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임기종 2017. 4. 28.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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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림 -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조광>(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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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원고지, 그 구겨짐의 명상

 

충혈된 새벽 글발이 미완의 끝에 서 있다

시작은 불길처럼 그리도 밤을 앓더니

잉크물 마르지 못한 푸른 낙태의 숨소리

 

또 다른 익명의 내가 자라고 있었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쉽게 버리는 법을 알고

하혈의 긴 휴우증에도 짧은 쾌락을 쫓는다

 

칼날을 제 자신이 도려낼 수 있다니

이름을 얻지 못한 글발들의 피 비린내

준비한 이별이 없어도 돌아서는 울음들

 

휴지통 가장자리에 필사로 매달린 미련

마지막 확인 사살과 다시 구겨지는 목숨들

살면서 죽이는 것은 타인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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