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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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일지(古松一枝) /박 헌 오
마을어귀 둥긋이 고개 숙인 여인이
온몸이 상기된 채 숨소리를 고르는 밤
선비는 갓 벗어놓고 오간 데가 없어라
가지 끝 여린 정이 철없이 솔솔 날고
별들이 둥지 내려 자고 있는 이슬 집
한아름 나이테 속에 기다림이 감긴다.
끊어진 그네에 매달린 그리운 밤
긴 세월 그린 얼굴 황토빛 껍질이 되고
빛 바랜 편지 한 장이 담겨 있는 까치집.
설한풍 안고 사는 마을 밖의 암자 하나
미명에 먹물 찍어 산길을 그려가다
천년의 푸른손으로 해맞이 종을 친다.
안개가 걷히올 제 이슬 터는 하얀 새
긴 목 위 머리 들어 들녘을 내다보면
샛강의 가야금소리 계절을 허물어 가고
옹두리 진 뿌리에 정한수를 떠놓는 이
옛 가지 휘어내려 기와 꽃에 입 맞추고
연화등 언 이마에 켜면 설레는 법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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