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

한국 명시와 시조 1수

임기종 2018. 6. 4.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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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 소경(夏日小景) 이장희

 

운모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

부드러운 얼음 설탕 우유

피보다 무르녹은 딸기를 담은 유리잔

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씨는

 

기름한 속눈썹을 깔아 맞히며

갸날픈 손에 들은 은사시로

유리잔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

탐홍색 청량제가 꽃물같이 흔들린다.

 

은사시에 옮기인 꽃물은

새악씨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

새악씨는 달콤한 꿀을 마시는 듯

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

 

콧마루의 수은 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

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친 작은 못 가운데서

거울같이 피어난 연꽃의 이슬을

헤엄치는 백조가 삼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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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옹관 앞에서

이황진(동아일보)

 

한 사내의 오랜 잠이 신라를 굴리며 온다.

눈 감았다 뜨는 사이 천녀이 흘러갔다

둥글게, 둥글게 굴러오는 고분군의 수레바퀴

 

흙은 구워져서 붉은 몸을 드러내고

시간이 그 몸 속에 무문으로 새겨놓은

게림의 배부른 달이 툭, 툭 털고 돌아온다

 

누가 나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겠는가

또다시 천 년 세월이 푸르게 흘러간 뒤

한 몸의 시작과 끝이 옹관 사이 놓였을 때

 

내게 뜨는 붉은 달을 흰 맨발로 굴리면서

윤회의 먼 바다를 아득히 건너간다

마침내 삶과 죽음이 한 몸으로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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