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에 가련(可憐)이란 기생이 있었다. 얼굴이 빼어나게 곱고 성격이 활달한 그녀는 때로는 제갈량의 출사표를 낭랑하게 외웠으며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잘 부르고 칼춤도 잘 추거니와 거문고와 퉁소, 바둑, 쌍육(雙六)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재색을 겸비한 기생이었다.
그녀가 어느 날 고을의 원을 따라 낙민루(樂民樓)에 올랐을 때 어떤 젊은이가 만세교를 건너가는 것이었다. 의복을 잘 차려 입은 그 젊은이는 장부다운 풍모가 능히 여인을 움직이기에 족했고 검은 나귀를 탔는데 그 뒤에는 거문고와 시통(詩筒)과 주합(酒盒)을 실은 나귀 한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가련은 곧 그가 자기 집 손님임을 직감하고 몸이 고단하다는 핑계를 대고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당도하니 나귀는 이미 문 앞 작은 복숭아나무에 매여 있었다. 곧바로 가련은 젊은이를 맞이하여 중당으로 들었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잠그고 촛불을 켠 방에서 놀이를 시작했다. 젊은이가 시를 읊으면 가련이 화답하고 가련이 읊으면 젊은이가 화답하였고 거문고를 켤 때는 가련이 켜면 젊은이가 노래를 부르고젊은이가 켜면 가련이 노래를 불렀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바둑을 두고 쌍육을 던지고 즐겼다. 퉁소를 불 때는 한 쌍의 봉황이 짝을 구해 기뻐하듯 하였고 함께 칼춤을 출 때는 눈썹이 서로 붙어 떠나지를 못했다.
가련은 매우 기뻐하여 혼자 생각했다.
'난 지금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기쁜 일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 만나 일생을 함께 한다면 내 여한이 없겠다.'
가련은 스스로 먼저 치마를 풀고 비녀를 뽑아 머리칼을 드리우고 다시금 술상을 내오고는 운우의 정을 나누려 하였다. 화려한 촛불을 새하얀 명주수건을 사뿐히 들어 바람을 만들어 끄자 향로에서 풍겨오는 향내가 코를 찌르듯 간지럽혔다. 그러나 젊은이는 뜻밖에도 벽을 향해 몸을 돌려 눕고는 길게 한숨만 내뿜을 뿐이 아닌가.
"이 사람이 오히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가련은 스스로를 달랬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동정이 없자 다가가서 젊은이의 몸을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데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지 않은가.
가련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면서 통곡을 했다.
"아, 하느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다니, 어허 하 하느님, 하느님!"
가련이 통곡을 한 후 창을 열고 밖을 보니 새벽 달빛은 처량한데 새는 우짖고 꽃은 떨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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