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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녀서 연구

임기종 2013. 9. 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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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庵 宋時烈의 戒女書 硏究

兪 睿 根 *

1. 序 言

2. 尤庵의 生涯와 學問

3. 子女와 連査關係 및 子女愛

4. 戒女書의 背景

 

<目 次〉

 

1. 序 言

-107-

 

尤庵硏究에 관한 論著는 논총․학보 등 단행본 10권, 박사학위논문 4편, 석사학위논문 7편과 일반논문으로는 철학사상․예론․의리․사학․문학 등 각 분야에 걸쳐 100여 편이 있는 바 그 중 철학사상 연구가 50여 편으로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 학회연구발표에서는 외국인(주로 중국인)학자도 10여 명이 발표한 것으로 조사된 보고가 있다. 그러나 우암의 戒女書에 관한 연구는 계녀서의 장르상 성격 규정에 관한 것과 계녀서에 대한 현대 젊은 여성들의 인식을 조사한 두 편의 보고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외적으로는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으나 내적으로는 이성을 잃고 도덕성 윤리성이 상실되어 사회는 날로 삭막하고 황폐화되어 끝이 안보이는 암흑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런 세계적 추세에 편승하여 우리 사회도 순후하고 평화로운 삶의 전통과 소박하고 훈훈한 인성과 자애로운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이기와 탐욕에 어두어 잔인한 패륜과 흉폭한 범죄만이 날로 기승을 부려 팽배해 가고 있는 것이 가공스럽고 참혹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늪에서 겨레와 나라를 구하는 초미의 급선무는 인간 스스로의 내면성찰과 이성회복을 통하여 사회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우고 인간존중의식과 도덕성을 고취 진작하는 일이고 그것은 오로지 학교교육․가정교육․사회교육 전반에서 특단의 각성과 대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 인성회복과 인간회귀교육의 한 계기가 되고 촉매가 될 수 있는 것이 계녀서 같은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戒女書는 17세기 성리학의 전통을 이은 큰 학자요 정치가이며 사상가이고 철학자였던 尤庵 송시열이 그의 맏딸이 權氏家에 출가함에 즈음하여 자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부녀자가 평생 지키고 실천해야 할 사항을 조목조목 들어 간곡히 적어 준 글이다. 이 글은 한 어버이가 한 딸에게 준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부녀자가 삶의 지표로 삼아 마땅한 글이고 나아가 모든 젊은이 교육에도 그대로 원용될 수 있는 글이다. 특히 오늘과 같은 사회현실 속에서는 젊은이 뿐 아니라 학교교육․가정교육․사회교육 등 모든 교육의 장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인간 본연의 자성을 찾아 밝히고, 孝․敬․和․仁․慈의 덕목을 고루 닦아 修身齊家하고 五倫三綱을 바르게 실천하여 가정과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이룩할 수 있는 기틀과 자질을 기르는데 긴요하고 절실한 가르침이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목적과 가치가 자명해지고, 계녀서는 이런 점에서 고전적 가치 뿐만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교육에서도 그대로 인간교육의 지표로 삼아 일상생활의 실천덕목으로 가르치고 강조해도 마땅한 시사성과 현대적 의의를 높이 평가받아야 하리라 사료된다.

2. 尤庵의 生涯와 學問

尤庵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11월 12일 옥천 구룡촌에서 낳으니 출생부터 신이함을 보였다. 어머니 곽씨가 명월주를 받아먹는 태몽을 꾸고 몸을 가졌고, 부친 수옹공이 청산 종가댁에 갔다가 孔子가 제자를 거느리고 집에 찾아온 꿈에서 깨고 바로 해산의 소식을 들었으니 비범한 출생이었으며, 두 살에 영오하고 장중함이 거인과 같았고 세 살에 文字를 깨우쳤고 志氣가 범상치 않았으니 하늘이 낸 큰 재목이었다. 일곱 살에 형들이 글 읽는 것을 어깨넘어로 듣고는 문득 기억했다. 이 무렵 이웃집 무녀가 이르기를 이 어린 낭군이 오면 신이 내리지 않아 점을 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린 우암의 正大한 氣가 잡신을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11세 때 수옹공이 還鄕杜門하여 敎子爲事하니 이로부터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文理가 일진하였다. 18세에는 종형 시혁이 지평재로 있었으므로 그 곳 龍門寺에 머물며 공부하였고 다음 해 4월에는 金泉寺에서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위하여 자주 山房에 머무르며 정진하였으니 연일 不寐不食하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충숙공 李尙吉(1556-1637)이 일찍이 말하기를 宋君은 산중이나 계곡을 가야 만날 수 있으니 牛溪․栗谷에 비길 수 있다고 하였다. 27세에 生員試 제 1에 뽑혀 경릉참봉을 시작으로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관이 左議政에 이르고, 孝宗 잠저시의 師傅, 西人의 領首, 流配 등 한편 우람하고 화려한 면도 있으나 83세의 병약한 노구로 제주 귀양길에서 국문을 받기 위하여 돌아오던 중 井邑 여사에서 後命을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우암의 한 평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우암의 학문은 栗谷-沙溪-愼獨齋로 이어진 朱子學의 학통을 이어 대성한 학자로 총 236권 102책의 역사상 유례가 드문 많은 분량의 著述을 남겼고, 忠淸七賢을 비롯하여 140명의 山林 또는 文人들과 교의를 맺었으며 권상하 김만준을 위시한 827명의 많은 제자를 두었다. 그 나이 77세 때에 효종 당대의 도화서 교수를 지낸 화가 설탄 韓時覺(1621-?)이 그린 초상화를 두고 贊한 글에 正祖는 泰山喬嶽이라 했고 수제자인 수암 權尙夏는 높은 산악의 기상과 넓은 바다의 가슴으로 群儒를 집대성하여 울연히 백대의 스승이라 극찬했으며, 후학인 농암 金昌協은 조선 300년에 드물고 뛰어난 기품이 뭉쳐 이룩된 바라고 앙모하였고 양현전심록에서 또 正祖는 우리나라 宋先生은 송나라 朱子와 같고 조선에 우암선생이 있어 人倫이 밝아지고 天理가 바로 섰으며 굳게 잡은 것은 주자의 大義이고 가르친 것은 주자의 大道이니, 朱子 가신 뒤에 이 땅에 宋선생이 태어났다고 하였으니 우암의 爲人과 學問과 學統을 단적으로 소연히 밝힌 말들이다. 이를 다시 집약하여 수제자 권상하는 스승의 墓表 말미의 銘에 이르기를

義秉春秋 學傳武夷

集群儒成 爲百世師

라고 적었다.

3. 子女와 連査關係 및 子女愛

우암은 일찍이 두 아들을 낳았으나 다 제대로 기르지를 못했고 또 후사를 얻기 위하여 부실까지 두었으나 딸은 하나 얻고 아들은 또한 기르지 못하였다. 하릴없이 1658년 7월 24일 나이 52세에 재종형 사부공 時瑩의 둘째 아들 基泰를 후사로 맞았다. 그 때 이미 기태는 나이 30세로 다섯 아들을 두고 있었으니 우암은 일순에 아들과 다섯 손자를 갖게되었고 이로부터 우암의 후손은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基泰보다 세 살 위인 맏딸은 현감 權惟에게 출가하여 三子一女를 두었는데 둘째는 현감이고 셋째 以鎭은 判書가 되었다. 惟의 아버지는 左尹을 지낸 炭翁 權諰인데 安東人으로 학덕이 높은 선비이다. 다섯 살 아래인 둘째 딸은 坡平人 尹搏에게 출가하여 二子二女를 두었다. 搏의 아버지는 大司憲石湖 尹文擧인데 시호는 忠敬이다. 맏딸보다 스물 다섯 살이나 아래로 우암이 45세에 晩得으로 얻은 셋째 딸은 閔周鏡에게 출가하여 一子三女를 두었는데 아들 나이 겨우 네 살에 37세로 早卒하였다. 周鏡의 父는 牧使 晋亮이고 祖父는 節義높은 領相 聖徽인데 시호는 肅敏이다. 특히 두 집안은 정의가 도타웠고, 주경의 맏형 府尹 周冕의 神道碑와 父의 墓碣과 祖父의 墓表를 모두 尤庵이 썼다. 그밖에도 우암은 계속 당대에 명성높은 집안과 連査관계를 맺어 名門巨族의 위상을 더욱 높였으니 셋째 孫婦는 市南 兪棨의 손녀이고 넷째 손부는 左相 朴世采의 따님이요 다섯째 손부는 左相 李端夏의 따님이었다.

尤庵은 밖으로는 우람하고 근엄하였으며 불같고 맹호같은 투사의 기질이었으나 안으로는 퍽 정겹고 자애로운 어버이였다. 비록 賜藥을 받고 비명에 갔으나 83세 장수를 하였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생애에 더더욱 子女에 대한 복은 薄福하였다. 아들․며느리․다섯 손자를 후사로 맞은지 불과 3년만에 子婦李氏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고 다시 맞은 며느리 柳氏도 다시 4년 후 22세로 또 세상을 버렸다. 그후 10년 평온하던 집안에 다시 연속되는 불행과 시련이 와서 1675년 우암 69세되던 해에 둘째 사위 윤박이 48세로 타계하면서 거의 1․2년 사이로 婦人 李氏, 큰 딸, 큰 사위, 둘째 딸, 셋째 딸의 불행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마다 祭子婦李氏文 祭尹子上(搏)文 祭長女權氏婦文 등을 써 그 애절하고 처절한 심정을 토했다. 특히 1687년 12월 우암 81세 때 겨우 네 살 된 아들을 두고 37세로 먼저 간 막내 딸을 애도한 글은 간장을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이 배어있다. “너는 겨우 서너 살 때부터 글을 알고 글씨를 썼다. 놀랍고 기뻤으나 너를 가르칠 겨를이 없었는데 너는 스스로 문리를 터득하여 小學을 익혔고 어쩌다 물어보면 깊은 속뜻을 시원히 대답하는 것을 보고 네가 사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한탄했었더냐? … 아아 슬프다. 네가 어찌 나를 버리고 먼저 가서 이 팔십 늙은 애비의 간장을 이렇게 아프고 끊어지게 하느냐? … 나의 이런 애절한 말에 너는 어찌 한 마디 대답이 없느냐. 네가 비록 말을 하는데도 내가 듣지를 못하는 것이냐? 아아 슬프고 슬프다…?

그러나 불행과 슬픔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 이어졌다. 일년도 채 안 되어 셋째 딸을 잃은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제 5손 晦錫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또 세상을 떠났고, 다시 석 달 후에는 5손부 李氏마저 29세로 타계하니 그 때 나이 겨우 열 세 살에 천애고아가 되어 外祖父 李端夏 밑에 가 의탁하고 있던 증손자 婺源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자애로웠다. 스스로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즈음에 자기의 목숨보다 더 걱정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壁立萬仞․直之一字란 말로써 자기의 뜻을 전하고 가르쳐줄 것을 당부하였다.

李端夏는 大文章家 澤堂 李植의 아들로 자는 季周, 호는 畏齋, 시호는 文忠으로 尤庵보다는 18年 연하이며 그 門下에서 수학하였고 老少論 분쟁시에는 적극 우암을 지지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또 5손 晦錫의 장인이 되기도 하여 두 사람은 師弟․同僚․同志․査頓 등 중첩된 관계로 30여년의 交分이 남달랐고, 그 사이 무려 177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마지막으로 고아가 된 증손자를 간곡히 당부하였지만 畏齋 또한 우암이 타계한 바로 그 해에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尤庵의 말년은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없이 곧은 의리와 신념으로 의연하였고, 이로써 후손을 가르치고 염려하는 사랑이 지극하였으니 大人 君子의 氣稟과 襟度가 넉넉하였다.

4. 戒女書의 背景

朝鮮朝는 儒學을 政治와 敎育의 근본 理念으로 한 사회로서 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成均館을 정점으로 동․서․남․중부에 이른바 四部學堂(四學)과 지방에는 鄕校를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書院․書堂에서는 私設교육이 실시되었다. 물론 이런 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兩班과 士庶人의 子弟에 국한되고 常民․賤民이나 婦女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체높은 士大夫家의 부녀자는 家學으로 글자를 익히고 나아가 五倫三綱을 밝혀 익히고 실천하도록 修身齊家의 人倫道德을 가르쳤다.

일반적으로 千字文으로 글자를 익힌 어린이에게 필독의 책은 天․地․人․物의 이치와 관계를 밝힌 啓蒙篇과 五倫三綱과 역대 王朝의 사적과 성현의 言行을 가르치는 童蒙先習․小學 등이었다. 그밖에 특히 부녀자에게는 女誡․女論語․內訓․女範․賢婦列傳․三綱行實圖․五倫行實圖 등을 읽혀 현숙한 婦德과 言行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社會的 背景에서 대표적인 유학자인 尤庵이 특히 행실이 높은 가문에 출가하는 맏딸에게 평생 持身鑑戒의 교훈으로 삼도록 써준 글이 戒女書이다. 발문에 이르기를 ‘사나이의 소학같이 알아 이 책을 공경하고 힘써 실천하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소학을 퍽 존숭하였고 이 글도 소학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쓰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小學은 8세쯤 된 아이들이 배우던 6편으로 된 修身書이다. 송나라 朱熹가 엮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 劉子澄이 스승의 명에 따라 편찬한 것으로 1187년에 완성된 책이다. 책의 내용은 立敎․明倫․敬身․稽古 등 內篇 4, 嘉言․善行 등 外篇 2로된 6편 386장으로,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등 五倫의 바른 도리와 心術․威儀․衣服․飮食 등 敬身의 도리, 그리고 옛 聖賢의 嘉言․善行의 사적과 格言 등을 밝힌 가르침이다.

이처럼 尤庵은 유교정신의 기본이요 근간을 이루는 五倫三綱과 敬身 持身의 바른 도리를 가르친 小學의 정신과 그 편제를 크게 참조하여 평소 깊이 간직한 사상과 윤리관을 戒女書에 담아 딸에게 준 것이다.

5. 戒女書의 內容考察

1) 戒女書의 作成年代와 그 傳承

계녀서의 작성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몇 가지 사실을 미루어 추정해볼 수 있다. 尤庵은 1625년 19세에 한 살 위인 韓山 李氏와 혼인하여 1626년에 장녀를 낳았다. 그 딸이 權氏婦가 될 때에 간곡한 사랑과 부정을 담아준 글이 계녀서이므로, 그 딸도 어머니처럼 20세에 출가했다고 가정하면 그 해는 1645년 우암이 39세 때가 된다. 그러므로 戒女書는 1․2년의 오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부터 약 357년 전인 1645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계녀서는 그 후 350여년 간의 전승과정 또한 분명하지가 않고, 현재 우암 친필의 진본과 그에 가장 가깝다고 인정할 만한 필사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계녀서보다 142년 후인 1787년(정조 11년)에 刊行된 방대한 우암의 문집 宋子大全 속에 친필 계녀서가 그대로 포함되어 오늘에 전했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글자수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236권 102책의 방대한 소위 진서 문집에 비하면 약 9000여자(22×10×42)로 계산되는 계녀서는 양적으로는 滄海一粟이지만 내용과 정신면으로는 우암의 모든 사상과 철학과 사랑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대전과 상응 비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녀서가 당시 언문이라 천시하던 국자로 쓰여진 이유만으로 문집에서 배제된 것은 못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戒女書의 筆寫本

필자가 살핀 바로는 현재 세상에 알려진 계녀서의 필사본은 세 종류로 파악되었다.

(1) 宋氏家傳本(淵齋本)

1946년 정음사에서 46쪽의 소책자로 간행한『尤庵先生 戒女書』의 서두에 당시 국립도서관장이었던 李在郁씨의 ‘소개하는 말씀’에 의하면 이 계녀서는 1891년(고종 28년)에 충북 영동군 양강면 원계리에 거주하던 우암의 9대손 淵齋 宋秉璿 댁에서 발견된 사본을 그 때 그 문하에서 수학중이던 삼희재 손진번이 등사하였고 그것을 4년 후인 1895년에 재등해서 손씨가 그의 장자부 이씨에게 전한 것을 바탕으로 발행하였다고 한다.

이 1946년판 계녀서는 필사본의 표기와 어투를 현대어로 옮겨놓은 것이고, 다시 40년 후인 1986년 동사 발행 계녀서에서는 한 단계 더 현대적 감각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녀서를 송병선 댁에 전해 온 필사본을 근거로 하였으므로 송씨가전본(연재본)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2) 權氏家傳本(世蹟本)

1979년 은진송씨대동친목회 발행 ‘恩津宋氏 世蹟錄’에 우암선생계녀서의 필사본이 영인 게재되어 있다. 그 말미에 “우암 부군 맏따님 권씨부되시니 보내실 적 경계하신 글인데 權氏家에 전하기로 얻어 베껴 집안에 전하노라… 임인 동 12월 서… 이 책은 11세조 우암문정부군의 훈계하신 글이라. 소중히…”라는 첨기로 미루어 이는 우암 11대손인 송모씨가 권씨가에 전해온 필사본을 보고 재등한 것이므로 이는 권씨가전본이라 하고, 재등한 임인년은 1902년으로 추정되나 여기서 또 아쉬운 것은 세적록발행 당시 관계자들이 그 때는 분명히 추적가능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소장자 권씨와 재등자 송씨의 실명과 좀더 구체적인 여러 사실을 자세히 밝혔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3) 韓氏家傳本?(三正本)

권씨부인 후손인 三正 權寧遠씨가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을 韓氏家傳本 또는 三正本이라 명명코자 한다. 이 책은 권영원씨가 1984년 여름에 금산시내 노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45쪽의 계녀서 필사본인데 그 뒷 부분에 같은 필체로 쓰여진 17쪽으로 된 ‘남당한선생부훈’이란 같은 계녀류의 글이 붙어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글은 南塘 韓元震선생이 부녀자에게 내려준 가르침 婦訓이다. 그 형식과 내용은 전문에 이어 사부모구고장, 사가장, 접형제, 자식과 며느리 가르치는 장, 대첩잉 등 여섯 장으로 되어 특히 가정생활 중심으로 가족관계에서의 효와 존경과 신의 그리고 우애와 사랑 등을 강조하여 가르친 글이며, 아마도 이는 우암의 수제자였던 수암 권상하의 또 수제자인 남당(1682-1751)이 직접 그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스승과 글을 통하여 스승의 스승이었던 우암을 존경하고 사숙하였고 그의 계녀서에 크게 감동되어 스스로 또 부훈을 지어 후손들에게 가르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확언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이 책은 남당의 후손 집안에 전해온 것으로 추정되어 한씨가전본으로 하거나 아니면 그런 확증이 없으니 현소장자의 호를 붙여 삼정본이라 하면 무관할 것 같다.

3) 戒女書의 內容

계녀서는 22장으로 나눌 수 있다. 86년 정음사판과 세적본에서는 전언이란 항을 두지 않았고 46년 정음사판과 삼정본에만 전언이란 항이 있으며, 발문이란 항은 46년 정음사판에만 두었지만 글의 내용과 성격상 전언과 발문이란 별항을 따로 설정하여 본 가르침 20항과 합하여 22장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계녀서의 내용을 먼저 항목으로 일별하면 전언에 이어 부모 섬기기, 남편 섬기기, 시부모 섬기기, 형제 화목, 친척 화목, 자식 가르치기, 제사 받들기, 손님 대접, 투기, 말조심, 절약, 근면, 병환 모시기, 의복 음식, 노비 부리기, 꾸고 받기, 팔고 사기, 비손, 중요한 경계, 옛 사람 선행, 발문 등이다.

본고의 계녀서 본문은 가장 현대식으로 표현한 정음사 발행 1986년 판을 기본으로 하고, 말과 표현에서 오류나 부자연스런 부분은 세적본과 삼정본을 참고하여 필자의 뜻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계녀서는 책으로 두어 번 발행된 바가 있으나 그렇게 널리 보급되지 않아 모든 이에겐 아직 생소한 글이라 사료되고, 또 일독하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가르침이라 조금 장황한 감도 들지만 각 항목별로 전문을 그대로 적고 필자의 소견을 간단히 부언코자 한다.

계 녀 서

(1) 전 언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장부가 갓을 쓰게 되면 아버지께 절을 하고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어머니께 절을 한다고 하시었으니, 여자의 행실은 아버지가 가르칠 일이 아니로되 너의 나이가 비녀를 꽂기에 이르러 행실이 높은 집으로 출가하니 마지못하여 대강 적어서 주는 것이니 늙은 아버지의 말이 선후가 맞지않고 疎略하다고 하지 말고 힘써서 행하도록 하라.

이 전언에서는 맹자의 말을 들면서 글을 쓰게된 동기를 말하고 힘써 지키기를 당부하였다. 아무리 다져도 미진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아버지의 끝없는 깊은 사랑이 배어있다.

(2) 부모 섬기는 도리라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니 부모가 없으시면 이몸이 어디에서 태어나며, 襁褓에 싸인 젖먹이 때로부터 성장하도록 근로하신 은혜를 생각하면 하늘이 끝이 없거늘 어찌 잊을 때가 있으리오.

은덕을 잊는 것도 불효요, 질병을 걱정하지 않는 것도 불효요, 형제친척을 박정하게 대하는 것도 불효요, 내몸을 천하게 하여 남이 경멸히 여기게 하는 것도 불효라 하였으니, 약간의 음식이나 의복을 하여 드리고 착한 체 말라. 부모가 남에게 주시려고 하시거든 주고, 말고자 하시거든 꺼리지 말고, 부모 앞에서 개와 닭을 꾸짖지 말고 항상 조심하여 정성이 극진하면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연히 감동하실 것이다.

옛사람이 말씀하시기를 자식을 길러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고 하였으니 네가 멀지않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대충 쓰는 바이다.

호천망극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는 백행의 근본이고, 물려주신 신체발부를 온전히 하는 것이 효의 으뜸이란 전통적 가르침의 깊은 뜻을 밝혔다. 그래서 ‘내 몸을 천하게 하여 남이 경멸히 여기게’ 하지 않는 것이 또 큰 효이고, 의복과 음식이나 해드리는 양구체보다는 부모의 깊은 뜻을 헤아려 받드는 ‘養志孝’를 강조하였다. 부모 앞에서는 ‘개와 닭도 꾸짖지 말라’는 말씀은 자식된 자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음미해야 할 가르침이다.

(3) 남편 섬기는 도리라

여자의 백년 우러러 바라는 것이 오직 남편뿐이다. 부군을 섬기기는 뜻을 어기지 마는 일 밖에 없으니 부군이 대단히 그른 일을 하여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할 일을 하는 외에는 그 뜻을 만분의 하나라도 미진한 일이 없게 하여 그가 하는 대로 하게 하고, 한 가지의 말과 한 가지 일을 어기지 말라.

여자가 부군을 섬기는 일 가운데 투기를 아니하는 것이 으뜸가는 행실이니 일백의 첩을 두어도 본체만체 말하지 말고, 妾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성낸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더욱 공경하여라.

너의 부군은 단정한 선비라 여색에 빠져들어감이 없을 것이요, 너도 투기할 사람이 아니지만 오히려 경계하니 너뿐만 아니라 네가 딸을 낳아도 제일로 인사를 가르치도록 하여라. 고금 천하에 투기로 망한 집이 많으니 투기를 하면 백가지 아름다운 행실이 모두 보람없이 되느니라. 깊이 경계하여라.

부부 사이 극진히 친밀하게 공경하는 것이 지극한 도리니 말씀하는 것이나 기거하는 것이나 一動一靜에 마음을 놓지 말고 높은 손님 대접하듯 하여라. 이와 같이 하면 저도 한결같을 것이니 부디부디 뜻을 어기지 말아라.

남편은 백년 우러러 높은 손님 대접하듯 하고 백의 첩을 두어도 투기하지 말고 더욱 공경하라는 말은 당시의 지나친 남성우월적 통념의 반영이지만 ‘부부 사이 극진히 친밀하게 공경하는 것이 지극한 도리니… 이와 같이 하면 저도 한결같을 것이니…’에서 보면 진정한 사랑은 먼저 받들고 무한히 베푸는데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는 높은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4) 시부모 섬기는 도리라

세상 부인이 부군의 몸을 자기 몸보다 더 중히 여겨 의복을 저는 입을 줄을 모르고 부군의 입을 자기 입보다 더 중히 여겨 음식을 저는 먹을 줄 모르고 백사에 제몸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남편의 부모는 제 부모보다 더 중한 줄을 모르고 제 부모의 私事편지를 시부모가 아실까 하니, 그러할 것 같으면 禮文에서 어찌하여 제 부모상복은 朞年이요 시부모 상복은 삼년을 하라고 하였으리오.

시부모 섬기기를 제 부모보다 중히 할지니 一動一靜과 一言一事를 부디 무심히 말고 극진히 섬기도록 하여라.

내 부모와 같이 섬기지 못하면 시부모도 자기 딸만큼 사랑하지 못하나니 저는 모르고 시부모가 딸만큼 여기지 못하면 그러한 일만 섭섭하게 여겨 거칠고 어리석은 부인은 싸울때도 많고 家道가 편안치 않아 참혹하게 하다가 늙은 후에 며느리를 얻으면 또 제 며느리 흉을 그지없이 하니 시부모를 박대하고 제 며느리 흉을 또 보는 사람이 세상에 많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시부모가 꾸중을 하셔도 내가 한 일이 그른 때에 꾸중하신다 생각하고 사랑하셔도 기뻐하여 더욱 조심하고 내 부모가 집에서 보내는 것 있거든 封한 대로 시부모앞에 풀어드리고 덜어서 나누어 주시거든 사양하지 말고 받아서 잘 간직해 두었다가 다시 드리고 내가 쓸 데가 있거든 시부모에게 다시 말씀드리고 쓰도록 하여라.

이 밖의 말은 부모 섬기는 장에서 다 말하였으니 그대로 할 것이니라.

시부모 섬기기를 친부모보다 더 중히 하라는 가르침이다. 예문의 기년복․삼년복을 들어 법으로 맺은 시부모를 더 정성으로 모시기를 강조하였다. 매사를 그 뜻을 받들어 지극히 섬기고 딸같이 사랑을 받고 가도의 편안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5) 형제 화목하는 도리라

형제는 한 부모에게 혈기를 나누어서 같은 젖을 먹고, 한 집에서 자라나 옷도 같이 입고, 밥도 같이 먹고, 놀기도 한시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고, 병이 들면 근심하고 배고파하거나 추워하면 민망하게 여기어 제가 당한거나 다르지 않게 하다가, 각각 夫婦를 차려서 분가한 후에는 제 자식의 말도 듣고 노비의 말도 듣고 자연히 不恭之說이 있어 처음 그렇게 사랑하던 마음이 점점 감소하여 심한 사람은 미워하고 헐뜯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비와 전답을 다투어 解緣한 이가 많고 욕심은 갈수록 길고 至情을 잊는 자가 많으니 부디 삼가라. 노비와 전답은 없다가도 있거니와, 형제는 한번 잃으면 모두 얻지 못하니 어릴때부터 같이 자라던 일을 생각하면 싸우고 불화할 마음이 어찌 나겠는가.

여자집의 오라비의 아내와 시집동생이 다 같지만 그 사이가 참혹한 사람이 많으니 부디 네가 집에 있을때 친동생 같이 하고 화복길흉과 대소사에 똑같이 살펴 조심하고 오로지 화목하기를 주장하여라.

의좋던 형제가 성인이 되어 분가를 하고 자식과 노비와 전답으로 인하여 해연하고 다투는 경우를 들어 경계하였다. 그리고 시가의 형제자매도 친가의 형제와 똑같이 화목을 으뜸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이다.

(6) 친척을 화목하는 도리라

친은 동성 겨레요, 척은 이성 겨레이다. 그 중에 촌수의 멀고 가까움이 있고 정의 후박이 있기는 하나 모두 先世의 자손인 것이다. 선세를 생각하면 선세자손을 박정하게 할 마음이 어찌 있으랴. 사람이 남녀간에 다 각각 자손을 두었으되 다 화목하고자 하여 늘 경계하나, 내 마음이 선세 마음과 같이 할 줄은 생각지 못하고 전답으로서 다투며 비천하면 업신여기고 부귀하면 시기하고 남을 보아도 겨레의 말을 그지없이 하려고 하니 당초는 한 사람의 몸을 나누어서 낳았으되 나중은 원수가 되니, 그런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니 각별히 경계하라.

그릇된 일을 보아도 참고, 그른 말을 들어도 참고, 부귀하거든 반갑게 생각하고, 질병에 조심하고, 혼사장례와 제사에 힘있는 대로 도와주면 어찌 감사하지 않게 여기겠는가.

옛사람이 九代가 같이 있으되 화목하는 법이 참을 忍자 백개를 써붙였다 하니, 화목하는 도리는 참는 것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동성의 겨레 친이 되고 이성의 겨레 척이 되었으니 선세를 생각하여 화목하라는 가르침은 논리적이다. 9대가 같이 살되 화목하는 법은 忍자 백개였다고 참는 미덕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7) 자식을 가르치는 도리라

딸자식은 어머니가 가르치고 아들 자식은 아버지가 가르친다 하거니와, 아들자식도 글을 배우기 전은 어머니에게 있으니 어렸을 때부터 속이지 말고, 너무 때리지 말고, 글 배울 때도 순서없이 권하지 말고, 하루 세 번씩 권하여 읽히고, 잡된 장난을 못하게 하고, 보는 데서 드러눕지 말게 하고, 세수를 일찍 하게하고, 친구와 언약하였다고 하거든 여행하여 남과 실언치 말게 하고, 잡된 사람과 사귀지 못하게 하고, 일가제사에 참례하게 하고, 온갖 행실을 옛사람의 일을 배우게 하고, 십오세가 넘거든 아버지에게 전하여 잘 가르치라 하고, 百事를 한결같이 가르치면 자연히 단정하고 어진 선비가 되느니라.

어려서 가르치지 못하고 늦게서야 가르치려 하면 되지 아니하는 것이니 일찍 가르쳐야 門戶를 보존하고 내몸에 욕이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어미에게 달려있으니 아비에게 책임지워 바라지 말고, 자식을 배었을 때도 잡된 음식 먹지 말고, 기우러진 자리에 눕지 말고 몸을 단정히 가지면 자식을 낳으면 자연 단정한 자식이 태어나느니라.

자식은 어머니를 닮는 이가 많으니 열달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있으니 어머니를 닮고 십세전에 어머니의 말을 들었으니 어머니를 또 닮게 되니, 어찌 아니 가르치고 착한 자식이 있겠는가. 딸자식도 가르치는 도리는 같으니 대개 남녀를 다부지게 하여 가르치고 행여나 병이 날가하여 눕게하고 편케하는 것은 자식을 속이는 것이니 부디 잘 가르쳐라.

자식이 15세가 되어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넘겨 가르치게 하되 그 때까지 유소년기는 전적으로 어미가 품성도야의 훈육과 글공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태교로부터 유소년기의 인성형성과 글익히기까지 구체적인 사항을 자세히 열거하며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하였다. 바르고 훌륭한 착한 자식은 오직 어진 어머니에게서 말미암는다는 이치를 강조하고 합리적으로 펼쳐 가르쳤다.

(8) 제사 받드는 도리라

제사는 정성으로 정숙하게 하며 조심하는 것이 으뜸이니 제수 장만할 때 걱정을 하지 말고, 하인도 꾸짖지 말고, 소리내어 하하 웃지 말고, 現於辭色하여 근심말고, 없는 것을 구차하게 얻지 말며, 제물에 티끌이 들어가게 하지 말고, 먼저 먹지 말고, 어린 아이가 먹겠다고 보채더라도 주지 말고, 많이 장만하면 자연 불결하니 쓸 만큼 장만하고, 훗 제사에 부족할 것 같으면 일년 제수 들 것을 생각하여 훗 제사에 闕祭를 아니하게 하여 풍족하고 박함이 너무 뚜렷하지 않게 하고, 정성으로 머리빚고 목욕하되 겨울이라도 폐하지 말고, 기제사에 색옷 입지 말고, 손톱 발톱을 깎고 정결하게 하면 신명이 歆饗하고 자손이 복이 있고, 그렇게 안하면 災禍가 있는 것이다.

남의 제사를 차려 보내거나 아비의 친구에게 致奠을 장만할 때도 다 내집 제사같이 하고 남에게 가는 것이라 하여 부정히 하면 심덕에 해롭고 복이 손상되는 것이니 부디 조심하여라.

가도가 바로 서고 자손이 번창하여 잘 되는 길은 먼저 학문에 힘쓰도록 잘 가르치고 봉제사 접빈객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전통적 가르침이다. 제사를 받드는 것은 정성과 정갈이 으뜸이니 겨울에도 필히 목욕재계하고 연중제사를 후박없이 미리 계획하여 제수준비를 해두고, 남의 제사를 차려보내거나 친구에게 치전을 장만할 때도 정성과 정갈을 내집 제사처럼 해야 심덕에 이롭고 복이 오는 것이란 가르침은 참으로 자상하고 자애롭다.

(9) 손님 대접하는 도리라

내집에 오는 손님이 먼 친척이 아니면 남편의 벗이요 媤族의 벗이라, 음식 잘하여 대접하고 실과나 술이나 있는대로 대접하되 손님이 잘 먹지 못하여도 박대요, 남편이 외출한 때에는 하인을 시켜 그 손을 挽留 아니함도 박대하는 것이니 일가사람을 청하여 주인 노릇을 하게 하고 일가사람이 없으면 마을에 집을 잡아 주인을 정해주고 잘 대접하여 보내도록 하여라.

한번 두번 박대하면 그 손님이 아니 오며 다른 손도 아니 올것이니 손이 아니오면 가문이 자연히 무식하고 남편과 자식이 주인노릇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니 부디 손대접을 극진하게 하여라.

옛 부인은 다리(머리 숱을 많게 하려고 덧드리는 딴머리)를 팔아 손을 대접하고 자리(席子)를 썰어서 말을 먹였으니 요새의 부인네는 손이 왔다하면 남편을 매우 나무라고 남편이나 자식이나 어디가서 잘 먹었다하면 그는 기뻐하니, 부디 명심하여 경계하여 잘 대접하되 인심이 부귀한 손이 오면 조심하여 잘 대접하고 빈천한 손이 오면 대수롭지 않게 대접하니 이는 덕스럽지 못한 행실인 것이다.

노소는 분간하여 대접하려니와 귀천과 빈부는 부디 분별하지 말아라.

집에 온 손님을 잘 대접하되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이라 남편 출타시 접빈의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예시하여 설명하였고 다리를 팔아 음식을 장만하고 자리를 썰어 말을 먹였다는 고사를 들어 손님대접을 강조하였다. 노소는 분간하되 빈부는 가리지 말고 극진히 대접하라 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군자의 가르침이다.

(10) 투기하지 말라는 도리라

투기 말라는 말은 군자를 섬기는 대문에 이미 말하였는데 투기란 것은 부인의 제일가는 악행이므로 다시 쓰는 것이다. 투기를 하면 친밀하던부부 사이라도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질병에 관계치 아니하고 분한 마음과 악정을 내게 하고 舅姑 섬기는 마음이 감하고 자연 사랑하는 마음이 歇後하여 노비도 부질없이 때리고 가사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늘 악정된 말로 하고 낯빛을 늘 슬픈 표정으로 하여 남 대하기를 싫어하니 그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투기를 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되기를 면하지 못하니 가도의 성패와 자손의 흥망이 거기 달려 있느니라.

옛부터 망한 집 말을 들으면 투기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사람이 많고 시전 삼백편에 문왕후비가 투기아니하신 말씀을 으뜸으로 썼으니 옛 성인이 생각하옵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으니 그 법을 어찌 効則하지 아니 하겠는가.

내 몸을 버리고 집이 패하고 자손이 다 망하는 것이 투기로 하여서 생기니 늙은 아비의 말을 허술하게 여기지 말고 경게하여라.

내 아무리 망령되나 너를 虛疎하게 여기며 네 남편이 얻지도 아니한 妾을 위하여 투기 말라고는 하랴마는, 부인의 행실에 지극히 중대한 일인 까닭에 다시 써서 申申 경계하는 바이다.

투기는 부인의 제일가는 악행으로 실절실행의 근본이 되고 투기로써 원만한 가족관계가 허물어지며 가도의 성패와 자손의 흥망이 거기 달렸으니 어떠한 경우도 투기는 하지 말기를 신신당부하였다. 이 항은 앞의 남편 섬기기와 함께 오늘날의 민주 평등사상에 비추어 보면 이론과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당시의 통념으로는 현숙한 부덕의 으뜸가는 덕목이다.

(11) 말씀을 조심하는 도리라

常談에 이르기를 신부가 시가에 가서 눈멀어 삼년이요, 귀먹어 삼년이요, 말못하여 삼년이라 하니 눈이 멀었단 말은 보고도 말하지 말라는 말이요, 귀먹었다는 말은 듣고도 들은 체를 말라는 말이요, 말 못한다는 말은 不緊한 말은 하지 말라는 말이니 말을 삼감이 으뜸가는 행실인 것이다.

삼가지 아니하면 옳은 말이라도 시비와 싸움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어든 하물며 그른 말을 할까 싶으냐.

남의 흉을 말하면 자연히 원망도 나고 싸움도 나고 욕도 나며 부모친척이 짐승으로 보이고 노비와 이웃사람이 없수이 여기나니 내 혀를 가지고 도리어 내 몸을 해롭게 하니 그런 애닯고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백가지 행실 가운데 말을 삼가는 것이 제일가는 공부니 부디부디 삼가 뉘움침이 없게 하여라.

처음 시집간 신부가 눈멀어 삼년, 귀먹어 삼년, 말못하여 삼년이란 석삼년의 상담을 들어 말조심하기를 당부하였다. 말로써 시비와 욕과 원망과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니 내 혀를 가지고 도리어 내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 말은 항상 조심하고 삼가하라고 가르쳤다.

(12) 재물을 撙節이 하는 도리라

재물이라 하는 것은 한이 있고 쓰기는 무궁하니 알아서 쓰지 못하면 나중에는 지탱하지 못하고 子女婚娶를 못하여 常人이 되는 이가 많으니 두려운 일인 것이다.

萬乘天子라도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면 나라가 망하거든 하물며 필부의 집이야 절약 해 쓰지 아니하고 재물이 어디서 날것인가?

풍년에나 흉년에나 추수할 곡식수효를 헤아리고, 제사가 몇 位인가 헤아리고, 식구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할 것이니, 제사를 정성으로 하되 장만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고, 부질없는 허비를 말고, 의복과 음식을 너무 사치하게 말고, 쓸데는 아끼지 말고, 무단한 일에는 조금도 허비말고, 의복 음식을 보아가며 하고, 허랑한 일을 일체 아니하면 자라게 쓸것이요, 늘 나머지를 두어 질병에 약값을 하거나 喪事의 소용을 하거나 公私債에 자손을 위하여 전답을 장만함이 또 옳은 것이다. 집을 다스리는 법은 절약해서 쓰는 밖에 없는 것이다.

재물은 한이 있는 것이라 규모있고 존절히 해야 자라게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치산의 법은 절약밖에 없으니 풍년에나 흉년에나 추수를 헤아려 제사와 식구를 헤아리고 허비와 사치를 말되 쓸데 아끼지 말라고 한 것은 참으로 온당한 中正의 가르침이다.

(13) 일을 부지런히 하는 도리라

천자황후도 놀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하신 말씀을 맹자께서 말씀하고 계시니 선비의 아내가 일을 부지런히 아니하고 부모를 어떻게 섬기며 자손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잠을 안 자고 밥을 안먹으며 너무 애를 써서 병이 나는 부인도 있거니와 그는 굳이 할것이 아니다. 심중에 놀지 아니하자 하면 옛적 언문고담을 어느 겨를에 할것인가.

시부모와 남편 섬기기와 노비와 자식 거느리기가 모두 家母에 달려있으니 재삼 삼갈 일이요, 제사와 방적과 장담고 조석 양식의 백가지 일이 모두 가모에게 있으니 어느 한가한 틈에 게으르고자 할 마음이 있겠는가.

이러하므로 가모가 부지런해야 그 집을 보존하고 게으르면 飢寒에 汨沒하여 자손의 혼취를 못하면 남도 천하게 여기고 내몸이 궁하여 마음이 부끄러울 것이다. 부디 부지런하기를 위주로 하여라.

천자황후도 놀지않고 부지런했다는 맹자의 말씀을 들어 부모 섬기고 자식 기르는데 선비의 아내가 부지런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침식을 잊고 애써 병이 나는 것은 무모하지만 앙사부육에 게으를 틈이 어디있겠느냐고 권면하였다.

(14) 병환 모시는 도리라

사람의 사생이 질병에 있나니 병환이 극히 염려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내 부모나 시부모나 남편이나 병환이 계시거든 머리빗지 말고, 말소리를 크게 하지 말고, 소리내어 허허 웃지말고, 게으르게 걸음을 걷지말고, 일찍 자지 말고, 자더라고 늦도록 자지 말고, 다른 사람이 뫼실 이 없거든 그 앞을 떠나지 말고, 약을 다리고 죽 다리기를 손수하여 종을 시키지 말고, 잡수지 않더라도 음식을 자주 하여 드리고, 모든 일에 지극한 정성을 일시라도 잊지 말고, 병구완하는 사람과 의원을 부디 잘 대접하여라.

시부모나 남편의 병환이 있을 때 몸가짐과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정성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병구완하는 사람과 의원도 잘 대접하라고 하였으니 그 자상하고 자애로운 배려가 참으로 놀랍다.

(15) 의복 음식하는 도리라

성인이 가르치시되 儉朴하라 하시었으니 의복치레하고 음식하기를 사치하게 가르칠 일이 아니지만 부인의 맡은바가 의식 밖에는 없으니 의식이 庸劣하면 부인네를 없수이 여기나니, 옛 글에 이르기를 부인이 규중에 있으나 알아야 할 일이 있으니 손님이 오면 음식을 보고 남편이 나가면 의복을 본다고 하였으니, 어찌 살피지 아니하겠는가.

부자는 의복 감이 넉넉하고 가난한 이는 부족하나니 넉넉하면 자연히 잘하고 부족하면 잘하고자 하지만 잘 할 길이 없거니와, 그러하나 부인이 민첩하지 못하면 음식 의복이 모두 좋은 감을 가지고도 不似하고, 부인이 능란하면 한가지 음식 한가지 의복을 하여도 봄직하니, 부디 淨하게 하여 남이 웃지 말게 하여라.

네가 미처 배운 것 없고 네 시가는 보통 다른 집과 달라 예의와 법도가 떳떳할 것이니 자세한 내용을 다 쓰지마는 부디 한때도 마음을 놓지 말고 조심하여 대단히 경계하면 자연히 잘 할 것이다.

옛 부인은 나물을 치수로 끊었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니 정결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네 시가에 가서 온갖 예도를 맏동서에게 물어서 정하게 배워서 정하게 하여라.

손님이 오면 음식을 보고 남편이 나가면 의복을 본다는 말을 들어 부인의 기본인 의식을 잘 살피라는 것이다. 옛 부인은 나물을 치수로 끊었다고 하니 시가의 예도를 묻고 배워서 부디 정하고 정하게 하라는 당부가 간곡하다.

(16) 노비 부리는 도리라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 손수 밭을 갈고 밥을 짓고 반찬 장만하고 제손으로 나무를 베어 부모 주무시는 방에 불을 때고 풍우를 폐하지 아니하고 부모의 수고를 대신하면 만고의 효자라고 하나니, 요사이는 그러한 자식이 있단 말을 듣지 못하니 자식이 못하는 일을 노비는 하여 농사하고 밥짓고 반찬 장만하고 원근에 심부름하니 아무리 나라의 명분이 그러하나 노비 밖에 귀한 것이 없는 것이다.

세상 풍속이 조그만 일에도 꾸짖고 음식도 잘 아니주고, 의복도 잘 아니 입히고, 대소간의 죄가 있으면 형장을 과하게 하여 死境에 가깝게 해놓고 위엄있고 행습이 엄하다고 자랑하되, 하는 일을 하늘이 괘씸히 여겨 그런 사람의 자손이 보전치 못하고 使喚이 없으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도 또한 사람의 자식이라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아니하겠는가.

부디 불쌍해 하고 꾸짖지 말고 매 칠 일이 있어도 꾸중하며 과하게 치지 말아라.

사람의 재주는 모두 각각이니 그 종이 못할 일은 시키지 말고 이 종더러 저 종의 말을 하지말고, 시가의 종을 제가 데리고 온 종만큼 아는 사람이 적으니 부디 같이 하고, 종을 데리고 남의 시비하는 말을 말고 종이 온갖 말을 하거나 음란한 말을 하거든 아는 체 하지 말고, 오랜 후에 경계하여 꾸짖되 늘 꾸중하지 말고, 늘 나무라지 말고, 헛되이 칭찬하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을 분간하여 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불쌍히 하고, 종이 병들거든 부모나 자식이나 아우가 있는 종은 죽쌀을 주고, 그렇게 돌볼 식구가 없는 종은 다른 종을 시켜 병구완을 하여주고 증세를 각별히 유의하여 물어서 고쳐주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행하면 종이 자연 忠奴忠婢가 되는 것이다.

上典이 그러한데도 늘 속이고 요사스럽고 악하여 부리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부리지 말아라.

자식이 부모에게 다하지 못하는 농사하고 밥짓고 심부름하는 일을 대신 다하는 노비 밖에 귀한 것이 없다 하였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함부로 꾸짓거나 매질하지 말고, 혹 병이 나면 병구완 잘 해 주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행하면 종이 자연 충노충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나라의 명분에 따른 것이지만 노비도 역시 귀히 여기고 타일러 부리라는 말 속에 노비의 인권도 존중하라는 기본 정신이 깔려있다.

(17) 꾸며 받는 도리라

사람이 부하여도 가난한 사람에게 取貸하는 일이 있으니 남이 꾸어달라고 하며 빚을 달라고 하고 나도 남더러 꾸어달라고 하며 빚을 달라고 하는 일이 있으니, 내가 남에게 꾸었거나 빚을 썼거나 하였거든 다시 꾸어 쓸지라도 즉시 마련하여 갚으라.

남의 것을 쓰고서 즉시 아니 갚거나 좋게 아니하면 不似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부디 조심하려니와 어지간 하여 꾸지 아니하여도 견딜만 하거든 꾸지를 말아라. 부질없이 꾸기와 빚내기를 즐기다가 갚을 때 공것 같고 집이 자연 가난해 지느니라.

남이 나더러 꾸어달라고 하거나 빚을 달라고 하거든 없으면 못주고 다행히 가지고 있거든 성난 표정을 말고 좋은 듯이 주어 보내고 재촉하지 말고 쓰기가 아쉽거든 제 형세 보아가며 재촉하되 보기 싫게 하지마라.

인품이 각각 달라서 잘하여 갚는 사람도 있고 심술이 바르지 않게 하여 갚는 사람도 있으니 만일 바르지 않게 하여 주어도 웃고 받아 노색 말며 아니 갚는 사람도 있으니 재촉한 후 사뭇 갚지 아니하다가 또 꾸어달라거나 빚을 달라고 하거든 그때는 주지 말고 그 집 사람보고 겉으로 나타내지 말고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제가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 대개 꾸기는 하려니와 빚을 주는 일은 부디 하지마라. 자연히 원망이 나고 재화가 있는 것이라.

빈부간에 취대하는 일이 있기 마련인데 어지간 하면 꾸지 말고 부득이 꾸거나 빚을 썼으면 즉시 마련하여 갚고 꾸어주거나 빚을 줄 때는 다행히 가지고 있거든 좋은 듯이 주고 보기 싫게 재촉하지 말라하였다. 심술이 바르지 않아 갚지 않으면 더는 주지 말고 잊어버려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가르쳤다.

(18) 팔고 사는 도리라

사람이 온갖 것을 다 장만하지 못하매 사며 팔기를 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사람의 마음이 살때는 적게 주고 팔때는 많이 받고자 하니 남에게 속기는 아니하려 하거니와 너무 이롭고자 하지말며 물건을 살 때 마음 속에 생각하기를 내가 팔면 얼마를 받겠다 얼마를 줄것이라 해서 값을 대충해서 사고팔면 자연히 마땅한 값대로 되는 것이니라.

남이 질병에나 기근에나 절박하여 물건을 반값만 내고 사라고 하거든 값은 값대로 주고 사도록 하여라. 이하게 사면 오래지 아니하여 잃거나 깨거나 자손이 도로 팔거나 하느니라. 혹 제 생각한 바의 값을 판단하여 헤아리지 못하고 과하게 주어도 잘못이니 남한테 물어서 여러 사람의 공론대로 하면 이해간에 내 심술과 福에 해가 없는 것이라, 부디 이롭고자 하지 마라.

사고 팔 때 남에게 속기는 아니하려니와 너무 이롭고자 하지 말며 남이 질병․기근․긴박한 사정 등으로 반값만 내라해도 값을 다 주고 사고 헤아리기 어려울 때는 공론대로 하여 내 심술과 복에 해가 없도록 하라 하였으니 지극히 온당한 상도의와 사람의 양심이 흔들리기 쉬운 재물 앞에서도 언제나 바르고 착한 아름다운 심성으로 살아가기를 가르친 것이다.

(19) 비손하는 도리라

무당과 소경의 말을 듣고 기도하지 말고, 산에가 빌거나 물에 가서 빌거나 부모병환에 기도하는 것은 집안의 의론이 있거든 분명히 그릇된 노릇으로 알지라도 집안의 의론대로 하여 못한다고 우기지 말고 하려니와, 그밖의 질병에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은 그르고, 아니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것이니라.

소경 불러서 하는 기도는 마지 못하지만 무녀와 화랑을 들여서 징치고 장구치고 큰 굿을 하는 집은 분명히 상사람의 집이니 자손이 오래지 아니하여 상인이 되는 것이니라.

세상에 양반이라 하면서 그러한 집이 있다하고 혹 동네에서 굿하면 부인들이 굿보려고 가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한심하고 불사한 행실이 어디 있겠는가. 내 자손 중에 그러한 사람이 있을까 두렵고 또 걱정하는 것이다.

절에 가서 시주불공하는 것은 더욱 허무하니 마음먹지도 마라

무당과 소경의 말에 따라 기도하기, 산천에 가서 빌기, 절에 가서 불공드리기 등은 다 허황하고 상사람이 하는 짓이니 아니하는 것이 옳고 내 자손 중에 그러한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고 한 것은 오직 공맹지도만을 존숭한 소이지만 그러나 부모병환에 기도하는 것만은 못한다고 우기지 말라고 한 것은 백행의 근본인 효와 순종의 미덕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20) 종요로운 경계라

사람의 귀천빈부는 다 정해진 분에 달렸으니 남이 귀하여 벼슬이 높으며 집이 富饒하거든 보고 부러워하지 말고 사람이 백사에 좋은 줄 알면 마음이 자연히 평안 할 것이다.

추워도 나만큼 못입는 사람을 생각하고 배고파도 나만큼 못먹는 사람을 생각하면 자연히 부족한 근심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대체로 교만하지 아니 함이 큰 덕이니 미천한 사람을 보아도 업신여기지 말고, 추워하고 굶는 사람을 보아도 업신여기지 말고 불쌍하게 여기고, 남의 것을 나무라지 말고 내것을 자랑하지 말면 자연히 시비가 없게 되느니라.

사람이 너무 疎濶하게 할 일은 아니로되 남이 절박하여 구하는 일이 있거든 그 사람 말을 들어보아 노친을 위하거나 제사를 차리거나 질병을 구완하거나 빈객을 위하거나 가장 마지못할 일이거든 힘있는대로 돌보아 주되 내가 쓸 데가 있어도 쓰지 않고 주는 것은 과한 짓이니 온갖 일을 得中케 하여라 남에게는 속을지언정 남을 속이지는 마라.

남이 나를 꾸짖어도 내 일이 그르면 저 사람 꾸짖음이 옳고 내 일이 옳으면 저사람이 그르니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들은둥 만둥하고 도리어 꾸짖지 마라.

시부모와 남편이 혹 잘못 아시고 꾸중하시거든 잔말하여 어지럽게 아니라고 발명말고 잠잠하게 있다가 오래 된 뒤에 조용히 그렇지 않은 까닭을 말하거나 끝끝내 말씀 안들여도 아실 날이 자연히 있으니 부디 그 당장에서 불사이 발명말고 내가 그릇한 일이 있거든 즉시 말씀드리고 미처 드리지 못하여 모르시거든 꾸미지 말고 옳은 대로 말씀드려라. 매사를 이와 같이 하면 자연히 그른 일이 적을 것이라.

말을 많이 하면 부질없는 말이 자연히 나오게 되고 남이 실없게 여기게 되니 부디부디 말을 적게 하여라.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칠거지악에 들었으니 경계하여라.

사랑에 손이 오면 혹시 엿보지마라. 엿보는 것은 그런 불관한 행실이 없으니 부디 마음 먹지도 마라. 그만치 駭怪한 행실이 없는 것이니라. 분명한 얼굴 모습 뿐만 아니라 의복도 밖의 사람이 보이게 하지 말고 어두운 후에는 등불을 켜고 종을 데리고 다니되 등불이 없거나 종이 없거나 하거든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문밖에 나서지 마라.

옛 부인은 화재를 당하여도 부모와 侍婢가 없어서 그로 인하여 불에 타죽어서 열녀전에 올라 있으니 어두운 후는 출입 말고 사오십되는 이라도 십세후는 한 자리에 가까이 말고 雙六치고 책을 보되 體禮를 중하게 하여라. 부디 그때그때 빠짐없이 詳審하고 남매간에 잡되게 謔諧말아라

친가에나 시가에나 혹 미진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말아라. 내 私親보고 시집 겨레의 말을 하지 말고 書辭에도 쓰지마라. 부인은 시가가 으뜸이요, 친가는 시가만 못하니 그런 줄 알면 다하지 못한 일이 있어도 알까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친가 겨레에게 듣게하겠는가.

아름다운 일은 자세히 널리 전하여 배우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니라. 시부모와 남편이 전갈하는데 끼어 앉아 전갈 말고 하고 싶거든 일어나 다른데 가서 전갈하고 한데 같은 곳에서 하지 말아라. 겨레의 종이 와서 전갈할 때도 그렇게 하여라.

종이 그른 일이 있어 때리고 싶더라도 시부모 앞에서 때리지 말고 아무리 사랑하는 종이라도 제손으로 때리지 말고 남편에게 말씀드려 다른 종을 시켜서 때리게 하여라.

병이 들어 음식이나 약을 안먹으면 시부모와 남편이 깊이 근심할 것이니 억지로라도 먹고 병이 날까 싶거든 미리 말씀드려서 고치게 하고 참고 숨기다가 병이 중한 후 근심되게 하면 대단한 불효로 불행한 일이니 미리 고치게 하여라.

머리빗고 세수하고 몸씻기를 시부모 병환 계실 때 밖에는 폐하지 말고 의복에 때가 있거나 하면 불사하니 아무리 추운 때라도 빨래하기를 폐하지 마라. 의복거는 횃대에 남편 옷을 건 데다가 같이 걸지 마라. 한데 건 것이 생각에 심히 불편할 것이니라.

자녀 혼일할 때 저집의 가행을 알아보아서 부디 아름다운데를 가려서 빈부는 보지 마려니와 인간대사라 신랑 신부를 자세히 알아서하되 남편에게 맡기고 자세히모르면 아는체 말고 약간의 소견을 말하되 판단을 내리지 마라.

며느리가 나만큼 못한데서 얻으면 며느리가 들어와서 조심하고 딸자식은 내집보다 나은 데로 보내면 딸이 조심하느니라.

사람이 대개 忠厚仁慈할 수 밖에 없고 큰일을 당하여서는 처단할 적에 칼로 베인 듯이 엄정하게 하여 남이 권하는 말을 듣지말고 스스로 판단하여 하여라.

사람이 구차하지 아니함이 좋으니 구차한 일을 하지 마라. 옛 사람은 큰 일을 당하여도 구차하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적은 일을 당하여 구차하게 하겠는가. 부질없이 구하는 일이 구차하며 불쾌한 음식을 먹는 것도 구차함이요, 이밖에 남에게 끌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구차한 일이니 부디 씩씩하기를 위주로 하여라.

부인 출입이 중대하니 아니하여도 될 일이거든 출입말고 본가부모 생신이나 大事를 지내거나 하거든 다니고 쓸데없는 출입은 하지말아라. 친구나 일가집에서 혼인을 지내거나 상사가 나거나 하여 마지 못하여 가야되거든 가되 깊숙히 안쪽으로 앉고 밖을 내다보지마라. 대사때 내외분별하기가 어려우니 부디 삼가라.

사람의 短處와 허물이 성품을 참지 못하는데에 있으니 어느 사람인들 성품과 심술이 없을까마는 오로지 참고 마음 가지기에 있으니 대소사에 성품을 지나치게 내서 말도 삼가지 못하고 선후의 차례를 차리지 못하고 일가친척에게도 불인한 일을 하면 좋지 아니한 일이 많으니 성품을 지나치게 내서 형벌도 지나치게 하며 성품을 참지 못하여 겉으로 내부리면 점점 늘어서 노기에 취하여 시끄럽게 떠들며 온갖 광언망설을 하는 이가 많으니 그런 부끄러운 擧措가 없는 것이니라. 성품이 그친 후에는 술먹고 취하였다가 깬 것 같으니 술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 성품을 참지 못한 때는 이와 같으니 부디 경계하여라.

덕을 힘써 그른 일은 고치고 옳은 일은 행하여라. 남편이 어떤 일에 혹 잘못 알고 忿頭에 지나치게 말할지라도 맞서 성품을 내어 대답을 불순하게 말고 마음을 낮추고 성이 날지라도 깊이 참고 있다가 옳은 일이나 그른 일이나 바른대로 조용히 대답하고 부디 성품을 참고 덕을 쌓아서 뉘우치고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라.

앞에서 열 여덟 가지의 중요한 도리를 말했지만 어버이의 마음은 아직도 아쉽고 미진하여 다시 종요로운 경계를 하였으니 스물 네 가지라. 앞의 것이 대체적인 총론이라면 이 항의 가르침은 세세하게 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또 빠진 도리를 보충한 각론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 항목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종요로운 경계: (1)늘 아래를 보고 족한 줄을 알아라. (2)교만하지 마라. (3)딱한 이웃을 도와주어라. (4)매사를 得中하라. (5)속을 지언정 남을 속이지 마라. (6)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라. (7)꾸미지 말고 옳은 대로 말하라. (8)말을 적게 하라. (9)사랑을 엿듣지 마라. (10)어두운 후는 출입을 마라. (11)매사에 체례를 지켜라. (12)남매간에도 잡되게 희롱하지 마라. (13)부모와 남편 앞에서 전갈하지 마라. (14)스스로의 병도 참고 숨기지 마라. (15)아무리 추운 때라도 빨래를 폐하지 마라. (16)횃대에 남편 옷과 같이 걸지 마라. (17)자녀 혼인엔 잘 살펴하되 남편 뜻을 중히하라. (18)忠厚仁慈하라. (19)매사는 엄정하게 스스로 판단하라. (20)구차하지 말고 씩씩하기를 위주로 하라. (21)부득이한 외엔 출입을 삼가라. (22)성품을 지나치게 내지 마라. (23)덕을 힘써라. (24)그른 일은 고치고 옳은 일은 행하라.

(21) 옛사람의 착한 행실말이라

王祥과 孟宗은 부모병환이 계시어 겨울에 죽순과 잉어를 구하거늘 맹종은 대밭에 가서 우니 죽순이 눈속에서 나고 왕상은 물가에 가서 우니 얼음이 터지며 잉어가 나온 것이다.

陸績은 袁術의 앞에 뫼셨더니 절할 때 유자가 내려지거늘 원술이 그 효성을 알고 더 주어서 보내더라.

육적이 옥에 갇혔더니 하루는 밥을 대하여 울거늘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노모가 오셨기에 우는 것입니다 하거늘 어찌 아는가 하니 대답하되, 내 모친이 나물을 촌수로 끊더니 오늘 음식이 그러하오매 노모가 오신 줄 아는 것이라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미와 자식이 어찌 그른 일이 있겠는가 하시고 즉시 내놓아 보낸 것이다.

郤缺은 밭을 맬 때 그 아내가 점심밥을 공경하여 받들어 드리기를 높은 손님 대접하듯 하니 귀한 손이 지나다가 보고 착하게 여겨 그 남편을 벼슬을 시켰느니라.

맹자는 어렸을 때 이웃집에서 돼지 잡는 모양을 보시고 어머니께 묻자온대 대답하시되 장난삼아 말씀하시기를 너 먹이려 한다 하시고 이윽고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어린 자식을 속인 일이 옳지 않다 하시고 즉시 돼지고기를 사서 먹이시었느니라.

孝의 상징적 교훈으로 삼아 온 王祥求魚․孟宗泣竹․陸績懷橘의 고사와 卻缺의 아내․남편공경, 孟母의 敎子信義 등의 고사를 상기시켜 인륜에서 가장 소중한 효와 남편공경과 자식교육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교훈을 삼도록 하였다.

(22) 발 문

네가 미성하여 출가하니 늙도록 내곁에 두어 가르치지 못하고 남의 집에 보내니 행여 인사와 每每事를 어찌할 줄 모르는 고로 내가 답답하고 민망하여 여러 가지 소견으로 써서 세세 구차하게 경계하여 이르나니 부디부디 뼈에 새기고 마음에 적시어 이 책을 일삭에 두 세 번씩 보아 잊지 말아라.

곁에 있어 대소 허물에 경계하는 줄로 알면 마음이 범연코자 하여도 자연히 범연할 일이 없을 것이니라.

남자의 소학과 같이 알아 이 책을 공경하고 시가에 가서 대소사에 네 허물로 말미암아 부모의 시비없이 하는 것이 큰 효가 되니 이것을 심두에 먹어 매사를 이대로 하면 네가 비록 내곁을 떠나나 膝下에 있어 내 말을 듣는 듯 하리라. 부디부디 명심하여 경계하여라.

아무리 자식이 장성하고 나이가 들어도 늘 어려보이고 마음 놓이지 않는 것이 어버이 마음이라 미성한 딸을 시집보냄에 답답하고 민망하여 세세 구차하게 적어주는 것이니 뼈에 새기고 마음에 적셔 한 달에 두 세 번씩 꼭 보아 잊지 말고 힘써 실천하라고 하였다. 남자 아이들이 늘상 옆에 놓고 읽고 실천하는 소학처럼 여겨 이 책을 늘 심두에 두고 실천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였다.

6. 結 語

尤庵 宋時烈은 朱子學을 集大成한 朝鮮 中期의 巨儒로 수많은 제자와 방대한 著述을 남긴 大學者이며, 仁․孝․顯․肅宗朝의 四代에 걸쳐 出仕하여 官이 判書․左議政에 이르고, 四色에 휘말려서는 西人․老論의 領首로서 禮訟과 國事에 관한 강인한 주장의 上疏로 여러 차례 流配生活을 하였고, 마지막 考終命도 복이 없어 83세의 병약한 老軀로 또한 멀고 먼 귀양길에서 後命을 받고 타계하였으니 참으로 一代의 風雲을 안고 살다 간 大政客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 생애는 오직 春秋大義와 忠․直으로 일관된 泰山喬嶽같은 삶이었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삶에서 보인 그의 品性과 位相과는 달리 그는 내적으로는 퍽 가정적이고 子女에 대한 정과 사랑이 남달랐다. 그런 간여린 어버이의 자애로움과 자상함의 일면이 표출된 글이 바로 계녀서이다.

출가하는 맏딸에게 부녀자가 평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당부한 이 계녀서 내용의 핵심어를 보면 孝道․恭敬․友愛․和睦․精誠․仁慈․儉素․勤勉․正道․柔順… 등의 단어로 집약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첫째, 대인관계에서

부모 시부모에 대한 효도, 남편 공경, 형제 우애, 친척 화목, 손님접대, 노비에 대한 측은 자애

둘째, 수신․지신 면에서

仁․敬․謹․順․柔․德․妬忌․愼言․古人善行 본받기

셋째, 제사와 집안일에서

孝․誠․淨潔․勤勉․病患구완․의복․음식․여가선용

넷째, 子女교육에서

仁․正․信․勤에 전일하고 오롯하는 교육

다섯째, 경제적 생활에서

존절․계획성있는 가계, 꾸고 받는 일, 밝고 바른 상도의

여섯째, 종요로운 경계(要戒)에서

앞에서 다하지 못한 미진한 가르침을 다시 구체적으로 修身․持身․心志․言行 등에서 知足 得中 無欺 毅然 愼言 등의 24개항에 걸쳐 자상하게 또 당부하였다.

계녀서의 근본정신은 仁․孝․慈와 五倫三綱의 유교사상이 바탕이 되어있지만, 현대 교육이론에도 합당한 치밀하고 과학적 합리적인 자녀교육, 계획성있는 가계와 밝고 바른 상도의 실천을 강조한 경제생활, 그리고 불란서 인권선언이나 미국의 독립선언보다도 130여 년이나 앞선 그 때에 노비부리기에서 보인 그의 정신은 자유․평등과 인도주의적인 사상의 배태를 볼 수 있어 단순히 仁慈의 정도를 넘은 先導的 卓見이라 이런 점에서 戒女書는 그 價値와 意義를 높이 평가해야 하리라 사료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20세기 이래 서구로부터 밀려 온 왜곡된 自由․平等思想과 지나친 黃金萬能의 이기주의․개인주의 등이 사회에 편만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훈훈한 美風良俗은 간데없고 사회는 영악하고 삭막한 도를 지나 극도의 혼란과 패륜, 살벌하고 흉폭한 악행과 살육이 난무하는 가공스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의 늪에서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는 기사회생의 처방은 오직 교육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 전반에 걸쳐 꺼져가는 양심과 이성을 일깨워 도덕성 인간성을 회복하는 인성복귀에 가위 혁신적인 특단의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계녀서는 350년의 시간차와 딸에게라는 국한된 대상의 한계성을 떠나 오늘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스스로 반성하고 잃어진 본성을 되찾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지표를 찾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바람직한 가르침이다. 그 중 몇 가지 항은 오늘의 시대성에 비추어 문제점이 없지않다 하겠으나 그건 그대로 토론하고 논의하며 그 근본정신을 바로 보면 충분히 시사성과 진실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모든 교육의 장에서 이 계녀서가 좋은 교본으로 활용되기를 간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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