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시조야화

임기종 2013. 10. 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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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황진이(黃眞伊) 이야기

이어령은 ‘흙속에 저바람 속에’ 라는 책에서 우리민족의 근본 성정은 ‘은근과 끈기’라 했다. 은근과 끈기는 남자보다는 여성에서 흔히 보였던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규방 깊숙이 자리한 사대부집 여성들은 종족 보존역할만 강요 당했을 뿐 여자로서 본능과 감정의 발산은 가족 뿐만아니라 사회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몇 개의 대문을 통과해야 거처가 나오는 우리네 가옥구조 속에서 숨어 있는 사람은 대가집 정부인이라는 칭호였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랑채라는 문간방에 거처를 정했고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같은 여성이지만 기방에 적을 둔 여자 즉 기생은 이에 비하면 다소 감정 표출이 활발했다. 물론 남자들의 이기심과 성욕해소의 방편으로 생겨난 이들은 어쩜 슬픈 역사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 부른다.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것이다. 일부 기생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달관하고 가슴속에 맺힌 한과 눈물을 새롭게 예술로 승화 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황진이다.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명월(明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송도 기생이다. 그녀는 송도에 삼절이 있는데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 황진이 자신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황진이를 연모하고 쫒아 다녔어도 자신이 바라던 사람은 화담뿐이었다. 황진이는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인 서경덕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홀로 독야 청정한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하루는 황진이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자주 화담의 초막을 향했다. 초막에서 들려오는 화담의 탄식소리를 듣는다.

 

마음이 어린후니 하는 일이 다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오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정에 여린 마음하나 가눌 길 없으니 하는 일마다 다 어렵구나

눈 덮인 산은 깊고 높아 내 사랑이 올수 없겠지만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스쳐가는 바람소리에

혹시 님 오는 소리가 아닌가 궁금해진다.

화담은 황진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담은 끝내 황진이의 간절한 사랑은 외면했다. 서경덕이 죽고난 후 황진이는 그를 그리며 노래한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있을 손가

주야로 흘러 드니 옛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아니 오는구나

 

산은 오래돼도 그대로 있지만 물이야

밤낮으로 흐르니 옛물일수는 없겠지

사랑하던 님도 저 물과 같구나 한번가니 돌아오지 않는구나.

황진이(黃眞伊)를 연모하던 유명인사는 많았다.

‘청산리 벽계수야’로 유명한 시조의 벽계수(碧溪守)가 있다. 그는 조선조의 종신(宗臣)으로 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특히 여자를 멀리했는데 황진이의 명성을 듣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칠 정도였다.

어느 날 벽계수가 밤중에 송도 만월대를 산책한 후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가려 하자 황진이가 그를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倒滄海)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한데 쉬어간들 어쩌리

 

푸른산 속 시냇물아 흐르기 쉽다고 자랑하지마라 흐르고 흘러 흘러 바다로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데 달 밝고 한적한 이곳에서 잠깐 쉬어 간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 .

자신을 못본 채 하며 돌아가는 선비 벽계수(碧溪守)를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碧溪水)로 비유하고 밝은 달 명월(明月)을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明月)로 바꿔 표현했다. 정말 놀라운 천재(天才)가 부럽다.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篳談)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황진이(黃眞伊)는 송도명기다. 미모와 예술과 재능이 출중해 온 나라에 이름이 퍼졌다. 당시 종실에 벽계수란 이가 있어 황진이(黃眞伊)를 한번 만나 보고자 했으나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벽계수는 주변인물 이달(李達)에게 황진이와의 만남을 부탁했다. 이달은

“진이(眞伊)를 한번 보려거든 내말대로 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벽계수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라고 답했다. 이달(李達)의 주문은

“ 어린 동자에게 거문고를 들고 따르게 하고 당신은 작은 나귀에 올라 황진이집 앞을 지나 집 근처 누각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그녀가 와서 옆에 앉을 것이니 관심이 없는 듯 본체만체 일어나 돌아오시오. 황진이가 당신 뒤를 따를 것이요. 뒤돌아보지 않으면 일이 성사될 것이고 돌아보면 허사가 될 것이요”

벽계수는 이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이달(李達)의 말과 같이 황진이가 뒤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벽계수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제는 됐구나 하고 희열을 느끼며 능청스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청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벽계수는 이 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나귀에서 떨어졌다. 이를 본 황진이가 소리내어 웃으면서

“명사(名士)인줄 알았더니 한낱 풍류남(風流男․바람쟁이)이군”

하고는 그길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근엄한 선비 벽계수는 부끄러워 어쩔줄 몰라했다 고 전한다.

황진이는 이미 벽계수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나갔던 황진이는 벽계수의 도도함에 어쩌면 하고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확인 한 방법 즉 아무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기품있는 방법에 벽계수가 넘어갔다.

헤프지 않은 몸가짐, 골라서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 그래서 황진이를 명기라고 했나보다. 반면에 순간, 천길 낭떨어지로 추락한 벽계수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에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타락과 방종에 찌든 땅에서 한줄기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령은 약속의 땅에 도달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한 여인이 뒤를 돌아 본 순간 그녀는 소금기둥으로 변한다.

조금만 참고 순간을 이겨내면 더 큰 행복이 다가오는데도 이를 못참는 남자의 조급함이여, 통한의 아쉬움이여...

황진이는 자신이 정복할 수 있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자신이 사랑을 바쳤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났다.

황진이의 첫사랑은 부운거사 김경원이다. 그 김경원을 그리며 쓴 한시가 있다.

 

별김경원(別金慶元)

相思相見只憑夢 생각고 보고픈 마음 만날 길은 다만 꿈길 뿐

濃訪歡時歡訪濃 임을 찾아가 반겨할 땐 임이 나를 찾아오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컨대 이후부터는 서로가 어긋나는 꿈길을

一時同作路中逢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그립고 야속한 사람, 떠나버린 첫 남자 부운거사를 만나는 길은 꿈길 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을 만나려 꿈길로 나서면 당신도 나를 찾아 꿈속을 헤맨다. 결국 매번 서로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기만 한다.

다음부터는 아예 서로 같은 시간에 같은 꿈을 꾸어 꿈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오죽이나 좋겠냐는 것이다.

부운거사도 거사지만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서 사랑했던 사람은 판서 소세양이었다. 소세양과 이별할 때 지은 시다.

 

정별양곡소세양

月下庭梧盡 (월하정오진) 달빛어린 뜰에는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서리속에 들국화 시들어 가네.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누대는 높아서 하늘에 닿고

相盞醉無限 (상잔취무한)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구나.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냉) 차가운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今日相別後 (금일상별후) 오늘 우리가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 (억군벽파장)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에는 소세양과 천수원에서 놀던 때를 잊지 못하여 떠나려는 소판서를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 있다.

'오늘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로 끝맺은 진이의 정성에 소판서도 하룻밤을 더 머물면서 사랑을 불태웠다.

그녀가 소세양을 그리며 지은 시조다.

 

어저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다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정이란 그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그리워지는 법인가?

아아 내 일이면 또 그리워 질줄 몰랐던가.

있으라고 붙잡았다면 굳이 버리고 갔을까마는

보내 놓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정을 나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그리워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양곡 소세양이었다. 떠나는 양곡 대감 소세양을 보내고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가슴 속에 듬뿍 담은 가련하고 애절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황진이는 그녀의 출생이 신비롭듯이 그녀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유언에 관한 이야기가 성옹직소록에 보인다.

죽음을 앞둔 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후회도 원망도 없는 고요한 체념관으로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명기다운 얘기이나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고 한 것을 보면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의 자학의 채찍이기도 했다.

황진이가 죽고 난 뒤에도 이야기가 있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호남아이며 당대의 한량이었던 백호 임제가 평안평사로 부임하던 길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황진이를 찾는더.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뒤라 백호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노래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뭇쳣는다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어여쁜 얼굴 어디두고 백골로 묻혔는가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사모하던 사람도 죽어 잡초 우거진 무덤에 백골만 묻혔구려 하며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는 애끓는 심정을 표현했다. 사실 황진이는 백호보다 11살 위였다. 그리고 살아서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술잔을 올렸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다. 이 후 백호는 벼슬길을 스스로 버리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황진이(黃眞伊)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각자였다. 본능을 감추고 감정을 숨겨야 정숙하고 존경받는 여자요 현모양처가 지상 목표였던 시대에 황진이는 이미 자신의 뜻을 적나라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신여성이었다.

물론 아무도 알지 못한 사정 때문에 기방에 몸을 담았지만 ....

감출 듯 뒤돌아선 듯 하면서도 은연중에 과시할 줄 알았던 우리민족, 그것도 한 많은 가련한 처지의 여성이 만들어낸 우리민족의 눈물과 감성을 볼 수 있다.

황진이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과감히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남다른 용기가 있었다. 권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상대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신 사고의 여성이었다.

황진이는 27세 때 선전관이며 당대 명창인 이사종(李士宗)을 만난다. 황진이가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스승 화담 서경덕이 죽고 난 후, 진이는 스승이 생전에 거처하던 서사정 초당에 자주 들러 옛날을 회상하곤 했다.

그날도 화담의 거처를 들렸다가 오는 길에 송도의 절경 박연폭포와 송악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이사종을 만난다. 명사를 알아본 황진이는 그와 함께 6년을 보낸다.

어우야담(於于野潭)에 이런 글이 있다.

황진이와 이사종은 뜻이 맞아 함께 지냈다. 황진이는 전재산을 정리하였고 두사람은 황진이 집에서 3년을 살고 이사종집에서 3년을 살았다.

기생과 유부남의 이같은 행동을 지금도 이해못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 옛날 그들은 수세기의 사고를 뛰어 넘어 계약결혼을 한다.

자신을 탐하는 뭇 남성들의 거짓사랑보다 자신이 원하는 남자의 품에서 가정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사종과 함께 마치 그의 아내처럼 신혼같은 6년을 보낸 황진이는 이사종의 임기만료로 헤어지게 된다.

이사종이 서울로 복귀할 때 그녀는 눈물로 그를 보낸다. 그리고는 밤마다 그가 그리워 애를 태운다. 찬바람이 휘몰아 친 동짓달 어느날 밤, 황진이는 언제 다시보게 될지 모르는 이사종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 둘을 내어

춘풍(春風)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임없이 홀로 보내야 하는 밤은 너무 길고 지겨우니 싹둑 반으로 자른다음 사랑의 불꽃을 태웠던 바로 그 이불속에 넣었다가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는 날 아쉬운 밤의 길이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황진이는 시간을 공간화할 줄 알았고 공간을 시간화할 줄 알았다.

이 은유의 천재는 여유있는 과거를 남겼다가 부족한 현재에 쓸 요량으로 동짓달의 그 밤시간을 반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또 자신과 이사종이 정열의 불을 태웠던 그 이불속에 잘라낸 시간의 반을 묻었다. 황진이는 이사종과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생각만은 황홀했던 그 이불속에 함께 있었다.

어찌 인간이 마음대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을까마는 우리의 황진이는 해냈다. 독수공방 지겹고 아쉬운 밤의 길이를 그녀 마음대로 자르고 이어 버렸다. 멀리있는 연인이 그날 밤을 회상토록한 절묘한 이 방법은 그녀가 아니면 그 누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 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의 시조와 별김경원 別金慶元· 영반월 詠半月· 송별소양곡· 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 박연 朴淵· 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 어우야담· 송도기이 松都紀異· 금계필담 錦溪筆談· 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 중경지 中京誌· 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기생 홍장(紅粧) 이야기

기생 홍장(紅粧)은 강릉기생이다. 당시 강릉 기생 2백여명 가운데 가장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런 글이 있다.

고려 우왕시절 강원감사 박신(朴信)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떠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경포대 한송정에서 송별연이 열렸다.

강릉부사 조운걸(趙云杚)이 박신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그동안 감사영감이 좋아했던 기생 홍장이 이별이 서러워 애태우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말한다.

이 말에 술잔을 받아든 박신의 얼굴이 금새 어두워진다.

박신은 한참동안 조용히 술잔만 쳐다보고 있다. 조부사는 침울해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기생들에게 권주가를 부르라고 명한다. 그래도 박신의 얼굴은 펴지지 않은 채 경포호만 응시한다. 기생들이 곁에서 술잔을 권해도 박신은 그대로다. 조부사가 묻는다.

“ 감사영감은 무얼 그리 보고 계시오”

“아, 아니오 술잔에 비친 달을 보고 있소이다”

엉겁결에 박신이 둘러댔다. 곁에 있던 기생 선옥(仙玉)이 토를 단다.

“감사님, 이 한송정에서는 동시에 달을 다섯 개 볼 수 있답니다.”

“아니 달이 하나지 어찌 다섯이나 되느냐.”

그러자 선옥은

“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한송정에 오르면 달이 다섯인데요. 하나는 하늘에 떠있는 달 또 하나는 경포호에 비친달, 다른 하나는 지금 감사님이 보고 계신 술잔에 뜬 달, 또 다른 하나는 앞에 있는 제 눈에 비친 달, 마지막 하나는 감사님이 맞춰보세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신은

“네 재치가 대단하구나, 그런데 그 답을 모르겠다”

하자, 선옥은

“ 감사님 마음에 떠있는 달입니다.”

바로 홍장을 지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박신은 속내를 들킨 것처럼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바로 그때 경포 호수위에 작은 배한척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달빛아래 하얀 수염과 백발을 한 늙은 사공이 노를 젓는 배 위에 한 미인이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박신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니 하늘에서 내려왔는가, 경포호에서 솟았는가, 두 눈을 꿈벅이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니 평소 마음을 두었던 홍장이 아닌가.

자신이 떠나는 것이 서러워 목숨을 끊었다던 바로 그녀였다.

조부사가 장난을 친 것이었다.

박신은 자(字)를 경부(敬夫), 호를 설봉(雪峰)이라 하며 본관은 설봉으로 공민왕 11년에 태어나서 세종 26년까지 산 사람이다.

포은 정몽주 밑에서 공부하였고 고려가 망하기 7년 전인 1385년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 형조 정랑을 지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승추부좌승지로 발탁되어 관로가 트이기 시작하여 1404년 개성유후, 한성부윤을 역임하였으나 한때 대사헌이 되어 언사로써 왕의 비위를 거슬려 아주현에 귀양가기도 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선공감 관리가 저지른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동안이나 통지현에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났다.

그가 강원 감사로 있던 기간은 비록 짧았으나, 그곳에서 만난 홍장과의 관계는 실로 깊은 애정 그것이었다. 박신과 홍장은 며칠간 강릉에 더 머물면서 정염의 불길을 태운다. 그러나 박신은 돌아가야 할 몸, 결국 박신은 서울을 향하고 혼자 남은 홍장은 노래한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세워보면 알리라

 

울며 가지 말라고 붙잡은 소매자락 뿌리치며 가지 마오.

보시오. 풀빛 푸른 긴 제방 뚝에 이미 해 저물었소.

주무시는 여관방에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밤 세워보시오.

 

당신을 향한 내 맘을 알게 되실 것이오.

어떻게 요즘 사람에게서는 이 같은 멋이 없을까.

아니면 나만 못 느끼는 것일까.

홍장은 애가 탔다. 한번 떠난 박신은 소식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설 형편도 아니다. 홍장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흥얼거린다. 자신이 기생이기 때문인가 하고 자학도 해본다.

 

기생과 양갓집 규수사이를 묻노니 다를게 뭐 있소

송죽같은 굳은 절개로 두마음 안 먹고자 맹세한다오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며 홍장은 박신을 그리워한다.

박신과 홍장과의 관계를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었다.

 

석양무렵에 현산의 철쭉꽃을 밟으면서 경포호로 내려가니,

십 리까지 뻗은 잔잔한 수면을 당기고 다시 끌어 당겨서,

낙락장송이 울창한 속에 마음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구나.

호수 속의 모래를 헤아리겠구나.

외로운 배를 매어 놓고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어 그 옆이 동해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호의 수면이여,

멀리 넓게 펼쳐진 동해 바다여!

여기보다 경치가 더 잘 갖춰진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옛날 박신과 홍장의 고사가 야단스럽기도 하구나.

 

온갖 유혹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고매한 정신 자세로 마음을 다 잡으며 살아 왔던 홍장이었지만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자신을 조소하기도 했다.

차라리 한 남자에게 깊은 정을 주지 말 것을…

때로는 성숙한 여인의 정염을 못이겨 몸부림치고 또 어떤 때는 독수공방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아무나 넓고 따뜻한 남정네의 품에 안겨버릴걸 하는 회한이 머리를 들곤 했다.

그러나 홍장은 절개를 지키면서 박신을 기다렸다.

조선 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고 또한 많은 여성이 기생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두 가지 제도는 모두 양반 남성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피 지배계층 여성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반이나 한량들의 가무 음주 자리에 불려 나온 기생들에게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초조감이 쌓이던 그리움의 1년이 지난 이듬해 여름.

박신이 순찰사가 되어 강릉에 들러 홍장의 일편단심과 굳은 절개를 알고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측실을 삼았다.

한결같이 사랑에 목을 매었던 홍장의 염원은 이뤄졌다.

박신과 조운흘은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친교가 두터웠다. 박신은 경포대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훗날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조운흘에게 보낸 시가 남아 있다.

증조석간운흘박혜숙신(贈趙石磵云屹朴惠肅信)이 그것이다.

 

소년시절접관동(少年時節接關東) 내 일찍 젊어서 관동에 갔던 그 추억

경포청유입몽중(鏡浦淸遊入夢中) 경포호의 놀던 모습 꿈 속에도 완연타오.

대하란주사우폄(臺下蘭舟思又貶) 그곳에 배를 띄워 또 한 번 놀고 싶소만

각혐홍분소쇠옹(却嫌紅紛笑衰翁) 아가씨들이 늙은 나를 웃을까봐 두렵소.

 

 

 

 

임제(林悌)의 사랑이야기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제(林悌)는 자(字)를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또는 겸재(謙齋)라 하며 본관은 나주이다. (참고로 본인의 선조되시는 어른임)

절도(節度) 진(晋)의 아들로 명종 4년(1549)에 나서 선조 20년(1587)까지 산 사람이다. 선조 9년에 생원 진사에 급제, 1577년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정랑 겸 지제교에 그쳤으나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탁월하며 시를 잘 쓴 풍류남이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그의 인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벼슬에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선비들은 그를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사귀기를 꺼려 하였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서로 취하였다. 일찍이 그는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大谷) 성운(成運)에게 사사(師事), 이율곡, 허균, 양사언 등과 교우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 소설사에서 화사(花史)라는 가전체소설(의인소설)을 써서 의인문학(疑人文學)의 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씨 조선의 대표적 멋쟁이요 한량(閑良)이었다. 40을 못채우고 요절했지만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정화(情話)를 뿌리고 간 사람이다.

한 번은 임제가 좋아하는 기생에게 부채를 선사하였다. 부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막괴융동증선지(莫怪隆冬贈扇枝)엄동에 부채를 선사하는 이 마음을

이금년소기능지(爾今年少豈能知)너는 아직 나이 어려 그 뜻을 모르겠지.

상사반야흉생화(相思半夜胸生火)그리워 깊은 밤에 가슴에 불이 일거든

독승염증육월시(獨勝炎蒸六月時)오유월 더위같은 불길을 이 부채로 식히렴

 

그는 한시문에 능하여 백호집(白湖集)에는 주옥같은 작품 700여수가 전하는데 막여정이간(莫如精而簡)이라 한 종제(從弟) 임서(林壻)의 후식(後識)을 보면 그는 양보다 질에 치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 6수를 남겼는데 모두가 여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다.

 

패강가(浿江歌)

패강아녀답춘양(浿江兒女踏春陽) 평양의 아가씨들 불놀이를 가는데

강상수양정단장(江上垂楊正斷腸) 강변의 수양버들 애를 끊게 하누나.

무한연사약가직(無限烟絲若可織) 하늘하늘 실버들로 비단을 짠다면은

위군재작무의상(爲君裁作無衣裳) 임을 위한 춤옷이나 지어서 드릴 것을

 

임제와 기생 일지매(一枝梅)와의 로맨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일지매(一枝梅)는 색향으로 이름난 평양의 명기였다. 그녀는 용모자태와 문장가무가 뛰어났는데, 그 만큼 성품이 매우 도도했다. 부(富)도 권력도 그녀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뭇 남성들이 그녀와의 하룻밤 염정(艶情)을 위하여 줄을 서는 상황이었다.

어느 해 여름, 임제가 평양에 들렀다. 일지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시재(詩才)를 동원하여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남루한 생선장수차림으로 황혼 무렵 그녀의 문전을 찾아 몸종과 생선을 흥정하는 체하며 시간을 끈다.

마침 날이 어둑해지자 그 집 문간방에서 하루 저녁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스름한 저녁, 홀로 쓸쓸한 방에서 팔을 베고 누워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달이 떴는지 때마침 교교한 달빛이 창살에 흘러 들고 있다.

그때 낭랑한 거문고 소리가 달빛을 타고 들려왔다.

그날 따라 연회가 없어 홀로 있는 밤은 일지매에게 못 견디게 외로웠다. 밤이 깊자 엄습하는 고독이 그녀로 하여금 거문고를 희롱하게 했다. 적막한 달밤의 청아한 거문고 소리는 임제의 방에까지 흘러들었다. 임제는 이때다 싶어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 거문고 소리에 화답했다. 절세의 화음이 여음을 남긴다.

놀란 것은 일지매. 자신의 거문고 소리에 화답한 사람은 누구일까?

일지매는 끌리듯 뜰에 내려섰으나 기척도 없다. 담장 너머를 쳐다보며 기웃거려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그냥 섬돌 위에 올라서는 일지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며 탄식이 새어 나온다.

일지매가 혼자 말한다.

"원앙금을 누구와 함께 잘까...."

"나그네의 베갯머리 한 끝이 비었는데...."

임제가 즉각 대답한다. 일지매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문간방에 든 사람은 분명 생선 장수였는데..

틀림없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문간방 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건넨다.

"어인 호한(好漢)이 아녀자의 약한 간장을 녹이는고...."

새 옷을 갈아 입은 한량과 술상을 사이에 둔 일지매,

정담(情談)과 화창으로 밤 가는 줄 모른다.

훗날 임제가 평안평사가 되어 부임하면서 황진이를 찾았는데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단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그리고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했다.

 

견송도명기 황진이총상 작사조지(見松都名妓 黃眞伊塚上 作詞弔之)'

 

이 기록이 해동가요에 실려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뭇쳣난다.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하노라

 

이 작품에 대해 유몽인의 ‘어우야담’ 에는 백호(白湖)가 진이(眞伊)의 무덤에서 제사를 모실때 부른 노래란 기록이 있다.

 

금송도대로변(今松都大路邊) 유진이총(有眞伊塚)

임자순(林子順) 위평안평사(爲平安評事)

위문제진이(爲文祭眞伊) 졸피조평(卒被朝評)

 

송도 길가에 황진이 묘가 있어

평안평사 임자순이 글을 지어 제를 올렸다.

이로 인해 조정의 비판을 받았다.

지난날 술잔을 들며 시로써 화창했는데 타계하여 무덤엔 잡초만 우거졌구나. 아, 허망한 인생. 그 아름답던 자태, 그 청아한 노랫소리, 눈에 삼삼하고 귓가에 쟁쟁한데 정녕 그대는 죽었단 말인가?

아니면 나를 놀래 주려고 짐짓 누워 있는 것인가?

임제는 유명한 문장가이다. 전해오는 것은 한시(漢詩)뿐만 아니라 시조 6수가 있다. 이 시조들은 대부분 여인네들과 사랑의 시다.

임제는 기생 한우(寒雨)를 좋아했다.

한우는 재색을 겸비해 시와 글에 능했으며 거문고와 가야금이 뛰어났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고 한다. 임제와 한우는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났다. 시를 논하면서 술잔을 나누다가 임제가 노래를 부른다.

 

북천(北天)이 맑다 해서 우장없이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가 내린다.

오늘은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북쪽하늘이 맑아서 비옷도 준비하지 않고 길을 나섰더니만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내리는구나. 오늘 차가운 비를 맞았으니 얼은 상태로 자야할까보다.

찬비는 기생 한우(寒雨 찬비)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우가 이 노래를 듣고 즉시 화답한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왜 얼어잡니까, 무슨 일로 언채로 주무십니까,

원앙요와 비취 이불이 여기 다 있는데 얼은 몸 그대로 어찌 잡니까.

말도 안되는 말씀 마시고 오늘 나와 함께 당신의 찬몸을 녹이시지요

라고 답한 것이다.

임제는 한량이요, 풍류를 아는 남자였다.

찬비(寒雨)를 맞았으니 얼은 채로 잘까하고 넘겨짚은 것은 네가 맞아주지 않으면 혼자 고독하게 잘 수밖에 없구나 하는 확신에 찬 응큼한 복선(伏線)이었다.

그러자 한우는 오늘 나(寒雨)여기 있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소. 나 보러 오셨으니 함께 정열을 불태워 언 몸을 녹이면 될 것을 하고 호방하고 정겹게 마음을 열어준다.

과연 어느 여자가 이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의 뜻을 확인한 남녀의 밤은 정말 뜨거웠을 것이다.

말을 알아 듣는 꽃, 해어화(解語花). 우리조상들은 직설적 화법보다는 은유적 화법에 통달한 언어의 달인(達人) 들이었다.

한우는 일개 기생이 아니었다. 당대의 문인이요 대단한 풍류남을 상대해 이렇듯 교묘하게 받아넘길 수 있는 정열의 시인이었다.

한우는 정말 정많고 순발력있는 여성이었다.

그런 어른들이 살았던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각박해 졌는지...

감정조차도 마를 대로 말라버린 정없는 세상이여...

 

 

 

 

정철(鄭澈)과 기생 진옥(眞玉)이야기

송강(松江)은 정철(鄭澈)의 호다.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大家)다.

중종31년인 1536년 태어나 선조 26년 1593년에 죽었다. 그의 부친과 조부가 병조판서, 김제군수 등을 지낸 유명한 집안출신이다. 큰 누님이 인종의 귀인이었고 둘째 누님은 계림군의 부인이다.

송강의 나이 10세 때 매부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몰려 처형되고 부친은 유배되었다. 그런 그가 명종16년 16세로 진사시험에 1등으로 관로에 오른다.

정철은 성격이 강직, 결백해 법을 고집하고 바른소리를 잘해 명종의 비위를 자주 거스려 고관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한다. 그 후에도 정철은 당쟁에 휘말려 어려운 관직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정송강여진옥상수답(鄭松江與眞玉相酬答)이란 기록이 있다. 정송강과 기생진옥이 주고받은 이야기란 말이다.

송강이 56세 때 이산해의 계락에 빠져 혼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된다.

그를 파직시켜 유배 보내면서 선조는 정철을 향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져 있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안타까워 했다.

선조가 56세의 늙은 재상에게 이렇듯이 노골적으로 꾸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철은 술과 여자에 심하게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한 때 율곡 이이도 그에게 제발 술을 끊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술을 좋아하였던 송강은 취하면 그 취기를 바탕으로 그 같이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를 뽑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배된 그는 진주와 강계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57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기도 하였다.

유배지 강계에 있을 때 만난 아릿다운 여인이 바로 노재상의 말년을 쓸쓸하지 않게 위로해준 진옥이라는 미모와 재기 발랄한 기생이었다.

송강이 거처하는 방이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은 누운 채로 대답했다.

문이 열리며 소리 없이 들어서는 여인, 그녀가 진옥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방문에 놀란 것은 송강.

더욱 놀란 것은 장옷을 벗고 보인 화용월태의 아름다움.

잘 손질한 모시옷의 우아함은 한 마리의 백학이었다.

침침한 불빛에 비친 얼굴은 화려하게 화장하지 않았다. 그 소박한 얼굴의 주인이 미소를 머금고 깍듯이 예를 드린다.

송강은 어안이 벙벙하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일이 졸지에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미인의 방문이었다.

"죄송하옵니다. 버릇없는 당돌함을 용서해 주옵소서."

"아아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어찌된 일이오?"

"예, 소첩은 진옥이라 하옵고, 기적에 몸담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이 밤중에 어인 일인고?"

"예, 벌써부터 대감의 명성을 들었사옵고, 더욱이 대감의 글을 흠모해 오는 천기이옵니다."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노?"

"제가 가야금을 타 올릴까요?"

"......"

거세부지세 (居世不知世)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대천난견천 (戴天難見天) 하늘 밑에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지심유백발 (知心惟白髮)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뿐인데,

수아우경년 (隨我又經年)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송강은 놀랐다. 이 여인이 강계에 와서 고통스런 심정을 읊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가야금을 타고 있지 않은가.

송강은 진옥의 아름다움에 첫 번째로 놀랐고, 자신을 알고 있는 진옥에게 두 번째 놀랐다. 또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진옥에게 세 번째로 놀랐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웠던 송강의 적소생활은 달라졌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진옥의 샘솟는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름을 잊게 되었고 그녀의 가야금의 선율을 들으면 헝클어졌던 마음이 가라안고 우울함을 달랠 수 있었다.

송강 앞에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었다. 시와 가무에 능한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송강은 이런 진옥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송강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예, 부르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

진옥은 말없이 거문고의 줄을 고른다. 정철은 목청을 가다듬어 읊는다.

 

옥이 옥이라 해서 반옥(반玉)인가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 볼가 하노라

 

정철의 노래가 끝나자 거문고에 손을 올린 채로 진옥이 지체 없이 받는다.

 

철(鐵)이 철(鐵)이라 해서 섭철(섭鐵)인줄 알았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정철은 놀랐다. 송강의 시조에 자자구구 대구 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진옥, 그녀는 정녕 뛰어난 시인이었다. 두 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뛰어난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모조 옥(玉), 진옥(眞玉)은 참옥(玉)을 말하고 기생 진옥(眞玉)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살송곳은 살(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는데, 진옥은 쉽게 그 뜻을 알아낸 것이다.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뜬다.

반옥에 대해서 섭철(鐵), 진옥(眞玉)에 대해서 정철(正鐵), 살송곳에 대해서 골풀무의 대(對)는 놀라운 기지와 재치와 해학이다.

섭철(鐵)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요, 정철(正鐵)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를 뜻한다.

철은 송강 정철(鄭澈)의 이름을 가리키고 골풀무는 불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다. 이것은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性器)를 은유하고 있다. 이만하면 문자 그대로 뛰어난 명기(名妓)이다.

이날 밤, 송강과 진옥은 뜨겁게 정염을 불태웠다.

송강의 살송곳이 진옥의 골풀무 속에서 완전히 녹아져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보다도 골풀무라는 표현을 썼을 뿐 실제로는 진옥의 젊은 육체는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활활 타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쉰여섯 노 재상 송강의 건강을 무엇보다 염려했던 진옥이 부드럽게 골풀무의 불살을 조절했으리라.

진옥은 본래 무명의 강계의 기녀였다. 그녀가 무명의 기생으로서 일약 이름을 떨친 것은 어쩌면 강계에 유배된 송강을 가까이에서 모신 인연이 계기가 되어 송강의 명성과 더불어 빛이 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송강은 강화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였고 송강 자신도 주중사객(舟中謝客)에서 ‘반백 인간이 술에 취하고 이름을 얻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청춘 남녀들이여, 하룻밤 풋사랑을 하더라도 멋을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여유와 낭만을 가져라.

 

 

 

 

성종(成宗)과 기생 소춘풍(笑春風)이야기

성종을 일컬어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 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낮에는 중국의 요(堯)와 순(舜) 임금처럼 선정을 베푸는 지혜로운 왕이지만 밤이 되면 하나라의 걸(桀) 임금이나 상나라의 주(紂) 임금처럼 주지육림에 빠진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심지어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어우동은 왕실 종친들과 많은 관료들과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과 잠자리를 가졌던 어우동이 이번에는 노비와 간통을 했다. 임금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반상의 질서를 깨뜨려 버린 사실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자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렵고 한편으로 매우 괘씸하게 여긴 성종이 교부대시(絞不待時)라 해서 시간을 끌지 않고 즉각 의금부에 명해 어우동의 목에 올가미를 메어 사형시켰다.

성종임금의 주연과 여색에 탐취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이다.

왕은 의정부, 육조판서, 경연당상, 승지, 홍문관, 예문관 등 고위관료와 더불어 장악원에서 달 구경을 하는 중, 마침 구름이 달을 가리자 야음을 이용하여 승지 조극치(曹克治)가 기생과 성행위를 벌렸다.

성종도 이를 알았으나 자신이 워낙 여색을 탐하는 성정인데다 남자의 허리아래 일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여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성종은 전국에서 미모가 빼어나고 가무의 자질이 뛰어난 기생들을 뽑아 서울로 불러 올리게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뽑혀 올라 온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고 한다.

그때쯤, 풍자와 해학과 기지가 뛰어난 영흥기생 소춘풍에 대한 소문이 널리 한량과 양반들 사이에 퍼졌다. 이 소문은 성종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종은 소춘풍을 불러 올리게 한다.

서울에 뽑혀 온 소춘풍은 그때부터 궁중곡연(宮中曲宴)에만 참석, 성종과 고관대작들을 상대하여 더욱 이름을 떨쳤다. 연회 중 좌중을 사로잡는 소춘풍의 해학과 기지는 성종의 아낌과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고 모든 대신들도 그녀의 뛰어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성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간 소춘풍은 의아했다. 궁중에 회연이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들어왔으나, 그런 기미는 전혀 없고 보좌에 앉아 있는 성종의 용안이 그날따라 더욱 쓸쓸해 보였다.

"상감마마, 오늘은 무슨 연회이옵니까?"

"아니다. 오늘은 연회가 없다."

"그러하오면?"

"음, 오늘은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 너를 불렀느니라."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게 한 성종은 평소보다 더욱 다감하게 소춘풍을 대했다. 약주 몇 잔을 든 성종은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로

"오늘은 너와 같이 지내고 싶구나"

하고 그윽한 눈빛을 보낸다. 소춘풍은 예상을 안한 바는 아니나 갑자기 대답할 말을 잊는다. 아무리 그 음성이 부드러울지라도 지엄한 왕의 명을 거역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소 흠모해마지 않았던 왕을 하룻밤만이라도 모시고 싶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그 하룻밤의 인연으로 하여 왕의 법도를 따라 평생 규방의 외로움을 참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춘풍이 말없이 머뭇거리자

"왜 마음이 내키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그 대답이 애매하구나"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소춘풍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종의 풍류와 남녀간의 상사지정에 관대함을 알고 있는 그녀는 용기를 내었다.

"황공하오나.... 오늘 성상을 뫼시면 그 후부터는 평생 감당키 어려운 많은 구속을 받으며 살아야 할 일이..."

"음, 네 말이 맞구나. 과인은 일국의 군주이지만 인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너는 인생의 군주로구나."

"......"

"알았다. 지금의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술이나 마음껏 마시자."

쓸쓸한 성종의 모습을 올려다 보면서 군주만 아니었다면 하는 마음을 몇 번이고 되뇌이는 소춘풍이었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늦은 밤에 어떤 한량이 소춘풍을 찾이왔다.

"여봐라, 이 집이 천하의 명기 소춘풍의 집이냐?"

소춘풍은 어둑한 마당에 서 있는 나그네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어찌 아시고 저을 찾으셨나이까?"

"하하, 천하 한량을 자처하는 내가 천하 명기 소춘풍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느냐?"

등불을 밝힌 소춘풍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하하하, 너무 놀라지 말아라. 오늘은 대궐이 아닌 너의 집, 임금이 아닌 지나는 한량의 자격으로 너를 찾은 것이니 달리 생각 말아라."

"하오나..."

"허허, 걱정 말래두. 꽃을 찾아온 한 마리의 나비라지 않느냐? 어서 주안상이나 가져오지 않고 뭘 그리 당황하느냐?"

"네...."

불을 끄고 금침에 들었다. 성종은 팔을 뻗어 소춘풍의 손을 더듬어 잡고 살며시 끌어다 가슴에 안았다.

"나는 13살 철없는 나이로 왕이 되어 20여 년간 권세와 아첨 속에서 허깨비로 살아 왔다. 오늘 저녁 너로 하여 나 자신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다시 없는 기쁨을 맛보고 싶구나. 군왕이 아닌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겠느냐?"

"오직 황공하올 뿐이옵니다"

그날 밤, 성종과 소춘풍은 군주와 천기로서의 신분이 아니라,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의 신분, 아니 한 사람의 풍류남아와 정염에 가슴 설레는 기생으로 밤새는 줄 모르는 사랑을 불태웠다.

다음 날 새벽, 소춘풍의 집을 나서는 성종은 이렇게 다짐을 받는다.

"오늘 이후도 전과 다름없이 궁중회연에 참석하여 주겠느냐?"

"여부가 있사옵니까. 다만 오늘 이후부터는 군주를 뫼시는 기녀로서 뫼시겠사옵니다."

그 후에도 성종은 궁중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소춘풍을 불렀다. 그녀도 전과 다름없이 발랄하게 행동하였다.

일개 천기(賤妓)의 몸으로 군왕(君王)을 모시고서도 속박의 몸이 되기를 거부한 여인. 인생을 자유분방하게 산 기녀, 그녀가 소춘풍(笑春風)이다.

소춘풍은 ‘봄바람을 웃는다’는 뜻으로 그것은 '잠깐 봄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을 우습게 본다'는 뜻도 되고 달리 보면 '세상사 봄바람처럼 덧없다는 달관한 자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함경도 두메산골 마을에 홀로 사는 과부가 있었다. 원체 박색이어서 그 과부를 업어 가려는 사람도 없어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과부는 누구든지 원하는 남정네한테는 몸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석양 무렵 칠십이 다 된 늙은 탁발승이 과부의 집에서 머무르기를 청했다. 그날 밤 노승은 과부와의 동침을 요구하며 어젯밤의 꿈 얘기를 했다. 꿈에 만경창파가 눈앞에 전개되거늘 잠시 후에 그 망망대해 한 복판에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오르더니 그 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꽃이 자꾸만 커져서 바다 전체가 꽃 한 송이로 가득차 버렸다는 것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 과부도 그 전날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산 속에서 웬 백발 노인이 과부에게 연꽃 한 송이를 주며, 집에 가지고 가 정성스럽게 키우라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본래 남자라면 젊은이든 늙은이든 가리지 않았던 과부는 그날 밤 노승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노승은 떠나면서 애가 태어 난 후에는 상관없으나, 애가 태어나기까지는 일체의 외간 남자를 삼가라는 다짐을 했다. 떠나는 노승에게 과부는 이름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어느 절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떠도는 몸이라고만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과부는 그날부터 일체의 남자를 거절하고 몸을 정히 하여 어린애를 낳았는데 태어난 아이가 소춘풍이다.

이렇게 하여 성도 이름도 모르는 늙은 탁발승에게서 태어난 소춘풍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모가 뛰어났고 머리가 총명하였다. 5살 때부터 쌍용사의 선원에서 글과 불경을 배웠고 열 살이 지났을 때에는 불경에 무불통지(無不通知)했다 한다. 그녀가 12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쌍룡사의 중들이 입적하기를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있다가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어느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영흥으로 오게 되었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교방에서 기생 수업을 하던 중 동기(童妓)가 15,6세가 되면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여 성인지례(成人之禮)를 올려야 했는데,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높이 산 많은 부자들이 서로 많은 돈을 내고 머리를 얹어 주겠다고 나섰으나 그녀는 수양모의 권유는 물론 많은 부자들을 뿌리치고 스스로 가난한 선비를 택하였다고 한다.

돈은 나중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소춘풍은 고이 간직해온 첫 순정만은 돈으로 살려는 남자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깊은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평생에 처음이자 한번인 순정을 바치는 것이라면 비록 기생의 신분이라 하지만 아무나 하는 사랑 아무나 하는 이별처럼 하고 싶지 않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 따랐다고 보여진다.

그 후에 명성이 높아질수록 돈 많은 한량들이 문전에 줄을 이었으나,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와도 풍류를 모르는 남자에게는 절대로 몸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 풍류를 아는 한량만은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성종은 군신들과 자주 술자리를 하면서 즐겼는데 한번은 소춘풍에게 행주(行酒)를 하게 했다. 행주란 임금대신 군신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술을 따르는 것이다. 소춘풍이 술잔을 들고 문신인 영상 앞에 나아가 잔을 권하며 노래한다.

 

당우(唐虞)를 어제본 듯 한당송(漢唐宋)을 오늘 본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저 설대 역력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 태평시대를 이룩한 요순시대를 어제 본 듯하고 중국문화의 바탕을 이룬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 문화를 오늘 본 듯 훤히 다 아는 선비들을 그냥 두고 제자리가 어딘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인武人들을 따르겠는가 하고 노래한다.

그러자 문신들은 좋아하지만 무신들은 화를 벌컥 냈다.

소춘풍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이번엔 무신 출신 병조판서 앞으로 가서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마오

문무일체(文武一體)인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앞에서 문신들에게 한말은 우스개 말이었소. 노여워 마시오, 문과 무가 하나인줄 나도 알고 있는데 훤칠하고 씩씩한 무관들을 아니 따르고 어쩌겠습니까 하자 무신들의 화가 눈 녹 듯 녹아버렸다.

소춘풍은 다시 한번 노래를 부른다.

 

제(齊)도 대국(大國)이요 초(楚)도 역대국(亦大國)이라

조그만 등국(藤國)이 간어제초(間於齊楚)하였으니

두어라 이 다 좋으니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제나라(문신)도 큰나라요 초나라(무신)도 역시 큰 나라입니다. 그사이에 조그만 등나라(소춘풍)가 끼었으니 등나라는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기겠소.

소춘풍은 조정의 내노라 하는 문무고관들을 울렸다가 웃겨버린 것이다.

한때 어색했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손자병법에 싸움이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긴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했다. 수만 백성위에 군림하고 수백번의 싸움에 이긴 재상과 장수들과의 싸움은 소춘풍이 들어서기 전 이미 소춘풍 승리였다.

소춘풍은 노래 한곡으로 이것을 확인 한 것이다.

소춘풍은 그저 노래만 불렀던 것이 아니다. 한낱 기생의 입담에 놀아난 고관들의 가련한 모습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종은 이 장면을 보고 비단과 명주 그리고 호랑이 가죽을 소춘풍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백성을 아끼고 성품이 어진 성종은 여색을 좋아했다. 영웅호걸이 주색을 싫어 하리오.

성종이 죽고난 후, 소춘풍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소춘풍은 자신의 고향집을 찾는다. 그러나 수양어머니 마저 세상을 뜬 뒤였다. 어머니가 가끔 말하던 운지대사를 찾아 석왕사에 갔으나 금강산 유점사에서 입적했다는 말을 듣는다. 어쩌면 그 중이 자신의 아버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낙을 잃어버린 소춘풍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주지스님에게 애원해 머리를 깎고 운지대사의 법사에 참석한다. 소춘풍의 법명은 운심(雲心). 그때 그녀 나이 28세였다.

누가 이런 여인을 보고 단순히 천한 기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요조숙녀도 이 같지는 못할 것이다.

충북 괴산출생 역사,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저서 조선여속고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유식한 여자들을 네 종류로 구분했다.

양반집 부녀자로 글을 아는 여자, 양반 댁 부녀자로 시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 양반집 첩실로 시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 그리고 교방기녀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자다.

이들을 시와 그림의 우열로 나누면 교방기녀가 첫째요. 양반첩실이 둘째, 다음이 양반부녀자가 되는데 이는 그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정감(情感)과 감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사대부 아니고는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 사람대접을 받는 순위는 사대부 남성, 양반여성, 서자녀, 양첩, 천첩, 양민, 기녀, 관노, 사노를 포함한 천인 순이다. 그런데도 최하 계층인 기녀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은 사대부들의 말을 알아듣게 만들어서 사대부 남성 그들이 즐기기 위해서 였다.

흔히들 기생을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른다.

그렇다고 기생모두가 해어화는 될 수 없었다. 돈과 색만 밝힌 창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규방 규수들이 집안 깊숙한 곳에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일부기녀들은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웃음과 몸을 팔았다.

기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고대부족사회의 무녀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이다.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시절, 사제인 무녀가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고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가와 결합해 근대의 기생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얘기다.

조선 중기 이후 기생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유교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과 예술이 기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황진이, 이매창 같은 명기들이 이름을 날렸다.

한편 조선 말기에는 기생들을 일패(一牌),이패(二牌), 삼패(三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일패는 전통 무가(舞歌)의 보존과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며 대부분 관기였다. 그들은 내부 규율이 엄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패는 밀매음(密賣淫)을 주로 한 기생들이고 삼패는 공창(公娼)기능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거금을 주고 소실을 삼고자 했던 친일파에게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한테 주라고 거절했던 진주기생 산홍(山紅)과 일본 경무총감이 독립군의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돈 뭉치를 주자 이를 뿌리친 춘외춘(春外春) 같은 애국심을 가진 기생도 있었다.

소춘풍 같은 여인은 일패중의 일패였음이 분명하다.

소위 해어화라고 불릴 수 있는 기생은 자기만의 특별한 재능과 의리, 나름대로의 정조와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유희경(劉希慶)과 기생 매창(梅窓)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성황산 서림공원입구에 매창시비(梅窓詩錍)가 있다.

지금은 매창공원이라 이름짓고 시비들이 모여있다.

이 비는 1974년 4월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시비의 주인공 매창은 선조 6년 1573년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소실에게서 태어났다. 그해가 계유년이라서 계생(癸生) 또는 계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본인이 스스로 매창이라고 이름지었다.

매창은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어려서 부친께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됐다. 아마도 어머니가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매창은 이름과 자(字),호(號)까지 가진 기생이었다. 기생신분인 매창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찝적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으며 겁 없이 앙탈을 부리는 남자들을 멋진 시구절로 물리치기도 했다.

매창은 죽은 후,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분신처럼 아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언덕을 지금도 매창이 뜸이라 부른다.

그녀가 죽은지 45년 후, 후세사람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그 후 13년이 지나자 매창의 시 수백편을 모아 고을 사람들이 목판을 깎아 ‘매창집’이라 이름짓고 개암사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한 여인, 그것도 화류계에 몸담았던 여성의 글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기록은 없다. 이 시집이 나오자 너무 많은 주문에 발행처인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17년 부안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음력4월이면 부안사람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조계의 대부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은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는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 사람들이 돌보기전에는 나무꾼들이 돌아가면서 벌초도 하면서 돌봤다고 한다. 유랑극단과 가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는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대시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기생 매창을 자신의 선배로 인식하고 예를 갖춘 것이다.

1974년 4월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시비를 다시 세웠다. 그녀의 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이런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에게 연인이 있었다.

바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다. 허균은 촌은을 가리켜 본시 천한 노예출신인데 성품이 청정해 주인 섬김에 충성스럽고 시에 능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원숙하고 순수했다고 밝혔다.

유희경(劉希慶)은 자를 응길(應吉), 호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로 조선조 대시인이요 유명한 학자이다. 효자로 유명했고 예(禮)와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에서부터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문의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가 됐고 광해군 때는 폐모 상소 올리기를 거부한 후,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이 유명한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기생 매창이다.

매창은 유희경의 시에 매료돼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어느 날 부사 이귀(李貴)로 부터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말 뜻하지 않은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당시 매창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한적한 곳에 초막을 짓고 거문고와 시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창은 즉시 부안으로 달려간다.

유희경은 닷새 후 부안에 도착했다. 매창을 본 유희경은 술자리에서 거문고를 재촉한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거문고의 음률은 50대에 접어든 유희경의 가슴속을 헤집고 다닌다. 유희경이 지긋이 눈을 감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유희경은 시한수를 지어 답을 하면서 거문고를 탄다.

 

일찍이 남국(남쪽)의 계랑(매창의 다른 이름) 이름을 들었는데

그녀의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들리더라

오늘 가까이서 얼굴을 대하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 하구나

나에게 신비의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수 있는데 금낭속 깊이 간직한 이약을

사랑하는 네게는 아낌없이 주리라

 

계랑이 화답한다.

 

내게는 오래된 거문고 하나 있다오

한번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기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이곡을 아는 이 없으니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소

 

신기로운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묘약은 과연 무엇일까.

쉽게 표현하면 사랑이지만 은유를 좋아하는 천재들의 표현 속에 감춘 의미는 무얼까.

한번 타면 온갖 정감이 생기고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르는 거문고 소리, 계랑이 말하는 그 의미는 또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그 약을 요즘 의미로 섹스라고 해도 좋다.

‘세상사람들이 모르는 노래’를 계랑자신의 육체로 해석해도 좋다. 아무에게나 헤프게 내돌리지 않던 은밀한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면 어떠랴.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다는 것을 당신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넘겨짚어도 좋다. 무어라 해도 좋다.

이날 밤 두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었다. 계랑의 나이 열아홉. 유희경은 50세.

50평생 근엄한 선비의 지조가 무너지고 오랫동안 굳게 닫쳤던 계랑의 문이 열렸다. 문풍지는 두사람의 거친 호흡에 펄럭이고 방안의 촛불은 정열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누가 만든 말이던가, 사람은 만나면 정녕 헤어져야만 하는가. 유희경과 매창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유희경의 한양 복귀로 헤어지게 된다.

청구가요에는 이런 글이 있다.

 

창밖에서 가마솥 구멍 떼우라고 소리치는 사람아

이별로 생긴 구멍도 메울 수 있는가

이 구멍은 본래 눈물이 흘러 흘러 영웅호걸들도 온갖지혜로 못 막았고

항우장사의 억센 힘으로도 막지 못했으니

실없이 다니면서 구멍 막는다고 하지마소

 

가슴속에 생긴 이별의 허전함을 메울자 누구인가.

사랑하는 님이 아니면 아무도 할수 없는 아픈 상처인 것을.

물론 유희경과 헤어지는 매창의 마음이 이랬을 것이다.

아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자신의 가슴속 구멍을 혼자만 느끼면서 매창은 유희경을 보낸다.

이별은 분명 서러운 것이다. 더구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헤어짐은 가슴이 메어지고 눈앞이 막막한 것이다. 평생에 언제다시 만날지 모른 채 헤어져야 하는 두 사람의 심정은 무슨 말로 적어야 할지...

촌은과 매창은 함께 열흘을 보냈다. 마침 내소사 구경을 함께하고 내려온 직후다. 부사 이귀(李貴)가 헐레 벌떡 달려왔다. 14만의 왜구가 침공해 왔다는 것이다. 7년간 끌어온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촌은의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나라의 위기를 보며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창의 존재는 아랑 곳 없었다. 매창은 사랑하는 님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촌은은 계랑의 눈물을 뿌리치고 전장으로 나선다.

대아(大我: 국가)를 위해 소아(小我:사랑)를 버릴 줄 아는 의인이었다.

사랑의 이별이 서러워 하늘도 운 것일까. 그날 부안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매창의 얼굴에는 빗물인가 눈물인가 구별할 수 없는 애닲음이 흘렀다.

계랑은 흐느끼며 노래한다.

 

울며 불며 잡은 소매 뿌리치고 가지마소

그대는 장부라 돌아가면 잊겠지만

소첩은 아녀자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촌은이 전장으로 떠난 후, 그를 잊지 못하는 매창은 몸져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점점 수척해저 가는 자신을 느끼며 붓을 든다.

 

이화우(梨花雨: 배꽃이 비처럼 쏟아짐) 흩뿌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은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촌은으로부터 연락이 없다. 그리움은 붓을 통해 시로써 승화하고 거문고 선율을 따라 공중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촌은이 떠난지 1년이 될 무렵이었다. 촌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통의 서찰이었다.

촌은으로부터 당도한 서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리 있어

나그네 시름겨워 잠조차 못 이루네

소식조차 전혀 없어 애간장이 타는데

오동잎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차마듣지 못 하겠네

 

매창은 촌은의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을 잊어버릴 그이가 아니라는 것 다시금 확인했다.

매창은 날이 밝자 남장을 한다. 부안에서 한양까지는 천리 길,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 것이다.

남자는 사랑 찾아 길을 떠날 때, 대부분은 백리 길을 가더라도 말 타고 기차타고 버스타고 갈 생각을 한다. 그것도 시간을 보고 여정을 계산하며 떠난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 버린 여자의 마음에는 계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님만 생각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열정이 여자를 강하게 한 것일까. 하지만 매창은 촌은을 만나지 못한다. 촌은은 이미 의병과 함께 전장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매창은 지친 몸을 이끌면서 허기진 사랑만 가슴에 품고 부안으로 돌아온다.

 

기러기 손으로 잡아 정들여 길들이고

님의 집 가는 길을 세세히 가르쳐서

밤중에 님 생각날 때면 소식전케 하리라

 

매창은 그리움에 지치고 지친 마음에 몸이 쇠약해졌다. 눈물로 촌은을 기다리던 그녀는 거문고를 뜯는다.

 

창오산이 무너지고 호수조차 말라야 이내시름 없을 것을

구의봉 닿은 구름 갈수록 더하구나

한밤중 동쪽 봉우리에 달이 뜨니 님을 뵌 듯 합니다.

이별이 너무 설워 문 닫고 누웠어도

흐르는 눈물 하염없이 옷자락을 적시오

홀로 누운 잠자리는 한없이 외로운데

소리없는 보슬비에 임 없는 밤 또 저무오

 

산이 무너지고 호수까지 말라붙어야 내 시름이 없어질까. 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걷힐줄 모르고 점점 더하는데 구름사이 동쪽 봉우리에 달 솟아 오르니 문득 당신을 본듯합니다. 얼마나 간절히 보고 싶어야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을까

결국 매창은 숨을 거둔다. 겉으로 보이지 않은 매창의 가슴은 물처럼 녹아버렸으리라. 아니면 오장육부가 다 녹아 버려 텅빈 육체로만 남았으리라.

매창의 부음은 촌은에게 전해진다. 촌은은 망연자실 허공만 바라본다.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유희경이 부안에 도착해 처음 맞이 한 것은 그리운 매창이 아니었다. 매창은 이미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육필(肉筆) 시한구절만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풍진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아

규방 깊은 곳 밤은 천년만 같구려

덧없이 지는 해 머리를 돌려보니

구름 덮인 청산만 눈을 가리네

 

매창의 마지막 글속에는 한이 들어있었다. 촌은은 이것을 읽었다. 받아주지 못한 사랑을 한스럽게 느끼며 자탄과 후회로 가슴 저미는 슬픔을 붓끝으로 토해냈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섭 계랑(매창)아

뜬 구름 따라 홀연히 간 곳마저 아득하구나

꽃다운 넋은 저승으로 벌써 떠나갔는데

그 누가 너의 옥골(玉骨) 고향에 묻어주랴

 

글속에 흐르는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촌은의 가슴속은 황하(滉河)가 길을 트고 폭포가 생겼으리라.

한 많고 정 많은 매창은 명종 5년 1550년에 갔다.

매창이 촌은과 헤어져 외롭게 지내고 있을 때 김제를 찾았던 홍길동의 저자 허균(許筠)이 그녀가 죽고 난후 이런 글을 남겼다.

‘계생(매창)은 부안기생인데 시를 잘 짓고 음율이 뛰어 났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우아해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번 자리를 같이 해 기회가 많았으나 한번도 음란한 행동이 오가지 않았으며 오래 사귀었으나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을 듣고 흐르는 눈물 억제하지 못해 시를 지어 슬픔을 대신한다’

 

묘한 시구는 비단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노래에 가던 구름조차 멈추네

선도(仙桃)를 훔치고 하계한 서옥모(西玉母)인가

향약(香藥)을 훔쳐 인간 세상에 쫒겨온 항아(姮娥)인가

밝은 촛불은 부용장막에 어두운데

그윽한 향기는 비취이불 속에 남았구나

명년 봄 복사꽃 다시필 때

누가 그녀의 무덤 지나려는가

 

이 매창의 무덤이 지금 전라북도 부안읍 공동묘지에 있다.

공동묘지 속에서도 공동묘지라 부르지 않고 ‘매창이 뜸’이라 불리고 있다.

후손도 없고 일가친척도 남아있지 않은 허황한 고을에 친척 아닌 친척들이 그녀를 보살피고 있다. 그들은 생전에 못 올린 술잔을 따르면서 그가 남긴 시를 읋조린다.

1974년 두 번째 세운 하얀 대리석 시비 한가운데는 검은 오석으로 ‘매창시비’ 넉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그녀의 시조‘ 이화우 흩 뿌릴제.......“ 가 새겨져 있다.

 

 

 

 

 

기생홍랑(紅烺) 이야기

홍랑(洪娘)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조선 선조 때 기생이다.

홍랑과 최경창(崔慶昌,1539∼1583)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최경창은 조선 선조 때 문인으로 사람들로부터 문장과 학문이 능해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꼽혔으며, 당시(唐詩)에 뛰어나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는데 율곡은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본래 문과를 통하여 입문한 문신이었으나 함경도 경성에서 여진족을 정벌하여 문무 양쪽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최경창(崔慶昌)의 사랑을 받았던 기생이 홍랑이다.

홍랑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병들어 누웠는데 집에서 80리 떨어진 곳에 최(崔)의원이라는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린나이에 밤낮으로 꼬박 사흘을 걸어 의원을 모시고 온다. 그러나 어쩌랴,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홍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쓰러진다. 홍랑의 효심에 감동해 동행한 최의원은 난감해 한다. 홍랑의 어머니는 동네사람들의 주선으로 뒷산 양지바른 언덕에 묻었다. 홍랑은 석달을 무덤가에서 지낸다. 그때 홍랑의 나이 12세.

어머니를 치료하러 왔던 최의원이 다시왔다. 효성지극한 홍랑을 그냥 버려 둘 수 없어 자기 집으로 대려가 수양딸로 삼고 키웠다. 그녀는 시문을 배우고 예의 범절등을 익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한 홍랑은 최의원에게

“이제 다 컸으니 떠나야겠다”

고 말한다. 최의원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허락한다.

최의원의 집을 떠난 홍랑은 먼저 어머니 무덤을 찾는다. 솟아오른 잡초를 손으로 잡고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뽑았다.

그후 홍랑은 기적에 몸을 담는다.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예술재능, 최의원집에서 익힌 양가집 규수의 예의범절은 기방을 찾는 뭇 남성들을 그냥두지 않았다. 돈 많은 한량, 부잣집 자제, 권력있는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돈꾸러미를 등에 얹은 나귀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만큼 홍랑은 인기였다.

 

술취한 손님이여 비단치마 잡지마오

댁의 손끝에서 치마폭이 뜯어지오

치맛자락이야 찢어진들 어떠리오마는

당신과 인연 끊어질까 두렵소

 

홍랑은 자기를 탐하는 사내들을 이렇게 다둑거리며 이겨냈다.

이때 홍랑 앞에 호를 고죽(孤竹)으로 하는 유명한 시인 최경창(崔慶昌)이 나타난다. 최경창은 중종 24년에서 선조 16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이 최경창과 홍랑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 보는 것일까.

홍랑의 눈에 비친 최경창은 마음속에 그리던 남성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홍랑은 고죽 최경창에게서 이성의 남자로써 혹은 아버지의 체취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홍랑은 모든 일을 청산하고 최경창을 모시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임기를 마친 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난다.

고죽이 떠나는 날 홍랑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따라 나와 울면서 보낸다. 이별이 서뤄워 밤이 오는 길을 재촉했을까, 마침 내리던 봄비도 곁을 지켰다.

홍랑은 길가 버들가지를 한 줄기 꺾어 고죽에게 주면서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묏버들 가지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오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최경창은 자(字)는 가운(嘉運), 호(號)는 고죽(孤竹)으로 해주가 본관이다. 중종 24년(1539)에 나서 선조 16년(1583)까지 산 사람으로 최충의 후손이며 수인(守仁)의 아들로 박순의 문인이다. 선조 1년(156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대동도찰방을 거쳐 1583년 정언이 되고, 뒤에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와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의 해변에 살 때에 왜구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에 죽었다. 숙종때 청백리에 녹천되었다. 문집으로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전한다.

최경창은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과 각별한 사이였다. 한 번은 이달이 고죽의 임소(任所)를 지나는데 정을 주었던 기생이 자운금(紫雲錦)을 보고 사 달라고 하였다.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증 최경창(贈 崔慶昌)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호상매금강남시 (湖商賣錦江南市)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조일조지생자연 (朝日照之生紫煙)아침햇살이 비치어 자줏빛연기가 나는구려.

주인정욕작군대 (住人正欲作裙帶)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수탐장ㅁ무직전 (手探粧ㅁ無直錢)화장그릇 뒤져도 줄돈이 한푼도 없구려

 

고죽이 이 시를 보고 회답하여 즉시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이 그 기생에게 자운금 한 필을 사 주었다고 한다.

"가치로 말하면 어찌 금액으로 헤아리겠소? 우리 읍이 본시 작으니 넉넉히는 보답 못하오."

 

요즘들어 최경창과 백광훈 등이

성당의 시경을 익혔다더니

아무도 안쓰던 ‘대아’의 시풍

이들에 와 다시 한 번 울리는구나

낮은 벼슬아치는 벼슬 노릇이 어렵고

변방의 살림은 시름만 쌓이네

나이 들어갈수록 벼슬길은 막히니

시인 노릇 힘들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허란설헌이 소녀 때 지은 시로 당시의 훌륭한 시인들이 사회로부터 빛을 보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분노와 한탄을 담아서 노래한 것이다.

소위 삼당시인으로 문명을 날렸던 허란설헌의 스승이자 오빠 허붕의 친구였던 손곡 이달이나 오봉 백광훈이 벼슬길에 별로 인연이 없었고, 어찌 보면 귀양지보다 못한 최북단 함경도의 경성(鏡城)의 임지로 무관이 아닌 뛰어난 시인 고죽 최경창이 발령 받고 있는 것을 보고 허란설헌이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고 보여진다.

동생 허균도 스승인 이달에게서 언제나 암울함을 느꼈으며,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만큼 그들 남매는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최경창은 1568년(선조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홍랑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의 일로, 선조 6년(1573년) 가을 최경창은 전부터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함경북도 경성(鏡城) 지방의 북도평사 즉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서른넷의 최경창에겐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북쪽 변방 군막생활을 처자들이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을 한양에 두고 홀로 부임하였다.

그 이듬해 봄 최경창이 서울로 전근 명령을 받아 귀경 하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선조 9년(1576) 다시 영광(靈光)군수로 좌천되었는데, 그는 뜻밖의 외직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허란설헌의 눈에 비친 현실처럼 최경창은 또다시 변방 군막 생활에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방 외직으로 좌천당하는 불운을 당하고 있다.

최경창이 1573년(선조 6)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변방인 함경도의 경성(鏡城)으로 가는 도중 홍원의 관기였던 홍랑과 처음 만났고 잠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어느 날 저녁 최경창은 함경북도 동해안의 청진항 근방에 위치한 경성(鏡城) 멀고도 외진 변방 근무를 위하여 홍원에 들린 그를 위로하고자 홍원 부사가 취우정에서 베푸는 술자리에 나갔다.

서울을 출발하여 철령 고개를 넘어 안변 원산에 이르고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을 지나 홍원에 당도하여 며칠을 쉬었다가 다시 동해안을 따라 험난한 산길을 천리가량 달려야 겨우 경성에 도착될 수 있었으니 서울에서 2천리가 넘는 먼 곳이다.

당시의 경성은 여진족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창끝을 바로 마주한 두만강 유역 무산과 북쪽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해방 전 동해안 명태잡이로 유명했던 신포 항과 아주 가까운 홍원에서 경성까지는 남한의 경북 울진에서 강원도 주문진에 이르는 해안선 거리와 맞먹는 먼 거리이다.

이렇게 변방 임무를 명 받고 떠나는 북도평사 최경창을 위한 그 날 저녁의 위로주연 자리는 홍원부의 관기로 속해있던 홍랑, 선옥, 혜원 등 기생들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때마침 열 나흘 둥근 달이 정자 위에 둥실 떠오르자 취흥이 도도해진 많은 사람들의 훤요가 밤하늘에 퍼졌다. 이부사가 호통을 쳤다.

"아 너희들은 꿀먹은 벙어리들이냐? 이놈들아, 흥을 돋워야지 자리만 지키고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아이구, 부사님 너무하신 말씀 마셔요."

"아아니 너무 하다니. 그래 내 말이 어디 잘못된 데라두 있느냐?"

"그러믄요. 언제 저희들에게 노래 부를 기회를 주셨어요?"

“그렇지. 임자 말이 맞네. 술만 따르라 했지. 언제 노래를 부르라고 한 적이 없지.”

최 평사가 옆에 있는 기생이 주는 술잔을 받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거 봐요, 역시 최평사님이 제일야.... 호호호..."

"하하하하..."

"저놈이 최평사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럼 어디 기회를 줄테니..."

"최평사님, 무얼 부를까요?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 아니면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 ?"

혜원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아따 이놈아, 유식한 체 말고 네 맘대로 부르거라. 그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겠느냐?"

이부사의 호쾌한 한 소리가 좌중을 잠잠하게 만든다.

 

유리병 호박잔이 짙고

작은 통에 떨어지는 술은 구슬처럼 붉구나.

용을 삶고 봉을 구우니 구슬 같은 기름이 끓는데,

비단 휘장은 향기로운 바람을 에웠구나.

용적을 불고 타고를 치는 흥겨운 소리에

호치로 부르는 노래 가는 허리 아름다운 춤이구나.

하물며 이 푸른 봄에 하루 해가 늦어 가니

복사꽃은 붉은 봄비처럼 어지러이 지는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온종일 마음껏 취해 보세.

술잔은 유령의 무덤 위에 다시는 못 간다오.

 

이하(李賀)의 장진주시(將進酒詩)가 혜원의 맑은 목소리에 달 밝은 밤하늘을 울려 퍼진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요란하고, 다시 술잔이 올려진다.

"여보 최평사, 노랠 들었으면 화창을 해야지요."

"아 아니오, 혜원의 노래는 이부사가 받아야 하는 게요."

"옳지, 홍랑아 네가 대신 받아라. 아 어서."

 

함정환불어(含情還不語) 하소연할 길 바이 없어 말 못하는 이 마음

여몽복여치(如夢復如痴) 이것이 진정 꿈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일까.

녹기강남곡(綠綺江南曲) 대답 없는 <강남곡(江南曲)>을 비파에 실어 보나

무인문소사(無人問所思)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홍랑의 낭랑한 음성이 비파 소리에 더욱 청아하다. 노래가 끝나자 최경창은 무릎을 치고 술잔을 가득 부어 홍랑에게 권하며 칭찬한다.

"너의 그 심사를 이제껏 눈치채지 못한 이 어리석음이 자못 크구나."

"아니, 최평사가 아까 혜원의 노래에 화창하지 않은 것은 다 속이 있어서 그랬구려."

"거 보세요. 전 벌써 눈치채고 있었어요."

혜원이 종알대며 입을 삐쭉한다.

"그래, 우리 둘이서 짝이나 맞추자꾸나. 최평사는 홍랑에게 맡기고 어서 이리 오너라."

이부사가 혜원을 끌어안자 좌중이 박장대소한다.

그날 밤 주연이 파한 후에 고죽(孤竹)은 홍랑을 불렀다.

"홍랑아, 내 네 집안 일을 다 들어 알고 있었다."

"녜? 평사님께서 어떻게..."

"내, 네 어머님의 일과 너의 극진한 효성, 그리고 최의원의 일까지 잘 알고 있느니라."

"....."

"그 극진한 효성이 가상하구나."

"......"

깊어가는 가을밤 촛불이 지짓 심지를 태운다. 홍랑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홍랑아, 눈물을 거두렴. 네 눈물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송구스럽사옵니다. 미천한 것을...."

"아니다.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욕보기덕(欲報其德) 호천강극(昊天岡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의 아름다운 효심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

고죽(孤竹)은 손을 들어 홍랑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일개 천기(賤妓)인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고죽이 고마웠다. 이 어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의지하고 따뜻한 남자의 크고 넓은 가슴에 자신을 던져 거기에 모든 걸 맡기고 싶었다.

최경창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는 장면을 좀 다르게 얘기하고 있다. 변방에 군사적인 임무로 일종의 순찰을 나갔다가 그 지역의 관리가 마련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 홍랑이 있었다. 술이 오가고 시를 읊는데 홍랑이 고죽이 있는지도 모르고 고죽의 시를 읊었다. 고죽이 이에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묻자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 하였고 그제서야 고죽이 자신을 밝혔다는 것이다.

최경창은 재색을 고루 갖춘 홍랑을 각별히 사랑하여 변방 임지로 떠나는 길에 그녀를 데려 가려 몇 번이나 궁리를 거듭했으나 변방이라 위험하기도 해서 차마 데리고 가진 못하고 기약만 남긴 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먼저 떠나고 만다.

너무나 아쉽게 헤어진 연인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던 홍랑.... 그녀는 참말로 지순한 사랑에 모든 걸 거는 그런 여인이었나 보다. 보고픈 마음에 하루가 여삼추 같았던 그녀는 마침내 남장(男裝)을 하고 천리 길을 걸어 경성으로 찾아 간다.

당초 홍원부 관기로 기적에 올려져 있는 홍랑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홍원을 맘대로 떠날 수 있는 신세가 아니었다.

님이 있는 변방으로 가기 위해 이부사에게 방직기(房直妓; 변방 사졸의 수발을 드는 기생. 변방에 관리나 병사가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게 하기 위함 )로 보내달라고 청을 넣고 허락을 하지 않자 자살 소동을 벌려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세종 이후 당시 관습에 따라 기생들로 하여금 변방의 관리들의 방직기(房直妓)가 되게 하였는데 홍랑 역시 그와 같은 예를 따른 것이다.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현지처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찬바람 휭휭 부는 변방의 군막을 물어 물어 최경창이 있는 곳에 드디어 무사히 도착하고… 서로 그리워했던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동거시절을 막중(幕中)에서 보내며 죽음보다 강하고 시보다 감미롭고 꽃보다 향기롭고 나비보다 아름다운 절대사랑을 나눈다.

북쪽 변방의 삭풍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꿈같이 보낸 그 이듬해 최경창은 다시 서울로 부임명령을 받게 되었다. 완전히 기적(妓籍)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방직기로서 홍랑은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따라 갈 수 없는 제약을 받아 할 수 없이 원래의 소속이었던 홍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이별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임의 앞길을 생각하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 깊숙이 누르는 홍랑의 아쉬움이 영흥까지 최경창을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 그녀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따라가 서러운 이별을 하고 돌아오다가 날이 저문 함관령(咸關嶺)에서 눈물처럼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애틋한 사모의 정이 담긴 시 한 수를 나지막히 노래하여 최경창에게 보냈다. 이 시가 바로 홍랑이 남긴 유일한 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

자시는 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산 버들 가지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홍랑의 일편단심과 버들가지에 의탁한 순정을 잊었는가. 한시에서 버들가지는 이별을 뜻한다.

애타는 기다림 속에서 3년이 물같이 흘렀다. 홀로 쓸쓸한 단양의 긴 겨울 밤을 올곳이 새우며 매화 한가지에 피는 꽃 보기를 기다리는 퇴계 이황을 향한 두향의 단심이 이리도 모졌을까?

행여나 하고 기다림에 목을 매는 그 시절의 여인들의 순절함에 어찌 진한 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쌍성을 떠나 서울에 온 이후로 3년간 소식이 없는 최경창이 1575년(선조 8)에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곧 행장을 차리고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서울에 당도, 꿈에 그리던 님을 만나 극진히 병간호를 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기쁨과 행복도 잠시.....

이들의 사랑을 질시하던 사람들이 양계의 금(禁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과 인순왕후의 국상이 지났지만 사대부가 기생과 어울렸다고 들고 일어났다.

이 일로 최경창은 급기야 관직에서 파면되고 홍랑 또한 쓸쓸히 홍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별하던 날, 최경창이 홍랑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준다.

 

고의 (古意) 옛 뜻을 적음

린린척차륜(燐燐隻車輪) 덜컹덜컹 쌍수레의 바퀴들은

일일천만전(一日千萬轉) 하루에도 천만 번씩 구른다지요.

동심부동차(同心不同車) 마음은 한가진데 수레는 같이 못 타

별리시루변(別離時屢變) 이별한 후 세월은 많이도 변했구려.

차륜상유적(車輪尙有跡) 수레바퀸 그래도 자취를 남기지만

상사인불견(相思人不見) 그리워 그리워도 볼 수 없는 그대여

 

이별의 아픔을 받은 홍랑은 고죽에 대한 애정의 눈물을 뿌리며 천리길 홍원으로 돌아갔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만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홍랑과 고죽은 세 번 만났다. 그러나 세 번째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덜 마음 아팠을 것이다.

그 이별 이후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최경창은 파면 후 복권돼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5세....

최경창의 죽음이 알려지자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그 곱디 고운 얼굴을 스스로 훼손한 뒤 세수도 않고 머리도 안 빗으며 9년 동안을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기껏 세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사랑을 나눴을 뿐인데도 무려 9년간이나 시묘를 살았다.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인 것처럼 속여 수절했던 기생은 있어도 여자의 생명인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 말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고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나를 님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랑은 비록 평생 동안 이처럼 최경창을 세 번 짧게 만났으나 영원을 함께 한 지고 지순한 사랑으로 최씨 문중과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당시 풍류를 읊조리는 자리에서는 시를 논하고 가무에 화창하여 어울리면서도 화류계 여자라고 배척하고 양반 적서의 차별이 심하고 겨우 첩실(妾室)로나 받아들이던 사회에서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을 배반한 여인 매화(梅花) 이야기

조선조 영조말엽 황해도 벽지 곡산 땅에 매화라고 부르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를 일컬어 재가열녀(再嫁烈女)라고 부른다. 두 번 결혼한 열녀라는 말이다.

매화의 나이, 열여섯, 절세 미모에 재주가 비상한데다 기생수업을 열심히 한 덕에 춤은 물론 노래도 절창이었다.

모두들 그토록 아까운 재주를 가진 아이를 이런 산골벽지에 보낸 신의 장난을 걱정하기도 했다. 매화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한량배들은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돌아서기 일쑤였다. 어느 날 돈많은 한량이 술자리에서 매화를 어루고 있었다.

“ 내가 너의 머리를 얹어주기 위해 마누라를 친정에 보내고 달려 왔느니라. 오늘은 내가 너의 머리를 꼭 얹어주고 싶구나”

“ 고마운 말씀입니다. 저를 그토록 생각해 주시다니요”

“ 그럼 허락하겠단 말이지”

“ 아닙니다. 아직 그런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 내가 돈이 없을 것 같게 보이느냐. 이래뵈도 해주 만석꾼이다.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주마”

“ 제가 옛사람의 시조 한수를 불러 올리겠습니다”

“ 그래라, 나를 위해 노래를 한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 어서 불러라”

 

세상 부귀인(富貴人)들아 빈한사(貧寒士)를 웃지마라

석숭만재(石崇萬財) 필부(匹夫)에 그치고

안빈일표(安貧一瓢)로도 성현에 이르나니

내몸이 빈한(貧寒)하다마는

내 길을 닦으면 남의 부귀 부러우랴

 

세상 부자들아 돈없는 사람 괄세마라. 수만금 가진 졸장부가 있고 가난하고 어려워 표주박하나만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어진 사람있는데 나 지금 비록 가난하지만 노력만 한다면 당신 돈 부러워하겠느냐는 것이다.

돈많은 해주한량은 기가 막혔다. 매화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 돈 만가지고는 안된다 그 말이지”

“예, 옛어른 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조강치처(糟糠之妻: 결혼 초 먹을 것이 없어 지게미와 쌀겨를 먹고 견딘 아내)는 불하당(不下堂: 집에서 내보낼 수 없다)이라고 했습니다. 방금 전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해 처를 친정에 보냈다면 장차 다른여인을 위해 나를 버리실 것이 아닙니까”

해주 한량은 무안해서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길로 매화의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기생의 수입은 술 팔고 몸 팔아 생기는 것이 전부였지만 돈만으로는 그녀의 정절을 꺾을 수 없었다.

요즘 인기리에 팔리는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것이 대부분 돈과 연관된 불륜이다. 연예인이 어떻고 가정주부가 어떻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들먹이고 있다. 돈이면 다 해결될 듯이 과대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가슴속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조와 정절이 숨어있다. 한 푼 없는 빈털터리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와 정이 있었다. 서구문물과 정서가 압구정동을 휩쓸고 백화점 쇼 윈도우에서 번쩍이는 사치가 눈을 홀려도 우리네 가슴속 한구석에 자리한 민족의 순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거센 유혹에 견디지 못해 잠깐 움추러 들었을 뿐이다.

고집과 정열이 있는 한민족,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우리를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 사랑과 정열, 지조와 순수를 간직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이심전심 뜻이 통했을까. 그렇다. 그 등불이 켜지는 날 세계는 우리를 주목하리라. 켜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한사람, 두 사람 우리 모두 순수와 지조와 정열의 등불을 밝히자

이렇게 도도한 매화에게도 연분이 있었으니 그녀가 17세되던 해 봄,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魚允謙)이 곡산땅에 순시차 들리게 된 것이다. 당시 어윤겸의 나이는 칠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은 관찰사를 모신 연회에 매화가 불려나왔다. 매화를 본 어윤겸은 이런 벽지에 저런 천하절색이 있는가 하고 눈을 의심했다. 연회를 마친후 매화가 관찰사의 이부자리를 깔고 돌아가려하자 어윤겸이 묻는다.

“ 네 나이가 몇이냐”

“예, 올해 열 일곱입니다.”

“그래 좋은 나이로구나. 예 앉아 이야기나 좀 하다 가거라”

기생으로 수년을 살아온 매화는 관찰사의 의중을 짐작한다. 조용히 곁에 앉는다.

“ 머리를 보니 아직 동기가 분명한데 지금까지 머리를 얹어주겠다는 사람이 없더냐”

“ 아니옵니다. 있었으나 소녀가 거절했습니다.”

“뭐라고, 거절 했다고”

“황공하옵니다만 미천한 천기일지라도 한번 몸을 허락하면 평생 그분을 위해 수절해야 하는 것으로 아옵는데 아직까지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 갸륵한 생각이로고, 여자는 정절이 생명인 것을...”

어윤겸의 말끝이 흐려진다.

“ 매화야, 사또가 너를 왜 이방에 들여 보낸 줄 아느냐”

“예, 사또님의 의중을 짐작 못하는 바 아니옵니다”

“ 그런데 왜 너는 수청들 생각을 하지 않고 이부자리만 펴고 돌아가려 했느냐”

매화는 조용히 말한다

“ 황공하오나 절개를 중히 여기기에 그러했사옵니다”

“음 그럼 내가 너를 희롱만하고 갈 것이라 생각했단 말이더냐”

“........”

“말이 없는 걸 보니 그렇단 말이렷다. 너를 수청들게 하면 내 조강지처를 내보내고 너를 들여앉혀야 한다는 말이지”

매화는 아무 말이 없다.

“ 그래 네 정절관에 감탄 했느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까지 소중하게 정절을 지켜라. 나가보아라”

놀란 것은 매화였다. 지엄한 관찰사의 위용으로 수청을 들라하면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어윤겸의 태도에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볼수 없었다. 나가보라고 한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매화가 머뭇거렸다. 관찰사가 말한다.

“ 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너같은 미인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 뜻이 가상해 돌려보내는 것이니라. 어서 가거라”

매화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인격이 높은 어른이라면 나이는 상관이 없을 듯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매화가 입을 열었다.

“ 오늘밤 소녀가 어르신을 뫼실까 합니다”

“ 아니, 가겠다고 하더니 웬일이냐”

어윤겸은 속으로 기뻤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해도 절세미인이 따르겠다고 말하는데 혹하지 않는 남자가 있으랴. 도학자적 윤리심에 방황하던 어윤겸은 진 듯, 이긴 듯 묘한 상황에 빠져 버렸다. 어윤겸의 머릿속에는 이태백의 시가 맴돌고 있었다.

 

인생의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기쁨을 다하여라

황금술단지를 달빛아래 헛되이 버려 두지 말아라

 

기회를 맞이했을 때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가버리면 후회한다. 때마침 천하절색이요. 어린 기생이 수청을 들겠다고 나섰으니 거절하는 것은 남자의 덕이 아니겠지.

매화가 주안상을 마련해 온다. 촛불이 펄럭거리다 꺼졌다.

그날이후, 매화와 어윤겸은 꿈같은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어윤겸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점점더 노쇠해져 갔다.

반면 매화는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젊음으로 무르익어 여자의 모습이 더 충실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곡산에 있는 노모에게서 기별이 왔다. 병이 깊어 열흘을 넘기기 어려우니 죽기전에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다. 매화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어윤겸은 걱정과 함께 노자 돈을 두둑히 주면서 다녀오라고 했다. 집에 도착한 매화는 사립문을 열고 자신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금방 죽을 것 같다던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머니”

“ 글쎄 나중에 이야기할테니 우선 들어오너라”

방안에서 어머니가 한말은 매화가 어윤겸을 따라 감영으로 올라간 후 곡산에 신임사또 홍시유(洪時裕)가 부임했단다.

홍시유는 전부터 소문으로 듣던 매화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이미 감영으로 어윤겸을 따라 간 후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번 만나 보겠지하고 곡산에 남아있는 매화의 어머니에게 음으로 양으로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이에 감동한 노모가 거짓편지를 써 매화를 내려오게 한 것이다.

어머니는 홍사또를 한번 만나보라고 청한다. 매화는 어쩔줄 몰라 했다. 기적에 몸을 담고 있으나 굳은 지조를 신념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게 실망할 것 같았다. 다음날 매화는 홍시유를 만난다. 건장한 젊음이 온몸에서 풍긴다. 늙은 어감사와는 사뭇 모습이다. 자꾸만 홍시유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날밤 매화와 홍시유는 함께 밤을 보낸다. 매화는 난생처음으로 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보름동안 홍사또의 품에서 신비의 세계를 맛보던 매화는 젊음이 이런 것인가 하고 다시한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윤겸에게 돌아가기로 약속한 기일은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살뜰한 내마음과 알뜰한 님의 정을

일시상봉(一時相逢) 그리워도 단장심회(斷腸心懷)어렵거든

하물며 몇 몇날을 이대도록 지내랴

 

살뜰이도 그리운 내 마음과 알뜰한 님의 정, 한번 만나고도 이렇게도 그리운데 창자를 끊어낼 정도로 그리워지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그 오랫동안 이렇게 그리워 어떻게 지냅니까.

매화는 아쉬움을 안고 떠난다. 언젠가는 홍시유 품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된다. 감영에 돌아온 매화는 매사가 즐겁지 못했다. 늙은 감사의 손길은 어쩐지 거북스럽고 전 같지 않았다. 감사의 얼굴에 홍시유의 젊은 홍안이 겹쳐 보였다. 매화는 혼자 홀로 쓸쓸히 흥얼거린다.

 

심중에 무한사(無限事)를 세세히 옮겨다가

달밝은 비단장막의 님 계신 곳에 전하고자

그제야 알뜰이 그리는 맘 짐작이나 하실까

 

한밤중 잠 못 이뤄 이리저리 뒤척일 때

궂은비 방울소리에 애간장 끊는 그리움

뉘라서 내 모습 그려다가 님 앞에 전할까

 

가슴속 깊은 곳의 끝없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적었다가

닭밝은 날 밤 님계신 곳에 전하고 싶소

이편지 받으시면 이토록 그리워 하는 내맘을 짐작이나 해주실까

한밤중에 잠 못이뤄 이리저리 뒤척일 때

짖궂은 저 빗방울소리는 그리움에 애간장을 끓게 합니다.

누가 이 모습을 그려다가 님에게 전해 줄까요.

매화는 병이 들었다. 홍시유를 향한 상사의 병이 깊어만 갔다.

상사병이 든 매화가 자리에 누워버렸다. 늙은 어윤겸이 유명한 의사를 불러다 진맥을 시키고 약을 먹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마음에 병이든 것을 어찌 약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며칠간 누워있던 매화는 갑자기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속옷만 입은채 거리를 헤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미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미친 것이 아니고 어윤겸의 그늘을 벗어나 홍시유의 품으로 가기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어윤겸은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여인, 돈으로 살수 없었던 정절을 지닌 여인, 자기에게만은 모든 것을 다 내주었던 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의원을 찾아 치료를 했으나 매화의 증세는 더 심해졌다. 속수무책이었다. 할수없이 매화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한다. 거기에다 곡산사또 홍시유에게 매화를 잘 부탁한다고 부탁까지 했다.

호랑이 굴에 강아지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어감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 리가 없었다.

매화의 심정은 하늘을 날것만 같았다. 곡산에 도착한 매화는 그리운 홍사또의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의 젊은 육체는 다시한번 불이 붙었다.

남보다 철저한 정조관을 지녔던 매화가 이렇게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랑에는 나이가 상관없다고 한다.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조물주의 오묘한 조화로 이뤄진 젊은 육체의 욕구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사람의 불륜은 오래가지 못한다.

홍시유와 함께한지 두어달 후, 어윤겸이 홍시유에게 감영으로 출두하라고 명령한다. 홍시유가 병신옥사(丙申獄死)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결국 홍시유는 참형을 당한다.

홍시유가 죽고 나자 그의 부인 李씨도 스스로 목을 메 자결했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를 선영에 고이 안장했다. 매화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사랑하던 홍시유를 자기 손으로 땅에 묻은 후 겉잡을 수 없는 공허함에 휩싸여 무덤가에서 눈물로 노래한다.

 

매화 옛등걸에 춘절이 돌아오니

옛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만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

 

매화나무 옛 가지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아름다운 꽃이 피던 그 가지에 다시 필만도 한데 봄눈이 어지럽게 내리고 있으니 필지 말지모르겠다.

세상사 윤회가 진리인데 세상이 어지러워 가신님은 오시겠는가.

자신의 손으로 홍시유를 땅에 묻은 매화는 인생의 허무를 뼈저리게 맛보았다.

다음날 매화의 시체가 홍시유 무덤가에서 발견된다.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지조와 정절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 자신을 알고 믿어주었던 인품에 이끌려 처녀의 몸을 바쳤던 늙은 감사 어윤겸과의 사랑, 하지만 물 오른 육체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젊은 사또 품에서 환희의 시간을 찾아 헤멘 여인, 미친듯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진정한 사랑을 찾았던 그녀였다.

세상 사람들은 매화를 일컬어 재가열녀(再嫁烈女)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토록 아껴주던 늙은 어윤겸을 배신하고 젊은 홍시유에게 돌아간 것을 비방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랑하던 홍시유의 주검 앞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열녀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감정에 충실했고 자신의 사랑 앞에 떳떳했던 한 여인. 거짓사랑보다는 삶의 진실한 욕구가 무엇인지 알았던 여인, 매화는 그렇게 갔다.

 

 

 

 

기다리는 마음 기생 송이(松伊)이야기

기생 송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해동가요란 책에 기록된 아홉명의 명기 중 한명으로만 전해진다.

아홉명의 명기는 황진이. 홍장. 소춘풍. 소백단. 한우. 구지. 송이. 매화. 다복이라는 기생이다.

그중에서도 송이는 기생작가중 제일 많은 14수의 시조를 남겼다.

송이가 머물었던 강화에서 일이다.

선조때 해주유생 박준한(朴俊漢)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다가 강화에 머문다. 객사에서 주모로부터 송이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동한다. 너무나도 정절이 뛰어난 기생이라는 말에 한번 꺾어 보려는 야심이 생겼다. 주모를 통해 송이와 만난 박준한은 술이 거나해지자

“네가 송이라 했지. 너를 위해 시를 한수 읊겠다”하면서

 

거문고 빗겨안고 조용히 부르는 노래

옛날엔 서울서도 그 이름 높더니만

봄빛이 거울 뒤로 꽃지듯 사라지니

흰머리 솟은 지금 아는 이도 볼수없네

 

이 노래를 들은 송이가 가만히 있다. 박준한은 송이를 다그쳤다.

“화답을 해야지 않겠느냐”

송이는 화답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서방님이 지금 부르신 노래는 서방님의 노래가 아니옵니다. 그 노래는 고산 유근(柳根)님의 노래올시다”

“그래 놀랍구나. 그럼 이 노래를 누구에게 준 것이냐”

“ 그 노래는 송도에 있는 기생에게 준 것입니다”

깜짝 놀란 박준한의 머리속에 이런 재능을 지닌 기생을 한번 꺾어 보야야겠다는 욕심이 몰려들었다. 상황을 눈치 챈 송이가 노래를 부른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인가 보았더니

천길절벽 낙락장송 그 솔이 나입니다.

길 아래 나무꾼 낫으로는 꺾을 수 도 없나니.

 

송이는 자신의 이름을 소나무에 비유했다. 겁 없이 달려드는 박준한을 길아래 지나가는 나무꾼으로 보았고 그 나무꾼의 낫으로는 자신을 꺾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기생일지라도 아무에게나 정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호한 거절이다. 박준한은

“그래 나같이 돈없고 이름없는 사람은 넘겨다 보지말고 조용히 물러가라는 뜻이렸다”

고 하자

“송구스럽지만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서방님께서는 지금 과거를 보러 가시는 길이온데 객주집에 빠져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송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마운 말이로다. 내가 과거를 보고난 후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려도 되겠느냐”

“서방님이 내려 오실 때는 뜻에 따르겠습니다”

박준한이 다시 강화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초겨울이었다. 진사시험에 급제한 그가 떳떳하게 나타났다.

송이와 박준한은 약속을 지켰다.

그날밤, 두사람이 머무는 방의 창호지가 흔들렸고 초가집 지붕위의 첫눈은 녹아 내렸다. 송이는 님과 함께하는 밤이 너무 짧은 것이 한스러웠다.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닭아 우지마라 잘 우노라 자랑마라

네 소리에 놀라 뛰칠 맹상군 여기없다.

오늘은 님 오신 날이니 아니 울면 어떠냐

 

몹쓸 닭아 울지마라 네 목소리 크다고 자랑마라

날 밝음을 알리는 소리에 놀랄 도둑 여기 없다.

오늘은 님이 오셨단다. 안 울면 어떻겠냐

 

송이와의 사랑이 격렬했어도 박준한은 떠나야 했다. 송이는 눈물로 쓴 시조 한수를 그에게 바친다.

 

내 사랑 남주지 말고 남의 사랑 탐치말라

우리사랑 틈새삼아 잡사랑이 낄세라

평생에 이사랑으로 버텨 살까 하노라

 

남을 사랑하지 말고 사랑받기를 바라지 마시오

우리의 진한 사랑에 다른 사랑이 끼어드오

나는 평생 우리의 이런 사랑으로 버티고 살까 합니다.

 

송이는 박준한이 떠나면서 남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데리러 오기로한 날이 지났다. 1년이 지났어도 소식이 없다. 송이의 애간장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송이는 지신의 심정을 흐르는 눈물에 섞어 적어간다.

 

남들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어

따슨 침실 깊은 곳에 주무시는 님생각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은하수 불어나서 오작교가 떳는가

소를 이끈 그님이 건너실수 없는가.

직녀의 애간장도 봄눈 녹듯 하여라

 

이리하여 날 속이고 저리하여 날 속이니

원수같은 그님을 잊음직도 하다마는

먼젓번 언약이 중해 못 잊을까 하노라

 

남들은 다 잠을 자는데 나는 왜 혼자 깨어

따뜻한 침실에서 주무시는 님을 생각하는가

천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외로운 꿈을 꾸노라

 

은하수가 불어나서 오작교를 세웠는데

소를 모는 견우님이 건너실수 없으시다면

직녀의 애간장도 봄눈 녹듯 녹아 버리리라

 

이리 저리 나를 속이시니

원수같은 님을 잊어 버릴까 하다가도

지난번에 해주신 언약 때문에 못잊고 있는 것을.

 

송이는 안절부절이다. 자신이 잠 못들어 애간장을 태우는데 사랑하는 님, 박준한은 따뜻하고 화려한 방안에서 자고 있겠지 나는 어쩌란 말이냐, 온다던 기일이 지난지 오랜데 오지않은 사연은 도데체 무슨 이유일까. 1년에 한번만나는 견우직녀처럼 오시는날 은하수 강물이 불어 오작교 다리가 떠내려 갔는가. 다타고 조금 남은 내간장이 봄날 눈 녹듯 다 사그러지는데..

송이는 사랑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한다. 이렇게도 속이고 저렇게도 속인 님을 그냥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같이 있을 때 한 약속이 너무나도 중하기에 도저히 못 잊겠다.

미련과 희망, 송이가 처한 처지에서 가질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송이는 걱정이 된다. 이대로 영영 안 오신다면. 송이는 그 심정을 글로 썼다.

 

주색을 삼간 후에 백년 살길 보증하면

서시(西施)를 관계하리 천일주(千日酒)를 마실소냐

아마도 참고 참다가 허송세월 걱정된다.

 

옥같은 궁녀도 오랑캐의 첩이되고

절세가인 양귀비도 역전이슬 되었나니

괜시리 너의 미모 아껴 무엇하리오

 

사랑이 변한 그리움이 원망이 되고 이제는 포기의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송이는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그리움에 지친 송이가 아름다운 자신의 용모가 시들기 전에 다른 길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박준한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이 도착한다. 송이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박준한이 보내온 서찰에는 한편의 시가 적혀있었다.

 

저 달 저문 그 밤 약속 닭 울도록 아니오네

새님을 만났는지 옛정에 묻혔는지

아무리 한때 약속이지만 이토록 속이랴

 

시를 받아든 송이는 가슴이 떨리고 손발이 굳어졌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기다리는 나를 이렇게 야속하다고 했을까.

기별만 주었어도 한걸음에 달려갔을 것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은 자신인데 이런 편지라니 송이는 억울하고 분했다. 하인은 그런 송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서방님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셔 얼마 안 있다가 이름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가 극진히 간호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눈을 감으시면서도 아씨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그 증거가 여기 이 싯귀입니다.”

박준한은 그렇게 갔다. 사랑하는 님이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부르다가 떠났다. 그러나 송이와 박준한과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준한의 어머니는 서러움을 누르면서 먼저 간 아들의 서재를 정리했다. 그속에서 이 시귀를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아들의 유언과 같은 편지를 송이에게 보냈다. 그후 자식의 장례를 마친 어머니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 한다.

송이는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통곡했다. 박준한의 억울하도록 짧은 삶을 위해 며칠을 울었다.

 

꽃보고 춤추는 나비 나비보고 방긋 웃는 꽃

저둘의 사랑은 잊지 않고 오건마는

어쩌다 우리사랑은 가고 아니 오는고

 

송이는 주변을 정리한다. 이젠 눈물도 말랐다. 마음을 진정한 송이는 박준한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황해도 암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스스로 중이 되었다. 입산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마음의 노래가 이것이다.

맺을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은 인연. 사랑은 기다림이요.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워 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다면 행복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하면 송이와 박준한의 처지와 다를게 없다.

박준한은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글한자 써서 보낼수 없도록 아팠던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기생에 빠진 것을 남이 알까 두려웠을까. 어쨌든 불행하고 어색하기만 한 두사람의 사랑의 종말이 저승까지 이어졌기를 바란다.

송이는 자신의 사랑을 믿기에 머리를 깎은 것이다. 이승에서 기다리고 있는 연인을 향해 면벽의 고행을 수행하므로써 상봉하기를 원한 것이다.

송이의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움으로 기다리다가 지쳐 끝나버린 서글픈 사랑이었다.

 

 

 

논개이야기

논개의 성씨는 주(朱)씨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 살았다. 이곳은 선조 6년(1593년) 6월 남편 최경회(崔慶會) 현감을 따라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고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승전연에 참석,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국한 겨레의 여인 주논개(朱論介)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년) 9월 3일 이곳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朱達文)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촌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다. 이곳은 논개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와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지역에 1997년부터 4년간에 걸쳐 넓히고 옮기는 사업을 통해서 2만평을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주논개 생가를 들어가는 관문인 의랑루(義娘樓)가 있고 연못과 정자(丹娥亭),주논개의 석상, 의암 주논개의 사료를 정리한 전시관 및 생가가 있다. 이렇듯 평범한 여인을 기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연유는 알 수 가 없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 변영로의 논개라는 시이다.

논개는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만여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온다.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된다.

그때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 (主谷村六助)을 촉석루 절벽아래의 의암바위로 유혹하여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한다.

 

말고 말근 강남수(江南水)야 임진(壬辰)이를 네 알니라

충신(忠信)과 의사(義士)덜이 몃몃치나 빠져 난고

아마도 여중장부(女中丈夫)난 논낭자(論娘子)가 하노라

 

맑고 맑은 강남수야 임진년을 네 알리라

충신과 의사들이 몇몇이나 죽었느냐

아마도 여자가운데 장부는 논개 낭자라 하노라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후인 1721년(경종 1)에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논개의 의열에 대해 국가가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국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논개를 의기로 지칭하게 되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춤추었던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1739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를 의암 부근에 세우고 논개에 대한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의암별제는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추모제이다.

 

무진년(戊辰年) 유월일에 단을 부어 분향하여

삼백명 여기(女妓)덜이 정성으로 기제(妓祭)하니

논낭자(論娘子) 충혼의백(忠魂義魄)이 내리실가 하노라

 

전쟁 중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먼저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 한용운의 시가 있다.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든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섞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바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나라의 꽃 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갸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 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 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 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밝히운, 강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오,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오,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贖罪)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의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박계숙과 금춘(今春)이야기-부북일기(赴北日記)(퍼온글)

 

부북일기(赴北日記)는 박계숙과 그의 아들 취문이 변방에 부임하면서 쓴 일기다.

이 책은 임진왜란 후 울산병사 김응서와 판관 조성립을 수행하던 선전관 박계숙의 부북(赴北, 함경도 회령 변방)일기와 양란 후에 부북(赴北)한 그의 아들 취문의 일기를 합책한 필사본으로 후손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이수봉님이 발견하였고, 심재완님에 의해 역대시조전서(歷代時調全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박계숙의 일기가 24장, 그의 아들 취문의 일기가 55장, 모두 79장으로 되어 있고, 부북까지 이르는 동안의 노정, 도중의 야사(野舍), 보급 상황, 감회, 이역풍경(異域風景) 등 주색으로 객수를 달래며 밤을 보내는 정경이 간간이 보인다. 이 일기 속에 한글로 기록된 시조 7수가 보이는데, 이 일기는 박계숙이 37세 되던 을사(1605)년 10월 15일부터 정미(1606)년 정월 2일까지 1년 2개월, 412일 간의 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우국 충절의 풍모와 풍류 남아의 면모를 여실히 만나 볼 수 있다.

박계숙(朴繼叔)은 자(字)를 승윤(丞胤), 호(號)를 반어헌(伴禦軒)이라 하며, 선조 2년에서 인조 24년까지 산 사람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훈련원부정,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임란 때에 원종절신(原從切臣)이 되었다. 전란 때 일등 공신이 된 박홍춘의 아들로, 임진란 때 수훈을 세운 무관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취문(就文)은 자를 여장(汝章), 호를 만회당(晩晦堂)이라 하며, 갑신(1644)에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똑같은 훈련원부정을 지냈고, 금군장(禁軍將).부사(府使) 등을 재냈으며, 광해 9년(1617)에서 숙종 16년(1690)까지 산 사람이다.

이를 보면 이 집은 3대가 무과 출신으로 임란과 병란 양란에 활약한 집안이다

먼저 부북일기에 기록 된 내용 일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을사(1605) 11월 22일.

20리쯤 되는 곳에 연흉포(連凶浦)가 있는데, 일명 맥진(麥津)이라고도 한다. 겨울에는 다리로 건너고, 여름이면 배로 건너는데, 그 나루가 길고 험하여 물살이 급해서 건너기가 썩 어려웠다. 또 10리쯤 가서 신안역에 도착한 즉, 음식을 대접할 생각이 없는 듯하여, 역장을 불러 이야기하였으나 여전하였다. 겨우 허기를 면할 만큼 잡곡을 얻어 밥을 지으니 진수성찬과 같다. 눈 오고 춥고 먼 길에 이런 일을 겪으니, 집을 떠난 감회를 이길 수 없어 시를 쓰다.

 

만리개산로 (萬里開山路) 만리길 산길은 가도가도 끝없네.

동서문빙수 (東西問憑誰) 동서 갈길을 누구에게 물어 보리.

설심사색료 (雪深沙塞遼) 눈깊고 모래 날려 갈 길을 막으니

풍설객수수 (風雪客愁愁) 바람에 날리는 눈 나그네의 수심을 더하네.

 

이것은 그가 이가등정(離家登程)한 지 한 달 반이 지난 11월 하순에 2천리 북녘의 맥진에서 설원의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객수를 이기지 못한 날의 일기다.

을사(1605) 11월 24일

그로부터 하루를 지난 24일에는 저 유명한 철령 고개를 넘어 안변경계에 이르러, 어느 역졸의 집에 여장을 풀고 가진 쌀을 모으니 여덟 되. 이것을 술과 바꿔 마시며 지나온 2천리 노정을 새삼 감탄하면서, 다시 앞으로 천리가 남은 아득한 여정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한 장부로서의 감개를 시조로 읊는다.

 

행로난(行路亂) 행로난(行路難) 바라보니 가이없다

이천리(二千里) 거의 오니 또 압피 천리 나매

충심이(忠心已) 허국(許國)하니 먼 줄 몰나 하노라

 

험하고 험한 이길 바라보니 끝이 없다.

이천리길 겨우 오니 또 앞에 천리길이

나라에 충성하기로 한 마음이니 먼 줄을 모르겠다.

 

을사(1605) 11월 27일

계속해서 2일을 지난 27일은 풍설 속에서 필마(匹馬)를 재촉하며, 새외호진(塞外胡塵)을 쓸어 버릴 호방한 강개와 심회를 시조로 읊는다.

 

관산(關山) 풍설리(風雪裡)예 가시는 벗님내야

어대를 가노라 필마(匹馬)를 뵈야는다.

새외(塞外)예 어득한 호진(胡塵)을 다 쓰로러 가노라

 

을사 (1605) 11월 27일

...어제 저녁 어둠을 틈타 와 본즉, '많은 손님들과 있어서 그냥 돌아갔나이다'라고 말하거늘, 더불어 이야기하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남의 탕기(蕩氣)로 반년을 집을 떠나 있으니 어찌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잊고 춘정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붓을 들어 한 수를 지어 주다.

 

비록 장부을(丈夫乙)지라도 간장(肝腸) 철석(鐵石)이랴.

당전(堂前) 홍분(紅粉)을 고계(古戒)를 사맛더니,

치성(治城)의 호치단진(皓齒丹唇)을 몯 니즐가 하노라 -화답가 1

 

비록 장부일지라도 간장이 쇠나 돌이겠는가.

뜰 앞의 예쁜 여인을 보면 옛 어른들의 경계 생각했더니

성중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니 잊을 수가 없구나

 

우리의 문헌에는 기녀와의 정담을 노래한 풍류적인 내용의 작품이 많으나, 박계숙과 같이 천신만고하여 이역만리 변방에 부임한 뒤 세밑을 앞두고 '초심사석(初心似石)'이 '여금춘동침(與今春同寢)'으로까지 풀려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작품의 제작경위와 일시, 장소까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작품은 드물다. 그것은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임란 직후에 쓰여진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반년간이나 가까이에 여인 하나 두지 않고 변방에서 홀로 지낸 박계숙이 어찌 여인의 육체가 그립지 않았으랴.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가없이 펼쳐진 설원의 선경뿐인 것을…

비록 몸은 무인이지만 시와 가무를 사랑하는 풍류남아였던 박계숙에게 꿈속에서처럼 찾아온 북국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지녔던 결심이 아무리 굳다 해도 설중미인(雪中美人)과의 하룻밤을 어찌 외면 할 수 있었으랴.

 

당우(唐虞)도 친히 본 듯 한당송(漢唐宋)도 지내신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 명철인(明哲人)을 어대 두고

동서(東西)도 미분(未分)한 정부(征夫)를 거러 므삼 하리 -화답가 2

 

기녀 금춘(今春)이 화답한 노래다. 무인 박계숙의 늠름한 가슴을 사모하고 있으면서도 훌륭한 한량, 재사, 문인 들이 다투어 정을 주겠다는데, 동서는 말할 것도 없고 풍류도 여인의 깊은 속내도 분별 못하는 무인에게 정을 줄까보냐고 말하면서 남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요염한 여인처럼 한 옆으로 나 앉으면서 살짝 옆 눈을 흘긴다.

박계숙의 그날의 일기 중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날 아침 애춘(愛春)이란 애가 아름다운 금춘(今春)을 데리고 방에 들어오니, 그 아름다움이 옛날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이요, 왕소군의 절색이라. 비단 옷을 입은 모습은 가을 구름에 숨은 달과 같고, 푸른 버들가지에 눈이 돋은 듯하며, 봄 연못에 비친 연꽃과 같았다. 금춘의 자(字)는 월아(月娥), 노래를 잘하며 바둑도 둘 줄 알아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거문고와 가야금에 능했다. 저녁이 맞도록 이야기하니, 어찌 능히 춘정이 없겠는가. 처음에 먹었던 돌과 같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다.....

 

나도 이러하나 낙양성동(洛陽城東) 호접(蝴蝶)이로다.

왕풍(枉風)의 지불려 여긔져기 단니더니,

새외(塞外)예 명화일지(名花一枝)예 안자 보랴 하노라. -화답가(和答歌) 3

 

나도 이렇게 근엄한 척하지마는 낙양 성동의 벌나비로다.

바람에 불려서 이리저리 날아 다니다가,

변방의 어여쁜 꽃가지를 보니 앉아 보고 싶구나

 

여념 집 보통 여자라도 그 육체가 그리웠을 건장한 서른일곱 남자에게 있어서 명모호치(明眸皓齒)의 양귀비와 비견되는 호치단진(皓齒丹唇)의 여인 금춘을 만난 박계숙이 명화일지(名花一枝)에 앉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정감의 유로(流露)가 아닌가? 이에 금춘도 저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아녀(兒女) 희중사(戱中辭)를 대장부 신청(信廳) 마오.

문무일체를 나도 잠깐 아노이다.

하물며 늠름무부를 아니 걸고 엇지리-화답가(和答歌) 4

 

동서도 분별 못하는 무인에게 정을 줄까보냐던 말은 그냥 해본 소리오니 깊이 담지 마소서. 그것은 장부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한 아녀자의 소견머리 없는 말이었습니다. 문신 무신을 가릴리가 있겠습니까. 씩씩하고 듬직한 정부(征夫)의 그 넓은 가슴만 이 그리울 뿐이랍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뜨거운 하소연이다.

그날의 일기에는 이날 밤의 일을 여금춘동침(與今春同寢)이라 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이날 밤 나는 금춘과 더불어 벼개를 같이하고 잤다. 서로를 사랑하는 정이 깊었다. 김공(金公)은 평소에는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이날 밤에는 애춘(愛春)이와 함께 사랑을 불태웠다.

이날 밤 결국 박계숙은 금춘이와 동침하였다.

영하(零下)의 추운 겨울 밤을 녹인 두 사람의 만단 정화(萬端情話)야 어찌 여기에 다 실을 수 있겠는가? 그저 짐작이나 할 따름일 뿐…

여기서 애춘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김공은 누구인가? 만약 저 왜장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평양의기 계월향(桂月香)의 정인으로 그녀의 죽음 후 여인을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았던 김응서 장군이었다면 상관인 김응서 장군이 의당 금춘이와 뜨거운 밤의 역사를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을까..

하긴 어쩌면 애춘이라는 기생이 손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력으로 11월 27일이면 요새 양력으로 따져 12월 하순이거나 정월 초순으로 한겨울 이다. 삭풍 몰아치는 북녁의 겨울이야 얼마나 추우랴. 그 추운 영하(零下)의 겨울 밤을 녹이는 두 사람의 정다운 사설은 남쪽의 정인들이 문풍지 바람 막고 숯불 이글거리는 화롯불 쪼이며 나누는 그런 초저녁의 로변정담(爐邊情談)하고는 다르리라. 장작불 잔뜩 지핀 장수의 군막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쓰고 온몸으로 땀에 젖어 긴 한숨 삼키다가 절정의 순간 입술로 절로 새어 나오는 한마디 신음으로 밤을 가르는 그런 정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깊어가는 겨울. 대한(大寒)이 소한(小寒)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년 중 제일 춥다는 소한을 전후한 그 북쪽 변방의 촌락을 휩쓰는 눈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북녘의 밤. 마음도 몸도 하나가 되어버린 두 남녀의 애정의 거친 호흡은 차가운 북녘의 눈바람도 녹게 했을 것이다.

함경남도 홍원 기생 홍랑이 찬바람 휭휭 부는 변방의 군막을 찾아 천리 길을 물어 물어 북도평사 최경창이 있는 함경도 경성이란 곳에 드디어 무사히 도달하고… 서로 그리워했던 두 사람은 그 이듬해 최경창이 다시 서울로 부임명령을 받게 되기까지 한동안 행복한 동거시절을 막중(幕中)에서 보내며 죽음보다 강하고 꿀보다 감미롭고 꽃보다 향기롭고 시보다 아름다운 절대사랑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홍랑과 금춘. 이들 함경도 여인들의 거침없고 숭고한 사랑에의 헌신… 이래서 남남북녀라는 말이 생겨난 것인가?

박계숙이 부북일기(赴北日記)를 쓴 지 40년 후에 그의 아들 취문이 아버지가 지났던 똑같은 길을 지나면서 쓴 일기 속의 작품을 소개한다. 즉, 을유년(1645) 2월 1일에 문고개(門古介)를 지나며 읊은 작품인데, 부자가 수십 년을 격하여 같은 수 천리 이역 변방의 같은 길을 지나면서 시조를 읊고, 그것이 분명한 기록과 함께 남아 전한다는 것은 기이하고도 보배스런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을유(乙酉) (1645) 2월 1일

눈덮인 길을 걸어 문고개(門古介)를 넘어 수중대(水重臺)를 지나니, 대(臺) 아래는 만경창파요 대(臺)의 주변은 천길 낙락장송이 있어, 거길 오르니 꼭 봉도(蓬島)에 드는 것 같았다.

 

노래를 짓다.

뭇노라 수중대(水重臺)야 너 나건지 몃 천년(千年)고.

고금(古今) 호걸이 몃 몃치나 지나더니.

이후의 뭇나니 잇거든 날 왓더라 닐러라.

 

무인의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조를 지으면서 그는 어쩌면 40년 전의 아버지가 지켰던 산하를 직접 밟고 눈으로 보며 또 그 때 아버지가 지어 남겼던 노래를 읊조리는 그의 감개와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부자가 다같이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썼음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위국충정의 정신을 담은 시를 포함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겨 시조문학의 유산을 살찌게 하고 있음은 더욱 반가운 일이다.

1619년 도원수 강홍립의 부장이 되어 두만강을 건너 명나라 장군 유정과 같이 건주위 정벌을 하기 위하여 가던 도중 14년 전 박계숙이 지나갔던 관산(關山)에서 장부의 위국충정의 심사를 아래와 같은 시조로 남겼다.

 

십년 갈은 칼이 갑리(匣裡)에 우노매라

관산(關山)을 바라보며 때때로 만져보니

장부의 위국 공훈을 어느때에 들이올고 김응하 (金應河)

의기사의 진주기생 산홍(山紅) <퍼옴>

 

진주 촉석루 벼랑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길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인데, 보는 이들은 눈살부터 지푸린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그 이름들도 함께 있으니, 말 그대로 오욕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논개의 넋이 깃들인 곳에 한점 부끄럼을 남긴 것이 아닐까.

그 중 눈길을 끄는 이름도 있다. 산홍(山紅)이란 두 글자.

당시 지체높은 권문세가의 어르신들(?) 이름 곁에 한 획을 남긴 산홍은 누구였을까.

바로 당대를 풍미했던 진주 출신 기생 이름이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씨(1919-1960)는 노래로써 산홍을 애타게 찾기도 하였다.

 

산-홍아 너만-가-고 나는 혼자-버-리-기-냐

너---없는 내가-슴-은 눈오는 벌판이다

달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이재호씨가 1940년 태평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세세년년’이란 대중 가요의 일절이다.

가수 진방남이 구수하게 불렀을 이 노래 가사 중,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이요, 달없는 사막이요, 불꺼진 항구라고까지 말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예부터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릴 만큼 진주 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진주 기생들의 가무는 조선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정조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총애를 받아 왕실에서 베풀어지는 잔치에 불려나간 명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산홍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만날 수 있다.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 조에

“진주기생 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 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이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기생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일점홍(一點紅)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 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셈이 되었다. 이를 들은 매천 황현은 일개 기생의 기개이지만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고종 말년에 나라에 경사가 자주 있어서 연회를 열 때마다 평양 등 전국 각지의 기생들을 불러 올렸다. 이때 올라온 기생들 중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같은 이름의 기생이 많아 분간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생의 원적과 성명을 함께 부르는 풍속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평양 기생 이난향, 대구기생 서향파, 진주기생 김영월, 해주기생 이벽선 등등으로 불렀다.

진주 기생 산홍도 당시 서울에서 이지용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한 기록을 보면,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의 진주기생 산홍을 소실로 삼으려하자.....”

라고 하였다. 산홍은 명월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홍은 선배 기생 논개의 사당을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산홍의 시는 의기사에 들어서면 의기사 현판 왼쪽에 걸려 있다. 현판 오른쪽에 또 한편의 시가 걸려있는데 매천 황현의 작품이다. 1898년 매천이 진주를 방문하여 의기사에 참배하고 지은 시이다. 산홍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린 매천의 시가 산홍이의 시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을사조약때 나라 팔아 먹은 매국노 이지용을 나무란 지조 높은 진주 기생 산홍의 시가 나란히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기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논개 영정만 보고 발길을 돌린다.

기자는 논개 사당에 걸린 산홍의 시를 보면서, 산홍이 임진왜란때 태어났더라면 충절의 고장 진주는 2명의 의기(義妓)를 배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 네이브 블로그 물처럼 바람처럼

 

 

 

 

맹사성(孟思誠)이야기

맹사성은 조선초기 문신이다. 흔히들 소를 타고 다니는 재상하면 그를 말한다. 고려 유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조선 세종때 좌의정을 지낸 분이다. 평생을 청렴, 검소하게 지내 재산을 모을 줄 몰랐다. 집은 비좁고 비가 오면 방안에 물이 쏟아질 정도였다. 출타할 때도 수행원이 따라오는 것이 번거롭다고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이분의 시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좋다고 남 싫은 일 하지말며

남이 하더라도 의(義)아니면 따르지 말라

우리는 천성(天性)을 지켜 생긴대로 하리라

 

본인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 글이다.

한번은 맹사성이 고향에 가던 도중 안성과 진위에서 고을하인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니 늙고 초라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도 우스워 놀려대자 맹사성이

“나는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는 늙은이요”하고 말했다.

고을 군수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기겁을 해 달려오다가 가지고 있던 관인을 연못 속에 빠뜨렸다. 그래서 이 연못을 지금도 인침연(印沈淵: 도장이 빠진 연못)이라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고향 온양에서 서울로 오던 길에 용인에 이르렀다. 때마침 비를 만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야만 했다. 물론 관아에 들리면 대접을 받겠지만 맹사성의 성품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조그만 방에서 쉬려고 하던 차 어느 젊은이가 나귀를 탄 채 종을 거느리고 주막에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맹사성은 모른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영남의 부잣집 아들로 한양에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젊은이가 보니 방안에는 아무도 없고 꾀재재한 늙은이만 있는 것 아닌가. 장난기가 발동한 젊은이가 말을 붙인다.

“ 노인장 바둑이나 한번 둡시다”

“ 바둑둘 줄 모르는데...”

“ 그럼 장기나 한판 둘까요”

“ 그것도 못하는데...”

“ 그럼 할줄 아는 것이 뭐요”

“ 시나 짓도록 합시다.”

“ 뭐요, 시를 짓자고요”

“ 한시(漢詩)말고 우리말로 끝에 ‘’ 또는 ‘’을 붙여 짓도록 합시다”

“ 참 이상한 시도 다 있네. 그래 먼서 불러보시오”

“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한양 간

“ 무엇하러 가는

“ 시험보러 간

“ 내가 합격시켜 줄

“ 천부당 만부당이

그로부터 며칠 후 맹사성이 의정부에서 정사를 논하고 있을때 이번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인사를 드리려 왔다. 맹사성이 보니 주막에서 만난 젊은이도 있었다. 맹사성이 말을 붙인다.

“ 그 사이 어떠한

젊은이가 머리를 들고 보니 상좌에 앉은 정승이 바로 용인 주막에서 자기가 함부로 대한 늙은이가 아닌가. 순간 사색이 돼 머리를 조아리며

“ 죽어지 당. 죽어지

맹사성은 크게 웃고 그 젊은이가 자신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젊은이도 그때의 경솔함을 뉘우쳐 말조심했고 나중에 크게 출세를 했다 한다. 청렴결백하고 인품이 너그러운 관리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충절의인 김상헌(金尙憲)이야기

김상헌(金尙憲)은 조선중기 문인으로 호는 청음(淸陰)이다.

선조 29년 문과에 급제해 수찬,교리를 거쳐 인조때 대사헌, 대제학을 엮임하고 예조,공조,형조,이조판서를 지낸 유명한 인물이다.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자결하려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동으로 돌아갔는데 끝내 청국인들에게 붙잡혀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심양에 잡혀온 그는 모진 심문과 고문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자 결국 청나라는 그의 충절에 감동해 돌려보낸다. 귀국 후 좌의정에 올랐다가 83세로 생을 마쳤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하여라

 

청나라를 거부하고 싸움을 주장하다가 잡혀가는 억울하고 서글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떠나는 발길, 고국산천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마음을 굳힌 그에게 청나라 사람들은

“당신은 의인이요”

하면서 결국 돌려보냈다.

병자호란때 인조는 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으로 대피했다. 청나라는 20만 군대로 남한 산성을 포위했다. 반면에 우리나라 군사는 1만7천여명, 왕이하 관리들이 3백명정도였다. 식량마저 부족해 50일치정도 남았다.

남한산성에서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적을 보면서 임금과 신하들이 울면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당시 회의석상에는 종사를 보존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주화파와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오랑캐에 항복할수 없으니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강화로 피신했던 빈궁과 세자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가족 등 2백여명은 이미 피란했던 궁궐이 함락되고 청군에 사로잡혀 남한산성 초입까지 끌려왔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주화파 대표 최명길(崔鳴吉)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을 오가면서 화의를 주선, 나라를 구하고자 했고, 싸울 것을 주장하는 김상헌등은 주화파가 나라를 망친다고 잡아 죽이려고 했다. 마침 최명길은

“조선국왕은 대청국 인성황제에게 말씀 올리나이다”

라는 항복문서를 쓰고 있었다. 김상헌은 이글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고는

“명망있는 선비의 자제가 어찌 이럴수 있소”

하면서 통곡했다. 그러자 최명길은

“대감은 찢으나 나는 맞추리다”

하면서 조용히 대꾸했다. 주변에 있던 관료들은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되고 다시 주워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된다”

며 애닲아 했다. 결국 인조는 척화파를 누르고 주화파의 편을 들었다. 굴복하기로 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강경한 김상헌을 충절의인이라고 칭송했고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작성해 나라를 구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김상헌은 항복을 거부해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렸고 최명길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게 했으니 둘다 관리로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강화가 성립된 후 김상헌은 청나라에 잡혀간다. 이때 이 시조를 지은 것이다. 그후 최명길도 명나라와 내통해 군비를 증강했다는 죄목으로 청나라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두 사람은 이국땅 감옥에서 만난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청을 꺾기 위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최명길 또한 김상헌의 꺾기지 않은 절개에 감탄했다.

오해가 풀린 것이다. 강화도 척화도 국가를 위한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서로가 알게 된 것이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이야기

성삼문은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 단종(端宗)이 열두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던 3정승을 죽이거나 귀양보내고 자기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내 쫒은 후 죽인다. 그후 정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의 기세에 몰린 단종이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넘겨주자 수양대군은 임금이 된다. 이 같은 수양의 행위에 대해 집현전학사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등이 단종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도모한다.

세조 6년,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잔치가 궁궐에서 열리게 되자 성삼문등은 이 기회에 일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같이 거사를 하기로 약속한 김질(金礩)의 고발로 세조에게 잡혀 극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떨어져 영월에 귀양가서 죽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삼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13번이나 만나러 다닐 정도로 열성적 학자였다. 그도 단종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9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됐다.

성삼문이 거사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때 세조가 묻는다. 거취를 분명히 하라고, 그러자 성삼문은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라고 답해버린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다. 또 세조가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

고 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단근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

고 성삼문 말한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또 한수의 시를 읊는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이밤은 어느집에서 쉬어 갈수 있을까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온다.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고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당시 역적들은 삼족을 멸하거나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노비를 삼았다. 성삼문은 이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처형됐다.

 

 

 

 

효자 박인로(朴仁老)이야기

박인로는 조선중기 무인이며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 13세때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가 31세 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에 가담해 싸웠다. 38세 때는 좌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휘하에서 임진란을 마무리하는 싸움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지으면서 가난하게 살다가 82세로 세상을 뜬 분이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박인로의 노래다. 소반위에 놓여있는 잘 익은 저 감이 참 좋아도 보이구나. 유자는 아니지만 가져다가 늙으신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

그러나 어쩌랴,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것을... 박인로의 가슴은 미어질 듯 애닲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다 느끼는 감정이다.

좋은 것 맛있는 것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 이런 가슴을 간직한 우리이기에 5천년 역사를 이어 올수 있었다.

우리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의 10분의 1만 부모에게 되돌려도 효자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부모 살아서 잘 모시지 못해놓고 죽은후 눈물 흘리는 사람은 효자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박인로의 시조에 또 이런 글이 있다.

 

왕상(王祥)의 잉어잡고 맹종(孟宗)의 죽순꺾어

검던머리 희도록 노래자(老萊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養志誠孝)를 증자(曾子)같이 하리라

 

왕상은 중국 진나라때 효자다. 그는 부모가 아프면 잠자리에서도 옷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때 옷 입는 시간만큼 지체되기 때문이다. 왕상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계모를 맞이했다. 한번은 추운 겨울 병환을 앓고 있는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했다. 왕상은 얼음이 가득 얼어있는 강에 가서 잉어를 잡으려고 뛰어 들려는 순간 얼음 속에서 한쌍의 잉어가 튀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했다고 놀라워했다.

맹종은 중국 오나라의 효자다. 어머니가 죽순을 매우 좋아했는데 겨울날 죽순이 드시고 싶다는 것이다. 맹종이 텅빈 대밭에서 탄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언 땅에서 죽순이 솟아나와 그것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대밭에는 겨울에 죽순이 솟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맹종죽이라고 말하는 대나무도 여기에서 연루된 것이다.

노래자는 중국 주나라 때 효자다. 자신의 나이 70세 늙은 몸이 돼서도 어린아이 때때 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새를 잡아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물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방법이다.

증자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때 효자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효에 대해서는 으뜸가는 사람이며 지성으로 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박인로가 노래한 것은 비단 중국의 효자들을 열거한 것만은 아니다. 효자들을 본받아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옛사람의 노래로만 끝나야 하는가. 박인로의 가르침에 가슴저린 사람 많으리라.

 

 

 

 

충신 김상용(金尙容)이야기

김상용은 청나라가 처들어 왔을때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간 척화파 김상헌의 형이다.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를 읊었던 분이다.

김상용은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한후 권율(權慄)장군을 따라 호남과 영남지방을 다녔다. 광해군때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인조반정후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냈다. 병자호란때 비빈과 대군들을 모시고 강화에 피신했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책임을 느끼고 자결했다. 70세 때였다.

 

사랑 거짓말이 님 나사랑 거짓말이

꿈에 뵌단 말 그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아니오면 어느꿈에 보이리

 

내가 님이 그리워 밤마다 잠 못 이루는데 꿈에 보인다는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오. 사랑한다는 말 모두 거짓이오. 멀리있는 사랑을 그리워한다면 잠 못이루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꿈속에서 본다는 말은 잠을 자고 있다는 것 아니오. 그래서 믿지 못하겠소.

김상용이 시인인지 수사관인지 알수 없는 정교한 추리요. 치밀한 논리 전개다. 김상용은 자살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감동적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빈들과 세자를 모시고 강화도에 갔으며 강화방위의 책임을 지고 한양에서 파견된 사람이 다. 김상용은 최선을 다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직면한다. 그는 강화성 남문 다락위에 화약궤를 쌓게 한다. 화약궤가 쌓이자 김상용은 아무 일 없는 듯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건네주면서

“내 몸이 없어지더라도 이 옷으로 거짓장례를 지내거라”

고 당부했다. 한참을 앉아있던 김상용은 가슴이 답답하니 담배한대 피우겠다고 불을 가져 오게한 후,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명령한다. 조용히 불을 화약더미에 붙이고 폭사했다. 강화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책임을 죽음으로 택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를 피해 숨어있던 강화군민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결사적으로 싸워 강화함락이 며칠 지연됐다.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가고 형 김상용은 강화도 성곽에서 자폭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책임을 진 형제간의 용기가 대단하다.

형과 동생의 기개와 충절,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해 군자의 기품을 갖고 있던 김상용은 자신이 지은 시에서도 그 감성을 엿볼수 있다.

 

금향로속 향저물고 물시계 멎었는데

어디에 가있다 누구와 사랑나누다가

달그림자 난간에 오르자 속떠보려 오느냐

 

마치 현세의 정경을 다시 보는듯하다. 밤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심사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감성이 풍부하고 여린 사람이 화약궤 위에서 자폭할 정도로 강인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몸에 익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내 책임이 아니다. 나 몰라라 하는 요즘 세태를 김상용이 보았다면 뭐라고 이야기 할까.

어느날 밤인가 TV에서 보니 검찰청 엘리베이터 앞에서 억지 미소 지으며 손 휘젓는 사진들이 보였다.

 

 

 

 

오우가(五友歌)의 고산 윤선도(尹善道)

윤선도는 호를 고산(孤山)으로 하는 조선중기 유명한 시조작가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품성이 뛰어나고 남달리 총명해 수많은 책과 의학, 의복, 음양, 지리에 이르기 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광해군4년 26세때 진사시험에 합격, 30세 때 이이첨(李爾瞻)일파의 불의를 비난하는 병진상서를 올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상소문은 임금까지 전달되지 못한다. 고산은 도리어 이이첨 등에 의해 경원 땅으로 유배된다. 그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8년이 지나 귀양살이에서 풀려난다. 인평대군의 사부가 됐다가 예조정랑, 시강원 문학등 벼슬에 올랐지만 당시 집권파인 서인의 모략으로 49세때 고향으로 낙향한다. 50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 원손과 대군 등이 강화도로 갔다는 말을 듣고 아들과 종 수백명을 데리고 강화도로 향했지만 이미 함락된 뒤였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 환도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윤선도는 낙심하고 그길로 탐라(현 제주도)로 가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결심을 한다. 그러나 제주도 가던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그곳에 터를 잡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짓고 평생 거처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인조는 병자호란 때 임금을 뵙지 않고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윤선도를 평안도 영덕으로 귀양보내 2년동안 그곳에서 지낸다. 효종 때도 공조참의가 됐으나 서인과 싸움으로 또 귀양을 간다. 귀양살이 햇수는 무려 19년간이었다.

고산이 병진상소 때문에 경원에서 맨처음 귀양살이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밥상에는 하얀 쌀밥이 올라있었다. 잡곡밥만 먹다가 쌀밥을 본 고산은 부인에게

“이것이 무엇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귀양살이의 처참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어쨌든 고산은 시조의 일인자다.

 

뫼는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뜻은 많고많고 하고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느니

산수간 바위아래 띠집을 짓노라니

그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석은 시골뜨기의 분에맞다 하더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후에

바위끝 물가에서 싫도록 노니노라

그밖에 다른것까지 부뤄할 것 있으랴

 

귀양살이를 많이 해서인가. 천성이 고고(孤高) 해서인가 시조에 나타난 고산의 성품은 깊고 온화한 외로운 학이었다.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산이 길고 길고 물이 멀고멀고 생각이 많고 많고, 외기러기 울고 울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혼자 있기를 19년, 고산은 자연 속에서 홀로 자신을 갈고 닦아 세상의 풍진을 다 씻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자기수양을 철저히 한 결과가 시조가 되었나. 덕분에 후손들은 주옥같은 고산의 생각과 감성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영광이다.

고산 윤선도의 삶은 81세까지 이어진다. 그중 19년이 귀양살이다. 19년의 귀양살이는 당시 집권층인 서인과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나를 알수 있는 확실한 증거다. 귀양살이를 하는 윤선도는 홀로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니었다. 하늘의 달과 구름이 친구요. 바위와 물 그리고 꽃과 대나무까지도 벗이었다. 이들을 보면서 느끼면서 지은 시조가 오우가이다.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때가 많구나

좋고도 그치지않는건 물뿐인가 하노라.

 

양털같은 뭉게구름이 하늘에 떠있다. 그러나 뒤를 이어 먹구름이 몰려온다. 비가 오려나. 바람소리가 싱그럽게 들린다. 어느덧 고요가 그 뒤를 따른다. 듣기에 좋으면서 그치지 않는 것은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 뿐이로구나

 

꽃은 무슨일로 피어서 빨리지고

풀은 어인일로 푸르다가 바래는가

아마도 변치않는건 바위뿐인가 하노라

 

꽃도 풀도 수명이 어찌 그리 짧은가. 보기 좋아 다시 보면 이미 저버리고 없는 것을. 그래도 묵묵히 자리 잡고 변하지 않은 것은 바위였구나. 고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天)에 뿌리 곧은 줄 그걸보고 아노라

 

삼라만상은 솟았다가 기울어지고 태어나면 죽는 것을.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지는 것이 당연한데 너는 구천 깊은 곳에 뿌리를 박았는지 변함이 없느냐. 너의 지조와 절개는 마치 나와 같구나, 어쩌면 고산은 이렇게 읊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무소유, 법정스님은 가지지 않는 것이야 말로 모두를 가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것 또한 가진 것이 아닐까

 

작은 것이 높이떠서 만물을 다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아니하니 내벗인가 하노라

 

세상모두를 다보면서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는 것. 눈아래 벌어지는 삼라만상의 변화가 부처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지금까지 아무말없이 견뎌온 자신을 달에 비유한 것일까. 달과 고산은 어딘가 닮은 꼴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변함없는 바위, 사시사철 푸르름이 그대로인 소나무, 속이 텅 비었으면서 꼿꼿한 절개의 대나무, 세상을 두루 비추면서 말없는 달, 오우가의 다섯 친구는 고산 자신이었다.

 

 

 

 

오성 이항복(李恒福)이야기

이항복은 선조때 명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오성군(鰲城君)에 책봉되었다. 후에 병조판서,우의정,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지 2년후, 의인황후 박씨와 혼인했으나 소생이 없이 죽자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분이 인목왕후다. 선조는 왕비의 몸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궁들에게서 열두형제를 얻었다. 맏아들이 임해군이고 둘째가 광해군이다. 당연히 임해군이 세자가 됐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다해서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뒤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왕후의 몸에서 난 적자(嫡子)로 세자를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일부 신하의 반대로 실행을 보지 못한채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다. 광해군은 임금이 된 후, 적자로 세자를 바꾸는데 반대한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등 북인들을 중용했다. 세력을 잡은 이들은 정적을 몰아낸 후 임해군을 죽인뒤 인목왕후 아버지 김제남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누명을 씌워 죽인다. 또 14살밖에 안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그곳에서 죽였다. 그리고 대비 인목왕후를 서인(庶人)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이 인목대비 폐모론이다.

이 폐모론에 상소를 올려 적극 반대한 사람중 하나가 이항복이었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벌을 받는다. 이항복은 삭탈 관직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간다. 귀양을 가면서 부른 노래가 이것이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어떠리

 

철령 높은 봉우리를 단번에 넘어가지 못하고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임금께 버림받고 귀양가며 흘리는 외롭고 원통한 내 눈물을 구중궁궐 임금님 계신 곳에 비삼아 뿌려 충성된 이 마음을 전하고 싶구나.

귀양명령을 받은 이항복은 먼 길을 떠나면서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염구(殮具)를 준비하게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조복(朝服 관복)으로 염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 선비의 웃옷)로 하라”고 당부한다.

철령을 넘어 북청에 온 이항복은 강윤복(姜胤福)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강윤복은 가산을 잘 다스려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고 세상의 근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를 본 이항복은 그를 부러워하며

“사람은 재상이 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강윤복이 만큼 살면 족하다”

라고 하면서 벼슬살이 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항복은 귀양온지 다섯달 남짓 살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시절(時節)도 저러하니 인사(人事)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저러 아닐소냐

이런다 저런다 하니 한숨겨워 하노라

 

40년 관직생활이 허무했다. 조정은 당쟁으로 뒤덤벅이고 사람들은 모두가 어수선한 가운데 오로지 정의 편에 서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당파에 초연하려했으나 결국 당쟁의 희생물로 끝나버린 인생.

광해군때 임금의 형 임해군을 변호하다가 탄핵받았고 영창대군을 구원하려고 힘썼으며 폐모를 반대하다가 결국은 귀양가서 죽은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선죽교에 흐른피 정몽주(鄭夢周)이야기

정몽주는 연일 정씨로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이다.

고려 공민왕 9년 22세때 관로에 진출했다. 이성계와는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철령이북의 땅을 자기네 것이라 억지를 부리자 최영장군이 요동정벌을 강력히 주장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가 돼 압록강변 위화도 까지 쳐들어간다.

당시 이성계는 최영의 휘하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진군하지 않다가 군대를 철수한다. 이것이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군을 돌린 후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과 함께 최영을 체포해 고양군으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충주로 옮긴 후 죽인다. 최영장군을 죽인 이성계 일파는 당시 임금인 우왕까지 강화도로 추방한다. 다음 임금 창왕도 1년을 못 넘긴다. 고려 마지막 공양왕이 옹립되자 이성계는 스스로 문하시중이 됐다.

정몽주는 이성계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고 기회를 엿본다. 마침 이성계가 명나라에 갔다 오던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정몽주는 하늘이 도운 것이라 기뻐하면서 이성계를 탄핵하는 글을 지어 고려의 관리들에게 돌렸다. 이글을 읽은 조정 관리들이 동요하자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황주에서 개성으로 급히 모셔온다. 그리고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굳힌다.

정몽주가 이런 낌새를 눈치챘다. 죽음을 각오했다. 정몽주는 조상을 모신 사당에 인사를 올린 후 두 아들을 불러 늙으신 어머니를 잘 봉양하라고 마지막 훈계를 했다.

이방원은 워낙 명망이 높은 대학자 정몽주를 죽이는 것보다는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성계의 병이 완쾌되자 축하연을 베푸는 자리에 정몽주를 초청한다.

정몽주는 때가 온 것을 알아 차렸다. 그날 밤 모든 것을 각오하고 마지막 밤을 보내려는 찰라 갑자기 사랑방 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 아니 벌써 나를 잡으러 온 것인가”

정몽주는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자 거기에는 이성계의 형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변중량은 이성계의 측근이다.

“선생님 빨리 피하십시오. 그리고 내일 절대로 방원의 집에 가시면 안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변중량은 정몽주의 인품이 아까워 충심으로 당부하러 온 것이다.

정몽주는 조용히 웃으면서

“무얼 그리 서두르시오. 마침 오셨으니 우리 술이나 한잔 하십시다”

하고는 변중량과 함께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늦게까지 잔 정몽주는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간다.

처음 술자리에서는 이성계의 병이 완쾌된 것을 축하하는 치하가 가득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슬쩍 자신의 속셈을 내보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 선생, 혼자 고고한 척 하지 마시오. 이렇게도 한세상 저렇게도 한세상인데 우리와 함께 한백년 잘 살아봅시다.

정몽주를 포섭하려는 이방원의 마음이었다. 이 노래가 하여가(何如歌)다.

이 소리를 들은 정몽주의 심사가 뒤틀린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노골적일 줄이야. 정몽주가 이방원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표현한다.

정몽주는 자신의 마음을 굳히고 노래 한수를 이방원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결심은 단호했다. 한번 아니 백번을 죽고 또 죽어 뼈마저 흙이 되는 한이 있어도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노라 .

이방원은 안색이 변하면서 눈쌀을 찌뿌린다.

술에 취한 정몽주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자 이방원이 눈짓을 한다. 자객이 정몽주의 뒤를 따라 급히 나갔다. 밖에 나온 정몽주가 나귀를 거꾸로 탄다. 곁에는 따라왔던 김경조(金慶祚)란 부하가 서있었다. 김경조가 보니 정몽주가 말을 거꾸로 타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술이 많이 취해 그렇거니 속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쯤 가다가 정몽주가 김경조에게 말한다.

“나 혼자 갈수 있으니 너는 어디서 놀다 오너라”

그러자 김경조는

“대감님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대감님께서는 왜 나귀를 거꾸로 타셨나요”

라고 물었다. 김경조를 잠시 내려다보던 정몽주가 대답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수 없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를 죽이려는 자객의 눈을 보기 싫어 나귀를 뒤로 탄 것이다. 나를 죽이려는 그자들의 얼굴을 봤을 때 내마음속에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지 누가 알겠느냐”

정몽주는 이미 죽음을 결심한 상태였다. 김경조는 이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주인과 같이 죽는 것은 영광이다”

라고 생각했다. 함께 죽기를 다짐한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몽주가 탄 나귀가 어두컴컴한 돌다리에 다다랐을때 자객 조영규(趙英珪)가 다리 밑에서 뛰어나와 쇠도리깨로 정몽주의 머리를 후려쳤다. 정몽주는 나귀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김경조도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공양왕 4년(1392년)때 일이었다.

정몽주가 죽은 다리이름이 원래는 선지교(選地橋)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죽을때 흘린 피가 스며든 돌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오자 사람들은 정몽주의 충절이 대나무로 변했다고 말하며 이 다리를 선죽교(善竹橋)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구를 닮았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고산 윤선도가 읊은 시가 생각난다. 비어있는 물욕의 창고를 가득채울수도 있으련만 정몽주의 곧은 성정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몽주에게는 대단한 어머니가 있었다. 자식인 정몽주에게 지켜야 할 길과 가야할 길을 어려서부터 교육시켰다는 걸 보여주는 어머니의 글귀가 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싫어하니

청파에 잘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속 좁은 까마귀들이 서로 욕심을 채우려고 날뛰는 곳에 백로인 너는 가지마라.

너의 굳고 곧은 지조와 절개를 그들이 시기할 것이다. 어쩌면 너를 희생의 재물로 삼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예언했다. 아들의 장래를...

결국 정몽주는 선죽교의 화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조준(趙俊)이야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새 왕조의 태조에 등극한다. 조준은 이성계의 뒤에서 새 왕조를 만드는데 각별한 공헌을 한사람이다. 그래서 조선조 개국공신 대열에 끼게 된다. 지금도 강원도 속초 가는 길에 하조대(河趙臺)라는 지명이 있는데 하조대는 하륜과 조준을 줄여 만든 말이다.

이씨 조선이 만들어 질때 의전을 맡은 이가 저 유명한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영남 삼기 사람으로 속성이 박(朴)씨였다. 18세에 출가해 소지선사에게 계를 받고 진천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20세 때 원나라에 가서 인도승려 지공을 만난다. 또 고려 명승 나옹과 만나 제자가 됐다. 그후 설봉산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은 이씨조선이 세워지자 태조의 요청으로 왕사가 됐다.

무학대사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답사를 나섰다. 고려시절에는 이곳을 남경이라고 불렀으며 산이 험하고 앞에는 강이 있어 천년도읍지로 아주 적지였다. 하지만 답사결과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무학이 고민에 빠져 생각하고 있는데 한 늙은이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십리를 더 가면 스님이 찾는 곳이 있을 것이오” 무학이 고민하며 서 있던 곳이 지금의 왕십리다. 무학은 그 노인의 말대로 십리를 가니 적당한 땅이 있었다. 삼각산 아래 지금의 광화문 근처였다. 지세를 본 무학대사는 감탄했다. 왕궁을 지을 땅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다시보니 앞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가 염려됐다. 무학대사는 비방으로 해태 한쌍을 만들어 화기를 제압하고 이곳을 도읍지로 선정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 무학이 선정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 이성계는 왕조를 세울 때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고려조 신하들도 많이 기용했다. 이들 중에 사헌부 장령 서견(徐甄)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대사헌 강희와 함께 이성계파인 조준과 정도전등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고는 관직을 사직하고 금천(지금의 시흥)에 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태조가 이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 고려조 신하가 그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만일 우리 이씨가 망한 뒤 이씨를 사모하는 신하가 있다면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그냥 내버려 둬라” 이말에 임금 앞에서 무슨 역모나 발견한 듯 벌떼같이 일어났던 신하들이 잠잠해졌다.

태조는 아들을 여덟두었다. 후궁 강씨를 총애해 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정하려고 하자 조준과 배극렴등이 아뢴다.

“방번 왕자는 난폭해 대통을 이을 분이 못됩니다. 꼭 강씨 소생을 세자로 삼으시려거든 방석왕자를 책봉하십시오” 태조도 이를 받아들여 방석을 세자로 삼는다. 그러나 이씨 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방원의 불만은 매우 컸다. 결국 태조 7년 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조준은 귀양을 간다. 조준의 심경은 혼란스러웠다. 술이라도 마시고 한 세상 견뎌야만 할 것 같다.

 

술 취해 길가다가 산속에서 잠이드니

누가날 깨울소냐 천지가 잠자리다.

광풍이 부른 빗줄기만 잠든나를 깨운다.

 

조준이 술에 취해 부른 노래가 아니다. 마시지 않았어도 충분히 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조준은 태조의 세력이 안정되자 개국공신이 되었다.이방원은 또 배다른 동생 방번, 방석까지 죽여버린다. 임금이 되고픈 욕망 앞에는 형제도 없었다.

조선 2대임금 정종(定宗)이 왕에 책봉됐다. 이방원은 이복동생 방간이 조정 관료들의 신임을 얻자 그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낸 후 처형한다. 정종 2년의 일이다. 동생 방간이 방원의 손에 죽자 형인 임금 정종은 불안해 한다. 왕비 또한 시동생 방원의 눈이 무섭다고 자주 말한다.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결심을 한다.

그해 11월 하륜(河崙)과 박은(朴訔)이 방원을 추대해 왕위에 오르는데 이분이 3대 태종이다. 반면 태조 이성계는 방원이 형제를 죽인 것에 노여움을 품고 함흥으로 떠나 버린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문안을 올릴 문안사절을 함흥으로 파견하지만 사신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소위 ‘함흥차사(咸興差使)’다. 임금의 명으로 이성계를 문안하러 간 사신이 함흥에 한번가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문안사절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판중추부사 박순(朴淳)이 사절로 나선다. 박순은 사신의 수레를 타지 않고 망아지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간다. 함흥에 이르렀을 때 태조가 머무는 행재소 앞에 망아지를 메어 놓고 어미말만 타고 들어갔다. 문안사가 왔다는 말을 들은 태조가 장검을 들고 뛰어 나왔다. 문안사를 보니 자신도 잘 아는 늙은 신하 박순이 아닌가, 그때 밖에 메어 놓은 망아지가 슬피운다. “저 말이 왜우느냐” 태조가 묻는다. 박순은 엎드린 채로 “대왕을 뵈러 들어오는데 망아지가 거추장스러워 밖에 메 놓았더니 어미가 그리워 우는 것입니다.” 갑자기 태조의 표정이 바뀐다.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혼란스럽게 휘젓고 있었다. 이일이 있은 후 박순은 행재소에서 묵게 된다. 하루는 태조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천정에서 어미 쥐 한마리가 떨었다. 보니 입에는 새끼를 물고 있었다. 어미는 떨어질때 다친 부상으로 곧 죽었으나 그때까지도 새끼를 놓지 않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다 싶어 바둑판을 옆으로 밀고 엎드려 울면서 간한다.

“미물도 저렇거늘 전하께서는 어찌 아들을 버리고 떨어져 사실수 있습니까” 이말을 들은 태조가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박순은 임무를 완수하고 한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다른 문안사절은 모두 죽였는데 왜 박순 만 돌려 보내십니까”하고 간하자 태조는 일리가 있다고 말하고 어검(御劒)을 내려주면서 “만약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면 그냥 돌아오고 건너지 못했다면 베어라”고 명했다. 태조는 박순이 시간상으로 용흥강을 건넜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순은 가는 도중 배탈이나 상당시간 지체됐다. 박순이 막 배에 오르려는 순간 자객들이 도착했다. 자객들이 아무말없이 칼을 내려치니 박순의 몸 절반은 배에 있고 나머지는 물에 떨어졌다. 태조가 이 소리를 듣고 “좋은 친구를 죽였구나” 면서 슬피 통곡했다고 한다. 그뒤 태조는 한양으로 간다. 태종은 부친이 돌아오기 전 양주에 별장을 짓도록 하고 그곳에 나가 친히 태조를 마중한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가 칼을 뽑아 태종을 친다. 태종은 이리 저리 피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양주행궁에는 기둥이 수십개가 있어 그사이로 피할 수 있었다. 조준이 양주행궁을 지을때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아름드리 기둥을 수십개 세웠던 것이다. 태조는 흥분이 가라앉자 “천운이로구나” 하고 칼을 버렸다.

 

석양에 취흥겨워 나귀등에 올랐더니

십리골짝 산길이 꿈같이 지나간다.

어디서 피리소리가 잠든나를 깨운다.

 

조준이 이 노래를 부른 의미는 무얼까. 자신을 귀양까지 보냈던 이방원을 살려낸 조준, 그동안 조준 자신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태종의 실세(實勢)에 동화된 것일까

 

 

 

 

호랑이 장군 김종서(金宗瑞) 이야기

김종서는 본관이 순천이고 호를 절재라 쓰는 이조 초기 대장군이다. 조선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 세종 16년 함경도 도절제사가 돼 여진족을 물리치고 두만강 이남의 6진을 개척했다. 체구는 작았으나 지략이 뛰어나고 성격이 불같아 모두 호랑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했다고 한다.

 

장백산에 기를 꼽고 두만강에 말씻기니

썩은 저선비야 우리아니 사나이냐

어떠냐 능연각 화상을 우리먼저 하리라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서서

긴파람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백두산 꼭대기에 조선의 깃발을 세우고 두만강 흐르는 물로 싸움에 지친 말을 씻는 우리가 진정 사나이다. 우리는 국가에 공을 세운 충신들이다. 정파에 물든 썩은 선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충신을 모신 사당에 우리가 먼저 오르리라. (능연각은 국가에 공을 세운 중국 충신들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살을 에는 듯한 모진 바람은 나무 끝에 휘몰아치고 눈속에 비친 달빛이 더욱더 차게 보이는 먼 변방의 성곽에서 긴 칼 짚고 선채 한바탕 휘파람 길게 분후 목청껏 외쳐보니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구나

호방한 기개와 열정이 넘치는 이 시는 김종서(金宗瑞)의 작품이다. 그리고 12살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는 좌의정에 오른다. 6진 개척을 마치고 돌아와 병조판서가 됐고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 때는 우의정이 됐다. 문종은 재위 2년 39세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단종의 숙부 즉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임금이 되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단종이 5월에 즉위하고 그해 10월, 수양대군은 심복 홍윤성(洪允成)과 두세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김종서 집으로 달려 간다. 이때 김종서는 손자와 놀고 있었다. 마침 출타했다 돌아온 아들 승규(承珪)가 이를 보고 김종서에게 급히 말한다.

“ 밖에 수양대군이 오셨습니다. 동행한 몇 사람은 불량배 같이 보이오니 만나지 않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김종서는 의복을 갖추고 밖으로 나가

“ 아니 이 밤중에 나으리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예를 갖춘다. 그 순간 같이 온 수양대군의 심복들이 칼과 철환(鐵丸)으로 김종서를 쳐죽였다. 물론 두아들도 함께 죽였으며 김종서의 집안은 몰살됐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인 후 단종임금에게 달려가

“ 김종서가 모반을 꾀해 죽였습니다. 사정이 급박해 사전에 임금께 말씀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하면서 궁궐에 거처하기 시작했다. 단종애사(端宗哀史)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 임금 단종은 벌벌 떨면서 삼촌 수양대군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수양은 곧이어 왕명으로 신하들을 긴급소집하게 된다. 소집된 관료들은 한명회가 미리 작성한 목록에 의해 차례로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죽은 사람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등 반대파 중신들이었다. 김종서는 두만강 변방 6진을 개척한 영웅이다. 그러나 시한수 속에 깃들어 있는 기개가 그의 수명을 단축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수양대군이 볼때 김종서는 눈앞의 가시였다 . 어리고 힘없는 임금이야 거리낄 것이 없으나 왕을 둘러싼 실세는 제거대상이었다. 왕위 찬탈을 둘러싼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육신(死六臣) 이야기

성삼문(成三問)은 본관이 창녕, 자를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성삼문은 지금의 홍성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성삼문이 막 태어나려고 할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묻는 소리가 세 번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 한다. 세종 20년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29년 중시에 장원했다. 승지가 된 후에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셨다. 세종 25년 훈민정음 창제 때는 집현전 학사로 명나라를 세 번이나 왕복하는 등 한글의 완성에 공이 지대한 분이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 단종을 모시던 노 재상들과 그 일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오르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했다.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을 김종서 일파라고 몰아 강화도에 귀양보내 죽인다. 그리고는 스스로 왕이 된다. 왕이 된 수양대군은 자신이 일으킨 정난공신에서 집현전 학사들도 공이 있다고 해 공신칭호를 내려준다. 성삼문의 동료들도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베풀지만 성삼문만은 이것을 수치로 여기고 잔치를 열지 않는다. 그리고는 단종복위를 위해 동지확보에 나선다. 세조 2년 창덕궁에서 열린 명나라 사신환영행사에서 세조의 심복 한명회와 정인지, 권람 등을 해치울 계획을 세운다. 이 연회에서 성삼문의 아버지며 당시 도총관인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雲劒 임금의 옥좌 양 옆에서 큰칼을 들고 호위하는 것 )맡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창덕궁이 좁으니 운검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절호의 찬스가 무너졌다. 성삼문은 거사를 미룬다. 그러나 그때 동지로 가담했던 김질(金鑕)이 겁을 먹고 좌찬성 정창손을 찾아가 이야기한다. 정창손은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후 친국(親鞠 왕이 직접 심문하는 것)이 시작된다. 성삼문이 맨 처음 끌려 나왔다. 사육신의 이름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순간이다.

세조가 묻는다.

“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려 했는가”

성삼문은 말한다.

“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한 것입니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 그렇다면 너는 지금까지 내가 주는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이런 행동은 네 잇속을 챙기려 했던 것이 아니냐”

성삼문은 말한다.

“ 내집 창고를 뒤져 보시오. 나으리가 준 녹봉이 거기 있을 것이요”

세조는 이 말에 크게 노해 성삼문의 다리를 찌르고 팔을 부러뜨렸다. 그러자 삼문은

“ 나으리 형벌이 참혹합니다. 그려”

하면서 태연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백이와 숙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고사리를 캠)도 하는 건가

아무리 푸새것인들 그뉘 땅에 났더냐

 

이시조를 보면 성삼문의 정서가 보인다.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때 백이와 숙제의 무덤을 보고 읊은 시다. 중국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는 자신이 섬길수 없는 주나라 임금의 치하를 피해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고 산속의 고사리만 캐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 고사리는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성삼문은 백이와 숙제의 이같은 행동을 꾸짖고 있다. 자신이라면 굶어 죽으면 죽었지 먹지 않을 것이다. 백이(伯夷) 숙제(叔齊)보다 더한 절의를 평소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성삼문이었다.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 발각돼 죽은 6분을 사육신이라 한다. 사육신은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之), 유성원(柳誠源)을 일컬은다. 성삼문 다음으로 박팽년이 끌려나왔다. 박팽년은 충청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재직중이었다. 세조는

“너는 어찌 나를 배반했는가.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고 묻자 박팽년은

“ 나으리, 나는 나으리의 신하가 된 적이 없소이다”

라고 답한다. 세조가 조사해보니 충청관찰사시절 조정에 올린 장계 모두에 신(臣 신하 신)자를 거(巨 클 거)로 표시해놓고 있었다.

이개는 국문도중 절명했다. 이어서 유응부가 끌려나왔다. 유응부는 거사에 참여했던 사람 중 유일한 무인이었다. 세조가 묻는다.

“ 너는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

유응부는 눈을 부라리며

“ 자네를 없애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노라. 간사한 무리의 고발로 붙잡혔으니 어서 나를 죽이게”

라고 답한다. 세조가 크게 화를 내며 모진 고문으로 심문했으나 옆에 있는 성삼문을 보면서 세조에게 말한다.

“옛부터 서생하고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했는데 이 무슨 꼴인가, 정말 분하구나,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 서생에게 물어보게”

세조가 불에 달군 쇠 꼬챙이로 유응부의 배꼽을 지진다. 그러자 유응부는

“ 쇠 꼬챙이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게”

라고 말했다.

다음은 하위지가 국문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유성원인데 일이 발각된 줄 알고 스스로 자결했다. 성삼문을 제외한 다섯분이 남긴 글을 반추해 본다.

 

까마귀 눈비맞아 하얀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박팽년)

 

방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 하였관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가

우리도 천리에 님이별하고 속타는 듯 하여라 (이개)

 

간밤에 불던바람 눈서리 쳤단말가

낙락장송 다 기우러 졌단 말가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말해 무엇하리오(유응부)

 

손님가자 문닫으니 가는바람에 달이진다

술항아리 다시열고 시한수 읊어보니

아마도 산속에서 얻는 것은 이뿐인가 하노라(하위지)

 

초당에 일이없어 거문고를 베고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렸드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나를 깨운다.(유성원)

 

후세에 남길수 있는 절개는 순간의 상황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평소에 몸에 밴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그렇다. 사육신은 가슴속에 자리한 정의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했던 것이다.

 

 

 

 

생육신(生六臣) 이야기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여섯 분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살아있으면서 절의를 지킨이가 여섯있었으니 이들이 생육신이다.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조여(趙旅),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등이다. 그러나 남효온 대신 권절(權節)을 말하는 이도 있다.

 

간밤에 울던 여흘 슬피울어 지나더니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냈구나

저물이 거슬러 흘러가면 나도 울어 보내리라

 

원호가 귀양가서 영월땅 청령포에 거쳐하는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다.

원호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난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버린후 고향인 원주로 간다. 그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자기도 그 근처에 작은 암자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옛임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시습은 한양에서 태어나 3세때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을 줄줄 외운 신동이었다. 세종때 궁중에서 그를 불러 시험했는데 총명하기 그지없자 임금이 명주 50필을 하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재상 허주(許周)가 다섯 살 김시습에게

“나는 늙은이다. 늙을 노(老)자로 시를 지어보라”

고 하니 시습은 노목개화심불노(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라고 즉석에서 읊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단종이 왕위에서 쫒겨날 때 삼각산 중흥사에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나오지 않더니 결국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조여는 단종원년에 진사에 올라 덕망이 높았으나 단종폐위후 고향인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 아래서 은거하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남효온은 일찍이 부친을 여읜 분으로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사육신을 숭배해 ‘육신전’을 지은후 세상을 한하며 살다가 39세로 일찍 죽었다.

이맹전은 병조판서 심지(審之)의 아들로 세종원년에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원, 소격서령등을 거쳐 현감을 지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일생을 살았다.

성담수는 세종 32년 진사에 올라 문과에 급제했고 승문교리에 이르렀으나 단종사건이후 벼슬을 버리고 한양 땅을 다시는 밟지 않겠다 맹세 한후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그밖에 권절을 생육신으로 치는 이도 있는데 권절은 완력이 뛰어났으며 수만권의 책을 읽은 학자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그를 찾아가 은근히 자기편이 돼줄 것을 부탁하자 귀가 먹은 듯 동문서답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특이한 인물이 있는데 허허(許噓)가 그 사람이다. 허허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축하연을 열자

“어찌 죄없는 중신을 죽인 자들이 술이나 마시고 즐길수 있단 말이냐”

면서 참석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세조가 허허에게 우찬성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자 거제도로 귀양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였다.

세조는

“허허가 있었다면 사6신이 아니라 사7신이 됐으리라”

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숙종때 영남의 선비들이 함안 백이산아래 사당을 짓고 서산서원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김시습,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남효온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이들을 생육신이라 한 것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야기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다 시피하고 그것도 모자라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 괴괴한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단종, 그러나 단종을 따르는 이는 너무나도 많았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은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발길 예놋다.

 

왕방연(王邦衍)의 시조다.

왕방연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영월까지 호송했다가 돌아오던 중 냇가에서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단종을 영월까지 모신 이는 어득해(魚得海)라는 사람이었다.

단종은 유배돼 몇 명의 시녀와 천치인 하인하나와 함께 영월에서도 떨어진 청령포근처 암자에 감금되다시피 살고 있었다.

세조주변의 간신들은 단종을 아예 없애버리자고 아우성이다. 세조는 마지못해 사약을 몇 번 내렸으나 사약을 가지고 가던 사람들이 차마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거나 도망쳐 버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단종은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정신적으로 모자란 하인에게 명한다.

“내가 문틈으로 명주자락을 내 보낼테니 너는 그것을 힘껏 잡아당겨라”

천치인 하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문밖으로 삐져나온 명주 천을 힘껏 잡아당긴다. 한참을 당기던 하인이 이상해서 문을 열어보니 단종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단종의 나이 겨우 17세였다.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저지른 하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시녀들도 모두 청령포 벼랑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세조는 단종을 비롯한 하인들의 시체마저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당시 영월군의 호장인 엄흥도(嚴興道)라는 사람이 밤중에 단종의 시체를 수습했다. 들키면 삼족을 멸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베 몇필을 준비해 정성껏 염을 한 후 등에 지고 나선다.

단종이 죽은 때가 겨울이었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모시고 가던 길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얼마쯤 가니 소나무아래 웅크리고 있던 노루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튀어 오른다. 그곳은 주변과 달리 쌓인 눈이 녹아 평평했다. 엄홍도는 하늘이 점지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단종을 모신다. 그후 식솔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단종은 영월땅 청령포 외로운 곳에서 살 때 죽지 못해 살았다. 한때는 왕위를 계승할 세자로, 그다음에는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으로, 그리운 형제와 화려했던 영화를 버려두고 이곳에 유배와 있다 서럽게 죽은 것이다.

 

두견이 슬피 울고

산에 걸린 달마저 저무는데

그리운 사람 생각에 가슴이 아파

다락마루 난간 끝에 머리기대 서있노라.

두견아 네가 울면 내 마음도 괴롭구나,

네 울음소리 그치니 근심 또한 멀어진다.

이별한 사람들께 진심으로 말하노니

춘삼월 두견이 우는 달밝은 밤에는

누각에 오르지 말아라

 

얼마나 그리웠으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달마저 저무는 한밤중에 누각에 올라 먼 한양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마침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마저 자신의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데...

어쩔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운명에 맞길 수밖에 없는 단종의 심정은 이별이 서러운 사람들은 달 밝고 두견새 우는 밤에는 누각에 오르지 말라는 말로 당부한다.

자신과 같은 서러운 심사가 백성들의 가슴에는 쌓이지 않도록 말이다.

2백년 후 숙종 임금이 이 비극을 듣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리고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단종이 묻힌 곳을 알아내 능을 만들었다.

 

 

 

 

요절한 장군 남이(南怡)이야기

남이장군은 이조 3대 임금 태종(이방원)의 외손자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장사이고 무예가 뛰어 났으며 호탕한 성격은 외조부 태종을 빼 닮았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1세에 장군이 돼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명나라 요청으로 여진을 정벌하기도 했다. 여진을 칠 당시 남이가 이런 시조를 읊었다.

 

장검을 뻬어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일엽 제잠이 호월에 잠겼세라

언젠가 남북 풍진을 헤쳐볼까 하노라

 

일엽 제잠(한서에 나오는 조선의 별명)/ 호월(호나라와 월나라)

긴 칼 빼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조선이 북호와 남월이라는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더라. 언젠가는 이 나라들을 쳐부수어 천하를 평정하겠노라.

라며 대장부의 기개를 보여준다.

남이장군이 떠꺼머리 총각일 때, 시골 농사군 같은 사람이 보자기로 싼 짐을 지고 지나가고 있었다. 남이가 보니 그 보자기 위에 토끼 눈을 하고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른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고 뒤를 쫓으니 그 사람은 어느 대가집 안으로 사라졌다. 남이가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까 안에서 곡성이 들린다. 무슨일이냐고 하인들에게 묻자 이 댁 작은 아가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남이는 분명 아까 그 귀신장난이구나 생각하고 자신을 방으로 안내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남녀 구분이 분명했던 시절에 아무리 죽은 처자라 할지라도 외간남자가 들어갈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이의 신분을 안주인이 이를 허락해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까 봤던 토끼눈 여자귀신이 작은 아가씨 가슴을 누르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귀신이 남이를 보더니 벌벌 떨면서 도망친다. 그러자 죽었던 아가씨가 숨을 쉬면서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이가 그 집을 나서면 처녀가 다시죽고 들어가면 살아나는 것이다. 남이가 주인에게 물었다.

“ 아까 그 농사군이 가져온 것이 무엇이오”

하니 연시를 가져왔다고 답한다. 그 처녀는 연시를 먹고 체를 했던 것이다. 남이가 자신이 본 귀신이야기를 하며 약을 지어 먹이니 처녀는 다시 죽지 않았다.

이집이 당시 좌의정 권람(權擥)의 집이었던 것이다. 권람은 자신의 딸을 살려준 남이가 마음에 들어 사위를 삼고자 한다. 점장이에게 물어보니

“남이는 장차 귀하게 될 상이나 무고하게 죽을 운이고 딸은 자식없이 단명하겠으나 장차 귀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됐다. 그 후 조정에 나가 여진을 쳐부수고 병조판서가 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당시 실력자 한명회가 이를 시기해 유자광(柳子光)을 시켜 남이를 무고한다. 남이는 억울했으나 실세인 영의정 정인지까지 자신의 적이 되자 견디지 못한다.

결국 남이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28세였다.

남이가 무고를 받게 된 시조가 여기있다.

 

백두산석(白頭山石) 마도진(磨刀盡) 이오

두만강수(豆滿江水)마무(馬無)라

남아이십(男兒二十)에 미평국(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아마도 이글 지은 자는 남이장군인가 하노라

 

백두산 돌은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다마르니

남자 나이 20세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어찌 후세사람들이 장부라 부를까.

이글을 지은 사람은 남이장군이노라.

얼마나 호탕하고 웅장한 기개인가.

그러나 남이는 이 싯귀 때문에 죽었다.

유자광이 이글에 있는 미평국(未平國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이란 글자중에서 가운데 자인 평(平)을 득(得)으로 바꿔 미득국(未得國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놓고는 남이가 반역을 꾀했다고 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글자 한자, 말한마디에 운명이 바뀌는 세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 쓰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생각해 볼일이다.

 

 

 

무소유의 원조 퇴계 이황(李滉)이야기

이황은 우리와 친근한 어른이다. 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바로 이황이다. 주자학의 대가이며 본관은 진보, 자는 경호, 호가 퇴계다.

5형제중 막내로 생후 7개월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삼촌에게 글을 배웠다.

관로에 나가 승문관 부정자, 호조좌랑에까지 오른다. 도산서원에서 계몽심경을 강의했다. 퇴계선생은 한서헌이라는 곳에서 학문에 정진했는데 그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보잘 것 없는 초가 오막살이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치네

마른 곳을 찾아 가구를 수시로 옮길 때

서적은 헌상자 속에 거두웠네

 

명천군수 허시(許時)가 퇴계선생을 찾아와 사는 모습을 보고 묻는다.

“이처럼 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고 있습니까”

그러자 퇴계선생은

“ 평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라고 답했다.

퇴계선생은 돌그릇을 세수대야로 쓰고 부들자리와 무명 옷 그리고 칡으로 만든 신과 죽장 차림이 전부였다.

한양 서소문에 살 때 좌의정 권철(權轍)이 찾아왔다. 퇴계선생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상위에 오른 반찬이 너무 형편없는 것이다. 권철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그냥수저를 놓고 돌아가면서

“ 스스로 입맛의 버릇을 잘못 길러 참으로 부끄럽구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명종이 임금에 오른 후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높은 관직에 나오도록 청했으나 듣지 않는다. 명종은 신하들에게

“ 어진 이를 불렀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노라”

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올리게 하고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의 풍경을 그리도록 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명필 송인(宋寅)에게 퇴계의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쓰도록 하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거처하는 방에 두었다고 한다.

세상물욕을 떨쳐버린 퇴계 이황. 그가 쓴 시속에 하늘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한 심성을 노래한 부분이 있다.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짓말이

인성(人性)이 어지다하니 진실로 옳은 말이

천하에 허다영재(許多英才)를 속여 말할까

 

순박한 풍속이 사라졌다 하는데 이건 진짜 거짓말이다.

인간의 성품이 어질다 했는데 그건 참으로 옳은 말이다.

세상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영리한 사람들을 속일수 있겠는가.

 

아직도 인성은 살아있고 순풍은 죽지 않았는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이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색안경을 낀 눈으로 보면 모두가 그색이고 비뚜러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것 모두가 틀어져 보인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다.

애써 중심을 잡고 바르게 사는 것을 비뚜러진 자신의 기준에 맞춰 일그러 뜨려 해석하는 세태가 지금인가.

나는 기억’이라고 말했는데도 듣는 이가 자기 기준에 맞춰 ‘니은’이라 들었다고 주장하는 요즘 세상이 안타깝다.

보이지 않은 진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고 어긋난 생각으로 덧씌워 보지 않는 순수가 상존할 때 민초(民草)들의 질적 수준은 향상되리라....

 

 

 

 

훈련대장 이완(李浣)이야기

 

군산(君山)을 깎았다면 동정호가 넓을 것을

계수를 베었다면 달이 더욱 밝을 것을

뜻두고 이루지 못하고 늙기 설워하노라

 

동정호수 안에 있는 군산을 깎아 내버리면 동정호가 더 넓어 졌을 것이요. 달속의 계수나무를 베어버렸다면 달이 더욱 밝을 것인데 뜻이 있어도 행하지 못하는 이 몸 늙는 것이 서럽다.

이 시조는 조선조 효종 때 훈련대장으로 이름 높은 이완장군의 시다.

이완에게는 어려서부터 정혼한 규수가 있었다. 초례 날까지 얼굴도 못 보았으나 혼인 후 신부를 처음 본 이완은 깜짝 놀랐다. 천하박색이었기 때문이다. 이완은 신혼 초야부터 한방을 쓰지 않고 계속 부인을 소박했다.

언젠가 임금이 이완을 한밤중에 부른다. 의관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이완에게 부인이 잠깐 보자고 말한다. 보기도 싫고 말하기 싫은 부인이지만 그래도 들어가 보니 부인이 아무 말없이 갑옷 한벌을 내놓는다. 아니 대궐에 들어가는데 갑옷은 무슨 갑옷이란 말인가.

못생긴 것이 하는 짓도 엉뚱하지, 분명 이완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이 갑옷을 입혀주자 어쩔 수 없이 입고 그 위에 도포를 껴입었다. 창덕궁 문앞에 다가가

“훈련대장 이완듭시오”

하고 소리치고 몇 걸음 걸어가자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이완의 가슴팍에 꽂혔다. 갑옷이 없었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또

“훈련대장 이완듭시오”

외치자 또 한개의 화살이 날아든다. 이완은 침착하게 갑옷에 박힌 화살을 뽑아 소매자락에 넣고 세 번째 문에 들어서 보니 효종임금과 송시열등 고관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완은 임금 앞에 엎드려

“신, 이완. 어명에 의해 대령했나이다.”

고 아뢴다. 임금이 웃으며 술 한잔을 주면서 붓 한자루와 벼루를 하사한다.

이완은 임금을 알현하고 집에 돌아온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지금까지 아내를 학대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곧바로 아내를 찾아가 사죄하면서 임금이 준 붓과 벼루를 자랑한다. 대대손손 집안의 가보로 보존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내는 갑자기 다듬이 돌에 붓을 올려놓고는 방망이로 내리치지 않는가. 이완이 깜짝 놀라 제지하려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때 아내가 붓통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준다.

그 속에는 ‘훈련대장 이완에게 병조판서를 겸하노라. 북벌책에 좋은 계획이 있으면 적어 올려라’라는 밀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완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만약 아내가 없었다면 임금의 뜻을 저버릴뻔 했기 때문이다.

이완의 아내는 임금이 밤중에 부를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와 무신인 남편에게 붓과 벼루를 하사하신 임금의 의중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완은 임금에게 건의서를 써 올린다. 내용역시 부인의 조언이 컸다고 한다. 거기에는 만주에는 산이 없고 벌판이 넓기 때문에 전투시 군사들에게 자루를 많이 준비시킨 후 거기에 흙을 담아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가슴속에 간직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아울러 영리함보다는 현명함을, 지식보다는 지혜로움을 더 소중히 할 수 있을 때, 삶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성웅 이순신(李舜臣)

이순신은 선조 때 명장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씩씩했으나 말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선조9년 32세로 무과에 급제해 발포 만호, 조산포 만호 등을 거쳐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추천돼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오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에서 적선을 격파해 최초로 수군통제사가 됐다. 그러나 이순신을 시기한 원균(元均)의 모략으로 서울로 압송돼 사형직전에 이른다. 이때 정탁(鄭琢)의 반대로 목숨을 부지해 권율(權慄)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적군에 패하고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한다. 이순신은 남은 배 12척으로 적의 대 부대를 명량해전에서 대파시켜 다시한번 재해권을 잡았다.

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시작했다. 이순신은 마지막으로 노량해전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그때 나이 54세였다. 진본 청구영언에는 이순신장군의 시조가 전해온다.

 

십년가온 칼이 갑리(칼갑)에 우노매라

관산을 바라보며 때때로 만져보니

장부의 위국공훈을 어느 때에 드리옵고

 

십년간 갈아온 칼이 칼집에서 울고 있다. 간혹 쳐다보며 만져보기만 하니 언제 이 칼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볼까

장군다운 의지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기개가 뛰어난 이순신에게 남들이 쉽게 따를 수 없는 넓은 도량이 있었다. 한번은 이순신이 당시 명나라에서 지원차 전쟁에 참여한 진린(陳璘)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진린의 부하가 전황을 보고한다.

“ 오늘 싸움에서는 조선수군이 적을 모두 물리치고 우리 수군은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진린은 불같이 화를 내며 술상을 엎어 버린다. 이를 본 이순신은

“ 장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바다의 도둑을 토벌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이긴 공은 모두가 장군의 것입니다. 오늘 밴 적의 머리는 모두 장군께 바치겠습니다. 장군이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같은 공을 세운 것을 북경조정에서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진린은 이순신의 손을 잡고

“ 본국에 있을 때 공의 명성을 많이 들었는데 이제 만나고 보니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며 좋아했다.

이날 이순신은 왜선 6척과 왜군의 머리 69급을 진린에게 넘겨 주었다.

이순신은 적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후 진린은 이순신의 이런 넓은 마음에 감복해 모든 일을 이순신과 의논해 처리 했고 심지어는 명나라 수군을 벌하는 일까지 맡길 정도였다. 훗날 이순신이 전사하자 진린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한산섬 닭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몰라 잠 못 이루고 수루에 혼자 올라 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 들려오는 한줄기 피리소리에 장군의 애간장은 끊어질 것 같았다.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요즘말로 하자면 진정한 CEO 였다. 전투도 일종의 경영이다. 최저 비용으로 최상의 결과를 이뤄낼 수 있어야만 한다. 이순신은 칼을 쓰기 전에 덕으로 상대를 제압할 줄 아는 현명한 어른이었다.

 

 

이순신에 관하여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충무공 전서 중 15권에 실린 "진중음"으로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말씀으로 원문은

"임금은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님은 북쪽에서 위태한 오늘, 외로운 신하가 나라를 걱정하는 날이여! 이제 장사들은 공을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 원수 왜적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비록 내 한 몸 죽을지라도 사양치 않으리라!' 이다.

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격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시 후,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말씀이다.

금신전선 상유십이 今臣戰船 尙有十二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십이 척이 있으니"

칠천량 해전 이후 공께서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라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의 밀지에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 내용이다.

원문은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다.

이는 수군의 존속과 가치와 그 효용론을 강력히 주장한 공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의 발언이라 하겠다.

필생즉사 사필즉생 必生卽死 死必卽生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씀이다.

원문은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군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이다.

차수약제 사즉무감 此獸若除 死卽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임진왜란 중 최후의 결전인 노량해전을 앞둔 1598년 11월 18일 밤 12시가 지날 무렵,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피우면서, 겨레의 생명과 나라의 보존을 위한 최후의 염원을 담아, 하늘에 빌었던 내용으로 충무공의 "결사보국" 정신의 말씀이다.

전방급 신물언아사 前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1598년 11월 19일 아침, 마지막 노량해전의 대 격전 중 갑자기 날아든 총환이 뱃머리에서 독전하던 공의 왼편 겨드랑이를 맞혀 공께서 전사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려한 '애국의 유언'이다.

본 것은 본 대로 보고하라

들은 것은 들은 대로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보지 않은 것과 듣지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김훈의<소설 이순신-칼의 노래>중에서

명나라 사신이 본 이순신

‘운덕’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순신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 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 것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명나라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 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國)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 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매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케 하소서).

 

 

 

43. 술에 얽힌 시조 몇편

술을 취케 먹고 빈산에서 잠이드니

뉘 날 깨우리 천지가 금침이다

광풍이 가랑비몰아 잠들나를 깨운다 (조준)

 

대추가 익어가자 밤은 어이 떨어지며

벼 밴 그루터기 게는 어이 나도는가

술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먹고 어떠리 (황희)

 

손님이 돌아가자 달마저 저무는데

술독을 다시열고 싯귀를 읊어본다

아마도 산사람이 얻는 것 이뿐인가 하노라(하위지)

 

들은말 즉시 잊고 본일도 모른듯이

내 버릇 이러함에 남과 시비 모를로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잡기만 하노라(송인)

 

집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앉으랴

솔불 켜지마라 어제진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한호)

(※박주산채: 맛없는 술과 산나물)

 

자네집에 술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초당에 꽃피거든 나도 자넬 청하옴세

백년덧 시름없을일 논의코자 하노라(김육)

 

재너머 성권농집에 술익단 말 어제듣고

누은소 발로 박차 언치놓아 지즐차고

아이야 네권농계시냐 정좌수왔다 하여라(정철)

(※언치:안장에 까는 털 헝겊. 지즐: 누르다)

 

큰잔에 가득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만고 영웅을 손꼽아 세어보니

아마도 유령 이백이 내벗인가 하노라

(※유령: 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술을 즐김. 이백: 당나라 때 시인)

 

금잔에 가득찬 술을 싫도록 기우리고

취한후 긴노래에 즐거움이 그지없다

어즈버 석양이 진다마라 달이 쫓아 오는데(정두경)

 

술을 취하게 먹고 둥글게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이야 잔가득부어라 가는시름 전송하게(정태화)

 

옷벗어 아이주어 술집에 잡혀두고

청천을 우러러 달에게 물은 말이

어즈버 옛날 이백이 나와무엇 다르뇨(김천택)

 

꽃피면 달생각하고 달밝으니 술생각

꽃피고 달 밝은밤 술 있으니 친구생각

언제나 꽃아래서 벗과 함께 완월장취 해볼까(이정보)

(※완월장취:달을 벗삼아 오래도록 취함)

 

 

 

44. 외설시조 몇편

어디자고 여기를 왔노 평양자고 여기 왔네

임진 대동강을 누구배로 건너 왔노

선가는 많더라만은 여기(女妓)배로 건너왔네

(※ 선가: 뱃삯. 여기(女妓): 기생)

춥다 네품에 들자 베게없다 네팔베자

입에 바람든다 네혀 물고 잠을 자자

밤중만 물밀어 오거든 네배 탈까 하노라

각씨네 외밤이 논이 물도 많고 걸다하네

병작을 줄려거든 밑 안쪽은 날을 주옵서

진실로 주기만 하면 가래들고 씨 뿌려 보리라

물레는 줄로 돌고 수레는 바퀴로 돈다

산진이 수진이 해동창 보라매 두 쭉지 옆에 끼고

태백산 허리 안고 도는구나

우리도 그런 님 만나서 안고 돌까 하노라

(※산진이:산에서 자란 해묵은 새매. 수진이: 손으로 길들인 새매 해동창: 송골매)

웃는 모양 이빨도 좋고 흘기는 눈매 더욱더 곺다.

안거라 서거라 걸어라 서거라 온갖 교태 다하여라

네부모 너 낳을때 나만 사랑하라 했느니

중놈도 사람인양 자고가니 그립고

중의 송낙 내가 베고 내 족도리 중놈베고

중의 장삼 내가 덮고 내치마를 중놈덮고

자다가 깨달으니 둘의 사랑이 송낙으로 하나 족도리로 하나

이튿날 하던일 생각하니 홍글항글하여라

(※송낙: 소나무로 만든 중의 모자. 홍글항글: 마음이 잡히지 않고 들떠 있는 모양)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으리

기와장이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두더지 자식인지 곳곳을 뒤지듯이

사공의 솜씨인지 시앗대 저으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가슴속이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니 참 맹서하지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얽고 검고 키 큰 구레나루 그것조차 길고 넓다

잠기지 않는 놈 밤마다 배에 올라

조그만 구멍에 큰 연장 넣어두고

흘근 흘근 할제는 애정은 커니와 태산이 덮누르는 듯

잔방귀 소리에 젖 먹던 힘이 다 쓰이노매라

아무나 이님을 데려다가 백년동주하고

영영 아니온 듯 어느 개딸년이 시앗새옴 하리오

처음에 몰랐으면 모르고나 있을 것을

어인사랑이 싹나며 움돗는가

언제나 이몸에 열매열어 휘둘거든 볼려뇨

내아니 이르랴 네 남편한테

거짓으로 물 긷는 체하고 통은 내려 우물 앞에 놓고

또아리 벗어 통조지에 걸고

건넌 집 작은 김서방을 눈짓으로 불러내어

두 손목 마조 덥석 쥐고 수군수군 말하다가

삼밭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 하는지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즑 우즑 하더라하고

내 아니 이르랴 네 남편에게

저 아이 입 보드라와 거짓말 말아스라

우리는 마을 지어미라 실삼 조금 캤더니라

45. 시조속의 웃음 몇편

창 내고저 창 내고저 내 가슴에 창 내고저

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저귀 수돌저귀

배목걸쇠 크나큰 장도리로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이따금 하 답답할제면 여닫어 볼까 하노라

솟 적다 솟 적다 하기에 그새 말을 곧이 듣고

작은 솟 팔아다가 큰 솟 사 걸었더니

지금에 풍년을 못 만나니 그새 날 속인가 하노라

남이 날 이르기를 정절없다 하건마는

내 탓이 아니라 임자 없는 탓이로다

아무나 내님 되어서 살아보면 알리라

개를 여나믄이나 기르되 요 개같이 미우랴

미운님 오게 되면 꼬리를 홰홰치며

뛰락 내리락 반겨서 내닫고

고운님 오면은 뒷발을 버둥버둥 물으락 나으락

캉캉 짖어서 돌아가게 한다

쉰밥이 그릇그릇 난들 너 먹일 줄이 있으랴

저 건너 흰옷 입은 사람 잔밉고도 얄미워라

작은 돌다리 건너 큰 돌다리 넘어

바삐 뛰고 가누나 애고애고 내 서방 삼고라쟈

진실로 내 서방 못될진대 벗이 님이 되고라쟈

편지야 너 오느냐 네 임자는 못 오드냐

장안도상 넓은 길에 오고가기 너뿐이냐

이후란 너 오지말고 네임자만 보내라

한자 쓰고 눈물지고 두자 쓰고 한숨지니

자자행행이 수묵산수가 되었고나

저님아 울며 쓴 편지니 눌러 볼가 하노라

댁들에 연지분사오 저 장사 네 연지분 곱거든 사자

곱든 비록 아니되 바르면 없던 교태 절로나는 연지분이오

진실로 그러 할양이면 헌 속곳 팔망정 대여섯 말이나 사리라

어이려노 어이려노 시어머님 어이려노

샛서방 밥 담다가 놋 주걱 잘른 부러졌으니 이를 어이하려노

저아기 하 걱정 마라 우리도 젊었을때 많이 겪어 보았노라

백발에 화냥 노는 년이 젊은 서방 맞춰 두고

흰머리에 먹칠하고 태산준령을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괘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든 머리 희어졌구나

그를사 늙은이 소망이 될락 말락 하여라

터럭은 희였어도 마음은 푸르렀다

꽃은 나를 보고 태없이 반기거늘

각씨네 무슨 탓으로 눈 흘김은 어찌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가

내몸 늙을 제면 넌들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 다니다 남 웃길가 하노라

중놈은 승년의 머리털을 잡고 승년은 중놈의 상투를 쥐고

두 끈을 맞맺고 이왼고 저왼고 짝짜궁이 치는데

뭇 소경이 구경하니 어디서 귀먹은 벙어리가 외다 옳다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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