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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던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간(肝)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시학} 창간호, 1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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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여 태 전
늘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고
입이나 글 따위로 떠드는 것만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고
조용히 타이르고 있다.
수다스럽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그 야무진 입술
들뜨고 지친 하루를
달콤하게 적신다.
그래
그래
가시돋친 말일랑
이제 그만
버릇처럼 세상을 도마질하며 사는
알량한 내 독선과 아집도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꽃눈 틔우는 삶이여
더 깊고 더 낮게 침잠하는 사랑의 수액
한 움큼 입 안에 머금고
다시 서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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