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임기종 2016. 11. 28.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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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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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일지(古松一枝) /박 헌 오

 

 

마을어귀 둥긋이 고개 숙인 여인이

온몸이 상기된 채 숨소리를 고르는 밤

선비는 갓 벗어놓고 오간 데가 없어라

 

가지 끝 여린 정이 철없이 솔솔 날고

별들이 둥지 내려 자고 있는 이슬 집

한아름 나이테 속에 기다림이 감긴다.

 

끊어진 그네에 매달린 그리운 밤

긴 세월 그린 얼굴 황토빛 껍질이 되고

빛 바랜 편지 한 장이 담겨 있는 까치집.

 

설한풍 안고 사는 마을 밖의 암자 하나

미명에 먹물 찍어 산길을 그려가다

천년의 푸른손으로 해맞이 종을 친다.

 

안개가 걷히올 제 이슬 터는 하얀 새

긴 목 위 머리 들어 들녘을 내다보면

샛강의 가야금소리 계절을 허물어 가고

 

옹두리 진 뿌리에 정한수를 떠놓는 이

옛 가지 휘어내려 기와 꽃에 입 맞추고

연화등 언 이마에 켜면 설레는 법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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