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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임기종 2014. 3. 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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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보

(1호에서 100호)

종 목 국보 1호 서울숭례문 (서울崇禮門)

분 류 성곽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 태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중구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불행히도 현재는 불에 타 버렸다. 복원마침.

문화재명 서울숭례문(서울崇禮門)

서울 성곽(城郭)의 정문으로 문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며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된 후 세종(世宗) 29년(1447) 크게 개축(改築)되었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석축(石築)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정면(正面) 5칸, 측면(側面) 2칸의 중층(重層)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지붕(屋蓋)은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으로 힘이 있고 간결한 살미첨차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수법(手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문은 외관(外觀)이 장중(莊重)하고 내부구조(內部構造)가 견실(堅實)하여 수도(首都)의 성문(城門)으로 당당한 면모(面貌)를 지닌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代表的) 건축(建築)이라 할 수 있다.

종 목 국보 2호 원각사지십층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초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종로구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명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이 탑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이며 높이는 약 12m 이다.

3중의 기단(基壇)은 평면이 아자형(亞字形)을 이루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3층까지는 기단과같은 평면이고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다. 각 면석(面石)은 용(龍) 사자(獅子) 모란(牡丹) 연꽃(蓮華)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 나한상(羅漢像) 천왕상(天王像) 등으로 빈틈없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탑신부에는 각 층마다 난간(欄干) 둥근기둥 다포계(多包系)의 공포(공包) 기와지붕 등이 새겨져 다포계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세부수법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대는 조선(朝鮮) 세조(世祖) 11년(1465)에 세운 원각사의 터이며 원각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폐사(廢寺)되어 현재 이 탑과 비(碑)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상층부(上層部)에 명문(銘文)이 있어 세조 13년(1467)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인 석탑의 재료가 화강암인 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든 점도 특이하며 조각의 수법이 세련되고 의장(意匠)도 풍부하여 조선시대 석탑으로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종 목 국보 3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진흥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大득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이 비문은 조선(朝鮮) 순조(純祖) 16년(1816, 병자(丙子))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친히 북한산 비봉에 올라 처음으로 판독하였다.

그리고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하여 주고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종 목 국보 4호 고달사지부도 (高達寺址浮屠)

분 류 부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소유자 국유

관리자 여주군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문화재명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이 부도(浮屠)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浮屠) 가운데 손꼽히는 거작으로 상륜부(相輪部)만 완전하지 않을 뿐 각부(各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단중대(基壇中臺)의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龍)과 구름모양을 조각한 솜씨가 힘차고 능숙하며 대담하다. 팔각(八角) 탑신(塔身)의 각면에는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고, 비교적 두꺼운 지붕에는 각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신라부도(新羅浮屠)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시대(高麗時代) 양식(樣式)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에 입각한 원종대사(元宗大師)의 혜진탑(慧眞塔)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3.4m이다.

종 목 국보 5호 법주사쌍사자석등 (法住寺雙獅子石燈)

분 류 석등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

신라(新羅) 석등(石燈) 중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그 조성년대(造成年代)는 성덕왕(聖德王)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등(燈)은 불타(佛陀)의 가피(加被)로 명랑(明朗)한 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의 재앙(災殃)(불교(佛敎)에서의 8난(八難))을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석조(石造) 유물(遺物)에 사자를 이용한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 많은 예를 볼 수 있으나 현존하는 석탑·석등에 설치된 사자 중 법주사 석등의 사자 조각은 가장 뛰어난 수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석등의 간주석(竿柱石)을 석사자(石獅子)로 대치한 이 석등은 전형양식(典型樣式)에서 벗어난 것으로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의 하대연화석(下臺蓮華石)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모두 하나의 돌로 조각한 것이다.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이 큰 것이 특징이다.

종 목 국보 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 (中原塔坪里七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충주시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명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이 탑은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建立)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유일한 7층의 거탑(巨塔)으로 높이 14.5m이다.

이 탑이 건립된 지점이 우리나라의 거의 중앙이라고 하여 속칭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1917년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때의 잘못으로 원형(原形)과 달라진 부분이 많아졌다.

현재의 모습은 기단(基壇)은 2중(二重)이고, 상하 각각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되어, 각 면에는 3주(三柱) 혹은 4주(四柱)씩의 탱주(撑柱)가 있으나 간격이 고르지 않은 것은 수리 때의 잘못으로 보인다. 갑석(甲石) 상면의 받침은 하층기단(下層基壇)에는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2단이고, 상층기단(上層基壇)에는 각형(角形) 2단이어서 신라(新羅) 석탑(石塔)의 전형(典型) 양식을 지키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5층까지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고, 6층부터는 한개의 돌로 되어 있다. 각층 탑신석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있고 옥개석 받침수는 각층 5단씩이다. 이 석탑을 해체할 때 6층 탑신석과 기단에서 각각 고려시대(高麗時代) 거울을 비롯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종 목 국보 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 (奉先弘慶寺事蹟碣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 현종

소유자 국유

관리자 천안시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碣碑)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문화재명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

봉선홍경사지(奉先弘慶寺址)가 있었던 곳은 인가(人家)도 드물었으며 잡초가 우거져 가끔 도적이 출몰하여 행인이 곤란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창사(創寺)를 명(命)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감독으로 동왕(同王) 12년(1021)에 200여칸을 완공하였다.

현종의 부왕(父王) 안종(安宗)이 법화경(法華經)의 묘설(妙說)을 보고 깊이 느끼어 창사하려다 서거(逝去)하여 그 유지(遺志)를 이어 완성한 것이므로 사명(寺名)에 봉선(奉先)을 앞에 놓았다. 절의 서쪽에 객관(客館)을 건립하여 행인(行人)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한다.

비신에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은 해서(楷書)로 각자(刻字)하였는데 최충(崔沖)이 찬(撰)하였고 백현례(白玄禮)의 서(書)로 되어 있다.

비를 세운 연대는 비문 끝에 「성상어유지십팔재대평기역지제육년하사월 일근기(聖上御유之十八載大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 日謹記)」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절을 세운 지 5년 뒤의 일이다.

비신(碑身)을 받는 귀부(龜跌)의 어룡(魚龍)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종 목 국보 8호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보光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진성여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보령시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보光塔碑)

이 석비는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때 당(唐)나라에 수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郎慧和尙) 무염(無染)(801∼888)을 위해 세워진 탑비로 귀부(龜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이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전체높이 4.55m, 비신높이 2.52m, 너비 1.5m로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최대(最大)의 것이며, 아름다운 조각은 신라시대 석비의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비좌(碑座)의 운문(雲紋)과 이수의 연화문(蓮華紋), 용틀임 등은 당시 조각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최치원(崔致遠) 사산비(四山碑) 가운데 하나로 비문은 최치원이 짓고 글씨는 최인곤(崔仁滾)이 썼으며 비를 세운 연대(年代)는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귀부가 심히 파손된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종 목 국보 9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 대 백제시대 후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부여군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문화재명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종 목 국보 10호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實相寺百丈菴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백장암

관리자 백장암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實相寺百丈菴三層石塔)

기단(基壇) 구조(構造)와 각부(各部)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 주는 전고(全高) 5m의 이형석탑(異形石塔)이다. 기단부(基壇部)는 방형(方形) 대석(臺石)을 놓아서 기단을 삼았으며 그 위로 방형(方形) 3층 탑신부를 올려 놓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에 있어서 아래층 탑신은 폭(幅)에 비해 높이가 높으며 2층, 3층의 탑신은 일반 석탑에서와 같이 감축도가 심하지 않다. 옥개석(屋蓋石)의 옥개받침에 층단을 두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개(寶蓋), 수연(水煙)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있는 것도 희귀한 예이다. 탑 전체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각층 탑신 상부에는 목조건축(木造建築)의 두공형(枓공形)을 모각(模刻)하였다 1층 탑신 4면에는 보살상과 신장상 2구 씩을 배치하고 2층 탑신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 탑신 4면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 1구 씩을 각각 새기고 있어 탑신 전체가 천인(天人), 보살(菩薩), 천왕상(天王像) 등으로 가득 찬 화려한 탑이다.

이상으로 볼 때 탑의 구조가 전형적인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설계에 의해 조성된 참신한 통일신라(統一新羅) 하대(下代)의 아름답고 대표적인 석탑의 하나라 하겠다.

종 목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 (彌勒寺址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 대 백제시대 후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익산시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명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이 탑의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 6층까지 남아 있으며, 높이가 14.24m이다. 반쯤 무너져 버려서 한쪽을 시멘트로 보강을 하여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탑의 건립연대는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源樣式)으로서 목탑(木塔)이 석탑(石塔)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초층탑신(初層塔身)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에 중앙칸에는 사방에 문이 나 있고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탑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네모난 돌기둥이 서 있다. 탑신 외면에는 엔타시스의 수법이 있는 네모난 돌기둥들 위에 목조건물의 창방(昌枋), 평방(平枋)을 설치하고 그 위에 두공(頭공) 형식의 받침돌이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2층 이상은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재(部材)의 구조도 간결하게 생략되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 들었다.

이와 똑같이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었으며, 두 석탑 사이에도 목탑(木塔)이 있어 이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이 있었다.

종 목 국보 12호 화엄사각황전앞석등 (華嚴寺覺皇殿앞石燈)

분 류 석등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화엄사

관리자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문화재명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앞石燈)

각황전(覺皇殿)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서 한국에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전형양식(典型樣式)에서 벗어난 고복형(鼓腹形) 계통(系統)으로 선림원지(禪林院址) 석등(石燈)(보물 제445호)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8각의 기대(基臺) 측면(側面)에는 안상(眼象)이 장식(裝飾)되었으며, 연화하대석(蓮華下臺石)에는 귀꽃을 갖춘 복판(複瓣)의 8엽연화(八葉蓮華)가 장식되었다. 연대상(蓮臺上)에는 1단의 운문대(雲紋臺)와 간석(竿石)굽받침대를 갖춘 위에 고복형의 간주석(竿柱石)을 안치(安置)하였다. 상대석(上臺石)의 앙련(仰蓮)은 8엽의 단판연화(單瓣蓮華)로서 판내(瓣內)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이 장식(裝飾)되었다. 상대석 상면에는 화사(火舍) 괴임대를 마련했는데 이러한 양식은 개선사지(開仙寺址) 석등(石燈)(보물 제111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꽃을 갖춘 옥개석(屋蓋石) 정상(頂上)에는 8엽단판연화(八葉單瓣蓮華)를 장식한 복발(覆鉢)과 8각의 노반(露盤)과 상륜(相輪)을 갖춘 간(竿)과 귀꽃을 갖춘 보개(寶蓋)를 안치하고 최정상에는 보주장식(寶珠裝飾)으로 끝막음하였다.

이와 같이 화려한 장식을 갖춘 이 석등의 조성연대(造成年代)는 명확하지 않으나 함통연간(咸通年間)(860∼873)을 전후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13호 무위사극락전 (無爲寺極樂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

시 대 조선 세종

소유자 무위사

관리자 무위사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문화재명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이 건물(建物)은 조선(朝鮮) 초기(初期) 세종(世宗) 12년(1430)에 건립(建立)된 주심포식(柱心包式)의 대표적(代表的)인 불전(佛殿)으로 맞배지붕 형식(形式)을 갖추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알맞은 평면(平面) 구성(構成)에 현저(顯著)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간결(簡潔)하고 아름다운 조각(彫刻)의 공포(공包)를 얹어 가구(架構)를 짰는데 그 수법이 고려기(高麗期) 양식(樣式)보다 세련미(洗鍊美)가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삼존(三尊)을 안치(安置)하고 후불벽(後佛壁)과 양측벽(兩側壁)에는 성종(成宗) 7년(1476)에 그린 벽화(壁畵)가 있어 더욱 내부공간(內部空間)을 장엄(莊嚴)하게 하였다.

고려(高麗) 말기(末期) 건축(建築)에 곡선재(曲線材)를 많이 쓴 데 비하면 이 건물은 직선재(直線材)를 써서 측면관(側面觀)이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균형을 잘 이루었고 조선 초기 양식을 어느 건물보다 유감 없이 발휘(發揮)하고 있어 주목받는 건물이다.

종 목 국보 14호 은해사거조암영산전 (銀海寺居祖庵靈山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은해사 거조암

시 대 조선시대 초기

소유자 은해사

관리자 은해사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명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居祖寺)라하여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는데 신라(新羅) 효성왕(孝成王) 2년(738) 원참조사(元참祖師)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景德王)(742∼764) 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은해사와 거조사와의 관계는 언제부터 맺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本寺)로 하고 거조사는 그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은 해체(解體) 보수시(補修時)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高麗) 우왕(禑王) 원년(元年)(1375)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重修)되었다고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柱心包系)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전·후퇴칸5량구조(前·後退間五樑構造)의 맞배집으로 공포(공包), 보(樑)의 단면(斷面), 솟을합장(八字臺工), 포대공(包臺工) 등에서 일부 고식(古式)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 보아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상(釋迦牟尼佛像)과 526분의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末期)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15호 봉정사극락전 (鳳停寺極樂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시 대 고려시대 후기

소유자 봉정사

관리자 봉정사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72년 해체·수리할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는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명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이 건물(建物)은 현존(現存)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木造建築) 중 최고(最古)의 건물로 유명하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건물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건물이지만, 전대(前代)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건축양식(建築樣式)을 내포(內包)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

1972년에 실시(實施)한 보수공사(補修工事) 때에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建立後) 첫 수리(修理)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이며 그 뒤 조선(朝鮮) 인조(仁祖) 3년(1625)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大藏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極樂殿)이라 개칭(改稱)한 것 같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공包)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內部架構)의 고격(古格)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부재(部材)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적(國寶的) 기법(技法)을 갖추고 있어 한층 더 지보적(至寶的) 존재(存在)라 할 수 있다.

종 목 국보 16호 안동신세동칠층전탑 (安東新世洞七層塼塔)

분 류 전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안동시 법흥동 8-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안동시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명 안동신세동칠층전탑(安東新世洞七層塼塔)

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이 일대의 지명(地名)을 법흥리(法興里)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塼塔)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7m, 기단너비 7.75m이다. 단층(單層)의 기단(基壇)은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한 판석(板石)을 세워 만들고 탑신부(塔身部)는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塼)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전의 크기는 길이가 약 28cm, 폭 약 14cm, 두께 약 6cm로 어긋나게 쌓았다. 각층 지붕 윗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는 목탑(木塔) 양식(樣式)의 수법(手法)을 모방(模倣)하여 전탑이 조성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탑의 윗 부분에는 금동제(金銅製) 상륜부(相輪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졌다.

종 목 국보 17호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 (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분 류 석등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문화재명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방형(方形) 지대석(地臺石)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배치되고, 지대석 위의 팔각 하대석(下臺石)에는 복련(覆蓮)과 귀꽃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8각의 간주석(竿柱石)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 위의 상대석(上臺石)에는 부드러운 8엽(八葉)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8각의 화사석(火舍石) 벽면(壁面)에는 네 곳에 화창(火窓)이 있고 네 곳에 세련된 보살상(菩薩像)이 조각되었다.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보주(寶珠)가 있었는데 보주대(寶珠臺)만 남아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2.97m이다.

종 목 국보 18호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중기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문화재명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661∼681)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創建)한 것이다. 그후 소실(燒失)된 것을 고려(高麗) 현종(顯宗)(1009∼1031) 때 중창(重創)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7년(1358) 다시 불에 타 버려 우왕(禑王) 2년(1376)에 재건(再建)하였고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1608∼1623) 연간(年間)에 단청(丹靑)하였다. 이 건물은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각각 약간 안으로 굽은 곡선(曲線)을 이루고, 굽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구(架構)는 직선재(直線材)를 사용하였고 장식적(裝飾的)인 요소(要素)가 적으며 공포(공包), 가구(架構)의 수법(手法)도 견실(堅實)하다.

1916년 해체수리시(解體修理時)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우왕 2년(1376)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양식(構造樣式)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주심포(柱心包)양식의 기본수법을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 하나이다.

전내(殿內)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奉安)하였는데 다른 불전에서와는 달리 불전을 측면(側面)에 모시고 있다.

종 목 국보 19호 부석사조사당 (浮石寺祖師堂)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후기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문화재명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부석사(浮石寺)를 창건(創建)한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진영(眞影)을 봉안(奉安)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高麗) 우왕(禑王) 3년(1377)에 건립(建立)되었고, 조선(朝鮮) 성종(成宗) 21년(1490)에 중수(重修)되었으며 동(同) 24년(1493)에 개채(改彩)되었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에 맞배집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비해 기둥의 배흘림이 약해졌고,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직선(直線)이며 굽받침이 없고, 공포(공包)와 가구(架構)의 수법은 간략하다. 구조양식(構造樣式)으로 보아 무량수전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內部) 입구(入口) 좌우(左右)에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상(四天王像)의 벽화(壁畵)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사상(繪畵史上) 희귀한 것이며, 고분(古墳) 벽화(壁畵)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彩色)그림 중 하나로서 지금은 새로 지은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에 보관되어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국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종 목 국보 20호 불국사다보탑 (佛國寺多寶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문화재명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한국(韓國)의 석탑 중에는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이 몇 기(基) 있는데, 이 탑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탑은 없다.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에 서쪽 석가탑(釋迦塔)과 대조를 이루어 동쪽에 자리한 탑으로, 감은사(感恩寺)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雙塔伽藍)의 배치를 보여준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軀)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八角蓮華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蓮華石) 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있어 8각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각의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완전히 의표(意表)에서 벗어난 참신한 착상으로 이루어져서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겼고, 조법(彫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건축을 보는 듯 우려하며, 복잡한 아래위의 가교(架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한 점의 문란함도 없다. 이 탑을 다보탑(多寶塔)이라고 하는 것은,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상으로 해석되는데, 동양의 불교국가에서 석조(石造)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이 탑은 서쪽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에 수리를 한 바 있다.

종 목 국보 21호 불국사삼층석탑 (佛國寺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문화재명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우수작의 하나이다.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결구(結構)되었고, 아래위 면석(面石)은 탱주(탱柱) 둘을 세워 3구(區)로 구분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탑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화(蓮華)가 조각된 8개의 둥근 돌을 돌리고, 이들 연화석(蓮華石) 사이에 긴 돌을 끼워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정역(淨域)을 나타내기 위한 시설이라고도 해석되며, 한편으로 연화대(蓮華臺) 위에 8보살(菩薩)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의태(意態)를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탑은 일명 석가탑(釋迦塔)이라고 하는데, 동쪽의 다보탑(多寶塔)에 대한 호칭으로, ‘법화경(法華經)’에 보이는 석가여래(釋迦如來) 상주설법(常住說法)의 상(相) 곧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나란히 앉기 이전의 상(相)으로 해석된다. 동서 두 탑의 대조가 묘할 뿐 아니라 조형(造形)이 소박 장중하여, 신라(新羅) 석탑 중에서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22호 불국사연화교칠보교 (佛國寺蓮華橋七寶橋)

분 류 석교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불국사연화교칠보교(佛國寺蓮華橋七寶橋)

불국사(佛國寺) 앞면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에 대하여 서쪽에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가 있다. 가구수법(架構手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대동소이하며, 전체의 높이가 청운교의 높이와 같은 소규모의 것이다. 밑의 연화교는 10단의 층계를 만들었는데, 계단식 등항(登桁)에 만들어 둘로 나누었고, 양쪽 끝의 등항(登桁)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아래위에 돌기둥만 서 있다. 다리밑은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돌로 궁륭형(穹융形) 통로를 만들어 놓은 점이 동쪽의 백운교와 같으나, 이 석제(石梯)에서 특이한 것은 층계마다 아름다운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다.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되어 있는데, 한 장의 긴 돌로 된 등항(登桁)으로 양분된 점이 연화교와 다르다. 돌기둥이 아래위에 남아 있어 석란(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겨 놓은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졌기 때문에 다리밑에 통로를 만들지 않았으며, 보계(寶階)에 특별한 조각장식은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極樂殿)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석제(石梯) 또한 약 45도의 안정된 경사를 보이며, 동쪽 석제(石梯)의 웅장함에 비하여 아름답고 섬세한 맛이 있어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제(石梯)도 동쪽 석제(石梯)와 마찬가지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4년 중수할 때에 돌간대를 다시 끼워 옛모습을 재현시켰다.

종 목 국보 23호 불국사청운교백운교 (佛國寺靑雲橋白雲橋)

분 류 석교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불국사청운교백운교(佛國寺靑雲橋白雲橋)

토함산(吐含山)에서 뻗어 내려오는 한 줄기를 잘라 남향으로 석단(石壇)을 만들어 고대(高臺)를 이루고 불국사를 세웠는데, 이 석단 앞면 두 곳에 석제(石梯)를 가설하여 당탑(堂塔)에 오르도록 되어 있다. 곧, 동쪽에 있는 2단의 석제(石梯)가 이것인데, 밑의 것을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을 백운교(白雲橋)라 한다.

17단의 청운교는 등항(登桁)에 의하여 좌우로 구분되었는데, 등항(登桁)에는 중앙에 능선을 두었고, 좌우쪽 끝의 등항(登桁)에는 원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아래위에 돌기둥만 남아 있다. 다리밑은 작은 돌을 가구(架構)하여 궁륭형(穹륭形)을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위쪽 양단(兩端)에는 등항(登桁)까지 내밀린 갑석(甲石)이 있는데, 우각(隅角)의 반전수법(反轉手法)은 다보탑(多寶塔)이나 석가탑(釋迦塔)의 반전수법과 일치한다. 청운교를 올라서면 보도(步道)가 마련되어, 서쪽의 환상적인 범영루(泛影樓) 돌기둥을 지나 극락전(極樂殿) 앞에 이르게 된다. 청운교 위의 백운교는 16단으로, 구성양식은 규모가 작을 뿐 청운교와 같은 양식이다. 이 다리 밑에도 작은 궁륭형(穹륭形) 통로가 마련되어 있고, 그 양쪽에서 길게 옆으로 뻗은 얇고 넓은 갑석(甲石)의 수법도 청운교에서와 같다. 백운교를 올라서서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앞에 대웅전(大雄殿)이 나서고,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다. 약 45°의 경사를 보이는 이 석제(石梯)는 설계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만들어졌으며, 좋은 화강석을 써서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세부양식에서도 서쪽의 석제(石梯)나 기타 당탑(堂塔)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제(石梯)도 서쪽 석제(石梯)와 마찬가지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 목 국보 24호 석굴암석굴 (石窟庵石窟)

분 류 석굴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석굴암

관리자 석굴암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문화재명 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

석굴암(石窟庵)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0년(751) 당시의 재상(宰相)인 김대성(金大城)에 의해서 창건(創建)되었다고 전한다. 석굴암(石窟庵)의 조각(彫刻)들은 심오(深奧)한 믿음과 우아(優雅)한 솜씨가 조화(造化)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가장 뛰어난 세계적(世界的)인 걸작(傑作)으로 한국불교예술(韓國佛敎藝術)의 대표작(代表作)이다.

굴(窟) 가운데에는 높이 3.48m의 여래좌상(如來坐像)이 안치(安置)되어 있고 전실(前室)과 굴입구좌우벽(窟入口左右壁)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 인왕(仁王) 및 사천왕(四天王) 등의 입상(立像)이 조각(彫刻)되어 불천(佛天)을 지키고 있다. 굴(窟) 내부 본존불(本尊佛) 둘레에는 천부입상(天部立像) 2구, 보살입상(菩薩立像) 2구 및 나한입상(羅漢立像) 10구를 배열(配列)하고 본존불(本尊佛) 바로 뒤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十一面觀世音菩薩立像)을 조각(彫刻)하였다. 그리고 굴(窟) 천장(天障) 주위에는 10개의 감실(龕室)이 있는데 그 안에 좌상(坐像)의 보살(菩薩)과 거사(居士) 등이 안치(安置)되어 있다.

종 목 국보 25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 (新羅太宗武烈王陵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초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문화재명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이 비석(碑石)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661)에 무열왕(武烈王)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碑)의 대석(臺石)이었던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위에 얹혔던 이수(이首)만이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新羅統一) 초기(初期)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龍)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東洋)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武烈王)의 둘째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龜跌)의 길이 380cm, 너비 249cm, 높이 103cm, 이수 높이 106cm이다.

종 목 국보 26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佛國寺金銅毘盧舍那佛坐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경덕왕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문화재명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佛國寺金銅毘盧舍那佛坐像)

불국사 비로전(毘盧殿)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높이 177㎝, 이 상(像)은 불국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이다.

대좌(臺座)나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지만, 육계(肉계)나 나발(螺髮)의 머리카락은 기교있게 만들었다. 상호(相好 : 부처님의 얼굴)는 반달눈썹에 눈은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 반개(半開)하였고, 인중을 뚜렷이 두드러지게 새겨 전체적으로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대의(大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얇게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보이는 당당한 체구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간 지권인(智拳印)으로서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증심사 비로사나불좌상(보물 제131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중엽경의 작품인 석굴암본존불(국보 제24호)의 특징과는 다른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종 목 국보 27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佛國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불국사

관리자 불국사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늘씬한 몸매 등은 장대하고 건강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문화재명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佛國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

불국사 극락전(極樂殿)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높이 166㎝로 이 상(像)은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이며 신체나 옷주름도 비교적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하였다.

상호(相好)는 근엄한 인상이 뚜렷하여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의 불상과 비교되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 양식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무릎은 매우 안정된 모습이다. 수인(手印)은 아미타(阿彌陀)의 9품인(九品印) 중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양손의 위치에 있어서 좌우가 서로 바뀌어진 것은 국보 제26호 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점이다.

이 불상은 조성연대가 국보 제26호와 거의 비슷한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28호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 (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보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백률사

관리자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와 뒤로 젖혀진 상체와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문화재명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이 상은 원래 경주의 북산인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있는 백률사(栢栗寺)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높이 177cm. 등신대(等身大)의 중후한 인상을 풍겨주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채색 금동불상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둥근 상호(相好)에 긴 눈썹, 가는 눈, 오똑한 코, 작은 입, 양볼의 살, 턱의 군살 등이 우아하게 묘사된 상(像)이다. 가슴은 비교적 넓고 양감(量感)없이 밋밋한 편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밀착된 법의(法衣)로 잘 나타나고 있다. 두손은 후보(後補)한 것이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팔의 위치로 보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서 약호(藥壺)를 받들었던 듯하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가슴에 U자형 주름을 여러 단 잡았으며, 한단씩 걸려 주름의 선을 가운데에서 끊은 것은 두다리의 윤곽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팔에서 내려진 옷자락과 발 위에 묘사된 옷자락은 묵중하여 중후하게 보이며 형태적 특징과 함께 이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像)의 뒷면에는 구멍이 나 있고, 광배(光背)를 달았던 꼭지가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분 류 동종류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혜공왕

소유자 국립경주박물관

관리자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문화재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廢寺)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音管)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종 목 국보 30호 분황사석탑 (芬皇寺石塔)

분 류 모전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시 대 신라 선덕여왕

소유자 분황사

관리자 분황사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명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이 석탑(石塔)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기단은 야석(野石)을 쌓아올린 단층으로 되어 있어 전탑 기단의 통식(通式)을 보여 주며, 그 중앙에 1층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화강암으로 한 층을 마련하였다. 탑신부는 길이 약 30~45㎝, 두께 약 4.5~9㎝의 진회색 안산암을 잘라 각층 옥신과 옥개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외형상 전탑과 같다.

탑이 세워진 것은 분황사(芬皇寺) 창건(創建)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3층으로 되어있는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각종의 옥류(玉類),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국(中國) 주화(鑄貨)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舍利裝置)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넓은 방형(方形)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1층탑신(一層塔身)의 4면에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는 인왕상(仁王像)을 조각(彫刻)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조각의 걸작품에 속한다.

종 목 국보 31호 경주첨성대 (慶州瞻星臺)

분 류 첨성대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국내에 삼국시대의 석조 건축물이 몇 가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첨성대(瞻星臺)가 가장 오랜 천문대(天文臺)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귀중할 뿐 아니라, 현존하는 천문대 중에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대석(地臺石)과 기단은 4각형으로 8석과 12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27단의 아래가 넓은 원통형 주체부(主體部)가 있는데, 여기에 쓰여진 돌은 362개이고, 1단의 높이는 약 30㎝이다. 제13단에서 제15단에 걸쳐 남쪽으로 면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가 나 있는데, 그 아랫부분 양쪽에 사다리를 걸었으리라고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 20단과 제25, 26단 두 곳에 정자형(井字形)으로 길고 큰 돌이 걸쳐져 있는데, 그 양쪽 끝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꼭대기에도 정자석(井字石) 2단이 놓여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판목(板木)을 놓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자리가 있다. 꼭대기의 정자석 위에도 관측에 필요한 어떤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나 석조부분만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데, 매우 희귀한 유적(遺蹟)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첨성대의 건립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條)에 「별기운시왕대연석축첨성대(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라고만 나와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덕왕 재위시(632~646)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 목 국보 32호 해인사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분 류 목판류

수 량 81,258매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해인사

관리자 해인사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문화재명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이 대장경판(大藏經板)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목판(木板)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을 말하며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하며 또한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文)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종(顯宗)(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蒙古)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 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고종 19년(1232)에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고자 국가적(國家的)인 차원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이때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北宋官版)과 거란본(契丹本)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誤謬)를 바로잡은 대장경 역사상 가장 완벽한 대장경판이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大藏刻版)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契丹兵)의 침입 때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지금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에서 부처님에게 고(告)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板刻)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이 대장경판은 판심(版心)이 없는 권자본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으로 한 면(面)에 23행(行) 14자(字)씩 총 1,401종(種) 6,708권을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새긴 것인데, 이중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판은 79종 520권이 판가(板架)에 수록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은 이 고려대장도감각판(高麗大藏都監刻板) 외에 9종의 분사대장도감의 판각판과 조선조(朝鮮朝)에 판각(板刻)된 사간판(寺刊板)이 포함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현존(現存) 최고(最古)의 대장경판일 뿐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대장경판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文化遺産) 가운데 하나이다.

종 목 국보 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신라 진흥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창녕군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명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이 비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이 세운 기념비(記念碑)로, 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領)·마운령(摩雲嶺) 비석(碑石)과는 달리 비문(碑文)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題名)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拓境碑)라고 일컬었으나, 임금을 수행(隨行)한 신하(臣下)들의 명단(名單)이 열거(列擧)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巡狩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와 비석(碑石)의 성격(性格)이나 형태(形態)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碑文)의 전반부(前半部)는 대체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나, 첫머리의 '신사년('辛巳年)' 이라는 글자를 통하여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앞의 3기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중국(中國)의 육조풍(六朝風) 해서체(楷書體)로 각 행마다 27∼18자씩 모두 27행 643자이다. 이 중에서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判讀)되었다. 비문의 후반부(後半部)는 명확(明確)하게 판독되는데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을 중앙 행정관(行政官)·지방군정관(地方軍政官)·지방행정관(地方行政官)·시종(侍從)의 순서(順序)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당시 지방(地方) 행정(行政) 조직(組織)의 실태(實態)를 엿볼 수 있다.

본래 이 비석은 목마산성(牧馬山城) 서쪽 기슭에 있었는데, 1914년 일본인(日本人)에 의해 발견(發見)되었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종 목 국보 34호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 (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창녕군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명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형성한 신라(新羅) 석탑의 일반형이다. 그 큰 규모와 조각수법 등이 불국사 석가탑(釋迦塔)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統一新羅) 성대(盛大)(8세기 중엽)의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에 '동(東)'자를 붙인 것은 한 사역(寺域) 안에 탑이 쌍으로 건립되어 있어서가 아니고, 술정리에 2개의 탑이 유존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은 여기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보존 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 수리하였다. 이때 3층탑신 윗면에는 네모진 사리공(舍利孔)이 있어서 뚜껑모양의 청동잔형용기(靑銅盞形容器)와 황색(黃色)의 유리병, 유리구슬, 향나무편(片) 등이 발견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으나 탑이 크고 짜임새가 장중하며 훤칠해 기품있게 보인다. 현재의 높이는 5.75m이다.

종 목 국보 35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화엄사

관리자 화엄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화엄사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명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은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어머니와 관련되는 전설을 지닌 석탑으로 근본 조형은 이중기단의 3층석탑인 기본형을 취하고 있으나 상층 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여 준다.

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고대 양식에 속하는 3구식(三軀式)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여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양각하였다. 천인상의 자세는 악기(樂器)를 연주하는 상(像), 춤을 추고 꽃을 바쳐 공양(供養)하며 불천(佛天)을 찬미(讚美)하고 있는 상 등 다양하다. 상층 기단에는 귀기둥(隅柱)을 대신하여 연화대(蓮華臺) 위에 꿇어앉은 암수 2마리씩의 사자(獅子)를 배치하고 머리 위에는 연화대를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게 하였다. 또 중앙에는 찰주(擦柱) 대신 합장한 대덕(大德)의 입상(立像)을 세웠고, 갑석 이면(裏面) 중앙에는 연화(蓮華)를 조각하여 천개(天蓋)를 삼는 등 다양한 특징을 갖추게 하였다. 귀기둥을 사자(獅子)로 대치한 양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자 배치 양식과 관련된다. 탑 조성에 있어 착상이 기발하고 조각이 우수한 점 등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사자탑 가운데 이를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게 한다.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한국 석탑형식 분류에서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석탑이다.

종 목 국보 36호 상원사동종 (上院寺銅鍾)

분 류 동종류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상원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상원사

관리자 상원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문화재명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현존(現存)하는 한국종(韓國鍾)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造成)되어 조선(朝鮮)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상원사(上院寺)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鍾)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鍾뉴) 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 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에 있는 상대(上帶)·하대(下帶), 네 곳에 있는 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紋)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紋)이 새겨졌고, 종복(鍾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華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理想的)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佛敎彫刻)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종 목 국보 37호 경주구황리삼층석탑 (慶州九黃里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명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이 탑은 이중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43년 이 탑을 해체수리하였을 때 제2층 옥개석내에 있었던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금으로 만든 여래입상(如來立像), 많은 유리구슬, 팔지, 금실 등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사리함 뚜껑 내면에 새겨둔 글자가 있어 이 탑에 대한 내용과 발견된 유물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즉 이 탑은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691년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세웠으며 효소왕이 돌아가자 성덕왕(聖德王)이 성덕왕 5년(706)에 앞서의 두 왕을 위해 사리(舍利), 불상(佛像)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세를 기원한 것이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높이는 7.3m이다.

종 목 국보 38호 고선사지삼층석탑 (高仙寺址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초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에서 또렷이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문화재명 고선사지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고선사(高仙寺)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서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주지로 있었던 곳으로 이름난 절이다.

이 석탑은 원래 경주시 암곡동(暗谷洞) 고선사터(高仙寺址)에 있었던 것을 경주고도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실시된 덕동댐공사로 인하여 수몰됨으로써 1975년 이곳으로 옮겨 세워 놓은 것이다.

옥개석(屋蓋石)과 옥신석(屋身石)은 여러 개의 부재를 써서 조립식으로 짜 맞추어 쌓아 올렸으나 3층탑신만은 하나의 부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사리장치(舍利裝置)를 하기 위한 사리공(舍利孔)과 찰주(擦柱)를 세우기 위한 찰주공을 마련하려는 배려였음을 해체복원시에 알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의 신라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현재 높이는 10.2m이다.

종 목 국보 39호 월성나원리오층석탑 (月城羅原里五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672

시 대 통일신라시대 초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부분의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경쾌함을 실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청신한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문화재명 월성나원리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이중(二重)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구성하였으며 탑신부 윗 부분에 장식(裝飾)되었던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찰주(擦柱) 일부만이 남아 있다. 경주(慶州)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巨大)한 규모의 석탑으로 각 부(部)의 구조(構造)도 정연하고 비례도 아름다우며 높은 위치에 세워 주위를 압도(壓倒)하는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석탑은 세운 당시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경주의 석탑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인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典型的)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종 목 국보 40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淨惠寺址十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경주시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문화재명 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서 원 위치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기단은 단층 토축(土築)이다.

토대(土臺)의 상면에 1단의 석축이 마련되고 그 위에 4매석(四枚石)으로 구성된 높직한 2단의 방형(方形)의 괴임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괴임돌은 곧 기단부 갑석(甲石) 상면의 괴임대 수법으로서 현재는 마치 지대석(地臺石)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탑신은 13층의 옥신(屋身)·옥개석(屋蓋石)으로 건립되었는데, 특히 초층의 옥신과 옥개가 큰 규모로 조성되고, 그 위의 2층부터는 아주 작아졌다. 초층 탑신은 네 귀에 방형의 석주(石柱)를 우주(隅柱)로 세우고, 우주 안으로 역시 1석씩으로 된 석주와 인방과 하방을 걸쳤다. 초층 옥개석은 개석과 하면 받침부가 별석(別石)인데 3단이다. 초층 옥개석 위에 1매 판석으로 된 1단의 괴임돌을 놓아 2층 이상의 탑신을 받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옥신·옥개석이 급격히 작아져서 마치 초층에 얹혀 있는 상륜부(相輪部)와도 같이 보인다. 옥신·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 특히 탑신은 작아져서 옥개석 위에 마련된 탑신 괴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는데, 일반적 형식이다. 이 석탑은 보기 드문 13층의 탑이고, 2층 이상의 체감비율이 특이하며 초층 탑신 4면의 감실(龕室)과 아울러 기단부 축조가 일반적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종 목 국보 41호 용두사지철당간 (龍頭寺址鐵幢竿)

분 류 당간지주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 광종

소유자 국유

관리자 청주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문화재명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신라(新羅)·고려(高麗)를 통하여 수많은 사찰(寺刹)의 건립(建立)과 함께 설치(設置)된 당간(幢竿)들이 있었으나 대개가 현재 석조(石造)의 지주(支柱)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특히 당간에 명문(銘文)이 있어 그 건립년대(建立年代)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철당간과 공주(公州) 갑사(甲寺)의 철당간(鐵幢竿)뿐이다.

당간의 지주는 화강석(花崗石)으로 양지주가 마주 서 있고 그 사이에 철통(鐵桶)의 원형(圓形) 당간 20개를 연결시켜 12.7m의 철제당간을 세웠다. 주목(注目)할 것은 철제당간의 밑에서부터 셋째 번의 원형철통 표면(表面)에 철당기(鐵幢記) 명문이 양각(陽刻)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으로 건립년대(建立年代)가 준풍(峻豊) 3년, 곧 고려 광종(光宗) 13년(962) 3월 29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遺物)이다.

현재 지주의 높이는 4.2m이고, 철제원통당간 1개의 높이는 0.63m이며 전체 높이는 12.7m에 달한다.

종 목 국보 42호 목조삼존불감 (木彫三尊佛龕)

분 류 목불

수 량 1좌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유자 송광사

관리자 송광사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명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이 불감(佛龕)은 송광사(松廣寺)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흔히 보조국사원불(普照國師願佛)로 알려져 있다. 불감은 닫으면 한 개의 포탄형(砲彈形)인데 열면 세 부분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이런 형식의 불감은 조선(朝鮮) 후기(後期)까지 목조불감(木造佛龕)에 잘 계승되고 있다.

중앙의 불감에는 투각(透刻)된 연꽃대좌(臺座) 위에 본존불(本尊佛)이 앉아 있는데 머리 위에는 장막(帳幕) 모양의 천개(天蓋)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본존불은 뾰족한 육계(肉계), 근엄한 얼굴,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얇은 불의(佛衣), 건강한 체구(體軀) 등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이 옷자락은 인도(印度)의 고식(古式) 옷주름에 기원을 둔 두 가닥의 옷주름 표현으로 손모양과 함께 인도양식(印度樣式)이 많이 나타나 있다.

본존불(本尊佛) 주위에 5구(五軀)의 협시상(脇侍像)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광배(光背)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좁은 공간 안에 여러 상(像)과 대좌(臺座), 천개(天蓋)들이 높은 돋을새김과 투각기법(透刻技法)으로 새겨져 있는데 원근법적(遠近法的)인 공간감(空間感)과 입체감(立體感)을 놀라울 정도로 잘 나타내었다.

왼쪽 불감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普賢菩薩), 오른쪽 불감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데 본존의 불감과 같은 수법이다. 이 문수·보현보살의 표현으로 보아 본존불의 석가불(釋迦佛)이 분명하므로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봉안(奉安)한 불감으로 크게 주목된다.

종 목 국보 43호 고려고종제서 (高麗高宗制書)

분 류 교서

수 량 1축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성보박물관

시 대 고려 고종

소유자 송광사

관리자 송광사

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제2세 진각국사 혜감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을 나타낸 홍, 황, 백색 등의 무늬가 있는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전체문장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아 귀중하다.

문화재명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이 제서(制書)는 능형화문(菱形花文)을 나타낸 홍(紅)·황(黃)·백(白) 등의 색능(色綾)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墨書)한 것인데, 그 내용은 고려(高麗) 고종(高宗)이 조계산(曹溪山) 제2세(第二世)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에게 대선사(大禪師)의 호(號)을 하사할 것을 제가(制可)하고, 최홍윤(崔洪胤) 이하 당시의 직사봉행(職事奉行)의 질(秩)을 열기(列記)하고 있으며, '정우 4년 5월 일(貞祐 四年 五月 日)'과 같이 그 시행년월(施行年月)을 명시하고 있다. 이 해는 바로 고종(高宗) 3년 병자(丙子)(1216)에 해당한다. 지금 그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여, 비단은 단락(斷落)되고 글자로 보이지 않는 것이 있어, 전문(全文)을 판독할 수 없음이 유감이나 고려(高麗)시대의 고문서로서 귀중한 것이다.

종 목 국보 44호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 (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분 류 석탑

수 량 3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

소유자 보림사

관리자 보림사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명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에 남북(南北)으로 대립(對立)하여 서 있는 2기(二基)의 삼층석탑(三層石塔) 사이에 아담한 석등(石燈) 1기(一基)가 배치(配置)되어 있다. 이 탑들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으로 석제상륜(石製相輪)까지 완전(完全)하게 갖추고 있는 희소(稀少)한 석탑(石塔)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놓여 있는 삼층석탑은 하층기단에 2탱주(撑柱), 상층기단에 1탱주를 간략하게 모각(模刻)하였고 상대갑석(上臺甲石) 윗면에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탑신(塔身)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주목(注目)되는 것은 양탑이 다 완전(完全)하며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 등 상륜부(相輪部)를 순서대로 나란히 갖추고 있어 신라(新羅) 말기(末期) 석탑연구(石塔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석등(石燈)은 탑과 더불어 전부재(全部材)를 완전(完全)히 갖춘 것으로서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을 취하고 있다. 방형(方形)의 넓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역시 방형의 대석과 8각(八角)의 기대석(基臺石)이 놓였다.

기대석은 연화하대석(蓮華下臺石)보다 크기가 작으며 각측면(各側面)에는 안상(眼象)이 장식(裝飾)되어 있다. 연화하대석은 8엽복판연화(八葉複瓣蓮華)로서 귀꽃을 갖추고 있으며 간주석(竿柱石)은 8각주(八角柱)로서 짧은 편이다. 상대석은 원형평면(圓形平面)으로 연판(蓮瓣)은 중판(重瓣)으로 판내(瓣內)에는 중엽(重葉)을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화창(火窓)을 구비하고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에는 아담한 귀꽃을 갖추고 있다. 정상(頂上)에는 중엽의 단판8엽연화문(單瓣八葉蓮華紋)을 장식하였고 그 위에 고복형(鼓腹形)의 상륜(相輪)과 보개(寶蓋)를 안치(安置)하고 최정상(最頂上)은 수연형(水烟形)의 보주(寶珠)로 끝막음하였다.

이들 석탑과 석등의 조성연대(造成年代)는 탑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에 의해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10년(870, 함통(咸通) 11년)을 전후한 것임이 밝혀져 석탑, 석등 연구에 기본이 되고 있다.

종 목 국보 45호 부석사소조여래좌상 (浮石寺塑造如來坐像)

분 류 소조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중기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명 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에 마련된 동향(東向) 불단 위에 안치된 거대한 불상으로,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이 불상은 소조상(塑造像)으로는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상으로, 나발(螺髮) 머리 위에는 육계(肉계)가 큼직하고, 얼굴이 풍만하다. 정안정시(正眼正視)의 미목(眉目)에는 위엄이 있고, 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高麗佛)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양쪽 귀는 긴 편이며, 잘록한 목에는 과장된 삼도(三道)가 보인다. 우견편단(右肩偏袒)한 법의(法衣)는 앞쪽에서 평판(平板)을 겹친 것 같이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두 무릎의 의문(衣文)은 평행선으로 각각 밖을 향하여 흘러내렸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미 도피안사주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鑄造毘盧舍那佛坐像)(국보 제63호)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상 뒤에는 목조(木造) 광배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원권(圓圈)으로 구별하고 각각 우아하고 화려한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고, 그 안에는 두광에 3체(體), 신광에 4체(體)의 심불(心佛)을 달았던 흔적이 있으며, 가장자리는 화염문(火焰文)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좌(臺座)는 앞면 너비 2.37m, 측면 너비 2m, 높이 1.05m의 흙과 돌을 섞은 수미단(須彌壇) 원형이 남아 있고, 바닥에는 주위에 신라시대의 녹유전(綠釉塼)이 깔려 있으나, 불상 무릎 아래에 후세의 첨가물인 목조불단이 가설되어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신라(新羅)시대 불상의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을 감출 수 없어, 시대적인 양식의 차를 보여 주고 있다. 온몸에 금빛이 찬연하고, 고려불(高麗佛)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특히 소상(塑像)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작품이다.

신라(新羅)시대의 조상(造像)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종 목 국보 46호 부석사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분 류 불화

수 량 6면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후기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명 부석사조사당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회화(繪畵)는 보존된 유적(遺蹟)이 매우 희귀해서 그 양상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힘든다.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벽화6면(祖師堂壁畵六面)은 이 건물(建物) 내진(內陳) 벽면(壁面)에 그렸던 건축당초(建築當初)의 작품으로서 확인되어 현재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건물창건연대(祖師堂建物創建年代)는 이 건물을 중수(重修)할 때 발견한 묵서명문(墨書銘文)에 따라서 서기 1377년으로 밝혀졌으므로 이 벽화의 제작연대(製作年代)도 이로써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국내에 유존(遺存)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를 비롯해서 예산수덕사대웅전벽화(禮山修德寺大雄殿壁畵)(1308년 건립(建立)) 개성수락암동고분벽화(開城水落巖洞古墳壁畵) 장단법당방고분벽화(長湍法堂坊古墳壁畵) 개풍군공민왕릉벽화(開풍郡恭愍王陵壁畵) 등의 유례(遺例)가 있으나 회화적(繪畵的)인 격조(格調)로 보나 그 보존상태(保存狀態)로 보나 유존(遺存)된 고려시대의 벽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이다. 이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는 천왕상(天王像) 각 1면(面)과 보살상(菩薩像) 2면(面)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그 내용을 조사당내진(祖師堂內陣) 원위치(原位置)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佛名未詳))(2)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3)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4)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5)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6) 보살상(菩薩像)(불명미상(佛名未詳))

이들 벽화(壁畵)는 토벽(土壁) 위에 프레스코로 그린 것이며 배경을 심록색계(深綠色系)로써 메꾼 뒤 홍(紅)·자(자)·녹(綠)·백(白)·다(茶)·금채(金彩) 등으로 상용(像容)을 농채(濃彩)한 것이다.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의 상용(像容)은 특히 힘찬 운동감을 나타낸 동적인 선으로 윤곽(輪廓)을 그렸고 그 안에 설채(設彩)를 해서 전반적인 인상은 매우 힘있는 율동감이 넘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보살상(兩菩薩像)은 보살상(菩薩像)이 지니는 정일감(靜溢感)을 잘 살려서 정적(靜的)이고도 유려(流麗)한 선(線)을 잘 구사(驅使)해서 고려조(高麗朝) 예술(藝術)이 지니는 아름다운 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건축(建築)이 황폐(荒廢)되었을 당시 우루(雨漏)로 오염(汚染)된 부분이 남아 있고 또 후세의 묵서(墨書) 낙서 등도 화면을 더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 그 채색(彩色)이 발견 당시보다 약간 퇴색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우려된다.

종 목 국보 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 쌍계사

시 대 통일신라 정강왕

소유자 쌍계사

관리자 쌍계사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그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거의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탑 전체가 많이 갈라지고 깨어져 있어 소중히 보존해야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문화재명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이 비는 신라 정강왕(定康王)(886∼887, 재위)이 신라말의 고승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774∼850)의 높은 도덕과 법력(法力)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로 고친 뒤에 건립한 것으로 최치원(崔致遠)(857∼?)에게 비문을 짓고 쓰도록 하였다.

대사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시호는 진감선사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애장왕(哀莊王) 5년(804)에 불도를 닦으러 당나라에 들어가 신감대사(神監大師) 밑에서 중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2년(810)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을 더 도를 닦았다. 흥덕왕(興德王) 5년(830)에 귀국하여 상주 모악산 장백사에서 선을 가르쳤다. 다시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대사는 범패(梵唄)에 능하여 그 많은 소리로서 또한 대중을 교화하였음은 유명하다.

종 목 국보 48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 (月精寺八角九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시 대 고려시대 초기

소유자 월정사

관리자 월정사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이 석탑은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 주로 유행했던 다각다층석탑(多角多層石塔)의 하나로 고려초기(高麗初期) 석탑을 대표하는 것이다. 팔각이중기단(八角二重基壇) 위에 팔각의 갑석(甲石)이 놓여 있는데 갑석 위에 조각(彫刻)한 복련(覆蓮)이나 기단 중석(中石)에 안상(眼象)을 새긴 점 등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인다.

이 위에 놓인 1층탑신(一層塔身) 받침 또한 고려 특유의 특징이며 탑신 각면의 감실(龕室)과 수평적인 옥개석(屋蓋石) 등도 마찬가지이다. 9층으로 된 탑신과 옥개석은 늘씬한 높이에 비해서 안정된 느낌을 주며 모서리의 반전(反轉)이나 탑신의 감실, 팔각의 다양한 변화 등은 이 탑의 고려불교문화(高麗佛敎文化)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 목 국보 49호 수덕사대웅전 (修德寺大雄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 수덕사

시 대 고려 충렬왕

소유자 수덕사

관리자 수덕사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문화재명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수덕사(修德寺)는 백제 법왕 원년(599) 지명법사(智明法師)에 의하여 창건되고, 대웅전은 그 이듬해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대웅전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墨書)에 의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져 고려시대의 연대가 확실한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맞배지붕에 주심포(柱心包) 형식을 한 이 건물은 주두(柱頭) 밑에 헛 첨차(첨遮)를 두고 주두와 소로(小累)는 굽받침이 있으며, 첨차 끝은 쇠서형(牛舌形)으로 아름답게 곡선을 두어 장식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측면에서 보아 도리(道里)와 도리 사이에 우미량(牛尾樑)을 연결하여 아름다운 가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물 중 특이하게 백제적 곡선을 보이는 목조건축이라 할 수 있다.

종 목 국보 50호 도갑사해탈문 (道岬寺解脫門)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도갑사

시 대 조선 성종

소유자 도갑사

관리자 도갑사

도갑사는 월출산에 있는 절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문화재명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도갑사해탈문은 해탈(解脫)의 모든 번뇌를 벗어 버린다는 뜻으로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1960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신미·수미(信眉·守眉) 두 스님의 발원으로 조선성종 4년(1473)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의 한칸씩은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안치하고 있으며 중앙의 한칸은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부석사 조사당(국보(國寶) 제19호)과 동일한 계통이나 특이한 점은 공포(공包) 부분이 다포계통(多包系統)의 형태로 되어 있어 주심포(柱心包)집이면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건물은 우리 나라에서 그 예가 많지 않은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종 목 국보 51호 강릉객사문 (江陵客舍門)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후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강릉시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사(官舍)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전(正殿)에 국왕의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유숙(留宿)하게 하였다. 강릉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 본부(本府) 객사로 총 83칸의 건물을 창건하고 임영관(臨瀛館)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15년(1366) 왕이 낙산사로 행차 도중 현액을 친필로 썼다고 전한다. 그후 수차례 중수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시 강릉공립보통학교(후에 강릉초등학교가 됨) 시설로 이용되었고 동교(同校)가 헐린 뒤에는 공지로 남게 되었다. 1967년 12월 여기에 강릉경찰서 청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 문만이 남게 되었다.

남산의 오성정(五星亭), 금산의 월화정(月花亭), 경포의 방해정(放海亭) 등은 객사의 일부였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이 문은 간결하고 소박하며 주심포계(柱心包系)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이다. 기둥의 배흘림은 현존해 있는 목조건축 유구(遺構) 중 가장 크고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곡을 이루고 굽받침을 두었으며 단장혀(短長舌)로 외목도리(外目道理)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쇠서(牛舌), 첨차(첨遮) 화반(花盤), 보(樑) 등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 목 국보 52호 해인사장경판전 (海印寺藏經板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4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 대 조선 성종

소유자 해인사

관리자 해인사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문화재명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

해인사 장경판전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불리우고, 이 건물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배치하였다.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며 동·서쪽에도 작은 규모의 동(東)·서판고(西板庫)가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部材)를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고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板架)의 진열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 세조 3년(1457) 확장·재건한 후 성종 19년(1488)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아 옛 모습을 남기고 있는데,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1964년 해체수리시 상량문(上樑文)과 광해군 어의(御衣)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종 목 국보 53호 연곡사동부도 (연谷寺東浮屠)

분 류 부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연곡사

관리자 연곡사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부도는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부도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부도는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부도 외에도 서부도(보물 제154호), 북부도(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부도는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명 연곡사동부도(연谷寺東浮屠)

통일신라시대에 속하는 부도 중 가장 형태가 우아하고 조식이 정교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기본형으로 삼고 방형(方形) 지대석 위에 8각 2단의 하대석을 얹었는데 운룡(雲龍)과 사자(獅子)로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 및 상대석의 윗부분에는 안상(眼象) 속에 8부신중(八部神衆)과 가릉빈가(伽陵頻迦), 사천왕상(四天王像) 및 문비(門扉) 등 갖가지 형태의 무늬를 조각하였다. 기단부가 높기는 하나 아직 안정된 비례를 잃지 않았고 각부의 조각수법 또한 정교하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부도라고 전하나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전체적인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종 목 국보 54호 연곡사북부도 (연谷寺北浮屠)

분 류 부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시 대 고려시대 초기

소유자 연곡사

관리자 연곡사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부도는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부도 외에도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 서부도(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부도는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부도를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부도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부도’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부도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부도는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부도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문화재명 연곡사북부도(연谷寺北浮屠)

연곡사에는 세 개의 부도가 남아 있는데 이 부도는 동부도와 더불어 규모와 형태 및 각부 조식에서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거의 동일한 것으로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방형(方形) 지대석 위에 운문(雲紋)이 조각된 8각 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문(蓮華紋)을 돌려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8각 탑신의 각면은 문비(門扉), 향로(香爐),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장식되었고 비교적 넓은 옥개석은 목조 건물의 양식을 따라 기왓골 등을 정성들여 모각(模刻)하는 등 각부의 조각이 화려 웅장한 느낌을 준다.

사역 내의 북쪽 고대에 건립된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승의 묘탑일 것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55호 법주사팔상전 (法住寺捌相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조선 인조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재명 법주사팔상전(法住寺捌相殿)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재건하였고, 최근(1968)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팔상전은 법주사의 오층목조 탑파건축(塔婆建築)으로, 1984년 4월 30일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삼층목조탑이 화재가 발생하여 없어지게됨으로써, 한국 목조탑(木造塔)의 유일한 실예(實例)가 된 중요한 건축물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5칸, 3·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상부에 상륜부(相輪部)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공포(공包)의 양식(樣式)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5층은 주간(柱間)에도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내부 중앙에는 찰주(擦柱)의 심초석이 있어 이 위에 심주(心柱)를 세웠고, 이의 네 귀에 우고주(隅高柱)를 세웠다. 1층의 변주(邊柱)와 우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는 2층의 변주를 세웠다. 이러한 가구법은 목조탑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높이는 기단부에서 상륜(相輪)까지 약 24m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에 제일 높은 것이다.

종 목 국보 56호 송광사국사전 (松廣寺國師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

시 대 조선시대 초기

소유자 송광사

관리자 송광사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문화재명 송광사국사전(松廣寺國師殿)

이 건물은 송광사의 3조사(三祖師)의 화상(畵像)을 모시기 위하여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창건하고, 그후 두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한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어 경내 하사당(下祠堂)과 함께 같은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의 특색은 정면을 4칸으로 한 것과 양 측면에 측고주(側高柱)를 세워 전면쪽을 퇴칸(退間)처럼 가구한 점이다.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으로 짜임새는 단순하나 세부수법에 장식적인 요소가 짙게 나타나 있다. 공포는 헛첨차(虛첨遮)로부터 전개되고 행공첨차(行工첨遮)와 통장혀(通長舌)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게 하였으며, 내부에서는 헛첨차와 살미(山彌)가 보아지가 되어 힘있게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현재 대들보 윗면에 우물천장을 전면 가설하였으나 그 위의 가구부재(架構部材)가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초에는 연등천장이었던 것 같다. 대들보 위의 가구는 동자주(童子柱)가 종보를 받게 하였다.

종 목 국보 57호 쌍봉사철감선사탑 (雙峰寺澈鑒禪師塔)

분 류 부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 쌍봉사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

소유자 쌍봉사

관리자 쌍봉사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

쌍봉사 경내의 북쪽에 있는 이 탑은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新羅)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이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한 최대의 걸작품으로 상·하 각부가 조화되어 있고 장중한 작풍(作風)을 느끼게 한다.

평면이 팔각형을 이루고 있음은 통식에 속하는 2단을 이룬 하대석(下臺石)에는 하단에 운문(雲紋), 상단에 사자(獅子)를 조각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塔身)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 비천상(飛天像) 등이 조각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은 기왓골을 조각하되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木造) 건축(建築)의 의장(意匠)까지 보이는 등 석조(石造) 건축물(建築物)로서는 물론 조각으로서도 극치를 보이고 있다. 건조연대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8년(868)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58호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분 류 철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후기

소유자 장곡사

관리자 장곡사

충청남도 청양군 칠갑산에 자리잡은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 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광배는 원래 돌로 되었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나무광배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 중심부에는 꽃무늬를,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신라말과 고려초에 유행하던 광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장곡사 상대웅전(上大雄殿 : 보물 제162호)에 봉안되어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철불좌상이다. 전체높이 232㎝, 불상높이 91㎝. 이 불상은 대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나, 균형잡힌 당당한 체구와 뚜렷하게 표현된 눈, 코, 입, 귀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이 얕은 윤기선으로 간략한 선묘를 나타내고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지만, 현재의 손 상태로 보아 후보(後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좌(臺座)는 불상보다 훨씬 뛰어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대좌는 하대가 넓고 크고 높은 반면에 중대·하대가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지대석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기둥자리가 있어서 이 상은 원래 목조불감(木造佛龕)안에 봉안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대는 1면에 안상 4개씩 새겨져 있고, 복련(覆蓮)의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이 양감있게 부조되었다. 중대는 세장(細長)하게 보이도록 안상이 두 개씩 새겨져 있다. 상대는 밑면 판안에 화형앙련(花形仰蓮)을 배치하였다. 앙련은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이지만 3중꽃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복련연꽃의 특징과 잘 조화되고 있다.

광배는 원래 석조광배였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조때 목조주형광배(木造舟形光背)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는 테두리에 불신(佛身)주위로 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고려초에 유행된 원형광배를 모방하여 조성한 듯 하다.

전체적으로는 특이한 양식에 아름답고 부드러운 조각 수법을 이 대좌는 양질의 순백석질로 더욱 돋보이는 걸작이다.

종 목 국보 59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원주시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고려 선종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는 높이가 4.55m이며 고려시대 석비로서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품으로 조각 또한 정묘하다. 귀부(龜跌)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龍頭化)된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다. 등에는 네모 구획 안에 따로 귀갑문(龜甲紋)을 새겼으며 다시 그 안에 ‘와(瓦)’자를 양각했다. 등의 중앙에는 간결한 복련(覆蓮)의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신의 바깥 둘레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며 양 측면에 쌍룡을 조각한 것도 특이하다. 이수(이首)는 모자를 쓴 듯한 형태이며 네 귀에 전각(轉角)이 뚜렷하고 귀꽃이 있다. 이수 중앙에 상륜부(相輪部)를 두어 보주(寶珠)를 얹었다.

지광국사(智光國師)는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났는데 속가명은 해린(海麟)이다.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역대 왕의 우대를 받았으며 삼중대사(三重大師), 승통(僧統)이 된 후 문종 12년(1058)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1070년 이곳 법천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글씨를 썼다.

종 목 국보 60호 청자사자유개향로 (靑磁獅子유蓋香爐)

분 류 청자

수 량 1점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뚜껑은 대좌에 앉아있는 사자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좌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사자의 자세는 뚜껑의 왼쪽에 치우쳐 있어 시각적인 변화에서 오는 조형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표현했다. 사자의 목 뒤쪽과 엉덩이 부분에는 소용돌이모양의 털이 표현되었고, 꼬리는 위로 치켜올려 등에 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유약의 색은 엷은 녹청색으로 광택이 은은하다. 구조적으로 보면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하여 벌려진 입으로 내뿜도록 되어있는데, 아름답고 단정하여 이 시기 청자향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특별히 사자향로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 사람들도 극찬을 하였던 훌륭한 작품이다.

문화재명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유蓋香爐)

12세기 전반기는 고려(高麗)의 청자가 유약의 발색(發色)과 태토(胎土)의 정선(精選) 및 번조(燔造) 등 기술에서 고도로 세련되어 이른바 비색순청자(翡色純靑磁)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청자는 유약에 거의 식은테가 없고 송인(宋人)들이 일컬었던 소위 천하제일이라는 비색유(翡色釉)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 또는 신수(神獸)를 상형(象形)한 상형자기(象形磁器)는 대개 이 시대에 유행하였으며 인종(仁宗) 원년(元年)에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사절단원으로 고려(高麗)에 왔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속에 이런 상형청자를 설명한 대목들이 보인다. 특히 그는 사자향로(獅子香爐)의 일례를 들어 '최정절(最精絶)'이라고까지 찬양하였다. 이 사자향로는 바로 이런 시대적 특색을 나타낸 가작으로 사자를 상형해서 앉힌 향로 뚜껑과 3개의 수면족(獸面足)으로 떠받친 화사(火舍)로 이루어져 있다. 향연(香煙)이 사자 몸체의 공동(空洞)을 통하여 사자의 반쯤 벌린 입으로 서리어 나오도록 구상되어 있다. 사자가 자리잡은 위치가 뚜껑 왼쪽에 치우쳐 있는 것은 시각적인 변화에서 오는 조형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유약은 청아(淸雅)한 담록청색(淡綠靑色)이며 유택(釉澤)은 비교적 은은한 편이고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표현했다. 화사(火舍)의 넓은 변죽과 뚜껑 둘레에는 산화문(散花文)을 띄엄띄엄 음각해 놓았다. 이 종류의 수면족(獸面足) 상형청자 향로의 바탕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 조사에서 매우 정교한 것이 발견되었다.

종 목 국보 61호 청자비룡형주자 (靑磁飛龍形注子)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다.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가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중앙부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다. 손잡이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기이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한 마리의 상상의 동물모습을 하고 있다. 비취빛의 유약색과 더불어 지느러미와 꽃무늬에 나타난 세밀한 음각 표현은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주전자는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중에서도 매우 기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화재명 청자비룡형주자(靑磁飛龍形注子)

용두어신(龍頭魚身)처럼 보이는 일종의 어양(魚樣)을 상형(象形)한 몸체에 연(蓮)줄기 모양의 손잡이를 단 주전자이다. 귓대부리는 어두(魚頭)를 형상화했고 꼬리부분은 주전자 뚜껑이며 날개 모양으로 된 2개의 큰 지느러미가 머리 밑에 달려 있다. 이런 어형(魚形)은 고래(古來)로 방화주(防火呪)의 상징인데 건물 용마루 끝에 장식하는 상상적인 치미(치尾)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형청자(象形靑磁) 중에서도 매우 기발한 구상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비취옥(翡翠玉) 빛의 유약과 정치(精緻)한 태토(胎土)가 잘 융합되어 유면(釉面)에 거의 식은테가 없다. 지느러미와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로 된 점과 선을 퇴화(堆花)했으며 이 밖에도 음각선으로 지느러미의 연골(軟骨)을 그리고 앙련좌(仰蓮座)의 표현은 양각으로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런 상형청자의 뛰어난 파편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 조사에서 발견된 예가 많다.

종 목 국보 62호 금산사미륵전 (金山寺彌勒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

시 대 조선 인조

소유자 금산사

관리자 금산사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명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된 대사찰로 신라 해공왕 2년(766)에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현 건물은 조선 인조 13년 수문대사가 재건한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용화전, 산호전, 장륜전이라고도 불리워진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으로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다. 제일 높은 기둥이 하나로 된 통나무가 아니고 몇 토막을 이어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이 특수한 가구방식(架構方式)은 목조탑파(木造塔婆)의 양식에서 번안(飜案)된 구조로 규모가 웅대하고 상부의 체감이 안정된 느낌을 준다.

종 목 국보 63호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분 류 철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

소유자 도피안사

관리자 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명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이 불좌상은 신체와 대좌(臺座)가 모두 철로 된 신라말(新羅末)의 보기 드문 불상이다. 뒷면에 새겨진 100여 자의 명문(銘文) 가운데 "함통(咸通) 6년(六年) 기유(己酉) 정월(正月)"의 문구가 있어서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5년(865)임을 알 수 있다.

살상투(肉계)의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점, 계란 모양의 단정한 얼굴, 이상적이며 생동하는 느낌이 사라진 극히 현실적인 체구 등에서 우리는 당시의 참선하고 있는 스님을 대하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받는다.

법의(法衣)에는 얇게 빚은 듯한 평행 옷주름이 전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명문(銘文)에 의하면 이 불상은 철원군(鐵原郡)의 거사(居士) 신도(信徒) 1,500여 명의 열렬한 신앙심에서 만든 것으로서, 당시의 활발했던 불교신앙(佛敎信仰) 결사(結社)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이와 함께 이 불상은 당시 유행하던 철조 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종 목 국보 64호 법주사석연지 (法住寺石蓮池)

분 류 석연지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하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문화재명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 중의 하나이다.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굄과 한층의 복련대(覆蓮臺)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竿石)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을 조식(彫飾)한 걸작품으로, 연지 표면에는 밑으로 소문(素文)의 연꽃잎을 돌렸고 그 윗부분에 웅대한 겹잎연꽃을 새겨 장식하였는데, 각 연꽃잎 안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이 새겨져 있다. 연지는 내부를 파서 물을 담게 되었고 구연(口緣) 바깥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의 밑은 네모난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의 구간(區間)에는 천인(天人), 보상화(寶相華)를 양각(陽刻)하였으며, 윗부분에는 동자주(童子柱)를 세우면서 원형 난간을 옆으로 받게 하였다. 현재 연지의 몸체는 크게 균열되어 쇠붙이로 연결시켜 놓았다. 전체적인 조형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石欄干) 동자주와 유사하다.

연지의 조법은 정교하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대표가 될 만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종 목 국보 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靑磁麒麟유蓋香爐)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는 20㎝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이 꿇어 앉아있는 모습을 한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윗부분이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고 짐승모양을 한 3개의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 몸통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었고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가 배치되었으며, 그 위에 뚜껑을 덮도록 하였다. 뚜껑 한복판에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기린이 조각되어 있고, 기린이 앉아있는 자리의 옆면에는 번개무늬가 돌아가며 음각되었다. 기린의 머리에는 뿔이 돋아있으나 부러져 있는 상태이고, 목뒤의 부분은 곱슬곱슬하게 표현하였다. 눈은 검은색 안료를 사용해 점을 찍었다. 구조상 향의 연기는 벌려진 기린의 입을 통하여 뿜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

비취색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향로 전체를 품위있게 감싸고 있다.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문화재명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유蓋香爐)

꿇어 앉은 기린(麒麟)을 상형(象形)한 향로로서, 사자향로(獅子香爐)(국보(國寶) 제60호)와 거의 같은 구상으로 의장되어 있다. 변죽이 넓은 향로 바탕을 3발의 수면족(獸面足)으로 떠받치고, 뚜껑 한복판에는 꿇어앉아 뒤를 돌아보는 기린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도식화(圖式化)된 길고 넓은 기린 꼬리는 등 위에 구부려 붙여서 뒤돌아보는 기린 머리와 대칭적인 조형효과를 노리고 있다. 기린 앞가슴에 도식적(圖式的)인 나모(螺毛)를 표현한 것은 단조로운 기린 앞가슴에 조형효과를 돋우어 준 것이며, 반쯤 벌린 애교있는 입으로 향연(香煙)을 뿜도록 되어 있다. 턱수염과 상대해서 머리 위에 돋아난 뿔 끝이 부러진 것밖에는 거의 손상이 없고, 유약에는 약간의 식은테(유영제(釉永製))가 나타나 있으나, 이 시대 비색(翡色)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향로 전체를 품위있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대륜(臺輪)으로 된 뚜껑의 기린(麒麟)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 그 자장자리에는 뇌문(雷文), 향로 바탕·바깥면에는 서운문(瑞雲文)이 각각 음각되어 있다.

이것과 거의 같은 양식의 기린향로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면족(獸面足)을 상형한 향로 바탕의 파편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에서 많이 출토된다.

종 목 국보 66호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靑磁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고려 전기의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0㎝, 밑지름 8.9㎝의 크기이다. 원래 정병은 불교에서 모든 악을 씻어 버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던 용기의 하나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서방(西方) 양식이었으나, 고려에 와서 가장 세련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으로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1쌍을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8각으로 기품있게 만들어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물을 넣는 아가리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는데, 원래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대체로 초기의 상감청자는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바탕 위에 상감무늬가 곁들여졌던 만큼 한층 더 장식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병 또한 이러한 초기 상감청자의 하나로 매우 정제되고 세련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고려청자(高麗靑磁)의 상감(象嵌)기법이 이미 12세기 전반기에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은, 문공유(文公裕) 묘지(墓誌)와 함께 석관(石棺)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화문완(靑磁象嵌寶相華文완)(의종(毅宗) 13년(1159))이나, 명종(明宗)의 지릉(智陵)에서 출토된 상감청자기류(象嵌靑磁器類)(1197년경) 등이 보여 주는 뛰어난 상감기법으로 보아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초기의 청자상감은 유약(釉藥)이나 태토(胎土)가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淸雅)한 비색(翡色)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 주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상감무늬가 곁들여졌던 만큼 한층 더 장식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병(淨甁)은 이러한 초기 상감청자의 하나이며, 이 작품이 보여 주는 정제(整齊)되고 세련된 양식은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국보(國寶) 제92호)과 흡사할 뿐더러, 상감도안의 내용도 비슷하다. 이렇게 닮은 것은, 상감기법의 창안(創案)에 끼친 이들 은입사동기(銀入絲銅器)의 영향을 보여 주는 좋은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러한 정병(淨甁)은 불교(佛敎)에서 비구(比丘)나 비구니(比丘尼)가 제악(諸惡)과 불선(不善)을 씻어 버리는 의식(儀式) 곧 포살회(布薩會)에 쓰이던 불구(佛具)로서, 중국(中國)을 거쳐 전해진 서래(西來)양식이었다. 그런데, 이 양식의 정병이 고려(高麗)에서 가장 세련미를 나타내, 청동금은상감(靑銅金銀象嵌) 또는 청자상감(靑磁象嵌) 등 가작이 남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며,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색(翡色) 유약 밑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연꽃 그리고 노니는 1쌍의 원앙새를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1그루씩 상감했고, 병 목의 가장자리에는 백상감(白象嵌)으로 여의두(如意頭)를 둘러 놓았다. 8각으로 된 기품있는 주구(注口)는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고, 주둥이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다. 이 주둥이로는 물을 붓고 긴 주구(注口)로 물을 따르게 되어 있는데, 원래 주둥이에는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종류의 상감청자 파편은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유천리(柳川里)와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에서 출토되고 있다.

종 목 국보 67호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조선 숙종

소유자 화엄사

관리자 화엄사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명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이 건물은 조선 숙종 28년(1702) 계파대사(桂波大師)가 중건한 중층의 대불전(大佛殿)으로 전내에는 삼여래(三如來)·사보살(四菩薩)을 모시고 있다. 원래 이 건물터에는 3층의 장육전(丈六殿)이 있었고 사방벽에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다.

현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며 내부가 통층(通層)으로 되어 웅장감을 준다.

종 목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靑磁象嵌雲鶴文梅甁)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고려 매병(梅甁)은 중국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아가리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문화재명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고려(高麗) 매병(梅甁) 양식의 원형은 원래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미 12세기경에는 고려적인 독특한 선으로 한국화(韓國化)되어,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런 고려(高麗) 매병의 양식은 바로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 고려식(高麗式) 매병의 본보기를 보는 느낌이다.

넓고 부드러운 어깨에 비해 조그마한 주둥이가 기품있게 마감되었으며, 헌칠하고 매끄러운 하반신의 유선(流線)도 너그러이 자리잡혀 있다. 주둥이 가장자리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백상감(白象嵌)했고, 굽에는 흑백상감(黑白象嵌) 병행선으로 그린 연판문대(蓮瓣文帶)를 둘렀다. 어깨에서 굽에 이르는 몸체에는 6단으로 나누어 흑백 쌍선으로 상감한 동심원문을 어긋나게 배치해 놓았다. 이 원문(圓文) 속에 상감한 각각 1마리씩의 운학(雲鶴)은 모두 위를 향해 날고 있으며, 이 원문 밖의 여지에 상감한 학들은 모두 땅을 향해 날도록 잘 정리된 표현을 하고 있다. 병 전체에는 광택있는 회청색의 맑은 유약이 고르게 씌워져 있고, 성긴 식은테가 몸체를 감싸고 있다.

호사스러움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고려(高麗) 상감청자 매병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종 목 국보 69호 개국원종공신록권 (開國原從功臣錄券)

분 류 교서

수 량 1축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부산 서구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 태조

소유자 동아대학교

관리자 동아대학교

조선 태조 6년(1397) 10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왕의 명령을 받아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린 문서로, 공신임을 입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가로 140㎝, 세로 30.5㎝이며, 원래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심씨 집안에서 물려 내려오던 것이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제도는 조선시대에 개국공신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새로운 포상제도로,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봉해졌다. 심지백이 녹권을 받을 때에도 74명이 함께 받았는데, 이때 그들에게 내린 포상으로는 각기 밭 15결(結)을 내렸고, 각 공신의 부모와 처에게는 땅을 주고 벼슬을 내렸으며,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실록에도 빠져있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문서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의 문서로 이두문(吏讀文)이 많이 사용되어 그 문체와 내용이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며, 목활자를 이용하여 찍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성이 엿보인다. 또한 조선 전기의 목활자 인쇄물로서 상태가 완전하고 남한에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문서가 으뜸으로 손꼽혀지는데, 두루마리로 되어있는 점에서도 조선 전기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글자배열이 고르지 않는 등 인쇄가 정교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목활자 인쇄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활자 역사상 매우 귀중한 인쇄자료가 된다.

문화재명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

이 녹권(錄券)은 홍무(洪武) 30년, 곧 조선(朝鮮) 태조(太祖) 6년(1397) 10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사재부령(司宰副令)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린 것이다.

심지백(沈之伯)은 홍무(洪武) 28년 11월에 전 황주(黃州) 목사(牧使) 최계용(崔系溶) 등 수십 명과 더불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열(列)하였으며, 홍무(洪武) 30년 9월 11일에 왕지(王旨)에 의하여 이 녹권(錄券)을 사급(賜給)하여, 대장군(大將軍) 이화영(李和英)의 예(例)에 따라서 포상(褒賞)의 전(典)을 사(賜)한 것이다. 이 사실은 실록(實錄)에도 누락되어 소전(所傳)이 없으나, 이 녹권(錄券)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졌다.

심지백(沈之伯)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확실치 않으나, 아마 함경도(咸鏡道) 사람으로 일찍이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공을 세웠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 녹권(錄券)에 심지백(沈之伯)의 본관(本貫)을 청송(靑松)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후에 개찬(改竄)한 자취가 보인다.

이것은 조선(朝鮮) 초기의 고문서(古文書)로서 이두문(吏讀文)이 많이 사용되어 그 문제와 내용이 귀중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목활자(木活字)를 사용하여 인출(印出)해 낸 점에 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새로운 왕조(王朝)를 수립하자 관제를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고려(高麗)의 구제(舊制)를 답습하였다. 따라서 경적인출(經籍印出)의 일을 관장하는 관아(官衙)의 직제에 있어서도 여말(麗末) 서적원(書籍院)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주자인쇄(鑄字印刷)의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도 그대로 두게 하였다. 그러나 신왕조(新王朝)의 기반이 아직 잡히지 않아 태종(太宗) 3년(1403)에 계미동활자(癸未銅活字)를 주조해 내기까지에는 목활자(木活字)와 목판(木板)으로 긴요한 것을 우선 찍어서 수요를 충당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서는 태조(太祖) 4년(1395)에 서적원(書籍院)에서 백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만든 목활자(木活字)로 인출반행(印出頒行)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100여 권이 있으나 실물이 전하지 않고, 태조(太祖) 6년(1397)에 인출반사(印出頒賜)한 이 녹권(錄券)만이 겨우 하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자체(字體)가 균정(均整)하지 못하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배자(排字)가 고르지 못하고, 도각(刀刻)도 조촐한 편으로 목리(木理)가 보이나, 연대적으로 가장 오랜 목활자본(木活字本) 실물이라는 점에서 한국(韓國) 활자사상(活字史上) 매우 귀중한 인쇄자료(印刷資料)가 된다. 주자인쇄술(鑄字印刷術)이 발달된 이후의 조선(朝鮮) 공신록권(功臣錄券)은 활인방책(活印方冊)으로 만드는 것이 상례이나, 이것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한 조선(朝鮮) 초기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종 목 국보 70호 훈민정음 (訓民正音)

분 류 목판본류

수 량 1책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조선 세종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문화재명 훈민정음(訓民正音)

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현존하는 유일한 판각(板刻) 원본이다.

내용은 총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을 4장 7면에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26장 51면 3행에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을 3장 6면에 1자 내려 싣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을 명시하고 있다. 그 해가 바로 세종(世宗) 28년(1446)에 해당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에 친제(親製)하여 동 28년 9월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本書)에서 서문과 함께 역시 정인지(鄭麟趾)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解例)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것에 의하여 한글 제작의 원리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의 자양(字樣)에 있어서도 제정 당초의 모습을 본서(本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종 목 국보 71호 동국정운<권1,6> (東國正韻<卷一,六>)

분 류 금속활자

수 량 2책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조선 세종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문화재명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

이 책은 세종(世宗)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이 하명되었는데, 그것이 다음해 30년(1448) 11월에 제도(諸道) 성균관(成均館)·사부학당(四部學堂) 등에 비로소 반사(頒賜)되었으니, 그 사이에 그 간행이 시필(始畢)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성우(全晟雨) 씨 소장본은 전 6권 중 제1권과 제6권의 2책에 지나지 않으나, 권수(卷首)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날인(捺印)되고 표지의 제첨(題簽)도 본래의 것으로 원형을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본문대자(本文大字)는 목활자(木活字)이나 소자(小字)와 서문의 대자(大字)는 갑인자(甲寅字)이다. 자체(字體)는 본문 대자(大字)가 진양대군(晉陽大君)의 글씨이다. 그리고 한글 활자의 자체(字體)는 국보(國寶) 제70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판(原板)의 것과 같은데, 한글 제정 당시의 원래의 자양(字樣)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세종(世宗)이 명(明)의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하여, 한국(韓國)의 한자음(漢字音)을 바로잡기 위하여 편찬한 것인데, 세종(世宗)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제정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 정음(正音)의 창제원리(創制原理) 및 배경의 연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세종(世宗)이 의도했던 한자음(漢字音) 개신(改新)의 총체계(總體系)를 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고,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漢字音)을 적용시킨 국역서(國譯書)에서 제기되는 어학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

종 목 국보 72호 금동계미명삼존불 (金銅癸未銘三尊佛)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커다란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중앙에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보살을 배치하고 있는 삼존불(三尊佛)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불상 전체 크기에 비해 크고 높게 표현되었다. 미소를 띤 갸름한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으며, 어깨와 가슴은 약간 좁은 듯 하지만 둥글고 강인하게 처리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정면으로 V자형 옷주름이 있으며, 좌우로는 새의 깃같은 옷자락이 뻗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 2개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양 옆에 배치한 협시보살은 광배의 끝에 매달리듯 표현하였으며, 세가닥으로 올라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신체 표현은 본존불과 비슷하지만, 앞면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옷주름과 손모양이 다르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가는 선으로 장식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본존 주위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도드라지게 새기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쿨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바닥이 밖으로 퍼진 원통형이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의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에 의해 백제 위덕왕 10년(56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명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일광삼존(一光三尊)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광배(光背)·대좌(臺座) 모두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며, 도금(鍍金)도 광배 뒷면이 조금 벗겨져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이 원상태로 남아 있다.

본존(本尊)은 소발(素髮)에 육계(肉계)는 원구(圓球)에 가까울 정도로 우뚝하다. 얼굴은 갸름한데 약간 앞으로 수그리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두꺼운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인데, 앞면에서 V자형이 되풀이되었고, 옷자락은 좌우로 넓게 벌어졌다. 두 손은 통인(通印)인데, 왼손의 작은 손가락 둘을 꼬부리고 있다.

광배(光背)는 거신광(擧身光)으로, 본존(本尊) 주위에는 두광(頭光)·신광(身光)을 양주(陽鑄)하였고, 그 안에 연화(蓮華)·당초(唐草)·인동문(忍冬文) 등이 장식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화염문(火焰文)이 세각(細刻)되었고, 본존(本尊) 좌우로는 협시보살(脇侍菩薩)이 배치되어 있는데, 큼직한 연화대(蓮華臺) 위에 꼿꼿이 서서 모두 삼면관(三面冠)을 썼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법의(法衣)는 두껍고 본존(本尊)과 같이 좌우로 넓게 벌어졌으며, 천의(天衣)는 앞면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좌대(座臺)는 바닥이 밖으로 퍼진 원통형(圓筒形)인데, 위에는 3겹의 연판(蓮瓣)이 주출(鑄出)되어 있다. 연판(蓮瓣)은 맨 위에만 복판(複瓣)으로 표현하고, 판(瓣) 주위로 원권(圓圈)을 한 줄 찍어 놓았는데, 이런 수법은 본존(本尊) 두광과 신광에도 나타나 있다.

이 불상은 신묘명삼존불(辛卯銘三尊佛)(국보(國寶) 제85호)의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중국(中國)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조상(造像)양식을 따르고 있다.

광배 뒷면에 '계미년십일월일일 보화위망부조 인조(癸未年十一月一日 寶華爲亡父趙 人造)'라는 조상기(造像記)가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계미년(癸未年)은 조상(造像)양식으로 보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0년(북제(北齊) 하청(河淸) 2년, 563)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 목 국보 73호 금동삼존불감 (金銅三尊佛龕)

분 류 금동불

수 량 1좌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초기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고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작품은 높이 18㎝의 작은 불감으로, 청동으로 불감과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칠을 하였다. 불감 내부를 살펴보면 난간을 두른 사각형의 기단 위에 본존불과 양 옆에 보살상이 있으며, 그 위에 기둥과 지붕으로 된 뚜껑이 덮혀 있다. 법당 모양의 뚜껑에는 앞면과 양쪽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안에 모셔진 불상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본존불은 얼굴이 세련되지 못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을 간략한 선으로 표현했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나누어져 있으며, 불꽃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본존불 양 옆의 보살상도 구슬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형식이나 표현 수법이 본존불과 같다.

불감은 지금도 금색이 찬란하고 지붕에 녹청색이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본존불의 긴 허리,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옷주름, 그리고 보살이 쓰고 있는 구슬로 장식한 관(冠) 등 여러 양식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중국 북방 계통의 영향을 받은 11∼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명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불감(佛龕)이란 원래 호지불(護持佛)을 봉안하기 위하여 불당건축을 작게 모작(模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감은 여기에 봉안된 불상과 아울러 공예와 조각 양면으로 조형미를 고찰하는 대상이 된다.

이 불감 역시 신라(新羅) 말 고려(高麗) 초의 한국(韓國) 목조건축물의 구조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된다. 이 불당형(佛堂形)이 보여 주는 건축 각부 양식의 고격(古格), 특히 옥개(屋蓋)부분은 고려(高麗) 초 이전 신라(新羅) 불당건축의 양식을 전해 주는 것일 가능성이 짙은 매우 귀중한 유물(遺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형(建築形) 뚜껑을 벗겨 놓고 보면, 수미단(須彌壇) 모양으로 된 건축 기단부의 간결하고 오랜 양식이라든가, 단간(單間) 주심포(柱心包)집 모양이면서 앞뒤 양면 중앙에 공간포(空間包) 하나씩을 나타낸 포작구조(包作構造) 등도 주목되는 양식이다. 기둥에는 엔터시스가 있는데다가 우진각지붕이라는 점, 용마루 양쪽 끝에는 오대(五代) 북송풍(北宋風)의 망새(치미(치尾))가 뚜렷하고, 네 귀마루 위에는 각기 봉두(棒頭) 모양의 대소 장식 2개씩이 붙어 있는 점 등은 한층 더 고격(古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감(龕)의 두 측면과 정면에는 넓은 개창(開窓)이 있어서 감 안의 삼존불(三尊佛)이 잘 보이도록 되어 있으며, 네 처마귀에는 풍탁(風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남아 있다.

감 안에 안치된 삼존불(三尊佛)은 중앙에 여래좌상(如來坐像), 양쪽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시위해 있는데, 조각의 기법으로 보나 얼굴의 표현으로 보나 치기(稚氣)가 있어서 세련된 작풍(作風)을 나타낸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본존여래불(本尊如來佛)은, 장곡사(長谷寺) 상대웅전(上大雄殿) 석조불좌(石造佛座)(국보(國寶) 제58호)를 연상시키는 고격(古格)있는 4각형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했으며, 오른손은 들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무릎을 짚은 촉지인(觸地印)을 나타내고 있다. 통견(通肩) 법의(法衣)는 간략한 선각(線刻)으로 표현했고, 불상에 붙여서 주조(鑄造)된 앙련좌대(仰蓮座臺) 앞면으로는 법의(法衣)자락이 약간 늘어져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인데 백호(白毫)는 없고, 타출문(打出文)으로 된 전신광배(全身光背)를 등지고 있다.

두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모두 권점문(圈點文)으로 장식된 삼산형(三山形)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본존불(本尊佛)과 비슷한 타출문(打出文) 광배를 다 같이 갖추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오른손을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왼팔을 약간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나,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있다. 이 두 협시(脇侍)의 보발(寶髮)은 양 어깨 위까지 드리워져 있고, 치마는 좁고 길게 내려와 발등 위에 이르렀으며, 천의(天衣)는 겨우 무릎 근처까지 내려와 있다. 이들 보살(菩薩)의 장엄구(莊嚴具)나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엉성하다. 이 삼존불(三尊佛)은 모두 장방현 동판(銅版) 위에 못으로 고정시킨 것을, 다시 기단 위에 뚫어진 장방형 구멍을 막아서 못으로 고정시켰는데, 치기(稚氣)있는 이들 삼존불(三尊佛)의 조각수법은 불감 자체가 지닌 정제(整齊)되고 또 고격(古格)있는 양식과는 대조적이어서, 양자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 준다. 불감은 아직도 도금색(鍍金色)이 찬란하며, 지붕에는 녹청색(綠靑色)의 칠이 남아 있고,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매우 좋다.

종 목 국보 74호 청자압형수적 (靑磁鴨形水滴)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전성우

관리자 전성우

오리 모양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청자 연적으로 높이 8㎝, 너비 12.5㎝의 크기이다.

물위에 뜬 오리가 연꽃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오리의 등 가운데 붙어있는 연잎에는 안으로 뚫은 구멍이 있어 물을 넣도록 되어있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고 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데, 이 부리가 연줄기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연적은 오리의 깃털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맞은 크기와 세련된 조각기법, 그리고 비색(翡色)의 은은함을 통해 고려 귀족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문화재명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비색(翡色) 상형청자기(象形靑磁器) 중에서도 뛰어나게 정교한 작품의 하나이다.

물 위에 뜬 오리가 연줄기를 꼬아 입에 물고 있는데, 이 연줄기에 달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여 조화시켰다. 오리의 등 한복판에 붙어 있는 연잎에는 안으로 뚫린 구멍이 있어 물을 넣도록 되어 있고, 반쯤 핀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게 되어 있다. 물 따르는 구멍은 오리 주둥이 오른쪽에 붙어 있는데, 이 구멍이 연줄기 끝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하게 짐작할 수 없다. 이 연적(硯滴) 전체는 거의 정확한 사실적 기법으로 깃털까지 세밀하게 음각되어 있다. 식은테가 없는 담록색의 맑은 유약(釉藥)이 전체에 고르게 씌워져 있다. 이 오리의 알맞은 크기, 세련된 조각기법, 적절한 비례 등으로 보아, 고려(高麗) 중류사회의 세련된 문방취미(文房趣味)를 엿볼 수 있다.

원래 이 연적은 일본(日本) 동경(東京)에 와 살고 있던 영국인 존 개스비의 소장품이었으나, 그가 늙어 귀국함에 앞서 수많은 고려자기(高麗磁器) 수집품과 함께 현 소장자에게 넘겨 준 것이다.

유약과 태토(胎土)의 질(質)이나 세련된 상형기법으로 보아, 12세기 전반기에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가마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종 목 국보 75호 표충사청동함은향완 (表忠寺靑銅含銀香완)

분 류 불구류

수 량 1점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31-2 표충사

시 대 고려 명종

소유자 표충사

관리자 표충사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화재명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완)

동제(銅製)의 향로에 도문(圖文)을 음각(陰刻)한 홈 속에 은사(銀絲)를 메꾸어 넣어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技術)이 매우 세련된 향로이다. 이 향완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전성하기 시작한 은입사장식의 불교예술품 중 하나로, 그 시대의 이러한 작품의 대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향로의 화사(火舍) 둘레 이면(裏面)에는 57자의 은입사한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시대와 유래 등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명문에 나타난 대정(大定) 17년(十七年)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7년(1177)에 해당한다. 또한 명문 속에 나타나는 호칭(呼稱)을 그대로 살려서 이 향로의 지정명칭도 '함은향완'이라고 붙였다. 명문에서 함은(含銀)이라 한 것은 은입사(銀入絲)란 뜻으로 쓴 것이다. 은입사라는 호칭은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은상감(銀象嵌)이라는 술어와 같은 말이다. 향완의 상연부(上緣部)의 넓은 변죽에는 6자의 범자문(梵字文)을 등분(等分)된 간격에 한 자씩 상감하고, 그 사이에는 서운문(瑞雲紋)을 같은 수법으로 장식하고 있다. 화사(火舍)의 바깥면에는 한 면에 한 개씩의 동심원(同心圓) 속에 한 자씩의 범자문을, 높은 굽다리의 둘레에는 한 마리의 용(龍)을 정교하게 상감하였으며, 화사의 아랫도리에는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을 그리고, 굽다리의 윗부분 이음새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을 각기 장식하여 크게 번거롭지 않은 제한된 의장효과(意匠效果)와 대조적인 문양장식을 나타내고 있다.

향완의 제작연대는 명문에 나타났듯이 12세기때로서 현재 국내에서 알려진 최고(最古)의 작품이며, 일본(日本) 법륭사(法隆寺)에 가 있는 금산사(金山寺) 향로보다 1년 앞서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고려시대의 귀중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종 목 국보 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분 류 원고본

수 량 합 9책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시 대 조선 선조

소유자 최순선

관리자 현충사관리소

이 책은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이순신(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이다.

이순신은 28살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불행하게도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뒤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벼슬을 시작했다.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詩)를 짓는데도 특출하였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극한 충성심과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일기의 구성을 보면 제1권은『임진일기』로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선조 26년(1593) 3월까지 27매, 제2권은『계사일기』로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제3권은『갑오일기』로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52매, 제4권은『병신일기』로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제5권은『정유일기』로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제6권은『정유일기속』으로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선조 31년(1598) 1월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다. 제7권은『무술일기』로 선조 31년(1592)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로 구성되어 있다.

7년의 난 동안 이순신의 피와 눈물이 헤아릴 수 없이 배인 것이며,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충무공(忠武公)(1545∼1598)께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중에서 육필로 집필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으로 나뉜다. 첫째;임진일기(壬辰日記)는 선조(宣祖) 25년(1593) 5월 1일부터 동왕 26년(1593) 3월까지 27매. 둘째;계사일기(癸巳日記)는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셋째;갑오일기(甲午日記)는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52매. 넷째;병신일기(丙申日記)는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다섯째;정유일기(丁酉日記)는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여섯째;정유일기속(丁酉日記續)은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동왕 31년(1598) 1월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 중복된 부분이 있다. 일곱째;무술일기(戊戌日記)는 선조 31년(1598)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이다.

이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에 시작하여 중간에 비록 약간의 건너뜀이나 중복이 있느나 장군께서 전사한 전달까지의 기록으로 뒷날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이다.

특히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狀啓)의 초안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연구에 결정적 사료로 높이 평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종 목 국보 77호 의성탑리오층석탑 (義城塔里五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1383-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의성군

탑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낮은 1 단(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구성한 이 탑은 특히 제1층 탑신에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수법을 따라 배흘림이 있는 네모기둥을 세우고 남면(南面)에 감실(龕室)을 두었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의 형태를 본떠서 조각하였다. 각층 옥개석(屋蓋石)은 전탑(塼塔)의 구조를 본떠 아래 윗면을 모두 층급형으로 단을 지어 조성하였으며 맨 윗부분에 장식되었던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장중한 아름다움과 함께 전탑의 양식을 따르면서 일부 목조건물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 특이한 구조의 이 석탑은 경주(慶州)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에 다음 가는 오래된 석탑으로 한국(韓國) 석탑양식(石塔樣式)의 발전(發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종 목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金銅彌勒菩薩半跏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문화재명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한국(韓國)에서는 삼국기(三國期)에 반가사유(半跏思惟) 형식의 불상이 유행하였는데, 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된 반가상(半跏像)(국보(國寶) 제83호)과 더불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한 가운데에 눈꼬리는 길고 위로 약간 들린 봉안(鳳眼)이며, 입가의 미소는 신비스러운 인상을 준다. 머리에는 복잡한 보관(寶冠)을 썼고, 여기서 내려오는 두 가닥의 수식(垂飾)이 보발(寶髮)과 함께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앞에는 짧은 장식이 있고, 두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는 날개 모양 옆으로 퍼졌으며, 그 가닥은 앞면으로 늘어져 무릎 위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어 있다.

상반신은 나형(裸形)으로, 가는 허리에서 신라(新羅) 불상의 기본형을 볼 수 있다. 두 손에는 팔찌를 끼었고, 왼손은 오른쪽 발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가락을 볼에 대어 사유(思惟)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하반신에 걸친 상의(裳衣)는 배 앞에서 매듭을 지었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도식화된 옷자락 무늬를 선각(線刻)으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에는 한 가닥의 끈이 드리워져 있다. 왼발은 밑으로 내려서 작은 단판(單瓣) 연화좌(蓮華座)를 특징적으로 밟고 있다. 이 반가상(半跏像)에는 원래 광배(光背)가 있었던 모양으로, 뒷머리 부분에 그 흔적이 있다. 균제(均齊)된 자세, 명상에 잠긴 오묘한 존용(尊容), 아름다운 의문(衣文)의 각선(刻線) 등 이를 따를 만한 작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동반가상(金銅半跏像)으로 이만한 대작(大作)은 찾을 수 없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에 의하여 촬영한 결과 재질(材質)이나 제작수법이 특이하고, 주조(鑄造)기술 또한 고도로 발달되었으며, 내부의 결함이나 보수(補修)의 흔적이 없이 보존이 비교적 잘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1912년 일인(日人) 연토정조(淵土貞助)가 입수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기증하였던 것을, 1916년 총독부 박물관 창설 때 이관(移管)된 전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밖의 관계지견(關係知見)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종 목 국보 79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 (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초기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 안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속옷이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명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높직한 연화좌대(蓮華座臺)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광배(光背)도 완전하게 남아 있는 금제불상(金製佛像)이다.

원형의 복판(複瓣) 복련(伏蓮) 위에 원절형(圓節形)의 중대(中臺)를 사이에 두고 중판(重瓣)으로 된 원형 상대(上臺) 위에 안치되어 있다. 큼직한 육계(肉계)가 있는 소발(素髮)의 얼굴은 풍만하며, 두 눈은 정안(正眼)이고, 입가에는 매우 희미하게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오른손은 들어서 손바닥을 보이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있다. 가슴을 드러낸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비교적 얇고 앞면에서 반원의 옷주름이 여러 겹 나타나 있다. 이 의문(衣文)은 무릎을 거쳐 밑으로 흘러내리게 하여 상현좌(裳懸座)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좌우대칭의 수법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연결된 판금(板金)으로, 두광에는 연화(蓮華)를 중심으로 인동당초(忍冬唐草)와 그 가장자리에 화염문(火焰文)이 투각(透刻)되어 있고, 신광은 찍어낸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주위에 다시 인동당초와 화염문을 투각해 놓았다.

이 불상은 불신(佛身)과 대좌·광배가 분리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상현(裳懸) 습벽(襲벽) 뒤에 돌기(突起)를 마련하여 대좌에 고정되도록 되어 있다. 불신·광배·대좌에 금빛이 찬란하나, 대좌만은 금의 함량이 적은지 동녹(銅녹)이 나타나 있다. 이 불상은 금제여래입상(金製如來立像)(국보(國寶) 제80호)과 함께 1934년 경주시(慶州市) 구황리(九黃里) 삼층석탑(三層石塔)(국보(國寶) 제80호)에서 발견된 것으로, 불상을 장치(藏置)하였던 사리함(舍利函)에 기명(記銘)이 있어 신룡(神龍) 2년(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년, 706)에 납치(納置)한 사실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연대 추정에 시사(示唆)를 주고 있다.

그러나 명기(銘記)에는 1구(軀)를 격납(格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발견된 것은 2구(軀)여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시에 발견된 입상에 비하면 이 불상의 조성연대가 떨어지는 것 같다.

종 목 국보 80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 (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초기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함께 경주구황리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두 볼에는 살이 올라 있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문화재명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갖추어져 있는 금제불상(金製佛像)이다.

복판(複瓣)의 얕은 복련좌(伏蓮座) 위에 꼿꼿이 선 상으로, 머리가 소발(素髮)에 육계(肉계)는 높지 않으나 큼직하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두 볼에 살이 올라 있고, 눈은 정시(正視)인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법의(法衣)자락을 잡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두꺼운데 앞면에서 U자형으로 주름이 나 있고, 좌우로 약간 퍼져서 고식(古式)을 지니고 있다. 광배는 원형을 중심으로 화염(火焰)에 둘러싸인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으로서, 작은 원권(圓圈)안의 연화(蓮華)를 중심으로 광망(光芒)이 방사(放射)하는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화염문(火焰文)을 투각(透刻)하여 세공(細工)을 다하고 있다. 연화대좌(蓮華臺座)에 푸른 녹이 있을 뿐 광배와 온몸에는 금빛이 찬란하다. 일부에서 고조(古調)를 띠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의 전이(轉移)를 알아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금제여래좌상(金製如來坐像)(국보(國寶) 제79호)과 함께 1934년 경주시(慶州市) 구황리삼층석탑(九黃里三層石塔)(국보(國寶) 제37호)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들 불상과 함께 장치(藏置)되었던 사리함(舍利函)에는 다음과 같은 명기(銘記)가 있어 연대 추정에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명기(명기)의 신룡(神龍) 2년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년(706)이다. 신룡이년병오오월삼십일 금주대왕불사리사전금미타상육촌일구무구정광대다라니경일권안치석탑제이층이상(神龍二年丙午五月三十日 今主大王佛舍利四全金彌陀像六寸一軀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安置石塔第二層以上)

종 목 국보 81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분 류 석불(동산)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성덕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다음 해인 720년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 하나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舟) 모양이며,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보살상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불신(佛身)을 제외하고는 동사(同寺) 아미타불입상(阿彌陀佛立像)(국보(國寶) 제82호)과 비슷한 형태로, 불신(佛身)·광배(光背)·좌대(座臺)를 한 돌로 만들었다.

불신은 석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조법(彫法)을 보이며, 특히 풍만한 지체(肢體)는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되어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다. 머리에는 보발(寶髮)이 높직하고,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으며, 보발은 두 어깨로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볼이 풍부하고 또 원만하다. 상반신은 나형(裸形)인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앞가슴에는 목에서부터 영락(瓔珞)의 목걸이가 걸쳐져 있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 놓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보이는데, 손목에는 천의(天衣)가 감겨 있다. 법의(法衣)는 얇은데 상의(裳衣)는 위끝이 밖으로 젖혀져서 주름이 나타나고, 아랫몸에서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발목으로 내려왔는데, 왼쪽 허리에서 한 줄의 영락(瓔珞)이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어 인상적이다.

좌대는 8각인데, 각면(各面)에 안상(眼象)이 1좌(座)씩 있고, 그 위에 판(瓣) 안에 화형(花形)을 넣은 복련(伏蓮)과, 같은 형식의 앙련(仰蓮)이 마련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구분되는 위치에서 바깥 둘레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불신을 싸고 3줄의 등행선(等行線)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며, 가장자리에는 고식(古式)을 풍기는 화염문(火焰文)이 조각되어 있다.

세련된 조법(彫法)으로 이루어진 표현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광배 뒷면에는 장문(長文)의 명기(銘記)가 있어 조상(造像)의 유래와 연대가 명시(明示)되어 있는 점이 중요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 상(像)은 당(唐) 개원(開元) 7년 곧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19년(720)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보살상(菩薩像)은 아미타불입상(阿彌陀佛立像)(국보(國寶) 제82호)과 더불어 원위치인 감산사지(甘山寺址)에서 1915년에 현위치로 옮겨졌다.

종 목 국보 82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 (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분 류 석불(동산)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후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불상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으로 지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별하고 있으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 아니라, 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명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8각 대좌(臺座)와 거신광배(擧身光背)를 한 돌로 조성한 상인데, 불신(佛身)은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다.

보발(寶髮)은 나발(螺髮)인데 육계(肉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단엄(端嚴)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두 어깨에 걸쳐 윗몸에서는 반원을 그리다가 아랫몸에 이르러 두 다리에 따로 타원을 그린다. 옷주름이 드리워져 있어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심타원형(同心楕圓形) 의문(衣文)의 선구(先驅)를 이루고 있다. 법의(法衣)의 왼쪽과 아래끝에서 약간의 습벽(褶벽)을 나타내어 고태(古態)를 보여 주고 있으며,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려 설법인(說法印)을 결(結)하고 있다.

좌대 각면에는 안상(眼象) 1좌(座)를 새기고, 위에는 복판(複瓣) 연화(蓮華)를 큼직하게 조각하였으며, 다시 간략하고 큼직한 단판(單瓣) 연화의 앙련좌(仰蓮座)를 두는 등 고식(古式)이 엿보인다.

거신(擧身)의 후광(後光)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2줄의 양선(陽線)으로 구분하며, 신광부(身光部)에는 그 사이에 화형(花形)을 조각하고 가장자리에 화염문(火焰文)을 돌려 놓았다.

광배(光背) 뒷면에는 명각(銘刻)이 있어 조상(造像) 연대와 유래를 알 수 있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 상은 원위치에서 1915년 현위치로 옮겨 놓았는데, 동(同) 사지(寺址)에는 아름다운 삼층석탑(三層石塔)과 석등(石燈) 대석(臺石) 및 건물 기단지(基壇址)가 남아 있다.

종 목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金銅彌勒菩薩半跏像)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밟고 있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는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며, 연꽃무늬 대좌를 덮은 옷자락은 깊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왼쪽으로 옥을 꿴 치마의 띠가 내려가고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명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 최대의 금동반가상이다. 기본형에 있어서 피차에 다른 점이 없으나, 조형감각과 세부기법에 있어서는 같지 않은 일면을 가지고 있다. 국보(國寶) 제78호 반가상이 직절적(直截的)이고 날카로우며 장식적이고 기교적이라면, 이것은 풍요 원만한 지체(肢體)와 간소 명랑한 표현형식이 오히려 감각적인 육체를 통하여 생동하는 미를 볼 수 있다.

머리에는 조그맣고 둥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얼굴은 거의 원(圓)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한데, 눈은 가늘고 눈썹은 아름다운 고선(孤線)을 그리며,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길게 늘어진 귓불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상반신은 전라(全裸)의 모습이며, 몸에는 목에 2줄로 표현된 목걸이가 걸려 있을 뿐 아무 장식도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좌(蓮座)를 밟고, 오른발은 그 무릎 위에 얹어 놓았는데, 왼손으로 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아랫몸을 덮은 하상(下裳)은 매우 얇아서 아랫몸의 표현에 충실하고, 쌍판(雙瓣) 복련(複蓮)의 대좌(臺座)를 덮은 옷주름은 깊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연화대(蓮華臺)가 거의 다 드러나 있는데, 왼쪽으로 규옥(圭玉)을 맨 상의(裳衣)띠가 내려가고 있다. 뒷머리부분에 긴 촉이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원래 광배(光背)가 있었던 것 같다. 온몸에는 도금(鍍金)한 위에 칠금(漆金)을 올렸던 듯 금빛이 은은하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에 의한 조사를 한 결과, 머리부분에서 몸통에 걸쳐 4각 막대기의 지주가 박혀 있고, 왼발부분에는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도 못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 불상은 막연히 경주(慶州) 오릉(五陵) 근처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전하나 근거 없는 말이며, 아직 그것이 전해져 오는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조각수법으로 보아 국보(國寶) 제78호 반가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三國) 말기에 가까운 시기의 제작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종 목 국보 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 (瑞山磨崖三尊佛像)

분 류 마애불(부동산)

수 량 1좌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시 대 백제시대 후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서산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명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서산마애불(瑞山磨崖佛)은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보물 제432호)과 함께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낸 마애석굴(磨崖石窟)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고 있다. 삼존불은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菩薩立像)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배치된 특이한 삼존형식으로서, 이는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에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이나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제작시기는 6세기말이나 7세기초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시대 중국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걸작의 불상이라 하겠다.

종 목 국보 85호 금동신묘명삼존불 (金銅辛卯銘三尊佛)

분 류 금동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이건희

관리자 호암미술관

1930년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호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으로 높이 15.5㎝이다. 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을 조각한 형태의 삼존불(三尊佛)로 현존하는 같은 형식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좌우의 보살상은 본존불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 광배의 끝에 겨우 매달린 듯 보이는데, 이는 본존불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본존불의 가슴과 광배의 오른쪽 끝에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본존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있으며, 옷자락은 양 옆으로 펼쳐지면서 발목까지 덮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서 손끝이 아래로 향하면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불상과 분리되며 본존불의 등 뒤에 달려있는 뾰족한 촉(觸)으로 고정시켜 준다.

배(舟) 모양의 광배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표현하였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굴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작은 부처를 조각하였다. 광배의 아래쪽 끝부분에 새겨진 두 협시보살은 큼직한 얼굴에 원통형의 빈약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가슴에는 X자형의 옷자락이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본존불에 비해 솜씨가 서툴러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사람 이름이나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 불상으로 보이며, 글에 나타난 ‘신묘(辛卯)’는 고구려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큼직한 얼굴과 손, 원통형의 체구 등에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강인한 기품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 세련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문화재명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

이 삼존불(三尊佛)은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인데, 현존하는 금동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의 불상 중 가장 크고, 광배(光背) 뒷면에 명문(銘文)이 있는 가장 뚜렷한 보기이다.

본존(本尊)의 좌대(座臺)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에 흠집이 남아 있으며, 여기서 오른쪽으로 길이로 길게 터진 균열과 광배 오른쪽 끝에 약간의 흠집이 있는 것 말고는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본존은 얼굴이 풍만하며, 육계(肉계)가 크고 우뚝한데, 입에는 미소를 풍기고 있어, 평양(平壤) 원오리(元五里)에서 발견된 니불(泥佛)들과 비슷하다. 두 손은 통인(通印)인데, 왼손의 작은 손가락 둘을 꼬부리고 있는 것은 삼국기(三國期)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통견(通肩)의 두꺼운 법의(法衣)는 좌우로 펼쳐지면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등뒤에는 광배(光背)를 끼우는 촉이 달려 있어 고정시키게 되어 있다. 광배 표면에는 본존을 중심으로 두광(頭光)·신광(身光)을 구획짓고, 그 안에 연화문(蓮華文)·당초문·(唐草文)·인동문(忍冬文)을 양각하였으며, 밖으로 고식(古式)의 화염문(火焰文)을 양주(陽鑄)하고, 그 사이에 화불(化佛) 3구(軀)를 배치하였다.

광배 아랫부분과 본존 좌우에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이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조상기(造像記)가 음기(陰記)되어 있다. 경□사년재신묘비구(景□四年在辛卯比丘)도국공제선지식나루(道國共諸善知識那婁)천노아왕아거오인(賤奴阿王阿거五人)공조무량수불일구(共造無量壽佛一軀)원망사부모생생심중상(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치제불선지식등치(値諸佛善知識等値)우미륵소원여시(遇彌勒所願如是)원공생일처견불문법(願共生一處見佛聞法)

이 불상은 1930년 가을, 황해도(黃海道) 곡산군(谷山郡) 화촌면(花村面) 봉산리(蓬山里)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원래 일인(日人) 이등전웅(伊藤전雄)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여러 사람을 거쳐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한 것이다. 조상(造像) 연대는 광배 명문(銘文)에 나타난 인명(人名)이나 조상양식으로 보아 고구려불(高句麗佛)로 보여지며, '신묘(辛卯)'는 평원왕(平原王) 13년(북제 무평(北齊 武平) 2년, 571)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 목 국보 86호 경천사십층석탑 (敬天寺十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 충목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경천사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塔身)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에 기왓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을 섬세하게 새겨 놓았다. 또한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탑으로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는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으며, 완성된 후 앞으로 건립될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문화재명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이 탑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 부소산(扶蘇山) 경천사터(敬天寺址)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인들이 반출한 것을 되돌려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4년 (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이 탑을 본따 만든 것이다. 높이가 13m 에 달하는 대리석 10층 석탑으로 네 면이 튀어나온 사면(四面) 두출성형(斗出星形)의 3층 기단 위에 같은 평면을 한 탑신을 3층 올린 뒤 정사각형의 탑신 7층을 쌓았다.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에는 불(佛) 보살(菩薩) 초화문(草花紋) 등을 양각했으며, 탑의 지붕인 옥개석(屋蓋石)의 처마 구조는 목조 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종 목 국보 87호 금관총금관 (金冠塚金冠)

분 류 금관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시대

소유자 국립경주박물관

관리자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명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금관(金冠)은 이마 위에 얹히는 대륜(臺輪)의 둘레에 단순하게 도식화한 대생지(對生枝)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 3개와 녹각형(鹿角形) 입식(立飾) 2개를 세워서 장식해 놓았다. 이런 의장(意匠)은 신라(新羅) 보관(寶冠)의 보편적인 기본형으로서 일반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관모(冠帽)는 얇은 금판(金板)을 오려서 만든 3각형 '책(책)' 모양의 금제(金製) 모(帽) 위에 2갈래로 된 긴 익형장식(翼形裝飾)을 꽂아 장식해 놓았다. 이 관모(冠帽) 내부에는 자작나무 껍질과 섬유를 발라서 머리에 쓰도록 마련되어 있다. 새 날개를 관모(冠帽)의 장식으로 꽂는 것은 삼국시대인(三國時代人)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시베리아 예니세이 지방에서 발견된 금속제 샤만관(冠)에 사실적인 녹각(鹿角)과 깃털형(形) 장식(裝飾)이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이 금관(金冠)과 관모(冠帽)는 모두 금판(金板)을 오려서 금실·금못으로 엮고 붙였다. 금관(金冠) 표면 전체에는 곡옥(曲玉)들을 꿰어 달았으며, 대륜(臺輪) 좌우에는 끝에 비취 곡옥이 달린 긴 수식(垂飾)이 1줄씩 늘어져 있다.

종목 : 국보 제88호 금관총과대및요패 (金冠塚과帶및腰佩)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금속공예/ 장신구

수량 : 1식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대 : 신라

소유자 : 국립경주박물관

관리자 : 국립경주박물관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금관총 과대 및 요패는 무늬를 뚫어서 조각한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종 목 국보 89호 금제교구 (金製교具)

분 류 장신구류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교구로, 길이 9.4㎝, 너비 6.4㎝이며, 허리띠를 연결시켜주는 금제 장식이다. 머리쪽이 넓고 둥글게 되어 있으며, 안쪽에 이와 평행하게 휘어진 구멍을 만들었고 걸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 허리띠를 매게 하였다. 틀을 만들어 그 위에 금판을 놓고 두드려 용의 윤곽을 만들고 금실과 금 알갱이로 큰 용 한마리와 작은 용 여섯마리를 만들었다. 가장자리는 금실을 꼬아서 돌렸고, 안으로 일정한 넓이의 삼각형을 만들었다. 용과 용사이에는 꽃잎모양의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비취옥(玉)을 끼워 넣었는데 현재 7개만이 남아 있다. 금실을 이용하여 장식하는 누금세공(鏤金細工)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용 7마리의 배치도 율동적으로 표현된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명 금제교구(金製교具)

1916년 평남(平南) 대동군(大同郡) 대동강면(大洞江面) 석암리(石巖里) 제9호 고분(古墳)에서 발견되었다.

앞이 둥글고 뒤가 네모진 원형(原型) 조각 위에 금판(金板)을 덮어 놓고 두드려 7룡문(龍文)을 낸 다음 그 위에 금사(金絲)와 크고 작은 금사(金絲)을 장식한 이른바 Filigree라는 누금세공품(鏤金細工品)이다.

장식은 7룡(龍)이 주된 문양이 되어 있는데 중심부에 자리잡은 큰 용 1마리와 작은 용 6마리를 앞이 둥글고 뒤가 네모진 형대 금구(金具) 위에 자유스럽고도 율동적인 솜씨로 배치해 놓았다.

용과 용 사이의 간지(間地)에 작은 우점형(雨點形) 금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고운 비취옥을 감입(嵌入)했던 자취를 남기고 있으나 현재 원상(原狀)대로 남아 있는 것은 7군데뿐이다. 금빛과 비취옥의 담록색(淡綠色) 조화가 매우 아름답다.

종 목 국보 90호 금제태환이식 (金製太環耳飾)

분 류 장신구류

수 량 1쌍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보문동의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한쌍의 금귀걸이로, 길이 8.7cm이다. 태환이식이란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를 말한다.

귀걸이의 몸체가 되는 커다랗고 둥근 고리에 타원형의 중간고리가 연결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뭇잎 모양의 화려한 장식들이 매달려 있다. 커다란 둥근 고리에는 거북등무늬와 같이 육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4엽 혹은 3엽의 꽃을 표현하였는데, 꽃 하나하나에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을 이용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밑부분에는 나뭇잎 모양의 작은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달고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모양을 달았다.

신라 귀걸이 장식에는 대부분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누금세공법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태환을 비롯한 전체 장식에 누금세공법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화려하고 놀라운 세공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

이 태환식(太環式) 귀걸이는 신라(新羅) 귀걸이 중에서도 뛰어난 가작(佳作)의 하나로 경주(慶州) 보문동(普門洞) 고분(古墳)에서 나왔다.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이 매우 능숙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신라(新羅)의 금(金)귀걸이에는 대개 이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을 써서 장식한 예가 많다. 그 중에서 태환(太環)과 수식(垂飾) 전체에 걸쳐 누금세공법으로 장식한 예는 이것이 대표적인 작품(作品)이다.

태환(太環)의 전면(全面)을 금립(金粒)으로 귀갑문(龜甲文)에 가까운 6각형으로 나누어 장식하고 그 6각형 안에는 4엽(葉)이나 3엽(葉)으로 된 초엽문(草葉文) 같은 것을 하나씩 금립(金粒)으로 표현해 놓았다.

귀걸이의 몸체가 되는 이 태환(太環)에는 가는 고리를 맞물려 달고 다시 2단으로 된 중간부 둘레에 심엽형(心葉形)의 작은 영락(瓔珞)을 금실로 꼬아서 수없이 달아 놓았으며 이 수식의 맨 끝에는 큰 하트형(形) 장식 하나를 달아 놓았다.

종 목 국보 91호 도제기마인물상 (陶製騎馬人物像)

분 류 토기

수 량 1쌍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경주시에 있는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어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인물상은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문화재명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

(1) 말탄 사람의 토우(土偶)는 3각형 관모(冠帽)를 쓰고 정장을 하였으며 마구(馬具)를 갖추고 착장(着裝)한 말을 타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는 잔(盞)모양의 그릇이 얹혀 있어 속으로 통하였고 앞가슴에는 물 같은 것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길게 뻗어 있다. 말꼬리는 손잡이의 구실을 하도록 의장(意匠)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록 실용성은 없으나 토우(土偶) 전체가 일종의 그릇 구실을 하도록 구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의 네 다리는 짧고 말굽의 표현은 서투르지만 말머리와 엉덩이의 표현은 사실적이다. 특히 얼굴과 입, 코의 표현은 말의 특색을 효과적으로 나타낸 부분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공예조각품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가작(佳作)이며 1924년 가을 경주시(慶州市) 노동동(路東洞) 금령총(金鈴塚)에서 순금보관(純金寶冠)과 함께 출토되었다.

(2) 앞의 토우(土偶)와 말 모양이나 그릇으로서의 양식은 모두 같다. 다만 인물은 꼭지 달린 모자를 쓰고 바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흔드는 형상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등에는 전대(錢帶)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1)인물은 주인이라고 생각되며, (2)인물은 (1)의 앞을 인도하는 종자(從者)로 짐작된다.

종 목 국보 92호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 (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분 류 불구류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대표적인 금속 공예품의 하나로 높이 37.5㎝의 정병(淨甁)이다.

어깨와 굽 위에 꽃무늬를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가 우거지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이 있으며, 주위로 오리를 비롯하여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였다. 먼 산에는 줄지어 철새가 날고 있고, 물 위에는 사공이 조각배를 젓고 있다. 이들은 모두 청동 바탕에 은을 박아 장식한 은입사(銀入絲)기법을 썼으며, 은상감무늬이다. 물을 따르는 부리에는 뚜껑이 덮혀 있는데 구멍을 뚫어 장식하는 기법으로 덩굴 무늬를 새기고, 그 옆면에는 연꽃 무늬를 배치하였다. 목 부분에도 뚜껑이 있는데 은판(銀板)을 뚫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이 정병은 형태에 있어서 안정감 있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며, 무늬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려 전기부터 크게 발달된 입사기법(入絲技法), 즉 은을 박아 장식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은입사정병은 여러 점이 알려져 있으나, 이 정병은 잘 조화된 우아한 모습을 보여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명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기신(器身) 굽과 어깨에 1줄씩의 도식화(圖式化)된 여의두문대(如意頭文帶)가 돌려져 있고, 몸통에는 늪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 2그루와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3인물, 그리고 수면에 3쌍의 편주(片舟)가 떠 있고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청동 바탕에 은입사(銀入絲)를 해서 묘사한 은상감(銀象嵌) 문양(文樣)이다.

이 은입사의 풍경표현은 근경(近景)에 그치지 않고, 먼 육지와 하늘을 나는 오리·기러기떼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양들의 상감기법은 매우 세련되고 정교해서 은상감이라는 인상을 잊게 해줄 정도이다. 병면(甁面) 전체에는 청록색의 녹이 고운 배경을 이루어서 문양들이 한층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림은 전체가 거의 회화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늪가의 풍경은 고려청자의 문양 중에는 매우 보편화되어 있다.

어깨의 주둥이에는 역시 은으로 하엽문(荷葉文)이 상감되어 있고, 마개 표면에는 뇌문대(雷文帶)와 그 안에 유려한 초문(草文)이 투각(透刻)된 은(銀)장식을 씌워서 세금공예(細金工藝) 기법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병 목에는 도식화된 뇌문(雷文)이 배치되어 있고, 주구(注口)의 원통부(圓筒部)에는 나뭇잎 같은 문양이 역시 은상감되어 있다. 또한 이 원통형의 긴 주구(注口)와 주둥이와의 접속부에 있는 마디 표면에는 뇌문대 안에 초문을 투각한 은장식을 덮었으며, 굽은 은으로 돌려 마무리하고 있다.

이러한 은상감 동기(銅器)의 장식기법은 고려청자 상감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 목 국보 93호 백자철화포도문호 (白磁鐵畵葡萄文壺)

분 류 백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로 적당한 높이의 아가리에 어깨부분이 불룩하고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모양이다. 크기는 높이 30.8㎝, 입지름 15㎝, 밑지름 16.4㎝이다.

직각으로 올라 선 아가리 둘레에도 무늬를 두르고 몸통에는 능숙한 솜씨로 포도 덩굴을 그려 넣었다.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포도 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표현으로 보아 도공(陶工)들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전문 화가들이 그린 회화성이 짙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몸통 전면에 푸른색이 감도는 유백색의 백자 유약이 고르게 칠해져 있는 이 항아리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백자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문화재명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유백색(乳白色)의 온아(溫雅)한 유약(釉藥) 밑에 철채(鐵彩)로 포도덩굴을 매우 활발하고 세련된 솜씨로 그려 놓았다. 포도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붓끝의 놀림, 포도덩굴에서 희롱하는 원숭이의 표현 등이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철화사기(鐵畵沙器)는 정부의 사옹원(司甕院)이 해마다 감조관(監造官)을 임명하여, 그가 도화서(圖畵署)의 화가(畵家)들을 거느리고 분원(分院)(사옹원(司甕院)의 분원이라는 뜻)에 나가서 어용사기(御用沙器)나 실용사기(實用沙器)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으므로, 도공(陶工)들이 그린 공예 장식적인 그림이 아니라 전문화가들의 회화적인 작품이었다.

몸체에 그린 이런 회화적인 그림과는 달리, 항아리의 주둥이 언저리에는 방간(方間)의 철채문대(鐵彩文帶)를 돌려서 이 병의 조형 효과를 정돈해 주고 있다. 또한 전아(典雅)한 항아리의 곡선이나 철사(鐵砂)의 발색(發色) 등도 매우 효과적이어서, 조선자기(朝鮮磁器) 중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귀족적 취미의 가작(佳作)이다.

현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수준의 작품은 사옹원(司甕院) 직계 가마의 생산품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이 포도 그림도 틀림없이 어느 저명한 도화서(圖畵署) 재적화가(在籍畵家)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종 목 국보 94호 청자소문과형병 (靑磁素文瓜形甁)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고려 인종(仁宗)의 릉에서 ‘황통(皇統)6년(1146)’이란 연도가 표기된 책과 함께 발견된 화병으로, 높이 22.8㎝, 아가리 지름 8.8㎝, 밑지름 8.8㎝ 크기이다.

참외 모양의 몸체에 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작품으로 긴 목에 치마주름 모양의 높은 굽이 받치고 있는 단정하고 세련된 화병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비색 유약이 얇고 고르게 발라져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7·8호 가마터를 중심으로 동일한 청자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양식은 다른 고려 고분의 출토품에도 보이며 중국의 자주요와 경덕진 가마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병이 발견된다.

고려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과 비색의 은은한 유색이 돋보이는 참외모양 화병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장도면(長道面)의 고려(高麗) 인종(仁宗) 장릉(長陵)에서 황통(皇統) 6년(1146) 기년(紀年)이 들어 있는 인종(仁宗) 시책(諡冊)과 함께 발견된 화병(花甁)이다.

태토(胎土)와 유약(釉藥)이 가장 세련되었던 고려청자 최성기의 작품이며, 과형(瓜形) 몸체에 외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취향의 작품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회청색 유약이 매우 얇고 고르게 씌워져 있으며, 유면(釉面)에 부분적으로 식은테가 나타나 있고, 태토는 더할 수 없이 정선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수준의 작품은 순청자(純靑磁)시대에 가장 뛰어난 작품을 생산했던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가마의 생산품으로 짐작된다.

중국(中國) 당(唐)나라 양식의 과형화병(瓜形花甁)에서 유래된 고려(高麗) 과형 화병은 물론, 한(韓)·일(日) 양국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과형(瓜形) 청자화병으로서는 가장 단정하고 세련된 형태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인종(仁宗) 원년(元年)(1123) 고려(高麗)에 왔던 송(宋)나라 서긍(徐兢)이 그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 속에서 칭송했던 고려(高麗) 비색(翡色)의 아름다움도 이런 것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종 목 국보 95호 청자칠보투각향로 (靑磁七寶透刻香爐)

분 류 청자

수 량 1점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대좌지름 11.2㎝의 크기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刑)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문화재명 청자칠보투각향로(靑磁七寶透刻香爐)

3마리의 토끼가 떠받치고 있는 3릉(稜) 화반(花盤) 위에 앙연화판(仰蓮華瓣)으로 겹겹이 싸여 있는, 화사(火舍)가 놓여 있는 형식의 향로이다. 노신부(爐身部)는 나뭇잎형(形) 복엽좌(伏葉座) 받침 위에 경쾌하게 얹혀 있고, 화사(火舍)의 뚜껑은 둥근 윤대(輪臺) 위에 칠보문(七寶文)을 투각(透刻)한 구형(球形)을 얹은 형식이다.

이 구형 투각 칠보문 교차부(交叉部)에는 각각 상감(象嵌)한 흰 점 하나씩이 장식되어 있고, 토끼의 눈은 검은 점을 찍었으며, 화반(花盤) 가장자리에는 초화(草花)를 음각하여 돌려 놓았다. 유약(釉藥)은 회청색이며, 식은테는 개반부(蓋盤部)에 일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 작품도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청자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수다스럽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품의 생산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에서 이 향로의 토끼발 형상과 흡사한 파편이 발견된 적이 있다.

종 목 국보 96호 청자귀형수병 (靑磁龜形水甁)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로, 높이 17㎝, 밑지름 10.3㎝, 굽지름 9.9㎝의 크기이다. 연꽃 위에 앉아있는 거북을 형상화했는데 물을 넣는 수구(水口), 물을 따르는 부리, 몸통,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모습은 거북이라기보다 오히려 용에 가까우며, 이마 위의 뿔과 수염, 갈기, 눈, 이빨, 비늘 등이 모두 정교하면서도 부드럽게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졌다. 두 눈은 검은색 안료를 써서 점을 찍었으며, 아래와 위의 이빨은 가지런하게 표현되어 있다. 목과 앞 가슴의 비늘은 음각했으며, 발톱은 실감나도록 양각해 놓았다.

등에는 거북등 모양을 새겨 그 안에 왕(王)자를 써 넣었고, 등 뒤로 꼬아 붙인 연꽃 줄기는 그대로 손잡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거북등 중앙에는 섬세하게 표현된 작은 연꽃잎을 오므려 그곳에 물을 담도록 되어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윤기가 흐른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된 거북의 모습은 우아한 비취색과 함께, 당시 유행한 동·식물 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재명 청자귀형수병(靑磁龜形水甁)

앙련(仰蓮)받침 위에 꿇어 앉은 거북을 상형(象形)한 수병(水甁)이다.

두 눈은 철사(鐵砂)로 찍었으며, 아래위의 이빨은 정연하게 양각되어 있다. 목과 앞가슴의 비늘은 음각했으며, 발톱은 실감나도록 양각해 놓았다. 등의 귀갑문(龜甲文) 안에는 '왕(王)'자 하나씩을 음각했는데, 거북이 앉은 연화좌(蓮華座) 뒤에서 뒷등으로 꼬아 붙인 연줄기는 그대로 손잡이가 되도록 구상하였다.

거북등 중앙에는 연잎을 오므려 붙여서 장식한 조그마한 병 주둥이가 있고, 이 주둥이를 막는 뚜껑으로 반쯤 핀 연꽃 봉오리를 상형하였다. 작품 전면(全面)에 윤택 있는 회청색 유약(釉藥)을 고르게 씌운 청자 최성기의 상형청자인데, 공예조각의 높은 격조를 자랑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순 청자의 맑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릇 전체를 하나의 동물이나 식물 모양으로 상형해서 만든 상형청자가 성행했다. 일반적으로 불상(佛像) 조각이 퇴조(退潮)를 보이던 그 시대의 풍조에 비하면, 매우 세련된 이 공예조각의 발전은 참으로 기이한 대조(對照)현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종 목 국보 97호 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 (靑磁陰刻蓮花唐草文梅甁)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매병으로, 높이 43.9㎝, 아가리지름 7.2㎝, 밑지름 15.8㎝이다. 원래 매병의 양식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 초기에 전래된 이후 곡선이나 양감에서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고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 매병은 작고 야트막하나 야무진 아가리와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그리고 아래부분이 밖으로 약간 벌어진 곡선에서 전형적인 고려자기 임을 알수 있다. 아가리는 일반적인 매병 양식으로 각이 져 있으며 약간 밖으로 벌어졌다. 몸통에는 연꽃덩굴 무늬가 전면에 힘차고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맑고 투명한 담록의 회청색 청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씌워져 있으며, 표면에 그물 모양의 빙렬(氷裂)이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작품의 모양새를 보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에서 구워 냈을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 고려 순청자 전성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명 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靑磁陰刻蓮花唐草文梅甁)

풍만하면서도 유려(流麗)한 곡선으로 감싸인 동체에 맑은 담록색 계통의 유약(釉藥)이 고르게 씌워져 있다. 유약(釉藥)에 식은테가 성기게 나타나 있으나, 이 식은테는 오히려 유약의 풍아(風雅)한 맛을 돋우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매병 중에서는 아랫도리의 곡선이 비교적 작게 벌어져서 헌칠한 맛이 있으며, 기품있게 오므린 주둥이는 병의 크기에 비하여 매우 작고 두드러져서 이 병의 부푼 곡선의 매무새를 잘 가늠해 주고 있다.

몸체에는 비교적 굵은 선으로 활달하게 음각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이 대범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병의 크기와 곡선미에 잘 어울리는 장식솜씨이다. 굽 둘레에 새긴 간결한 뇌문대(雷文帶)와 아울러 조금도 번잡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매병은 어디까지나 환원염(還元焰) 절대주의로 굽던 당시 도공(陶工)들의 신조(信條)가 역력히 반영되어 있는 듯한데, 유약의 발색(發色)이 맑고 깊이가 있는 데다 이만한 크기의 그릇에 이상발색(異常發色)이나 유약의 흠집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원래 이 매병의 양식은 중국 당(唐)·송(宋)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高麗) 초기에 전래된 이후 곡선이나 양감(量感)에서 중국(中國)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련되기 시작하여, 고려(高麗)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 매병의 유질(釉質)이나 작풍(作風)으로 보아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가마에서 구워 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 목 국보 98호 청자상감모란문항 (靑磁象嵌牡丹文缸)

분 류 청자

수 량 1개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20.1㎝, 아가리지름 20.7㎝, 밑지름 14.8㎝이다.

몸통에는 앞뒤로 모란이 한 줄기씩 장식되어 있다. 모란꽃은 잎맥까지도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몸체의 한 면마다 가득히 큼직한 문양을 넣어 인상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꽃은 흰색으로 잎은 검은색으로 상감하였는데, 꽃을 중심으로 잎을 좌·우·상·하로 대칭되게 배열하였다. 유약은 맑은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으로 매우 얇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항아리의 형태로 보아 12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는 꽃과 잎이 큼직하게 표현됨으로써 흑백의 대비가 강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며, 상감기법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

시골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물동이를 축소한 것과 거의 같은 형태이다. 시골에 따라서는 지금도 냉수 방구리(경기(京畿)지방)라고 불리는 질그릇이나 오지그릇 중에 이와 흡사한 규모의 그릇이 남아 있다. 또, 조선(朝鮮)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 질그릇 중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모양을 간혹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의 손잡이가 사자면(獅子面)으로 물리어 있고 굽다리가 따로 야트막하게 세워져 있는 데 반하여, 그것들에는 단순한 흙타래 손잡이가 붙어 있고 너래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담록색이 약간 빗긴 회청색 계통의 얇은 유엽(釉葉)에 식은테가 있으며, 유질(釉質)이나 그릇의 제식(制式)으로 보아 12세기를 크게 내려가지 않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더구나 그릇의 앞뒤 양면에 큰 모란(牡丹) 1가지를 큼직하게 상감해 놓은 의장효과(意匠效果)는 상감기법의 고격(古格)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청자상감 중에서는 드물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수준의 유약과 태토(胎土) 및 세련된 기법의 상감작품은 요지(窯址)에서 발견되는 파편으로 보아,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또는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 가마 등이 생산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 목 국보 99호 갈항사삼층석탑 (葛項寺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2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경덕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갈항사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문화재명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동탑(東塔)인 석탑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금릉군(金陵郡)의 갈항사 터(葛項寺址)에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갈항사 금당(金堂)의 남쪽에 동서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대표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동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는데 상륜부만 없어졌을 뿐 완전하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이두(吏讀)로 새겨진 명문(銘文)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문은 영묘사(零妙寺) 언적법사(言寂法師) 3남매에 의하여 신라 경덕왕(景德王) 17년(758)에 쌍탑이 건립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서탑(西塔)인 석탑은 경상북도 금릉군의 갈항사터에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갈항사 금당의 남쪽에 동서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서탑은 3층의 옥개석과 상륜부 등 동탑에 비해 부재가 많이 없어졌다. 동탑의 기단부에는 이두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문은 영묘사 언적법사 3남매에 의하여 신라 경덕왕 17년 (758)에 쌍탑이 건립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종 목 국보 100호 남계원칠층석탑 (南溪院七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명 남계원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

남계원칠층석탑은 원래 경기도 개성(開城) 부근 남계원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웅건한 기풍과 정제한 수법 등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려 석탑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했다. 현재 하층기단 면석과 상층기단 사이의 하층기단 갑석자리에 상·하층 기단 갑석을 놓았는데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이 정연하고 그 치석도 세련된 풍을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으며, 각층 옥신에는 각면에 양쪽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다. 상륜부는 탑신 정상에 한개의 돌로 조성한 노반과 복발뿐이고, 그 이상의 부재는 결실되었다. 이 탑에서 은니사경(銀泥寫經) 7축(七軸)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서울숭례문(서울崇禮門) -- 국보 1호 서울 중구

2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3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4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5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 --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6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7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 --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8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보光塔碑) --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9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10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實相寺百丈菴三層石塔) --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11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12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앞石燈) --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13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14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 --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15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16 안동신세동칠층전탑(安東新世洞七層塼塔) --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17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18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19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20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21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22 불국사연화교칠보교(佛國寺蓮華橋七寶橋) --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23 불국사청운교백운교(佛國寺靑雲橋白雲橋) --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24 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 --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25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26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佛國寺金銅毘盧舍那佛坐像) --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27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佛國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 --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28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29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30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31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32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33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34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35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36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 --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37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38 고선사지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39 월성나원리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40 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41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42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43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44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45 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46 부석사조사당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 --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47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48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49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50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51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52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 --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53 연곡사동부도(연谷寺東浮屠) --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54 연곡사북부도(연谷寺北浮屠) --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55 법주사팔상전(法住寺捌相殿) --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56 송광사국사전(松廣寺國師殿) --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57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 --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58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59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60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유蓋香爐) --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61 청자비룡형주자(靑磁飛龍形注子) --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62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 --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63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64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65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유蓋香爐) --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66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67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68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69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 -- 국보 69호 부산 서구

70 훈민정음(訓民正音) --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71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 --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72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73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74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75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완) --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76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77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78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79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80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 --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81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82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83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84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85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 --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86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87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88 금관총과대및요패(金冠塚과帶및腰佩) --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89 금제교구(金製교具) --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90 금제태환이식(金製太環耳飾) --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91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 --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92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93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94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 --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95 청자칠보투각향로(靑磁七寶透刻香爐) --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96 청자귀형수병(靑磁龜形水甁) --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97 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靑磁陰刻蓮花唐草文梅甁) --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98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 --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99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100 남계원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 --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101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102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103 중흥산성쌍사자석등(中興山城雙獅子石燈) -- 국보 103호 광주 북구

104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105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106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107 이조백자철사포도문호(李朝白磁鐵砂葡萄文壺) --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108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109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110 익재영정(益齋影幀) --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111 회헌영정(晦軒影幀) --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112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畵靑磁楊柳文筒形甁) --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114 청자상감모란국화문과형병(靑磁象嵌牡丹菊花文瓜形甁) --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115 청자상감당초문완(靑磁象嵌唐草文완) --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116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靑磁象嵌牡丹文瓢形甁) --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117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118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119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7年銘金銅如來立像) --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120 용주사범종(龍珠寺梵鐘) --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121 하회탈및병산탈(河回탈및屛山탈) --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122 진전사지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123 익산왕궁리오층석탑내발견유물(益山王宮里五層石塔內發見遺物) --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124 순금금강경판<부금대2개>(純金金剛經板<附金帶2個>) --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125 유리제사리병(유리製舍利甁) --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126 금제방합<개부>(金製方盒<蓋付>) --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127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128 기타유물(基他遺物) --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129 한송사석조보살좌상(寒松寺石造菩薩坐像) --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130 녹유골호<부석제외함>(綠釉骨壺<附石製外函>) --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131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佛國寺三層石塔內發見遺物) --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132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 --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133 은제사리외합(銀製舍利外盒) --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134 은제사리내합(銀製舍利內盒) --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135 유향(儒香) --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136 금동방형사리합(金銅方形舍利盒) --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138 동환(銅環) --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139 경옥제곡옥(硬玉製曲玉) --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140 홍마노환옥(紅瑪瑙丸玉) --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141 수정절자옥(水晶切子玉) --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142 수정보주형옥(水晶寶珠形玉) --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143 수정환옥(水晶丸玉) --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144 녹색유리환옥(綠色琉璃丸玉) --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145 담청색유리제과형옥(淡靑色琉璃製瓜形玉) --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146 유리제소옥(琉璃製小玉) --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147 향목편(香木片) --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148 청동제비천상(靑銅製飛天像) --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149 동경(銅鏡) --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150 동제채자(銅製채子) --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151 목탑(木塔) --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152 수정대옥(水晶大玉) --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153 홍마노(紅瑪瑙) --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154 수정제가지형옥(水晶製가지形玉) --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155 유리제과형옥(琉璃製瓜形玉) --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156 유리소옥(琉璃小玉) --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157 심향편(沈香片) --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158 섬유잔결(纖維殘缺) --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159 묵서지편(墨書紙片) --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160 삼양동금동관음보살입상(三陽洞金銅觀音菩薩立像) --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161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162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163 선산죽장동오층석탑(善山竹杖洞五層石塔) --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164 이태조호적원본(李太祖戶籍原本) --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165 징비록(懲毖錄) --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167 금동보살삼존상(金銅菩薩三尊像) --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168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169 용두보당(龍頭寶幢) --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170 대구비산동출토동기류(大邱飛山洞出土銅器類) --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171 동검검경및동모부속구(銅劍劍梗및銅모附屬具) --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172 광봉동모및검장(廣鋒銅모및劍裝) --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173 금관및부속금구(金冠및附屬金具) --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174 군선도병(群仙圖屛) --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175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 --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176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 --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177 동국정운1질(東國正韻一帙) --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178 화순대곡리출토청동유물(和順大谷里出土靑銅遺物) -- 국보 143호 광주 북구

179 청동검(靑銅劍) --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180 청동팔령구(靑銅八鈴具) --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181 청동쌍령구(靑銅雙鈴具) --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182 청동삭구(靑銅削具) --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183 청동공부(靑銅공斧) --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184 청동세문경(靑銅細문鏡) --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185 월출산마애여래좌상(月出山磨崖如來坐像) --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186 귀면청동로(鬼面靑銅爐) -- 국보 145호 서울 성북구

187 강원도출토일괄유물(江原道出土一括遺物) --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188 팔수형동령(八手形銅鈴) --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189 동조령부병두(銅造鈴附柄頭) --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190 동조환상쌍두령(銅造環狀雙頭鈴) --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191 동조령식초(銅造鈴飾초) --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192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193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194 권지16(卷誌十六) --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195 권지17(卷之十七) --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197 권지4,5(卷之四,五) --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198 권지6(卷之六) --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199 송조표전총류(宋朝表전總類) --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20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201 정족산본(鼎足山本) --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202 태백산본(太白山本) --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203 오대산본(五臺山本) --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204 기타산엽본(基他散葉本) --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備邊司謄錄附議政府謄錄) --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206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207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 --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208 일성록(日省綠) --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209 금제관식<왕>(金製冠飾<王>) --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210 금제관식<왕비>(金製冠飾<王妃>) --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211 금제심엽형이식<왕>(金製心葉形耳飾<王>) --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212 금제수식부이식<왕비>(金製垂飾附耳飾<王妃>) --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213 금제경식<왕비>(金製頸飾<王妃>) --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214 금제뒤꽂이<왕>(金製뒤꽂이<王>) --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215 은제팔찌<왕비>(銀製팔찌<王妃>) --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216 청동신수경(靑銅神獸鏡) --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217 청동신수경(淸銅神獸鏡) --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218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219 수대경(獸帶鏡) --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220 석수(石獸) --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221 지석(誌石) --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222 두침(頭枕) --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223 족좌<왕>(足座<王>) --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白磁鐵畵梅竹文大壺) --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225 청자인형주자(靑磁人形注子) --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226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227 청자양각죽절문병(靑磁陽刻竹節文甁) --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228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 --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229 청동은입사보상당초봉황문합(靑銅銀入絲寶相唐草鳳凰文盒) --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230 진양군영인정씨묘출토유물(晋陽郡令人鄭氏墓出土遺物) --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231 백자상감초화문편병(白磁象嵌草花文扁甁) --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232 묘지(墓誌) --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233 잔(盞) --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靑磁鐵彩堆花點文羅漢坐像) --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235 금동수정감장촉대(金銅水晶嵌裝燭臺) --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236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白磁象嵌蓮唐草文大접) --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237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 국보 176호 서울 중구

238 분청사기인화문태호<내외호>(粉靑沙器印花文胎壺<內外壺>) --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239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粉靑沙器彫花魚文扁甁) --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240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粉靑沙器剝地蓮魚文扁甁) --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241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242 장량수급제패지(張良守及第牌旨) --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243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244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245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246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247 양평금동여래입상(楊平金銅如來立像) --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248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249 천마총금관(天馬塚金冠) --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250 금모<천마총>(金帽<天馬塚>) --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251 금제과대및요패<천마총>(金製과帶및腰佩<天馬塚>) --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252 금관및수하식<98호북분>(金冠및垂下飾<九十八號北墳>) --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253 금제과대및요패<98호북분>(金製과帶및腰佩<九十八號北墳>) --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254 유리제병및배<98호남분>(琉璃製甁및杯<九十八號南墳>) --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255 금제경식<98호남분>(金製頸飾<九十八號南墳>) --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256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258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 --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259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260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261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국보 200호 부산 남구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奉化北枝里磨崖如來坐象) --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권37>(大方廣佛華嚴經 晋本<卷三十七>) -- 국보 202호 서울 중구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권6>(大方廣佛華嚴經 周本<卷六>) -- 국보 203호 서울 중구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권36>(大方廣佛華嚴經 周本<卷三十六>) -- 국보 204호 서울 중구

266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267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 --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268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瞥行疏)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능嚴經) --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大防廣拂華嚴經世州妙嚴品) --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272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바羅蜜經) --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273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바羅蜜經) --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274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275 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 --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276 인천보감(人天寶鑑) --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佛說預수十王生七經) --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278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 --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279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大方廣佛華嚴經략神衆) --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281 화엄경변상도<주본>(華嚴經變相圖<周本>) --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282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大方廣佛華嚴經<貞元本>) --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283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晋本>) --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284 대방광불화엄경<주본>(大方廣佛華嚴經<周本>) --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285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對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초) --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287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바羅密經) --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護저童子陀螺尼經) --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289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290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291 남양선생시집(南陽先生詩集) --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 --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293 당현시범(唐賢詩範) --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약諸經論念佛法門往生淨土集) --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295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296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 --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297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 --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298 보협인석탑(寶협印石塔) -- 국보 209호 서울 중구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권13>(紺紙銀泥不空견索紳變眞言經<卷十三>) --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권1∼7>(白紙墨書妙法蓮華經<卷一∼七>) --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1-10>(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卷一-十>) -- 국보 212호 서울 중구

302 금동대탑(金銅大塔) --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興王寺銘靑銅銀入絲蕓龍文香완) --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권31>(紺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卷三十一>) -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305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306 금강전도(金剛全圖) --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307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308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309 청자상감용봉모란문개합(靑磁象嵌龍鳳牡丹文蓋盒) --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310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木彫文殊童磁坐象) --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311 청화백자매죽문호(菁華百磁梅竹文壺) --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312 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313 경복궁경회루(景福宮慶會樓) --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314 창덕궁인정전(昌德宮仁政殿) --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315 창경궁명정전(昌慶宮明政殿) --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316 종묘정전(宗廟正殿) --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 국보 228호 서울 중구

318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 국보 229호 서울 중구

319 혼천시계(渾天時計) --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320 용범(鎔범) --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義安伯李和開國功臣錄券) --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 -- 국보 233호 부산 남구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권1∼7>(紺紙銀泥妙法蓮華經<卷一∼七>) --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325 월성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 --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326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 국보 237호 서울 동대문구

327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 -- 국보 238호 서울 동대문구

328 송시열상(宋時烈像) --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329 윤두서상(尹斗緖像) --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권249>(初雕本大般若波羅蜜多經<卷二百四十九>) --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331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332 현양성교론<권11>(顯揚聖敎論<卷十一>) --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333 유가사지론<권17>(瑜伽師地論<卷十七>) --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권20>(新纘一切經源品次綠<卷二十>) --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335 대보적경<권59>(大寶積經<卷五十九>) -- 국보 246호 서울 송파구

336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公州儀堂金銅菩薩立像) --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337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338 동궐도(東闕圖) --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339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 -- 국보 250호 서울 중구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권14>(大乘阿毗達磨雜集論<卷十四>) -- 국보 251호 서울 중구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靑磁陰刻連花文梅甁) --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靑磁陽印刻連唐草·象嵌牡丹文銀구大접) --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靑磁陰刻蓮花折枝文梅甁) -- 국보 254호 서울 중구

344 전충남출토청동방울일괄(傳忠南出土靑銅방울一括) --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345 팔주령(八珠鈴) --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346 쌍두령(雙頭鈴) --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347 조합식쌍두령(組合式雙頭鈴) --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348 간두령(竿頭鈴) --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1>(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一>)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29>(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二十九>) -- 국보 257호 서울 강남구

351 청화백자죽문각병(靑華白磁竹文角甁) --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352 분청사기상감용문호(粉靑沙器象嵌龍文壺) --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353 분청사기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粉靑沙器剝地牡丹文鐵彩자라甁) --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354 백자호(白磁壺) --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355 백자대호(白磁大壺) -- 국보 262호 서울 중구

356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花鳥文大壺) -- 국보 263호 서울 중구

357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 --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13>(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十三>) --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2,75>(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二,七十五>)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권제12>(初雕本阿毗達磨識身足論<卷第十二>)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권제11,17>(初雕本阿毗曇毗婆沙論<卷第十一,十七>) --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362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권제6>(初雕本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卷第六>) --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363 청자모자원형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364 초조본현양성교론<권제12>(初雕本顯揚聖敎論<卷第十二>) -- 국보 271호 서울 송파구

365 초조본유가사지론<권제32>(初雕本瑜伽師地論<卷第三十二>) -- 국보 272호 서울 송파구

366 초조본유가사지론<권제15>(初雕本瑜伽師地論<卷第十五>) -- 국보 273호 서울 송파구

367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368 초조본유가사지론<권제53>(初雕本瑜伽師地論<卷第五十三>) --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36>(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三十六>)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덕진구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太宗十一年李衡原從功臣錄券附函) --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제74>(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第七十四>) -- 국보 279호 서울 서초구

372 성거산천흥사동종(聖居山天興寺銅鐘) --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373 백자주자(白磁注子) --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374 흑석사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黑石寺木造阿彌陀佛坐像幷腹藏遺物)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375 불상(佛像) --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376 전적(典籍) --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377 직물류(織物類) --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378 기타 복장물 오향,칠약,오곡,칠보류,사리함(其他 腹藏物 五香,七藥,五穀,七寶類,舍利函)국보 282-4호 경북 영주

379 통감속편(通鑑續編) --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권제162,170,463>(初雕本大般若波羅蜜多經<卷第一百六十二,一百七十,四百六十三>) --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381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382 백자발(白磁鉢) --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383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대향로(扶餘陵山里出土百濟金銅大香盧) --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384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385 익산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386 통도사대웅전및금강계단(通度寺大雄殿및金剛戒壇) --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387 용감수경(龍龕手鏡) --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388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 --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金銅觀世音菩薩立像) --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390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391 나주신촌리고분출토금동관(羅州新村里古墳出土金銅冠) --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392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 --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393 안심사영산회괘불탱(安心寺靈山會掛佛幀) --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394 갑사삼신불괘불탱(甲寺三身佛掛佛幀) --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395 신원사노사나불괘불탱(新元寺盧舍那佛掛佛幀) --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396 장곡사미륵불괘불탱(長谷寺彌勒佛掛佛幀) --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397 화엄사영산회괘불탱(華嚴寺靈山會掛佛幀) --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398 청곡사영산회괘불탱(靑谷寺靈山會掛佛幀) --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39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400 여수진남관(麗水鎭南館) --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401 통영세병관(統營洗兵館) --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402 삼국유사<권3-5>(三國遺事<卷三-五>) -- 국보 306호 경기 의왕시

403 삼국유사권1-5(三國遺事卷一-五)---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404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405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국보 308호 전남 해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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