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 이성복 -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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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노래 최현배
내 고향은 병영이다 경상도 좌병영이
날 길러준 이 고장이 언제나 나의 그림
그림을 한 아름 안고 또다시 들렀세라
십칠세 홍안소년 책보끼고 떠났더니
칠십에 흰 머리로 못잊어 다시왔네
길거리 닫는 아이야 너가 누구 소자인가
저 집이 국민학교 옛날에 배울털세
서당을 파하고서 옮아들은 [일신학교]
양숫자 첨 배우던 일 아직도 선하구나
三一祠 여기로다 문을 열고 경례하니
을미년 만세운동 어제련듯 도로 생각
왜총에 쓰러진 충혼 이 고장을 지키누나
자갈길 밟으면서 동문으로 가노라니
이집 저집 간데없고 배추밭이 되었구나
어즈버 울산의 신흥도시 어이 이리 처량한고
고향 온 나그네가 예 살던 집 찾아보니
아랫채에 살던 사람 어데 가고 비었는데
몸체는 지붕마자 꺼졌으니 한숨에 눈물진다
회포를 가득 안고 동문성터 올라서니
동문루는 간데없고 가을바람 소슬하다
"산전물"이고 가는 이 없어 더욱 답답하구나
성곽은 허물어져 평지나 다름없고
이젯사람 밭을 갈아 고추가 붉어있다
갈바람 찾아온 손이 못내 설워 하노라
성우에 둘러섰던 백년 고목 간데없고
망월루 옛터에는 초석조차 안 보인다
좌병영 나라 지키던 일 꿈이런가 하노라
비석옆에 노송 하나 굽게 휘어 늙어 있다
우리 엄마 이 낙에서 아들 배웅 서울 갔다
이 솔아 네거 정녕 그 솔이거든 말좀하여 주렴.
1974.10월
*산전물 -山田동네에 있는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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