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최생(崔生)은 부친이 함흥 통판(通判)으로 부임하자 따라갔다. 최생은 그곳에서 한 기생을 사랑했는데 후에 그의 부친이 전보되자 그 역시 기생과 서로 헤어지게 된다. 이별하던 날, 기생이 최생의 손목을 잡고 울면서 말한다.
"한 번 하직하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으니 원컨대 도련님 신변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하나를 선사하시어 서로 잊지 않을 징표를 삼는 것이 어떨까요?"
결국 최생은 이 말에 감동해 이빨 하나를 빼 주고 길을 떠났다. 중도에 길가 나무그늘 밑에서 말을 먹이다가 기생 생각이 나자 눈물을 짓는다. 그때 한 청년이 오더니 역시 눈물을 뿌리며 훌쩍거린다. 또 한 청년이 그 뒤 이어 오면서 역시 눈물을 흘린다. 최생은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너희들은 무슨 이유로 우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 한 청년이 말하기를
"저는 서울 재상가의 종입니다. 함흥기생을 사랑한 지 오래됐습니다. 그 기생이 통관 아들의 꼬임을 받고 있을 때도 틈나는 대로 만났는데 지금은 감사 아들이 기생을 감금해 놓고 내 보내지 않아 희망이 끊어져 우는 것이 랍니다"
하고 또 한 청년은
"저는 그 기생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틈만 나면 서로 정을 통했습니다. 이제 통관 집 도령이 이미 서울로 돌아가 제가 마음대로 즐기려 했는데 어찌 감사 아들이 또 그를 사랑할 줄 알았겠습니까? 이젠 깊이 감금해 다시 만날 수 없어 심장이 끊어지는 듯하던 차에 도련님의 눈물과 저 친구의 울음을 보고 저절로 슬픈 마음에 눈물이 어리는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한다. 최생이 그 기생이름이 무엇이더냐고 물으니 둘의 대답이 똑같이 자기와 교제하던 기생이다. 최생은 아연히 놀라는 표정으로
"원통하구나, 그 천물(賤物)은 관심 둘 것이 못 되는구려"
하고 곧 종에게 자기가 빼 줬던 이빨을 도로 찾아오라 한다. 기생은 종을 보더니
"네 상전 이빨을 어찌 내가 알 수 있냐. 네 멋대로 골라 가거라"
하고 발악한다. 종이 전대 속을 들여다보니 이빨이 거의 서너 말 가량이나 된다. 이를 본 종놈은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물러서고 말았다고 한다.
-명엽지해(蓂葉志諧)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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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을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라 한다. 그렇다고 기생 모두가 해어화는 될 수 없었다. 돈과 색만 밝힌 창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규방 규수들이 집안 깊숙한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웃음과 몸을 팔았다.
기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고대부족사회의 무녀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이다.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시절, 사제인 무녀가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고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가와 결합해 근대의 기생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얘기다. 조선 중기 이후 기생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유교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과 예술이 기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황진이, 이매창 같은 명기들이 이름을 날렸다.
한편 조선말기에는 기생들은 일패(一牌),이패(二牌), 삼패(三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일패는 전통 무가(舞歌)의 보존과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며 대부분 관기였다. 그들은 내부 규율이 엄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패는 밀매음(密賣淫)을 주로 한 기생들이고
삼패는 공창(公娼)기능을 했다.
그런 가운데 거금을 주고 소실을 삼고자 했던 친일파에게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한테 주라고 거절했던 진주기생 산홍(山紅)과 일본 경무총감이 독립군의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준 돈 뭉치를 주자 이를 뿌리친 춘외춘(春外春) 같은 애국심을 가진 기생도 있었다.
소위 해어화라고 불릴 수 있는 기생은 자기만의 특별한 재능과 의리, 나름대로 정조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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