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새 - 천상병(千祥炳)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 한국현대시 2016.07.04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덤 - 김광림(金光林)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 한국현대시 2016.07.01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산 - 김광림(金光林)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시집 {학의 추락}, 1971) ----------------------------- 생수/경 .. 한국현대시 2016.06.30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연시(軟柿) - 박용래(朴龍來)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집 {강아지풀}, 1975) ---------------------------------------- 베란다에서/구 귀 분 .. 한국현대시 2016.06.29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 한국현대시 2016.06.27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봄 비 - 이수복(李壽福)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 한국현대시 2016.06.24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폭 포 - 이형기(李炯基)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 한국현대시 2016.06.23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꽃과 언어(言語) - 문덕수(文德守)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현대문학} 74호, 1961.3) --------------.. 한국현대시 2016.06.22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趙炳華)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 한국현대시 2016.06.21
한국현대시와 시조 1수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趙炳華)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 한국현대시 2016.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