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이창희씨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농 집안의 자식인 그는 8세 때 종로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화가 김병기, 소설가 황순원, 희곡 작가 오영진 등과는 모두 그때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오산보고에 입학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 미술에 정진하기 위한 유학길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평탄함에서 파란만장한 길목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동경제국 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한 중섭은 운명의 여인 마사꼬를 만나게 되었다. 수줍음을 잘타고 내성적인 중섭을 대신하여 홍하구라는 친구가 마사꼬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 주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침내 타올랐지만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부딪혔다. 마사꼬의 부모들이 식민지인 조선 청년을 좋게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갈수록 일본에 불리해지자 마사꼬는 부모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남자 이중섭과 함께 있기 위해 무조건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이때 이중섭은 원산에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연락을 받고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얼마 후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결혼해서 원산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마사꼬는 결혼하면서 이남덕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인 물고기, 나비, 곤충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들은 공산치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소재는 부르조아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의에 빠진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인, 화가 , 작가들은 그 무렵 하나둘 월남했으나 이중섭은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6.25가 터졌다. 그러자 이중섭도 처자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단칸방에서 지내며 막노동을 하다가 선배의 주선으로 해군 종군 화가단에 가입하였고 거기서 나온 배급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같이 동행해 일본으로 갈 것을 설득했으나 중섭은 듣지 않는다. 결국 부인과 자식들만 귀환선에 오르게 된다. 중섭은 뒤따라간다고 했지만 여비를 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부둣가 다방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별한 아내와의 해후를 갈망하는 이중섭은 그의 말처럼 살아갈 힘도 재주도 없이 끊임없이 그림만 그렸다. 판잣집 골방에서, 부두에서 막일하다 쉬면서도,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한없이 그림만 그려나갔다.
이중섭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화, 수채화, 데생 등 2백여점, 은지화 약 3백여 점을 남겨 현대 한국미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된다. 드디어 이중섭은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때가 헤어진 후 3 년이 지난 1953년 1월이었다.
약 2주일간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그는 다시는 그리운 처자를 볼 수 없었다. 일본에서 만난 아내는 중섭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여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그는 더 이상 그 것을 지켜볼 수 없다면서 귀국한 것이었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그는 여러 방면으로 돈을 마련했으나 그때마다 주위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늘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이 없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판 돈도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술값으로 날리기 일쑤였으니 그에게는 일본으로 건너갈 여비조차 모아지지 않았다. 일본행은 거의 절망에 가까웠고 그는 나날이 좌절감과 자학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자 식음거부증세를 나타냈다.
"내가 이 밥을 먹으면 나 때문에 한 끼를 굶는 사람이 생길 것 아냐? 그러니 어떻게 먹겠나?"
그는 온종일 방안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마도 그의 영혼은 그리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갔을 것이다. 험난한 세파와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도 예술적 품성을 지켜 나갔던 이중섭은 이렇게 우리들 앞에서 한 많은 세상을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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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1916--1956) 평양 출생.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문학학원 재학 중 일본 자유 미협전에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작품 성향은 포비슴(Fauvisme, 야수파)의 영항을 받았으며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서 우리나리에 서구 근대화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1956 년 간장염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활짝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주요 작품에는 소, 흰 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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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노경에 실현된 청년시대의 꿈이다. (A. D. 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