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난초 이병기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 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가람시조집>(1936) - 낡은 집 이용악.. 한국현대시 2017.06.21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낙화 - 조지훈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 한국현대시 2017.06.20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한국현대시 2017.06.19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 한국현대시 2017.06.16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 한국현대시 2017.06.15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낙엽 - 복효근 -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 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 우포늪에서 이근구.. 한국현대시 2017.06.14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나의 칼 나의 피 -김남주-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살찐 그대 가슴 위에 언덕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 한국현대시 2017.06.13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 한국현대시 2017.06.09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나뭇잎 하나 - 김광규 -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 한국현대시 2017.06.08
한국 현대시와 시조 1수 나무 - 박목월 -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 한국현대시 201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