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 정지용(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해설피 : 느리고 어설프게.
* 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 성근 : 드문드문한.
({조선지광} 65호, 1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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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원촌리 겨울 -이육사 생가에서/정경화
한 시대의 회상처럼 원촌리 겨울이 오면
탱자 숲 언 가시도 기다림에 지쳐 눕고
철 잃은 어린 동박새 귀소(歸巢)하는 빈 하늘.
마른 살 스스로 발라 푸른 재 흩뿌리고
뼈마디 꺾어꺾어 광야에서 보낸 생애,
가두고 물길 돌려도 긋지 않던 그 혼불.
터지고 갈라진 틈에 생명의 풀씨는 자라
바람 시린 능선따라 오색 깃발 세워 놓고
청포도 그리운 날들을 알알이 물고 있다.
정녕 봄이 다시 오지 않아도 좋다.
덜 녹은 잔설 위로 서리 깊게 내려앉아
나목들 초록 깊은 넋, 그 넋으로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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