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머리말
어느 늦가을, 직장에서 이슥토록 근무한 이가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였다. 시끄러운 거리를 벗어나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아! 그 조용하기라니...
하늘을 쳐다보니 보름을 지난 달이 둥두렷이 내려다보고 있다. 양쪽 주택 정원의 나무와 풀밭에서 이름모를 벌레들이 다투어 아름다운 소리를 자랑하고... 모처럼의 고요를 만끽하며 발짝을 옮기는데 이런 변이 있나?
길가 호화주택 철문 안에서 대굴통이 수박만이나 한 도사견이 “컹”하고 짖고 나선 것이다.
정신이 아찔하면서 아아! 산산이 깨어져 버린 그 평화경. 그는 저도 모르게 길바닥으로 눈길이 갔고 거기서 주먹만한 돌을 주워 힘껏 개를 향하여 던졌다. 그런데 던지는 솜시가 서툴러 그랬든지, 개는 아니 맞고 엉뚱하게 옆집의 대형 유리창이 쨍그렁 하고 나갔다.
자아! 여기서 생각해 본다.
“유리창은 왜 깨어졌을까?
달이 밝으니까 창이 깨졌다도 비약이지만 돌멩이에 맞았으니까 깨어졌다? 맞았다고 다 깨어지나? 맞았더라도 날아온 돌의 압력을 유리의 탄력이 견디지 못했으니까 깨어졌지. 이것이 이른바 과학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그 답으로 족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분은 과학이 사람을 편리하게는 하였어도 행복하게는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스위치 하나로 불이 켜지고, 리모콘 단추 하나로 여직껏 잘 달리던 서부 활극이 뭉게구름 이는 남태평양 경치로 바뀌는 텔레비전 화면이 우리 생활의 전부일 수는 없다. 에어컨을 켜고 흔들의자에 앉아 노닥거리는 것도 좋기는 하나, 정자나무 그늘에서 제각기 편편한 돌멩이를 깔고 앉아 도깨비 얘기를 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 틈틈이 모은 설화자료를 정리해 몇권 책을 내었다. 중국의 고대신화도 번역하였는데, 퇴직한 뒤론 내 처지를 이해했는지 여러 업체에서 얘기를 써 달라는 부탁을 곧잘 받았다.
그래 취미삼아 읽던 야담책 중에서 무언가 좀 알맹이가 있는 얘기를 옮겨서 여기저기 실었는데 이번에 뜨인돌 고사장 눈에 띄어 그 중의 몇 가지를 새로 엮었다.
내가 좋아 모은 얘기가 여러분 취향에도 맞을는지는 미처 모르겠으나, 토방에서 호롱불 켜놓고 도란거리던 옛 맛을 얼마간이라도 느껴 주었으면 고맙겠다. 끝으로 이 산만한 자료에 눈길을 모아 엮어내 준 뜨인돌 고사장 이하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고집퉁이 황진사
우리나라 역사에, 어쩌다가 고집세기로 후세에 이름난 분이 있었으니, 황순승이라는 어엿한 성명과, 진사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있건만, 세간에서 황고집으로 통하게 된 어른의 이야기다.
성질이 워낙 강직해서 한번 말한 것은 꼭 준행하고 조금도 굽힐 줄을 몰랐던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황고집이라고들 불렀다.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싫지 않게 여겨, 집암이라는 호를 지어 쓰더라고 하니 그의 인품을 미루어 알 만하다. 평야 인현리에 살았는데, 세간에서 외성의 황씨라면 모두가 알아주는 그런 가문의 출신이다.
한번은 동네 앞 개울에 다리를 놓는데 또 한번 황진사의 고집이 활동하였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장마가 져서 으레 홍수가 지는 때문에, 여간 완구하게 놓은 다리가 아니면 배겨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여름 한철은 아예 개울에 다리 없이 첨벙거리고 건너 다니다가, 늦장마까지 염려가 가신 뒤에야, 온 동네가 나와서 함게 다리를 놓아 겨우내 건너다니다가, 이듬해 단오가 지나고 뜯어서 쌓는 것이 연중행사로 되어 있었다. 동네에서는 추렴을 거둬 재목을 구하여 끝구멍을 파고 촉을 해 맞추어, 마치 집 짓듯이 교각을 조립식으로 구성해 놓고는 그 위에다 섶을 얹고 흙을 펴 밟아 다지고 건너다니게 마련이었는데, 흙을 파다 붓는데 보니 허옇게 회가 섞여 있는 것이라 진사님이 물었다.
“자네들 이 흙 어디서 파 왔나?”
“저 산날 잘라진 끝에서 파 왔습죠.”
“거긴 사람들 묘 썼던 자린데, 그렇다면 이거 산소를 꾸몄던 광중 흙이 아닌가? 사람 시신을 딛고 다니는 것이나 같으니, 그 흙 버리고 다른 흙을 깔게.”
“아유, 진사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회 섞인 흙이면 더 좋지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십니까?”
젊은 사람들하고 더 다투기 싫어서 혀만 쩍쩍 차며 돌아서고 말았는데, 그 뒤가 문제다. 황선생은 겨우내 나들이 할 때 차가운 개울물을 그냥 첨벙첨벙 건너다녔지, 다리 위로는 통과를 않는 것이다.
한번은 도둑놈들이 길 가는 이들의 옷가지라도 벗겨갈 요량으로 어두운 뒤에 목을 지키고 있는데, 저만치 옷깃이 번듯한 사람이 오기에 `옳지 저놈을 털어야겠다.` 하고 벼르는데, 이 양반이 다리목까지 와서 얼음이 써걱써걱 하는 개울물을 그냥 건너는 것이다. 서로 쳐다보고 혀를 내둘렀다.
“얘들아, 황진사님이다. 우리가 이 생업을 해 먹을 망정, 그 어른의 옷을 벗긴다면 도둑놈 의리에 금이 간다.”
그리고는 그날 영업을 거두고 돌아갔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다. 한번은 볼 일이 있어 서울 출입을 했는데, 와서 들으니 그곳에 사는 친구 아무개가 죽었다는 얘기다. 일행들이 `마침 왔던 길이니 문상하고 가자` 하는 것을 그는 또 거절하였다.
“볼일 보러 왔던 길에 문상을 하다니 친구간 의리에 그럴 수가 있나?”
그리고는 부지런히 평양까지 돌아갔다가, 차림을 갖춰 다시 상경해, 문상을 치르고 돌아갔더라고 한다.
서울서 평양을 550리라 해서, 하루 평균 80리를 걷는데도 왕복에 보름이 걸린다. 친구간의 의리를, 더구나 죽은 사람 상대로도 이렇게 신의를 지켰으니, 다른 일엔 어떠하였으랴!
물론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도 정성이 남달라서, 제수 흥정을 꼭 자신이 몸소 나서서 하는데, 한번 지목한 물건의 값을 물어 턱없이 비싸게 달라더라도,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거나 값을 깎는 일이 절대 없었다.
“값을 깎아서 살 양이면 아예 제사를 안 지내는 쪽이 낫지.”
아들이 장성하여 장가를 들였을 때의 일이다. 새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의당 이튿날 아침 예모를 갖춰 문안을 드려야 하는 것인데, 해가 높다랗도록 그런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 여자 하인을 시켜서 가 동정을 보고 오라 일렀다. 그랬더니 하인이 돌아와 하는 말이라.
“밝기 전에 이미 일어나 세수랑 치장을 마치고 그림같이 앉아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그러면 나도 이렇게 일어나 있으니 들어와 뵈올 일이지, 무엇을 기다린단 말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진사님! 새아씨 말씀이 `아버님께서 사당에 뵙고 내려오시거든 일러다고, 그러고 나서 들어가 뵈어야 순서니라`고 하십니다.”
황진사는 낯이 홍당무같이 붉어지며 감탄하는 것이다.
“내 행신 좀 봐라. 가도를 세운다는 주제에, 저 자신 아침마다 조상 사당에 다니는 체통은 안 지키면서, 자부의 인사부터 받으려 하다니...”
그 길로 사당에 올라가 절하여 뵙고 내려와 앉으니, 그제사 새며느리가 하인의 인도를 받아 들어와서 날아가는 듯이 절을 올리는 것이다. 진사님은 방바닥에 두 손을 짚어 자부의 절을 맞았다.
“네가 오늘 도리로써 나를 깨우쳐 줬으니, 정말 내집 며느리답도다. 일후로도 이 늙은 시아비에게 잘못이 있거든 서슴없이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그러고 나서부터 그 며느리의 의견을 남달리 존중하고, 옳은 가풍을 세우기에 전보다 갑절 마음을 썼다는 것이다.
암행어사와 자린고비
옛날 애기를 모으다 보면 인색하기로 소문난 자린고비 얘기가 쏠쏠히 많은 데 놀란다.
굴비에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떠넣고 한 번씩 쳐다보면서 먹는데, 겸상해 먹던 아들이 두 번씩이나 쳐다봤다고
“임자식! 물켜려고 짜게 먹는다.” 했다는 유의 얘기들이다.
옛날 충주에 고비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비는 비자와 통하여 난다는 뜻이다. 성과 합치면 높이 난다는 뜻이 된다. 광해군 때 학자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오를 정도로 부자면서 인색하기로 조명이 난 사람이다.
본래 사람 사는 길이라는 것이 체면과 도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특히 유교의 예절을 바탕으로 발달한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제사를 제대로 받들고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함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인색하여 그것을 옳게 차리지 못했으니 소문은 좋지 않게 나고, 자연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아 지방을 붙이고 행사를 하는 때는, 제사를 마친 뒤 그 지방과 축문을 깨끗이 불살라 없애는 것이 도리인데, 얘기의 주인공은 그 종이 태워 없애는 것이 아까워서 책갈피 같은데 끼워 놓고 매년 꺼내 되풀이해 썼더란다.
그런데 옛날 백지는 다룰 적마다 피어 보푸라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고비옹은 닳지 말라고 들기름으로 결어놓고 썼으며, 그래서 별명지어 `결은 고비`라고 하던 것이, 변해서 오늘날은 `자린고비`니 `자리곱재기`니 하는 호칭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가 사는 고장으로 암행어사가 왔는데, 일대에 자자한 그의 소문을 듣고, 어느날 늦게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하룻밤 쉬어 가자고 했더니, 들라 한 것가지는 좋았으나 오래지 않아 저녁 상이 나온 것을 보니 기가 차다.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게 격식 갖춰 차리고 곁상에는 전골과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이것은 주인의 몫이다.
다음, 개다리 소반에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친지 뭔지 반찬이 딱 한 가지 놓여서 내왔는데 이것은 손님의 차지다.
“시장하실텐데 어서 드시지요.”
그래도 인사는 잊지 않고, 부잣집 영감님답게 반주 석 잔 따라 자시고, 이 반찬 저 반찬 곁들여 상의 것을 골고루 아주 복받게 잘도 먹어 나간다. 어사야 애시에 그러려고 길 떠난 사람이라 자기 몫으로 온것을 이 또한 달게 먹어 치웠다. 뜰에 내려 한참을 서성이고 들어서니까 하는 말이다.
“기름 아까운데 우리 일찌감치 자리에 듭시다.”
침구를 내려 푹신한 이부자리는 아랫칸에서 자신이 깔고, 개떡조각같은 이불을 내어주며,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웃칸에서 자라고 한다.
`듣던 대로구나!` 하며 고신고신 잠을 못이루고 그렁저렁 한 밤중이 되었는데, 그 집 남자 하인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친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살쾡이가 와서 닭을 한 마리 물어갔사와요.”
“으음!”
신음하는 것같은 소리가 나더니 주인 영감이 일어나 앉는 눈치다. 이내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이부자리를 개어 얹고 나더니, 장지를 열며 웃칸의 손님을 부른다.
“손님! 손님! 잠시 일어나 얘기나 나눕시다.”
“...”
“공연히 그러지 마십시오. 점잖으신 어른이 그만큼 하대를 받았으면, 분해서라도 잠드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지못한 척 몸을 일으켰더니 손을 잡아 아랫칸으로 인도한다.
“여봐라, 거 나 먹는 식으로 한상 잘차려 내오너라.”
새삼스레 통성명하며 인사를 나눈 뒤에, 주인이 잔을 들어 권하며 자신의 성장과정을 털어놓는다.
“알거지나 진배없는 외로운 신세로 남의 집을 살다가 등짐장사로 나섰습지요. 착실하니 신용있게 하는 사이 차츰 돈을 만지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달걀을 하나 얻었습니다. 주인 집에 맡겨 깠더니 암평아리 하나 주어서 제 몫으로 키웠는데, 알이 열다섯 개 모였을 때 안겼더니, 하나를 더 낳아 보태서 열여섯 마리를 깠는데 모조리 암놈이지 뭡니까? 그대부터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겼아와요. `나는 하늘이 낸 놈이다.` 그래 객주에 들어서도 음식이랑 언제나 최고급으로만 시켜 먹으면서 작정을 했습니다.
`어디 얼마나 느나 힘껏 해보자.`
천량은 날로 늘고 이외의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디다.
한집에 살면서도 저녁에 보셨듯이 나만 그렇게 먹었지. 평생을 같이 산 마누라에게도, 자식 새끼들에게도 손님께 드린 그 이상은 못 먹게 했사와요.
`내가 누군데.`
물론 인근 동에도 고을 안에도 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방금 살쾡이가 닭을 한 마리 물어갔다지 않습니까?
내 일생동안 천량에 축이 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내 재산 느는 것도 이것이 고비라는 징조로 여겨집니다. 여태까지가 오르막길이었다면 이제부턴 내리막인데, 인심도 이제 그만 잃고 돈도 한번 본때있게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님! 외모로 보아도 손님께서는 학식도 유여하고 경륜도 깊으실 것입니다. 이놈에게 제 천량 유용하게 쓰는 법 좀 친절하게 지도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튿날로 소 잡고 돼지 잡아 동네 잔치를 한바탕 벌이고, 가족들에게도 새옷과 옳은 밥상이 차례왔으나, 낭비를 막기는 오히려 전보다 더하였다.
어사는 그의 재산목록을 살핀 뒤 갖가지 사업을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충주 갑부 고비옹은 고장의 자선사업가로 탈바꿈해, 다리도 놓고, 집회소도 지어주고, 빈민 구제의 기금도 세워주어,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나이 많아 죽을 때, 그의 손엔 한푼 재산도 남은 것이 없었다. 임종에 그는 자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유언하였다.
“나는 내 손으로 모아 내 복에 살고 나 할 일 하고 간다. 너희들도 제 손으로 벌어서 제 몫을 하며 살아다오.”
이런 유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널리 또 길이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객지에서 어떻게 지내는공?
조선조 초기 황희 정승과 나란히 명재상으로 치는 맹사성은 청렴하고 소탈한 점에서도 서로 통하는 분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년)에 나,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세종 9년에 좌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출천지효로 열살 적에 이미 자식된 도리를 다하여, 어머님이 돌아갔을 때는 이레 동안이나 식사를 못했고, 장사 뒤에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아 죽을 먹으며 3년을 바쳤더란다.
정성으로 산소 앞에 심은 잣나무를 멧돼지가 무게질러서 말라 죽자, 어린 효자가 통곡통곡하였더니, 이튿날 그 돼지를 호랑이가 물어가니, 모두들 효심에 감동된 때문이라고 하였다.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짬을 내, 고향인 온양 땅으로 성묘차 다니곤 하였는데, 항상 구지레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통소를 불며 오르내리니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맹정승이 귀성한 길에 통과하신단 말을 듣고, 예의 갖춰 환영하려고 큰 길에 나와 군막을 치고 대기했는데, 기다리던 정승행차는 아니 오고 웬 영감태기가 통소를 불며 소를 타고 가기에, 혹 정승 행차에 결례가 될까 하여 사람을 보내 나무랬다.
“어인 사람이기에 그런 행색으로 지나가는가? 곧 귀하신 분이 지나실게니 비켜 가도록 하라.”
그랬더니 소 탄 영감이 히죽이 웃으며
“온양 사는 맹고불이가 제 소 타고 저 갈 길 가는데 웬 참견인가고 여쭈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두 고을 원이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물건을 챙기다가 인뒤웅이를 언덕 아래 깊은 소에 빠뜨리고 소란을 떨어서, 뒤에 그 곳을 침인연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고불은 그의 별호고, 인뒤웅이는 관인을 넣어서 항시 갖고 다니는 상자다.
이번엔 온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채 저물기 전에 용인 어느 원에 들렀을 때 얘기다.
원이라면 사리원, 조치원, 퇴계원 등 지명에도 많이 나오는데 당시에 여행객을 무료로 재워주던 시설이다.
커다란 방 두엇과 대청을 지어 불은 늘 뜨뜻이 때 주고, 식사때가 되면 원지기 하인이 그릇을 갖고 와 진지살 내어 줍쇼 하여, 양식을 거둬다가 저희 밥할 때 얹어 지어서는, 또 큰 그릇에 담아 갖고 와 각자 그릇에 나눠 주는 것이 식이었다. 그러니까 여행객은 길양식이라고 하여 저 먹을 쌀을 지니고 다녀야 했고, 찬합에 반찬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때마다 꺼내 먹어야 했다. 이부자리도 따로 없어서 대개는 입은 채 누워자고, 혹 접요라고 담요같은 것을 말 안장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맹정승이 들어와 보니 선객이 이미 들어 있는데, 타고 온 말이랑 모두 호화롭고, 데리고 온 수화도 벅적거렸다.
공이 들어가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있으려니, 손짓해 부르면서 같이 앉아 이바구나 하자고 한다.
그의 요청대로 마주 대해 앉자, 상대가 안을 내는데 이쪽에서
“...는 공?”
하면 상대방에서
“...당.”
하고 대답하는 장난을 하자는 것이라. 그것 좋다고 고불부터 시작하였다.
“어디 사는 분인데 무슨 용무로 어딜 가는 공?”
“영남 사는 사람인데, 녹사 취재하러 간당.”
하는 것이다. 녹사는 정부의 기록을 담당하는 최하급 관리여서, 대우가 아전이나 다를 바 없는 미관말직이요, 취재라면 요새말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내가 한자리 시켜 줄공?”
“당치도 않당.”
공의 행색을 보고 공연한 소리 말라는 것이다. 몇 가지 더 문답하며 담소하다가 자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정부에 않았으려니, 예의 영남 선비가 차례를 따라, 취재차 들어오는 것이다. 공이 먼저 물었다.
“아사! 이 객지에 어떻게 지내는 공?”
선비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때 그 노인이라, 넙죽업드리면서
“죽여지이당.” 해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공이 찬찬히 그날 얘기를 하며, 웃고 채용해 주었는데, 사람이 성실하고 주변성이 있어서 차츰 자리를 높여 몇 군데 수령까지 지냈다는 얘기다.
이것이 유명한 공당문답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병조판서가 결재서류를 갖고 공을 댁으로 찾았더니 마침 비오는 날이라 집이 허술하여 밖에서는 가는 비 오고 집안에서는 굵은 비가 와서, 군데군데 주룩주룩 새는 것이 아닌가?
그 판서는 마침 집에 행랑채 짓는 역사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로 정승댁도 저러한데, 내 처지에 과분하다면서 공사를 중지시켰다니 그 또한 뜻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적고 보면 그런 대감이 조정 공사는 어떻게 처리하랴 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다.
법과 풍기를 다루는 대사헌직에 있을 때는 당시 빽을 믿고 귀하신 몸짓을 단단히 하던 부마 조대림 집대문에다 먹칠을 하고 그의 과람한 행동을 치죄하였으니 대단한 배짱이다.
그러한 기질 때문에 맹정승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마터면 죽을 뻔 하기도 했는데, 영의정 성석린 등 중신이 감싸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다니, 조정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 잡았을까는 짐작이 간다.
물론 청백리로 선록되고, 효자 정문이 내렸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 제정에도 맣은 공로를 남겼다.
나라를 건진 조선의 의기남아
조선조 중기, 서울에 홍순언이라는 역관이 살았는데 중국을 드나들며 사신들 외교활동에 통역 일을 맡았다.
당시 법으로 이런 실무직은 상류층에선 하기를 꺼려해서, 특수계층에서나 맡아 했는데, 서울 복판 청계천을 중심으로 많이 살아서 흔이 중인라고들 불렀다. 말이 역관이지, 직접 외국인을 상대하여 교섭하는 직책이었던 때문에, 혀끝하나 놀리기에 따라. 하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무역에 관여해 욕 안먹고도 상당한 재산을 이룰 수 있었던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누구나 윤기가 돌았다.
그 홍역관이 한번은 사신을 모시고 중국엘 갔는데, 공식적인 임무를 마치고 시간이 나자 객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래 요새로 치면 나이트클럽을 찾아나섰는데, 그곳 홍등가의 풍습대로, 매파들이 나와서 손님을 끌었다.
“따아런!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냥 예사로 들었더니, 뒤따르는 말이 솔깃하다.
“하루저녁 모시는데 xx금인데, 그 길로 일생을 바치겠다는 군입쇼.”
호기심에 따라 들어갔더니 그야말로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같은 처녀인데, 그냥 양갓집 규수라기보다 사뭇 고상하게 귀티가 난다. 물론 말이야 유창하게 통하는 사이라, 조용히 사정을 물었더니 딱하기 이를 데 없다. 벼슬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북경 와 살았는데, 갑자기 자리를 잃고 이내 돌아가셔서, 고향인 강남으로 운구해 모시고 싶으나, 워낙 청백하게 지내셔서 그럴 여축도 없고...
생각다 못해 이곳에 나와서 자기 몸을 팔아 그것으로 경비를 충당하려고 터무니 없는 고가를 불렀으니 들어만 주신다면 그길로 일생을 모시겠노라는 얘기였다.
홍순언은 의기남아다.
이 정경을 보고 어떻게 돌아서겠는가?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던져 아가씨를 구렁에서 건져 주었다. 그리곤 손목 한번 안 쥐어 보고, 그냥 돌아서려 하는데 처녀가 붙들고 매달린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어디 계신 누구이신 줄이나 일러 주시면, 일생동안 은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딸로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이-.”
그 순정에 감동해, 나는 조선인 아무개노라 하고 휘적휘적 대문을 나섰다. 그것이 사재였는지 공금이었는지 그 많은 금액을 보충하려면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일설에는 공금을 유용해 쓴 죄로 옥에 갇혔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로, 중국 들어갔다 나온 동료 역관들의 말이 국경을 들어서며부터 이번 행보에 홍대인은 안왔느냐고 자꾸만 묻더라는 것이다.
`이상한 일도 있다` 했었는데, 다음 번 자기 차례가 돼서 들어갔더니, 아니나다를까 산해관을 들어서자 관원 하나가 다가와서 묻는다.
“이번 행보에 홍대인이 오셨는지요?”
내가 그라고 했더니, 그러냐고 무척 좋아하며 돌아갔는데, 북경에 도착해 급한 공사를 마치고 나자, 또 한사람이 객관으로 찾아와 전한다.
“석노야께서 대인을 기다린지 오래시외다.”
노야라면 저들이 말하는 극존칭으로, 우리말로 하면 `대감`에나 해당할 그런 호칭이다. 준비해 갖고 온 가마를 타고 따라 나섰더니, 얼마를 가다가 어떤 고대광실 크나큰 집 대문을 썩 들어서더니 몇겹 대문을 또 거쳐서 내려놓는다. 그곳 풍습에 익숙해서 잘 알지만 여기는 주인의 서재 아닌가?
점잖은 분이 나서며 손을 턱 잡더니
“내 아내가 대인을 뵙겠다는구려.”
“?”
“띠에띠에!”
“아니, 아버지라니?”
주렴 안으로부터 구르듯이 달려나와 맞는 귀부인을 보니, 아니 이거 홍등가에서 구해 준 그 아가씨 아닌가?
“내 아내에게 아버지면 당신은 내게 장인이오. 그리고 조선은 나의 처가이고.”
주인은 귀 알았으리, 요새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 석성이요, 아가씨는 홍역관의 도움으로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연줄이 닿아 그의 후취부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물론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 중에도 귀한 선물은 부인이 그동안 무늬를 놓아서 손수 짠 비단, 바로 보은단 여러필이다. 재생의 아버지 은혜를 보답코자 시간만 나면 짜서 모은 것이다.
국무위원을 사위로 두고 보니 그동안 정체됐던 양국간의 어려웠던 문제도 순화롭게 풀려서 국가의 체면도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도 안된다.
예고도 없이 왜군이 쳐들어와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200년 평화에 젖어온 조선 정부에서는 어쩔 방도가 없다. 물론 각처에서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지만, 나라의 운명이 달린 큰일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물은 요청된다. 중국관계는 물론 홍순언이 나서야 했고, 그는 수양딸 치마폭에 엎어져 울음으로 호소하였고, 병부상서의 설명으로 조선은 의기있는 사람이 사는 우방임을 생각해, 드디어 이여송이 10만 명의 원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며, 정세는 급전환을 보았다.
그 뒤의 임란 사정은 얘기 않는다.
다만 석성 그 자신은 일본과의 강화문제로 책임을 물어 옥에 갇히고 그 안에서 생을 마쳤으니, 처갓집 신세갚음치고는 너무나 애처로운 최후였다. 얘기는 바뀌어 그 홍순언이 살던 곳이 서울 복판 삼각동이었고, 담을 화초담으로 곱게 꾸몄대서 고운담골이라고 하였었는데, 광복 직후 정객들이 흔히 찾던 미장그릴은, 그 동네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일설에는 보은단골이라는 것이 원래 이름이라고 하나, 아무튼 설화치고는 가슴 흐뭇한 이야기다.
사명당의 사처방인가?
임진왜란 하면 우리 민족사에 그런 비극이 없었다.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그 많은 사찰이 하나같이 임란에 불타 없어져 그 뒤에 재건한 것이라니, 전문적으로 절만 사르고 돌아다닌다 해도 힘들 노릇이다.
한일합방 후 한국의 전통문화를 찾아 문화재를 조사하러 건너온 저들 전문가들이 다 혀를 내두른다.
“어쩌면 이렇게도 깨끗하게 싹 쓸어 없앴을까?”
그러다가 지도를 펴 들고 경상북도 영주군의 부석사를 찾아나서며, `여기라면 혹시 무엇이?` 했다가, 무량수전의 아담한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했던 감격을 그들은 기록해 놓고 있다.
그 왜란 중에 저들의 별동대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산대사를 만나 뵙고는 그만 저도 모르게 합장하였다.
“난리가 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세라지만 살생은 삼갈지니라.”
그들은 훈계를 듣고 돌아서며 너무나 의젓한 그 모습에 감탄하였다. 반야심경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두려워 겁날 것도 없으며, 어떠한 사리에도 벗어나 망상도 버리게 된다`더니 저런 스님 목에는 칼을 겨눌 수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고 눈 하나 깜짝할 스님도 아니다.
그 뒤 대사는 행재소로 선조대왕을 찾아 뵙고, 자신이 나서서 도와 드리는 것이 도리이나, 나이도 많고 근력이 부쳐, 대신 제자 유정을 보내오니 손발같이 부리시라고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친다.
이 서산대사 휴정의 천거로 나라에 봉사한 이가 사명당 유정인데, 당당한 체구에 머리는 깎았으나 풍채좋은 수염은 그냥 기르고 지냈다.
“머리 깎은 것은 승려인 것을 나타냄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대장부임을 보임이외다.”
그런데 두 분의 필적을 보면 서산대사는 아주 소탈하고 힘찬 필치에 획 하나하나가 모두 붙끝이 복판으로 지나가는 장봉이어서 남성적인데 비해, 사명당의 글씨는 그냥 틀에 박힌 얌전한 글씨여서 의외의 감마저 든다.
조정에서는 일본인들이 불교를 하 숭상하고, 승려를 정정히 대접하는 것을 알고 저들과의 외교 접촉에는 자주 사명당을 내세웠다. 그가 처음 왜장으로 용명을 떨치는 가토오를 만났을 때다.
첫 마디로 묘한 질문을 받았다.
“귀국에 보물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일본에 있소이다.”
“무슨 보물이기에 우리에게 있다고 하시지요?”
“조선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모가지를 소원해, 모두가 갖고 싶어하니 그것이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래서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사나운 장수건만 그만 기가 팍 죽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난다. 서로 웃었다고 한 데도 있고, 가토오가 질려서 떨었다고 써 있는 데도 있다.
이 내용은 우리 외에도 저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대사가 뒷날 강화 교섭차 일본에 갔을 때, 행렬 가운데 그의 뛰어난 풍채를 보고는 모두들
“저 어른이 바로 설보화상(보물 얘기를 했다는 그 스님)이냐며 생불같이 합장해 우러러 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기록이나, 왜란의 원한이 얼마나 깊었기에 뒷날 <임진록>이라는 소설책이 나왔고 그 가운데서 얼마나 일본을 욕했는지, 일제하에서는 인쇄, 구독이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백성 사이에 어찌나 많이 애독되었던지, <임진록> 가운데 몇 가지 기록은 마치 사실인양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인용되어서 `사명당의 사처방인가?`는 온돌방이 몹시 추울 때 향용 쓰는 말이다.
왜인들이 “조선의 생불이 온다 하니 반드시 묘계가 있으리니 어찌하리요?” 하고는, 여러 폭 병풍에 글을 써서 길가에 펴놓고 지나온 뒤에 외우겠냐고 한다. 이에 다 외우고 끝의 폭을 못외워 이상히 여겼더니, 그 폭만은 바람에 접히어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못물에 천근짜리 방석을 띄우고 선유하라 하는 것을 올라앉아 떠다니며 일본 왕더러 `친히 나와 춤추어 흥을 돋우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번의 묘계(?)를 모두 실패한 뒤에 그들이 낸 계교를 원문대로 옮겨본다.
“구리쇠로 집을 지어 사명의 처소로 정하고 문을 봉한 후, 숯을 쌓고 대풍구를 부치니, 사명이 구리방석에 얼음 빙자를 쓰고, 벽엔 눈 설을 쓰고 단정히 앉아 팔만대장경을 외우니 좌석이 서늘하더라. 이때 왜놈들이 대풍구로 밤낮 이틀을 부치니 구리 쇠기둥이 다 녹는지라. 왜왕 왈,
`아무리 생불이라도 혼백이 다 녹으리라!` 하고 군사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니,
사명당이 가사의를 입고 완연히 앉아 호령 왈
`남방이 덥다 하더니 어찌 이리 추우뇨?`
자세히 보니 앉은 데 얼음이 얼고, 사방 벽에 눈이 뿌리거늘...” 했는데, 전하는 말에는 눈썹에 성에가 끼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더라고 해서 그쪽이 더 실감이 난다. 끝내 그들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 3백장과 동철 3천근, 모관 3천근, 왜물 3천근을 조공하라.” 하여 다짐을 받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구두로 전해오는 말에는 총각의 불알 말린 것 서 말에, 처녀 인피로 3백장을 받기로 했다고 과장 윤색해서 전하고 있다.
얘기는 본론으로 들어가 그의 인품을 평할 때, 그가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고 범하지 못할 위엄이 넘쳤던 것은 그의 마음 가운데 한점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점으로 인해 어떠한 위력이나 유혹으로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니, 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다 두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안갑내 다리의 유래
조선조 후기의 일이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공부 잘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판사와 정승까지 다 지내고, 치사(나이 많으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한 팔자 좋은 대감이 한 분 있었다.
별로 출입을 않다 보니 행랑에 사는 수많은 하인들도 할 일이 없다. 나들이를 하셔야 가마도 메고 일산도 받치고, 앞뒤로 갈라서서
`에이 비켰거라, 물렀거라.`
벽제를 치며 큰 길을 휩쓰는 것인데, 그럴 일도 드물다 보니 정말로 심심해 죽겠다. 그래 여럿이는 새벽마다 저마다 빗자루를 들고 나와 문 앞서부터 큰길 저 멀리까지 쓸어 나갔다. 그리고는 길가 해장국집으로 들어가 구뚜름하게 끓인 술국에 막걸리 한 잔씩으로 목을 축이곤, 기분이 좋아서 돌아와 그 집의 술국 끓이는 솜씨와 아침의 해장하는 맛을 떠들어댔다. 대감이 측간에 앉았다가 그들의 떠드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첫새벽 술국 맛이 그렇게 좋담!`
대감은 저으기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저들과 어울려 갈 수도 더욱 없으려니와, 통량갓에 도포 차림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어느날 아침 일찌감치, 동저고리 바람으로 하인들과 맞부딪치지 않을 만큼 시간을 안배해 저들이 떠들던 술집을 찾았다.
“할아버지! 무얼 드릴깝쇼?”
“국하고 막걸리 한 잔.”
막고추가루를 쳐 저어서 훌훌 마셔보니 과연 속이 확 풀리는 것 같다. 그리고는 슬쩍 거냉한 그 막걸리 맛이라니! 다시 국물을 마시고 났으니, 이제 계산을 해야겠는데
“아차차.”
대감이 언제 돈을 만져나 봤나? 허리께를 더듬어 봤자 돈이 있을 리 없다.
“여보시우 주인! 늙은이가 정신이 없어 돈 갖고 오는 걸 잊었으니, 누굴 좀 딸려 보내면 내 그 편에 보내주리다.”
“아니! 이 바쁜데 누굴 딸려 보냅니까? 참 할아버지도...”
그러는데 저쪽에 여럿이 둘러서서 먹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다가온다.
“뭔데 그러십니까?”
주인의 하는 얘기에 젊은이는
“아따, 이 양반아! 우리들 계산에 넣어. 단 한 잔 잡순걸 가지고... 할아버지 그냥 올라가셔요.”
“그렇소! 참 고맙소이다. 이렇게 서로 알게 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니, 며칠 안에 내 집을 한 번 찾아주오. 조 궁우물에서 왼쪽으로 빤히 들여다 보이는 집이야. 꼭 찾아와야 되우.”
“예 예, 염려 마시고 어서...”
평나막신은 노인들이 이웃 출입할 때 흔히 신는다지만, 하얗고 조그만 상투엔 금동곳이 아침해에 반짝 빛났다.
그날은 그걸로 끝나고 다음날 아침 젊은이는 빈 소를 끌고 궁우물께를 찾아가 두리번거렸다.
“당신, 하얀 노인네 댁을 찾으시구랴. 날 따라 오우.”
으리으리한 솟을대문 앞에 이르더니 젊은이는 고삐를 하마석에 매면서 너스레를 떤다.
“대감마님! 기다리시던 젊은 친구가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영창을 두루루 열고 내다보는데 그때 그 노인, 삼층 관을 받쳐써서 인자한 얼굴에 위엄이 넘친다.
“대감마님! 소인 문안드리옵니다.”
“무슨 소린가?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 따질 형편인가? 어서 올라오게.”
“오니올시다. 끄레발인걸입쇼.”
“괜찮아! 장판방이라 훔쳐 올리면 그만 아닌가? 어서...”
엉거주춤 들어선 그에게 자리를 권한다.
“일전엔 참 고마웠네. 그땐 자네 술 먹었으니 오늘은 내 술 한잔 마셔보게.”
“얘, 약주상 보아온.”
상노에게 이르고,
“그래 어디 살며 무얼로 생업을 하기에 새벽 일찍 예까지 오고 하나?”
“예. 뚝섬 사옵는데, 저희 뚝섬 육백 호는 무 심는 걸로 생계를 삼읍지요. 그래서 무를 가지고 뚝섬갈비라고들 한답니다. 가을에도 내지만 대부분 땅속에 묻어놓고 겨우내 소바리로 실어다 거래처에 넘기는데, 아침 한 행보하고 나서 낮에는 다른 일을 합지요.”
“그래! 자 어서 한잔 들고..., 그런데 여보게! 나는 이렇게 들어앉아 있네만 집의 아이가 지금 조정에 몸 담고 있어 한 가지 정도 청이라면 들어 줄 수 있으니, 어떤가? 사양말고 어서 얘기해 보게.”
“그렇습니까? 그럼... 다른 게 아니오라, 뚝섬서 무 실은 소바리가 살곳이 다리를 거쳐서 오노라면, 동대문 밖 저만치서 꼭 개울을 건너야 하옵는데, 추운 날 발빼기가 괴롭고... 소등에 올라앉기도 합니다만 그놈인들 좀 고생스럽겠습니까? 거기 튼튼한 다리나 하나 놓아 주셨으면...“
옛날 왕십리서 광희문까지는 자락자락 쪽박 엎어놓은 것처럼 묘지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었을 뿐, 달구지나 소바리가 연락 부절하게 다닐 길이 못 되었다.
“좋은 말일세.힘써보지.”
그런 뒤로 요망하는 자리에 다리를 놓았는데, 그 마음 착한 뚝섬갈비 장수의 이름이 안갑내였다고 한다.
지금도 안암동 예전 다리께가 그 고장 토박이들 사이에서는 모두 안갑내로 통한다.
원님, 둥우리 타시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차례로 치르고, 그 상처가 조금 아물기 시작할 무렵부터 조정의 기강은 썩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탐관오리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았는데 이들에게 가장 쉽게 돈 생기는 길이 남을 등쳐먹는 것과 매관매직으로 벼슬자리를 파는 일이다. 세간에서 흔히 `등쳐먹는데 이골이 났다`고 하는데 사람이 너무 큰 고기점을 삼키거나 하면 옳게 삭이지를 못해서 목에 걸리고, 그럴때 등을 두드리면 웨익 하고 토해 놓는데, 뱉어놓은 그것을 낼름 집어먹는 것이 등쳐먹는 것이고 하도 그런 짓을 자주 해 이력이 차서 곬이 생긴 것을 이곬이 났다고 하는 것이다.
서울의 명물이라면 좀 미안하지만 정수동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남다른 재간이 있었지만 가문이 낮아 뜻을 펴지 못하고 지내던 사람이다. 그가 사귀던 대감이 누구에게 돈 2만냥을 먹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다.
“그 분만은 그렇지 않을 사람으로 알았는데...”
하루는 대감 댁을 심방했더니, 그 집 행랑 사는 하인 내외가 우는 어린 것을 붙들고 쩔쩔 맨다.
“왜들 그러나?”
“글쎄 돈을 삼켰지 뭡니까? 가지고 놀라고 엽전 한닢을 줬더니 입에 넣었다
그만 삼켜 버려서...”
“그게 누구 돈이지?”
“그야 녀석에게 줬으니까 제놈 돈입지요.”
“그래?”
그러고는 사랑에까지 들리도록 목청을 돋구어서 떠들었다.
“염려말게, 주인대감은 남의 돈 2만냥을 삼켰어도 끄덕 없는데, 제 돈 한푼 먹은 게 뭐 그리 대사라고...”
물론 주인이 들었고, 그는 부끄러워서 그 돈을 원래의 임자에게 돌려 주고야 마음이 후련해졌다고 한다.
그럴 무렵에 경기도 포천 땅에 원님 하나가 왔다.
이 자가 정사 돌보는 것은 둘째고 돈 나올 구멍부터 눈여겨 살폈다. 그리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 들였다. (이런 것을 옛 어른들은 갈퀴질이라고 하였다.)
이러다간 포천고을에 기둥뿌리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쑤근쑤근 사방에서 공론이 일었다.
"이 자를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이 동네서 저 동네로 저 동네서 이 동네로 전갈이 통하여 온 고을안이 뜻을 모았다.
그대로 들고 일어나 소란을 피우면 이를 민요라 하여, 폭행, 약탈에 살상으로까지 번지는 수가 있으나, 여기는 이웃 영평과 함께 양반고을로 치는 곳이다. 그래 아주 조용히 원님이라는 자를 집어다 내버리기로 하였다.
둥우리라고 닭 키우는 제구가 있는데, 놓아 먹이는 닭이 올라가 달걀도 낳고 품어서 병아리를 까게 그냥 위가 열려 있는 것이 있고, 닭을 산 채로 넣어 장터 바닥에 누구나 보게 말뚝을 박고 발목을 매어 놓고 팔기도 했다.
사람타는 가마를 닭의 둥우리처럼 새끼줄로 결어서 메고 들어가, `원님, 둥우리 타시오` 하는 날이면 꼼짝없이 타야 하고, 그러면 여럿이 메고 가서 지경 밖에다 팽개치는 것을 `둥우리 태운다`고 하여 조정에서 파면당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큰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갈퀴질의 명수인 원님은 둥우리를 타고 서울 가까운 양주 지경 축석령 고갯마루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그런데 이 자가 울어도 시원치 않을텐데,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늘을 쳐다보면서 껄껄거리고 웃는 것이 아닌가?
“저런! 너무 충격이 커서 아주 미쳐버린 거 아냐?”
군중 가운데 하나가 다가가서 물었다.
“원님! 무엇이 우스워서 그리 웃소?”
“나 너희들 못난 짓 하는 것이 하도 우스워서 웃는다.”
“당신 신세는 인제 끝장인데, 우리 하는 것이 무엇이 못났단 말이오?”
“아, 이 사람아! 이문 안 남는 장사를 누가 한다던가?
내가 이 고을 원 자리를 5천냥 주고 사서 해왔는데, 어제까지 모두 만냥을 거둬들었으니 이제 남은 임기동안 좀 옳은 정사를 펴보려고 했는데, 그동안을 못참아서 나를 둥우리를 태워? 며칠 안있어 만냥 밑천들인 원님이 부임해 올 것이니, 그땐 갈퀴질커녕 나올게 없으면 쇠스랑을 들고 파서라도 거둘 것이니, 그렇다고 못견디어 또 내다 버리고...“
여럿은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리곤 그 중의 하나가 웃옷을 홀랑 벗어서 탁탁 털어 바닥에 깔았다.
“이리로 올라 앉으십시오.”
그리고는 일행 중에서 제일로 긴 장죽을 가져다 담배를 재웠다.
“이거 대라곤 시원치 않습니다마는...”
이 약삭빠른 원님은 군말 않고 그것을 받아 물고, 백성이 붙여 올리는 대로 뻑뻑 빨았다. 그리곤 새삼스레 꾸며 가지고 온 사인교를 타고 다시 동헌으로 들어가 정사를 돌보았단다.
그렇다고 죽일 것까지야
옛날의 암행어사는 글자 그대로 몰래 다니는 암행이라, 본색을 숨기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고을의 원님이 위세를 보이느라 그랬는지, 공사를 처리하는 등 남의 앞에 나앉으면, 큼직한 부채를 훨쩍 펴서 귀 뒤에서부터 활활 내리부치며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 밑에서 명령을 거행하는 사령들이 공론을 하였다.
“내 저 부채질 못하게 할게, 너 볼래?”
“임마, 무슨 수로 그렇게 해? 그 어른의 본래 버릇인 것을.”
“두고 봐라, 내가 성사시키면 너 한잔 사야 한다.”
그러고는 창 앞으로 바짝 다가가 조그만 소리로 아뢰는 것이다.
“웬 중년의 남자가 어찌보면 양반 퇴물 점쟁이도 같고, 어떻게 보면 집 잃은 사람도 같은데, 구지레한 옷차림으로 어제부터 장터를 돌아다니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할깝쇼? 잡아 들여서 문초해 보시면...”
“그래? 아직 너무 떠들지 말고, 너랑 눈치빠른 몇 사람이서 먼 발치로 좀더 살펴 보도록 해라.”
그리고 내려와서 보니, 원님의 그 위세좋던 부채질은 뚝 끊기어 반쯤만 펴서 든 채, 몸도 안 흔들며 턱 아래로만 힘없이 부치고 있다.
“내 저 부채질 다시 활활 부치도록 해줄게. 더 두고 보련!”
“임마, 금방 또 손을 쓸 수는 없지 않아?”
“그래 그래, 이따 점심 지나서 하기로 하지.”
원님이 겁에 질려 옹송거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실컷 지켜보다가, 점심때가 지나서 다시 다가가
“안전님! 어제부터 쏘다니던 그 이상한 과객이 웃말의 김진사댁으로 들어갔는데 자세히 물으니, 그 댁에 드나드는 지관이라는 굽쇼.”
지위가 낮아 정3품 당상관이 못되는 원님에게는 사또라 부르지 않고 안전이라 부른다.
“그런걸 왜 어제부터 돌아다녔던고?”
그러고 나더니 다시 부채는 쫙 펴지고, 귀 뒤에서부터 활활 내리 부치며 몸을 계속 흔드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더라고 한다. 행객의 차림새로 보아 암행어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가 죽어 있다가, 아닌 것을 확실히 알자 당초의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동래 정씨로 호를 임당이라 하는 유길 상공이 있었다.
중종 10년에 태어나 선조 2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 명문 출신에다 수재로 문과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그가 젊어서 호남지방의 암행어사 특명을 받아, 전라도의 최남단인 해남땅에서 진도의 벽파진으로 건너가는 나룻목에 다다라 주막에 들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곧장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역졸들을 불러 모아 쑥덕공론도 하고, 그러면서 며칠을 묵었다.
물론 접객업소의 사람들이란 눈치가 빠른 법이라, 저들은 일행의 정체를 알아차렸고, 사람을 진도 고을로 보내 이러이러한 일행이 와 있노라고 알렸다. 그래 기밀은 알려질대로 알려진 뒤에, 마치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자리를 뜨듯, 끙 하고 일어나서 나루를 건넜다. 말할 것도 없이 진도에서는 백성을 늘어세워 환영만 안했을 뿐,
“옳지 옳지, 저기 어사의 일행이 간다.”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뒤에, 관청 삼문기둥을 두드리며 김새는 소리로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외쳤다.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터라, 진도원님은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런데 자기 딴에는 얼없이 맞춰 놓느라고 했겠지만, 중앙에서 데리고 간 민첩한 서리들이 검열해 보니 일처리의 귀가 맞지 않는 곳이 여기저기서 퉁겨져 나왔다.
물론 어사의 판단으로 진도군수는 파면되고, 창고는 봉해 놓고 후임 군수가 취임하면 열어서 처리하게 되었다. 이른바 봉고파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그의 친구가 물었다.
“암행어사라는 직분이 불쑥 뛰쳐나와 갑자기 뒤져서 가릴 것은 가리는 것이 본분인데,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느슨하게 하였단 말이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하는데 당시 진도군수는 무관 출신이라 전투에 나서면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겠지만, 내정에 대해선 백지이고, 인정이 많아서 단 한가지도 딱 부러지게 처리하지 못했을 터인데, 갑자기 들이닥치면 엉망진창일 것이 뻔하니, 그렇다면 죽여야 하겠는데,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 정도로 해 파면조치로 끝내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각박하게 굴었다가 생전에 잃은 인심으로 죽어서 자손마저 잘되지 않은 가문이 무척 많은데, 그는 이렇게 너그럽게 처신하여 복을 받아 그랬던지 자손도 무척 번창하여 여러 대째 내리 정승판서가 줄달아 나서 회동 정씨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지금 신세계백화점 뒤 회현동에 서 있는 큰 은행나무는 본시 그의 댁 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때 살림이 기울면서 대물려 살던 주택은 없어졌으나, 자손들은 모두 절개를 굳게 지켜, 그 조상에 그 자손이라는 말을 듣게 하였다.
오라버니, 어디 계슈?
고대소설이나 야담에서 절개있는 기생 이름을 들자면, 북에는 평양의 계월향, 남으로 진주의 논개를 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면 계월향, 그가 어떠한 행적을 남겼기에 그러는 것일까?
그는 임진왜란 때 평양의 기생으로 노류장화의 몸이라, 적의 선봉 소서행장 막하의 용맹한 장수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거드럭거리는 소서비에게 붙잡혀 그의 시중을 드는 신세가 되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호의호식하고 없는 것 없이 지내겠지만, 그는 의기있는 이 나라의 아가씨였다.
하루는 한껏 아양을 떨어 그의 환심을 사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장군님? 저는 이렇게 장군의 굄을 받아 행복하게 지냅니다만, 저의 가족들이 성밖 난민 중에 섞여 고생하고 있으니, 불러들여서 밥 한끼라도 배불리 먹여 주었으면 좋겠사와요. 예? 장군님.”
“그러냐? 요 예쁜 것아! 그게 네 소원이라면 그리 하려무나.”
당시 김응서라고 무과에 장원급제한 용감한 청년이 조방장으로 기용되어, 어이없이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으려고 동료들과 보통문 밖에 둔치고 있었는데, 구지레하게 민간인 차림을 하고 피난민들 틈에 끼어 성밖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린 채 병장기를 들고 성 위로 왔다갔다 하는 적군을 멍청히 바라보고 섰으니 누가 보아도 정신나간 사나이 같다. 그때 녹의홍상으로 화사하게 차린 젊은 여자가 적군 틈을 헤치고 성가퀴께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희들 수장의 애인이니 막을 놈도 없고, 우리 백성 중에선 이런 소리도 들렸다.
“저런 죽일 년이 있나? 아무리 천한 기생의 몸이기로 적에게 붙어 호강을 해?”
그러나 김군관만은 달랐다. 적이 부산포로 상륙하여 승승장구해 쳐 올라올 제, 둘이는 조용히 만나 얘기한 것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지 않아요? 고기값이라도 해야지!`
계집은 적병을 밀치고 성가퀴 위로 상반신을 드러내며 깁을 찢는 듯한 목소리로 거듭해 외쳤다.
“우리 오라버니, 어디 계슈?”
“오! 월향이냐? 나, 예 있다.”
원래 목소리대로라면 천지가 진동하겠지만 맥빠진 목소리로 응답하자,
“오라버니, 얼마나 고생하셨소? 우리 장군께 얘기해서 같이 있자고 했으니 이걸 타고 올라오셔요.”
성 위에서 내려주는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양을 보고, 정체를 모르는 이는 아마 무척 욕했을 것이다.
“장군님! 저의 니이쌍이에요. 여러날 굶었다는군요. 내, 밥 먹여서 쉬게 하고 올라 올께요.”
“오냐 오냐. 아암 그래야지.”
푸짐하게 차린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둘이는 의견을 모아 여자는 저녁식사 때 적장에게 술을 한껏 권해 먹였다. 잠시 후 적장은 의자에 벌렁 기대어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데, 화경같은 두 눈깔을 부릅뜨고 양손에 칼을 뽑아 들었으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버릇이 그래요, 자고 있는 것이니 자! 어서.”
김응서는 여자가 구해다 준 칼을 뽑아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내리쳤다. 워낙 능숙한 솜씨라 목은 단칼에 떨어졌는데, 그래도 놈은 두 칼을 차례로 던져 하나는 천정에 꽂히고 나머지는 기둥에 깊이 박혔다고 기록에는 나 있다. 상투를 쳐들어 화롯재에 눌러 피를 멎게 해 허리에 차고, 그 곳을 떠나려니 여자가 매달린다.
“제발 나를 데리고 가 주셔요.”
혼자 몸도 안전하게 빠져나갈지 말지한데, 연약한 여자를 데리고? 두고 오면 영락없이 놈들 손에 죽을거고...
망설이는 양을 보자 여자는 눈을 꼭 감으며 부탁하는 것이다.
“놈들에게 당하느니 당신 손에 깨끗하게 죽겠어요.”
차마 못할 짓이건만 김응서는 아직 피가 뚝뚝 흐르는 그 칼을 휘둘렀고, 여인은 비명 한마디 없이 합장한 자세로 고꾸라졌다. 이리하여 평양 수복에 세운 공로로 김응서는 경상병사로 승진하였고, 난이 끝난 뒤 사명대사와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 화의를 성립시켜, 선무일등공신에 올랐다.
계월향에 대하여는 달리 포상한 기록이 없으나, 논개의 그것처럼 평양의 기생들 사이에서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귓속에서 파랑새가 나오더니
조선조 시대에 훌륭한 정승이 여러 분 있었으나, 초기에는 황희, 후기에는 약현대신 김재찬을 꼽아, 황금으로 양쪽 마구리를 장식했다고들 한다. 그 황희 정승은 청렴하기로 이름났고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인데, 특히 공사를 엄격히 구별한 그의 처신은 높이 꼽을 만하다. 하루는 방에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정경부인이 곁에 와 상의하는 것이다.
“저녁거리가 없는데 어떡하죠?”
나룻이 석 자라도 먹어야 샌님이라는데, 일국의 영의정댁에 끼닛거리가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감은 천천히 눈길을 돌리면서 조용히 일렀다.
“그런 것도 정승에게 상의하여야 하오?”
부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들의 철부지 어린 것들이 무릎에 올라 앉고, 오줌을 싸도 괘념치 않았으며, 여자 하인들이 서로 싸우다 달려와서
“대감마님! 아무개년이 이리저리 하길래 쇤네가 저리이리 했는데 쇤네 말이 맞습죠?”
“오냐! 네 말이 맞다.”
이번엔 상대편 되는 애가 달려와
“대감마님! 아무개년이 글쎄 요러요러한 짓을 했길래, 쇤네가 이러이러하게 나무랐는데 쇤네 말이 맞습죠?”
“오냐 오냐, 네 말이 맞다.”
마침 다니러 와서 곁에 앉았던 처남되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아이, 형님도! 이년은 이리하였고 저년은 저리하여 잘잘못이 뻔한데, 아무거나 다 옳다시니 그런 처사가 어디 있어요?”
“그래 그래, 자네 말도 옳으이.”
그가 나랏일을 이 모양으로 처리했다면 큰일날 일이겠지만 그게 아니다. 하루는 아침에 사진할 양으로 사모관대를 갖추고 의자에 앉아 평교자가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 부인이 무슨 일인가 그 방엘 들어서다가 놀라서 멈칫하고 섰다. 그 전신에 넘쳐흐르는 위엄에 그만 눌려 버린 것이다. 대감은 빙싯이 웃으며
“지금에야 우리 마누라 - 높은 분이 자기 부인을 부르는 호칭, 젊은 사람이 어른 앞에서 이런 말을 쓰는 건 큰 잘못이다 - 가 정승을 알아보는군!”
사를 떠나 오직 정도만을 걸어, 수십년 조정에서 지내온 그에게는 유한 가운데도 허튼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가 높은 연세로도 조정의 수반으로 세종대왕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을 때, 김종서가 그 아랫자리에 있었다. (황정승은 문종 2년 91세로 작고하였고, 김종서는 그보다 27세나 연하다.)
그런데 툭하면 그를 불러세우고 호되게 나무라는 것이다. 꾸짖어도 보통으로 꾸짖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체통을 내세워 그 결과로 파생될 앞으로의 일까지를 쳐들어서 장황하게 나무라기를 자주 하여서, 약간 후배되는 허조가 옆에 있다가 넌지시 간하였다.
“젊은 사람치고는 일을 차분하게 잘 처리해, 지금 조정에 그만한 인재가 없는데, 같은 일을 놓고도 툭하면 김종서만 불러서 꾸짖으시니 그 저의를 모르겠소이다.”
“그만한 인물이기에 나무라는 것이오. 다음 세대에, 우리 지위에 서서 큰일을 처리할 인물은 그 밖에 없기 때문에 옥성시키려고 그러는 것이죠.”
그 뒤 김종서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함경도 지방을 개척하는 함길도절제사의 중책을 맡았는데, 그 자신도 대왕의 지우에 감격하여
“내가 있더라도 위로 성군을 받들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감격하였고, 세종대왕도 그를 보내고
“내가 있다 하더라도 김종서 같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더라면, 이번 일은 생의도 못했을 것이다.”고 그를 신임하였으니 가위 수어지교라고 할만한 일이다. 그무렵 어느날 아침 일이다.
황희 정승이 소세를 마치고 머리를 매만지다가 부인이 들어서니까,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부인! 이건 부인만 알고 있지,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지 마오.” 라고 미리 소금을 뿌리고는 이렇게 잇는다.
“글쎄 낯을 씻는데 왼쪽 귀에서 요만한 파랑새가 나오며, 펄펄펄 저기께로 날아가지 뭐요. 보도 듣도 못하던 기이한 일이라 무슨 징존지? 부디 아무에게도...”
그런지 대엿새 뒤 일이다. 황정승이 대왕을 가까이 모셔 앉았는데,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경의 귀에서 파랑새가 나와서 날아갔다는 얘기가 들리니 무슨 소리요?”
황정승은 부복하며
“다른 일이 아니오라, 닷새 전 아무날 아침 세수를 마치고 나서, 절대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토를 달아 신의 노처에게 부러 말한 것이옵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신신당부했건만, 그것이 온 장안을 돌고 돌아 상감마마께까지 도달하였지 않았습니까?“
다시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지금 김종서가 국가의 전병력을 거느리고 함길도 경영에 나서고 있사온데, `만약에 그에게 흑심이라도 있는 날이면...` 하는 말이 은밀히 돌고 있사옵니다마는 신의 목을 걸고 보증하옵니다. 김종서는 만의 하나 그럴 인물이 아니옵니다.”
대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늙은 대신을 안아 일으키며 울먹였다.
“알았소, 알았소. 경의 그 성충을 누가 당한단 말이오.”
성군도 승하하시고 노정승도 세상을 떠난 뒤, 나라안의 신망을 온몸에 받던 김종서는 혁신세력의 기습을 받아 허무하게 세상을 마쳤다. 그것도 이 나라의 운이었든지...
마음 씀씀이는 어질고 착해야
한국사에 관해 얘기하자면 꼭 외워두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무슨 왕대에...`하면 대충 어느 연대쯤인 것은 판단이 가야 하는 건데 앞뒤 왕의 존호를 대고 서력으로 연대를 맞추고해야 이해가 간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 전
`세`자가 두 번 나오는데 먼저 어른이 세종, 나중 분이 세조며,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났고, 선조 때는 임진란, 인조 때는 병자호란을 치뤄야 했다.
순자가 두 번 나오는데 먼저 분은 순조, 뒤의 분은 맨 나중 빈 자리를 지키다 물러난 순종이시다.
셋째줄의 현종대왕 아버지가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온 효종이시고, 아드님이 당파 싸움에 휘말리어 장희빈의 파란을 겪은 숙종인데 비해, 현종대왕은 15년 동안 비교적 무풍지대에 왕위에 있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간 분이다.
그 어른이 아직 세자로 계셨을 때 일이다. 누가 새끼곰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쳐서 대궐 뜰에 놓아두고 길렀는데, 이놈이 미련하기는커녕 사람을 따르고 재롱이 여간 아니다.
본시 산간지대에서는 곰을 어려서부터 데려다 길러, 방아를 찧거나 장작을 패게 하는 등 일을 가르쳐서 부리기도 한다는 것인데, 평화로운 환경에서 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받다보니 대견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본성은 속일 수 없는 것이어서 무럭무럭 자라나 뼈대가 굳어져 가고, 때로 성을 내어 이를 드러내 보이든지 하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래 주위에서는 귀한 어른들을 모신 뜰안에서 자칫 무슨 사고라도 내든지 하면 큰일 아니냐고 소리없이 처분해 없애자는 공론이 돌았다.
이것을 풍편에 전해 듣고 세자는 그러시는 것이다.
“어려서야 귀염도 받겠지만, 자라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여지껏 아껴 기르던 것을 어찌 차마 그런단 말이냐? 사고만 안내면 되는 것이니, 저 살던 고장에서 마음껏 뛰놀게 깊은 산중에다 풀어 놓아 주려무나.”
신하들은 땅에 엎디어 인자하신 처분에 눈물을 흘리며 감복하였다.
“지당하신 분부인 줄로 아뢰오.”
그리고는 이 어른이 왕위에 오르시면, 그 타고 난 성품대로 자비로운 정치를 하실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지만, 어머님의 사랑을 모르며, 구중궁궐의 눈치꾸러기로 자란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대왕을 모시고 대궐 후원을 거닐었을 때 얘기다.
이 역시 놓아 먹이는 사슴이 아마도 평화롭게 기른 때문이라 무척 사람을 따라서 콧등을 긁어주면 좋아할 정도로 길들었는데, 그중의 한 놈이 신방등을 핥았더란다. 가만 두고보아도 좋고, 싫으면 발을 빼면 될 것을 세자는 짜증스럽게 그놈의 얼굴을 연거푸 찼다.
부왕이신 성종은 장차 만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할 귀한 신분에 있으면서, 그러면 못쓰는 거라고, 이 역시 그냥 타이른게 아니라 좀 따끔하게 꾸지람을 하셨던 모양이다.
훤칠한 키에 신하를 모아 잔치 열기를 좋아했고, 건강을 해쳐 피를 토혈하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하루저녁도 여색을 가까이 않은 날이 없다던 풍류대왕 성종께서 무절제한 생활이 화근이 되어 38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버렸을 때, 세자는 아바마마의 승하에 눈물을 흘리긴커녕 활을 얹어 가지고 곧장 후원부터 찾았다.
그러고는 그때 그 사슴을 찾아내 한 살에 쏘아 죽이는 것으로 첫 공사를 삼았다니 옮기기조차 끔찍한 얘기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한비자가 쓴 책 <설림>에 이런 얘기가 실려서 전한다. 한창 나라 안이 어지럽던 전국시대의 한 조그만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맹손이라는 노나라의 군주가 사냥을 나갔다가 예쁜 아기사슴을 한 마리 붙잡았다. 아마도 몰이꾼들의 함성에 겁을 집어 먹은 어미사슴이 저도 모르게 내달려 가버려, 아기사슴이 혼자 아장아장 나섰다가 눈에 띈 모양이다.
맹손은 부하가 안고 온 아기사슴의 초롱초롱한 눈매를 보자 별다른 생각없이 전서파라는 부하에게 일렀다.
“저것 좀 네 수레에 실어 가지고 돌아가자.”
궁전에 돌아 오는 길로 진서파를 불러 그 아기사슴을 바치라고 했더니,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놓아 주었으니 죽이시더라도 그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뭐야? 제멋대로 놓아줘?”
“예! 어미가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오며 하도 애처롭게 울어대기에 그만...”
“집어쳐라 이놈, 누가 널더러 인정 베풀라더냐?”
그는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 집에서 근신하고 있는데, 몇 달이 지나 소명이 내려서 들어갔더니 벼슬을 높여 공자의 보호역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곁의 사람이 간하듯이 그랬다.
“먼저 제멋대로 사슴을 놓아 주었으니 벌받을 놈인데 오히려 중책을 맡기시다니 혹시 덜 생각하신 거나 아니온지?”
그에 대한 임금의 대답이 들을 만하다.
“사슴새끼도 차마 어쩌지 못하는 놈이니, 내 아들에게야 오죽 잘하겠나?”
칡넝쿨로 다리를 놓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거의 무인지경같이 밀고 올라왔으나, 날이 갈수록 정세는 달라져 갔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처에서 봉기해 의병이 되고, 또 자진해서 군세에 가담하여 왜병을 괴롭혀대니, 그들은 빼앗은 땅을 점의 형태로 연결하여 유지했을 뿐, 한때도 마음놓고 쉴 겨를이 없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명나라의 십만 대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해 내리 밀었을 때, 당대의 인물로서 도체찰사의 임무를 띠고 그 이름을 드날렸던 서애 류성룡이 그의 수기인 <징비록>에서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싣고 있다.
임진년(1592년)의 이듬해인 계사년, 남하해 내려오는 명나라 군사의 앞을 서서 나오며 주선을 하는데, 때마침 겨우네 얼었던 임진강이 녹으며 얼음덩어리가 강을 덮어 떠내려 오니까 군대를 건네야겠으니 다리를 놓으라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요구해 왔다.
강에 떠 있는 배를 모아 연폭해서 서로 잇고 그 위로 판자를 깔아, 공식대로의 주교를 놓았으면 좋겠으나 배는 모두 하류쪽 강 어구에 있고, 흘러내려오는 얼음덩어리에 막혀 배를 끌어 거슬러 올라올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시일을 지체할 수는 없고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류성룡이 말을 몰아 금교역에 이르러 보니 황해도의 수령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명나라 군사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벌판 가득히 웅서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봉현령 이희원을 불러, 수하에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수백명은 족히 된다고 대답했다.
“곧장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칡을 있는대로 끊어서 내일 일찍 임진강 나루까지 지워가지고 오게. 지체해서는 안되네.”
이튿날 현장인 임진강엘 달려가 보니 경기감사랑 여러 사람이 모여 있건만 멍청하니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있다. 곧장 우봉 이희원의 사람들이 가져온 칡으로 백사장에서 동아줄을 틀게 하였다. 처음에 꼬기 좋을만한 굵기로 틀어 그것을 합쳐서 꼬으니, 굵기가 두어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강을 여러번 가로지르고도 남는다. 한편, 강 양쪽에다 두 개씩 튼튼하게 기둥을 박고 장목을 가로 걸치고 동아줄의 양끝을 걸게 했다.
그러나 곧 중간이 쳐져서 물에 잠겨 버리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에 인력만 낭비했다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천명이나 넘는 군중에게 제각금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동아줄에 꽂아 일제히 틀게 하였다. `영차 영차` 소리를 내며 바싹 틀어서 당기는 그제서야 다리가 팽팽하게 물위로 뜬다.
이렇게 해서 열다섯 가락을 나란히 걸친 위로 버들가지를 쳐다 깔고, 다시 풀과 흙을 펴니 평지나 다를 바 없다.
“자! 이제들 건너가라.”
명나라 군사들은 좋아라고 채찍을 휘둘고 신이나서 말을 달렸고 포차랑 군기들까지 잇달아 건너다 보니, 이 견고한 줄다리도 많이 쳐져서 중간쯤에는 많은 보병들이 강 위쪽 얕은 여울을 발벗고 건너게 되었지만 별로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본래 명나라 군사들은 `우리는 구원병이로다` 하는 우월감에서 `너희 나라도 과연 인물이 있나? 어디 좀 보자` 하는 식으로 난제를 던지는 일은 전란 중에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중의 하나로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땅에 들어서자, 물론 서로가 필담이나 통역을 거치지 않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무언가 달라는 기색이다.
“내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너희들 나라를 구하러 나왔으니 내어 놓으라.”
그것이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금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게고... 그때 접반사로 나갔던 한음 이덕형이 수하들에 들려 가지고 간 기다란 상자에서 두루말이로 된 문서를 꺼내, 이 역시 말없이 이여송 앞으로 쑤욱 내밀어 건네었다. 이여송이 그것을 받아들고 펼쳐보고는 빙그레 웃는다. 말로 하진 않아도 속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이 나라에도 인물은 있구나!”
아무 준비도 없이 기다렸다면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통천문하여 날씨 돌아갈 것을 예측하고, 하달지리하여 땅의 지세와 교통로, 이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과 작전에 방해가 될 지 모를 여러 가지 조건들, 바로 그런 것들이 적힌 문서였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는 전략이 서질 않는다. 그 뒤 류성룡은 자신의 한 일을 반성하여 이렇게 썼다.
“그 당시 좀 더 많은 칡을 장만하여, 한 삼십 가닥쯤 동아줄을 건너 질렀더라면, 나머지 군사들도 여울을 발벗고 건너지 않았을 터인데...”
그리고는 그 뒤 그는 <남북사>란 책을 보다가 옛날 전국시대 때 제나라가 양나라를 쳤을 때,주나라와 힘을 합쳐 이를 막았는데, 강의 좁은 목에 큰 새끼줄을 갈대로 엮어 다리를 놓고 군량미를 옮겨 쌓았다는 기사를 읽고는 깨달았다. “내가 처음 생각해 낸 줄로만 알았더니, 옛날에 이미 써먹은 적이 있는 방법이었구나!”
그러나 그러한 좋은 착상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의 거북선도 그렇고, 최윤덕이 군사들에게 풀빛옷을 입혀 수풀 속을 통해 적의 배후로 숨어들게 한 것도 그렇다.
잠도 제대로 안자고 골똘히 연구한 끝에라야 영감이 떠오르지, 아무에게나 그렇게 쉽사리 떠오르는 예지가 아닌 것이다.
신으로 남아있는 임경업
조선조 중엽에 임경업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지략이 뛰어나 명성이 일세를 덮어 국내는 물론이요, 이웃나라에까지 그의 명성을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만주족이 일으킨 청나라와 불화가 생겨 나라에서 국방에 크게 신경을 쓰게 되자 인조대왕은 그를 의주 부윤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적들도 어쩌지 못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의 14년(1636년) 겨울, 적은 대군은 거느리고 꽁꽁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침범해 왔으니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적들은 임경업 장군과 마주치기를 꺼려서 압록강 중류로 건너 왔기에 장군도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조정은 두달 가까운 동안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여 버티다 끝내는 삼전도에 내려와 굴욕적인 화평외교를 맺음으로써 국란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명나라의 마지막 저항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가도를 공략하겠으니, 군사를 내어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이미 전쟁은 끝나 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 있는 터라, 울며 겨자먹기로 아니 따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유림과 임경업 두 장군이 징벌되었는데, 유림은 병자호란중 유일하게 잘 싸운 것을 인정받아 청나라에서 요구해 온 것이다. 군사를 몰아 가도가 마주보이는 육지까지 진군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부대에게 선봉을 서라고 한다. 명나라의 잔여군이 맹렬하게 저항하면 우리가 많이 다치고 청의 군대는 편하겠다는 욕심이요, 또 처음 합동작전을 하는데 우리 군대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임경업 장군은 그들의 요구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군사를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명의 잔여 군대는 끝까지 버티는 데 쓰려고 대단한 양의 보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보화를 우리 군대가 차지하게 될 것이니 한밑천 잡아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의 전쟁은 군사들에게 약탈할 기회를 주어 용기를 북돋우던 터라 그런 유언비어가 통했다.
이 정보는 곧 그들의 수뇌부에 알려졌고 싸우지 않고 우리 차지의 보화를 그냥 새치기한다면 무슨 맛에 싸우겠냐는 의견이 일어 선봉은 청의 군대로 교체되고, 우리 군대는 오랫동안 친교를 맺어 온 명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고 뒷전에서 구경이나 하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부지런히 나무를 켜서 조그만 배를 수없이 만들고, 그 배에 바퀴를 달아 캄캄한 밤을 틈타 군사들이 나눠타고 섬의 뒷편으로 상륙해, 그것을 끌고 산등성을 기어올라 정면에서 대적하고 있던 청의 군사와 합세하여 일시에 공격하니 성안은 크게 혼란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도독, 심세구 등 200여 명의 명나라 장성이 모두 죽고 절개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린 부녀자가 무수하였다.
물론 청군은 무수한 보화와 가축 등을 싣고 돌아갔으나 이 싸움으로 청군사도 피해가 컸다.
이후 임, 유 두 장군은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이 우리 조정에 처벌을 의뢰하여 벼슬이 깎이고 하였으나 목숨은 무사하였다. 그런 뒤의 일이다. 임경업이 청나라 군대의 부장으로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느날, 군사들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 청의 황제는 재미있는 경기를 하나 제안하였다.
맨손으로 40명씩을 거느려 진을 치고는 번갈아 습격해서 공격한 쪽이 잡히거나 지켜내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들은 머리를 짜서 제각기 진을 쳤는데 그 모양이 각각이다. 임경업이 40명으로 십자를 그려 서로 등을 대고 서게 하니, 진이 허술해 보였다. 이어 다른 부대가 쳐들어 오니 금시에 진형을 바꾸어 겹으로 둘러싸고 몽땅 붙잡고 말았다. 진이란 그냥 줄로 늘어서서만 되는 것이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대형을 바꾸면서 다음 태세에 임하는 데 묘미가 있다.
한 예를 들어 산골짜기 양쪽으로 적의 복병이 있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줄을 맞춰 진군하면 복병은 적의 세력을 둘로 쪼갤 생각에 대열의 한복판 쯤으로 쳐 나온다. 이때 둘로 짤린 후미의 군대는 크게 놀라 후퇴하는 것같이 물러나고 숨어있던 적병이 앞으로 몰려 나왔을 때 포를 쏘면서 앞서가던 한쪽의 군대도 되돌아 복병을 협공하게 되니 적은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그런 꼴이 되는 식이다.
임장군도 그렇다. 오는 적을 잡아야겠는데 밀집부대로는 그것이 안된다. 그래서 대열을 흐트려 놓은 것도 모르고 적은 덤벼들다가 혼이 난 것이다. 그 뒤 임경업은 끝까지 혼자의 몸으로 국세를 돌이켜 보려고, 무진 애를 쓰며 파란 많은 일생을 보내다 결국 청의 미움을 받아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의 중책을 가지고도 살짝살짝 전쟁을 피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던 김자점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경업에게는 절세미인인 소실이 있었는데 김자점은 그 여인을 자기 소유로 할 욕심으로 임경업을 죄로 얽어 모진 형벌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그도, 왕명도 없이 유능한 인재를 함부로 죽였다는 죄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는데 전란 때부터 그의 간사한 행동에 분개한 백성들이 그의 시체를 발기발기 찢었다 하여 `자점이 점점이라.`는 말까지 오늘날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서해 연평도를 중심으로 토속신앙에 임경업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미처 풀어보지 못한 그의 재능과 억울한 죽임을 동정하는 민심이, 그를 신의 영역으로까지 받들고 있는 것이다.
옳게 들어온 재물이 아닐 바에야
조선조 중기에 인조반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승평부원군 김류는 성격이 몹시 거칠었다.
자기 아버지 김여물이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싸우다 전몰하였고, 또 아직 위에 오르기 전의 인조대왕과 연줄이 닿아서 반정에 참획하였던 때문에 신임과 총애가 두터웠다.
사람은 그럴수록 몸을 낮추어 겸손하고 사생활에 검소해야 하는 법인데 그는 그렇질 못했다.
내가 세운 공으로 지위가 높아 이만큼 사는데 누가 나를 어쩌랴 하는 식으로 살았느니, 점잖은 행신은 아니다.
거기다 누가 무어 갖다 주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내관이 그댁에 갔다가 직접 본 얘긴데, 안에서 부인이 물건을 받고는 물건 목록을 언문으로 적어 하인을 시켜 내어보내며, 이러이러한 소청이라 전갈하면, 그 뇌물로 바친 분량을 보아 피륙 같은거 백필에 차지 않든지 할때, 대단히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요런 적은 물건을 갖고 어떻게 어른께 바친단 말이냐?”
그래 대궐같은 집을 짓고 호화롭기 한이 없는 생활을 하기에, 어떤 사람이 보다못해 충고하였더니 그 하는 소리 좀 보라.
“내가 주상을 도왔기에 우에서 -임금의 언동을 말할 때 이렇게 쓴다- 왕위에 오르셨는데, 나라고 이 정도 못하고 산단 말인가?”
후에 같은 혁명동지이면서, 공로에 비해 보답이 적다는 불평을 품고, 평안병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쳐올라올 제, 조정 안에서 어쩔줄을 몰라 하는 중에, 말하자면 예비검속으로 잡혀 갇힌 조정의 고관이 기자헌, 김원량 등 49인이나 되었다.
이들의 처리를 놓고 역시 반정 원훈인 이귀와 의견이 상치되었다. 이귀의 주장은 그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거친 점잖은 분들이라 내응하거나 그런 짓을 할 분들이 아니니 살려두자는 것이고, 김류는 한 번 터뜨린 터에 싹쓸어 없애 버려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다 조정의 공론이 김류의 의견 쪽으로 기울어, 결국 49인의 원로들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 자리에 참석했다 나온 권첩이라는 분이 한 말이 있다.
“승평 김류는 반드시 후사가 끊어질 게고, 연평 이귀는 후손이 번창하리라.”
그러더니 뒤에 사실로 그리 되었다. 여러해 후 그동안 미묘한 관계에 있던 청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드디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말았는데,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피난하기로 하고 누구면 능히 지켜낼 것이냐고 했더니, 김류는 경징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자기 아들을 추천하고, 다른 고관들은 그리 잠자코 원로대신의 하는데로 따랐다. 씨는 못 속인다고, 그런 환경에서 제 아비 하는 양을 보며 자란 김경징은 왕실보다도 저희 집 가족과 보화를 옮기기에 바빴고, 강화에 들어가서도 염화가 가로 놓였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날마다 술이나 마시며 질탕히 놀다가, 힘 한번 못 써보고 함락되어 어이없는 비극을 당하고 만다.
전례에 없이 창피한 화약을 맺고 조용해지자, 김경징은 죄를 물어 약사발을 받아야 했으니, 제 아무리 나는 새도 떨구는 아비 배경이 있어도 이것만은 도리가 없었다. 외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목숨이 질겨, 김류는 그후도 조정에 남아 다시 영의정을 지내는 등 지위를 유지하다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효종 때 인평대군이, 이미 권력을 잃어 쓸모없이 된 그의 큰 집을 빌어 쓰자고 했더니, 희똑희똑 외롭게 살아 남은 손자가 듣질 않아서 다른 죄목을 씌워 귀양을 보내는데, 저의 할아버지 신주를 모시고 가는 것으로 보고 모두 그랬다.
“승평 김류가 죽어서도 귀양을 가네 그랴!”
그러다 그의 자손에 백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좀 달랐다. 조상 덕분에 고을의 원을 하고 물러나 스스로 오출이라고 하였는데 활달하면서도 약간 세상을 비꼬아 보는 성격이었다.
박필주라는 분이 이조판서 자리에 있을 때, 그의 댁에 가 앉았다가 갑자기 오출이 복통을 일으켜 자반뒤집기를 하는 것이라. 어쩌면 좋으냐니까, 다른 약은 소용없고 꼭 순금을 백비탕에 끓여 먹어야 되는데 구할 길이 없다고 한다. 박판서가 자기 망건의 금관자를 떼어서 달여 먹였더니, 여전히 아프다면서 하는 소리 좀 보라.
"그거 겉만 금이지, 속은 구리인가 보구려!"
실속에 치우친 박판서의 명성을 빗대어 슬그머니 욕해준 것이니, 많은 행동이 그러하였다.
오출은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아 살림이 요부했는데, 물론 승평부원군이 당대에 긁어 모은 것이라서 매양 말하기를,
"이거 모두 옳게 들어온 재산이 못돼. "하고는 닥치는대로 헤피 쓰고는 돌아보지도 않으니, 조상 덕분에 살면서도 그 조상이 한 짓을 모두 부담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러면서 자탄조로 시를 지어
"많은 벼슬아치는 천지간에 활개치고 다니건만, 오출 나만은 푸서리 사이에서 나직이 읊조리노라." 하였다.
그리곤 그 많은 재산을 흩어 다 날려 버리고는 말년에 충청도 보은 땅 토굴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거 무슨 치료법이 그렇소?
옛날 평양성 안에 큰 부자가 한 집 있었는데, 영감 마누라 해로해 살건만 소생이라곤 무남독녀로 딸 하나라. 그 아이가 차차로 커가니까 성중 총각들 사이에서 자주 화제에 올랐다.
"어떤 놈이 재수가 좋아서 그 집에 사위로 들어가 그 많은 재산을 차지하게 되려누?"
물론 어른들 사이에서도 얘깃거리가 되고, 입심 좋은 부인네들은 부지런히 중매를 들려고 그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영감이 출입했다 들어오더니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나, 우리 아기딸년 신랑감 하나 골랐지."
할머니가 솔깃하여 묻는다.
"어디 사는 누구의 몇째 아들이야요?"
"그게 아니고... 저 대동문 안에서 포목전 하는 이주부 있잖소? 그 집에서 심부름하는 총각놈 있지? 갸 괜찮아 보이데."
"뭐야요? 그놈은 작년까지 쪽박들고 남의 집 문전으로 다니며 비럭질 하던 거렁뱅이 아니요? 아니 우리 아기딸년이 어떤 아인데... 금지옥엽 같이 키워가지고 그래, 우리 집에 밥이 없소? 돈이 없소? 뭐가 부족해서 그따위 거러지한테다..."
"쉬이 떠들지 말고... 그러기에 여자는 속이 좁다는 거야. 내 얘기 좀 찬찬히 들어보오.
제 집, 제 부모, 동기 의젓하게 갖춘 놈이 내 집에 데릴사위라고 들어왔다가 저희들끼리는 정이 들어 씨공달공 하다가도 늙은이들 귀찮다고 훌쩍 나가는 날이면, 우리 두 영감할멈은 끈 떨어진 됫박이야. 그랬다고 무를 수가 있소? 죽고 나면 재산은 다 저희들 거 되는 거고... 차라리 돌아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놈을 데려와야, 사위겸 내 자손 되는 거지. 안그렇소?"
"!"
"그러지 말고 그 전방엘 한번 가보오. 내가 보기엔 그늘에서 자란 아이답지 않게 애가 붙임성이 있고 괜찮아."
할머니가 다녀오고는 포목전 주인 이주부를 수양아버지로 삼아 혼인절차를 밟게 되니 평양 성중은 또 한번 그 얘기로 들 끓었다.
이제 혼인날이다. 부자의 단 하나밖에 없는 외딸이라, 돈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차려서 온 성안 사람들이 잔치를 한 번 푸짐하게 얻어먹고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던데... 이 내 팔자 기박하여... 어 취한다."
손님도 다 헤어지고 이제 가족끼리만 남아 신방을 꾸몄는데 불끈 방에서 신부가 소릴치며 뛰어나온다.
"어마나! 이걸 어째요? 신랑이 죽어서 뻣뻣해요."
모두들 놀라서 달려가 불을 켜고 보니 진짜 뻗어 있다. 용하다는 의원집엘 달려가고 무당집, 판수집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그런데 길 건넛집 할멈이 와서 그러는 것이다.
"우리집에 손님 한 분이 와 계신데 자신이 보면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그러셔요. 용한 의원이라대요."
어서 오시라고 해서 보였더니.
"이거 일이 급하군, 과부 한 50명 구할 수 없겠소? "
“과부라니, 늙은이요? 젊은이요?"
"상관없으니, 빨리들 오래서 마당에 늘어앉아 큰 소리로 울라고들 일러요. 돈 뒀다 뭣에 쓰오? 행하를 미리 후하게들 주고..."
이리하여 잔칫집은 삽시간에 초상집이 되어 애고 대고, 처음엔 돈에 팔려 형식으로 우는 척 하다가 정작 제 설움에 복받쳐 목을 놓고 울어댔다. 신랑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앉았던 이 의원은 이제 그만들 울라고 손을 저었다. 신랑 얼굴에 핏기가 돌고 이내 눈을 떠서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약낭에서 소합원 한 알을 꺼내 더운 물에 개어서 흘려넣어 주니까, 그것을 삼키더니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는다.
"자 그럼, 사랑으로..."
안내를 받아 큰 사랑에 들어서니 평양 성중의 내노라는 명의들이 다 모여있다.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거 무슨 치료법이 그렇소?"
"예, 원리는 다 같은 거죠. 이열치열이요 이냉치냉이라. 열은 열로 다스리는 거 아닙니까? 앞집에 와 묵으면서 듣자니 신랑의 자란 환경이 순조롭지 않답디다그려. '그래, 이거 병 나지' 하고 떠나는 걸 하루 물리고 대기했는데, 것 보셔요. 큰일날 뻔했지.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 병이 난다고 해요. 평소에 수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웬만한 격변에 견디지만, 그렇질 못하면 으레 병이 나죠. 사업에 실패하고 피를 토한다든지...
그런데 이번 환자는 너무나 행복해진 환경에 그만 황홀해서, 여직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울음을 터뜨려야겠는데, 경사스런 자리에 그럴 수도 없고, 겹치고 겹친 설움을 꿀꺽 삼켰다가 변을 당한 거예요. 하니 설움 중에서 과부 설움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소? 이것을 풀어서 뭉쳤던 슬픔을 끌어낸 거지요."
"아 참, 성함과 거처가 어떻게 되시더라?"
"나 성천 사는 이경화라오."
"온 저런!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은 이렇게 뵐 불이야..."
그는 인조 7년에 나 숙종 32년까지 산 인물로, 침구에 뛰어났고, 저술까지 있어 의학사상에 발자취가 뚜렷한 분이다.
옭아채서 당겨서는 퍽!
임진왜란 때 얘기다.
적은 오래전부터 침공을 준비해왔고, 더구나 그들은 저희끼리 자나깨나 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 직업군인이라기보다 전쟁버러지들이다 .조선조 개국이래 2백년간이나 평화에 젖어, 가뜩이나 착한 심성에 오손도손 자급자족으로 농사를 즐기며 살아오던 우리나라로선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이 독한 종족들은 저희들 말마따나 거의 그냥 걷는 정도의 속도로, 큰 저항 받지 않고 소백산맥의 분수령인 조령을 넘어섰다. 유명한 신립 장군이 천험의 요새인 조령의 수비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거하다가, 전멸을 당한데 대해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장수나 그의 측근 장교들이 제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훈련받지 못한 이 순하디 순한 백성으로 불시에 조직된 군대가 처음 듣고 보는 조총이 빵빵빵빵 울리면서 곁의 사람이 피흘려 쓰러지는 것을 보고 뿔뿔이 거미새끼 흩어지듯 하는 날이면 그나마 허사여서, 죽을 땅에 놓고라야 용기를 낼 수 있다는 원리를 좇아, 달천강을 등뒤로 두고 버텼던 것이라고, 그를 두호하는 측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사실로 수하 군대가 뜻대로 움직여 차츰 가다듬어져,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관군도 양주 게넘이고개에서 신각이 패잔병을 수습해 북진하는 적을 요격 전멸시켜 차츰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다만 신각은 상관인 도원수 김명원의 절제를 받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의 승전보고가 정부에 도착하기 직전에 처형당하였다. 이 무렵 임중량이라는 분이, 조상은 울진사람이지만 평양 못미쳐 중화땅에 살았는데, 적이 평양을 포위하고 남은 병력으로 사방 노략질하고 다니는 꼴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부모님이 돌아가 복상중이었으나, 이런 난국에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수 있겠느냐고 떨치고 일어나니, 그의 명성과 인품을 흠모해 따른 군정이 4백여 명이나 되었다.
때는 중화군수 김요신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버려 백성들은 어쩔 줄 몰라 떨고 있는 터라, 곧장 그들을 독려하여 성을 수축해 탄탄히 쌓고 둘레로는 깊은 도랑을 파서 바닷물을 끌어 해자를 만들어 쉽사리 접근 못하게 해 놓고는, 기회를 보아서는 나아가 적을 괴롭혀대니 놈들은 배후에 이런 적을 두고 평양 공격에 전념할 수가 없어, 대거해서 이 조그만 성을 공격해 왔다.
임중량이 말을 타고 나와 대적해 몇합을 싸우다가 등을 돌려 성중으로 쫓겨 들어왔더니, 적은 우습게 여겨 겹겹이 둘러싸고 들이쳤다. 그런데 적들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많은 병력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무엇이든 유비무환이다. 미리미리 준비한 게 있으면 닥쳐올 근심이 없는 법이라지만,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새삼스레 어떻게 누구를 훈련해 낸단 말인가?
더구나 적은 역전의 용사요, 천하의 독종들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느긋하게 성안의 백성들을 데리고 세상에도 묘한 것을 만들어 냈다. 진흙을 뭉쳐 가운데가 잘룩하게 주먹만한 덩어리를 지어 불에 구워냈더니 단단하기가 돌덩어리같다. 삼베로 꼰 튼튼한 밧줄 끝에다 그것을 달아메고 한 발이나 넘겨 되는 다른 끝을 작대기에다 동여맸다. 그리고는 주민들을 불러서 훈련하는 것이다.
마당 복판에다 굵은 말뚝을 박고, 작대기를 홰홰 돌려 세게 원심력이 생겼을 때 후리치니 끝에 추가 있어 무서운 힘으로 칭칭 감긴다.
"자! 그것을 힘껏 잡아당겨 봐라."
"안 끌려요. 내 몸이 도리어 끌려 가는 걸요."
"그래? 그럼 잘 됐다."
그는 주민들을 갈라 조를 짰는데, 그들 중의 하나는 도끼 자루를 갈아 끼워 아주 길게 해서 제일 무지한 놈이 들게 하고, 눈치 빠르고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 새로 만든 신기한 무기를 들었으며, 몇 사람이 예비로 그의 등뒤에 섰다. 또한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안에서 자유로이 왕래하게 호를 파서 모두가 숨고, 집집마다 있는 가마솥을 떼어다 걸고, 일부는 줄을 서서 물을 길어다 붓고, 통장작을 길길이 쌓아 놓고 물을 끓이며, 한편으로는 바가지에다 긴 자루를 달아서 들고 줄로 늘어섰다.
"자아, 지금이다!"
나아가 싸움을 돋우고 임공은, 숨어 있는 여럿에게 손을 저어 군호하였다.
"이놈의 성이 왜 이렇게 죽은 것처럼 조용하다지?"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는 적의 머리가 성곽위로 드러나자
“위~위~위잉."
채찍을 휘둘러서 맞추니 목과 어깨를 얼러 칭칭 감긴다.
"자아, 당겨라 당겨. 옳지 삼봉이 넌 찍어라."
"퍽."
여기 저기서 놈들의 골통이 뻐개져 나뒹굴었다.
"자, 다음은 물 좀 먹여라."
방패를 머리에 이고 기어올라 마악 벗어버리는 찰나 끓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끼얹어댔다.
"퍽!"
"야, 또하나 깼다."
이리하여 그의 지혜와 용기로 성은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백성들도 무사하였고, 감사는 신나게 그의 공을 조정에 보고해, 포상으로 그에 걸맞는 벼슬이 내려졌다. 그뒤 평양이 수복되고 왜병도 멀리 남으로 밀려난 뒤의 일이다. 거동행차가 그곳 시골길을 지나는데, 봄철이라 그랬든지, 임금님의 연을 맨 군정들의 일부가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돼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나룻이 길게 나 풍신이 아주 좋은 건장한 군인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 앞채를 선뜻 들어서, 모두 무사히 벗어나고 임금도 한숨을 쉬었다.
"저 장사는 어디 사는 누구인고?"
모시고 가던 선전관이 아뢰었다.
"중화 의병장 임중량인 줄로 아옵니다."
"오! 오! 그 채찍을 휘둘러 적을 옭아잡은 장수가 그대던가?"
임금님은 감격의 찬사를 내리고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자손들도 모두 능력을 따라 등용하여, 그의 공을 길이길이 칭송하였다.
비록 행색은 초라해도
조선조 중엽의 명재상이요, 뛰어난 문장가로 월사 이정구라는 분이 있었다. 광해군이 재위하던 혼란기와 병자호란의 격동기를 모두 최일선에서 겪었으며, 좌의정에까지 올라 국사에 진췌한 분이다. 한문학의 대가로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당대의 4대가로 일컫기도 한다.
그런 그가 사생활에 있어 가정을 어떻게 꾸려갔던지 이런 일화가 전한다.
선조대왕은 공주 하나에 옹주가 아홉 분이나 되었으니, 그중의 어떤 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새로 며느리를 맞게 되었을 때 얘기다. 임금의 외손자가 장가드는 잔칫날이라, 우에서도 한껏 기뻐 상류층의 부인들은 모두 모여 즐기라는 특명까지 하달되었다.
옛날에는 남편이 출세하면 부인도 덩달아 거기 맞게 칭호를 내리는 법이어서, 1품재상의 부인이면 정경부인, 정2품관의 아내면 정부인, 정3품 당상관의 마누라님은 숙부인의 첩지를 받는 법이라, 서로 부를 적에도
`정부인, 어서 듭시오.`
하는 식으로 호칭하였다. 그런 상류층 여인들이 모두 모였으니, 그 현란하기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집안에서 누군가가 중국 사신을 다녀오면, 그때마다 그곳 사치품이 바리바리 실려오고, 그런 것을 못 만져보는 계층 앞에서 흐르리하르리 차려 입고 `네가 더 고우냐? 내가 고우냐?` 으시대는 게 사뭇 요샛말로 패션쇼 자리같다. 거기다 국내에서는 나지 않은 값진 항료를 향랑에 넣어서 차고 값진 노리개를 줄줄이 늘여차, 구경하기에 정신을 못차릴판이다.
아무리 나라에서 하사한 넓고 큰 부마댁이라도 온종일 벅적벅적 하는데, 저녁나절 느직이 두 사람이 매는 보교 한 채가 대문, 중문을 거쳐 안마당 깊숙이까지 들어 온다.
`온 저런? 저런 껑청한 가마가 예까지 들어오다니?` 하고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앞채를 쳐들자, 반백이나 넘은 노부인이 그것도 무명 저고리에 베치마 차림으로 나타나는데 아니, 공주님이 신을 거꾸로 신고 쫓아 내려가 부액해 모시고 올라와 대접이 극진하다. 물론 안방 아랫목에 모셔 앉히고 잔칫상을 올렸는데, 일변 공주님과 대화하며 수저를 놀리며 잡숫는 양을 보니, 역시 점잖으신 댁 부인답다. 상을 물리고 나서 일어서려고 하니 공주가 말린다.
“정경부인! 다른 부인들도 와 계시고 하니 좀더 앉아 한담이라도 하지 않으시고...”
“아니야요, 대감께오서 약원도제주로 새벽부터 입궐해 계시고...”
`아니 저런? 정경부인이요. 약원도제주라니? 그럼 어떤 정승 부인이실꼬?`
“큰 아이가 정원에 나아가 있고, 작은 애가 승지로 입직해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있어야 저녁상을 돌봐서 들여 보낼 것이라, 자갸를 이렇게 뵈오니 반갑고 늦갑습니다마는 그만 물러가야겠으니 이해해주셔와요.”
`아니 작은 아들이 승지라? 그러면 월사상공의 부인 아니셔? 아이고머니나! 그런 줄도 모르고...`
그리고는 모두가 각자의 몸에 넘치는 사치한 물건을 걸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는 그런 얘기다. 두 분 아드님은 백주 명한, 현주 소한의 형제분으로, 맏이는 이조판서, 아우는 참판까지 하였으며, 백주의 아드님 일상도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대제학에 뽑혀 드물게 보는 명문으로 치는 가문이다.
이렇게 검소하고, 또 남자들의 식사는 꼭 몸소 돌보아야 하는 가풍이 이런 훌륭한 자손을 또 줄줄이 두게 된 연유일 것이다.
일제 때 이런 얘기도 있다.
일본서 노련한 정객으로 꼽히는 오자끼라는분이 서울 온 길에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만나자고 요청해 왔다.
그래 예의바르게 월남 이상재 선생을 가회동 자택으로 찾았더니, 여덟 칸 짜리 초가집, 추녀가 머리에 와 닿는 오막살이에서 반백이나 된 머리를 깎은 영감이 내다보더니,
“응! 오셨구랴. 우리 응접실로 갑시다.”
`응접실? 이런 집에 살면서...`
그런데 안에 들어가 헌 돗자리를 한닢 끼고 나와, 뒤 등성이 소나무 아래 펴고, 거기 마주앉아 장시간 담화를 나눴더란다. 오자끼가 돌아가 한 말이 재미있다.
“이번 조선에 갔다가 히도이 오야지(지독한 영감태기)를 만나고 왔네.”
대개는 돈이나 권세로 낚겠는데, 이건 안되겠던 모양이다.
늦게 시작한 큰그릇 양연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다. 손을 끌어 조용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욕보여서 스스로 분발해 공부하도록 하는, 좀 거친 수법의 선생을 말한다.
조선 초기 세종조의 문신 양성지의 손자로 양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얘기다.
젊어서 탁형불기하였다 했으니 아마 상당한 왈가닥이었던 모앙이다. 그만한 명문에 났으면서도 글 공부를 안 한데다가 사십이 되어서야 학문을 시작했다 하니, 아마도 무언가 크게 인생의 방향을 틀어 놓을만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옛날이면 초로지경에 들 나이에 공부를 시작할 까닭이 없다.
하여간 커다란 결심을 하고 발분하여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만약에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면 손을 펴지 않으리라.` 왼손을 오므려 주먹을 꽉 쥐고 잠자는 동안에도 펴질 않았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듯이, 그까짓 결심 며칠이나 가랴 할지 모르나, 이 분만은 그게 아니다.
한 일년 공부끝에 문리가 확 트였다 했으니 대단한 속성이다.
시 또한 격이 높아서 한번은 그의 장인께 보냈는데,
책상머리에 등빛이 어둡고(서탑등광암)
벼루에는 물빛이 말갛습니다(연지수색청)
관성(붓)은 바라는 바요(관성오소원)
겸하여 저선생(종이)도 바라옵니다(겸망저선생)
달리하면
`의당 밝아야 할 책상 머리가 어둡다 했으니 초 좀 달라는 얘기고, 벼루물은 까매야 하는 것인데 말갛다니 먹이 있어야겠다는 것이다. 붓도 바라는 것이지만 아울러 종이도 좀 보내 주십시오` 했으니 문방사우라면 본래 먹, 벼루와 종이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벼루 대신 초를 써 넣어서 이 모두를 보내 달라는 얘기다.
무식쟁이였던 사위 솜씨로 지어서 써보낸 이 멋진 시를 보고 그의 빙장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망하는 물품과 함께 장난으로 글 한줄을 써보내기를
양씨 선비가 사십에사(양충의사십)
산당에서 독서하니(도서산당)
아아 늦었도다(오호만의)
이것이 널리 알려져 당시의 멋진 얘기로 전하였다. 그 뒤 중종 19년(1524년) 과거에 급제하여 결심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그제사 굳어진 주먹을 펴니 손톱이 자라 손바닥까지 파고 들었더라고 한다.
물론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로이 승진을 거듭한 사이 소신껏 일해서,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김안로, 채무택 등 권세를 잡아 농간부리던 무리들을 따져서 벌주어 조정 공기를 맑게 하고, 그 공로로 지위를 돋구어 좌찬성에까지 올랐다.
중종37년에 별세했다 하니 18년 동안에 한 일이라, 늦게 시작한 벼슬길이었지만 그의 공적은 다른 사람이 평생 걸려도 못다 할 일을 해냈다 할 만하다. 양연의 호는 설옹이었는데, 그의 이 늦게 결심한 이야기는 미담으로 오래 전해져, 제21대 영조대왕은 이 사실을 듣고 감격해 양충의 사십 독서산당 오호만으로 액자를 만들어 호당에 걸게 하셨더라고 한다. 호당은 독서당이라고도 하여, 과거에 급제한 문사중에서 대제학의 추천으로 특별히 뛰어난 인재를 골라, 비교적 한가로운 벼슬을 주어 요(봉급)는 그대로 지급하면서, 상당기간 자유로이 연구하게 하는 제도였다. 호당은 지금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매봉을 등에 지고 동남향으로 도두룩한 언덕 위에 있었는데, 송파 쪽으로부터 도도히 흘러 오는 한강 물줄기를 정면으로 받아, 시원하기 이를 데 없어 호당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긴 것이었다. 영조는 그 호당에 뽑혀 들어와 연구하는 선비들에게 `너희들도 그를 본받아 더 열심히 공부하라.’ 하는 격려의 뜻을 담아 써서 걸게 하였던 것이다.
착한 뒤끝은 반드시 있다
양주 조씨에 이우당 조태채라는 분이 있었다. 숙종 때부터 벼슬을 하여 우의정에까지 올랐다가, 왕위계승 문제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아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가 중년에 부인 심씨를 잃고 비통해 마음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을 때의 일이다. 판서로서 공적인 일이 생겨 담당 서리가 들어와야 일을 처리하겠는데 새벽같이 찾아와야 할 놈이 해가 높다랗도록 소식이 없다. 대감은 대단이 화가 나서 곧장 잡이를 차려타고 관청으로 출근하였다. 물론 이놈을 잡아들여 볼기를 쳐서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줄 심산이었을 게다.
그런데 막상 서리가 잡혀 들어와서 뜰아래 엎드리며 신상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데, 그 이야기가 애절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놈이 죽을 죄로 공무를 소홀히 하였사오나, 벌을 받을 때 받더라도 현재 당하고 있는 딱한 사정이나 말씀드리고 나서 처분을 바라겠사오니 잠시만 고정해 주십시오. 무슨 놈의 팔자가 글쎄 이 나이에 계집이 죽어가지고, 집에 겨우 다섯 살 짜리를 맏이로 둘째놈이 세 살이요, 딸년이라는게 난지 겨우 여섯 달이지 뭡니까?
어려운 살림이라 사람을 두어 돌보게 할 수도 없고, 이놈이 일일이 돌보자니 아비 겸 어미 겸 사람으로선 견디지 못할 고생이옵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같이 일어나는데 그 핏덩이가 울어대지 뭡니까?
그래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청해서 젖을 얻어 먹이고 나니, 이번엔 둘째놈이 배고프다고 울어대기에 달려가 죽을 사다가 먹여주고, 그리고는 대감 분부가 소중하와 큰놈은 옆집에 부탁하고, 소인은 잔입으로 그냥 달려온다는 게 이렇게 늦었사오니, 그저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대감은 벌써부터 듣다 말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만둬라, 그만 둬. 네 사정이 어쩌면 그리도 나하고 똑같으냐? 알았다. 그만 둬라.”
서리는 풀려 나오면서 혓바닥을 낼름하였다.
이런 나쁜 놈이 있나?
대감의 정경을 익히 알고 있는 때문에 모두가 꾸며댄 거짓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감은 아기 키우는 데 보태쓰라고 쌀과 피륙까지 넉넉히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그러기에 군자는 가기이방, 점잖은 분은 방법을 가지면 속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도 이런 인정 많은 상전이었기에 그의 하인 중에는 신명을 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한 이도 있었다.
임동석이라고 중앙관서에 서리를 다녔던 그댁 하인이 있었는데, 반대당의 대관들이 공을 헐뜯어 상소하는 문서를 닦으며 그더러 받아쓰라고 했더니 단연히 거절한다.
“자식으로서 제 아비의 죄를 적을 수 없듯이, 상전과 하인 사이는 부자와 같은 관계인데 어찌 이 손으로 그런 글을 베껴 쓰겠습니까?”
서슬이 시퍼런 대관들은 그를 잡아 넣고, 모진 형벌로 다스렸으나 그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공이 귀양을 가게 되자 구실(옛날 관아의 직무를 이르던 말)살던 것을 팽개치고 제주까지 따라가 봉사하였다. 그러나 기어이 조정에서 주인 대감께 사약이 내리게 되었다.
이때 후에 대제학을 지낸 둘째 아들 회헌 조관빈이 아버지의 임종이나마 지켜 보려고 말을 달려 가는데, 약사발을 받든 금부도사가 먼저 도착해 빨리 마시라고 독촉이다.
동석이 나서며 죄인의 아들이 미구에 도착하겠으니, 그가 도착하거든 부자 상면이나 하게 하고 나서 마시게 하여 줍시사고 극구 간청을 하였건만 듣지를 않는다. 그러자 동석이 아무리 공사이기로 인정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사약그릇을 발길로 차 엎어버렸다. 그러니 모두들 죽을 상이다. 임금이 내리시는 약이니 이 일을 문제시 삼으면 걷잡지 못할만큼 커지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금부도사는 풍랑에 약그릇을 바다에 빠뜨렸노라고 꾸면서 보고를 드렸으니, 다시 사약을 내려보내는 데 달포나 걸리는지라, 이 동안 도달한 회헌은 아버지를 마지막 한달 동안 모시고 지낼 수 있었다. 그 사이 대감은 아드님께 유언을 겸해 신신 당부하였다.
“동석이를 친동기같이 여겨야 하느니라.”
동석은 상주와 함께 유해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서리를 살았는데 대대로 그 구실을 세습하도록 하고, 대감의 유언을 받들어 오래도록 한집안같이 내왕하였더란다.
임동석의 사람됨도 신실하였겠지만, 그의 이같은 충성은 수하 서리의 속임수에 넘어가 오히려 도와 줄 정도로 착한 대감의 마음씨가 은연중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착한 뒤끝은 반드시 있다 하였다.
아비를 위해선데
일의 경중을 가늠해 선후를 차릴 줄 알면 그를 유능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아무렇게나 우선 시작부터 해 놓고 뒷감당을 못한다면 크고 적고 간에 무얼 맡길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성종 하면 조선조 초기의 홍륭하는 운세를 타고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다만 재주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무학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보니, 연락을 즐기고 여성문제에도 단순치 않아, 뒷날 연산군의 병탈이 거기서 많이 유래됐다는 평을 듣는 어른이다.
어느 해 하 몹시 가물어서, 임금이 친히 경회루 못가에 나와 비를 비는 기우행사를 주관하는데, 어디서 풍악소리가 들려와 모두 놀랐다.
“이 가뭄에 풍악을 올리며 잔치를 하다니...”
알아보니 방주감찰의 잔칫날이라는 것이다. 그렇기로 백성이 도탄에 들어 우에서 친히 또약볕에 나와서 긍휼을 비는 이 판국에...
결국 잔치에 모였던 13인은 모두 잡혀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주제에 아들을 시켜 석방운동을 벌였으니 웃기는 얘기다. 고만고만한 어린 것들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들고 줄지어 진정하러 왔다는 전갈을 듣고 임금은 진노했다.
“제놈들이 분수없는 짓을 저질러 놓고는 무어? 어린 것들을 시켜서 용서해 달라고? 고놈들 모조리 잡아 들이래라.”
우람한 체격의 별감들이 보기에도 설고 무시무시한 홍의의 넓은 소매를 날리며 양팔을 벌리고
“요놈들, 모조리 잡아들이랍신다!”
외치면서 몰려나오니, 철모르는 꼬맹이들이 댕기 꼬랑이를 내저으며 거미알 헤어지듯 흩어져들 가는데, 한 놈 아이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꼿꼿이 서 있다가 순순히 그들을 따라서 들어온다.
“너는 저 사람들이 무섭지도 않더냐? 왜 도망 안 갔니?”
“아비를 구하기 위해서 한 일이온데, 죄를 받으면 받았지 어찌 도망 가오리까?”
“고놈 참 숙성하다. 그래, 이 글은 누가 지어주고 누가 쓴 것인고?”
“소신이 짓고, 쓰기도 소신이 하였사옵니다.”
“그래! 네 나이 몇 살이냐?”
“열셋이옵니다.”
“너 속이면 혼날 줄 알아라, 네 손으로 다시 짓고 쓰고 하겠느냐?”
“앞서 글도 모두 소신 손으로 한 것이오니, 시험하신다면 지어 올리오리다.”
그래 민한(가뭄을 애처러워 하노라)이란 제목으로 글을 짓게 했더니, 그 자리에서 써올리는데 그 끝을 이렇게 맺었다.
동해과부가 상초삼지한하고
은왕성탕이 능치천리지우오니
원성상은 진념언하소서
성탕은 은나라의 성군이라 아무나 아는 일이고, 동해과부는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중국전한때 우공이라는 분이 있었다.
동해땅 하비라는 곳에서 형옥 다스리는 직책을 띠고 있었는데 관내에서 사고가 났다.
한 젊은 여인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됐는데, 자식조차 없으니 의당 팔자를 고쳐 가야하겠으나, 시어머니 봉양할 이가 없어 그냥 시댁을 지키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내 걱정말고 시집을 가라 하고, 본인은 계속 효성을 다해 봉양을 하고, 그러기를 십년이나 하다가 시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을 했다.
`나 때문에 청춘을 그냥 늙힐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뜻에서다.
그런데 시집간 시누이들이 고소를 했다.
`이년이 시집갈 욕심에 걸리적거리는 시어미를 없애소`
원님은 한쪽 말만 듣고 효부를 체포하였다. 우공은 연인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통하지 않자, 구실을 내놓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 하 몹시 독한 고문을 가하니, 효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복해, 안락한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내리 3년을 가무는 것을, 새로 온 태수가 까닭을 물으니 우공이 말하였다.
`상 주어야 할 사람을 죽인 때문인 줄로 아외다.`
그래 소 잡고 크게 차려 과부 묘에 제사지내 주었더니, 원혼도 감동했던지 그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농사도 풍년이 들고, 다시 태평을 되찾았다.
<설원>이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대왕은 크게 기특히 여겨 다시 물었다.
“네 아비는 누구냐”
“예, 방주감찰 김세우이옵니다.”
“네 이름은?”
“어린룡 규자, 외자 이름이옵니다.
“네가 글짓기도 잘하고 쓰기도 잘하니, 너의 글을 보고 네 아비를 놓아주며, 너의 글씨를 보고 네 아비의 동료들을 놓아 주는 것이니, 너의 그 효심을 나라와 임금께 충성하는 길로 옮길지니라.”
왕은 잡혔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는 명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인 정3품직인 전한에까지 올랐다. 세종 당시의 집현전을 대신한 관서였으니, 학문을 연구하는 매우 깨끗한 벼슬자리에서 일한 것이다.
멋을 아는 대감
청풍 김씨에 호는 잠곡, 육이라 하는 명재상이 있었다.
선조 13년에 나 신동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자란 그는 소년시절에 임진왜란을 겪고 25세에 소과에 급제,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여 대과 초시까지 치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며부터 국사가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는, 가평땅 잠곡 청덕동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았다.
몸소 밭 갈고 나무장사, 숯장사에 안하는 일 없이 어렵게 지내는 중에,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귀빈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선조대왕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이 찾아든 것이다. 명재상이요, 문장가인 상촌 신흠의 아들로 그가 부마로 뽑혔을 때는 모두 장래의 영의정감 하나 버렸다고 개탄하였다. 왕의 사위는 의빈이라 하여 벼슬을 못하는 규정이 있던 때문이다.
과거를 해도 의당 장원급제할 것을 못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선조대왕이 꼭 할 장원을 못했으니 장원은 네 손으로 뽑으라고 시관을 시켜주기까지 하였다는 당대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국사는 날로 글러만 가고 마음을 잡을 길 없자, 바람도 쏘일 겸 뜻 맞는 친구를 찾아 회포나 풀어 보자고 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마침 동네 소를 빌어다 밭을 갈고 있는 중이라 일을 중간에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손님과 만나지 않을 수도 없어 주인이 쟁기질하며 가는대로 손님은 밭두둑을 따라 오고 가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한 뙈기를 다 갈고 났을 때는 밭두둑에 빤질빤질하게 길이 났더라는 얘기다.
소를 떼어서 아이를 불러 돌려보내고 나서야 둘이는 손을 잡고 집이라고 돌아왔는데, 이게 글자 그대로 게딱지 같은 초가삼간이라, 방이 아래웃칸, 부엌이 하나, 아랫칸은 안방, 웃칸은 사랑으로 쓰는 그런 집이다.
“잠깐 앉아 계십시오.”
한참 만에 주인이 들어오는데, 돼지고기 한 덩이를 삶아 건져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도마에 얹어 식칼 곁들어 들여놓고 막걸리가 한 방구리, 거기에 쫑구라기가 하나.
그런 것을 주섬주섬...
“산중이라 뭐 별 것이 있어야죠.”
둘이는 고기를 일변 썰어 소금에 찍어 안주삼아 술을 나누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동양위는 놀랐다. 이런 뛰어난 경륜과 포부를 가진 분이 당대에 또 누가 있으랴? 그렇기로 살림이 이렇게 규모 없을 수가...
그러는데 아랫칸에서 계속 신음소리가 들려와 둘의 얘기는 잠시 중단이 되었다.
“대감! 내 잠깐 다녀와야겠소이다.”
그리고 안방으로 내려 갔는데 잠깐 있더니,
“응애! 응애!”
이런 일이 세상에 있나? 그런 줄도 모르고...
동양위는 그만 가슴이 성큼하였다. 한참 만에야 주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들어선다.
“대감이 오시자 집에서 아들을 낳소이다그랴! 내 삼갈라 뉘어놓고 동네 할멈 하나 불러 첫국밥 지으라고 일러 놨으니, 우리 그것 같이 들고 주무십시다.”
손님은 겹치고 겹친 감격에 주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잠곡! 이거 우연한 인연이 아니니 우리 사돈 맺읍시다. 집에 난지 얼마 안되는 딸년이 하나 있어요. 고것하고 댁의 아기하고...”
주인도 지기상합하는 이 좋은 친구의 제의에 쾌히 응하며 술을 채웠다.
“자! 그럼 우리 사돈끼리...”
당시 잠곡은 37세로 딸만 둘 있고 아들은 하나 낳았다가 실패하여 이번 아기가 맏아들인 셈이었다.
이렇게 시골에 처박혀 지내는 사이, 44세 되던 해 인조반정으로 세상은 바로 섰다.
그래 즉시 상경한 그는 이듬해 과거에 장원하고 벼슬길이 트이어, 내외요직을 두루 거쳐 70세에 우의정, 72세에 영의정까지 올라, 효종 9년 79세로 천수를 다하기까지 정성을 다해 국사에 진췌하였다.
국민의 실생활을 중시해 각종 현물로 바치던 세공을 무명과 돈으로 통일한 대동법을 창안해 실시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며, 민생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실학의 실마리를 풀어, 학문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러한 그가 회갑 때의 얘기가 하나 있다. 벼슬은 아직 승지 지위에 있었고, 번화한 것을 몹시 싫어해, 익구성만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하하게 살고자 노력하던 그의 처신인지라 검소하게 차린다 했지만, 역시 덕망 있는 분의 경사라, 평소에 그를 숭앙하는 많은 하객이 모여들고, 사방에서 봉물이 들어왔다.
그런데 난처한 사람이 하나 있다. 맏며느님 신씨의 친정에서는 부조는커녕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 않는다. 그래 잔치 치르는 북새통에서도 무슨 죄나 지은 것 모양 기를 펴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는데 다 저녁때 손님도 거의 흩어질 무렵 하인이 하나 뛰어들어오며 외친다.
“저기 저, 동양위 대감 납십니다.”
지위에 걸맞는 좋은 옷에 근감한 행차가 아니다. 수수한 베 도포에 미투리 신고 하인에게 무얼 한짐 지워가지고 들어선다. 주인 영감과 수인사를 나눈 뒤
“얘! 그거 들여오너라.”
모두들 보니 큼직한 통돼지 삶은 것 하나에 막걸리가 한 장군이다. “우리가 이런 술과 안주로 교분을 맺었으니, 오늘도 이것이라야 뜻이 있지요. 자! 만수무강하시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도 골고루 나눠주었으니 그날 그것 받아 먹은 것을 두고 두고 생광으로들 여겼더라고 전한다.
최술의 어머니
잠곡 김육에게 좌명, 우명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분 다 명석한 두뇌에 성실한 근무태도로 많은 공적을 남긴 분들이다. 두 분 중 맏이 좌명공 댁 하인으로 최술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건만, 대단한 어머니여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게 키워 내놓았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똑똑하고 사리에 밝으며 또 글을 제법 알아서, 귀계가 호조판서가 되자 서리로 기용해서 부리기로 하였다. 호조란 요즘으로 치며 재무부와 같은 곳으로 나라 살림을 총괄하는 곳이라, 속을 알지 못하는 놈은 무슨 부정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놓고 임명해 쓰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어머니가 판서댁으로 찾아왔다.
“그놈의 구실을 떼어서 내쳐 주십시오.”
“남들은 시켜 달라고 문턱이 닳게 드나들며 졸라대는 자린데, 할멈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자리를 마다 하는고?”
“그래서 하는 말씀이옵니다, 대감! 이 늙은 것이 일찍 홀로 되어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저놈 하나 사람답게 키워 내려고 무진 애써 왔사온데, 이놈이 글씨를 반듯하게 쓴다는 재주 하나로, 대감 눈에 띄어 구실을 얻어 다달이 타는 요(봉급의 옛말)로 밥을 먹게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어느 부잣집에서 놈이 재상댁에 공역 사는 것을 보고 사위를 삼았습지요. 그래 그 아이가 요새 제 처가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말이 들려오지 뭡니까? 하루는 반찬 투정을 하면서 `이렇게 맨 생선국을 끓여 놨으니, 이런 반찬으로 어떻게 밥을 먹으라는 거여?` 제놈이 배 곯리지 않게 된 지가 며칠이나 됩니까 불과 십여일 사이로 저따위로 사치하고 방자한 생각을 갖게 되다니... 오래도록 재물을 다루는 관청에 두었다가는 큰일나겠습니다. 호조라면 큰 돈 만지는 관부가 아니겠습니까?
저따위로 마음씨를 쓰다가는 그 마음이 저도 모르게 날로 커서 끝내는 죄를 저지르고 말 것이라, 늙은 것이 놈의 형벌 받아 죽는 꼴은 차마 못보겠어서 그러는 것이옵니다.
대감께서 갸의 글씨 재주를 아껴 떼어 보내기 싫으시거든, 그저 저희 식구들 주리지나 않게 먹여 살려 주시면 되지, 제발 저놈이 건방진 생각을 못 갖도록, 단단히 신칙해 부려 주셨으면 하옵니다.”
대감은 할멈의 하소연을 듣고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았네, 할멈의 소원이니 내 들어 줌세, 그리고 할멈의 아들이니까 잘해 낼거야.”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나날이 생활용품을 대어 주어 살림을 시켜 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이런 일은 옛날 조괄의 어머니와도 맞먹는 얘길세.”
그러면 조괄이란 과연 누구인가?
중국의 옛날 전국시대, 나라 안이 여러 세력권으로 갈려 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을 때 일이다. 서쪽으로 진이라고 강성하고 무도한 나라가 있었는데, 툭하면 동으로 진출하여 이웃나라를 쳤다. 그들과 지경을 접하고 있는 조나라에는 유능한 노장군 염파와 문신으로 인상여 같은 이가 있어, 강한 진나라도 거기엔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영토 확장에 눈이 뻘건 진나라가 한나라로 침입해서, 조나라에서는 원로장군 염파에게 대군을 주어서 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경험 많은 노장군 염파는 자신대로의 전략이 있어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염장군의 속셈을 알 수 없는 진나라에서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그의 병법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간첩을 시켜 슬그머니 유언비어를 퍼뜨려 헛소문을 내었다.
“염파 장군의 손속은 이미 다 아는 일이라 겁날 것 없고, 조괄이 대장군이 되는 것을 진나라에서는 제일로 겁내고 있다.”
마침 아비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애송이 임금 효성왕은 쉽게 그들 손에 놀아났다. 헛소문을 믿고 노장군 염파 대신 조괄을 사령관으로 앉힌 것이다. 조괄은 자칭 전술로는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는 경망한 작자였다. 어려서부터 병법과 용병을 배우기는 했으나, 그의 아버지 조사는 그를 미덥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전쟁이란 위험이 따르는 것인데, 그애는 너무 쉽게 그것을 나불거린단 말이오. 나라에서 그놈을 장군으로 삼는 날이면 앞날이 위험하지.”
자기 부인에게 들려 준 얘기다. 그런데 남편이 죽은 뒤 나라에서는 기어이 그 주책떠는 조괄로 군사를 지휘하게 한 것이다. 지자는 막여부라는데, 유능한 장군인 남편이 일러준 바도 있고, 어머니 자신도 큰소리나 탕탕 치는 아들이 사령관직을 맡는 것이 못 미더웠다. 여자의 몸이건만
“조괄로 장군을 삼는 것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왕에게 글을 올렸으며, 왕은 글을 보자 직접 조괄의 어머니를 불러서 물었다.
“그건 어쩐 까닭이오?”
“예전에 그애 아버지가 대장이 됐을 때는 겸손하고 친구를 아꼈으며, 공에 임하면 사가 없고,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게 된 후부터는 집안 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괄이란 놈은 상장군이 되며부터, 부하들이 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상으로 내리시는 물건이 있으면 이를 독차지하고, 날마다 값싸게 파는 땅이나 집이 나지 않을까, 그런데만 정신을 쏟고 지낸답니다. 제발 그에게 내린 제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왕도 똑같은 친구로 조괄을 절대 신임해, 이 떠벌이 대장은 진나라 장군에게 참혹한 패전을 당해, 지휘 책임을 물어 조괄은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임금의 배려로 연좌되는 것만은 모면하였다.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활약한 권률 장군의 이름지은 의도를 보면 복 많이 받고 귀히 되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률자는 바로 두려워서 떤다는 “떨률”자다. 권은 “권세권”, 출세하여 권력을 쥐고 권세있는 자리에 오를수록 혹시라도 분수에 넘치지나 않을까 조심하고 떨라는 원대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내 복으로 내가 잘 사는데, 누가 감히 날 어쩌랴?”
이것은 확실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복을 깎아먹는 손복의 행위이다. 옛 어른들은 특히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밥 먹고 나서 `아유, 배 불러라` 소리도 못하게 하셨다. 매사에 조심하고 고맙게 여기며 사는 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다. 살얼음판 같은 벼슬길에서 저 잘났다고 꺼정꺼정 하다가, 얼음이 꺼져 빠졌다
면, 동정은커녕 아마 웃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몸은 비록 장인이지만
옛날 무기에 쇠뇌라는 것이 있다.
총대같은 나무 대 끝에 활을 장치해 바짝 당기어서 틀에 걸어 가지고, 목표물을 겨냥해 걸쇠를 당겨 퉁겨서 쏘는 무기다. 활처럼 목표물을 보고 나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재어서 가지고 있다 쏘게 되니까 효율이 훨씬 뛰어나다. 수나라 양제가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침공해 온 것이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이다.
견디다 못해 고구려는 항복하겠노라고 사신을 보냈는데, 양제가 그들을 배 안으로 맞아 왕이 올린 항복 문서를 막 읽는데, 따라갔던 사람 중의 하나가 품속에 감춰 가지고 간 조그만 쇠뇌로 양제의 가슴 한복판을 쏘아 맞추었다. 그 때문에 양제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야 했는데, 크고 강한 쇠뇌였다면 가슴에 관통했을 것이고, 이런 장난감같은 조그만 것이라면 실촉에 무서운 독약을 발라, 의당 죽었을 것인데 거기 대해선 기사가 없다.
화약이 발명되기 전이라 전쟁무기의 연구 개량은 각국이 모두 쇠뇌나 사다리차 거북이차 같은, 성을 공격하는 무기에 힘을 쏟았다. 신라가 오랜 동안의 거국적인 노력 끝에 삼국을 통일한 이면에는 이런 방면의 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백제와 합동하여 한강 연안을 수복하고는, 백제의 세력을 내몰아 서쪽 해안에 진출하여 당과 손잡을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원교근공, 먼 데 나라와 손잡아 가까운 곳을 협공해 치는 역사적인 수법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넘어뜨리는 데 성공했으나, 같은 침대에 자면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더니, 두 나라 사이가 그 꼴이다. 당나라가 신라 좋으라고 군대를 풀었을 리 만무하고, 신라도 동족의 나라를 이민족에 팔아먹으려는 뜻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좋은 척 갖은 교태를 다 부려 그들 눈앞에 노랑수건을 흔들어야 했으니 딱한 노릇이다.
문무왕 9년(668년) 백제를 멸한 지 6년째요, 고구려가 지도에서 사라진 바로 이듬해다.
그해 겨울 당나라 사신이 임금의 조서를 갖고 와 전하고, 쇠뇌 만드는 기술자로 구진천을 데리고 돌아갔다.
당으로 끌려가 너희 나라 방식으로 어디 목노를 한 번 만들어 보라는 명령을 받고 한 대를 꾸며서 바쳤는데 화살이 30보 밖에 안나간다.
보라면 두 발자욱, 곧 한 칸 길이가 된다.
30칸 거리면 약 50m.
이까짓 거 가지고는 실전에 소용이 안된다.
“듣자니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가 일천보를 능히 간다던데, 이게 겨우 30보밖에 안 나가는 것은 어인 일인고?”
당나라 황제의 물음을 받고 그는 아주 공손이 대답하였다.
“글쎄올시다. 아마 재료가 같지 않아서 그런가 싶사옵니다. 만약에 본국에서 재목을 가져온다면 만들 수 있을지, 여기 재료 가지고는 도무지...”
머리를 긁적긁적 했는지는 미처 모르겠으나, 황제는 그의 말을 따라 신라에 기별하여 재목을 들여오게 하였다. 그동안 몇 달 좋이 걸렸을 것이니, 술밥 거저 얻어먹고 편히 지냈을 밖에...
신라에서는 복한이라는 대내마 지위에 있는 사람을 시켜 재목을 실려 보냈다. 나라 사이의 일이나 좋은 재료를 곧 많이 보냈을 것이니 구진천은 다시 깎고 맞추는 일을 해야 했다.
여러 날 걸려 완성된 것을 쏘아 보니 이젠 겨우 60보밖에 안 나간다. 넉넉히 잡아 100m거리니 야전이고 공성이고 별로 큰 효과가 없다. 재료가 틀려 그렇다더니 너희 나라에서 들여왔는데 왜 이모양이냐고 까닭을 물으니까, 겉으로는 겸손한 체를 자못 유들유들하게 대답한다. “글쎄올시다. 신도 그 까닭을 모르겠사와요. 아마도 재목이 바다를 지나오는 사이 습기를 먹어서 그런 거나 아닌지... 그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이라고 그 뱃속을 짐작못할 이가 없다. 재주를 다 내놓도록 어르고 달래고 별짓을 다하였지만 소용 없었다. 정작으로 재주를 다해 천보는 마치 몰라도 화살이 그 절반만 나가도 당시로서는 신예의 위력있는 무기다. 그것이 누구를 겨냥하게 될 것인지를 잘 아는 그이기에, 고양이로 치면 발톱을 끝내 내보이지 않은 것이다.
`너희 나라하고는 친교가 있는 사이 아니냐?`
`신라같이 산이 첩첩한 나라에서는 별 소용 안 닿고, 서역으로 평야를 달려 오랑캐를 치려는 것이니, 그 방면 책임자를 시켜주마, 좋은 집을 주마, 홀몸으로 와 있을테니 장군의 딸로 장가를 들여 주마.`
무슨 유혹인들 없었겠는가?
어떤 협객은 말하였더란다.
“아무 것도 싫다는 놈처럼 다루기 힘드는 상대는 없대나.”
술과 계집과 재물도 지위도, 세속에서 귀히 치는 것을 어느 하나도 나는 싫다니, 이런 귀찮고 괴로운 상대가 어디 있나?
먼저 수나라 양제를 저격한 일행도 단 한 사람 살아 돌아가진 못했을 것이다.
목숨조차 싫다는 독종들이니 애먹었을 밖에...
구진천에겐들 얼마나 위협이 따랐으랴?
서역 원정에 병정으로 딸려 보낼테다, 병신을 만들어 놓겠다, 죽이겠다, 그래도 꼼짝 않았으니 신라왕이 좋은 신하 둔 것을 무척이나 부러워 했을 게다.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의 도를 행하여서, 부귀로도 그를 더럽히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그의 뜻을 돌려 놓지 못하며, 위무로도 굽히지 못할 때, 이를 대장부라 한다.”고 맹자는 말씀하셨다. 일개 활 만드는 기술자로, 만리 타국에서 고향땅 가족들을 그리며 외로이 말년을 보냈을 그의 심경을 생각해 보면 감회가 깊다.
제주목사 이시방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은의도 저버리고 세상 만났다고 나불대는 얄팍한 세속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가실 날이 없다. 더구나 저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나는 그를 모르노라.”
너무한 얘기다.
조선 왕조에서 폐출되어 임금 자리를 쫓겨난 인물로 광해군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신세도 졌고, 또 역대로 평화롭게 사귀어 온 명나라의 세력이 날로 기울어가고, 만주족 청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지는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양면외교로 고식적이나마 잘 버티어 온 왕조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사생활에는 엉망이어서 하필이면 선왕의 후궁인 개시를 사랑하여 수령방백이 그녀의 손에 좌우되고, 동기간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아무리 계모라도 폐모하기에 이르자, 뜻있는 이들이 군사를 일으켜 능양군을 세우고 왕위에서 몰아내니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이렇게 왕위에서 폐출되었어도 호칭에는 군을 붙였는데,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도 복위되기 전 노산군으로 불리었고, 연산군은 나면서부터 세자라 폐위와 함께 주어진 칭호이었으며 광해군은 본래의 군호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군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실덕하여 왕노릇한 것도 없거나, 세자로 있던 것이 아니라 해도 선왕의 아들인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지라, 왕자로서의 예우만은 지키는 체통이었던 것이다.
그 분들의 최후도 노산군 단종은 목을 졸려 비명에 돌아간 분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연산군은 폐위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더위에 곽란으로 급서하였다 하는데, 향년이 33세이니 아무래도 타살의 혐의가 짙다. 아무튼 그의 묘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데 묘역을 꾸민 석물이랑 그래도 왕자의 예모를 갖추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 8년(1575년)에 태어나 1608년부터 15년간 왕위에 있다가 밀려나 인조 19년(1641년)까지 생존했으니 그런대로 천수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그 사이에도 공신들 사이에서는 슬쩍 해치워버리자는 공론도 있었으나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그야말로 볼 일 다 본 터에 대접이 온전할 까닭이 없다.
겹겹이 막히어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들여 보내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에 없이 공궤가 깨끗하고 좋아져서 폐주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처우가 달라졌을 제는, 아마도 전일 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제주목사로 왔는가 보이.”
그랬더니 따라와 모시고 지내는 늙은 궁녀가 그런다.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것을 그대가 어찌 아노?”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께서 재위하시는 동안 신하들 승진이나 보직을 모두 궁인들의 말이나 듣고 처리하셨사온대, 그렇게 뒷구멍으로 손을 써서 출세한 사람이라면, 제 밑이 구려서라도 일부러 마마께 박하게 굴어, 전혀 그렇지 않았던 양으로 꾸밀 것이지, 그런 용렬한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마마를 특별히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까? 아마 옳은 가문에서 바로 배운 공자가 도임해 왔을 것이옵니다.”
뒤에 차차 알아보니, 새로 취임한 목사는 이시방으로 반정공신 중에도 원훈인 이귀의 둘째 아들이요, 자신도 형 시백과 함께 정사 이등공신에 오른 사람이다. 말하자면 광해군을 내어 쫓은 가문이요, 장본인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와 보니 광해군이 거기 안치돼 있어 주방에다 단단히 이른 것이다.
“비록 실수는 했어도 왕자요. 십여 년이나 임금으로 받들던 분이다. 추호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니라.”
그러다가 인조 19년(1641년) 광해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바닷길이 하 멀어 일일이 중앙에 품해 지시를 기다릴 길이 없다. 곧장 섬 안의 관원들을 데리고 소복하고 들어가 친히 수시걷고 염습까지 말끔히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아마 망인도 영혼이 있었더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못된 놈의 꼬임에 빠져 어머니도 폐했는데, 이미 왕의 몸도 아닌 나를...”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간은, 무슨 일이고 트집잡아 따지는 관원인지라, 멋대로 처사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 공론이 돌아서 무사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호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으며 자손도 크게 번창하였다.
그가 수습한 광해군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에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다.
방석을 비켜 앉은 처녀
조선조 제21대 영조대왕은 역대에 유례없이 83세까지 장수하신 어른인데, 중년에 세자를 뒤주에 가둬 자진케 하는 등 궁중생활은 별로 순탄치 못하였다. 거기다 춘추 환, 진갑이 지나 정성왕후 서씨가 하세하시니, 국법에 곤전은 비워 두지 못하는 제도라, 상기가 끝나자 왕후 간택을 서두르게 되었다.
간택이라면 양반가 처자들의 출가를 일체 금하고, 후보자를 궁중에 불러들여 일차로 선발하는 것이 초간택, 둘째, 셋째의 간택으로 마지막 결전을 거쳐 왕비나 세자빈을 들여 앉히는 절차인데, 혼사만 결정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고, 때로는 궁중의 복잡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빠지는 일도 종종 있다.
신랑감 노대왕이 친히 간택 장소에 나와 보니, 햇병아리같은 처녀들이 지정한 자리에 얌전을 빼고 앉아들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석을 비켜나 바닥에 앉아 있다.
“그대는 왜 지정한 자리를 비워두고 게 가 앉았는고?”
“예! 아비 이름이 거기 있사온대 어찌 감히 올라 앉으오리까?”
당시 제도로 처자의 아버지 벼슬과 이름이 방석 끝에 써 붙여 있어서, 올라 앉으면 깔고 앉는 꼴이 됐던 것이다. 임금은 그 대답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여럿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을꼬?”
지명받은 처녀마다 혹은 산이 깊다 하고 혹은 물이 깊다 하며 대답하는 중, 방석을 비켜 앉은 그 처녀에게 물었더니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래 그 까닭을 물었더니
“물건의 깊이는 잴 수 있으되,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나이다.”
상감은 아마 속으로 `요것 봐라`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으로 또 물음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무슨 꽃이 가장 좋은고?”
어떤 처녀는 해당화다, 어떤 색시는 모란, 복사꽃이다 제각금 다르게 대답한 중에 예의 처자를 지명하였더니
“목화꽃인 줄로 아옵니다.”
“그건 왜지?”
“예, 다른 꽃은 한때 좋은 데 지나지 않사오나, 면화는 온 백성을 따뜻하게 옷입혀 주는 공이 있사옵니다.”
때마침 밖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에 우에서는 즉흥으로 또 한마딜 물어셨다.
“저 월랑의 기와골을 헤아려 알 수 있을꼬?”
처녀들은 모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 둘, 셋, 넷, 헤고 있는데, 이 처자만은 상감이 자꾸 자기만 유의해 보시는 것같아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그냥 다소곳이 숙이고 앉았기에 짓궂게 또 한 번 지명해 보았다. 그랬더니 몇십 몇줄기라고 딱 맞춰낸다. 한층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해서 알아냈는고?”
“예! 낙수가 떨어져 패인 구멍을 헤어서 알았나이다.”
상감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져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이 열다섯살 난 처녀는 일약 왕비로 뽑히어 국모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분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인데 아버지 한구공은 충청도 서산땅의 가난한 선비로, 아기딸 세살 적에 서울로 이사했으나, 간택에 뽑혔을 때도, 말이 벼슬이지 조정의 마련없는 말단 직책에 매어 있던 터라 남산골 그의 오막살이 게딱지 같은 초가에는 이제 쨍 하고 볕이 든 셈이었다. 부원군을 봉하고 집을 옮기고..., 그것은 차차 얘기고, 우선 궁중에선 내관이 파견되었다. 왕비 후보인 처녀의 의복을 지어서 보내 드려야 되겠어서 그래 의양을 재고자 처녀를 앉혀 놓고 앞품, 섶 길이, 소매넓이 등등 재고나서
“아가씨, 이제 뒷품을 재게 잠깐 돌아 앉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오 조그만 아기씨 말 좀 들어보라.
“그대가 돌아가면 안되겠는가?”
파견돼 나온 늙은 나인은 그만 아찔하였다.
`이런 실수가 어디 있담!`
체통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누구더러 멋대로 돌아 앉아라 마라, 당키나 한 소린가?
늙은 상궁은 그만 고패를 떨구었다.
“황공하여이다.”
그리하여 대혼 절차를 마치고 궁중에 들어가니 누가 뭐래도 당당한 중전마마다. 그런데 상감께서 노욕이라야 할지, 노망드셨달지, 그 몸에서 소생을 바라시는 거다. 그래 내의원을 시켜 부지런히 포태하기에 좋다는 약을 지어 보내시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왕비는 사태를 옳게 안다.
당신보다 7년이나 연장이신 세손이 계시지 않는가?
이런 환경에 자신이 아기를 낳아놓으면 또 한 번 사단이 일것은 뻔한 일이라, 중전은 그 약을 대려 올리면 받아서, 매번 젓수신 척하고 몰래 쏟아 버리었다. 궁중의 평온을 위하여는 그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니할 말로 할아버지같은 상감을 모시고 청춘을 보낸 이 왕비는 순조 4년 회갑을 맞던 해 세상을 떠났다. 관향은 뒷날 서가로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가 그 가문이다. 탄강하신 동네 이름을 따서 세간에서는 `한다리마마`라고 부르곤 하였다. 능침은 영조대왕과 함께 원릉을 봉해 현재 동구릉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다리는 달리 보면 한다리. 다리 하나인 귀신을 독각귀 곧 도깝이라 하여, 그 친정댁 일문을 `도깝이 김씨`라고 했던 것인데, 멋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 김가고 김씨만 보면 도까비라고 조롱을 하곤 했으니 웃기는 얘기다.
저까짓 걸 무엇에 쓸라고 저러노?
흔히 저 자신은 새로운 일을 아무것도 못하면서 남이 하는 일을 보고 비웃는 이가 있다. 창안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일에 성실하게 열의를 다하다 보면 떠오르게 마련이다.
십년 이십년을 한 가지 일에 종사하면서도 똑똑한 아이디어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재주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근무하는 태도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 중엽에 윤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호조판서로 있을 적에 헌 돗자리가 해어져서 못쓰게 된 것을 모조리 거두어 곳간에 챙겨 두게 하여서 모두들 비웃었다.
“저까짓 걸 무엇에 쓸라고 저러노?
그런데 조금 조용한 시간이 생기자 그는 그 알량한 물건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자리 가로 돌려가며 둘러 꾸민 푸른 천을 뜯어내고 나머지를 조지서로 보냈다. 조지서라면 종이 만드는 공장으로 서울 창의문 밖 세검정 계곡에 있었다. 이놈을 불려 찧어서 종이 원료에 섞었더니, 제품이 곱고도 질기어 십상이다. 푸른 천은 빨아 대려 예조로 보내, 예조에서는 그것으로 야인 곧 여진족의 옷끈을 만들었다. 따로 몇십 필씩 물들여 끊어 쓰지 않고도 됐으니 희한한 착상이다. 여진족하고는 소소한 거래가 늘 있었고 그들은 저희 국토에서 나지 않는 때문에 무명으로 만든 거라면 무엇이나 좋아서 바꾸어 갔다. 호조 창고에 쌓아둔 쌀을 풀어내 쓰고 나면 쥐똥 섞인 것이 곧 많이 남는다. 골라내도 먹을 수 없는 그것을 거두어 챙겨 두어서 모두들 또 한 번 웃었다. 그랬더니 외국 사신이 와서 묵는 공관에 그때마다 도배를 해야 했는데, 그 쌀을 내어다 풀을 쑤니까 오히려 여느 풀보다 많이 차질어서 더 잘 붙는다. 그제서야 모두들 그의 주변성을 감탄하였다.
가정 살림을 하는 데도 땔나무를 헤프게 쓰지 못하도록 기와 굽는 공장의 타다 남는 장작을 들여다 무딘 도끼를 주어서 패어 때게 하였다. 패기 힘들어 조금씩 때게 됐다니 참으로 무던한 얘기다. 당시만 해도 멀리 나들이할 일이 많아 집집에서 말을 키웠는데, 공터에다 피를 여러 두렁 심어놓고 날마다 한 두렁씩 깎아서는 말먹이를 삼았다. 다음날도 한 두렁, 다음날도 한 두렁, 피가 본시 잘 자라는 작물인데다 말의 배설물을 그대로 거름으로 주니 한바퀴 깎고 나면 도로 그 턱이라, 도성 안에 살면서도 말먹이에 걱정을 않았다.
이러한 그였으니 매사에 처리가 어떠하였을까는 미루어 알만하다. 어느 해 목화값이 지천이었는데 그는 돈을 내어서 그것을 사 재었다. 무엇이든 한 번 싸면 주기적으로 꼭 오르게 마련이라, 몇 해 안 가 목화 흉년으로 값이 껑충 뛰었을 때 내어 팔아서 몫돈을 벌었다.
“양반이 점잖지 못하게 돈 버는 일에 눈을 뜨다니?”
당시에 상류층 인사라면 이런 말도 들었을 것이나, 입으로 청백하기를 뇌까리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 남에게 몹쓸 짓이나 하던 부류와는 비교가 안되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윤판서의 일화로 보이는 어떤 호조 서리의 얘기가 있다. 서울 서대문 밖 현 독립문 앞에는 높다란 주춧돌 한 쌍이 멋없이 서 있다. 그것은 영은문이라는 옛날 명나라 사신을 맞는 상설 환영문의 흔적이다. 영은문은 그 주춧돌 위에 기둥 하나씩을 세우고 지붕을 해얹어 재주 자랑을 겸해서 세워논 것이었다. 갑오경장으로 청나라의 굴레를 벗어버리자 독립협회에서 재빨리 헐어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지금의 독립문이다. 그런데 그 영은문 용마루의 기왓장이 하나 깨졌다.
그냥 두면 빗물이 스며 목조 부분이 썩을 것이고, 수리하자니 큰 일이다. 사다리를 걸쳤다간 고 회똑회똑한 건물이 넘어져 버리겠고, 앞뒤로 비계를 매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비용이 조만히 든다.
그래 실무진이 걱정들을 하는데 판서가 부른다.
“내일 아침 일찍 호조 돈 오백냥만 싣고 영은문 앞으로 나오너라.”
약아빠진 아전이지만 영문을 모른 채 이튿날 새벽 돈바리를 안동하여 현지로 갔다. 엽전 백냥이면 장정 짐으로 한짐이더라니 말바리에 실어도 두 바리 잔뜩이다. 판서는 미리 현장에 나와 있다가 돈을 풀어 무악재 고개로 넘어오는 나무짐을 모조리 샀다. 이때는 쪽바리 장작, 솔가지, 갈퀴나무 등등 서울 시민의 땔나무가 소나 말에 실려 서대문으로 새벽마다 길이 메게 들어오던 때이다.
산더미만큼 사 모은 그 나무를 그는 영은문 앞뒤에서 쌓아올리게 했다. 그래서 문보다도 높이 쌓인 그 위로 널조각을 걸치고, 몸 가벼운 사람이 성한 기왓장 하나를 들고 올라가 후딱 갈아끼웠다.
입을 딱 벌리고 구경하는 나무장사들 뒤로, 뭉게뭉게 모여든 것은 서소문, 서대문 안에서 나무바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구경을 끝낸 그들은 제가끔 저 필요한 나무를 사 싣고들 가니 돈은 고스란히 회수되고 주변에는 부서진 부스러기만이 흩어져 있었다. 부비 든 거라곤 기왓장 한 장, 일꾼들에게 해장국값으로 내린 행하 정도였던 것이다. 호조 실무에 귀신이 다 된 늙은 서리였지만 그 솜씨를 보고야 무서운 대감이라고 아니하진 못했을 것이다.
실수와 고의는 엄연히 다른 법
동래 정씨에 홍순이라는 이가 있었다.
영조 21년 을축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우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그가 호조판서로 예조판서를 검하고 있을 때, 저 유명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예조판서 책임하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모든 절차를 될 수 있는 한 후하게 하고, 염습하는데 쓰인 옷감에서부터 시신에 신기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재료를 한조각씩 따로 떼어, 그 당시의 경비 쓴 문부와 함께 궤짝에 넣고 굳게 봉하여 두었다. 그리고 그 궤짝의 열쇠를 몸소 지니고, 믿을 만한 서리에게 일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부디부디 이 궤를 단단히 간수 하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조가 연세 높아 승하하시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연산군의 재판으로 일대 보복의 형옥이 일어날 판이다 자기 아버지를 혹시라도 소홀하게 다루었을까 하여 왕은 상례 당시의 담당관을 물었다
곧 어전에 불려 들어간 그는 이미 일러두었던 서리에게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고, 몸소 차고 다니던 열쇠로 열었다. 그리하여 이러이런 천으로 이러이러한 옷을 지어 입혀 드리고 이러한 재료로 이런 것을 만들어 넣어 드려 경비는 암만암만이 나고... 재료 견본과 함께 손살피같이 밝혀진 사실을 보고, 정조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아버지를 위해 쏟은 그 정성, 오늘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만반의 대비를 갖춰놓은 그 꼼꼼한 일솜씨...
임금은 크게 감동하였고 그래 정승으로 승진시켜 국가대사를 의논하게 된 것이다.
그보다 앞서 그가 평안감사로 있을 당시의 일이다.
기생 하나가 사또가 안계신 틈을 타 담배를 조금 훔쳐서 피웠다. 자리에 돌아와 담배 함 안의 것이 대중에 틀리는 것을 알고는, 누가 그랬는가를 밝혀, 예의 기생은 끌려내려가 매 30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았다.
그런지 얼마 뒤 일이다. 심부름하는 통인이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전신을 비춰보는 체경을 깨뜨리자 겁에 질려서 떨었다.
담배 한두 대에 그런 형벌을 내리던 사또인데....
자리에 돌아와 대령할 아이들 하나 없이 텅 빈 것으로 보고 다른 하인에게 물으니 그런 사정이라, 모두 불러 오게 해 잘 타이르고, 깨어진 것이나마 한쪽씩 나눠갖게 하고는 다시는 말이 없다. 그 당시 유리로 된 거울은 정말로 귀중품이었으므로 측근에 모셨던 이가 의아해서 물었다.
“거울을 깨친 것이 먼젖번 담배에 비할 것이 아닌데, 먼젓건 벌하고 이번엔 그냥 두시다니...”
“그게 아냐! 먼젓건 고의로 그랬으니 소행이 발칙하고 이번거야 철모르는 아이들이 실수로 그런 거 아닌가베.”
그 정승에게 딸이 있어 걸맞는 감의 수재를 사위로 맞게 됐는데, 혼사에 쓸 부비를 부인과 의논하니, 혼수에 8백냥, 잔치비용에 4백냥의 예산을 가져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혼인날이 다 되도록 피륙을 안 들여와 부인이 안절부절한다
“장사꾼이 가져오마고 하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입던 옷이나 빨아 입혀서 보낼밖에...”
또 잔칫거리를 들여오지 않아 성화를 하니까,
“가져오마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그냥 있는 것 가지고 치르지.”
그렇게 치뤄진 혼례이니 딸은 물론 사위도 은연중 불평이 컸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위가 처가에 와 밥먹고 묵는 것까지 용납않고 되쫓아 보내던 박정한 장인은 몇해만에 딸과 사위를 불렀다. 집 가까운 한 곳에 이르더니 보여주는데, 조촐한 집에 뜨락도 아늑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그야말로 분통같이 꾸며져 있다.
“네가 시집갈 때 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천이백냥은 들거라고 하더구나. 그렇기로 그 많은 돈을 공연히 남의 눈이나 즐겁게 하려고 써 버릴 것이 뭐냐? 그래 그 돈을 따로 세워 가지고, 그 동안 늘렸느니라. 그 불어난 것으로 이 집도 지었고, 시골에 땅도 사서 계량할 만한 추수는 받게 해 놓았지. 이만하면 남의 집에 꾸우러 가지는 않을 것이니, 예 와 살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추수나 받아먹고 편히 지내라는 얘가는 아니다. 후고의 염려없이 사나이답게 앞길을 열어가는 기본을 삼아라, 그런 얘기지, 하하하.“
한번을 그의 사는 집을 수리하는데 그 공임 몇 푼을 가지고 장색들과 다투는 것이었다. 자제들이 보기에 딱해서 조용한 시간을 타서 말씀드렸다.
“가난한 일꾼들의 수고비를 깎자고 하신다면 상신된 체면에 뭣하지 않습니까?”
“모르는 소리! 정승은 일국의 의표야. 나 편한 것만 취해서 품삯을 올려주면 곧장 선례가 돼서 많은 백성에게 누가 된다는 것은 왜 생각않누?”
내 뜻을 잊지 말아 주오
조선조 후기에 이창운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영대장 총융사에까지 오른 분이다. 당시의 법이, 대장이 되면 조정의 아무라도 좋으니, 한 사람을 종사관으로 뽑아 쓸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이미 왕조도 사백년이나 되고 보니 문벌에 얽매이고 정실에 좌우되어, 자신을 가지고 나갈 수 없을 만큼 해이한 때였건만, 이런 제도가 살아 있었다는 것은 갸륵한 일이라 하겠다. 이장군은 당대의 인물로서, 다른 이 아닌 원로대신 김육의 자제로 문과에 급제한, 신진기예의 김재찬을 지명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재찬은 콧방귀를 뀌었다.
“제까짓 것이 나를 데려다 수하에 두겠다고?”
문무가 모두 양반이건만 문관들은 무관가문을 얕보는 것이 당시 하나의 풍조였다. 몇 번을 불러도 아니 오니까 대장은 강권을 발동하였다. 상관의 명을 거역한 죄로 군법을 시행하겠다고, 군사를 풀어 잡으러 보낸 것이다.
김재찬이 다급해진 나머지 아버지께 들어가 사뢰었더니,
“꼴 좋다. 네가 조정의 체통을 무시하고 잘난 체 하더니,그사람 성품에 넌 죽어!”
“그렇기로 아버님! 이걸 어쩝니까?”
애걸하듯이 받아낸 아버지의 편지를 품에 지니고 군사들을 따라갔더니, 좌기를 차리고 않아 호령이 추상같다.
“내 오늘 나라의 기강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리라!”
아비의 서신이 있노라고 애걸했으나, 대장은 곧이 듣질 않는다.
“그 대감이 아들의 목숨 구하려고 그 따위 편지나 쓰실 그런 어른이 아니니라.”
그래도 안 받으려 드는 것을 주위에서 하 권해 받아 펴보니, 이게 웬 일인가? 그냥 백지다.
“그 어른 편지는 미상불 잘 쓰셨네, 자식을 똑똑히 못 가르쳐 할 말이 없으시다는 거여.”
그리하여 죽음은 면했지만 옥에 내려 가두고 덜커덕 자물쇠로 걸어 잠갔으니 그 꼴이 뭐람?
그날 저녁 대장은 옥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밤이 이슥토록 평안도의 지리와 물산.교통로.군비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후 매일 저녁 찾아와서는 전날 가르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다음 과정을 가르쳐, 김재찬은 40여 일 만에 평안도 40여개군의 실정을 그 고장 다스리는 사람보다도 더 소상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독한 밀봉교육이 끝나는 날, 대장은 그의 손을 잡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조정이 서북사람을 차별대우해서 불평이 쌓일대로 쌓였는데, 나라 안이 군사를 모른 지 벌써 200년이요. 이 늙은 것이야 쉬 죽을 것이지만, 일후에 대란을 치를 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부디 내 뜻을 잊지 말아 주오.“
그뒤 세월은 흘러 김재찬이 정승 지위에 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세의 풍운아 홍경래가 반기를 들었다.
당시 서울에는 인왕산과 낙산, 남산에 봉화대가 있어서, 서북방과 함경도 및 남해안의 경보를 전해 받는데,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전했다. 무사할 때는 한 가닥씩 올리는 제도라 도성사람들은 밤새 뜰에 내려 보아, 세 군데 봉화가 한 개씩 켜져있으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었는데, 인왕산의 봉화가 둘이 떴다, 그러더니 이내 셋이 되고 넷이 되고, 이젠 다섯 가닥이 올랐다.
사태가 불안할수록 한 개씩 늘려,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마지막으로 다섯 개를 다 피워서 알리는 것이다.
온 도성이 발칵 뒤집히고 조정은 돌발사고에 정신을 못차렸다
“약현대신 빨리 들라 하라.”
약현은 김재찬의 사는 곳, 지금의 서울역 뒤 중림동 일대다. 그는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서는데 말을 타도 좋고, 달리 걸음 빠른 가마도 있건만 일부러 평교자라고 낮은 가마를 탔다. 그리고는 벽제소리도 구성지게
`에이, 물렀거라! 비켰거라`
마냥 노라리조로, 서대문으로 질려갈 수도 있건만 일부러 남대문을 들어서서 장안대로를 헤치면서 예궐하였다. 평교자란 노재상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본래 슬금슬금 다니게끔 만든 가마인 것이다.
그러자 막상 피난보따리를 꾸려 지고 거리가 메워지게 뛰쳐나왔던 도성안 백성들은 제 눈을 의심하였다.
“저거 약현대신 행차 아냐? 저렇게 갈짖자 걸음으로 언제나 대궐에 도착하지?”
“아녀! 다 마련이 있길래 저렇게 겉지, 대책이 없어봐. 허둥지중 먼지를 일구며 달려갈 거 아닌가베.”
백성들은 수근거리면서도 마음이 진정되어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리니 거리는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조정에 도착하니, 온 정부가 펄펄 뛴다. 뭘 하기에 이제 들어왔느냐는 것이다.
“오면서 한 가지 일을 하고 오느라고요.”
유들유들 대답하며 자리에 앉자 사태 수습을 일사천리로 지휘하였다. 예기꾼의 표현을 빌자면 소매자락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지휘하였더란다. 명령을 받은 관원들도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하여 며칠이 안 가 난리는 평정되었다. 흔들리는 민심을 행차 모습만으로 수습을 하고 난리 또한 간단히 평정한 그의 능력에 대한 주위의 칭송도 들은둥 만둥 그는 어금니를 주근주근 깨물면서,
“그때 이장군이 명인이지!”
그러더란다.
주인의 원수를 살려둘 수야...
조선조 전기에 정순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정암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섞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따로 놀았다니 어딘가 인간성의 결함이 그들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화위복으로, 그들과 멀었던 때문에 도리어 덕을 보아, 중종 14년에 벌어진 기묘사화에 말려드는 것을 면하고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었다.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을 때,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같은 윤씨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본시 중종에게는 장경왕후 몸에 낳은 세자와 후취인 문정왕후 몸에서 얻은 경원대군이 있었는데, 인종의 외숙 윤임의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형 일당은 소윤이라 하여 대립해 있었다.
당연한 추세로 인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대윤의 세상이었으나, 그가 재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왕위에 올라 이번에는 소윤 일파가 득세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하니 이른바 을사사화이다.
정순붕은 이기 등과 함께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유인숙, 유관 일파를 숙청하고, 자기 편에 가담 않는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사림들을 몰아내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그 공로로 일당은 크게 세력을 떨쳐서 국정을 주물렀으나 굳세 믿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몰락하여 20여 년 동안의 영화는 비참한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정변이 있을 때면 언제나 반대파는 역적으로 몰리어 폭삭 망하고, 이긴 쪽은 충신으로 대접받아 공신으로서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망해버린 가문의 재산은 몰수되어 새로 된 공신들 손에 들어가고, 가족 중 남자들은 모조리 죽여서 씨를 말리고, 여자들은 신분을 떨구어 공신들 집안에 종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신세가 말이 아니다.
이 얘길 쓰면서 생각나는 것이, 세조 때 단종의 사육신들 가족의 말로다. 인정있고 체통을 아는 가문에 떨어진 분은 그래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겠지만,
`이년 저년, 너의 집 종년이냐?` 하듯이, 한다 하는 명문의 귀한 딸이 종의 신세로 궂은 일을 하다가, 무지막지한 놈을 비부로 맞아 남편으로 받들고 지내야 했겠으니, 생불여사라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을사사화에서도 비참하게 망한 대윤 일파 대갓집 가족들은, 일약 충신이 된 가문에 가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정순붕의 가문에도 물론 그의 손에 희생당한 대갓집의 수많은 하인들이 상급으로 주어졌다.
그래 유인숙의 옛 하인들도 곧 많이 정순붕의 소유로 돌아갔는데, 모두들 소릴 죽여 울면서 새로운 상전 댁으로 배정받아 가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는데, 저런 발칙한 것이 있나?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계집애 하나는, 조금도 섭섭해 하는 것 없이, 새로 들어간 상전들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쪽에서야 찔찔 울고 옛상전 생각이나 하는 애들보다야 지연 그애에게로 마을이 갈 것이고, 거기다 예쁘장한 데다가 영리하기 이를 데 없다. 정순붕도 그 애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여, 나중에는 신변 가까이의 일은 도몰아 그 애에게 맡기다시피 되었다. 그런데 주인 대감이 꿈자리가 사나와 괴로워 하더니, 그 증세는 차츰 더해져 나중에는 매일 저녁 자다가도 가위를 눌리어 소리쳐 깨어나 헛소리를 하고, 이것은 누가 보나 귀신들린 증세다.
의원을 불러다 보여 약도 쓰고 별 짓을 다해온 정경부인은 짚이는 데가 있든지 이름난 무당을 불러다 보였더니, 아니나다를가 누군가가 예방을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예방이라면 저주라고 하여 요사스런 방법으로 귀신의 힘을 빌어 상대방에게 벌역을 내리게 하는 일이다.
그리 신변의 물건을 샅샅이 까뒤집어 살펴나갔더니, 주인이 베고 자던 베개 속에서 사람의 해골 뼈가 나오지 않는가?
주인은 병이 중하여 이미 숨을 모으고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누가 한 짓일까?
“나의 상전이 무슨 죄가 있길래, 그 댁을 그 꼴로 만들었더냐? 그 동안 몇해를 벼르고 별러 이제 소원을 뤘웠으니 더 살생각은 없다. 어서 죽여라.”
주인대감의 몸은 차츰 식어갔고, 여자로서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이 계집종은 그 자리에서 매맞아 죽었다.
자손들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쳐 주인은 그저 심상히 죽은 것으로 새상에 알려졌는데, 주인공의 둘째 아드님 고옥이 나이 70이 넘어 유언으로 말하였다. “내 평생에 가문의 불명예로 여겨 안팍으로 입을 봉해 왔으나, 그 계집의 의열이 하도 가상하기로,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와 이제 세상을 뜨면서 처음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 올곧은 아버지를 모신 아들들의 그 동한 처신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들은 형제였는데 맏이는 호가 북창, 아우가 앞에 말한 고옥으로 두 분 다 뛰어난 재주와 기개로 이름났건만, 아버지의 행적에 부담을 느껴, 세상에 나설 뜻을 포기하고 시와 술로 한평생을 즐기면서 보낸 때문에, 아까운 인재를 썩혔다는 의논도 있었으나, 그런 일면으로 이 두 분의 생애를 신선에 비하여 이르기도 하였다.
조강지처는 불하당이요
흔치 칠거지악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옛날 남성들의 횡포를 얘기하는데 웃기는 얘기다.
어쩔 수 없어 아내를 내보내야 할 일곱 가지를 들었대서 툭하면 그것만 추켜들지만, 거기에 대하여 쫓아내지 못할 사불거가 열거돼 있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지,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첫째, 들어와서 시부모님 거상을 입은 사람.
그는 이미 자신의 아내이자 부모님께 자손된 도리를 한 사람이다.
둘째, 자녀를 낳은 사람.
어미 없는 자녀는 어쩌란 말인가?
셋째,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거지가 되든지 윤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넷째는 자못 인정미가 넘친다.
선빈천 후부귀.
가난하고 천하였을 때 서로 만나 이제 이쯤 부하고 지위가 높아졌으니까 걸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는 가라. 이건 인정에 차마 못할 일이다. 그러니까 칠거지악에 들면서 이 조항에 걸리지 않은 여성만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는 말을 들추는데, 조는 술 지게미, 강은 곡식을 찧고 재꼈을 때 나오는 겨, 두 가지 다 먹을 것이 못되는 음식이다. 돼지에게나 줄 그런 것을 먹으면서 고생을 같이 한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요, 거기엔 다음과 같이 얽힌 얘기가 있다.
후한의 광무제가 왕조를 중흥하고 나니 이젠 집안일을 좀 정리해야 할 단계인데 누님인 호양 공주가 과부가 되었다. 광무제는 부하 중에 송흥이라는 장군을 점찍고 어전으로 불렀다. 병풍 뒤에다 누님을 앉혀놓고 황제는 말머리를 꺼냈다.
“속담에 이르기를 귀역교 부역처라, 귀해지면 친구를 바꾸고 부해지면 아내를 바꾼다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신이 듣기에 빈천지교는 불가망이요,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 하옵니다.”
이에 황제는 병풍 뒤로 들리게 말했더란다.
“누님, 다 틀렸소.”
우리나라에도 이에 못지 않게 인간미 넘치는 얘기가 있다.
신라 때 지금 충주땅의 어떤 사람이 아들은 낳았는데, 이게 묘하게도 머리 뒤에 높은 뼈가 불룩 솟아 있고 정수리에 검은 반점이 있다.
보는 사람마다 `하 괴상하게 생겼으니 무언가 한가닥 할거다`고들 하여서 곱게 키웠는데 이름도 자연 우두, 즉 쇠마리가 되었다. 자라나면서 공부를 즐기기에 어떤 방향을 취하려느냐니까 단연코 유학을 공부하겠단다.
그래 선생을 붙여서 <효경>, <곡례>, <이아>, <문선>등을 읽혔더니, 그야말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쳐 장족의 진보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그후 벼슬길에 발을 디뎌 많은 촉망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젊은 혈기에 바람을 피워, 가마실이란 동네 대장간 집 딸하고 눈이 맞아 정이 자뭇 깊었다.
그러는 중에도 스무살이 차니까 부모님은 읍내의 얼굴 곱고 행실 뛰어난 색시를 골라 혼담을 진행하였으니 물론 걸맞는 가문의 규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 되는 신랑이 다른 데로는 장가를 못 가겠노라고 버틴다.
아버지는 화나 나서 의례건 할 말을 늘어놓는다.
“네가 지금 명성이 한껏 높아서 나라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래 그 따위 천한 집 출생하고 살겠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출세에 장애가 된다거나 한 말까지는 기록에 없지마는 독선생을 앉힐 정도의 집안이니 그런 말도 족히 나왔을 것이다. 그랬더니 아들의 대답이 의연하다.
“가난하고 지위 낮은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도를 배우고도 이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옛사람 말에 조강지처는 불하당이요, 빈천지교는 불가망이라고 들었습니다. 천한 여자지만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념을 가지고 내세우는 고집을 누가 꺽겠는가?
그후 태종이 즉위했을 때 당나라에서 조서를 보내왔는데, 물론 한문이요, 당시 국내실력 가지고는 풀지 못할 곳이 많아서 그를 불러 물었더니 척척 읽어내고, 답서를 쓰게 했더니 흠잡을 곳이 없다.
왕이 놀랍고도 기뻐서 가까이 불러 이름을 물으니 우두라 한다.
“그런 이름으로야 쓰겠는가? 경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우리말로 역시 쇠마리)선생이라 함이 좋으리라.”하고 일을 맡길 만하다 하여 임생이라 부르며 달리 이름을 부르지 아니 하였다.
여기까지만 써 놓고 보면 흔히 있는 출세한 얘기라 별거 아니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경의 공이 지대하다고 높은 벼슬과 무수한 상사가 내렸건만, 생업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살아갔으며, 신문왕 대에 이르러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비용을 풍부히 보냈건만, 그의 부인은 장례 치르고 나서 남은 것을 모조리 절에 기부하고 도로 가난하기가 전과 같다.
나라에서 보살펴 주마 하니까 미망인은 끝내 사양해 받지 않았으니,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나 할까. 분수를 지키며 조용히 사는 품이, 한창시절의 강수 선생이 열애해 그 뜻을 굽히지 않게 할 만한 일면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겠다.
오늘 사냥감은 바로 네놈이다
흔히 사람 덜된 것을 보고 등신이라고 하는데, 등은 같다는 뜻으로 몸뚱이와 똑같이 만든 것이 등신이다. 곧 남에게 몹쓸 짓을 해 보복이 두려워 떠는 자가, 밤에 자객이 들더라도 저대신 칼맞아 죽으라고, 저 잘 자리에 이불덮어 눕혀놓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모양만 사람 닮았지, 생각할 줄도 행동할 줄도 모르는 것이 등신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꼴이라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인조 때 이원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왔던 이여송이 이땅에서 낳은 손자다. 무과에 급제해서 어느 고을에 군수를 내려갔는데, 거기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서울의 어느 철리(임금의 친척)집을 배경으로 한 양반이 있어 관가 곡식을 꾸어다 먹고 갚지를 않는데 자그마치 삼백 섬이나 되었다.
당시 사환미라 하여서 봄에 어려운 때 가난한 백성에게 관의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햇곡식으로 쌍아두자는 모처럼의 좋은 제도였는데, 그런 곡식을 이놈이 권세를 믿고 꿀꺽 삼켜 놓았으니 밑천이 있어야 관을 운영하지.
그렇다고 그 자가 그걸 갚을 형편이 못되는 것도 아니다.
이군수는 당연한 처사로 사람을 보내 사환미 갚기를 독촉하였다. 그랬더니 양반댁에 사환미를 독촉하려 오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볼기를 쳐서 돌려보냈다. 이군수가 그 꼴을 당하고도 다시 아무 말이 없자 주위에선 수군거렸을 것이다.
“이번 원님도 별 수 없군! 상대방 권세가 워낙 세어서...”
그렁저렁 가을도 저물어 얼음이 얼고 눈보라치는 날씨가 되자 군수는 관청안을 모두 풀고 군사들을 휘동해 사냥을 나섰다. 물론 짐승도 잡으려니와 남자다운 씩씩한 놀이로 울적한 심회도 풀고 군사들의 기능도 시험하고 친목도 도모하는 그야말로 다목적의 행사였다.
일부는 목을 잡아 덫을 놓고, 군수 자신은 왼손에 잘 길들인 매를 받쳐 들고, 군사는 사냥개를 휘몰아 골짜기를 뒤졌다. 꿩이 뛰쳐나오면 날쌘 매를 날려 덮쳐서 잡고, 낮잠 자던 멧돼지는 놀라 일어나 달려가다 덫에 걸리고, 창에 찔렸고, 노루는 내뛰다 말고 등성마루에서 먼산바래기를 하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물에 걸린 토끼랑 여우. 너구리. 오소리...
푸짐한 그날 수확을 갈라메고 군사들은 좋아라고 떠들면서 산을 내려왔다.
산 아래 개울가 너른 자갈밭에는 미리 군막을 쳐놓아 군수는 우선 거기 들어서 좌정하고, 수행원들은 각각 소임을 따라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에 사냥한 짐승의 각을 떠서 굽고, 지지고 토막내 썰어 넣어서 끓였다.
“여보게 김비장! 저어기 보이는 것이 아무아무댁일세. 자네 가서 내말을 전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의당 들어가 뵈어야 도리에 옳겠으나 몸에 군복을 걸치고 있어서 사가로 찾아뵙기 미안하여 그러노라고, 고기도 넉넉하니 잠깐 나오시면 반갑게 뵙겠습니다고, 공손하게 여쭙게.”
집에 있던 그 양반 작가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의관을 정제해 거드름을 빼고 찾아왔다. 군막 앞에 이군수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외친다.
“잡아라! 오늘 사냥에 제일 큰 수확은 네놈이다.”
결박을 지어서 말 위에 동그마니 올려매 높고, 등에다가는 미리 준비한 깃발을 세웠는데 거기 쓴 글귀가 엄청나다.
“역적, 관명을 거였했으니 역이요, 관곡을 훔쳤으니 적이다.”
술과 고기로 배를 불린 군사들 뛰-따-두리둥둥 길군악을 늘어지게 치면서 앞뒤를 옹위하여 관가에 도착하자 옥에 밀어 넣었다. 말할 것도 없이 먹혔던 관곡은 즉시 완전 회수되고, 양반은 고개를 떨구고 옥문을 나와서 사라져 갔다. 그 뒤 서울 권력가의 보복이나 받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두려웠다면 이런 멋진 처사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의 몇 대조 할아버지가 이러저러한 높은 벼슬을 했노라고 너불거리는 이를 가끔 보는데 웃기는 얘기다. 말씀만 하오면 그저 옳다는 지당대신도 있고, 해바라기 족속도 있으며, 탐관오리는 오히려 낫지, 무능해서 밑의 놈들이 마구 먹어도 쇠통 모르고 앉았던 등신도 많은데. 과연 옳은 판단으로 기골있게 제 몫을 하였던가? 그러지 못했다면 부끄러워서도 잠자코 앉아있는 게 낫다.
정열은 외곬으로
공부하거나 일한 때면 한눈팔지 말라고 어른들은 자주 침을 놓는다. 한눈팔다가 일을 그르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모처럼 천품을 잘 타고나, 열심히 공부한 끝에 벼슬길에 올랐으면, 나랏일이나 열심히 하랬지 누가 한눈을 팔랬나?
재물에 한눈을 판 사람들은 탐관오리로 낙인이 찍혔고, 미색에 눈이 팔린 사람들은 집안을 어지럽히고 나랏일을 그르쳤다. 어찌 그뿐이랴. 그들이 끼친 오명은 길이길이 그 자손들에게 부담이 되어 남는다.
하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오성, 한음 두 분 재상의 내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성은 나라에 끼친 공로로 그의 본관인 경주의 옛이름을 따 오성부원군에 봉했기 때문에 그 작호를 따서 부르는 것이고, 별호는 백사였으며, 한음은 이덕형의 호였다.
두 분 다 선조를 모시어 임진왜란 때 활약했고, 어려서 같이 자라며 재치 넘치는 장난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행적을 살펴보며 느끼는 것이, 두 분 모두 사심이 없었다는 것이니, 오성이 청백리에 녹선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나 알 것이다. 한음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31세에 대제학이 되고 38세에 우의정을 하여 흑두재상으로 전무후무하게 출세가 빨랐다는 사실과 명나라 군사의 사령관인 이여송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등이 고작으로, 이것은 그의 전 인생의 표면을 스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임금을 의주까지 모시고 피난갔다가 왜군이 물러나 서울로 수복했을 때의 일이다.
영의정으로 국사를 총괄하랴, 또 폐허가 된 서울에 왕이 거처하실 창덕궁을 수축하는 총책임을 맡아 밤낮 없이 뛰고 있었다. 헌데 못견디겠는 것이 당시의 근무복 차림이다.
속에 모시 홋옷을 받쳐 입고, 그 위에 사로 지었다지만 겹으로 된 단령을 입고, 사모관대를 차리고 나서면,
속대발광욕대규
글자 그대로 `미쳐서 소리라도 지를 지경이다`
거기다 더운 날씨에 집에서 일일이 식사를 날라오는 데도 문제가 있다. 그래, 대궐 가까이에 조그만 집을 한 채 마련하고 소실을 얻어 살림을 차려줬다. 소실을 얻은 것은 당시 상류층에서는 예삿일이었는데, 미색을 탐해서가 아니라 집무중에 잠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또 입에 맞는 식사로 일에 능률을 올리자는 목적이었다.
어느 하루 푹푹 찌는 오후에 그는 그 무거운 차림을 끌고 소실 집엘 들어서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당시 제호탕이라고 하여, 갖은 향기로운 약재를 넣어 달여서 얼음에 채웠다가 꿀에 타마시는, 소위 약을 겸한 청량음료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대접 먹었으면 해서 내민 손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어미는 것을 보니 바로 그 제호탕이 아닌가.
그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약그릇을 보고 또 다시 얼굴을 한참
이나 들여다 보더니, 별안간 뒤로 돌앗! 저벅저벅 대문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에 발그림자를 들이지 않은 것이다. 요즘 말로 딱지를 놓아버린 것이었다.
며칠 안 있어 오성 대감이 소실 집엘 찾아갔다. 그 활달한 기질에 커다란 소리로 부르며 들어선다.
“대감 계시우?”
여인이 반색을 해 맞아들여 앉히곤 눈물로 하소연이다.
“한때나마 나라 안의 제일 가는 어른을 남편으로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제 일생의 영광이옵니다마는, 무슨 죄가 있어 버리신 것인지 연유나 속시원히 알았으면 한이 없겠사와요.”
그런 뒤 오성 대감은 대궐 뒤뜰에서 한음과 마주쳤다.
“대감, 그 계집 버리셨수?”
“예, 버렸습니다.”
“왜, 똑똑하던데...”
“너무 똑똑해서요.”
그날, 날씨는 푹푹 찌는데, 꼬옥 제호탕이 한 그릇 먹고 싶어서 말없이 손을 내밀었더니, 내어 놓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무럭무럭 귀엽고 대견한 생각이 끓어오르더란 말이다.
“그렇기로 이런 난국에 계집이나 사랑하고 있을 형편이 되얍지요. 그래서 그냥...”
한음은 당시 41세의 한창 나이였다.
그렇게도 유난을 떨더니
조선조 중엽 광해군 때 활약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잡혀서 죽은 대문장가에 유몽인이라는 분이 있다.
서예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설화를 모아 <어우야담>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어우는 그의 별호다.
이 책 가운데 채록되어 있는 얘기로 주인공을 소개하면서
“연운의 자는 태공이니 거부장자라”라 하였는데, 별로 들어보지 못하던 성이다.
예쁜 딸이 하나 있어서 남달리 사랑스러워 그에 걸맞는 미남자를 구해 사위를 삼겠다고, 화공을 고용해 자신이 생각하는대로의 초상화를 하나 그려 내었더니. 그리는 동안 아마 잔소리 깨나 했을 것이다.
얼굴은 둥글지도 않고 옳지! 옳지! 그 정도로 갸름하게, 광대뼈가 너무 나와서는 못쓰고, 눈귀는 올라가서도 안되고 쳐저서도 못쓰며, 눈은 봉의 눈으로 인자하게, 코끝은 뭉뚝해야 하고...
웬만하면 하 유난한 주문에 화공은 붓을 팽개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한다하는 부자라 사례금도 듬뿍 받았겠다, 하여간 진땀을 빼며 잔소리를 머리가 희도록 들은 끝에, 한 남자를 꾸며 그려서 당대에 둘도 없을 미남자로 창출해 내었다. 이 그림을 표구해 족자로 꾸며서, 길로 면한 문 위에 걸고 광고하였다.
“꼭 이렇게 생긴 남자가 있거든 찾아오라. 사위를 삼으리라.”
그러나 그런 미남자가 쉽게 나타날 리 없다. 날마다 지나가는 이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많은 한다하는 총각들이 찾아와 봤으나, 스스로 제 얼굴과 비교해 보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들 갔다.
그런데 하루는 수염을 길게 드리운 점잖은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 그림을 보고 놀라며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도련님! 여기는 왠일로 와 계시옵니까?”
그러고는 바짝 다가가 자세히 보더니 또 한번 뇌까린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으신가 했더니 이런 제에기, 그림 아냐? 그렇기로 신통도 하지, 우리 댁 도련님을 어쩌면 이렇게 쏙 빼놓은 것처럼 그려 놓았을까?”
물론 지키던 하인은 곤두박질을 쳐서 주인에게 들어가 그 사실을 고하고, 주인도 마음이 황홀해서 그 하인에게 뒤를 밟아가 어디 사는 어느 댁인가를 확인해 오도록 일렀다.
그리하여 혼담이 오가고 정혼이 되어 이제 예만 치르면 될 단계다.
그런데 이면에 곡절이 있다. 이 댁 신랑이라는 것이 사실을 병신이라. 병신도 이만저만 흉칙한게 아니어서, 한 눈을 멀고 한 다리는 절며 한 팔을 쓰들 못하고, 낯이 고석매처럼 얽은 데다가 검기는 왜 그리 검은지...
그렇건만 묘하게도 재산은 남부럽지 않게 많아서 부자로 소문이 난 가문이다. 그래 한다하는 중매쟁이를 매수하여 혼처를 구했다가, 납폐까지 하고도 되돌아온 것이 세 번이요, 중매할멈이 욕먹고 쫓겨 돌아오기를 수없이 한 그런 상대다.
물론 부모는 애가 닳아 무당에게 묻고 장님에게 점치면, 예외없이 미인에게 장다들 거라고 하여서, 그것만을 믿고 차일피일하기 실로 몇해더냐?
신랑의 나이 서른하고도 여덟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데 그집 하인 중에 능글맞은 자가 아마 주인에게 은혜도 많이 받았든지 멋진 연기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으로 치면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길일이 다가와 주인은 재물을 흩어 하인이랑 동네 사람의 입을 막고, 신랑을 분장하여 날이 어둑어둑할 무렵, 길차려 떠나는, 얼굴에는 분을 뚜껍게 바르고 옷을 흐르리하르리 겹쳐 입어, 저는 다리는 목발로 괴고 팔을 소매 속에 팔장끼어 의젓하게 내세웠다. 초례청에 들어서 부축을 받으며 절하여 예를 마치고, 이제 신방에 들어 색시와 마주앉아 상우례를 시킬 차례인데 일대이변이 일어났다.
“네 이노옴! 장자야, 나오너라. 나는 동쪽 늪을 오래도록 지켜온 화룡이니라. 내 혼자 지내기 쓸쓸하여 너의 딸로 배필을 삼으려 점찍었었는데 내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딴 놈에게 주어? 이미 남의 것이 된 이상 난 심청이와 놀겠다만 신랑 네놈의 눈을 멀게 하리라.”
신랑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고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음 네놈의 한 발을 절게 하리라.”
신랑이 벌떡 일어났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검어쥐고 나자빠졌다.
“이노옴! 그걸로 내 분이 풀릴 줄 아느냐? 네놈의 팔을 분질러 놓으리라.”
신랑이 외발로 솟구쳐 일어섰다가 모접이로 쓰러지는데 억지로 일어앉는 것을 보니 한팔이 벌써 뒤틀어졌다.
“어이, 후련하다. 그렇기로 내 네놈의 얼굴을 그냥 둘 줄 알았더냐? 너의 얼굴을 얽고 칠을 하노라.”
온 집안이 난가가 되고, 장모랑 식구들이 마당에 내려서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화룡은 불꽃 타오르는 양팔을 들어 위협하는 자세를 짓고는 지붕 너머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망연실색한 가족들은 잠깐 사이에 볼썽사나운 병신이 돼버린 신랑의 몰골을 보고 눈물지었다.
“화룡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그래도 얘야. 용에게 시집간 것보다야 낫지 뭐냐? 용과 산다면 그것은 물에 빠져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얘기지 뭐냐?”
이리하여 유난을 떨던 연부자는 어이없이 병신사위를 보고도 체념해야만 하였다.
남한산성의 숨은 애국자
정조 때 홍경모가 엮은 <남한지>에 이런 인물 얘기가 올라 있기에 소개한다. 서흔남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는데, 아병의 사노였다고 기록돼 있다. 아병이라면 대장을 따라 본진에 있는 병사다.
옛날 제도에 일반 장정으로 군적에 올라있는 이는 번을 들어서 근무하였으니, 오늘날의 군복무와 같다.
그런 중에 대장을 따라 본진에 있었다면, 이는 직업군인으로서의 사병, 말하자면 현역 근무하는 하사관 정도로 알면 될 것이다. 선대에 누가 법에 걸렸으면 죄값으로 팔려 개인 또는 관청의 소유가 되어, 대대로 자유를 모르고 매어 지내야 했는데, 관청에 매었으면 관노, 여자는 관비, 개인 소유일 때는 사노 또는 사비라 하였다.
<춘향전>을 읽으면 딸을 기생시키고 싶어진다고 한 독설가도 있지만, 기생의 공식 신분은 관비다.
그 구실에서 벗어나려면 대비정속이라 하여, 다른 데서 사비를 사다 대신 바쳐야 했었다.
아병 자체가 썩 뚜렷치 못한 처지에 다시 그의 종 신분이었다니 그의 비참한 처지는 미루어 볼 만하다.
기와도 굽고 대장간도 하며 지냈다고 했는데, 기록대로 옮기면 `믿음직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해서 모두의 천대를 받았다`고 하였으나, 이런 것은 기록의 성질상 후의 좋은 일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거를 과장해서 나쁘게만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이다.
그러던 그도 병자호란이 터져, 임금이 성안으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옮겨와 앉고, 2만 명 가까운 군사가 들끓게 되자 환경이 달라졌다. 청나라 군사가 몰려와 성밖을 겹겹이 둘러싸고, 심지어 바깥 둘레로 솔가지 울타리를 치고 방울을 달아매어 시척만 해도 소리가 나게 하였으니, 성안에 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다급해진 정부에서는, 누구고 바깥 세상에 나아가 이 다급한 사정을 우리 군대에 전해줄 사람은 없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때 대대로 벼슬하며, 입으로 충의를 뇌까리던 이른바 세록지신들은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다. 이 혹한에 적의 눈을 속이며 낮에는 숲 속에 숨고 밤이면 기어나가 적진을 뚫고 나아가기란, 손에 물 안 묻히고 편히 지내던 그들에게는 생의도 못할 험한
일이었다.
“누구고 성을 넘어 나아가 우군과 연락의 길을 터줄 사람은 없는가?”
이 소식을 듣고 서흔남은 선뜻 나섰다. 무지막지하게 살아온 그의 경력으로 보아 적임일지는 모르나, 여벌 목숨이 따로 있다면 모를까? 십중팔구 죽을 일에 뛰어들다니 여간 결심으론 안될 일이다. 그는 가뜩이나 손질 않아 새둥지같은 머리에 재를 끼얹어 헝클어뜨리고 들비비었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땟국이 지르르 흐르는 옷은 몸을 못 가려 군데군데 맨살이 삐어지고, 손에 가진 것은 지팡이와 바가지 한쪽이라. 임금이 내리신 유지를 간격맞춰 짜개어 지노를 꼬아서, 찢어진 옷의 갈피갈피를 꿰매어 감췄다. 그리고 어느 날 성을 넘어 나갔는데, 비척비척 걸어가다 넘어지고, 눈보라치는 속을 엎드려 기기도 하며, 사람을 만나면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서글픈 목소리로 먹을 것을 청했다.
이렇게 적의 진지를 며칠 헤매다가 그곳을 벗어나 달려가 임무를 수행하고, 또 그 꼴을 하고 적진을 헤매는 척 되돌아오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니, 아무리 강인한 신체라도 그 고생이 어떠하였을까?
그러다가 어느날 새벽 안개 짙은 가운데 성을 기어 넘다가 적병 눈에 띠었다.
“멀쩡한 놈이었다”
적도 그것을 알고는, 이미 허실이 들어나 진지를 버리고 본진을 삼전도로 옮기어 경계를 더욱 삼엄히 하였다.
예서부터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얘긴데, 성 지키는 군관의 보고로 그가 성을 넘다 들킨 것을 아시고, 임금 인조대왕은 그를 부르시었다.
“여러 차례 수고하였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전쟁도 곧 끝나겠으니, 그만 쉬도록 하라. 너의 공로를 무엇무엇으로 보답하겠나? 원하는 것이 있거든 서슴없이 말해 봐라”
임금은 입으셨던 곤룡포를 벗어서 하사하시며, 그를 천민 명단에서 빼고 통정대부 훈련원 주부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시었다. 그가 여생을 조촐하게 지내다 죽었을 때, 일생의 영예로 여겼던 곤룡포를 저승에서 자랑으로 여기라고 함께 묻었다고 전하는데, 그의 무덤은 동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첫번째 동네 뒷산에서 썼고, 조정의 모든 관원은 임금의 곤룡포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 앞 큰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하기를 수백년간 지켜왔었다. 그런데 요 몇해전 그의 산소자리에는 서울 사람 부자의 호화분묘가 들어 앉고,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조그만 비갈마저 비탈 아래로 나뒹굴어 있었다.
옳은 사랑은 반드시 이뤄지니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짝사랑이어야 된다.
주고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거래지, 어떻게 신성한 사랑의 범주에 넣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이름난 사랑의 예를 들어보자. 나라가 망하려고 할 때 이름있는 애국자는 모두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쳤지만, 그들은 거의가 나라의 은혜를 풍족하게 받은 이들이 아니다. 독립투사 중 윤봉길 의사같은 이는 나라 잃은 슬픔을 깊이 모른다. 뼈에 사무치는 망국의 설움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을 정도의 연배가 아닌가?
이봉창 열사도 왜놈 사회에 섞여 살아 조선말을 거의 잊어버린 상태에서 애국단에 뛰어들었다.
사랑이란 주는 것, 그러지 아니하고는 못 배기겠는 불덩이같은 그것이라야 한다.
각설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없이 사계절의 경치 좋기로야 우리나라 동해안을 제쳐놓고는 얘기가 안된다.
거기에 전해 오는 얘기라면서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돼 있는데, 따분하게도 시대와 주인공의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질 않다. 이야기인즉슨, 요새로 치면 고등고시 준비를 위해 한 젊은이가 강릉땅에 와서 묵었다.
그곳 특유의 훤칠하게 자라 줄지어 선 솔밭 사이로 하얀 모래를 밞아 걸으면 싸악싸악 소리가 나고 한편으로는 깁처럼 펼쳐진 푸른 바다가 백설같은 파도를 육지로 향해 펼쳐보인다. 울창한 숲 안쪽으론 거의 기복없이 들판이 열리고, 병풍처럼 막아선 태백산맥은 특히 해 떨어지는 광경이 일품이다.
그곳 지형의 특징으로 솔밭 안쪽으로는 거울같은 호수가 열리고, 그 앞으로 따라가며 솔밭이 이어지는데 솔밭을 뒤로 하고 연못을 향해 오손도손 부락은 형성되며, 생활이 안정된 고장이라 기와집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다. 젊은이는 그중 한 집에 처소를 정하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사나이로 세상에 났으면 과거를 거쳐 입신출세하여 부모님까지 후세에 빛나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하루, 청년이 창을 열고 하염없이 연못에 떠도는 흰구름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 저런?”
늘씬하게 잘 생긴 처녀 하나가 그릇을 들고 솔밭을 걸어서 지나와 물가 펑퍼짐하게 생긴 자연석에 앉아 그릇의 밥을 집어서 던져 줄 적마다 잉어들이 좋아라고 달려들어 받아 먹는다.
그러기를 한동안 하더니 처녀는 일어서서 돌아가는데 어엿한 그 태도, 그 몸매, 어쩌다 옷자락을 고치노라 고개를 돌리는데 오! 그 얼굴!
처녀가 나타나 전일과 똑같이 고기떼에게 밥을 주고...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청년은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러다가 결심을 하였다. 있는 글재주를 다해 편지를 썼다.
“첫눈에 반해 어떨 줄을 모르겠으니 무슨 도리를 차려야겠소이다.”
처녀가 나타나기 전에 늘 앉는 자리에 조약돌로 눌러놓고 그가 다녀간 뒤 나아가 보니 쪽지가 안 보인다.
의젓도 하여라! 남이 알세라 눈에 안뜨이게 슬그머니 치마폭에 싸가져 간 것이겠지.
이튿날 처녀가 다녀간 뒤에 나아가 보니 자기가 했던대로 쪽지가 놓여 있다. 가지고 돌아와 허겁지겁 읽어보니
“유능한 수재가 와 계시다는 것을 일찍 들어 알고 있사온대, 이만짝 사람을 그쯤 여겨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사오나 한낱 아녀자에 구애되어 자칫 대장부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뜻대로 과거에 오르시면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쫓으오리니. ”
“그 말씀 고맙습니다. 소저의 높으신 뜻을 따라 떠나가오니 부디 저버리지 말아 주시길...”
돌 위에 글을 남기고 청년은 홀홀히 돌아와 자택에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청년은 집을 나서서 장터 구경을 갔다.
“원! 저렇게 큰 잉어가?”
청년은 그 생선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손수 칼을 들어 비늘을 긁고 배를 갈랐다. 효심 많은 그인지라 손수 조리하여 부모님상에 올리려는 정성에서다. 그런데 별일 도 다 있지. 고기 뱃속에서 비단 쪽에 쓴 글이 나왔다.
“당신께서 떠나신 뒤 부모님이 서둘러 다른 곳으로 혼인을 정해 아무 날로 날짜까지 받았으니 이를 어찌하오리까? 나에게 여러해 밥 얻어먹은 물고기난 내 마음을 알아서 전하여 줄지...”
청년은 그 편지를 들고 부모님께 들어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부모님도 그저 놀랄 밖에, 고기 뱃속을 통해 편지가 오다니?
“오냐, 가거라?”
청년은 집에 기르던 천리마를 끌어내 타고 네 굽을 모아 달렸다. 말의 전신이 땀으로 젖어 숨을 허덕이며 달려 들었을 때 웬 놈팽이 하나가 하인의 팔밀이를 받으며 문간을 들어서고 있다.
“잠깐만!”
청년은 곧장 안마당으로 뛰어 들며 두 팔을 벌려 의식의 진행을 막고 고기 뱃속에서 나온 편지를 드리며 일장 연설을 하였다. 색시 집에서도 이런 기이한 일은 듣던중 처음이라.
처녀가 딱한 사정을 써서 물엔 던진 것을 대장잉어가 집어 삼키고 자진하여 어부의 낚시를 물었는데, 워낙 큰 잉어라 좋은 값을 받으려 서울로 가져가고, 두 사람의 티없는 사랑 사연에 하늘이 감동하여, 그것은 청년의 가정으로 들어간 것이다.“
색시 집에서는 정했던 신랑을 잘 일러서 보내고 둘이는 정식으로 예를 일러 청천백일하에 떳떳한 부부가 되어 대망의 입신 출세를 뜻대로 하고 해로하며 잘 살았던 것이다.
그들의 유적이 지금 강릉땅에 양어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연전에 그곳 향토사학자에게 들으니 물이 말라 버렸다는 얘기였다. 우리나라에 번안 소개되어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라는 주제가로 유명했던 작품의 원작은 일본의 `곤지끼야사`라는 것이었고, 그들의 연애무대는 애당초 동경에서 가까운 아타미라고 하는 관광지 해변가다.
그곳에 있는 노송 한 그루를 주인공 이름을 따 `오미야마쓰`라 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한마디 제안이 있다.
강릉의 양어지와 그 주변을 조경하여, 진정한 연애의 성지로 개발하고 이렇게 선전하시라.
“옳은 사랑끼리 여기 와 서약하면 반드시 이뤄지리라.”
반역자를 죽이려다
병자호란에 따른 민족의 비극은, 책을 들추기조차 역겨울 만큼 참혹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견디기 힘들다.
패전으로 `성하지맹`의 수모를 당한 후에, 세자와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이 볼모가 되어 저들의 땅으로 끌려가게 됐을 때, 명색이 벼슬아치들이라는 게 평소에 나불대던 충성은 어디다 던져두고, 핑계를 대어 배행해 모시고 가기를 모두들 꺼려 하였다.
오직 정뢰경만이 시강원 사서로서 수행하기를 자원해서, 그를 모시고 일했던 강효원도 함께 가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정공은 필선으로 승임되었는데 그는 인조 8년(1630년) 23세로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장래를 촉망받는 문신으로 당시 나이 30세밖에 안되었다.
병자호란에는 약간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다.
중국 본토의 명나라와는 건국초부터 남달리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구원병을 보내준 것을 다시 없는 은혜로 여겨 오던 터라 그들에 대한 은의도 저버릴 수 없고, 만주땅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청나라 세력에 맞설만한 군사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집권하던 14년 동안엔, 이른바 등거리외교로 그럭저럭 양편으로 다 좋은 척하며, 내 몸만 상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자위책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는 동안 광해군 10년 무오에 명나라의 만주토벌에 협력하기 위해 강홍립으로 도원수를 삼아 10만 병을 동원했는데, 심하싸움에서 패전해 김응하는 전사하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 지 5년 만인 인조원년, 반정에 공이 컸건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이괄편에 붙었던 구성부사 한명련의 두 아들이 청으로 도망가 거기서 저들의 장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향도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명수라는 놈이 있었는데, 본시 은산고을의 관노로 역시 같은 계급 출신인 김돌이와 함께 청군에 붙잡혀 갔다. 그런데 요놈이 어찌 영리하고 약아 빠졌는지 어느 결에 저들의 말을 배우고 익혀서 용골대, 마보대라는 저들 장군 신변에 있어 통역구실을 하고 저들의 창귀가 되어 본국 정부에 대해 차마 못할 짓을 무던히도 하였다. 여기 창귀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범에게 잡아 먹힌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이것이 범의 앞잡이가 되어 `조놈 잡아 먹어라, 저놈 맛있겠다, 먹어 치워라.`하며 인도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 세력을 믿고 못된 꾀만 내는 놈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면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청나라 조정에서도 차츰 놈들의 행동을 수상쩍게 여겨 놈의 행동을 캐밝히어 죽여 없앨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뢰경 일행이 이 낌새를 알고, 이 기회를 틈타
`요놈을 손 안대고 저들의 힘으로 죽여 없애리라.` 마음먹게 되어 현지에 와 있던 박호, 신득연, 박계영, 신욱, 김종일, 정지화, 여러 분이 힘을 모으기로 했는데 주모자는 물론 정뢰경이었다.
이 해 정월에 김종일과 상의 끝에 수하 이속 중에 믿고 일 맡길 사람은 강효원만한 이가 없다고 의견이 일치되어 그를 불러 앉히고 말하였다. "명수와 돌이 두 도적놈의 못된 짓은 세상이 다 아는 바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요놈들을 없애려 하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되겠네."
두 놈의 이름에 성을 붙여 말하지 않았는데, 옛날부터 역적같은 질 나쁜 죄인을 지칭할 때는 그 일가들이 거북해할까 보아 그냥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이 선례였다.
"요사이 두 놈의 행적이 더욱 방자해져서 하한에게 보내는 물품 중에서 배와 감 각 열 접씩을 가로채 먹었고, 최상국이 올때 가져온 은자 2백냥과 역관 최득남이 싣고 온 은 일곱 바리를 몽땅 떼어먹었는데 증명할 만한 문건은 모두 여기 있어. 그러니 그대는 천노와 함께 문서로 그 간악상을 고발하라. 청관이 증거를 대라거든 시강원 양반들이 알고 있다 하라. 그러면 뒷일은 우리가 담당함세."
그러나 명수 일당은 철저하게 간사하였다. 증거물로 제출한 문서를 박로라는 자를 시켜 태워 없애고, 박로가 신문 당할 때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게 하였다. 적반하장으로 정뢰경 일행은 되레 완전히 뒤집어 쓴 꼴이 되어 사형을 당하게 됐는데 그들을 용서받게 하려고 세자께서 납셨다.
이때 웬놈이 길을 가로막아 서기에 정지화가 이런 무엄한 데가 있느냐고 했더니
"이놈, 나를 누구로 아느냐? 내가 정명수다, 이놈아!" 하고 주먹으로 마구 쳐서 의관이 다 파열을 당하였다.
끝내 정뢰경과 강효원, 천노는 함께 참형을 당했는데 그들의 태도는 끝까지 당당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정에서는 정뢰경을 충신으로 정문을 내리고, 강효원은 아전의 지위를 면해 주었다.
당시의 사실은 훗날 청나라에 오가는 과정을 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운데 `하필이면 정명수란 놈에게 형벌을 맡기어서 그 참혹함을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고 나와 있다.
청나라에서도 놈의 행적에 정이 떨어지고 본국에 와서 행한 행패도 낱낱이 알려져, 이 반역자의 무리는 저희들이 저지른 죄값으로 청인들 손에 목이 날아갔고, 남은 건 씻을 길 없는 악명뿐이었다.
한편 청에 투항한 도원수 강홍립은 인조반정 후 자신의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풍설을 듣고 저들의 군대를 끌고 평산땅까지 왔다. 조정에서는 그의 온 가족을 군문까지 데리고 가 면회시켜 주어서 오해는 풀렸으나, 그의 숙부 강진은 `조선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크게 꾸지람을 했다.
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는 그를 남겨 두어 조정의 처분에 맡기고 회군해 갔다.
조정에서는 청이 강성한 것을 두려워해 드러내 놓고 죽이진 못하고, 강홍립을 양화 나룻가에 있는 정자에 나가 있게 했는데, 나라안 분들을 대할 면목이 없어서인지 방 문지방을 나서지 않은 채 여러해 동안 탄식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인조 5년 병사해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이 슬그머니 목매어 없애 버린 듯 그렇게 나와 있는 기록도 몇 군데 있으니 나라를 배신한 자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나 할까.
국그릇을 엎질러서
조선왕조 건국당시 공이 컸던 분에 하륜이라는 분이 있었다.
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고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며, 태조의 등극(1392년) 때는 이미 46세의 장년이었다. 특히 관상술에 뛰어나 일찍이 동료 친구 민제에게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으나, 둘째 사위 이방원(뒷날 태종)같은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번 만나게 해 주시오."
해서 교제를 터 깊이 사귀며, 하늘을 덮을 영특한 기상이라 하였다니, 태종에 대한 기대가 무한히 컸었음을 알 만하다. 태조 7년,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받아 떠나기에 앞서, 그의 저택에서 여러 친구들이 모여 전송하는 자리가 벌어졌는데, 당시 한창또래 씩씩한 청년왕자 정안군 이방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당시 우리나라 잔치하는 식이, 음식상은 각자가 따로 받고, 술은 단지 앞에서 부어 한잔씩 들고 가, 돌려가며 권하는 식이었다. 하륜은 자기를 전별하는 자리에 귀하신 몸인 왕자가 친히 임석하신 것을 감격스럽게 여겨, 몸소 그 앞에 가 무릎 끓고 잔을 받들어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국그릇을 왕자 옷자락에 둘러엎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한창 팔팔하던 정안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뛰쳐나와 자신의 말을 끌어내 타고, 속력을 내어 자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륜은 허둥지둥 왕자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려 하였으나 뿌리치고 가 버리자, 자신도 뒤따라 말을 달려 정안군의 뒤를 쫓았다. 누가 보나 왕자께 실례한 것을 사과하러 가는 것이었다.
정안군이 댁에 돌아와 대문에 들어서 그대로 말을 몰아 중문을 통과해 들어왔는데, 뒤미처 하륜이 게까지 따라 들어오며 붙잡지 않는가?
`나으리!`
정안군도 그제사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방에 데리고 들어와 마주 대해 앉았다.
`나으리, 어쩌려고 난국을 앞에 두고, 그 풍파를 어찌하시려고 안연히 앉아 계시는 겁니까?`
`...`
`왕위 계승에 있어 평상시에는 적장자로 잇는 법입니다마는, 건국초에는 공 있는 왕자를 세우는 것이 도리요, 또 전례이온대, 지금 우에서는 막내왕자 방석을 세자로 세웠지 않습니까?
이럴 땐 유능할수록 신변이 위험한 법입니다. 세자 방석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용같고 범같은 이복 형님들이 쭈욱 버티고 있는데, 마음놓고 그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거기다 그쪽에는 꾀주머니같은 정도전이 딸려 있습니다.`
이번엔 정안군이 딱 20년 연상의 이 노련한 정치가 하륜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소?`
`예! 소인은 충청도 임지로 떠납니다마는 서울에는 이숙번이 지안산군사로 있어 일을 같이 의논할 만하며, 그밖에 아무아무가 같이 보좌해 올릴 것입니다. 아, 이것좀 보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남의 의심을 사겠기로 이만...` 그가 황망히 떠나가는 뒷모습을 뒷날의 태종인 정안군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모의는 급속도로 진전해 이숙번의 지휘아래 정도전을 잡아 없애고 방번과 방석 두 이복동생을 잡아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은 발발하였고, 태조는 화가 치밀어 그길로 서울을 떠나 금강산을 구경하고는 함흥 고향에 돌아가 오랜동안을 버티는 사이, 많은 충신이 잇달아 목숨을 잃는 함흥차사의 비극으로 펼쳐진다.
이 사실상의 쿠데타에서 정도전을 사로잡았을 때,
`살려만 주시면 극력 왕업을 돕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태종은 눈을 딱 감고
`네가 고려조를 망해 먹고, 이제 또 창업초의 이 왕조마저 망하게 하려는 거냐?`
하며 그 자리에서 목쳐 죽였다고 하는데, 일제말 서울 창동역 확장공사장에서 그의 것이라는 시체가 미이라 형태로 발견되어, 6.25 사변 때까지 국립 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공사 현장 발굴에 참여했던 한 인부의 얘기를 들으니, 말짱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일으켜 세워놓고 재 보았더니, 자기의 키도 적지는 않은데 어깨밖에 닿지 않더라고 하며, 머리통이 이만이나 하고 왼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칼로 찢긴 자국이나 있더라고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댔다.
박물관 유리함에 진열됐을 때 보니, 옷으로 가려서 상처는 볼 수 없었고, 확실히 우람한 체격에 어마어마하게 큰 머리통에는 사모 둘레의 철대가 그냥 붙어 있었다.
그것이 정도전이라는 중요한 근거는 창업초 지금의 노원벌을 국도로 정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삼봉이라는 그의 호도 자신이 사는 집터에서 우람하게 쳐다보이는 삼각산의 세 봉우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글자 수 맞춰서 글을 지으라
조선조 전기에는 중국 명나라와의 국교가 유례없이 도타와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서로 오갔다.
그 중에 최립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중종 34년에 나,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는 사이, 뛰어난 글재주를 인정받아 자주 명나라에 드나들며 그곳 명사들과 많이 교유하였다.
뒤에 벼슬이 참판에까지 오른 분이다. 임진왜란 때는 외교문서 작성에 제1인자로서 공로가 컸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고장, 같은 시대의 오산의 시, 석봉의 글씨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힌 그런 인재이다.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곳 문장가 중에도 제1인자로 명성높던 왕세정의 서재를 찾았더니, 마침 서양사람 하나가 찾아와 대나무 그린 병풍 위에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엄주가 지어 놓을테니 아무날 다시 오라고 승낙하자, 폐백을 드리는데 마차로 한 대분이나 되는 부피였다.
글이나 서화같은 점잖은 예술품에 대한 사례는 예의 갖춰 피륙으로 하는 것이 예사라, 진귀한 물품이나 직접 돈으로 내더라도 의당 폐백이라고 한다. 지정한 날짜에 간이(최립의 호)가 먼저 찾아가 왕세정의 지은 글을 구경하니, 도도하게 천여 자에 이르는 대문장이었다.
시간이 되어 정작 부탁한 서양인이 와서 보더니 자못 실망하는 눈치라 주인이 물었다.
`왜 글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러는가?`
`천만에....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오리까마는, 죄송한 말씀이오나 글을 부탁드리러 올 적에 저의 아비가 이르던 말을 미처 여쭙지 못한 것이 죄송해서 그럽니다. `이 그림 병풍은 우리집 보물이다. 네 갖고 중국에 가거든 다른 이는 말고 꼬옥 왕선생이 지으신 글로, 또 제일 가는 명필의 글씨를 받아서 가져오되 화폭의 여백이 한자로 스물다섯 자밖엔 더 들어갈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부탁드리라.`
하였는 것을 지난 번에 잊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여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게 되어 죄송하옵고, 이제 다시 부탁말씀 드리려 하나 감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러옵니다.`
왕엄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세상에 어디 글자 수 헤어가며 글짓는 이가 있단 말인가? 다시 짓지는 못하겠노라.`
그러고는 먼젓번 예물로 들여놓은 물건들을 도로 내어주려하니, 서양인도 그럴수는 없다고 굳이 사양하고, 사태는 아주 재미있게 벌어지고 말았다. 예술인들 사이에는 꼿꼿한 오기가 살아있고, 또 속에 품은 재주가 소리없이 고개를 쳐드는 법이다. 최간이는 번개같이 영감이 떠올라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스물다섯자 서문이 무에 그리 어려워서 그러십니까?`
그 당시 외국에 나가는 우리 사행들은 소매없는 남천익을 입고 품수에 맞는 색깔의 술띠를 흉복통에 띠며, 붉은 빛깔의 주립으로 무관의 평상복 차림을 하는 것이 법이다.
서양인은 이 낯선 차림의 이방인을 무척 기이한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주인이 너그러이 웃으면서 소개한다.
`이 분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온 분인데, 문장실력이 대단한 분이외다. 최공! 한 번 지어 보시구려.`
최립은 붓을 집어들자 그 자리에서 스물다섯자 문장을 단번에 써 내려갔다. 이런 때 섣부른 통역을 중간에 넣고 하느니 이와같이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유서양인화죽자하니
유죽은 습하고
연죽은 미하며
설죽은 한하고
풍죽은 소소연시유성지라
서양사람으로서 대나무를 그린 이가 있으니
비 맞은 대는 축축한 맛이 나고
안개에 서린 대는 희미해 보이며
눈을 이고 있는 대는 추운 느낌이 드는데
바람에 불리고 있는 대는 소소하니
금방이라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구나
주인이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한다.
`조오타! 정말 실감이 나는 좋은 글이다. 내 재주 가지곤 어림도 없소이다.`
서양사람도 감탄하여 마음에 들어하고, 이제는 어떻게 명필을 구할까 하고 망설이는 눈치라, 일동은 또 한번 서로 보고 웃었다.
`왕희지의 필법을 쏙 뽑은 신필이 여기 있는데, 누굴 찾소이까?`
그리고는 동행했던 한석봉을 시켜 써서 내주니, 서양인은 좋아서 가지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왕세정이 서양인에게서 예물로 받은 것을 간이와 석봉에게 주려는 것이다. 굳이 사양했으나 막무가내라, 하는 수 없이 받아서 동행했던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동양화 가운데서 전문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즐기는 그림을 문인화라 하는데, 그들은 거기 흐르는 고상한 운치를 사랑하였다. 매란국죽의 사군자도 처음엔 화법의 초보 과정이었으나, 각각 덕목을 붙여 문인화의 여기로 즐기었고, 여백에는 그림에 걸맞는 시나 문장을 필치좋은 글씨로 써서 함께 감상하는 전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산신령의 노여움을 풀어야
옛날에 지방관이 탐욕을 부리거나 실수가 있으면, 백성이 산에 올라가 큰소리로 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나 해야 시쳇말로 스트레스가 풀렸던 모양이다.
원주시에서 서울 쪽으로 가까이 안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 때 굉장히 큰 규모의 절이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서울로 오자면 약간 후미진 곳에 묘한 이름을 가진 바위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욕바위.
앞에서 보면 오똑하게 높이 솟았는데, 뒤는 등이져서 그대로 밋밋하게 산으로 연해 있다.
원주서 벼슬 살았던 이는 물론이요, 그 방향 고을에서 원 노릇을 하였던 이라면, 서울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이 목을 거쳐서 가야 하는데, 이자가 임지에 내려와서 못된 짓을 많이 하였다면,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이 관원의 행차가 지날 때, 그 바위위에 올라서서 낱낱이 조목을 들어서 욕을 퍼부었더라고 한다.
물론 끝에 가서는 갖은 악담을 늘어놓았을 것이고...
그것을 듣고 원님이 화가 나서 `저놈 잡아오라.` 고 소리치면, 쫓아갈 신명도 안났을 것이고, 어쩌지 못해 쫓아 간대도 밑의 사람이 도달하기 전에 등성이를 타고 뺑소니치면 그만이다. 본래 욕이란 것은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 주면 되는 것이고, 악담은 뒤끝이 좋지 않으라고 잘못되기를 비는, 말하자면 일종의 저주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욕할지라도 악담은 하지 말라고 일러오는데,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이라면 어떻게 욕만 하고 말 것인가?
자자손손이 어떻게 되라는 둥 갖은 악담을 늘어놓았을 것이니, 입담좋은 사람이 그 몫을 삯 받고 다니며 하는 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정혁선이라는 분이 청주목사로 내려갔는데, 밤에 어느 놈이 산에 올라가서 걸차게 욕을 해댄다. 물론 새로 도임해 갔으니, 자신에게 돌아올 욕은 아니었겠지만 속이 상한다. 그것이 여러 날 계속되기에 그 고장 출신의 이속을 불렀다. `사람이 그럴 리는 없고, 아무래도 우암산 산신이 덧나서 그런 모양이니, 집집마다 10문씩만 거둬서 굿을 하든지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라.`
분부받은 아전 생각에, 산신이 그런게 아니라고 했다간 그놈을 잡아 들이라고 할 판이라, 구역을 갈라 분담해서 돈을 거두고 하라는 대로 기도행위를 하여서 며칠은 그냥 조용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또 그놈이 욕질을 한다. 고요한 밤하늘에 욕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니 멀리까지 들렸을 것이고, 그 중의 몇몇은 아무개 놈의 짓이 틀림없다는 지목도 갔을 것이다.
원님은 또 담당자를 불렀다.
`산신령이 단단히 노여운 모양이다. 일전의 그것 가지고는 심정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니, 이번엔 갑절씩 거둬서 앞서보다 더 성대하게 치르도록 해라. 얻어먹을 만큼 먹어야 가라앉을 모양이로구나.`
없는 중에 생돈으로 추렴을 내면서 백성들의 원망은 원님보다도 밤중에 소리지른 놈에게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굿판을 차린 뒤로 신령님의 노여움은 식어졌고 원님은 빙싯이 웃었다.
`싱거운 산신도 다 있지. 좀더 보챘더라면 더 얻어먹는 것을....`
한가지를 보면 열가질 안다고, 이만한 배짱이라면, 아마 공사도 변변하게 잘 처리했을 것이다. 섭섭하게도 그의 다른 행적이나 생존기간에 대해서는 달리 나온데가 없다.
이것은 딴 이야기지만 한 곳을 감사의 행차가 지나가는데, 길옆 정자나무 아래 덕이 진 곳에 건장한 청년이 조골조골하게 참혹하도록 늙은 할머니 하나를 앉혀서 부축을 하고 서 있다.
`저건 어떠한 백성인고?`
그 고장의 연세높은 집장이 앞으로 다가서며 여쭙는다.
`이 골짜기 안 20리 쯤에 사는 백성이온대, 어미 말이 `나라님 거동하시는 행차가 거룩하다더구만도 서울을 못 가니 구경할 길이 없고, 감사님 영내 순찰하시는 행차 또한 근감하다던데 그거라도 한번 구경하였으면...`
하고 입버릇처럼 소원해 왔건만 살기에 바빠 이뤄드리지 못했다가, 보시다시피 기력이 아주 쇠해 더 지탱하기 어렵게 돼서, 이번 기회에 사또 행차를 보여드리려고 먼길을 업고 와 구경시켜 드리고 있는 것이랍니다.`
감사는 그의 효성에 감동해 누구 다른 사람에게 붙들어 드리라 하고, 그 효성스런 청년을 앞으로 불렀다.
그리곤 등을 투덕거리고 껄그러운 손도 만지며 무수히 칭찬하고 행리 중에서 비단 두 필을 꺼내 상으로 주고 그곳을 떠났다. 감사라는 직책이 본시 각 고을의 직책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이라, 그 행보에 열 고을을 두루 돌아보고, 이제 돌아오는 길인데 앞서 그곳에서 벌어졌던 것과 똑같이 늙은 할머니를 젊은이가 부축하고 서 있는 것이다. 행차를 멈추고 까닭을 물으니 그때 그 집강이 와서 고한다.
`먼젓번 상금을 내리셨던 효자집 옆에 사는 놈이온데, 평소에 어미에게 심하게 굴어 불효로 소문난 녀석이, 상 타 먹을 욕심에 어미가 싫다고 싫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업고 와 구경시키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랴?`
일러바친 사람은 못된 놈 볼기 몇 대 얻어맞게 하자던 것인데, 감사는 시침 뚝 떼고 청년을 불러서 전과 똑같이 상급을 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다음부터 그곳 관청에서 사령이 나오면, 두 사람 효자를 똑같이 찾아보고 인사를 드렸다.
`어떻습니까? 어머님 봉양하시기에 어려움은 없으신지 알아오라는 분부십니다.`
하 세우 인사를 오는 때문에 불효자는 저도 모르게 진짜 효자가 되어 버렸다는 그런 이야기다.
때려줘서 혼내느니 칭찬해서 효자 만드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죽 한 그릇 나눠주고 복을 받아
서울 남대문 밖 현재의 서울역에서 조금 남쪽 낮은편 일대를 도동이라 했는데, 그 날가지 끝으로 관운장을 모신 남관왕묘가 지금도 있고, 그 가까이 언덕위로 양녕대군의 종손이 살았다고 한다.
양녕대군이라면 조선조의 셋째번 임금 태종대왕의 맏아드님이다. 건국초의 왕운을 띠어서 그랬는지, 조선조 초기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많은 왕자를 두었다. 태종 역시 훌륭한 아드님을 여럿 두어서 첫째가 양녕, 둘째가 효령대군, 셋째가 세종대왕, 넷째가 성녕대군이며, 후궁 몸에서 태어난 분이 경녕군, 성녕군, 온녕군, 근녕군, 혜녕군, 회녕군, 후녕군, 익녕군의 여덟 형제나 된다. 그밖에 왕후 몸에 난 공주가 넷이요, 후궁 출생의 옹주가 열씩이나 되니 대단한 자녀복이다.
전하는 말에 처음 세자로 봉했던 양녕대군이 덕을 잃어 세자를 폐하기로 조정에 공론이 돌자, 둘째 효령대군이 혹시나 자기 앞으로 왕 자리가 돌아올까 하여 얌전을 빼고 공부를 하는데, 형님 양녕이 방에 들어서며 책읽고 앉았는 효령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면서 꾸짖더란다.
`얘야! 정신차려. 부왕의 뜻이 어디 계신데, 내가 왜 너만 못해서 미친 체 하는 줄 아니? 목숨이 붙어 남으려거든 정신 좀 차려라.`
효령도 특출한 분이라 형님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곧장 불도 공부의 길로 들어서 버렸다고 하는데, 여러 형제 중에 세종이 더욱 영특하여서 그쪽으로 왕위를 물려줄 의사가 있으신 것을 눈치채고,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 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고 하는 분이다.
얘기는 다시 바뀌어 양녕의 저택이 앞서 말한 도동에 있었고, 그의 증손이 눌러 살았는데, 그런 가문에서는 여느 집안 모양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의 4대까지만 사당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맨 윗대 왕자나, 특별히 나라에 공로 있는 분은 불천지위라고 하여, 연대가 오래되어도 그냥 모시고, 따라서 가족들 외에도 드나들 수 있게 따로 구획을 짓고 사당을 모시는 까닭에, 그런 곳을 별묘라고 하였다.
그런데 왕의 일가는 종반이라고 하여 공연히 높은 지위만을 주고, 실제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법도였으며, 왕실에서 촌수가 멀어질수록 국가에서 주는 생활비도 차츰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그것마저 아주 없어져, 궁하게 일생을 보내야 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 양녕대군 댁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손 지광이라는 분이 크나큰 집을 쓰며 살기는 하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궁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하필이면 그 알량한 가정에 동냥중이 찾아들었다.
낮에 왔다면 곡식이나 조금 떠 주면 될 일이나, 저녁때 찾아들었으니 거절하면 한데서 잠을 자야 할 판이다.
어느 쪽이 염치가 없는지는 몰라도 그 중을 사랑으로 불러들이었다. 그러나 저녁을 따로 차려 대접할 형편도 못된다. 주인은 자기 앞으로 내온 한 그릇 죽을 객승과 나눠먹고 불을 못 때 차디찬 냉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중은 아침에 일어나는 길로 하루저녁 신세진 것을 깊이 사례하고는 떠나는 마당에 물었다.
`저 댁 뒤의 단청한 건물은 무슨 집입니까?`
`예, 파시조 되는 대군의 사당이고, 내가 그 증손이외다.`
그것을 듣고 나서 중의 하는 말이 기이하다.
`보아하니 무척 곤궁한 처지에 놓여 계시기에 소승이 수일내에 형편이 크게 트이실 방도를 일러 드리려는데 들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주인의 말이, “사람마다 저 타고 난 분복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대사의 힘으로 고쳐지겠소?”
“일을 꾸미는 건 사람에 달렸고,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공연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한번 시험삼아 해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저 사당 앞의 큰 나무 몇 그루를 베어 버리시면 며칠 안 가 발복이 되실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객승이 돌아간 뒤 주인은 사람을 시켜 사당 곁에 줄로 선 늙은 홰나무를 모조리 베었다. 그것을 토막내 쌓으면서,
“이것만 가지면 한겨울 춥지 않게 지낼 수 있겠지.”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며칠 뒤 영조대왕이 헌릉에 거동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깐 관왕묘에 들리셨는데, 거기서 사방을 둘러보자니, 규모는 큰데 볼품없이 퇴락한 옛 사당이 눈에 띠어서 근신에게 물었더니, 양녕대군을 모신 지덕사라는 것이다. 사손이 있으면 만나 보자고 하시었다. 지팡이를 짚고 남루한 차림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와 어전에 부복하니 정말 보기에 딱하다. 양녕대군의 13세손인 것을 물어서 알고 왕의 하는 말씀이다.
“대군이 양보하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 나와 그대의 처지가 바뀌었을 거 아닌가?”
그리고는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당과 주택을 일신하게 중수하고, 생계를 넉넉히 대어주며, 증손은 곧장 남부도사로 임용 하였다가, 차츰 벼슬을 돋구어 목사까지 되었는데, 고생한 사람답게 백성을 은덕으로 다스려서 선치로 이름을 얻었다. 지광의 증손 승보와 그의 아들 근수 양대가 차례로 문과에 급제하여 똑같이 판서까지 지내니, 세간에서 도동 이판서댁이라 이르던 명문이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또한 그 문중의 출신이다.
중이 찾아들던 그날 저녁
“밥을 굶는 터에 손님은 웬 손님이여!” 하고 박찼더라면, 사당 앞의 나무를 베라고 일러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사당이 임금님 눈에 띌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죽 한 그릇 선뜻 나눠 먹은 후덕이 이러한 복록의 길을 열었다고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사람 패는 도지사
지사라면 한 도의 어른이요, 따라서 점잖은 분이겠는데, 그런 분이 손수, 그것도 자기 관할하에 있는 유력인사를 넙치가되게 두들겨 주었다면 충분히 얘깃거리가 될 만하다.
주인공은 1862년에 태어나 민족과 나라의 격동기를 겪고 1946년 85세의 고령으로 작고한 이규완이라는 분이다. 갑신정변 때 칼을 휘두르며 참가했던 장수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도일하였고 그후 고종황제가 퇴위당하여 순종이 빈자리에 오르던 1897년에 귀국하여 중추원 찬의로 있었다.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가 되면서 처음으로 행정업무에 종사하고 춘천실업학교가 설립되자 동교 교장을 겸무하고 춘천에다 터전을 잡아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동안 한일합방이 되면서 직책은 강원도 장관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지금처럼 도지사로 불리게 된 것은 1918년 함경남도 장관으로 전임한 다음에 3.1운동 후의 일이요, 1924년 도지사를 사임하였을 때는 그도 나이가 이미 63세였다.
춘천에서 장관 벼슬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몸소 거름통을 메어나르며 농장일을 하였고,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용으로 양어장을 활용했다. 드넓은 과수원을 손수 지도해 운영했는데, 아침마다 괭이와 밑씻개를 갖고 매 그루마다 차례로 찾아다니며 용변을 보았으니, 앉았는 동안 과수를 관찰하여 손질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하루 업무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였으니 밤에도 한시 반때를 쉬는 일이 없었는데, 그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강원도는 척박한 고장이라서 소문난 부자는 별로 없었으나, 국운이 쇠하고 치안이 부실해지면서 그들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툭하면 밤손님이 찾아드는데, 지칭 의병이라면서 군자금을 요구하거나, 게중에는 전혀 엉뚱한 무리들도 섞여 있어서, 한시를 마음놓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기반을 인구 많은 도회로 옮겼으니, 그때의 도시는 상공업이 흥한 것이 아니라 놀고 사는 백성들의 집합장소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벼 천석이나 한다는 지주들은 가만히 앉았어도 일정한 수입은 들어오겠다, 손 하나 까딱않고 두두룩한 배를 문지르며, 그 중에도 견딘다는 집 사랑에 모여앉아 싱거운 소리나 주고 받으며, 바둑이나 장기, 골패 등으로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는 어떤 집 사랑에 도청에서 전갈이 왔다. 아무날이면 장관님이 저녁 마실을 오시겠다는 것이다.
약속한 날짜에 찾아온 장관은, 모두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차려내온 요리상을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한참을 더 앉았다 일어서며 하는 말이다.
“과분하게 잘 먹었소이다. 백성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수확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받아먹을 수야 있겠소?
심심한데 노라도 꼬시지 않고... 내 수일내로 또 오리다. 나 밤참 좋아 않으니 준비하지 마시고... 하하하!”
이튿날로 무리들은 기둥마다 미닫이 틀마다 못을 박고 노 갈고리를 구해다 걸었다.
그리고 서투른 솜씨로나마 손을 쉬지 않고 노를 꼬아, 주먹만하게 어떤 것은 제법 큰 노 몽댕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방안은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며칠을 안 가 이장관이 예고도 없이 찾아들었다.
그리곤 노 몽댕이 하나씩을 만져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노는 사뭇 1학년이구려! 그렇지만 꼬다 보면 자연 늘지요. 이건 아주 물렁물렁한데 노를 감는 데도 요령이 있어요.
옳지! 이것 꼰 분에게 배우시면 되겠군...
주안은 아니 내오기로 했는데 또 차리셨구려!
모처럼이니 들겠소이다만 번번히 그러면 어디 미안해서 자주 올 수 있겠소이까?”
그리고 일어서 갔는데, 정말로 미안해 그랬던지 두어장 도막이나 지나서 다시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먼젓번처럼 노 몽댕이를 하나하나 차례로 점검하다가 그 중의 하나를 만져보고는 묻는다.
“이건 어떤 분 것이오?”
“저... 제 것이올시다만은...”
장관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의 오른 손목을 쥐어 잡아나꾸어 넘어뜨리며 왼쪽 무릎으로 찍어눌렀다. 앉아서 하는 격투기의 기본 기술로 오른팔을 뒤로 돌려 비틀어 포승을 지르는 방법이다.
“죽일 놈 같으니! 내가 지난번에 그냥 살펴본 줄 아냐? 손톱 밑에다 먹을 찍어가지고 와서 표시를 해놨는데...
이놈아! 십여일 동안에 단 한뼘도 더 안꼬아? 네놈 맛좀 봐라!”
상대방의 지위도 있지만, 전문으로 기술을 익힌 분이다. 이 자를 공기돌 놀리듯 하며 메다붙이고, 대가리를 방바닥에 쾅쾅 쳐 박아, 비틀 적마다 `애개개` 소리를 지르고 하는데 얼마를 그러다가 분을 삭이고 숨을 돌렸다.
개구락지 모양으로 방바닥에 납죽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발발 기며 비는 친구는 돌아보지도 않고, 장관은 한마디 하였다.
“정신들을 차려요, 정신을! 나라가 왜 망한 줄을 아시오? 당신네들 같은 작자들 때문에 이렇게 종살이를 하는 것이오. 내가 왜놈 밑에 심부름하고 있으면서 뽐내는 거 본 적 있소? 어쩌다가 이 자리에 앉게 됐으니, 내 나름대로 우리 백성들을 일깨우고 기운들 차리게 하고... 이것이 나의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임무요. 내일도 퇴근하면 내 농장에 있을테니 구경들 와요. 보고 좀 배워요. 입에 밥이 들어가니까 제 세상으로 알지 말고... 뭐든지 한 가지씩 해요. 좋은 재주 좋은 재산 두었다 무엇에 쓰려오? 맞은 분한테는 미안하오만 그것을 약으로 알고, 한번 떨쳐 일어나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지. 얻어맞고 기가 죽어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면 그야 죽은 것이지. 숨만 붙어있다고 산 것이겠소?”
버젓하게 배짱도 좀 있어야
조선의 말엽을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였고 그당시 연안 김씨 명문가에 김사철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다. 아버지가 동지돈녕부시를 지냈으며 외숙이 뒤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한 홍순목이니, 우정국의 초대국장으로 있으면서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꾸몄다가 실패해 죽은 홍영식과는 내외종간이 된다.
높은 벼슬을 했으면서도 청렴했든지 아버지를 여의어 수입의 줄이 끊기자 생계는 매우 곤란하여 낙원동 납작한 초가집에서 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아서 지냈는데, 뛰어난 천품을 지닌 그를 눈여겨 보고, 사실상 생계는 그의 외숙이 대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이른바 양반 가문에서 출세와 성공의 길은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것 뿐이라, 이 김사철 소년도 바깥출입을 않고 밤낮없이 틀어박혀 글공부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사람을 찾는 소리가 났다.
“하님 아뢰오.”
그 당시 점잖은 분이 남의 집을 심방하면 대문 밖에서 목청을 높여, “이리오너라!” 하고 긴 소리로 하인 부르는 구호를 외고 하인이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지만 그러지 못하고 주인 여자 혼자 있든지 하면,
“아무도 아니 계신다고 여쭈어라.”
이 역시 중간에 하인이 있는 양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나 주인댁 대감의 심부름으로 온 하인쯤 되면 그 식으로는 안 통한다.
“하님, 아뢰오.”
하님이란 남의 집 하인에 대한 존칭이다. 김소년은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거 누구냐?”
“예! 도련님 혼자 계시구먼입쇼. 가회동서 양식하고 나무바리를 가져왔사와요.”
도령은 훤칠한 키에 벌떡 일어서며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을 화경같이 떴다.
“뭐야? 이놈! 그래 김사철이가 외갓집에서 내주지 않으면 못 산다더냐? 낼름 도로 가져가거라. 고연놈 같으니.”
하인은 까닭없는 호령만 듣고 기가 죽어서 돌아갔다. 저녁때 나들이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부엌을 들여다 보아 여전히 횡뎅그레한 걸 보고 아들에게 물었다.
“낮에 가회동서 무얼 보내오지 않았든?”
“뭔가 실려 보냈기에 호통을 쳐서 쫓아 보냈지요. 그래 우리가 외갓집 그늘 아니면 못 산단 말씀이에요?”
이튿날 아들이 글읽기에 골몰해 있는 사이 어머니는 친정을 찾았다.
“왜 하필 걔가 있을 때 보내셨어요? 그 애 성미가 그런 줄 아시면서...”
그런 뒤로 시량은 도령 없을 때만 전해지고, 그러는 사이 공부는 점점 숙달해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가에서 전갈이 왔다. 정부 안에서 한가닥하는 외숙이 부른 것이다.
“너 이번에 과거를 봐라. 내가 시관이 됐느니라.”
그러나 대답은 또한번 뜻밖이었다.
“싫어요, 내 힘으로 버젓하게 하지, 왜 외숙 덕에 했다는 말을 듣게 해요?”
대감은 성숙한 생질의 어엿한 대답을 듣고, 다시 더 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김소년은 엉뚱한 길을 택하였다. 과거에는 제술이라 하여 글을 지어 올리는 길이 있고, 유학의 경전을 외우고 해설하는 강경과가 있는데 후자를 택한 것이다. 당시 제술에는 차작(남의 글)을 받는 등 버젓하게 부정이 행해졌는데, 강경이라고 협잡이 없을까마는, 이것은 본인이 직접 나와 여러 시관 앞에서 당당하게 강론하는 것이라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장에 들어선 그는 먼저 정해진 순서대로 시관석을 향해 읍하여 경의를 표하고 거기 마련된 대통에서 첨자를 뽑아 얼핏 보고 대령한 서리에게 넘겼다. 거기엔 경전 중에 나온 글귀의 머리글 몇 자가 씌어 있는 것이다.
시관이 대쪽을 받아 탁자에 놓자, 그는 청산유수로 그 대목을 암송하고 거기 대한 주석을 거침없이 해 내려갔으며 시관들 사이에서는 귓속말이 오갔다.
“야! 녀석 끌밋하게 잘도 생겼다. 언변도 좋고... 못보던 이름인데 누구야?”
“누군 누구야? 홍판서 생질이지.”
“그랴?”
과거는 순조롭게 합격이 되었다. 물론 외숙의 이름이 작용하였겠건만, 당자의 태도는 버젓했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하지, 왜 외숙의 힘을 입어?”
이리하여 당당히 합격한 김급제의 벼슬길은 순조롭게 트여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 선산 도호부사로 나갔을 때 일이다. 하루는 점잖게 생긴 늙은 백성 하나가 잡혀 들어왔는데 참혹해서 바로 보지 못하겠다.
무어 차림새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눈은 초점을 잃고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데 아래웃니의 딱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곁에까지 들린다.
“원죄로구나.”
김부사는 늙은이의 태도에서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죄목을 물으니 볼썽사납게도 늙은이가 며느리와 붙었다는 것이다. 우선 방 하나를 치워서 들여앉히고, 나이 든 기생을 불렀다.
“영감을 잘 모셔야 한다. 잘못하면 자결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네년 모가지를 그냥두지 않을 테다.”
기생은 소합원을 달여먹여 노인을 안정시키고 돌봤으며, 부사는 눈치빠르고 믿을 만한 포교를 동원해 뒷조사를 일렀다. 아니나다를까, 노인의 재산을 탐내 못된 놈들이 조작해 낸것임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래 노인을 의관시켜서 곁에 앉히고 좌기를 차렸으니 요새로 치면 법정을 마련한 것이라.
일 꾸민 놈들을 오라지어 꿇리고, 그 사이 조사한 것을 읽어서 들려준 뒤 모두 사실임을 승복하는 다짐을 받았다.
“이제 나라에 품하여 물고를 낼 것이요. 그동안 네놈들의 목숨은 내가 맡아둔다.”
노인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날 수도 없이 절을 했다.
“그런 몹쓸 누명을 쓰고는 정말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사옵니다. 사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뒤로, 노인은 줌안에 든 베, 모시와 명주를 바리로 실어 춘추로 보내 나귀째 두고 가기를 죽는 날까지 하였고, 김사철은 그것으로 살림을 일으켜 또다시 버젓하게 조정에 서서 높은 벼슬을 두루 하고, 합방이 된 뒤에 세상을 떠났다.
건방진 놈이다. 묶어라
옛날 산중에 있는 이름없는 절간의 스님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 생기는 불공의 수입 가지고는 건물 유지조차 힘이 들고, 민간으로 나돌아 다니며 활동을 해야 하는데, 여간한 수단 가지고는 그것도 용이치 않았다.
충청도 어느 산간 조그만 암자의 스님 한 분이 궁여지책으로 시냇물을 따라가며 닥나무를 심었다. 한지를 뜨는 닥나무는 그런 곳이라야 잘자라고, 또 지역이 넓어 곧 많은 수의 나무를 심어 그것을 베었다.
그로부터의 공정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닌데, 중은 도 닦는 기분으로 그것을 끈질기게 해냈다.
도랑물을 이끌어 물방아를 걸어서 재료를 찧고, 껍질을 벗기고 난 속대를 말리어 삶아 쪄서는 거기 넣고 다시 찧었다. 힘드는 여러 과정을 두루 거쳐 종이를 떠냈는데, 전문 직공이 아니다보니 힘은 곱이나 들고 성과도 아마 번지르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벽에 붙여 말려서 떼어내 스무 장씩 겹쳐서 접으니 그것이 한 권이요, 그것을 단위로 하여 매매하는 것인데, 그것을 여러권 포개 짐을 묶어서 멜빵을 걸어 지고 산을 내려갔다.
인간 많은 곳에 가야 팔겠어서 한나절을 걸려 청주를 찾아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면 오죽 좋으랴만, 하필이면 날짜를 잘못 짚어 장날이 아니어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 조차 없다.
전방 차린 데를 찾아갔더니 성수기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턱없는 헐값에 거저 뺏으려 든다.
간신히 어떤 집에서 점심 한끼를 얻어먹고, 호젓한 길가 담모퉁이 편편한 곳을 찾아 종이짐을 내려놓고, 멜빵을 내려 팔에 걸친 채 짐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쉬다가 식곤증이 생기어 어느덧 가무락 가무락 졸음이 오고, 새벽부터 험한 길을 걸어온 피로마저 포개어, 내처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처라면 으레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 그대로, 해가 설핏해 중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빈 멜빵만 팔에 걸쳐 있을 뿐, 종이 짐은 온데간데가 없다.
정신이 번쩍 든 중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훔친 자취를 남겨두고 갈 멍청한 도둑놈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중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멍청히 있다가, 다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그곳 원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 파수가 허술했든지 관아의 삼문을 무사히 들어선 중은 정면 원님 처소 그 아래로 가 엎드리며 두 손을 짚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웬 중인데 이리 소란을 떠는고?”
손님을 대해 앉아 약주를 들고 있던 원님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중의 푸념 섞인 하소연을 다 듣기도 전에 원님은 미닫이를 소리나게 쾅 닫았다.
“나, 웬 미친 놈의 중도 다 보겠다. 제가 실수해 잃어버려 놓고, 그런 것까지 관에 와 찾아달래? 어서 그 잔 비우게... 여봐라! 그놈 꼭두잡이 시켜서 내쫓아라.”
해가 설핏할 무렵 술자리가 파하여 손님은 일어나 가고, 원님은 배웅할 겸 대청까지 나섰다가 불현듯이 영을 내렸다. 어느 영이라 지체하랴? 더구나 원님은 낮부터 자신 술에 얼굴이 대춧빛이지 않은가?
관청 안이 들끓어 총동원되고 앞 뒤 배종에 육방관속이 말타고 뒤따르는 행렬은 지체없이 정비되었으며, 원님은 풍채좋은 군복 차림에 상모를 휘날리며 등채를 짚고 백마에 높이 올라 일동은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삼문을 나섰다.
“저녁 안개 스미는 황금빛 벌판, 수수잎 버석이는 건들바람...”
원님은 글귀를 읊조리며 얼마를 가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번 달리자꾸나.”
말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네 굽을 모아 달리고 때아닌 돌개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얼마를 달리다가 걸음을 늦춘 원님은 땀을 닦았다.
곧 먼 데까지 나갔다가 거의 땅거미가 져서 돌아오는 길에 원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저건 웬 놈이냐?”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하는 소리다.
“그건 장승이올시다.”
“장승이여? 성은 장가인데 이름은 외자로 지었구. 어디 장가인고?”
“사또! 그것은 장승이올시다.”
“장승이! 너희가 모두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그놈 이름 있는 왈패인 게로구나! 건방진 놈, 관장이 지나시는데 뻣뻣이 서서..., 그중에 술을 쳐먹었더냐? 웬 얼
굴은 저리 붉고 무엄하게끔 눈깔을 부릅뜨고..., 저놈 잡아 묶어라.”
여럿은 얼굴을 서로 쳐다 보았다.
`낮술 안주에 무엇을 잘못 자신 거나 아닌가? 잘못 독버섯을 먹으면 미친 짓을 하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는데...`
서로 눈을 끔뻑이며 하라는대로 오랏줄로 장승을 겹겹이 묶어 말에 실었다. 관청에 돌아온 원님은 모두를 세워 놓고 엄숙하게 일렀다.
“저놈을 단단히 치죄할 것이로되,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옥에 내려 가두고 비상령을 내려서 관속들 모두가 모여서 밤새도록 지키게 하라. 흉악한 놈이니 밤사이 도망하면 큰일이로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행수기생이 상대로 또다시 술상을 대하여, 큰 잔으로 연거푸 기울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큰일이 벌어졌다. 원님이 좌기를 차리고 장승을 대령하라는데 간 곳이 없다.
물론 밤사이 행수기생이 영리한 사람을 시켜 갖다 감춘 것이다.
“네놈들 듣거라. 내 그처럼 엄중 감시하라 했는데 기어이 놓쳐 버렸으니 이놈들을 그저 모조리...”
펄펄 뛰는 원님을 비서격인 책방이 뜯어 말려서 간신히 무마시켰다.
“내 책방의 청을 들어 체벌만은 않을 것이로되, 일후를 징계하여 벌로 물건을 받으려 하니, 매 인당 창호지 두 권씩을 바치되 지체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관속들은 종이를 구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청주 성안의 종이는 시시각각 값이 올랐으나 그나마 바닥이 났다.
“여봐라, 어제 여기 왔던 중놈이 가지 않고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데니 그놈을 데려오도록 하라.”
얼마만에 맥없이 끌려온 중에게 원님은 인자한 얼굴로 일렀다.
“네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게다만 이 중에서 어떤 종이가 네가 뜬 것인지 가려내봐라.”
중은 거침없이 그 중에서 상당량의 종이를 추려냈다. 종이 끝에 꿰어 단 꼬리표를 점검해 그 종이 바친 사람들을 따로 모았다.
“너희는 이 종이를 어디서 구했더냐?”
그리하여 범인은 쉽사리 잡히고, 여럿이 바친 많은 양의 종이는 관청 창고에 들여 놓고 쌓았다.
“이 종이는 다른 데 쓸 것이 아니다. 너희들 중에, 두드러진 공로있는 자가 생기면 그때마다 상급으로 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
경주 이씨의 오성대감 이항복의 현손인 이광좌에 얽힌 얘기인데, 이렇게 기발한 안을 낼 정도로 유능한 분이라, 뒷날 영의정에까지 올라 나랏일에 공헌하였다.
마마! 이 나라는 망했사옵니다
조선조 중엽에 오윤겸이라고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선조 15년(1582년)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다 겪고, 왕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에까지 오른 분으로, 인조 14년(163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조선에선 드물게 78세까지 장수한 분이다.
그분이 인조반정을 겪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을때의 일화다.
이조는 문관직의 인사발령을 맡은 관청인데 그 책임자를 자칫 잘못 뽑아 앉히다 보면, 어떤 지저분한 짓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대에 가장 강직하고 덕망있는 사람이라야 그 자리에 앉고 또 그래야 해낼 수 있는 중대한 자리였다. 더구나 주인공이 이조판서가 된 것은, 광해군 때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여 나랏일이 썩을대로 썩어 개탄할 정도에 이르렀을 때, 신흥세력이 일어나 구 왕권을 둘러엎은 이른바 인조반정의 직후라, 청신한 공기를 불어넣어야겠다는 의욕이 팽배하였던 때라 그에 대한 기대도 자못 컸다.
이리하여 제1차로 인사를 맡은 병조의 도묵과 함께 상감의 어전에서 합석해 고수하는 정사를 치르니, 이것을 친임도정이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있은 일이다.
그해 과거에 합격해서, 처음으로 직장을 배정할 인원을 열거한 가운데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위에서 물으시었다.
“응? 오가 성 가진 이가 있네, 경하고는 어떻게 되오?
“신의 집 조상 제사 받드는 사람이옵니다.”
“그래?”
그러고는 상감께서 그 사람 이름에다 낙점을 찍으셨다. 몇 사람 후보자 가운데 가장 적합하니 이 사람으로 발령내리는 마지막 결정이다. 전국에 배치되는 문무관의 고수를 마치자, 우에서는 그동안 이것 꾸미느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어찬을 내리셨다.
“수고들 했으니 저녁들 자시고 나가도록 하오.”
물론 군신 관계가 엄한 터니, 같은 방 안에서가 아니라, 아마도 상감은 온돌에 계시고, 이조와 병조 양 판서는 대청에서 각각 상을 받았겠는데, 다담상이니 반주로 술도 몇 잔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오 판서는 술이 약했든지 아니면 너무나 감격해 그랬든지,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쾌해지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으흐흐흐, 마마! 이 나라는 망했사옵니다. 신은 도목을 꾸미는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망에 오른 사람 중에 특정인물을 신의 종손이라고 지적하였삽고, 우에서는 또 신의 낯을 보아 그 사람으로 낙점을 내리셨으니, 이렇게 상하가 모두 사정에 얽매어 내린대서야, 이 나라 꼴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어허허엉...”
그냥 통곡으로 이어졌으니 이런 변이 있나?
그래도 젊으신 상감은 그의 무례를 꾸짖지 않고 좋은 낯으로 대하셨더라고 기록에는 나와 있다.
사사로운 연줄로 사람 잘못 써서 일을 그릇친 예는, 오 판서와 같은 때 같은 동지인 김류보다 더한 이가 없다.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피난처로 잡은 강화도의 방위책임을 뉘게 맡기면 되겠느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자기 아들 경징을 친거하였고, 젊은 녀석이 웬 술은 그리 먹었든지, 강화 함락의 실책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 생전에 형받아 죽었으니 집안 꼴은 무엇이고, 온 나라안이 치러야 했던 고난은 또 어떠했던가?
사사로운 연줄로 사람을 잘못 써서 일을 그르친 예는 역사에 수없이 나오지만 반면 흥선대원군의 이런 일화도 있다.
아들을 임금으로 들여앉혀 국정의 실권을 거머쥐자, 이경하에게 훈련대장과 좌우 포도대장을 겸해서 내어맡겼는데, 이경하는 발령을 받는 자리에서 잘라 말했다.
“소인이 그 자리를 맡은 이상, 대감의 청탁이라도 받지 않겠소이다.”
그랬더니 대원군은 그 가스름한 눈에서 빛을 뿜으며 호통을 쳤다.
“이 사람 좀 보게? 그러라고 자네에게 맡기는 거야.”
비구니가 된 정순왕후
서울 가까이 조선조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과 순종 부자분의 홍릉과 유릉-흔히 아울러서 금곡릉이라 부른다- 을 찾을 때 조금이나마 뜻이 있는 분이라면, 거기서 몇 발자국 안되는 거리에 있으니 사릉을 한 번 찾아보아 주시길 권한다.
조선조 제6대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되는 수양대군께 빼앗기고 영월땅으로 귀양 가, 거기서 17세의 어린 나이로 비명에 돌아간 이야기는 듣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데, 그 단종의 왕비되는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라 감회가 깊겠기에 하는 말이다.
남편되는 왕이 폐위되었으니, 당연히 왕비에서 깎이어 일반평민의 신분으로 계시다 돌아 갔으니, 의지할 데 없이 친정댁 산소갓에 묻히었다가 수백년이 지나 숙종 조에 이르러 복위되었기 때문에, 능의 구조도 자연 초라하고, 능역에 친정댁 선대 산소들이 그냥 보존돼 있어서 이색적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 이상한 것이 능갓의 늘씬늘씬한 소나무가 모두 동남쪽 영월을 향해 휘우듬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영월 장릉에 가 보면, 능앞에 소나무가 모두 서울 쪽을 향해 기울어서 자라고 있다.
이것을 놓고 흔히 두 어른의 영혼이 서로를 잊지 못해 그렇게 마주 휘어져 있는 거라고 설명하며, 그것을 동정의 눈물을 짓는 이도 곧잘 있다. 물론 과학적인 설명은 못된다.
사릉 언저리는 서울지방의 서북 계절풍으로 자연히 휘어진 것이고, 장릉은 흔히들 보검출갑형이라고 하여 지형이 워낙 가파라 꼿꼿이 서서 자랄 수가 없어서 그리 되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을 초월해 동정하는 심정으로 향해, 버스 한 정류장쯤 가면 왼쪽으로 창신동 골짜기가 틔어 있다.
밟음밟음 찾아 들어가면 창신초등학교가 있고, 차츰 더 올라가면 골짜기가 막히고, 거기 언덕 위에 당집 같은 건물이 있다.
안에 서 있는 비석에는 정업원 구기(옛터)라고 새겨져 있는데 영조대왕의 어필이다.
단종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허울좋은 상왕자리에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세조께는 충신되는 모씨가 사뢰었더란다. “젊은 것들을 한데 붙여 보냈다가, 소생이라도 생기면 뒷날 골칫거리가 아니오리까?”
그리하여 왕만을 따로 때어 보내놓고 보니, 뒤에 남은 왕비의 처리가 문제다. 그래 왕비는 머리를 깍아 비구가 되어 부처님 가사폭에 안겨 여생을 보내게 되었는데, 가까이 모시던 궁녀들 몇이, 이 역시 여승의 차림으로 시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얼마동안은 몰라도 차츰 세인의 주의에서 희미해지자 시량을 대어 드리는 것마저 뜨막해지자 영영 끊기고 말았더란다.
옛날엔 서울이 성벽으로 둘려 있고 4대문을 열어야 통행을 할 수 있었던 때문에, 서울 장안을 돌구멍이라고들 불렀다. 그런데 성안 사람은 성밖에서 물자가 들어와야 살 수가 있고, 성 가까운 시골 사람의 주민들은 양곡과 나무를 성안에 공급해야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래 부지런한 시골 사람은 땔나무와 양식을 마소에 싣고, 찬거리를 지게에 지고 새벽 같이 성문 앞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성문을 열어야 들어가게 마련이라 둘레의 주민들 편의를 위해 거기서 새벽장 한차례를 치르고 나서, 성문이 열리자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그네들 인파속에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그것도 머리를 푸른 기가 나도록 밀어 깎은, 젊고 귀띠나는 여승이다.
검은 장삼자락으로 반쯤 얼굴을 가리었으나 그럴수록 화사한 모습은 더욱 빛났다.
자연히 군중 속에서 수군수군 귓속말이 오갔다.
“새벽같이 웬 여승일까?”
“뭐, 가까이 있는 정업원에 있는 스님이겠지.”
“정업원이라니? 저 노산군 부인이 나와 있다는...?”
“임마! 노산군이 뭐야? 어엿하게 왕으로 계셨는데. 부인도 왕비마마셨고!”
“쉬잇! 말조심들 해.”
나이 지긋한 영감이 타이르듯 하면서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양도가 끊긴 듯하이. 우리 자기 가진 것 중에서 조금씩 보시해 드리도록 하세. 그리고 삼봉아! 너 나뭇짐지고 뒤따라 가서 나무 광에 부려 드리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둘러 보고 오너라. 이런 일에는 나이 어린 사람이라야 걸맞느니라.”
그리고는 여승에게로 다가갔다.
“스님! 어떻게 몸소 이렇게 탁발을 나오셨습니까? 여기 쌀이 있으니 이것을 좀...”
"많이는 소용이 안되와요. 그저 조금만...“
여승의 은방울 굴리는 것 같은 목소리는 여럿의 귀에 길이 남았다. 성문이 열릴 때나 되어 헐레벌떡 달려온 삼봉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너스레를 떤다.
“요렇게 조그만 암자에 아련하게 불이 비치고, 목탁치며 염불하는 소리만이 들려오는데 광은커녕 부엌에도 나무 한 단 없는 것이 불도 며칠 못 땐 것 같아요. 나뭇짐을 부렸더니 아까 그 스님이 보고 생그레 웃는데 어떻게나 다정하고, 선녀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런 모습일 거예요.”
“예끼놈! 수다도 잘 떤다.”
그리고는 누가 나가서 이끈 것도 아닌데 동대문 밖 새벽장은 창신동 어귀로 옮겨져 서게 되었고 정업원의 스님이 다녀 올라가야 천천히 동대문 쪽으로 군중은 옮겨 갔다. 그러기를 수십년, 단종 왕비는 82세토록 골방같은 암자에서 아침 저녁 예불로 세월을 보내었다. 그동안 남편되는 왕을 핍박하던 많은 무리들이 차례대로 죽어가는 소식도 들었다. 궁중에서 일어난 갖가지 소식도 못 들었을 리 없다.
그중에도 연산군이 갖가지 난행 끝에 일으킨 갑자사화에는 여러 훈신이 화를 입었는데, 물론 자기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이지만, 귀에 한청회, 정창손의 이름이 부관참시 명단에 든 소식을 들었을 때, 파란많은 일생을 살어온 늙은 스님의 심증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주름 투성이의 아래윗턱을 오물거리며 읊조렸을 것이다.
“인생은 무상도 해라. 나무아미타불.”
미녀는 괴로워
고려시대라면 근 오백년 동안 개성에 도읍하였다. 창업지주인 태조 왕건 자신이 해군 출신이고, 중국을 읗해 문호를 열어서 개성의 외항은 자못 벅적거렸다. 개성은 임진강과 예성강을 양옆으로 둘렀으며, 전면은 한강수를 역류로 받고, 강화도가 수구를 막았는데 김포와 사이의 염하를 통해 남도로 연락한다.
물에 둘러싸여 물길로 사방 연결되는 위에, 서쪽으로 예성강만 건너면 황해평야의 기름진 땅이 펼졌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좋은 땅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중국은 당이 멸망한 후 고도의 문화를 지닌 중국족의 세력이 차츰 남으로 밀려나고, 북쪽에는 강력한 서북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어, 그전과 같이 육로로는 통할 수 없는 실정이라, 중국과의 교류는 뱃길로 황해를 건너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자니 개성 가까이 예성강 하구에는 자연 국제적인 항구가 형성되어 자못 일성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런데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여기서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물자를 교역하러 왔던 중국의 돈 많은 상인 하두강이라는 이가 어떤 부인을 보고 홀딱 반해 버린 것이다.
오매불망 그 부인 모습에 정신이 나간 하대인은 골몰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한 꾀를 내었다.
어떤 경로로 밟았는지 그 부인의 남편되는 이와 알게 되고, 둘이는 시간만 나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며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상대방은 장사 수완으로 닳고 닳은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사귀는 사이 바둑 수완은 서로 빤히 들여다 보이게쯤 되었고, 하대인은 지는게 분했는지 돈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제의해왔다. 뻔한 결과로 하대인은 연일 상당한 재물을 내기에서 잃었다.
오기가 났든지 내기에 거는 금액을 높여 갔으나 그의 바둑 수완으로는 부인의 남편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곱상한 아내를 둔 주인공-고려 사람이니(까오따아런) 이라고 해 두자- 은 한밑천 톡톡히 잡았다.
그러던 어느날 하대인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제의하는 것이다.
“정말 까오따아런 바둑 수완은 못 당하겠어. 울리 사람이 그동안 내기에 다 잃고 이제 남은 거라곤 배 한척 하고 불알 두 쪽밖에 없어 해. 마지막으로 한 번 내기하는데 나는 남은 재산 다 걸고 따아런은 부인을 걸면 어때해?”
“이 사람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나마 다 잃으면 만리타국에서 알거지가 될 텐데, 그땐 어떡하려고...”
“괜찬아 괜찬아, 울리 송나라 사람 의리있어 해. 친구들 배 타고 귀국하면 울리집 장원 아직도 더 있어 해.”
사람좋은 고대인은 상대방 바둑 수완쯤 익히(?) 아는 바라 괘히 승낙하고 판을 대했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몇 점 놓으면서 보니 자기보다 몇 수나 위다. 점점 위기에 몰려든 고대인은 한 판을 다 못 두어 돌을 내려 놓고 말았다.
“휴우!”
“까오따아런! 장사꾼은 신용이 제일이야. 당신 아내는 이제 울리 사람 꺼다. 알았지?”
이리하여 아내를 내기에 잃은 고대인은 그 동안 내기로 딴 재물이 있으니 아내를 값을 쳐서 팔아먹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아내를 싣고 가는 배의 돛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강 언덕에 멀거니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지어서 부른 것이 예성강곡이다. 천하일색을 손에 넣고 의기양양해서 돌아가던 배는 바다 복판에서 방향을 잃었다. 풍파도 없는데 한자리를 빙빙 돌며 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덜컥 겁이 나서 점을 쳐보니 부인의 높은 절개에 감동하여 하늘이 시킨다는 풀이다.
뱃사람들은 요동을 떨며 뱃머리를 돌렸고, 일동의 목숨도 온전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 남편을 대면한 부인은 눈물을 삼키면서, 노래 한곡조를 불렀는데, 이것이 예상강곡 후렴으로 물론 가사나 곡은 전하지 않는다.
왕건의 조상
고려시대의 정사인 <고려사> 첫머리에 김관의의 편년통록 기록이라면서 태조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술이 재미난다. 성골장군 호경이라는 이가 친구들과 열이서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바위 굴에서 밤을 나는데, 호랑이가 굴 어귀에서 으르렁거리고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를 잡아 먹으려는 것이라고 열 사람의 갓을 차례로 던졌더니 다 물리치고 호경의 것을 덮쳐서, 호경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왔는데, 범은 간 곳이 없고 굴이 탈싹 내려 앉으며, 나머니 아홉 사람은 모두 깔려죽고 말았다. 무사히 살아난 것이 고마워 산신께 제사지냈더니, 산신이 자기와 부부가 되자면서 함께 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혼이 옛 아내에게 다니면서 강충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가 이인의 의견을 따라 송악으로 자리잡아 원 노릇을 하며, 대단한 부자로 지냈다.
두 아들 중에서 아우가 중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하고 돌아왔는데, 꿈에 곡령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온 세상을 덮은 것을 형에게 얘기했더니, 이제건이 형을 사위로 삼아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이 또한 오관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세상을 덮은 꿈을 꾸고 동생인 진의에게 얘기하였다. 그랬더니 진의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었든지, 비단 치마를 줄테니 그 꿈을 팔라고 했다.
언니가 응낙하자 동생은 그 꿈 얘기를 다시 하라고 하며, 그것을 받아 품는 몸짓을 세 번 하더니 매우 흡족한 눈치였다. 그때 당나라 숙종 황제가 아직 임금이 되기 전, 천하를 두루 유람하고자 명황 천보 12년 봄, 바다를 건너 패강 서포에 왔는데, 마침 조수가 빠져 개펄이 드러나서, 수행원이 배 가운에 엽전을 꺼내서 펴고 상륙한 때문에, 그것을 전포라고 하게 되었다.
드디어 송악군에 이르러 곡령에 올라 남으로 바라보고 “여기가 도읍할 만하다.” 라고 평하고 여러 경로를 거쳐 보육의 집에 묵게 됐는데, 주인의 두 딸을 보자 마음에 기뻐, 옷이 튿어졌는데 좀 꿰매주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보육이 상대방이 중국의 귀하신 몸인 것을 알고, 곧장 큰딸에게 따르라고 일렀더니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서자 갑자기 코피가 터져서, 대신 작은딸을 들여보내 시중들도록 하였다.
머문 지 달포 만에 아기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떠나기에 임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대당의 구인이로다. 남자아이를 낳거든 이 활과 살을 주라.”
과연 아들을 낳으니 이 분이 작제건인데 훌륭히 커서, 열여섯이 되자 어머니가 감춰뒀던 활을 내어주니 백발백중이라, 세간에서 이르기를 신궁이라고 하였다.
이에 자기 아버지를 찾아 뵈려고 장사꾼 배를 빌어 탔는데, 바다 복판에 이르더니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캄캄하여 사흘이나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배안의 사람들이 점쳐 보고는 고려사람을 없애야 된다고 야단이다.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지닌 채,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밑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 달랑 서게 되었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일어 장사배는 나는 듯이 떠나 버렸다. 이윽고 늙은이 하나가 나타나 절하며 이르기를
“나는 서해의 용왕인데 매일 밝을 녘이면 늙은 여우가 광채를 뿜어 부처의 모습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에 일월성신을 늘어놓고, 북 치고 소라 불며 이 바위에 앉아 옹종경을 외워대면 내 골이 빠개지는 듯 아프구려! 듣자니 낭이 활을 잘 쏜다기에 나의 괴로움을 없애달라고 붙잡았소.”
제작건이 쾌히 응낙하고 기다리는데, 정한 시각에 과연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울리며 서북으로부터 내려오는데, 하도 장엄하여 혹시나 진짜 부처나 아닌가고 망설였더니, 노인이 다시 나타나
“틀림없이 늙은 여우니 마음놓고 쏘라”고 한다.
그래 잔뜩 당겨서 쏘지 떨어지는데 과연 여우다. 노인이 기뻐서 자기 궁전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의 소망을 물어 자기 딸을 주고 또 많은 보화를 주어 돌려보냈다. 그 용녀가 새로 우물을 파고 그리고 들어가 친정인 용궁으로 왕래하는데 남편과 약속을 했다.
“내가 우물로 왕래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되오. 지키지 않는다면 가서 돌아오지 않겠소이다.”
그런 것을 하루는 답답해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몰래 엿보았더란다. 소녀와 함께 우물로 들어가더니, 황룡이 되어 오색구름을 일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는데, 용녀가 돌아와 딱 잘라 말한다.
“약속을 어겼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소.”
그리고는 우물에 들어가 용이 되어 모습을 감추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용녀의 몸에서 네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용건이 한씨를 얻어 도선이 일러주는 명당자리에 가 살다가 왕건 태조를 배어서 낳았다는 것이다.
조신의 꿈
신라 때 양양 낙산사에 조신이라는 스님을 지장으로 임명해 보냈는데, 이는 원님이라면 알맞는 것이다.
조신은 김호 공의 따님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낙산사 부처님께 나아가 한 번 만나게 해 줍시사고 몰래 빌기를 수없이 하였다. 그러는 사이 몇 해가 지나 낭자는 딴 데로 시집가 버려서 조신은 부처님 앞에 가 엎드려 소원 들어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슬피 울기를 마지 않았는데 이미 해는 서산에 들고 말았다.
그때 김씨댁 따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환한 얼굴로 반가이 웃으며 속삭인다.
“먼 발치로 스님을 뵙고 얼마나 사모했다구요! 잠시도 잊은적이 없었는데, 어쩝니까? 부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시집가기는 했으나, 이제 마음을 고쳐먹고 스님과 평생을 같이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조신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손에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림차리고 살기를 사십여 년이나 하였다.
뒤늦게 자녀들도 줄줄이 낳아 다섯이나 두었는데, 살림이 궁색하여 덩그러니 빈집 같은 가운데 식량을 대기조차 막연하였다. 어쩌는 수 없이 떼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밥을 빌어 나섰는데, 이렇게 하기를 십여 년 하는 사이, 옷은 누덕누덕 조각보를 모은 듯 그나마 몸을 가리지 못할 지경이다.
마침, 강릉의 해현령을 넘는데, 열다섯이나 먹은 제일 큰 아이가 배고픔을 못이겨 덜커덕 길에서 죽고 말았다.
울며 불며 길가에 구덩이를 파고 묻긴 했으나 앞길이 캄캄하다. 나머지 넷을 데리고 우곡현에 이르러 길섶에다 초막을 어리고 거처를 정했으나, 여전히 생계는 간 곳 없다. 그런 위에 부부는 이미 늙고 병마저 들어 배고파 탈진하여 일어날 기력마저 잃고 말았다.
열 살 먹은 딸년이 동네로 다니며 비럭질을 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네 사나운 개한테 물려서 유혈이 낭자해 가지고 돌아와, 부모 앞에 고꾸라져 울어대니 그 정경이 어떠하랴!
옛부터 이런 땐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고들 하는 것이다. 서로 쳐다보며 한숨얼러 눈물짓다가 여자 쪽에서 먼저 일어 앉아 하는 말이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나이 젊고 자색도 있었으며 선명한 옷차림에, 맛있는 게 생겨도 당신과 나눠먹고 따뜻한 곳이 있어도 당신과 같이 지내, 같이 살기 오십년에 더할 수 없이 사랑하고 서로가 아꼈으니, 짙은 인연이라 이르겠지요.
요 몇 해째 몸은 쇠약하고 병든 몸에 기한은 날로 심하니, 이웃집에서도 동냥주기 꺼려하고, 집집이 찾아다닐 제 부끄럼이 오죽하오? 아이들이 춥다 울고 배고파 보채대니 무슨 수로 이어가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생각하겠소?
젊은 얼굴에 생그럽던 웃음도 한낱 풀잎의 이슬이요, 향기롭던 언약도 버들꽃같이 흩날려 버렸지요. 당신은 나로 하여 짐이 되고 내 마음은 당신으로 인해 걱정 잘 날 없구려!
곰곰히 지난 날의 좋았던 일 생각하니, 모두가 번뇌로 오르는 계단이었지 뭐요?
여보! 당신이나 내나 이 참혹한 지경에서, 여럿이 이렇게 함께 고생하기보다는 차라리 따로나 헤어지는 게 어떻겠소?
순경일 때는 친하고 역경일 때는 버리는 것이 인정에 차마 못할 일이긴 하나, 그러나 가고 멈추는 것이 뜻대로 아니되고 떠나고 만나는 것이 다 운명에 매었으니 내 말대로 합시다. 예?”
그리하여 둘이 아이 둘씩을 나눠 데리고 돌아서며 여자는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나 가겠으니, 당신은 남으로 향해 가구려.”
조신이 차마 안떨어지는 발길을 몇 발짝 옮겼을 때 눈 앞이 탁 트이며 정신이 번쩍 드는데 잠깐의 꿈이었고 타다 남은 촛불은 펄럭이는데 시각은 한밤중이다. 새벽이 되어서 보니 그 사이 머리와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 있다. 활연히 깨달으며 허전하여 세상에 뜻이 없고, 지난 고생이 지긋지긋해, 욕심과 세속 생각이 봄눈 녹듯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길로 일어나 부처님 모습을 우러르며, 허물을 뉘우쳐 무수히 빌고 꿈에 해현마루의 큰 자식이 죽어 매장한 곳을 찾아가 파니, 땅 속에서 돌로 깎은 미륵상이 나타난다.
깨끗이 씻고 닦아 가까운 절을 찾아 모셔 놓고, 서울로 돌아와 장임직을 내어놓고, 사재를 몽땅 털어 정토사를 이룩하여 열심히 도를 닦았는데, 그 뒤는 어찌 됐는지 아는 이가 없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가운데 이 사실을 소개하고 스스로 이렇게 평하였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생각하건대, 어찌 꼭 이 스님의 꿈이라고만 할 것인가? 지금 세간에서 저 잘났다고 우쭐대며 밤낮없이 날뛰는 것들은 모두가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아주 비슷한 것이 중국 옛 기록에 몇군데 보인다. 당나라 때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홰나무 그늘 남쪽 가지 아래 누워서 낮잠을 잤는데, 꿈에 괴안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임금의 사위가 되고 남가 고을의 태수가 되어 20년 동안 영화를 누렸는데, 깨어 보니까 나무 등걸 텅빈 공간에 왕개미가 있고, 남쪽 가지로 구멍이 연해 있었으니 자신이 원 노릇 했던 곳이다.
이것이 남가일몽의 어원이 되는 얘기다.
역시 당나라 때 사람 이필의 침중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생이라는 청년이 한단땅 주막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짓고 있으려니까, 곁에 있던 여옹이라는 도사가 자루속에서 목침을 하나 꺼내주며, 이거나 베고 한잠 자라고 일렀다. 노생은 꿈에 귀한 집 딸에게 장가들고 바라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내외직을 두루 거쳐 조국공에 봉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부귀를 한껏 누렸는데, 기지개를 켜며 깨어보니 한낱 꿈이요, 누울 적에 주인 여자가 앉힌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더라고 한다.
이것이 한단지몽의 어원이 되며, 희곡으로 꾸며져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중국의 꿈이 부귀와 영화의 뜬 구름이었다면, 조신이 꾼 것은 끔찍하고 지겨운 고생의 연속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현실의 고생이나 영화가 한낮 꺼풀이라면, 몇 겹으로 된 그 과잉포장을 벗겨내고 남는 알맹이는 과연 무엇일까?
청춘시절 벼개닛이 젖도록 밤새 울어 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얘기가 안 통한다고 하는데 거듭 되새겨 볼 얘기다.
미남은 괴로워
조선왕조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로 정인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초대 임금인 태조 5년에 나서 성종 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씨 왕조의 초창기 왕성한 운세를 타고, 천품의 재주를 한껏 발휘하여 출세하고 또 많은 공적을 남긴 분이다. 19세로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니 뛰어난 글재주를 짐작케 한다.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어 세종이 즉위하자 특별히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뽑혔으니 그의 학문은 날로 깊이를 더하였고, 세종 9년 32세로 문과 중시에 또한번 장원하여 곧장 좌필선에 선임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을 겸임하기에 이른다.
필선과 시강관은 둘 다 시강원의 요직으로 다음 왕위에 오를 세자의 직접 선생님이니, 세종의 신임과 총애가 어떠하였나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의 소년시절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출생을 놓고 석성현감 홍인의 아들로 권우의 문인이라고 하였으니, 결코 혁혁한 가문은 못된다.
집안에 신동이 태어났다고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겠는데, 또한 사명감을 갖고 학문에 열중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옛날 공부라는게 학문으로 된 원전을 주로 참고하며 읽어 이해하고는, 책을 펼쳐놓은 채 눈길을 코끝으로 모아 책은 보는지 마는지 몸을 전후 또는 좌우로 흔들며, 낭랑한 목소리로 읽고 외우는 것이라, 가다가 막힐 때나 잠시 눈을 들어 본문을 보고, 다시 본래 자세로 돌아가 왱왱 외우는 것이 태반이다.
어두운 호롱불 아래서는 또 그렇게 하는 공부밖에 달리 할 길이 없다.
어느 가을, 밤도 이슥하여 주인공이 이렇게 글을 외우고 있는데, 시늉만의 등불이 펄렁이더니 앞이 갑자기 훤한 것이다. 눈을 들어 보니 묘령의 여인 하나가 다소곳이 서 있지 않은가?
“사불범정이라니 요망한 귀신이거든 썩 물러가고 사람이거든 어인 사람이면 무슨 일로 왔는가를 말하라.”
잔뜩 율기를 하고 묻는 말에 상대방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똑똑히 말한다.
“곁의 집에 사는 처자이온대 도련님의 글 읽으시는 소리를 듣고, 사모하옵는 마음을 억제치 못하와 그만 이렇게...”
금방이라도 다가올 모양이라 언사를 부드럽게 하여 차분히 일렀다.
“우리나라는 예의지국이라, 자고로 예절을 숭상하는 터에 젊은 남녀가 사사로이 만나는 건 도리가 아닌 줄로 아오.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중매를 놓아 청혼하면 달리 방도가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상대는 기안에 눌리어 다시 더 아무말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져 갔다.
“어휴...”
큰 숨을 몰아 쉰 그는, 밝은 날로 부모님을 졸랐다.
“집 팔고 이사갑시다.”
이리하여 그는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이보다 더한 예로 고려 초기의 강감찬 장군의 일화가 있다.
그는 천병만마를 호령하는 장군도 아니다. 문과 출신으로 체수도 적고, 얼굴은 박박곰보에 검기는 왜 그렇게 까맣든지, 흔히 외모론 보잘 것 없으면서 재주 있는 사람을 그렇게 별명지어 부르기까지 하는 그런 분이다.
옛날엔 청년들이 자기도 당당한 남아라고 뽐낼 때 하는 말이 있었다.
“나도 임마! 홍역, 마마 다한 놈이다.”
마마는 천연두 증세도 대단했고, 혹 살아 남더라도 그 흉터가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날짜를 채우고 환자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되면, 호구별성마마 배송낸다고 마마귀신을 전별하는 의식을 치렀다. 시원스러게 어서어서 가라고 평화적이긴 하나 쫓아내는 절차다. 그런데 소년 강감찬이 그런 자리에 와서 두 손을 모아 빌더라지 않은가?
“별성마마님, 이 집을 떠나거든 제발 내게로 와 주시오.”
간데마다 쫓아내는데 오라고 환영하는 데가 있으니 오죽 좋은가? 강감찬은 그길로 몸져 누워 앓아 사경을 헤맸다. 얼굴에 손등에 무섭게 돋았던 것이 딱정이가 질 때 곱게 넘기면 흉터가 안남는 것인데, 이 딱한 소년은 제 얼굴을 제가 사정없이 할퀴었다. 어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그리하여 박박 얽어뱅이가 되어 일어앉은 그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이제 됐어, 얼굴이 좀 곱상하다 보니 계집애들이 어찌나 따르는지! 이젠 마음놓고 공부하고 장부답게 일도 해야지. 에헴!”
박차오르는 필흥
조선조 때 조씨라던가 하는 명필의 얘기가 있다. 주인공되는 조모라는 분은 물론 상당한 벼슬자리에 있고, 또 처신이 고결하여 사회의 칭송을 받는 분이었다. 그가 하루는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이 생겨 하인 하나만을 데리고 나귀를 몰아 대문을 나섰는데, 사실은 어디라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심심하니까 그저 바깥구경이나 할까 하고 그래서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연전에 작고한 매형 생각이다. 촉망받은 분이었는데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혼자된 누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바느질 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고 계신 터였다.
“옳지! 게나 가 보아야겠다.”
그래도 살던 끝이라 아담하게 꾸민 중문을 들어서니 그댁 하인이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마님, 사직골 나으리께서 행차하셨사와요.”
옛날 법에 조관이라고 하여 양반이 하는 벼슬은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아홉 품수에 정과 종이 있어 18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6품 이상은 정, 종 품수 안에 다시 두 계층이 있어서 모두 30계단이다.
그리고 정3품은 동반(문관)일 경우 통정대부와 통훈대부로 갈리고, 서반(무관)을 절충장군과 어모장군으로 나뉘어서, 통정대부와 절충장군은 같은 정3품이면서도 당상관이라 하였고 나머지 둘은 당하관 품계였다.
그리하여 정2품 이상일때는 대감이라는 칭호를 올리고, 종2품과 정3품의 당상관을 영감이라 불렀으며, 그 이하는 모조리 나으리 - 한자로 쓸때는 진역 - 라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벼슬지위가 높으면 젊은 영감도 있게 마련이나, 당상관에 오르기는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다.
“어이구, 어쩐 일이셔? 동생이 우리집엘 다 납시니...”
누님의 영접을 대청에 올라서며 보니, 잘 정돈된 안방 방바닥엔, 중국서 들여온 좋은 비단이 이제 옷을 마르려고 펼쳐져 있다.
“동생! 잠깐 앉아 계시게. 내 장국상 차릴테니... 그동안 심심하더라도 잠깐 혼자 앉아 계셔야겠네.”
앞치마를 두르며 호들갑을 떨고 뜰에 내려서 갔는데, 동생되는 나으리는 딴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을 휘둘러보니 매형이 쓰던 문방구가 그냥 있는데, 아껴쓰던 용연도 그대로다. 얼른 잡아다니어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이크! 알맞은 크기의 붓도 그냥 있고...”
말이 장국상이지,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을 대접하려고 점심상을 차리는덴 시간이 조만히 걸렸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지.`
나으리는 잘 갈린 먹을 붓에 찍어 공글렸다. 그리고는 예의 중국비단을 폭 맞춰 방바닥에 깔아 폈다.
슬쩍 안마당의 기척을 살피고 나서, 팔을 걷어부치고 무릎걸음으로 비단폭 앞에 섰다.
고문진보나 문장궤범의 실린 글은 달달 외우는 터라, 구중의 좋은 글 하나를 책을 보지 않고 웅얼거리면서, 붓끝은 사뭇 바람을 일구어 행서와 초서를 섞어가며 써 내려가는데, 얘기쟁이 표현마따나 그냥 소맷자락에서 비파소리가 날 지경이다.
“아이구, 저걸 어쩌나?”
점심상을 마루에 놓으며 소스라쳐 놀라는 누님을,
“쉬이잇!”
손을 저어 제지하고, 여울에 흐르듯 용트름치며, 내려가는 필세에 누님도 혀를 내둘렀다.
동생이 명필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참으로 놀랍다. 마지막 서명까지 하더니, 이마에 솟은 땀을 소매자락으로 닦아 올리면서 물러나 서서히 훑어본다. 그리곤 히죽이 웃으면서,
“누님! 모처럼의 바느질감을 버려놨으니 어떡하우?”
“얘,칠복아! 이것 갖고 종로 육주비전 배주부에게 갖다주고 이와 똑같은 비단으로 한 필, 그리고 돈을 줄테니 쌀과 나무를 사서 지워가지고 오너라.”
방엔 글씨가 마르지 않은 채 있어서 점심상은 마루에서 받았다.
“역시 우리 누님이셔, 술도 마련하셨구려! 글씨를 쓰고 나서 컬컬하니, 그냥 이 공기에다 부어 주슈.”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키고 다른 음식도 걸신 들린 사람모양 탐스럽게 자셔 치웠다.
“동생! 식성은 변하지 않으셨네 그랴?”
“그게 아니예요. 흥이 나서 글을 쓰고 났으니까 이렇게 먹히는 거지요.”
퇴침을 끌어당겨 베더니 이내 잠이 든다. 해가 설핏하여 하인 칠복이가 돌아오는데 아, 이게 다 뭐지? 쌀이 몇 섬, 나무가 바리 바리, 그것만이 아니다. 마루가 쾅 하도록 돈도 한짐을 내려놓았다. 나으리가 일어나 앉아 싱그레 웃었다.
“역시 배주부가 알아보는군!”
그 뒤 나으리는 누님에게 졸리고 배주부에게 부대끼었다. 그때 그런 글씨 다시 한 번 써 달라는 거다.
“그런 글씨가 그렇게 쉽게 써지나요? 벅차오르는 필홍이 일순 돋아야지!”
어느 원로 출판인이 애써 만든 책의 제호를 누구에게 써달라나 하고 궁리가 많았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서체를 발견해 그의 댁을 찾았더란다. 이차저차 말씀 드렸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아무 날 오라 하기에 갔더니 글씨 쓴 종이 둘을 내어 놓더란다.
“이중 마음에 드시는 걸로...”
“어느 게 먼저 쓰신 겁니까?”
그래 이쪽 거라 하길래
“네, 그것을 쓰겠습니다. 나중 쓰신거야 첫장의 모자라는 점을 보강해 겉모양은 정제돼 있겠지만, 기가 살아있는 건 처음 것일테니까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 때 경문왕이라면 861년에 즉위하여 874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니,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하여(668) 통일된 지도 어언 2백년이요, 왕의 14년 최치원이 당에서 그 과거에 급제하였고 3년 뒤인 877년 고려의 왕건 태조가 태어났으며, 그뒤 935년에 신라는 왕조가 막을 내리는 그러한 시기다. 아니 18세에 화랑으로서 헌강왕의 잔치에 참가했을 때 왕은 그에게 물었다.
“낭은 국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겠는데, 무어 특이한 것을 본 적이 없는고?”
“예! 훌륭한 행동 세 가지를 보았사옵니다. 남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몸을 낮춰 겸손할 줄 아는 이가 그 하나였고, 누구보다도 부호로 잘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이가 둘째였사오며, 귀한 지위에 있어 세력도 있건만 그것을 내보이려 않는 이가 셋째였사옵니다.”
왕은 그의 말이 마음에 들어 “내게 두 딸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에게 장가들어 주지 않겠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런데 `둘중의 맏이는 추물이요 둘째가 절세미인이라 모두 둘째를 얻으라`고 하는 중에, 낭도 중에 식견 높은 이가 있어 따로 만나 권하는 것이었다.
“맏이를 얻으시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내 말을 들으십시오. 아니면 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그런 지 석달만에 왕의 병이 위중해 숨을 거두게 됐는데, 아들이 없으니 `맏사위로 대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그 말을 따라 왕위에 오른 그에게, 앞서 권하던 동지가 찾아와 치하한다.
“그것 보십쇼, 맏이를 얻었기에 왕의 자리가 굴러 들어왔고, 어여쁜 둘째는 저절로 껴잡아 얻게 됐으며, 주위에서 모두 기뻐들 하시니 이 얼마나 경사스럽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귀가 점점 자라 당나귀 귀처럼 커지고 말았는데, 왕비나 궁중의 가까이 모시는 이들도 누구하나 눈치 챈 이가 없었다. 그러나 왕의 복두를 만드는 이만은 모를 까닭이 없다. 물론 기록에는 없으나 왕은 그 자에게 눈을 부라렸을 것이다.
“이놈! 입밖에만 내 봐라. 네 목숨은 열이 있어도 모자랄 것이니...”
그래 평생토록 참다참다 이제 죽을 때가 임박해, 도림사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엎드려서 털어 놓았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같단다...”
그 뒤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 귀는 기일-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에 실린 얘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얘기가 그리스 신화에 있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미다스(Midas)왕은 신에게 두 번이나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왕은 욕심쟁이어서 금이 많이 생겨지라고 빌었던 때문에, 디오니소스의 잔혹한 형벌을 받아 만지는 것마다 모두 금이 돼 버리는 것이었다.
그릇을 만지면 그릇이 금이 되고,음식을 먹으려고 손을 대면 금방 금이 돼 버리고, 딸의 손을 만지면 그 딸이 금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신전에 가 여태까지의 소원을 없애달라고 빌어서 간신히 모면하였다.
태양의 신이요, 음악의 신이기도 한 아폴로와 목축의 신인 판이 음악 솜씨를 겨루었는데 신도, 사람도 모두 아폴로 쪽이 낫다고 했건만 미다스왕만이 무슨 고집인지 판쪽이 이겼다고 내버티어서, 화가 난 아폴로는 미다스왕의 귀를 떼어내고 대신 당나귀 귀를 붙여주고 말았다.
왕은 그 귀가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언제나 관을 써서 덮고 지냈는데 머리를 매만지는 이발사에게만은 보이지 않을 방도가 없다. 그래서 머리손질을 할 적마다 끝나고 나서는 이발사를 반드시 죽이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이발사 하나는 손질할 차례가 되자 애걸을 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말 않겠다는 서약을 하겠는가?”
열번 백번 절해서 맹세하고 정작 일을 시작해 보니 이런 변이 있나? 임금님 귀가 이게 뭐람?
무사히 일을 마쳤고 목숨마저 부지했으니, 잘만 하면 왕의 단골이발사로 일평생 영화를 누렸겠는데, 그의 복이 그뿐이었든지 그는 병이 나서 덜컥 눕고 말았다. 의사를 불러서 보였더니 예상한 대로다.
“다른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참다가 참다가 난 병이니, 나로선 손 쓸 방도가 없소이다.”
그래서 환자는 억지로 기력을 차려 일어나서 땅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다 머리통을 쳐박고 속삭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다.”
그리고 흙을 덮고 시치미를 떼었는데 거기서 버드나무가 한 그루 났다. 그것이 커서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흐느적거릴 적마다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발사가 말했던 그대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다.”
이렇게 신기하도록 일치하는 동서양의 두 얘기를 놓고 생각해 본다. 어떤 정치가는 설명한다. 귀는 남의 말을 듣자는 기관인데, 신의 뜻으로 운영되는 것인 줄로만 알던 세계에서, 차츰 인간냄새 나는 세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발생한 설화라는 말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설화를 접하고 있는데, 저 유명한 `나뭇꾼과 선녀`얘기는 멀리 노르웨이서부터 동으로 일본에까지 분포되어 있고 유명한 신데렐라공주 얘기는 콩쥐팥쥐 얘기로 우리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다. 특히 불경 가운데 많은 얘기가 민화에 스며들고 있어서, 몸이 변하고 딴 물체로 변하거나 하는 요소는 다분히 불교설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는 폭풍에 쓰러진 고목에 치어 고생하는 요정을 구해줬더니, 당신네가 바라는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바다 용왕의 아들을 고난에서 구해 줬더니, 연적을 하나 보답으로 주면서 한쪽면을 문지르며 빌 적마다 한 가지씩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한 얘기가 있다.
이 연적은 네모 반듯하다고 했으니 윗면과 바닥까지 하면 정육면체이다. 그것을 손에 넣은 청년은 일생을 같이 살 예쁜 아가씨, 어디나 타고 다닐 수 있는 좋은 말, 잘 잘 듣고 충성스런 하인,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좋은 집을 차례로 요구해 그 모두를 얻어냈다.
“이제 남은 한면에다는 무엇을 비는 것이 좋을까요?”
수수께끼로 이어지는데, 아무래도 개화 이후에 들어왔을 아라비안나이트의 냄새가 약간 풍긴다.
수수께끼의 대답은 간단하다.
“이와 똑같은 연적을 하나 더 주십쇼.”
대통령의 보은
이승만 대통령의 짧지 않은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였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다.
그 어른이 귀국하고 전후의 어수선한 시국을 거쳐 모처럼의 초대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6.25의 전란을 치러야 했으니, 그 사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돌볼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는 사이 휴전이 성립되고 서울로 환도하여 다소나마 안정을 되찾게 되자, 이박사는 연래의 숙원인 자신의 주변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사람이 남의 은공을 모르면 사람이랄 수 없는 것이라, 이박사는 평생을 두고 고맙게 여겨 온 세 분 요인에 대한 보은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 첫번째가 충정공 민영환인데 이분은 이대통령에게 생명의 은인이라, 한창 젊은 혈기로 개화운동의 앞장을 서서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약하다가 반대세력의 고발로 체포되어 종신징역의 판결을 받아 복역하던 중에 민충정공의 손길이 뻗친 것이다. 1904년 그의 주선으로 감형이 되고, 이어 석방의 은전을 받아 그길로 미국으로 건너갈 계기가 된 것이다.
옛날 중국의 정치가 관중이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님이요,나를 알아준 것은 포공이라.”
했듯이 충정공이야말로 이승만을 살려 준 분인 동시에 알아주는 분이었던 것이다.
보답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알다시피 민씨 문중은 내력있는 재산가요, 자손들은 현재도 상류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어 경제적으로 도와줄 일은 생각 않아도 될 형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동상 건립인데, 지금 창덕궁 돈화문 앞에 서 있는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인 사모관대 차림에 신식 대수훈장을 엇매고 섰는 그 모습은, 패쇄에서 개화로 옮겨가던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하여도 될 것이다.
대좌 정면의 제호를 이박사 자신이 썼는데, 그분의 필적은 처처에 있으나, 이 동상의 것만큼 잘 써진 것이 달리 없다.
얘기는 바뀌어 미국에 건너가 거기서 학업을 닦은 이박사는, 한일합방이 되자 귀국하여 종로에 있는 한국기독청년회의 총무로 활약했는데, 일본인들의 표독스런 눈길이 가만둘 리 만무하다. 체포되어 또한번 옥살이를 치러야 했고..., 미국선교사들의 주선으로 풀려나 재차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모셨던 회장이 바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다.
그는 실권을 잡자 월남선생의 자제를 남전 사장 자리에 앉혀 우대하고, 명당을 구하여 월남의 산소를 옮겨 썼으며 묘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찬양했는데 그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더 언급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분은, 그가 서울에 체류했을 동안 숙식을 하던 하숙집의 주인 할머니다. 본업인 하숙 영업을 제쳐두고, 아침 저녁으로 사식을 차려다 구메밥을 넣어 드렸다니 친부모로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학생이나 칠 정도의 가정이었으니 존재가 뚜렷할 리 없다. 사방으로 수소문해 그의 소재를 찾기는 했으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간 뒤고, 자제되는 청년이 근실해 보여서, 우선 순경으로 취직시켜 앞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심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 손수 할머니의 덕을 찬양하는 글을 지어, 돌에 새겨 산소 곁에 조촐하게 세워 드리고 싶은데, 비문의 잔글씨까지 손수 쓰기에는 이박사는 너무 고령이다.
노대통령은 측근에게 일렀다.
“장안에서 누가 글씨를 잘 쓰는지 알아내서 좀 들어오도록 하라.”
그런데 여러 날이 되도록 소식이 감감하여, 다시 물었다.
“거! 글씨 쓸만한 사람 찾아 보랬는데 어찌 되었노?”
“예! 이병희라고 있다기에 들어오랬더니, 뵈오러 올때 입을 만한 옷이 없어 못오겠다고 합니다. 각하.”
“어떻게 일렀기에 그런 대답을 했을꼬?”
“종로서에 일러서 사람을 보내 봤더니, 그따위 대답을 하더라고 하옵니다. 각하!”
“이놈들아! 아예 수사를 보내 잡아오지 그랬냐? 너희들이 나를 모시고 일하는 놈들이냐? 경우도 모르고 어떡하자는 거야? 걔가 나를 보고 싶다든? 내가 손을 빌고 싶어서 청하는 것인데, 깔끔한 선비가 순사가 가서 오랜다고 선뜻 올 것 같으냐? 비서 중에 누가 찾아가 내 뜻으로 전하고, 그분의 형편이 좋다는 날짜에 내차를 가지고 가서 모셔오도록 해. 에잉! 듣고 보지 못한 것들... 쯧쯧.”
과연 회답은 예의차려서 화하게 돌아왔고, 이옹은 대통령의 초청을 따라 경무대의 접견실을 들어섰다.
“잘 왔네. 자네가 이병흰가? 글씨를 잘 쓴다기에 청했네.”
“?”
“사실은 내가 자네 힘을 좀 빌어야겠어서, 이렇게 오라고 했어. 어렵더라도 수고 좀 해 주게.”
그 뒤에 어떻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지성이 있는 이면 미루어 알 것이다. 개도 사흘을 기르면 주인을 잊지 않는다는데 이 세상엔 보신탕도 안되는 모리배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그 정도 사람은 되느니라
조선조 중엽에 구봉 송익필이라는 분이 있었다. 인명사전에는 서출이라 하고 본관은 여산, 사련이라고 나와 있다. 사련이라는 이는 1496년 (연산군 2년)에서 1675년(선조 8년)까지 살았는데, 이분 역시 안돈후의 서녀 감정의 소생이라고 되어 있다.
미천한 출신으로 간신 심정에게 아부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안처겸, 안당, 권전 등이 남곤, 심정 등의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하여, 신사무옥을 일으켜서 안씨 일문 등에 화를 입히고, 그 공으로 당상에까지 올라 30여 년간 거드럭거리다가 죽고, 선조 19년에 이르러 사건 전모가 밝혀지며 관직을 삭탈 당했는데 그런 이의 서자, 그것도 계집종 막덕의 몸에서 났으니, 그야말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체가 낮아 벼슬길은 단념했으나, 율곡, 우계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논하여 통달했고, 예학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미 당상으로 대감 지위에 오른 율곡 선생과도 대등하게 친구로 사귀었는데, 여기 문제가 있다. 서로 자네니 내니 하고 사귀는 것을 `벗을 한다`고 하여 약간 까다로왔다.
지벌이 상적하고 학식이 비슷하며, 연령 또한 과히 차이나지 않아야 허교한다고 하여 서로 말을 놓아 하는데, 십년이장 즉협사지 한다고 하여 9년까지는 허교하여도 그 이상 차이날 때는 노형으로 대하는 것이 도리였다.
또 노인 자체라고 하여 그 사람 아버지가 자기 할아버지와 친구간이면, 서로 거북한 사이로 쳐서 경대하며 지내고, 나이차는 얼마 안 나더라도 장형하고 트고 지내는 분에게는 까불지 못하는데, 이것은 장형부모라 하여, 맞형도 형님 중에서도 각별히 여기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율곡의 계씨가 형님 처신에 불평이다.
“그래 형님도? 무위무관의 그것도 남의 집 종의 새끼-종 신분일 때는 아기니 아들이니 하는 말을 안 썼다-하고 너나들이를 하신단 말씀입니까? 형님 안 계실 때 찾아오면, 뜰에도 못오르게 하고 혼내서 쫓아 보내겠습니다.”
“그래? 며칠 뒤 그를 오라고 해놓고 내 피해 줄테니, 네 마음대로 해 보려무나.”
약조된 날, 계씨는 정자관을 높다랗게 쓰고 큰사랑 아랫목 보료 위에 점잔을 빼고 앉았다. 속으로는
“이놈이 오면, 그냥...”
하고 벼르고 앉았는 것이다. 대문께서 자기집 하인이 외운다. “구봉 송선생 듭시요.”
그 소리를 듣자 율곡의 계씨는 자신도 모르게 관을 벗어놓고 일변 갓을 떼어서 쓰면서 대청으로 나와 버선발로 대뜰에 내려섰다. 관은 평교간에는 같이 쓰지만, 점잖은 어른을 뵐 적에는 갓으로 바꿔 써서 정장을 하는 것이 당시 예절이었다.
“선생님! 어서 오십쇼.”
“어! 그래. 중씨는 아니 계신가?”
“잠깐 출타했습니다.”
“온! 사람을 만나자 해 놓고 비우다니?”
스스럼없이 아랫목 보료에 가 털썩 앉는데, 계씨는 자신도 모르게 날아갈 듯이 절을 한 번 하고 한 무릎을 세우고 모셔 앉았다. 무슨 분부라도 떨어지면 금장 일어나 거행할 수 있는 자세다. 한참 만에야 구봉이 입을 열었다.
“요새 쌀값은 얼마나 하누? 나무는 짐에 어떻게 하고...”
“쌀은 섬에 암만냥이고, 나무는 드리없으나, 좋은 건 짐에 암만한다고 들었습니다.”
또 한동안 덤덤히 앉았다가 자리를 뜨며 이른다.
“중씨 들어오시거든, 다녀갔다고 여쭙게.”
“예! 그럼 안녕히 행차하십쇼.”
대문간까지 나아가 배송하고 돌쳐서며
“아차차! 이런 제에기...”
갓을 벗어 팽개치고 관은 집어 쓸 생각도 않고, 후우푸우 화가 나서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분을 삭였다. 저녁상을 물리고 율곡이 물었다.
“너 오늘 구봉 혼 좀 내줬니?”
“혼내 주는게 뭡니까? 얼떨결에 뜰에 내려가 모셔 올리고 절을 하고....”
“아암, 그 양반이야 네가 그렇게 대접할 만한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지. 그래 무얼 묻데?”
“쌀값은 어떻고 나무금은 얼마하느냐고 묻습디다.”
“호! 너는 그런 얘기나 할 상대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
구봉은 문자에도 능하여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었다. 나라에서는 구봉이 죽은 뒤에 지평을 증직하였고 시호를 문경이라 내리었다. 이렇게 옮기면서 한숨이 절로 난다. 문벌 지벌이 무엇이기에 이런 인재를 초야에 썩혀 두더란 말인가?
전하는 말에는, 구봉이 자신의 아들에게 율곡의 서녀를 맞았으면 하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혼잣말 처럼 뇌까렸다는 것이다.
“율곡까지 그렇게 소견이 좁을 줄은 몰랐네.”
이런 적서 구분 때문에, 앞서 구봉의 아버지도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하여 소인 소리를 들어야 했고, 저 유명한 유자광도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라더니, 그가 가는 곳마다 풍파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살육하지 않았든가?
중국 사기를 보더라도, 명사 아무개는 아버지 죽은 뒤 개가하는 어머니를 따라가 의부의 성을 따랐다가, 성년한 뒤에 자기 성을 되찾았다는 기사가 곧잘 나오고, 미국의 명사 중에도 우리나라 같으면 낯을 들고 나오지 못할 가문의 출신이 있으며, 고아출신의 금메달리스트 기사를 읽고는 가슴이 다 뭉클하였다.
사람이란 활활 부담감 없이 피어나야 하는 것인데...
멋지게 벌어서 뜻있게 쓰고
조선조 후엽에 중국상대 무역상으로 큰 돈을 벌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재산을 모아 멋있게 산 임상옥이라는 분이 있었다. 의주 사람으로 정조 3년(1779년)에 나 철종 6년(1855년)까지 살았는데, 가업을 이어 18세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순조 10년(1810년)에 불과 21세로 이조판서 박종경의 정치적 권력을 배경삼아,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의 대 중국 무역권을 독점하여 천재적인 사업수단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까지 여러 상인들이 각각 인삼바리를 싣고 사신을 따라 들어가, 그것을 팔아 우리나라에는 없는 사치품을 무역해서 싣고 오던 것인데 인삼에 한해서는 다른 상인이 손을 못대게 한 것이다.
그곳의 상인들이 보니 여직껏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인삼을 싣고 오더니 이제 몇 년째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도 닳고 닳은 상고들이다. 그래서 저희들 나름대로 지혜를 짜보았는데 다름 아니라 인삼전매권을 손에 쥔 지 10년째인 순조 21년(1821년) 저들이 불매동맹을 일으킨 것이다.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에 교역을 끝내고, 사행과 같이 귀국해야 하는 것인데 그해 임상옥이 북경에 도착하며 보니 분위기가 전과 싹 다르다. 전같으면 숙소로 찾아와 “따아런, 따아런!”하고 환영이 대단하였는데 어느 한놈 얼씬도 하지 않는다.
“옳지! 올 것이 왔고나.”
임상옥의 머리에는 번개같이 스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느낌에 못지 않은 속도로 그에 대비할 구상이 떠올랐다. 놈들이야 찾아오거나 말거나 가지고 간 물건을 창고에 챙겨둔 채 자물쇠로 잠가두고, 말을 몰고 간 인부들은 날마다 핀둥거리며 논다. 때로 모여앉아 투전으로 돈내기 노름도 하고, 술판을 벌여 마신 끝에는 고함을 지르며 멱살잡이 싸움도 곧잘하고... 주인이란 따아런은 사행 가운데 몇몇과, 때론 현지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를 데리고, 산천 구경을 다니며 술도 마시고 글도 짓고...
이제 다급해진 것은 자네들이다.
`이 자가 초조해서 우리 인삼 사지 않겠느냐고 설설 길 줄 알았는데, 저렇게 유들유들하게 관광이나 하며 다니니, 무언가 좀 이상하다.`
그래 사방으로 염탐꾼을 놓아 임대인의 동정을 살피는데, 사신 일행이 돌아올 채비를 서두를 때쯤이나 하여서 이변이 일어났다. 유람에서 돌아온 임대인은 손수 창고 문을 열고, 인부들이 인삼짐을 바리바리 져내자 마당에 쌓으라는 것이다. 이 정보를 들은 중국인 인삼 상인들은 허둥지둥 모여들었다.
그랬더니 저런 일 좀 보게, 인삼 쌓은 둘레로 기름을 붓더니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곳 상인들은 문이 메어지게 들이달으며, 그러지 못한 자들은 담을 넘어들어가, 일변 불을 끄며 일부는 임대인을 둘러싸고 애걸을 했다.
“임대인, 이러지 말아해! 울리 사람이 잘못했어, 값 올려 줄께 불에 태우지 말아해, 오배 줄께 팔아해! 십배 줄께 팔아해! 이십배 줄께, 아니 삼십배 줄께, 제발이지 불에 태우지 말아해...”
듣고만 있던 임대인은 손뼉을 쳐서 여럿의 주의를 모으고 빙싯이 웃었다.
“불은 끌 것 없다. 그것은 거짓 인삼짐이야! 진짜는 창고에 그냥 쌓인 채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너희들이 지금 부른 값이 아니면 팔지 않겠다. 사내자식이 어찌 두 가지 말을 하겠노? 진정 너희가 부른 값으로 사는 거지? 안 들으면 나도 배짱이다. 기왕 태우랴던 것 몽땅 태우고 말 것이다.”
여럿이는 손을 싹싹 비비며 애걸복걸을 하였다.
“좋아! 살 사람만 줄을 서고 나머지는 돌아들 가라.”
인삼짐을 한짝씩 져내서는 풀어서, 저들이 내놓는 금액만큼씩 쳐서 내어주기를 온종일 하여, 드디어 그는 일조에 거부가 되고 만 것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백과사전에는 그의 이러한 행적에 관해 이 대목을 이렇게 써놓고 있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북경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분쇄하고, 원가의 수십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쓰며 어떠한 사업을 하며 살었던가. 그만큼 통이 큰 사람이라면 따라갔던 인부들도 팔자를 고쳤지 않았을까?
관광을 다니고 노름을 하고 술먹다 싸움질을 하는 것은 모두가 저들을 속이는 눈가림이다. 밖에서 떠들던 인부들은 번갈아 광속으로 들어가 소리없이 가짜 인삼짐을 꾸려서 쌓았으니, 그들의 공적을 후하게 대접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다시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이다.
“그동안 기민(주린 백성들)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순조 32년(1832년) 곽산군수가 되고, 1834년에는 의주의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구성부사에 올랐다가 물러난 뒤로는 빈민 구제와 시주로 여생을 보냈는데, 시야 물론 한시인데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시와 술을 즐겼다 했으니 물론 글 잘하는 선비를 사귀었겠는데, 여기에 덧붙여 꼭 한마디 적어야 할 일이 있다. 수백칸 되는 호화주택을 짓고 그의 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보다도 특기해야 할 것이, 수십칸 사랑을 짓고 만권이 넘는 서적을 들여놓아, 누구고 글을 읽고 싶은 이는 와서 묵으며 공부하도록 편의를 보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주인의 학식 수준이 높다 보니, 웬만한 선비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겠는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성과를 거둔 것이 있다. 이 곳에 자주 출입하던 이제마라는 분은 뛰어난 재질로 모든 분야에 달통해서 1894년 그 지방에서 일어난 최문환의 난을 힘 안들이고 평정했으니, 그 지방에서의 덕망도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마는 고전의 하나인 <주역>을 깊이 여구한 끝에, 이것을 사람의 생김새에 적용해 크게 음과 양으로 구분하고, 다시 그것을 양분해 음을 태음과 소음으로 나누고, 양 또한 태양과 소양으로 구분해, 체질에 따라 같은 증세라도 처방을 달리해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냈다.
이것은 동서양을 물론하고 의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한국의학으로 세계에 자랑하는 사상의학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지방의 유력자인만큼, 기초되는 서적은 집에 앉아 모두 읽었을 것이고, 서울에도 체류하며 벼슬 주는 것도 마다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으니, 국내에 들어와 통하는 책 치고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의주의 임부잣집엔 진귀한 책이 많이 있고, 그것을 와서 읽으라 권장한다는 소식이 아니 전해질 리가 없다. 그래 천리를 마다않고 임부자를 찾아가, 그의 사랑에 머물며 무엇 하나 불편할 것 없는 환경에서 차분히 글을 읽어서 체계 세워낸 것이 이 세상에 자랑할 사상의학의 이치라니, 돈 한번 멋있게 썼다 하는 찬사를 아니 던질 수 없다.
옛날의 제도를 보면 유난히도 환경의 지배를 세게 받아, 훌륭한 재질을 펴보지 못한 이가 많은데, 이렇게 개방된 원조의 시설을 펼치다니, 이제마뿐 아니라 구한말의 뜻있는 인사가 수없이 그의 신세를 졌을 것으로 짐작이 가 스스로 고개가 숙어진다.
이 또한 병법이 아니겠소?
고려말 격변기의 제일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분들이 최영 장군을 들 것이다.
고려 충숙왕 3년(1316년) 나 평생을 전쟁터로 달리며, 남쪽 해변으로 침공해온 왜구를 쳐부수고, 북으로 원나라에 뺏겼던 지경을 되찾는 등 공로가 많은 중에도, 1358년 전라도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여 척을 격파하고, 이듬해부터 국내를 휩쓸던 홍건적을 처처에서 물리쳐 대공을 세웠으나, 요승 신돈의 모함을 받아 한때 한직으로 좌천되었다가, 신돈이 처형당하자 다시 병력을 거느려 국방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우왕 2년(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어 이를 토벌하던 원수 박원계가 크게 패하자 자원 출정하여 연 5년 사이에 처처에서 왜구를 토벌했는데, 이 무렵부터 뒷날 조선조의 태조가 된 이성계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신진세력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으니, 그는 최영보다 19세 연하인 1316년 생이다.
이성계는 남북으로 달리며 왜구를 토벌하여 전공을 세우던 중 1380년 경상도와 전라도 접경인 운봉에서 적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병력을 섬멸한 후로 조야의 신망을 모아, 최영에 대립하는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대륙에서 원나라가 힘을 잃고 명의 세력이 일어날 때, 1388년 요동지방을 치러 내어보낸 이성계가, 압록강 가운데 위화도에서 회군해 들어오자 그에 맞서 버티다가 붙잡혀 죽으니 고려 왕조도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이내 종막을 고하게 된 내력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때나 그때나 나라에 망조가 들면 매사에 기력을 잃고 안일과 사치만을 일삼게 마련인데, 고려 말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밖으로 최영같은 장군이 갑옷을 끄를 사이 없이 흙먼지 속을 뛰닫는데, 수도인 개경에서는 이른바 명문가 출신의 무능한 고관대작들이 서로 어울려 바둑이나 두고, 돌려가며 청하여 진수성찬으로 사치를 다하여 먹고 마시는 한일월을 즐겼다.
최영 장군이 개경에 돌아와 있을 때 일이다. 이 상류층의 돌려가며 먹기식 잔치가 장군댁 차례로 돌아왔다. 최영 장군은 자랄 적에 그의 아버지가 항상 경계하기를
`견금여토(금을 보기를 흙과 같이 하라)`
하여 이 넉 자를 허리띠 끝에 써서 평생토록 차고 지내던 분이다. 정권을 잡아 위세가 안팎으로 떨쳤어도 남의 것이라면 털끝만치도 건드리지 않아, 겨우 먹고 사는데 그쳐, 사생활에 근검하기가 이를데 없던 분이라, 귀빈이 모인다고 호들갑을 떨어 잘 차리려 할 분도 아니고 그럴 기구도 없다.
날짜가 되자 손님들이 줄줄이 모여드는데, 물론 당대에 제일가는 고관대작들이다.
그런데 점심을 내올 시각이 되어도 아무런 기별이 없다. 하루 세끼뿐 아니라 주전부리로 간식을 무시로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절제없는 가문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참기 어려운 고통일 수 밖에...
배에서 쪼로록 소리가 나고 눈이 다 퀭할 때쯤하여 점심상을 내어오는데, 메기장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짓고, 갖은 나물로 국 끓이고 반찬하여서 내어오니, 그네들로서는 처음 먹는 음식들이다.
모두들 허겁지겁을 해서 먹어치우고는 제각기 한마디씩 하였다.
“철성(최영 장군의 호)댁 음식이 유별하게 맛있습니다그려.”
주인은 싱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게 다 용병하는 술법이외다.”
잔뜩 배고프게 해놓고 나서 음식을 내어오니 어쩔 수 없이 맛나게 먹을 수밖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한 그인지라 조그만치도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임렴이라는 이의 소행을 분히 여겨서, 그의 가족까지 모조리 죽여 없앤 일이 있었는데 자신이 형벌받기에 앞서 한 말이 있다.
“내 일찍이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임렴에 대한 형벌은 지나쳤다. 내게 조그만치라도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더니 그 뒤 고양군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몇백년 되도록 떼풀이 살지 않아 벌거벗은 무덤이라, 흔히들 홍분이라고 하였다. 이상은 대체로 성종 때의 학자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실린 대로를 옮긴 것인데, 그의 무덤은 서울 근교 벽제 대자리라는 데 있어 서울서 하루에 다녀오기 알맞은 거리다.
그 근방은 모두 흙빛이 빨간데, 붉은 흙은 진흙이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겨울에 땅이 얼면 서릿발이 서면서 풀뿌리를 들고 일어나서 떼가 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석비레나 개울에 장마때 앉는 세모래를 거두어 한식 때마다 뗏밥을 주면, 몇 해 거듭하는 사이 모래가 고루 섞이며 흙이 무거워져, 겨울에 얼어도 뿌리를 들고 일어나지 않아 자연 파랗게 살기 마련이다. 지금 그의 산소는 자손들의 저성어린 손질로 떼가 파랗게 자라고 있는데 둘레를 돌아본 이는 감회가 깊다.
짚신장수가 된 왕손 옥진
어른들 사회에서는 뽐낸다고 하고 아이들은 잰다는 말이 있다. 이 뻐긴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저건 모두 겉치레고 허식이다. 그 겉을 싸고 있는 헛것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본연의 실체가 나타나겠는데, 저렇게 큰 체 하는 정작 알맹이는 과연 얼마만이나 할꼬?`
세종대왕은 아드님이 많아서 정실인 왕비에게서 낳은 대군이 팔형제고, 후궁들 몸에서 10형제를 두었다.
맞이인 세자 몸에서 첫 손자를 보았으니 이 분이 뒷날 비극의 주인공인 단종이다.
의당 유모를 들여야겠는데 가뜩이나 복잡한 궁중에 새 사람을 들였다가 그 떨거지들마저 뛰어들어 설치는 날이면 더욱 골치아프겠어서 대왕은 다른 방책을 세웠다.
당신 후궁들중에서 젖 흔한 이로 봉보부인을 삼자. 그리하여 뽑힌 분이 혜빈 양씨다. 한남, 수춘, 영풍의 세 왕자를 낳아 바쳤는데, 영풍군이 아직 강보에 있고 유도도 흔해서 이 분께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단종대왕은 영풍군과 같은 무릎에 앉아 양쪽 젖을 갈라 자시며 자라는 기연을 맺어, 위의 두 왕자와도 자연 친형제처럼 섞여 자라시게 된 것이다.
세종이 승하하시고 문종까지 빈천하시자, 둘째 왕자 수양대군의 야심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공사가 혜빈 양씨의 세력을 꺾는 일이라, 맏아들인 한남군은 죄를 씌워 경상도 함양으로 귀양을 보내고, 막내인 영풍군이 하필이면 박팽년의 사위라, 선위하던 날 어머니와 함께 현장에서 박살을 당해 묘소마저 없다. 그 가운데 수춘군은 시세를 비관하고 식음을 전폐하여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란통에 한남군의 아들 홍안군은 폐족이 되어,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리로 쫓겨났다. 당당한 장손이건만 때를 잘못 만나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옛날엔 가장 손쉽고 그래서 또 가장 비참한 직업이 짚신장수였다. 겨울에도 불을 안 때는 움퍼리에 모여 앉아, 힘들어 다른 일은 못하고 짚신을 삼아 팔아서 연명하는데, 대개는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 늙은이나 불구자들이 이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렇게 만들어낸 짚신을 열 켤레씩 모아 거래 했는데, 만든 솜씨에 따라 값에 차등이 날 것은 물론이다.
홍안군도 밥은 먹어야 살겠어서 이 틈에 끼어들었는데 홍안군의 아들 옥진이라는 분이 짚신을 볼품있게 공들여 삼아서 장안에 이름이 났다. 그래 건달들이 기생에게 선물을 해도 `옥진이 솜씨`의 짚신이라야 환심을 샀다. 그러니 그의 영업(?)도 번영했을 것이다.
그런 중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었다. 중종조에 이르러, 일직이 세조손에 희생된 모든 분의 명예를 회복할 제, 한남군과 아버지 홍안군의 지위도 복구되고, 이미 중년의 솜씨좋은 짚신장수 옥진도 회천정을 봉해 정3품 창선대부로 발바닥에 흙을 묻히지 않는 신분이 되었다.
사모품대로 위의를 갖추어 구종 별배를 앞뒤에 느리고, 사인교를 타고라야 출입하는 어엿한 지위로 되돌아간 것이다. 엊그제까지 받던 천대를 생각할 때 얼마나 뽐내어 자랑하고 싶으랴만 그게 아니다. 그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공력을 들여 남 다 못해내는 솜씨를 발휘하던 그 성실한 사람됨은 바탕부터가 다르다. 한가지를 보면 열가지를 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말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하인에 견마 잡히고 거리에 나왔다가라도, 옛 동업자를 만나면 반드시 내려서 손을 잡고 반기었다. 굳은 살도 안 빠진 예전의 그 손이언만 옛 동료들은 손을 잡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높이 되신 처지에 우리같은 것들을...”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지었다. 그뿐이 아니라 존장 어른을 뵈면 길에서도 절을 했다. 상대방이 미안해서 눈에 띄면 미리 숨어버릴 형편이다. 관대차림으로 지나다가도 시간만 허락하면 주막에도 함께 들렀다.
“아이구! 이게 누구셔? 우리같은 거 집엘 다 오시다니...”
“무슨 말씀을? 옛날의 옥진이가 그 옥진이지, 어디 간답디까?”
“아이구, 사위스러워라. 그러나 저러나 앉으실 데두 만만치 않구 무어 차려 놓은 게 있어야지...”
“옛날 그대루가 좋아서 온 사람이니 수선 너무 떨지 말구, 자! 어서1”
그 인정미 넘치는 이야기는 광해군 때 문장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전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도 덧붙이고 있다. 그분 자손 중에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난 의성군이라는 분이 있었다. 마침 손님과 장기판을 가운데 놓고 앉았는데 장기 만든 솜씨가 일품이라 곁의 친구가 집어보고 감탄하며 무심코 한다는 말이
“거 참 잘 만들었다. 마치 옥진이 솜씨 같아이.”
지위 높고 재산이 많아 인정미가 가신다면, 그까짓 지위나 재산, 조금도 부럽지 않다. 된장찌개 한 가지라도 인정이 담겼어야 제 맛이 나지.
부자간의 공기놀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거느리고 나온 총사령관은 이여송이다. 그 아우 이여매하고 같이 나왔는데, 이들의 선대는 조선사람으로 이 역시 장군인 이성량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집안은 조선계의 군벌 가문인 것이다. 그런 그가 평양서부터 왜군을 내리 몰아 물리쳤으니, 이제 승전고를 울리며 저희 나라로 돌아가야 하겠는데, 이 자가 병력을 거느린 채 서울 서북쪽 홍제원서 벽제관에 걸친 벌판에 진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엉뚱한 생각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나와 정부의 높은 분들을 고루 만나보고 나서 그러더란다.
“왜 한음 이덕형이로 임금을 삼지 그랬소?”
어찌 보면 선조대왕의 그릇이 크지 못하다는 얘기도 되지만, 남의 나라의 실정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
이 정도로 밖에 조선을 알지 못하는 그인지라,
“나도 조선의 핏줄이요, 이가 성이다. 본국에 돌아갈 것없이 여기 눌러앉아 임금 노릇해서 안될 것이 없지.”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앉은 생각은 이것이다. 사실 그가 자기 뜻을 펴려고 했다면, 당시 조선에서는 그것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하루는 진지안의 사령부 장막 안에 앉아 쉬는데, 밖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웬 조그만 소년 하나가 나귀를 타고 진지 안을 무인지경같이 누비고 다니는데, 어찌나 빠른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여송은 자기의 무예만 믿고 곧장 무장을 갖추고 천리준총 좋은 말에 높이 올랐다. 그리고는 먼지가 이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자기 수하의 여러 장수들이 앞뒤로 달려 들었으나, 소년은 참기름쟁이 모양 용하게도 그 사이를 뚫고 흙먼지를 일구며 달린다. 본시 진지란 격식 맞춰 배치하는 법이어서, 이곳을 침범당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초립동이 나귀 등에서 대장군이 직접 따라 붙는 것을 보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주 돌아보면서 고삐를 채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고놈이 탄 것은 조그만 당나귀인데 이여송이 채찍질해 몰아도 따라 잡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다른 군인은 다 지쳐 떨어지고 단둘이 벌판을 가로질러 어떤 험한 바위산 기슭에 당도하였는데, 훤하게 트인 잔디밭 곁의 오막살이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이여송도 숨을 헐떡이며 그 앞에서 내렸다.
말발굽 소리와 말의 코 푸는 소리를 들었는지 오막살이의 방문이 열리며 하얀 할아버지가 내다본다.
“어서 들어오시오.”
이여송이 코를 벌름거리고 숨을 헐떡이며 자기가 수모당한 것을 얘기했더니 노인은 차분히 말한다.
“그랬어요? 고놈이 또 까불었구먼! 아들 셋 중에 그놈이 막내인데, 툭하면 나아가 일을 저질러서 골치거리라, 내 오래 전부터 없애 버리려던 참이니 오늘 장군 손을 빌어서 처치합시다. 고놈이 그래도 아비 말은 거역치 않아 녀석더러 물 좀 떠오라고 그럴 터이니 방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리치시오. 그러면 나도 한시를 잊겠소이다.”
이여송이 칼을 뽑아 추켜들어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아버지가 소리쳤다.
“얘! 거 물 한 그릇 떠온!”
“네!”
문이 열리며 소년이 들어서기에 분명히 내리쳤는데, 칼 쥔 손에는 반응이 없고, 소년은 찰랑찰랑 담긴 물그릇을 고스란히 든 채 칼등 위에 동그마니 올라서 있지 않은가? 등골이 싸늘해진 이여송은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른께서 무슨 일로 저를 예까지 부르셨습니까?”
노인은 대답않고 소년더러 일렀다.
“형들 다 데리고 동산으로 나오너라. 장군께 우리 공기 노는거나 보여드리자.”
잔디로 덮인 펀더기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 뒷간채만큼씩이나한 바위를 제각기 손으로 들어서 높이 던지고, 그것이 내려오는 것을 받아 되던지며 노는데, 바위 날아가는 소리가 귓뿌리에서 윙윙 한다.
“그만들 쉬어라. 장군! 애들 노는 건 저 정도인데, 이것을 가지고 노는 놈은 아직 없구려! 내가 한번 던져 볼까?”
그러면서 연자매만한 산같은 바위를 이리궁굴 저리궁굴 굴려보다 앙 하고 용을 쓰며 추켜 던졌는데 하늘 파총으로 날아올라 흰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가 가물가물... 다시는 내려져 올 기색이 없다.
개구락지 모양 넙죽 엎드려 벌벌 떠는 이여송을 내려다 보며 노인은 차분히 타일렀다.
“외람된 생각 말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거라. 이 나라의 주인은 하늘에 매었어. 자, 그럼 어서...”
이여송이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 부자와 오막살이는 흔적도 없고, 때마침 서쪽하늘을 물들인 노을을 받아 북한산의 백운, 만경, 인수 세 봉우리의 모습은 의젓하고 우람하기만 하였다.
얘기꾼은 여기서 잇달아 덧붙인다.
공기를 놀아서 이여송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세 아들은 삼각산의 신령들이고, 공기돌을 치뜨려 놀라게한 하얀 노인은 백두산의 신령이라고 말이다. 워낙 터무니 없는 얘기라 정말로 믿을 이는 없겠지만, 역사적 사실로도 이여송은 서울을 점령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 해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개성 하면 지척같이 드나들던 곳인데, 그곳 선죽교에 가면 정몽주가 흘렸다는 핏자국이 있어, 물을 떠다 끼얹으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저만치 끝에 얹힌 석재의 아랫면에도 역시 그런 무늬가 있다.
양주동 박사가 학생 때, 거길 갔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선생님, 여기 이것도 핏자국이라고 해야 할까요?” 했더니 인솔한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글에 쓴 것이 있다.
“붉은 무늬를 꼭 핏자국이 아니라고 해서 좋을 것이 무어냐?”
위의 얘기도 그렇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존심을 키워줄 만한 전설쯤은 있어야 하고, 또 그래야 이 땅에서 살 맛이 나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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