손이 말했다.

"새끼 사슴이 가련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사람 자식은 얼마나 귀하게 다루겠는가? 내 자식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악양은 공을 세우고도 의심을 받았고, 진서파는 죄가 있었지만 더욱 신임을 받았다 -

상아젓가락이 나라를 망친다 - 韓非子중에서 -

은나라의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자 기자는 그것이 두려워서 이렇게 말하였다.

"상아젓가락을 만들면 국을 흙으로 만든 오지그릇에 담을 수는 없고, 반드시 뿔이나 주옥으로 만든 그릇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옥그릇이나 상아젓가락을 사용하게 되면 반찬은 콩이나 콩잎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쇠고기나 코끼리고기나 표범고기를 차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고기를 먹게 되면 아무래도 짧은 털가죽이나 초가집에서는 살 수 없는 노릇으로, 반드시 비단옷을 입어야하고 고대광실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상아젓가락의 격에 맞추다 보면 천하의 재물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 성인은 하찮은 징조를 보고도 장차 발생할 사태를 알 수 있으며, 단서를 보고서 결과를 추측한다. 상아젓가락을 보고 결과를 두려워한 것은, 천하의 재물을 다 쓸어 넣어도 욕망은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

숨기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위험하다 - 韓非子중에서 -

습사미가 전성자와 면회를 했다. 전성자와 함께 누대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서북 삼면은 트이어 있었으나 남쪽은 습사미 집의 수목이 무성하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와 종으로 하여금 나무를 자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도끼로 몇 차례 찍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게 했다. 나무를 찍던 종이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다.

"왜 갑자기 그만 두라 하십니까?"

습사미는 대답했다.

"옛말에 '깊은 물 속에 숨어 있는 고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 전성자는 제를 공격하려는 대사를 꾸미고 있다. 거기다가 내가 작은 일에 신경을 쓰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게 되면 나는 반드시 위험에 빠진다. 수목을 자르지 않더라도 자르라고 명하지 않은 이상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일을 지적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이다."

-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

이익에 눈이 멀어 - 韓非子중에서 -

위나라의 어떤 사람이 그의 딸을 시집 보내기에 앞서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시집을 가면 꼭 남몰래 저축을 해라. 남의 아내가 되면 때로는 쫓겨나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평생을 살게 되면 더욱 좋을 거고..."

그리하여 시집간 딸은 남몰래 저축을 했다. 시어머니가 그것을 알게 되자 자기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쫓아버렸다. 그런데 쫓겨난 딸이 친정으로 가지고 돌아온 것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간 것의 배가 되었다.

그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자기 자신이 딸을 잘 못 가르쳤다는 것은 아예 모르고 더욱 반가이 여겨 기뻐하고 있었다.

이들의 논쟁 - 韓非子중에서-

세 마리의 이가 논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한 마리의 이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무엇을 따지고 있는 거지?"

세 마리의 이가 입을 모아 말하였다.

"우리는 토실토실 살 찐 돼지의 맛있는 부분을 따지고 있는 거야."

그러자 뒤에 나타난 이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머지않아 제사 때가 되면 불을 피워 돼지를 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느냐? 그렇게 되면 돼지는 물론 우리까지도 모두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세 마리의 이는 다툼을 멈추고 힘을 모아 돼지의 피를 빨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돼지는 비쩍 마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돼지로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하여 잡지 않았다.

능력은 상황에 따라 바뀐다 - 韓非子중에서 -

백락이 두 사람에게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는 말의 감정법을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외양간에 가서 말을 조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어떤 말을 지적하고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하였다.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의 뒤로 돌아가서 세 번이나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는데도 말은 뒷발질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을 한 사람이 자기가 감정을 잘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이 감정을 잘 못한 것이 아니오. 이 말은 어깨가 굽었고, 앞 무릎이 부어 있소. 원래 뒷발질 잘하는 말은 뒷발을 들어 그 체중을 앞발에 이동시키는 법인데, 이 말은 앞발이 부었으니 뒷발을 들 수가 없는 거요. 당신은 뒷발질 잘하는 말 감정에는 최고인지 몰라도 무릎 감정할 줄은 전혀 모르는군요."

생각해 보면 매사는 의당 그렇게 되어 가는 도리가 있는 법이고, 정세에는 불리한 경우가 있는 법이다. 말의 앞 무릎이 부어 있으면 무거운 체중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알고 있다. 어쨌든 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이기는 하나 우리에 가두어 두면 돼지가 되고 만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 사람도 그 사람에게 불리한 정세에 놓아두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작은 원한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다 -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 중대부에 이사라는 자가 있었다. 왕이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술에 만취되어 복도에 나와 문에 기대어 있었다. 그 때 형벌로 다리가 잘린 문지기가 졸랐다.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있으면 적선하십시오."

이사는 문지기를 나무랐다.

"시끄럽다. 죄를 지어 벌을 받은 주제에 어디서 버릇없이 함부로 구느냐? 손윗사람에게 술을 달라고 조르다니.."

다리가 없는 문지기는 재빨리 사라졌으나 이사가 그 자리를 떠나자 다시 나타나서 마루 끝에 물을 뿌리어 마치 오줌을 싼 것처럼 해두었다. 이튿날 왕이 이것을 보게 되었다.

"이 곳에 소변을 본 것이 누구이냐?"

문지기는 대답하였다.

"잘은 모르겠으나, 어제 중대부께서 여기에 서 계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이사를 처형하였다. 사소한 행동이 목숨을 잃게까지 한다는 것에 놀란다. 앞으로는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교만한 마음을 품고 남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바 있지 않으냐?

천하를 줄 테니 네 목을 달라 - 韓非子중에서 -

초나라 남쪽에 있는 여수라는 강에서 사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훔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사금을 훔치는 자에 대한 법을 만들어 체포되면 시장에 끌고 나가 공개처형을 했는데도 여전히 훔쳐 가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처형된 시체를 강에 버려 강물이 막힐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둑은 그칠 줄 몰랐다. 그보다 무서운 처벌이 없는데도 도둑이 그치지 않은 것은, 도둑질해서 얻는 이익이 있는 반면 반드시 체포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천하를 몽땅 줄 테니 네 목을 내어놓아라."고 했다면 아무리 우매한 사람도 천하를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한 이익은 없다. 그러나 천하를 얻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구멍 뚫을 수 없는 표주박은 필요가 없다 -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에 전중이라는 숨어사는 선비가 있었다. 송나라 사람 굴곡이 그를 만나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선생께서 주장하시기를 남의 은혜로는 먹고살지 않는다고 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표주박을 심는 요령을 알고 있습니다. 그 표주박은 돌처럼 단단하고 구멍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전중은 대답했다.

"표주박의 용도는 구멍을 뚫고 물건을 넣는데 있다. 그런데 구멍을 뚫을 수 없다니 아무짝에 쓸모가 없지 않나. 그런 표주박이라면 필요 없다."

굴곡은 말하였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도 그걸 버릴 작정이었죠."

어쨌든 전중은 남의 덕택에 먹고살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없었다. 이 것은 돌 같은 표주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장군이 사병의 고름을 빨다 - 韓非子중에서 -

오기가 위나라 장군이 되어 중산국을 공격하였는데, 사병 가운데 악성종기로 괴로워하는 자가 있었다. 오기가 무릎을 꿇고 그 종기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 주었다. 그 사병의 모친은 그 말을 듣고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장군께서 당신의 아드님 종기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아드님 종기의 치료를 위해 그토록 수고를 하셨는데 왜 우는 거요?"

모친이 대답했다.

"오기 장군이 그 애 아버지의 종기도 그렇게 빨아준 적이 있었죠. 그 애 아버지는 감격하여 장군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 애도 그렇게 싸우다 죽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웬놈의 멍에가 그렇게 많은가 - 韓非子중에서 -

정현의 사람이 수레의 멍에를 주웠는데 무엇인지 몰라 어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뭘 하는 거죠?"

"그건 멍에라는 거요."

정현 사람이 같은 물건을 또 주웠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거 뭘 하는 거죠?"

"그건 멍에라는 거요."

물어 본 사람은 성을 내며 말하였다.

"아까 물었을 때도 멍에, 또 물어봐도 멍에라니 웬놈의 멍에가 그렇게 많지. 당신이 나를 속이고 있군."

두 사람은 싸움이 벌어졌다.

자기 발을 못 믿는 사람 - 韓非子중에서 -

정나라 사람으로 신발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다. 먼저 자기 발의 길이를 재어 종이에 기록을 하였으나, 그 종이를 잊고 장에 갔다. 시장에서 신발을 보고

"신발의 치수를 적은 종이를 잊었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종이를 들고 다시 시장에 나갔으나 장은 이미 파한 뒤였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여보시오. 신발을 신어 봤으면 됐을 게 아니오."

그 사나이가 대답하였다.

"치수를 적은 종이는 믿을 수 있어도, 내 발은 믿을 수 없소."

말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다 -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 경공이 소해에서 유람을 할 때, 급히 온 특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영이 위독하여 임종하려고 합니다."

경공이 당황하여 일어서려고 하는데, 또 다른 특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경공은 말하였다.

"곧 번차에 수레를 매고, 마부는 한추를 시켜라."

그리하여 수백보를 달렸는데, 경공은 그 마부가 느리다 하여 스스로 말을 몰기로 했다. 수백보를 더 달렸을 때, 그 말이 빨리 달리지 못한다 하여 수레에서 내려 뛰어갔다. 명마 번차의 빠른 발과 마부 한추의 능한 솜씨가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차에서 내려 뛰어가는 자신이 더 빠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 일은 따로 있다 - 韓非子중에서 -

위나라 소왕은 스스로 관리의 일을 집행해 볼 생각으로 맹상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과인이 직접 관리들의 일을 다루어 보고자 하오."

맹상군이 말하였다.

"왕께서 직접 관리의 일을 하시겠다면, 먼저 법전을 숙독하셔야 될 것입니다."

소왕이 법전을 열 장 정도 읽다가 졸려서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깬 왕이 말했다.

"나에게는 이 법전을 읽을 만한 끈기가 없는 모양이오."

도대체, 왕이 정권을 장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신하가 할 일을 하겠다니 졸음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어린 아들을 위해 돼지를 잡다 - 韓非子중에서 -

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갔다. 어린 아들이 따라오며 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라. 집에 가면 돼지를 잡아 삶아 줄 테니."

아내가 장에서 돌아와 보니, 증자는 돼지를 잡고 있었다. 아내는 그 것을 말리며 말하였다.

"애를 달래기 위해서 한 마디 해보았을 뿐인데....."

증자는 말하였다.

"어린애에게는 특히 실없는 말을 해서는 안되오. 애들은 무지하여 부모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어린애를 속인다고 하면, 애에게 사기를 가르치는 것이 되오. 모친이 애를 속이고, 그래서 아이가 모친을 믿지 않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소?"

그리하여 돼지를 잡아 삶았다.

귀걸이로 왕의 마음을 떠보다 - 韓非子중에서 -

정곽군이 제나라의 재상이었을 때 왕후가 사망했다. 그 후 누가 왕후가 될지 몰랐기 때문에 옥으로 된 목걸이를 왕에게 헌상하여, 어떤 여자에게 주어지는가를 보고 왕의 마음속의 여자를 알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설공이 제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제나라 위왕의 부인이 사망했다. 그 때, 후궁에 열 명의 첩이 있었는데 모두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설공은 그 가운데서 어떤 여자를 왕후로 추대할 것인지 왕의 의중을 미리 알고 먼저 그 여자를 권고할 참이었다.

만일 자기가 권고한 여자가 왕후가 될 경우 자기의 주장이 관철된 셈이 되고, 그 왕후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또 만일 자기가 권고한 여자가 왕의 마음에 없을 경우, 자기의 주장은 꺾일 것이고, 새로이 들어선 왕후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왕이 왕후로 삼으려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어 왕에게 권고하려고 옥으로 된 귀걸이 열 쌍을 만들고, 그 가운데 한 쌍은 특히 아름답게 만들어 왕에게 헌상하였다. 왕은 귀걸이를 열 명의 첩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튼날 설공은 왕의 곁에 앉아 있다가 가장 아름다운 귀걸이를 하고 있는 첩을 발견하자, 그 여자를 추천하여 왕후로 택하게 했다.

술집에는 개가 없어야 한다 - 韓非子중에서 -

송나라 사람으로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되도 정확하고, 손님 접대도 잘 했고, 술 맛이 좋고, 간판이 되는 깃발을 높이 세워 두었는데도 술은 팔리지 않고 시어만 갔다. 이상스런 일이어서 잘 알고 지내는 양천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 집의 개가 사나운가?"

술장수가 반문했다.

"개가 사나운 것하고, 술이 안 팔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양천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개를 무서워하기 때문이야. 개가 사나우면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어 술을 사오라고 했을 때 개가 뛰어나와 물게 되고, 손님이 왔을 때 으르렁대며 물려고 한다면 술이 시어질 때까지 안 팔리게 되지."

생각해 보면, 나라에도 개가 있다. 뜻 있는 자가 치국정책을 품고 가서 군주에게 알리고 싶어해도 근신들이 사나운 개처럼 물어뜯는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눈과 귀가 가려지게 되어 뜻 있는 자를 임용하지 못하게 되고 나라는 썩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속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 韓非子 說難篇 -

설득이 어려운 것은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 나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언변이 뛰어나기가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또 말을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하고싶은 말을 다하기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설득의 어려움은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나의 말을 그에게 맞추어야 하는데 있다. 설득해야 할 상대가 명예를 좋아하는데 이익이 많음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절조가 낮고 비천한 자를 만났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 할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두터운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속으로는 이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명예를 높이 여기는 척하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하려 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할 것이며, 또 이익이 많이 생기는 일을 가지고 설득을 하면 속으로는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척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않된다.

이렇게 설득하면 몸이 위태롭다 - 韓非子 說難篇 -

일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은 누설됨으로써 실패한다.

유세자(遊說者) 자신이 꼭 누설하려고 한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 우연히 숨겨야 할 일에 미치는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에게는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척하는 일이 있고, 속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유세자가 그 겉으로 들어난 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임금이 속으로 하고 있는 일도 알게 되면, 그러한 세객은 몹시 위태롭다. 세객이 임금에게 특이한 일을 헌책하였는데 지혜있는 자가 외부에서 추측하여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것을 외부에 누출하는 수가 있다. 임금이 반드시 진언한 자 자신이 누설하였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러한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의 총애를 아직 받기도 전에 자기의 있는 지혜를 모두 말해 버리면, 진언이 시행되어 공이 있어도 진언한 자의 공덕을 잊어버리게 되며, 진언이 시행되지 아니하여 실패하면 의심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을 때 세객이 예의를 밝혀 말함으로써 임금의 잘못을 캐내려 하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임금이 혹 누구의 계책을 가지고 성공하여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는데 세객이 거기에 간여하여 아는 척하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되지 못할 일을 임금에게 강요하거나, 그만두지 못할 일을 중지시키려고 한다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임금에게 대인과 군자를 가지고 논하면, 임금은 자신을 간접적으로 풍자한다고 생각하고, 천한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의 권력을 천한사람들에게 팔려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그 사람의 힘을 빌어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임금이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간단히 생략해서 하면 지식이 없어 졸렬하다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뒤섞어 널리 말하면 말이 많고 꾸밈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을 간략히 대의만을 말하면 비겁하고 나약하여 할말을 다하지 못한다 생각하고, 일을 생각이 넓고 거리낌없이 말하면 비천하며 예의가 없고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설득의 어려움이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

상대의 뜻에 맞추면 설득은 성공한다 - 韓非子 說難篇 -

설득하는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은 상대방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부끄러워 하는 일은 없애줄 줄 아는 것이다. 그에게 사사로운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공의(公義)에 맞는 일임을 넌지시 보여서 그 일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

임금이 마음으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설득자는 그를 위해서 그것을 아름답게 꾸며 설명하고,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함은 졸렬한 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임금이 마음 속으로 높은 이상이 있으나 현실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설득자는 그를 위하여 그 높은 이상이 좋지 못한 점을 들고, 그 잘못을 드러내어 그 것을 하지 않음이 좋다고 말해야 한다.

임금이 자신의 지능을 자랑하고자 한다면, 그 일과 비슷한 다른 예를 들어 여러가지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이쪽의 설에서 많은 도움을 얻게 하고, 거짓 모르는 척 함으로써 지혜를 도와주어야 한다.

빈민을 구휼하고자 함을 납득시키려면 먼저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워 이를 밝히고, 그것이 임금의 사사로운 이익과도 합치된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야 한다.

위험하고 해로운 일을 중단시키고자 할 때에는 그것에 대한 세상의 헐뜯음과 비난을 분명히 드러내 설명하고, 그것이 임금 자신의 근심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임금을 칭찬함에는 칭찬할 만한 임금의 행동과 같은 행동을 한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임금의 행동을 규제하고자 하면 임금의 생각과 같은 다른 계획의 예를들어 그 잘못을 말하여야 한다.

임금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했을 때에는 임금의 행동과 같은 행동을 한 일을 예로들어 해로울 것이 없음을 크게 꾸며서 말해야 하며, 임금이 무슨 일에 실패하였을 때에는 임금과 같은 실패를 한 일을 예로들어 아무런 실책이 없음을 꾸며서 설명해야 한다.

임금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에는 이를 논란함으로써 자신감을 억제시켜서는 안된다. 스스로 결단을 내림에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임금에게는 그 결단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계책을 세우는데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임금에게는 그의 실패한 예를 들어 추궁하지 말아야 한다.

말의 대의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야 하고, 말은 걸리고 얽히는 데가 없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지혜로운 언변을 마음껏 구사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법이 임금에게 친근하면서 의심을 받지 않고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이윤은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는 노예가 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군주에게 쓰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었다. 그러나 몸소 노역을 하지 않고서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 임금을 설득하려는 자가 자신의 말을 요리인이나 노예처럼 비굴하게 함으로써 임금에게 받아들여지고 채용되어 세상을 진흥시킬 수 있다면, 이는 유능한 사람이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고 임금의 총애가 두텁게 되면, 깊은 기밀의 계책을 진언하고도 의심받지 않고, 임금의 잘못을 충고하여도 벌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이익과 해로움을 분명히 분석함으로써 공을 이루고, 곧은 말로 시비를 가림으로써 자신을 빛낼 수 있게 된다. 이와같이 서로 의지하게 되면 설득은 성공한 것이다.

진리의 말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 韓非子 說難篇 -

정나라 무공이 호를 공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딸을 호임금의 아내로 주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하려 하는데 어느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겠는가."

대부 관기사가 대답했다.

"호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공은 몹시 화가나서 "호는 형제의 나라이다. 네 어찌 형제의 나라를 치라고 하느냐." 하고 관기사를 죽여버렸다.

호의 임금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정나라가 자기를 친애한다고 생각하고 정나라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가 이 틈을 타 호를 습격하여 빼앗아 버렸다.

송나라에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비가 많이 내려서 담이 무너졌다. 그의 아들이 말했다.

"담을 새로 쌓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이 들어올 것입니다."

이웃의 늙은이도 역시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날 밤에 도둑이 들어 많은 재물을 잃게 되었다.

그 집안에서는 아들은 매우 지모가 있다고 여기고, 이웃의 늙은이는 의심을 하였다.

이 두사람이 말한 것은 모두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심한 경우는 죽음을 당하고, 또는 도둑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알리느냐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요조는 틀림이 없이 진(晋)나라의 계략을 알아차렸지만, 진(晋)나라에서는 그를 성인이라 감탄하였어도 진(秦)나라에서는 진(晋)나라와의 관계를 의심받아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설득자는 이러한 것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설득하기 전에 신임을 얻어야 한다 - 韓非子 說難篇 -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탄 자는 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밤에 그 사실을 미자하에게 알려 주었다. 미자하는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어질다고 여기면서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월형의 죄를 범하는 것도 잊었구나" 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미자하가 임금과 더불어 과수원을 노닐면서 복숭아를 따먹다가 맛이 달다고 다 먹지 않고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나를 사랑하여 맛있는 것도 제가 다 먹지 않고 나에게 먹게 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미자하의 고운 얼굴빛이 시들고 총애가 식어져서 임금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말하기를 "미자하는 본래부터 그랬다. 일찍이 나의 수레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도 있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라고 말하였다.

미자하가 한 행동은 처음과 달리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전에는 착하다고 했던 일이 뒤에는 죄를 받게 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지혜있는 말이 받아들여져 친해함을 더하게 되지만, 군주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지혜있는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죄를 받으며 소원함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간언을 하고 담론을 하는 사람은 임금이 미워하고 좋아하는 바를 살핀 뒤에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용이란 동물은 유순하여 길들이면 사람이 탈 수도 있을 만큼 유순하다. 그러나 턱밑에 지름 한자 정도되는 역린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시 역린이 있어 유세객이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으면 훌륭한 설득이라 할 수 있다.

논공행상은 정확히 되어야 한다 - 韓非子 : 難篇 -

진나라 문공이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구범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상대는 사람 수가 많고 우리는 적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구범이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군자는 번잡한 예의를 지키는 것을 충실하고 성실하다고 하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거짓으로 꾸며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속여야만 합니다."

문공은 구범을 내보내고 옹계를 불러 물었다.

"장차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저 쪽은 사람이 많고 우리는 적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옹계가 말했다.

"사냥할 때 숲을 태워버리면 많은 짐승을 잡을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모든 짐슴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속임수로써 백성을 대하면 한 순간의 승리는 차지할 수 있어도 결코 백성들의 신망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공은 옹계를 내보낸 다음 구범의 모책에 따라 초나라와 싸워 승리를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데 옹계의 벼슬을 앞세우고 구범을 뒤로 했다. 여러 신하들이 궁금히 여겨 말하였다.

"전쟁은 구범의 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진언을 채택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포상을 뒤로하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문공이 말했다.

"이것은 그대들이 알 바가 못된다. 구범은 한때의 권도를 말한 것이고, 옹계는 만세의 이익을 말한 것이다."

공자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문공이 패자가 됨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한 때의 임기응변을 알고, 또 만세의 이익을 알았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옹계의 대답은 문공의 물음에 합당하지 못하다. 무릇 물음의 대답에는 인유하는 바가 있으며, 물음의 크고 작음과 느리고 급함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 묻는 것은 높고 큰데 낮고 작은 것으로 대답한다면 현명한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문공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대적할 계책을 물었는데, 백성을 신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대답은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이 못된다.

게다가 문공은 한 때의 권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또한 만세의 이익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전쟁을 하여 이기면 나라가 편안하고 몸이 안정되며, 군대는 강해지고 위엄이 선다. 비록 뒤에 백성을 신망을 얻는 일이 있더라도 이 보다 더 큰 이익은 못될 것이다. 또한 만세의 이익을 취한다 해서 환란이 닥쳐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전쟁을 하여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는 멸망하고 군대도 괴멸되며, 몸은 죽고 이름은 사라진다. 당장의 죽음에서 벗어나기도 바쁜 판국에 어느 겨를에 만세의 이익을 기다리겠는가. 만세의 이익을 기대함은 바로 오늘의 승리에 있으며, 오늘의 승리는 적을 속이는 데 있다. 적을 속이는 것이 바로 만세의 이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옹계의 대답은 문공의 물음에 맞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다 문공은 구범의 말도 구범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거짓으로 속임을 꺼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 백성을 속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을 속이라는 말이다. 적이란 정벌할 나라를 말한다. 뒤에 비록 다시 신망을 얻지 못한다 한들 무엇을 조심할 것이 있겠는가.

문공이 옹계를 먼저 포상한 것은 그에게 공이 있어서인가? 초나라 군사를 무찔러 승리를 얻게 된 것은 구범의 계략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옹계의 말이 착해서인가? 옹계의 말은 착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구범은 양쪽을 겸하였다. 충실하다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요. 성실하다는 것은 백성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이미 사랑하고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보다 더 착한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속임수를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쟁의 계략이었을 뿐이다. 구범은 앞에서는 착한 말을 하고 뒤에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구범은 두 가지 공이 있는데도 논공에서 뒤로 밀리고, 옹계는 한가지 공도 없는데 우선하여 포상하였다. 그런데도 문공이 패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 공자는 논공행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겠다.

상과 벌로 다스리면 반드시 다스려진다 - 韓非子 : 難篇 -

역산의 농민들이 밭의 경계를 서로 침범하였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경작하자 1년 만에 밭고랑 싸움이 바로잡아졌다. 황하 물가의 어부들이 낚시터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고기를 잡자 1년 만에 낚시터를 연장자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이의 도공이 만든 그릇은 품질이 나쁘고 일그러졌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질그릇을 굽자 1년 만에 그릇이 견고해졌다고 한다.

공자가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밭갈고, 물고기 잡고, 질그릇 굽는 것은 순의 본직이 못된다. 그런데 순이 가서 이런 일을 한 것은 나쁜 습속을 고쳐 주고자 함이었으니 순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로구나. 몸소 노고로운 일을 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래서 성인의 덕화라고 하는 것이로구나.」

어떤 이가 유자에게 「그때 요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요는 천자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요를 성인이라고 함은 어째서인가. 성인이 사리를 밝게 살피어 천자의 지위에 있음은 장차 천하로 하여금 그릇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농민과 어부는 다투지 않고, 질그릇은 일그러지지 않게 되었다면 순은 또 무슨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켰단 말인가. 만일 순이 백성들의 나쁜 습속을 고쳐 주었다면 이는 곧 요임금에게 실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을 어질다고 한다면 요임금의 명찰함을 부인해야 하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한다면 순의 덕화를 부인해야 할 것이니, 양쪽이 동시에 병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자가 있었다. 자기 방패를 자랑하여 「나의 방패의 견고함으로 말하면 어떤 물건도 이것을 뚫지 못한다」하고, 또 창을 자랑하여 「내 창의 예리함은 어떤 물건이라도 뚫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는가」하니, 그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어떤 물건에도 뚫어지지 않는 방패와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세상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요와 순의 양쪽을 다 칭찬할 수 없음은 창과 방패를 자랑하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또 순이 백성의 그릇된 습속을 고침에 있어 1년 만에 한 가지씩이면 3년에 세 가지의 허물을 바로잡은 셈이 된다. 순의 수명은 다할 때가 있고 천하의 그릇된 것은 끝이 없다. 유한한 몸으로써 끝이 없는 허물을 쫓는다 해도 시정되는 것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과 벌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면 반드시 이것이 이루어진다. 명령을 내려 「법의 규정에 맞는 자는 상을 주고 맞지 않는 자는 죽인다」고 하면, 법령이 아침에 내려 저녁이면 습속이 고쳐질 것이고, 저녁에 내려 아침이면 고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열흘이면 온 천하가 다 고쳐질 터인데 어찌 1년이나 기다릴 것이겠는가.

그렇거늘 순은 이런 방법을 요에게 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명령에 따르도록 하지 아니하고 몸소 노고하였으니, 이 역시 백성 다스리는 술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몸소 노고함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킨다는 것은 요순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권세를 잡고 앉아서 맥성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용렬한 임금에게도 하기 쉬운 일이다.

장차 천하를 다스리고자 함에 있어 용렬한 군주도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요순도 하기 어려운 방법을 말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정치를 말할 수가 없다.

정당한 형벌은 많아도 나쁘지 않다 - 韓非子 : 難篇 -

제나라의 경공이 안영의 집에 들러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집이 작고 시장과 가까우니 그대의 집을 예장의 동산으로 옮기도록 하라."

안자가 두 번 절하고 사양하여 말하였다.

"신은 집이 가난하여 시장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아침저녁으로 시장에 다녀야 하므로 먼 곳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경공이 웃으며 물었다.

"그대의 집안이 시장에 익숙하다고 하니 물가의 비싸고 싼 것을 아는가."

이때 경공은 형벌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안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발(발목 베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신는 신)은 비싸고, 보통 신은 쌉니다."

경공이 물었다.

"어째서 그러한가."

"형벌을 받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공은 놀라 낯빛이 변하면서 「과인이 그처럼 포악하단 말이냐」하고, 이에 형벌 중 다섯 가지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안자가 목발의 값이 비싸졌다고 한 것은 정말이 아니고, 방편으로 그런 말을 함으로써 형벌이 많은 것을 중지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데서 오는 병폐이다. 대체로 형벌이란 것은 그것이 정당하면 많아서 나쁠 것이 없고, 부당하면 적더라도 많은 것이다. 따라서 안자가 형벌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고 너무 많다고 한 것은 정치의 술수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온 병폐이다.

폐하여 달아나는 군사는 백 명 천 명을 처벌해도 오히려 도망을 멈추지 않는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림에는 형벌을 지나치다고 걱정할 만큼 사용해도 간악한 짓이 그대로 없어지지 아니한다.

안자는 형벌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살피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많은 것만 들어서 말하였으니 이 또한 그릇되지 아니하였는가.

대체로 잡초를 아끼면 벼이삭에 손실을 가져오고, 도둑에게 은혜를 베풀면 양민을 해치게 만든다. 지금 형벌을 늦추고 너그러운 은혜를 베푼다면, 이는 간사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정치하는 도리가 못된다.

명분없는 상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근본이다 - 韓非子 : 難篇 -

제나라의 환공이 술에 취하여 그의 갓을 잃어버렸다. 환공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흘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 관중이 말했다.

"이것은 나라를 가진 임금에게는 수치가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왜 바른 정치를 가지고 그 수치를 씻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환공은「좋다」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죄수들을 다시 논죄하여 가벼운 자는 풀어 주었다. 사흘을 지나자 백성들은 「임금님 임금님. 왜 또다시 갓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관중은 환공의 수치를 서민들에게서 씻었지만 군자들에게서는 수치가 생기게 했을 뿐이다. 환공으로 하여금 창고의 곡식을 풀어 빈민들에게 주고 죄수들을 다시 살펴서 가벼운 죄인을 석방하게 한 것이 정당한 도리가 아니라면 그것으로써 수치를 씻을 수는 없는 것이요, 그것이 정당한 도리라면 환공은 의를 묵혔다가 갓을 잃은 뒤에야 이를 행한 셈이니 환공이 의를 행한 것이지 갓을 잃은 수치를 씻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비록 갓을 잃은 수치를 서민에게서 씻었다 할지라도 군자에게는 의를 저버리고 행하지 않았다는 수치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창고를 풀어 빈민들에게 쌀을 내준 것으로 말하자면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준 것이요, 죄수들은 다시 논죄하여 가벼운 죄인을 석방했음은 허물을 벌하지 않은 셈이 된다. 대체로 공이 없는데 상을 주면 백성들이 위를 향하여 구차하게 요행을 바라게 되고, 허물을 벌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징계되지 못하여 쉽사리 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수치를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는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 韓非子 : 難篇 -

정자산이 새벽에 외출하여 등장거리를 지나다가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자산이 마부의 손을 눌러 수레를 멈추고 듣다가 한참만에 아전을 보내 그 여인을 잡아다가 심문한즉 제 손으로 자기 남편을 교살한 여자였다. 다른 날 마부가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자산이 대답했다.

"그 울음소리에 뭔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은 자기가 친애하는 사람에 대하여 처음에는 병들면 근심하고, 죽음이 가까워 오면 두려워하며, 이미 죽어버리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죽은 자를 곡하는데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에게 간악한 바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자산의 정치는 역시 부산할 수밖에 없겠구나. 간악한 것을 꼭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뒤라야 알게 된다면 정나라에서 간악한 것을 적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형리에게 맡기지도 않고 이것저것 참조하는 방법을 살피지 아니하며, 떳떳한 법도와 표준을 밝히지도 아니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총명에 의지하며 지혜와 생각을 수고롭게 하여서야 간악한 것을 알아낸다면, 역시 정치하는 술수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사물은 많고 지혜는 적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지혜란 모든 것을 두루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물은 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은 많고 윗사람은 적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임금이 모든 신하의 일을 두루 다 알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에 인유하여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몸을 노고하게 하지 않아도 일은 잘 처리되며 지혜와 생각을 쓰지 않아도 간악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송나라에 이런 말이 있다.

「예는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를 반드시 쏘아 떨어뜨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활의 명수인 예일지라도 꼭 그런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온 천하에 새그물을 친다면 새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체 간악한 것을 알아냄에 있어서도 또한 큰 그물만 있으면 그 하나도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방법을 익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속으로 살피는 것을 가지고 화살로 삼고 있으니, 자산은 되지도 않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를 해치게 된다」고 할 말은 자산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남을 관찰하되 관찰 당하지 마라 - 韓非子 : 觀行篇 -

옛 사람이 제 눈으로는 스스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거울로 얼굴을 보았으며, 지혜로 자신을 알기에 부족하였기 때문에 도로써 자신을 바로잡았다. 거울이 흠을 드러냈다고 해서 허물 될 것이 없고, 도가 잘못을 밝혔다고 해서 미워할 것은 없다. 눈이 있어도 거울이 없으면 수염과 눈썹을 바로 다듬을 수 없고, 몸이 도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미혹을 알 수가 없다.

서문표는 자신의 성미가 급함을 알았기 때문에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마음을 누그러트렸고, 동안우는 마음이 너무 완만하였기 때문에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마음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넉넉한 것을 가지고 부족함을 채우고 장점을 가지고 단점을 잇는 사람을 일러 현명한 임금이라고 한다.

천하에 꼭 믿어야 할 이치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지혜만으로 성립시키지 못할 일이 있고, 둘째는 힘만으로 들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셋째는 강한 것만으로 이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임금과 같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오획과 같이 센 힘이 있다 하더라도 남의 도움을 얻지 않고서는 제가 자기 몸을 들지 못하며, 맹분·하육과 같은 강함이 있다 하더라도 법술이 없이는 항상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세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있고, 일에 따라서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오획이 천근은 가볍게 여기면서 제 몸을 무겁게 여기는 것은, 그의 몸이 천근보다 더 무거워서가 아니라 사세가 들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주가 백 보나 떨어진 것을 쉽게 보면서도 제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백 보는 가깝고 눈썹은 멀어서가 아니라 사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은 오획이 스스로를 들지 못한다고 하여 추궁하지 않으며, 이주가 제 눈썹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곤경에 빠뜨리지 않고 될 수 있는 사세에 따라 쉬운 방법을 찾는다. 그러므로 적은 노력으로 공명이 이루어진다.

천시의 운행에도 차고 비는 일이 있고, 일에는 이로운 것과 해치는 것이 있으며, 생물은 나고 죽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이 무리하게 될 수 없는 세 가지 경우의 일 때문에 희노를 내색하면 금석처럼 절개가 굳은 선비라도 마음이 그 임금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며, 성현의 무리라도 임금의 마음의 얕고 깊음을 넘볼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현명한 임금은 남을 관찰하고 남이 나를 관찰하지 못하게 한다. 요임금도 혼자서 일을 이를 수 없고, 오획도 제 몸을 들 수 없으며 맹분·하육도 저절로 이길 수 없고 방법과 수단을 써야 한다는 사리를 밝게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행동을 관찰하는 방법은 더할 여지가 없다.

남을 믿음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 韓非子 : 備內篇 -

임금된 이의 근심거리는 남을 믿는 데에 있다. 남을 믿으면 남에게 제압을 당한다.

남의 신하된 자는 그의 임금에 대하여 핏줄이 이어진 육친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세에 얽매여 섬기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남의 신하된 자는 그 임금의 마음을 엿보기에 잠시도 쉴 사이가 없는데, 임금은 태만하고 오만하게 그 위에 앉아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임금을 위협하고 임금을 시해하는 신하가 생기게 되는 까닭이다.

임금이 되어 지나치게 자기 아들을 사랑하면, 간신이 그 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태는 조나라 혜문왕에게 붙어서 문왕의 아버지 무령왕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임금이 되어 아내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간신은 그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시는 진나라 헌공의 애첩 여희에게 붙어서 헌공의 후계자인 신생을 죽이고 여희의 아들 해계를 세웠다.

임금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아내와, 가장 친애하는 아들도 오히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밖에 다시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또 만승의 나라의 임금이나 천승의 나라의 임금에게 있어 그 후비나 부인으로서 자신의 아들이 태자로 봉해졌을 경우 간혹 임금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수가 있다.

이는 어찌하여 그러한가. 대체로 아내라는 것은 핏줄을 나눈 육친이 아니다. 사랑하면 친근하여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소원하여진다. 속담에 이르기를 「그 어미를 좋아하면 그 아들도 귀여워서 끌어안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어미를 미워하면 그 아들도 버린다」는 말이 된다.

남자는 50세가 되어도 호색하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는 30세가 되면 아름다운 자태가 시들어 버린다. 아름다움이 시든 여자로서 호색한 남자를 섬기게 되면 자신이 소외되고 천대받지나 않을까를 의심하고, 자기의 아들이 임금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지나 않을까를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곧 후비나 부인이 그의 임금이 죽기를 바라게 되는 소이이다.

어머니가 태후가 되고 아들이 임금이 되면,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못한 일이 없고 하기 싫어 금지하고자 하면 그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또한 남녀간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대로 자행할 수 있으므로 임금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으며, 그리고 만승의 큰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임금을 독살하고 몰래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이 생기게 하는 소이이다. 그러므로 <도올춘추>에 말하기를, 「임금으로서 병들어 죽는 자는 전체의 반도 못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것을 모르니 그러한 환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죽음을 이롭게 여기는 자가 많으면 임금은 위태롭다.

이익은 애증보다 앞선다 - 韓非子 : 備內篇 -

왕랑은 말을 사랑하고 월왕 구천은 사람을 사랑하였다. 사람을 사랑한 것은 싸움에 쓰기 위함이요, 말을 사랑한 것은 타고 달리기 위한 것이다. 의사는 사람의 상처를 잘 빨아 주기도 하고 남의 피를 머금기도 하는데, 그것은 육친처럼 친애해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레 만드는 사람이 수레를 만들면 남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목수가 관을 만들면 사람이 일찍 죽기를 바란다. 수레 만드는 사람은 어질고 목수는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부귀해지지 않으면 수레를 사지 않을 것이요,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야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비·부인·태자가 무리를 이루어 임금이 죽기를 바람은, 임금이 죽지 않으면 자기들의 권세가 성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정으로 임금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임금이 죽어야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된 이는 자기가 죽으면 이익이 있게 될 자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겉으로는 밝은 빛을 둘렀지만 해와 달을 해치는 설여는 속에 들어 있다. 또 미워하는 자를 방비하더라도 화단은 사랑하는 자에게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군왕은 사실을 참조하지 않은 일을 거론하지 않으며, 평소에 덕진 음식이 아니면 들지 않는다.

먼 곳의 일은 귀로 듣고 가까운 일은 눈으로 보아서 안과 밖의 과실을 자세히 살피며, 말의 서로 같고 다름을 살펴서 붕당의 대립 관계를 알아낸다.

일의 결과가 서로 부합하는가를 조사하여 진언한 일의 실적에 책임을 따진다. 그리하여 뒤에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지난번 진언한 말에 부응하는가를 살펴서, 법에 따라서 민중을 다스리고 여러 사람의 말의 단서를 가지고 서로 참조하여 살핀다.

선비가 요행으로 상을 받는 일이 없고, 자기의 직분을 넘어서 행동하는 일이 없게 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죽이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간사한 자가 사욕을 부려볼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권한은 빌려주어서는 안된다 - 韓非子 : 備內篇 -

요역이 많으면 백성이 고통스럽다. 백성이 고통스러우면 권세가 일어난다. 권세가 일어나면 부역의 면제가 많아진다. 부역의 면제가 많아지면 귀인이 부자가 된다. 이와 같이 부역으로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귀인을 부자되게 하며, 임금의 권세를 일으켜서 신하에게 빌려줌은 천하의 장구한 이익이 못된다.

그러므로. 부역이 적으면 백성이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하면 밑에 있는 신하에게 무거운 권한이 없게 된다. 신하에게 무거운 권한이 없으면 권세도 없어진다. 신하의 권세가 없어지면 덕이 임금에게로 돌아간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큰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은 끓어올라 없어져도 불은 여전히 성하게 타오른다. 그리하여 물은 본래 불을 이기는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법치로써 간사함을 금지할 수 있다 함도 또한 물이 불을 이기는 것보다 명백하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신하가 가마솥과 같은 짓을 하여 법의 시행을 막고 있으니, 법은 홀로 가슴속에서만 밝을 뿐, 그래서 간사함을 금지하는 법의 직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상고로부터 전해 오는 말과 춘추의 기록을 보면, 법을 범하고 반역하여 일으킨 크게 간사한 일 중에 존귀한 지위에 있는 신하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는 법령을 두루 갖추어 실시한다든지 형벌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신분이 낮고 천한 자들에게만 해당한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절망하고 호소할 데가 없다. 대신들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서로 두둔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한동아리가 된다. 그리하여 속으로는 서로 친하면서도 겉으로는 서로 미워함으로써 사심이 없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귀가 되고 눈이 되어 임금의 빈틈을 노린다.

임금은 사람의 장막에 가리워져서 실정을 얻어들을 수가 없다. 임금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권은 없고, 신하가 법을 전단하여 제 마음대로 시행한다. 주나라의 천자가 이러한 임금의 실례이다.

임금이 치우치게 신하에게 권세를 빌려주면 상하가 위치를 바꾸게 된다. 이것은 신하에게 임금의 권세를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화씨의 옥 - 韓非子 : 和氏篇 -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가져다가 초나라 여왕에게 올리니, 여왕이 옥인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인이 「돌입니다」하니, 여왕은 화씨가 거짓말로 속인다고 하여 그의 왼쪽 발을 베어 버리게 하였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화씨는 또 그 옥돌을 가지고 가서 무왕에게 올렸다. 무왕은 옥인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인이 또 「돌입니다」하니 무왕은 또 화씨가 속인다고 하여 그의 오른쪽 발을 자르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화씨가 그에 그 옥돌을 안고 초산 아래에 가서 사흘 밤, 사흘 낮을 슬피 우니, 눈물이 다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계속하였다. 임금이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베는 형벌을 받은 사람은 많다. 너는 어찌하여 그처럼 슬피 우느냐."

화씨는 대답했다.

"나는 발 베인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보배인 옥을 돌이라고 부르고 정직한 선비에게 속인다는 죄명을 씌우니 그것을 내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문왕이 이에 옥인을 시켜 그 옥돌을 다듬게 하니, 보옥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그 옥을 「화씨지벽」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익에 상반되는 것은 싫어한다 - 韓非子 : 和氏篇 -

대체로 주옥은 임금이 몹시 얻고자 애쓰는 것이다. 화씨가 올린 옥돌이 비록 아름다운 옥은 아닐지라도 임금에게 해될 것은 없다. 그렇건만 오히려 두 발을 베인 뒤에야 비로소 보옥으로 논정되었다. 보옥을 논정하기도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이 법술에 대하여는 반드시 화씨벽 얻기를 애쓰는 만큼 법술로써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사리 사욕과 간사함을 금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러한즉, 도를 지닌 자, 즉 법술가가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만 제왕의 박옥(즉 법술)을 아직 임금께 올리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임금이 법술을 쓰면 대신이 정권을 함부로 독단할 수 없게 되고, 근신들이 감히 권력을 팔 수 없을 것이다. 관에서 법을 시행하면 놀고 있는 백성들이 농경에 달려가야 하고, 놀고 있는 선비들은 전진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게 될 것인즉, 법술이란 것은 바로 여러 신하들과 사민이 화난으로 여기는 바가 된다.

따라서 임금이 대신들의 논의를 어기고 백성들의 비방을 무시하며, 홀로 도언(즉 법술의 말)에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즉 법술가가 비록 죽음에 이를지라도 법술의 도는 결코 그 진가를 논정받지 못할 것이다.

법을 괴롭게 여기고 구속받기를 싫어한다 - 韓非子 : 和氏篇 -

옛날에 오기가 초 도왕에게 초나라의 풍속을 가리켜 말하기를, 「대신이 지나치게 세력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봉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그들이 위로는 임금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못살게 굴게 될 것이니, 이것은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군대를 취약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봉군의 자손으로 3대가 되거든 그 작록을 회수하고 모든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며, 긴급하지 않은 관원을 폐지함으로써 정선되고 노련한 선비를 기르도록 하십시오」하였다. 초 도왕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1주년 뒤에 도왕이 죽었다. 오기는 초나라에서 4지를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옛날 상군은 진 효공에게, 백성 10호를 한 통으로 연결하고 5호를 한 반으로 묶어서 서로 고발하고 연대 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설치하며, 또 시서를 불태워 버리고 법령만을 밝게 할 것과, 사삿집의 청탁을 막고 국가의 노역을 권장하게 할 것과, 벼슬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백성이 없게 하고, 농사짓고 싸움에 참가하는 선비를 표창하라고 가르쳤다. 효공이 그대로 실행하니, 이로써 임금은 존엄하고 편안하며 나라는 부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뒤에 효공이 죽자 상군은 거열의 형을 당하였다.

초나라는 오기의 헌책을 채용하지 아니하여 국토가 깎이고 내란이 일어났으며, 진나라는 상군의 법은 시행하여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말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기는 4지를 찢기고 상군은 거열을 당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대신은 법을 괴롭게 여기고 간세한 백성들은 잘 다스려지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신은 권세가 무거워지기를 탐하고, 간세(奸細)한 백성들이 혼란한 것을 편안하게 여김이 진나라나 초나라의 풍속보다도 심하며, 임금은 초 도왕이나 진 효공처럼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니 법술을 지닌 선비가 어떻게 오기·상군 두 사람이 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법술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세상은 어지럽고 패업을 성취하는 임금은 없게 되는 까닭이다.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것과 위험하게 하는 것 - 韓非子 : 安危篇 -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방법이 일곱 가지가 있고,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길이 여섯 가지가 있다.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첫째 상과 벌은 옳고 그른 것에 따라 주어야 한다. 둘째 화와 복은 선과 악에 따라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셋째 죽이고 살리는 것은 법령에 따라서 시행해야 한다. 넷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현명한 사람인가 불초한 사람인가를 살필 뿐이고 사랑하고 미워함을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슬기로운 사람인지 실증을 가지고 살필 뿐이고 남의 비방이나 칭찬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믿음성이 있고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

국가를 위태한 데로 몰아넣는 길은 첫째 법을 안으로 굽혀서 일을 처리하는 것, 둘째 법을 법 밖으로 확대하여 처리하는 것, 셋째 남의 해를 자신의 이로 삼는 것, 넷째 남의 화난을 즐거워하는 것, 다섯째 남의 편안한 것을 위태하도록 만드는 것, 여섯째 사랑해야 할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미워해야 할 자를 멀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삶의 즐거움을 상실하고 죽음이 중난한 것임을 망각한다. 사람들이 삶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면 임금을 존중하지 않고, 죽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면 임금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귀에 거슬린다 충언을 듣지 않으면 위태롭다 - 韓非子 : 安危篇 -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다 어느 본보기에 대하여 지능을 다 바치게 하고 법도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 진력하게 한다면, 그러한 군주는 군대를 동원하여 싸우면 이기고, 가만히 지키고 있으면 나라가 편안하게 될 것이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일을 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게 하고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게 하면 소인은 적어지고 군자는 많아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직은 길이 보전되고 국가는 오래도록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난폭하게 달리는 수레 위에는 공자는 타고 있지 않을 것이며, 엎어진 배 밑에는 백이는 없을 것이다(군자는 위태한 곳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령은 나라의 배와 같고 수레와 같은 것이다. 호령이 바르고 나라가 편안하면 지혜롭고 청렴한 풍습이 생기고, 호령이 난폭하여 나라가 위태하면 쟁탈과 비열한 행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마치 주리면 먹고 추우면 입는 것처럼 인정의 본연의 상태에 따라 시행한다면, 특별히 명령을 내리는 일이 없어도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

선대의 현명한 군왕들이 다스리는 도리를 서적에 남기었는데, 그 법이 이치에 순당하므로 후세에서도 감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으로 하여금 굶주린 때에 음식을 버리고 추울 때에 의복을 버리게 한다면, 비록 명분·하육과 같은 용감한 자일지라도 그 명령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법령이 자연의 사리를 무시한다면 비록 도리에 순당하더라도 법으로서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굳세고 날랜 자도 실행할 수 없는 법령이라면, (그 법령에 대한 반항이 생길 것이니) 임금이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이미 다 없어진 것을 구하여 마지않는다면,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백성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면 법을 경시하게 된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그것이 경시되면 공명도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듣건대, 옛날 편작은 병을 치료할 때에 칼로 뼈를 찔렀으며, 성인이 위태로운 나라를 구제할 때에는 충성된 말로써 귀에 거슬리게 하였다고 한다. 뼈를 찔렀으므로 조금 아프기는 하였으나 장구한 이로움이 몸에 있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게 말하였으므로 조그만 거슬림은 마음에 있어도 장구한 복은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의 이는 아픔을 참는 데 있고, 용맹하고 의젓한 임금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복으로 삼았다. 고통을 참았기 때문에 편작이 의술을 다할 수 있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오자서는 충언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몸을 장수하게 하고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다.

병들어 치료의 아픔을 참지 못하면 편작의 오묘한 의술을 놓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듣지 않으면 성인의 의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장구한 이를 먼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없고 공명도 오래 가게끔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국가의 안위는 정의에 달려 있다 - 韓非子 : 安危篇 -

임금 된 이가 스스로 요임금처럼 착한 임금이 되도록 극기하지 못하면서, 신하들이 오자서처럼 충신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폭군 주왕이 모든 은나라 사람들을 비간과 같은 충신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하였으면 주왕은 나라를 잃지 않고 신하들은 망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금 된 이가 신하의 힘을 알맞게 저울질하지 않아서 전성자 같은 역신이 있게 했으면서 신하들이 모두 비간처럼 되기를 바라고만 있으니 나라가 한결같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

요·순 같은 착한 임금을 물러나게 하고, 걸·주 같은 폭군을 세운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장점을 즐길 수 없고 단점을 근심하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각자의 장점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국가에는 공이 없을 것이며, 단점을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다면 백성들은 삶을 즐겁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공 없는 임금이 살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백성들을 다스린다면, 백성을 잘 다스려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웃사람은 아랫사람을 부릴 수가 없고 아랫사람은 위를 섬길 길이 없을 것이다.

국가의 안전과 위험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고, 국가의 강함과 허약함에 달려 있은 것은 아니다. 국가의 존망은 국가 실정의 허술하고 알찬 데 달려 있고, 국민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제나라는 만승의 큰 나라였으나 이름과 실망이 서로 맞지 않아서, 위로 임금의 지위가 공허하여 나라 안에 이름만 있을 뿐 실권이 이름에 차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빼앗게 되었다.

걸은 천자였다. 그러나 시비를 판정하는 일정한 표준이 없었다. 공적 없는 자에게 상을 주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를 등용하니, 거짓을 꾸며 속이는 짓을 대견한 것으로 여겼다. 죄 없는 자를 죽였으니 곱추는 날 때부터의 타고난 병신인데 등을 쪼개게 하였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옳다 하고 타고난 천성을 그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가치 판단이 뒤집혔기 때문에 작은 나라(은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 이기게 된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내정을 확고하게 하므로 외교에 대하여 실패하지 않는다. 안에서 실패하고서 먼 나라에 멸망을 당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빼앗을 때에 조정에 버린 것을 줍듯 하였다. 은나라가 그 어진 신하들을 조정에서 버리지 않았더라면 주나라가 은나라의 국토 안에서 감히 터럭 끝만큼의 작은 것도 얻기를 바라지 못하였을 것이니, 더군다나 감히 지위를 바꾸기를 바랐겠는가.

현명한 임금의 도는 법에 충실하고 그 법은 사람의 마음에 충실하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임금이 백성에게 군림하면 백성들은 그를 본보기로 삼아 떠나간 뒤에는 사모한다. 요임금은 아교풀이나 칠과 같은 굳은 약속을 그때 세상에게 한 일이 없었으나 그의 도는 행하여졌으며, 순임금은 송곳을 세울 만한 작은 영지도 후세에 남기지 않았으나 덕이 맺어져서 길이 풀리지 않으니, 능히 도를 옛날에 세워서 만세에 덕을 남기는 이를 현명한 임금이라고 한다.

법칙 없이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 韓非子 : 用人篇 -

옛날의 사람을 잘 쓰는 이는 반드시 천시에 따르고 인정에 순응하며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천시에 따르면 힘쓰는 것이 적고 공을 세우며, 인정에 순응하면 형벌이 줄어들고 명령이 행하게 된다. 상벌이 밝으면 백이와 도척을 뒤섞어 혼란하게 하는 일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흑백이 또렷이 구분된다.

잘 다스려진 나라의 신하는 나라에 공을 이룩하여 그것으로써 높은 지위에 오르고, 관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인정받아 직책을 받으며, 법도에 알맞도록 힘을 다하여 일을 책임진다. 신하된 자는 다 자기의 능력에 알맞아서 자기의 관직을 잘 감당하고 자기의 임무를 거뜬히 수행한다. 그리하여 벼슬과 직책이 자기의 능력에 차지 않는다는 불만을 마음에 품지 않으며 겸관(兼官)의 책임을 임금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원한을 품고 일으키는 변란이 없고, 밖으로는 거짓 복종하는 전국의 환란이 없다.

밝은 임금은 각자의 일이 서로 간섭하고 침범함이 없게 한다. 그런 까닭에 다투어 소송하는 일이 없다. 선비로 하여금 벼슬을 겸임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기술이 발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이 같도록 만들지 않기 때문에 쟁송이 없다. 쟁송이 그치고 기술이 발달하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힘을 겨누지 않으며, 빙탄(氷炭)처럼 상반되는 것이 한데 뒤섞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는 서로 헐뜯고 상하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정치의 극치인 것이다.

법과 술을 버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정치를 한다면 요 같은 성군도 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규구를 버리고 함부로 자기의 어림짐작으로 한다면 해중과 같은 공교한 공인도 한 개의 수레바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며, 척촌을 버리고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하려고 한다면 왕이 같은 능숙한 공인도 길이의 반과 너비의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등 정도의 임금으로 하여금 법술을 지키게 하고, 졸렬한 공장으로 하여금 규구 척촌을 지키게 한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임금 된 이가 현명하고 공교한 사람도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보통이거나 졸렬한 이도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는 것을 지킨다면 사람의 힘을 다 활용할 수 있어서 공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으로 다스리면 위험하다 - 韓非子 : 用人篇 -

밝은 임금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상의 제도를 세우고, 피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하여 벌을 설정한다. 그런 까닭에 어진 사람은 상에 격려된다. 그리하여 자서가 충간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화를 당하는 일이 없고, 불초한 자에게도 벌이 적어서 타고난 곱추에게 등이 굽다고 성내어 그의 등을 쪼갬과 같은 부당한 형벌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경은 평지에 있어 깊은 계곡에 빠지는 일이 없으며, 어리석은 자는 고요함을 지켜서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하의 사이에 은정이 맺어진다.

옛 사람이 말하였다. 「마음은 알기 어렵고, 즐겨하고 성내는 것은 절도에 맞게 하기 어렵다」라고. 그러므로 깃발로 표시하여 눈에 보이게 하고 북을 쳐서 귀에 말하며, 법으로써 마음에 가르치는 것이다. 남의 임금 된 이가 이러한 세 가지의 쉬운 방법을 버리고 한가지 알기 어려운 마음을 행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성냄은 위에 쌓이고 원망은 아래에 쌓일 것이다. 성냄을 가득 쌓은 임금이 원망을 가득 쌓은 아랫사람들을 통어한다면 양편이 모두 위태할 것이다.

밝은 임금의 표시는 보기 쉬우므로 약속이 성립된다. 그의 가르침은 알기 쉬우므로 말이 실용된다. 그의 법은 실행하기 쉬우므로 법령이 시행된다. 이 세 가지가 확립되고 위에서 사심이 없으면 아래에서 법을 준수할 수 있어 나라는 다스려질 것이다. 표시를 바라보고 움직이며, 먹줄을 따라 깎고, 찢어진 데를 봐서 꿰맨다. 이렇게 하면 위에서는 법에 따르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일로 위업을 부려 해독을 끼치는 일이 없고, 아래에서도 오직 법에 따라 행동하므로 자신의 어리석고 졸렬한 것으로 벌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밝음에 처하여 성냄이 적고, 아래에서는 충성을 다하며 범죄가 적을 것이다.

상과 벌은 명확해야 한다 - 韓非子 : 用人篇 -

이런 말이 있다. 「대체로 일을 처리하면서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것은 요임금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라고. 그나마 세상에는 일찍이 일이 없는 때는 없었다.

남의 임금 된 자로서 사람에게 작록 주기를 인색하게 하며, 자신의 부귀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그러한 임금과는 함께 위급한 나라를 구제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임금은 연치를 격려하고 인의를 치켜올려야 한다. 옛날 개자추는 작록이 없으면서 의로 문공의 출분에 수행하였다. 문공이 굶주림을 참지 못하니 개자추는 어진 마음에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다. 그런 까닭에 임금은 그의 덕을 잊지 못하여 서적에 그의 이름을 드러냈다.

임금은 사람들이 공적인 일에 진력하는 것을 기뻐하고, 사리를 위하여 임금의 위엄을 빼앗는 것을 괴로워한다. 신하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벼슬을 얻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한 몸으로 두 가지의 직책을 지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신하가 괴로워하는 바를 제거하고, 임금의 기뻐하는 바를 세운다. 그렇게 하면 상하의 이가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임금의 권위가 신하의 사문에 돌아가는 것을 살피지 않으며, 국가의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생각하며, 작은 죄를 무겁게 처벌하고, 작은 과실을 오래도록 잊지 않으며, 길이 남을 업신여기며, 일신의 즐거움을 남몰래 취하고 자주 화를 끼친 자에게 은덕을 베푼다면 이것은 손을 끊어 버리고 옥으로 잇는 꼴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임금의 지위를 바꿔 버리는 환란이 있는 것이다.

임금 된 이가, 하기 어려운 것을 설정하여 놓고,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죄 준다면 사사로운 원한이 생길 것이다. 신하된 자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기회를 잃고 해낼 수 없는 일을 받들어 행하게 된다면 숨은 원한이 맺어질 것이다.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지 않고 근심과 슬픔을 가엾게 여기지 않으며 기쁘면 소인을 칭찬하여 어진 이와 불초한 자를 함께 상주고, 성내면 군자를 헐뜯어 백이 같은 현인과 도척 같은 도둑을 함께 욕보인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반역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안으로 자기 나라의 백성은 미워하고 밖으로 노나라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면 연나라 백성은 쓸 수 없을 것이고 노나라의 백성도 붙지 않을 것이다. 백성이 미움을 받으면 나라 일에 진력하여 공을 이루기를 힘쓸 수 없을 것이고, 노나라 백성을 좋아함을 얻게 되었더라도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타국의 임금을 친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백성과 신하들은 임금의 빈틈을 엿보게 되고 임금은 고립될 것이다. 빈틈을 엿보는 신하로서 고립된 임금을 섬기게 한다면 이런 것이 위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이 없는 다스림은 원망을 만든다 - 韓非子 : 用人篇 -

과녁은 버리고 함부로 발사하면 비록 적중하였더라도 잘 쏜 것이 아니며, 법제를 버리고 함부로 성낸다면 비록 살육을 자행할지라도 간사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죄는 갑이 지었는데 화는 을에게 돌아간다면 숨은 원한이 맺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극히 잘 다스려진 나라에서는 상벌은 있으나 즐겨하고 성내고 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형법이 있으나, 죽이는 것을 독충이 쏘는 것처럼 성냄에 맡겨 참혹하게 죽이는 일은 없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간사한 사람이 복종하는 것이다. 화살을 쏘면 과녁에 적중하고, 상벌을 내리면 부계를 맞추는 것처럼 공과 죄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요가 다시 난 것 같고 예가 다시 선 것 같다.

이와 같으면 위에는 은 주가 무왕에게 멸상되고 하 걸이 탕왕에게 멸망당하는 것과 같은 근심은 없을 것이다. 신하에게는 비간이 충간하다가 주에게 죽임을 당함과 같은 화는 없을 것이다. 임금은 베개를 높이 하여 일이 없고 신하는 자신의 일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도는 천지를 덮고 덕은 만세에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충실하여야 한다 - 韓非子 : 用人篇 -

대체로 임금 된 이가 틈과 구멍을 막지 않고 적토와 백토로 장벽을 장식한다면 사나운 비와 빠른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발등에 붙는 불을 끄지 않고 팽분·하육과 같은 용사가 죽을힘을 다해 지켜 주기를 바라며,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내란을 조심하지 않고, 먼 국경에 견고한 성벽을 쌓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현인의 진언은 채용하지 않고 밖으로 천리의 먼 곳에 있는 만승의 나라와 외교를 맺는다면 회오리바람이 한 번 일어난 때에는 맹분·하육 같은 용사도 미처 구제할 겨를이 없고, 외교를 맺은 먼 나라의 구원도 미처 올 시간이 없을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화난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남의 임금 된 이를 위한 충성된 계책은 반드시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노나라 사람을 좋아하지 말고 제나라 백성을 사랑하며, 근세의 일로 하여금 옛날의 현인을 사모하지 말게 할 것이며, 먼 월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중국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려고 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해야만 상하가 서로 친애하여 안으로 공을 세우고 밖으로 이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의 생애와 사상

I. 韓非의 시대상황

봉건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周나라가 천하의 제후를 통솔한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제후들 가운데에서 강성한 자가 나타나 스스로 覇者가 되어 여러 제후들을 지배하는 春秋戰國時代가 시작된다. 춘추시대에는 오히려 尊周攘夷의 기치를 들고 나와서 宗主國인 周室을 높이고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것은 겉으로나마 구호로 삼았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구호마저 포기하였다. 그야말로 名分도 義理도 없이 그저 弱肉强食을 위한 힘의 대결이 있을 뿐이었다. 서로 치고 싸우는 동안에 백 수십개나 되었던 나라들은 전국시대의 말기에는 드디어 秦楚燕齊韓魏趙의 이른바 戰國七雄으로 줄어들었다. 이 일곱 나라들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또 천하를 제패하기 위하여 피의 角逐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정치이론과 縱橫無盡한 역량을 가진 人材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드디어 百家爭鳴의 상태를 빚어내었다. 누구나 자기의 정치 사상이나 경륜을 어느 군주에게 進言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당장에 부귀를 누릴 수 있고 자기의 사상이나 포부를 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諸子百家라고 하는 思想家가 나와 서로 自家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들 설에는 儒家 . 道家 . 陰陽家 . 名家 . 墨家 . 縱橫家 . 法家등이 대표적이며 이중에서 가장 정치사상으로서 비중이 크고 또 서로 청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儒家와 法家이다. 法家는 멀리 춘추시대의 菅仲에서 유래하며, 전국시대에는 商앙의 法 . 申不害의 術 . 愼到의 勢 등의 사상이 있었고, 이것이 韓非에게 계승되었다.

II. 韓非子의 生涯

한비자(韓非子: B.C. 약 280∼233)는 한(韓)나라 귀족 출신이며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筍子)의 제자이다.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기원전 233년 한나라가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 진나라에 강화 사신으로 파견된 한비자는 순자의 같은 제자이면서 당시 진나라의 재상이던 이사의 모함 때문에 옥중에서 자살했다. 그는 당대에 자기의 정치 철학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 철학은 그를 모함했던 이사에 의해 진나라의 지도적 사상이 되었으며,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정치 철학으로 작용하였다.

  여러 학파의 說을 채용하고 비판하여 제자백가의 최종 주자가 되었던 韓非子는 오직 문장에 의해서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였고 부자유한 辯說을 보충하듯이 문장이 예리하였다. 타고난 말더듬이었던 그는 기원전 3세기 초엽에 韓王 安의 庶公子로 태어났다. 전국 7웅 가운데서 작고 약한 나라였던 韓은 특히 강국 秦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이를 늘 개탄하던 한비자는 당시의 대표적 학자였던 筍子에게로 가서 수업을 하였다. 그 결과 순자의 성악설과 노자의 무위자연설을 받아들이면서 商앙과 申不害의 '법'과 '술'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법술'이론을 완성하고 이것을 국가 통치의 근본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반드시 형벌을 엄중하게 하여 법으로써 다스리고 쓸모없는 무리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한비자의 간언을 韓王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의 시황은 달라서 그의 <孤憤>과 <오두>논문을 보고 " 이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후에 韓이 평화의 사신으로 한비자를 보내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였으나 李斯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주장은 秦始皇이 강력한 專制體制를 확립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문장을 모은 것이 『韓非子』 55편이다.

III. 韓非子의 思想

한비는 이전 국가통치의 최고원리인 禮를 분명하게 法으로 대체시켜 제자백가 중 法家를 종합한 전국시대 마지막 대학자이다. 그가 주장한 法治사상은 한마디로 法과 術로 요약된다.

一. 도덕에 대한 法의 우위

한비자가 배움을 받은 순자는 예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유가의 사람이었을 뿐, 도덕을 부정할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비자에 이르러 여러가지 각도에서 법의 도덕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이 강조된다. 이것은, 정치의 유일한 방법은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法律 萬能의 정치 사상이다. 韓非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란 철두 철미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本性이 善이란 설은 믿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그 속의 속마음을 파헤쳐 보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이 가슴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익은 항상 상반되기 마련이다. 君主의 이익과 신하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으며, 군주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 사이에도 이해는 상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각자의 노리고 추구하는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특히 임금과 신하는 본래부터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 남과 남의 사이이며, 임금과 백성의 사이는 지배와 피지배자의 힘에 의한 관계이다. 그러한 신하들에게, 백성들에게 충성심만을 기대하는 정치란 성립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하와 백성들을 仁義니 道德이니, 仁政이니, 恩愛니 하는 것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은 법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을 바르게 세우고 그것을 잘 운용한다면 천하의 臣民들은 법의 궤도 안에 매이게 되어 나라의 질서는 저절로 井然하게 될 것이다. 법이 잘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는 형벌을 엄하고 중하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잘 운용한다는 말은 법을 그야말로 만인에게 평등가게 적용하여 어떤 경우에도 추호만큼의 私도 두지 말아야 하며, 조금의 寬容이나 溫情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의 정치 사상이다.

二. 법 운용의 기술(術) 1. 刑名參同의 설

법이 아무리 정비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임금된 자는 이익이 상반할 수도 있는 신하들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오직 임금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여 주도록 신하들을 잘 부려야 할 것이다. 그 신하를 잘 부리는 데는 術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術의 제 1은 형명참동이라 하는 것이다. 形은 구체적인 실질, 名은 표면의 名義라는 의미이어서, 名實이 일치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느 직명을 가진 관리가 그 직명에 따라서 실적을 거두고 있는가 어떤가를 검토하는 것이, 즉 형명참동이다. 그 직명 보다도 이하의 실적을 거둔 경우에는 물론 벌하지만 그 직명을 벗어난 실적을 거둔 경우에도 벌한다. 이 직명을 넘은 실적이 있는 자를 벌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것 같지만 사실은 법의 일률적 적용이라고 하는 점에서 근대법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법의 운용은 재판관의 인정에 의한 것이 모범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관의 개성이라 하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강해지고 법 적용의 공평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손상된다. 근대법은 이같은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인정이라고 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법문을 기계적 . 형식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하고자 한다. 한비자의 형명참동의 사상은 근대법의 정신을 앞서 가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한비가 말한 法은 오늘의 국민을 主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법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때의 법이란 군주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러니 法과 術을 아울러 사용하면 군주의 지배는 더욱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三. 법 운용의 기술 2. 虛靜無僞

한비자의 법술, 즉 법 운용의 기술 중 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법의 운용자인 군주가 가능한 한 虛靜無爲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여, 도가의 노자 사상을 채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대단히 기묘한 결합이다. 법가는 극단적인 통제 주의의 입장에 있는 것에 대해서 도가는 無爲自然을 역설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양 극단에 있는 사상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면 한비자는 노자의 말을 자기의 입장에 유리하게 해석해서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비자는 군주는 虛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정하면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물을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또 군주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스스로를 욕망의 밖에 두어버리면 신하가 이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군주는 무위이어야 한다. 군주는 형명참동이라는 무기가 있으므로 정치의 실무는 모두 신하에게 맡기어 조용히 이것을 관찰하면 된다. "명군이 위에서 무위하면 군신은 아래에서 두려워 긴장한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生道篇)

이와같이 허정무위라 하는 말, 그것은 노자와 똑같지만 그 내용은 훨씬 법가적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거리지 않는다고 하는 법가특유의 음험함이 살펴진다. 따라서 한비자가 이용한 노자의 사상은 노자 본래의 성격과는 다르다.

IV. 韓非子에 대한 評價

韓非 政治哲學의 긍정적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객관적 정치규범으로 한비 이전의 정치철학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있다. 한비 정치철학의 효능은 실제정치의 운용에서 새로운 처방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儒墨道 三家는 생명의 價値理想에 있어서 우월성이 있고 지극히 높은 경지와 체계가 있으나 戰國같은 亂世에 대처하기 위해서 꼭 실행해야 할 구체적 조치나, 능히 적용될 수 있는 운용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儒家에서는 人性의 본원을 발휘해야 한다는 成德敎가 되었고, 墨家는 天志를 본받고 표준으로 삼는 겸애주의가 되었으며, 道家는 자연에 돌아가는 無爲의 정치이상을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이상들은 결국 객관화와 제도화가 되지 못하였고, 그것이 객관적 정치체제와 정치국면이 되도록 다리를 놓고 추진할 수 없어서 끝내 현실 정치에 낙착되지는 못 했다. 즉 법이라는 매개를 통한 객관적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한비는 이러한 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둘째는, 법의 표준과 제도화, 勢로써 통치권력의 확보, 術에 의한 통치방법의 모색을 통하여 정치를 道德敎化의 영역에서 멀리 독립시켰다. 적어도 한비는 정치를 도덕교화로 부터 독립시켜 무엇이건 금할 수 있는 勢와 인재등용하여 그들의 공로를 감責하는 術의 운용은 하나의 국가를 강하게 할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봐야 한다. 한비는 그의 정치철학에서 君勢를 강화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국토가 넓고 國事가 복잡한 전국시대에 군세가 强固하지 못하고, 통치권력의 통치 중심이 견실하지 못하면, 법의 표준성도 확고하게 성립되지 못하고, 術의 治道를 실행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군세를 강고하게 함이 정치철학의 첫번째 전제이다. 그러나 法과 術만을 唯一 無二의 방법으로 하는 한비자의 정치사상은 그 사상 자체에, 시행의 과정에서, 또 결과에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점이 많다. 인간은 그 본성은 철두철미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은 儒敎에서 말하는 性善說과는 너무나 상반된 견해이다. 아마 한비의 性惡說의 유래는 그의 스승인 筍子의 영향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惡하다고 하였으며 이것은 전면적으로 인간을 不信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世道 人心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하다. 또 仁義니 도덕이니 寬容이니 온정이니 하는 것을 일고의 여지도 없이 배격하였으니 그것은 인간 사회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너무나 냉담하고 비정하고 서로의 감시와 敵對의 冷戰場으로 보게 한다. 실상은 인간이란 반드시 그렇게 서로 노려보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고 있다. 또 인간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비정한 일면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善으로 유도하여 인간 사회를 따뜻한 것으로 만들어 살맛이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고 지도자가 필요하고 敎化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정치 사상은 어떻게 하면 군주의 지배를 완벽하게 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국민 생활을 따뜻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된다. 국민의 참마음에서 나오는 협력을 기대하지 않고 힘만을 편중하고 마음의 소중한 것을 살피지 않는 정치라고 하겠다. 이 점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힘만의 정치는 오래 유지 못하다. 秦王政은 한비의 정치사상을 채용하여 한때 부국 강병을 이룩하고 천하를 힘으로 통일하여 천자가 되었었다. 그는 유명한 暴君 진시황이 되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焚書坑儒를 감행하고, 냉혹하고 까다로운 법을 세웠으며, 만리장성을 쌓고, 천하의 쇠붙이를 죄다 모아 거대한 쇠사람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이 兵器를 만들 여지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겨우 二代만에 멸망하였다. 종래에는 『한비자』에서 가혹한 벌의 시행을 주장하므로서 人性이 무시된다고 하여 惡書라는 지적을 받아 금기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2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부분의 정치사상이 겉으로는 儒家思想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체제는 실로 法家的요소가 많았다. 즉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였다는 점이 이것이다.

한비자

◦ 한비자(韓非子) 저자 : 한비자(韓比子, BC 280-233)

생 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秦 . 楚 . 燕 . 齊 . 韓 . 魏 . 趙)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韓非: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 . 도가 . 명가 . 법가 . 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 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말재주가 없어 자신의 뛰어난 문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문장을 모은 저서 [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 . 위 . 조 삼진(三晋)지역이다.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부국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 . 위 . 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존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나라 법가학파의 정치사상은 그 중심이 경제에 있었다.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管子)]에 보면, 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晋)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지는데, '법치주의(法治主義)' '술치주의(術治主義)' '세치주의(勢治主義)'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法術)'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이사와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이사는 위나라의 문후(文侯)를 섬겨 변법을 추진했고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申不害)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愼到)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 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公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嚴刑主義)'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强兵)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법치의 운영 방법으로 술치와 제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法 . 術 . 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刑名同參)'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名)과 실제의 공로(刑)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刑名論)'은 명가(名家)의 실재론(實在論)과 상통한다.

[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韓子)라 불렀는데 당(唐)의 한유(韓兪도 한자(韓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 . 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 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이병(二柄)]편 : 밝은 임금은 刑과 德 두 대의 손잡이를 잡고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 신하 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 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刑이요 상이란 德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

2. [비내(備內)편 :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도 믿어서는 아니 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원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3. [고분(孤憤)편 : 중신(重臣)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術'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4. [설난(說難)]편 :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행시켜야 성공하며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두] . [십과(十過)]편 :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5.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仁義)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하는 자.

6.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7.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

8.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 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순간 얻는 상인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9.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10.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

11.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12. 음악에 빠지는 것

13. 지나친 욕심

14. 여락(女樂)에 빠지는 것

15.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 다니는 것

16.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17.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 된 자가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의의 및 영향

우리는 앞에서 유가와 도가 그리고 여기서 법가사상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 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도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公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私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중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커다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보면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刑名法術)'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일단 달성하게 된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한비자가 나라를 살린다 - 경제학자가 제안하는 통쾌한 한국개혁론/최윤배 - 청년사 (2000)

 한비자는 현재의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한비자

세월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해간다. 그러니 정치하는 방법도 그 시대에 따라 적절하게 변해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이고 융통성 없는 완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촛불의 효과가 컸다고 해서 대낮에도 촛불을 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선왕(先王)의 인의(仁義)정치로써 전쟁과 살벌과 이해와 권모술수로 뒤얽힌 난세를 다스리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오직 엄격한 법만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한비는 인류의 문화가 단순하고 몽매한 것에서부터 점점 복잡하고 고도의 단계를 옮겨 온 역사의 자취를 회고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여건이 변하고 바뀌어 어제의 최선이 오늘의 최선일 수 없고, 홍수 때의 대책이 가뭄일 때의 대책이 될 수 없음을 논리 정연하게 논술하고 송나라의 고사를 예로 들어 선황의 도니 인의니 하는 따위의 정치방법을 복고하려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시대의 환경과 그 여건에 따라 대책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현대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할 금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고시대에는 인구가 적고 재화가 풍족하였으므로 살기 위한 투쟁을 할 필요가 없었으며 왕의 지위도 오히려 귀찮은 자리였기 때문에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현령 정도의 낮은 벼슬자리로도 충분히 치부할 수 있어, 자손 대대로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낮은 자리도 남에게 양보는커녕 떨쳐버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산중에서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먹는 사람들은 2월의 누제나 섣달의 납제 때에는 서로 물을 주고받았지만, 이에 반해 습지에 살면서 수해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일꾼을 사서 도랑을 만든다. 그러므로 흉년이 든 해 봄이면 어린 동생에게도 밥을 아끼지만, 풍년이 든 해 가을에는 어떤 손님이든지 꼭 밥 대접을 한다.

이는 자기의 혈육을 소홀히 하면서 손님에게 극진히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물자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재물을 가볍게 여긴 것은 그만큼 재물이 흔했기 때문이요, 지금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빼앗으려 하는 것은 그들이 비열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천자 자리를 거절한 것은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제후들이 땅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은 천한 것이 아니라 그 때 왕의 무거운 권세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은 많고 적은 것은 것을 따지고, 야박하고 후한 것을 논하여 정치를 한다. 따라서 형벌이 가볍다고 하여 인자한 것이 아니며, 처형이 엄중하다고 해서 잔인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걸맞게 행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일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니 대비하는 것도 그 변화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한비가 말하는 "오두"란 나라를 좀먹는 다섯 가지 벌레를 의미한다.

그 첫째는 선왕의 도리와 인의를 내세우는 유학자, 둘째는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언론가로서의 종횡가, 셋째는 멋대로 날뛰는 협객, 넷째는 뇌물을 바쳐 병역을 기피하는 환역자, 다섯째는 비양심적인 상공민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한비가 가장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유학자이며, 환역자나 상공민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한비는 경개지사(耿介之士), 즉 절개가 있어서 세속과 구차하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경개지사라고 추켜올린 것은 법술가(法術家)를 지칭한 것이다.

결국 법술가의 등용이나 법술의 시행과 사용에 방해가 되는 이 다섯 부류를 제거해야 할 좀벌레로 단정한 것이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현상의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한 그 병폐를 없애는 처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느 국가나 어떤 사회, 그리고 어떤 기업이나 단체에도 그런 좀벌레는 존재하게 마련이고, 각기 사종에 따라 대처 방법은 다르더라도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한비의 주장은 만고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그 문장을 보면 ---------초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초산(楚山)에서 옥돌을 주워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장이에게 그것을 감정하도록 했는데 옥장이는 한낱 돌이라고 했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며 그 왼발을 자르는 형벌을 주었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감정결과 역시 돌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왕은 그의 오른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옥돌을 안고 초산아래에서 통곡을 했다.

사흘낮 사흘 밤을 울어 눈물이 마침내 피로 흘렀다. 문왕이 그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묻도록 했다.

"세상에는 다리를 잘린 사람이 많소.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렇게 슬피 울고 있소?" 하자 화씨는 대답했다.

"저는 다리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보옥을 돌이라 부르고, 곧은 선비를 사기꾼이라 부르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자 문왕은 옥장이를 시켜 그 옥돌을 다듬게 하여 보배를 얻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을 화씨의 구슬이라 부르게 되었다.---대저 주옥(珠玉)은 임금이 무척 얻고자 하는 것이다. 화씨가 올린 옥돌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임금에게 나쁠 것은 없다.

그로나 두 발을 잘린 뒤에야 보물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와 같이 보물을 인정받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지금 임금들의 법술(法術)에 대한 태도는 화씨가 구슬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다지 급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하들과 백성들의 사사로움을 금할 수 있을까. 그러하니 올바른 도를 가진 법술의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왕들에게 옥돌을 아직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술(術)을 쓰면 대신들이 정권을 함부로 독단할 수 없게 되고, 측신들이 감히 권력을 팔 수 없을 것이다.

관청에서 법을 시행하면 놀고 있는 백성들이 밭갈이에 달려가야 하고, 놀고 있는 선비들은 싸움터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게 될 것인 즉, 법술이란 것은 바로 신하들과 사민(士民)들이 화산으로 여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금이 대신들의 뜻을 어기고 백성들의 원성을 무시하며, 홀로 도언(道言)에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술가가 비록 죽음에 이르더라도 법술의 도는 절대 그 진가를 논정(論定)받지 못할 것이다.

---옛날 오기(吳起)가 초나라 도왕(悼王)에게 초나라의 풍속에 관해 아뢰었다.

"대신들의 권력은 너무 무겁고, 땅을 봉해 받은 봉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위로는 임금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학대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나라가 빈궁해지며 군사가 약화되는 길입니다. 봉군의 가솔들은 삼대 째에 작위와 녹을 회수하고, 여러 관리들의 녹도 줄이며, 별 필요가 없는 벼슬은 과감히 없애버리고 그 경비로 잘 훈련된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대로 실천하다가 일년만에 죽었다. 그러자 오기는 초나라에서 죽음을 당했다.

상앙(商앙)은 진(秦)나라 효공(孝公)에게 말했다.

"열 집 또는 다섯 집을 한 조로 하여 조원(組員)들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인보제를 시행하십시오. 또한 ≪시경≫≪서경≫ 같은 유서(儒書)를 불태우고, 법령을 엄하게 하고, 권세가들의 사사로운 청탁을 막고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시상하십시오. 본업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엽관운동을 하는 자들을 금하고,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나면 싸우는 자들을 표창하십시오."

효공이 이대로 실행하자 임금은 존귀하고도 편안해졌고, 나라는 부강해졌는데 8년만에 죽었다.

그러자 상앙은 진나라에서 수레에 몸을 매어 찢기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오기를 불용하였으므로 땅을 빼앗기고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진나라는 상앙의 법을 시행함으로써 부강해졌다.

이 두 사람의 말은 참으로 합당하다. 그런데도 오기는 사지가 찢기고, 상앙은 수레의 매어 찢기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대신들은 법이 괴로웠고 낮은 백성들은 다스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보면 대신들은 오직 권세에 눈이 어둡고 비천한 백성들은 혼란에 안주하고 있으니 이는 진나라와 초나라의 습속보다 더욱 심한 것이다. 게다가 도왕이나 효공같이 귀를 기울이는 임금도 없으니 법술을 지닌 선비가 어찌 오기와 상앙이 당했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법술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세상이 혼란해지고 패왕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인 것이다.

---무릇 유세가 어렵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지혜로써 임금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아니고, 또 나의 변설로써 나의 뜻을 다 밝히기가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 말이 감히 빗나가 뜻을 다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무릇 유세의 어려움은 나의 유세로써 설득하려는 임금의 마음을 알아 가지고 나의 설득이 그에게 합당할 수 있음에 있는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가 요순과 같은 명예를 높이 여기는 데도 부국강병과 같은 공리(功利)로써 그를 설득하면, 곧 너절하게 보여 비천한 자를 만났다고 여기어 반드시 멀리 버림을 당할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가 부국강병과 같은 공리를 높이 여기는 데도 높은 명예로써 그를 설득하면 곧 내가 때를 보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 사정에 어두운 자로 여겨져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가 속으로는 공리를 중히 여기면서 겉으로는 명예를 높이 사는 사람인 데도 명예로써 설득하면, 곧 겉으로는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멀리할 것이다.

반대로 공리를 중하게 하는 것으로써 설득하면 속으로는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 겉으로는 그 사람을 버릴 것이다.

이런 것들을 잘 살피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

---대저 일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모의는 누설하면 실패한다. 반드시 자기가 누설한 것이 아닐 지라도 임금과 말하다가, 말이 그 숨기고 있는 일에 미치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람은 신상이 위험하다.

임금이 겉으로는 어떤 일을 드러내놓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유세자가 겉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이미 하는 그 일까지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

유세자가 임금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계획하는 것이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하도라도 지혜 있는 자가 밖에서 추측하여 이것을 알게되면, 일이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 분명히 유세자가 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임금의 총애가 그다지 두텁지 않은 데도 유세자의 말이 아주 지혜로우면 그 유세가 시행되어져 공적이 있어도 그의 덕분임을 잊게 되며, 유세가 시행되지 아니하여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의심을 받게 된다.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귀한 사람이 과오의 단서가 있을 때 유세자가 예의를 갖추어 말함으로써 그 과오를 들춰낸다면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귀한 사람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서 계책을 얻어서 그것을 자기 공로로 삼으려 할 때 유세자가 그것을 알게되면, 이러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롭다.유세자가 억지로 임금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되고, 그만둘 수 없는 일을 그만두게 하면, 이런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롭다.임금에게 대인군자를 가지고 논하면 임금은 자신을 간접으로 풍자한다고 생각하고, 천한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의 권력을 천한 사람들에게 팔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그 사람의 힘을 빌어 발판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며, 임금이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한다.말을 간단하게 생략해서 하면 지식이 없어 졸렬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예를 들어 폭넓게 얘기하면 말이 많고 꾸밈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을 간략하게 그 뜻만을 얘기하면 비겁하고 나약하여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고 하고, 일의 생각이 넓고 거리낌이 없으면 비천하여 예의가 없고 거만하다고 한다.이것이 곧 설득의 어려움이니 이를 알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다.

---대체로 설득하는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은 상대방이 자랑으로 여기는 바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부끄러워하는 일은 없애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임금이 사사로이 서두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公義)를 내세워 그것을 서두르게 해야 한다.

그 임금이 속으로는 나쁘게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을 때에는, 유세자는 그를 위하여 그의 미덕을 칭찬해 주면서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결점이라고 말해 줘야 한다.

그가 마음속으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유세자는 그 임금을 위하여 그 잘못을 듣고 그 일의 나쁜 점을 드러내어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임금이 지혜와 능력을 뽑아내려고 한다면 그 임금을 위하여 다른 종류의 예를 들어 채택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어서 임금으로 하여금 나의 주장을 따르도록 하면서 나는 모른 체함으로써 임금이 그 지혜의 바탕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타국과 공존해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곧 반드시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것을 밝히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임금의 개인적인 이익에도 합당한 것임을 은밀하게 드러내어야 한다.자국의 해로운 일을 말하려 한다면 곧 그 일이 해롭고 옳지 못한 것임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임금 개인의 걱정과도 부합하는 것임을 은밀하게 암시해야 한다.타인 중에 임금과 같은 행동이 있다면 칭찬해 주고, 다른 일 중에 임금의 계획과 같은 것이 있다면 경탄해야 한다.임금과 같은 결점을 가진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이 반드시 약점만은 아니라는 것을 꾸며주고, 임금과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잘못이 아님을 밝게 꾸며주어야 한다.

임금이 자신의 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면 그가 하기 어려운 일 같은 것을 들어서 그를 거슬려서는 안되며, 그가 자신의 결단을 내림에 용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를 노하게 해서는 안된다.

임금이 스스로 자기의 계략을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실패를 들어서 그를 추궁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대의(大義)가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말씨가 걸리는 데가 없은 후에야 지혜와 변설을 마음대로 떨칠 수 있는 것이다.이 유세법이야 말로 임금과 친분이 두터워져서 의심을 받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말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옛날에는 이윤(伊尹)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百里奚)가 포로가 되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임금에게 임용될 것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사람은 성인(聖人)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벼슬을 하려고 자기의 몸을 더럽혀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내 말 때문에 요리사나 포로가 되었더라도 그것으로써 임금에게 기용되어져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면, 이는 벼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수치로 여길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임금과의 친분이 이미 두터워져서 아무리 묘한 계책을 세워도 의심받지 아니하고, 정면으로 간쟁(諫爭)을 해도 죄를 주지 않게 되면 이해를 명백히 분석하여 그 공을 이루어 주고 시비를 곧바로 지적하여 그의 몸을 꾸며준다. 이렇게 임금은 의심하지 않고 죄를 주지 않으며, 신하는 공을 이루고 몸을 꾸미게 되면 이것이 유세의 성공이다.

──옛날에는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오랑캐를 정벌하려 했다. 그래서 먼저 그 딸을 오랑캐 나라 임금에게 시집 보냄으로써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서 무공은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한바탕 전쟁을 하고 싶은데 먼저 누구를 쳐야 되겠소?"

대부(大夫) 관기사가 대답했다.

"오랑캐 치는 것이 좋겠나이다."

그러자 무공은 노하여 그를 죽이고 나서 말했다.

"오랑캐 형제와 같은 나라요. 그대가 이를 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망발인가!"

오랑캐 임금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정나라는 자기와 무척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을 굳혀 전혀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군대가 오랑캐 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송(宋)나라에 한 부자가 있었다. 어느날 비가 와서 담이 무너지게 되자 그 아들이 말했다.

"담을 새로 쌓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이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집에 사는 노인도 그 아들과 같은 말을 했다.

과연 밤이 되자 도둑이 들어 재물을 몽땅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그 아들을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웃집 노인은 의심했던 것이다.

관기사와 이웃집 노인 두 사람의 말은 둘 다 옳다. 그러나 크게는 죽음을 당하고 작게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니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 요조(繞朝)의 말은 합당한 것이어서 진(晉)나라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생각했지만, 진(秦)나라에서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설득자는 바로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옛날에는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는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는 사람은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서 위급한 상황이 되자 어떤 사람이 듣고 밤중에 가서 미자하에게 고하였다. 미자하는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섰다. 그런데 뒤에 이 사실을 듣고 임금이 말하기를,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한 나머지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잊었도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임금과 더불어 과수원에서 노닐 때 복숭아를 먹다가 너무 달기에 다 먹지 않고 그 반을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기를,"정말 과인을 사랑하는 도다. 자기의 입맛을 잊고서 과인을 먹여 주는구나." 하였다. 그러다가 미자하가 아름다움이 시들고 임금의 사랑이 없어진 후에 임금에게 말하기를, "너는 언젠가 과인을 속이고 과인의 수레를 탄일이 있었고, 또 전에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었다." 하였다.

미자하의 행동에는 처음과 끝이 변함이 없이 한결같았다. 그런데 전에 어질다고 여겼던 것이 뒤에 가서 죄가 된 것은 임금의 사랑과 임금의 변화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총애가 있으면 그 지혜가 합당해져 더욱 친근해 지고, 임금의 미움이 있으면 그 지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죄가 되고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해서 임금에게 간언을 하거나 변호를 하려는 선비는 임금의 사랑과 미움을 잘 살핀 후에 유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대저 용(龍)이란 동물은 성질이 유순하여 잘 길들여지면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멱 밑에는 직경이 한자나 되는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다. 만약 그것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이처럼 임금도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으니 유세자가 임금의 거꾸로 박힌 비늘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거의 훌륭한 설득이라 할 수 있다.

──현명한 임금이 그 신하들을 통솔하는 방법은 두 자루(二柄)가 있을 뿐이다.

두 자루라고 하는 것은 형벌과 은덕(恩德)을 말한다.

형벌과 은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벌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은덕이라 이른다. 신하된 사람은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을 내리면 기뻐한다. 그러니 임금이 직접 형벌과 은덕을 사용하게 되면 모든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달라붙는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가 않다.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좋아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 그에게 상을 내린다. 그러면 임금이 상벌의 위엄과 이로움을 자기로부터 나가지 않게 하고, 신하에게 맡겨 그 상벌을 행하게 되면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된다.

이것은 임금이 형벌과 은덕을 잃은 환난이다.

대저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까닭은 그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랑이가 그 발톱과 이빨을 떼어서 개가 그것을 쓰도록 하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 당할 것이다.

임금이란 형벌과 은덕은 가지고 신하를 제어하는 것이다. 지금 임금이 그것을 신하에게 주어 쓰도록 한다면 이는 임금이 반대로 신하에게 제어를 당할 것이다.

──임금이 신하의 간특함을 금제코자 하여, 곧 형(刑)과 명(名)을 상세히 대조한다는 것은 말(言)과 일(事)의 두 가지이다.

신하되는 자가 그 의견을 말하면 임금은 그 말에 좇아서 그에게 일을 맡겨 오로지 일에 대해서 그 성공의 결과를 다짐한다. 그리하여 결과가 그 일에 딱 맞고 또 일이 그 말에 딱 맞으면 상을 주는 것이며, 결과가 이와 반대면 벌을 내린다. 이는 형과 명을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의 그 말은 크고 공적이 적으면 벌을 내리는 것이니, 이는 공적이 적다고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뭇 신하들의 그 말은 적고 공적이 크면 또 벌을 내리는 것이니, 이는 공적이 그 말한 것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하의 마음이란 반드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임금을 섬기는 체함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얻기에 중점을 두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임금이 그 호오(好惡)의 심정을 은밀히 숨기지 아니하고, 또 그 욕망하는 단서를 숨기지 않아 신하로 하여금 그것으로 인해 임금을 침범케 하면 제나라 재상 전상(田常 )이 그의 임금 간공(簡公)을 죽이는 것 같은 일을 하기에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호오를 드러내 뵈지 않으면 뭇신하들이 아첨할 방도가 없으므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라고 하였으니 뭇신하들이 그 본바탕을 드러내면 임금은 눈이 어두워질 염려가 없게 된다.

──법술을 알고 있는 선비는 반드시 멀리 보고 넓게 살핀다. 넓게 살피지 못하면 사람의 비밀을 밝혀낼 수가 없다. 법에 능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굳세고 뚜렷하며 철저하고 곧다. 철저하고 곧지 못하면 사람의 간사함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신하된 사람으로 명령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고, 법에 따라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자는 이른바 중신은 아니다. 중신이란 임금의 명령이 없이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법을 어기면서 사리를 추구하고, 나라에 손해를 끼치면서 사리사욕을 채운다. 그들의 세력은 능히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네 의사에 따르도록 하니 이런 것이 소위 중신들이다. 법술을 아는 인사는 밝게 살핀다. 그들의 말을 임금이 들어서 정책에 반영된다면 장차 중신들의 숨은 정상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법에 능통한 인사는 강직하다. 그들의 말이 임금에게 채용된다면 장차 중신들의 간사한 행동을 바로잡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술을 알고 법에 능한 인사가 등용되면 벼슬 높은 중신들은 반드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을 아는 인사와 실권을 쥐고 있는 중신들과는 공존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는 것이다.

권세가들이 중요한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게 되면 안팎이 모두 그들의 부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제후는 그를 통하지 않고는 일의 성과를 올릴 수가 없으므로 적국이 그를 위하여 칭송하고, 백관들은 그를 거치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으므로 뭇신하들이 그에게 부림을 받게 된다.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군주에게 접근하지 못하므로 좌우의 근신들은 그의 잘못을 모른 체 하고, 학자가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봉록이 박해지고 대우가 낮아지므로 그를 위하여 찬양하는 말을 하게된다.

이 네 가지 간사한 신하들이 자기를 장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중신들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체하면서 적대자인 법술가를 천거하지 않을 것이며, 임금이 4중의 장벽을 넘어서 중신의 정체를 밝게 살피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존재는 간데 가없고 중신들의 권세는 갈수록 더해 가는 것이다.

──무릇 권세가로서 임금의 신뢰와 사랑을 받지 않은 자는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은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숙한 사이다. 그들이 임금의 마음을 좇아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같이하고 있음은 원래부터 자진해서 그렇게 하고자 해서 한 것이다. 그들의 벼슬은 존귀하고 무거우며 붕당 또한 많다. 게다가 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한다. 그러나 법술을 지닌 선비로서 임금에게 자기의 포부를 밝히려는 사람은 신의나 친분, 오래 사귄 은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법술의 이론으로써 임금의 편벽된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하니 이것은 임금의 뜻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위는 낮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도 없어 고독하다. 대저 임금과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임금의 사랑과 신망을 받는 자와 다툰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당연하다.

임금의 뜻과 상반되는 자가 임금과 뜻을 같이하는 자와 다툰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입으로 온 나라와 다툰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하다.

법술을 지닌 선비들은 이러한 이길 수 없는 형편을 가지고는 몇 년이 지나도 임금을 뵙지 못한다.권세가들은 이 다섯 가지 이길 수 있는 바탕을 지녔으니 항상 임금 앞에서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 법술을 지닌 선비들이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임금은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따라서 바탕이 꼭 이길 수 없고 형편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으니 법술을 지닌 선비들이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하에게는 큰 죄가 있고 임금에게는 큰 실책이 있다. 이는 신하와 군주의 이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군주의 이점은 유능한 자에게 벼슬을 주는 것에 있고, 신하의 이점은 무능하면서도 벼슬을 하려는데 있다. 군주의 이점은 공로가 있는 자에게 벼슬과 봉록을 주는데 있고, 신하의 이점은 공이 없으면서도 부유해지는데 있다. 군주의 이점은 걸출한 인사로 하여금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있고, 신하의 이점은 붕당을 만들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있다. 그래서 나라의 살림은 줄어들어도 권세가는 부를 축적하게 되고, 임금은 지위가 낮아져도 권세가인 대신은 중하게 된다. 임금은 세력을 잃고 신하는 나라를 얻게 된다. 임금은 명칭을 고쳐 스스로 번신(제후)이라고 일컫게 되고, 상신(相臣)이던 자는 벼슬을 마음대로 줄 수 있는 신분이 된다. 이것은 남의 신하가 된 자가 군주를 속이고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세의 중신으로써 사세(事勢)를 변경할 경우 지금까지의 군주의 총애를 굳힐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신하의 죄가 크기 때문이다. 신하로써 큰 죄가 있다는 것은 군주를 기만한 행위를 말한다. 그 죄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인사는 멀리 내다보고 죽을 것을 두려워하므로 결코 중신처럼 되지 않는다.현명한 인사는 수양이 있고 청렴하여 간신과 함께 군주를 기만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중신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도(當塗)한 자의 무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로써 틀림없이 탐욕스럽고 간사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자인 것이다.

대신은 어리석고 탐오한 자를 끼고, 그들과 함께 위로는 군주를 속이고 아래로는 사사로운 욕심을 거두어 들인다. 붕당을 만들어 침탈을 하며 편당끼리 서로 두둔하고 어울린다. 한결같이 모두가 임금을 속이고 법을 파괴함으로써 백성 혼란에 빠뜨린다. 또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영토를 깍이게 하며 임금을 피로케 하고 욕도 하게 만든다. 이것이 곧 큰 죄인 것이다. 그런데도 군주는 이를 막아내지 못하니 이것이 곧 큰 실책인 것이다.

임금은 위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고, 신하는 아래서 큰 죄를 범하게 만들어 놓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대저 일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모의는 누설하면 실패한다. 반드시 자기가 누설한 것이 아닐 지라도 임금과 말하다가, 말이 그 숨기고 있는 일에 미치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람은 신상이 위험하다.

임금이 겉으로는 어떤 일을 드러내놓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유세자가 겉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이미 하는 그 일까지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

유세자가 임금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계획하는 것이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하도라도 지혜 있는 자가 밖에서 추측하여 이것을 알게되면, 일이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 분명히 유세자가 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

임금의 총애가 그다지 두텁지 않은 데도 유세자의 말이 아주 지혜로우면 그 유세가 시행되어져 공적이 있어도 그의 덕분임을 잊게 되며, 유세가 시행되지 아니하여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의심을 받게 된다.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

귀한 사람이 과오의 단서가 있을 때 유세자가 예의를 갖추어 말함으로써 그 과오를 들춰낸다면 이런 사람은 몸이 위태롭다. 귀한 사람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서 계책을 얻어서 그것을 자기 공로로 삼으려 할 때 유세자가 그것을 알게되면, 이러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롭다. 유세자가 억지로 임금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되고, 그만둘 수 없는 일을 그만두게 하면, 이런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롭다.

임금에게 대인군자를 가지고 논하면 임금은 자신을 간접으로 풍자한다고 생각하고, 천한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의 권력을 천한 사람들에게 팔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그 사람의 힘을 빌어 발판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며, 임금이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간단하게 생략해서 하면 지식이 없어 졸렬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예를 들어 폭넓게 얘기하면 말이 많고 꾸밈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을 간략하게 그 뜻만을 얘기하면 비겁하고 나약하여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고 하고, 일의 생각이 넓고 거리낌이 없으면 비천하여 예의가 없고 거만하다고 한다.

이것이 곧 설득의 어려움이니 이를 알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다.

---대체로 설득하는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은 상대방이 자랑으로 여기는 바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부끄러워하는 일은 없애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임금이 사사로이 서두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公義)를 내세워 그것을 서두르게 해야 한다.그 임금이 속으로는 나쁘게 생각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을 때에는, 유세자는 그를 위하여 그의 미덕을 칭찬해 주면서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결점이라고 말해 줘야 한다. 그가 마음속으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유세자는 그 임금을 위하여 그 잘못을 듣고 그 일의 나쁜 점을 드러내어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임금이 지혜와 능력을 뽑아내려고 한다면 그 임금을 위하여 다른 종류의 예를 들어 채택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어서 임금으로 하여금 나의 주장을 따르도록 하면서 나는 모른 체함으로써 임금이 그 지혜의 바탕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타국과 공존해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곧 반드시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것을 밝히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임금의 개인적인 이익에도 합당한 것임을 은밀하게 드러내어야 한다.자국의 해로운 일을 말하려 한다면 곧 그 일이 해롭고 옳지 못한 것임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임금 개인의 걱정과도 부합하는 것임을 은밀하게 암시해야 한다.

타인 중에 임금과 같은 행동이 있다면 칭찬해 주고, 다른 일 중에 임금의 계획과 같은 것이 있다면 경탄해야 한다.

임금과 같은 결점을 가진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이 반드시 약점만은 아니라는 것을 꾸며주고, 임금과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잘못이 아님을 밝게 꾸며주어야 한다. 임금이 자신의 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면 그가 하기 어려운 일 같은 것을 들어서 그를 거슬려서는 안되며, 그가 자신의 결단을 내림에 용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를 노하게 해서는 안된다. 임금이 스스로 자기의 계략을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실패를 들어서 그를 추궁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대의(大義)가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말씨가 걸리는 데가 없은 후에야 지혜와 변설을 마음대로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유세법이야 말로 임금과 친분이 두터워져서 의심을 받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말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옛날에는 이윤(伊尹)이 요리사가 되고, 배리해(百里奚)가 포로가 되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임금에게 임용될 것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사람은 성인(聖人)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벼슬을 하려고 자기의 몸을 더럽혀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내 말 때문에 요리사나 포로가 되었더라도 그것으로써 임금에게 기용되어져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면, 이는 벼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수치로 여길 것이 아니다.

한비자韓非子

거울이라는 것은 자기의 표면을 깨끗하게 지켜서 다른 물건을 어떻게 비출까 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이나 누추한 것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사람도 이와 같이 마음을 비우고 외물(外物)에 접해야 하는 것이다. -한비자

겨울에 대지를 굳게 닫고 얼게 하는 엄동이 없으면 봄에서 여름에 걸쳐 초목이 무성하게 성장하지 못한다. 사람도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경험하지 않으면 후일의 번영은 없다. 주공(周公)의 말을 인용한 것. -한비자

견마난(犬馬難). 개나 말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개나 말은 누구나 보아서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이것을 잘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려도 사람들은 그린가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기가 쉽다. -한비자

고택지사(枯澤之蛇) 물이 말라 없어진 못에 있는 뱀. 남의 위력을 빌어 자기의 위력을 부리려고 하는 것. -한비자

공과 사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법제를 밝혀서 사사로운 은의(恩義)를 버린다. 이것이 밝은 군주의 길이고 정치의 요도(要道)다. -한비자

공인(工人)이 자주 그 직업을 변경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이 없어지고 만다. -한비자

구슬을 담는 궤만 사고 그 속에 든 구슬은 돌려주었다. 세상에는 말만 번드르하게 하는 사람만 중용하고 사람의 진실된 참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전구(田鳩)가 한 말. -한비자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혜가 있음을 비유한 말. 성인의 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을 말함. -한비자

눈으로 본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비치는 것은 적다. 그래서 견식이 넓고 바르지 못하다. 눈에 비치지 않는 것까지도 꿰뚫어보는 밝음이 필요하다. -한비자

덕(德)은 득(得)이다. 즉 체득한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덕이 될 수가 없다. 귀로 들은 지식만으로는 덕이 안 되는 것이다. -한비자

도(道)는 만물을 낳게 하는 것이라서 만물의 처음이 되고 옳고 그름과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근본이 된다. -한비자

도(道)의 실체는 깊은 것이라서 보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참된 도가 있다. 또 참된 활용은 조그마한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거기에 참된 대용(大用)이 있는 것이다. -한비자

망지도(忘持度). 치수를 재고 그것을 잊고 왔다. 자기의 발을 내밀었다면 쉽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를 비유함. -한비자

모순矛盾.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뜻하는 말. -한비자

백성이 굶주리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성이 고달파서 병이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성이 너무 노고에 시달려도 전쟁이 일어난다. 민심이 흩어지면 전쟁이 일어난다. 진(秦) 나라 강공(康公)에게 신하 임망(任妄)이 간한 말. -한비자

법을 잘 지키고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강하고 굳세며, 또한 굳고 바르다. -한비자

사람을 등용하는데 자기의 일족이라고 해서 사양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는 원수라고 해서 그것을 피할 필요도 없다. 모두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발탁해서 써야 한다. -한비자

세상 일에도 항상 이의를 내어 높다고 여기고 있는 자가 있다. 그러나 실제는 평범한 일상사의 완전한 실현이 어렵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한 것이다. -한비자

쇠뇌의 힘이 약해도 화살 이 높이 나는 것은 바람의 세력을 타기 때문이다. 세력의 힘을 주장한 신도(愼到)의 말. -한비자

약은 지식을 쓰고 있으면 세상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런 지식은 버리는 것이 좋다. 약고 영리함이 있으면 오히려 실적이 오르지 않는다. 이것도 버려야 할 일이다. 또 필부의 용기 같은 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런 용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대용(大勇)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비자

영구히 강한 나라도 없고 영구히 약한 나라도 없다. 나라의 강하고 약한 것은 경영 여하에 달려 있다. -한비자

예의가 지나친 사람은 속마음이 쇠(衰)한다(예의도 지나치면 아첨이 된다). -한비자

임금된 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여기에 영합하기 때문이다. 그 좋아하는 것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것도 멀리할 때 비로소 신하된 사람들은 자기 본심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한비자

집에 일정한 가업이 있으면 비록 기근을 당해도 굶는 일은 없다. 한비자(韓非子)가 인용한 고어. -한비자

제12강 한비자(韓非子)-1

1) 미래사관으로서의 법가(法家)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6국을 통일하였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는 일입니다.

‘한비자’에서 예제를 뽑아 함께 읽어가면서 법가의 성격을 이해하고 다른 제자백가들과의 차별성을 확인해 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한비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의 정치로써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는 다같이 농본적(農本的) 질서를 이상적 모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복고적(復古的)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상적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선왕(先王)의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비하여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의 정책대응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는 우화입니다. 이 우화는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들을 비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방식도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양보하였다고 하지만 당시의 임금이란 오늘날의 노복(奴僕)보다 힘든 자리였다.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는 것은 이를테면 노복을 그만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현령(縣令)같은 낮은 벼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치부하는 자리가 되고, 자손 대대로 잘 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남에게 양보하기는커녕 한사코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가의 현실인식입니다.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지요.

제12강 한비자(韓非子)-2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하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송하였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하였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하여야 하는 것이지 인의(仁義)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하여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컨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義)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변화사관은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후왕사상(後王思想)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후왕(後王)이란 금왕(今王)을 의미합니다. 후왕사상은 과거모델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현실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후왕(後王)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후왕을 버리고 태고(太古)의 왕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후왕사상이 제자인 한비자에게 계승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비자는 내외정세가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여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숱한 시무책을 국왕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비단 한비자와 한(韓)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변화된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고로 발상을 전환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지요. 다음 예제는 여러분도 잘 아는 화씨지벽(和氏之璧)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주워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인을 시켜 감정케 하였더니 돌이라 하였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하여 월형을 내려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무왕에게 그 돌을 또 바쳤다. 무왕이 그 돌을 옥인에게 감정케 하였더니 또 돌이라 하였다. 무왕도 그가 자기를 속였다 하여 월형으로 오른 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이제 그 옥돌을 안고 초산에서 곡을 하였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잘린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이요?’

화씨가 대답했다. ‘저는 발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문왕이 옥인에게 그 옥돌을 다듬게 하여 보배를 얻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화씨의 구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매한 군주를 깨우치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한비자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임금들이 법술(法術)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구슬을 얻고자 하는 마음같이 급한 것은 아니며 또 올바른 도를 가진 법술가들이 월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왕에게 아직 옥돌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3 2) 한비자(BC.280-233)

한비자(韓非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한(韓)나라는 지금의 호남성 서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한비자는 한왕(韓王) 안(安)의 서공자(庶公子)라고 합니다. 서공자라는 것은 모계의 신분이 낮은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한비자는 55편 10만 자(字)의‘한비자(韓非子)’를 남겼는데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왕에게 간하기 위한 글들이었습니다.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림(說林), 세난(說難), 저설(儲說) 등 대부분의 논설은 그러한 동기에서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적국인 진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孤憤), 오두(五蠹)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동문수학한 이사(李斯)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李斯)는 순자(荀子)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듯 하지요.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말더듬이였다고 전합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비자를 위로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의 사상과는 반대로 매우 우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인 순자는 그 성정이 강퍅불손(强愎不遜)하고 자존심(自尊心)이 대단한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습니다.

엄정한 형벌을 주장하고 유가와 묵가의 인의(仁義)와 겸애(兼愛)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術數)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비자’를 읽어 가는 동안에 그러한 선입관을 서서히 바꾸어 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4

한왕(韓王)이 한비자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은 것과는 반대로 진(秦)나라는 일찍부터 법가사상가들이 포진하여 법가 방식의 부국강병책을 실시해 왔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한비자(韓非子)’를 중심으로 법가(法家)를 읽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학파이든 그것은 그 학파 이전의 사상이 계승되고 집대성됨으로써 학파로서 성립됩니다. 법가사상의 계보를 자세히 다룰 수 없습니다만 선구적인 몇몇 법가사상가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법가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 병역(兵役) 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군제개혁, 성문법(成文法)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의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주권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보수세력의 완고한 저항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하여 비로소 군주권력을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법은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습니다. 법가가 형벌을 강력한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형태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秦)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재상인 상앙(商鞅)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진나라는 반읍국가(半邑國家)라고 불릴 정도로 변방에 있는 작은 약소국이었지만 상앙에 의하여 변법과 개혁에 성공합니다.

상앙의 개혁 역시 그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고 전대의 선구자였던 자산(子産), 이회(李悝), 오기(吳起) 등에 의해 시도된 변법, 개혁의 경험 위에서 이루어졌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상앙은 먼저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하여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하여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行制也天)을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법치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公開性)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앙은 핵심적인 것을 놓치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법관청을 설치하고 사법관리를 두어 존비귀천을 불문하고 법을 공정, 공평하게 적용한다는 형무등급(刑無等의 원칙을 실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귀족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고 군주의 절대적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상앙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엄벌주의(嚴罰主義)의 원칙을 고수하였습니다. 그것은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림으로써 법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었으며, 엄벌로써 일벌백계를 삼아 나라의 불법과 법외(法外)를 없앤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형(刑)으로 형(刑)을 없애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법가적 방식에 의해서만이 감히 법을 어길 수 없고(民不敢犯), 감히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民莫敢爲非) 사회 즉 무형(無刑)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천금을 줌으로써 백성들의 국가에 대하 불신을 없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상앙이었지요.

상앙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만 법가 이해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비자’를 읽기로 하겠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5

3) ‘한비자(韓非子)’ 예제(例題)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히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 잡으며, 예외(例外)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에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에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은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아래 위의 분별이 없어진다.”

법지상주의(法至上主義)의 선언입니다. 법치는 먼저 귀족(貴族), 지자(智者), 용자(勇者) 등 법외자(法外者)에 대한 규제로 나타납니다.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 사회적 강자(强者)들에 대한 규제에서 시작합니다.

주(周) 이래로 규제방식에는 예(禮)와 형(刑)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공경대부(公卿大夫)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써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법가는 주대(周代)의 이러한 예(禮)와 형(刑)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서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의 이러한 방식을 현실을 외면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주장이라고 조소하는 한편, 유가는 법가적 방식을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법가는 공평무사한 법치를 주장하며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치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계층이 권력을 강화하고, 권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大夫)는 예(禮)로써 다스리고 서민은 형(刑)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犯罪)와 불법행위(不法行爲)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2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犯罪人)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하여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불법행위자(不法行爲者)정도입니다. 이것은 주나라 이래의 관행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역설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가의 법지상주의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은 물론 사회구조에 대하여 매우 허약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법가의 군주권을 강화하는 이론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만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울 것이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질 것”(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이라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6

‘한비자’ 유도편(有度篇)에서 천명되고 있는 이 법지상주의는 글자 그대로 법을 가장 높은(至上) 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법이 가장 높은 것일 수 있기 위한 필수요건이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법가에서도 이 점이 간과되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가 주장한 법의 기본 성격을 종합하여 보면 1)법의 성문화, 2)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지법, 3)전국적인 법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형식적 측면입니다. 형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형태가 일정한 그릇에 담아서 올려놓는 것입니다.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고 권력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화는 군주권력의 강화이면서 동시에 군주권의 제한이기도 합니다. 법이 군주보다 높을 때 비로소 지상(至上)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가는 법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듯이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었습니다. 이 3가지의 성격은 법가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덩어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지향적 사관이 아닌 변화사관에 입각하여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잠재력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이 3가지의 내용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단호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는 시대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정치상황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춘추시대 약 3백60년간은 중앙정부의 권위가 무너지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대의명분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진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1백83년간의 전국시대는 어떠한 정신적 중심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적나라한 시대입니다.

주종실(周宗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힘에 의한 패권의 추구만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한비자의 표현처럼 대쟁지세(大爭之世)입니다.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명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제후들은 인의(仁義)의 기치(旗幟)를 팽개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도(正道)와 이단(異端), 고도(古道)와 신설(新說)이 우후죽순처럼 각축하는 혼란의 극치를 보이게 됩니다. 빈번한 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동력 있는 기능과 구조를 갖춘 강력한 정부가 요청되게 됩니다. 정의(正義)나 명분(名分)보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대안(政策代案)이 요구되기에 이릅니다. 치자(治者)는 더 이상 성인이거나 군자일 필요가 없으며 탁월한 전문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법과 개혁에 대한 저항이 훨씬 줄어든 시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식인을 요구하게 됩니다. 소위 법술지사(法術之士)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법가(法家)의 ‘법(法)’은 오늘의 법학(法學)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統治論), 지도자론(指導者論), 조직론(組織論) 등 오늘날 정치학(政治學)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상황의, 새로운 대응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이기 때문입니다. 천하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7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刑)과 덕(德)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즉 임금을 움직여서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는 역시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상을 준다. 상벌이 임금으로부터 나가지 않고 신하로부터 나가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형덕을 잃은 환란이 그와 같다. ···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어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 당할 것이다.”

체(體)로서의 법(法)과 그 체의 기반 위에서 용(用)으로서의 술(術)을 활용함으로써 군주가 세(勢)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입니다. 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술은 신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법은 문서로 편찬하여 관청에 비치하고 널리 일반백성에게 공포하는 것이며, 술은 임금의 마음 속에 은밀히 숨겨두고 신하들을 통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가를 법술지사(法術之士)라고 부릅니다.

한비자를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꼽는 것은 법(法)과 술(術)에 세(勢)를 더하여 법가사상을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상앙(商鞅)의 법(法)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을 종합한 한비자의 법술사상(法術思想)은 이제 신도(愼到)의 세(勢)를 도입함으로써 절대군주제에 필요한 제왕권(帝王權)의 이론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군주에게 위세가 없으면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신도의 세치(勢治)입니다.

요(堯)임금도 필부였다면 세 사람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며, 걸왕(桀王)도 군주의 위세를 누렸기 때문에 천하를 어지럽힐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군주는 세위(勢位)를 믿을 것이지 현지(賢智)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 신도의 주장입니다. 법과 술로써 반드시 확립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세(勢)입니다.

이러한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비자의 군주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서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혼란 역시 임금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서 시작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식입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을 확고히 하지 않는 한 간특한 무리들을 내쫓을 수 없으며, 칼을 차고 다니며 법을 무시하는 법외자(法外者)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란으로 말미암은 인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강력한 중앙(中央)을 확립하는 것임을 한비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한비자는 관료제를 주장합니다. 위의 예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비자가 상벌(賞罰)이라는 이병(二柄)을 놓지 말 것을 강조하는 까닭은 군주가 신하들을 효과적으로 통어하기 위함입니다. 관료제는 군주의 일인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등장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관료제란 사사로운 통치방식을 지양하고 제도와 조직을 통한 통치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법가의 법치(法治)부분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관료의 임명, 직책과 직권, 승진, 포상, 겸직(兼職) 등에 관한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료제도가 분업화(分業化)와 전문화(專門化)를 통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매우 치밀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료들을 통어함에 있어서 군주 개인의 감정과 편견을 배제하고 오로지 그 명(名)으로서 그 실(實)을 독책(督責)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른바 형명참동(刑名參同)의 이론입니다.

놀라운 것은 ‘한비자’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개념이 이렇듯 서로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시종 일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형태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가 법가에 의하여 통일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라는 권력형태는 진(秦)을 거쳐 한(漢)으로 이어지고 다시 역대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짐으로써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8

다음 예제는 망징편(亡徵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일곱 가지 징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위에서 전개한 논리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法令)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 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쫓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이 망징편에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역조명할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가 크다는 것은 국가는 채무가 많고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돈이 많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 특히 금융부문의 채무를 나라에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나라를 황폐하게 내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는 구절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구절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계화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소위 개발독재기간동안 국민들이 비싸고 질이 좋지 않은 국산품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하여 자본축적을 한 것이 재벌입니다. 불법으로 유출시킨 자본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을 이유로 해외투자와 해외 이전에 열중하는 오늘의 경영방식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상품논리, 세계화논리,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실물적 측면을 직시하는 관점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제조업은 해외로 이전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의 제조업기반은 공동화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외자는 국내로 유입됩니다.

중간기술수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한국자본은 국내시장을 내주고 해외시장으로 이전합니다. 결국 한국은 자본주의국가로서의 자본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노동자와 소비자로써만 국민경제를 구성하게 됩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처럼 신기술과 신상품을 선도적으로 창출할 수 있거나, 거대자본으로 금융시장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거나, 아니면 막강한 군사력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거나, 전쟁특수를 만들어내고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는 한 경제는 망하는 것이지요.

제1세계의 중하위에 매달려 그 추락을 지연시키는 것이 고작이지요.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는 일은 2천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경제적 의미가 다른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제12강 한비자(韓非子)-9

“정나라 사람으로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난 뒤였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

장에 신발 사러 가는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탁을 가지러 구태여 집까지 갈 필요가 없음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위 예제의 핵심은 사람들의 반문에 대한 차치리의 답변에 있습니다. 직접 신어보고 신발을 고르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차치리의 대답이 매우 엉뚱합니다. 탁은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책에도 소개한 구절입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구절로도 기억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들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과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兒說)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뜻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은 대단한 능변가로서 흰말은 말이 아니라(白馬非馬)는 변론으로 직하(稷下)의 변자(辯者)들을 꺾었다. 그러나 그가 흰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백마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10

“서적을 쌓아놓고 변론을 일삼으며 제자를 모아놓고 학문을 닦고 논설을 펴면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어진 선비를 존경하는 것은 선왕의 도라고 한다. 무릇 관리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농민들로부터이고, 임금이 세금으로 기르는 것은 학사(學士)들이다. 농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고 학사는 많은 상을 받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고 언담(言談)을 삼가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리(義理)를 내세워 도당을 모으고 지조(志操)를 내세워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 하며, 듣기 싫은 말이 귓전을 스치면 반드시 칼을 들고 따라가 해치는 무리들에 대하여,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선비라고 한다. 무릇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적의 머리를 벤 병사는 상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싸움을 한 자는 대접받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서 적을 막고, 사사로운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구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가(儒家)와 협객(俠客)입니다. 유가의 비현실적 공리공담과 협객의 불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변설은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협객의 불법적 행위는 법질서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법가로서는 마땅히 엄금해야 할 일입니다.

한비자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의 부류를 오두지류(五蠹之類)라 합니다. 참고로 소개합니다. 첫째가 학자(學者)입니다. 이유는 선왕의 도를 빙자하고 인의를 빙자하며, 용모와 의복을 꾸며서 변설을 그럴듯하게 하며 법을 의심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고 둘째가 언담자(言談者)로서 세객(說客)입니다. 거짓으로 외력을 빌어 사복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대검자(帶劍者)로서 위의 예제에서 비판하는 협객(俠客)입니다. 국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네번째 근어자(近御者)로서 임금의 측근(側近)입니다. 뇌물로 축재하며 권세가들의 청만 들어주며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상공지민(商工之民)을 들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그릇을 만들어, 즉 사치품을 만들어 농부의 이익을 앗아간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11

"자어(子圉)가 상(商)나라 재상에게 공자를 소개하였다. 공자가 (재상을 만나고) 나오자 자어가 들어가서 (재상에게) 공자를 만나본 소감을 물었다. 재상이 말하기를 '내가 공자를 보고 나니 자네가 마치 벼룩이나 이처럼 하찮게 보이는구려. 내가 공자를 임금께 소개해 드리려고 하네.' 자어는 공자가 임금에게 귀하게 여겨질까 두려워서 재상에게 말했다. '임금께서 공자를 보시고 나면 장차 임금께서 재상님 보기를 벼룩이나 이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은 다시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인(人)의 장막(帳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어진 사람을 만날 수 없도록 하는 측근들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군신관계는 이해관계에 있어서 서로 대립적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신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군주를 속이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며 무사안일을 추구하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한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군주는 이들 신하들을 철저히 독책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군주의 이목을 가리는 것(臣閉其主), 신하가 국가의 재정을 장악하는 것(臣制財利), 군주의 승인 없이 신하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臣擅行令), 신하가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臣得行義), 신하가 파당을 조직하여 군주를 고립시키는 것(臣得樹人)등 신하가 군주를 가리는 것이 거듭되면 군주가 고립되고 실권하는 것은 물론이며 급기야 국가가 찬탈 당하게 된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12

'한비자'에는 법가사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세사(世事)와 인정(人情)을 꿰뚫는 많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를 읽게 되면 한비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냉혹한 마키아벨리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인간적 면모를 조사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한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악양(樂羊)이라는 위(魏)나라 장수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였습니다.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습니다. 중산국 왕이 그 아들을 인질로 삼아 공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중산국 왕은 드디어 그 아들을 죽여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냈습니다. 악양은 태연히 그 국을 먹었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도사찬(堵師贊)에게 악양을 칭찬하여 말하였습니다. "악양은 나 때문에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도사찬이 대답했습니다.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 누구인들 먹지 않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돌아오자 위나라 임금 문후(文侯)는 그의 공로에 대하여 상은 내렸지만 그의 마음은 의심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악양식자(樂羊食子)의 이야기입니다.

악양식자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노나라 삼환(三桓)의 한 사람인 맹손(孟孫)이 사냥을 나가서 사슴새끼를 잡았습니다. 잡은 사슴새끼를 신하인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미사슴이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진서파는 참을 수 없어서 새끼를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돌아와서 사슴새끼를 찾았습니다. 진서파가 대답하였습니다. "울면서 따라 오는 어미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크게 노하여 그를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석달 뒤에 맹손이 다시 진서파를 불러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맹손의 마부가 말했습니다. "전에는 죄를 물어 내치시더니 지금 다시 그를 불러 아드님의 사부(師父)로 삼으시니 어쩐 까닭이십니까?" 맹손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슴새끼의 아픔도 참지 못하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픔을 참을 수 있겠느냐?"

이 이야기의 말미에 달아 놓은 한비자의 멘트가 있습니다.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巧詐不如拙誠)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읽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 때문에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러한 면모를 뒷받침해 줍니다. 동문수학 친구인 이사의 속임수에 빠져서 죽임을 당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펼치는 이론과는 반대로 한비자는 오히려 우직한 졸성(拙誠)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전편(問田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계공(堂谿公)이 한비자에게 충고합니다.

"오기(吳起)와 상앙(商鞅) 두 사람은 그 언설이 옳고, 그 공로 또한 대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기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상앙은 수레에 매여 찢어져 죽었다. 지금 선생은 몸을 온전히 하고 이름을 보전하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걱정된다."

이 충고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동시에 법가사상의 의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한비자의 답변은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선왕의 가르침을 버리고 (위험하게도) 법술을 세우고 법도를 만들고자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고 몽매한 임금(亂主暗上)의 박해를 꺼리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의 화복(禍福)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사랑하여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저를 크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이든 노래든 사상이든 나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13

4)법가 유감(法家 有感)

법가에 대한 비판으로서 가장 먼저 드는 것으로 법가(法家)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군주(君主)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애민(愛民)사상이 아니라 군주의 권력을 중심에 두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비민주적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비민주적 성격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면에 있어서도 군주권력에 과도한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시스템으로서의 관료제도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것이지요. 관료의 역할과 임무를 최소화(最小化)함으로써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관료제의 효율성을 살려내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법가의 현실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법가는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당대의 사회적 과제에 대하여 새로운 대응방식을 발빠르게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법가가 추구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책(方策)에는 민부(民富)의 기초가 없다는 것이지요. 부강(富强)의 물적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한계가 비록 천하통일이라는 현실적 과업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가가 추구한 현실성(現實性)이 한대(漢代) 이후 유가(儒家)의 현실성에 그 지위를 넘겨주는 역설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결국 법가의 현실성은 단기적(短期的) 현실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가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사상가들에 관하여 함께 읽는 동안 그 사상의 장단점을 지적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자제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진한(秦漢)을 하나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진(秦)과 법가(法家)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한(漢)과 유가(儒家)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의 통치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었지요. 진(秦)과 한(漢)은 각각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이라는 역사적 임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사상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체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상(位相)을 묻고, 결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가의 장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며, 법가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이 법가의 개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개별적 가치나 배타적 성격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신조(信條)입니다. 다른 것과의 연관 즉 관계론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객관적 진리나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역사적 제약의 상대적 표현이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법가는 물론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읽은 모든 사상체계에 대해서도 똑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은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도도한 역사의 과정에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제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법가적 대응양식 역시 당시 수많은 부국강병책의 하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부국강병은 그 목표가 천하통일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하통일은 궁극적으로는 전국시대라는 대쟁지세(大爭之世)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제자백가들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법가의 경우 부국강병의 구체적 모델이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라는 데에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앙집권적 관료국가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혼란의 재발을 막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법가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법가사상을 군주철학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법가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改革性)과 법치주의(法治主義)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백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의 원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진보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예측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치주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관료제입니다. 관료제도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료제에 대한 규제방식으로서의 군주의 술(術)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술치(術治) 때문에 법가가 권모술수(權謀術數)의 학(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란 무도한 시대이며 혼란의 극치를 보이는 시대입니다. 임금을 죽인 것이 36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번이었습니다. 이러한 하극상과 혼란이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법가에 있어서는 관료에 대한 견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료는 언제든지 제후(諸侯)나 대부(大夫)의 지위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료들의 이반(離叛)을 통제하고 견제하지 못하는 한 전기의 모순과 혼란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군주의 술치(術治)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원리로서 이해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12강 한비자(韓非子)-14

끝으로 이사(李斯)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법가를 끝내려고 합니다. 이사는 한비자를 이야기하기에도 좋고 진시황의 모신(謀臣)으로서 천하통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의 헌책으로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한비자를 직접 만나본 진왕이 한동안 망설였다고 합니다. 아마 한비자의 언변이 매우 서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한 동안의 망설임이 한비자에게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비자를 죽이자는 진언을 합니다.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공자입니다. 그를 중하게 쓰면 진나라를 위하여 진심으로 진력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를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물어 그를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이사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한비자의 역량을 아까워한 진왕은 다시 한동안 망설이게 됩니다. 한비자를 일단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사는 틈을 주지 않고 옥중에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진왕의 뜻이 아님을 안 한비자가 진왕을 만나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한비자를 옥에 보내기는 하였지만 그 직후 진왕은 마음이 변하여 한비자를 사면하려고 옥중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한비자의 목숨이 끊긴 후였습니다. 한비자가 죽고 3년 후에 한(韓)이 멸망하고 한이 멸망한 뒤 10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전하는 이야기가 너무 극적이어서 신뢰감이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극적 구조에 대한 갈증이 없지 않는 것이지요. 스스로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었던 이야기도 역설적이 아닐 수 없으며 특히 경쟁상대를 제거하기 위하여 동문수학의 우정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이사의 비정함을 통하여 전국시대의 사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합니다.

이사는 BC 221년, 진왕(秦王) 정(政)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모든 권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나갑니다. 그때까지의 사회구조였던 봉건적 지방분권제도를 청산합니다.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던 것도 이사의 주도 하에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봉건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이사는 시황제에게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이사는 봉건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비록 왕자나 동족을 제후로 봉하더라도 대를 거듭할수록 혈연이 멀어져 결국은 이반(離叛)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군수, 군위(郡尉), 군감(郡監)을 두고, 군 아래에 현을 두어 현령, 현위, 현승(縣丞)을 임명하여 민정(民政), 군사(軍事), 감찰(監察)의 3권을 분담하게 하였습니다. 치밀한 제도적 개혁입니다. 이들 지방장관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통치자인 황제에 의하여 임면되도록 함으로써 황제의 명령은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하달되었습니다.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중국의 정치제도상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체제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진의 통일과 이사를 이야기한다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방금 언급한 분서갱유(焚書坑儒)입니다. 통일 직후 강력하게 추진되는 중앙집권적 개혁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차츰 봉건제 복원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에 대하여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焚書)관련 내용에 의하면 첫째로 박사관(博士官)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약(醫藥) 점복(占卜) 종수(種樹) 등 과학기술 서적도 제외하였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秦)의 전적(典籍)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의 분서는 차라리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관부(官府)소유의 서적이 서적의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詩書)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갱유(坑儒)에 관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많습니다. 우선 땅에 묻힌 사람의 숫자가 4백60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갱유의 발단이 된 것은 불사약을 구하던 방술사(方術士)인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 도망한 사건이었는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이 갱유의 영을 내린 이유는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사(御使)를 시켜 요괴한 말로서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을 조사하게 하자 서로 고발하여 법령을 어긴 자가 4백60명이었는데,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유학자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분서갱유라는 표현도 한(漢)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사와 한비자의 인생을 일별하면서 느끼는 감회는 역사란 참으로 장대한 드라마라는 새삼스러운 느낌입니다.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애를 끝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 역시 BC 208년 7월(2세 황제 2년)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법가적 단호함과 공평무사함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간신 조고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비명에 가고 맙니다.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는 이사에 대하여 그 공적이 주공(周公)에 비견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주살(誅殺)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하였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간신 조고(趙高)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여 적장자(適長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湖亥)를 옹립한 것은 정도(正道)를 배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公明)함과 공평(公平)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었으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한비자의 법치와 세, 술

신도, 신불해는 각기 ‘세치’와 ‘술치’를 주장하였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고 미숙하였으므로 한비자는 두 선구자들의 이론을 철저히 분석하여 약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여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세치’와 ‘술치’이론을 완성하였다. 한비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법치에 대해서도 그 개념과 성격을 깊이 분석하여 약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이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통치이론을 발전시켰다.

한비자가 주창한 법의 개념과 성격을 보면, “은밀히 시행하는”, “누설해서는 안 되는”, ‘술’과는 달리 “법은 제정하여 문서로 관청에 기록, 보관하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공포하여 알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치는 전국 백성들이 전부 알 수 있도록 공포된 성문법에 의거한 치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 시행에서 정치, 사회 신분상의 고하, 귀천, 존비를 막론하고 잘못이 있으면 처벌을 하고 잘하면 반드시 시상(施賞)을 한다는 공정, 공평한 법 집행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형에는 등급이 없다’는 상앙의 “刑無等級”의 원칙과도 일치되고 있다. 한비자가 제시하고 있는 법의 개념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법의 성문화, 법의 전국적 공포, 계급 계층을 초월한 법의 공평성, 법의 통일성, 법의 절대성으로 구비된 성문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비자는 법의 운영에 대해서 다양한 원칙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비자는 우선 법을 모든 일을 제어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법을 제정할 때에는 모든 규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그리고 빈틈없이 제정해서 논쟁의 여지를 없애고 악용의 틈이 없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한비자는 군주의 마음 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법이 제정되어져서는 안되며, 반드시 백성들의 필요와 요구 그리고 시세에 따라서 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기』상앙열전을 참고하면 국가의 변법,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의 신뢰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상앙은 변법, 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의 신뢰확보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한비자 역시 상앙과 마찬가지로 법의 시행에는 백성들의 신뢰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강조하였다. 또 법은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데 군주가 법령을 수시로 바꾸면 백성들의 일상생활이 크게 흔들리고 이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비자는 또한 이러한 법치의 효율을 높이고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상필벌’의 원칙을 확립하고 ‘엄법시행’을 주장하였다. 즉 한비자는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고 해를 싫어하는’ 본성을 가졌으므로 이같은 본성을 이용한 ‘신상필벌’의 원칙을 법치운용의 한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비자는 ‘엄법’, ‘엄형’의 시행을 강조하였는데, ‘엄법’, ‘엄형’을 통하여 중형은 물론 경형까지 없앨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인간의 성정을 통찰하고 이같은 인간의 성정을 법치에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동시에 ‘형으로 형을 없앤다(以刑去刑)’이라는 상앙의 ‘중형론’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한비자는 법을 통치의 근간으로 인식하고 성문법에 의거한 법치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법치만이 완전무결한 통치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법치의 약점과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법’이 아무리 장 정비되고 백성들에게 철저히 시행되고 있어도 군주가 ‘술’로써 신하와 관리들의 간악과 욕심을 미리 살피어 제어, 감독하지 못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히려 신하들만 살찌게 해준다는 사실을 명쾌히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한비자는 반드시 ‘술’을 병용해야 ‘법’의 약점과 한계를 보충할 수 있으며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술’역시 ‘법’과 마찬가지로 약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군주가 위에서 아무리 ‘술’을 사용하고 있어도 아래에서 법이 통일되어 시행되고 있지 않으면 수많은 관리와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한비자는 신도가 주창하였던 ‘세치’와 신불해가 제시하였던 ‘술치’ 그리고 상앙이 시행하였던 ‘법치’를 종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가하여 각 학설과 사상의 약점과 결점을 보충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여 그 특유의 통치ㅏ상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세, 술, 법’을 종합한 통치이론이었다.

한비자는 천하 백성들의 옹립과 추대에 의해서 최고의 통치권인 ‘세’를 장악하여 통치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한 군주가 냉철한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循名責實’, ‘형명’, ‘參伍法’, ‘守靜致虛’, ‘無爲’등으로 구성된 ‘술’, ‘술치’를 통하여 신하, 관료들을 다루고 제어하며 모든 계급과 계층을 초월하여 공정, 공평하게 시행되고 엄법시행과 신상필벌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법치’를 통하여 백성들을 통치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고 패업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2. 법가사상의 성격과 한계

상앙은 법가 선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변법, 개혁을 추진하여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도와 군현제도로 구성된 중앙집권체제, 강력한 중농억상정책을 기본으로 하는 농본경제와 부국강병, 사, 농, 공, 상의 사민사회 등으로 조직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수립하였으며, 그 통치의 수단은 ‘법’, ‘법치’였다. 여기에서 종래의 ‘예치’, ‘덕치’는 ‘법’, ‘법치’로 교체되었는데, 이 ‘법’과 ‘법치’는 이후 2000여년 이상 중국 전제군주국가에서 장구히 시행되어 왔던 ‘법’, ‘법치’의 성격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약간 늦은 시기에 발달하여 1300여 년간 로마제국의 통치근간이 되었던 로마법과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마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법(神法, Jus divinum), 시민법(市民法, Jus Civile), 만민법(萬民法, Jus Gentium)으로 되어있다. 이 중에서 신법은 불문율(不文律)이었는데, 로마민족 초기의 매우 엄격한 종교적 의례, 의식, 관습, 전통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영토의 확대, 인구증가, 생활규모의 확대에 따라 신법은 그 한계를 드러내었고, 이후 12동판법을 계기로 기록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성문화되었는데, 이것이 시민법의 제정이다. 그러나 이 시민법은 신법과 마찬가지로 그 적용대상이 로마시민에 국한되었으므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이었다.

이후 로마의 정치?군사적 발전과 팽창은 이질적인 문화와 다양한 인종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시민과 비 시민간의 차이, 로마민족과 이민족간의 갈등, 마찰, 충돌이 발생하자 시민법만으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는 종래 ‘시민법’의 범위를 넘어선 그리고 인종, 전통, 관습의 차이와 구별을 초월한 보편적인 법을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만민법’이었다.

만민법의 정신적 기초와 성격을 살펴보면 스토아 사상의 영향을 받아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생존을 위한 기본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국가도 무시하거나 범할 수 없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만민법은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평등을 인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인간의 이성과 양식에 기반한 항구불변의 ‘자연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천부적인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한 반면, 중국의 법가사상 속에서는 인간의 천부적 평등성에 대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없다. 다만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법치시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강구된 것이었다. 또 스토아 학파는 천부적 평등성에 기반하여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고 이 사해동포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편국가 수립의 세계국가상을 제시하였으며 만민이 통용될 수 있는 보편법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선진시대 법가들이 제시한 법치사상과 구세관 속에는 무력에 의한 천하통일과 패권장악이 그 궁극적 목표였다. 그리고 법가들이 추진한 변법, 개혁의 목표는 ‘중농억상정책’에 기반한 부국강병과 군주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 수립의 군사강국이었으며, ‘법’, ‘법치’는 이 같은 군사강국을 달성하기 위한 통치의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이 선진시대 법가들의 ‘법’, ‘법치’사상과 구세관은 인권, 민권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군주의 통치와 부국강병 달성의 도구 그리고 전제군주의 통치도구에 불과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선진시대 법가들의 사상적, 이념적 한계였으며, 약점이었다. 이 같은 ‘법’, ‘법치’가 2000여년 이상 중국 전제왕조의 통치근간이 되어왔던 사실을 감안하면 그 부정적 영향이 어떠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법가 (法家, legalism) 

고대 중국 철학의 한 학파.

전국시대(BC 475~221)에한비자(韓非子)의 영향을 받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BC 221~206)의 이념적 토대를 이루었다. 법가는 인간의 실제행동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백성이 통치자의 미덕을 인정한다고 해서 사회적 화합이 보장되지는 않으며,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가는 특정한 행동에 대해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를 내세워 정부를 옹호했다. 또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진나라는 이 정책을 가혹하게 실행했기 때문에 결국 15년 만에 무너졌고, 법가철학도 중국에서 영원히 불신받게 되었다. 

한비자 (韓非子)

한비자 (韓非子), (병)Hanfeizi (웨)Hanfeitzu. ?~BC 233. 중국의 법가 철학자.

진왕(秦王) 정(政 : 후의 始皇帝)은 그의 전제정부에 관한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이를 통일국가의 정치원리로 삼았다. 그의 이름을 따라 한비자로 명명된 그의 저서는 당시 법가 이론의 총괄이다.

생애

한비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의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한비자는 유가인 순자(筍子)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순자를 저버리고 그당시 봉건체계가 붕괴되는 상황과 보다 밀접한 이론을 가진 다른 학파를 따랐다. 자신의 충고가 한 왕에게 무시당하자 한비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반론에 대한 논박도 글로 썼다. BC 221년 통일 후 시황제가 된 당시의 진왕 정은 한비자의 글을 읽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BC 234년 진은 한을 공격했고, 한왕은 한비자를 진에 협상자로서 파견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 진의 승상이자 이전에 한비자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이사(李斯)는 한비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한비자가 이심(二心)을 가졌다고 모함하여 그를 투옥시켰다.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그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게 했다.

정치사상

한비자는 정치제도란 반드시 역사적 상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유가처럼 과거의 낡은 제도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풍습은 도덕적 감성이 아니라 그 사회의 경제적 여건에 의해 변화하며, 정치제도는 당연히 이것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그 친척에게도 양식을 주지 않지만, 반대로 풍년이 들면 낯선 사람에게도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인색하거나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양식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자가 풍부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재물을 가볍게 여겼으나, 인구가 점점 증가하여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은 재물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따라서 군주는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막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은 이기적이면서도 무엇이 진정 자기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군주는 그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아서 믿을 것이 못 된다. 유가의 이론에 따르면 덕이 있는 왕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덕이 없는 왕은 그 지위를 잃게 된다. 그러나 한비자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이 어떻든 또 그가 어떻게 다스리든 상관없이 권력(그는 이를 愼到의 이론에 따라 勢로 설명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며, 아들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변함없는 대원칙 중의 하나이다. 군주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신하는 군주의 자리를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의무는 다른 모든 의무에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병졸이 그가 전사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싸움터에서 도망쳤다. 한비자는 이에 대해 "효자는 그 군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권력은 변덕스럽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공포하면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법(法 : 商의 법 이론을 따름)을 통해 행사되어야 한다. 현명한 군주는 법에 따라 사람을 고를 뿐 절대 자신의 마음대로 고르지 않는다. 법에 의해 그 대상자의 장점을 평가하고 군주 자신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어떤 법을 폐지할 권한은 있으나, 그 법이 살아 있는 한은 군주 자신도 그 법에 따라야 한다. 신하들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 또 그 신하들의 반역을 막기 위해 군주는 술(術 : 申不害의 술 이론 계승)을 써야 한다. 전국시대의 통치자들은 정치·외교 및 전쟁에 능한 사람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많은 유세객 속에서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직위를 준 후에 군주는 그가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가를 감시하여, 의무를 다하지 못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군주는 어떤 신하의 제안을 승인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결과가 계획에 못 미치거나 또는 목표를 넘어설 때도 벌을 주어야 한다.

한비자는 많은 왕들의 왕권을 잃게 한 반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술로써 대답했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해관계는 일치할 수 없다. 위에 있는 자와 밑에 있는 자는 하루에도 100번씩 싸운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무도 믿지 말고 아첨꾼을 경계할 것이며, 누구라도 지나치게 많은 권력이나 세력을 가지게 하지 말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첩자를 이용하여 반역 음모를 적발해내야 한다. 왕권이 확립되고 질서가 제대로 잡힌 뒤에 군주는 무력을 사용하여 영토확장에 나선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나라가 가진 군사력이며, 이는 경제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농업만이 유일한 생산적 일이므로 다른 모든 직업들, 특히 학자의 일 같은 것은 억제되어야 한다.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어리석고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빈민을 돕는 것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의 것을 강탈해서 게으르고 낭비하는 자들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이사 (李斯)

무자비하나 매우 효율적인법가(法家) 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합병하고, 통일제국 진(秦

이사 (李斯, (병)Li Si (웨)Li Ssu). BC 280(?) 중국 중부의 주(周)나라~BC 208 셴양[咸陽].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무자비하나 매우 효율적인 법가(法家) 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합병하고, 통일제국 진(秦:BC 221~206)을 건설하는 데 공헌했다. BC 247년 진나라로 가서 그후 거의 40년간 나중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 정(政)을 위해 일했다. 진의 승상으로서 BC 221년 이후 시행된 거의 모든 정치·문화의 급진적 개혁을 주도했다. 이사는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었으며, 모든 군은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시황제는 화폐단위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또한 그는 천하의 모든 문자를 전서체(篆書體)로 통일시키도록 했는데, 한자(漢字)는 그후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존속되어왔다. 마지막으로 불온한 사상의 확산을 막기BC 213년 역사교육을 금지하고 분서(를 명령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후대 모든 유학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BC 209년 시황제가 죽자, 황위 계승자를 바꾸려는 환관 조고(趙高)의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2년 후 둘 사이에 암투가 생겼고 조고는 그를 사형에 처했다

한비자(韓非子)

I.생애

한비자(?-BC233)의 출생시기와 본명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전국시대 말기의 7국(秦, 楚, 齊, 燕, 韓, 魏, 趙) 중, 韓나라의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호칭은 본래 “韓子”였으나 唐代의 “韓愈”와 구분하기 위해, 후에 “韓非子”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더듬어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성장과정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한비자의 철두철미한 법치주의는 언어장애로 인한 불우한 성장과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비자는 “性惡說”을 주장한 순자의 제자였다. 그는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과 상앙(商鞅)의 법치사상을 계승․발전시켜 스스로의 학문을 세웠고, 法家의 맥을 이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후에 한비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시기에, 순자에게서 함께 동문수학했던 이사(李斯)에 의해 생을 마감하였다.

전국시대 약소국에 속했던 韓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한비자는, 국가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군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등용되지 못하자, 그는 오직 글로써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한비자는 이 시기 “孤憤”, “說難” 등 십만여 자나 되는 글을 썼는데, 바로 이 글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韓非子』이다. 그후 어느 날 우연히 “孤憤”과 “五蠹”가 진시황에게 전해졌는데, 한비자의 글을 읽은 진시황은 “이 사람과 함께 놀 수(대화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후 진시황은 韓나라를 공격해 韓非子를 만날 수 있었다. 한비자를 직접 만나 본 진시황은 그의 박식함과 뛰어난 식견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드디어 자신을 알아주는 군왕을 만났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옛 친구의 질투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한비자는 법가의 체제를 중심으로 순자의 성악설과 유가의 윤리관을 받아들였다. 그는 “人性利己說”을 통해 인간의 性은 이기적이고 악하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강력한 법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훗날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중요 통치사상이 되었다.

II.교육과 인간

법가는 법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형성된 학파이다. 때문에 법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한 법가의 인간관은,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다. 법가에서는 인간의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강력한 법으로 인간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가의 성악설은 순자의 성악설과는 의미가 다르다. 한비자의 인간관이 순자의 성악설에 근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비자의 인간관은 순자의 성악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순자는 인간의 性이 악하긴 하지만, 수양과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비자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하였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비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만 이익을 추구할 뿐, 근본적으로 타인을 위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는 인간관계에서도 이해관계(利害關係)만을 인정할 뿐, 서로 돕고 서로 나누는 이상적인 관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 예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였다. “수레(차)를 만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부귀해 지기를 바란다. 나무로 관을 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바란다” 즉, 한비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개인적인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불신은 통치자에게도 적용된다. 한비자는 “군왕과 신하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 군왕은 자신의 계산으로 신하를 키우고, 신하는 자신의 계산으로 군왕에게 시중든다. 군왕과 신하 사이의 교제는 곧 계산이다”라고 했다. 이는 군신관계(君臣關係) 역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늘을 대신해 통치하는 군왕도 이기심에 가득찬 인간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인간에 대한 한비자의 일관된 관점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축하하고, 딸을 낳으면 그 딸을 죽여버린다. 모든 자녀는 부모가 낳았는데, 아들은 축하를 받고, 딸은 죽임을 당한다. 이는 부모도 훗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즉, 부모 역시도 이기심에 가득찬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전국시대 말기,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들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결국 한비자의 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이해관계만을 인정한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善心”이나 “愛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기심만 존재할 뿐이다. 이는 곧 엄격한 정치제도와 법률의 근거이며, 나아가서 교육이 근본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기존의 교육으로는 효과적인 성과를 가져 올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오히려 강한 법제(法制)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 더 효과적이며 신속하다고 하였다. 한비자는 “어머니는 깊은 애정으로 자녀를 대하였지만, 자녀의 (도덕심은) 상당히 실패하여 나빠졌다. 이는 애정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애정으로 대하지 않고, 매로써 가르쳤더니, 자녀는 상당히 착해졌다. 이는 엄격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행실이 나쁜 자녀가 있는데, 부모가 노여워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충고를 해도 나아짐이 없으며, 선생이 가르쳐도 변화가 없었다. 부모의 사랑, 동네 사람들의 덕행, 선생의 지식, 이 세 가지 미덕이 더해졌지만, 조금도 개선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을의 관리가 官兵을 동원해서 公法으로 간악한 자를 색출하자, 그후 두려워서 자신의 습관을 고치고 행실을 바꾸었다”라고 예를 들었다. 이 예를 통해 한비자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 충고, 교육보다 엄격한 법률이 더 효과적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법가가 유가, 묵가, 도가 등의 사상과 구별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유가, 묵가, 도가는 교육으로 인한 인간의 변화와 인격을 비교적 중시하였지만, 법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법제뿐이었다. 한비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이해하였고 교육을 포함한 사회전반에 있어서 “형법만능론(刑法萬能論)”을 주장하였다.

III.교육정책

1.私學打破

전국시대 말기, 각 나라에는 군왕에게 조언하는 직책인 “양사(養士)”와 “예사(禮士)”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비자는 “양사”나 “예사”가 군왕에게 개인적으로 조언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가는 文으로 법제를 혼란하게 하고, 俠客은 무력으로 禁令을 위반하는데, 군왕은 (이 두 부류에게) 모두 禮로써 대하니, 이것이 바로 나라가 혼란한 원인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 私學이 현실정치에 많은 혼란을 주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각 학파는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조언하게 되고, 자기 학파를 옹호하게 되므로, 군왕은 당연히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제로만 통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법제를 떠나 자기 학파의 이론만을 조언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조언을 하는 私學을 “二心私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대개 난을 일으켜 세상에 반대한 자는, 일반적으로 공부한 사람 중에 二心私學한 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한비자에게 있어서 私學은 법제를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난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이렇게 그는 私學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우둔하고 사람을 속이는 학문과(여기서는 유가와 도가를 가리킴) 복잡하고 모순된 행위를 밝은 군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현실정치에 법제만 남아있게 하기 위해서 모든 私學을 타파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서 한비자는 당시 사회의 법제를 혼란하게 하는 다섯 가지 私學인 “學者(儒家)”, “言談者(縱橫家)”, “帶劍者(游俠)”, “患御者(逃避兵役者)”, “商工業者”를 “五蠹(다섯 가지 사회를 좀먹는 해충)”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한비자에게 있어서 국가에 필요한 유일한 학문은, 법제를 완성시킬 수 있는 법가이며, “五蠹”에 해당하는 私學은 정책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교육개혁의 대상이었다. 또한 한비자는 私學이 법제를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군권을 통제할 수도 있으므로, 확고한 법제를 확립하고 가르쳐, 강성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한비자의 교육정책은 다음 구절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사악한 법을 금지하려면, 첫째로 사악한 사상을 금지해야 하고, 둘째로 사악한 말을 금지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사악한 행위를 금지시켜야 한다” 이는 법으로 모든 사상과 행위를 통제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며, 동시에 私學을 타파하고 통일된 사상으로 법치국가를 이룩하고자 한 한비자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말이기도 하다.

2.耕戰敎育

한비자는 상앙의 “경전(耕戰)”사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韓非子』에는 경전에 대한 정책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한비자는 당시를 강한 국가만이 살아남는 전쟁의 시대라고 생각하여, 강한 군사력만이 국가를 존속시켜 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당시는 전국시대 말기로, 각 나라의 정치적 관건은 중원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즉, 한 국가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전국통일의 가능성에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간파한 한비자는 “힘이 세면 다른 사람이 (나를) 받들게 되고, 힘이 약하면 다른 사람을 받들어야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국가가 온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군사교육이 필요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군사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한비자의 주장은, 전국시대의 사회의식을 교육정책에 반영시킨 것이었다. 즉, 한비자는 백성들이 “喜農樂戰(농사를 좋아하고 기꺼이 전쟁에 임한다)” 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비자는 시대를 불문하고 각 국가의 교육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기존 교육을 통해 배양된 인재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비자는 “관리는 농사짓는 농민에게서 세금을 거두는데, 오히려 군왕은 공부하는 학자를 존중한다. 농민에게는 세금만 더 무거워지고, 학자에게는 상만 더 많아진다”라고 하였다. 이는 국가의 근본인 농업을 우대해서 농업중심의 인재를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한비자는 농민을 제외한 학자, 상인, 장인 등의 직업이 사회를 혼란시킬 뿐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국가가 부강하려면, 비농업 인구를 농업에 종사하도록 개혁하고, 유사시에는 긴급히 참전(參戰)할 수 있도록 모든 농민에게 군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백성들이 종사할 수 있도록, (말하기를) 부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므로, 백성들이 종사할 수 있도록, (말하기를) 귀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한비자는 국가교육의 핵심을 농민과 군사를 배양하는 데 두었고, 그 밖의 것들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정치에 종속된 교육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IV.법치교육

한비자는 상앙의 “명법령(明法令)”과 “위법령치관(爲法令置官)”사상을 계승․발전시켰다. 그는 “밝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서적과 문헌을 폐지시키고, 법으로 가르치며 선왕의 말을 버리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선생으로 삼는다”라는 말로 상앙 보다 더 강력한 법치교육을 주장하였다. 이는 사회 전반에 법치교육을 실시할 것과,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곧 스승임을 주장한 것으로, 곧 법가 교육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교육내용 역시도 법령이었다. 그는 상앙의 말을 해석하면서, “나타내서 눈에 보이고, 북으로 소리를 내어 귀에 듣게 하며, 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이는 법이 모든 생활의 근거이며, 인간 행동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법을 가르쳐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사회가 안정되고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법치교육을 하려면 먼저 법 앞에서 모두가 엄정하고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법치교육을 보편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인 것이다. 한비자가 군왕에게 건의했던 “칠술(七術)” 중에, 두 번째가 “필벌명위(必罰明威)”였으며 세 번째가 “신상진능(信賞盡能)”이었다. 이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률의 적용만이 성공적인 법치교육의 기초가 됨을 건의한 것이다.

한비자 법치교육의 특징은 법가사상을 계승하여 법률을 교육내용으로, 관리를 교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의 법치교육은 기존 법가사상과 명확히 구분된다. 한비자에게 있어서 교육내용인 법과 교사인 관리는, 실제로 교육내용과 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즉, 교육내용인 법은 행동의 규범은 될 수 있으나 지식의 본체(本體)는 될 수 없고, 교사인 관리는 법제과 직책에 의해서 전달하고 판단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들이 학생이며, 모는 관리가 교사이고, 모든 법률이 교육내용이라는 한비자의 주장은 폅협하고 국한된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비자의 법치교육은 법제에 지나치게 치우쳐 교육 본연의 의미를 왜곡하였다. 또한 국가가 발전하려면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오히려 그는 지식이나 인격교육이 불필요하다고 여겼고, 법제에 따른 획일적인 인재만을 인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고대의 법제를 체계화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비자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V.교육목적

한비자는 법제에 의한 통치와 법치교육을 위해서 “智法之士(법을 알고 법에 지혜로우며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를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지법지사”는 한비자의 이상적인 인간상임과 동시에,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당시 각 나라의 인재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라가 평안할 때에는 유생과 협객을 배양하겠지만, 전쟁시에는 갑옷 입은 병사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관점에서는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인재를 배양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여기서 쓸모 있는 인재란 곧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병사라고 할 수 있다. 즉, 당시는 전쟁이 잦았던 전국시대였으므로, 한비자의 교육목적은 병사를 배양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타 학파와는 상반되는 내용으로, 당시 유가와 도가 중심의 교육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교육목적은 仁, 道, 義와 같이 관념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제에 의해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한비자는 기존의 인재교육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인재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 기준 역시 “지법지사”이다. 그는 “통치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멀리 보고 사소한 일에도 빈틈이 없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욕을 위해 협작하는 것을 통찰하지 못한다.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강경하고 정직하며 결단력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위법과 범죄를 바로 잡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교육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법지사”는 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다스리며, 공평무사하게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지법지사”가 바로 충신이고, 훌륭한 관리이며, 국가에 필요한 인재라는 것이다.

한비자는 “지법지사”를 제시함과 동시에, “지법지사”의 조건으로 “공용(功用)”을 주장하였다. 그는 “실제적 효용으로 기준을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법치국가의 발전을 위해 유용성 있는 인재를 선출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德보다는 능력을, 명예보다는 실력을 더 중시했다. 그는 “도를 아는 군왕은, 청렴한 관리를 찾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교활하더라도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를 인재라고 하였다. 바로 이 점이 仁, 德, 義 등을 주장하는 기타 학파와 그가 다른 점이다.

한비자는 실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그는 실제 일을 맡겨 보고 능력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비자는 “관직으로 시험하고, 일의 성과를 통해 심사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秦漢)시대 초기까지 인재선발 방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한비자는 “재상은 반드시 기층 관청에서 선발하고, 용맹한 장수는 반드시 사병들 중에서 선발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각 집단에 속해 있는 인재의 성과를 고려하여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며, 실무능력을 갖춘 자를 선발해야만 관리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무능력 위주의 인재선발은 묵자의 “겸사(兼士)”와 순자의 “대유(大儒)”에서도 나타나지만, 한비자는 그 내용을 달리한다. 즉, 묵자과 순자의 실무능력은 지식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지만, 한비자가 주장한 인재의 실무능력은 지식훈련보다는 경험과 성과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한비자의 교육목적은, 법을 공평하게 집행할 수 있는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仁, 德, 義와 같은 무형적 가치는 실무능력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비자의 교육사상은 독단주의와 실용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법가사상 외의 모든 학파의 이론과 사상을 부정하고 비판했으며, 오직 법제를 올바로 집행할 수 있는 인재만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법제를 떠난 모든 가치와 윤리는 불필요한 것이며, 농민과 병사 외의 모든 사회구성원도 개혁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한비자의 관점은 전국시대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또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장애와 시대적 불운 등으로 인해 뜻을 펼치지 못한 그의 개인적 감정도 반영된 것이었다.

법가의 교육사상은 지식교육과 도덕교육을 경시하고, 법을 인간보다 우선 순위에 두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또한 다양해져 가는 사회체제를 획일적인 사상과 인재로 통치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복잡해져 가는 사회가 법치주의를 수용하고 강화하는 이유는, 바로 현재의 사회에 강력한 법제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간파하여, 실용적이고 획일적인 인재 양성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 점이 현재 중국 교육학계가 한비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부정적으로도 평가하는 근거이다.

한비자의 인간관과 사회 질서의 문제

홍 승 표

I. 문제 제기

II. 한비자의 인간관

III. 한비자의 사회 질서관

IV. 현대 사회학의 인간관과 사회 질서관

V. 논의

I. 문제 제기

사회 질서의 문제는 사회학의 근본 과제의 하나이다. 사회 질서의 문제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에 의해서 제기된 이후에,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eim)과 탈코트 파아슨스(Talcott Parsons)를 비롯한 많은 사회학자들이 사회 질서의 기초를 밝히고자 하였다. 물론 사회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사회 질서의 문제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동양 사상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춘추 전국 시대의 다양한 사회 사상들은 사회 질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란 동주(東周) 시대의 시작인 B.C. 770년부터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는 B.C. 221년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는 역사의 급격한 변동기로 서주(西周)의 예(禮)에 바탕한 윤리적 질서가 붕괴되고, 전쟁이 격화된 혼란의 시대였다. 춘추 시대를 통해 전쟁이 일어난 횟수는 1,200회가 넘고, 춘추 초기의 100여 국이 춘추 말기에는 13개 국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가히 이 시대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다(이춘식, 1986:101). 군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국력을 강화시켜야 했고, 국력 강화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민중을 보다 효율적으로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였다(이성구, 1989:108). 따라서 농경지의 황폐화, 사상자의 속출, 빈번한 징발과 과다한 세금으로 민중의 생활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된다. 한비자(韓非子 上, 八說:152)는 “옛날 사람은 도덕과 의리를 소중하게 여겨 이를 먼저 해야할 일이라 서둘렀지만 중세(中世)에 와서는 슬기와 꾀로서 서로 다투었고, 지금은 무력으로 힘을 견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윤리적 질서가 붕괴된 전국 말기의 시대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렇듯 혼란한 시대 상황에 직면하여,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였다. 이렇듯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가들은 사회학의 중요한 관심사인 사회 질서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들이 제시한 해답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사회학자들의 설명과 비교될 수 있고,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법가(法家)를 대표하는 한비자(韓非子)의 사상 역시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비자는 전국 말기의 사상가로 사회 혼란을 종식시키고, 민중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엄격한 법의 제정과 공정한 집행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첫째로, 한비자의 인간관을 살펴 보고, 인간관과의 연관에서 그의 사회 질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이 사회 질서 형성 방안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둘째로, 현대 사회학자들의 이기적 인간관과 사회 질서관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한비자와 현대 사회학의 인간관과 사회 질서관을 비교하면서, 이들 논의의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II. 한비자의 인간관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하였다.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을 최초로 체계화한 학자는 한비자의 스승이기도 한 순자(荀子)이다. 순자는 인간은 원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감정을 타고나며, 이것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荀子, 榮辱:105). 인간의 욕심은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荀子, 榮辱:108).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악이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荀子, 性惡:507). 그래서 이러한 악한 본성이 방치되었을 때에는, 서로 다투고 빼앗는 격심한 사회 혼란이 야기되어, 무법(無法)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荀子, 性惡:507).

한비자는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였으며,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변형시켰다. 한비자는 인간이란 원래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임금은 천하를 얻기를 바라고, 신하는 부귀를 구하며, 보통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도 생활이 넉넉하여 자기 한 몸의 편안함과 집안의 이익을 희구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을 순화시키는 방법으로 순자는 예를 내세웠음에 비해서, 한비자는 엄격한 법률의 제정과 집행을 주장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심각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한비자의 인간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타고나는 성정을 관찰해 보면 어진 사람은 적고, 못된 사람이 많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회피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모든 인간은 이익이 되는 일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형벌을 겁내고 포상을 바라며, 귀한 것을 좋아하고, 천한 것을 싫어하며,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며, 혼란을 좋아하고 그 법을 사랑하려 들지 않으며(韓非子 下, 心度:445), 노동을 싫어하고 나태하게 지내기를 좋아한다(韓非子 下, 心度:447). 사람들은 이로움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마치 들판에 노니는 사슴과 같아서, 사슴이 무성한 풀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 듯이, 상이 두터운 곳으로 모여 든다. “이로움이 있는 곳에는 민중들이 모여들게 마련이고,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일이라면 선비는 목숨을 건다”(韓非子 下, 外儲說左上:14). “뱀장어는 뱀과 비슷하고, 누에는 배추벌레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배추벌레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고기잡이는 뱀장어를 만지고 부인들은 누에를 만진다. 이익이 있는 일에는 누구나 싫은 것을 잊고 모두가 맹분(孟賁)과 전저(專諸)처럼 용감해진다”(韓非子 上, 內儲說上: 476).

한비자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여서,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이기적 동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韓非子 下, 外儲說左上:37). 그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위(魏)나라 오기(吳起) 장군이 부하의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아준 것은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건강을 회복한 부하가 전투에서 열심히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고(韓非子 下, 外儲說左上:12),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며(韓非子 上, 備內:205), 왕랑(王良)이 말을 아낀 것은 타고 달리기 위함이며(韓非子 上, 備內:205), 관(棺) 만드는 사람이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은 관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자 함이며, 수레 만드는 사람이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원함은 수레를 팔기 위함이며(韓非子 上, 備內:205), 주인이 머슴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많은 품삯과 용돈을 주는 것과 머슴이 힘을 내 열심히 김을 매고, 밭갈이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쓰고자 함이라는 것이다(韓非子 下, 外儲說左上:37).

이렇듯 각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은 상대를 위해 일을 하게 되면 보답을 바라게 되고, 적절한 보답이 없으면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韓非子 下, 外儲說上:12). 이러한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자식간에도 해당된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 부모의 보살핌이 허술했다면 그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원망한다. 자식이 장성하여 성인이 된 후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하면 부모는 화가 나 그 자식을 책망하게 된다. 자식과 부모 사이는 원래 가장 친밀한 관계인데도 혹은 책망하고 혹은 원망하게 되는 것은 서로가 자기를 위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 바램을 상대가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을 믿을 수 없다. 한비자는 아내나 자식처럼 가까운 사이의 사람을 포함해서,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인간에 대해서 철저히 불신해야함을 주장한다(韓非子 上, 14편 備內:204). 인간 관계를 상호 신뢰의 바탕 위에 형성시키려해서는 안되며, 상대방의 이해(利害)에 호소해서, 자신이 상대방에 원하는 행동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적 인간간에는 언제나 서로의 이해 관계가 반목하게 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간의 이해도 서로 다르고(韓非子 上, 五蠹:56), 공적인 이익과 사적인 이익도 일치하지 않으며(韓非子 上, 五蠹:56), 임금과 신하의 이해 관계도 언제나 상반되게 된다(韓非子 上, 八經:167). 이렇듯 각자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며, “자기의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나라를 위하는 신하는 없으며, 나라를 해치면서까지 신하의 이익을 꾀하는 일을 임금은 하지 않는다. 신하의 일반적인 性情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면 이로움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임금의 일반적인 성정은 나라를 헤치게 되면 친근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긴다. 임금과 신하는 이렇듯 서로의 이익을 헤아리는 관계를 맺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진실한 충신이란 없으며(韓非子 上, 29편, 內儲說下:491), 신하들은 임금의 위세에 얽매여 부득이 섬기고 있을 뿐이다(韓非子 上, 14편, 備內:203).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결코 신뢰나 사랑의 바탕 위에서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으며, 마치 까마귀를 길들이는 방법과 같이 상대편을 길들이고자 하는 것이다(韓非子 下, 32편, 外儲說右上:107).

한비자는 또한 의로움을 따르기 보다는,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다(韓非子 上, 五蠹:49). 사람들은 사랑으로 대했을 때에는 쉽게 교만․방종하고, 위세로 대했을 때에는 순종한다(韓非子 上, 五蠹:51). 이것은 어짊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적고, 의로움을 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韓非子 上, 五蠹:49). 그러므로 권력만 있으면 사람들을 복종시키기란 쉬운 일이며(韓非子 上, 五蠹:49), 사랑이나 의로움에 호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III. 한비자의 사회 질서관

상술하였듯이 한비자는 인간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어떻게 사회 질서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한비자와 현대 사회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문이다. 인간이 각자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한다면, 사회에는 상호 반목과 다툼이 팽배하게 될 것이고, 극단적인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적절히 통제해서, 그들로 하여금 규범 동조적으로 행위하게끔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뒤따르게 된다. 여기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은 인간이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좋아하고, 손해가 되는 일을 싫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악한 본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익과 손해에 호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규범 동조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상을 주어서 그러한 행위를 수행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됨을 분명히 하여 이러한 유형의 행위를 촉발시키고, 규범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벌을 줌으로써 그러한 행위가 자신에게 손해가 됨을 분명히 하여 이러한 유형의 행위를 회피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은 규범 동조적 행위를 하게되고 사회에는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 질서 수립에 대한 이와같은 한비자의 전략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주창자인 스키너(B. F. Skinner)의 인간 행동의 수정을 위한 방안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한비자는 “옛날에는 인의(仁義)가 소용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전국 시대말의 극심한 사회 혼란기에 직면해서, 인의에 바탕한 사회 질서의 수립이란 공허하며, 비현실적인 구호일 뿐이고, 오로지 권력에 바탕해서만 사회 질서 수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방임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사악한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게 되어, 각자 사사로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될 것이며(韓非子 上, 姦劫弑臣:237),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인들의 욕망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권력이란 이런 의미에서 사회 질서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권력은 질서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하면, 혼란의 원천도 될 수 있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권세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편리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데도 쓰일 수 있다.” “무릇 권세라는 것은 현명한 사람은 이를 이용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진 사람이 이를 사용하면 세상은 곧 다스려지고, 못된 사람이 이를 사용하면 세상은 곧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사회 질서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하여 법을 제정하고, 법에 따른 상벌을 공정히 시행하여야만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도덕심에 호소하여서는 사회 질서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짊이나 포악은 다같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하여, 권력자의 포악함 뿐만 아니라 어짊도 사회 혼란을 불러 온다고 하였다. 특히 군주의 어짊(仁)은 유가 사상가들이 사회의 도덕적 질서 형성의 근원으로 파악한 것인데, 한비자는 이를 오히려 혼란의 원천으로 파악한 점이 특이하다. “어진 사람이 임금 자리에 있으면 신하들이 제멋대로 금령과 법률을 쉽사리 범하게 되고, 구차하게 요행만을 임금에게 바라게 되므로,”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규범에 따른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도덕심에 호소해서는 안되며, 형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민중이 법률에 따라 못하게 금할 뿐, 염치심에 호소하여 못하도록 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한 “위세로 난폭한 것을 다스릴 수 있으나 후덕한 은정으로서는 혼란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개인이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나 습관을 고치는데 있어서 조차도, 부모․스승․마을 어른들의 훈화나 꾸중보다는, 그런 버릇을 가진 사람을 색출하여 형을 집행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한다(韓非子 上, 五蠹:51).

사악한 인간 본성을 억압하는데 있어서, 한비자는 법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법은 “임금의 과오를 바로잡아 주고, 백성들의 악함을 꾸짖어 주며,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그릇됨을 결단해 주며, 지나침을 견제하고, 옳지 못함을 가즈런히 해 준다. 백성들을 통일하는 방법으로는 법보다 좋은 게 없다.” 또한 사람들의 행동을 바로 잡는데 있어서 법에 따른 처벌이 가장 효과적이다. “관리들을 엄히 단속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지나친 행동과 위태로운 행동을 물리치고, 사기치고 속이는 일을 멎게 하는 데에는 형벌보다 좋은 게 없다.”

한비자에 따르면, 사회 질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행위에 관한 규범이 무엇인지를 행위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인식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법의 제정과 공포이다. 일단 이러한 작업이 완수되고 나면,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법에 따른 상벌의 시행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사회는 질서를 이루고 부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론에서 상벌은 규범적 행위를 이끌어내는 유력한 도구인데, 상벌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그의 인간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비자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여서,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구하고, 해로운 것을 회피한다고 보았다. 그러하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규범 동조적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기심에 호소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규범에 따르는 행위에는 상을 주어서 그러한 행위의 수행이 당사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고, 규범을 어기는 행위에는 벌을 주어서 그러한 행위의 수행이 당사자에게 해가 되도록 함으로써, 인간은 규범에 따르는 행위를 하게 되고, 사회는 질서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다음 두 구절을 통해서 이러한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무릇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사람의 성정을 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성정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을 이용해 상과 벌을 쓸 수 있다.” “밝은 임금이 신하를 인도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을 따름이다. 두가지 방법이란 형벌과 은덕을 말한다. 형벌과 은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벌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은덕이라 한다.”

상벌의 시행이 질서 확립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상벌 시행의 원칙이 있음을 한비자는 강조한다. 상벌 시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법에 따른 공평한 집행이다. 법을 무시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의거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중용하거나, 청탁에 따라서 사람을 등용한다거나, 친족을 등용하거나,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거나, 개인적 감정으로 공로가 있어도 상을 주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상벌을 시행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법령을 마련하는 것은 사사로움을 폐하기 위한 것이다. 법령이 잘 시행되면 사사로운 방법은 적용되지 않고 폐지된다. 사사로움은 법령을 어지럽히는 까닭이 된다.” 상벌 시행의 또다른 원칙으로 한비자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상은 후하게 줄수록 효과적이며, 벌은 엄격할수록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상은 후하고 확실하게 주어서 민중으로 하여금 이롭게 여겨 신실을 추구하게 하고, 형벌은 무겁고 엄하게 하여 민중들로 하여금 법을 두렵게 여기게 함이 가장 좋다.” “상을 후하게 주면 바라던 일을 쉽게 이룰 수 있고, 벌을 무겁게 내리면 싫어하는 일이 갑자기 그치게 된다.”

IV. 현대 사회학의 이기적 인간관과 사회 질서관

한비자와 현대 사회학의 인간관과 사회 질서관은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인간관의 측면에서 볼 때, 한비자와 많은 현대 사회학 이론가들은 인간을 이기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다. 이러한 이기적 인간관에 대한 공유는 사회 질서 형성 방안에 대해서 유사한 견해를 갖게 되는 바탕이 되는데, 한비자와 현대 사회학 이론가들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성공적으로 억압하였을 때, 사회 질서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학의 이기적 인간관과 사회 질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대 사회학의 이기적 인간관

홉스 이래 이기적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은 근대 서구의 대표적 인간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현대 사회학에 있어서도 많은 이론가들이 이러한 인간관을 공유하고 있다. 홉스는 인간이란 부, 명예, 권력, 쾌락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이기적 인간관을 제시하였다(Hobbes, 1994:58-59). 인간이란 이렇듯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 방임의 상태에서는, 서로의 이기적 욕망 충족이 상반하게 되고, 충돌하는 가운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고전적 사회학자인 뒤르케임도 인간이 사회나 사회가 형성한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각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되며, 각자는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고 보았다(Durkheim, 1976:167). 뒤르케임에게 있어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욕구 충족이 없이는 만족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물의 욕구가 생명 활동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제한된 것임에 비하여,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욕구는 한계점이 없는 무한한 것이란 차이점이 있다(Durkheim, 1976:207). 그러므로 욕망의 고삐가 풀리게 되면, 인간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욕망을 가질 것이며, 충족은 욕구를 충만하게 해주는 대신 새로운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Durkheim, 1976:208).

현대 사회학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회학 이론가들이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파아슨스는 홉스의 인간관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서, 인간은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Gouldner, 1971:241; 한완상, 1986:36).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인간은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안정되고 행복한 형태의 교호 작용을 이룩하지는 못할 것으로 믿고 있다”(Johnson, 1978:21).

랄프 다아렌도르프(Ralf Dahrendorf)가 가정하고 있는 인간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 지배 집단의 성원은 기존의 지배 질서의 유지와 강화라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피지배 집단의 성원은 기존 질서의 변화라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Dahrendorf, 1959:237-240). 다아렌도르프와 파아슨스의 사회학 이론은 상반된 측면이 많지만, 이기적 인간 본성에 대한 양자의 가정은 유사하다.

조오지 호만스(George Homans)의 교환 이론에 나타나는 인간도 본래부터 이기적이며, 쾌락적이고,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Duke, 1979:247). 호만스는 인간을 욕망을 갖고 있는 독자적인 개체로 인식한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하며, 행위를 통해서 가장 큰 보상과 가장 적은 처벌의 선택지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호만스의 인간관은 한비자의 인간관과 유사한 점이 많다.

2. 현대 사회학의 사회 질서관

이렇듯 많은 사회학자들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가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간관의 바탕 위에서 이들은 사회 질서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이들의 대답의 공통점은 인간의 이러한 이기적 본성을 성공적으로 통제하였을 때, 질서가 수립되게 된다는 것이다. 통제의 방법에 대해서 각자가 제시하고 있는 방안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발상은 유사한 것이다. 사회 질서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던 뒤르케임과 파아슨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뒤르케임은 인간의 욕망의 특성은 적절한 통제 장치가 없으면, 무제한으로 확장된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무한한 욕망이란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폭발하였을 때,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되어야지만 사회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뒤르케임(1976:209)은 “욕망이 제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욕망은 능력과 조화를 이루며 만족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욕망을 제한할 수 없으므로,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 욕구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 것인지’, ‘합법적인 것인지 부적절한 희망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한계를 그어주어야 하며, 이렇게 개인의 열망을 적절한 수준에서 제약하였을 때, 비로서 개인의 차원에서는 생활의 안정과 만족이 있을 수 있고, 사회의 차원에서는 질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Durkheim, 1976:213). 그리고 이러한 외적 규제를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제의 수단으로 종교를 제시하였다. 그는 종교는 인간에게 자제를 가르치는 최선의 학교라고 말한다. 많은 경우 종교는 빈곤의 장점과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절제의 훈련을 하게하고, 집합적인 규율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그럼으로써 사회 질서를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Durkheim, 1976:214).

사회 질서의 문제는 파아슨스의 사회학 이론에 있어서도 중심에 위치해 있다. 그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인간이 규범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사회 질서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통제하는 주된 수단으로 그는 사회화를 제시하였다. 사회화란 사회 체계의 지위-역할을 포함하여, 문화 유형의 언어, 가치 등을 행위자의 인성에 내면화시키는 과정이다. 파아슨스는 학습의 다섯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강화-소거(reinforcement-extinction), 금지(inhibition), 대체(substitution), 모방(imitation), 동일시(identification)를 제시하였다(Parsons, 1951:209). 특히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서, 부모나 교사에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통한 가치, 규범의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은 규범 동조적으로 행위하게 되며, 이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사회 통제의 기제를 제시하였다. 사회 통제란 “역할 기대의 충족을 어기는 경향에 대해서 행위자들이 맞대응을 하도록 동기화하는 과정”(Parsons, 1951:206)으로, 사회 통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대인적 제재와 몸짓(interpersonal sanctions and gestures), 의례 활동(ritual activities), 안전판 구조(safty-valve structures), 재통합 구조(reintegration structures), 강압과 힘의 사용의 제도화 등을 말하였다(Turner, 1986:68).

IV. 논의

뒤르케임이나 파아슨스의 인간관과 사회 질서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한비자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즉, 이들은 ‘사악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대한 적절히 통제를 통해서 사회 질서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제의 주된 방법으로 한비자는 법에 따른 형벌의 강력한 집행을, 뒤르케임은 종교의 교화적 힘을, 파아슨스는 부모의 양육을 포함한 교육을 제시하고 있다.

파아슨스나 뒤르케임의 사회 질서 형성의 방안은 외면적인 측면에서, 공자와 맹자를 포함한 유가들이 교육을 사회 질서 형성의 방안으로 제시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파아슨스나 뒤르케임의 교육과 공자나 맹자의 교육은 근본적인 목적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파아슨스나 뒤르케임의 교육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억압하기 위한 외적 힘으로써의 의미를 갖는 반면에, 공자나 맹자의 교육은 인간 내면의 어진 본성을 해방시키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인 것이다. 동일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사회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기제로서 순자와 맹자가 예(禮)를 강조하고 있는 유사성과 예의 근본적 목적의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파아슨스․뒤르케임과 공자․맹자가 사회 질서 유지의 방안으로 제시한 교육은 외형상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작용을 하는 것이며, 파아슨스․뒤르케임의 교육은 한비자의 법에 따른 형벌과 그 목적에 있어서 유사점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한비자와 파아슨스․뒤르케임의 사회 질서에 대한 이론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데, 이러한 유사점이 나타나는 근본적 요인은 이들이 이기적 인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들의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는 파아슨스나 뒤르케임의 경우는 자본주의적 산업 사회의 인간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고, 한비자의 경우는 전국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이기적 인간관 형성의 시대적 배경은 상이하지만, 이들 모두가 자신의 시대 상황 속에서 관찰되는 지배적 인간 유형을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들의 이러한 인간관은 대부분의 사회학 이론들이 빠져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현상으로 드러난 인간을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사회학 이론의 발전에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혼동은 논리적인 이유에서 인간 소외에 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하며, 비판적 현실 인식을 어렵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현실의 인간 소외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현실 속에서 관찰되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논의는 비인간화되지 않은 정상적 인간에 대한 가정을 전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관찰되는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간주할 경우에,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논의와 소외 극복의 방안에 대한 논의는 원천적으로 차단되게 되며, 현실에 대한 일차원적 기술만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불가능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현실의 인간 소외를 방조하게 되고, 강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인간관은 사회 질서에 대한 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을 때, 사회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비자․뒤르케임․파아슨스가 그러하였듯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성공적으로 억압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가정하였을 때, 현실의 지배적 인간 유형으로서의 이기적 인간은 원래적이며,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 제도 등의 영향으로 원래의 모습이 파괴된 결과로서의 현상적 모습일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 사회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조치, 즉 사회 제도를 개혁하여 바로 잡고, 인간의 선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교육 활동 등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선설의 입장에서 사회 질서의 문제를 논의한 대표적 학자는 맹자이다. 무질서의 문제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맹자는 힘에 의한 사회 질서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즉, 힘에 의한 질서의 상태란, 사람들이 진심으로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며, 불안정함하다는 것이다(孟子 公孫丑上篇). 법과 금령에 의한 정치는 백성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에 바탕해서 질서를 찾고, 도덕 정치는 백성들의 기꺼워하는 마음에 질서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후자가 보다 근본적이며, 우월한 질서유지의 방법이라는 것이다(孟子 盡心上篇). 즉 사람들이 선에 흥기하게 되면, 비도덕적 행위는 자연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것이다(孟子 盡心下篇). 선성설을 주장했던 맹자는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인의예지의 본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사회에 규범적 질서가 형성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며, 그러했을 경우 인간은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하게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은, 사회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이 취해져야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된 방안이 나타나게됨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한 검토 작업이 없이, 현상의 인간을 인간 본성으로 쉽게 간주하고서 사회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방관하고, 악화시킬 개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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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gg, Roger. 1988. Ideas of Human Nature: An Historical Introduction, Oxford, UK:

Basil Bin嶯褁厝騇 i

◦ 승패는 한순간에 결정된다. -손자병법

◦ 결론과 결단을 내렸으면 즉시 실천해야 한다. -손자병법

◦ 어떤 일이든 해결 방법은 반드시 있다. -손자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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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성 있는 인간관계와 훌륭한 대인 관계가 성공 세일즈의 기본 요소임을 깊이 인식한다. -윤남용

◦ 고객은 자기가 믿고 좋아하는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며, 가능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제품을 사고 싶어한다. -윤남용

◦ 인간이 상호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관점을 교환하거나 혹은 상호간 어떤 목적의 추구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토의하는 것이 바로 협상이다. -제라드 I. 니렌버그(미국 협상학자)

◦ 관련된 쌍방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각자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토의를 진행하는 것을 말하며,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조정하면서 각자가 비교적 만족하는 협의에 이르려는 부단한 조화의 과정이다. - P.D.V. 마쉬(미국 협상학자)

◦ 협상은 합의점을 모색하는 해결 과정이다. 자신의 입장과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싸움이지 협상이 아니다. -김병국(국제변호사) [비즈니스 협상론]

◦ 천리길도 발밑에서 시작되고 높은 산도 작은 먼지에서 시작된다. 나의 길도 이와 같다. 이를 실천함에 날로 새로움을 귀하게 여기도다. -백거이

◦ 항시 계책과 묘책을 연구해야 하고, 지략과 전략 전술에 능해야 한다. -손자병법

◦ 하나의 원칙으로 100가지 응용이 가능하다. -손자병법

◦ 최고의 목적은 승리에 있다. -손자병법

◦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

◦ 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적을 이긴다는 것이다. -손자병법

◦ 계산이 많으면 이기고 계산이 적으면 이기지 못한다. -손자병법

◦ 체제를 갖추어야 제 힘을 쓸 수 있다. -손자병법

◦ 모든 전쟁은 정공법으로 대결하고, 기습으로 성공한다. -손자병법

◦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의도를 십분 파악하는 데 있다. 또한 급소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 -손자병법

◦ 위험이 있으면 반드시 이익도 있다. 또한 이익이 있으면 반드시 위험도 있다. -손자병법

◦ 기선을 제압하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주도권을 잡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

◦ 지혜가 있다는 사람도 실제 전쟁터에서는 그 반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자주 그런 경험을 쌓고 이른바 싸움터에 익숙해지면 비로소 평소의 지혜가 그대로 나오게 된다. -손자병법

◦ 인간 믿음(신뢰성)의 유일한 길은 언행일치이다. -한비자

◦ 위대한 상식은 삼척동자도 잘 알지만, 80세 노인도 실행하기는 어렵다. -한비자

◦ 거짓이 아무리 교묘하더라도 서투른 성실만 못하다. -한비자

◦ 충분한 정보 수집과 정확한 정보 분석을 토대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한다. 막연하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대처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한비자

◦ 쓸모없는 자를 미워하고 쓸모 있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한비자

◦ 인간의 본질은 이욕(利慾)을 좋아하는 공리적인 것이어서 사리사욕이 없으면 사회는 정체한다. 또한 그 이욕은 활동과 동기 부여의 근원이며 필요악이기도 하다. -한비자

◦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인정도 아니고 애정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고 어설픈 의리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오직 이익(돈, 명예, 권력, 유희 등) 한 가지뿐이다. 인간은 각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다. 즉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누구나 용자(勇者)가 되는 것이다. -한비자

◦ 군사(軍事)의 속전속결은 많은 것(막대한 시간, 비용, 자원, 노력 등)을 절약하므로 무엇보다도 신속을 귀하게 여긴다. -손자병법

◦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다소 미흡하더라도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 -손자병법

◦ 지혜로운자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참작한다.-손자병법

◦ 사람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으려면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가장좋다. -손자병법

◦ 언제나 순조로운 일만 겪어 역경에 빠진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점보다는 약점이 훨씬 많으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알아내는 눈이 어두운 것이다. -손자병법

◦ 적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이편에게 달려 있고, 이편이 승리하는 것은 적군에게 달려 있다. 또한 전쟁은 이미 이겨놓고 승리는 단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이다. -손자병법

제궤의혈(堤潰蟻穴)

堤:방죽 제. 潰:무너질 궤. 蟻 :개미 의. 穴: 구멍 혈

개미구멍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큰 둑이 무너진다는 뜻. 곧 사소한 결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곧 손쓰지 않으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말

상고(上古)시대 우(禹)임금은 도로의 건설 등 개척 사업에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치수(治水) 사업을 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국시대 초기 홍수를 예방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위(魏)나라 재상 백규(白圭)는 스스로 자기의 공적이 우임금을 능가할 것이라고 큰소리치곤 했다.

'한비자(韓非子)'를 쓴 韓非도 "백규가 수재를 막은 것은 둑의 구멍을 막은 것(白圭之行堤也 塞其穴)"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인형을 조각하는 법- 韓非子중에서 -

인형을 조각하는 법은 우선 코를 크게 만들어 두는 것이 좋으며, 눈은 되도록 작게 만들어야 한다. 코를 크게 하는 것은 언제든지 깍아서 작게 할 수 있지만 작은 코를 나중에 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눈을 작게 하는 것은 언제든지 도려내어 크게 할 수는 있지만 나중에 작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하는 데도 같은 이치로 다시 손을 쓰도록 해두면 실패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 약- 韓非子중에서-

불사의 선약을 초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안내인이 이것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시종이 물었다."그건 먹어도 되는 것인가?"

안내인이 대답했다."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그 자리에서 그 약을 빼앗아 먹어버렸다.왕은 크게 노하여 형리를 시켜 그 시종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그러자 시종은 이렇게 변명하였다.

"저는 안내자에게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먹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장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죄가 없고 안내자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손님이 불사의 선약을 바쳤는데, 이것을 먹은 저에게 왕께서 죽음을 주시게 되면 그 것은 불사약이 아니라 사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손님은 왕을 기만한 셈입니다. 생각건대 죄가 없는 저를 죽이시고 폐하께서 속았다는 말이 천하게 퍼져 창피를 당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시는 것이 나을 줄로 아룁니다."

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훌륭한 거짓도 어설픈 진실에 미치지 못한다- 韓非子중에서 -

악양이 위나라 장수가 되어 중산을 공격하였는데,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에 있었기 때문에 중산의 군주가 그 아들을 죽여 삶아서 육즙을 만들어 악양에게 보냈다.

악양은 막사 안에서 그 육즙을 깨끗이 먹어치웠다.위의 문후는 그 소식을 듣고 도사찬에게 말하였다.

"악양은 나를 위하여 제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도사찬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 자식의 고기를 먹은 자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인들 안 잡아먹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귀국했는데 문후는 그 공을 치하는 하였으나 그 마음속은 믿지 않았다.

노나라 대부 맹손이 사냥을 하고 있었을 때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를 시켜 수레에 싣고 돌아가게 했다.진서파는 어미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가련하게 여겨 새끼 사슴을 돌려보내 주었다.맹손이 돌아와서 새끼 사슴을 찾자 진서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나도 가련해서 어미사슴에게 돌려주어 버렸습니다."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했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불러들이어 자기의 자식을 지키게 했다.마부가 맹손에게 물었다.

"전에는 처벌 하셨는데 다시 불러들여 아드님을 지키도록 하신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맹손이 말했다.

"새끼 사슴이 가련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사람 자식은 얼마나 귀하게 다루겠는가? 내 자식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악양은 공을 세우고도 의심을 받았고, 진서파는 죄가 있었지만 더욱 신임을 받았다 -

상아젓가락이 나라를 망친다- 韓非子중에서 -

은나라의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자 기자는 그것이 두려워서 이렇게 말하였다.

"상아젓가락을 만들면 국을 흙으로 만든 오지그릇에 담을 수는 없고, 반드시 뿔이나 주옥으로 만든 그릇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옥그릇이나 상아젓가락을 사용하게 되면 반찬은 콩이나 콩잎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쇠고기나 코끼리고기나 표범고기를 차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고기를 먹게 되면 아무래도 짧은 털가죽이나 초가집에서는 살 수 없는 노릇으로, 반드시 비단옷을 입어야하고 고대광실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상아젓가락의 격에 맞추다 보면 천하의 재물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 성인은 하찮은 징조를 보고도 장차 발생할 사태를 알 수 있으며, 단서를 보고서 결과를 추측한다. 상아젓가락을 보고 결과를 두려워한 것은, 천하의 재물을 다 쓸어 넣어도 욕망은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

숨기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위험하다- 韓非子중에서 -

습사미가 전성자와 면회를 했다. 전성자와 함께 누대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서북 삼면은 트이어 있었으나 남쪽은 습사미 집의 수목이 무성하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와 종으로 하여금 나무를 자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도끼로 몇 차례 찍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게 했다. 나무를 찍던 종이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다."왜 갑자기 그만 두라 하십니까?"

습사미는 대답했다.

"옛말에 '깊은 물 속에 숨어 있는 고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 전성자는 제를 공격하려는 대사를 꾸미고 있다. 거기다가 내가 작은 일에 신경을 쓰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게 되면 나는 반드시 위험에 빠진다. 수목을 자르지 않더라도 자르라고 명하지 않은 이상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일을 지적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이다."

-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

이익에 눈이 멀어- 韓非子중에서 -

위나라의 어떤 사람이 그의 딸을 시집 보내기에 앞서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시집을 가면 꼭 남몰래 저축을 해라. 남의 아내가 되면 때로는 쫓겨나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평생을 살게 되면 더욱 좋을 거고..."

그리하여 시집간 딸은 남몰래 저축을 했다. 시어머니가 그 것을 알게 되자 자기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쫓아버렸다.그런데 쫓겨난 딸이 친정으로 가지고 돌아온 것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간 것의 배가 되었다. 그 아버지는 그 것을 보고 자기 자신이 딸을 잘 못 가르쳤다는 것은 아예 모르고 더욱 반가이 여겨 기뻐하고 있었다.

이들의 논쟁- 韓非子중에서-

세 마리의 이가 논쟁을 하고 있었다.거기에 다른 한 마리의 이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무엇을 따지고 있는 거지?"세 마리의 이가 입을 모아 말하였다.

"우리는 토실토실 살 찐 돼지의 맛있는 부분을 따지고 있는 거야."

그러자 뒤에 나타난 이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머지않아 제사 때가 되면 불을 피워 돼지를 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느냐? 그렇게 되면 돼지는 물론 우리까지도 모두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세 마리의 이는 다툼을 멈추고 힘을 모아 돼지의 피를 빨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돼지는 비쩍 마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돼지로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하여 잡지 않았다.

능력은 상황에 따라 바뀐다- 韓非子중에서 -

백락이 두 사람에게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는 말의 감정법을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외양간에 가서 말을 조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어떤 말을 지적하고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하였다.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의 뒤로 돌아가서 세번 이나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는데도 말은 뒷발질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뒷발질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을 한 사람이 자기가 감정을 잘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이 감정을 잘 못한 것이 아니오. 이 말은 어깨가 굽었고, 앞 무릎이 부어 있소. 원래 뒷발질 잘하는 말은 뒷발을 들어 그 체중을 앞발에 이동시키는 법인데, 이 말은 앞발이 부었으니 뒷발을 들 수가 없는 거요. 당신은 뒷발질 잘하는 말 감정에는 최고인지 몰라도 무릎 감정할 줄은 전혀 모르는군요."

생각해 보면 매사는 의당 그렇게 되어 가는 도리가 있는 법이고, 정세에는 불리한 경우가 있는 법이다. 말의 앞 무릎이 부어 있으면 무거운 체중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알고 있다. 어쨌든 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이기는 하나 우리에 가두어 두면 돼지가 되고 만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 사람도 그 사람에게 불리한 정세에 놓아두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작은 원한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다-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 중대부에 이사라는 자가 있었다. 왕이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술에 만취되어 복도에 나와 문에 기대어 있었다. 그 때 형벌로 다리가 잘린 문지기가 졸랐다.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있으면 적선하십시오."

이사는 문지기를 나무랐다.

"시끄럽다. 죄를 지어 벌을 받은 주제에 어디서 버릇없이 함부로 구느냐? 손윗사람에게 술을 달라고 조르다니.."

다리가 없는 문지기는 재빨리 사라졌으나 이사가 그 자리를 떠나자 다시 나타나서 마루 끝에 물을 뿌리어 마치 오줌을 싼 것처럼 해두었다. 이튿날 왕이 이것을 보게 되었다.

"이 곳에 소변을 본 것이 누구이냐?"

문지기는 대답하였다."잘은 모르겠으나, 어제 중대부께서 여기에 서 계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이사를 처형하였다.

천하를 줄 테니 네 목을 달라- 韓非子중에서 -

초나라 남쪽에 있는 여수라는 강에서 사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훔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사금을 훔치는 자에 대한 법을 만들어 체포되면 시장에 끌고 나가 공개처형을 했는데도 여전히 훔쳐 가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처형된 시체를 강에 버려 강물이 막힐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둑은 그칠 줄 몰랐다. 그보다 무서운 처벌이 없는데도 도둑이 그치지 않은 것은, 도둑질해서 얻는 이익이 있는 반면 반드시 체포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천하를 몽땅 줄 테니 네 목을 내어놓아라."고 했다면 아무리 우매한 사람도 천하를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한 이익은 없다. 그러나 천하를 얻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구멍 뚫을 수 없는 표주박은 필요가 없다-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에 전중이라는 숨어사는 선비가 있었다. 송나라 사람 굴곡이 그를 만나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선생께서 주장하시기를 남의 은혜로는 먹고살지 않는다고 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표주박을 심는 요령을 알고 있습니다. 그 표주박은 돌처럼 단단하고 구멍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전중은 대답했다.

"표주박의 용도는 구멍을 뚫고 물건을 넣는데 있다. 그런데 구멍을 뚫을 수 없다니 아무짝에 쓸모가 없지 않나. 그런 표주박이라면 필요 없다."

굴곡은 말하였다."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도 그걸 버릴 작정이었죠."

어쨌든 전중은 남의 덕택에 먹고살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없었다. 이 것은 돌 같은 표주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장군이 사병의 고름을 빨다- 韓非子중에서 -

오기가 위나라 장군이 되어 중산국을 공격하였는데, 사병 가운데 악성종기로 괴로워하는 자가 있었다. 오기가 무릎을 꿇고 그 종기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 주었다. 그 사병의 모친은 그 말을 듣고 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장군께서 당신의 아드님 종기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아드님 종기의 치료를 위해 그토록 수고를 하셨는데 왜 우는 거요?"

모친이 대답했다.

"오기 장군이 그 애 아버지의 종기도 그렇게 빨아준 적이 있었죠. 그 애 아버지는 감격하여 장군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 애도 그렇게 싸우다 죽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웬놈의 멍에가 그렇게 많은가- 韓非子중에서 -

정현의 사람이 수레의 멍에를 주웠는데 무엇인지 몰라 어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뭘 하는 거죠?""그건 멍에라는 거요."

정현 사람이 같은 물건을 또 주웠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거 뭘 하는 거죠?" "그건 멍에라는 거요."

물어 본 사람은 성을 내며 말하였다.

"아까 물었을 때도 멍에, 또 물어봐도 멍에라니 웬놈의 멍에가 그렇게 많지. 당신이 나를 속이고 있군."두 사람은 싸움이 벌어졌다.

자기 발을 못 믿는 사람- 韓非子중에서 -

정나라 사람으로 신발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다. 먼저 자기 발의 길이를 재어 종이에 기록을 하였으나, 그 종이를 잊고 장에 갔다. 시장에서 신발을 보고

"신발의 치수를 적은 종이를 잊었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종이를 들고 다시 시장에 나갔으나 장은 이미 파한 뒤였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여보시오. 신발을 신어 봤으면 됐을 게 아니오."

그 사나이가 대답하였다."치수를 적은 종이는 믿을 수 있어도, 내 발은 믿을 수 없소."

말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다- 韓非子중에서 -

제나라 경공이 소해에서 유람을 할 때, 급히 온 특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영이 위독하여 임종하려고 합니다."

경공이 당황하여 일어서려고 하는데, 또 다른 특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경공은 말하였다.

"곧 번차에 수레를 매고, 마부는 한추를 시켜라."

그리하여 수백보를 달렸는데, 경공은 그 마부가 느리다 하여 스스로 말을 몰기로 했다.

수백보를 더 달렸을 때, 그 말이 빨리 달리지 못한다 하여 수레에서 내려 뛰어갔다.명마 번차의 빠른 발과 마부 한추의 능한 솜씨가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차에서 내려 뛰어가는 자신이 더 빠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 일은 따로 있다- 韓非子중에서 -

위나라 소왕은 스스로 관리의 일을 집행해 볼 생각으로 맹상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과인이 직접 관리들의 일을 다루어 보고자 하오."

맹상군이 말하였다.

"왕께서 직접 관리의 일을 하시겠다면, 먼저 법전을 숙독하셔야 될 것입니다."

소왕이 법전을 열 장 정도 읽다가 졸려서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깬 왕이 말했다.

"나에게는 이 법전을 읽을 만한 끈기가 없는 모양이오."

도대체, 왕이 정권을 장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신하가 할 일을 하겠다니 졸음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어린 아들을 위해 돼지를 잡다- 韓非子중에서 -

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갔다. 어린 아들이 따라오며 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라. 집에 가면 돼지를 잡아 삶아 줄 테니."

아내가 장에서 돌아와 보니, 증자는 돼지를 잡고 있었다.아내는 그 것을 말리며 말하였다.

"애를 달래기 위해서 한 마디 해보았을 뿐인데....."

증자는 말하였다.

"어린애에게는 특히 실없는 말을 해서는 안되오. 애들은 무지하여 부모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어린애를 속인다고 하면, 애에게 사기를 가르치는 것이 되오. 모친이 애를 속이고, 그래서 아이가 모친을 믿지 않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소?"

그리하여 돼지를 잡아 삶았다

귀걸이로 왕의 마음을 떠보다- 韓非子중에서 -

정곽군이 제나라의 재상이었을 때 왕후가 사망했다. 그 후 누가 왕후가 될지 몰랐기 때문에 옥으로 된 목걸이를 왕에게 헌상하여, 어떤 여자에게 주어지는가를 보고 왕의 마음속의 여자를 알게 되었다.일설에 의하면, 설공이 제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제나라 위왕의 부인이 사망했다. 그 때, 후궁에 열 명의 첩이 있었는데 모두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설공은 그 가운데서 어떤 여자를 왕후로 추대할 것인지 왕의 의중을 미리 알고 먼저 그 여자를 권고할 참이었다.만일 자기가 권고한 여자가 왕후가 될 경우 자기의 주장이 관철된 셈이 되고, 그 왕후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또 만일 자기가 권고한 여자가 왕의 마음에 없을 경우, 자기의 주장은 꺾일 것이고, 새로이 들어선 왕후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왕이 왕후로 삼으려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어 왕에게 권고하려고 옥으로 된 귀걸이 열 쌍을 만들고, 그 가운데 한 쌍은 특히 아름답게 만들어 왕에게 헌상하였다. 왕은 귀걸이를 열 명의 첩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튼날 설공은 왕의 곁에 앉아 있다가 가장 아름다운 귀걸이를 하고 있는 첩을 발견하자, 그 여자를 추천하여 왕후로 택하게 했다.

술집에는 개가 없어야 한다- 韓非子중에서 -

송나라 사람으로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되도 정확하고, 손님 접대도 잘 했고, 술 맛이 좋고, 간판이 되는 깃발을 높이 세워 두었는데도 술은 팔리지 않고 시어만 갔다. 이상스런 일이어서 잘 알고 지내는 양천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 집의 개가 사나운가?"

술장수가 반문했다."개가 사나운 것하고, 술이 안 팔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양천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개를 무서워하기 때문이야. 개가 사나우면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어 술을 사오라고 했을 때 개가 뛰어나와 물게 되고, 손님이 왔을 때 으르렁대며 물려고 한다면 술이 시어질 때까지 안 팔리게 되지."

생각해 보면, 나라에도 개가 있다. 뜻 있는 자가 치국정책을 품고 가서 군주에게 알리고 싶어해도 근신들이 사나운 개처럼 물어뜯는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눈과 귀가 가려지게 되어 뜻 있는 자를 임용하지 못하게 되고 나라는 썩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속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韓非子 說難篇 -

설득이 어려운 것은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 나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언변이 뛰어나기가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또 말을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하고싶은 말을 다하기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설득의 어려움은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나의 말을 그에게 맞추어야 하는데 있다.설득해야 할 상대가 명예를 좋아하는데 이익이 많음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절조가 낮고 비천한 자를 만났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 할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두터운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속으로는 이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명예를 높이 여기는 척하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하려 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할 것이며, 또 이익이 많이 생기는 일을 가지고 설득을 하면 속으로는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척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않된다.

이렇게 설득하면 몸이 위태롭다- 韓非子 說難篇 -

일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은 누설됨으로써 실패한다.

유세자(遊說者) 자신이 꼭 누설하려고 한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 우연히 숨겨야 할 일에 미치는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에게는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척하는 일이 있고, 속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유세자가 그 겉으로 들어난 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임금이 속으로 하고 있는 일도 알게 되면, 그러한 세객은 몹시 위태롭다.

세객이 임금에게 특이한 일을 헌책하였는데 지혜있는 자가 외부에서 추측하여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것을 외부에 누출하는 수가 있다. 임금이 반드시 진언한 자 자신이 누설하였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러한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의 총애를 아직 받기도 전에 자기의 있는 지혜를 모두 말해 버리면, 진언이 시행되어 공이 있어도 진언한 자의 공덕을 잊어버리게 되며, 진언이 시행되지 아니하여 실패하면 의심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몹시 위태롭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을 때 세객이 예의를 밝혀 말함으로써 임금의 잘못을 캐내려 하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임금이 혹 누구의 계책을 가지고 성공하여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는데 세객이 거기에 간여하여 아는 척하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되지 못할 일을 임금에게 강요하거나, 그만두지 못할 일을 중지시키려고 한다면 이러한 자는 몸이 위태롭다.

임금에게 대인과 군자를 가지고 논하면, 임금은 자신을 간접적으로 풍자한다고 생각하고, 천한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의 권력을 천한사람들에게 팔려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그 사람의 힘을 빌어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임금이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논하면 임금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간단히 생략해서 하면 지식이 없어 졸렬하다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뒤섞어 널리 말하면 말이 많고 꾸밈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을 간략히 대의만을 말하면 비겁하고 나약하여 할말을 다하지 못한다 생각하고, 일을 생각이 넓고 거리낌없이 말하면 비천하며 예의가 없고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설득의 어려움이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말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韓非子 說難篇 -

정나라 무공이 호를 공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딸을 호임금의 아내로 주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하려 하는데 어느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겠는가."

대부 관기사가 대답했다.

"호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공은 몹시 화가나서 "호는 형제의 나라이다. 네 어찌 형제의 나라를 치라고 하느냐." 하고 관기사를 죽여버렸다. 호의 임금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정나라가 자기를 친애한다고 생각하고 정나라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가 이 틈을 타 호를 습격하여 빼앗아 버렸다.

송나라에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비가 많이 내려서 담이 무너졌다. 그의 아들이 말했다.

"담을 새로 쌓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이 들어올 것입니다."

이웃의 늙은이도 역시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날 밤에 도둑이 들어 많은 재물을 잃게 되었다.

그 집안에서는 아들은 매우 지모가 있다고 여기고, 이웃의 늙은이는 의심을 하였다.

이 두사람이 말한 것은 모두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심한 경우는 죽음을 당하고, 또는 도둑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알리느냐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요조는 틀림이 없이 진(晋)나라의 계략을 알아차렸지만, 진(晋)나라에서는 그를 성인이라 감탄하였어도 진(秦)나라에서는 진(晋)나라와의 관계를 의심받아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설득자는 이러한 것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설득하기 전에 신임을 얻어야 한다- 韓非子 說難篇 -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탄 자는 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밤에 그 사실을 미자하에게 알려 주었다. 미자하는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어질다고 여기면서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월형의 죄를 범하는 것도 잊었구나" 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미자하가 임금과 더불어 과수원을 노닐면서 복숭아를 따먹다가 맛이 달다고 다 먹지 않고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나를 사랑하여 맛있는 것도 제가 다 먹지 않고 나에게 먹게 하는구나" 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미자하의 고운 얼굴빛이 시들고 총애가 식어져서 임금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말하기를 "미자하는 본래부터 그랬다. 일찍이 나의 수레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도 있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라고 말하였다.

미자하가 한 행동은 처음과 달리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전에는 착하다고 했던 일이 뒤에는 죄를 받게 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지혜있는 말이 받아들여져 친해함을 더하게 되지만, 군주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지혜있는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죄를 받으며 소원함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간언을 하고 담론을 하는 사람은 임금이 미워하고 좋아하는 바를 살핀 뒤에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용이란 동물은 유순하여 길들이면 사람이 탈 수도 있을 만큼 유순하다. 그러나 턱밑에 지름 한자 정도되는 역린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시 역린이 있어 유세객이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으면 훌륭한 설득이라 할 수 있다.

논공행상은 정확히 되어야 한다- 韓非子 : 難篇 -

을 속이는 것이 바로 만세의 이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옹계의 대답은 문공의 물음에 맞지 않는 것이다.진나라 문공이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구범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상대는 사람 수가 많고 우리는 적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구범이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군자는 번잡한 예의를 지키는 것을 충실하고 성실하다고 하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거짓으로 꾸며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속여야만 합니다."

문공은 구범을 내보내고 옹계를 불러 물었다.

"장차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저 쪽은 사람이 많고 우리는 적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옹계가 말했다.

"사냥할 때 숲을 태워버리면 많은 짐승을 잡을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모든 짐슴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속임수로써 백성을 대하면 한 순간의 승리는 차지할 수 있어도 결코 백성들의 신망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공은 옹계를 내보낸 다음 구범의 모책에 따라 초나라와 싸워 승리를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데 옹계의 벼슬을 앞세우고 구범을 뒤로 했다. 여러 신하들이 궁금히 여겨 말하였다.

"전쟁은 구범의 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진언을 채택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포상을 뒤로하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문공이 말했다.

"이것은 그대들이 알 바가 못된다. 구범은 한때의 권도를 말한 것이고, 옹계는 만세의 이익을 말한 것이다."

공자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문공이 패자가 됨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한 때의 임기응변을 알고, 또 만세의 이익을 알았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옹계의 대답은 문공의 물음에 합당하지 못하다. 무릇 물음의 대답에는 인유하는 바가 있으며, 물음의 크고 작음과 느리고 급함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 묻는 것은 높고 큰데 낮고 작은 것으로 대답한다면 현명한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문공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대적할 계책을 물었는데, 백성을 신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대답은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이 못된다.

게다가 문공은 한 때의 권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또한 만세의 이익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전쟁을 하여 이기면 나라가 편안하고 몸이 안정되며, 군대는 강해지고 위엄이 선다. 비록 뒤에 백성을 신망을 얻는 일이 있더라도 이 보다 더 큰 이익은 못될 것이다. 또한 만세의 이익을 취한다 해서 환란이 닥쳐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전쟁을 하여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는 멸망하고 군대도 괴멸되며, 몸은 죽고 이름은 사라진다. 당장의 죽음에서 벗어나기도 바쁜 판국에 어느 겨를에 만세의 이익을 기다리겠는가. 만세의 이익을 기대함은 바로 오늘의 승리에 있으며, 오늘의 승리는 적을 속이는 데 있다. 적거기에다 문공은 구범의 말도 구범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거짓으로 속임을 꺼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 백성을 속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을 속이라는 말이다. 적이란 정벌할 나라를 말한다. 뒤에 비록 다시 신망을 얻지 못한다 한들 무엇을 조심할 것이 있겠는가.문공이 옹계를 먼저 포상한 것은 그에게 공이 있어서인가? 초나라 군사를 무찔러 승리를 얻게 된 것은 구범의 계략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옹계의 말이 착해서인가? 옹계의 말은 착한 말이 아니다.그러나 구범은 양쪽을 겸하였다. 충실하다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요. 성실하다는 것은 백성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이미 사랑하고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보다 더 착한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속임수를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쟁의 계략이었을 뿐이다. 구범은 앞에서는 착한 말을 하고 뒤에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구범은 두 가지 공이 있는데도 논공에서 뒤로 밀리고, 옹계는 한가지 공도 없는데 우선하여 포상하였다. 그런데도 문공이 패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 공자는 논공행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겠다.

상과 벌로 다스리면 반드시 다스려진다- 韓非子 : 難篇 -

역산의 농민들이 밭의 경계를 서로 침범하였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경작하자 1년 만에 밭고랑 싸움이 바로잡아졌다. 황하 물가의 어부들이 낚시터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고기를 잡자 1년 만에 낚시터를 연장자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이의 도공이 만든 그릇은 품질이 나쁘고 일그러졌는데 순이 거기에 가서 질그릇을 굽자 1년 만에 그릇이 견고해졌다고 한다.공자가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밭갈고, 물고기 잡고, 질그릇 굽는 것은 순의 본직이 못된다. 그런데 순이 가서 이런 일을 한 것은 나쁜 습속을 고쳐 주고자 함이었으니 순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로구나. 몸소 노고로운 일을 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래서 성인의 덕화라고 하는 것이로구나.」

어떤 이가 유자에게 「그때 요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요는 천자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요를 성인이라고 함은 어째서인가. 성인이 사리를 밝게 살피어 천자의 지위에 있음은 장차 천하로 하여금 그릇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농민과 어부는 다투지 않고, 질그릇은 일그러지지 않게 되었다면 순은 또 무슨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켰단 말인가. 만일 순이 백성들의 나쁜 습속을 고쳐 주었다면 이는 곧 요임금에게 실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을 어질다고 한다면 요임금의 명찰함을 부인해야 하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한다면 순의 덕화를 부인해야 할 것이니, 양쪽이 동시에 병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자가 있었다. 자기 방패를 자랑하여 「나의 방패의 견고함으로 말하면 어떤 물건도 이것을 뚫지 못한다」하고, 또 창을 자랑하여 「내 창의 예리함은 어떤 물건이라도 뚫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는가」하니, 그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어떤 물건에도 뚫어지지 않는 방패와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세상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요와 순의 양쪽을 다 칭찬할 수 없음은 창과 방패를 자랑하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또 순이 백성의 그릇된 습속을 고침에 있어 1년 만에 한 가지씩이면 3년에 세 가지의 허물을 바로잡은 셈이 된다. 순의 수명은 다할 때가 있고 천하의 그릇된 것은 끝이 없다. 유한한 몸으로써 끝이 없는 허물을 쫓는다 해도 시정되는 것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과 벌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면 반드시 이것이 이루어진다. 명령을 내려 「법의 규정에 맞는 자는 상을 주고 맞지 않는 자는 죽인다」고 하면, 법령이 아침에 내려 저녁이면 습속이 고쳐질 것이고, 저녁에 내려 아침이면 고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열흘이면 온 천하가 다 고쳐질 터인데 어찌 1년이나 기다릴 것이겠는가. 그렇거늘 순은 이런 방법을 요에게 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명령에 따르도록 하지 아니하고 몸소 노고하였으니, 이 역시 백성 다스리는 술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몸소 노고함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킨다는 것은 요순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권세를 잡고 앉아서 맥성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용렬한 임금에게도 하기 쉬운 일이다.

장차 천하를 다스리고자 함에 있어 용렬한 군주도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요순도 하기 어려운 방법을 말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정치를 말할 수가 없다.

정당한 형벌은 많아도 나쁘지 않다- 韓非子 : 難篇 -

제나라의 경공이 안영의 집에 들러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집이 작고 시장과 가까우니 그대의 집을 예장의 동산으로 옮기도록 하라."

안자가 두 번 절하고 사양하여 말하였다.

"신은 집이 가난하여 시장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아침저녁으로 시장에 다녀야 하므로 먼 곳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경공이 웃으며 물었다.

"그대의 집안이 시장에 익숙하다고 하니 물가의 비싸고 싼 것을 아는가."

이때 경공은 형벌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안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발(발목 베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신는 신)은 비싸고, 보통 신은 쌉니다."

경공이 물었다.

"어째서 그러한가.""형벌을 받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공은 놀라 낯빛이 변하면서 「과인이 그처럼 포악하단 말이냐」하고, 이에 형벌 중 다섯 가지를 중지하였다고 한다.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안자가 목발의 값이 비싸졌다고 한 것은 정말이 아니고, 방편으로 그런 말을 함으로써 형벌이 많은 것을 중지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데서 오는 병폐이다. 대체로 형벌이란 것은 그것이 정당하면 많아서 나쁠 것이 없고, 부당하면 적더라도 많은 것이다. 따라서 안자가 형벌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고 너무 많다고 한 것은 정치의 술수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온 병폐이다.폐하여 달아나는 군사는 백 명 천 명을 처벌해도 오히려 도망을 멈추지 않는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림에는 형벌을 지나치다고 걱정할 만큼 사용해도 간악한 짓이 그대로 없어지지 아니한다. 안자는 형벌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살피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많은 것만 들어서 말하였으니 이 또한 그릇되지 아니하였는가.

대체로 잡초를 아끼면 벼이삭에 손실을 가져오고, 도둑에게 은혜를 베풀면 양민을 해치게 만든다. 지금 형벌을 늦추고 너그러운 은혜를 베푼다면, 이는 간사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정치하는 도리가 못된다.

명분없는 상벌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근본이다- 韓非子 : 難篇 -

제나라의 환공이 술에 취하여 그의 갓을 잃어버렸다. 환공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흘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 관중이 말했다.

"이것은 나라를 가진 임금에게는 수치가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왜 바른 정치를 가지고 그 수치를 씻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환공은「좋다」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죄수들을 다시 논죄하여 가벼운 자는 풀어 주었다. 사흘을 지나자 백성들은 「임금님 임금님. 왜 또다시 갓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관중은 환공의 수치를 서민들에게서 씻었지만 군자들에게서는 수치가 생기게 했을 뿐이다. 환공으로 하여금 창고의 곡식을 풀어 빈민들에게 주고 죄수들을 다시 살펴서 가벼운 죄인을 석방하게 한 것이 정당한 도리가 아니라면 그것으로써 수치를 씻을 수는 없는 것이요, 그것이 정당한 도리라면 환공은 의를 묵혔다가 갓을 잃은 뒤에야 이를 행한 셈이니 환공이 의를 행한 것이지 갓을 잃은 수치를 씻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비록 갓을 잃은 수치를 서민에게서 씻었다 할지라도 군자에게는 의를 저버리고 행하지 않았다는 수치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창고를 풀어 빈민들에게 쌀을 내준 것으로 말하자면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준 것이요, 죄수들은 다시 논죄하여 가벼운 죄인을 석방했음은 허물을 벌하지 않은 셈이 된다. 대체로 공이 없는데 상을 주면 백성들이 위를 향하여 구차하게 요행을 바라게 되고, 허물을 벌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징계되지 못하여 쉽사리 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수치를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는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韓非子 : 難篇 -

정자산이 새벽에 외출하여 등장거리를 지나다가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자산이 마부의 손을 눌러 수레를 멈추고 듣다가 한참만에 아전을 보내 그 여인을 잡아다가 심문한즉 제 손으로 자기 남편을 교살한 여자였다.다른 날 마부가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자산이 대답했다.

"그 울음소리에 뭔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은 자기가 친애하는 사람에 대하여 처음에는 병들면 근심하고, 죽음이 가까워 오면 두려워하며, 이미 죽어버리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죽은 자를 곡하는데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에게 간악한 바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자산의 정치는 역시 부산할 수밖에 없겠구나. 간악한 것을 꼭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뒤라야 알게 된다면 정나라에서 간악한 것을 적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형리에게 맡기지도 않고 이것저것 참조하는 방법을 살피지 아니하며, 떳떳한 법도와 표준을 밝히지도 아니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총명에 의지하며 지혜와 생각을 수고롭게 하여서야 간악한 것을 알아낸다면, 역시 정치하는 술수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사물은 많고 지혜는 적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지혜란 모든 것을 두루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물은 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은 많고 윗사람은 적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임금이 모든 신하의 일을 두루 다 알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에 인유하여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몸을 노고하게 하지 않아도 일은 잘 처리되며 지혜와 생각을 쓰지 않아도 간악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송나라에 이런 말이 있다.

「예는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를 반드시 쏘아 떨어뜨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활의 명수인 예일지라도 꼭 그런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온 천하에 새그물을 친다면 새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체 간악한 것을 알아냄에 있어서도 또한 큰 그물만 있으면 그 하나도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방법을 익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속으로 살피는 것을 가지고 화살로 삼고 있으니, 자산은 되지도 않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를 해치게 된다」고 할 말은 자산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남을 관찰하되 관찰 당하지 마라- 韓非子 : 觀行篇 -

옛 사람이 제 눈으로는 스스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거울로 얼굴을 보았으며, 지혜로 자신을 알기에 부족하였기 때문에 도로써 자신을 바로잡았다. 거울이 흠을 드러냈다고 해서 허물 될 것이 없고, 도가 잘못을 밝혔다고 해서 미워할 것은 없다. 눈이 있어도 거울이 없으면 수염과 눈썹을 바로 다듬을 수 없고, 몸이 도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미혹을 알 수가 없다.서문표는 자신의 성미가 급함을 알았기 때문에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마음을 누그러트렸고, 동안우는 마음이 너무 완만하였기 때문에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마음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넉넉한 것을 가지고 부족함을 채우고 장점을 가지고 단점을 잇는 사람을 일러 현명한 임금이라고 한다.

천하에 꼭 믿어야 할 이치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지혜만으로 성립시키지 못할 일이 있고, 둘째는 힘만으로 들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셋째는 강한 것만으로 이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임금과 같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오획과 같이 센 힘이 있다 하더라도 남의 도움을 얻지 않고서는 제가 자기 몸을 들지 못하며, 맹분·하육과 같은 강함이 있다 하더라도 법술이 없이는 항상 이기지 못할 것이다.그러므로 사세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있고, 일에 따라서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오획이 천근은 가볍게 여기면서 제 몸을 무겁게 여기는 것은, 그의 몸이 천근보다 더 무거워서가 아니라 사세가 들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주가 백 보나 떨어진 것을 쉽게 보면서도 제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백 보는 가깝고 눈썹은 멀어서가 아니라 사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은 오획이 스스로를 들지 못한다고 하여 추궁하지 않으며, 이주가 제 눈썹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곤경에 빠뜨리지 않고 될 수 있는 사세에 따라 쉬운 방법을 찾는다. 그러므로 적은 노력으로 공명이 이루어진다.

천시의 운행에도 차고 비는 일이 있고, 일에는 이로운 것과 해치는 것이 있으며, 생물은 나고 죽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이 무리하게 될 수 없는 세 가지 경우의 일 때문에 희노를 내색하면 금석처럼 절개가 굳은 선비라도 마음이 그 임금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며, 성현의 무리라도 임금의 마음의 얕고 깊음을 넘볼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현명한 임금은 남을 관찰하고 남이 나를 관찰하지 못하게 한다. 요임금도 혼자서 일을 이를 수 없고, 오획도 제 몸을 들 수 없으며 맹분·하육도 저절로 이길 수 없고 방법과 수단을 써야 한다는 사리를 밝게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행동을 관찰하는 방법은 더할 여지가 없다.

남을 믿음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韓非子 : 備內篇 -

임금된 이의 근심거리는 남을 믿는 데에 있다. 남을 믿으면 남에게 제압을 당한다.

남의 신하된 자는 그의 임금에 대하여 핏줄이 이어진 육친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세에 얽매여 섬기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남의 신하된 자는 그 임금의 마음을 엿보기에 잠시도 쉴 사이가 없는데, 임금은 태만하고 오만하게 그 위에 앉아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임금을 위협하고 임금을 시해하는 신하가 생기게 되는 까닭이다.

임금이 되어 지나치게 자기 아들을 사랑하면, 간신이 그 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태는 조나라 혜문왕에게 붙어서 문왕의 아버지 무령왕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임금이 되어 아내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간신은 그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시는 진나라 헌공의 애첩 여희에게 붙어서 헌공의 후계자인 신생을 죽이고 여희의 아들 해계를 세웠다.

임금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아내와, 가장 친애하는 아들도 오히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밖에 다시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또 만승의 나라의 임금이나 천승의 나라의 임금에게 있어 그 후비나 부인으로서 자신의 아들이 태자로 봉해졌을 경우 간혹 임금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수가 있다.

이는 어찌하여 그러한가. 대체로 아내라는 것은 핏줄을 나눈 육친이 아니다. 사랑하면 친근하여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소원하여진다. 속담에 이르기를 「그 어미를 좋아하면 그 아들도 귀여워서 끌어안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어미를 미워하면 그 아들도 버린다」는 말이 된다.

남자는 50세가 되어도 호색하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는 30세가 되면 아름다운 자태가 시들어 버린다. 아름다움이 시든 여자로서 호색한 남자를 섬기게 되면 자신이 소외되고 천대받지나 않을까를 의심하고, 자기의 아들이 임금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지나 않을까를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곧 후비나 부인이 그의 임금이 죽기를 바라게 되는 소이이다.

어머니가 태후가 되고 아들이 임금이 되면,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못한 일이 없고 하기 싫어 금지하고자 하면 그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또한 남녀간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대로 자행할 수 있으므로 임금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으며, 그리고 만승의 큰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임금을 독살하고 몰래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이 생기게 하는 소이이다. 그러므로 <도올춘추>에 말하기를, 「임금으로서 병들어 죽는 자는 전체의 반도 못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것을 모르니 그러한 환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다.그러므로 임금의 죽음을 이롭게 여기는 자가 많으면 임금은 위태롭다.

이익은 애증보다 앞선다- 韓非子 : 備內篇 -

왕랑은 말을 사랑하고 월왕 구천은 사람을 사랑하였다. 사람을 사랑한 것은 싸움에 쓰기 위함이요, 말을 사랑한 것은 타고 달리기 위한 것이다. 의사는 사람의 상처를 잘 빨아 주기도 하고 남의 피를 머금기도 하는데, 그것은 육친처럼 친애해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수레 만드는 사람이 수레를 만들면 남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목수가 널을 만들면 사람이 일찍 죽기를 바란다. 수레 만드는 사람은 어질고 목수는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부귀해지지 않으면 수레를 사지 않을 것이요, 사랑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야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비·부인·태자가 무리를 이루어 임금이 죽기를 바람은, 임금이 죽지 않으면 자기들의 권세가 성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정으로 임금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임금이 죽어야 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된 이는 자기가 죽으면 이가 있게 될 자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겉으로는 밝은 빛을 둘렀지만 해와 달을 해치는 설여는 속에 들어 있다. 또 미워하는 자를 방비하더라도 화단은 사랑하는 자에게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군왕은 사실을 참조하지 않은 일을 거론하지 않으며, 평소에 덕진 음식이 아니면 들지 않는다.

먼 곳의 일은 귀로 듣고 가까운 일은 눈으로 보아서 안과 밖의 과실을 자세히 살피며, 말의 서로 같고 다름을 살펴서 붕당의 대립 관계를 알아낸다.

일의 결과가 서로 부합하는가를 조사하여 진언한 일의 실적에 책임을 따진다. 그리하여 뒤에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지난번 진언한 말에 부응하는가를 살펴서, 법에 따라서 민중을 다스리고 여러 사람의 말의 단서를 가지고 서로 참조하여 살핀다.

선비가 요행으로 상을 받는 일이 없고, 자기의 직분을 넘어서 행동하는 일이 없게 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죽이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간사한 자가 사욕을 부려볼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권한은 빌려주어서는 안된다- 韓非子 : 備內篇 -

요역이 많으면 백성이 고통스럽다. 백성이 고통스러우면 권세가 일어난다. 권세가 일어나면 부역의 면제가 많아진다. 부역의 면제가 많아지면 귀인이 부자가 된다. 이와 같이 부역으로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귀인을 부자되게 하며, 임금의 권세를 일으켜서 신하에게 빌려줌은 천하의 장구한 이익이 못된다.

그러므로. 부역이 적으면 백성이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하면 밑에 있는 신하에게 무거운 권한이 없게 된다. 신하에게 무거운 권한이 없으면 권세도 없어진다. 신하의 권세가 없어지면 덕이 임금에게로 돌아간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큰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은 끓어올라 없어져도 불은 여전히 성하게 타오른다. 그리하여 물은 본래 불을 이기는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법치로써 간사함을 금지할 수 있다 함도 또한 물이 불을 이기는 것보다 명백하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신하가 가마솥과 같은 짓을 하여 법의 시행을 막고 있으니, 법은 홀로 가슴속에서만 밝을 뿐, 그래서 간사함을 금지하는 법의 직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상고로부터 전해 오는 말과 춘추의 기록을 보면, 법을 범하고 반역하여 일으킨 크게 간사한 일 중에 존귀한 지위에 있는 신하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는 법령을 두루 갖추어 실시한다든지 형벌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신분이 낮고 천한 자들에게만 해당한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절망하고 호소할 데가 없다. 대신들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서로 두둔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한동아리가 된다. 그리하여 속으로는 서로 친하면서도 겉으로는 서로 미워함으로써 사심이 없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귀가 되고 눈이 되어 임금의 빈틈을 노린다.

임금은 사람의 장막에 가리워져서 실정을 얻어들을 수가 없다. 임금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권은 없고, 신하가 법을 전단하여 제 마음대로 시행한다. 주나라의 천자가 이러한 임금의 실례이다.임금이 치우치게 신하에게 권세를 빌려주면 상하가 위치를 바꾸게 된다. 이것은 신하에게 임금의 권세를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화씨의 옥- 韓非子 : 和氏篇 -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가져다가 초나라 여왕에게 올리니, 여왕이 옥인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인이 「돌입니다」하니, 여왕은 화씨가 거짓말로 속인다고 하여 그의 왼쪽 발을 베어 버리게 하였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화씨는 또 그 옥돌을 가지고 가서 무왕에게 올렸다. 무왕은 옥인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인이 또 「돌입니다」하니 무왕은 또 화씨가 속인다고 하여 그의 오른쪽 발을 자르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화씨가 그에 그 옥돌을 안고 초산 아래에 가서 사흘 밤, 사흘 낮을 슬피 우니, 눈물이 다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계속하였다. 임금이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베는 형벌을 받은 사람은 많다. 너는 어찌하여 그처럼 슬피 우느냐."

화씨는 대답했다.

"나는 발 베인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보배인 옥을 돌이라고 부르고 정직한 선비에게 속인다는 죄명을 씌우니 그것을 내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문왕이 이에 옥인을 시켜 그 옥돌을 다듬게 하니, 보옥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그 옥을 「화씨지벽」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익에 상반되는 것은 싫어한다- 韓非子 : 和氏篇 -

대체로 주옥은 임금이 몹시 얻고자 애쓰는 것이다. 화씨가 올린 옥돌이 비록 아름다운 옥은 아닐지라도 임금에게 해될 것은 없다. 그렇건만 오히려 두 발을 베인 뒤에야 비로소 보옥으로 논정되었다. 보옥을 논정하기도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이 법술에 대하여는 반드시 화씨벽 얻기를 애쓰는 만큼 법술로써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사리 사욕과 간사함을 금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러한즉, 도를 지닌 자, 즉 법술가가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만 제왕의 박옥(즉 법술)을 아직 임금께 올리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임금이 법술을 쓰면 대신이 정권을 함부로 독단할 수 없게 되고, 근신들이 감히 권력을 팔 수 없을 것이다. 관에서 법을 시행하면 놀고 있는 백성들이 농경에 달려가야 하고, 놀고 있는 선비들은 전진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게 될 것인즉, 법술이란 것은 바로 여러 신하들과 사민이 화난으로 여기는 바가 된다.

따라서 임금이 대신들의 논의를 어기고 백성들의 비방을 무시하며, 홀로 도언(즉 법술의 말)에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즉 법술가가 비록 죽음에 이를지라도 법술의 도는 결코 그 진가를 논정받지 못할 것이다.

법을 괴롭게 여기고 구속받기를 싫어한다- 韓非子 : 和氏篇 -

옛날에 오기가 초 도왕에게 초나라의 풍속을 가리켜 말하기를, 「대신이 지나치게 세력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봉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그들이 위로는 임금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못살게 굴게 될 것이니, 이것은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군대를 취약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봉군의 자손으로 3대가 되거든 그 작록을 회수하고 모든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며, 긴급하지 않은 관원을 폐지함으로써 정선되고 노련한 선비를 기르도록 하십시오」하였다. 초 도왕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1주년 뒤에 도왕이 죽었다. 오기는 초나라에서 4지를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옛날 상군은 진 효공에게, 백성 10호를 한 통으로 연결하고 5호를 한 반으로 묶어서 서로 고발하고 연대 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설치하며, 또 시서를 불태워 버리고 법령만을 밝게 할 것과, 사삿집의 청탁을 막고 국가의 노역을 권장하게 할 것과, 벼슬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백성이 없게 하고, 농사짓고 싸움에 참가하는 선비를 표창하라고 가르쳤다. 효공이 그대로 실행하니, 이로써 임금은 존엄하고 편안하며 나라는 부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뒤에 효공이 죽자 상군은 거열의 형을 당하였다.

초나라는 오기의 헌책을 채용하지 아니하여 국토가 깎이고 내란이 일어났으며, 진나라는 상군의 법은 시행하여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말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기는 4지를 찢기고 상군은 거열을 당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대신은 법을 괴롭게 여기고 간세한 백성들은 잘 다스려지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신은 권세가 무거워지기를 탐하고, 간세(奸細)한 백성들이 혼란한 것을 편안하게 여김이 진나라나 초나라의 풍속보다도 심하며, 임금은 초 도왕이나 진 효공처럼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니 법술을 지닌 선비가 어떻게 오기·상군 두 사람이 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법술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세상은 어지럽고 패업을 성취하는 임금은 없게 되는 까닭이다.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것과 위험하게 하는 것- 韓非子 : 安危篇 -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방법이 일곱 가지가 있고,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길이 여섯 가지가 있다.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첫째 상과 벌은 옳고 그른 것에 따라 주어야 한다. 둘째 화와 복은 선과 악에 따라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셋째 죽이고 살리는 것은 법령에 따라서 시행해야 한다. 넷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현명한 사람인가 불초한 사람인가를 살필 뿐이고 사랑하고 미워함을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슬기로운 사람인지 실증을 가지고 살필 뿐이고 남의 비방이나 칭찬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믿음성이 있고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 국가를 위태한 데로 몰아넣는 길은 첫째 법을 안으로 굽혀서 일을 처리하는 것, 둘째 법을 법 밖으로 확대하여 처리하는 것, 셋째 남의 해를 자신의 이로 삼는 것, 넷째 남의 화난을 즐거워하는 것, 다섯째 남의 편안한 것을 위태하도록 만드는 것, 여섯째 사랑해야 할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미워해야 할 자를 멀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삶의 즐거움을 상실하고 죽음이 중난한 것임을 망각한다. 사람들이 삶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면 임금을 존중하지 않고, 죽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면 임금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귀에 거슬린다 충언을 듣지 않으면 위태롭다- 韓非子 : 安危篇 -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다 어느 본보기에 대하여 지능을 다 바치게 하고 법도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 진력하게 한다면, 그러한 군주는 군대를 동원하여 싸우면 이기고, 가만히 지키고 있으면 나라가 편안하게 될 것이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일을 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게 하고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게 하면 소인은 적어지고 군자는 많아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직은 길이 보전되고 국가는 오래도록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난폭하게 달리는 수레 위에는 공자는 타고 있지 않을 것이며, 엎어진 배 밑에는 백이는 없을 것이다(군자는 위태한 곳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령은 나라의 배와 같고 수레와 같은 것이다. 호령이 바르고 나라가 편안하면 지혜롭고 청렴한 풍습이 생기고, 호령이 난폭하여 나라가 위태하면 쟁탈과 비열한 행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마치 주리면 먹고 추우면 입는 것처럼 인정의 본연의 상태에 따라 시행한다면, 특별히 명령을 내리는 일이 없어도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선대의 현명한 군왕들이 다스리는 도리를 서적에 남기었는데, 그 법이 이치에 순당하므로 후세에서도 감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으로 하여금 굶주린 때에 음식을 버리고 추울 때에 의복을 버리게 한다면, 비록 명분·하육과 같은 용감한 자일지라도 그 명령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법령이 자연의 사리를 무시한다면 비록 도리에 순당하더라도 법으로서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굳세고 날랜 자도 실행할 수 없는 법령이라면, (그 법령에 대한 반항이 생길 것이니) 임금이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이, 이미 다 없어진 것을 구하여 마지않는다면,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백성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면 법을 경시하게 된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그것이 경시되면 공명도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듣건대, 옛날 편작은 병을 치료할 때에 칼로 뼈를 찔렀으며, 성인이 위태로운 나라를 구제할 때에는 충성된 말로써 귀에 거슬리게 하였다고 한다. 뼈를 찔렀으므로 조금 아프기는 하였으나 장구한 이로움이 몸에 있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게 말하였으므로 조그만 거슬림은 마음에 있어도 장구한 복은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의 이는 아픔을 참는 데 있고, 용맹하고 의젓한 임금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복으로 삼았다. 고통을 참았기 때문에 편작이 의술을 다할 수 있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오자서는 충언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몸을 장수하게 하고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다.

병들어 치료의 아픔을 참지 못하면 편작의 오묘한 의술을 놓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듣지 않으면 성인의 의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장구한 이를 먼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없고 공명도 오래 가게끔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국가의 안위는 정의에 달려 있다- 韓非子 : 安危篇 -

임금 된 이가 스스로 요임금처럼 착한 임금이 되도록 극기하지 못하면서, 신하들이 오자서처럼 충신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폭군 주왕이 모든 은나라 사람들을 비간과 같은 충신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하였으면 주왕은 나라를 잃지 않고 신하들은 망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금 된 이가 신하의 힘을 알맞게 저울질하지 않아서 전성자 같은 역신이 있게 했으면서 신하들이 모두 비간처럼 되기를 바라고만 있으니 나라가 한결같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

요·순 같은 착한 임금을 물러나게 하고, 걸·주 같은 폭군을 세운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장점을 즐길 수 없고 단점을 근심하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각자의 장점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국가에는 공이 없을 것이며, 단점을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다면 백성들은 삶을 즐겁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공 없는 임금이 살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백성들을 다스린다면, 백성을 잘 다스려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웃사람은 아랫사람을 부릴 수가 없고 아랫사람은 위를 섬길 길이 없을 것이다.

국가의 안전과 위험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고, 국가의 강함과 허약함에 달려 있은 것은 아니다. 국가의 존망은 국가 실정의 허술하고 알찬 데 달려 있고, 국민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제나라는 만승의 큰 나라였으나 이름과 실망이 서로 맞지 않아서, 위로 임금의 지위가 공허하여 나라 안에 이름만 있을 뿐 실권이 이름에 차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빼앗게 되었다. 걸은 천자였다. 그러나 시비를 판정하는 일정한 표준이 없었다. 공적 없는 자에게 상을 주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를 등용하니, 거짓을 꾸며 속이는 짓을 대견한 것으로 여겼다. 죄 없는 자를 죽였으니 곱추는 날 때부터의 타고난 병신인데 등을 쪼개게 하였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옳다 하고 타고난 천성을 그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가치 판단이 뒤집혔기 때문에 작은 나라(은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 이기게 된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내정을 확고하게 하므로 외교에 대하여 실패하지 않는다. 안에서 실패하고서 먼 나라에 멸망을 당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빼앗을 때에 조정에 버린 것을 줍듯 하였다. 은나라가 그 어진 신하들을 조정에서 버리지 않았더라면 주나라가 은나라의 국토 안에서 감히 터럭 끝만큼의 작은 것도 얻기를 바라지 못하였을 것이니, 더군다나 감히 지위를 바꾸기를 바랐겠는가.

현명한 임금의 도는 법에 충실하고 그 법은 사람의 마음에 충실하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임금이 백성에게 군림하면 백성들은 그를 본보기로 삼아 떠나간 뒤에는 사모한다. 요임금은 아교풀이나 칠과 같은 굳은 약속을 그때 세상에게 한 일이 없었으나 그의 도는 행하여졌으며, 순임금은 송곳을 세울 만한 작은 영지도 후세에 남기지 않았으나 덕이 맺어져서 길이 풀리지 않으니, 능히 도를 옛날에 세워서 만세에 덕을 남기는 이를 현명한 임금이라고 한다.

법칙 없이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韓非子 : 用人篇 -

옛날의 사람을 잘 쓰는 이는 반드시 천시에 따르고 인정에 순응하며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천시에 따르면 힘쓰는 것이 적고 공을 세우며, 인정에 순응하면 형벌이 줄어들고 명령이 행하게 된다. 상벌이 밝으면 백이와 도척을 뒤섞어 혼란하게 하는 일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흑백이 또렷이 구분된다.

잘 다스려진 나라의 신하는 나라에 공을 이룩하여 그것으로써 높은 지위에 오르고, 관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인정받아 직책을 받으며, 법도에 알맞도록 힘을 다하여 일을 책임진다. 신하된 자는 다 자기의 능력에 알맞아서 자기의 관직을 잘 감당하고 자기의 임무를 거뜬히 수행한다. 그리하여 벼슬과 직책이 자기의 능력에 차지 않는다는 불만을 마음에 품지 않으며 겸관(兼官)의 책임을 임금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원한을 품고 일으키는 변란이 없고, 밖으로는 거짓 복종하는 전국의 환란이 없다.

밝은 임금은 각자의 일이 서로 간섭하고 침범함이 없게 한다. 그런 까닭에 다투어 소송하는 일이 없다. 선비로 하여금 벼슬을 겸임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기술이 발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이 같도록 만들지 않기 때문에 쟁송이 없다. 쟁송이 그치고 기술이 발달하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힘을 겨누지 않으며, 빙탄(氷炭)처럼 상반되는 것이 한데 뒤섞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는 서로 헐뜯고 상하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정치의 극치인 것이다. 법과 술을 버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정치를 한다면 요 같은 성군도 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규구를 버리고 함부로 자기의 어림짐작으로 한다면 해중과 같은 공교한 공인도 한 개의 수레바퀴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며, 척촌을 버리고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하려고 한다면 왕이 같은 능숙한 공인도 길이의 반과 너비의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중등 정도의 임금으로 하여금 법술을 지키게 하고, 졸렬한 공장으로 하여금 규구 척촌을 지키게 한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임금 된 이가 현명하고 공교한 사람도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보통이거나 졸렬한 이도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는 것을 지킨다면 사람의 힘을 다 활용할 수 있어서 공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으로 다스리면 위험하다- 韓非子 : 用人篇 -

밝은 임금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상의 제도를 세우고, 피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하여 벌을 설정한다. 그런 까닭에 어진 사람은 상에 격려된다. 그리하여 자서가 충간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화를 당하는 일이 없고, 불초한 자에게도 벌이 적어서 타고난 곱추에게 등이 굽다고 성내어 그의 등을 쪼갬과 같은 부당한 형벌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경은 평지에 있어 깊은 계곡에 빠지는 일이 없으며, 어리석은 자는 고요함을 지켜서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하의 사이에 은정이 맺어진다.

옛 사람이 말하였다. 「마음은 알기 어렵고, 즐겨하고 성내는 것은 절도에 맞게 하기 어렵다」라고. 그러므로 깃발로 표시하여 눈에 보이게 하고 북을 쳐서 귀에 말하며, 법으로써 마음에 가르치는 것이다. 남의 임금 된 이가 이러한 세 가지의 쉬운 방법을 버리고 한가지 알기 어려운 마음을 행한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성냄은 위에 쌓이고 원망은 아래에 쌓일 것이다. 성냄을 가득 쌓은 임금이 원망을 가득 쌓은 아랫사람들을 통어한다면 양편이 모두 위태할 것이다.

밝은 임금의 표시는 보기 쉬우므로 약속이 성립된다. 그의 가르침은 알기 쉬우므로 말이 실용된다. 그의 법은 실행하기 쉬우므로 법령이 시행된다. 이 세 가지가 확립되고 위에서 사심이 없으면 아래에서 법을 준수할 수 있어 나라는 다스려질 것이다. 표시를 바라보고 움직이며, 먹줄을 따라 깎고, 찢어진 데를 봐서 꿰맨다. 이렇게 하면 위에서는 법에 따르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일로 위업을 부려 해독을 끼치는 일이 없고, 아래에서도 오직 법에 따라 행동하므로 자신의 어리석고 졸렬한 것으로 벌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밝음에 처하여 성냄이 적고, 아래에서는 충성을 다하며 범죄가 적을 것이다.

상과 벌은 명확해야 한다- 韓非子 : 用人篇 -

이런 말이 있다. 「대체로 일을 처리하면서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것은 요임금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라고. 그나마 세상에는 일찍이 일이 없는 때는 없었다. 남의 임금 된 자로서 사람에게 작록 주기를 인색하게 하며, 자신의 부귀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 그러한 임금과는 함께 위급한 나라를 구제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임금은 연치를 격려하고 인의를 치켜올려야 한다. 옛날 개자추는 작록이 없으면서 의로 문공의 출분에 수행하였다. 문공이 굶주림을 참지 못하니 개자추는 어진 마음에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다. 그런 까닭에 임금은 그의 덕을 잊지 못하여 서적에 그의 이름을 드러냈다.

임금은 사람들이 공적인 일에 진력하는 것을 기뻐하고, 사리를 위하여 임금의 위엄을 빼앗는 것을 괴로워한다. 신하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벼슬을 얻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한 몸으로 두 가지의 직책을 지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신하가 괴로워하는 바를 제거하고, 임금의 기뻐하는 바를 세운다. 그렇게 하면 상하의 이가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임금의 권위가 신하의 사문에 돌아가는 것을 살피지 않으며, 국가의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생각하며, 작은 죄를 무겁게 처벌하고, 작은 과실을 오래도록 잊지 않으며, 길이 남을 업신여기며, 일신의 즐거움을 남몰래 취하고 자주 화를 끼친 자에게 은덕을 베푼다면 이것은 손을 끊어 버리고 옥으로 잇는 꼴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임금의 지위를 바꿔 버리는 환란이 있는 것이다.

임금 된 이가, 하기 어려운 것을 설정하여 놓고,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죄 준다면 사사로운 원한이 생길 것이다. 신하된 자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기회를 잃고 해낼 수 없는 일을 받들어 행하게 된다면 숨은 원한이 맺어질 것이다.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지 않고 근심과 슬픔을 가엾게 여기지 않으며 기쁘면 소인을 칭찬하여 어진 이와 불초한 자를 함께 상주고, 성내면 군자를 헐뜯어 백이 같은 현인과 도척 같은 도둑을 함께 욕보인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반역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안으로 자기 나라의 백성은 미워하고 밖으로 노나라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면 연나라 백성은 쓸 수 없을 것이고 노나라의 백성도 붙지 않을 것이다. 백성이 미움을 받으면 나라 일에 진력하여 공을 이루기를 힘쓸 수 없을 것이고, 노나라 백성을 좋아함을 얻게 되었더라도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타국의 임금을 친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백성과 신하들은 임금의 빈틈을 엿보게 되고 임금은 고립될 것이다. 빈틈을 엿보는 신하로서 고립된 임금을 섬기게 한다면 이런 것이 위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이 없는 다스림은 원망을 만든다- 韓非子 : 用人篇 -

과녁은 버리고 함부로 발사하면 비록 적중하였더라도 잘 쏜 것이 아니며, 법제를 버리고 함부로 성낸다면 비록 살육을 자행할지라도 간사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죄는 갑이 지었는데 화는 을에게 돌아간다면 숨은 원한이 맺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극히 잘 다스려진 나라에서는 상벌은 있으나 즐겨하고 성내고 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형법이 있으나, 죽이는 것을 독충이 쏘는 것처럼 성냄에 맡겨 참혹하게 죽이는 일은 없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간사한 사람이 복종하는 것이다. 화살을 쏘면 과녁에 적중하고, 상벌을 내리면 부계를 맞추는 것처럼 공과 죄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요가 다시 난 것 같고 예가 다시 선 것 같다.

이와 같으면 위에는 은 주가 무왕에게 멸상되고 하 걸이 탕왕에게 멸망당하는 것과 같은 근심은 없을 것이다. 신하에게는 비간이 충간하다가 주에게 죽임을 당함과 같은 화는 없을 것이다. 임금은 베개를 높이 하여 일이 없고 신하는 자신의 일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도는 천지를 덮고 덕은 만세에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충실하여야 한다- 韓非子 : 用人篇 -

대체로 임금 된 이가 틈과 구멍을 막지 않고 적토와 백토로 장벽을 장식한다면 사나운 비와 빠른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발등에 붙는 불을 끄지 않고 팽분·하육과 같은 용사가 죽을힘을 다해 지켜 주기를 바라며,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내란을 조심하지 않고, 먼 국경에 견고한 성벽을 쌓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현인의 진언은 채용하지 않고 밖으로 천리의 먼 곳에 있는 만승의 나라와 외교를 맺는다면 회오리바람이 한 번 일어난 때에는 맹분·하육 같은 용사도 미처 구제할 겨를이 없고, 외교를 맺은 먼 나라의 구원도 미처 올 시간이 없을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화난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남의 임금 된 이를 위한 충성된 계책은 반드시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노나라 사람을 좋아하지 말고 제나라 백성을 사랑하며, 근세의 일로 하여금 옛날의 현인을 사모하지 말게 할 것이며, 먼 월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중국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려고 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해야만 상하가 서로 친애하여 안으로 공을 세우고 밖으로 이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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