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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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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혹은 신문 김수엽
각진 놈, 곁에 서서 신문을 읽다가
그 몸을 뒤져보니 젖은 빛깔들 뽐내면서
한번도 썩지 않았다고 아우성으로 빽빽하다
읽어보면, 비틀어진 자음 모음이 우겨대며
톡톡 튀어 올라 내 눈을 덮친다.
그 녀석 콧노래로 떨며, 서 있는 냉장고다
때론 내 뱉어진 말, 말이 아닐 때가 있다.
특히, 소갈비같은 사람들이 으스대며
숨죽인 돼지고기를 짓눌러 깔아뭉갤 때
날마다 신문 위에 그려지는 입들
훨씬 유효기간을 뛰어 넘긴 소시지이다.
썩어서 제 몸 망가진 활자들이 사는 집
다 안다. 햇빛은 달빛과 다르다는 걸
그 속에서 차갑게 익혀내는 건 잠깐일 뿐
알맞게 옷 벗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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