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 이성복 -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
-----------------------------------------
존재의 높이/최오균
무심히 집을 나서다 문득 가을 만나던 날
수신이 없는 부고(訃告) 문설주에 펄럭이고
휑하니 스치는 바람, 햇빛마저 종종 뛴다.
제 스스로 추스르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조금씩 소멸해 가는 순명(順命)의 모습 아름답다
차돌에 기름 바른 듯 가감승제 어련하랴.
내가 조금 살아보니까 주는 사람이 남는 장사더라
누군가의 가슴속에 고마움으로 남는 사랑
세상에 왔다간 흔적으로 그만하면 술명한 게야.
있는 날까지 살아가다 저 나무처럼 아쉬움 털고
정작 내 시간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는 거다
내가 쓸 시간의 잔고 에누리도 하지 말고.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10.28 |
---|---|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10.27 |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10.25 |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10.24 |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0) | 201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