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반 한 사람이 나이 늙었는데도 아무런 이름이 없고, 더욱 집안은 가난하고 살 수 없어 떠돌아다니다가, 호남 어느 조그만 읍내에 머물러 이교(吏校)의 자제들을 모아 놓고 훈장질을 하며 지냈다. 사오년이 지난 후에 생원이 늙어 죽고 처와 딸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집이 가난하여 딸의 나이 열여덟에도 여의지를 못했다. 이웃집 양반이 처녀가 아름답고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정혼하고 예의를 행하려 했는데, 가까이 있는 본읍 이방의 아들이 통인으로 다니는 놈이 있어 또한 학동(學童)이었다. 이자가 불쑥 행원의 집에 와서 여종을 보고
" 너의 댁 소저가 내가 와서 글 배울 때에 여러번 나하고 상관했노라."
하거늘 여종이 처녀의 어머니에게 고하니, 어머니가 혼비백산하고 얼굴이 흙빛이 되어 그 딸에게 물었다.
" 이는 그 놈이 나의 아름다움을 듣고, 우리 집이 또한 보잘 것 없이 외롭고 약 한 것을 넘보아 이 불측한 계책을 내었으니, 그까짓 상대할 것도 없습니다. 차라리 관가에 고발해 원통함을 풀고 부끄러움을 씻을까 합니다. "
처녀는 얼굴색도 변치 않고 말하고 곧 교자를 타고 관정에 들어가 고해 바쳤다.
사또가 해괴히 생각하여 밝히기 어렵게 여기더니, 얼마동안 끙끙 생각하다가 통인을 불러 들였다.
" 네가 말하기를 저 처녀와 여러 번 상통했다 하니 그 얼굴과 몸뚱이를 반드시 자세히 알리니, 일일이 고하라. 어기면 죽고 남지 못하리라. "
이에 통인이 일일이 고하니, 사또가 처녀로 하여금 보교 앞에 출입케 하여 자세히 본즉, 과연 통인의 말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가만히 사람을 시켜 미리 그 자세한 것을 정탐한 연고라. 사또가 크게 놀라 할 말이 없었다. 처녀가 이미 통인의 간계로 인해 사또의 처결이 어려운 줄 알고
" 소녀의 왼쪽 젖통 아래있는 검은 사마귀가 밤톨만 하옵고, 그 사마귀 위에 터럭이 수십개 있으니, 이는 다른 이는 알지 못하는 바여서 이미 이르되 상통했다 한즉, 그가 반드시 알 수 있을지니 차례로 이로써 하문하시옵서서. "
사또가 또 통인을 불러
" 네가 처녀와 상통했다 하니,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 무슨 별 다른게 없더냐? "
원래 좌우를 피하게 했을 때 이미 가만히 몰래 엿들은 자가 있어 그 사이에 먼저 통인에게 그 비밀을 통지해 주었던 터라, 통인이
" 처녀 왼쪽 젖통아래 한 개의 검은 사마귀가 있어 크기가 밤톨만한데 털이 십여개 났소이다. 이로써 가히 증험하소서. "
이에 사또가 크게 놀라거늘 처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옷을 벗고 젖을 보이며
" 소녀가 본래 검은 사마귀가 없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온즉 저 간사한 놈이 반드시 사람을 시켜 몰래 듣게 하여 꼭 맞추어서 결단키 곤란케 한 것이외다. 저놈이 도리어 소녀의 술책에 떨어짐이니, 이로써 볼진대 아까 소녀의 얼굴을 상세히 얘기한 것도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정탐하여 교묘히 고해바친 것이 아니리이까? "
사또가 크게 깨닫고 기특하다고 처녀를 칭찬한 후에, 통인을 잡아들여 위엄을 보여 준엄히 심문하니, 통인이 이제는 할 수 없어 스스로 그 죄를 자복하자 형에 부치어 속히 쳐서 죽이라 했다. 사또가 처녀의 재주와 자색이 가상하여, 또한 이미 정한 혼인을 퇴했다 함을 듣고 처녀의 집에까지 행차하여 그의 둘째 아들로 구혼케 하여, 며느리를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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