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 치 환 -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ㅎ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 한국현대시 2017.09.15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 한국현대시 2017.09.14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 한국현대시 2017.09.13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 한국현대시 2017.09.12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떠나가는 배 - 박용철 -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한국현대시 2017.09.11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때밀이 수건 - 최승호 -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 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 한국현대시 2017.09.08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땅끝 - 나희덕 -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 한국현대시 2017.09.07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딸그마니네 -고은-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다 .. 한국현대시 2017.09.06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등산 - 오세영 -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절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바람에 뜨는 별.. 한국현대시 2017.09.05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들길에 서서 - 신석정 -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 한국현대시 2017.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