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詩) - 윤동주(尹東柱)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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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판전(版殿) 앞에서 / 손태원
어슬렁 뒷짐 지고 숲속 길로 접어든다
가다가 걸음 멈추고 가쁜 숨결 고르는 듯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여! 맥박소리 들린다.
흙마당 쓸다 남은 비질 자국 보이는 듯
새하얀 아가손이 쓰다 멈춘 낙서인 듯
다가온 계곡 물소리 문득 끊긴 저 정적.
꽃도 잎도 다 시들어 빈 대궁만 남은 가을
얼마나 깊었던가 잠겨버린 하늘 위로
동동 뜬 낙관이 하나 늦잠자리 앉아 있다.
* 판전(板殿)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칠십일세 와병중 임종 3일 전에 썼다고 전해오는 봉은사에 있는 마지막 현판 글씨
*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 : 판전의 낙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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