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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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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대추 따는 날 - 양만규-
대추를 따는 날은 온 동네의 잔칫날
차일도 안 쳤는데, 철이 돌이 모두 온다
소문이 어찌 났는지 하늘 높이 해도 맑다.
머리통 갈겨 대도 주머니는 불러 오고
씹지 못할 주제에 신이 나는 누렁이
눈매가 제일로 고운 순이 치마가 무겁다.
아버지의 헛기침에 바지랑대 소리 높고
통째 씹어 넘기려도 혀가 녹는 대추들이
우두둑 소나기처럼 온 마을에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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